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36
<민족> X 65
<한국> X 135
[윤상철 칼럼] 역사적 트라우마, 왜곡된 소용돌이
2024-12-23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일반 국민, 비상계엄 정치적 혐오
87년 헌법, 제왕적 대통령제 약화
적극적인 정의보다 소극적 방식
대통령·거대야당, 이중권력 구도
합리적인 국민들이 해답 찾을 것
선진국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령과 그에 이은 의회의 탄핵이 낳은 소용돌이에 온 사회가 휩쓸리고 있다. 대통령은 다른 모든 영역을 정상적으로 작동시키면서 합법적인 틀 안에서 이른바 원포인트 비상계엄으로 한국사회를 정상화하려 했다는 뜻을 밝혔던 반면, 야당 등 반대세력은 대통령의 내란을 징치하고 탄핵과 더불어 조기 대선으로 정치체제를 정상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다소 복잡하다. 첫째 이 소용돌이의 근원에는 대통령의 행정권력과 야당 주도의 의회권력 간의 권력경쟁이 자리한다. 둘째 세력구성, 정책 비전, 지지동원 등에서 극단적으로 다른 양대 정치세력이 충돌하고 있다. 셋째 표방하는 정치체제는 불명확하지만 자유민주주의체제와 그 바깥의 체제 간의 충돌이기도 하다. 넷째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적 지정학 때문에 불명확하게 드러내지만 북한을 포함한 국가간 동맹체제의 이질적 구상이 서로 충돌하고 있다. 그럼에도 현실정치는 이러한 복합적인 권력경쟁의 합리적 조정과 실현가능한 대안을 모색하기보다 역사적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감성적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있다. 따라서 설사 봉합된다 하더라도 이러한 양상은 주기적으로 반복될 것이다.
일반 국민들은 비상계엄에 대한 정치적 혐오·거부와 그에 따른 탄핵의 정당성을 지지한다. 우리나라에서 마지막 계엄령은 1979~1980년 사이의 대통령 사망, 12·12쿠데타, 1980년 서울의 봄, 5·18광주민주화운동 등으로 이어지는 군부권위주의 체제의 붕괴와 복원의 와중에서 진행되었다. 그 역사적 경험은 계엄령의 이미지를 군부지배세력의 폭력과 민주화 요구의 압살, 그리고 지배와 기득권의 동요와 재구축, 그리고 피지배 소외세력의 배제 이미지로 채색되었다. 나름 설득력 있는 대통령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기성 세대의 독재 트라우마와 신세대의 자유박탈 공포심에 의해 전면적인 거부감을 낳고 있다. 즉, 1980년 이후 40년 넘게 진전된 한국의 자유화와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여전히 권위주의 정권과 군부의 폭력동원을 기억해낸다. 과거의 계엄령이 전혀 먹힐 수 없는 현재의 상황에서 대통령의 주취가 낳은 실수라든가, 민주화된 군부 내의 명령불복종 및 저항으로 해석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미 오래전에 97%의 국민이 가지고 있는 휴대전화, 레거시 미디어를 넘어서는 유튜브와 SNS, 2천550만대의 자동차를 보유한 나라에서 전격적인 군사전략이 필요한 과거와 같은 군사쿠데타나 비상계엄령이 더 이상 통용되기 어렵다는 사실은 간과되고 있다.
제도로서의 1987년 헌법 역시 구권위주의체제에 대한 트라우마를 담고 있다. 민주주의는 인권과 자유, 법치주의, 삼권분립 등에 대한 적극적인 정의로 구성되었다기보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약화시키는 소극적인 방식으로 구성되었다고 보인다. 이 헌정체제는 대통령과 다수여당체제 하에서는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여소야대의 구도 하에서는 분쟁적이기 마련이었다. 나아가 대통령과 지배적 거대야당이 충돌하면 어떤 조정도 불가능하면서 일종의 이중권력이 만들어지곤 했다. 3당 합당과 같은 해결책도 거대 양당의 진영간 대립 상황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대통령 권력과 거대야당 권력이 상호 관용하지 못하고 제도적 권력을 자제하지 않는 경우에는 충돌과 국가 마비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최근에는 의회의 온갖 탄핵과 무한 입법에 대응하여 대통령은 국회해산권 없이 의회를 견제해야 했다.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군부권위주의의 원인을 찾았던 민주화 헌법은 대통령에게 ‘재의요구권’이라는 소극적 권한과 ‘비상계엄권’이라는 적극적 권한을 합법적 권한으로 부여했지만 의회를 견제하기에는 미흡하거나 무용하였다. 실제로 현재의 헌법은 45년 동안 벌써 3차례의 탄핵을 거치면서 의회와 대통령이 충돌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현행 헌법의 한계는 단임제나 대통령제가 아닐 수 있다. 즉, 4년 중임제나 의원내각제 등의 개헌이 답이 아닐 수 있다. 선한 국민이 만들어내는 민주주의라도 일방의 독주를 견제하는 권력분립의 실질적 내실화가 그 해답일 수 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국민들이 대증적 미봉책이 아닌 그 해답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윤상철 칼럼] 역사의 정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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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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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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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8윤상철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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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X 65
<한국> X 135
<대한민국> 27
포퓰리즘 47
포퓰리즘 47
시대정신
좌파 28, 북한 20
사회주의 22 자본주의 32
과학 29, 이성 13, 정의 64
동맹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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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철 칼럼] 역사적 트라우마, 왜곡된 소용돌이
2024-12-23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일반 국민, 비상계엄 정치적 혐오
87년 헌법, 제왕적 대통령제 약화
적극적인 정의보다 소극적 방식
대통령·거대야당, 이중권력 구도
합리적인 국민들이 해답 찾을 것
선진국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령과 그에 이은 의회의 탄핵이 낳은 소용돌이에 온 사회가 휩쓸리고 있다. 대통령은 다른 모든 영역을 정상적으로 작동시키면서 합법적인 틀 안에서 이른바 원포인트 비상계엄으로 한국사회를 정상화하려 했다는 뜻을 밝혔던 반면, 야당 등 반대세력은 대통령의 내란을 징치하고 탄핵과 더불어 조기 대선으로 정치체제를 정상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다소 복잡하다. 첫째 이 소용돌이의 근원에는 대통령의 행정권력과 야당 주도의 의회권력 간의 권력경쟁이 자리한다. 둘째 세력구성, 정책 비전, 지지동원 등에서 극단적으로 다른 양대 정치세력이 충돌하고 있다. 셋째 표방하는 정치체제는 불명확하지만 자유민주주의체제와 그 바깥의 체제 간의 충돌이기도 하다. 넷째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적 지정학 때문에 불명확하게 드러내지만 북한을 포함한 국가간 동맹체제의 이질적 구상이 서로 충돌하고 있다. 그럼에도 현실정치는 이러한 복합적인 권력경쟁의 합리적 조정과 실현가능한 대안을 모색하기보다 역사적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감성적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있다. 따라서 설사 봉합된다 하더라도 이러한 양상은 주기적으로 반복될 것이다.
일반 국민들은 비상계엄에 대한 정치적 혐오·거부와 그에 따른 탄핵의 정당성을 지지한다. 우리나라에서 마지막 계엄령은 1979~1980년 사이의 대통령 사망, 12·12쿠데타, 1980년 서울의 봄, 5·18광주민주화운동 등으로 이어지는 군부권위주의 체제의 붕괴와 복원의 와중에서 진행되었다. 그 역사적 경험은 계엄령의 이미지를 군부지배세력의 폭력과 민주화 요구의 압살, 그리고 지배와 기득권의 동요와 재구축, 그리고 피지배 소외세력의 배제 이미지로 채색되었다. 나름 설득력 있는 대통령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기성 세대의 독재 트라우마와 신세대의 자유박탈 공포심에 의해 전면적인 거부감을 낳고 있다. 즉, 1980년 이후 40년 넘게 진전된 한국의 자유화와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여전히 권위주의 정권과 군부의 폭력동원을 기억해낸다. 과거의 계엄령이 전혀 먹힐 수 없는 현재의 상황에서 대통령의 주취가 낳은 실수라든가, 민주화된 군부 내의 명령불복종 및 저항으로 해석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미 오래전에 97%의 국민이 가지고 있는 휴대전화, 레거시 미디어를 넘어서는 유튜브와 SNS, 2천550만대의 자동차를 보유한 나라에서 전격적인 군사전략이 필요한 과거와 같은 군사쿠데타나 비상계엄령이 더 이상 통용되기 어렵다는 사실은 간과되고 있다.
제도로서의 1987년 헌법 역시 구권위주의체제에 대한 트라우마를 담고 있다. 민주주의는 인권과 자유, 법치주의, 삼권분립 등에 대한 적극적인 정의로 구성되었다기보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약화시키는 소극적인 방식으로 구성되었다고 보인다. 이 헌정체제는 대통령과 다수여당체제 하에서는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여소야대의 구도 하에서는 분쟁적이기 마련이었다. 나아가 대통령과 지배적 거대야당이 충돌하면 어떤 조정도 불가능하면서 일종의 이중권력이 만들어지곤 했다. 3당 합당과 같은 해결책도 거대 양당의 진영간 대립 상황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대통령 권력과 거대야당 권력이 상호 관용하지 못하고 제도적 권력을 자제하지 않는 경우에는 충돌과 국가 마비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최근에는 의회의 온갖 탄핵과 무한 입법에 대응하여 대통령은 국회해산권 없이 의회를 견제해야 했다.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군부권위주의의 원인을 찾았던 민주화 헌법은 대통령에게 ‘재의요구권’이라는 소극적 권한과 ‘비상계엄권’이라는 적극적 권한을 합법적 권한으로 부여했지만 의회를 견제하기에는 미흡하거나 무용하였다. 실제로 현재의 헌법은 45년 동안 벌써 3차례의 탄핵을 거치면서 의회와 대통령이 충돌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현행 헌법의 한계는 단임제나 대통령제가 아닐 수 있다. 즉, 4년 중임제나 의원내각제 등의 개헌이 답이 아닐 수 있다. 선한 국민이 만들어내는 민주주의라도 일방의 독주를 견제하는 권력분립의 실질적 내실화가 그 해답일 수 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국민들이 대증적 미봉책이 아닌 그 해답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윤상철 칼럼] 역사의 정치화
[윤상철 칼럼] 역사의 정치화
입력 2024-10-28
역사는 늘 민족주의적 신화로 덧칠
고종 '개혁군주'·'매국노' 상반 평가
'日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 대학교수
이러한 역사적 쟁점 우리 주변 산적
재해석, 수용·합의로 공동체 통합을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정치적 사안들이 사법영역에서 판가름되는 이른바 '정치의 사법화'가 논란이다. 그러나 정치계급 내부의 담합이나 법치주의의 파괴에 비하면 지연된 사법화가 더 문제로 인식되곤 한다. 이에 비해 '역사의 정치화'는 그 과정이나 결과에 있어서 사회적 부가가치를 낳는다고 보기 어렵다.
역사는 늘 국가주의적 혹은 민족주의적 신화로 덧칠되기 마련이다. 역사적 사실이 과장, 축소, 은폐되기도 하고, 왜곡된 '이름 짓기'가 행해진다. 물론 역사의 신화화는 민족적, 국가적 자긍심과 가능성을 높이는 시도이다. 그러나 역사적 변형이 현재의 정치적 관점을 정당화하거나 현재의 정파적 정당성을 높이기 위한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즉 정치화의 결과물이라면 지극히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대한제국의 고종은 '비운의 개혁군주'와 '매국노'라는 상반된 평가가 공존한다. 이러한 평가들은 조선의 가혹한 수탈체제를 거론하지 않고, 해방 후 왕정복고는 거론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일본총독부에 의해 실시된 토지조사사업은 일본인들의 토지 수탈을 위한 제도적 기반이었다는 근거 박약한 평가도 있다. 조선의 쌀 수출에 대해서도 자본주의적 무역거래였다는 주장과 일방적 수탈이었다는 주장이 공존한다. 우리 독립군의 일본군에 대한 압도적 승전으로 알려진 청산리전투와 봉오동 전투도 객관적으로 검증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더 원천적으로 일본식민지시기를 기존의 일제시대나 왜정시대가 아닌 이른바 '일제 강점기'로 부르는 의미는 무엇일까? 일본에 의한 병탄 이전에 갑신정변과 갑오경장을 거치면서 근대적 개혁엘리트세력이 왕조권력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고, 임오군란 이후 군대해산을 거치면서 국가의 군사력이 해체되어버리고, 백성들은 왕조권력에 등을 돌린 상황에서 정작 한일합방 당시에는 일제의 무단체제에 저항할 아무런 잠재력도 없었던 점을 은폐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군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이라는 내용의 강의를 한 대학교수가 사법적 판단무대에 올랐다. 정확히 말하면, '자발적 매춘'과 '강제동원된 성노예' 사이에서 무엇이 역사적 사실인지를 둘러싼 재판이었지만, 사법부는 강의중 내용이 위안부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점에 대해서 무죄로 판결하는 최소한의 개입에 머물렀다. 이 교수는 역사적 진실이 사회적 통념에 반한다는 이유로 형사기소되는 현실을 개탄했고, 고소인인 사회단체는 '반인권적, 반역사적 판결'이라고 유감을 표했다.
결과적으로 법정은 어느 쪽이 역사적 진실인지를 밝히지 못하고 회피함으로써 역사적 진실은 정치적으로 비화하기 쉬운 또다른 논란거리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쟁점들은 주변에 산적해 있다. 지난 1960~70년대에 제주 4·3사건은 단정반대를 위한 남로당의 폭동이었지만, 민주화 이후 국가권력에 의한 양민학살로 새롭게 정의되었다가
최근에는 현 정부의 장관에 의해 '남로당의 정치폭동으로 시작되었으나 국가권력에 의한 양민학살로 귀결된 사건'으로 재정의되었다. 4·3을 포괄하는 복합적 진실은 정치진영에 따라 어느 한쪽으로 재정의되고 있는 사태를 막지는 못하고 있다.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 세계의 모든 사회운동이나 1980년대 한국의 사회운동 역시 순수 민주화운동만은 존재하지 않고, 다양한 수준과 방향의 사회운동이 서로 결합하는 게 더 일반적이다. 민주화운동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에 대해서 어느 수준에서 민주화운동의 방향에 합의했었는지를 밝히고 이를 벗어난 영역에 대해서는 경계를 설정해주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역사적 사실은 항상 재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국가공동체의 정치체제 안에서 국민적 합의를 통해 역사적 진실을 매개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열려진 진실규명과 정파를 넘어선 수용과 합의를 통해 공동체적 통합을 이뤄내야 한다. 복합적인 사실의 편린을 과장, 왜곡, 은폐함으로써 각 정치적 진영의 독선적 입장과 배타적 이익에 부합되는 파편화된 진실을 외칠 때에 대한민국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2024-10-28윤상철[윤상철 칼럼] 선한 한국인, 이기적인 한국인 지면기사
과학자 설명보다 '핵폐수' 설득돼
사실·과학 거부되고 맹목적 믿음
홉스, 인간 본성 이기적이라고 봐
믿음과 신념만으로는 양보·타협
다가갈 '선한 한국인' 될 수 없어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오래전부터 지역마다 맨발걷기용 황톳길이 만들어졌다. 이른바 '어싱'의 효과가 과학적으로 검증되었기 때문이기보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경사로 산책로마다 덮여진 친환경 야자매트나 폐타이어 계단, 저수지마다 설치된 둘레길 모두 유행처럼 번지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이러한 의사결정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우리 사회의 빠르고 강한 그러나 비과학적인 쏠림현상에 늘 놀랄 뿐이다.
지역사회의 작은 사안에서 보이는 심성과 관행은 국가적 의사결정에도 나타난다. 후쿠시마 오염처리수 문제는 정부나 과학자 그리고 IAEA 사무총장의 설명보다는 야당대표의 '핵폐수' 선동에 일시적으로 더 설득되었다. 그 결과 방사능 조사에 많은 예산이 투입되었지만 일본산 수산물의 수입은 오히려 증가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우리 사회는 탈원전과 신재생에너지 확대로 경도되었다. 그 결과는 한전의 적자와 전기요금 인상, 산과 바다의 황폐화, 원전산업의 쇠망 등을 낳았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정부는 결정하고 국민은 동원된다.
이른바 환경정치에는 그 문제의 제기와 해결의 근간이 되어야 할 과학이 사라진지 오래다. 이번 원전처리수 논란에 그나마 과거에 비해 과학적 관점과 토론이 중시되었지만, 향후에도 논란은 다시 출현할 수 있다. 천안함 피격사건, 세월호 침몰사고, 이태원 압사사고 등 우리의 국가를 송두리째 흔들었던 사건이 발생했을 때마다 비과학적 추론과 종교적 맹신으로 인해 늘 더 큰 국가의 위기를 초래하곤 했다. 그 모든 사건들에 사실과 과학은 오히려 거부되고 맹목적인 믿음과 극단적인 신념만이 자리잡으면서 우리의 국가공동체를 붕괴시키곤 하였다.
모든 국가적 의사결정은 어느 일방향으로 결정되기가 어렵다.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인식되는 그 무언가는 오히려 절제되어야 한다. 한때는 빈곤한 국가가 과대한 부양인구로 고통받았지만, 그 인구가 국가성장의 토대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과학적인 공동체였다면, 다자녀 출산을 경멸하고 죄악시하는 사태에 이르기까지 산아제한정책을 밀고 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페미니즘을 성평등주의로 인식하고 적절한 수준에서 그 수준과 강도의 심화에 제동을 걸었다면,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스트가 혐오와 경멸의 대상이 되고, 많은 남성들이 과도한 피해의식을 갖게 되는 사회균열을 낳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역사적 과정이나 정신적 내재화 과정 모두에서 사회계약론의 경험이 얇다. 외삽된 사회체제이념과 법질서를 수용했을뿐이다. 그 사회계약론의 이론적 뿌리를 세운 사회이론가인 로크와 홉스는 상반된 인간관 위에 서 있다. 로크는 '인간은 자연상태에서도 자유롭고 평등하기 때문에 선의를 바탕으로 평화롭게 서로 도우며 살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반해 홉스는 인간의 본성을 '대단히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것으로 봤기 때문에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은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로크는 개인들은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구성원들간의 합의를 이루고 사회계약을 맺어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 국가가 국민의 이익이 아닌 사익을 추구한다면 이른바 혁명도 가능하며, 그러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하여 국가권력을 분할하는 삼권분립을 주장하였다. 이와 달리 홉스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제어하기 위한 계약의 방식으로써 절대군주론을 주장하고 군주에게 강력하고도 절대적인 통치권이 주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홉스가 말한 의사(pseudo) 절대군주국가를 거부한 우리 국민들은 결코 '이기적인 한국인'은 아니다. 한편에서는 계엄령을 우려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현 정부를 부정하고 일괴암적인 다른 국가를 신념으로 조장한다면, 우리 국민은 결코 '선한 한국인'이 아니다. 현실의 우리 국민은 스스로의 주장과 이익을 취하면서도 타인과 합의할 수 있는 의미에서 '선하면서도 이기적인' 한국인이다. 실현가능한 해결책은 그 중간 어디에 있으며 이를 만들 수 있는 국민은 과학적이고, 이성적이고, 타협가능한 의미에서 교양있고 '선한' 국민이어야 할 것이다. 믿음과 신념만으로는 서로의 차이(이익)를 인정하고 양보와 타협에 다가갈 수 있는 '선한 한국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윤상철 칼럼] 사적 국가, 공적 국가
한국의 민주주의 절대적 정의 추구
지도자 자체가 이젠 존재하지 않아
저열한 동기·욕구 정치 오염시켰고
국민들조차 언급하려하지 않는다
적나라한 약탈적 사적국가로 전락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집권당의 당대표 선거에 출마한 후보가 '대통령 부인 문자 무시' 의혹에 대해 "집권당의 비대위원장과 영부인이 사적 방식으로 공적이고 정무적인 논의를 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공과 사의 구분이 모호한 상황에서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민간인인 영부인 문제가 공적 이슈로 등장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공을 지향하는 사적 영역인 정당이 내부의 의사결정에 공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도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 제도적·비제도적인 통로의 문제라면 정당의 사활적 문제를 제도적 논의의 장으로 이끌지 못하거나 무대응한 데 대한 정무감각의 부재 혹은 권위적 판단오류를 성찰해야 했다. 많이 알려졌다는 이유로 공인을 자처하면서 자신의 발언에 과도한 정당성을 부여하지만 문제 이슈들에 사실상 무지한 연예인들이나 체육인들의 문제와 그들에게 과도한 사회적 책임성을 부가하려는 사회적 경향성 만큼이나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 문제는 사적 개인들의 영향력이 공적 권력이 되는가를 보여준다.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한 대의 정치체제로서 다수를 대표하는 사람이나 정당이 그만큼의 권력을 위임 받는다. 유권자의 견해를 대표하는 것인지, 유권자의 이익을 대표하는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왜냐하면 어떠한 견해가 정치나 정책으로 구체화되어 그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의 이익을 실제로 대표하는지는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국가영역에도 존재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까지를 고려한다면 정치적 대표성의 디커플링은 항존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다수의 정치적 혹은 경제적 이익을 대표하는 정치인이나 정치세력이 공익을 대표한다고 받아들여진다. 그럼에도 민주주의는 소수자의 이익 또한 고려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민주주의는 사적 영역에서 사적 방식으로 출발하여 공적 영역에서 공적 방식으로 견해를 모아가는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불완전하지만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정치적 민주주의는 현실의 정치에서는 다수의 공익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막스 베버에 따르면 정치의 장에서 절대적 정의를 주장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이 목적을 위해 추종자, 즉 인적기구가 필요하다. 현대의 정치에 있어서 정당과 추종자, 나아가서 소극적 유권자까지를 포함한다. 절대적 정의를 추구하는 자는 이 인적 기구에 적절한 보상을 해주어야 스스로의 목표를 실현할 수 있다. 내적 보상으로는 증오심과 복수심의 충족, 원한의 충족 및 사이비 윤리적 독선에 대한 욕구의 충족 등이 있고, 외적 보상으로는 모험, 승리, 전리품, 권력과 봉록 등이 있다. 지도자의 성공여부는 이 인적기구의 원활한 작동여부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하면 지도자의 성공은 그의 동기가 아니라 이 기구의 동기에 달려 있다. 즉, 그의 추종자들의 행위에 깔린 윤리적으로 대부분 저열한 동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즉, 지도자와 그의 대의의 주창 및 그에 대한 믿음은 대부분의 경우, 복수심, 권력욕, 전리품과 봉록에 대한 숨어있는 욕구의 윤리적 정당화에 지나지 않는다.
절대적 정의(실제로는 상대적 정의에서 출발하여 절대적 정의를 추구하는)가 사라졌고, 인맥과 연고가 기승하는 한국의 민주주의는 절대적 정의와 저열한 동기 사이에서 후자 쪽으로 더욱 기울어진다. 이제 정치는 선거에서의 승리 가능성과 자신들의 접근가능성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선거 승리는 감성적 팬덤정치에 의해 결정되고 지도자에의 접근은 정치적 노선이나 가치와 무관하게 시도된다. 이제 민주주의를 통해 이룰 수 있는 국가적, 국민적 합의는 애당초 불가능하고 그 누구도 문제삼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민주주의에는 절대적 정의를 추구하는 지도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저열한 동기와 욕구가 모든 정치를 오염시켰고, 이제 국민들조차 이를 인식하거나 언급하려 하지 않는다. 민주적 공적국가는 적나라한 약탈적 사적국가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저열한 동기들이 절대적 정의로 둔갑하기 이전에 규범적 제재를 가했거나 정치적 지도자를 꿈꾸는 영역에서는 사적 욕망이 공적 정의를 압도하도록 하지 않아야 했다.
[윤상철 칼럼] '87년 체제'의 교착
정치체제 구조적 한계·미시적 결함
현재의 한국정치 교착상태 빠트려
대한민국, 국가체제 되돌아볼 시점
체제전쟁속 미봉적 대안 해결못해
공고히 하거나 새로 바꿔야할 상황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오늘의 한국정치는 행정부와 의회 간의 정치적 교착국면에 빠져 있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대통령의 시도들은 의회에 의해 거부되고, 야당의 입법은 대통령의 거부권에 좌절된다. 나아가 삼권분립 역시 용인되지 않는다. 대증적 제안들은 양극화된 진영정치의 불가피성에 묻힌다. 결과적으로 거시적 국가체제와 미시적 '87년체제'의 무능화 혹은 붕괴에 직면하고 있다. 권위주의체제의 민주화를 넘어서서 국가체제의 해체로 나아가지 않을까 우려된다.
이른바 '87년체제'는 '권위주의체제의 종식과 형식적 민주주의의 제도화'로 특징지어진다. 좌파들은 정치적 민주화가 급속히 진전된 반면 경제적 민주화는 지연되면서 보수적 민주화에 머물렀다고 평가한다. 우파들은 권위주의적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사이에 힘의 균형이 형성되면서 자유민주주의체제로 이행하였으나 이제 그 체제적 한계를 벗어날 위기에 처해있다고 진단한다. 체제의 보다 미시적인 특징은 '직접선거에 의한 대통령제'와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를 통하여 지역이나 세대 등 다양한 사회균열에 기반한 할거정치가 가능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정치체제의 구조적 한계와 미시적 결함 등이 현재의 정치상황을 낳았다고 볼 수 있다.
'87년체제'의 한계는 여소야대 혹은 여대야소 등 의회 내의 정파적 불균형이 심각해질 때 더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여당과 야당 간의 의석분포가 균형을 이루고 있을 때에는 타협에 의한 국정운영이 시도되고, 외견상 원만한 민주주의정치를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여당의 의석이 압도적이면 일방적인 독주로 민주주의가 훼손되고, 야당이 압도적이면 체제작동의 병목이 발생한다. 특히 양극화된 정치세력이 민주주의정치의 요체인 '정치적 경쟁자(세력)에 대한 상대적 관용'과 헌법과 법률 안에서의 '제도적 자제'를 견지하지 않을 경우에 이러한 일탈적 양상은 더욱 심해진다. 권력의 집행권이 대통령과 수상에게 이원화되어 있는 이원집정부제나 의원내각제 하에서는 이러한 상황이 해소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체제는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있지만 국회해산권이 없는 상태에서 이러한 교착상태가 발생하는 경우 행정부와 의회는 각자 자기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그 결과 '87년체제'의 성립 이후 '3당합당'과 분당, 대통령 탄핵과 같은 사태가 간헐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대통령 중임제는 현재의 정치체제가 갖는 한계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개헌 자체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 기대하기 어렵다. 많은 소수정당의 소멸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다당제의 활성화 역시 실현가능하고 의미있는 대안은 아니다.
일부 학계에서는 '87년체제'의 한계로 민주적인 사회경제적 대안의 미비, 민주화 패러다임 자체의 한계, 분단체제 극복의 미완성 등을 들기도 한다. 그러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체제적 한계가 40여 년이 흐른 지금 체제 실행의 교착을 낳았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체제의 붕괴 혹은 사회민주적 복지국가체제의 위기와 변형, 그리고 1997년 IMF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 등을 목도하거나 직접 경험한 이 나라가 이제 그러한 체제실험을 할 수 있다고 보기 어렵다. 남북간의 체제대결과 북한의 핵개발, 최근에 이르러 북한에 의해 '동족관계'가 아닌 '적대적 두 국가관계'가 되어버린 남북관계의 상황에서 분단체제 극복을 논할 상황은 더더욱 아니다.
요컨대 현재 대한민국은 국가체제와 정치체제를 다시 돌아볼 시점에 와 있다. 분단체제극복이 오로지 민족통일을 통해서 가능하고 현재의 국가는 미완성의 반국가라는 인식에 사로잡혀 있는 한 국가체제를 구성하는 헌정체제는 항상 불안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적 정치체제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면, 정치체제 자체를 바꾸거나 정치체제를 벗어나는 행위에 대한 엄격한 법집행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미 진행되고 있는 체제전쟁 속에서 현재 거론되고 있는 미봉적 대안들이 이러한 체제정치를 해결할 수는 없다. 현재의 체제를 공고히 하거나 새로운 체제로 바꿀 국면이다.
[윤상철 칼럼] 국민들의 선택 기준?
- 자본가 집단·고령층일수록 우파
- 노동자·영세자영업자 좌파 지지
- 사회구조 다양화로 정체성도 분화
- 국민정당 지향하는 방향으로 진화
- 총선, 대선과 매우 다른 모습 보여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국회의원 총선이 끝났다. 선거결과에 따라 이후 한두달의 정국이 더 요동칠 것이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유권자들의 선택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매우 혼란스럽다. 그 선택이 결과를 예측하면서 혹은 기대하면서 이루어졌는지, 아니면 스스로를 표출하기 위한 행위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혹자는 정권심판적 선거였다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대안적 선택이 무엇인지는 더더욱 오리무중이다.
유권자는 어떤 후보자나 정당을 왜 지지할까? 후보자 개인의 특성이 지지선택의 이유일까? 범죄 경력이 많거나, 저품격의 막말을 일삼거나, 금융비리에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도 다수 당선되고 뛰어난 학벌, 화려한 경력, 그리고 훌륭한 품성의 엘리트들도 낙선하는 양상을 보면 후보자 개인의 특성이 결정적 기준은 아니다. 포퓰리즘을 앞세운 정책적 실패를 거듭했을뿐만 아니라 각종 비리로 기소되고 재판중인 당대표를 방탄하는 게 전부인 정당을 지지하는 모습이나 서투른 국가운영이나 사소한 비리가 드러났지만 국가행정의 정상화를 추구하는 정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모습을 보면, 정당의 특성 또한 결정적 기준은 아닌 듯싶다. 그렇다면 국민들은 후보자 개인이나 정당을 판단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이 부재하거나 그 판단기준이 기형적인 도덕성과 정치성향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을까? 흔히 말하듯 국민들의 판단기준을 전적으로 바르다고 판단하는 정치인들의 가식적 발언에 동의하기도 어렵지만 민주주의체제 하에서 국가의 파국 역시 국민 선택의 결과라는 사례들을 보면 반박하기도 쉽지 않다.
국민들의 선택동기를 살펴보자. 정치의 기능 혹은 본질이 경제적 자원의 재분배에 있는 만큼 정치인·정당 선택은 스스로에게 더 유리한 자원분배를 해줄 것으로 기대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자본가 집단이나 부유한 상층, 고위 전문직 중산층, 고령층일수록 자본주의체제의 보수적인 우파정당을 지지하고 노동자 농민 집단이나 사회적 하층, 영세 자영업자 층들은 개혁적인 좌파정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40~50대 세대들이 생애경험으로 인해 좌파정당을 지지하고, 전형적인 보수지지세력인 의사집단들이 특정한 사회정책에 반발하여 좌파정당을 지지하는 반면, 비정규직 등 사회적 빈곤층들이 경제적 안정과 국가의 복지정책에 기대어 우파정당을 지지하고 특정 지역 주민들이 전통적인 관계에 의해 우파정당을 지지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소수자집단·이주민 집단들에 의해 행해지던 스스로에 대한 인정 요구 등이 전통적 지지성향을 관성적으로 고수하는 지역 주민들, 특정한 시대적 경험을 공유하는 세대들, 사회적 인권 혹은 권리를 일시적으로 박탈당하거나 억제되는 직업집단들에 의해 경제적 재분배를 우선하여 표출되기도 한다. 또 다른 기준인 정치적 대표성은 일반 유권자들에게는 실질적인 이익과 더 거리가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들의 엘리트들에 한해서 행정부나 입법부에 호선될뿐이다. 특정한 지역이나 특정한 학벌 등이 흔히 그러한 기준으로 인식된다.
서구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오랫동안 경제적 계급균열과 그에 따른 계급정당이 이념형적인 모델이었다. 우리나라도 자본주의적 발전이 급속하게 이루어지면서 전형적인 계급정당의 모습은 아닐지라도 사회적 상층을 대변하는 자유주의적 보수정당과 서민과 노동자 등 하층을 대변하는 진보적 개혁정당의 정치적 경쟁 양상을 보여왔다. 이러한 정당구조는 사회구조가 다양화되고 개인화된 정체성이 분화되면서 선거승리를 위한 국민정당(캐치올 파티)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국가경제의 발전과 국민들의 경제적 풍요를 위하여 많은 정책으로 대응하고 많은 성공을 이루었음에도 국민들이 이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보수정당은 한탄할 수 있지만, 국민들이 이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심화된 불평등과 지연된 낙수효과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다. 국민들이 공정과 상식을 더욱 원하고, 다양한 소수자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기를 주장하고, 경제적 재분배보다 정치적 대표성을 더 원하고 있다면, 총선은 단 하나만의 가장 결정적인 균열 위에서 선택이 이루어지는 대통령선거와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윤상철 칼럼] 청년세대의 포기는 정당한 선택인가?
한국인들 희망 중산층 인식 왜곡돼
OECD기준과 큰 괴리 상류층 열망
계층상승 기대감 좌절 잘못된 판단
가능한 삶의 기회 스스로 포기 절망
과도한 불평등 인식 부조화 극복 못해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나라에서 '삼포세대(三抛世代)'란 기이한 말이 등장한 지도 이미 10여 년이 넘어섰다. 2011년에 경향신문은 '불안정한 일자리, 학자금 대출상환, 기약 없는 취업준비, 치솟은 집값 등 과도한 삶의 비용으로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하거나 기약없이 미루는 청년층'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러나 만일 안정된 일자리가 연봉 5천만원을 넘어서는 대기업 정규직으로, 신혼집은 신축아파트 전세 이상으로, 결혼식 비용은 가전 빼고 7천만원 이상으로 생각하면서 자신을 삼포세대로 치부한다면, 2022년 통계청 추산 가구당 중위실질소득이 3천200만원인 이 나라에서 지극히 헛된 꿈을 꾸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좌절하면서 가능한 삶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이 나라는 심각하게 뒤틀린 데다가 사회적 재생산의 전망조차 불투명한 취약국가가 되었다.
청년세대를 포함하여 한국인들이 희망하는 중산층의 모습에는 다소 왜곡된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우선, OECD의 기준에 따르면 중산층은 중위소득의 75%에서 200%까지의 소득을 가진 집단을 말한다. 이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중산층은 4인 가구당 연실질소득이 2천400만원에서 6천400만원에 이르는 집단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계적 구분과 대중들의 인식 간에는 앞서의 삼포세대처럼 큰 괴리가 있다. 2022년 모 증권사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들이 대체로 4인가구 기준 월소득이 686만원, 월소비 427만원, 순자산 9억4천만원은 되어야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실제로 각각 상위 24%, 9.4%, 11% 수준에 이르는 거의 상류층의 하한선으로 보인다. 이른바 '왜곡된 평균'이 한국인들을 우울하게 할 뿐만 아니라 '삼포세대'를 양산하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실제로 중산층이 아닌 상류계층으로 진입하지 못하는 열패감에 젖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재의 계층적 지위가 기대수준에 못 미치더라도 미래의 계층상승전망이 열려 있고, 그 가능성이 밝은 경우에 사람들은 현재의 빈곤과 열패감을 감당해낼 수 있다. 가령 50~60대의 구 세대들은 저발전 농업사회에서 미분화된 계층구조의 하층민으로 살면서도 사회경제적 발전 속에서 삶의 질이 상승하고 계층적 지위가 높아지는 기대감으로 참아냈다. 그들은 한국사회의 구조적 계층상승이동의 물결을 타고 스스로를 성취해냈고, 또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청년들은 자신들의 계층적 현재 지위나 계층이동의 지향점에 있어서도 크게 잘못된 인식을 하고 있다. 즉, 사회적 하층에서 상류층 말단까지 이동할 수 없기에 현재도 미래도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연관되어 있는 점이지만, 한국의 청년층들은 그 상당수가 중산층의 자식으로서 제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안정적인 부의 세습이 상류층에서나 가능한 상황에서, 한국의 중장년층이 자식을 중산층에 과도하게 편입시키기 위해서는 노인빈곤을 포함하여 개인적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발생시킬 수밖에 없다. 원래 세대간의 계층이동에 있어서 중산층 부모를 둔 자식세대의 상당수가 하층으로 하강하고, 하층부모를 둔 자식세대의 일정 정도는 중산층으로 상승하는 현상은 지극히 당연함에도 말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의 청년층들은 자신들이 현재 하층계급에 속한다고 인식해야 비로소 현실적이고도 긍정적인 전망이 생긴다.
상황이 이러하니 연애와 결혼, 나아가서 출산은 애초부터 어려워진다. 일반적으로 개인화된 산업사회에서 높은 출산율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도시사회에서 자식은 가족노동력에 포함되기도 어렵고 개인화된 신세대들에게서 부모봉양을 기대하기란 더욱 어렵다. 더구나 그들은 하층에서 상류층 경계에 이르는 계층상승을 당연시하는 인식 속에서 이를 저해하는 모든 사회적 굴레로부터 자유롭고자 생각한다. 국가 속의 개인의 부와 지위는 절대적으로 증대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생산과 성장이 필요하다. 계층인식의 왜곡에 덧붙여 부의 불평등을 과도하게 문제 삼거나 국가의 무능력을 문제삼는 방식은 이러한 부조화를 결코 극복할 수 없는 것이다.
[윤상철 칼럼] '정치테러?' 유감…
동기·성격 명확한 20세기 정치테러
민주화 이행은 맨손저항 피지배 세력
군대 무장한 지배세력과 평화 서약
점점 사익 추구하며 혐오로 파편화
국가 기능상실, 그저 감정투쟁 난무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최근 야당 대표와 여당 국회의원 등 정치인을 대상으로 하는 테러가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 행위의 동기와 그 정치적 배후가 아직 명확하지는 않지만, 정치인을 대상으로 분노 혹은 혐오가 표출되었다는 점은 명확하다. 그러나 야당대표 피습 사건은 이해하기 어려운 경미한 행위라는 이유로, 여당 의원 피습사건은 나이 어린 청소년의 행위라는 이유로 정치테러로 선뜻 인식되지 않는다. 지난 2006년에도 야당대표에 대한 피습사건이 있었지만 당시에도 범인의 일탈적 자기과시욕에 기인한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정치테러 혹은 정치폭력의 역사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해방정국에서 여운형뿐만 아니라 송진우, 장덕수 등 민족지도자들의 암살 역시 신설 국가의 미래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에서 발생한 정치테러였다. 비민주적 권위주의시대였던 1950년대에는 폭력조직들이 개헌에 반대한 야당의원들에게 폭력을 행사했었고 1976년도의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난동사건', 1987년 통일민주당 창당방해사건 등에서 보이듯 정권이나 야당 내부에서 사주한 정치테러 등이 빈발했다. 이렇듯 정치테러는 정치적 반대세력의 정치인들에 대한 직접적인 폭력행위라는 점에서 비민주적 체제 안에서 발생한 사건이긴 하지만 그 동기와 성격 및 목표 등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민주화 이행 이후의 상황은 크게 다르다. 자유민주주의체제 하에서는 정치 자체가 경제영역 안에서 발생하는 부의 불평등 심화에 따른 빈곤과 양극화가 적나라한 폭력적 분배갈등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막기 위한 장치로서 기능한다. 특히 민주주의체제는 개인에게 평등한 정치적 권리를 부여하고 정치적 토론·논쟁을 통한 합의체제로 작동한다.
이른바 '제3의 물결' 민주화에 올라탄 신생 민주주의체제는 대부분 제도적 폭력인 군대와 경찰로 무장한 권위주의적 지배세력과 맨손으로 저항하는 피지배 사회정치세력간의 합의로 이루어졌다. 인권과 자유, 그리고 주기적 선거를 통한 권력구성에 합의하면서 지배세력은 제도적 폭력의 사용을 자제하고, 피지배세력은 거리의 투쟁을 삼가는 합의를 통해 민주화 이행이 이뤄졌다.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세력들이 어떤 형태의 폭력도 사용하지 않겠다는 동의이자 서약이었다. 이후에는 민주주의체제를 구성하는 정치세력들간의 상호관용과 집권세력의 제도적 자제가 이러한 합의를 유지시킬 수 있었다. 보다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체제는 자기 희생과 양보라는 규범이 자리잡아야 비로소 존속가능하게 된다.
민주화 이행 이후의 한국 민주주의는 이러한 민주적 심화의 길을 갔다고 보기는 어렵다. 정치세력들은 국가권력의 독식과 패권적 이익분배를 추구하였다. 국가권력을 공익을 추구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제도로 만들기보다는 독점과 권력남용을 통한 사익추구의 장으로 만들었다. 사회세력들도 국가를 법과 제도를 매개로 한 이익의 공정한 분배체계로 보기보다 연고와 사회관계를 통한 이익분배기제로 인식했다. 시민사회단체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익집단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결국 정치의 장으로 경제적 이익의 격렬한 투쟁이 고스란히 이전되었다. 이익갈등의 제도화된 비폭력적인 조정기제를 만들기보다는 폭력적인 주먹과 이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장이 되었다. 자기희생과 양보에 기초하여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민주주의체제는 스스로 정의를 독점하고 상대를 적으로 혐오하는 세력들에 의해 파편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민들은 더 이상 국가의 권위를 인정하거나 민주주의 규범을 존경하지 않게 되었다. 자기편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면 언제라도 적의를 드러내며, 국가와 민주주의를 대리하는 정치인들은 그러한 정서표출의 출구가 된다. 포퓰리즘이 지속되면서 그러한 표출은 정제되지도 조정되지도 않고 수용되기 마련이었다. 정치인들에 대한 폭력적 공격이기에 정치테러라 부르기 쉽지만, 공격을 감행한 이들의 특성이나 동기를 보건대 정치적 이념갈등으로 보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렇다고 체제변경을 둘러싼 갈등의 경계에 서 있지도 않은 이상한 분노의 표출일 뿐이다. 국가와 정치가 기능을 상실하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적나라한 감정투쟁이 난무할 뿐이다.
[윤상철 칼럼] 포퓰리즘적 복지국가주의의 유제
과잉복지 등 좌파적실험 성공 이유
과거 신자유주의 지구화 물결 덕분
30년 넘게 자리잡은 국내 정치사회
레드 웨이브 같은 새변화 가로막아
어떤 정권이 됐든 유제들 너무 공고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출범한 지 채 2년이 되지 않은 현정권에 대해 온갖 원성이 드높다. 시골의 노인들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에서 온갖 명목으로 뿌리던 포퓰리즘적 돈잔치가 사라진 데 대해 현정부의 무관심과 '싸가지 없음'을 비난한다.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헬리콥터 정부의 지원에 흐뭇해 하던 중소기업들은 국제경기의 하락과 고금리에 의해 벌어진 곤란을 현정부의 무능 탓으로 돌린다. 협치의 이름 아래 근거없는 지원을 받던 이른바 시민단체들은 국가의 일원으로서 지내다 쫓겨난 불만을 정권 출범 초부터 '대통령 탄핵'으로 되갚으려 했다. 민주주의의 근간인 법치를 사적 패당 정치로 무너뜨린 야당정치세력은 의회 다수의 힘을 동원하여 그들에 대한 사법 적용을 정치적 탄압으로 몰아가면서 정쟁에 몰두하고 있다. 이 모든 양상들은 좌파 포퓰리즘과 능력을 넘어선 과잉의 복지국가, 그리고 자유시장 규제의 국가주의 등의 익숙했던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시대적 유제로 보인다.
돌이켜 보면, 한동안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물결이 세계를 뒤덮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현실주의적 경제정책을 포함하여 불가피한 대학 개혁정책마저 신자유주의 비판의 화살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WTO 각료회의, World Bank, IMF 등에 대한 반세계화시위와 세계사회포럼 등이 세계시민사회의 조직된 저항이었다. 이른바 블루웨이브는 좌파 포퓰리즘적 정권의 득세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러나 세계화가 저개발국의 저성장과 빈곤을 낳는다고 보기 어렵고, 닫힌 국가주의는 선택 가능한 대안이 아니었다. 특히 한국의 현실은 세계적 이념동원과 조응하지 않았다. 한국은 세계화와 세계무역의 혜택을 가장 많이 본 나라였고, 성장할수록 세계화로부터 이탈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한국의 좌파적 실험은 그러한 세계화의 혜택 속에서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최근에는 세계화를 주도했던 나라에서 반세계화의 흐름, 이른바 글로벌 보수화 조류, 즉 레드웨이브가 나타나고 있다. 즉, 보수주의가 국가주의의 외양을 띠면서 세계적인 트렌드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에서 트럼프의 집권과 재부상, 영국의 브렉시트, 프랑스의 극우정당 국민연합의 부상, 아르헨티나에서 극우 자유지상주의 성향 자유당 후보의 대통령 당선 등이다. 한국의 지난 대선 결과도 세계화의 붕괴와 새로운 체제 경쟁의 등장과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국가들이 보수적 국가주의를 선택할 수 없다. 한국의 자본주의적 발전과정 자체가 세계화에 의해서 부양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화된 경제의 중위 파트너로서 자리잡아온 한국경제는 비좁은 내수시장, 상대적으로 낮은 기술 수준, 작은 자본규모 등으로 인해 세계화 속의 역할을 벗어나서는 성장하기도 생존하기도 어렵다.
요컨대 한국은 세계적인 경제관계, 즉 자유시장적 세계경제에 의해서 국내의 경제가 크게 요동칠 수 있는 나라이다. 또한 그러한 경제적인 네트워크는 정치군사적인 네트워크와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외양상 현재 한국의 보수정권은 그러한 네트워크에서 이탈하지 않고 만들어진 체제라고 볼 수 있다. 과거의 정권이 이러한 네트워크를 벗어나 새로운 국제관계망을 구성하려다 한국의 경제와 정치군사적 전망을 매우 불투명하게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설사 이러한 국제적인 관계망에 부응하는 정권이 등장했다고 할지라도 30년 이상 형성된 국내의 정치사회관계는 새로운 변화를 가로막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한 국가의 경제적 생산력에 의거하여 결정되는 사회복지 수준은 이미 높은 수준에서 형성되고 제도화되어서 이를 흔들기는 대단히 어렵다. 민주화의 과정에서 이미 활성화된 시민사회와 노동세력은 한국의 세계적 분업구조 내 역할과는 동떨어져 있지만, 쉽게 재구성할 수 없다. 포퓰리즘적 정권에 의해서 이미 정착되어온 사회관계와 사회의식은 설사 보수정권이 출범한 후에도 거대한 저항의 흐름만 형성할 뿐 한국사회의 현재를 인식하지도 미래를 준비하지도 못한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그 정권이 보수적 자유주의 정권이든, 좌파 국가주의정권이든 이미 어찌할 수 없는 과거의 유제들이 너무도 공고하다.
[윤상철 칼럼] 이념도 민생도 없는 정치
지금의 한국정치는 보수주의(정당)와 진보주의(정당)와의 쟁투로 비쳐진다. 양대 정당은 각각의 정치적 이념을 대표하는 듯 포장하고 있고, 국민들도 양자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 중도세력은 명확한 이념적 지향도 없이 늘 선거의 쟁점으로 부각되었지만 대세 추종 세력이거나 정치적 무관심세력, 정치적 혐오세력 등으로 폄하되곤 하였다.
보수세력은 건국 이후 자유당, 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 민주자유당 등으로 이어져 오다가 1990년대 이후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 국민의힘 등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을 살펴보면, 1990년대 초반까지는 자유, 공화, 정의 등의 정치적 이념과 변화를 지향하는 정당이었다. 초기에는 자유민주주의체제의 수립, 국민 형성과 국민교육, 경제성장과 정의구현, 점진적인 자유확장 등의 방향을 추구하였다. 왕정이나 제정 등 전근대적 지배권력이 존재했다거나 이들에 저항하는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가 강력하게 성장했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새로운 정치체제와 경제체제를 만들어가면서 전근대적 체제로부터 벗어나 근대적 개인과 자유를 확장하는 목표를 지향했었다. 그러나 경제성장과 민주화가 일정한 수준으로 진행되면서 스스로 목표를 잃었고 1990년대 이후에는 그 색채를 알 수 없는 관료적 국가주의세력으로 변모하였다. 선거정치의 필요에 의해 자유주의세력을 일부 흡수하기도 했지만 곧바로 내부에서 소멸해버렸다.
한국정치 보수·진보주의간 쟁투화
양대 세력 '정치적 이념·지향' 파산
한국의 진보·개혁세력은 자유주의, 사회자유주의, 사회보수주의, 민주화운동세력 등이 이합집산하면서 한민당, 민주당, 신민당, 민주당,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새정치민주연합, 더불어민주당 등으로 이어져왔다. 이 정치사회세력의 이념적 경향은 군사정권과 독재, 권위주의를 반대하는 반권위주의적, 자유주의적인 성향과 재야 운동권 및 사회주의세력에 대한 친화성향으로 나타났다. 대체적으로 중도자유주의세력이 주도하고 점차 좌파 사회주의적 세력으로 중심이 이전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 세력은 민주화가 일정한 정도로 실현되면서 자유주의적, 반권위주의적 분파의 영향력이 추락하면서 점차 급진, 진보세력으로 편향되어 갔지만, 거의 동시적으로 사회주의체제가 붕괴되면서 이념적 지향이 모호해졌다. 그 결과 이들은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사회주의적 정책지향을 갖는 내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 세력 역시 보수주의세력과 마찬가지로 실현 불가능한 이념적 지향을 추종하는 수단으로써 국가주의와 집산주의를 취하게 되었다.
보수주의는 추구할 정치적 목표를 상실하고 자유주의마저 배제하면서 고립된 탓에 좌파사회주의세력의 포퓰리즘에 이끌리게 되었다. 좌파 진보 진영의 모든 이슈에 맞설 수 없게 되면서 무색채의 관료적 국가주의만으로 나아갔다. 그 결과 전통과 질서 등 이미 존재하고 있는 체제를 존중하고 미래의 방향설정이 부재한 일종의 신비주의로 나아가고 있다. 진보주의세력은 사회주의로의 진보·개혁의 역사적 패배와 새로운 실현 가능성 부재의 상황에서 그 관성적 수단으로서의 집산주의를 취하고 포퓰리즘적 평등과 복지를 내세우면서 정치공학과 권력장악에만 몰두하고 있다.
경직된 집산주의로 대중 설득 못해
결과적 이전투구식 권력경쟁 계속
왜 민생 해결 못하는지 되돌아볼일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모두 정치적 이념과 지향에 있어서는 파산한 세력이다. 보수주의세력은 정부당국에 대한 선호와 경제적 힘에 대한 몰이해로 인해 하나의 정치적 질서 안에 생각이 다른 세력을 포용할 수 있는 원칙이 부재하다고 볼 수 있다. 진보주의는 사회주의체제에 대한 과도한 신념 때문에 시장을 경유한 자유를 관용할 수 없다. 양 세력 모두 자유주의를 포용하거나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에 경직된 집산주의 안에서 대중을 설득할 수 없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일반대중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전투구식의 권력경쟁을 선전선동과 가짜뉴스 등 비민주적 방식의 수단을 통해 계속하는 것이다. 나아가 양대 세력은 집산주의적 국가주의에 매몰된 쌍생아로서 역사발전의 이념적 합리성에 기대거나, 반국제주의적 민족주의로 포장하며, 포퓰리즘적 사회주의로 선동하는 정치를 지속하는, 정치적 존재의의도 없고 역사발전의 가능성도 실현하지 못한다. 왜 이들이 정치적 집단주의를 취하면서 권력쟁취와 내부 분배에만 몰두하고 있는지, 그 결과 정작 대중의 민생을 해결할 이념적 지향을 제시하지 못하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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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철 칼럼] 지연된 공적 정의, '민주적' 사적 제재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법언이 있다. 헌법 27조 3항은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되어 있다. 재판이 길어질수록 소송당사자의 부담이 커지고 범죄 피해자의 구제가 늦어질 수 있는 만큼 재판은 신속하게 이루어지는 게 바람직하다. 그러나 판사들이 워라밸을 중시하고, 판사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고, 인사이동이 빈번하다는, 혹은 이른바 '사법민주화'로 인해 판사들의 업무 동기가 약해지고 유능한 판사들이 퇴직한다는 지연사유들이 거론되기도 한다.
실제로 우리 국민들은 전혀 다른 사안들에서 '지연된 정의'를 인식한다. 현 야당대표에 대한 수많은 범죄혐의는 수사, 기소, 재판, 국회체포동의 등에서 발목이 잡히고 있다. 그의 선거법 재판사건은 확정된 후에도 '재판거래'의 의혹을 받고 있다. 몇몇 간첩단사건은 변호인 측의 재판방해에 휘말렸고, 피의자들은 석방되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대통령비서실이 총동원된 울산시장 선거개입사건은 그 당사자가 임기를 마치고 나서야 1심 구형이 이루어졌고, 그나마 그 주역들은 수사와 기소에서 빠져버렸다. 전임 법무장관 재판은 공범인 부인이 형 확정으로 복역 중인데도 아직 1심 진행 중이고, 주범일 수도 있는 그의 성인 자녀는 이제야 기소되었다. 이에 조력한 한 국회의원의 재판은 임기를 다 마쳐가는 판국에 대법원에서 표류하고 있다.
정의가 지연되면서 정치적 공방만 거칠게 이루어진다. 정치적 편향성이 강한 검찰과 사법부에 의해서 유력한 정치인들의 재판은 법치의 영역에서 정치의 영역으로 옮겨간다. 국민들도 어느 순간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이나 정당의 편에 서면서 법치주의에서 벗어난다.
울산시장 선거개입 임기 후 구형 등
정의가 늦춰지면서 정치적 공방만
사적 복수 허용땐 법치주의 붕괴돼
현대에 이르러 시민과 시민사회의 사회적 행위 역시 공공성을 담보해야 한다고 요구된다. 실제로 시민단체는 정당과는 다른 사회적 공공성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익집단과 구별된다. 따라서 그들의 목소리는 공익을 담고 있다고 인식된다. 특히 이들은 정당체제가 결여한 대의를 대체할 수도 있고, 사법적 판단에 앞서서 사회적 정의를 대변할 수도 있다고 받아들여진다. 그렇지만 시민사회가 실제로 공공성을 담지한 공적행위자로 인정되지는 않는다. 그 목소리에 공공성을 담고 있지만 형식적으로 사적 기구로 받아들여진다. 불법적이고 불공정한 행위에 대해 정치적, 도덕적 비난을 할 수 있지만 제도적으로 물리적 징계나 제재를 가할 수 없다. 그러나 법치가 붕괴되면서 정치로 대체되는 상황에서 이들의 목소리는 법치를 대신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한편 민주주의의 정당성이 자리잡으면서 모든 영역에 민주주의를 적용시키려는 시도들이 확산된다. 스스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는 행위를 민주주의로 정당화한다. 사회적 공분이 높은 사안에 대해서는 개인적, 집단적 목소리를 상대방에게 직접 표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의견 개진이 아니라 사적 제재에 가까운 발언과 행위를 쉽게 표출한다. 교사들의 훈육행위를 자의적 잣대로 '아동학대'로 규정한 결과 그들을 자살로 내몰기도 한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침해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정의의 결손·과잉 사이 우왕좌왕속
개인 인권·자유·법 앞 평등도 훼손
헌법 1조 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모든 국민이 스스로의 주권에 준하는 권력을 행사하려 한다면 나라는 무정부상태가 될 것이다. 자신 혹은 자신의 가족의 자유와 권리가 타인에 의해 침해받았다 해서 그 상대방의 자유를 침해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자유의 침해 여부는 자의적으로 판단할 수 없고, 설사 적절한 판단이 내려진다 해도 사적 복수에 가깝기 떄문이다. 이를 허용한다면 그로 인해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 발생한다면 사회 자체는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법치주의가 붕괴하고 사회적 합의와 공통 규범이 사라지게 된다.
현존하는 공적 국가는 수많은 '정의의 지연' 사례들을 보여준다. 현존하는 시민사회는 사회적 합의가 없는 자의적인 '정의의 실현' 사례들을 보여준다. 우리 사회의 법치주의가 정의의 결손과 과잉 사이에서 우왕좌왕 하는 사이에 개인의 인권과 자유뿐만 아니라 법 앞의 평등도 같이 훼손되어가고 있다.
[윤상철 칼럼] 근대적 한국인, 근대적 대한민국
계단주의'라는 경고문을 흔하게 발견한다. 영어식 표현인 'Watch your Step!'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지만, 계단은 행위의 주체가 아니기에 의미의 맥락은 달라진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당신의 행동에 유의하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곤경에 처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만일 이를 계단으로 해석한다면 비탈길, 젖은길, 자갈길 모두에 각각의 주의표시를 해야할 판이다. 이와 달리 물품이 선반에 빽빽하게 진열되어 있는 상점에서 '선반 주의'가 아니라 '머리 주의'라고 씌어 있는 곳들도 종종 발견된다. 다른 예로 테니스 동호인들은 자신의 공이 네트에 걸리면 "오늘따라 네트까지 도와주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우리식의 세계관이 담겨 있는 독특한 표현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피동적이고 방어적인 세계관이 담겨 있다. 자유로운 행위주체로서의 근대적 개인은 없다. 자신의 행위를 구속하는 외적 요인을 강조하고 자신을 그 피해자 혹은 '을'로 규정한다. 우리는 이른바 '구조'를 개인의 행위를 제어하는 한계 혹은 개인 자유의 한계로 이해하고 인식한다. 반면 자유로운 개인과 주체적, 자발적 행위를 강조하는 미국인들은 '구조(structure)'라는 단어의 개념적 의미를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지 않다. 그들에게는 개인들의 자유가 충돌하는 경계에서 자신의 행위의 한계를 발견하기 때문에 그 지점에서 어떠한 합의와 보상의 방식을 통하여 그 한계들을 돌파하는 방안을 찾는다.
한국인 피동적이고 방어적 세계관
국가간 충돌, 외부 요인 먼저 인식
개인 혹은 국가간의 충돌 속에서 우리는 외부의 뭔가에 의한 좌절을 먼저 인식한다. 사람간의 정당한 이해갈등을 흑백논리 등을 통해 하나의 적대로 이해한다. 자본가들이 적이 되거나, 국가 혹은 국가의 현실적 구성원이 적이 된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사회계약을 바탕으로 성립하는 근대국가는 종종 자본가, 지배세력, 기득권을 보호하는 적으로 변모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뿌리를 둔 한 통일운동가이자 종교인은 '벽도 밀면 길이 된다'는 말로 분단의 장벽을 넘고자 했다. 이후 대통령을 꿈꾸던 한 정치인은 '벽도 밀면 문이 된다'는 말로 자신의 포부를 펼쳤지만 그 꿈을 실현하지는 못했다. 차라리 이들이 '벽이 있으면 문을 찾아라'고 했다면 스스로가 만든 벽에 갖히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근대 국가는 자유로운 개인의 결사체로서 그들을 묶어주는 자기정체성을 가진다. 국가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행위의 결과이고 그들의 자기실현이기도 하다. 국가는 공동체로서의 자기실현이자 개인들의 성공과 실현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 성공과 실현은 많은 실패와 좌절을 안고 있기도 하다. '일제에 의해 좌절된 대한제국의 근대화'는 새로운 국가사회를 만들기 위해 절치부심했던 조선 인민들의 삶을 기화시킨다. '친일세력과 야합한 독재체제'는 사회주의체제로 기울던 변방의 국가를 '자유민주주의적 국가수립'으로 이끌어 오늘의 성공적인 나라를 만들어낸 역사를 부정한다. '군부권위주의와 노동인권을 압살한 자본주의적 산업화'는 세계 최고의 빈국을 '세계적 경제대국으로 이끈 경제발전'의 성취를 위축시킨다. 반면 '쓰레기통의 장미처럼 사회로부터의 성공적인 민주화'는 그 주역인 사회운동세력의 권력과 자기이익 추구에 의해 사회갈등을 조장하고 사회발전을 지체시키는 역설을 낳고 있다.
'일제에 좌절된 대한제국 근대화'
절치부심했던 조선인민들 삶 기화
자기실현의 역사, 국가지속성 담보
미국 법원은 전쟁포로수용소 피해자였던 미군 병사가 일본 회사를 상대로 낸 소송을 기각하면서 '원고가 받아야 할 충분한 보상은 앞으로 올 평화와 교환됐다'고 판결한 바 있다. 우리는 근대국가의 형성에 기여한 인민의 헌신의 역사를 제국주의 국가 혹은 우리 국가에 의해 약탈당한 피해의 역사로 둔갑시켰다. 이 국가를 만들어낸 공헌에 대한 정신적 찬양을 그 과정에서 받은 피해와 노력에 대한 물질적 보상으로 둔갑시키고 있다. 근대국가의 한국인들은 이 역사적 공동체를 위해 모든 이들이 헌신했고 그들 자신의 실현으로 이 나라를 만들어 내었다. 그 다면적 성취가 오늘의 한국을 만들었다. 그러나 일부 한국인들은 자신들만의 배타적인 헌신으로 이 나라의 역사를 협애화한다. 지금 한국은 그러한 한국인들의 주체적 자기실현의 역사를 그 대상도 불명확한 자기 실패의 역사로 변형시키고 있다. 성공과 자기실현이 사라진, 그럼으로써 주체로서의 자기공간이 사라진 실패와 억압의 역사는 결코 한 국가의 정체성과 지속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2023-07-31윤상철[윤상철 칼럼] 이성과 과학 대신 감성과 선동이 넘쳐
한국노총 금속노련의 간부가 철탑 고공농성을 벌이다 경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에 한국노총은 공권력의 폭력성을 규탄하며 경제사회노동위원회를 불참하고 탈퇴를 저울질한다. 민주노총 또한 올해 초 정권퇴진운동을 선언하였으니 사회적 대화는 사실상 중단되었다. 노동계의 강도높은 반정부투쟁에 대해 정부는 엄정한 법집행을 예고하면서 노정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여당은 생산성 향상에는 무관심하면서 정치투쟁과 불법파업을 일삼는 특권세력에게 엄정한 법집행이 필요하다고 한다. 야당은 노동계의 파업과 정치투쟁을 '노란 봉투법' 등으로 오히려 후원하고자 한다.
이 간부의 농성은 임금교섭과 부당노동행위 중단을 요구하는 포스코 하청사 '포운' 노동자들의 천막농성이 400일을 넘겨 장기화된 데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 천막농성이 왜 발생했는지, 그 해법이 있는지 제대로 따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 노총간부의 농성이 불법적인지 아닌지는 따지지도 중시하지도 않는다. 모두 묻어버리고 사태 발생의 이유도, 문제 해결방식도 알 수 없는 거대한 패싸움이 거대한 사회적 합의를 대체할 뿐이다.
일본 후쿠시마 오염처리수 방류가 임박하였고 여야를 넘어서 사회적 이슈로 진화하고 있다. 서울시교육청은 학교급식에 대해 방류시점부터 전수 방사능 검사를 하겠다고 밝혔다. '소금사재기' 사태가 발생하며 소금거래액이 8배 이상으로 급증하고 있다. 전교조는 '후쿠시마 오염수 해양투기' 반대 서명에 참여하도록 독려하고, 일부 정당은 '후쿠시마 오염수 저지 TF'를 가동하고 있다. 문제발생이 임박했는데 해결책도 없이 뒷북만 치고 있다.
日 오염수 방류 임박 사회이슈 진화
IAEA 중간보고서 공신력 폄하도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중간보고서는 일본 도쿄전력이 오염수 샘플에서 방사성 핵종을 측정분석한 방법은 적절하다고 평가한 바 있다. 곧이어 동일한 내용의 최종보고서가 나온다는 사실을 애써 눈감고, 심지어 이 기관의 공신력을 폄하하기도 한다. 조사에 참여한 IAEA 산하연구소와 한국, 미국, 프랑스, 스위스, 일본 등 5개국의 실험실의 활동도 묵살한다. 한국인들은 국제기구의 전문성과 과학성도 무시하고, 심지어 자국의 과학자들의 헌신도 짓밟고 나아가 자국 정부도 불신한다. 오로지 불확실한 위험에 대한 감성적 공포와 일본에 대한 혐오, 그리고 나 아닌 모든 것들에 대한 불신 등에 사로잡혀 이를 끝없이 재생산할 뿐이다.
많은 중대 사안들에 대해서 그렇다. 먼저 어느 개인이나 집단이 주장이나 위험을 말한다.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검증 이전에 자기 이익을 탐지한 정치인이나 사회집단이 자극적인 프레임으로 대중들을 선동한다. 다른 집단의 생각이나 그들과의 갈등은 개의치 않고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다른 국가들의 인식이나 대응을 선택적으로 고려한다. 생각이 다른 개인들에 대해서는 집단적으로 비난하고 해법이 다른 국가들을 교묘하게 무시한다.
북한 핵개발은 경제적 제재를 통해 중단시켜야 한다는 게 국제적인 합의였지만, 우리의 대통령은 우선적인 제재 해제가 필요하다고 우방국의 수반들을 설득하려다 국제적인 망신을 당한다. 우리나라의 일부 국민들은 이에 동조하고 찬양하기도 한다. 전형적인 폐쇄적 정치부족주의의 모습이다. 일부 언론의 광우병 관련 조작선동에 온 국민들이 광적 히스테리에 휩싸였고, 공당의 정치지도자들과 영향력 있는 사회단체들이 이를 부채질하면서 온 나라가 마비되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에 반하는 과학자들은 마녀사냥 당하고 정부는 대책 없이 우왕좌왕했던 몇 달이 흐른 후에 우리 국민들이나 정치지도자, 시민단체활동가, 과학자 모두는 아무런 반성도 그 어떤 해명도 없다.
생각·해법 다르면 비난 교묘히 무시
경험적 관찰·합리적 절차 밟지않아
대한민국 공동체 문제해결 서툴러
우리 사회의 많은 주체들이 먼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경험적으로 관찰하고,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합리적으로 결론을 짓고, 합법적으로 행동하는 절차를 밟지 않고 있다. 비단 정치인들이나 사회운동가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일반 시민들도 과학적으로 사고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하기에 앞서 정치적 선동에 휘둘리고 감성적 흥분에 도취된다. 대한민국 공동체는 늘 문제를 인식하고 구성하고 해결하는 데 집단적으로 서투르다.
2023-06-19윤상철[윤상철 칼럼] 민족과 통일을 잊으면
한반도를 중심으로 신냉전구도가 형성되고 있다. 한국, 미국, 일본의 자유민주주의 동맹과 러시아, 중국, 북한의 국가사회주의 동맹이 맞서는 형국이다. 양 동맹 사이를 배회하던 한국이 한 축에 정착하면서 이 대립구도가 더 선명해지는 듯하다. 20세기 초반 영·일동맹이나 러·일간의 한반도 분할 시도 등에서 보이듯, 북방국가들과 해양국가들 간의 대립구도에서 한반도는 늘 중요한 메뉴였다. 해방 이후 한반도는 이 구도에 늘 긴박되어 있었고, 남북분단과 두 국가형성을 낳았다. 통일정부수립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1946년에 북조선인민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실질적인 정부를 구성했고 뒤이어 남한은 1948년에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정부를 구성하였다. 두 개의 한국은 이 대립구도 하에서 각자 독자적인 국가형성의 길을 밟아갔다. 남한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체제를 수용하고 북한은 인민민주주의와 국가사회주의의 체제를 수용하여 그 안에 각각의 대중들을 포섭해갔다. 뒤섞인 이념과 대중들은 두 국가 체제를 용인하지 못했고 두 국가의 내부에서 혹은 두 국가 간에 내전을 벌였지만 이 대립구도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남한은 한동안 자유민주주의적 해양국가동맹의 나라로 커 나가는 듯했다. 정치적 독재이든, 경제적 발전국가이든, 자유주의적 군부체제이든, 보수적 민주주의체제이든 지향하는 정치체제와 국가동맹은 일관되었고 상당한 수준으로 정돈된 대중들은 그 체제에 동의하는 듯했다. 그러나 감성적 민족주의와 통일이 다시 대두되고 체제변경을 추구하는 세력이 등장하고 반일종족주의와 반미제국주의가 떠오르면서 다시금 내전의 양상을 만들어 나갔다. 냉전적 대립구도의 완화와 사회주의블록의 와해, 그리고 글로벌 시장 통합이 그러한 공간을 열어주었을 것이다.
정치엘리트 이념으로 대중 지배뿐
그들을 위한 정치·행정에는 소홀
잠정적으로 국가는 국민을 위한 최선의 공동체로 받아들여진다. 그 국가는 국민에게 더 높은 삶의 질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를 위해 보이지 않는 이념과 가치를 실현하는 '상상의 공동체'로서 존재한다. 한반도의 한 국가는 민족을 내세워 권위주의적 국가사회주의를 유지하면서 인민을 억압하고 다른 한쪽을 위협하는 반면, 다른 하나는 세계적인 선진국가를 만들어 가면서도 스스로 결손국가의 열패감에 시달리면서 민족의 환상을 좇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의 민족국가는 그 연원이 복잡하다. 단일민족 이데올로기는 이미 환상으로 받아들여진다. 과거의 한민족도 동북아시아의 다수 민족들이 혼융되면서 만들어진 다민족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민족국가는 역사적 투쟁 속에서 찢어지고 흩어지면서 변화해왔다. 그 민족의 일부를 바탕으로 늘 새로운 국가가 만들어졌고 민족 내의 이합집산을 거듭해왔다. 그러나 오늘날 보편가치의 측면에서 보면 그러한 민족국가가 늘 한반도 인민들의 삶을 고양시키는 좋은 공동체였다고 보기도 어렵다.
현재 한반도에서는 명확한 실체로 보기도 어렵고 바람직하지도 않았던 민족과 그 국가의 역사를 다시금 되살리려 한다. 민족을 바탕으로 하되 바람직한 인민공동체를 어떻게 만들어가는가보다는 쇼비니즘적 민족주의에 뿌리를 두고 민족을 위해서는 모든 바람직한 국가의 모습들을 쉽게 포기하고 지워버리려는 노력이 더욱 강해지고 있다. 이 땅에 사는 인민들을 위한 민족과 국가가 아니라 민족이라는 가상의 절대가치 앞에서 실제로 인민들의 삶을 백안시하는 정치적 행태들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두 국가의 정치적 지도자들은 인민 누군가를 대표하고 또한 그들에 의해 통제되기보다는 민주주의의 제도적 외양을 쓰고 나타나 인민대중을 지배하는 엘리트들일 뿐이다. 정치엘리트들은 대중들이 현혹되기 쉬운 이념들을 동원하면서 인민들을 지배할 뿐 그들을 위한 정치와 행정을 한다고 보기 어렵다.
MZ세대 더이상 민족·통일 갈망안해
차라리 최선의 공동체 실현하는게
그나마 통일까지 앞당기지 않을까
우리는 오랫동안 통일이 우리 민족의 살 길이고 외세의 속박에서 벗어나 우리 민족의 밝은 미래를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 민족주의적 감성이 이 땅의 인민들의 삶에 무엇을 가져다 줄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분단은 우리가 만들지도 않았고, 우리가 해소할 수도 없다. 또한 풍요로운 선진국에서 태어난 MZ세대들은 더 이상 민족과 통일을 갈망하지 않는다. 차라리 민족을 버리고 통일을 폐기하고 이 땅에 최선의 공동체를 실현하고자 하는 방향이 그나마 통일까지도 앞당길 수 있지 않을까?
2023-05-01윤상철[윤상철 칼럼] 불완전한 국가체제, 불안정한 민주정체 지면기사
한국 정부가 강제징용 해법을 발표한 뒤에 열린 한일정상회담을 둘러싼 여진이 여전하다. 민족주의적 정서의 뇌관을 건드린 탓에 정치적, 사회적 갈등이 증폭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나아가 한-미-일과 중국-북한 사이의 진영간 충돌 모습도 보인다. 국내 강제징용 피해자 보상, 수출규제와 화이트리스트 제외, 지소미아 정상화 등 한일 양국간의 난제들을 풀기 위한 해법에 대해 여야간에 극단적인 이견을 보이는 배경에는 또 하나의 '그레이트 게임'이 도사리고 있는 듯 보인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외교-안보적 사안에 대해서는 여야간에 이견을 내지 않으며, 서로 갈등하다가도 외교적 중대국면에서는 한 목소리를 내는 데 반해 한국에서는 북한과 중국, 미국과 일본 등에 관련된 입장들이 극단적으로 그리고 수시로 상충하는 양상이 나타난다. '기자는 사실을 보도하고, 학자는 진실을 토로하고, 정치인은 국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데 반해 언론이 사실을 왜곡하고, 학자들이 이념의 주구들로 전락하고, 정치인이 집단적 사익을 위해 국익을 외면하는 모습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철저히 국가의 이익이 우선시되는 국제관계에서 한국 내에는 여러 개의 국익, 국익으로 덧씌워진 사익들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거대한 이념·사회적 합의 전혀없어
조그만 갈등에도 큰 충돌로 이어져
이러한 상황은 한국의 국가형성을 되돌아보게 한다. 국익에 대해 상반된 견해가 존재하고 그 외교적, 안보적 실행에 있어서도 극단적 이견을 보여준다는 사실은 한국이 단일한 국가를 형성하지 못했거나 여전히 분화하고 있다고 이해될 수 있다. 중국에 예속되어 있었던 조선에서 명과 청 사이에서 동요하거나 주전론과 주화론 사이에서 갈등했던 사실은 독자적인 국익이나 국가 정체성을 세우지 못한 데서 기인하는 바와 같다. 현재의 한국이 북한과의 관계에 있어 늘 불완전한 국가형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측면도 존재한다. 한국은 북한을 배제한 자기충족적인 국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북한을 통합하고자 적극적으로 시도하지도 않는다. 그로 인해 한국 내에서 북한에 대한 극단적인 이견은 동일한 국가 내부의 허용할 수 있는 정치적 이견이라고 보기보다는 내전의 양상을 띤다. 남북한 간의 민족적 균열은 미국-일본을 한 축으로 하고 중국-러시아-북한을 다른 축으로 하는 이데올로기적 균열로 확장된다. 단순히 민족통일의 문제를 넘어서서 정치체제적 충돌이 존재한다. 이러한 양상은 자유민주주의체제로의 진입, 국민화, 한국전쟁,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를 거치면서도 여전히 국가를 해체하는 동력으로 작동한다.
불완전한 국가형성은 정치체제의 불안정성을 극대화한다. 민주화과정을 통해 자유민주주의체제에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세력들은 체제내 경쟁을 넘어서서 체제 자체에 도전하는 양상을 보인다. 선거결과를 흔쾌히 승복하지 않을뿐더러 비선거적 방식으로 정권교체를 추구하고, 더러 성공하기도 했다. 체제 내 경쟁을 통해 일단 집권하고 나면 정부구성을 통해, 정책변경을 통해 체제 자체를 재편하고자 시도한다. 즉, 주요 정치적 경쟁세력이 서로 다른 체제를 궁극적으로 추구한다. 즉, 국가체제와 정치체제를 감싸는 거대한 이념적, 사회적 합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조그만 사회적 갈등만 발생하더라도 사회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충돌로 나아가기 쉽다.
선진국 대열 반일종족주의 피해의식
분단 상처로 미래로 나가는데 발목
국가공동체 이탈 개인 여전히 불안
요컨대 대한민국은 일제식민통치와 남북분단을 경험하면서 국가와 국민의 정체성 형성에 극단적인 트라우마를 안고 있다. 이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선진국의 대열에 진입한 상황에서도 한편으로는 반일종족주의적 피해의식과 분단으로 인한 미완성의 민족국가라는 양단의 상처로 인해 미래로 나아가는 데 발목이 잡히고 있다. 과거사의 질곡에 빠져 일본이 경제협력과 정치적 연대가 가능한 아시아 유일의 국가라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실질적으로는 북한은 적대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로 거부하지도 감싸 안지도 못하는 형국이다. 국가는 현대의 개인들이 스스로의 삶을 유지하는 현실적으로 가장 강력하고 현실적인 공동체이다. 그럼에도 한반도에서는 권위주의국가와 사회주의국가라는 역사적 경험으로 인해 국가를 개인 및 시민과 충돌하는 부정적 공동체로 간주되곤 했다. 그러나 국가에서 이탈한 개인은 여전히 불안하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실제로 많은 국민들은 국가 안에서 성장해온 경험을 체화하고 있고, 현실의 정당한 공동체는 여전히 국가이기 때문이다.
2023-03-20윤상철[윤상철 칼럼] 산업화, 도시화 그리고 사회적 고립 지면기사
대한민국에서 '고독사'는 '고독사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제2항에 '가족, 친척 등 주변 사람들과 단절된 채 홀로 사는 사람이 자살 병사 등으로 혼자 임종을 맞고, 시신이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에 발견되는 죽음'으로 정의된다. 다른 나라에도 이러한 법률이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우리 사회에서 고독은 중대한 사회문제임이 분명하다. 고독사는 노년의 경제적 빈곤이나 청년의 장기실업 등이 낳는 사회적 고립의 극단적인 형태이지만 산업사회와 도시화, 그리고 익명의 대중사회로 변모하는 현대사회에서 고독한 개인은 일반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만은 이미 1950년에 '고독한 군중'이라는 책에서 현대적 고독을 설파한 적이 있다. 그는 시대변화에 따른 미국인의 성격변화를 '전통지향형', '내부지향형', 그리고 '외부지향형'의 3단계로 구분하고, 특히 외부지향형은 또래 집단이나 친구집단에 따라 행동하는 현대인으로 타자들에게 격리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내면적으로 고립감에 번민하는 사회성으로 정의한 바 있다. 다른 맥락에서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사회의 역사적 변환을 공동체적 '기계적 연대'의 사회에서 개인적 '유기적 연대'의 사회로 설명한다. 현대의 개인들은 인식하기 어려운 관계의 사회 속에서 고립되어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갑작스런 사회변화 극복 어려웠고
개인·자유주의 확산 분리 더 심화
스스로 대응하는 가치관·삶 갖춰야
산업화된 도시의 한국사회 역시 예외는 아니다. 명절이면 부모와 고향을 찾아 밥상에서 주고받던 설민심이나 추석민심이 정치적 풍향을 예고해주는 시대는 이미 사라졌다. 나이 든 사람들은 부모와 고향을 잃었고, 젊은 사람들은 그보다는 같은 세대 간의 랜선과 미디어를 통한 횡적 커뮤니케이션을 더 중시하게 되었다. 집산주의적 문화가 짙게 자리잡고 있었던 한국사회에서 그 공동체적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던 개인들에게 갑자기 불어 닥친 산업화와 도시화는 극복하기 어려운 도전이었다. 여기에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확산되면서 사회적 분리와 고립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구조조정과 해고, 그리고 퇴직 등은 경제적으로 빈곤한 장년층과 노년층을 낳고, 산업구조의 변화에 따른 청년실업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독신 청년들을 양산한다. 부모세대와 자녀세대 사이의 갈등은 모든 연령대에 걸쳐 발생하면서 부모와 자녀는 각각 고립된다.
대중 속에서 해체되고 고립된 개인들은 아직 개인주의나 자유주의로 무장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 필요한 물질적 기반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그에 따라 자아를 상실한 무력한 개인들은 사회적 조류에 쉽게 휩쓸리고 사회적 보호를 요청하기도 한다. 경제적 빈곤이나 정신적 공황 등에 대해서는 국가가 사회복지와 사회보호를 제공할 수도 있지만, 급격하게 1인가구가 늘고 있는 상황에서 그 대응은 더디고 비효과적이다. 각종 시민집단들도 도시 속의 공동체를 모색하였지만, 일부는 정치세력의 동원에 휩쓸려 들어가고 다른 일부는 과도한 정치적 무관심으로 고립된다. 일찍이 토크빌은 이른바 풀뿌리 조직이 미국민주주의의 자양분이라고 간파한 적이 있다. 현대의 사회운동 연구자들도 정치적으로 무관한 조직들이 많이 자생하는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더 발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 민주주의가 개인의 사회적 고립을 저지할 수 있지만 그 기대감은 점차 낮아지고 있다. 급격한 산업화 시기에 종교는 도시로 내몰린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을 포용하고 위로하면서 지방과 농촌의 공동체로부터의 이탈을 해소시켜 주었지만, 이제는 자본주의적 기업의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다.
국가·지방단체 소외된 개개인 포용
빈 구멍 투성이 공동체 방치 안된다
산업사회의 도시인들이 사회적 고립에 직면하게 되는 상황은 불가피하다. 개인 시민들은 스스로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고립에 대응하는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갖춰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고립되어가는 개인들을 포섭해야 하고, 사회는 소외된 소수자들까지 포용하는 공동체로서 작동해야 하며, 종교 역시 고립된 개인들을 다독이는 관심과 사회규범을 보여야 한다. 더 많은 사회적 포용기제들을 발굴해내야 할 것이다. 국가는 고립된 개인들을 방치하는 빈 구멍 투성이의 공동체일 수 없다.
2023-02-06윤상철[윤상철 칼럼] 실용적 권위주의로의 회귀? 지면기사
화물연대의 총파업이 정부의 업무개시명령과 함께 16일 만에 종료되었다.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후속 파업들의 여진은 남아있지만 대중들의 냉랭한 시선과 더불어민주당의 동요와 퇴각 속에서 오래 지속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아가 '노란봉투법' 개정이 불투명해지고 '불법적' 노조활동에 대한 손해배상 압력이 현실화되면서 노동조합의 환경이 더 열악해질 수 있다. 화물연대의 요구는 '안전운임제 일몰제 폐지와 적용품목 확대'였지만 관련 사안들이 두루 당사자들의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고,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 속에서 한국경제가 처할 물류대란을 우려하는 여론은 별로 호의적이지 않았다.
민주화 이후의 역대 정부들은 다원민주주의 하에서 목소리가 큰 사회집단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여 미봉적 해결을 취했던 데 반해, 현 정부는 '공정과 상식' 그리고 법치의 이름으로 이에 전면 대치하는 방식을 취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면을 보면, 지탱가능한 경제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부드러운 민주주의'를 포기하고 '실용적 권위주의'로 이행하는 양상이다. 과거에 '유신체제'와 '관료적 권위주의'를 만들어냈던 한국의 국가가 '포퓰리즘적 민주주의'로는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렵다는 인식도 확산되고 있다. 박근혜 정권의 시도는 대통령탄핵으로 붕괴하였지만 문재인 정권의 정책적 난맥상은 '비효율적 민주주의'로 전락하고 말았다.
민주주의체제, 정치·경제조직 동반
한쪽 파국땐 전체 사회 붕괴 이어져
국가공격에 포퓰리즘 지속 불가능
민주주의체제는 자원분배를 둘러싼 국가 성원 간의 전쟁을 선거로 대체하는 체제이다. 역사적인 민주화 이행의 과정을 보면 전제적 권위주의적 정치권력이 물리적 폭력을 통한 지배를 포기하는 한편, 저항적 피지배세력 역시 대중동원을 통한 정치적 폭동을 자제하면서 선거를 통한 정치권력의 장악과 교체를 수용하는 거대한 합의가 이루어질 때에 가능해진다. 이 과정을 통하여 사회경제적 자원의 정치적 분배 및 재분배가 자연스럽게 조정된다. 민주화 이행의 초기에는 정치적 목소리의 공간을 넓혀주기만 해도 충분했던 단순한 정치적 대립구도는 민주화와 자유화가 확장되면서 잠재해 있던 사회집단들의 요구가 분화하고 폭발하게 되면 매우 복잡다단해지게 된다.
이 민주주의체제는 기본적으로 정치체제이지만 동시에 경제체제와 동반한다. 즉, 진화하는 정치체제를 부담할 정도로 경제체제가 잘 작동하는가의 문제이다. 아무리 훌륭한 민주주의체제도 허약한 경제체제를 받쳐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 사회의 정치체제와 경제체제가 동시에 지탱가능한 체제로 발전하지 않는 경우에 어느 한쪽에서 파국이 발생하면 그 파국은 전체 사회의 붕괴로 가기 마련이다. 기본적으로는 그 국가의 국민들이 경제적으로 생존가능한 체제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정치적으로도 파국을 맞게 된다. 처음에는 포퓰리즘적 국가 혹은 권위주의적 발전국가로 나아가지만 극단적으로 국민의 생존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우에는 국가체제의 붕괴나 전제적 독재국가로 나아갈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민주주의체제의 비효율성 혹은 비효능감을 먼저 목도한다. 국민적 요구의 정치적 과잉과 국가의 미흡한 경제능력이 민주적 정치체제에 대한 불신을 초래한다. 대중들의 국가공격에 대해 정치권력은 포퓰리즘으로 대응할 수 있지만 지속적일 수는 없다. '더불어민주당'의 정권이 그러한 대응방식을 취했지만 결국 정권재생산에 실패하는 것과 같다. 이 경우에 서로 다른 정치세력 간의 타협과 조정, 그리고 지지자 집단과 국민 전체에 대한 설득이 이루어지면 되겠지만 개방된 민주주의에 익숙한 국민들은 스스로에게 불리한 제안들을 수용하기를 거부한다. 결국은 국가의 강제력에 의한 통치가 실용적 권위주의라는 이름으로 비효율적 민주주의를 대체한다. 아마도 '국민의 힘' 정권은 사회집단의 모든 요구에 응하기보다는 경제체제의 존속에 유의하면서 선별하고 조정하고 억압하는 방식으로 대응할 것이다.
국민들 불리한 제안 수용하기 거부
동원된 민주주의로는 지탱 어렵다
정치체제나 경제체제는 모두 국민들이 참여하고 조직하고 운영하는 체제이다. 모든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유지하려면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체제의 한계 혹은 효율성을 인식해야 한다. 모든 체제는 기본적으로 자기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경제체제 하에서 확보된 중계적 위치 속에서 국가의 생존을 이어가는 대한민국이 목소리가 큰 집단들이 더 많아지는 '들뜬 혹은 동원된 민주주의'로는 지탱하기 어렵다. 민주주의에 능률을 더하는 방식이 법치를 내세운 '실용적 권위주의'의 외양을 띠게 될 것이다.
2022-12-12윤상철[윤상철 칼럼] 코로나 이후의 새로운(?) 삶 지면기사
코로나 팬데믹이 지속되는 동안, 언론과 학계에서는 코로나 이후의 사회적 삶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의가 코로나 특유의 비대면 대화를 통해 자못 진지하게 이루어졌다. 근본적인 변화가 이미 발생했고 설사 코로나가 종결되더라도 과거로 돌아가기는 어렵다는 견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와중에도 사람들은 관성적으로 자기 나름의 삶을 회복해갔다. 코로나 이전에 비해 위축되어 있었지만 '호모 사피엔스(슬기로운 사람)'는 물리적으로 뛰어난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를 뛰어넘는 '소통'능력을 잊지 않았다. 생존을 위한 소통을 넘어서 집단지성의 창의성 또한 꿈틀거리는 본능이었다. 마스크에 호의적이지 않고 자유를 중시하는 서구인들이 축구와 야구 경기장에서 보이는 모습은 또 한 번의 유행을 경고하는 와중에서도 활기에 넘쳐 있어서 이미 코로나의 공포에서 벗어난 듯하다.
사회 마다의 역사와 문화는 코로나 팬데믹 속에 적응하는 방식을 서로 다르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코로나가 다소 약해지면 사람들은 곧바로 그 이전의 삶을 다시 드러냈다. 한국인들처럼 집단주의적 심성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국가의 강제적(?) 격리를 규범적으로 수용하는 한편, 과거에 비해 소수의 사람들이 어울리는 심도있는 교류방식을 만들어낸 듯하다. 향후에 한국인들은 떼를 지어 모여서 노래하고 즐기는, 그러나 그 규모는 친밀도 높은 소수를 취하는 변화를 선택할지도 모른다.
재유행 경고에도 서구인들은 활기
결혼정보회사 '동질혼' 늘어나고
고독한 시민은 가족과 소통 갈구
결혼정보회사를 통한 동질혼이 상당한 수준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20대 중후반에 이루어지는 결혼에는 스스로의 사회적 교류와 감성적 유대가 중요했다면, 30세를 훌쩍 넘겨 이루어지는 결혼은 긴 사회적 단절과 과도한 직업활동으로 인해 이들을 엮어주는 제3의 제도를 필요로 하였다. 잠깐이나마 코로나 팬데믹이 사회적 교류의 장을 제한했었다는 편의적 설명이 억지스럽지만 부가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결혼방식이 압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배경은 다른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결혼정보회사 혹은 소수의 상류층을 대상으로 하는 비공식적 중매제도는 한국사회의 계급구조가 정착되기 시작한 1980년대 이래 이미 제도화되고 있었다. 상류층 사람들은 중산층이나 하류층에서 올라오는 '신데렐라'나 '개천의 용'이 불편했을 수도 있다. 반면 중산층이나 하류층의 내부분화는 미미해서 실질적인 이질혼이 비교적 쉽게 이뤄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부동산 가격의 폭등, 노령화로 인한 노후비용의 증가, 출산 및 양육 등의 비용 증가 등으로 인해 중산층 내부에서도 질적인 분화가 급속하게 심화되었다. 이제 결혼은 결정적인 위험(danger)에 노출되어 있어서 위험(risk)이 매우 큰 도전이다. 사람들은 그 리스크가 위험으로 전화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애완 대신 '반려동식물' 지위 얻어
비인간 소통대상 확대 변화 가속화
노령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결혼연령이 늦어지며, 비혼이 증가하면서 세대 구성원의 수가 줄어들어 1·2인 가구의 비율이 64.1%에 이르고 있다. 이미 지방에서도 1·2인 가구에 특화된 소형주거시설이 각광받고 있다고 한다. 3세대 이상의 대가족 구성은 더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동일한 공간 안에 거주하는 가족간의 소통은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다. 비단 도시인만이 아니라 온 국민이 사회에서 벗어나 일상화된 고독을 느낀다. 그야말로 '고독한 군중'의 모습이다. '고독한 시민'들은 가족과의 동반과 소통을 갈구한다. 그러나 사람 가족이 아닌 동물 가족이 그 자리를 메꾼다. 개나 고양이와 같은 친숙한 동물뿐만 아니라 토끼, 패럿, 기니피그, 햄스터, 다람쥐 등 포유류 외에도 조류, 어류, 파충류, 양서류, 갑각류 등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더이상 애완동물이라 부르지 않고, 자유의지와 권리를 가진 반려동물의 지위를 얻어가고 있다. 이와 더불어 관상적 필요나 공기정화 등의 기능을 넘어서는 반려식물도 급격하게 확산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은 인간들간의 사회적 교류를 제한함으로써 이러한 고독을 더욱 심화시켰는지도 모른다. 반려동물과 더불어 사는 어려움 때문에 반려의 대상이 더욱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더욱 정적인 삶이 더 독백적이고 정적인 대화를 가능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사회는 이미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개인화와 개인주의화가 지배적이고, 직접적인 교류가 사라지고 간접적인 교류를 통해 결합하며, 그를 대신하는 비인간 소통대상이 확대되는 그러한 사회적 삶이 점차 지배적이 된다. 2년 이상에 걸친 코로나 팬데믹은 이러한 변화를 더욱 가속화했지만, 그 이전부터 사람들은 그 방향으로 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2022-10-24윤상철[윤상철 칼럼] 다규범사회, 무규범사회 지면기사
보호종료아동(?)의 연이은 불행에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다. 이 사회문제는 갑작스럽게 발생한 사안이 아니다. 두 청년의 죽음으로 촉발되었으나 주기적으로 제기되었고 그 대안들이 재탕삼탕 거론되었으니 말이다. 또 한번 신문과 방송을 소비하다가 사라져 갈 것이다. 이들을 담당했던 구청 아동복지과 직원들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외로움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그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경제적 추가 지원이 아니라 정신적 멘토라고 말한다. 아마도 정부는 이들에 대한 사회복지예산을 증액하는 수준에서 생색만 내고 덮으려 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미 18세를 넘어선 사회적 성인인 이들에게 정신적 멘토링이 가능할지는 의심스럽다. 이들을 아동취급하는 언론의 시선도 그렇거니와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소년시절에나 필요할 듯한 수준의 멘토링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마땅치 않다. 젊은 대학생들에게 부모나 교수들, 심지어 선배들조차 영향력있는 타자들이 아닌 이 사회에서 과연 멘토링이 가능할까? 사실 그들은 자신들을 이끌 아무런 규범도 없는 상태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른바 아노미현상은 사람들이 자신의 사고와 행위를 이끄는 옮고 그름의 기준이 없는 상태이다. 사실은 극심한 사회변동으로 다양한 규범들이 충돌하면서 사람들이 어느 규범을 따라야 하는지 선택할 수 없는 상태이다. 에밀 뒤르껭이라는 프랑스의 사회학자는 이러한 아노미상태에서 자살, 범죄 등과 같은 사회적 일탈이 발생하고 그러한 일탈행위들이 전면화되면서 사회적 해체로 나아간다고 보았다. 로버트 K. 머튼이라는 미국의 사회학자는 문화적 목표와 제도적 수단간의 괴리로 인해 일탈이 발생하고 사회적 통합이 지연되는 상태를 아노미로 보았다 민주화운동 시절에 이른바 운동권 학생들은 민주주의라는 문화적 목표를 위하여 국가보안법이라는 제도적 수단을 거부하는 개혁의 태도를 취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스승에 대한 예를 취하고 도로교통법을 준수함으로써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의 규범을 가지고 있었다.
여당대표, 일탈적 행위 인정보다는
'당내 권력갈등 피해' 동정심 유발
오늘날 민주화된 한국사회에서는 규범의 부재 혹은 목표규범과 수단규범간의 괴리도 아닌 특이한 아노미적 일탈이 눈에 띄고 있다. 여당의 대표는 장유유서와 같은 전통적 사회규범은 물론 이른바 성상납과 그 은폐시도와 같은 일탈행위로 인해 당 윤리위원회의 징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징계 만료 이후에 당대표로 다시 복귀하고자 한다. 또한 이를 방해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도를 넘는 비난과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 야당의 대표는 무고와 공무원자격사칭, 도로교통법 위반, 특수공무집행방해, 선거법위반 등의 전과를 저지르고도 시장과 도지사를 역임했고 선거법 위반, 배임 뇌물 등의 부패혐의, 사법부 매수 및 변호사비 대납 등 의혹과 검찰수사에 처해 있으면서도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였고 이제 국회의원 및 당대표에 당선되었다. 규범을 편의적으로 차용하는 모습들이다.
여당 대표는 일탈적 행위 자체를 인정하기보다는 당내 권력갈등의 피해자로 자처하면서 당원과 국민들의 동정심과 지지를 유발시키고자 한다. 야당대표는 기존의 전과행위에 대해서는 공익구현을 위한 수단으로 정당화하였고, 현재 상황에 대해서는 여권의 정치보복으로 둔갑시키면서 차기 집권과 국가발전을 위해 자신의 역할을 부각시키는 방법으로 방어하고 있다. 사실 이들의 일탈적 범죄는 그 자체로서 사회적으로 용인되기가 어렵고, 그들이 내세우는 민주주의의 수호나 국가발전을 위한 불가피한 수단으로 수용하기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여전히 자기의 범죄적 일탈을 인정하지도 않고 이를 사과하지도 않는다. 또한 양당의 당원들과 일부 국민들은 여전히 이러한 일탈을 문제삼지도 않고 오히려 정치적으로 더 강하게 지지하기도 한다.
野대표, 전과 공익구현 수단 정당화
'與 정치보복' 둔갑시켜 자신 방어
규범 충돌속 아노미상태 빠지면 안돼
과거와 달리 정치지도자들의 도덕성 수준이 반드시 높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종교지도자나 교육자들의 도덕성에 대해서도 사회적 관용의 수준이 높은 사실을 감안하면 정치지도자들에게는 더 관용적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이 사회의 정치지도자들은 여전히 국민들의 도덕적 전범(典範)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결국 이 사회는 개인의 수준에서 괴리되거나 충돌하는 서로 다른 규범수준을 용인하게 되고, 일반시민들은 충돌하는 규범들 사이에서 편의적, 이율배반적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정치지도자들은 도덕적 존경의 대상은 아니지만 도덕적 규범을 회피하기 위한 영향력있는 타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국가의 사법제도가 이들의 일탈을 징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사회규범이 변화할 수는 있지만 아노미상태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2022-09-05윤상철[윤상철 칼럼] 팬덤과 진영의 정치, 그리고 정치의 몰락 지면기사
더불어민주당의 젊은 비대위원장은 '당을 위기에 빠뜨리는 강성 팬덤 대신 국민 곁으로 조금 더 다가가는 혁신'을 촉구했다. 아마도 정치인에 대한 팬덤은 정치를 비이성화, 극단화, 폭력화 함으로써 정치 자체를 왜곡시키거나 몰락시킬 수 있다는 자각에서 나온 발언으로 보인다. 그가 말하는 팬덤 정치는 그 발생과 고조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 그 대상이 비도덕적 범죄자라 할지라도 그릇된 정책과 정치로써 국가와 국민의 파탄을 초래해도 팬덤의 정서는 가라앉지 않는다. 지지자에 대한 팬덤은 그 반대자에 대한 공격적 비난과 폭력적 증오로 나타나기 쉽다. 어느 쪽이나 비이성적 진영론으로 포장된다. 진영대립의 어느 쪽인가가 중시될 뿐 진영 자체의 정치적, 이성적 근거를 반성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더 심각한 결과는 한 진영의 팬덤에 대한 반작용으로 다른 진영도 팬덤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팬덤과 팬덤의 대결은 정치와 정책을 극단화하고 대화와 토론의 민주주의를 협애화하고 타협과 조정의 정치를 타락시킨다.
'팬덤 vs 팬덤'은 정치·정책 극단화
대화·토론의 민주주의 협애화 시켜
새로운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이 30% 초반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조만간 국정운영 동력은 동요할 거라고 예견된다. 보수와 중도 유권자들조차 등을 돌리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물론 야당 지지자들의 95% 이상이 '묻지마 반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간과된다. 그들은 지난 대선에서 자신들이 지지한 후보를 더 많이 지지하기도 한다. 취임 초반의 정치적 허니문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170석에 이르는 야당은 여당의 115석을 제외한 나머지를 아우르는 의회독재조차 가능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당시보다 훨씬 손쉽게 탄핵을 할 수 있다는 협박이 나돈다. 언론 역시 새 대통령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은 그야말로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과거에도 우리 정치사에 유사한 상황은 존재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초기에 보수 정치세력과 보수 언론에 의해 조롱당하다시피 했다. 대통령 폄하가 국민스포츠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야당과 반대세력에 의한 광우병 선동으로 한때 20%대에 머무르기도 했다. 공고한 지지층이 있었던 박근혜 대통령도 임기 초기에 지지율 하락을 겪었다. 팬덤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나름대로 지지층이 공고했던 노무현과 박근혜의 지지율은 일시적으로 요동쳤지만 기술적 업무수행능력으로 인정받았던 이명박은 정권의 몰락을 염려할 지경이었다.
새 대통령은 독자적 팬덤에 기반한다기 보다 이전 정권에 반대하다가 정치적 핍박을 받으면서 반사적 인기를 얻어 현재의 지위에 올랐다. 야당지지자들은 새 대통령에 기대를 걸기보다는 이재명 전 후보의 좌절을 안타까워하는 정서에 동원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 집권세력은 두 가지의 유혹에 흔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첫째, 야당의 팬덤들을 붕괴시키는 방안이다. 우연히도 전임 대통령이나 야당 대선후보 모두 사법적 위기에 너무 많이 노출되어 있다. 전임 대통령은 집권 시에 경쟁하는 반대 정치세력에 대해 관용적이지도 않았고, 스스로의 권력행사에 있어서 법률적 한계를 넘어설 정도로 자제력이 없었다. 야당 대선후보는 지방자치단체장으로 재직시에 뇌물 등 부정부패와 연루되어 있고, 대법관 매수와 변호사비 대납 등 사법권 유린의 의혹에 싸여 있다. 둘째, 스스로 팬덤을 만들어가는 방법이다. 특정한 사회세력을 동원할 수 있는 배타적 국가정책을 포퓰리즘적 수준에서 집행함으로써 그들만의 지지에 기대지만 사회를 극단적으로 분열시키는 방안이다. 전임 문재인 대통령이 임기 내내 대선 당시의 지지율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다.
사회분열 기댄채 편향 가능하지만
통합없는 두 국민 국가로 '악순환'
지지·반대자 수용 이성적 판단 필요
사법적 팬덤 해체는 정치적 반대의 동원을 사전에 차단하는 방법이지만 스스로의 정치·정책적 비전과 전략이 없는 손쉬운 방법으로서 순환적인 정치보복의 달콤한 마약에 빠지기 쉽다. 이전 정권이 스스로의 국가운영에 대한 국민적 토론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었던 방법이기도 했다. 사회분열에 기대어 스스로 팬덤을 만들 수는 있지만, 사회통합 없는 두 국민국가를 만들어 정치적 악순환을 이어나가는 정치적 결과를 낳게 된다. 그 결과 정치적 지지는 유지할 수 있지만 극렬한 반대자들과 대결해야 한다. 지지자들과 더불어 정치적 반대자들도 어느 정도는 수용하게 되는 이성적, 합리적 정치를 만들어내는 일이야말로 인권과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 등 보편적 사회가치를 이 나라에 실현해내는 첫걸음이다. 이성적이고 민주적인 국민들이 '국민 모두의 대통령과 정부'를 그나마 현실적인 수준에서 만들어낸다.
2022-07-18윤상철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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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철 칼럼] 어떤 '자유'? 지면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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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철_-_기명칼럼필진.jpg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제20대 윤석열 대통령의 독특한 취임사가 관심을 끌고 있다. 역대 대통령들의 취임사들은 대부분 각 영역별 공약들로 구성되어 있던 데 반해 윤 대통령의 취임사는 대한민국의 체제와 국제사회의 연대를 이끌어갈 보편적 가치인 자유, 인권, 공정, 연대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특히 무려 35번이나 사용된 '자유'는 이전 정부가 시도했던 헌법개정안에서 삭제되었던 표현으로 두 정부 간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기존의 취임사들은 지지자들을 동원하는 데 사용했던 공약들을 사회통합의 관점에서 확장하였다면, 윤 대통령의 취임사는 이념 및 가치의 측면에서 대선캠페인의 연장 선상에 있다.
그렇다면 이 취임사의 자유란 과연 무엇인가? 한국법제연구원에서 제공하는 헌법 전문의 영문번역에 따르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the basic free and democratic order), '자유와 권리'(freedom and rights), '자유와 행복'(liberty and happiness) 등에서 '자유'라는 말을 서로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 이에 비해 대통령 취임사의 다중적인 자유는 대부분 'freedom'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자유로운 정치적 권리, 자유로운 시장이 숨쉬는 곳…'의 자유와 '어떤 개인의 자유가 침해되는 것이 방치된다면 나와 우리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자유마저 위협…'의 자유는 의미있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게다가 '번영과 풍요, 경제적 성장은 바로 자유의 확대', '자유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준의 경제적 기초, 그리고 공정한 교육과 문화의 접근기회가 보장되어야…'는 표현은 더 근본적으로 자유를 가질 수 있는 능력과 노력을 언급하고 있다.
현 사회 '자유로운 시장' 기준에서
자유가 답-자유만이 답 아니라는
사람들간 격렬한 진영 갈등 만연
한국어로 똑같이 '자유'로 표현되지만 영어의 'Freedom'과 'Liberty'는 상당히 다른 의미를 지닌다. Freedom은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권리로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상태를 말한다. Liberty는 지배, 권위 등으로부터의 자유이자 합법적인 권리로서의 자유를 말하며, 과거에 존재했던 지배와 억압을 암시한다. 또한 자유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조건으로 하고 다른 이들의 권리에 따라 일부 제약을 받는다. 실제로 자유권이 국가에 앞서고 국가를 초월하는 자연법상의 권리이냐, 또는 실정법에 의해 승인된 실정법상의 권리이냐에 관해서도 학설상의 대립이 존재한다. 즉, 포괄적인 권리인가 아니면 헌법이 규정하는 개개의 자유권만이 있는가가 문제된다.
천부적인 자유와 합법적 권리로서의 자유는 본질적으로 인간과 인간, 그리고 국민과 국가 간의 문제이다. 실제로 우리 헌법에도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는 다소 유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필요 외에도 인간은 '자연으로부터의 해방 혹은 자연의 지배로부터의 자유'의 문제를 안고 있다. 인간은 과학과 기술, 생산과 경제를 통하여 자연의 가혹한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또한 일국적인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국가 간의 문제에 의해서도 자유로워지고자 한다. '자연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경우도 많고, 천부적인 자유라 해도 여러가지 이유로 유보되기도 한다. 또한 특정한 이념을 표방하는 국가주의로 인해 국민의 자유는 억압되기 쉽다.
우리 사회는 여러가지 억압에 의해 자유를 박탈당해 왔다. 국가공동체의 경제적 생존을 위한 국가의 억압은 발전국가, 관료적 권위주의국가, 군부권위주의 체제 등으로 나타났다. 공동체의 정치적, 주권적, 군사적 생존을 위해 천부적 자유들까지도 너무 쉽게 짓밟혔다. 자유대한의 이름으로 자유를 억압하고 '사람사는 세상'이나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도 자유를 억압한다는 사회적 저항에 직면했다. 시장자본주의가 만드는 다두제적 다원민주주의 체제는 경제적 불평등의 사회적 심화를 막아내지 못했고, 그 결과 민주주의를 가로막은 것은 반지성주의가 아니라 자유시민의 경제적 기초와 삶의 기회가 열악했기 때문이었다.
이젠 지속가능 체제로 실현 가능한
'합법적 권리로서의 자유' 확장해야
현재 우리 사회는 '자유로운 시장'의 기준에서 자유가 답이라는 사람들과 자유만이 답이 아니라는 사람들 간에 격렬한 진영갈등을 벌어지고 있다. 모두가 자신의 자유를 천부적, 포괄적 Freedom으로 주장하면 서로의 자유가 마주치는 경계에서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그 결과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는 체제로서의 안정성을 잃는다. 직전의 두 정부는 각각의 경계를 이미 시도해보았고, 스스로도 국민들도 대안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였다고 본다. 이제 우리 사회는 '천부적 자유'에 근본주의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지속가능한 사회체제와 이를 가능하게 하는 '합법적 권리로서의 자유'를 확장해가는 데 합의해야 할 것이다.
2022-05-30윤상철[윤상철 칼럼] 균열은 폭발하고 통합은 멀어 지면기사
미국의 대학원에서 저명한 노교수의 사회학 강의를 청강한 적이 있다. 사회균열이 정당 및 정치적 대표성에 어떻게 반영되는가를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강의 중간중간에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한 여학생은 젠더적 시각에서 이를 재해석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대부분의 경우에 교수는 '뭐 그렇게 볼 수도 있지' 정도의 반응을 보여주었다. 20년이 훌쩍 지난 일이었지만, 교수와 여학생의 관점이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음을 지금도 기억한다. 오늘날 한국의 대학에서 교수들은 페미니즘으로 무장한 학생들이 자신의 강의를 감시하듯이 지켜보고 있다고 더러 푸념하기도 한다. 최근 벌어진 여성가족부 폐지를 둘러싼 거친 공방도 우리 사회의 젠더갈등이 극에 달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회균열은 비단 젠더균열만이 아니다. 군부권위주의체제를 경험한 한국 사회에서 이른바 민주 대 반민주의 사회균열은 거의 30여 년을 지배했고, 그러한 균열에 기초한 정치적 언어들이 여전히 사용된다. 기득권 적폐세력이니 신적폐세력이니 하는 언어들은 상대를 경제적, 정치적 독점세력으로 다중적으로 규정하지만 민주 대 반민주의 프레임을 벗어났다고 보기 어렵다. 이를 뒷받침하면서 한국 현대정치사를 가로지르는 가장 구조적인 균열은 지금도 여전히 작동하는 지역균열이다. 이 지역균열은 보수 대 진보라는 프레임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산업화기의 불균형발전과 광주의 역사적 경험에 뿌리를 두고 지역차별 담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산업발전단계가 부분적으로 제4차 산업혁명에 이르고, 경제가 저성장기조를 유지하면서 일자리와 주거공간을 둘러싼 세대균열 또한 엄청난 갈등으로 치닫고 있다. 젊은 세대들은 취업난과 불투명한 미래전망을 내세우지만 나이든 세대들은 그들의 지위를 과도한 기득권으로 보지 않는다. 이에 대해 양 세대를 만족시키려는 포퓰리즘적 대안은 현 정부 하에서 그 한계를 명확하게 드러내었다. 성장과 환경의 균형에 초점을 둔 생태주의적 균열 역시 그 뿌리는 명확하지 않지만 상당한 수준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 결과 탈원전을 둘러싼 갈등은 실용적이고 과학적인 대안도 없이 정치화되었다. 물론 이러한 사회적 균열의 기저에는 자본주의사회의 계급균열이 자리잡고 있다. 서구적인 계급갈등과 계급정당체제는 아니지만 노동계급과 자본계급을 양축으로 하는 사회균열이 자리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산업발전 단계에 따른 비정규직 등 고용문제, 경제의 대외의존성 등을 고려한다면 계급균열을 정치적으로 대표하는 문제는 매우 복잡해진다.
이상적으로 보면, 자유민주주의사회의 대의체계는 이러한 다중적인 사회균열을 중첩적으로 짜깁기한다. 사회경제적 집단들간의 정치적 대표성과 더불어 젠더, 민주주의, 지역, 세대, 생태주의 등에 따른 사회균열을 정치적으로 대표할 수 있도록 정당과 정치세력을 구성한다. 제도권 정치체계와 거리를 두고 시민사회 내의 다양한 목소리들이 정치적으로 스스로를 대표한다. 그 이유는 제도정치의 대표성이 가장 주요한 사회균열에 집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엘리트와 대중간의 균열이라는 한계를 지니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 후보·정당·사안 입장 팽배
진영 따라 젠더균열도 좌우균열도
모두 뭉뚱그려졌고, 시민사회 역시
정치진영 안으로 복속되어 버린 것
그 결과 정치에 대한 불신은 더 커져
이번 대통령선거는 거대한 진영간 대결이었다. 막역하던 친구들조차 정치적 지지진영이 다를 경우 연락을 차단하기까지 했다. 대통령선거가 치러질 때마다 서로 지지후보가 다른 사람들간에 말다툼에 주먹다짐까지 벌어지곤 했지만 선거가 끝나고 나면 그런 표면적인 갈등은 사라지곤 했다. 그 이유는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 그리고 선거를 사회적 균열과 갈등을 통합하는 방안, 혹은 잠정적인 해결책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 선거처럼 후보와 정당, 그리고 사안에 대해 전혀 다른 해석과 입장이 팽배하게 맞서고, 선거 이후에도 단 하루의 허니문도 없이 탄핵이나 청부살인까지 거론되는 경우는 없었다. 심지어 당선자의 직무수행에 대한 기대감이 선거지지율을 약간 상회하고 낙선자와 그 정당 지도부가 곧바로 정치일선에 다시 등장하려는 경우는 이제껏 본 적이 없다.
더욱 심각한 민주주의의 위기는 그 근거도 명확하지 않은 거대 양진영간 균열 안에 다른 사회균열들이 다 휩쓸려 들어가 버린 것이다. 여러 사회균열과 그에 바탕을 둔 사회정치적 갈등이 서로 교차하면서 일시적인 연합을 만들어낼 수는 있지만, 지난 5년의 시간 동안 만들어진 진영갈등 속에서 다른 사회균열이 그 정치적 해소의 출구를 찾지 못하고 흡수되어 버린 것이다. 진영을 따라 젠더균열도 지역균열도 환경균열도 좌우균열도 모두 뭉뚱그려졌고, 시민사회 역시 그러한 정치진영 안으로 복속되어 버린 것이다. 그 결과 우리 사회의 정치적 동원은 엄청나게 활성화되었지만 그 무능과 비효능감으로 인해 정치에 대한 혐오와 불신은 더욱 커져만 가고 있다.
2022-04-11윤상철[윤상철 칼럼] 법의 지배, 정치보복과 적폐청산
최근 적폐청산인가 정치보복인가를 둘러싸고 윤석열 대통령 후보와 문재인 대통령간에, 그리고 여야간에 격렬한 공방이 일었다. 한 일간지 인터뷰에서 윤 후보는 전 정권 적폐청산 수사를 묻는 질문에 "대통령이 관여 안 하는 시스템에 따른 수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답했다. 이에 문 대통령은 분노를 표명하고 사과를 요구했다. 여당은 정치보복을 예고했다고 비판했고, 야당은 원칙론적 표명에 명백한 선거개입이라고 반박하는 등 여야간에 확전이 거듭되는 듯싶더니 점차 잠잠해졌다. 대통령선거를 불과 1달 남기고 양 진영이 벌인 지지자 결속용 선거전략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거나 내로남불식 전략의 한계였다는 등으로 해석되고 말 일은 아니다.
하버드 대학의 정치학자 레비츠키와 지블랫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라는 저서에서 민주주의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경쟁자들에 대한 상호관용과 제도적 권력행사의 자제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또한 이러한 정신과 태도가 사회구성원들에게 규범으로 내면화되어야 한다고 설파한다. 민주주의 자체가 심지어 적대 세력간에 평화적 공존이라는 점에서 서로 다른 세력에 대한 상호관용이 부재할 경우에는 선거가 아닌 내전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설사 내전에 이르지 않더라도 이른바 '적폐청산'과 같은 정치보복이나 극단적인 진영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 정치적 상대를 민주주의 체제의 구성원이 아닌 배제되어야 할 적으로 간주하는 경우이다.
가장 심각한 국가기구 파괴는
'검찰개혁' 미명 그나마 남아있던
법 수호세력 검찰마저 종속시킨 일
그렇다면, 정치세력이나 사회세력의 불법적인 행위조차 무조건 관용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남는다. 이를 바로잡는 민주주의의 또 다른 요소는 이른바 '법의 지배'이다. 법 자체가 경기의 규칙이고 그 법의 지배는 규칙을 어기는 구성원에 대해서는 법적 제재를 가해야 한다. 그러나 정치권력이 제도적 자제력을 상실하고 정치적 이념이나 이익에 따라 최대주의적 법률해석에 의거해 권력을 남용하고, 그로 인해 다른 구성원의 인권과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요컨대 민주주의는 상호 관용에 의거하여 제도적 자제력을 발휘할 때에 법의 지배를 무너트리지도 정치보복으로 나아가지도 않게 된다.
대한민국의 최근 정치사를 되돌아보면 제왕적 대통령제에 의한 권력남용이 극심하였고 이에 대한 사후적 법의 적용은 정치보복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었다. 그 결과 정권이 바뀐 후에는 항상 '법의 지배'를 적용하는 일련의 과거 청산적 정치과정이 존재했다. 이 경우에도 대부분의 정권들은 상호관용 정신을 잊고 적폐청산을 통해 스스로의 정당성을 찾고자 했고, 이후에는 스스로 자제력을 잃고 또다시 권력남용을 행하기 일쑤였다. 일련의 사법적 과거 청산은 불법적 권력남용과 그로 인한 인권침해 등에 대한 정상화 및 사후 복원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그러나 권력남용의 가해자들은 정치보복으로 항변하기 마련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스스로 죽음으로써 자신을 정치보복의 피해자로 둔갑시키곤 했다. 결국 정치권력의 불법적 남용, 다시 말하면 상호관용과 제도적 권력 자제의 부재가 이후의 정치과정에서 자제되는 순기능적 자정으로 나아가지 않고, 늘 정치적 쟁론의 주제로 떠오르거나 정치보복을 다짐하고 당연시하는 역기능적 폭발로 이어졌다.
정치보복, 민주주의 무너트리지만
'법의 지배'까지 버릴 일은 아니다
특히 심각한 사실은 민주주의 존속에 필요한 국가적 기능들, 즉 정치적 경쟁의 심판자들을 특정 정파에 종속시키는 민주주의 자체의 파괴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사법부, 감사원, 선거관리위원회, 헌법재판소 등 헌법상 독립기구이자 정치의 심판관들을 특정 정치세력에 예속시킴으로써 집권세력의 권력남용을 심판하고 제재할 국가기구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가장 심각한 국가기구 파괴는 이른바 '검찰개혁'이라는 미명 아래 그나마 남아있던 '법의 지배' 수호세력인 검찰마저 종속시킨 일이다. 현 집권세력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권력남용에 대한 현재와 미래의 심판을 원천적으로 막아내기 위한 불가피한 예방조치였지만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 정화기구들을 다시 복원시킬 정도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된다. 정치보복은 민주주의를 무너트리는 적이지만, 그렇다고 '법의 지배'까지 버릴 일은 아니다.
2022-02-21윤상철[윤상철 칼럼] 국가행정 부재의 정치 지면기사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가르친다. 국가와 정치는 그러한 계급투쟁의 내용이자 외양이라고 한다. 그들은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하면 계급이 사라지고, 국가와 정치도 사라진다고 주장한다. 설사 그러한 사회에서도 사람들의 삶의 수요를 충족시키고 분배를 해결하는 행정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욕구를 알 수 없고 적정한 분배를 가늠할 수 없고 사람들의 계획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질 행정은 고도의 계산과 방정식을 해결해야 하는 수학, 통계학과 이를 일선에서 전달해야 하는 엄청난 행정요원들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장과 정치는 이러한 복잡한 사회측정의 대체도구로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K방역은 없다'라는 책이 발간되었다. 'K방역은 과연 존재했나?'는 근본적인 질문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전문가들이 우리나라 의료방역정책에 대해서 다각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그 가운데 중요한 질문은 코로나19 방역정책이 누구 혹은 어떤 기구에 의해서 분석되고 입안되고 집행되었는가의 문제이다. 군복을 걸친 오바마 대통령이 전체 작전을 지휘하는 군지휘부의 뒤편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다소 생경한 사진을 목도했던 우리 국민들은 K방역도 전문가들의 주도하에 과학적 근거에서 진행되었던가 묻고 있다. 의료전문가와 보건행정가들이 전면에 나서는 듯하지만, 최종 단계로 갈수록 정치적인 결정과 정치적 홍보가 주도하지는 않았는지 의심스럽게 쳐다보고 있다. 정치 과잉의 나라에서 의료정책의 전문가들은 최종적으로 결정된 정치방역을 정당화하는 도구 수준에 머무르지 않았는지 묻고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적 유물론에서 봉건체제에서 자본주의체제를 거쳐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로 발전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특히 자본주의는 인간사회의 생산력을 획기적으로 높임으로써 인간의 경제적 삶의 질을 높인다고 한다. 그 높은 생산력을 이루기 위해서 높은 노동생산성은 필수적이지만 그러한 노동규범은 자연발생적이지 않고 고도의 관리감독체제하에서 가능할 뿐이다. 자본주의적 착취를 건너뛰기 위한 스타하노프운동이나 대약진운동, 천리마운동 등은 사회주의적 노동규범으로 생산성을 높이려는 시도들이었다. 양질의 사회복지도 높은 생산성의 선진자본주의사회에서 가능했던 만큼 자본주의 이후의 대안적 체제는 높은 생산성이 필수적이라 볼 수 있다. 높은 생산성은 정치적 흥정이나 공동체적 자발성으로 성취하기 어렵다.
민주주의 선거는 정치적 이념 전장
비현실적 이념적 정책 내세워서
현실적인 관료·행정 백안시하는
정치집단은 반드시 실패하기 마련
정치인들 유능한 행정 하도록 해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을 때에, 자본주의 시장생산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드는 첫 번째 질문은 '과연 만들어진 상품은 다 팔릴까', 즉 가치 실현의 문제이다. 그 전제가 합당하지 않으면 그에 기반한 노동가치, 잉여가치 혹은 착취 등의 이야기들은 가당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일국의 시장에서 실현되지 않으면 전 세계의 시장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뒤따른다. 왜 국제관계가 정치체제와 사회이념으로 (군사적) 동맹과 적대를 만들어내면서도 근본적으로 철저한 경제적 실리를 바탕으로 진행되는가를 설명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정치적 이념이나 가치는 뒷전일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 든다.
민주주의체제에서 선거는 정치적 이념의 전장이다. 정치적 이념은 상상의 프레임이다. 현실과 상당한 간극이 있고, 충돌이 있게 마련이다. 정치 과잉은 그러한 정치적 이념을 실현시키는 조건 상황으로서의 현실적 요소들을 도외시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선거를 통해 정치인을 선출하고, 그 선출된 정치인에게 적절한 정책과 행정을 기대한다. 따라서 선거 이후에는 정치적 이념과 실용적 행정을 잘 결합해야 한다. 만일 부정합이 이루어진다면, 선거에서 지지한 유권자들이 선거 이후에 떠나기도 하고 선거에서 지지하지 않은 유권자들이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이념적 정체성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제시되었던 이념적 정책들이 현실을 움직이는 정책으로 수정되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전문가들과 행정가들에 의존해야 한다. 비현실적 이념을 들고서 현실적인 관료와 행정을 백안시하는 정치집단은 실패하게 마련이다. 정치인들을 선출하더라도 그들이 유능한 행정을 하도록 해야 한다. 국가라는 근대적 공동체는 일단 공동체의 존속과 부국강병이라는 두 가지의 목표를 이탈하면서 다른 이념적 가치를 추구하기는 참 어렵다.
2022-01-03윤상철[윤상철 칼럼] 법적 정의와 정치적 올바름 지면기사
제20대 대통령선거 캠페인은 이미 시작되었고 다양한 정책들이 정책공약으로 제시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여당 후보가 '음식점 허가 총량제'를 언급했다. 외식업을 비롯한 자영업 전반의 과당경쟁이라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음식업자들에게 다소 매력적인 정책공약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늘 거론되듯이 한국의 자영업 비율이 OECD 최상위권인 이유가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하고 사회안전망이 취약한 데서 오는 불가피한 결과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원인도 대안도 잘못되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또한 자유시장경제를 근본적으로 반대한다는 점에서 반헌법적이고, 국가의 제도적 권력을 자제하지 않고 사용한다는 점에서 전체주의적 발상처럼 보인다. 검찰총장 출신의 야당후보는 그의 총장 취임사에서 "형사법집행은 국민의 권익보호를 목적으로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국민의 권익침해를 수반하기 때문에 공익적 필요에 합당한 수준으로만 이뤄져야 한다"는 민주적 법치주의의 대강을 말한 바 있다. 그는 국가권력이 어디까지 행사되고 어느 지점에서 멈춰야 하는지의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민주주의체제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설사 헌법과 법률이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도 국가기관과 공직자들은 제도적 자제력을 갖춰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정책공약은 민주주의체제를 일탈하게 된다고 판단할 여지가 있다.
대선 공약 언급 음식점허가 총량제
反헌법적 전체주의 발상처럼 보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치주의와 법률적 정의를 벗어나는 그 어떤 것이 있다는 믿음은 여전히 존재한다. 법적 정의야말로 매우 보수적이고 최소한적이어서 이를 넘어서는 정치적 정의 혹은 비전, 나아가 정치적 올바름이 심지어 통치차원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회적 믿음이 있다.
앞서의 여당 후보는 청년 기후활동가들과의 만찬에서 "공동체의 합의된 룰을 일부 어기면서 이 주장을 세상에 알리는 것조차 그럴 수 있다고 본다" 혹은 "그런 식의 삶도 응원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가령 석탄발전소 건설에 반대하기 위해 스프레이칠을 해 벌금형을 선고받는다든가 대통령이 지나갈 때 도로에 뛰어들기도 하는 행위 등에 대해서 다소 이해할 수 있다는 허용적인 입장을 천명했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도 목적만 좋으면 불법이나 탈법도 용인되는 고질적인 '떼법'문화를 부추긴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국가가 정치적 대의를 위하여 법치주의적 한계를 벗어날 수도 있고, 비제도적 사회운동이 스스로의 운동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법치주의적, 제도주의적 틀을 벗어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일견 일관된 입장을 보여주곤 했다. 그러나 비제도적 사회운동의 운동 목표가 국가의 정치적 대의와 충돌할 경우에는 법적 규칙을 벗어난 창과 방패의 예측불가능한 투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형사법 집행 권익보호가 목적이나
필연적 침해를 수반하니 합당해야
이러한 일탈 사법적 판단·제재 수반
우리는 국가를 담당한 정치세력의 정치적 대의가 국가 구성원들에 의해서 민주적으로 조정, 재조정되어야 할 뿐, 결코 정치적 올바름과 등치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 정치세력은 기본적으로 특정 집단 혹은 집단들의 이해를 선별적으로 대표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사회운동의 목표 역시 매우 약한 사회적, 과학적 토대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에는 이 목표를 실현하기가 여전히 어려울 수 있지만, 이를 드러내어 요구할 수 있는 민주적 제도들이 열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정치세력의 성급함과 사회운동세력의 편협성이 이러한 법치주의적 일탈을 낳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법치주의적 관점에서의 일탈은 사법적 판단과 제재를 받을 것이다. 그럼에도 정치적 비전들은 정치적, 감성적 선동에 허약하기 마련이어서 그 일탈을 저지르기 쉽다. 정치적 대의와 사회운동적 목표가 민주주의적 수레바퀴 안에서 머무를 뿐 아무런 변화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사회집단들과 대중들은 분노하기 마련이고 쉽게 선동될 수 있다. 경제 선진국이자 민주주의국가인 한국이 법률적 한계를 넘어서야 하는 사회문제를 안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근대적·자본주의적 발전을 경험한 사회가 우리가 상상하는 정도 이상으로 격렬한 사회분화를 겪었고 쉽게 조정하기 어려운 사회갈등의 상황에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오히려 필요하지 않을까?
2021-11-29윤상철
[윤상철 칼럼] 근거없는 신뢰, 묻지마 지지
현재 대한민국은 대통령 선거를 이미 치르고 있다. 각 정당들은 후보를 선정하기 위한 내부 경선의 과정에 있다. 정당의 당원이나 선거인단뿐만 아니라 국민들도 정당 경선과정에 참여하면서 잠재적인 예비후보들을 둘러싸고 온갖 논란들을 일으키고 있다. 도덕적 검증의 와중에 다양한 이슈들이 거론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건들은 사법적 판단을 거쳐 규명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호하게 처리하거나 꼬리 자르기를 하거나 나중으로 미뤄지기도 한다. 과거 수서사건이나 BBK사건, 그리고 현재의 대장동 사건 등처럼 뒤로 미뤄지거나 최소한으로 무마된다. 그 결과 유권자 시민들은 자신들이 믿고 싶은 대로 믿곤 한다. 대장동 사건에 대해서 여당 지지자의 80%는 '국민의힘' 게이트라 생각하고, 야당 지지자들의 80%는 이재명 게이트라고 생각한다. 사법적인 조사와 판단이 이루어진다면 쉽게 그 향방을 알 수 있고 그와 관련된 정당이나 정치인들의 도덕적 결함이나 법률적 일탈을 판단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권력과 국민들은 이를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물론 이러한 이슈들은 정치적 지지의 제한된 기준으로 볼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무슨 판단 기준을 가지고 정치인이나 정당을 신뢰하고 지지하는지 자못 의심스럽다.
국민도 경선 참여… 이미 대선 돌입
대부분 이슈 사법적규명 가능 불구
모호 처리·지연·꼬리 자르기 무마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기로는 대한민국은 저신뢰국가이다. 타인에 대한 신뢰도 매우 낮을 뿐만 아니라 사법체계 등 국가기관에 대한 신뢰의 수준도 OECD 최하위권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 탓인지 사기, 무고, 위증 등의 범죄가 가까운 나라 일본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많이 발생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인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정치적 지지는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가능할까. '역사의 종말'의 저자로 유명한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그의 저서 '트러스트'에서 "경제 활동의 대부분은 신뢰를 바탕으로 일어나며 사회적 신뢰는 거래비용을 줄임으로써 경제의 효율성을 높여주는 경제적 자산"이라고 언급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세계사적인 경제발전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인가? 교통사고가 발생하면 경찰, 변호사, 보험회사와 같은 공적제도의 보호를 우선시하는 미국인들과 달리 경찰과 검찰에 아는 지인을 찾는, 이른바 개인적인 연고의 사회적 자원을 찾는 한국인들은 어떻게 공동체와 사회규범을 만들 수 있는가.
다시 말하면, 우리 사회는 공적 신뢰가 결핍되어 있고 연고주의에 기반한 사적 신뢰에 묶여 있다고 판단된다. 정치인을 보는 시각도 그의 정치적 능력과 정책적 구상에 대한 신뢰보다는 나 자신과의 연고, 가령 학연 및 지연 등을 중심으로 한다고 보여진다. 민주주의 운영에 있어서도 정부기관 간의 견제와 분립을 제도화하고 국민이 통치권을 견제하는 방식을 중시하는, 즉 수평적 통제와 수직적 통제를 제도화하는 서구적 방식과는 다르게 작동한다. 최고권력을 정점으로 정부 기관이 위계적으로 서열화하고, 대통령에 대한 충성과 관계를 중시하는 방식이다. 매번 집권 말기에 이르면 현 대통령에 대한 지지철회와 노골적인 실망을 드러내면서도 새로운 대통령이 들어서면 그 이전의 방식을 되풀이하곤 한다. 대통령에 대한 신뢰와 지지의 근거도 모호했을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국민들이 직접 항상 그 권력을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도 빈약했던 것 같다. 오히려 실현되기 어려운 정치·정책적 전망과 통제되기 어려운 권력을 사적인 신뢰를 통해 붙잡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검증되기 어려운 도덕성을 기준으로 신뢰하면서 법률·제도적 기준보다는 감성·이데올로기적 수준의 신뢰를 하지 않았을까. 경제산업화를 추구하는 개발독재국가에 따르거나, 국가 위기의 상황에서 금 모으기에 동참하거나,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전혀 다른 국가와 '우리 민족끼리'에 광적으로 매몰되는 한국인들은 '기대하고 믿는 대로 행동할 가능성'을 타인 신뢰의 기준으로 삼는 서구의 사회적 신뢰와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연고·감성 기반 서구와 다른기준 탓
결국엔 뒤늦은 후회만 반복 할텐데
최초의 문제로 다시 돌아오면, 국민들 가운데 적어도 절반은 특정 이슈에 관한 한 근거 없는 신뢰를 하거나 공적 제도로서의 대통령을 타락시키는 지지행위를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감성적 지지와 이념적 허구에 사로잡혀 그 정치인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지에 대한 판단을 하지 않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지속적으로 묻지마 지지를 하거나 뒤늦은 후회를 반복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치인을 지지하는 일은 연예인에 환호하는 일과 다르다.
2021-10-25윤상철[윤상철 칼럼] 언더독, 아웃사이더, 그리고 반민주주의 포퓰리스트 지면기사
우리나라의 대통령선거는 그야말로 총탄 없는 전쟁이다. 온갖 네거티브와 마타도어, 심지어 정치공작까지 공공연하게 횡행하고 있고, 국민의 삶과 국가의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정치적, 정책적 논쟁은 뒷전으로 밀리고 어설픈 도덕논쟁이 선행한다. 뒤처져 있던 언더독 여당 후보가 부상하고, 제3지대 아웃사이더 후보가 제1야당의 선두주자로 나서면서 그 전쟁은 훨씬 복잡해졌다. 그에 따라 사람들은 대선 이후의 상황을 더 우려하기도 한다.
2016년 미국 국민은 역사상 처음으로 공직 경험이 전혀 없고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존중할 의지가 보이지 않는 독단적 성향이 뚜렷한 인물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일부 미국인들이 우려한 대로 트럼프집권은 미국 민주주의의 쇠퇴를 가져왔고 그 상흔은 쉽게 치유되지 않고 있다. 그들은 미국 헌법이 트럼프와 같은 선동가들을 제어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고, 실제로 200년 넘게 견제와 균형의 매디슨 시스템은 지탱되었으며, 남북전쟁과 대공황, 냉전과 워터게이트도 이겨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미국의 정치체제가 의외로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목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미국인들은 과거 미국 사회에 견제와 균형이 가능했던 이유는 정당 간 상호관용과 제도적 자제력이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는 한편, 이제는 배타적 진영논리와 뿌리깊은 양극화가 이러한 정치적 자원들을 소멸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또한 확인하였다.
트럼프 집권 美 민주주의 쇠퇴불러
국내도 미래를 위한 대선 논쟁 뒷전
국민들 내부 주류 재생산 거부 상황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상황은 어떨까? 현 정권은 정권 내내 상대 정당을 적폐로 규정하고 그 청산과 개혁(?)을 고집했다. 그 결과 태극기부대와 이른바 대깨문이 주도하는 극단적인 진영갈등이 정치를 지배했다. 더불어 소득주도성장과 부동산정책은 소득과 자산 모두의 극단적인 양극화를 초래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 양대 정당은 그들 간의 선거경쟁결과와 무관하게 대중적 신뢰를 잃어갔다. 그 결과 여당은 비주류세력에서 자신들의 후보를 내야 했고, 야당은 외부에서 후보를 영입해야 했다. 두 정당의 내부 주류의 재생산을 국민들은 거부하고 있다. 현재 여당을 대표하는 후보는 당의 주류세력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고 그에 따라 당에 대한 충성심 역시 약하다. 오히려 이 당이 추진해온 정책노선을 더욱 극단화시키는 방향으로 양극화된 대중들을 동원하고 있다. 현재 야당을 대표하는 후보는 현 정권에 의미있게 저항한 유일한 사람으로 인식되면서 제3지대에서 머물다가 입당하였다. 선거전략상 입당했을 뿐, 제1야당과 그 세력에 대한 신뢰가 약하고 현정권의 정책노선에 반하는 국민들의 지지와 동원을 추구하고 있다. 즉 극단적인 진영논리가 거대 양당의 지배력을 약화시키고 극단적인 양방향의 포퓰리스트를 강력한 대선 주자로 끌어올린 것이다.
결국, 여야 비주류·외부 후보 영입
문제는 대선후… 정치 파국 위험성
문제는 대선 이후이다. 역사적으로 무솔리니, 히틀러, 그리고 차베스 등의 전제주의적 독재는 그들 스스로가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는 기술이 있었고, 기성의 정치인들이 경고신호를 무시하고 권력을 쉽게 넘겨주거나 정치무대에 들어오도록 문을 열어주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물론 그들에게는 고유한 조짐들이 있었다. 히틀러는 쿠데타에 실패했고, 차베스는 무장봉기에 실패했으며, 무솔리니의 검은셔츠단은 의회폭력에 가담한 바 있다. 비민주주의적 성향을 이미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대한민국의 여야 유력후보들은 이러한 사태를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의회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잘 훈련된 정치인으로 보기도 어렵다.
대한민국의 유력한 대선후보들은 강력한 정당체제와 당내 원로들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등장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기본적으로 파벌연합으로 이루어진 허술한 정당체제이기 때문이다. 여당은 잘못된 정책으로 당내 주류의 재생산에 실패했고, 야당은 그에 대한 무대응으로 내부의 후보를 만들지 못했다. 여당의 언더독 후보는 기존 노선의 급진화를 통해 양극화에 대응하는 진보적, 대중적, 급진주의노선으로 가고 있고, 야당의 아웃사이더 후보는 우리 사회의 엘리트 연합을 통해 보수적, 대중적, 급진주의 노선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 누가 대통령에 당선되든 그는 기존의 정당체제를 근본적으로 변경시키지 않고서 자신의 정책노선을 실행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 결과 지난 5년간 쇠퇴해오던 민주주의를 더욱 파괴시키는 방향으로 갈 위험성이 있다. 그들 자신의 비민주적 선동가적 기질보다는 기존 정당체제와 현정권 5년 통치가 만들어낸 기형적인 정치지형이 이들의 선동가적 위임민주주의를 촉발시킬 수 있을 것이다. 분배주의적 포퓰리스트가 경제의 파국을 가져온다면, 국가주의적 포퓰리스트는 정치의 파국을 가져올 것이다.
2021-09-13윤상철[윤상철 칼럼] 정명(正名), 제자리 찾기
유가의 '정명(正名)'사상은 원래 '이름을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즉 이름과 실상이 서로 부합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사회과학의 관점을 취한다면, 어떤 이름이나 직함이 그에 상응하는 의무와 책임 혹은 기능적 역할을 이행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탈근대사회 혹은 탈진실사회로 오면 다분히 규범적이고 기능주의적이고 정당성 있는(legitimate) 이름은 사라지고 만다.
과거에 우리 사회가 극심한 정치사회적 위기에 처하면, 권위주의 정권과 야권의 지도자들이 정치적, 종교적 사회원로들을 만나면서 그 해결의 출구를 찾았다. 그 원로들은 정치적 파벌을 초월한 품격과 해결책을 가지고 있었다. 민주화 이후에 그러한 원로들은 사라져버렸다. 사람들이 이제 그 원로들을 찾지 않는다. 정치인들도 자신들의 뒷배경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원로로 삼는다. 그 원로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높이려는 책략만 돋보인다. '6인회', '7인회', '원탁회의' 등은 실재하는지조차 모호하였다.
산업화와 민주화는 경직되고 단편적인 사회를 훨씬 자유롭고 복잡하게 변화시킨다. 더 많은 집단들과 개인들이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는 만큼 문제도 다층적이고 그 해법도 섬세해야 한다. 그만큼 더 많은 전문가들이 필요하고 그 전문가들에 대한 사회적 신뢰 역시 높아야 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 전문가들이 정치적 포퓰리스트들의 병풍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나아가 스스로 포퓰리스트가 되고 있다. 당연히 그들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정책적 합리성을 결여한 정치적 선택들에 대해서 전문가들도, 정부관료들도 더 이상 맞서지 않는다.
사회운동은 어떠한가? 환경운동가들은 환경문제에 대해 과학적 분석보다는 위기담론으로 대처하여 스스로의 성가를 높이려는 아마추어들인 경우가 많다. 지구가 소빙하기로 접어들고 있다는 과학자들의 연구는 돌이켜보지 않고 지구온난화와 탄소중립만을 외친다. 저렴한 전기생산을 가능하게 하고 기후가스를 배출하지 않는 원자력발전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여성운동과 여성가족부가 성폭력피해자와 여성인권유린 사태에 대해서 취하는 태도를 보면, 여성운동을 대표하는 비례대표 국회의원이나 여성가족부의 존폐가 거론될 만하다. 이른바 신사회운동이란 자본가·노동자 계급균열이나 민주·반민주 세력 균열에서 은폐되거나 무시되는 다른 사회적 균열들을 대표한다. 따라서 이러한 근대적 사회균열에 휩쓸리지 않고 언제나 스스로를 드러내야 함에도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정치인들은 민주주의체제에서 지역주민이나 특정 사회집단을 대표하여 국가의 방향을 정하고 정책을 집행한다. 국민을 대표하여 그들로부터 권한을 제한적으로 위임받아 행사한다. 그러나 현실의 정치인들은 국민들보다는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더욱 중시한다. 심지어 검증되지도 않은 이념지향적 정책을 추구하기도 한다. 정당은 정강과 정책을 통해 국가운영의 대강을 국민들에게 제시한다. 그러나 내부의 세력균형과 강력한 정치지도자의 성향에 따라 예측 불가능한 정치와 정책이 발생한다.
주권자인 국민들은 어떠한가? 민주주의의 다수결은 교양있는 시민들의 집단 지성에 대한 믿음 때문에 중시된다. 그러나 국민들은 타인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국가공동체에 대한 스스로의 책임을 인식하지 못한다. 정치인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명확한 원칙과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보이지 않는다. 국가운영의 원리와 목표에 대해서 충분한 교양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아무런 교양이나 지식 없이 정치인들에 의해 이리저리 선동되어 국가와 집단, 마침내는 자신을 망치는 그러한 시민들이 더 많이 눈에 띈다.
법치주의는 점차 붕괴하고 있다. 법 적용의 형평성은 차별적 법 집행에 의해 사라지고 있다. 다수결의 횡포 속에서 정파와 집단의 특수 이익을 보장하는 비민주적 악법들이 마구 만들어지고 있다. 법의 적용자이자 사회의 심판자들이 정파적 논리에 의해 구성되고 작동하면서 법치주의와 공공성은 흔들리고 있다. 정치적 지배자들은 사법적 판단을 공공연히 앞장서서 부정한다. 그러나 법치주의 없이 민주주의는 존속하기 어렵다. 자신들에게 불리한 사법적 판단에 대해서 법률 자체를 부정한다면 법치주의도 민주주의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모든 사안들은 권위주의의 망령이 도사리고 있는 한국 민주주의의 실상이다. 정명(正名)이 없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허명을 믿으며 살아가는, 그야말로 탈진실의 사회이다. 그럼에도 정명이 지배하는 영역이 이 사회를 든든히 받치고 있기에 그나마 지탱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혹은 시민들이 여전히 거세게 정명을 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들 네 이름대로 하라.
2021-08-09윤상철[윤상철 칼럼] 대통령을 뽑는다?
이제 차기 대통령선거까지는 불과 9개월이 남았다. 집권을 꿈꾸는 대선 후보들이 여야를 통틀어 20여명을 넘어서고 있다. 여느 대통령 선거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많은 숫자이다. 우리 사회의 운영, 진로, 대안, 나아가서 이른바 시대정신이나 그 실현의 방식이 생각보다 더 다양한 탓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단순히 정치적 권력만을 원할 수도 있고, 새롭게 고양된 국가와 국민을 만들기 위하여 헌신할 수도 있지만 상호 중첩되어 있는 상황에서 쉽게 판별할 수는 없다. 존경할 만한 자질도 무용할 수 있고, 권력의지만으로는 국민에게 무의미하기 마련이다.
대선 후보들은 먼저 국민들을 대상으로 대중적 지지를 호소하는 한편, 당내 경선을 통과해야 한다. 이를 위해 소속 정당의 국회의원 및 당협위원장 등의 지원을 바탕으로 당원들의 지지를 동원하는 한편 교수, 언론인, 전직 관료 등 전문가들을 폭넓게 동원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드러냄으로써 유권자 대중의 관심을 유도한다. 이 전문가들은 대부분 현재 정치권에 몸을 담고 있거나 장차 정치인 혹은 임명직 관료를 꿈꾸고 있는 정치적 계급들이다. 후보들은 그들의 사회적 영향력을 활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권위의 기반을 확장하고자 한다.
이어서 혹은 동시에 도덕적 검증과 정책적 검증이 진행된다. 각각 소속 정당과 국민 전체를 향해 동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다소 엇박자가 나기 마련이다. 당내 파벌의 소속과 충성도가 거론되기도 하고, 특정 정치적 사건에서의 대응 전력 등이 거론되기도 한다. 민심과 당심이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 상황에서는 다소 복잡한 정치과정이 진행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장관 청문회에서 거론되는 부패비리전력, 친인척비리, 범죄경력 및 품성 등이 논란이 되기도 한다. 국민들에게 중시되는 도덕성 검증기준은 이미 기존의 인사청문회에서 현재의 여권에 의해 묵살되었던 탓에 대선후보에게도 제대로 적용될지는 의문이다. 더구나 정당 간 경쟁에 의해 후보의 경쟁력을 우선하다 보면 도덕성 기준은 형해화될지도 모른다. 여기에 국민들의 감성적인 성향과 진영논리가 횡행하다 보면 더욱 미미해질 수도 있다.
더불어 후보자 상호 간에 정책공약 혹은 지역공약 등을 주장하고 반박하는 논쟁이 벌어진다. 대국민 소통과정에서 제기된 정책적 이슈가 후보의 적합성과 준비 정도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작용한다. 즉, 실제로 국가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를 둘러싼 토론이 이루어진다. 그 공약들은 여러가지 쟁점을 제기한다. 그 첫째는 그러한 공약들이 시대정신 혹은 시대적 상황변화에 조응하는지와 관련된다. 대통령선거는 현재의 상황에서 치러지기 때문에 현재의 정치적 균열구도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주요 정당 간의 정치적 이념균열을 반영하게 되지만, 현재의 정치균열은 과거의 역사적 결산이고, 현재 진행되고 있거나 향후에 전개될 사회적, 정치적 균열을 반영하지 못할 수가 있다. 그 결과 지배정당 내에서도 합종연횡을 통하여 현재의 정치지형을 변경하고자 하는 후보들이 있기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기존 정당 외부에도 새로운 상황에 부응하는 후보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정치제도는 전자보다는 후자에 불리하기 마련이고, 후자들은 기존의 정치지형에 순치되기도 한다.
둘째는 그 공약들이 선거를 통하여 국민적 합의를 어느 정도 통과하였는지, 그리고 그 많은 공약 간의 내적 갈등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현 정권의 소득주도성장이나 탈원전 정책 등에서 이미 나타났는 바, 국민적 합의를 충분히 거치지 않은 상황에서도 정책을 매개로 사회경제적 체제 자체를 변형시킬 수 있는 이른바 '행정쿠데타' 혹은 '연성권위주의'의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선거는 의례적인 정치행위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치명적인 체제변환을 낳기도 한다.
요컨대 국민들은 더 이상 정치주도세력들에 의해 만들어진 정치적 선택구조에 매몰되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선택구조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정치구조가 사회적 상황의 변화에 응답하지 않고 정치엘리트 세력을 포함한 기득권집단의 이해구조를 유지하려는 주형(鑄型)일 뿐이다. 또한 집권한 정치세력들이 자행하기 쉬운 행정쿠데타의 가능성을 미리 인식하여 후보자의 개인적 성향과 더불어 그가 속한 집단의 정치적 프레임이 어느 정도 민주주의에 친화적인지, 국민들의 소망에 부응하는지를 면밀하게 확인해야 한다. 즉 국민들은 새로운 가능성에 너그러워야 하고 선거가 민주주의와 자신의 이익을 제대로 보장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윤상철 칼럼] 이른바 "이준석 현상" 지면기사
구체적인 현실 인식하는 수준 높고
마냥 수구 기존 보수들과 많이 달라
사람들 촛불정부의 '민주개혁' 실망
양대 정당 기대감 없는 세력 돼버려
이제 국민들 변화할 사람에게 의지
2021053101001200100059601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최근 야당인 국민의힘 당 대표선거를 둘러싸고 언론의 관심은 이준석 후보에 집중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른바 '이준석 현상'을 우리 사회의 큰 변동의 징후로 지목하고 있다. 그가 국회의원 경험조차 없는 30대 젊은 정치인이라는 점에서도 사람들의 관심과 기대가 몰린다. 대통령 후보들의 동정이나 여론조사마저 한 정당의 단기 대선용 당 대표 선출에 밀리고 있는 형국이다.
예비경선을 1위로 통과한 그가 본선에서도 그 기세를 더하여 고리타분한 보수정당의 수장으로 자리 잡는다면 국민들의 정치적 효능감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한 언론인은 '이준석 현상' 때문에 '그 당이 재미있어졌다'고 말한다. '수구꼴통'으로 불렸던 정당이 재미있고, 역동적이고, 기대마저 드는 정당이 된 것이다. 이준석이라면 대통령과도 기념사진 이상의 뭔가를 만들어내고, 야권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들이 국민의힘 입당을 마냥 주저하지 않으리라 지적한다. 국회의원 한 번 당선된 적이 없어서 '구상유취'한 '정치적 미성년자'라고 하기엔 그만큼 모든 사안에 대해 일관성도 있고 구체적 경험적 대안도 있는 그리고 누구와도 토론을 마다하지 않는 정치인을 많이 보지는 못했다. 너무 편파적이어서 공정한 대선후보 경선관리를 하지 못할 거라 우려하기도 하지만, 진중권이나 박근혜를 대하는 그의 자세에서 불공정성을 찾기 어렵다. 너무 젊어서 국회의원들이 대표로 모시기는 어려워 당을 붕괴시킬 수 있다고 한다. 나이든 대표 밑에서도 별 존재감을 보이지 않았던 직업국회의원들이 굳이 나서서 할 일도 없다. 가끔 그에게 '가볍고 싸가지 없는' 우파 유시민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재능과 언변이 뛰어나 말하기를 즐겨할 뿐, 정말 '싸가지 없는' 토론 상대자를 사회자에게 떠넘기는 수준의 예의를 보여주곤 했다.
정치인으로서 그에게 사람들은 무슨 기대를 할까? 그는 일단 머리가 좋고 말을 잘하고 모든 사안과 토론에 대해 개방적이다. 엄격하고 근엄하며 진지하지만 사람 사귀기에 서툴고 거짓말도 능숙하고 자기반성도 없는 전형적인 정치인들과는 달라 보인다. 자기주장과 논거를 열심히 말하지만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구체적인 현실을 인식하는 수준이 높다. 그렇다고 여야를 불문하고 자기주장만 내세우고 남의 말에 귀를 닫으며, 심지어 도덕적 우월감에 절어 있는 꼰대로 보이지는 않는다. 보수(保守)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언제라도 보수(補修)한다는 점에서 마냥 수구(守舊)인 기존 보수들과는 참 다르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그런 가능성을 보는 것 같다. 이준석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의 정치인들에게 이끌려온 국민의힘이 아무런 비전도 없는 힘없는 야당으로 전락해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준석의 그러한 모습은 더 이상 약점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나는 정치인 이준석보다는 정치적 상황이 '이준석 현상'을 낳았다고 볼 수 있다. 그간 우리 정치에서는 '노무현 현상', '안철수 현상', '윤석열 현상' 등이 떠올랐었다. 노무현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성공적으로 직을 수행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안철수는 실패했지만 아직도 약간의 기대를 받고 있으며, 윤석열은 차기 대통령의 가능성이 높은 인물로 거론되고 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구세주의 도래를 꿈꾸듯이 나타난 이른바 '○○○ 현상'은 이번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어쨌든 사람들은 2016년 탄핵촛불집회를 통하여 권위주의적 권력구조와 사회경제적 양극화로 얼룩진 보수세력에 대해 기대를 버렸다. 촛불정부라 참칭했던 현 정부가 정치사회적 분열과 경제정책을 포함한 정책적 무능 그리고 도덕적 타락에 있어서 역대 어느 정권에도 뒤지지 않는 점에서 소위 '민주개혁세력'에 대한 기대도 접어버렸다. 양대 정당세력은 정치적으로도 정책적으로도 심지어 규범적으로도 이제는 기대하기 힘든 세력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들이 90% 이상의 국민들로부터 정치적 지지를 받는 마당에 의지할 만한 다른 대안을 찾기 어렵다.
이제 국민들은 변화할 여지가 있는 외곽의 사람과 세력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노무현, 안철수, 윤석열에게 기대했거나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 가능성을 믿지는 않지만 그나마 기존 정치인들과 외관부터 다른 사람에게 아직 남은 희망을 걸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미 기득권 정치계급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미숙하지만 친절하게 뭔가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요구하는 젊은 세대에 공감하는 사람들에게 얼마 남지 않은 기대를 걸고 있는지 모른다. 또, 그러한 민심이 당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야당의 당내 변화가 다른 당의 변화를 낳고, 국민에게 또다른 희망을 주고, 대통령선거와 권력 향방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정치가 국민의 삶을 한껏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2021-05-31윤상철처음==
[윤상철 칼럼]20대 자유주의자들의 저항
이대남' 심리적 기대와 생활수준
미래전망 사이 상대적 박탈감 느껴
왜 사회적 차별 받아야하는지 울분
'고립무원' 상태 기회평등 약속하면
그나마 기꺼이 마음 줄 수 있을 것
2021042601001033800051061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이대남'이 최근의 화두다. 그 구성원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바뀌지만, 사람들은 지금의 '이대남'과 수년 전의 '이대남'을 동일한 집단으로 인식하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한때 현 정권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던 세대들이 최근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야당을 전폭적으로 지지한 사실에 놀라움을 드러낸다. 과거의 '이대남'이 보여준 모습이 세대적 특질은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된다. 이 현상의 원인을 둘러싸고 정치인들과 평론가들은 아직 토론 중이다.
구조적으로 사회변동, 특히 계층 간 사회이동을 보는 사회학자의 눈에서 보면 '이대남'이 처한 현실은 예측 가능하고 필연적이기도 하다. 여야의 일시적 처방들이나 정책들도 이 구조적 사회변동을 되돌리기는 어렵다. 그 구조적 사회변동이란 계층구조가 어느 정도 안정화된 이후의 부모세대와 자식세대 간의 계층이동을 말한다. 나라에 따라 다르지만, 중류층 부모의 자식들 가운데 절반 이상은 하층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류층 부모의 자식들 가운데 일부는 중류층으로 상승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두가 중산층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그 국가의 경제성장이 엄청나게 가속화되어야 한다. 과거 586세대들이 경제성장과정에서 대거 중산층에 편입될 수 있었듯이 인구의 증가도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저성장의 국가에서 세계 최저의 출산율로 인구증가가 정체되고 있는 상황에서 모두를 중류층에 머무르게 하는 경제성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양상은 서울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지금의 20대는 50대 부모들 품안에서 자랐다. 권위주의시대에 태어나 민주화와 정보화, 세계화의 와중에서 살아왔던 부모들은 경제성장의 단꿀을 맛보면서 대부분 계층상승을 경험했던 세대들이다. 그들은 민주화의 짐을 지고 투쟁하면서 살았다고 하지만, 일자리를 쉽게 찾을 수 있었고, 아파트와 차를 구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고, 집값 상승의 혜택을 많이 누렸던 세대였다. 자녀양육과 교육비에 시달렸다고 하지만 기껏해야 2명을 넘지 않는 자식들을 키웠으며, 자녀 결혼에 체면 세우느라 무리하지 않으면 이제는 여유있게 살 수 있는 세대이기도 하다.
자식세대인 20대는 어떠한가? 그들은 이미 부모가 제공한 중산층의 삶에 익숙해 있다. 부모가 준 것이든 스스로 아르바이트로 얻어냈든 간에 대학 시절의 해외여행 경험쯤은 이미 몸속에 내재해 있다. 설사 하류층의 부모를 두었다 할지라도 중산층의 문화를 세대문화로 수용한 바 있다. 그 경험을 통해 그들은 자유주의적인 삶과 사고에 익숙해 있기도 하다. 그들은 이러한 삶이 부모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도 지속되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치솟는 집값을 보면서 선배들이 타고 올라갔던 사다리가 치워졌다는 걸 깨닫게 된다. 취업 절벽은 스스로가 계층하강이동의 플룸라이드를 타고 있다는 걸 깨닫게 한다. 또한 그들은 가족, 직장, 국가 그 어느 것도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걸 안다. 가족은 노령화의 덫에 걸려있고 국가는 더 이상 유능하지 못하고, 심지어 직장도 종신고용이나 사내복지를 충분히 제공하지 못한다.
그 '이대남'은 자신이 더 이상 올라가기도 힘들고 오히려 추락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제임스 C. 데이비스의 J곡선에 따르면, 그들은 심리적 기대와 심각하게 유리되는 실제 생활수준 혹은 미래전망 사이에서 극심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는 그들이 너무 오래 남성으로서의 혜택을 입어 왔고, 따라서 하나하나 벗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들이 왜 사회적 차별의 수혜자로서 비난받아야 하는지 울분을 피력한다. 586꼰대들은 자신들의 경험에 비추어 충분히 노력하면 성공이 보장된다거나, 그래도 국가가 질 낮은 급식을 줄 수 있다고 약속한다. 막차를 타고 사다리를 올라선 40대들은 이른바 진보정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고집스럽게 주장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대남'은 홀로 고립되어 사회혁명이라도 추구해야 할 판이다. 이 구조적 상황에서 고립무원한 그들에게 자유주의적 기회의 평등이라도 열어주겠다고 약속한다면 그나마 기꺼이 마음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마저 그들의 추락을 지연시키는 날개가 아니라는 걸 그들은 곧 알 것이다.
2021-04-26윤상철[윤상철 칼럼]누가 시대정신을 구현하나?
보선후 대선에 모든 관심 집중될것
누구는 배제, 누군가를 동원한다면
집권해도 사회 균열·갈등 심화시켜
'국민참여 정치공동체' 외면한다면
또다시 광적인 '빠정치'만 낳을 수도
20210315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바야흐로 정치의 시대가 왔다. 4월7일 보궐선거가 끝나면 본격적인 대통령선거 국면이 펼쳐질 것이다. 오래전부터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던 정치인들과 더불어 검찰총장 출신의 새로운 후보가 거론되고 있고, 이제까지와 다르게 다크호스의 등장도 점쳐지고 있다. 그들과 사회세력, 정당과 지지자들이 어울려 향후 1년간은 모든 관심과 언론기사가 대통령선거에 집중될 것이다. 이미 후보들은 선거공약에 가까운 주장이나 정책들을 내걸고 있다. 한 후보는 기본소득을, 다른 후보는 안심소득을, 또다른 후보는 공정과 정의를 내걸고 있다. 다 듣기에 좋은 말이고 대통령을 꿈꾸는 사람들이 내걸 만한 그럴듯한 캐치프레이즈이기도 하다. 다수의 정치평론가들은 새로운 대통령은 시대정신과 부합하거나 국가경영에 필요한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노련한 한 정치인은 천운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짧은 정치적 연륜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에 오르거나, 대통령직의 수행이 기대에 못미치는 경우를 말할 것이다.
먼저 한국의 대통령들이 시대정신을 스스로 잘 구현했는지를 돌이켜 보기로 하자.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와 반공이었고, 박정희는 경제산업화와 민족통일, 전두환은 정의사회구현, 복지사회건설, 선진조국창조, 노태우는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 김영삼은 민주주의와 군정종식, 김대중은 평화적 정권교체, 노무현은 특권과 기득권 타파, 이명박은 경제살리기, 박근혜는 경제민주화였다. 우파의 대통령들은 자신들이 구상하는 사회만들기를 시대정신으로 보았고, 좌파의 대통령들은 특정한 사회적 대상에 대한 비판 혹은 배제를 통한 새로운 사회 만들기였다. 우파의 대통령들은 자신들의 슬로건으로 사회적 통합의 구상을 말했던 데 반해, 좌파의 대통령들은 사회적 균열을 포착하되 통합된 사회는 제시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다. 우파의 대통령들은 국민 모두의 참여를 독려하였지만 이에 따르지 않는 국민들은 배제될 운명을 만들었고, 좌파의 대통령들은 처음부터 일정한 국민들을 배제함으로써 좋은 나라, 나라다운 나라를 꿈꾸었다.
문재인이 취한 시대정신은 공정, 평등, 정의였다. 그는 대통령 취임식에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란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추구한 공정, 평등, 정의는 모두가 아닌 누군가를 배제하는 좌파 전래의 시대정신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른바 적폐청산으로 그의 임기 대부분을 보내고 말았다. 그의 공정, 평등, 정의는 자기들만의 내로남불이자 부패완판으로 기울고 있다는 세간의 평가가 이미 나오고 있다. 언론에 거론되는 차기 대통령 후보가 공정과 정의를 부르짖고 그가 시대정신을 잘 포착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하니 말이다. 다른 좌파의 후보들이 주장하는 기본소득이나 안심소득은 사회적 불평등의 해소를 시대정신으로 보고 있지만,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통한 소득과 자산이 많은 이들을 설득하지 않고는 또다른 균열의 정치로 나아갈 뿐이다.
요컨대 누군가를 배제하고 누군가를 동원하는 시대정신은 설사 집권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사회의 균열과 갈등을 심화시킨다. 이와 관련하여 이른바 차기 대선구도가 어떻게 치러질 것인가가 거론된다. 제3지대 형성이나 여야 정당들의 분열 가능성 등이 거론된다. 양자구도보다는 다자구도가 더 유력하게 전망되기도 한다. 여권 지지층에서 이탈한 2030세대, 야권으로 옮겨가지 않는 중도층, 부동산 문제에 분노하는 수도권 유권자 등 사회집단들이 거론된다. 이런 구도일수록 특정 세력이나 집단의 지지를 받으면서도 다른 세력을 위압하지 않는 유연한 시대정신이 필요하다. 유권자들은 시대정신을 내건다고 쉽게 마음을 내줄 수 없는 경험을 이미 치렀기 때문이다. 역사적이고 시대적인 타협으로서의 민주주의와도 정확하게 부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가 사라진 민주주의는 공화국의 자치정신과 충돌한다. 모두가 주체로서 참여할 몫이 있어야 한다. 어떤 이들은 '헌법정신과 법치주의'를 지키는 게 시대정신이라고 말하지만, 이로써 국민 모두를 포섭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국민들이 참여하여 스스로의 정치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하는 책임과 의무이자 권리를 말하지 않는다면, 또다시 자기들만의 집단주의적이고 광적인 '빠정치'만을 낳을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대통령은 시대정신을 말할 수 있지만, 개개의 살아있는 모든 국민이 이를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21-03-15윤상철[윤상철 칼럼]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역사적 사실 제대로 알지도 못한채
고종을 '매국노' 해석 동의 쉽지않아
우리는 기시감 가득한 위기국면서
'경험 못해 본 나라' 꿈꾸다 말지도
경험했지만 성공 못한것부터 극복
20210201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언제부터인지 정치인들이나 언론에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회자되었다. 신채호, 박은식, 윈스턴 처칠 혹은 미국 작가인 데이비드 매컬러가 말했다지만 별 근거도 없고 또한 중요하지도 않다. 우리 사회가 어떤 맥락에서 이 말을 화두로 삼는지가 더 중요할지 모른다. 흔히 우리 국가 혹은 민족의 잘못된 과거를 잊지 말고 되풀이하지 말자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이와 달리 우리가 타국 혹은 타민족에게 당한 치욕이나 수모를 기억하고 반드시 되갚아주자는 의미로 더 자주 사용되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가 왜 치욕과 수모를 당했는지 그 배경과 원인을 명확히 밝혀내어 우리 스스로의 잘못이나 실수를 바로잡지 못한다면, 되갚아 주기보다 되풀이하기가 더 쉬울지도 모른다.
최근에 '매국노 고종'이라는 다소 선정적인(?) 제목의 서적이 출간되었다. 대한제국의 황제로서 근대를 열어가는 '개혁군주'였고, 강대국들이 각축하는 한반도에서 조선을 지켜내기 위해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고 전국적인 반일의병투쟁을 배후에서 진두지휘했던 민족 투사였으나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강제 퇴위당하고 결국은 독살된 '비운의 황제'에게 이러한 제목은 사실을 왜곡하는 불경스러운 호칭이었고 민족주의적 교육과 정치담론에 익숙한 사람들을 극도로 경악시켰다.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고종은 목숨을 걸고 나라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 고독하게 투쟁한 지도자였고, '을사오적'과 같은 친일 정치모리배들에 의해 조선은 일본에 팔려 나갔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서술은 민족적 자긍심과 자주독립에의 열의를 북돋우고 국민들의 감성을 감싸 안았지만 그 스토리의 중간중간에 생략, 비약 그리고 비이성이 너무 많아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역사학자가 아닌 사람들이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알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고종을 암군이자 매국노로 해석하는 입장에 손을 들어주기란 쉽지 않다. 국제정치외교에 무능했고,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백성을 학살하고, 혁신을 거부하고 개혁세력을 몰살했다는 객관적인 사실들이 드러남에도 여전히 그렇다. 이럴 때면 이른바 '하인리히의 법칙'이 떠오른다. 하나의 대형참사가 발생하기까지 인명피해가 없는 300건의 사고에 이어서 29건의 경미한 부상 사고가 선행한다는 이론이다. 한일합방이라는 민족사적 대형참사가 고종이나 을사오적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나 사적 이익의 추구에서 곧바로 발생하기는 쉽지 않다. 국가의 수준과 역량이 어떠했길래 고종의 실정이나 대신들의 탐욕으로 인해 곧바로 망국으로 치닫게 되었는지 의문스럽다. 동학농민운동, 임오군란이나 의병투쟁에도 불구하고 정작 대한제국의 멸망이 비교적 조용하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길고 다층적인 과정에 의해 조선은 서서히 침몰하고 있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매국노 고종'에 동의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개혁군주 고종을 내세운 '일제종족주의'의 주장에 동의하기도 쉽지 않다. 다만 이러한 논의들로 인해 우리는 '역사를 잊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배워온 조선 패망의 역사는 잊혀진 역사가 아니라 왜곡된 역사였는지도 모른다. 가산제적 황제전권국가에서 몇몇 대신들이 압박하여 황제가 을사늑약이나 한일합방에 동의하도록 했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황제와 대신들을 포함한 조선의 지배엘리트들이 백성들을 배신하고 나라를 팔아넘기는데 담합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해 보인다. 그렇다고 사악한 제국주의 국가의 강력한 발굽 아래 허약하지만 선한 국가와 황제가 짓밟히면서 근대로의 민족자존의 희망이 유린당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제국주의시대에 국가 간의 관계를 이념적 선악으로 구분하는 것은 전근대적 봉건국가에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을 자본주의적 계급갈등으로 보는 것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그러나 역사를 왜곡한 민족에게 현실이 먼저 왜곡되기 마련이다. 앞서의 어떤 해석을 택하든 결국 우리가 어떻게 왜 망했는지 모르는 결과를 초래한다. 겉보기에 유사한 내부의 적을 공격하기 위한 정치로 소비될 뿐이다. 결국 우리는 기시감 가득한 극적인 위기국면에서 엉뚱하게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꿈꾸다 말지도 모른다. 우선, '여러 번 경험하면서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던 위기'를 먼저 극복해야 하지 않을까?
2021-02-01윤상철[윤상철 칼럼]포퓰리즘의 종말
민주주의 결손서 생기는 '포퓰리즘'
특정한 소망만을 감성적으로 동원
그 파국적 결과는 충분히 예측 가능
민주주의의 균형과 견제 사라지면
포퓰리즘 기반은 서서히 자리잡아
2020122101000861400044021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사회적 불평등이 극심하고 여기에 경제위기가 도래하면 민주주의적 정치제도는 불안정해지고 그 틈새에 포퓰리즘이 스며든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라틴아메리카를 휩쓴 이른바 '핑크타이드(pink tide)'는 중도좌파정권의 포퓰리즘 광풍이었다. 이제 그 포퓰리즘은 점차 종말을 맞고 있다. '남미의 북한'으로 불리는 베네수엘라가 비참한 종말이라면 브라질, 칠레, 콜롬비아 등은 실용노선과 경제적 시장주의를 통하여 포퓰리즘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흔히 포퓰리즘은 인민주의 혹은 대중주의로 해석된다. 지배계급에 저항하는 인민주의는 국가사회주의로 변질되면서 인민을 유기했다. 엘리트와 갈등하는 대중주의는 대중영합주의를 따르면서 정치적, 경제적 파국을 낳았다. 그럼에도 포퓰리즘은 다두제적 대의민주주의에서 소외되는 시민의 소망을 동원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직접민주주의를 가능케 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포퓰리스트들은 일반 대중에게 직접 호소하여 자신이 표방하는 정책에 대한 지지를 획득하고 이후에 그러한 정치적 동원력을 바탕으로 기득권 정당 안에 진입한다. 그들은 저소득층과 중산층의 연합에 의지하고 대의민주제를 공격하기도 한다. '남아메리카 포퓰리즘의 거시경제학'의 공저자인 세바스티안 에드워드와 루디거 돈부시는 포퓰리즘을 "지속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한 재정적자와 통화팽창 정책을 구사하는 한편, 생산성 향상과는 아무 상관없는 공공부문 근로자들의 임금을 인상함으로써 소득을 재분배하는 경제정책"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 결과 포퓰리즘은 초기에는 대중들에게 엄청난 희열을 주지만 점차 급격한 인플레이션, 실업률 증가, 임금하락과 같은 참혹한 종말을 낳는다.
전통적인 포퓰리즘과 달리 이른바 네오포퓰리즘은 재정 및 통화팽창정책을 노골적으로 강조하거나 공공부문 임금을 대폭 인상하지는 않는다. 재정 적자보다는 정부통제나 제도적 규제를 늘려가는 방식을 취한다. 국가의 역할이 강조되는 조세정책이나 노동정책에 직접 개입하게 된다. 민주적인 과정을 거쳐서 권력을 장악한다는 점에서 국민들은 포퓰리즘의 도래를 인식하지 못한다. 확고한 민족주의자들은 아니지만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와 그 산물인 사회적 양극화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그럼에도 네오포퓰리즘 역시 파국적인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 역시 남미와는 다르지만 포퓰리즘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한국은 토지분배, 공공부문의 재정지출, 교육제도 등에서 남미와는 현저하게 다른 사회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낳은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른바 '소득주도성장'과 공기업 주도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내세웠다. 코로나19의 팬데믹사태로 변명하였지만 실업률 상승, 자영업의 몰락, 수출의 지속적 감소 등 경제적 불안정성은 피할 수 없었다. 수요공급의 논리를 벗어난 부동산정책은 주택가격 급등과 전세난을 낳았다. 남북평화와 통일을 앞세운 민족주의적 담론은 한국의 오늘을 있게 해준 동맹국가들과의 외교관계를 불안하게 하고 남북간의 평화는 더욱 위협받고 있으며, 브레튼우즈체제의 최고 수혜자인 한국경제의 앞날을 요동치게 하고 있다. 정치적 필요에 따라서는 내부의 친일파를 청산하고 일본과의 전쟁도 불사한다는 민족주의적 감성을 동원한다. 현실적인 '에너지전환' 정책이 결여된 '탈원전' 정책은 '탄소중립 2050비전'의 실효성을 의심케 할 뿐만 아니라 원전산업과 에너지안전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문재인 케어는 건강보험 재정악화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문재인 푸어'를 맞게 될 수 있다. 민주주의가 균형을 잃으면서 진행된 K-방역은 백신의 준비상황이나 방역 자체에 대한 국제적인 평가에 있어서 결코 후하지 않다.
세바스티안 에드워드는 그의 저서 '포퓰리즘의 거짓 약속'에서 '경제정책에서 실제적이고 장기적인 발전을 이루려면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입법부와 사법부에 대등한 권력을 주는 자유민주주의적 정치개혁을 실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은 포퓰리스트 의제를 추진하기 위해 대통령의 권력에 과도하게 의존하게 되고 이를 강화시킴으로써 그 균형을 파괴한다. 카리스마적 지도자는 경제에 악영향을 끼치는 법안을 통과시키고자 시도하고 이러한 정치지형 속에서 성공하기도 한다. 마침내 경제정책도 파산하고 포퓰리즘의 비극적 종말이 나타나게 된다.
포퓰리즘은 결손된 민주주의 하에서 발생하여 특정한 소망만을 감성적으로 동원하며 그 파국적 결과는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 민주주의는 사회세력간의 팽팽한 균형 속에 이루어진다. 그 균형과 견제가 사라지면 국가권력 내부의 균형과 견제도 사라지며 포퓰리즘의 기반은 자리잡게 된다. 한때는 스웨덴인가 미국인가를 논했던 한국이었지만 이제는 차베스인가 룰라인가를 선택해야 될지도 모른다.
2020-12-21윤상철[윤상철 칼럼]민주주의를 지키려면
민주주의는 문화적 전파이든
국제적 유인이든, 내부적 투쟁이든
쉽게 제도로서 복사될 수 있지만
이를 변함없이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내·관용·자제·희생등 절대 필요
20201109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요즘 한국의 젊은 세대들은 당당하고 자유로워 보인다. 취업은 어렵고 미래는 불투명한 헬조선에 산다는 그들이 결코 주눅들고 억압된 존재들은 아니다. 아마도 그들이 자본주의적 산업화가 낳은 경제적 풍요와 정치적 민주화가 가져온 자유와 평등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미래를 위해서도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는 잘 꾸려져야 할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더 많은' 부를 '탐욕'으로 비판하고 절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더 많은' 민주주의는 지극히 당연하게 여긴다. 경제는 상대적이어서 더 많이 추구할수록 더 큰 착취와 불평등을 낳지만, 민주주의는 무한히 추구할 수 있는 화수분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민주주의 역시 이해와 생각이 다른 사람집단 간의 관계이기 때문에 자제와 균형이 이뤄질 때에 유지할 수 있다. 민주주의가 과도하면 사회적 균열과 붕괴를 낳기 마련이고 민주주의 없는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잘 설계된 헌법은 전제주의를 막는 방파제이자 민주주의의 버팀목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믿음은 현실 정치에 의해 자주 배반당했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견제와 균형을 기반으로 잘 설계된 헌법에도 불구하고 링컨시대의 행정부 권력집중과 닉슨의 워터게이트 스캔들을 낳았다. 그 고귀한 헌법은 트럼프의 인종차별과 비도덕적 포퓰리즘을 막지 못했다. 독일의 바이마르 헌법은 히틀러에 의해 유린당했고,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헌법 역시 바르가스 군사독재정권과 페론이즘에 의해 짓밟혔다. 필리핀은 마르코스 독재에 의해서, 한국은 이승만체제나 유신독재에 의해 얼룩졌다. 2차 대전 이후 신생 공화국들은 미국 헌법을 교본으로 민주주의적인 헌법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를 유지하지 못했다.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렛은 그들의 저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헌법의 불완전성과 다의성을 지적한다. 나아가서 헌법을 기계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법의 취지가 훼손될 수 있다고 한다. 오히려 헌법보다 성문화되지 않은 규범이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완충적 가드레일의 역할을 하면서 일상적인 정쟁이 전면적인 분열과 내전으로 치닫지 않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 첫번째 규범은 상호관용이다. 정치경쟁자가 헌법을 존중하는 한, 그들이 존재하고 서로 권력경쟁을 벌이며 사회를 통치할 권리를 갖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정치적 경쟁자를 적폐세력 혹은 주사파 친북세력으로 매도하거나, 상대 세력을 배제한 새로운 정치구도를 희망하는 한 이들 사이에 더 이상 민주주의는 없다. 상대세력에 대해 반민주적 폭력이나 대중선동과 길거리정치로 대응하는 한 민주주의는 유지되기 어렵다.
두번째 규범은 제도적 자제이다. 법적 권리를 신중하게 행사하는 태도 혹은 법을 존중하면서도 동시에 입법취지를 훼손하지 않는 태도이다. 제도적 자제는 민주주의보다 더 오래된 정치적 전통이기도 하다. 영국의 왕은 총리임명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수당의 대표가 맡는 관습에 따랐다. 미국의 대통령은 두 번의 임기를 넘지 않는 관습을 지켜왔다. 만일 헌법을 기계적으로 해석하여 제도적 특권을 함부로 휘두르는 이른바 '헌법적 강경태도'를 견지하면서, 정치적 경쟁자를 제거하고자 한다면 그 결과는 파국적이다.
민주적 헌법체계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행정, 사법, 입법의 3권이 균형과 견제를 유지해야 한다. 의회를 장악한 야당이 제도적 특권을 활용하여 대통령 탄핵을 모의하고, 사법부의 임명을 거부하고, 행정각료의 임면에 과도하게 개입한다면, 입법부와 사법부를 장악한 여당이 헌법적 의무보다 대통령의 불법적 행위를 묵인하고 오히려 그 권력 강화에 집중한다면, 그를 위해 입법부의 제도적 관행을 어기고 상대가 반대하는 법률을 일방적으로 세우려 든다면 민주주의는 유지되기 어렵다. 대통령이 행정명령과 사면권을 남용하고 정파적으로 대법관을 임명하려 든다면, 정치인 법무장관이 준사법기관인 검찰을 수사지휘권을 들어 핍박한다면 제도적 자제를 넘어선 것이다.
민주주의를 지탱하게 하는 사회적 규범은 제도정치를 넘어서서 시민사회의 영역에서도 필수불가결하다. 사회집단 간의 상호관용이 없다면 그들의 지지에 기반을 둔 정당 간의 상호관용도 존재하기 어렵다. 민주적으로 제도화된 사회에서 자제되지 않는 길거리의 정치와 상대를 고려하지 않는 정체성의 정치는 대통령 등 행정부와 입법부의 자제력을 상실케 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문화적 전파이든, 국제적 유인이든, 내부적 투쟁이든 쉽게 제도로서 복사될 수 있지만,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내, 관용, 자제, 희생 등의 가치규범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2020-11-09윤상철[윤상철 칼럼]민주주의의 위기는 왔는가?
진보인사들 민주정권 부정적 평가
가짜뉴스 민주주의 뿌리째 병들어
네트워크로 권력장악 성공한다면
사회적 문제해결도 포퓰리즘 변질
정치적 감응력 갖춘 시민 필요할때
20200928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민주주의는 항상 논란의 대상이다. 그 민주주의의 계기는 '총을 가진 사람들이 총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고, 그 동기는 적대적 투쟁에서 죽을 수 있는 공포로부터의 해방일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민주주의는 사회갈등의 근본적 해결책이기보다 잠정적인 타협에 가깝다. 그러나 근본주의적 한국사회는 인간과 사회의 한계와 잠정적 타협에 동의하지 못한다. 친일청산이나, 민주화운동 명예회복이나 잠정적 해결책에 동의하지 못하고 끝없이 진행된다. 제주 4·3사태, 광주민주화운동, 천안함폭침사건, 세월호, 대통령탄핵, 삼성불법경영승계 등 우리 역사와 사회의 근간을 뒤흔들어왔던 문제들이 해결되지도 종료되지도 않고 끝없이 반복된다. 지뢰밭을 걸어가는 형국이다. 운동장이 언제 어느 방향으로 기울지 모른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근원적으로 착근하기 어렵지만, 현존 민주주의 역시 불협화음을 내면서 정치적 효능감을 감쇠시킨다. 이제 진보적(?) 민주정권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공공연히 그 내부로부터 나온다. 현 집권세력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는 진중권은 촛불정권이 연성독재로 전락했다고 질타한다. 진보좌파개혁세력과 정부에 몸담았던 한상진은 그들의 국가권력중심주의를 지적하고, 최장집은 인민민주주의적인 전체주의의 도래를 우려한다. 보수적 우파들의 견해를 차치하더라도 한국 민주주의는 이제 위기와 파국에 다가가고 있는 듯 보인다.
영국의 정치학자인 데이비드 런시먼은 '민주주의는 어떻게 종말을 고하는가?'라는 책에서 민주주의의 위기는 쿠데타, 대재앙, 정보권력 등 세 가지의 계기로 온다고 분석하고 있다. 첫 번째 징후는 쿠데타이다. 쿠데타의 원인으로는 이념적 좌우대립, 국가 기구 간의 분열, 정치적 파벌 간의 불신, 국책책임자의 부재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상황이 충분히 무르익은 나라에서도 군사적 쿠데타는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다. 다만 현대의 쿠데타는 조용하게 다가올 뿐이다. 집권 세력들이 민주주의를 유예하는 행정부 쿠데타나 전략적 선거조작 혹은 부정투표 등이 있을 수 있다. 선거를 통해 정당성을 부여받은 세력들이 공약을 내세워 민주주의를 장악하기도 한다. 이러한 조용한 쿠데타를 수행하기에 민주주의의 절차는 썩 괜찮은 외양이 되기도 한다. 그로 인해 '민주주의를 지지하던 것이 오히려 가장 큰 위협이 되고, 민주주의를 위협하던 것이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방어벽이 되는' 역설이 발생한다.
민주주의를 붕괴시키는 또 다른 계기는 핵전쟁이나 환경재앙 그리고 나치즘과 같은 대재앙의 위기로서 실존적 위협이기도 하다. 물론, 대참사가 낳는 세상의 종말을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어날지 모르는 최악의 사태를 걱정하느라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 나아가 실존적 위험 앞에서 생명과 제도가 저울질 될 때 민주주의는 소모품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사회이론가 일레인 스캐리는 "우리는 핵무기를 철폐하는 대신 의회와 시민을 제거해 버렸다"고 말한다. 코로나19의 팬데믹 상황에 대한 공포 속에서 우리들은 자유, 인권, 민주주의가 위축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정보권력의 문제는 더 심각하다. 컴퓨터가 인간의 반응을 유도해 내는 능력이 오용되면 민주주의는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다. 개인의 편향을 조장하고자 특정 성향의 유권자들을 겨냥해서 기계가 메시지를 보내고 가짜 뉴스를 만들어 간다면 민주주의는 뿌리째 병들게 된다. 민주국가의 힘은 상의하달식 권위와 폭넓은 포용성의 적절한 결합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국가라는 리바이어던이 권위만을 내세워 페이스북과 트위터, 유튜브와 포털 그리고 SNS와 같은 네트워크에 기반한 정보권력 리바이어던을 수하로 부리게 된다면 민주주의는 설 자리가 없다. 민주주의란 애초에 오랜 시간을 숙고하면서 의사결정을 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국가 혹은 정치권력이 더 많은 정보와 지배적 지위를 가지고 조정하면서 확증 편향에 물들은 군중의 '다수의 횡포'를 민주정치의 양념이라고 호도한다면 더 이상 기대할 수 있는 민주주의는 없다. 네트워크의 힘으로 사회운동에 성공할 수는 있지만 권력 장악에도 성공한다면 사회적 문제 해결도 포퓰리즘으로 흐르고 민주주의도 점차 쇠약해진다.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서는 창의적이고 적극적이면서 성찰적인 시민들이 필요하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위기징후를 포착할 수 있는 정치적 감응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민주주의가 문제 해결에 무능하더라도, 당면한 사회적 문제 해결이나 진영적 독선을 위해 민주주의를 버리는 우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야말로 실존적 죽음을 부르는 사회적 공포에서 벗어나는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이다.
2020-09-28윤상철[윤상철 칼럼]껍데기만 남은 사회규범을 위하여
민주주의는 국내 최상위 정치규범
최근 3권분립.소수존중 등 동요 목도
'서울시장 사건'에 페미니즘의 회의
환경생태주의도 '4대강 논란' 퇴색
실천적 실재 못찾는 현실 안타까움
20200817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지난 40년간 한국사회의 최상위 정치 규범은 민주주의였다. 여야와 좌우를 넘어 민주주의에 대한 합의 수준은 매우 높았다. 사회적 배경에 따라 다르기도 했지만, 지역간의 차이는 비교적 선명했다. 특히 호남지역은 5·18 민주화운동 이후 민주주의와 민주당 계열 정당에 대해 굳건한 지지를 보여줬다. 최근 진보적 원로정치학자인 최장집은 현 정부 들어 나타난 정치적 양극화와 민주주의의 퇴행을 들어 현 정권의 민주주의는 실상 다수결로 무장한 전체주의라고 일갈한 바 있다. 어떤 보수 정치철학자는 현 정권을 연성 파시즘으로 규정한다. 국가주의적 이념의 혼란을 감안한다면 전체주의적 포퓰리즘 독재가 더 적절해 보이기도 한다. 최근 우리는 정치적 다원주의 혹은 자유민주주의체제 하에서 볼 수 있었던 삼권분립, 법의 지배, 언론의 독립, 소수에 대한 존중 등이 동요하고 있음을 목도한다. 이런 상황이라면 현 정권의 진보적 좌파성향과 민주주의 성향을 중시하여 지지를 해왔던 호남지역은 가장 먼저 그 정치적 지지를 철회하거나 약화시켜야 한다. 그러나 다른 지역민들의 정치적 지지가 눈에 띄게 퇴조하는 상황에서 호남지역의 지지는 철옹성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지지했던가?
페미니즘 혹은 성평등주의는 또 하나의 최상위 정치규범이다. 대통령조차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칭하고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여성가족부'가 날로 그 활동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스스로를 페미니즘과 동일시하지 않고서는, 정치인도 교사도 학자도 그 사회적 입지가 흔들리고 노골적인 비난에 직면하며, 심지어 평범한 남성들도 사회적 삶을 견뎌내기 버거운 꼰대로 전락한다. 비례대표 여성할당제 등으로 인해 여성 국회의원들의 비중은 점차 높아지고 있고, 성평등교육은 정부기관, 교육기관뿐만 아니라 일반기업까지 확산되고 있다. 그럼에도 현직 서울시장의 성추행사건이 수년간에 걸쳐 진행되고 있었을 때에 그 피해여성을 보호할 수 있는 제도와 조직 그리고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전직 비서가 마침내 변호인의 조력을 받아 이를 고발했을 때에 여성가족부도, 여성국회의원들도 그녀를 위해 나서지 않았다. '피해호소인'이란 생소한 명칭을 사용했고, 가해자의 사망에 따른 '공소권 없음'으로 수사를 종결하고자 했으며, 피해자에 대한 인터넷 댓글 공격이나 5일간의 '서울특별시장'은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로 가혹하기만 했다. 그들의 페미니즘은 무엇이었던가?
환경생태주의 역시 중요한 정치규범이자 생활규범이다. 환경생태의 향상과 보존은 경제성장이나 삶의 질과 으레 충돌하거나 길항관계에 있기 마련이어서 매 사안마다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과학적 분석과 민주적 토론을 같이 해야 한다. 4대강 사업에 대해 환경생태와 삶의 질 개선을 둘러싸고 상반된 주장들이 충돌해왔다. 사업이 끝난 후에도 16개 보의 개방 및 철거를 두고 온갖 정치적인 논란이 반복됐다. 그 환경생태주의자들은 탈원전정책 이후 진행된 태양광발전과 에너지 전환에 대해서는 아무런 주장도 하지 않는다. 원전을 대체하는 석탄발전이나 화력발전 그리고 LNG 발전의 미세·초미세먼지나 지구온난화 배출가스의 증대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 장기간의 장마로 인한 산사태가 태양광패널을 설치하기 위해 이뤄진 삼림파괴와 어떠한 관련이 있으며, 무너진 발전시설로 인한 오염 가능성에 대해서도 조용하기만 하다. 과연 이들이 환경생태주의자인지 의심스럽다.
인권변호사 출신의 대통령을 가진 나라에서 우리 민족 북한의 인권에 대해서 눈감고 있고, 정권에 속한 일부 특권세력 피의자의 인권을 중시하는 반면, 정권의 비리를 파헤치려는 언론사 기자나 검사에게 그 기준은 적용되지 않는다. 차라리 인권을 말하지 말라.
정치적 자유를 보호하고 다원적 가치를 인정하는 문제는 민주주의 이전의 가치이자 민주주의의 주춧돌이기도 하다. 민주주의, 성평등주의, 환경생태주의, 그리고 인권 그 모두가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지배적 규범들이다. 하나의 가치가 상위에 서서 다른 가치들을 전제적으로 배타적으로 지배하고, 가치들 상호간에 위계서열이 존재하는 상황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로 인해, 그리고 집단의 세속적 이익이나 관심에 따라, 어떤 지고한 규범이 묵살되거나 감춰지는 상황도 더욱 바람직하지 않다. 모든 근대적 보편적 인본적 가치들이 내세워지지만 그 실천적 실재를 찾을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2020-08-17윤상철[윤상철 칼럼]'적'과 동침하는 민주주의
다수를 존중하고 소수를 배려하는
'자유민주적 질서'가 체제운영원리
선거통해 권력의 정당성 상호인정
특정이익 추구땐 사회적반발 초래
복원시키려면 엄청난 희생 불가피
20200706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대한민국의 정치체제는 헌법 전문에 이어 제4조에서 반복되듯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로 규정되어 있다. 헌법 전문의 내용들은 대부분 대한민국의 역사와 정체성 그리고 국가의 목표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체제운영원리는 오직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담겨 있다. '자유와 민주주의에 기반한 질서'에서 민주적 기본질서는 헌재의 판례에 따르면 '모든 폭력적, 자의적 지배를 배제하고, 다수를 존중하면서도 소수를 배려하는 민주적 의사결정을 기본원리로 하는 민주적 기본질서'이다. 즉, 헌법에는 체제 운영의 기본 원리만이 제시되어 있을 뿐,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정의는 찾기 어렵다. 이렇듯 광의의 방어적 정의로 인하여 어떤 체제운영원리가 수용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통합진보당의 위헌정당해산에서 볼 수 있듯이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최근의 정치상황과 국민의식을 살펴보면, 민주적 기본질서 역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민주주의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일정한 절차에 따라 움직이는 '적과의 동침'이다. 화해불가능한 적도 있고, 적인지 친구인지 불명확한 대상도 있고, 이해를 같이 하는 친구도 있다. 그러한 관계가 항상 고정되어 있지는 않다. 상황에 따라서 적이 친구로 될 수도 있고 친구가 적으로 둔갑할 수도 있다. 이러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상황에서 가능하면 더 많은 친구를, 가능하면 더 적은 적을 두고 있을 때에 더 안전하고 더 지속가능한 미래를 담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적이 없는,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추구했던 실험들은 결국 국가체제 자체를 붕괴시키거나 국민들의 삶을 나락으로 빠뜨렸다.
민주주의는 특정한 세력이 주장하는 선과 정의를 실현하는 체제가 아니다. 그러한 목적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장단기적 목표들을 서로 합의해내고 실현하기 위한 형식적 규칙들이다. 적과의 갈등을 풀어내는 제도화의 방식이다. 잠을 자지 않고 살 수 없는 인간들이 안전하게 적과 동침하기 위해 만들어낸 제도의 묶음이다. 내가 생존하기 위해 적의 생존을 보장하는 제도인 것이다. 즉, 친구도 아니지만 적도 아닌 기묘한 사회관계의 양식이 민주주의로 서로 얽힌 것이다.
그 민주주의는 극단적인 갈등과 폭력적인 충돌을 피하기 위해 새로운 규칙들을 만들어낸다. 정기적인 선거를 통하여 권력을 위임하고, 그 권력의 정당성을 상호 인정한다. 위임의 내용과 한계, 그 절차 등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규정되지만 완벽하지 않다. 이 경우에 우리는 상식과 관행에 따라 법의 미비점을 보완한다. 역사적 선례와 과거의 지도자들은 좋은 지침이 될 수 있다. 예기치 않게 법을 재해석하거나 사문화된 법률조항을 되살려내는 행위는 법논리상 옳다 하더라도 민주주의의 합의정신과 충돌한다.
일반적인 사회규범 역시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는 제약조건이자 균열을 메우는 시멘트이다. 평등과 차별금지의 에토스는 그 어떤 가치나 이데올로기로도 유보될 수 없다. 유교적 권위주의적 질서는 사회에 짙게 드리워져 있지만, 신분과 계급의 질서를 덧씌우기는 어렵다. 기회의 균등과 결과의 평등이 갈등하고 있지만 공정성을 배반하는 행위에 분노한다. 자본주의가 낳는 사회적 양극화에는 분노하지만, 그렇다고 경쟁의 가치와 사적 소유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반드시 유교에 기반한다고 보기는 어려운 생래적 가족주의적 가치관 역시 강하게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어떤 진보나 보수라도 이에 대항한다면 그 긍정적 가치를 실현하지도 못하고 무너지게 된다. 산업화와 민주화, 민족주의와 반외세 등의 가치도 어느 것 하나 양보하기 어렵다. 자유의 가치 역시 또다른 사회적 억압이 체제화된다면 국민 모두가 호출할 것이다.
이렇듯 민주주의는 여러 가지 정치적, 역사적, 사회적 유산과 제약들을 담고 있다. 특정한 가치를 추구하기 위하여, 특정한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민주주의를 파산시킨다면, 그들이 추구했던 것들을 이루기도 힘들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또다시 복원시키기 위해 엄청난 희생과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인류의 집단지혜는 민주주의가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말한다. 어렵게 만들어낸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훼손시키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2020-07-06윤상철[윤상철 칼럼]탈성역의 민주화
날로 커지는 '정의연·윤미향 사태'
사회공동체 파수꾼 역할이 목표인
시민단체의 권력유착 폐해를 본다
문제는 그 이후 '은폐·호도' 집착땐
사회운동 대의는 살아남기 어려워
20200525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정의기억연대와 윤미향 전 이사장의 사태가 날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성금 횡령이나 배임의 의혹은 시민단체가 경제적 이권을 찾아 타락하였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국회의원 당선자인 윤 전 이사장에게 시민단체 활동은 정치권력으로 나아가기 위한 통로였을 수 있다. 시민단체 활동가가 위안부 문제에 당사자들을 배제하고 개입함으로써 국가간 외교를 왜곡시키고 국내정치까지 소용돌이치게 한 사실은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돌아볼 일이다.
세계적인 사회학자 찰스 틸리는 '동원에서 혁명으로'라는 저서에서 정치세력이 시민사회세력을 동원하고 호선하는 양상은 다원민주주의체제 하에서 불가피하다고 갈파한 적이 있다. 그 과정에서 시민단체가 권력화하거나 시민운동가가 출세하는 일은 사회적으로는 부수적인 현상일 뿐이다. 모든 사회구성원들이나 집단이 사회문제를 의사결정하는 정치권력을 추구하는 한 불가피하다. 사회문제를 위임하거나 대표하지 않고 스스로 정책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 또한 부적절하다고 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시민운동단체가 특정 정치권력과 지속적 유착관계를 맺는 모습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비정부기구로서 정파적, 계급적, 집단적 이해관계를 넘어서서 전체 사회공동체의 생존과 발전에 기여해야 할 시민운동단체가 그 안에 갇힘으로써 우리 사회가 잃는 손실은 너무도 크다. 더군다나 그들이 공식적으로 지키고자 했던 피해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소망을 펴보지도 못하고 사라져가거나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비난을 받거나 심지어 매도되면서 거듭된 피해와 고통을 받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못하다. 뿐만 아니라 정치권력이 그들의 지지에 기반을 두고 정치적, 정책적 선택을 수구할 수밖에 없다면, 변화하는 현실에 무능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말할 수 있다. 어떤 진영에 속한 사람이든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이성을 가지고 있다면 여기까지는 쉽게 말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의 문제이다. 시민운동단체가 정치권력이라는 뒷배와 묻지마 지지를 외치는 진영 내의 군중을 믿고서 은폐와 호도를 일삼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시민운동을 우리 사회의 파수꾼으로 기대할 수 없다. 손잡고 협력해왔던 부적절한 동거가 무너지면서 스스로의 권력기반이 약화될까 두려워 정치권력이 이들을 두둔하고 나아가 타락한 정치공세를 지속한다면 이 나라의 정치와 역사는 다시 곤두박질치게 될 것이다.
여기부터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를 경험하지 못한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끝없이 확장되고 심화됨으로써 그 완성으로 가는 과정에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산업화에 따르는 국가주의와 발전주의를 넘어서는 과정에서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갖는 성역과 금기들을 무너뜨렸다. 그럼에도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성역들을 만들어냈다. 민주주의를 촉발시키고 밀어준 사람, 장소, 사건, 그리고 이데올로기들이 성역화되었다. 보수적 산업화세력의 역사적 성찰성 결핍과 개혁적 민주화세력의 권력집착으로 인하여 우리 국민들은 진지하게 성찰하고 토론하면서 합의로 나아가기 보다는 사람들이 더 이상 건드려서는 안되는 성역들을 쌓아올렸다. 불가피했다고 항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쌓아 올린 성역들은 약간의 틈새나 지진에도 쉽게 무너져 버림으로써 그 가치들을 훼손시켜버린다. 강변한다고 해서 사회운동의 대의는 살아남기 어렵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성역 만들기가 횡행하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미 이루어졌음에도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여기저기 성역을 쌓아 올린다. 압축비약적 발전이 천민자본주의를 낳음으로써 가진 자들의 갑질과 사회적 양극화를 낳았었다. 그럼에도 토론과 합의가 부재한 민주주의는 5·18민주화운동을 지속적으로 폄훼와 반동에 시달리게 한다. 이처럼 졸속적 민주화의 길을 간다면 사회적 평등과 삶의 질, 생명과 안전이라는 기본적인 가치들도 페미니즘에 대한 냉소와 세월호에 대한 비인륜적 패악질로 나타날 것이다. 스스로 납득할 기회와 과정을 만들지 못하였으니 그들은 틈만 나면 못들은 체 하면서 트집을 잡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을 법과 제도로 짓누르겠다고 하면 우리 사회는 과거의 권위주의체제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것인가? 아무리 정의로운 가치와 이념이라도 비민주적 권위주의체제를 만들어낼 수 있다.
2020-05-25윤상철[윤상철 칼럼]문제는 키잡이가 아니라 항로이다
진영논리 여야 커지는 '갈등의 골'
코로나 사태로 총선 쟁점 '블랙홀'
세계경제 위기 '무질서 시대' 예고
자본·기업 국가와 사회 개입 확장
미국배제 친중은 매우 위험한 전략
20200413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주중에 총선거가 치러지면 여야는 승패에 따라 극단적으로 반응할 것이다. 승리한 여권은 지난 3년간의 실정을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공수처를 내세워 자신들의 부패와 비리를 파헤치던 검찰과 야당을 핍박할 것이다. 승리한 야권은 국정을 중단시키고 정권비리에 대한 총체적 수사와 대통령 탄핵마저 밀어붙일 것이다. 정치권은 곧바로 대권경쟁에 돌입하면서 국가적 경제위기 등 산적한 국정과제는 진영논리에 휘말릴 것이다. 유권자인 국민들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채 휩쓸려 왔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코로나19 사태는 블랙홀처럼 총선거의 쟁점을 희석시켜 버렸다. 코로나19 사태는 전세계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와 국가간, 지역간 경제봉쇄를 낳으면서 지구를 정지시켜버렸다.
IMF총재인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는 1930년대 세계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난이 목전에 와 있으며 170여개국 이상이 마이너스성장을 기록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한국정부의 희망처럼, 잘 나가던 경제가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주춤하고 있지만, 이 사태가 끝나면 다시 회복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OECD 최하위권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던 경제가 잘 나가고 있었다고 동의하기 어려우며, 세계적인 팬데믹 사태가 가까운 시일 내에 가라앉을지도, 설사 수습된다 하더라도 세계경제가 이전 수준으로 복귀할지는 알 수 없다. 최근 경제분석기관, 신용평가사, 투자은행 등이 내놓은 한국의 경제성장률 평균치는 -0.9%의 역성장이다. 이미 1, 2분기의 경제가 역성장을 보인 만큼 그러한 전망이 뒤집힐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가장 비관적인 노무라증권이 제시한 성장률은 -6.7%이다. 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5.1%)와 1980년 2차 오일쇼크(-1.6%)보다도 더 심각한 경제침체이다.
더욱 치명적인 사실은 세계와 한국이 직면한 상황이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일시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점이다. '거대한 분기'를 비롯하여 많은 저작들이 2008년 이후 신자유주의의 위기와 붕괴를 주장해 온 바 있다. 한국은행 등 국내의 주요 경제분석기관들도 2012년부터 GVC(지구적 가치사슬)가 눈에 띄게 약화되고 있다고 진단한 바 있다. 지정학 전략가인 피터 자이한은 '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이란 책에서 브레튼우즈체제가 완전히 붕괴하면서 2015~2030년간에 자유무역질서의 해체, 세계적인 인구역전 현상, 유럽과 중국의 붕괴가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미국의 시장, 해군력, 전략적 우산에 의해 가능했으나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실속없는 이 체제가 사회주의체제의 붕괴, 패권국가로서의 중국 등장, 세일가스혁명의 진전 등에 의해서 새로운 무질서의 시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시대로 변화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신자유주의체제 하에서나 미국 주도의 국제무역질서 하에서도 중국과 한국은 가장 많은 혜택을 받았던 나라였다. 특히 한국은 지구적 상품 사슬이나 지구적 가치 사슬에 있어서 미국이 제공한 국제적 평화체제 하에서 급속한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던 나라였다. 이 체제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한국은 대내적으로는 진보적 재분배전략으로, 대외적으로는 중국과의 정치적, 경제적 관계를 중시하는 전략으로 대처해왔다. 노동자들의 임금수준을 높이고 사회복지와 의료체계를 급속하게 확충하는 한편 자본과 기업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개입을 확장하는 전략이 적절했는지는 의심스럽다. 미국의 배제전략과 과도한 기업부채로 인하여 성장률이 둔화되고 기업부도와 유령도시가 속출하는 데다 한국에 대해 정치, 군사적 종속까지 강요하는 중국에 접근하면서 기존의 다차원 동맹과 거리를 두는 전략 또한 근시안적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은 비우호적인 국제환경 속에서 매우 위험한 전략으로 대처했다고 볼 수 있다. 금번 코로나19 사태는 이러한 대내외적인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고, 분열적, 고립적 방향으로의 변화의 속도를 더욱 진척시켰다고 볼 수 있다. 풍랑이 더욱 거칠어지는 바다에서는 선장과 항해사, 조타수 가운데 누가 키를 잡을지가 중요하기 보다는 누가 선택하든 정해지는 항로가 어디인가가 더 중요할지 모른다.
2020-04-13윤상철처음==
[윤상철 칼럼]정보민주주의? 정보포퓰리즘! 지면기사
조국이어 코로나19 사태 사회 쟁점
인터넷이 '해법 공론장' 기대했으나
국가·자본의 네트워크 개입 사유화
개개인은 의견 취합전에 편식·잡식
집단간 대화·토론부정 반민주공간
20200302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최근 두 가지의 정치사회적 쟁점이 한국사회를 뿌리부터 흔들고 있다. 하나는 소강상태에 이른 '조국사태'이고 다른 하나는 절정을 향해 치닫는 '우한폐렴 사태'이다. 두 사건 모두 국민의 일상적 삶에 깊숙하게 관여하는 사안인 만큼 국민들은 이에 높은 관심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견해를 명확하게 드러내려 한다. 이미 국민들은 자신들이 모두 발언할 자격과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믿고 있다. 두 사안의 의미를 진단하고 해석하는 데 있어서나 해법을 제시하는 데 있어서도 국민들은 극단적으로 상반된 입장으로 대립하고 있다. 이미 국민들은 사안들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서로 확신한다. 또한 으레 그렇듯이 두 사안 모두 정치세력들간의 결사항전의 메뉴로 소비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국민들을 대표하는지 아니면 동원하는지 알 수 없는 세력들이 존재한다. 물론 두 사안 다 권력관계에 의해 결정되고, 외적 상황에 의해 봉합될 수도 있지만, 여진이 가시지 않은 휴화산일 뿐 언젠가 다른 쟁점으로 다시 소환될 것이다.
1980년대 이후의 한국사회는 거대하고 중층적인 변화를 겪었다. 권위주의체제로부터 민주화된 직후부터 지구화의 거대한 흐름에 휩쓸렸다. 정확하게 말하면 민주화 자체도 지구화의 한 흐름이었다. 그러나 지구화와 함께 대중들의 일상생활을 더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흐름은 정보화였다. 민주화를 성취한 한국인들은 정보화에 대해서도 진보적 낙관론을 가질 수 있었다. 권위주의체제의 폐쇄성, 즉 정보의 비대칭성이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데 결정적 장애였다고 생각하고, 정보화는 이러한 장애를 넘어서 정보로 무장한 민주적 시민들의 풀뿌리 민주주의를 배양할 거라고 기대했다. 심지어 자본주의체제의 불평등성도 기본적으로 노동자와 자본가 간 정보격차를 해소하면 완화될 수 있다고 믿었다.
민주주의와 미디어 간의 관계를 갈파한 미국의 언론학자 로버트 맥체스니는 '디지털 디스커넥트'라는 책에서 미디어는 더 이상 하버마스가 그렸던 '공론장'이 아니라고 말한다. 정부 간섭이나 통제로부터 벗어나 국가의 정책에 대해 시민들이 자유롭게 토론과 논쟁을 벌이는 공간이기를 멈추고 자본에 의해 사유화되고 소비자의 정보가 상품화되고 광고의 경제학이 지배하는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인 공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정보화사회의 꽃인 인터넷 역시 자본의 욕망과 국가권력의 통제가 투사되면서 민주적이고 자율적이고 사회적인 대중소통의 공간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즉, 정보화가 보다 풍요롭고 평등하게 정보를 공유하게 해줄 거라는 기대는 전혀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강한 국가와 자본에 의해 분절된 사회인 미국에서 정보민주주의의 희망이 사라졌다면, 그나마 상대적으로 강한 사회를 지닌 한국은 세계적 수준의 정보화를 기반으로 네트워크로 연결된 민주주의를 이루었을까? 미국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국가와 자본은 정보화사회의 네트워크에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개입한다. 물론 정보화 자체의 왜곡 혹은 결함도 있다. 사이버공간의 압도적 이미지는 사적인 욕망과 기호가 분출하면서 정보의 경중과 정오를 가리기 힘들어진 정보의 쓰레기장이다. 대부분의 개인들은 정보를 취하기 전에 그 막대한 양에 압도당하고 만다. 전문성과 도덕성 등의 기준이 없는 그 공간에서 개인들은 자신의 기호에 따라 편식하거나 잡식할 뿐이다. SNS 등으로 대표되는 정보화의 또 다른 특징은 이른바 '유유상종' 혹은 '호모필리(homophily)'이다. 카카오톡, 라인 등 다양한 DM(Direct Message)뿐만 아니라 페이스북, 트위터, 팟캐스트나 유튜브 등도 자유로운 공론장이기보다 비슷한 특성과 취향에 따라 모여서 확증편향을 강화하는 공간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인터넷 공간은 일군의 사람들이 정보의 쓰레기장의 한 귀퉁이를 자신들의 영토로 선언하고 다른 집단간의 대화와 토론을 부정하는 반민주주의적 공간이 되고 있다.
정보화가 계층간, 세대간, 지역간 정보불균형을 해소하여 더 깊은 민주주의를 만들어내려면, 이에 덧붙여 집단간 소통과 타협이 더욱 활성화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 집단들은 국가와 자본의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나 정보의 쓰레기 더미 속에서 집단간 격리와 균열을 더욱 확산시켜 '디지털 디스커넥트'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나아가 일부 시민들은 국가와 자본에 의해 분리되거나 동원되고, 나머지 시민들은 또다른 비집권 정치세력에 의해 동원되는 사회는 더 확신에 찬 '정보포퓰리즘'을 낳을 수 있다. 그 포퓰리즘 안에서 민주주의는 질식된다.
2020-03-02윤상철[윤상철 칼럼]청년, 여성, 그리고 광장민주주의?
젊은 학자들 비정규직 미래 불투명
남성중심 기득권체제서 女 더 열악
직접민주주의 목청 포퓰리즘 양상
과도할땐 특수이익만 배타적 반영
공화주의, 민주주의적 독재 처방전
20200120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지난주에 한 학회의 워크숍에 참석했다. 토론의 주제는 '갈라진 진보, 세대와 광장의 정치'였다. '진보'라는 말이나 좌파·우파의 구분은 정치세력들의 자의적 개념 사용으로 인해 그 '정명(正名)'이 어렵기는 하다. 그럼에도 참석자들의 논의를 대략 정리하면, 현집권세력은 한국의 정치 지형상 좌파로 규정할 수 있고, 집권 전까지 단일한 대오로 뭉쳐 있던 좌파세력이 집권 후반기로 가면서 이른바 '조국사태'를 계기로 내부적으로 분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이들에 친화적이었던 청년, 여성 세력들이 점차 이탈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또 다른 문제 제기는 자유민주주의의 통치형태인 의회민주주의가 그 정치적 효용성과 대표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광장민주주의 등의 직접민주주의를 대체재 혹은 보완재로 불러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이른바 '86세대' 남성엘리트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의회와 정당체제가 여성이나 청년들의 이해관계를 전혀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면서 학계가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쏟아졌다.
청년과 여성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상황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학계 역시 예외는 아니다. 교수 및 연구자의 길을 가고 있는 젊은 학자들은 학령인구의 감소에 따르는 대학구조개혁의 찬바람을 맞으면서 비정규직 강사와 연구원으로서 열악하게 살아가고 있으며 그 미래도 대단히 불투명하다. 그 이유는 국가발전의 토대인 지식생산자들을 국가와 사회가 여전히 유한계급으로 인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 역시 취업절벽 앞에서 헬조선을 부르짖기는 여느 청년들과 마찬가지이다. 여성의 상황은 더 열악하다. 예비연구자들의 성비나 여성들의 연구역량 등이 과거와 다르게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성 중심의 기득권적 대학교원체제는 요지부동이다. 사회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지만 여성들은 나이가 들수록 결혼, 출산, 육아 등의 압력을 더 받고 있으며 남녀의 상대적 차이를 논할 바가 아니다. 그로 인해 이들은 이제까지 결과적 평등과 소수자 및 약자의 배려를 주장해왔던 좌파들을 정치적으로 지지하면서 그들과 연합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한국 좌파에 실망하고 전지구적 좌파의 무관심과 무능력에 좌절하면서 현재의 정치적 거버넌스를 부정하고 새로운 급진민주주의적 개혁의 수레에 올라타고자 한다.
정치적 대표성을 상실했다고 생각하는 세력들은 의회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할 수도 있지만, 우회적인 수단으로 의회에 영향을 미치고자 한다. 최근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이른바 '광장민주주의'와 같은 직접민주주의적 양상들이다. 서초동과 광화문, 그리고 혜화동은 소용돌이치는 대중들의 반란이다. 이 광장에서 청년과 여성을 비롯한 다양한 이익들이 정치적으로 이슈화되고 동원된다. 일부 이슈들은 정치세력들을 통해 의회민주주의의 방향을 이끌기도 한다. 그러나 그 정치적 과실은 이들에 편승하거나 이들을 동원하는 정치 세력의 차지일 뿐이다. 더 안타까운 일은 대통령권력의 위임민주주의나 야당세력의 권력정치의 포퓰리즘적 선동에 동원되는 양상이다. 또한 광장민주주의가 갖는 감성적 소용돌이는 대중독재와 광장파시즘을 우려하게 하면서 체제의 불안정성을 키우기도 한다. 그들이 스스로를 동원하면서 내심 요구하고 있는 이익들은 일시적으로 표면적으로 정치적 담론에 반영되는 듯하다가 정치적 담합에 의해 어느덧 사라진다. 광장민주주의는 광장에서 먼지처럼 사라지고 잊혀간다.
그럼에도 민주주의가 과도하게 주장되면, 그 결과 힘을 지닌 집단의 특수한 이익이 선택적으로 수용되면, 다양한 집단의 이익갈등을 조정하여 최선의 일반의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민주주의를 배반하게 된다. 이에 일반적 정의와 모두의 이익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체로 나서는 공화주의가 거론된다. 공화주의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특수한 이익만을 배타적으로 반영하는 민주주의적 독재로 변모하지 않도록 하는 처방전일 수 있다. 동양이나 한국의 공화주의는 그 서구적 경험이 없고 진영논리가 팽배한 상황에서 이른바 협치 거버넌스를 통하여 모두의 이익이 대표되면서 상호조정되는 그러한 사회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과도한 광장민주주의는 공화주의가 부재한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파탄케 할지도 모른다.
2020-01-20윤상철[윤상철 칼럼]세대의 지배, 전근대의 지배
신분제 해체·서로 존중 사회…'
'자유로운 개인·독립의 개체…'
두 주장 틀렸다고 탓하기보다
우리사회 어떤 결핍 보았는지
동의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야
20191209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불평등의 세대'란 책이 올해 학계와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다. 주로 정치적인 해석이 덧붙여지고 있지만, 독자들은 자신이 속한 세대에 따라 다양한 감정을 표출한다. 계급적 시각에서 불평등을 바라보던 진보진영에서는 사회적 균열에 대한 세대적 시각에 동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정치적 정당성의 근간이었던 민주주의연대가 오히려 다른 세대에 대한 독점적 지배의 자원이 되었다는 점에 매우 부당해 한다.
저자인 이철승 교수는 세대의 정치가 어떻게 불평등의 구조를 낳게 되었는가를 다각도로 조명한다. 그는 386세대의 '네트워크 위계'가 '한국형 위계 구조'로 진화했다고 본다. 여기에서 위계구조는 첫째, 나이에 기반한 '연공구조'를 한편으로 하고 둘째, 세계화로 인한 노동시장 유연화 기제, 대·중·소기업 간 지배종속 관계, 그리고 노동조합을 통해 3중으로 중첩된다. 이 우연적 결합의 중심에 386세대의 네트워크가 최대의 수혜자로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들은 이른바 민주주의연대를 매개로 자본주의 하의 시민사회를 처음으로 조직한 세대였다. 또한 그들은 이전 산업화세대가 퇴출된 공간을 차지하고 후세대의 편입을 선별함으로써 정치적으로 과대대표될 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으로 과대독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제는 경제적으로도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약속했던 민주주의의 확장을 저버렸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비도덕적이라고 주장한다.
'반일종족주의'란 책은 역사학과 사회과학뿐만 아니라 정치권과 사회운동권에 두루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인문학 도서로는 보기 드물게 10만부 이상 판매되었다 한다. 독자들은 자신의 역사관이나 정치관에 따라 격분하기도 하고, 합리적 정당화의 지적 자원을 찾았다고 득의만만하기도 한다.
이영훈 교수 등의 주장도 기존 역사학계의 통념을 뿌리째 흔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년기부터 그렇게 교육받고 성장한 국민들의 민족주의적 정서와 충돌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그들의 주장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분노를 드러내며 친일파 혹은 '토착왜구' 등으로 먼저 낙인찍는다. 일본제국주의의 경제적 수탈을 시장적 교환으로 해석하고, 강제노동과 민족간 임금차별, 그리고 강제징병을 부정하고, 한일회담이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 청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한민족 민족주의의 상징인 백두산과 독도 문제의 뿌리 얕은 내막을 드러내고, 쇠말뚝신화의 허구성을 밝히며, 구총독부 청사의 해체를 반달리즘식 문화테러로 보기도 한다. 고종을 망국의 암주가 아닌 개명군주로 둔갑시키는 정치적, 역사적 '조작'에 맞서서 백성과 국민에 무책임한 이 나라 지배층과 엘리트들을 성토한다. 위안부와 공창제 문제는 이미 널리 알려진 바 그대로다.
나는 위의 두 책의 주장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동의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왜 이 연구에 대해서 '동의'에서 나아가 '환호'하는지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먼저 이철승 교수는 시장의 근본적 모순인 자본과 노동 간의 근본적 해결을 주장하는 구조주의 좌파에 맞서 '사회적 자유주의'를 주장한다. 계급의 덫에 빠져서 실제의 사회적 지배와 신분제에 눈감고 이를 존속시키는 우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는 시장경쟁의 폭압에 국가가 개입해 사회와 공동체를 지켜야 한다고 하지만, 근본적으로 국가와 사회의 속박을 공히 부정한다.
이영훈 교수는 샤머니즘적 반일종족주의에서 벗어나 자유민주주의와 근대화된 세계주의를 열고자 한다. 반일종족주의의 기형적 산물인 북한의 신정체제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는 전근대적 권위주의가 어떻게 근대적 민주주의의 확산과 심화를 억누르고 있는지를 지적한다.
이철승 교수는 "신분제 사회를 해체하고 내 자식과 다른 자식들이 자유로운 개인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사회적 위험을 분담하며, 노동의 대가를 적절히 공유하는 사회"를 꿈꾸고 있다.
이영훈 교수는 "자유로운 개인, 독립하는 개체, 충일한 개성, 고양하는 예술, 과학하는 정신, 협력하는 사회, 경쟁하는 기업, 세계와 통상하는 나라, 그러한 아름다움… 근대문명", 즉 자유로운 개인의 근대국가를 꿈꾼다.
진단이 틀렸으니 처방인들 맞겠는가 탓하기보다 그들이 우리 사회에서 어떠한 결핍을 보았는가, 그리고 그들의 독자인 시민들이 또한 그러한 진단에 동의하지 않았는지 생각해볼 만하다.
2019-12-09윤상철[윤상철 칼럼]거짓말로 무너지는 사회
'사기' 발생건수 모든 범죄 중 1위
OECD국가 중 관련범죄율도 최고
권력과 이익 취하기 위한 '거짓말'
교양있는 시민도 진위 파악 어려워
신뢰 상실하고 밑으로부터 '붕괴'
20191028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영국의 총리 디즈레일리는 "세상에는 3가지 거짓말이 있다"고 말했다. 거짓말, 지독한(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라고 한다. 선의의 거짓말이나 위선적 거짓말은 사회적으로 권장되지는 않지만 스스로의 편익을 취하지 않는다면 그나마 용납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권력과 이익을 취하기 위한 지독한 거짓말은 사회적 신뢰를 약화시켜 사회적 행위의 비용을 증가시키고 나아가 온 사회를 타락하게 한다는 점에서 묵과하기 어렵다. 더구나 "하나의 거짓말을 참말처럼 하기 위해서는 항상 일곱 가지 거짓말을 필요로 한다(마르틴 루터)." 여기에 불공정한 언론과 정치편향적인 조사기관, 그리고 이해당사자들이 만드는 통계까지 더해진다면 그 사회의 성원들은 정의/부정의, 삶의 목표, 후세대의 교육 등 일상적인 삶에서 아노미 상태에 이른다.
예부터 우리 사회의 '중요한 타자'들은 "착하지. 거짓말은 하지 마라"며 아이들을 격려하곤 했다. 이렇게 자리 잡은 사회적 규범은 경제적 저발전과 빈곤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이웃, 나아가 사회를 신뢰하는 기반이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거짓말이 많아졌다. 대검찰청의 '2018년 범죄현황'에 따르면, 2015년부터 사기발생건수가 모든 범죄 가운데 1위를 차지했다. 세계보건기구의 2013년 발표한 '범죄유형별 국가 순위'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의 37개 회원국 중 사기범죄율 1위를 기록했다. 무고사건 역시 2015년을 고비로 연 1만건을 넘어섰고, 김영란법과 맞물리면서 급속하게 증가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일본의 한 경제잡지에는 한국에서 위증죄로 기소된 사람 수가 일본의 66배, 인구 대비로는 165배라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최근 이른바 조국사태에서 우리들은 한 번의 거짓말을 정당화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만들어내는지, 한 사람의 거짓말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추가적 거짓말을 필요로 하는지 직접 체험했다. 조국 전 법무장관은 기자간담회와 국회청문회에서 자신을 향한 의혹에 대해 '모른다'거나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 아닌 해명을 했었다. 블라인드펀드, 펀드의 실제 소유자, 자녀 입학 관련 논란 등은 위법 여부를 떠나 곧바로 확인된 거짓말들이다. 법무장관과 그 가족들의 거짓말은 더 많은 거짓말을 만들어냈다. 국무총리의 압수수색 언급은 그가 중요한 정보로부터 차단당해 있거나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새빨간 거짓말을 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여당대표는 조국관련 보도건수 언급이나 검찰의 결론 없는 먼지떨이 수사 등의 근거 없는 거짓말로 검찰을 압박하거나 국민들을 현혹시켰다. 조국 전 장관의 강력한 지원자인 유시민씨의 '증거보전'논란이나 김어준씨의 SAT점수 혹은 논문제출논란 등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곧바로 확인될 거짓말로 자기 대중을 포획하는 사례들이었다. 조국씨가 장관직을 사퇴한 이후에도 그들의 거짓말은 스스로에 의해 확인되지 않았다.
같은 시기에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만을 위한 개별 대통령기록관 예산을 본인이 주재하는 국무회의에서 의결해놓고도 언론이 문제 삼자 "지시도 원치도 않은 일이라 격노했다"고 청와대 브리핑은 전한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서울시 산하 교통공사의 고용세습과 채용비리가 감사원 감사로 확인되자 "채용비리는 사실이 아니었다"고 대담한 거짓말을 하면서 거꾸로 언론을 비난하기도 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처럼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쉽게 화를 내는 모양이다. 스스로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타인을 공격하거나 비난하기도 한다.
교양있는 시민이라 하더라도 타인의 말이 거짓말인지 아닌지 쉽게 간파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얼마 동안 속일 수는 있고, 또 몇 사람을 늘 속일 수는 있지만, 모든 사람을 늘 속일 수는 없다고 링컨은 말한다. 또한 그 거짓말은 스스로에게 자살행위일 뿐 아니라 건전한 인간사회에 대해 칼을 꽂는 행위라고 에머슨은 일갈한다. 거짓말이 횡행하고 거짓 선동이 이뤄지는 동안 우리 사회는 인간 상호 간의 신뢰를 상실하고 밑으로부터 붕괴하고 있다. 심지어 그 거짓말을 지켜내거나 반박하기 위해 대중들이 동원되기도 한다. 전혀 무관한 정치적 명분을 제시하지만 사실은 그 거짓말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 거짓말에 정치적 경제적 명운을 건 세력들을 지키기 위해 우리 사회는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치르는 셈이다. 젊은이들이 말하는 '헬조선'은 그러한 거짓말이 세운 사상누각일지도 모른다.
2019-10-28윤상철[윤상철 칼럼]불공정의 사회, 불신의 사회
공정·진보 상징 법무장관 임명자
자녀 입시과정서 특혜·편법 의혹
분노한 20代 청년 후보퇴진 호소
대통령은 "나쁜 선례될 것" 훈계
개혁 배반 가치 내장 사회는 파산
20190916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아들과 엄마는 설전 중이다. 대학 졸업과 취업을 앞두고 모자는 예민해져 있다. 엄마의 눈에는 취업을 준비하는 아들이 느슨해 보이지만, 아들은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한다. 모자간의 대화 아닌 갈등은 길게 이어지지만 세대 간의 균열을 보여줄 뿐이다. 엄마는 걱정 섞인 질책을 하고, 아들은 물려줄 건물이 있는지, 소개해줄(아들 세대는 '꽂아줄'로 표현한다) 인턴이나 일자리는 있는지 항변하면서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이미 아들은 취업이 결코 녹록지 않다는 사실을 체득하고 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경쟁의 공정성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아들은 대학 입시와 군복무를 마칠 때까지 이 사회의 공정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부모와 학교로부터 배운 공정성과 정직성의 가치를 부정하지도 않았다. 열심히 노력하면 사회는 자신에게 반드시 보상하리라고 기대하였다. 이제 불공정한 이 사회에서 살아갈 방법을 깨달은 듯했다. 아마도 아들은 부모의 시대착오적 현실인식이나 사회적 무능력을 탓하거나 스스로 좌절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부모는 아들의 판단과 선택을 그저 조용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 시점에 이른바 최고 대학의 법대 교수이자 공정하고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의 진보적 상징이었고, 젊은 세대의 멘토였으며, 이른바 촛불정부의 민정수석을 거쳐 법무부장관에 임명된 사람의 특권적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보통사람들에게는 가시밭길이자 지뢰지대인 고교 이후 의학전문 대학원까지의 입시과정을 그의 자식들은 공항의 무빙워크를 걷는 듯했다. 그 과정에서 온갖 특혜와 편법 등이 동원되었고, 위법으로 의심되는 사안들도 더러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사회적 격려가 주어지기도 했다. 20대 청년들은 즉각 분노했다. 직접 관련된 대학의 학생들은 극한의 자괴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은 위법이나 불법, 탈법이나 편법을 넘어서서, 가치와 도덕의 아노미에 빠진 이 사회를 고발하고 그 위선적인 당사자의 퇴진을 외쳤다. 국민들은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경계를 넘나드는 법무장관 후보에 대해 대통령이 바로 잡아 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개혁성이 강한' 후보를 격려하는 반면 국민들에게는 '의혹만으로 임명하지 않는다면 나쁜 선례가 될 것'이라고 훈계하였다. 지식인들은 익명으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거나 심지어 답변을 거부하기도 했다. 개인적 일탈이나 위선으로 판단하거나 심지어 세대의 문제로 보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지배집단의 도덕적 불감증으로 보기도 한다. 다른 이는 자기주장이나 자기 정당화가 강하여 객관적인 자기평가를 할 수 없다고 한다. 환경 안에서의 인간의 한계로 말하기도 한다. 자녀교육의 문제라고 설득하려 한다. 심지어 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작은 것은 희생할 수도 있다고 강변하기도 한다. 자신들의 문제인 양 다양한 변명을 만들어낸다.
설사 이 문제가 특정한 개인이나 세대의 문제인가? 그 개인의 과거와 현재를 정치적, 진영적 논리로 덮어버리는 다른 정치지도자나 정치지지자들이 있는 한, 이제 우리 사회가 함께 감당해야 할 문제이다. 이러한 사실들이 밝혀졌을 때에 특정한 개인이나 세대의 문제로 만들 수 있는 다른 개인이나 세대가 있었다면, 20대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모든 개인들과 세대들은 이제까지 견지해온 사회적 가치와 사회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면서 안도하는 심정으로 조용히 퇴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지 못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특히 젊은 세대들이 그러한 편법적, 탈법적 행태에서 도덕과 가치를 붕괴시키고 오로지 더 많은 것들과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것을 사회적 가치로 체화한다면, 그 장관과 이 정부가 이루고자 하는 개혁은 사상누각일 뿐이다. 젊은 세대를 좌절시켜 사회적 삶의 준거를 잃어버리게 한다면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개혁을 한다는 것인가? 보다 정의롭고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개혁이 정치적 권력 경쟁의 슬로건으로 전락하고, 그로 인해 시민들에게 개혁에 배반하는 가치를 내장하게 한다면 이 사회의 파산은 불을 보듯 명확할 뿐이다.
2019-09-16윤상철[윤상철 칼럼]'없는 것'과 '가진 것'
집착·보상 욕구 부르는 빈곤·결핍
집단 확산땐 조급증·의구심 낳기도
결과의 평등, 사회 발전잠재력 침식
강한 열망 오늘의 한국 만든 원동력
역사의 변증법 개인·국가 성찰해야
20190805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최근 주말드라마를 보다가 사람들의 내면에 있는 어떤 결핍감이 이후의 삶을 얼마나 왜곡할 수 있는지를 새삼 돌이켜 보게 되었다. '어머니를 존경하거나 사랑한 적이 없다'는 남자의 내면에 깔려 있는 결핍이 자신의 딸을 평생 짓누르게 될 걸 걱정하는 다른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갑작스러운 부자들이 자신의 자식을 교육수준이나 사회적 지위가
빈곤과 결핍이 낳는 '상대적 박탈'이나 '지위불일치'가 가져오는 좌절과 보상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거리를 두고 보면, 사람들은 자신에게 '없는 것'에 과하게 집착하고, 스스로 '가진 것'을 가볍게 여기기 쉽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개인 차원의 보상 욕구가 사회 수준의 문제로 확산되면 좀 더 복잡해진다. 제도, 법, 그리고 정책을 통한 사회적 조정의 과정에서 또 다른 불일치를 낳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국민들은 군사쿠데타와 돌진적 산업화를 용인했고,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이 유린되었고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과 산업재해, 그리고 사회안전망 없는 저임금에 시달려야 했다. 국가주의적, 자본주의적 발전전략은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를 낳았기에 이를 낙수효과가 부재한 이윤주도성장으로 인식하고 노동자를 중시하는 소득주도성장으로 나아갔지만 급속한 최저임금인상과 52시간 근무제, 그리고 과도한 복지확장은 경제성장을 지연시킨다. 과도하게 이상적이고 지연된 적폐청산은 우리 사회의 바람직한 미래를 제시하고 있지만 충분한 사회적 합의 없이 권력을 활용하여 급하게 진행되다 보니 또 다른 유사 적폐를 낳고 있다.
우리에게 없는 것은 더 커 보이고 우리가 이룬 것은 누구나 어느 나라나 다 쉽게 이룰 수 있는 자연스러운 사회의 진화발전과정이라는 생각이 경제발전과 정치발전을 동시에 성취해낸 이 나라의 현재와 미래 진로를 너무 조급하고 더 소용돌이치게 만들고 있다.
오랜 남북갈등은 평화를 희구하게 했고 민족분단은 민족적 완성체를 당장의 대안으로 생각하게 한다. 전쟁과 충돌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경제적으로 곤궁해지고 정치적으로 왜곡되고 사회적으로 균열과 갈등을 체험하면서 평화적 결과보다 평화적 과정을 우선시하는 조급증은 국가의 영토가 유린되고 국민들이 기본적인 안전망에 의구심을 갖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민족분단은 늘 국제지정학에 의해 국가와 민족의 행로가 좌우되는 불편한 경험을 가져다주었지만, 그 대안이 폐쇄적 쇼비니즘적 '우리 민족끼리'를 앞세워 우리 사회를 어떠한 가치와 이념 속에서 세울 것인지에 대한 대안 없이 수십 년간 같이 해온 정치군사적 경제적 동맹들을 다 뿌리치는 편협한 홀로서기로 갈 일은 아니다.
사려깊게 구상되지 못한 평등은 타인의 자유도 사회의 발전도 침해하기 마련이다. 결과의 평등에 사로잡히다 보면 구사회주의의 길이 아니더라도 국가주의의 함정에 침몰할 수 있다. 개인들은 자유와 삶의 동기를 잃음으로써 이 사회의 발전잠재력은 침식되게 된다. 아직까지도 역사적 시대와 사회적 집단의 우열은 사회적 생산력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바람직한 사회는 생산력의 발전 위에서 분배와 평등, 그리고 개개인의 자유와 성취가 확산된다. 사회집단 간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있어서도 또 다른 불평등의 도래에 유의해야 한다. 모든 사회는 역사적으로 계승되지만 항상 새로운 개인들에 의해 재구성된다. 과거의 불평등에 대한 연좌제적 복수가 불가할 정도로 사회의 구성원은 계속 바뀌고 그들에 의해 새로운 사회계약을 맺게 된다.
최근 인류의 발전은 정당성 있는 주체가 씨족, 부족, 가족, 국가가 아닌 집단에서 개인으로 진화해왔다. 그러나 사회의 지속은 개인만으로 이뤄질 수 없고 사람들의 삶을 문화적으로 정서적으로 촘촘히 메우고 연결하는 다양한 사회단위를 필요로 한다. 너무 과도한 개인주의와 국가와 사회의 무능력은 장기적으로 그 사회를 해체하게 될 수 있다. 다른 희망이었던 민족은 더더욱 멀어지게 된다.
우리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강한 열망은 오늘의 한국사회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추구해온 모든 가치들은 다 특정한 역사와 발전시기에 필요한 덕목이었고 당시 사회를 추동하는 힘이었다는 점을 성찰해야 한다. 역사의 변증법적 발전은 이전에 추구했던 가치가 현재에 어떻게 녹아들어 있는가를 말할 뿐 결코 이를 폐기하거나 대체하지는 않는다. 500년된 예멘의 아파트를 고집하지는 않더라도 30년이 되기도 전에 재개발을 시도하는 우리들이 "시체에서 악취가 나지 않게 하려는 것보다 어렵고 비싸지만 쓸데없는 일은 없다"라는 말이나 어설픈 진보로 변명하고 있지는 않은지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성찰해볼 일이다.
2019-08-05윤상철[윤상철 칼럼]정치시민교육이 필요한가?
서구 민주화 과정보면 값을 치러야
반복할 필요 없지만 건너뛸 수 없어
한국사회, 방향·내용 합의 쉽지않아
재사회화된 시민, 자유 실현할 주체
가치 지탱할 훈련해야 하지 않을까
20190624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지난 주말에는 컴퓨터 앞에서 폭력예방교육을 받으며 보냈다. 양성평등기본법 등 여러 법률에 따르는 법적 의무로서 대학 교직원 모두가 연 1회를 이수해야 한다고 한다. 교육내용은 양성평등, 성희롱, 성매매, 성폭력, 가정폭력 예방교육 등 5개 과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 과목당 2시간 이상 지속되는 교육을 제한된 시간 내에 마치지 못하고 결국 비이수자로 남게 되었다.
교육을 받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유용하다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별로 와 닿지도 않는 내용으로 국가예산 낭비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내용을 판단하기 전에 국가주도의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방식이 적절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사회적으로 충분한 합의의 과정이 이뤄졌다고 보기도 어렵고, 더러 다른 사안들과 충돌하는 윤리적, 정치적 내용들을 국가가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판단하고 이를 전파하는 방식이 자못 불편하다. 대부분 사회학적으로 재사회화에 해당되는 내용들이어서 더 조심스럽다.
서구의 민주화 과정을 돌이켜보면, 민주주의정치야말로 그만큼의 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진민주주의의 동요와 내파를 보면 인권과 민주주의, 자유와 평등, 나아가 양성평등의 쟁점들까지도 시민들의 의식 속에 쉽게 내장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무슨 방안이 가능할까? 우리가 어떻게 인류보편적 가치에 동의해갈 수 있을까? 세계화의 시대에서 우리가 서구의 과거 역사를 반복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건너뛸 수도 없다. 그래서 나는 압축적 정치시민교육을 주장한다. 정치인이 아닌 시민으로서 살기 위해서도 정치시민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연고 및 정파, 그리고 그 집단적 극화가 심각하고, 정치적 가십을 정치로 혼동하고, 정치인들을 술자리의 안주거리로 삼지만 동시에 과도하게 동일시하는 사회에서 쉽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어느 커뮤니티에서나 정치와 종교, 그리고 젠더를 금기시하는 고착된 한국사회에서 정치시민교육은 그 방향과 내용에 합의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정치를 잘 알고 실천한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여기에서 플라톤의 원취지와는 다르지만 그 시민적 버전인 "정치적 무관심의 대가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의 통치를 받는 것이다"는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또한 정치적 무지는 정치권력자들의 선거놀음의 대상일 뿐이다. 물론 정치에 대한 교육과 토론은 극단적인 갈등을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정치에 대한 대화가 없으면 정치적 사고는 더 극화될 뿐이다. 탐욕스런 권력자는 스스로의 권력만을 추구하는 '총탄형 정치가'이거나 대중의 선호에 휘둘리는 '뗏목형 정치가'이거나 간에 시민들에게 바람직한 정치를 주지 않는다. 이 중간 어느 지점에서 우리 사회의 활로를 찾아야 할 것이다.
정치시민교육의 장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되, 타인의 생각을 경청할 수 있어야 한다. 지난 대통령선거의 토론처럼 서로 비난만 하거나 딴전을 부려서는 안 된다. 상대는 생각을 달리하는 공동체의 구성원일 뿐, 제거되어야 하는 적폐일 수 없다. 우리는 대선 토론에서 특정 후보와 말하지 않겠다는 후보들처럼 일상을 살 수는 없다. 서로 의견이 다르지만 정답은 그 사이에 존재한다고 생각하기로 하자. 상대의 어떤 생각도 존중되어야 하고 이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해보기로 하자. 정치인이나 정당은 우리가 선택하는 대상일 뿐, 우리가 동일시하면서 추종해야 하는 대상은 아니다. 상황에 따라 언제라도 바꿀 수 있는 우리의 대리인일 뿐이다. 우리의 미숙한 정치행위의 결과에 대해 직접민주주의를 대안으로 내세우지 말자. 아직도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지도 행동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가기까지 우리는 서로 싸우거나 교육받아야 한다.
우리 사회는 포스트 자본주의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제조업의 고용규모나 부가가치 생산이 낮지 않지만 더 확장될 가능성은 회의적이다. 탈산업사회라고 보기는 다소 성급하지만 제4차 산업혁명의 물결이 주변에 밀려오고 있다. 더 많고, 더 어려운 사회적 정치적 이슈들을 해결해내야 한다. 과거의 민주주의를 구성하던 주체들, 부르주아 혹은 프롤레타리아, 나아가 대중적 포퓰리즘도 더 이상 새로운 민주주의를 이끌 수는 없다. 정치교육을 받으며 성장하고 이후 재사회화된 시민들이야말로 이른바 포스트자본주의 시대에 민주주의와 인권, 자유와 평등을 실현할 주체들이다. 특히 젊은 청년들에게는 평생의 직장도, 근대적 보호막으로서의 조직도 집단도 없다. 디지털 노마드의 시대에 스스로 인류가 만들어낸 가치를 지탱할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하지 않을까?
2019-06-24윤상철[윤상철 칼럼]국가의 길, 국민의 길
국민 가치관 따라 '정부개입' 차이
착취보다 포용적 경제 성장에 유리
집단주의 성향 강해도 성공한 한국
우리 사회 '국가가 분배 주도' 요구
자본·민주중 한쪽 희생해야할 상황
20190513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배링턴 무어의 저서,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은 "부르주아 없이 민주주의 없다"는 테제로 요약된다. 부르주아계급의 존재가 민주주의, 독재, 그리고 파시즘의 경로를 결정했다는 내용이다. 물론 현대의 확장적 대의민주주의는 여기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적 역할이 더해진다. 이후 남미, 동구, 아프리카의 '제3의 물결' 민주화를 지켜본 정치경제학자들은 "국가 없이 민주주의 없다"라고 주장한다. 즉, 계급 간의 투쟁으로 국가가 불안정하면 민주주의도 자리 잡기 어렵다는 말이다.
국가는 민주주의 정치만 제도화하는 게 아니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라는 공저에서 경제학자 대런 애스모글루와 정치학자 제임스 로빈슨은 "우리 이론의 요체는 포용적 정치·경제 제도와 번영의 관계다. 사유재산권을 보장하고, 신기술에 대한 투자를 장려하는 포용적 경제제도는 경제활동에 인센티브를 제공하지 못하는 착취적 경제제도에 비해 경제성장에 훨씬 더 유리하다"고 말한다. 즉, 포용적 국가 없이 경제적 번영은 없다는 주장이다. 이들이 제시한 사례는 아니지만, 미국에 비해 최대 3배의 셰일가스 매장량을 가진 중국이 그 생산량에서 훨씬 못 미치는 배경에 대해서도 포용적 국가제도가 거론된다. 지진 빈발 혹은 물 부족과 같은 자연환경적 요인보다는 셰일가스의 개발이익 분배와 같은 제도가 민간의 창의적 개발의욕과 기술개발에 큰 격차를 유발한다고 지적한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국가인가의 문제이다. 자유주의자인 김정호 교수에 따르면 토지의 소유제한, 분배 등 경제적 헌법조항을 가진 나라들은 주로 사회주의 혹은 저개발국들이고,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세세한 정부개입조항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차이가 국민들의 가치관에서 비롯된다고 추정하면서, 전자의 국가들은 집단주의적 성향이 강하고 후자의 국가들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고 보고 있다. 개인주의적 시민들은 국가의 개입을 거부하고 자신의 삶은 자신이 책임진다는 세계관을 가진 반면, 집단주의적 시민들은 집단적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국가가 개인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적 발전의 경험이 개인주의적 성향을 더 심화시키는 역의 인과관계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민들은 집단주의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만 OECD에 들어간 나라들이 그리스,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터키, 멕시코 그리고 대한민국 등이고, 이 국가들이 어떠한 정치체제를 통해 경제발전을 이루었고 이후 어떠한 경로를 밟아가는가를 살펴보면 그 인과의 방향을 판단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집단주의적 가치관이 더 지배적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에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의 저자인 오구라 기조 교수는 한국의 현대사를 '힘=문화'라고 생각하는 입장과 '힘=철'이라고 생각하는 입장 간의 쟁투로 보고 있다. '힘=문화'로 보는 전통적인 유교 사대부적 입장에 반해, 후자에 선 이들은 공업화와 산업화를 추진하고 국력을 기르는 것은 국가의 존망과 관계된다고 생각하고 '하면 된다'는 슬로건을 제창하고 효율적인 통제를 위하여 군사적인 힘을 강화했다고 보고 있다. 집단주의적인 가치관이 지배하는 한국에서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이 가능했던 이유일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기로에 서 있다. 집단주의적인 가치관이 지배적인 한국사회가 민주주의적인 대의제를 통하여 국가권력을 재생산하고 있다. 군사정권이나 권위주의적 국가권력이 사라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국민 대중이 대의제 민주주의를 통해 만들어내는 국가체제는 자본주의적, 개인주의적 성장주도체제라기보다 국가주의적, 사회주의적 분배주도체제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국가의 발전전략에 이끌려왔던 우리 사회는 국가가 다시 분배를 주도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발전과정이 기적인 이유는 국가와 경제의 파국을 막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동시적, 순차적 발전을 이끌어냈다는 점이다. 이제 한국사회는 그 적절한 조합이 아닌 어느 한 쪽을 희생시키면서 다른 쪽을 선택하는 국면에 처해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의 칼자루는 국민에게 쥐어져 있다. 이제까지 걸어왔던 길과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2019-05-13윤상철[윤상철 칼럼]아랫목이나 윗목이나
국민총생산 세계 11위 오른 한국
'삶의 질'은 20위권 후반 머물러
소득주도성장, 자영업자 좌절 초래
국가는 부자지만 국민은 가난해
장기적 관점서 정책 처방 찾아야
20190401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현재의 86세대는 1980년에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을 접했다. 군부권위주의정권 시대에 접했던 정보사회의 예언서에서 불과 15년쯤 후를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구로공단의 여공들과 청계피복노조의 전태일, 그리고 중화학공업의 산업재해와 중동건설 붐을 경험했던 세대들에게 정보화는 열악한 노동으로부터 인간의 해방을 열어주는 신기루였을까?
그 후 40여년이 흐르면서 민주화도 산업화도, 그리고 정보화도 성취해냈다. 국민총생산은 세계 11위를 점하고, 1인당 국민총소득은 3만달러를 넘어섰으며, 인구가 5천만이 넘는 한국은 이른바 30-50클럽에도 들어갔다. 그 클럽의 회원국은 한국을 제외하면 모두 G7국가들이다. 그러나 정치체제는 민주공화국을 완성시키기 위한 적폐청산에 매진하고 있다. 사회경제적 양극화는 사회적 균열과 갈등을 격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냉정하게 살펴보자.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40위권을 맴돌다가 작년에는 31위 수준이다. '삶의 질'은 20위권 후반에 머물고 있다. 놀랍게도 작년도 가계 1인당 가처분소득이 1천900만원 선에 그치고 있다. 국민들은 처한 위치에 따라 엄청난 혼란과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는 셈이다. 더구나 경기불황, 실업, 가계부채 등에도 불구하고 연휴기간 동안 인천공항을 채우는 여행객들, 여전히 성업 중인 고급 식당들, 부동산 투자로 엄청난 수익을 올린다는 소식들은 누군가의 소득은 3만불을 훨씬 상회하리라고 믿게 한다.
소득 양극화에 대응하여 현 정부는 소득주도성장정책을 내걸었다. 그러나 중산층의 배아픔이나 상류층 따라잡기 욕망을 해소하기보다 하위 1분위 저소득층의 배고픔과 소득저하 그리고 자영업자의 좌절을 초래했을 뿐이다. 정규직 중심의 고용시장 재편이 자본의 반발과 양극화의 심화를 낳았을 뿐이다. 부동산으로 인해 자산증가율이 소득증가율을 앞지르고 나아가 높은 이자와 조세 부담을 지움으로써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켰다는 진단에서 내놓은 정부의 반시장적 부동산정책은 불과 1년 사이에 서울지역의 아파트 가격을 이전 정부 4년에 필적할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전 청와대 정책실장, 청와대 대변인, 여당 시의원의 뉴스들은 정책입안자들조차 믿지 않은 정책에 따르고자 했던 대중들을 격앙시키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17년 우리나라 경제주체들이 GDP에 기여한 비중은 가계 56%, 기업 20%, 정부 24%인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에게는 동반성장정책, 사내유보금 과세, 정경유착 청산과 정규직화, 국민연금 스튜어드십 코드 등이 제안되었고, 국가주도의 일자리 창출이 현 정부 내내 진행되었다. 그러나 국가는 부자이지만 국민은 가난한 현상황을 바꿀 것 같지 않다.
문재인정부도 어느덧 집권 3년 차에 접어들고 있다. 한국사회의 사회적 양극화에 대한 지난 2년간의 진단이나 처방이 타당하거나 효과적이었다고 보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이미 레임덕의 문턱에 이르렀다. 미시적인 대증요법으로는 경제와 사회가 처한 위기를 극복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선지 정부는 내부 구조조정보다는 불확실한 외부시장확대전략에 의존하고 있었던 듯 하다.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개척처럼 북한을 시장으로 편입시키고 나아가 그를 발판으로 더 먼 유럽까지의 길을 열고자 했지만 그 결과를 지금이나 현 정부의 집권 기간 내내 확언하기는 어렵다. 세대, 성별, 지역 등 우리나라의 사회적 균열의 양 축 간의 양보와 타협으로 극복할 수 있기를 기대했지만 우리 사회의 어떤 주체들도 그렇게 할 의지와 리더십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보다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데서 원인을 진단하고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정책적 처방을 찾아야 할 것이다. 제3차 산업혁명의 냉기가 국민의 피부에 와 닿기도 전에 제4차 산업혁명의 한기가 함께 몰려오고 있다. 세상은 더 글로벌화되고 대외적 환경은 더욱 비우호적으로 바뀌고 있다. 방안의 한기가 이불과 구들의 문제가 아니라 더 먼 데서 날라와 벽 틈을 타고 오는 것이라면…….
2019-04-01윤상철[윤상철 칼럼]열지 못한 세대, 닫혀가는 세대 지면기사
유튜브·페북·밴드·카톡 SNS매체
유유상종·동종교배 네트워크 작동
정치 '적폐 對 개혁'등 흑백균열 심화
소통도 대안도 없이 분열사회 남겨
민주화 불구 '그 그늘' 못 벗어난듯
20190218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이른바 '밀레니얼세대'가 '꼰대' 586세대들을 당혹스럽게 한다. 수메르인들처럼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버릇이 없다'라고 점토판에 쓰거나 소크라테스처럼 "요즘 아이들은 폭군과도 같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대들고, 게걸스럽게 먹으며, 스승을 괴롭힌다"고 말할 수 없는 한국의 꼰대들은 우왕좌왕할 뿐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태어나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 성인이 된 20대 '밀레니얼세대'는 '디지털 네이티브'로 살아왔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대면커뮤티케이션보다 온라인,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에 더 익숙하다. 간결하고 즉각적인 소통을 선호하고 줄임말을 구사하고 막말이나 아무 말도 서슴지 않는다. 수평적이고 효율적인 소통에 익숙하고, 정보수집에 능하며 멀티태스킹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중심의 세계를 설정하고, 사회적 인간으로서 기성세대와 그들의 사고, 이미 주어진 사회 및 세계에 적응하는 데 어색하다. 불합리성, 불공정성, 불투명성 모두에 적대적이고 고리타분하고 형식화된 절차를 기피한다. 어렵게 들어간 회사에서도 업무는 스스로 구획하려 하고, 상사의 대화시도를 간섭으로 불편해하고, 자신의 계획에 따라 거침없이 뛰쳐나오기도 한다. 그들과 다른 세대와의 소통은 가정과 사회에서 시도되기도 전에 장애에 직면한다.
586세대인 고등학교 동창들의 모임이 있다. 지천명을 넘어섬에도 모두들 젊은 시절부터 민주화 흐름에 몸담으면서 다진 결기가 대단하다. 그러나 촛불집회와 탄핵, 그리고 대선으로 이어지면서 우파정치세력이 거의 몰락하다시피 한 이후에는 서로 다른 목소리가 표출되기 시작했다. 상당하게 동질적인 집단이었지만, 연령효과로 인한 꼰대들에게는 약간의 차이도 크게 느껴졌다. 여러 가지 이유들로 포장되기도 했지만, 그들 일부의 공통적인 희망은 '나와 다른 이야기로 나를 침해하지 마라'는 것이었다. 평생의 믿음이 조금이라도 부서질까 두려워한다. 종교와 달리 정치는 개인의 자유로운 신념의 영역만은 아니고 서로 간의 관계와 경계를 정하는 일이니만큼 충분히 상호 존중하면서 토론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던가? 평생을 민주주의를 의식하면서 살아왔지만, 그들에게 민주주의는 타인을 향한 요구일 뿐 내장된 가치가 아닌 듯했다. 그들을 엮어주던 공통토대인 정치가 화제로 오르지 못하게 되자 그들의 단톡방은 가끔 안부만 전하는 공동묘지로 바뀌어 버렸다.
밀레니얼세대나 586세대에게나 온라인,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이 주요한 소통방식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20대는 성장과정부터 대면적, 전면적 소통에 능하지 않지만, 50대 역시 점차 대면적 소통의 비중을 줄여가고 있다. 20대는 자기중심적으로 세계를 재구성하고 자신과 다른 세대를 수용하지 못하지만, 50대는 이미 경직되어가는 세계관 내로 소통을 좁혀가고 있다. 이러한 소통방식의 변화는 인터넷과 SNS가 일상화되면서 가능해졌고, 그에 따라 정보화의 빛과 그림자가 함께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보화는 개인의 지식접근이 넓어지고 개인들 간의 지적 교류가 쌍방향적으로 전 지구적으로 확대되면서 인류 수준의 집단지성을 꿈꾸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차이의 인정과 상호 대화보다는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서로의 생각을 격려하고 극단화시키는 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20대는 사회구조에 대한 인식이 부재함으로써 소통의 도구를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반면, 50대는 그 특유의 꼰대성으로 인해 대화의 소재와 대상들을 제한하게 된다. 여기에 유튜브, 페이스북, 밴드, 카카오톡 등 SNS매체들은 대부분 개방과 공유의 시대를 열기보다는 유유상종과 동종교배의 네트워크로서 작동하고 극단화된 승자독식 시장을 열어간다는 점에서 이러한 추세를 더 심화한다.
여기에 최근 한국의 정치상황은 적폐세력 대 민주개혁세력, 재벌자본세력 대 노동민중세력, 남성집단 대 여성집단, 친원전세력 대 탈원전세력 등 극단적인 흑백의 사회균열을 부추긴다. 즉 사회적 소통방식과 정치적 균열이 상호 악순환하면서 극단적 분열의 사회로 치닫고 있다. 선민적 자기집단의식으로 무장하거나 악마적 적폐집단으로 규정하거나 상관없이 소통도 없고 대안도 없이 분열된 사회로 나아간다. 그러나 1987년 민주화 이행 이후 보여준 모습들은 모두 다 민주주의의 넓은 스펙트럼 내에서 가능한 형태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들의 생각도 우리의 생각처럼 충분히 가능한 사회적 지향이 아닐까? 오로지 하나의 대안만이 있다고 생각하는 전체주의 혹은 권위주의를 벗기 위해 길고 긴 민주화의 과정을 걸어왔건만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는 못한 것만 같다.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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