2024-10-16

金成東의 인간탐험 - 黃長燁 : 월간조선

金成東의 인간탐험 - 黃長燁 : 월간조선

金成東의 인간탐험 - 黃長燁
『우리 마누라는 내가 오는 해에 자살하고 둘째 딸은 수용소로 가는 도락구에서 떨어져 죽고 그렇게 됐다구 그래』


김성동

前 북한 노동당 비서의 서울생활 6년 秘話
평양에서의 70년보다 긴…

● 知人에게 보낸 편지: 「죽고 싶다」
●『편안하게 죽을 생각 없다. 서서 金正日과 싸우다 죽을 것이다』
●『이번에는 꼭 미국에 가고 싶다』
●『미국 망명 안 한다. 죽더라도 여기서 죽겠다』
●『金德弘과는 화해할 것도 없고 내가 金德弘을 배반한 일도 없다. 각자 자기 일 잘 해 나가면 된다』
●『金正日은 중국 鄧小平을 자주 욕했다. 중국의 개혁·개방이 북한에 영향을 주는 게 싫었던 거다』

黃 長 燁
1923.2.17 평안남도 강동 출생.
1941.12 평양상업학교 졸업. 일본 中央大 야간 전문부 법과 입학.
1949.10~1953.11 소련 모스크바 국립대학 유학.
1965.4 김일성 종합대학 총장.
1972.12 최고인민회의 의장(11년간 역임).
1979.10 조선노동당 과학교육담당 비서. 주체사상연구소 소장.
1984.4 조선노동당 국제담당 비서.
1993.12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회 위원장.
1997.2.12 대한민국으로 탈출.
現 탈북자 동지회 명예회장.
著書 「어둠의 편이 된 햇볕은 어둠을 밝힐 수 없다」,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등.
갇혀 있는 자의 몸짓

지난 5월3일 오전, 서울 송파구 소재 탈북자 동지회 사무실에서 만난 黃長燁(황장엽·80·탈북자 동지회 명예 회장) 前 북한 노동당 비서의 모습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건강해 보였지만 왠지 서두른다는 느낌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원하는 결과를 직접 봐야겠다는 팔순 노인의 조바심과 원하는 결과가 눈앞에 다가왔는데 혹시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黃 前 비서가 「원하는 결과」란 북한 金正日의 몰락과 독재체제의 붕괴다.

탈북자 동지회 명예회장실로 趙甲濟 月刊朝鮮 편집장과 기자가 들어서자 黃長燁씨는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후 서둘러 趙편집장의 오른편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호스트의 자리가 아닌 내방객이 앉는 자리였다. 격식이 그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는 것 같다. 그의 몸짓은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 싶어하는 열망의 표현으로 느껴졌다.

기자는 黃長燁씨의 오른편 자리에 앉았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趙편집장을 향해 쉴새 없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정확히 말해 자신의 생각을 쏟아 놓고 있는 黃長燁씨의 뒷머리칼이 엉켜 있었다. 건강해 보이는 앞모습과 달리 그의 뒷모습은 많이 피곤해 보였다. 건강한 앞모습과 피곤해 보이는 뒷모습은 老망명객의 남한에서의 생활 만 6년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黃長燁씨는 오랫동안 참아 왔다는 듯 趙甲濟 편집장을 향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金正日 정권 붕괴 방법」을 쏟아 놓았다. 이라크 전쟁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생각을 정리한 것 같았다.

『미국은 북한의 核과 관련한 美·中·北 3者협상에서 시간을 끌고 가야 돼요. 美·中·北 회담을 계속해야 돼요. 그 시간을 북한 공격에 관한 연구를 하는 기간으로 만들어야 된다는 거죠. 북한의 위험성을 全세계에 제대로 알리는 시간으로도 삼아야 해요. 그것이 어느 정도 된다면 중국하고 북한을 떼어 놓는 걸 앞세워야 할 것 같아요. 그런 조건에서 북한을 한국의 親北 세력하고 떼어 놓고, 그 다음에 유엔결의를 통해 경제봉쇄로 가야 돼요. 경제봉쇄를 해야 북한이 먹고 살기 위해서 개혁을 한다구요. 농지개혁을 하면 소규모 상인들도 생기고 그렇게 하면 시장이 자꾸 넓어지고 사람들의 자유왕래가 상당히 넓어지면 그때에 우리가 북한 내부를 와해시킬 수 있어요.

내부 와해작전을 해야 하는데 중국 연변에다 큰 공장을 세우는 것도 방법이죠. 북한의 주민들을 원조해 줄 수 있는 큰 공장들을 건설해 주고 탈북자들을 취직시키고 거기서 북한으로 물자를 보내고(그쪽에서) 와서 보기도 하고, 그러면 중국 사람들에게도 나쁠 게 없지. 연변지구 하나를 잘 꾸려 주게 되면 중국에도 좋은 거니까. 그런 식으로 하게 되면 내 생각으로는 북한의 내부가 와해될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하면 되는데, 무슨 체제보장이니 그따위 소리들이나 하고…』

―북한에 대한 경제봉쇄를 너무 서둘러 하지 말자는 말씀이시죠?

『지금 단계에서는 할 필요가 없어요. 중국하고 북한을 분리시키고, 남한과 북한을 분리시킨 다음에 해야죠』


―미국이 이 회담을 계속하면서 북한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한다는 것을 중국이 자연스럽게 알게 해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죠. 미국은 이 회담을 자꾸 연장시켜서 부시 대통령이 再選(재선)될 때까지는 계속 끌고 나가야 돼요』

―북한이 재처리 시설을 가동해서 대규모 플루토늄을 추출해 핵무기를 대량으로 만든다면 미국으로서는 북한에 대한 공격을 하게 되지 않을까요?

『아아, 그거는 절대 걱정할 필요없어요. 소련이 핵무기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金正日은 절대로 핵무기 못 씁니다. 그걸 왜 쓰겠습니까. 남한에 핵무기 하나만 쓰면 金正日 자기가 죽는데, 절대 못 씁니다』



金正日을 「고놈」으로 호칭

―金正日이 핵무기를 못 쓴다는 판단을 하게 되면 공갈도 안 먹히겠네요.

黃長燁씨는 金正日을 지칭할 때 자주 먼 발치에 있는 아랫사람을 지칭하듯 「그놈」, 「요놈」이라고 했다.

『고놈이 그런 전술(공갈)을 잘 쓰는 놈인데, 제 꾀에 넘어가서. 나도 엊그제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그러데요. 「그러다가 金正日이가 핵을 탁 터뜨리면 어떻게 하나」, 그래서 「절대로 염려할 필요가 없어요. 그놈이 살 길이 다 열려 있는데 왜 죽을 길을 가겠습니까」 하고 대답해 주었어요. 그놈은 절대 죽을 길을 안 가요. 안 그래요?』

―미국도 黃선생의 말씀과 같은 전략으로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중국과 북한의 관계가 그렇게까지 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중국 사람들은 자기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 그렇게 해요. 또 金正日은 중국을 욕하고 있어요. 그렇게 해야 자기 위신이 서는 줄 알고 계속해서 욕을 했어요』

―특별히 누굴 욕합니까.

『뭐, 鄧小平이다 뭐다』

―욕하는 포인트가 뭡니까.

『중국이 개혁·개방을 함으로써 北京을 통해서 자본주의 사상과 문화가 들어오거든요. 그게 치명적인 타격이 되니까 욕하는 원인이 거기에 있어요. 그것도 그거이고 사실은 그놈이 질투심 때문에 그런 거지』

―鄧小平이 잘 되니까 질투를 했다는 말씀이죠.

『아, 그럼. 그러니까 중국이 잘 됐을 때 자기 잘못한 게 나타나니까. 내가 한 번 그랬어요. 「왜 자꾸 욕을 하십니까」 그랬더니, 「아, 중국에 영향받을 거 같아서 그러죠」 라고 대답하는 거예요』

―金正日이가요?

『그럼요』

―인간적으로 중국 지도부와 金正日의 사이가 벌어진 것처럼 국가 이익과 관련돼서도 사이가 벌어지도록 해야 할 텐데요.

『중국은 미국을 계속 경계합니다. 그 경계심만 없애면 되는데, 중국은 미군이 압록강까지 들어올까 봐 걱정하는 거니까 그 걱정을 안 하게 하면 되는 거죠』

―그러니까 金正日 정권을 미국과 중국이 힘을 합쳐 붕괴시키되 북한의 다음 정권이 親中정권이 되는 걸 보장하겠다, 그렇게 하면 된다는 거죠?

『그럼요. 그렇게 하면 되지』

―절대 북한의 체제 붕괴 쪽으로는 가지 않겠다, 그러나 金正日이는 안 되겠다, 이런 식의 약속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럼. 그렇게 하면 되죠. 金正日이가 만약 중국식으로 개혁·개방을 하면 내가 찾아가서 악수를 하지. 그런데 그놈이 그걸 못 합니다』



부시 再選 후 북한 붕괴

―미국도 黃선생께서 말씀하신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동시에 중국이 북한의 核을 막지 못하면 미국도 대만과 일본의 核무장을 막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이시하라 신타로 같은 친구가 일본의 再무장을 얘기하기도 하는데 대만과 일본의 核무장을 중국이 두려워할 수밖에 없죠』

―지금까지 말씀하신 시나리오에는 경제봉쇄까지는 있는데 金正日을 물러나도록 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없잖아요.

『그 말은 안 해도 됩니다. 경제개혁만 되고 내부 와해만 시키면 어디 가겠습니까. 암살하거나 하는 그런 수단은 안 써도 돼요』

―그러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거 아닙니까.

(남한으로 망명할 당시 黃長燁씨는 북한 정권이 5년 내에 붕괴할 것으로 예상했었다.)

『아냐, 그렇게 오래 안 걸려요. 부시가 再選된 다음 재임 기간인 4년 동안이면 될 거 같은데』

―金正日이가 변하지는 않을 거고 그러면 궁정 쿠데타에 의해서 넘어간다는 얘깁니까.

『그 사람들 다 개혁·개방하자는 패들입니다. 경제봉쇄하게 되면 개혁하게 되고 개혁·개방하면 붕괴로 가는 거고』

―경제봉쇄를 하면 살기 위해서 개혁을 한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그 개혁은 누가 하게 되는 겁니까. 金正日입니까.

『金正日이가 하게 될지 안 하게 될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하게끔 만들어야지』

―중국이 북한을 경제봉쇄 때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습니까.

『기름하고 식량만 안 주면 돼요』

―중국이 기름과 식량을 끊으면 북한 체제에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북한이 살 수 있습니까? 중국이 원조를 하지 않으면 북한은 농지개혁을 할 수밖에 없어요. 金正日은 살기 위해서 개혁을 하지만 그게 스스로를 죽이는 일이 되는 겁니다』

―북한이 「불가침 조약을 맺자, 우리한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 말라」고 하는 요구는 駐韓美軍 철수하고 바로 연결이 되죠?

『같은 얘기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국과 미국의 경각심을 마비시키고 둘을 이간시키고 그렇게 해서 고립시킨 다음에 자기들의 우세한 군사력과 중국과 러시아의 지원, 이렇게 해서 여기에 親北정권을 세우자는 거죠』

―북한에서는 체제보장이라는 말을 안 쓰던데, 우리가 그렇게 해석을 한 거죠?

『안 쓰죠. 생각을 안 합니다』



『이번에는 꼭 미국에 가고 싶다』

趙甲濟 편집장과 黃長燁씨의 대화는 최근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는 黃長燁씨의 미국 방문 문제로 이어졌다. 黃씨는 오는 6월 중순쯤 訪美를 희망하고 있다. 訪美할 경우 자신을 초청한 디펜스 포럼 재단이 주최하는 포럼에 참석하는 한편, 美 상·하원 합동 북한 청문회에서 북한 문제에 대해 증언할 계획이다. 부시 행정부의 對北정책 담당자들과의 면담도 희망하고 있다.

黃長燁씨는 지난 1월5일 미국 하원 헨리 하이드 국제관계위원장과 크리스토퍼 콕스 하원의원 등 상·하 의원 4명에게 친필 서신을 보내 자신의 訪美를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 콜린 파월 美 국무장관에게도 미국 방문을 희망한다는 서신을 보낸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의 디펜스 포럼 재단은 지난 3월 黃씨에게 訪美 초청장을 전달했고, 지난 4월10일에는 黃씨의 미국 방문 수속을 밟아 줄 것을 駐美 한국 대사관에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黃씨의 측근들은 미국을 가겠다는 黃씨의 생각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고 말한다. 이하 설명은 한 측근의 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에 가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에 공식 요청을 하지 않으면 한국 정부가 보내지 않으려고 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미국 정부가 왜 초청하지 않는가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지만 먼저 초청 때 상황과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金大中 정부가 무조건 저지 입장이었다면 盧武鉉 정부는 그런 것 같지는 않다』

―盧武鉉 정부도 黃선생의 여권 발급을 거부했지 않은가.

『黃선생의 訪美를 놓고 보는 盧武鉉 정부와 金大中 정부의 이해관계는 다르다. 金大中 정부下의 미국 방문은 金大中 정부의 햇볕정책에 타격을 주고 金大中 개인에게도 엄청난 불이익이 갈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盧武鉉 대통령은 북한에 빚진 것도 없고 그런 관계로 黃선생의 訪美를 막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金大中 개인에게 끼칠 불이익이란 무언가.

『확실한 건 아니지만 북한으로부터 받은 정치자금이 공개되는 걸 우려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黃선생은 설사 그 사실을 안다고 해도 그런 이야기를 하실 분은 아니다』





『미국 망명 안 한다. 여기서 죽을 것』

黃長燁씨의 訪美 문제와 함께 거론되는 게 망명설이다. 黃씨의 측근들은 그 가능성을 부인하고 있다.

―黃선생이 미국에 가게 되면 그곳에서 망명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설이 있다.

『그건 黃선생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왜 조선 사람이 미국에 가서 사는가. 남북통일을 위해 일을 해도 제 땅에서 해야지 왜 남의 땅에서 해야 하느냐는 게 黃선생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黃선생께서는 수많은 일가친척을 버리고 민족을 위해 넘어온 분이다. 한국 땅에서 북한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겠다는 결심이다. 당신께서는 침대 위에서 편안하게 죽을 생각이 없다고 말씀하시곤 한다. 서서 金正日과 싸우다 전사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한데 망명은 무슨 망명인가』

―미국에 머무는 게 지금 남한에 있는 것보다 북한 金正日 정권의 악마성을 폭로하는 국제여론 조성에 유리한 것 아닌가.

『망명이라기보다는 잠시 머무는 거지. 그걸 망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잠시 그곳에 머물 의향도 생기실지 모르겠다. 세상에 절대적이고 고정불변한 것은 없다. 그러나 黃선생은 그런 생각에 절대적으로 반대다』

측근들의 말처럼 黃長燁씨 본인도 망명설에 대해서는 펄쩍 뛰고 있다.

―일부에서는 黃선생이 미국에 가시면 안 돌아오는 거 아니냐 하고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黃씨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대답했다.

『내가 어떻게 망명을 하겠어요. 내가 죽어도 여기서 죽어야지.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주한 美대사관 관계자는 『金大中 정부가 黃長燁씨의 訪美 문제가 불거졌을 때 신변보장 문제를 거론했는데 미국 정부로서는 지금까지 미국 방문자에 대해 신변보장을 한 예가 없다』고 덧붙였다.

黃長燁씨는 1997년 2월12일 북한을 탈출한 후 그해 4월20일에 대한민국 땅을 밟았다. 6년이란 시간은 그의 생활습관을 바꿔 놓았다. 밤 12시에 취침해 새벽 5시에 일어나던 북한에서의 습관은 밤 9시 이전 취침에 새벽 3시 기상으로 바뀌었고, 빵과 과일을 좋아했던 식성은 닭고기와 소갈비를 좋아하는 입맛으로 바뀌었다.

黃長燁씨에게 기자는 남한에서 그의 비서 역할을 하고 있는 모 여인과의 득남설, 북한에 남겨 두고 온 부인의 자살설 등에 물어 보았다. 사생활과 관련된 부분에 대한 질문에 黃씨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 보면 다 알 일인데 왜 쓸데없이 그런 질문을 하느냐』며 화를 내기도 했다.

黃長燁씨는 또 『남한 내에서의 활동이 자유스럽다고 생각하는가』 등의 정치적으로 예민한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질문에는 즉답을 피했다. 그는 오직 美北관계, 韓美관계, 南北관계, 中北관계 등 金正日 정권의 존립과 관계 있는 분야에 대한 이야기에만 열중했고, 하려 했다.

결국 측근들과 知人(지인)들을 통해서 남한에서 망명생활 6년째를 맞고 있는 그의 「속생각」을 들어볼 수 있었는데, 일치하는 것은 지난 金大中 정권 5년이 북한 金日成·金正日 부자 체제下에서 살았던 50여 년에 못지않은 정신적 고통을 黃長燁씨에게 안겨 주었다는 점이다.

2001년 초 하기와라 료(일본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타」 前 평양특파원)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살하고 싶다」고 언급했던 그는 최근 서울 입성 만 6주년이 되는 무렵에 써서 知人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여전히 「죽고 싶다」는 말을 하고 있다. 북한 주민들을 억압과 굶주림에서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남한으로 탈출한 이 「주체철학」의 태두에게 남한은 북한 주민의 해방을 위한 연구와 활동 대신 「죽음에 관한 연구」를 시키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잠결에 어디선가 들려온다

―망명하신 지 만 6년이 이제 막 넘었습니다. 그동안 남한에서의 생활이 자유스러웠다고 생각하십니까.

黃씨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까짓 소리해서 뭐하겠어요. 뭐 자유로운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이번 정부 들어와서는 金大中 정부 때와 달라진 게 있습니까.

『아직은 다른 게 없어요. 아직은 그 사람들이 계속 있고 그 진영이 다 통제하고 있으니까』

―金日成 부자 체제下에서 한 50여 년 계셨고 여기 와서 6년 있으면서 金大中 정부 때는 대통령의 임기 5년을 고스란히 겪었는데 혹시 金大中 정부下의 5년이 북한 金父子 체제下의 50년보다 더 길다고 느끼지 않으셨습니까.

『아이, 고저 그런 형용사들 다 그만두자구요. 그까짓 건 해서 뭐하겠어요. 큰 이해관계도 없는데 그까짓 것 해서는 뭐하겠어요. 그런 거 할라면 그저 객관적으로 쓰면 됩니다. 그저 사람들의 흥미 있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 할 필요는 하나도 없고』

―식성은 안 바뀌셨습니까. 선생님의 회고록 「나는 역사에서 진리를 보았다」를 보면 북한에 계실 때는 사과, 빵 이런 걸 좋아하셨다고 하는데, 제가 이번에 주변에서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닭고기를 좋아하신다고 하던데요.

『아, 그거 아무거나 먹으면 되지. 그런 거 할라면 우리 동지들한테 물어봐요』

黃長燁씨는 서울 입성 만 6주년이 되는 지난 4월20일 새벽에 詩 한 편을 썼다. 그는 가끔 詩로서 자신의 소회를 적기도 하는데 이 詩에는 그동안 남한 사회에 와서의 고독과 좌절, 그리고 망명 당시의 결심을 다시 한 번 다짐하는 결의가 실려 있다. 다음은 詩 전문이다.

<잠결에 어디선가 들려온다./이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는/속삭임 소리./눈을 번쩍 뜨고 일어나 보니/벌써 새벽 3시30분./물론이지, 이대로는 죽을/권리가 없는 걸./공들여 찾은 진리 착실히/포장하여 맡길 데만이라도/정해야겠는데./아직 무거운 죄짐만 걸머지고/허둥지둥하는/가련한 신세./어떻게 나 홀로/다시 돌아올 수 없는 먼 길/떠날 수 있단 말인가./시련을 맞받아 다시 한 번 분발하여/길을 찾아 나서보자./미련 없이 떠날 수 있는 마지막 길까지./생명을 주고받은 사랑하는 「사람」들과/내게 인생을 안겨 준 「위대한 어버이」께/감사와 속죄의 정성 다 바쳐/끝까지 싸우다 싸움터에서/이 세상 하직하는 길밖에/다른 길 없을 터.

2003년 4월20일(망명 6주년)>

―망명 6주년에 맞춰 쓴 詩에서 쓴 「위대한 어버이」는 누구입니까. 金日成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아, 金日成은 아니고, 그거는 철학적인 얘기죠. 어느 사람을 염두에 둔 게 아니고 민족이라든지 이념을 염두에 둔 거지』

―詩에서 후계자를 언급하셨던데, 선생님의 인간중심의 철학을 이을 후계자는 발견하셨습니까.

『후계자라는 것보다도 지금까지 와서 그것을(자신의 철학을) 충분히 전달을 못했으니까』




金德弘은 회초리 들고 기다리는데도 안 와

黃長燁씨가 남한 사회에서 겪었던 아픈 일 가운데 하나가 함께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했던 金德弘(김덕홍)씨와의 결별이다. 黃長燁씨는 金德弘씨에 대해 그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그와 수십 년 동안 친형제나 다름없이 지냈다. 또 양쪽 가족들도 우리의 결의형제를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 그가 그저 동생이라고만 부르기에는 너무도 귀중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북한 탈출에 성공한 후 중국에 머물러 있을 당시에 소회를 적은 글이다. 이처럼 「귀중한 동생」과 黃長燁씨는 訪美 문제를 놓고 이견이 생긴 지난해 1월에 갈라섰다.

―金德弘씨는 작년에 결별한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안 만났습니까.

『그 뭐, 난 다 잊어 버렸는데, 그 녀석은 밸이 쎄서, 종아리 채찍 꺾어서 오랬더니 안 와요』

―국정원 안전가옥에 같이 있잖습니까.

『가까이 있지』

―한 번도 안 부닥치셨습니까.

『못 봤어요.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자기 일 해 나가라 그러면 돼요』

―金德弘씨와는 언제 화해를 할 생각이십니까.

『아니 뭐, 화해할 것도 없고, 내가 어떻게 한 것도 아니고. 자기 일 잘 해 나가라고 하면 돼요. 그리고 뭐, 언젠가 오겠지』

―金德弘씨를 기다리고 계신 겁니까.

『아, 기다리고 있지는 않아. 내가 金德弘이를 배반한 일은 하나도 없고 방해한 일도 없고, 밤낮 그 녀석이 괜히 그렇게 해서…』

―2000년 봄 무렵에 정부 관리가 金正日의 뜻이라면서 北으로 다시 돌아오면 복권도 시켜 주고 대우도 잘 해주겠다는 얘기를 전했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그런 얘기를 들은 적 없어요. 어떤 사람이 나한테 와서, (金正日) 욕하지 않으면 우리 아들 살려 주겠다고 그런다고 해서, 나는 가족 다 버리고 온 사람인데 그 따우 소리한다고 했지』

黃長燁씨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그의 측근들은 평양을 다녀온 정부관리가 「金正日의 뜻」을 전달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한 측근의 말이다.

『사실이다. 金大中 정부 때 黃선생 회유하려고 관료가 평양에 다녀와서 이전 직위 복권시켜 주고 대우도 잘 해주겠다고 한 金正日의 말을 전했다고 한다.

黃선생은 「내가 金正日이 때문에 여기 온 것이다. 그 사람이 독재하지 않고 인민을 굶겨 죽이지 않았다면 왜 여길 왔겠는가. 나는 金正日 독재체제가 싫어서 온 사람이다. 나는 金正日과 끝까지 싸울 것이다」며 단호히 거부했다고 한다. 金大中 정권은 金正日과 짜고 黃선생의 입을 막기 위해 계속 감시했던 것 같다』

국정원 관계자는 黃씨 측근들의 이런 주장에 대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라며 『黃선생의 북한에서의 과거 지위와 지금까지의 행동을 볼 때 그게 가능한 이야기겠는가』라는 말로 부인했다.



인간중심 철학연구소 건물 완공

黃長燁씨가 남한에서 와서 하고 싶었던 일 가운데 하나가 개인 연구소의 설립이라고 한다. 그곳을 자신의 인간중심의 철학을 더욱 발전시키고 보급시키는 기지로 삼고 싶어했다고 한다. 국정원이 黃씨의 訪美를 막기 위해 연구소 건립 지원을 약속하여 그를 회유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을 정도로 黃씨는 개인 연구소 설립에 애착을 가졌다.

―개인 연구소가 3월 말에 완공된 걸로 아는데 安家(안가)에는 계속 계실 겁니까.

『아, 그거 지금 토론하고 있어요.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는 걸. 거 뭐, 누구도 책임지고서 해줄 사람이 없거든』

―선생님의 남한에서의 생활에 관심들이 많거든요.

『관심들이 있거든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서 해. 내가 생활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도 그렇고』

黃長燁씨는 대통령 선거를 앞둔 지난 해 9월 「북한 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란 글에서 북한이 보수적 민주수호 세력 집권 저지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면서 남한에서 보수세력이 집권해 미국 공화당과 연계해 공격적인 對北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金正日이 2002년 대통령 선거 결과를 어떻게 볼 것 같습니까.

黃씨는 그런 문제에 대해 말하는 게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오늘은 그 전략문제만 토론하고』



북한에 남겨 둔 가족 소식

―조금만 더 여쭤 볼게요. 가족들 소식은 어떤 경로로 듣습니까.

『가족들 소식은, 일본에 내 친한 친구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이 북한에 가서 보고 와서 나한테 얘기해 주고 있어요』

黃長燁씨는 아홉 살 연하인 아내(박승옥)와 사이에 3녀1남을 북한에 남겨 두고 왔다.

―최근에 들은 가족 소식은 무엇입니까.

가족 이야기는 그가 살아 있으면서 짊어져야 할 가장 무거운 짐인 것 같았다. 黃長燁씨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다른 데서도 좀 듣고 그래서 그런데, 그… 우리 마누라는 내가 남한으로 오는 해에 1차 자살하고, 둘째 딸은 수용소로 가는 도락구(트럭)에서 떨어져 죽고 그렇게 됐다구 그래』

―실제 그렇게 믿고 계십니까.

『실제 그렇게 믿고 있지』

국정원 관계자는 黃長燁씨의 가족들 소식과 관련해 『黃선생이 알고 있는 北에 있는 가족들 소식은 소문일 뿐 확인된 게 아니다』고 말했다.

黃長燁씨와 관련된 소문 가운데 하나가 그의 비서 역할을 하고 있는 국정원 직원 모 여인과의 사이에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다. 黃長燁씨 개인연구소 건물은 이 비서役의 명의로 돼 있다. 得男 소문이 증폭되는 데에는 그런 이유도 한몫 하고 있다. 黃씨의 측근들은 대부분 『모략이고 음모』라며 부인했다. 黃씨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得男說에 대해서는 공개적인 해명을 왜 안 하십니까. 자꾸 소문이 증폭되는데.

『그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들이 필요하면 내가 양자를 갖다가 하면 되지』

黃長燁씨는 밖에서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며 그만하자고 했다. 그의 관심은 오직 金正日 정권의 붕괴에 관한 것뿐이었다. 기자는 그의 눈빛을 보았다. 그의 모습에서 노인의 완고함과 신념이 만든 완고함이 팔순의 몸을 지탱해 주는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완고함 너머에 있는 老망명객의 「절대 고독」을 읽을 수 있었다. 새벽녘 국정원 安家 주변을 산책하며 상념에 잠겨 있을 그의 눈빛은 무척 슬퍼 보일 것 같다.


[측근들이 전하는 黃長燁씨의 근황]


『그는 자신이 주체적으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사무실을 원한다』

기자는 黃長燁씨의 말대로 그를 자주 만나는 탈북자 출신 측근들과 남한內 몇몇 인사들을 통해 그의 근황을 들을 수 있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의 이름을 밝히지 말 것을 주문했다. 다음은 측근들을 인터뷰한 내용이다.

―黃長燁씨의 근황은.

『安家에서 생활하고 있으니까 활동의 자유가 없다. 한국에 망명해 들어올 때는 북한 민주화를 위해 한국 사회가 좋을 것이고 지지하는 사람도 많을 거라고 기대하고 왔는데 그 기대와 현실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는 걸 뼈아프게 느끼고 계시는 것 같다. 큰 실망을 가지고 있다』

―구체적으로 국정원에 의한 활동 제약 사례를 말해 달라.

『금년 1월 일본에서 사진작가 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사진을 찍으려는 게 아니라 黃선생이 알고 지내는 일본 분의 인사말을 전해 주려고 왔는데 국정원 경호원들이 탈북자 동지회 명예회장실까지 들어와 黃선생과 그 작가의 말을 들었다. 그게 감시가 아닌가. 그때 黃선생님이 그 작가에게 일본어로 「당신이 보다시피 이렇게 외부 사람 만나는 것도 자유스럽지 못하다」고 말했다. 하시고 싶은 말은 많았는데 경호원이 있으니까 말씀을 못 하시더라』

우리 국민들이 오해하는 게 있다. 黃長燁씨가 北에서 南으로 넘어왔으니까 사상전향을 했을 것으로 믿는 게 그것이다. 北에 있을 때나 南에 와서나 黃長燁씨에게는 변하지 않는 게 있다. 인간중심의 철학이라는 그의 사상이다. 그는 지금도 그 철학의 완성을 위해 공부하고 철학자들과 토론을 벌인다.

―여전히 글을 쓰고 독서하는 일로 소일하나.

『그렇다. 북한에 계실 때 만든 주체사상이 金부자 체제유지에 유리한 방향으로 왜곡됐기 때문에 그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글을 많이 쓴다. 黃선생의 주체철학은 人本主義(인본주의)에 입각한 인간중심 철학이다. 그것에 대한 글을 많이 쓰고 있다. 또한 북한 정권의 본질을 알리고 북한의 민주화를 위해 국제 사회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글들을 쓰고 있다. 신문, 잡지, 소설 등 다방면으로 독서를 하신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黃선생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학자로서의 양심과 지조를 지킬 줄 아는 분이다』

―黃선생은 요즘 무슨 생각을 하며 지내는 것 같은가.

『그는 「내 나이 80이다. 병상에 누워서 절대로 편안하게 죽지는 않을 것이다. 金正日과 죽을 때까지 싸우다 죽을 것이다」 하는 말씀을 여러 차례 하셨다』

―黃선생의 특별한 생활습관은.

『저녁에는 빨리 주무시고 새벽 3시경에 일어나서 독서와 집필을 하신 후 30분간 산책을 하신다. 식사는 小食(소식)을 한다. 닭고기와 소갈비를 좋아하신다. 술은 전혀 안 하신다』



『북한 문제보다 남한 문제가 더 시급하다고 본다』

―이번에 정부가 黃선생을 미국에 보내줄 것 같은가.

『韓美 공조를 위해서도 盧정부가 黃선생을 보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黃선생은 現 시국을 어떻게 보고 있나.

『남한 사회가 이념적으로 많이 엇갈리는 것을 제일 개탄하고 있다. 북한 문제보다 남한 문제가 더 시급하다고 본다. 남한이 무너지면 아무 소용없으니까. 남한 사회의 反美·親北 성향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자유민주 체제가 귀중하다는 것을 젊은이들이 너무 모르고 북한 金正日 작전에 놀아나고 있다고 개탄하고 있다. 우리의 희망이 실현되려면 남한이 튼튼해야 하는데 걱정이다. 당장 전쟁이 일어날 거라는 염려보다는 북한의 장기전략에 말려들고 있다는 것이 걱정이다. 국회內에도 反美 외치는 진짜 「잡초」들이 있는데』

―지방 여행도 다니시는가.

『지금은 그렇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黃선생의 생활은 단조롭다. 당신의 사적인 즐거움이나 이런 거는 없고 어떻게 하면 자신이 창시한 주체철학을 계승시키고 애국자를 키울 것인가만 생각한다. 어디 놀러 가고 그런 생각은 갖지도 않고 오직 연구소와 탈북자 동지회를 오가며 글쓰기로 세월을 보낸다』

―黃선생이 근래에 활짝 웃는 걸 본 적이 있는가.

『웬만해선 웃지 않으시는 것 같다. 북한에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하신다. 당신이 올 때만 해도 북한 체제가 5년이면 무너질 줄 알았는데 와서 보니까 선택을 잘못한 것 같다고 후회하신다. 북한은 국제사회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1998~99년에 망했을 텐데, 살려 주었다고 아쉬워한다.

중국으로 넘어온 탈북자 30만 명을 한국 정부가 살려 주었다면 그 뒤로 북한 주민 50만, 100만 명이 넘어오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국 북한이 망하게 되는데 오히려 중국이 탈북자들을 다시 북송을 해도 내버려두고 金正日에게 도움을 주니 저렇게 됐다고 안타까워하신다』

―남한 사회에 와서 黃선생이 제일 인상 깊게 생각하는 것은 뭔가.

『대학 입시 때 출근시간, 교통 통제 등 입시를 국가적으로 치르는 걸 보고 인상 깊었던 것 같다. 나라가 발전할 수 있는 좋은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북한은 실력에 따라서 대학에 가는 나라가 아니니까』

―건강 관리는 어떻게 하나.

『생활이 규칙적이다. 아직 감기 한 번 안 걸렸다. 신문은 보지만 텔레비전은 잘 시청하지 않는다』



『남한 사회를 너무 모르고 왔다는 후회가 있는 것 같다』

―黃선생이 받는 정신적인 고통은 무엇인가.

『한국이라는 사회가 남북통일을 위해서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는 것, 활동할 수 없을 정도로 구속받는 데서 고통받는 것 같다』

―安家 밖으로 나오면 되잖는가.

『나오셔도 되는데 두 가지 문제가 있다. 밖으로 나와서도 국정원이 신변 보호를 계속해 주겠는가 하는 문제가 있고, 경제적으로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는 기초가 안 돼 있다는 점도 문제다. 우리가 보기에는 지금 나오시면 안 될 것 같다』

―黃선생이 가족 얘기는 자주 하는가.

『북한에 가족을 두고 온 탈북자들이 가족 얘기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공통된 심정이다.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黃선생은 왜 「죽고 싶다」는 표현을 자주 하나. 습관적인 것 아닌가.

『습관적인 것은 아니다. 현실상황이 가족들을 죽이고 왔는데, 활동도 자유롭지 않고 젊은 사람들에게 북한의 실상과 독재주의가 어떤 것인가를 알려 주고 싶고, 자신의 주체사상은 인간중심 철학이지 독재사상이 아니라는 걸 알려 주고 싶은데 그게 뜻대로 잘 안 되니까 그러시는 거다. 책을 통해서 알리는 것도 한계가 있는 거고, 북한의 실상을 정확히 알면 反美·親北 이런 게 없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도 크시다』

―항상 절망적인 심정으로 사는가.

『감정의 기복이 심한 상태다. 한마디로 말해서 남한 사회를 너무 모르고 왔다는 후회가 있는 거다』

―남한으로 온 것을 후회한다는 건가.

『후회한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지만 내가 볼 때는 남한 사회를 너무 몰랐다는 회의가 있으시다』

―북한에서 그 정도 지위에 있던 분이 남한 사회를 모르나.

『폐쇄사회이고 독재정치 사회이다 보니까 남한 사회를 제대로 알기는 어려웠을 거다』

―망명 이후 달라진 점은.

『웃음이 없어졌다. 다른 사람들은 黃선생이 차다고 한다. 다정다감하지 않고 곧고 사무적이다』

―黃선생이 지금 원하는 것은.

『자유롭게 글쓰고 강의하고 말할 수 있는 본인의 사무실을 원한다. 당신이 주체적으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사무실을 원한다』

老망명객이자 老철학자의 소원은 너무나 소박하다. 주체적으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사무실 하나면 족하다는 것이다.●


〔편집자 注〕 북한민주화협의회(대표회장·황장엽)는 지난 5월3일 북한 민주화 촉진 투쟁 전개를 다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다음은 그 全文이다.

북한 민주화 촉진 투쟁을 다짐하며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한의 평화적 통일을 실현해 나가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북한체제의 민주화가 촉진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소련이 붕괴되고 사회주의 국가들이 개혁·개방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데도 북한은 오히려 개인 우상화와 수령독재를 고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선군영도체계 운운하면서 군국주의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그들은 국방위원회가 국가주권과 행정부를 다 가진다고 하여 「국가기구를 군권중심의 체계」로 고쳤으며 이것을 「장군님의 군사중시, 선군영도 사상이 구현된 독창적인 우리 식의 국가기구체계」라고 찬양하고 있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의 「국가대표권」을 「위대한 장군님의 위임에 의한 대표권」이라고 정의함으로써 국가대표권자가 국민·국가의 대표가 아니라 세습독재자 개인의 한낱 하수인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또한 그들은 「국가는 사상혁명을 강화하여 사회의 모든 성원들을 혁명화·노동계급화하며 온 사회를 정치적으로 단합된 하나의 집단으로 만든다」(헌법)고 하여 인민대중을 유일사상 10대 원칙으로 속박하면서 「金正日의 총폭탄」이 되도록 주조하는 데 전력하고 있다.

이로 인해 북한사회는 수령절대주의와 수령개인독재를 옹호하는 봉건가부장적 세습영도의 전체주의가 판치는 암흑사회로 되고 말았다. 인민들이 한참 굶어 죽고 탈북자들이 속출하는 참담한 환경 속에서도 金日成 시신 궁전을 꾸리는 데 수억 달러를 투입하는가 하면 인민들이 굶어 죽는 것이 「수령복」인 양 「우리는 부러움 없이 살고 있다」고 되뇌이게 하고 있다.

가아와 궁핍에 허덕이는 인민대중이 일상적인 감시, 통제에 시달리며 걸핏하면 정치범수용소에 수감하고, 수년 전부터는 공개처형을 종전의 강력범죄, 반체제범죄 위주로부터 풍속범과 잡범에까지 확대하고 있다. 북한에서의 인권문제는 평등권·자유권은 고사하고 생존권과 생명권도 위협받는 상황으로 되고 있다.

북한 인권의 참혹상이 얼마나 심각했으면 지난 4월16일 UN인권위원회가 57년 역사상 처음으로 북한 인권 규탄안을 가결하였겠는가?

북한의 수령독재체제와 인권문제는 우리 민족문제와 통일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 있어 가장 큰 근원적 장애로 된다는 점에서 결코 도외시할 수 없는 선차적 극복대상으로 되어야 한다.

따라서 북한민주화협의회는 한반도의 평화와 평화통일을 성취하기 위해 북한의 체제문제와 인권문제를 같은 차원에 두고 북한 민주화 촉진을 위한 투쟁을 적극 전개해 나갈 것을 다짐한다.

2003. 5. 3

북한민주화협의회

대표회장 황장엽, 공동회장 박갑동·이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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