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선 슬리퍼는 어떻게 국민 슬리퍼가 되었나
중앙일보
업데이트 2017.06.30
버켄스탁·크록스도 울고가는 국민 슬리퍼, 삼선 슬리퍼는 2000년대 들어 한국 사회 곳곳에 자리를 잡았다. 신인섭 기자
자칫 칙칙해 보일 수 있는 검은 몸통에 흰 줄 3개가 들어가 밝고 깔끔한 느낌을 더한다.
말랑말랑한 바닥은 피로에 지친 발바닥을 편안히 지탱해 준다.
발목을 까딱하는 간단한 동작만으로 벗을 수 있어 생활의 간편함을 더해 준다.
도둑맞거나 망가져도 걱정이 없다.
까짓것 3000원 주고 새로 사면 되니까. '삼선슬리퍼' 이야기다.
'오리지널' 제품을 만든 회사의 이름까지 본뜬 '삼디다스'라는 별칭엔 장난기가 넘친다.
지난달 21~24일 치러진 마지막 사시, 제59회 사법시험 제2차 시험장에도 삼선슬리퍼를 신은 수험생이 많았다. 여름이 뜨거워질수록 더 자주 만나게 될 친구, 삼선슬리퍼의 세계를 살펴봤다.
덥든 춥든 삼선(三線)슬리퍼를 신는다
곤충을 연구하는 배윤혁(23) 연구원은 삼선슬리퍼를 신고 전국을 돌아다닌다. [사진 배윤혁]
이화여대 행동생태실험실에서 곤충을 연구하는 배윤혁(23)씨에게 삼선슬리퍼는 중요한 '연구도구'다. 연구실 생활을 하면서 신기 시작한 삼선슬리퍼와 함께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고, 제주도와 일본 출장길에도 동행했다. 배씨는 "곤충을 관찰하기 위해 물가에 가는 경우가 많아 발이 물에 잘 젖는데 슬리퍼가 금세 말라 좋고 아예 벗어 버리기도 편하다"며 삼선슬리퍼가 자신의 마스코트라고 했다.
'패션왕'으로 유명한 웹툰 작가 기안84는 사시사철 삼선슬리퍼를 신는다. [사진 기안84]
웹툰 작가 '기안84'도 삼선슬리퍼를 즐겨 신기로 유명하다. 엄동설한 눈밭에서도 맨발로 삼선슬리퍼를 신고, 방송 촬영을 하는 날에도 삼선슬리퍼를 신고 카메라 앞에 섰다. 그에게 삼선슬리퍼를 즐겨 신는 이유를 물었다. "살다 보니 꾸미는 게 귀찮아지기도 했고 잘 보일 사람도 없다"며 "(막힌) 신발을 안 신어 버릇하니 가끔 신으면 발도 답답하고, 마감할 때는 슬리퍼가 가장 편해 자주 신게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삼선슬리퍼는 국민 슬리퍼가 된 지 오래다. 중·고교 앞 문구점에서도, 오피스타운 편의점에서도, 장례식장 매점에서도 살 수 있다. 서울 신림동 고시촌과 시험기간 대학가에서 삼선슬리퍼를 신은 청춘을 3초에 최소한 한 명은 볼 수 있다. 사법시험 시험장에도 수험생들은 트레이닝 팬츠에 삼선슬리퍼, 오로지 시험에만 집중하기 위한 패션으로 나왔다.
폭염에는 삼선슬리퍼도 뻗어 버린다
서지성(18)군이 SNS에 올린 임시 실내화. 삼선 슬리퍼가 폭염 속에 축구를 하다 접착 부분이 녹아 못쓰게 되자 친구가 재활용 슬리퍼를 만들었다. [사진 인스타그램]
발에 땀이 차기 쉬운 여름철이 '삼선슬리퍼 성수기'지만 날이 너무 더우면 수명을 다하는 삼선슬리퍼가 속출한다. 고교생 서지성(18)군은 며칠 전 수업시간을 착각하는 바람에 체육시간에 실내화인 삼선슬리퍼를 신고 축구를 했다. 달궈진 운동장에서 한참 뛰어다니는데 슬리퍼가 발에서 '이탈'했다. 접착제가 폭염에 녹는 바람에 스트랩이 떨어져 나갔다. 서군은 "친구가 종이박스에 삼선 스트랩을 얹은 실내화를 만들어 줬다"며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페이지에 사진을 올렸다.
삼선슬리퍼의 최후는 대동소이하다. 오래 신다 보면 발등을 덮는 고무재질의 스트랩이 찢어지거나 스트랩과 밑창을 연결한 접착 부분이 분리된다.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실로 밑창과 스트랩의 연결 부위를 꿰매거나 볼트나 압정을 박기도 한다.
'삼선답지 않은' 예쁜 디자인…시장은 중국산이 점령
삼선슬리퍼의 최대 소비자는 중·고교생이다. 2000년대 중반만 해도 흰 실내화를 신게 한 학교가 대부분이라 삼선슬리퍼는 반항기 있는 청소년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요즘은 아예 삼선슬리퍼를 실내화로 신는 학교가 많다. 10대 취향에 맞게 분홍·하늘·연보라 등 색깔도 다양해졌다. 줄무늬 위에 인기 캐릭터를 그려 넣는 '패션감각'을 발휘하기도 한다.
대다수 중고등학교에서 실내화로 삼선슬리퍼를 신는다. 여학생들에게는 알록달록한 색이 인기다. [사진 인스타그램 @boram_vly]
하지만 삼선슬리퍼도 '메이드 인 차이나'의 공습을 피할 수 없었다. 2001년부터 경남과 부산에서 공장을 운영하며 삼선슬리퍼를 만들어 온 A씨는 "국내에 유통되는 삼선슬리퍼 중 15% 정도만 국산이다"고 말했다. 한때는 국산 삼선슬리퍼가 우즈베키스탄과 동남아시아 등에 수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은 저가 중국산 슬리퍼에 밀려 문을 닫은 공장이 많다고 했다.
A씨는 "제대로 원료를 다 쓴 최고급 슬리퍼도 납품 단가는 겨우 1300원이다"며 "중국산 저가 제품은 생산비를 아끼기 위해 원재료는 30%만 쓰고 나머지는 재생고무를 섞는다. 그런 제품은 밑창이 닳기도 전에 바닥이 푹 꺼진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국내 업체 중에도 끈 떨어진 리퍼를 한 켤레에 100~150원에 매입해 재활용하는 곳이 있다.
짝퉁은 어떻게 '국민 슬리퍼'가 됐나
삼선슬리퍼는 이른바 '짝퉁'이다. 1972년에 나온 아디다스 슬리퍼 ‘아딜렛’이 삼선슬리퍼의 원조다. 2000년대 초 아디다스의 오리지널 슬리퍼가 청소년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는데 가격이 2만5000원이었다. 학생들은 비싼 명품 대신 문방구에서 8분의 1 가격의 모조품을 사 신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에 이를 즐겨 신었던 세대가 성장하면서 삼선슬리퍼의 영역도 넓어졌다. 직장인 정모(31)씨는 "15년째 이 슬리퍼를 계속 구입해 신고 있다. 사무실 책상 밑에 항상 삼선슬리퍼를 둔다"고 말했다.
직장인 정모(31)씨는 아침에 출근하면 구두를 벗고 책상 밑에 둔 삼선슬리퍼로 갈아신는다. 학창시절부터 15년 넘게 삼선슬리퍼를 신고 있다. 이현 기자
이준영 상명대 소비자주거학과 교수는 "국민 슬리퍼가 된 것은 동조심리 때문인 것으로 해석 가능하다. 우리나라 사람들, 특히 어린 친구들은 주변 사람과 똑같이 행동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얻으려는 동조심리가 강하다. 유행에 민감한 것도 같은 이유로 설명된다"고 말했다.
오리지널은 짝퉁과 다른 길을 택했다. 아딜렛은 발등과 바닥에 쿠션을 넣어 짝퉁과 차별화했다. 밑창·스트랩·줄무늬 색을 마음대로 조합하고 이니셜도 새길 수 있는 7만5000원짜리 '커스터마이즈' 제품까지 나왔다.
원조 삼선 아디다스 "유사 상표 사용은 법적 조치 취할 것"
삼선슬리퍼의 원조로 알려져 잇는 아디다스 아딜렛 슬리퍼. 바닥과 발등에 쿠션을 넣어 짝퉁과 차별화했다.[사진 아디다스]
아디다스는 다른 회사가 삼선 줄무늬를 사용하는 것에 민감한 반응을 보여 왔다. 지난 2월 푸마가 축구화에 4선 줄무늬를 사용한 것이 상표권 침해라며 미국 연방법원에 소송을 냈다. 같은 달 테슬라의 모델3 로고에 넣은 석 삼(三) 자가 아디다스 상표와 유사하다며 미국 특허상표청에 상표 사용금지요청서를 내기도 했다. 테슬라는 삼선 로고를 없애고 대신 숫자 '3'을 넣었다.
한국에서는 2009년 아디다스의 삼선이 상표로 등록됐다. 단순한 줄무늬일 뿐이지만 수십 년간 삼선이 들어간 제품을 판매하면서 많은 소비자가 옆 선에 줄 3개만 봐도 어느 회사의 상표인지 알아볼 수 있게 됐기 때문에 상표로 인정받았다. 2011년엔 삼선 줄무늬가 포함된 스포츠의류를 만들어 판 인터넷쇼핑몰을 상대로 상표권 침해 금지소송을 제기해 이겼다. 재판부는 "국내에서도 널리 알려진 상표라 아디다스와 출처에 관한 혼동을 일으킨다"며 삼선 줄무늬가 포함된 스포츠의류를 제조 또는 판매해서는 안되고 보관 중인 의류도 폐기하라고 결정했다.
굵은 흰 선 위에 가는 실선을 넣은 '6선 슬리퍼'(왼쪽)와 'KOREA' 슬리퍼. 상표권 분쟁을 염두에 둔 디자인 변형으로 추정된다.
시중에 판매되는 삼선슬리퍼를 자세히 보면 하얀 선 위에 양각으로 'KOREA'라고 새겨진 것들이 있다. 굵은 흰 선 위에 보일 듯 말 듯 가는 실선을 넣은 '육선슬리퍼'도 있다. 상표권 분쟁을 염두에 둔 디자인 변형으로 추정된다.
아디다스 측은 "(슬리퍼를 포함해) 모든 신발에 대해 삼선 상표를 등록해 뒀다. 삼선 무늬 상표는 당사의 주요 상표이므로 이를 보호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유사한 상표 사용에는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원론적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전국에 퍼져 있는 삼선슬리퍼에 대해 아디다스가 소송을 제기한 적은 없다.
이현 기자 lee.hyun@joongang.co.kr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1716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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