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20

우경화하는 일본 정치: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리다. 김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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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JS일본리뷰 제56호 김태진 동국대학교 일본학과 교수의 "일본정치에 관한 오해 혹은 진실"이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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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JS일본리뷰 제56호 발행 안내

"일본사회가 우경화되었다는 이야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현상 자체가 보여주는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경화와 정치적 무관심, 자민당 일당지배체제라는 진단은 모두 일본 사회를 설명하는 개념들로서는 너무 포괄적이어서 동어반복적인 결론으로 그치고 있으며, 그 원인으로서 일본만의 문제라기보다 현재의 전 세계적인 민주주의 위기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 눈감아 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변하지 않는 일본 정치의 특성으로 파악하여 하나의 고정된 상수로 파악하고, 이러한 상황을 묘사하는 데만 치중해 정작 중요한 일본 사회와 현재의 정치적 변화에 눈감아 버리기 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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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年 02月 19日
일본정치에 관한 오해 혹은 진실
우경화하는 일본 정치: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리다
일본 정치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들이 있다. 일본이 우경화되고 있다는 주장, 일본 국민이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인식, 그리고 자민당의 장기집권이 일본 사회의 보수화를 의미한다는 해석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세 통념은 서로 연결되어 일본 국민은 정치에 무관심하기에, 어 차피 자민당이 장기집권할 것이며, 이 바탕에서 일본은 계속 우경화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 으로 이어진다. 과연 그럴까?

물론 이에 대한 대답은 예스 아니면 노라는 방식으로 제시될 수 없다. 왜냐하면
  • 실제로 우경화라는 것이 어떤 기준으로 우경화되었다는 것인지 판단할 준거 가 마땅하지 않으며, 무관심에 대한 잣대 역시 투표율 등의 사례로만 일반화할 수 없기 때문 이다.
  • 또한 자민당 우위가 반드시 일본사회의 보수화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고,
  • 실제로 일본 내 정치적 효능감이 낮아진 상황에서 유권자들이 특정 정당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는 구 조적 요인 역시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우경화에 대해서 헌법 개정에 관한 논의를 모두 극우적 언행으로 보는 것도 조심할 필 요가 있어 보인다. 자위대의 명문화가 동아시아와 국제적 차원에서 어떤 불안정을 가지고 올 것인가에 대한 주의는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개헌 논의를 단순히 헌법 9조만 의 문제로 한정할 수도 없으며, 나아가 이걸 곧바로 아무런 제한도 없는 전쟁 가능한 나라로, 신정한론(新征韓論)으로, 2차대전 전으로 돌아가는 걸로 보는 것은 다소 지나친 해석일 수 있다.
01 피해의 역사를 가진 이웃나라로서 일본의 우경화를 경계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때 우경화가 얼마나 오른쪽으로 기울어 간다는 것인지, 일본 전체 국민들이 그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 있다는 것인지, 이것이 일본만의 독특한 현상인지는 쉽게 말하기 어렵다. 오히려 글로벌 한 차원에서 포퓰리즘에 기반한 배외주의, 자국우선주의, 혐오와 배제의 일상화의 문제가 일 본에서 어떤 방식으로 벌어지고 있는지 살펴보고, 일본의 우경화를 반대하는 논리가 또 다른 우경화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닌지 주의해야 하는 이유이다.
물론 나카노 고이치(中野晃一)가 지적하듯이 일본 사회가 우경화하고 있다는 진단에는 어느 정도 동의되는 부분이 있다. 그는 일본의 우경화가 고이즈미나 아베의 등장으로 느닷없이 촉발된 것이라거나, 아울러 아베의 퇴장으로 곧바로 끝날 성질의 것이라고도 보지 않는다. 일 본의 우경화 과정은 과거 30년 정도의 긴 시간적 범위 안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그는 그 특징 으로 세 가지를 꼽는다.
  • 첫 번째 현대 일본에서 우경화는 어디까지나 정치 주도이지, 결코 사 회 주도가 아니었다는 점.
  • 둘째 우경화 과정이 단선적으로 이뤄졌던 것이 아니라, 밀려왔다 쓸려가는 파도처럼 반대 방향으로 일시적으로 회귀했다가 다시금 진전되는 식으로 전개되었 다는 점.
  • 셋째 이러한 우경화의 본질이 ‘신우파 전환’이라 부를만한 것으로 요컨대 과거부터 존재해 왔던 우파가 그대로 좀 더 강해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우파로 변질되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해 왔다는 점이다.1)

그러나 일본사회가 우경화되었다는 이야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현상 자체가 보여주는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경화와 정치적 무관심, 자민당 일당지배체제라는 진 단은 모두 일본 사회를 설명하는 개념들로서는 너무 포괄적이어서 동어반복적인 결론으로 그치고 있으며, 그 원인으로서 일본만의 문제라기보다 현재의 전 세계적인 민주주의 위기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 눈감아 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변하지 않는 일본 정치의 특성으로 파악하여 하나의 고정된 상수로 파악하고, 이러한 상황을 묘사하는 데만 치중해 정작 중요한 일본 사회와 현재의 정치적 변화에 눈감아 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역사적으로, 좀 더 사상적으로 조망해 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2)
헤이세이사와 제로년대의 상상력: 아버지의 부재와 서바이브감
그렇다면 시간의 축을 조금 앞으로 돌려 헤이세이 시대(1989~2019)와 제로년대(2000년 대 초반)로 가보자.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까지 익숙해져 있던 정치 문법과는 다른 새로운 정 치적 환경에 처해있는 것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요나하 준(與那覇潤)은 쇼와 시기의 종언을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해 이야기한다.
1) 나카노 고이치, 김수희 옮김, 『우경화하는 일본 정치』, AK, 2016, 9쪽. 
2) 이에 대해서는 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일본학』 63호, 특집기획 <기획자의 말: 현대 일본의 정치적 무의식> 참조. 02 “이렇게 해서 좌우 모두 쇼와 일본을 지탱했던 ‘두 개의 기둥이 소리를 내며 부러져버렸습니다’. 정신분 석 전문가가 즐겨 사용하는 표현을 빌자면, 두 명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나처럼 하라’는 형 태로 행동의 모범을 보여주고, ‘이건 하지마’라고 금지 명령을 내려서 아이들의 사고 양식에 틀을 제공 하던 강력한 존재가 사라졌습니다.”3) 이때 두 아버지란 전후 일본의 보혁(保革) 구도에서 아버지 역할을 해왔던 쇼와 천황과 마 르크스주의를 가리킨다. 헤이세이 시기는 전후 보수주의자들의 상징과도 같았던 쇼와 천황 의 죽음과 함께 시작되었고, 세계적으로는 냉전이 해체되면서 진보주의자들이 기대고 있던 마르크스주의라는 거대한 지적 체계 또한 무너졌다. 이는 단순히 이념만이 사라진 시대라기 보다 모범이 사라진 시대, 정신적 기둥이 사라진 시대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거대한 모범이나 주의가 사라진 것뿐만이 아니라 마음에 썩 들지는 않아도 무언가 따뜻함이 남아있 던, 믿음직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무언가 권위 있던 ‘쇼와의 오야지’들이 사라진 것이기 도 했다. 즉 자유롭지 않지만 따뜻한(알기 쉬운) 사회에서 자유롭지만 차가운(알기 어려운) 사회로의 전환이었고, 그 핵심은 무언가 가치가 공유되고(공유될 수 있다고 믿고),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던(소통할 수 있다고 믿던) 무언가 막연하게나마 믿을 대상이 사라진 것이었 다. 이는 사회의 변화와 함께 정치적 이념이 아닌 생존과 실존의 문제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 었으며, 이후 일본 사회에서는 개인이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을 고민해야 하는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우노 츠네히로(宇野常寛)가 제로년대의 특징으로 ‘서바이브감’과 ‘결단주의’ 를 꼽은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90년대 후반같이 “틀어박혀 있으면 죽어버린다, 살아남을 수 없다”는 어떤 ‘서바이브감(survive感)’이라 불리는 감상이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혁과 격차 사회의 도래와 함께 제로년대 이후 생겨났음에 주목한다. 세계는 더 이상 ‘옳은 가치’라던가 ‘살아가는 의미’를 알려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 개인은 살아남기 위해서 우선 스스로 생 각하고 행동한다는 태도를 선택한다. 설령 “틀려서” “타인을 상처입히더라도” 무언가의 입장 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즉 ‘감히/굳이(あえて)’ 특정 가치를 선택한다는 ‘결단주의’가 그것이다.4)
우노는 제로년대에 들어서면서 ‘큰 이야기’가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무근거한 ‘작은 이야기’ 를 자기책임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변화를 짚어낸다. 사람은 무언가(가치, 이야기)를 고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면 좋다라는 방식의 사고정지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때 결단이란 결국 살아남기 위한 방식으로 어딘가에 소속될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하고, 이는 자신이 속한 부족(tribe)의 가치를 신념으로 체화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3) 요나하 준, 이충원 옮김, 『헤이세이사: 1989~2019 어제의 세계, 모든 것』, 마르코폴로, 2022, 34쪽. 
4) 宇野常寛, 『ゼロ年代の想像力』, 早川書房, 2008, pp. 25~26. 03 이러한 경향은 적과 동지를 나누는 정치적 방식과 결합하면서, 단순하고 직관적인 해결책 을 추구하는 ‘단순함의 정치’로 이어진다. 특정 가치나 신념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적을 설정 하고 자신이 속한 부족을 강화하는 부족주의(tribalism) 정치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이는 정 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의 부상과 연결되며, 자신이 속한 집단의 가치와 신념을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를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특정한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가 형성되고, 부분적 사실을 전체적 진실로 치환하는 가짜뉴스(fake news)가 범람한다. 그리고 이 속에서 혐오와 배제의 정치는 점점 강화된다. 제로년대 들어 일본에서 일종의 ‘자기책임론’과 ‘능력주의’ 담론이 퍼져 나간 것 역시 이와 동전의 양면 같은 현상일지 모른다. 모든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자기책임론은 ‘격차 사회’ 시대 각자도생의 방식으로 생존을 자기책임의 문제로 환원시킨다. 이처럼 사회적 책임 을 개인화시키는 방식으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적 시선은 정당한 능력과 그에 맞는 보상 이라는 능력주의(meritocracy)의 이름으로 합리화된다.5) 그런 점에서 이념이 사라진 자리에 그 이념을 대체해 생존이 들어선다고 해서 이념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신념과 소속감이 새로운 ‘주의(-ism)’로서 자신의 근거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대신한다. 전후 공간에서 일종의 ‘픽션(fiction)’으로서 이데올로기를 파악하는 감각이 어느 정도 존재했다 면, 제로년대 이후 생존의 문제를 보완하는 기제로서 신념은 개인의 정체성을 정당화하는 ‘사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로서 자리 잡아간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3.11 동일본대지진과 코로나 사태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된다.
넷우익이 된 아버지: 부족주의, 정체성의 정치, 반향효과
따라서 정체성의 정치란 점에서 보자면 현재 일본에서의 노스텔지어는 본인들의 목소리가 어디에서도 대변되지 않는다는, 어쩌면 본인들의 경험과 괴리되는 지금의 현실에서 본인들 의 지난 삶이 부정된다는 감각에서 비롯되는 것일지 모른다. 그리고 이는 당연히 비즈니스 우 익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 그런 점에서 그들에게는 공통된 모종의 피해자의식이 깔려있어 보인다. 여기서 그들이 피 해자인지 아닌지는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피해자이지도 않은 자가 왜 피해자인 체하느냐는 힐난은 자신을 피해자화(self-victimization)하는 이들에게 별로 적절한 처방은 아니다. 그 비 판은 정확하지만, 아니 정확하기 때문에 오히려 효과가 없다. 중요한 것은 왜 그들이 피해자 라고 생각하느냐, 어떤 상실감이 본인들을 피해자로 포지셔닝하게 하는가일지 모른다. 5) 이 시기 출판된 주요한 서적으로 『希望格差社会: 「負け組」の絶望感が日本を引き裂く』(2004), 『多元化する「能力」と 日本社会: ハイパーメリトクラシー化のなかで』(2005)가 이를 보여준다. 04 따라서 이를 애국 비즈니스(愛国ビジネス)에 현혹된 생각 없는 이들로 치부하는 것 역시 문제를 단순화시키는 것일 수 있다. 넷우익(ネット右翼)이 된 아버지를 분석한 스즈키 다이 스케(鈴木大介)의 저작은 그런 점에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그는 아버지가 어느 순간 우 익이 되어 버린 것을 발견하고 아버지의 삶을 추적한다.6) 그는 아버지가 한국인을 비하하는 ‘화병내다(火病る, ファビョる)’, 중국과 한국, 북한을 묶어 비난하는 ‘특아(特亜)’, 대중매체를 경멸하는 ‘마스고미(マスゴミ)’, 좌익을 조롱하는 ‘파요쿠(パヨク)’, 생활보호 수급자를 멸시하는 ‘나마포(ナマポ)’, 한국의 문화적 주장에 대한 조롱인 ‘우리지날(ウリジナル)’ 같은 표현을 사용하게 된 과정을 되짚어 추적한다. 그는 이 러한 변화가 정치적 이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삶에서 발생한 우월감의 상실과 외로움과 관련 있다고 본다. 아버지가 퇴직 후 같은 경향을 가진 사람들과 월간 《Haneda》나 《Will》 같은 잡지를 읽고, 채널 〈사쿠라〉 같은 유튜브 콘텐츠를 즐기기 시작한 것은 새로운 커 뮤니티를 통해 상실감을 공유하고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한 시도였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스즈키는 이를 일종의 ‘고독의 병’으로 파악한다. 커뮤니케이션의 부재와 공동 체의 상실은 과거에 대한 왜곡된 노스텔지어와 결합하여 가상의 현실을 만들어낸다. 그 속에 서 과도한 소속감은 방어적 환상을 심화시키고 가상의 적에 맞서 자신이 ‘성전’의 전사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그리고 이는 반향효과(echo chamber)를 통해 취사선택적 정보만 을 습득하게 하고, 확증편향을 통해 강화된다. 취직빙하시대, 로스제네시대에 ‘패자그룹(負け組)’이 되어, 국가나 사회에 증오를 품고, 차별주의 단체에 들어가 음모론에 빠지며 혐오놀이 를 하는 젊은 남성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 경로를 따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 중 다수가 가족을 국가의 최 소단위로 삼아 전통적 가족관의 회귀를 목표로 하는 24조 개헌안에 찬성하고, 복지자원으로 어느 정도 비용을 할당하는 것을 국가재정 면에서의 큰 위협으로 파악하며, 전통적 가족이나 전통적 젠더관의 파괴를 위험시하는 종교에 빠진다. 커다란 이야기가 사라진 자리에 등장한 가족, 시장, 종교의 새로운 삼위일체는 이들에게 정체성과 생존의 기제를 제공한다. 현대 네트정치 문화론: 게임이 바뀌고 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을 일본 전체 상황으로 일반화하는 데에는 신중해야 한다. 넷우익이 일본 사회에서 그리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보기 어렵고, 그 수 또한 제한적이다. 실제로 일본의 보수 정치인들이 한국에서 흔히 평가하듯 넷우익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단정 짓기도 어렵다.
6) 鈴木大介, 『ネット右翼になった父』, 講談社, 2023. 05 그럼에도 이러한 정치적 현상의 발흥은 새로운 우익의 출현과 관련되어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가짜뉴스, 음모론, 탈진실(post-truth), 팬덤정치, 대안우파 등 새로운 정체성 정치 의 부상은 기존 정치 문법과는 다른 정치 질서로의 변화를 시사한다. 후지타 나오야(藤田直哉)가 지적하듯이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정치적 현상이 아니라, 문화적·사회적 구조 변화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7) 그런 점에서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개념 자체가 변하고 있는 상황일지 모른다. 그것은 마치 게임에 참가하듯이 가상의 현실 속 끝판왕을 무찌르는 구조를 닮아있으며, 거기서 합의나 설 득의 자리는 없다. 내 능력치를 좀 더 레벨업시켜서 무수히 존재하는 약자의 틈바구니에서 자 신의 ‘능력 하나’만을 믿고,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가혹한 ‘서바이벌’ 게임을 싸우는 플레이어만 있을 뿐.
그렇다면 기존의 대표와는 다른 방식의 정치적 대표의 과정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단순히 게임에 참가하는 것만이 아닌 게임의 룰 자체를 다시 설계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는 아무도 이런 대분열의 시대가 오리라 예상하지 못했고, 이에 대한 해법 역시 그리 간단치 만은 않을 것이다. 복잡한 사회현안을 과도하게 단순한 정책적 해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 각하는 태도. 오직 본인들만이 진짜 애국자이고, 상대를 공존불가능한 악으로 상정함으로써 이를 일소하겠다는 오만. 무언가 어떤 거대한 음모가 존재하고, 그 음모를 제대로 파헤치기만 하면 희망찬 미래가 도래할 것이라는 환상. 오히려 문제는 거기에 있을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이는 지금의 한국 사회를 돌아보는 데도 유효한 시점을 던져준다. 오히려 지금 의 계엄 이후의 사태를 보면 한국사회가 보다 우경화되었다고 보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일 본에서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한국에서 모든 것을 정치로 연결시키는 태도는 비정치화와 과정치화라는 점에서 둘이 결국은 다른 이야기가 아닐지 모른다. 한국 사회에서 극우라 불리 는 세력이 일정 정도 정치에서 중요한 행위자로 등장하는 것 역시 위의 분석이 일본적인 현상 만으로 볼 수 없게 만든다. 한국에서도 “누칼협(누가 칼들고 협박했어)”이란 표현이 보여주는 것처럼 과도한 자기책 임론과 ‘공정한 경쟁’만을 능사로 여기는 능력주의와 서열주의가 만연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난민이나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 이른바 PC(Political Correctness)라 불 리는 것들에 대한 방어적 공세로 이어진다. 현재의 사태를 두고 한쪽은 모든 원인을 중국에 돌리고, 다른 쪽은 토착왜구나 신친일파 탓으로 돌리는 접근 방식은 표면적으로 차이를 보이 지만, 본질적으로 유사한 적대적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물론 두 입장을 같은 차원으로 단순 비교할 수 없으며, 지금처럼 엄중한 시기에 균형 잡힌 지식인인 척 양비론적 태도를 취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7) 藤田直哉, 『現代ネット政治=文化論: AI、オルタナ右翼、ミソジニー、ゲーム、陰謀論、アイデンティティ』, 作品社, 2024. 06 IJS 하지만 그들을 단죄하고 힐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연구자, 아니 같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로서 그들의 복잡한 내면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들의 목소리를 적의 이 야기로 한정하고 단순화하는 게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성을 회복하게 하는 방식이 필 요한 것이 아닐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그 게임의 구조 안에 어떤 노이즈를 만들어낼 수 있는 방식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우리 정치에서 상수로 등장했고, 단지 그들이 자연적으로 고사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훨씬 전략적인 방법일 것이기 때문 이다. 그러려면 우선 그들의/우리들의 정신사를 분석하는 것이 먼저일지 모른다. 동국대학교 일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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