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은 ‘정치적 조폭’인가 [강준만 칼럼]
수정 2024-12-30
권성동 국민의힘 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앞줄 오른쪽 둘째)와 의원들이 지난 24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국기에 경례하고 있다. 연합뉴스
강준만 | 전북대 명예교수
“철학이나 노선 투쟁이라도 했으면 모르겠는데 그야말로 패거리 지어 왕따 시키며 ‘너는 안 돼’, ‘너는 싫어’ 하는 식의 싸움은 조폭들도 안 하는 짓 아닌가.” 2023년 1월26일 전 국민의힘(국힘) 의원 이언주(현 민주당 의원)가 페이스북을 통해 전 국힘 의원 나경원의 당대표 불출마 선언과 관련해 한 말이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8일 뒤인 2월3일 국힘 상임고문 이재오는 시비에스(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 출연해 당시 유력 당권 주자인 안철수를 연일 공격하고 있던 친윤 정치인들을 향해 “안 후보에 대한 집단 린치가 거의 테러 수준”이라고 했다. 이어 그는 “이건 국회의원들이 아니다. 이건 완전히 조폭들이다. 조폭 중에서 조폭 똘마니들이나 하는 짓”이라며 “이들이 똘마니면 대장은 대통령실”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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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때리기’에 윤석열까지 가세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2월4일 안철수가 ‘윤-안 연대’라는 표현을 썼다는 이유로 대통령실로부터 “무례하고 어폐가 있다”는 ‘엄중 경고’를 받았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윤석열도 ‘윤-안 연대’라는 표현에 대해 “도를 넘은 무례의 극치”라며 격노했다나. 윤석열과 국힘은 집단적으로 그 무엇엔가 홀려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이런 일련의 공격에 대해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오병상은 윤석열에게서 “절대복종을 요구하고, 불복에 진노하는 제왕적 권위의식이 엿보인다”고 했고, 동아일보 부국장 이승헌은 “군사정권 이후 정치권에서 이렇게 집단 린치가 집중적으로 자행된 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결국 3·8 국힘 전당대회에선 윤심의 선택을 받은 김기현이 당대표로 당선되었지만, 그 역시 나중에 윤석열의 ‘격노’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국힘은 늘 윤석열의 ‘격노’에 흔들리며 춤을 추는 정당이었다. 당시 국힘이 윤석열의 뜻에 절대복종하는 ‘조폭놀이’를 중단하고 이성을 회복했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12·3 비상계엄 선포와 같은 미친 짓이 나올 수 있었을까? 우문이다. 현재 국힘은 “보수는 배신자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배신자론으로 무장해 대통령 탄핵에 표를 던진 의원들에 대한 복수욕에 혈안이 돼 있으니 말이다.
좋은 쓴소리가 배신으로 몰리고 낯뜨거운 아첨이 사기 진작으로 여겨지는 집단은 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진짜 조폭조차 망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런 단순무식한 배신자론은 배격하건만, 국힘은 그걸 무슨 종교적 신조나 되는 것처럼 신봉하고 있으니 이 노릇을 어찌할 것인가. 국힘을 조폭에 비유하는 게 오히려 조폭에게 결례가 되는 건 아닌지 염려될 정도이다.
연세대 교수 최영준은 지난 16일치 한겨레 칼럼에서 국힘의 배신자론에 대해 “조폭집단이면 이해가 가지만, 자유민주주의와 공공성을 강조하는 보수정당의 핵심 담론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믿기지 않지만 그게 사실인 걸 어이하랴. 국힘에서 배신자론을 역설하는 대표 논객들이 하늘 우러러 한점 부끄럼조차 없다는 듯 당당하게 하는 말을 들어보라. 이들의 배신자론에 국가와 국민은 없다. 공적 가치도 없다. 미시적인 인간관계만 있을 뿐이다. 그것도 오직 위만 쳐다볼 뿐 아래와 옆을 위한 의리를 강조하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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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이들에게 배신자론은 속된 말로 ‘남는 장사’다. 왜 그런가? 배신자론은 정치를 ‘사익 추구 비즈니스’로 악용하는 사람들에게 그럴듯한 포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나는 의리를 목숨처럼 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는 포장이다. 정치인이 공사를 구분하지 않고 사적 의리를 앞세우는 건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살벌한 당파싸움이 벌어지는 승자독식 체제에선 좀 다른 양상이 전개된다.
지금은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상황이 아니다. 그래서 일부 시민들에겐 국가·국민·공적가치를 배신하는 것에 대한 분노보다는 잔인한 정치 보복 가능성에 대한 공포가 더 큰 의미를 갖는다. 공적 문제를 사적 문제로 ‘바꿔치기’하는 배신자론은 바로 그런 상황에서 번성한다. 정도의 차이일 뿐 누구에게건 사적인 인간관계에서 배신으로 인한 쓰라린 상처의 경험은 있기 마련이다. 배신자론을 팔아먹는 사람들은 바로 그 점을 노린 것이며, 그 효능은 이미 경험으로 입증된 바 있다. 이제 우리는 걸핏하면 배신을 외쳐대는 정치인들의 상습적인 사기 행위를 응징하기 위해서라도 정치는 사적 관계에 휘둘려서는 안 될 공적 영역임을 분명히 하면서 그걸 지겨울 정도로 반복해 역설할 필요가 있다. 정당은 ‘정치적 조폭’이 아니며, 국회의원은 조폭 똘마니가 아니라는 걸 국회법 제24조(선서)에 추가하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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