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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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2월 대선(구로구청 투쟁 포함)이 노태우의 승리로 확인되자, 나는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비탄에 빠졌다.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수구냉전세력이 기승을 부려 툭하면 잡혀가고, 도망 다니고, 쫓겨나는 세월이 끝없이 계속될 것 같았다.
대한민국도 내 인생도 가망이 없어 보였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 취임식 날(2월25일) 위장취업(사문서위조) 혐의로 2번째 구속되어 초여름까지 구금되어 있었는데, 만 24세 시퍼런 청춘이었지만 암울한 생각에 눌려 지내다 보니 갖가지 병마가 밀물처럼 몰려왔다. 남의 주민증과 주민등본으로 공장에 위장취업해 있던--하지만 현장에 깊이 뿌리 내리지 못한-- 혁명가(?) 시절에는, 88올림픽이 끝나면 대대적인 반동(공안통치)이 휘몰아 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당시 광장과 거리의 정치투쟁만 알던 운동권의 대부분은 이 따위로 정세를 전망하면서, 또 다시 지하 활동을 준비했다.
그런데 현장(특히 노동운동)에 붙어있는 운동권들은 달랐다. 노동자•민중이 수십년의 체념과 좌절에서 깨어나는 것을 똑똑히 봤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결투쟁으로 자신의 권리•이익을 스스로 쟁취하려는 거대한 용틀임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하며 미래를 낙관했다.
대롱으로 하늘을 보는 수준의 만 24세 혁명가(?)의 눈은 바닥(현장)의 변화만 못 본게 아니다. 당시 민주화 추세는 전지구적인 것이었다. 2차대전(독립투쟁 포함) 전후하여 과잉 팽창된 군부•군인 지도자의 권위, 이념, 문화가 퇴락하기 시작한 1970년대 중반, 스페인(프랑코 총통 사망)에서 시작하여 필리핀 한국 대만 미얀마 남미, 그리고 동구와 중국 등으로 퍼져나간 지구적 사조였다. 공명선거를 절대 거스를 수 없고, 개방경제를 취하던 한국은 민주화는 더더욱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 박정희가 1979년에 시해 당하지 않았어도, 늦어도 1980년대 말까지는 대만이나 칠레처럼 민주화가 되지 않았을까 한다.
내 청춘 시절의 어이없는 무지와 오판을 얘기하는 것은
12.3 계임이후 3개월간 일어난 엄청난 변화의 방향과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서다.
지난 3개월은 수십년 만에 한번 있을까말까한 대폭로, 대경악, 대각성이 일어났다.
보수우파 정당에 미래가 없어 보이고(정권교체가 확실해 보이고),
지지율 20%대의 윤통이 도대체 이해가 안가는 비상계엄을 때리고,
(배신 소리 안들으면서 명분있게 윤통과 차별화할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던) 한동훈이 앞장서서 내란으로 규정하자,
공수처, 경찰, 검찰, 서부지원, 헌재, 주요 언론등이 법과 상식을 내팽개치고,
윤통의 목을 따려는 공치사 경쟁에 나섰다.
미래권력에 잘 보이기 위해 앞다투어 빤스를 벗고 설친 격이다.
윤통이 내지른 12.3 계엄은, 아직도 최선의 시나리오가 뭔지 모르겠는데,
어슬펐기 때문에, 사법기관들과 거대 야당의 흉측한 민낯을 스스로 드러나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썩어문들어진 1987체제와
백척간두에 서있는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이 결과가 바로 대각성, 대반전이다.
계엄령이 의심할 여지가 없는 국민 계몽령이 된 것이다.
그 결과 1919년 3.1운동과 1987년 6월항쟁 급의 대각성, 대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사실 3.1운동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순진한 기대와 환호가 동력이었다. 뿐만 아니라 세계 최악의 군주 고종에 대한 조선 백성의 애도 열기에도 편승하는 꼼수도 부렸다. 3.1운동 기획 조직자들이 생각한 최선의 시나리오가 뭔지 지금도 궁금하다. 분명한 것은 일제의 탄압으로 수천명이 사망하고 수만명이 투옥 혹은 부상 당할 줄은 생각 못했을 것이다.
3.1운동의 무모함과 순진함은 당시 조선 최고의 선각자 윤치호의 비판이 말해준다.
그런데 3.1운동의 결과는 어땠나? 한마디로 민족적 대각성을 이루었다. 우리도 할 수 있다,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자주독립을 위해 뭐라도 해야 한다면서, 그 이후 수천수만 갈래 독립운동의 책원지가 되었다.
12.3 계엄도 3.1운동처럼 윤통의 순진한 기대, 착각, 실수, 고집 등이 다 섞여 있을 것이다.
물론 주성분은 충정과 위기의식일 것이다.
12.3 이후 사법기관, 주류 언론, 여당, 야당, 자칭 보수원로들의 윤통과 보수우파 주류에 대한 온갖 무도한 탄압, 모독, 폄하가 가해졌다. 마치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가혹한 탄압처럼!! 그래서 결과가 비슷한 것이다.
1919년 3.1운동은 민족적 대각성을 통해 자주독립의 희망과 의지를 불어넣었다. 6월항쟁은 시민의 힘(피플파워)을 확인시키고, 노동자•민중의 권리와 이익을 위한 대약진을 초래했다. 그런데 멈춰야 할 때에 멈출 줄 모르면서 국가의 지속가능한 생존과 번영을 위태롭게 만들어버렸지만......
12.3 계엄은
1987체제의 모순이 극에 달한 상태에서 이를 거칠게 제동을 걸려다가,
되치기 당하여 암약하던 모든 비양심 몰염치 시대착오들이 총 출연하도록 만들어,
결과적으로 자유, 보수, 우파의 대각성을 초래하였다.
이는 중도로 진보좌파로 퍼져나가기 마련이다.
1987•88년 이후 2024년 12월3일까지는 한마디로 민주진보 기치를 든 세력의 이념적 문화적 헤게모니가 관철되던 시대였다. 이들이 더 개혁적으로 보이고, 더 도덕적으로 보이고, 더 따뜻해 보이고, 더 멋있어 보이고, 더 젊어 보이던 시대 였다.
따라서 보수의 개혁 내지 혁신은 진보좌파가 집중 공격하는 허물이나 사람을 손절하는 것이었다. 사실을 말했어도, 저들이 길길히 뛰면 5.18 망언자(?), 세월호 망언자(?), 노인비하 발언자(김대호)로 규정하고 징계하고, 출당하고, 제명했다.
김영삼을 민자당 후보로 만들고, 김종인과 이준석을 박근혜 옆에 세운 것도, 진보좌파 헤게모니 시대의 보수우파의 힘겨운 생존전략의 소산이다.
따지고 보면 사실 박근혜 탄핵=손절도 그 연장이다.
국힘의 본관 회의실에 단지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사진만 걸려있는 것도 진보좌파 헤게모니 시대의 증거이다.
이 시대는 진보의 철학, 가치, 정책, 문화를 받아서 적당히 코팅하는 것 혹은 순한 맛 진보가 보수 혁신이고 개혁이었다. 이는 지금 한동훈 패거리, 김재섭, 김상욱, 유승민과 5.18 묘지 퍼포먼스 등을 한 이준석 등이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2.3 계엄은 이런 한 시대를 바꾸었다. 그래서 3.1운동과 같은 수십년은 갈 거대한 변화의 동력을 만들어 냈다.
이제는 전세계적으로 보수우파가 장사가 잘 되니, 다시말해 이념적, 문화적 헤게모니가 바뀌니 이재명도 보수로 코팅을 하려고 한다. 그게 최근의 중도보수 타령이다. 기본소득 접고, 미국 일본에 추파를 던진다. 물론 인생이 거짓말로 점철되어 있어서 설득력은 없겠지만!!
3.1운동을 기획조직한 33인처럼, 윤통도 치밀하게 기획하지도 의도하지도 않았겠지만 엄청난 변화를 만들어냈다. 아마 윤통의 모든 허물을 몇십 곱절은 갚고도 남을 불멸의 업적이 아닐까 한다.
가장 중요한 변화 내지 성과를 많은 식자들이 간과하는 것 같아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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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eho Lee
이번 기회를 통해 고정된 사고의 40-50과 화석화된 운동권들의 민낯을 보았습니다.
20년전 태극기 부대 노인네들을 비판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딱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0년전 눈으로 세상을 보니 제대로 보일리가요.
머리가 말랑말랑한 20-30은 대각성해서 계몽령이라고 말합니다. 뇌가 굳어버린 40-50은 죽었다깨도 이걸 이해를 못합니다.
6d
이보열
이재호 그들은 그들의 의식이
화석화되어 지금도 풍화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인정하지도 않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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