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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촬영된 한강의 짧은 인터뷰였다. 요즘 언급되는 그의 대표 소설들은 거진 읽었다. 그래서인지 작가에 관해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말할 때의 음색, 시선과 눈빛을 화면으로 듣고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글과 그가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기도하고, 또 어떤 표정에서는 글과 완전히 다른 생소함이 전해지기도 했다.
대화중 한마디의 여운이 길었다. 질문자가 물었다.
"글을 쓴다는 건... 어떤 것일까요?"
"글을 쓴다는 것은... 결심하는 거예요...... 계속 결심해야 문장과 문단과 글이 만들어지지요. 단어 하나를 고르는 것도 결심이고.... 문장을 어떻게 맺을지, 주어를 무엇으로 놓을지.... 이런게 하나하나가 다 결심들이죠"
그랬다. 그래서 글을 쓰는게 그렇게 고단했던게다. 종이 한 쪽을 채우기 위해 나도 모르는 무수한 결심들이 이어졌어야 했으니까. 질문과 상상에는 결심이 필요없다. 그저 열린 생각을 이어나가면 된다. 그러나 글은 다르다. 그 생각의 조각들을 모아 결심을 엮어가며 한문장 한문장 매조지는 거다. 마침표 하나에 담긴 결심이 무겁고 또 무거운거였다. 그리고 또 결심의 고민꺼리를 가득 안은채 다음 문장을 시작한다.
어쩌면,
말 한마디 내어놓는 것도 결심의 연속일거다. 오늘 아침 수업시간에 외교관 후보자들에게 이 인터뷰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약간 꼰대스럽게 내 이야기를 덧대었다.
말할 때... 날리듯 생각없이 내어놓지 말자고.
단어 하나 고르는 것도, 정성을 다해 결심하고 선택하자고,
일물일어설을 믿는양 체에 거르듯 고르고 골라 말을 잇자고,
사람에게 말을 전달할 때, 가장 잘 다듬어지고 규격에 딱 맞는 말을 구사한다면... 그 자체가 품위있는 언어로 상대를 존중하는 외교관의 매력, 아니 인간의 매력 아닐까라고 이야기 해 주었다.
내게 다짐시키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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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전 오늘 포스팅. 요즘 일들이 겹쳐져서 약간 수정 후 옮김)
삭개오는 세리장이었다. 로마의 앞잡이로 식민 속국 유대땅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 자기의 재산을 불리던 악한 관리였다. 사람들은 혹여 중과세 당할까 그를 겉으로는 두려워하면서도 뒤에서는 욕하고 저주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자기 백성을 식민주의에 잡아 가두는 역할을 했으며, 경제적으로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그러나 가렴주구로 인한 호의호식이 그를 마냥 행복하게 했을 리 없다. 앞에서는 다들 굽신거리지만 동족에게 뒤에서 손가락질 당하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삶의 관성은 무서운 것. 그럴수록 더 재물을 탐했고, 재물이 쌓여갈수록 그의 눈은 핏발이 섰다. 이렇게 달려가는 것이 맞는 것인지 때론 두려웠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궁금했다. 돈 모으는 것 말고는 삶의 흥미가 없었던 삭개오에게 어쩌면 그 청년은 피로한 인생을 뒤집는 변곡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예수의 동선을 예측하고 미리 달려갔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누가는 이렇게 기록한다. “삭개오는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키가 작은 그는 인파로 인해 예수의 행렬을 볼 수 없었다. He wanted to see who Jesus was, but being a short man he could not, because of the crowd”
키가 작은 삭개오였지만 어쩌면 키는 큰 문제가 아니었을법도 하다. 대략 의지만 있으면 군중들을 뚫고 앞으로 갈수도 있었을 것이다. 군중들이 그를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삭개오도 군중들이 두려웠다. 자신이 백성들의 혐오를 받는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섣불리 그들과 섞이기 두려웠다.
대중에게 유리된, 손가락질당하는 그는 돌무화과나무위로 올랐다. 그저 먼발치에서라도, 군중들과 떨어져서라도 예수라는 사람을 직접 보고 싶었다. 물론 언감생심 예수에게 말 한마디 건넬 수 없다는 것 잘 안다. 그냥 어쩌면 메시아일지 모를 청년을 보는 것만으로도 평생 욕먹으며 살아온 자기의 피폐한 삶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을지 모른다. ‘의인’이라는 뜻을 가진 지금 이름과 거꾸로 살아온, 백성 수탈의 대명사로서의 삭개오는 뭐라도 붙잡고 싶은 목마름이 가득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예수가 지나갈 동선을 예측하고 나무위에 올라 먼발치에서 보고자했던 삭개오였다. 높이가 다르니 예수와 눈이 마주칠 가능성도 없었고 그저 내려다보고자 그 자리를 잡았던 터였다. 그런데 예수가 나무 아래 바로 삭개오가 자리잡은 그 지점에 이르자 (Jesus reached the spot) 발걸음을 멈추었다. 위를 올려다보며 (he looked up) 외쳤다. “삭개오. 즉시 거기서 내려오시오. 나는 오늘 반드시 당신 집에서 머물러야하오 Zacchaeus, come down immediately. I must stay at your house today”
"May I" 도 “I would like to" 도 아닌 "I must" 였다. 군중은 웅성거렸다. 세상에 식민 제국에 부역한 것도 미워죽겠는데 백성들의 재산까지 수탈한 천하의 몹쓸사람 집에 예수가 머무른다고? 미리 통성명을 하거나 자기를 소개하는 대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삭개오가 예수의 유숙을 읍소한 것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예수는 마치 그 지점이 이번 여정의 최종 목적지였던것처럼 돌무화과나무 아래에 섰다. 그리고 올려다보았다. 삭개오를 불렀고 내려오라 요구했다. 그 집으로 가야만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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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공생애 당시 세리와 창녀와 사마리아인, 그리고 이방인은 혐오의 대상이었다. 유대사람들은 창녀와 사마리아인과 세리를 묶어서 욕했다. 창녀는 도덕적 타락, 사마리아인은 종교적 타락의 상징이었기에 추상적인 분노에 가까웠다면, 세리는 내 돈을 빼앗아가는 물리적 분노의 대상이었다. 창녀나 사마리아인은 대놓고 욕지거리를 할 수 있지만, 세리 앞에서는 슬슬 피했을 것이다. 어쩌면 분노와 증오의 차원이 달랐을것이다.
어떻든 그들을 미워하고 따돌리는 것은 ‘의로운’일이었다. 사회 지도층일수록 얼만큼 그들과 대척점에 있는가를 드러내는 것이 스스로의 의를 증명하는 척도였다. 대중들의 지지와 환호를 얻으려면 그들을 배척하고 비난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거꾸로였다. 세리의 집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함께 먹고 마시면서 하루를 같이 보냈다. 당시 규례로 보면 마치 건강한 이가 나병환자의 집에 들어가 하루 머무는 것 같이 위험하고 부정한 일이었다.
삭개오는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맞았다. 나무에서 황급히 내려왔다. 예수를 먼발치에서라도 보기 위해 나무 위를 올랐는데, 이제 그 앞으로 내려와 직접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며 보게 된 셈이다. 처음엔 아마도 무릎을 꿇고 엎드리지 않았을까? 연후 구주의 말을 듣고 일어서며 말했다. (But Zacchaeus stood up and said to the Lord)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노라 약속했고, 속여서 빼앗은 부당 과세의 네 갑절을 납세자들에게 돌려주겠노라 서원했다. 예수의 요구가 아니었다. 그는 오랫동안 마음에 걸리던 부분들을 그저 예수와의 몇마디 대화끝에 결단했다. 회심이었다.
삶을 돌이키는 변화의 핵심은 다른 데 있지 않다. 그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 삭개오에겐 축재한 물질을 어떻게 처분하느냐에 있었다. 특히 세리장 삭개오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예수가 그의 집에서 유숙하기 전, 즉 구주의 시선과 말씀으로 사람은 이렇게 바뀐다.
구주는 반식민운동을 하지 않았다. 사람을 모아 정의를 위한 집회나 농성에 나서지 않았다. 백성들을 정치적으로 압제하는 제국 로마에 저항하지 않았고, 그 하수인들의 중과세에 대한 납세거부 운동을 하지 않았다. 그는 로마 병정에게 자기 몸을 내어주어 십자가의 수욕을 감당했으며, 세금도 시저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분해서 내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대신 그는 혐오받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세상을 바꾸어나갔다. 건전한 가정 캠페인이나 순결, 윤리 증진 운동같은 것 하지 않았다. 간음하다 끌려온 여인에게 돌을 쥐어들고 분노의 형을 집행하려는 사람들 앞에서 서서 그 여인 편을 들었다. 대신 연민의 눈길로 ‘다시는 죄짓지 말라’ 조용히 당부했다. 일부러 사마리아를 거쳐 갈릴리로 올라가시면서 전 남편 다섯을 둔 기구한 여인에게 예배의 비밀을 알렸다. 성소를 들어 정통과 이단을 가르는 시대에 ‘영과 진리’의 본질을 설파한 것이다. 여리고 피의 길 비유를 들어 강도당한 자의 친구는 ‘옳다고 믿는’ 자칭 주류 의인이 아니라, 배척받는 사마리아인임을 말했다.
지금 우리. 혐오가 만연한 세상이다. 혐오는 '나는 옳고 깨끗한데 쟤는 틀리고 더러워'에 다름아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해지고 잘살게 되면 사람들의 마음도 더 너그러워지리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증오와 규정짓기와 편가르기로 온통 서로를 탐색하는 세상이 되었다. 99% 비슷하더라도 1%만 다르면 그 차이로 인해 기꺼이 손가락질과 비난을 일삼는다. 교회 공동체도 다르지 않다. 무슨 무슨 운동으로 스스로 띠를 두른다. 여전히 이방인과 소수자에게 부지불식간에 배타적이고 때론 노골적으로 적대하기도 한다. 200만이 모여 회개하자고 한다. 함께 죄악을 토설하자고 한다. 회개는 아름답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분명 회개의 기도를 위해 모이는 것 같은데 잘못되었다고 정죄받는 타자들이 어른거린다. 회개의 심정은 세상의 누구, 어떤것들을 바꾸는게 아니다. 오직 나와 구주만 남는 정경에서 비롯된다. 맞다. 공동체의 회개를 특별히 요구하실 때도 있다. 그러나 맥락은 같다. 결국 가슴 움켜쥐고 옷을 찢으며 내 잘못, 내 공동체의 잘못을 통회하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는 예수가 보인 행적을 기억하며 한땀 한땀 따라가야 한다. 배척하거나 혐오로 연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배척과 혐오의 대상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들어가 함께 교제하고 대화하고 보듬어 안는다. 그리고 오직 그 삶의 궤적만이 사람을 바꾼다. 삭개오에게 단 한마디도 정의가 무엇인지를 구주는 이야기하지 않았음에도 삭개오는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인지를 알게 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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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찬송가 96장. 마침 삭개오가 예수가 누구이신지 알고자 했다는 (He wanted to see who Jesus was) 본문 구절과 맞물려 한구절 한구절 노래 부르는 내내 묵상을 이어갈 수 있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
예수님은 누구신가
약한 자의 강함과, 눈먼 자의 빛이시며, 병든 자의 고침과, 죽은 자의 부활되고 우리 생명 되시네
예수님은 누구신가
추한 자의 정함과, 죽을 자의 생명이며, 죄인들의 중보와, 멸망자의 구원되고 우리 평화 되시네
예수님은 누구신가
온 교회의 머리와, 온 세상의 구주시며, 모든 왕의 왕이요, 심판하실 주님되고 우리 영광 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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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의 근원 '아르케고스' (Archegos) 에 대한 탐색은 늘 갈무리하는 생각의 소재다. 고대 신인동형동성 시대의 아르케가 신, 다시말해 불핀치가 묘사한 '인간과 친근한 희랍의 신'이었다면, 밀레투스 학파는 신을 내려놓고 가견적인 자연을 들이밀었다. 자연이 곧 아르케였다.
그리고 만물의 아르케가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일단의 무리들, 즉 소피스트들이 등장한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프로타고라스의 명제는 강력하다. 아직도 살아숨쉰다. 사술과도 같은 억지논리로 사람들을 희롱한 궤변론자들이지만, 그 주제만큼은 육중하다. '人本' 주의가 궤변론자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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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스트에 의해 처음 발을 내디뎠던 '인본'은 플라톤의 로고스에 의해 논리적으로 부정되는 좌표에 위치했다. 플라톤 철학이 교부들에 의해 기독교 신학으로 이어지면서 이후 로마교회의 기독교는 로고스에 모든 것을 건 '神本'의 세계를 견고하게 구성한다. 人本은 후퇴했다.
이후 이 '인본'과 '신본'의 아르케고스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지중해 지역 인간 사상사의 궤적을 그려냈다. 때론 인본의 시대, 때론 신본의 시대, 그리고 그 교점에서 나타난 혼란과 갈등...
아르케고스를 신에게로만 집중해서 인간의 자아를 최대한 무력화시켰던 시대가 중세 암흑시대라면, 반대로 아르케고스를 '인간'으로 보고, 인간에 대한 신뢰와 합리성에 사유의 중점을 두었던 일련의 흐름, 르네상스와 계몽의 시대도 이어졌다.
신의 세계에 대한 향수를 못버린 이들은 여전히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에 의혹의 눈초리를 둔다. 그들은 자유주의자들을 거부하고, 신의 이끄심을 여전히 숭모하는 '중세적' 논지를 수호하는 십자군임을 자임한다. 그것이 신본주의임을 확신한다.
반면 신의 세계를 거부하고, 인간의 세계에서 이상향을 구축할 수 있다고 믿는, 아니 설사 이상향을 만들어내지 못하더라도 인간의 자유와 존엄이 말살되는 신의 세계에 몸 둘것을 거부하는 이들은 '계몽'의 이름으로 또는 '허무'의 이름으로 '절대자'를 거부했다.
흐름은 이렇다.
고대 희랍 (신의 세계) - 밀레투스 학파 (자연의 세계) - 소피스트 (인간의 세계) - 플라톤 (이데아의 세계, 곧 신의 세계의 전초) - 교부들의 신학 (신의 세계) -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다시 인간의 세계) / 종교개혁 (본래 신의 세계의 복원) - 최근의 근본주의 (다시 신의 세계)
이렇게 아르케를 중심으로 신-인간의 회귀반복으로 지중해세계의 사상을 풀어나가는 것은 뭐 그닥 어렵지 않은데...
그러나 실제 기독교의 세계는 이렇다.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이미 하나된 것. 즉 신과 인간이 이항대립적 존재 즉, 복종 피복종의 관계 및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인 것이 사람들 인식의 핵심 축이지만, 그리스도의 화육강세 (incarnation)은 이러한 신의 세계와 인간 세계간 대립의 벽을 완전히 허물었다. 단순히 물리적 격벽의 해체가 아니라, 화학적으로 중간지대를 완전히 소멸시켰다. 즉 신과 인간간의 격실이란 존재 자체가 소멸되어버린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본주의의 토대는 인본주의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심을 통하여 신의 관심과 애정이 인간에게 고스란히 투사되는 '전이'가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에게 있다. 신의 시선은 광활한 우주공간을 관통하며 불같은 눈으로 사람 하나하나를 응시한다. 이 관심과 애정은 십자가로 이어진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직접 죽으셨다는... 이 엄청난 충격의 사건은 신본과 인본의 두 아르케를 하나로 합해버렸다. 따라서 신을 위한다고 하면서 인간을 배척하거나, 인간의 희생을 전제로 한 신의 영광 추구란 형용모순이 된다.
역으로 말해도 같은 논리가 성립된다. 인본주의의 토대는 신본주의에 놓여있다. 왜 사람이 다른 동물보다 우월한가? 왜 인간 하나하나의 권리는 천부적인 것인가. 간단하다. 하나님의 창조물이자, 대속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가진 하나님의 형상 (imago dei) 은 인권의 기초가 된다. 나아가 구주의 죽으심이 인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는 성서 기자의 진술은 모든 성서의 활동이 救贖事 (saving activity) 에 수렴하고 있음을 재차 강조한다.
과거의 사상사가 신과 인간간의 줄다리기로 본 것은 세속적 관점이다. 신앙의 눈길로 세상을 보면 신본과 인본, 두 아르케는 이미 하나다. 따라서 사람을 하찮게 여기는 신학이란 기독교가 아니다. 신 자체가 추앙을 받으면서도 인간이 비하되는 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스스로를 세리와 창녀와 죄인 사이에 두시면서 이를 확고히 입증하셨다.
덧. 신본과 인본의 하나됨... 이에 가장 큰 도전은 19세기부터 세상을 강타한 資本주의이다. 새로운 아르케가 등장했는데... 이 아르케고스는 정말 견고하고 편재적이다. 資 (돈) 가 아르케고스가 된 세상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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숟가락 얹기.
이 땐 이 작품이 8년 후 노벨상 수상작이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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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sik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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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전 이란이 이스라엘로 미사일을 쏘았다. 200발 정도로 보도되고 있다. 4월 1일 시리아 이란 대사관 영사부 폭격에 대한 보복이었던 4월 14일 미사일 공격에 이어 두번째다. 그 때와 좀 달라보이긴 하는데 조금 더 지켜보아야 할 것 같다.
이스라엘의 게임은 두가지 층위로 전개되고 있다. 헤즈볼라 및 레바논을 타격, 남부 리타니강 이남 블루존 지역에 아예 헤즈볼라가 다시는 똬리를 틀지 못하게 그 지역 거점들을 갈아엎어버리는 전술적 목표가 한 층위다. 여기를 정리해야 이스라엘 북부에서 헤즈볼라 공격으로 작년 10월8일부터 소개되었던 6만명의 북부 주민들이 귀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피난 비용을 재정으로 부담하고 있다. 6만명의 의식주를 1년동안 나라에서 책임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경제위기의 한 요인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지상군의 레바논 진입은 아마 그 목표를 들고 간 것 아닐까 싶다. 물론 더 치고 올라가 베이루트와 베카벨리 등으로 산개한다면 또 다른 이야기고.
두번째 층위는 전략적 측면이다. 이란을 전쟁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미 이스라엘은 우위에 섰다. 이란발 최대 위협요인 헤즈볼라를 무력화시켰기 때문이다. 장기판으로 비유하면 이스라엘은 자기 궁 바로 앞까지 치고들어와 기동력있게 교란하며 위협하는 이란의 車를 둘 다 떨궈낸 셈이다. 이제 이란은 멀리서 원거리 包와 象으로만 싸워야 하는 형국이다. 헤즈볼라가 리더십을 다시 세우고, 무너진 C4I를 비롯 전투역량을 회복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 그렇기에 이 지점에 머무르지 않고 이스라엘은 아예 더 치고 올라가면서 이란을 자극하고 있다.
이란의 분노는 임계점에 이미 다다랐다. 지난번 대사관 공격, 하니예 폭살, 최고지도자의 32년 지음 나스랄라 폭살 등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일련의 공세에 대응하지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왔다. 최고지도자 하메네이는 몇년전 솔레이마니 폭살때 대성통곡을 했다. 그리고 그에 버금가는 동지이자 친우인 나스랄라를 잃고 지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닐거다. 작년말엔 후계자로 염두에 두던 라이시도 죽고, 이스라엘과 맞서던 하니예도 죽었다. 그것도 테헤란에서. 이정도면 내가 죽든말든 결사적으로 보복하겠다고 나설법한데... 문제는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 원하는 바라는 점이 곤혹스럽지 않을까?
이스라엘의 전략목표는 이란이 교전 당사자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미국과 이란의 대결 구도를 만드는 것에 수렴한다. 이렇게 되면 향후 해리스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미국은 당분간 이란과의 핵합의나 제재 해제 등의 유화 정책을 쓸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즉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란이 정상국가 코스프레 하고 다니던 2015년 7월 상황을 어떻게해서든 막는게 중요하니까. 이스라엘의 눈에는 이란 체제가 바뀌지 않는 한, 어떠한 국제사회와 핵합의도 사기로 보인다. 이란 자체의 속내가 이스라엘 소멸에 있음을 알기에 외교적 정상행위자가 되지 못하도록 막는게 관건이다.
이러한 속내는 이란을 혐오하고 두려워하는 사우디와 UAE, 이집트 리더십의 생각도 마찬가질거다. 다만 자국민들의 반이스라엘 정서 때문에 겉으로는 팔레스타인 연대를 외치고 있지만, 속으로는 '이스라엘 잘한다 잘한다' 생각하지 않을까싶다. 네타냐후는 그 그림을 염두에 두고 있다. 지난 유엔 총회연설에서 '축복'의 진영 (이스라엘-사우디-이집트-UAE-인도)과 '저주'의 진영 (이란-이라크-시리아-레바논-예멘)으로 나누어 자신이 '축복'진영에서 이란 및 그의 프록시들과 맞서싸우는 모습을 부각시키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란이 이 게임에서 이기는 선택지는 명확하다. 이스라엘의 의도를 간파하고, 그 逆으로 가면 된다. 즉, 이스라엘의 도발과 공격을 도덕적인 틀에서 비판하면서 외교무대에서 승부를 걸고 군사적 대응을 자제하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지난번 페제시키안 대통령의 유엔연설은 합리적 기조에 부합한다. 이스라엘을 무도한 폭력 국가 이미지로 만들고, 이란은 오히려 인내하며 대화를 추구하는 나라로 대비시키는 효과를 노리는 것이 이란의 선택지여야 맞는다. 물론 이란의 행적을 보면 결코 평화애호국가는 아니기에 어차피 수사학 싸움이지만, 중동 어느나라든 다 비슷하니까.
이 행보를 계속하면서 미국과 유럽에 외교적 타결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인을 보내는 게 이스라엘을 당황케 하는 포석이다. 가자지구의 하마스 문제는 민간인 피해를 강조하고, 레바논 헤즈볼라 문제는 이스라엘의 자위권 차원이라 해도 주권국가 국경을 월경, 지상군이 주둔하면서 침략행위를 벌이고 있다는 도덕적 비판에 날을 세우는 것이 핵심이어야 한다. 그리고 선전전을 통해 헤즈볼라의 이중성 (무장폭력테러집단 + 레바논의 제도권 정파이자 실질적 통치세력) 중 전자를 뒤로하고, 후자를 강조하면서 헤즈볼라가 제공하는 의료, 복지, 빈민지원, 및 교육 서비스 등의 그림을 계속 내세우는게 더 나은 옵션이다. 이 게임을 하게 되면 이스라엘 편을 들어 싸우는 미국의 해리스 진영은 만일 당선될 경우, 이란의 전략적 인내를 일정부분 평가하면서 부정적이지 않은 분위기를 조성할 수도 있을테니 (반대로 이스라엘에 대한 이미지는 비우호적이 될 가능성이 있고)
너무 이상적인 상상이긴 하다. 내가 말해놓고 봐도 별 가능성이 없다. 일단 이란 내부의 강경파들이 지금 펄펄 뛰면서 대통령실의 무능을 비판하고 있을 법하다. 그러나 거듭 이야기하자면 일단 신중하게 반응하는 것이 이란이 이기는 포석이다. 어떻든 지금 이란 최고의 전략 자산인 헤즈볼라가 무력화된 상황이다. 현재로서는 딱히 이스라엘에 보복할 수단도 마땅치 않다. 미사일의 경우 중간 이라크나 요르단에 주둔하는 미군이 1차로 요격하고, 이스라엘 본토내 방공시스템도 지금 최고수준의 대응태세로 기다리고 있을테니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전쟁이 확전되면 가장 함박웃음을 띨 사람은 바로 이란의 원수 네타냐후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외교의 시간으로 진입하는 국면을 최대한 늦추는 게 이 게임에서 이길 확률을 높인다. 이란은 하루라도 빨리 외교의 시간을 잡아채 이스라엘의 게임 구도를 반전시키는 것이 이기는 길이다. 이란의 내공이 어느 정도일지 앞으로 며칠동안의 대응에 달려있다. 여기서 이란 개혁파의 전략적 인내가 무너져 군사적 대응 수위를 높이고 준전면전 비슷하게 가면, 이란의 다음 수순은 정해져있다. 빠른 속도로 핵능력 고도화에 올인하고 러시아와 전쟁 연대는 물론 반미, 반서구의 이념화를 더욱 거세게 밀어붙일 가능성이 있다. 미국이 우려하는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기에 이스라엘을 뜯어말리면서 이란도 우회해서 설득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이 말을 들어먹지 않는다며 좌절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모든 상황이 정리되고 나중에 판을 복기할 때,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과 국제사회의 인식은 결코 이전으로 돌아가기 어려울 것 같다. 모사드의 공작능력에 대한 찬탄과, 국가로서 이스라엘이 보여준 외교행보에 대한 평가는 별개다.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보수 연정이 지금은 이걸 별것 아닌 걸로 여기고, 곧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제 미국의 젠지들 심리는 다르다. 마치 아랍 젊은 리더십이 팔레스타인을 더 이상 형제로 여기지 않듯, 이대로라면 미국의 젊은이들도 앞으로는 이스라엘을 더이상 우방으로 여기지 않을 시점이 도래할 지 모른다. 그걸 간과하면... 안된다. 네타냐후도 승리를 선언하고 빨리 협상을 통한 외교의 국면으로 돌아가야 한다. 무엇보다 아직 하마스에게 잡혀있는 101명 (생존확인 66명) 인질 구출이 시급하다. 협상을 하면 정치적으로는 위기의 구름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일테지만 그래야 이스라엘이 살고, 그래야 네타냐후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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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시간전 이란 외무장관 X 게시 업데이트.
일단 이란이 방향을 잘 잡은 듯.
Earlier this evening, we exercised self-defense under Article 51 of the UN Charter, targeting solely military & security sites in charge of genocide in #Gaza and #Lebanon.
We did so after exercising tremendous restraint for almost two months, to give space for a ceasefire in Gaza.
Our action is concluded unless Israeli regime decides to invite further retaliation. In that scenario, our response will be stronger and more powerful.
Israel's enablers now have a heightened responsibility to rein in the warmongers in Tel Aviv instead of getting involved in their folly.
이한석
반이스라엘 여론이 강한 서방 Z세대가 사회 지도층이 되기 전에 최대한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놓으려고 빨리 움직이는 면도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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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외받고 사양해 온 학회 만찬 강연이 있다. 요즘 바쁘기도 하거니와 밤 늦은 시간 이동하는게 귀찮아 정중히 양해를 구했는데 재고를 요청하며 다시 연락이 왔다. 마침 회사 근처 도보 5분거리 컨퍼런스 빌딩에서 열린단다. 6시반부터이니 퇴근길에 들러 강연하고 가면 되겠다 싶어 수락한게 두어달 전쯤이었고.... 그게 오늘.
저녁 5시반. 주섬주섬 타이 매고 수트 챙겨입고 집 나와 출근 중.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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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h Rynn
집에 있었으면 뭔가 진도개 3호 정도 발효상황이었을 것을 피했다고 생각해 보삼. 성에 안차면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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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h Rynn 갑자기 행복해졌어. 네 말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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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sik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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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동의 판도
1. 전략적 인내로 버티며 거중조정자 레버리지를 유지하려는 이란과.
2. 이라크, 아프간에서의 뼈아픈 경험 결과, 중동 전장 개입대신 역외 균형자 레버리지를 유지하려는 미국을.
3. 싸움 붙여 미-이란간의 실질적 분쟁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네타냐후의 계속되는 provocation으로 보고 있음.
한마디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이스라엘-헤즈볼라 전쟁'으로 전선을 넓혀, 이를 디딤돌로 '이스라엘-이란' 전쟁으로 다시 확장시키고, 종국에는 '미-이란 전쟁'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네타냐후의 게임으로 읽는다. 그렇게만 되면 네타냐후의 모든 이전 과오는 증발될 수 있다. 다만 네타냐후의 이 게임에 말려들고 싶지 않은 이란이 전략적 인내 포지션으로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데... 하산 나스랄라까지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지 주목된다. 하니예의 죽음에도 별다른 보복이 없었는데 이번 나스랄라 죽음에도 별 움직임이 없다면 이란은 소위 프록시들의 대부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의든 타의든 세게 치고 나가 테헤란에서 또 한번 일을 벌일 수 있어야 명색이 저항의 축 중심국으로서의 체면을 지킬 수 있다. 그럼에도 아직 이란이 반응하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이스라엘의 정보력과 공작능력 및 화력에 대한 우려가 있을 것이고, 그리고 전략적으로도 개입을 통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기 때문이다. 이란판 전략적 인내다.
미국, 특히 백악관 입장에서는 네타냐후가 원망스러워 죽을지경일 듯. 지난 3년반 중동정책에 성과가 거의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젠 성과는 커녕 전쟁을 막지도 못하고, 심지어 미국의 최근거리 우방인 이스라엘이 말을 들어먹지도 않는 모습을 만방에 알리고 있는 판이다. 어떻게든 가자 휴전 협상을 중재하고, 선거에 집중해야 하는데 이란과 그 프록시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이 상상의 범주를 넘어설 정도로 심화되다보니 저으기 당황하는 것 같다. 나스랄라 공격 때는 미국에 미리 알려주지도 않았다고 하니....
이 판을 이란과 미국이 못읽을 리는 만무하고, 따라서 네타냐후의 게임에 말려들지 않는 것이 이익이라는 것을 잘 아면서도... 상황변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긴장국면으로 떠내려 갈 수도 있어서 문제다. 그 첫 상황전개의 착점은 이란의 대규모 보복 참여 여부다. 현 상황은 하마스와 헤즈볼라의 C4I가 파괴된 상황이기에 프록시를 동원하는 기존의 대응은 별 임팩트가 없다. 그렇기에 이란이 직접 군사행동을 하면, 그래서 이스라엘 안보에 변수가 생기면 미국도 그에 맞춰 대응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란이 계속 전략적으로 인내하며 국익을 빌드업해나갈지, 아니면 보수진영의 일갈에 못이겨 결국 무력 대응을 시작할 지에 달려있다. 그 점에서 오늘 최고지도자의 발언은 묘했다. 싸움의 주체는 헤즈볼라고, (이란포함) 모든 무슬림들은 시온주의와 싸우는 의무가 있기에 헤즈볼라를 지원하겠노라 밝혔는데 어떻게 보면 이란이 최전선에 나서기를 저어하면서 즉각적 확전을 애매하게 피해가는 뉘앙스도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여간.
이란이 반응하고 공세수위를 높이면, 아무리 미국이 개입을 마뜩찮아 한다해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그게 네타냐후가 학수고대하는 그림이다. 이란이 알고도 그 길로 갈 것인지, 안가고 또 버틸 때 이스라엘은 테헤란의 심장부를 노려 심지어 최고지도자나 측근까지 타겟으로 삼을지가 앞으로 지켜봐야 할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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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섭
전쟁?의 뒷배 양키를 솎아내지 않는한 지구에 전쟁이 끊이 질 않을겝니다. (하기사, 다음을 이어 올 것도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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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하산 나스랄라의 행적을 짚고 있다. 글로 정리하다보니 머리가 아플 정도다. 이스마엘 하니예에 이어 푸아드 슈크르, 이브라힘 아킬 그리고 하산 나스랄라를 사살했다. 적장을 하나씩 없애고 있다. 야히야 신와르만 잡으면 네타냐후는 승리를 선언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벌어진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은 지도자의 의무다. 하나하나 따지면 논쟁점이 많지만 어떻든 전쟁 중 적장을 치는 것을 탓하긴 어렵다. 국외자 입장에서 차갑게 보려 한다.
그러나 이들 적장이 아닌 너무 많은 민간인들의 죽음에 이스라엘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무고한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가자주민 사망자 4만천명도 너무 많거니와, 레바논 호출기 폭발로 무장대원 아닌 이들도 너무 많이 죽고 다쳤다. 자국 인질들 귀환 문제도 논란이많다. 인질의 불가피한 희생을 감수할 수 있다는 소위 한니발 지침을 의심케하는 행보를 보이며 생환보다는 시신으로 돌아온 인질들이 더 많다.
네타냐후는 일단 기사회생했다. 바닥에 떨어졌던 그와 그의 극우 내각 지지율도 상승할 것이다. 이스라엘 지도자로서는 가장 큰 책임질 일 - 기습 허용-을 저지르고 정치적 생명이 위기에 처했을 때 강공으로 버텼다. 점점 보수화되는 이스라엘 국민 여론을 잡아채고 있다.
"그래. 네타냐후가 좀 잘못했고, 주변인물들이 다 또라이 같긴하지만... 아무리봐도 그 이만큼 경험있는 지도자가 또 있을까? 이 난리판에 저렇게 열일하는 네타냐후 밖에 없는 거 아냐?"라는 마음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 마음은 지지율 상승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네타냐후와 그의 내각, 그리고 리쿠드가 자기 진영의 승리 트로피를 들고 환호할 수는 있을지 모르나, 국가 이스라엘에게는 해를 끼치고 있다. 보수화에 환멸을 느끼는 이들이 나라를 떠나고 있다.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귀환자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고 있다. 극우 보수파들의 나라로 바뀔지 모른다는 우려들을 이스라엘 현지 친구들이 툭툭 던지듯 이야기한다. 이스라엘 안보의 핵심 주제 중 하나인 향후 인구문제도 흔들린다고 한다.
건국 이래 그간 온갖 비판과 욕먹을만한 일을 하고도, 그래도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되게 했던 최소한의 virtue들이 하나씩 날아가고 있다. 홀로코스트 피해자로 갖고 있던 도덕적 지위도 약해지고 있다. 과연 resilience 가 작동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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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연철
이판에...소위 '적폐'를 끝장 내주길 바라는 미국의 마음을, 이스라가 행동으로 대신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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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sik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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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어느 나라에서 지진이 났을때 옆 나라 겸임국 대사관에 근무하던 우리 외교관들이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구호활동과, 우리 파견 소방방재청 인력들을 지원한 적이 있다. 열심히 일하고도 당시 모 언론사의 오보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외교관들이 일은 안하고 편한 콘테이너 막사에서 에어컨 틀고 지낸다는 보도였다. 영상에는 콘테이너 밖에서 땀에 쩔어 노숙하듯 지쳐 쉬고 있는 우리 소방대원들 모습이 찍혔다. 그 날 난리가 났다.
외교부 당직실 전화기는 불이나듯 울렸다고 했다. 그 따위로 외교관 생활하지 말라는 욕이자 항의였을 것이다. 다행히 바로 다음날 오보로 밝혀졌다. 당시 현장에서 지원 업무를 진두지휘하던 외교관의 소회를 기억한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오해받는 억울함보다 반성이 담긴 소회였다. '사실이 아닌 이런 보도로 인해 속상하긴 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앞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보도를 접하신 국민들께서 '아냐 우리 외교관들이 그럴리 없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고, 바로 우리를 비난 하실 때에는 어쩌면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혹시라도 우리가 그동안 믿을만한 모습을 제대로 보여드리지 못했기에 국민들께서 우리를 신뢰하시지 못하는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는 논지였다. 최선을 다해 재해현장에서 일했던 이가 억울함보다는 성찰을 담은 소회를 나눌 때 그 글을 읽으면서 숙연해졌던 기억이 있다.
조금 맥락은 다르지만.... 개신교에 대한 실망이 넘치는 시대.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 때론 분노를 대화 중 들을 때가 있다. 그 때마다 깊은 송구함과 자괴감이 들곤 한다. 보통은 나는 주류와 다르다고 항변하며 한국 개신교회와 나를 분리하는 알리바이를 만들곤 한다. 그러나 여전히 죄송하다. '내 삶이 그리스도인을 대표하지 못했음'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교회 다니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싫어하는 분에게, 내가 달리 보였으면 개신교에 대한 미움은 덜했을 터였다. 오히려 그와 가깝고 친한 내가 말씀안에서 제대로 그림같이 살았다면 내 모습이 그리스도인의 표준이 되었을 것인데 그렇게 살지 못한 죄송함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구주께 죄송했고 내가 속한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인인 나로 인해 마음 상하는 이들께 죄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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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춘
반성을
겸손하고 성실히 사는 사람만해서 문제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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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고 믿음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정체성이 바뀌었다. 정주민에서 유목민으로. 처음엔 이 땅이 전부인줄 알았다. 부르신 곳에 터 잡아 더 깊이 뿌리내리고 그 기초를 딛고 높이 쌓아나가야 구주가 좋아하시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땅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자침을 맞추는 나침반 하나 들고 이 땅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유목민이었다. 때론 부평초처럼 떠돌기도 하고, 파도에 휩쓸려 방향을 잃곤 하지만 이내 다시 하늘의 극점으로 자침을 맞추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소명이었다. 부르심은 곧 보내심이었다. 동시적이었고, 같은 의미였다.
아라비아의 유목민들은 두 개 이상의 우물을 오가며 산다. 그 우물, 오아시스가 고갈되면 다른 우물을 판다. 그리스도인이 유목민이라면 강변과 해안 또는 무한천변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광야에서 하늘에 이끌려살며 샘을 파는 사람들이다.
때론 한 샘에 오래 머물기도 한다. 유목민이라고 염세적이거나 세상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다. 최선을 다해 하루를 버텨내고, 매일 하늘을 우러른다. 그리고 샘에서 얻는 한 줌의 물로 감사한다. 그러나 정체성에는 변함이 없다. 언젠가 주 예수의 날에 이르러 영원히 정주할 그 소망이 유목민, 그리스도인의 동력이다.
교회 앞 모 아파트 단지의 詩碑 하나가 화제다. 픽 웃음이 나왔고, 그런가보다 했다. 단지 주민들이 원해서 세운 거고, 그대로 살겠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물론 1도 동의하거나 공감하지 않지만 그 곳과 상관없는 내 입장에서 왈가왈부 할 일은 아니다.
다만 어쩌면 아파트 아닌 다른 것에 비슷한 뿌리를 내리고, 움켜쥐고 인생을 걸고 있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수많은 내 안의 다른 시비들이 존재하고 있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제국 심장부에서 온갖 영화를 누렸을 요셉도 그 곳에 뿌리내리고 매장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입관만 했고, 다시 약속의 땅으로 후손들이 돌아가는 날, 그 후손들이 자기의 뼈를 매고 열조의 땅으로 가주길 원했다. 그는 유목민이었다. 형들이 던져 넣은 구덩이부터, 보디발의 집을 거쳐, 옥중에서도 하늘에 시선을 두었더랬다. 제국의 총리가 되어서도, 죽어서도 그 곳에 뿌리내리지 않았다. 나침반을 들고 산 사람이었다.
닭장같은 거주공간을 상찬하며 천년만년 거주할 궁전이라 비유하는 낯뜨거운 비석대신, 거친돌 하나 세워 여호와께서 우리를 도우셨다고 증언하는 도움의 돌, 에벤에셀의 고백이면 족하다.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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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마지막장 50장에는 두 개의 장례식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는 야곱, 다른 하나는 그의 아들 요셉의 장례다.
전반부에 나오는 야곱의 장례는 그야말로 성대했다. 이집트 제국의 총리대신인 아들 요셉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록 범죄 혐의로 옥살이까지 한 이민자 출신의 총리였지만 그는 이집트 국민을 7년 대기근으로부터 구한 사람이다. 70일동안 이집트 국민은 요셉 총리의 아버지를 위해 곡을 했다.
돌아가신 아버지 장례를 위해 파라오에게 부탁한다. 아버지를 고향 가나안 땅에 장사지내려 하니 보내달라고. 파라오는 자신의 신하들과 궁의 원로들 그리고 병거와 기병까지 보내 추도하게 한다.
아마 가나안 백성들은 깜짝 놀랐을 것이다. 제국 이집트의 심장부에서 이 많은 고관대작들이 몰려와 일주일동안 애통하는 모습은 생소했을 것이다. 요셉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드러나는 장면이다.
아버지 야곱은 조상 아브라함이 히타이트로부터 구입한 막벨라 밭 굴에 '묻혔다'. "They carried him to the land of Canaan and buried him in the cave in the field of Machpelah, which Abraham had bought as a burial place from Ephron the Hittite"
반면 정작 후반부에 나오는 요셉의 장례는 간략히 기록되어 있다.
"요셉이 백십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So Joseph died at the age of a hundred and ten. And after they embalmed him, he was placed in a coffin in Egypt"
아버지 야곱은 조상의 묘실에 '묻혔지만' 아들 요셉은 '입관된' 기사로 끝난다. 이 장면과 함께 창세기의 대단원이 막을 내린다. 그리고 출애굽기가 시작된다.
창세기 마지막 장에서 죽기 직전 요셉은 이집트의 디아스포라로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언한다. 지금은 너희들이 여기서 나름 평안하게 살고 있지만 이 땅은 영원한 거주지가 아니다. 언젠가 너희들도 내 아버지 야곱, 내 할아버지 이삭, 내 증조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묻힌 가나안으로 갈 것이다. 그 때 내 뼈도 추려 함께 그 곳에 데려가다오... 라고.
대제국 이집트의 명망가 요셉은 아마 제국의 장례법도에 따라 안치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서의 기자는 기록하지 않는다. 대신 요셉의 유언을 디아스포라에 전한다.
이 땅이 지중해 연안의 최대 강국이고 문명의 거점이지만... 그리고 요셉은 이곳에서 파라오 버금의 권세를 누렸고 온 이집트 백성의 존중을 받았지만 정작 그 요셉은 늘 아버지 묻힌 곳을 기억하고 그리워했노라 암시한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말한다. 여기가 전부가 아니라고. 지금은 찬란한 문명의 제국에서 안온하고 걱정없이 살지만... 우리의 돌아갈 곳은 유장한 나일강변이나 유프라테스-티그리스 강변이 아니라 늘 샘을 찾아 살아야하는 광야 근처 헤브론이라고 말한다.
지혜로운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이 말을 남긴다. 보이는 애굽이 전부가 아니다. 언젠가 영원한 본향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늘 그 곳을 기억하라. 여기서 성과 탑을 쌓으려 하지 말아라.
그 기억을 계대하기 위해 그의 시신은 아버지와 함께 막벨라굴로 가지 않았고, 죽음 이후에도 유골로 이집트 땅에 백성들과 함께 남아, 언젠가 출애굽의 때가 이를 때 백성들에게 본향을 기억하게 만들었다.
소년 시절 형들의 모략에 의해 온갖 고난을 겪으며 살아온 인생이었기에 그 누구보다 본향이 그리웠을 그는 뼈를 남기면서까지 자손들에게 신의 섭리를 기억시켰다.
He was 'placed in a coffin' in Egypt, not bur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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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외받고 사양해 온 학회 만찬 강연이 있다. 요즘 바쁘기도 하거니와 밤 늦은 시간 이동하는게 귀찮아 정중히 양해를 구했는데 재고를 요청하며 다시 연락이 왔다. 마침 회사 근처 도보 5분거리 컨퍼런스 빌딩에서 열린단다. 6시반부터이니 퇴근길에 들러 강연하고 가면 되겠다 싶어 수락한게 두어달 전쯤이었고.... 그게 오늘.
저녁 5시반. 주섬주섬 타이 매고 수트 챙겨입고 집 나와 출근 중.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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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있었으면 뭔가 진도개 3호 정도 발효상황이었을 것을 피했다고 생각해 보삼. 성에 안차면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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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h Rynn 갑자기 행복해졌어. 네 말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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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동의 판도
1. 전략적 인내로 버티며 거중조정자 레버리지를 유지하려는 이란과.
2. 이라크, 아프간에서의 뼈아픈 경험 결과, 중동 전장 개입대신 역외 균형자 레버리지를 유지하려는 미국을.
3. 싸움 붙여 미-이란간의 실질적 분쟁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네타냐후의 계속되는 provocation으로 보고 있음.
한마디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이스라엘-헤즈볼라 전쟁'으로 전선을 넓혀, 이를 디딤돌로 '이스라엘-이란' 전쟁으로 다시 확장시키고, 종국에는 '미-이란 전쟁'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네타냐후의 게임으로 읽는다. 그렇게만 되면 네타냐후의 모든 이전 과오는 증발될 수 있다. 다만 네타냐후의 이 게임에 말려들고 싶지 않은 이란이 전략적 인내 포지션으로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데... 하산 나스랄라까지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지 주목된다. 하니예의 죽음에도 별다른 보복이 없었는데 이번 나스랄라 죽음에도 별 움직임이 없다면 이란은 소위 프록시들의 대부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의든 타의든 세게 치고 나가 테헤란에서 또 한번 일을 벌일 수 있어야 명색이 저항의 축 중심국으로서의 체면을 지킬 수 있다. 그럼에도 아직 이란이 반응하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이스라엘의 정보력과 공작능력 및 화력에 대한 우려가 있을 것이고, 그리고 전략적으로도 개입을 통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기 때문이다. 이란판 전략적 인내다.
미국, 특히 백악관 입장에서는 네타냐후가 원망스러워 죽을지경일 듯. 지난 3년반 중동정책에 성과가 거의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젠 성과는 커녕 전쟁을 막지도 못하고, 심지어 미국의 최근거리 우방인 이스라엘이 말을 들어먹지도 않는 모습을 만방에 알리고 있는 판이다. 어떻게든 가자 휴전 협상을 중재하고, 선거에 집중해야 하는데 이란과 그 프록시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이 상상의 범주를 넘어설 정도로 심화되다보니 저으기 당황하는 것 같다. 나스랄라 공격 때는 미국에 미리 알려주지도 않았다고 하니....
이 판을 이란과 미국이 못읽을 리는 만무하고, 따라서 네타냐후의 게임에 말려들지 않는 것이 이익이라는 것을 잘 아면서도... 상황변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긴장국면으로 떠내려 갈 수도 있어서 문제다. 그 첫 상황전개의 착점은 이란의 대규모 보복 참여 여부다. 현 상황은 하마스와 헤즈볼라의 C4I가 파괴된 상황이기에 프록시를 동원하는 기존의 대응은 별 임팩트가 없다. 그렇기에 이란이 직접 군사행동을 하면, 그래서 이스라엘 안보에 변수가 생기면 미국도 그에 맞춰 대응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란이 계속 전략적으로 인내하며 국익을 빌드업해나갈지, 아니면 보수진영의 일갈에 못이겨 결국 무력 대응을 시작할 지에 달려있다. 그 점에서 오늘 최고지도자의 발언은 묘했다. 싸움의 주체는 헤즈볼라고, (이란포함) 모든 무슬림들은 시온주의와 싸우는 의무가 있기에 헤즈볼라를 지원하겠노라 밝혔는데 어떻게 보면 이란이 최전선에 나서기를 저어하면서 즉각적 확전을 애매하게 피해가는 뉘앙스도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여간.
이란이 반응하고 공세수위를 높이면, 아무리 미국이 개입을 마뜩찮아 한다해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그게 네타냐후가 학수고대하는 그림이다. 이란이 알고도 그 길로 갈 것인지, 안가고 또 버틸 때 이스라엘은 테헤란의 심장부를 노려 심지어 최고지도자나 측근까지 타겟으로 삼을지가 앞으로 지켜봐야 할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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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섭
전쟁?의 뒷배 양키를 솎아내지 않는한 지구에 전쟁이 끊이 질 않을겝니다. (하기사, 다음을 이어 올 것도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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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하산 나스랄라의 행적을 짚고 있다. 글로 정리하다보니 머리가 아플 정도다. 이스마엘 하니예에 이어 푸아드 슈크르, 이브라힘 아킬 그리고 하산 나스랄라를 사살했다. 적장을 하나씩 없애고 있다. 야히야 신와르만 잡으면 네타냐후는 승리를 선언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벌어진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은 지도자의 의무다. 하나하나 따지면 논쟁점이 많지만 어떻든 전쟁 중 적장을 치는 것을 탓하긴 어렵다. 국외자 입장에서 차갑게 보려 한다.
그러나 이들 적장이 아닌 너무 많은 민간인들의 죽음에 이스라엘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무고한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가자주민 사망자 4만천명도 너무 많거니와, 레바논 호출기 폭발로 무장대원 아닌 이들도 너무 많이 죽고 다쳤다. 자국 인질들 귀환 문제도 논란이많다. 인질의 불가피한 희생을 감수할 수 있다는 소위 한니발 지침을 의심케하는 행보를 보이며 생환보다는 시신으로 돌아온 인질들이 더 많다.
네타냐후는 일단 기사회생했다. 바닥에 떨어졌던 그와 그의 극우 내각 지지율도 상승할 것이다. 이스라엘 지도자로서는 가장 큰 책임질 일 - 기습 허용-을 저지르고 정치적 생명이 위기에 처했을 때 강공으로 버텼다. 점점 보수화되는 이스라엘 국민 여론을 잡아채고 있다.
"그래. 네타냐후가 좀 잘못했고, 주변인물들이 다 또라이 같긴하지만... 아무리봐도 그 이만큼 경험있는 지도자가 또 있을까? 이 난리판에 저렇게 열일하는 네타냐후 밖에 없는 거 아냐?"라는 마음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 마음은 지지율 상승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네타냐후와 그의 내각, 그리고 리쿠드가 자기 진영의 승리 트로피를 들고 환호할 수는 있을지 모르나, 국가 이스라엘에게는 해를 끼치고 있다. 보수화에 환멸을 느끼는 이들이 나라를 떠나고 있다.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귀환자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고 있다. 극우 보수파들의 나라로 바뀔지 모른다는 우려들을 이스라엘 현지 친구들이 툭툭 던지듯 이야기한다. 이스라엘 안보의 핵심 주제 중 하나인 향후 인구문제도 흔들린다고 한다.
건국 이래 그간 온갖 비판과 욕먹을만한 일을 하고도, 그래도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되게 했던 최소한의 virtue들이 하나씩 날아가고 있다. 홀로코스트 피해자로 갖고 있던 도덕적 지위도 약해지고 있다. 과연 resilience 가 작동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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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연철
이판에...소위 '적폐'를 끝장 내주길 바라는 미국의 마음을, 이스라가 행동으로 대신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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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sik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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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어느 나라에서 지진이 났을때 옆 나라 겸임국 대사관에 근무하던 우리 외교관들이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구호활동과, 우리 파견 소방방재청 인력들을 지원한 적이 있다. 열심히 일하고도 당시 모 언론사의 오보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외교관들이 일은 안하고 편한 콘테이너 막사에서 에어컨 틀고 지낸다는 보도였다. 영상에는 콘테이너 밖에서 땀에 쩔어 노숙하듯 지쳐 쉬고 있는 우리 소방대원들 모습이 찍혔다. 그 날 난리가 났다.
외교부 당직실 전화기는 불이나듯 울렸다고 했다. 그 따위로 외교관 생활하지 말라는 욕이자 항의였을 것이다. 다행히 바로 다음날 오보로 밝혀졌다. 당시 현장에서 지원 업무를 진두지휘하던 외교관의 소회를 기억한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오해받는 억울함보다 반성이 담긴 소회였다. '사실이 아닌 이런 보도로 인해 속상하긴 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앞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보도를 접하신 국민들께서 '아냐 우리 외교관들이 그럴리 없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고, 바로 우리를 비난 하실 때에는 어쩌면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혹시라도 우리가 그동안 믿을만한 모습을 제대로 보여드리지 못했기에 국민들께서 우리를 신뢰하시지 못하는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는 논지였다. 최선을 다해 재해현장에서 일했던 이가 억울함보다는 성찰을 담은 소회를 나눌 때 그 글을 읽으면서 숙연해졌던 기억이 있다.
조금 맥락은 다르지만.... 개신교에 대한 실망이 넘치는 시대.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 때론 분노를 대화 중 들을 때가 있다. 그 때마다 깊은 송구함과 자괴감이 들곤 한다. 보통은 나는 주류와 다르다고 항변하며 한국 개신교회와 나를 분리하는 알리바이를 만들곤 한다. 그러나 여전히 죄송하다. '내 삶이 그리스도인을 대표하지 못했음'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교회 다니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싫어하는 분에게, 내가 달리 보였으면 개신교에 대한 미움은 덜했을 터였다. 오히려 그와 가깝고 친한 내가 말씀안에서 제대로 그림같이 살았다면 내 모습이 그리스도인의 표준이 되었을 것인데 그렇게 살지 못한 죄송함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구주께 죄송했고 내가 속한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인인 나로 인해 마음 상하는 이들께 죄송했다.
All reactions:459Ken Geunyoun YI and 458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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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춘
반성을
겸손하고 성실히 사는 사람만해서 문제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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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고 믿음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정체성이 바뀌었다. 정주민에서 유목민으로. 처음엔 이 땅이 전부인줄 알았다. 부르신 곳에 터 잡아 더 깊이 뿌리내리고 그 기초를 딛고 높이 쌓아나가야 구주가 좋아하시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땅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자침을 맞추는 나침반 하나 들고 이 땅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유목민이었다. 때론 부평초처럼 떠돌기도 하고, 파도에 휩쓸려 방향을 잃곤 하지만 이내 다시 하늘의 극점으로 자침을 맞추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소명이었다. 부르심은 곧 보내심이었다. 동시적이었고, 같은 의미였다.
아라비아의 유목민들은 두 개 이상의 우물을 오가며 산다. 그 우물, 오아시스가 고갈되면 다른 우물을 판다. 그리스도인이 유목민이라면 강변과 해안 또는 무한천변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광야에서 하늘에 이끌려살며 샘을 파는 사람들이다.
때론 한 샘에 오래 머물기도 한다. 유목민이라고 염세적이거나 세상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다. 최선을 다해 하루를 버텨내고, 매일 하늘을 우러른다. 그리고 샘에서 얻는 한 줌의 물로 감사한다. 그러나 정체성에는 변함이 없다. 언젠가 주 예수의 날에 이르러 영원히 정주할 그 소망이 유목민, 그리스도인의 동력이다.
교회 앞 모 아파트 단지의 詩碑 하나가 화제다. 픽 웃음이 나왔고, 그런가보다 했다. 단지 주민들이 원해서 세운 거고, 그대로 살겠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물론 1도 동의하거나 공감하지 않지만 그 곳과 상관없는 내 입장에서 왈가왈부 할 일은 아니다.
다만 어쩌면 아파트 아닌 다른 것에 비슷한 뿌리를 내리고, 움켜쥐고 인생을 걸고 있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수많은 내 안의 다른 시비들이 존재하고 있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제국 심장부에서 온갖 영화를 누렸을 요셉도 그 곳에 뿌리내리고 매장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입관만 했고, 다시 약속의 땅으로 후손들이 돌아가는 날, 그 후손들이 자기의 뼈를 매고 열조의 땅으로 가주길 원했다. 그는 유목민이었다. 형들이 던져 넣은 구덩이부터, 보디발의 집을 거쳐, 옥중에서도 하늘에 시선을 두었더랬다. 제국의 총리가 되어서도, 죽어서도 그 곳에 뿌리내리지 않았다. 나침반을 들고 산 사람이었다.
닭장같은 거주공간을 상찬하며 천년만년 거주할 궁전이라 비유하는 낯뜨거운 비석대신, 거친돌 하나 세워 여호와께서 우리를 도우셨다고 증언하는 도움의 돌, 에벤에셀의 고백이면 족하다.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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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sik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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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마지막장 50장에는 두 개의 장례식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는 야곱, 다른 하나는 그의 아들 요셉의 장례다.
전반부에 나오는 야곱의 장례는 그야말로 성대했다. 이집트 제국의 총리대신인 아들 요셉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록 범죄 혐의로 옥살이까지 한 이민자 출신의 총리였지만 그는 이집트 국민을 7년 대기근으로부터 구한 사람이다. 70일동안 이집트 국민은 요셉 총리의 아버지를 위해 곡을 했다.
돌아가신 아버지 장례를 위해 파라오에게 부탁한다. 아버지를 고향 가나안 땅에 장사지내려 하니 보내달라고. 파라오는 자신의 신하들과 궁의 원로들 그리고 병거와 기병까지 보내 추도하게 한다.
아마 가나안 백성들은 깜짝 놀랐을 것이다. 제국 이집트의 심장부에서 이 많은 고관대작들이 몰려와 일주일동안 애통하는 모습은 생소했을 것이다. 요셉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드러나는 장면이다.
아버지 야곱은 조상 아브라함이 히타이트로부터 구입한 막벨라 밭 굴에 '묻혔다'. "They carried him to the land of Canaan and buried him in the cave in the field of Machpelah, which Abraham had bought as a burial place from Ephron the Hittite"
반면 정작 후반부에 나오는 요셉의 장례는 간략히 기록되어 있다.
"요셉이 백십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So Joseph died at the age of a hundred and ten. And after they embalmed him, he was placed in a coffin in Egypt"
아버지 야곱은 조상의 묘실에 '묻혔지만' 아들 요셉은 '입관된' 기사로 끝난다. 이 장면과 함께 창세기의 대단원이 막을 내린다. 그리고 출애굽기가 시작된다.
창세기 마지막 장에서 죽기 직전 요셉은 이집트의 디아스포라로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언한다. 지금은 너희들이 여기서 나름 평안하게 살고 있지만 이 땅은 영원한 거주지가 아니다. 언젠가 너희들도 내 아버지 야곱, 내 할아버지 이삭, 내 증조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묻힌 가나안으로 갈 것이다. 그 때 내 뼈도 추려 함께 그 곳에 데려가다오... 라고.
대제국 이집트의 명망가 요셉은 아마 제국의 장례법도에 따라 안치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서의 기자는 기록하지 않는다. 대신 요셉의 유언을 디아스포라에 전한다.
이 땅이 지중해 연안의 최대 강국이고 문명의 거점이지만... 그리고 요셉은 이곳에서 파라오 버금의 권세를 누렸고 온 이집트 백성의 존중을 받았지만 정작 그 요셉은 늘 아버지 묻힌 곳을 기억하고 그리워했노라 암시한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말한다. 여기가 전부가 아니라고. 지금은 찬란한 문명의 제국에서 안온하고 걱정없이 살지만... 우리의 돌아갈 곳은 유장한 나일강변이나 유프라테스-티그리스 강변이 아니라 늘 샘을 찾아 살아야하는 광야 근처 헤브론이라고 말한다.
지혜로운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이 말을 남긴다. 보이는 애굽이 전부가 아니다. 언젠가 영원한 본향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늘 그 곳을 기억하라. 여기서 성과 탑을 쌓으려 하지 말아라.
그 기억을 계대하기 위해 그의 시신은 아버지와 함께 막벨라굴로 가지 않았고, 죽음 이후에도 유골로 이집트 땅에 백성들과 함께 남아, 언젠가 출애굽의 때가 이를 때 백성들에게 본향을 기억하게 만들었다.
소년 시절 형들의 모략에 의해 온갖 고난을 겪으며 살아온 인생이었기에 그 누구보다 본향이 그리웠을 그는 뼈를 남기면서까지 자손들에게 신의 섭리를 기억시켰다.
He was 'placed in a coffin' in Egypt, not bur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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