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대진재와 좌충우돌 현지조사
1995년 벽두(1995.1.17.)에 발생한 한신대진재(阪神大震災)에 대한 현지조사는 연구자로서 는 다시 떠올리기도 싫은 패착의 연속이었다. 필자는 지금도 강의 시간에 조사를 이렇게 하면 안된다는 반면교사로 활용하고 있다. 고생은 실컷하고,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했으며, 학계의 평가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존 질서가 무너진 재 해 현장에서 일본 사회를 관찰했던 희귀한 경험은 소중한 자산으로 남아있다.
당시 필자는 지금의 서울대 국제대학원의 전신에 해당하는 서울대 지역종합연구소(지종
연)에서 브레인풀 제도의 적용을 받는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성공회대로 옮기기 직전이었다. 브레인풀은 지금의 연구교수 제도와 비슷한 것인데, 다만 특정 프로젝트가 아니라 조직에 소 속되는 점이 달랐다. 이사 준비를 서두르던 1995년 2월 중순에 갑자기 권태환 소장으로부터 서울대 사회학과 김경동 교수를 도우라는 지시를 받았다. 김 교수의 이야기는 한국언론연구 원에서 예산 지원을 약속받았으니 지진이 엄습한 고베(神戸) 지역 조사를 할 수 있도록 프로 포절을 만들고 팀도 꾸리라는 것이었다.
글자 그대로 벼락치기로 진행되는 일이었으나 다행히 도쿄대에서 유학을 마치고 갓 귀국 한 이원덕 박사가 지종연에 있었으므로 프로포절을 빨리 마무리할 수 있었다. 예산 지원하는 곳이 언론계이므로 팀 구성에 얼굴도 모르는 언론학 전공자를 배려해야 했고, 교육학 교수도 참여했다. 더구나 개강 직전이라 일본에 정통한 연구자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다행히 한 국정신문화연구원의 인류학 전공 문옥표 교수와 정치학 전공인 중앙대 김호섭 교수가 참가 할 수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여러 대학에서 일본 근현대사를 강의하는 천황제 전공의 박 환무 선생도 동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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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지역 전공자들이 모였지만 현지 상황을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글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서울대 사회복지학과를 나오고 재일동포 여성과 결혼해 뒤늦게 오사카시립대학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밟는 양관수 선배, 재일동포 본국 유학생 출신으로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오사카에서 사업을 하는 하동길 선배에게 출발 직전에 국제전 화를 걸어 무조건 도움을 요청했다. 고베대 사회학과에는 인사를 나눈 적이 있는 태국연구가 전공인 기타하라 아츠시(北原淳)교수가 있어 일단 전화로 도움을 요청했다.
급하게 일을 처리하다 보니 항공권과 숙소도 각자가 알아서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필자 는 가와사키 조사의 책임자였던 문옥표 교수와 같이 2월 19일에 현지로 출국했다. 일본 전국 에서 피해 수습을 지원하러 온 공무원과 각종 인력들이 오사카의 호텔을 차지하고 있어 숙소 구하는 것이 큰일이었다. 더구나 고베의 부유층들은 오사카에서 호텔에 장기 투숙을 하고 있 었다. 다행히 문 교수의 후배로 간사이 지방에 있는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오 모 선 생이 적극적으로 움직여 오사카에 호텔을 간신히 예약할 수 있었다.
조사 첫날은 우선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문 교수가 아는 근방의 모 대학에 재직 하는 영국인 인류학 교수를 아침에 만나 얘기를 들었다. 영국인 교수는 유머를 섞어가며 침착 하게 심각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어쨌든 현지 조사의 기본인 현장 확인을 해야 하므로 둘이 서 전철을 타고 접근할 수 있는 곳까지 가보기로 했다. 물론 전철도 시간표는 의미가 없을 정 도로 불규칙하게 운행했다. 고베에 접근할수록 지붕을 청색 비닐로 덮고 있는 집이 늘어났다. 진동으로 기와가 날아간 것이었다.
전기, 전화, 수도의 3대 라이프라인이 단절된 고베 시내를 걸어 다녀 보니 바람이 불 때마 다 무너진 건물에서 나오는 먼지가 휘날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행인들을 보니 몸 전체를 감싸는 등산용 파카 같은 옷을 입고 있는 “신사이루크”(震災ルック) 차림이 많았다. 길거리 에서 휴대폰을 수북하게 쌓아 놓고 파는 모습도 보였다. 유선 전화망이 단절되었으니 휴대폰 이 진가를 발휘한 것은 당연했다. 핵전쟁이 벌어져도 작동하도록 네트워크형 통신망 구조를 가진 인터넷은 대지진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아 기능을 발휘했다. 그러나 생수나 음료수를 파 는 가게도 없고 식당도 찾을 수 없는 상황이 진짜 문제라는 사실을 조사자가 깨닫는 데는 시 간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무작정 배회하다 간신히 영업하는 카페를 발견해 쉬면서 둘러보니 대낮인데도 술에 취한 사람들이 보였다. 옆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그는 세입자인데 집이 무너져 주인에게 맡긴 시키킨(敷金), 즉 보증금을 돌려받을 가능성도 없고, 주인들은 복 구 지원금이라도 받을 수 있지만 세입자는 아무것도 없다고 답답함을 호소했다. 즉, 같은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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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자인데도 주인과 세입자라는 지위의 격차에 따라 실질적인 피해가 달라지고 있었다. 피난 소로 사용되는 어느 학교에 들러보니 건물은 사용할 수 없었지만 운동장이 텐트촌이 되어 있 었다. 둘러보니 게시판에 생활 규칙과 진료 일정이 공지되어 있었다. 요일에 따라 진료 과목 이 달랐으며 심리상담 등을 제공하는 정신과 진료도 있었다. 한국에는 트라우마에 대한 인식 이 없던 시절이라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원에 설치된 천막촌 입구에는 붉은색 자치회 깃발이 세워져 있었고, 간부로 보이는 완장을 착용한 사람들도 있었다. 전반적으로 피난소의 분위기는 평온했고 질서가 유지되고 있었다.
전철이 제대로 다니지 않으니 고베를 벗어나는 것도 문제였다. 양관수 선배와 오사카 어느 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1시간 이상 늦었다. 그런데도 기다리고 있던 양 선배와 김○○으 로 기억되는 재일동포 민족학급 운동 활동가는 “고베에 간 사람하고 약속하면 이 정도는 보 통이라고” 웃어 넘겼다. 민족학급은 재일동포 집단거주 지역에 있는 소학교에 설치된 한국어 학습 프로그램을 말한다. 식사를 하면서 지진 발생 이후에 발생한 일에 대한 이야기를 집중적 으로 들었다. 이 자리에서 재일동포들이 가내 수공업 형태로 경영하는 플라스틱 슈즈를 만드 는 신발공장이 밀집한 고베시 나가타구(長田区) 지역의 화재 진압이 늦어진 배경에 대한 의 혹이 퍼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가연성 자재와 제품이 쌓여 있는 신발 공장이 화 재에 취약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시 당국이 골치 아픈 조선인들을 몰아낼 기회라고 여겼기 때문에 소방차를 신속하게 배치하지 않고 화재를 방치했다는 괴담 자체가 평상시에 재일동 포들이 느끼는 피해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현지의 연구자나 관공서에 협조를 요청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낮에는 재해 지역을 무작정 돌아다니고 저녁에는 아는 사람을 수소문해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는 정보 수집에 한 계가 있었지만 특별히 정리된 자료를 만드는 곳도 아직 없었다. 따라서 신문, 잡지를 수집하 고 자기 전에 호텔 방에서 TV를 열심히 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 한신대진재가 발생한 직후 에 다른 일로 도쿄에 들렀다가 만난 매일경제 특파원 김석원 기자와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그도 현지에서 식사 제공을 비롯해 이재민 구호 활동을 가장 제대로 하는 조직은 평소에 가두 에서 아무도 듣지 않는 정치 연설이나 하던 우익들이라는 현장을 목격했다. 야쿠자와 경계선 이 분명하지 않지만 자금, 조직력, 행동력, 국민을 위한다는 이데올로기를 갖춘 우익 단체들 이 행정력이 마비된 지역에서 존재의 의의를 과시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어떠한 매체도 공 개적으로 보도하기에는 불편한 내용이었다.
현지 언론은 물론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규칙과 관행에 집착하는 관료들의 무능을 성토하 고 있었다. 예를 들면 “피난소에 대피한 사람의 숫자보다 빵의 개수가 더 많았는데, 잘못 나누 면 민원이 발생한다는 이유로 배급을 거부했다”, “어느 유럽 국가에서 파견한 구조대가 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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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온 구조견을 동물 검역을 마쳐야 한다는 이유로 통과시키지 않았다”, “미군이 이재민 숙소 로 쓰라고 수송선을 보냈지만 텐트에서 자는 사람과 형평성이 맞지 않는다고 거절했다”, “전 국에서 소방차가 왔지만 무선 주파수가 맞지 않아 제대로 지휘를 할 수 없었다”는 등의 이야 기였다. 수상에게 상황이 제대로 보고되지 않아 자위대가 정찰기를 띄워 겨우 사태의 심각성 을 파악했다는 것이 관료 무능 시리즈의 정점이었다. 바다를 매립해 신도시를 만드는 방법으 로 돈을 벌어 칭찬받던 고베의 시정 경영도 마각이 드러났다. 인공적으로 형질을 변경한 지역 이 지진에 가장 취약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매립지에 만든 항만 하역 시설은 지하수가 올라 오는 액상화 현상으로 지반이 약해져 치명상을 입었다.
반면에 사원을 철저하게 보호한 대기업은 칭찬의 대상이었다. 어느 대기업은 위성통신 장 비를 헬기로 공수해 사내 통신망을 확보하는 모범을 보였다. 가장 칭송의 대상이 된 기업은 미국계 편의점인 로손이었다. 로손은 재난 대비 매뉴얼을 갖추고 평소에 훈련을 하고 있었으 며 지진이 발생하자 오토바이로 상품을 점포에 공급해 영업을 신속하게 재개할 수 있었다. 지 역 공동체 조직의 가치도 재평가되었다. 조나이카이(町内会), 지치카이(自治会)와 같은 지역 공동체 조직의 연대가 비교적 잘 유지되는 지역은 사망자 발생률이 낮았다. 이웃의 사정을 동 네 사람들이 알고 있으므로 보이지 않는 사람을 파악하고 구조하는 작업이 신속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또한 일본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복구를 돕겠다는 볼런티어들이 고베 지역으 로 모여드는 새로운 사회현상이 일어났다.
그러나 최대의 명분과 실리를 챙긴 조직은 자위대였다. 잔해를 치우고 도로를 뚫는 일부터 제대로 작동하는 조직인 자위대가 할 수밖에 없었다. 국회에서 자위대 출동이 늦었다는 질책 을 받은 자위대 측은 태연하게 “총리의 명령이 없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체계이므로 대응이 늦었다. 앞으로는 현지 부대장의 판단으로 출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요지의 의미심장한 답 변을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한신대진재는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옴진리교의 도쿄 지하철 독 가스 테러 사건(1995.3.20.)과 함께 자위대의 행동 반경이 넓어지는 계기로 작용했다.
좌충우돌하는 현지 조사의 하이라이트는 3, 4일 지났을 때 문옥표 교수가 시가에서 부고를 받고 급거 귀국한 일이었다. 혼자 남아서 조사도 하고 후속으로 도착하는 다른 연구자들도 챙 겨야 했다. 김경동 교수와 같이 고베대 사회학과를 방문했지만 학과 사무실 앞에 잔해가 남아 있는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일본 교수들도 본격적인 조사를 해야겠다는 구상을 하고 있는 단 계여서 김 교수가 구상하는 국제 공동 연구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진행될 수 없었다. 고 베대학 밑에 있는 고베학생청년센터를 찾아가 보니 유학생과 이주민을 지원하는 시민단체였 는데, 숙소를 잃은 유학생들도 재워주고 외국인을 혐오하는 유언비어의 발생을 방지하는 활 동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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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결과를 논문으로 정리하려면 1년은 걸리는 것이 정상이고 아무리 서둘러도 6개월은 필요하다. 그러나 연구비를 제공한 측이 요구하는 행정적 기한 때문에 여름방학도 되기 전인 1995년 5월 무렵에 어설픈 내용으로 발표회를 열어야 했다. 필자는 계층에 따라 피해가 차별 화된다는 요지의 보고를 했다가 선배 교수들에게서 “재미는 있지만 논문이 아니다. 고급 저 널리스트의 르포에 불과하다. 아무래도 직업을 잘못 선택한 것 같다”는 평을 들었다. 지역연 구를 하는 소장파들은 “일주일 동안 그 정도 파악했으면 된 것이지,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얘 기냐”고 위로했다. 이는 정보 수집과 이론적 정합성 확보의 우선순위에 관한 문제였으며 지 역연구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이기도 하다. 시간이 한참 지난 다음에 필자도 울리히 벡(Ulrich Beck, 1944-2015)의 『위험사회(Risk Society)』를 미리 읽었으면 보다 조직적이고 생산적인 연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조사가 마무리된 직후에 삼풍백화점 붕괴(1995.6.29.)라는 비극적 사건이 발생해 국내 학계에서도 재난에 대한 관심이 높 아지기 시작했다. 연구진이 대중매체의 요청으로 재난에 대해 발언하는 일도 늘어났다. 1995년 7월에 한국언론연구원은 보고 서 “일본의 위기대응 체제와 행위에 관한 연구: 한신(阪神) 대진 재 사례를 중심으로”를 펴냈다. 연구 결과는 최종적으로 서울대 출판부에서 1997년에 『일본사회의 재해관리: 고베지진의 사례 연구』로 간행되었다. 그러나 체계적인 후속 연구가 빈약한 것도 사실이므로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초빙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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