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20

사사키 아타루 작품 분석 이 치열한 무력을 - 본디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사사키 아타루 작품 분석


사사키 아타루




ChatGPT의 말:


사사키 아타루(佐々木 敦)는 일본의 평론가이자 작가로, 현대 철학과 문화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글을 써왔습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는 정보의 과잉과 지식의 무용성, 반복해서 읽는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단순한 독서 행위를 넘어선 실천적 독서의 의미를 탐구합니다 .
Brunch Story


사사키 아타루는 문학, 철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현대 사회의 문제들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글을 써왔습니다. 그의 글은 독자들에게 깊은 통찰을 제공하며, 현대 사회에서의 인간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 성찰하게 만듭니다.


그의 작품은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있으며, 국내 독자들에게도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특히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한국 독자들 사이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Brunch Story


사사키 아타루의 글은 단순한 이론적 분석을 넘어, 독자들에게 실천적인 행동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의 글을 통해 현대 사회의 문제들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그에 대한 대응 방안을 모색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사사키 아타루위키백과, 
작가 정보
출생 1973년 8월 2일(51세)
일본아오모리현
국적 일본
직업 사상가, 작가
영향
영향 받은 인물 자크 라캉
모리스 블랑쇼
질 들뢰즈
미셸 푸코
피에르 르장드르
페티 벤슬라마
나카이 히사오
후루이 요시키치



사사키 아타루(일본어: 佐々木 中, 1973년 8월 2일 ~ )는 일본의 사상가이자 작가이다. 전공은 철학, 현대사상, 이론종교학.

약력[편집]1973년 8월 아오모리 현 아오모리 시 출생
1989년 7월 이바라키 현립 미토 제일고등학교 중퇴
1990년 10월 대학입학자격검정 합격
1994년 4월 도쿄 대학 문과이류(文科二類) 입학
1996년 4월 도쿄 대학 문학부 사상문화학과 종교학 종교사학 전공[專修]과정 진학
1999년 4월 도쿄 대학 대학원 인문사회계 연구과・문학부 종교학 종교사학 전문분야 석사[修士]과정 입학
2001년 4월 도쿄 대학 대학원 인문사회계 연구과 종교학 종교사학 전문분야 박사과정 진학
2007년 9월 박사논문 <푸코, 라캉, 르쟝드르에 있어서 종교와 주체의 형성에 관한 탐구>로 박사 학위 취득
2007년 4월 ~ 2011년 3월 릿쿄 대학 겸임 강사
2009년 4월 ~ 2010년 3월 게이오기주쿠 대학 비상근 강사(사회학 서양서 강독)
2009년 4월 ~ 2011년 3월 동경의과치과대학 교양부 비상근 강사
2011년 4월 ~ 현재 호세이 대학 비상근 강사

인물[편집]

박사논문을 단행본화한 <야전과 영원>으로 주목받아, 2010년 <잘라라, 그 기도하는 손을>로 한국의 교보문고에 견줄수 있는 키노쿠니야로부터 인문 대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첫 소설 <구하(九夏) 전야>를 <와세다분가쿠[早稲田文学]>에 게재했다. TBS 라디오 <라임스타 우타마루의 위켄드 셔플[ライムスター宇多丸のウィークエンドシャッフル]>에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1].

산케이 신문 독서면에 수필 기고를 요청받아, “어떤 테마라도 실을 수 있도록, 심한 경우에는, <공산당선언>이라도”라는 조건 하에, <이시하로 신타로의 ‘신・타락론’>을 테마로 글을 하나 썼으나, 산케이 신문으로브터 게재를 거부당했다. 이에 대해 사사키 본인은 “(게재 거부에 대한) 담당자의 설명은 정중하였다. 그것은 명백히 산케이(신문)라는 회사의 본질, 방침일 것이다. 유감이며 (이에) 항의한다”고 밝히고 있다.[1].

저서[편집]

평론[편집]
책 제목의 한국어 번역 또는 한국어판 서명일본어 책 이름한국어 출간일일본어 출간일야전과 영원 夜戦と永遠 2015 2008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切りとれ、あの祈る手を──〈本〉と〈革命〉をめぐる五つの夜話 2012 2008
제자리걸음을 멈추고 - 아날렉타 1 足ふみ留めて──アナレクタ1 2017 2011
이 나날의 돌림노래 - 아날렉타 2 この日々を歌い交わす──アナレクタ2 2018 2011
바스러진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 - 아날렉타 3 砕かれた大地に、ひとつの場処を──アナレクタ3 2017 2011
이 치열한 무력을 - 아날렉타 4 この熾烈なる無力を──アナレクタ4 2013 2012
춤춰라 우리의 밤을 그리고 이 세계에 오는 아침을 맞이하라 踊れわれわれの夜を、そして世界に朝を迎えよ 2016 2013
동: selecetd lectures 2009-2014 仝: selected lectures 2009-2014 2015


소설[편집]
책 제목의 한국어 번역일본어 책 이름한국어 출간일일본어 출간일구하 전야 九夏前夜 2010
행복했다 죽은 것처럼 しあわせだったころしたように 2011
아키코의 네 모든 문제 晰子の君の諸問題 2012
밤을 마셔 밤보다 어두운 夜を吸って夜より昏い 2013
누더기 잡아당기기 らんる曳く 2013
짧은 밤 밝히기 短夜明かし 2014
가미나비 神奈備 2015


공저[편집]
책 제목의 한국어 번역일본어 책 이름한국어 출간일일본어 출간일Back 2 Back Back 2 Back 2013


각주[편집]
이동:가 私は産経新聞の今回の決定に抗議します. 보관됨 2013-03-02 - 웨이백 머신 2012년 11월 27일

외부 링크[편집]공식 웹사이트 atarusasaki.net
사사키 아타루 - X
인터뷰ー<영원의 야전>의 지평이란 무엇인가(永遠の夜戦>の地平とは何か), <図書新聞> 2009년 1월 31일자 (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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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일본의 사상가
일본의 철학자
아오모리현 출신
1973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도쿄 대학 동문
릿쿄 대학 교수
게이오기주쿠 대학 교수
호세이 대학 교수
==
佐々木中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佐々木 中
(ささき あたる)
誕生 1973年8月2日(51歳)
日本青森県
職業 作家
言語 日本語
国籍 日本
教育 博士(文学)
最終学歴 東京大学
ジャンル 現代思想
代表作 『夜戦と永遠 フーコー・ラカン・ルジャンドル』(以文社、2008年)
『切りとれ、あの祈る手を』(河出書房新社、2010年)

影響を受けたもの[表示]
公式サイト atarusasaki.net
ウィキポータル 文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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佐々木 中(ささき あたる、1973年8月2日 - )は、日本哲学研究者作家京都精華大学国際文化学部人文学科准教授[1]。専門は現代思想、理論宗教学学位博士(文学)東京大学)。

略歴[編集]


伝記の記載を年譜形式のみとすることは推奨されていません。 人物の伝記は流れのあるまとまった文章で記述し、年譜は補助的な使用にとどめてください。(2022年8月)


この節は検証可能参考文献や出典が全く示されていないか、不十分です。 出典を追加して記事の信頼性向上にご協力ください。(このテンプレートの使い方
出典検索?: "佐々木中"ニュース · 書籍 · スカラー · CiNii · J-STAGE · NDL · dlib.jp · ジャパンサーチ · TWL (2022年8月)
1973年8月 青森県青森市に生まれる
1989年7月 茨城県立水戸第一高等学校中途退学
1990年10月 大学入学資格検定合格
1994年4月 東京大学文科二類に入学し、1996年4月に同大学文学部思想文化学科宗教学宗教史学専修課程へ進学
1999年4月 東京大学大学院人文社会系研究科基礎文化研究専攻(宗教学宗教史学専門分野)修士課程に入学し、2001年3月に修了。修士(文学)の学位を取得[1]
2001年4月 東京大学大学院人文社会系研究科基礎文化研究専攻(宗教学宗教史学専門分野)博士課程に進学し、2007年3月をもって単位取得満期退学[1]。同年9月博士論文「フーコー、ラカン、ルジャンドルにおける宗教と主体の形成をめぐる探究」で、東京大学大学院人文社会系研究科から博士(文学)の学位を取得[2]
立教大学東京医科歯科大学教養部非常勤講師[3]などを経て、2015年4月、京都精華大学人文学部教員に就任[4]し、現職に至る。

人物[編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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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典検索?: "佐々木中"ニュース · 書籍 · スカラー · CiNii · J-STAGE · NDL · dlib.jp · ジャパンサーチ · TWL (2022年8月)
博士論文を単行本化した大著『夜戦と永遠』で注目され、『切りとれ、あの祈る手を』で紀伊國屋じんぶん大賞2010受賞。
2010年に「九夏前夜」を『増刊 早稲田文学』に掲載し小説デビュー。
TBSラジオライムスター宇多丸のウィークエンドシャッフル』へのゲスト出演歴あり[5]
産経新聞読書面に随筆寄稿を求められ、“何をテーマにしてもよい、極論、『共産党宣言』でも”という条件の下、石原慎太郎の『新・堕落論』をテーマに1本書いたところ、産経から掲載を拒否されたという。これについて“担当の説明は丁寧だった。これは明白に産経という社の体質、方針であろう。遺憾であり抗議する”と述べている[5]

著書[編集]

評論[編集]『夜戦と永遠──フーコーラカンルジャンドル』(以文社、2008) - 博士論文 (増訂版)『定本 夜戦と永遠』(上・下)(河出文庫、2011)
『切りとれ、あの祈る手を──〈本〉と〈革命〉をめぐる五つの夜話』(河出書房新社、2010)
『足ふみ留めて──アナレクタ1』(河出書房新社、2011)
『この日々を歌い交わす──アナレクタ2』(河出書房新社、2011)
『砕かれた大地に、ひとつの場処を──アナレクタ3』(河出書房新社、2011)
『この熾烈なる無力を──アナレクタ4』(河出書房新社、2012)
『踊れわれわれの夜を、そして世界に朝を迎えよ』(河出書房新社、2013)
『仝(どう): selected lectures 2009 - 2014』(河出文庫、2015)※「アナレクタ」シリーズから再編集[6]
『戦争と一人の作家:坂口安吾論』(河出書房新社、2016)ISBN 978-4-309-24750-2
『万人のための哲学入門:この死を謳歌する』(草思社、2024)ISBN 978-4-7942-2758-4

小説[編集]『九夏前夜』(河出書房新社、2011)、初出は「早稲田文学増刊π」2010
『しあわせだったころしたように』(河出書房新社、2011)
『晰子の君の諸問題』(河出書房新社、2012)
『夜を吸って夜より昏い』(河出書房新社、2013)
『らんる曳く』(河出書房新社、2013)
『短夜明かし』(河出書房新社、2014) 
『神奈備』(河出書房新社、2015)

翻訳[編集]フリードリヒ・ニーチェツァラトゥストラかく語りき』(河出文庫、2015)ISBN 978-4-309-46412-1

共著[編集](いとうせいこう)『BACK 2 BACK』(河出書房新社、2012)ISBN 978-4-309-02089-1 ※共作小説

分担執筆[編集]「生への侮蔑「死の物語」の反復」、河出書房新社編集部編『村上春樹1Q84』をどう読むか』(河出書房新社、2009年)ISBN 978-4-309-01933-8
「砕かれた大地に、ひとつの場処を」、河出書房新社編集部編『思想としての3・11』(河出書房新社、2011年)ISBN 978-4-309-24554-6
「踊れわれわれの夜を、そして世界に朝を迎えよ」、磯部涼編著『踊ってはいけない国、日本:風営法問題と過剰規制される社会』(河出書房新社、2012年)ISBN 978-4-309-24601-7
「ゲン、爆心地の無神論者」、河出書房新社編集部編『『はだしのゲン』を読む』(河出書房新社、2014年)ISBN 978-4-309-02262-8
「ニーチェを読み解く」桐光学園中学校・高等学校編『わたしがつくる物語:13歳からの大学授業』(水曜社、2014年)ISBN 978-4-88065-347-1
「仮の、往生の、傳の、試みの、文」、『古井由吉 : 文学の奇蹟』(河出書房新社、2020年)ISBN 978-4-309-02897-2

脚注[編集]^ a b c "教育研究活動データベース:佐々木中."京都精華大学公式サイト. 2024年11月26日閲覧。
^ "博士論文検索:佐々木中."CiNii Dissertations. 2024年11月26日閲覧。
^ 『切りとれ、あの祈る手を』著者紹介より。
^ [1][リンク切れ]
^ a b 私は産経新聞の今回の決定に抗議します。[リンク切れ] 2012年11月27日
^ "資料に関する注記."国立国会図書館サーチ. 2024年11月26日閲覧。

外部リンク[編集]公式ウェブサイト atarusasaki.net
佐々木中 (@atarusasaki) - X(旧Twitter)
インタヴュー「『永遠の夜戦』の地平とは何か」『図書新聞』2009年1月31日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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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아타루' 검색 결과 총 9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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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Choice
사사키 아타루 (지은이), 송태욱 (옮긴이)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13,500원 → 12,150원 (10%할인), 마일리지 67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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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다섯 밤의 기록, 개정판
사사키 아타루 (지은이), 송태욱 (옮긴이) | 자음과모음 | 2024년 4월
8.6 (11) | 세일즈포인트 : 1,836
3.



[국내도서] 야전과 영원 - 푸코.라캉.르장드르 Choice
사사키 아타루 (지은이), 안천 (옮긴이) | 자음과모음 | 2015년 11월
8.6 (33) | 세일즈포인트 :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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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국내도서] 이 치열한 무력을 - 본디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사사키 아타루 (지은이), 안천 (옮긴이) | 자음과모음 | 2013년 9월




































Sales Point : 1,029

8.8 100자평(39)리뷰(29)

408쪽
책소개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사사키 아타루의 신간.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상가 사사키는 아사부키 마리코, 안도 레이지, 가가미 아키라, 하나에, 이치카와 마코토, 다카하시 겐이치로, 후루이 요시키치, 이토 세이코, 진노 도시후미, 우카와 나오히로 등 많은 작가, 평론가와 함께 나눈 이야기를 <이 치열한 무력을>에 담았다.

<이 치열한 무력을>에는 대담과 좌담 말고도 다양한 형식의 텍스트가 들어 있다. 좋아하는 두 작가의 작품을 추천하는 글이 있다. 먼저 카프카와 들뢰즈가 사랑했던 작가이자 극작가 클라이스트의 <칠레의 지진>을 짧지만 강한 문구로 추천한다. 그리고 ‘20세기 최대의 시인’이라고 생각하며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라는 책제목에 시구를 빌려올 정도로 각별한 독일 시인 파울 첼란의 <파울 첼란 전집> 간행 추천사에 지금이야말로 파울 첼란의 시를 읽어보자고 권유한다.

후쿠오카 강연을 바탕으로 정리한 「변혁을 향해, 이 치열한 무력을」과 교토세이카대학 강연을 요약한 「우리의 제정신을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가르쳐달라」 기본 주기 21개 글도 있다. 또 여러 매체에 실린 기고도 있다. 잡다하지만 비교적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본디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모르겠다”는 말을 이처럼 정면에서 듣기는 처음입니다」와 사사키 본인의 소설을 출간한 기념으로 대담한 「아무것도 끝나지 않아, 왜냐면 열받았거든」, 「희망 없는 희망으로서의 소설을 위해」라는 텍스트도 있다.




목차


[2011년]
말이 태어나는 곳
클라이스트 『칠레의 지진』을 추천한다
몰라도 괜찮아
연애의 시작
본디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소설을 쓰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누군가가 되는 모험이다
변혁을 향해, 이 치열한 무력을
파울 첼란을 읽어보자
「우리의 제정신을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가르쳐달라」를 요약한 기본 주기 21개
아무것도 끝나지 않아, 왜냐면 열받았거든

[2012년]
후루이 요시키치, 재난 이후의 영원
40년의 시행과 사고
“모르겠다”는 말을 이처럼 정면에서 듣기는 처음입니다
희망 없는 희망으로서의 소설을 위해

지은이의 말
대담자와 좌담자 소개
옮긴이의 말
추천의 말

접기


책속에서


P. 13 우선 5천 년 전에 언어가 하나의 시각적 존재로 주어졌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이 때문에 일종의 ‘회화로서의 언어 예술 작품’이 가능해지죠. 서예, 즉 캘리그래피 말입니다. 근대 이전까지 이 분야가 가장 꽃핀 곳은 중화와 아랍입니다. 두 제국 모두 장대한 시詩의 문화를 갖고 있죠.
P. 21~22 어쨌든 여기서는 ‘읽어라’라는 절대적인 명령이 내려지면서 하나의 세계가 현실에 출현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읽어라’라고 쓰여 있기는 하지만 조심스레 확인해가면서 읽어보면 이 신의 말은 이미지나 문자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말하지 말라’고 쓰여 있으니 음성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즉 언어의 구성 요소로 꼽히는 이미지, 의미, 음성이 전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절대적인 이물질로서의 언어가 주어졌다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안정된 언어관 안에 존재하는 쉽게 읽고 쓰고 말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라 지금 바로 아사부키 씨가 말씀하신, 이미지와 의미와 음성이 항상 결합되었다가 분리되는 거대한 운동성과 같은 언어가 말입니다. 접기
P. 35 여러분, 철학을 공부하십시오. 하지만 창작 활동에서는 자신이 쌓아온 지식을 한순간 불꽃 속에 태워버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아까워하면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고생은 뭐였지?’라는 생각조차 나지 않게, 완전히 잊을 정도로 그것을 제로로 해버려야 합니다. 지식은 은행의 예금 계좌가 아닙니다. 몇 백 포인트 쌓았으니까 더 뛰어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얼마나 성대하게 불태우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접기
P. 53 읽을 수 없다면 쓸 수도 없습니다. 이때의 읽기는 필연적으로 ‘다르게 읽기’를 의미하죠.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건 똑같은 행위가 아니거든요. 쉬운 예로 제2장까지 읽고 졸려서 일주일 정도 내버려뒀다가 다시 다음 장부터 읽는 것과, 하룻밤 사이에 책을 다 읽는 것은 인상이 전혀 다릅니다. 시기에 따라 ‘읽기’는 전혀 다른 것이 되고 마는 거죠. 당연히 개개인에 따라서도 다르고요. 물론 최저한의 수준은 존재합니다만. 접기
P. 69~70 ‘Love’ 혹은 ‘Amour’란 무엇인가? 많은 논의가 있습니다만, 한마디로 잘라 말하면 “신이 왜 이 세계를 만들었는지 모르겠다”는 것과 관련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의 전통에서 신이란 물질세계를 초월한 순수 ‘정신’입니다. 13세기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은 무얼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신은 자신을 만끽하고 있다”고 답하고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신은 전지전능의 무한 존재이기 때문에 굳이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만들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런데 굳이 세계를 만들고 우리 인류를 창조하셨죠. 도대체 왜? ‘사랑’이라고밖에 답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 존재가, 이 풍요로운 세계가 압도적으로 주어지고 말았다, 이를 증여받았다는 사실의 경이로움. 이 수수께끼에 대한 답이 바로‘사랑’입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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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글
가라타니 고진의 『탐구』 이후에 나를 가장 놀라게 한 일본인 저자의 책이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었다. 일본 최대 비평가라는 평판의 가라타니 고진과는 달리 사사키 아타루는 무명의 저자였다. 하지만 ‘책을 읽는다는 혁명’에 대한 그의 신념과 열정은 가슴까지 뜨겁게 만들었다. 평판과 무관하게 그는 일급이었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이후의 강연과 대담을 묶은 『이 치열한 무력을』은 사사키 아타루를 기억하는 독자들에게 또 하나의 즐거움을 제공한다. 철학이 난해하다면 리오넬 메시의 드리블과 스즈키 이치로의 타격도 난해하다는 그의 견해에 동의한다면, 우리에게 남은 건 기꺼이 그 난해함의 친구로서 철학과 문학 그리고 비평이 어우러진 인문학의 만찬을 즐기는 일이다.

- 이현우 (서평가,『로쟈의 인문학 서재』 저자)

인류가 지구에 출현한 이래 혁명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혁명에서 늘 피를 연상하는 것은 정치·군사 혁명만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혁명의 범주는 크고 넓다. 때로는 감성적 혁명, 웃음과 재미를 찾는 혁명, 먹고 마시는 축제와 같은 유쾌한 혁명도 있다. 자기를 넘어서서 무엇인가가 되려는 시도, 세계의 크고 작은 질서를 바꾸려는 시도, 모든 주체적 삶의 기획과 실천이 크고 작은 혁명의 발화점들이다. 혁명은 일상의 밋밋함을 뚫고 나가는 의식의 생성이고, 경계를 넘는 도주이자 횡단이다. 무딘 사람만이 못 느낄 뿐이다. 그들은 일상에서 치욕과 굴욕을 견디며 무력함으로 팔다리를 허우적일 뿐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책을 읽고 쓰는 것이야말로 열락과 광기를 동반하는 혁명의 단초라고 되풀이한다. 그가 자연재해를 겪고 반쯤 부서진 사람들 속에서 ‘재해 이후’의 의미에 대해, 삶을 침식하는 치욕과 무력을 넘어서는 혁신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자고 말을 건다. “웃어야 마땅한 것처럼 웃는 것을 배워라. 더 높은 인간들이여, 실로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하다.”(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사사키의 책에서 니체의 메아리를 듣는 것은 나만의 환청인가?

- 장석주 (시인, 소설가, 문학평론가)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동아일보
- 동아일보 2013년 9월 14일자 새로나온 책



저자 및 역자소개
사사키 아타루 (佐-木 中)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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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이자 철학자로 1973년 일본 아오모리에서 태어났다. 도쿄대학 문학부 사상문화학과를 졸업했고, 도쿄대학 대학원 인문사회 연구계 기초문화연구과 종교학一종교사학 전문 분야 박사학위를 받았다(문학박사).
호세이대학 비상근 강사를 거쳐 현재는 교토세이카대학 인문학부 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비평서로는 『야전과 영원一푸코, 라캉, 르장드르』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제자리걸음을 멈추고』『바스러진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 『이 치열한 무력을』 『춤춰라 우리의 밤을 그리고 이 세계에 오는 아침을 맞이하라』 『같음: 강의 모음집 2009~2014同: selected lectures 2009~2014』 『전쟁과 한 명의 작가一사카구치 안고론戰爭と一人の作家―坂口安吾論』 등이 있고, 소설로는 『여름 석 달 전야九夏前夜』 『행복했을 적에 그랬던 것처럼しあわせだったころしたように』 『아키코 너의 문제들』 『밤을 빨아들여서 밤보다 어두운夜を吸って夜より昏い』 『남루를 끌다らんる曳く』 『짧은 밤샘短夜明かし』 『신성한 곳神柰備』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 나날의 돌림노래>,<바스러진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 … 총 12종 (모두보기)

안천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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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현대 일본 문학을 전공했으며 도쿄대학교 총합문화연구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현대 일본의 새로운 ‘계급’을 둘러싼 지적 지형도」, 「‘소설의 종언’ 이후의 일본 소설론」, 「대전환의 예감, 보이지 않는 윤곽」 등의 글에서 아즈마 히로키를 다뤘다. 아즈마 히로키의 『일반 의지 2.0』, 『약한 연결』, 『느슨하게 철학하기』, 『정정하는 힘』을 우리말로 옮겼으며, 2020년에는 아즈마 히로키를 인터뷰한 책을 한국에서는 『철학의 태도』로, 일본에서는 『철학의 오배』로 펴냈다. 그 외에도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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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사사키 아타루의 신간, 『이 치열한 무력을』
“이 압도적인 현실 앞에서 OO은 무력하다!(?)”

사사키 아타루는 박사 학위 논문을 단행본으로 출간한 『야전과 영원-푸코·라캉·르장드르』로 데뷔한 후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으로 명성을 날린, 일본 사상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젊은 지식인이다.
사사키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로 널리 알려지게 된 이후 기고, 강연, 대담 등 대중적으로 더 많이 활동하였다. 그 결과물들을 ‘아날렉타 시리즈’로 엮어 꾸준히 출간하고 있다. 이번 신작 『이 치열한 무력을』은 그중 네 번째 시리즈며, 일본에서는 곧 다섯 번째 책이 출간될 예정이다.
사사키는 아사부키 마리코, 안도 레이지, 가가미 아키라, 하나에, 이치카와 마코토, 다카하시 겐이치로, 후루이 요시키치, 이토 세이코, 진노 도시후미, 우카와 나오히로 등 많은 작가, 평론가와 함께 나눈 이야기를 『이 치열한 무력을』에 담았다.
『이 치열한 무력을』에는 대담과 좌담 말고도 다양한 형식의 텍스트가 들어 있다. 좋아하는 두 작가의 작품을 추천하는 글이 있다. 먼저 카프카와 들뢰즈가 사랑했던 작가이자 극작가 클라이스트의 『칠레의 지진』을 짧지만 강한 문구로 추천한다. 그리고 ‘20세기 최대의 시인’이라고 생각하며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라는 책제목에 시구를 빌려올 정도로 각별한 독일 시인 파울 첼란의 『파울 첼란 전집』 간행 추천사에 지금이야말로 파울 첼란의 시를 읽어보자고 권유한다.
후쿠오카 강연을 바탕으로 정리한 「변혁을 향해, 이 치열한 무력을」과 교토세이카대학 강연을 요약한 「우리의 제정신을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가르쳐달라」 기본 주기 21개 글도 있다.
또 여러 매체에 실린 기고도 있다. 「연애의 시작」에서는 “우리를 농락하는 ‘연애’는 사실 12세기 유럽의 발명품입니다.”라고 시작하며 ‘사랑’과 ‘연애’를 역사적 큰 사건들을 통해 사사키 식으로 정의한다. 「후루이 요시키치, 재난 이후의 영원」에서는 “고로 현존하는 최고의 작가고 지금이야말로 읽혀야 할 작가며 나아가 여전히 앞으로 도래해야 할 작가다.”라며 후루이 요시키치를 칭송하고 그의 3부작 『히지리』, 『집』, 『부모』를 논한다. 여기서 사사키는 3부작의 줄거리를 상세히 전하고 있다.
그리고 잡다하지만 비교적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본디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모르겠다”는 말을 이처럼 정면에서 듣기는 처음입니다」와 사사키 본인의 소설을 출간한 기념으로 대담한 「아무것도 끝나지 않아, 왜냐면 열받았거든」, 「희망 없는 희망으로서의 소설을 위해」라는 텍스트도 있다.

“어떤 종류의 잡다함이 즐거움의 원천일 수 있다.”

사사키 아타루는 『이 치열한 무력을』 ‘지은의 말’에 위의 한 문장을 말하면서 함께 대담하고 좌담한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며, 이 책의 성격을 한 마디로 밝힌다.
사사키 아타루의 사상과 문체에 관심이 많아 『철학자의 사물들』에서 욕조와 사사키의 생각을 절묘하게 연결한 장석주 문학평론가는 『이 치열한 무력을』을 읽고 기꺼이 추천의 글을 집필했다. 사사키가 앞서 말한 것과 연결해 장석주 문학평론가의 말을 잠시 빌린다.
“계통과 체계는 미약하지만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육성’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사사키는 다양한 청자와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해 말을 주고받는다. 독자들은 『이 치열한 무력을』 차례를 보고 본인이 좋아하는 주제부터 찾아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사다 아키라, 아즈마 히로키 이래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상가 ‘사사키 아타루’

사사키 아타루는 혜성처럼 나타났다. 박사 학위 논문을 그대로 내놓은 첫 번째 저작 『야전과 영원-푸코·라캉·르장드르』는 사사키 특유의 문체와 어우러진 개성 있는 고찰로 인문학 관계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두 번째 저작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은 정통 인문서로는 극히 이례적으로 몇 개월 만에 3만 부가 읽혀 인문학의 쇠락을 통감하던 많은 이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결코 어려운 내용은 아니지만 주제는 상당히 무거운 저작이었기에 본문에서 사사키 본인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도대체 누가 찾아 읽는 거지?’라는 궁금증을 자아냈다.
이처럼 사사키 아타루가 세상에 알려진 경위는 ‘화려하다’는 수식을 덧붙이는 게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으나 사실 그가 걸어온 궤적은 그리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고난에 가깝다.
사사키는 1973년 아오모리靑森에서 태어났다. 그는 1989년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다음 해 검정고시에 합격한다. 그로부터 4년 후 도쿄대학에 입학해 졸업한 후 대학원에 진학해 석, 박사 과정에서 종교학을 전공했다. 그때 쓴 논문이 『야전과 영원-푸코·라캉·르장드르』이다. 이 원고를 들고 열 군데가 넘는 출판사를 직접 돌아다녀 겨우 출판했다. 당시 무명이던 사사키를 인정해주는 출판사가 없었던 것이다.
한편 사사키는 힙합 작사가이기도 하다. 그의 독특한 문체나 말투는 물론이고 그가 글쓰기뿐 아니라 노래하고 춤추는 것까지 포함해 ‘문학’을 논하는 것도 이를 염두에 두고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사키는 소설도 몇 편 내놓았다. 『이 치열한 무력을』본문에 실린 글들에서 종종 그의 소설이 언급된다.(안천 역자의 말 중에서)



평점
분포

8.8



현란한 말잔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읽기를 멈추었어야 했다.
madwife 2014-07-21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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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집이라 쉽게 읽히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이게 뭐야 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행간을 잘 읽으면 매우 재미있는 주제들을 잘 버무려 놓았어요. 이걸 보고 나니 그 `인공적 신체성`을 갖고 있다는 사사키의 소설도 읽고 싶군요
heru25 2014-01-04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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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백남기씨의 명복을 빕니다



아버지 생신이라 온 가족이 모여 식사를 했다. 늦게 오신 아버지가 대뜸 이렇게 말하신다.



“백남기 씨가 죽었더라.”



아......심장에서 돌 하나가 떨어지는 느낌.

(백남기 씨의 명복을 빕니다.)



그런데 경찰과 검찰은 시신 부검을 하겠다고 지랄발광이라지. 박정희는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 판결 후 18시간 만에 아무 죄 없는 국민 8명을 사형시켰다. 그리고 유가족에게 시신을 돌려주지 않았다. 사형당한 시민의 몸 전체가 온통 고문의 증거였기 때문에. 이제 도살자의 딸내미는 오히려 부검을 하게 시신을 내놓으란다. 사람 죽여 놓고 시체 내 놓으라? 그 아버지에 그 딸년이다. 저런 버러지를 대통령이라고?



정윤회에 이어, 최순실, 미르재단, k스포츠로 연일 뒤숭숭이다. 전두환의 일해재단처럼 박근혜의 비자금 조성자금 때문이라지. 800억?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은 최고의 노후대책? 이제 참을 만큼 참지 않았나? 도를 넘었다. 물은 99.99999.....도에 끓지 않는다. 100도에 끓는다.



대한민국에 416이 있다면 일본엔 311이 있다. 아타루에 따르면 <이 치열한 무력을>은 ‘아날렉타’ 방식으로 쓰여졌다. 처음부터 읽을 필요 없이, 기분 내키는 장을 선택해 읽어도 되는 책. 여러 주제들을 다루지만 가장 눈에 띈 글들은 ‘3,11’이후를 고민한 글들이었다. 2011년 후쿠시마 바다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세계 최악의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일어났다.



최근 울산 지진에 이어 경주에서 진도 5.8 이상의 강진이 발생했다. 정말로 경악스러운 사실은 정부는 활성단층 (지진이 일어날 수 있는 곳)이라는 걸 알면서도 원전을 그곳에 지었다는 거다.



“활성단층 위에 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됐다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국민안전처 박장관은 “맞을 수도 있고 안 맞을 수도 있다”고 답했다. (너 그러다 맞을 수도 있고, 안 맞을 수도 있다!) 박 장관은 또 “현재 활성단층이 450개 이상인데 25개밖에 조사가 안 된 상태”라며 최악의 경우 활성단층 위에 원자력 발전소가 건설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추혜선 의원의 자료에 따르면 울산 단층은 진도 8.3에 이를 수 있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현재 원전은 진도 7.0 정도까지를 견디도록 설계됐다. 지진학 이기호 박사에 따르면 이번 경주에서 발생한 5.8 규모의 지진이 전조현상일 경우 역사적으로 향후 2.6년 후 진도 8 이상의 대규모 지진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다락방님이 소개한 책 <한국 탈핵>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는 한국이다. 왜? 원전 마피아 때문이다. “불량품, 중고품, 검증서 위조 부품, 시험성적서 위조 부품 등이 납품되었다.” 그런데도 박근혜 정권은 원전을 더 짓겠단다. 왜? 원전 마피아들로부터 노후 대비 목돈을 벌어들이기 위해. 죽 한 그릇 더 먹겠다고 국민 생명을 담보로 잡아? 이게 국가원수인가, 국민의 ‘원수’지.





후쿠시마 사태 이후 대다수 국가가 원전을 포기하는 추세다. 올 여름, 중동 지역은 53도까지 올라갔고 우리 역시 그 어느 해보다 더운 여름을 보냈다. 해마다 지구 기상은 점점 더 예측 불가능하다.



세슘 137 반감기는 약 30년. 플루토늄 239의 반감기는? 2만 4천 년이다. 열화 우라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우라늄 238은?



45억 년이다.








아도르노는 그럼에도 “아우슈비치 이후의 문화는 모두 Müll이다”라고 썼습니다. “그에 대한 통렬한 비판도 포함해서 Müll이다. Müll은 먼지, 쓰레기, 폐기물 등을 뜻합니다.



이 Müll에 아톰을 붙여 Atommüll이라고 하면 핵폐기물이 됩니다. 그렇다면 후쿠시마 이후, 우리의 문화는 모두 핵폐기물일까요? 이에 대한 비판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아도르노 식으로 말하면 그렇습니다. 우리의 문화는 핵폐기물이 됐나요? 답은 하나입니다.



“두고 봐” 이것이 유일한 답입니다.



사사키 아타루, <이 치열한 무력을>



지금이야말로 ‘목숨을 건 도약’이 없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뻔해 보인다. 전 세계의 모든 핵 발전소는 반드시 폐기되어야만 한다. 나오미 클라인의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에 따르면, 이미 핵발전소를 대체할 수 있는 여러 방식들이 존재한다. 특히나 태양열.




치욕honte은 굴욕humiliation과 다릅니다. 치욕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치욕입니다. 자신에 기인한 그 무엇이 치욕입니다. 굴욕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항상 ‘그 누구’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굴욕을 느끼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자기를, 자기 세계를 변혁하고자 하는 동기가 되는 것은 항상 ‘치욕’입니다. 굴욕은 그 무엇도 바꾸지 않습니다. 그것이 낳은 것은 약자에 대한 폭력과 차별 뿐입니다.



이 치욕의 이름 아래 이 재해는 우리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과 이 재해를 불러온, 거기에 가담한 사람들의 책임을 묻는 것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책임은 추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무능과 무책임을 허용해온 우리를 바꾸는 것이야말로 우리 손으로 책임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 속하는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이름으로, 치욕의 이름으로 책임을 지게 해야 합니다. 도망치게 내버려둬서는 안 됩니다.



- 사사키 아타루, <이 치열한 무력을>



이명박, 박근혜와 자칭 보수라 주장하는 독재협력 세력들이 저지른 죄악이 너무도 크다.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백남기 씨 영면의 소식을 듣고 무력감에 빠졌다. 시신 부검을 요구하는 박근혜 정권의 행태는 인면수심이요 인간의 치욕이다. 이런 사태는 나의 책임이기도 할 것이나 직접적인 살해에 가담한 것들을 도망치게 놔둘 수는 없다.

반드시 댓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





무력하지만 그래도.

이 치열한 무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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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6-09-27 공감(56) 댓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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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의 재가 사라지고



2016년 2월 1일







1월의 마지막 나흘이 흐르고, 2월의 첫 날은 하나의 닫음으로 시작한다. 한 사람의 글을 이렇게 몰아서 읽어본 건 칼비노 이후 처음이었다. 사사키. 그가 무슨 말을 반복하는지 알았다. 지우지 못한 의심도 많지만 그간의 오해들도 어느 정도 풀렸고, 내 안에 딱딱하게 자리 잡고 있던 간단한 생각들도 차츰 물러졌다. 언젠가 닦아 없앨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한다. 이 기대가 동맥경화를 막아주겠지. 직설적이면서도 화려하고 겸손마저 무기로 다루는 이 일본 작가는 확실히 내 생각의 주름 하나를 접어줬다. 그도 한 장의 종이가 실은 여러 번 접혀있는 것이라는 말을 했으니까, 비유해보자면 그렇다. 종이접기.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도 좋아하시는 종이접기. 뭔가를 진리라 하여 추구하면 그건 장미 모양이나 학 모양으로 나타날 것이다. 안에 적힌 문자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속살을 내어주는 일은 없으리라. 대학 때부터 줄곧 그런 생각으로 살았다.




이 책, 사사키 아타루의 『이 치열한 무력을(この熾烈なる無力を)』은 그의 네 번째 아날렉타로 일본에서는 2012년에 출간됐다. 『야전과 영원』의 역자 안천 씨께서 수고해주셨으니 번역을 문제 삼는 이는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국내에 번역된 건 이 둘을 포함해 세 권이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언어를 위한 선언조의 변론이라 글의 온도가 꽤 높다. 사사키를 접할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권장되는 책이라고 하더라.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단, 두꺼운 책에 거리를 두지 않는 이들에 한해서 『야전과 영원』을 먼저 읽으라 말하고 싶다. 장황한 와중에도 할 말은 다 하니까. 비약이 적은 걸 읽어야 반복해서 읽었을 때 이해하기 쉬운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 둘과 비교하자면 『이 치열한 무력을』은 정말 중구난방이다. 아날렉타이니까 당연하다. 나머지 선집들도 번역 소개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데, 여하튼 이 책은 그냥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다. 대담이 글보다 더 많다. 리듬 따라가기가 용이하다. 대담의 즉흥성이야말로 우리처럼 자극될 만한 말을 듣고 싶어 하는 독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기도 하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작가들과 작품, 그리고 일본어를 잘 모르니 종종 등장하는 농담의 분위기를 잘 이해할 수 없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 이 책은 높은 수준의 대담들로 이뤄져 있다.







* * *







이 책을 읽으며 자신이 무슨 자극을 받고 싶어 했는지를 공들여 찾아보는 것도 소소한 재미이겠다. 어렵고 쉬움은 독자마다 다르겠으나, 일단 일본 문학을 풍부하게 알고 있는 이가 읽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사사키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일본어를 못 읽기 때문에 후루이 요시키치를 모르니 불쌍할 뿐이라고 농담 반 진담을 했다. 그 흉내를 내보자면, 이 책에 나온 소설을 일본어로 읽어본 독자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 생각을 한다. 그게 잘 팔리는 비평책의 함정이긴 하지만. 여하튼 이 아날렉타에서 자유롭게 펼치며 논하고 있는 여러 작품들은 그 비평을 읽는 것만으로도 한 번 쯤 읽어보고 싶어진다.




대학에서 김애란 씨와 대담을 가져본 경험이 있다. 이 공간 어딘가에 떨리던 그 소감을 옮겨놨는데, 역시 현장의 힘은 강했다. 소설의 뒷이야기도 흥미롭지만, 그보다는 머뭇거림과 주저 없음을 반복하며 던지던 그녀의 생각, 소설 관념, 철학, 삶, 세계 등, 그런 다채로운 투망이 너무 아름답게 보였다. 한 사람이 어떤 소설을 어떻게 썼는가를 우리가 물을 때는 겉으로야 “와, 정말 팬이에요!”라는 소녀/소년의 팬심이 겉에 발라져 있지만, 내심 궁금한 거다. 당신은 세상을 어떻게 보냐고. 그래서 비평은 한편으로는 그 작품을 읽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기도 하다. 세상 보는 일의 고뇌, 진통, 그런 것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작품은 나중에 직접 읽어보면 되는 것이고, 우리는 비평에 참가한 사람을 비평을 통해 읽게 되는 것이다. 덕분에 다카하시 겐이치로, 오에 겐자부로, 후루이 요시키치의 작품을 부랴부랴 사서 꽂아두고 만족 중이다.







* * *







사사키는 『야전과 영원』에서 맘껏 발휘했던 가공할 만한 공격력으로, 그 예의 화려한 단언으로 역사와 철학, 그리고 비평을 오고 간다. [달필+달변]인가보다. 사사키의 입이 풀리기 전에 말을 자르라는 사전 경고를 받은 사회자가 있다니. 여하튼 대담을 이끄는 쪽이든 따라가는 쪽이든 재치 있는 반론과 변론, 그리고 긴 역사 이야기를 주저 없이 펼치는데, 그 하나하나가 상대방 작가가 세상을 보는 눈, 그리고 작품에 대한 변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글을 쓰는 독자라면 그녀/그들이 공유하는 고민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엇나간 고민이 더 매력적일 수도 있다. 온도차로 찬 습기가 물이 되어 흐르고, 그 물이 단비처럼 느껴지기도 하니까.




분명 자극이 되는 책이고, 그만큼 자극적이다. 온통 문제적 작가들만 초대해놓은 책이다.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책을 어제 새벽부터 잠깐씩 읽고 있는데, 서두부터 ‘문제’라는 분위기가 확 풍긴다. 문학과 삶에 대한 확실한 지론이 있거나 어딘가에 오랜 시간 기대어온 독자들에게는 다소 버거운 독서가 되겠지만, 나처럼 삶의 단 하나의 확신은 부유 밖에 없다며 때론 (기분 상) 높이 떴다가 낮게 가라안기도 하는 독자들에게는 자신의 고민을 확인할 기회다. 사실 독서라는 게 그렇기도 하다. 자신에게 다 맞는 이야기인 것 같으면 읽다가 내팽개치는 것이 책이고. 늘 차이를 염두에 둔다. 그리고 그 차이에서 ‘봐라, 저들도 저렇게 다투고 싸우며 글을 쓰지 않는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사키의 말마따나 ‘닫힌 회로’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글을 쓰는 이가 아무래도 이 책을 더 깊게 읽을 가능성이 있다. 철학과 연애에 대한 단편이 조금 있지만 그건 선집에 껴놓은 정도이고, 어떤 글은 결론에 가서 푸시시 식어버리기도 한다. 『야전과 영원』을 읽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가 만능인 줄 알았는데. 뭐, 이런 생각. 여하튼 글을 고민한다는 것 앞에 사사키가 단언하며 당당하게 내놓는 것은 언어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역사의 변화다. 국내에 번역된 세 권의 책에서 내내 하는 말이 그거였다. 누군가는 문학이 뭘 하는가에 회의를 갖지만 정작 그 전선에서는, 창작의 참호에서는 그녀/그들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 치열한 무력을』은 그걸 들여다보는 책이다. 그래도 글을 붙잡고 놓치는 않는다는, 조야한 끈기 정도는 있는 독자로서 나 역시 자극으로 남는 글들을 꾸물꾸물 챙겨 바구니에 담아놓았다.







* * *







여러 글들을 길게 적어 그걸 다 쓸 수는 없고, 일단 이 책이 사사키의 무슨 주장을 담고 있는지 살짝 빼내고 싶은 이들은 「변혁을 향해, 이 치열한 무력을」을 먼저 읽고 그 뒤에 나오는 「후루이 요시키치, 재난 이후의 영원」을 읽으면 좋겠다. 전자는 무력(武力)으로 오해하던 이 책의 사납고 뜨거운 제목이 실제로는 (표지에도 떡 하니 나와 있지만) 무력(無力)이었음을 확인해주는 글이다. 3·11을 말한다. 그 앞에서 무력해진 모든 것을 말한다. 그러나 무력함이 무의미함을 뜻하지는 않는다면서 파울 첼란, 에마뉘엘 레비나스, 브루노 슐츠의 이름이 줄지어 나온다. 무력했지만 승리하게 되는 역설을 증언한다. 정의와 문학과 예술이 한 통에 담긴다. 물론 그 ‘의미’라는 걸 곧 ‘힘’으로 이해해버리는 건 나의 오래된 습관. 읽고 나서도 의심이 지워지진 않았다. 체념, 하지만 그로부터 다시 역설로 피어나는 희망. 어차피 다 그런 패턴이었으니까, 사사키 뿐만 아니라.




그래서 「후루이 요시키치, 재난 이후의 영원」을 이어 읽으면 좋다. 그의 작품집을 하나 사긴 했는데 번역된 게 한 권 밖에 없다. 사사키의 비평에 언급된 후루이의 초기 장편 3부작과 『산조부(山躁賦)』를 어디 큰 도서관에서 대여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여하튼, 사사키는 지면을 고려한다면서도 비교적 상세하게 후루이의 작품들을 소개한다. 촌락 공동체, 도시, 광기, 재결합, 치유로 이어지는 기묘한 이야기다. 어렵지 않게 분위기를 그려볼 수 있다. 요컨대 후루이는 생(生), 성(聖), 성(性)의 자의성을 말하는 작가다. 자의성이다. ‘당연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은 사사키가 『야전과 영원』에서 르장드르와 푸코를 빌려가며 그렇게나 반복했었다. 우리를 도박장에 밀어 넣으려고. 아무 근거 없음. 근거율과 인과율의 분리. 하지만 후루이는 그 자의성을 알면서 희망을 갖는다. 낙천이다. 왜 그것이 가능했을까? 후루이는 왜 “낙천은 불안과 잘 어울렸다.”(258쪽)라고 한 걸까? 죽음과 삶의 무근거성 앞에서 남는 건 오직 ‘살아남는 것을 사는 것’일 뿐이라는 걸, 공습과 재난의 시대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자의성의 텅 빈 공간을 낙천으로 채워 넣는다.




사사키가 이 비평 초두에 후루이의 초기 작품 3부작과 후기 『산조부』사이의 단절을 찾아보겠노라 벼렸던 것은 바로 저 메시지, 즉 후루이의 ‘낙천’을 재난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는 일본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후루이는 공습과 재난과 전쟁의 주제를 집요하게 잡고 늘어진 작가. 이어지는 사사키와 후루이의 대담도 글을 쓰는 것에서 시작해 결국에는 대지진 이후의 ‘말’을 논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사사키는 후루이에게 독자들을 낙천으로 이끌어달라고 한다. 거칠고 공격적인 사사키도 ‘낙천’이라는 말을 쓰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게 빈 공간을 채운다. 그 채움의 작업은 언어를 지녔다는 자긍심으로 아주 치열하게 불타며 진행된다. 그러나 모두 태우지는 않는 역설.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 자긍심에 대한 사사키의 증언은 이 책 맨 마지막 대담에서 읽을 수 있다. 차이를 느끼며 각자 판단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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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이들이 공감할 부분도 있다. 자극이 되는 것과는 좀 다르다. 「말이 태어나는 곳」은 제일 처음 등장하는 대담인데, 글을 쓰지 않는 이들이나 그에 대해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읽힐 지도 모르겠다. “말이 태어난다.”라는 말은 좀처럼 일상에 등장하는 법이 없다. 언어의 안팎을 나누는 서양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을 일상에서 신경 쓰는 일도 별로 없고. 달리 말하면, 글 쓰는 이들은 ‘말이 태어나는 곳’으로 향하며 명확하지 않은 고독으로 들어간다. 구체적인 청사진을 다 그려놓고 레고 조립하듯 쓰는 글이나 PR의 글은 제외한다. 대체 나는 언제 ‘글’이라는 걸 쓰는가?




이 글만 해도 그렇다. 사사키의 말을 빌리자면, 이건 순전히 뭘 읽었으니까 쓴 것이다. 문제는 최초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 이런 사소한 글도 그런데, 우물을 들여다보거나 우물 속에 들어가거나 혹은 우물을 부쉈다가 다시 만들기도 하고, 없는 우물을 저기 있지 않느냐며 박박 우기기도 하는, 온갖 다양한 기벽을 지닌 작가들은 과연 어떨까? 늘 궁금했다. 부끄럽지만 그렇게나 궁금해 하면서도 나는 그 누구의 말도 들어보려고 하지 않았다. 지독한 신비주의자 정도일까? 고민의 특권? 손 오그라드는 자기 감성? 지금 생각건대, 여러 작가들과의 대담 기회를 스르르 흘려보낸 것을 후회한다. 그만큼 뭘 읽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도 여전히 안개 속에 있으려고 하는, 이 자기두둔의 지독한 생명력은 참 경이로울 정도로 질기다. 그래서 이 대담에 수줍게 반가워한 것이다.




「말이 태어나는 곳」에서 뚫어져라 들여다본 문장은 이거였다. 되읽다보면 아직도 찌릿한 구석이 있다. 글 앞의 공간에 걸려 있는 어떤 자물쇠가 모습을 갖춰가는 것 같은 상상도 했다. 열쇠는 저마다 있을 테고. “근원적인 발생 장소에 이끼처럼 생겨나 곰팡이처럼 피어나는 신들. 구마구스의 점균과 오리쿠치의 무스비가 포개지는 장소가 제겐 ‘말이 태어나는 곳’입니다.”(33쪽) 덕분에 미나가타 구마구스(南方熊楠)가 누구인지, 오리쿠치 시노부(折口信夫)가 누군지, 무스비(生靈)는 또 뭔지, 흥미로운 정보들을 얻기도 했다. 그리고 단 하나, ‘점균’이라는 단어가 뇌리에 박혀 떠나지 않았다. 나흘 내내. 말과 이미지가 섞인 것. 과정인 것. 삶과 죽음이 하나인 것. 암수의 구분이 없는 것. 소설이라 시작해놓고 점점 이상해져 몇 달이고 내팽개친 여러 글들 앞에서 느끼던 감정이 ‘점균’에서 하나로 모아졌다고 하면 될까. ‘근원에서 피어난 점균이라니!’ 몇 번이고 외쳐버린 것이었다. 그 탓에 이 대담에서 사사키가 뭔 말을 했는지 다 잊어버렸다.




하나 더. 소설의 시작과 마무리를 고민하는, 이른바 ‘문창’의 창틀에 목을 매고 있는 이들에게는 반가울 고민이 「소설을 쓰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누군가가 되는 모험이다」라는 긴 제목의 대담에 나온다. 놀랍게도 사사키는 철저한 무계획성으로 소설을 썼고, 꽤 좋은 평을 받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 무계획성은 하나하나 접어가는 치열함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중층적인 소설을 낳는다. 읽을 때마다 달리 느껴진다는 독서 경험을 말하는 게 아니다. 달리 ‘읽힐 수밖에 없는’ 소설. 그런 장치들은 분명 사사키의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대담을 하며 나중에야 알게 된 거라고 빼지만.) “안이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마무리”(212쪽)를 거부한다는 사사키의 주장과 [문학]을 거부한다는 다카하시의 주장이 같은 선상에 있는 것도 재밌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아, 왜냐하면 열받았거든」은 대단원의 여부로 문학과 소설을 구분하는 다카하시의 논리, 일본 AV와 일본 근대문학의 공통점, ‘사랑하는 힘을 빼앗는’ 명령과 모자이크의 대비, 소세키의 작품 「명암」을 놓고 펼쳐지는 농담 등 매우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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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의 다른 번역본을 읽은 이라면 이 책에서도 그의 주장을 확인할 수 있다. 무서운 글을 쓰는 사람이다. 몇 번이고 그렇게 소개할 수 있다. 일본 사회도 그래서 그런 반응이었고, 폭발적인 관심은 극과 극으로 갈라졌다. 그가 얼마나 많은 변론을 했는지는 (사사키 자신이 소설의 세 가지 기원이라며 말했던 그 변론을!) 굳이 나열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도 그런 반응을 보이고 있고, 국내 인문학계의 최전방에 있는 이들도 그를 하나의 현상으로 보고 주시 중이다.




그의 이름이 뜨겁게 달아오른 이유는 하나다. 무력(無力)함 앞에 ‘치열함’이라는 엇나가버린, 전혀 짝이 맞지 않는 표현을 가져다놓았기 때문이다. 비문이다. 아니, ‘비어(非語)’라고 해야 하나? 이 억지스런 작업을 위해 사사키가 발휘하는 단언의 강도는 수많은 독자들을 뒤흔들어놓기에 충분할 정도로 셌다. 문체 자체에서도 “나는 세다.”라고 대놓고 드러내는 작가를 근래 읽어본 적이 있나 싶기도 하다. 사사키라면 이렇게 말했을까? 독자들이 그 치열함의 온도를 알았으면 된 거라고 했을까? 그간 그가 샀던 오해를 풀 변이 하나 있어 옮겨놓는다. “우리 사회는 실제로 법과 ‘법이 보증하는 권리’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말을 통해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 어디까지나 이를 뜻하는 것이지 “언어의 마술적인 포에지에 의해 무한하게 비상하는 상상력”과 같은, 소설을 읽고 마치 마약이라도 한 듯 세계가 다르게 보인다고 감격하는 식의 쓸데없는 얘기가 전혀 아닙니다.”(371쪽)




사사키는 “쓸데없는”이라는 표현을 바로 철회해버리지만 여기서 그는 세상의 작동원리인 말의 힘을 거듭 강조한다. 그걸로 쓰인 작품이 세상을 바꾼다는, 우리가 감상 삼아 쉽게 하는 일시적인 착각을 두둔하는 게 아니다. 여기서 틈이 벌어진다. 그가 자꾸 우리를 도박장으로 끌고 가 어디에 걸겠냐고 묻는 것, 그리고 자신은 어디에 걸겠다고 단언하는 것은 무력함을 무의미에서 탈출시키는 한 행위다. 그는 그 틈에서 활동하는 작가다,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아니면 ‘틈’을 ‘뒤’로 바꿔 이해해도 좋다. 사사키의 이 책에도 거듭 반복된다. 헤겔이 예술의 종언을 선언한다. 우리에게는 극히 일부일 뿐인 그 예술을. 바로 그 예술이 타고 난 잿더미에서, 바로 ‘헤겔의 재’에서 보란 듯 소설이 득세하더라고 그는 말한다. 희망을 본다. 언어의 긍지와 말의 힘. 우리가 쉽게 잊는 것들이다. 여기에 그가 아직도 유용하다고 말하는 실러의 예술론까지 더한다면, 아니, 더해야하는데, 그렇게 되면 이야기는 문학의 효용론을 논하는 수준에서 완전히 이탈한다. 애당초 사사키의 논의에서는 ‘효용’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도 없었다. 논외로 한 것이 아니라, 그가 예술이야말로 답이라 여기는 까닭이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읽은 이는 안다. 그 ‘말’이라는 것의 힘을 사사키가 어떻게 증언했는지.




그걸 사실로 받아들이는 일이 환상처럼 느껴지는 지점에서 출발하는 어떤 여정이 있다. 읽기와 쓰기. 아, 이 교과서 제목 같은 단어들. 그리고 줄곧 생각해왔다. 그는 그걸 삶에 가져다붙인다. 철학이 학문으로 변질되어 삶에서 떨어져나간다. 그렇게 잃어버린 무엇을 기린다. 같은 맥락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가 살아 돌아온다면 사사키처럼 말을 할까, 이런 생각도 해봤다. 동사가 없는 이 책 제목에 알맞은 동사를 넣으시오. 문제가 앞에 주어진다면 나는 주저 없이 쓸 것이다. ‘당신에게.’ 그러고 보니, 나는 답을 잘 쓰는 학생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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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기 2016-02-01 공감(8)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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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치열한 무력을



일본인에 의해 쓰여진 철학사상 도서는 이번이 처음이다.그런데 글이 대담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양한 주제를 놓고 두 분이 주고 받는 대담은 마치 설전에 가까운 토론의 분위기를 엿볼 수가 있었다.저자 사사키 아타루가 일본 사상계에 주목받는 인물이라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어 그의 철학서적은 기회가 닿는대로 섭렵해 보고 싶다.2011년과 2012년에 이루어졌던 대담형식을 한 권으로 묶어 독자들로 하여금(주로 일본독자)현시대에 일어났던 현상,현안인 이슈,독서와 창작의 의미 등을 허심탄회하게 들려 주고 있다.일본인의 시각에서 쓰여진 글이다 보니 한편으로는 이질감이 드는 경우도 있고 한편으로는 전세계가 함께 공통적인 요소를 담고 있기에 진지하게 공감케 하는 부분도 있었다.



철학과 종교는 고래로부터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데 이는 인간이 갖고 있는 정신세계를 생각과 사유 또는 절대적이고 영웅적인 신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철학과 종교는 시대의 변천과 문명의 발달에 따라 여러 갈래로 파생되어 왔다.고대의 신적인 존재,다양한 철학가들의 사상과 요체를 중간 중간 들려 주기도 한다.인간의 삶은 어디까지나 유한적인 존재이기에 내가 무엇을 욕망하고 갈구하려는 데에 몸과 마음을 쏟기보다는 자신의 능력과 처지에 맞게 대응하고 준비해 가려는 담대한 자세와 태도가 현명하다는 것을 늘 생각케 한다.



생(生)의,성(性)의,성(聖)의 자의성을 문체의 자의성으로 직조하며 살아가고 있는 후루이 요시키치작가가 현존하는 일본의 작가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199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오에겐자부로가 최고의 작가가 아닌가 싶었는데 후루이 요시키치작가라니 그의 작품을 아니 읽고서는 성이 차지 않을 거 같다.후루이작가의 작품들이 지닌 일련의 흐름 속에서 '단절'이나 '비약'이 두드러진다고 하는데 그만의 반복의 양상 속에서 반복되는 어구와 주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특히 <영혼의 날> 등에는 늙고 병든 몸의 수척함,쇠약함,낯섬을 묘사하는 어구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 특색이다.즉 일본의 토속적인 신앙과 현대인의 고립문제를 대비시켜 인간관계를 묘사하고 있다고 한다.반면 반핵운동 및 일본의 이중적인 모습과 전후 청산문제 등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오에겐자부로는 현실정치를 강렬하게 비판하는 양심적인 인물로 각인되고 있다.



책을 읽고 전체적인 내용과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서평인데 아직 내게는 이렇다 할 나의 무늬가 직조되지 않아 지지부진하기만 하다.그런데 이 글을 읽다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는데 글을 쓰다 막히게 되고 글이 안 쓰이게 되면 그것은 문체에 문제가 있다고 오에겐자부로는 전하고 있다.그래서 번역하는 게 가장 손쉽다는 것이다.번역이야말로 문체를 만든다는 본질을 제대로 짚어낸 조언으로 받아 들이고 있다.사실 외국어를 자국어로 번역을 한다는 것은 외국어의 실력 못지 않게 자국어의 어휘 및 문맥에 맞도록 궁리하고 고민을 거친 끝에 제대로 된 문체,번역물이 탄생하지 않을까 한다.더욱 좋은 점은 다양한 작가들의 문체를 발견하고 해당국의 문화,사정,인습 등을 체험할 수가 있기에 번역이라는 작업은 지난하지만 보람과 가치가 있는 작업임에 틀림없다.



시,법전을 중심에 두고 소설을 원의 테두리에 두어야 하는데 어느 나라나 대중화가 진전되면서 시와 법전은 소외되는 경향이 강하다.각종 종교의 경전물들이 시적이면서 불문법과 같은 계율성을 띠고 탄생하였지만 자유분방하고 (누구에게도)간섭을 받고 싶지 않은 현대의 흐름과 사조가 각종 소설이 범람하는 시대를 맞이하게 하지 않았는지를 생각해 본다.문자가 문들어진 것이 5,200년 전이고 최초의 문학가는 수메르 제3왕조의 공주 엔해두안라고 한다.단연 작품의 갈래는 시(詩)였다.물론 시,법전,문학 등의 순서로 글이 기록되어 전해져 오고 있으며 구비문학은 인류가 탄생하면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사사키 아타루저자는 <야전과 영원-푸코.라캉.르장드르>의 사상적 영향을 받고 그 특유의 문체와 어우러진 개성 있는 고찰로 일본 인문학 관계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나아가 <잘라라,기도하는 그 손을-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은 인문학의 쇠락이 심화되어 가던 때에 베스트셀러로서 목마른 인문학 독자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반향을 일으켰다고 한다.그는 글을 쓰는 작가이기도 하지만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힙합 작사가이기도 하면서 노래,춤까지 포함하여 '문학'을 논하기도 한다.일본에서 강연,대담,잡지 게재 등 대중적인 활동을 많이 하는 사사키 아타루는 문학과 예술을 넘나드는 경지에서 말의 탄생부터 희망 없는 희망으로서의 소설을 향해 그의 사상과 사유를 잘 버무리고 요리하여 정신적 세계를 한층 고양시켜 주고 있다는 이미지를 강하게 받았다.비록 계통과 체계가 미약하게 느껴지지만 내용만큼은 생생하고 신선한 자극제와 같은 즐거움을 만끽할 수가 있어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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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 2013-09-22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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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치열한 무력을











당황스러웠다. 책 표지에 쓰여진 "본디 철학이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빠져들어 즐거운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도무지 이건 너무 어려운 것이다. 몇 번이나 읽고 다시 읽어봐도 이해가 잘 안되고, 이해되었다고 생각했음에도 책을 덮고나면 내가 진정 이해를 했는가 갸우뚱. 뭐랄까. 읽긴 읽었으나 정말 내가 이 책을 읽었는지 스스로 의문이 생겼을 정도? 특히나 앞부분의 <말이 태어나는 곳>에 대한 좌담이 너무 어려워서 그만 힘이 빠지고 무력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래서 책의 제목이 "이 치열한 무력을"인가 하는 우스운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리뷰를 쓰러 들어와보니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 이 책이 어려웠나보다. 이상한 안도감을 느끼며 리뷰를 쓰기 시작한다.

이렇게 어려운 책을 계속 읽게 했던 힘은 바로 이 책에서 나왔다. 이 책의 54페이지에서부터는 <모르는 것은 재미없다?>라는 주제로 좌담을 하는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해가 안 되'면 "더 알기 쉽게 말해!"라고 화를 낸다는 것이다. 소설이나 만화같은 경우에는 "어려운 건 재미없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곧 내가 모르는 것은 시시한 것이라는 생각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와 같은 경우에서는 완전히 그와 반대였다. 어려운 것이 재미없기는 하지만 내가 모르기 때문에 시시해하기 보다는 자신의 무지에 조금 절망한다고나 할까? 어찌되었든 이들은 '내가 모르는 건 시시한 거야'라는 생각은 독서에 '권력욕'을 투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 나는 '아-'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료함, 시시함을 즐기는 이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고나 할까. 이 중 사사키 아타루의 말이 참 마음에 들었다. 사사키는 작가 호사카 가즈시의 "소설은 울음을 받아주는 엄마 품속이 아니다"라는 표현을 빌려 "예술은 아~ 하고 입을 벌리고 있으면 초콜릿을 넣어주는 할머니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얼마 전까지 꽤 오랫동안 미술관에서 일을 했었는데 매번 전시가 바뀔때마다 전시가 명쾌하게 이해되지 않아 조금 꽁해져 나중에는 아예 전시장에 잘 올라가지 않게 되었던 경험이 있다. 사사키의 말은 예술을 접하는 데 있어 마음가짐을 고치게 해주는 말이었다.

서두에서부터 책이 너무 어렵다는 말을 계속했지만 책이 내내 어려웠던 것만은 아니다. <연애의 시작>에 대해 쓰여진 부분은 재미있기까지 했다. 나는 무교에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지만 신으로부터 시작한 '사랑'이 어떻게 지금의 연애가 되는지에 대한 짧막한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웠다. 신의 사랑 혹은 신에 대한 사랑만이 '진짜'고, 그 창조물인 인간끼리의 관계는 육욕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었지만 트루바두르라 불리는 음유 시인들에 의해 "연애가 발명"되고 난 후, '궁정 연애'가 성립되었다는 이야기는 특히나 더 흥미로웠다. 대학에서 독일문학을 전공하고 있기에 유럽 문학에 대한 수업을 들으면 항상 처음 배우게 되는 부분이 이 궁정문학 부분이다. 대부분 기사가 귀부인을 사모하는 내용인데 그 사이에 육체적인 관계나 불미스러운(?) 일은 전혀 없다. 귀부인의 남편은 기사가 자신의 부인을 사모하는 것에 우월감을 느끼기까지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이러한 귀부인에 대한 기사의 숭고한 사랑의 모습이 흡사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과 유사하게 느껴져 신으로부터의 사랑이 지금의 연애가 되기까지 그 변화 과정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아 재미있었던 것이다. 또 사사키가 연애에 관해 인용한 사카구치 안고의 『연애론』의 구절이 정말 멋있어서 몇 번을 읽었다. 참으로 공감되었다.




교훈에는 두 가지가 있다. 앞 세대가 그 때문에 실패했으므로 후세 사람은 그걸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의 교훈이 하나. 앞 세대는 그 때문에 실패했고 후세 사람도 실패할 것이 뻔하지만, 그렇다고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교훈이 또 다른 하나.

연애는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결국은 환상이고, 영원한 연애 따위는 거짓 중의 거짓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지 말라'고는 말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것을 하지 않는다면 삶 자체가 사라지는 종류의 것이니까. 이는 "사람은 죽는다. 어차피 죽는다면 빨리 죽어라"라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 것과 같다.



나는 영원한 연애, 영원한 사랑에 대한 환상이 있는데 그것이 거짓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환상이고 거짓이라 해도 벗어날 수 없다. "사람은 죽는다. 어차피 죽는다면 빨리 죽어라"라는 말이 성립하지 않듯이 "영원한 연애란 없다. 어차피 헤어진다면 빨리 헤어져라"라는 말도 성립하지 않는거겠지?



대부분이 철학을 어려워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그렇다. 철학에 대해 알고 싶어서 관련된 강의를 많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철학이 어렵다. 때문에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책 표지의 "본디 철학이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또한 그렇기 때문에 책을 펼치기 두렵기도 했다. 이 책은 철학에 대해 지혜와 친구로 지내는 것이라 답한다. 대등한 관계에서 지배하지 않고 친구 같은 사이로. 나는 철학을 지배하려 하지 않았나, 친구처럼 일상적으로 곁에 두려하지 않고 몇몇 강의에 의지했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이 책은 여자들의 '철학적 의문'에 답하고 있다. 어렵게만 느껴졌던 철학이 "언제까지 '꾸미는' 혹은 '예쁜' 나로 존재해야 할까?", "이 시대에 출산은 옳은 것일까요?", "하나도 모르겠어요", "자원봉사나 모금을 안 하는 것은 죄일까요?", "일하는 의미를 모르겠다" 등의 일상적인 질문과 만나니 참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이런 것도 철학이구나. "일하는 의미를 모르겠다"에 대한 사사키의 대답 중 일에서 '안정'이나 '자극'을 구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잘못된 게 아닐까란 부분에 대해, 일이란 개인의 삶을 영위하는 것을 넘어서 사회가 유지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주어진 일들을 누군가는 해야하는 상황이지만 그 중에서도 특정한 일에 보람을 느끼고 의미를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일은 그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직업이라는 것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니만큼 원한다면 안정이나 자극 정도는 구해도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자원봉사나 모금을 안하는 것은 죄라는 난폭한 생각에 대해서는 최근 페이스북을 통해 알게 된 시아준수의 선행이 떠올랐다. 그는 캄보디아 도시빈민을 위해 주거수리 및 개선 사업을 하고 소외계층 이웃을 위한 사랑의 집짓기 사업을 후원하고 있다고 했다. 그와 관련한 댓글에 왜 캄보디아 빈민들만 도와주느냐는 이야기는 없는 것으로 보아 그런 난폭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매우 적구나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사사키가 파울 첼란을 읽어보자고 하는 부분이 참 인상 깊다. 독문학도로서 이야기를 해보자면, 파울 첼란의 가족은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게 되는데 그의 부모는 수용소에서 살해당하고 첼란은 극적으로 도망쳐 나오게 된다. 그는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모든 후유증세를 다 지니고 있었는데, 그 중의 한 가지는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의식'이었다. 사사키가 언급했던 '줄 서기'에서 첼란은 그가 줄을 옮기면서 그 대신 죽게 된 자에 대한 죄책감에 빠져 평생을 속죄하고자 했다. 첼란의 시는 고통을 표현하고 고통을 언어로 감당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즉, 현실에 상처를 입은 채 현실을 찾고 얻으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원전 사고로 위기를 맞은 일본인에게 파울 첼란을 추천하는 것은 참으로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사키는 읽을 책을 고를 때 "또 읽게 될까?" 여부로 정한다고 했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책을 반복해 읽음으로써 몸에 배게 한다. 마지막으로 내게 그런 책을 당신이 만들었다고 사사키에게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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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키와바앙 2013-09-24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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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아타루를 읽는 시간,이 치열한 무력을





'본디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란 부제의 이 책은 '사사키 아타루' 라는 작가의 강연이나 대담을 담아 놓은 책이다. 먼저 사사키 아타루라는 작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일까 읽고 있어도 계속 수박 겉만 핥고 있는 것이 솔직한 기분이다. 그의 전작인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 아무리 느낌이 좋은 책이라도 읽지를 않았고 모르는 작가이기에 그저 먼 곳에서 들려 오는 북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종교사학자이면서 힙합 작사가이기도 하고 소설까지 몇 편 쓴 작가인 사사키 아타루가 급부상 하고 있다고 해도 그에 대하여 아무런 것을 읽어보지 못하고 마주하는 책은 '낯설음'이다. 거기에 철학 하면 정말 어렵다고 밖에 생각이 들지 않는다.아무리 읽어도 '철학'이란 그 단어부터 어렵게 다가온다.



얼마전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집>을 읽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아니 그의 작품을 조금 어려워하고 있어 잡문집을 읽고나니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 느낌이 들었고 그렇게 하여 신간인 <색채가 없는 다카키 쑤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좀더 편하게 읽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사사키 아타루를 알게 된 작품이니 그의 다른 소설들을 좀더 편하게 만날 수 있을까? 그의 작품 한 편이라도 읽었다면 계속적으로 겉돌기는 하지 않았을텐데 대담을 읽는 시간내내 '이건 뭐지' 하는 느낌으로 어쩌면 그런면이 더 '생각'이라는 터널을 넓혀가는 시간이 되어서 모험의 시간이 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볼수도 있겠지만 글에 등장하는 작가와 작품들이 낯선 것들 뿐이라 한계가 느껴진 것은 사실이다.그렇다고 철학을 특히나 좋아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가 처음부터 작가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아니고 논문이나 그외 다른 일들을 하다가 소설을 써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고는,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에 그는 이미 소설을 반 정도 완성해 놓은 상태라 더 이상한 기분이라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글쓰기가 몇 편의 소설을 내게 되었고 그를 작가의 반열에 확실하게 올려 놓게 되었나 보다. '말 혹은 언어'라는 것은 '글'이란 무엇인가? '문학은 무력합니다. 하지만 문학은 승리합니다.단순한 진리입니다.' 라는 글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힘이 없는듯 보여지면서도 그 속에 힘이 들었다고 본다. 펜의 힘은 강하다고 했다. 한정된 사람들이 보는 글보다 많은 독자를 만날 수 있는 소설이나 그외 글이 주는 힘은 '치열한 노력의 힘은?' 이라고 생각을 하며 읽어 보게 되었다. 그렇게 그 또한 수면위로 올라와 독자를 만나고 있으니 치열한 무력의 힘은 대단하다고 본다.



그의 글 중에서 다른 글보다도 '독서' 에 대한 글을 좀더 유심히 읽게 되고 기억에 남는다. 난 한번 읽은 책을 잘 읽지 않는 편이고 한번 쓴 글도 다시 읽지를 않는다. 글쓰기를 배설처럼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는 한번 읽은 책을 여러번 다시 읽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책을 읽다보면 '이 책은 다음에 또 읽어야지' 하는 책들이 분명 있는데 다시 접할 기회를 만든다는 것은 정말 힘들다. '읽을 수 없다면 쓸 수도 없습니다. 이때의 읽기는 필연적으로 ' 다르게 읽기'를 의미하죠.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건 똑같은 행위가 아니거든요. 쉬운 예로 제2장까지 읽고 졸려서 일주일 정도 내버려뒀다가 다시 다음 장부터 읽는 것과, 하룻밤 사이에 책을 다 읽는 것은 인상이 전혀 다릅니다. 시가에 따라 '읽기' 는 전혀 다른 것이 되고 마는 거죠. 당연히 개개인에 따라서도 다르고요. 물론 최저한의 수준은 존재합니다만.' 이라는 부분이 마음에 와 닿는다.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저자의 다른 책을 읽은 후에 다시 읽어봐야할 책이다.



철학이니 인문학이니 하는 단어들은 그 단어자체로 참 난해하고 어렵다. 이 책을 처음 접하는 느낌도 '난해,낯설음' 이었는데 이렇게 '사사키 아타루'라는 인문학자이면서 힙합 작사가라는 그를 알게 되었으니 그의 작품들과 대면할 때는 '낯설음'은 아마도 '설레임'과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치카와의 말에서 ' 제가 사사키 씨의 백미는 첫째로 <야전과 영원>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 잘 나타나 있는 '사람을 발정케 하는 문체의 힘' 입니다. 그와 동시에 이에 무방비하게 발정하거나 공감하는 사람들은 의심스럽다고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설을 쓰면 일종의 미심쩍음과 함께 사람을 발정케 하는,매우 선정적인 물건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생각했지요.' 라는 말처럼 '사람을 발정케 하는 문체의 힘'을 가진 작가의 작품들을 한번 만나봐야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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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2013-09-22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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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종만
오오~~
"친절하게 알기 쉽게 쓴 글은 사기다." 라는 말은
무역 중심국가 즉 다문화 그리스인으로 번역에 대한 이야기인지, 수학 또는 철학과 논증에 대한 이야기인지는 말하기 어렵지만...
평론을 쉽게 쓸 수 있는가는 이미 독자가 알고있는가의
가시성 전제가 붙기에 쉽고 어렵고가 조금 간명해지는것 같습니다.
쉽고 어렵고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가 되는것 같습니다.
1.문화충돌
지구의 대척점에 있는 철학의 기후 환경 역사와 관계되기에 무경험적 입장에선 쉽지않지요.
2.가시성 차이에 의한 독자의 지식수준
해석은 독자의 지식의 범주에 있기에 지식의 하나의 층을 겨냥한 책이 존재하기에 소크라테스의 말은
계몽적 언어로 모든 층을 아우르고 싶은 욕심이겠지요.
최근에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기상 교수의 제 2판을 샀는데 ㅋㅋㅋ
울고싶네요.(돈 아까워)
소크라테스 형님의 말이 맞습니다.
정말 본질을 알아야 읽기 쉽게 쓸 수 있습니다.
21h
Edited
박현정
한종만 선생님의 두 가지 측면 말씀에 조금은 동의를 합니다. 책의 취지는 '여튼 고민을 해라', 거칠게 말하면 그렇습니다. 저 역시 쉬운 것만 바라다보니 조금 어려우면 번역이 어떻다느니 구질한 핑계를 대지요^^;
저는 이기상 선생님의 책들을 이해하든 못하든, 그저 아낍니다. 제 마음이 그러합니다^^
20h
한종만
박현정 죄송합니다
핑개를 대어서~^^
20h
한종만
제가 말씀드리는것 중에 번역은 사소한 한가지 입니다~^^
20h
박현정
한종만 맞아요. 선생님 말씀 취지는 알고 있지요. 번역은 그저 하나일 뿐 ^^
저는 쉬운 책이 좋습니다. 초콜릿을 입에 넣어만 주면 최고일 것 같아요 ㅎ
20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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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
파울 첼란의 시 구절을 제목으로 차용한 저자는 “읽고 쓰는 것, 그것이 곧 혁명”이라고 외친다. 이 책은 저자가 자신의 책과 혁명에 관한 생각을 자유롭게 풀어 쓴 인문 에세이다. 혁명으로서의 책 읽기’를 주장하는 저자는 불합리하고 부당한 세상을 변화시켜달라고 두 손을 모아 신에게 기도하는 것보다, 그 손으로 책을 들어 읽고 또 읽고, 고쳐 읽고 다시 고쳐 쓰는 행위 자체가 더 가치 있고 아름다운 일이라고 주장한다. 종횡무진하는 지적인 글쓰기가 답답한 현대인의 속을 시원하게 해 준다.
허연
책소개
일본 사상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비평가이자 젊은 지식인 사사키 아타루. 그는 일본에서 대표적인 비평가로 자리 잡은 아사다 아키라, 아즈마 히로키의 뒤를 잇는 최고의 사상가로 인정받고 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된 사사키 아타루의 저서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출간되자마자 수많은 독자를 사로잡으며 단숨에 베스트셀러로 등극하였으며, 2012년 알라딘 ‘올해의 책’ 선정, 『중앙일보』 『동아일보』 『한겨레신문』 등 국내 다수 일간지 단독 추천 등 많은 주목을 받았다.

지금까지도 깊이 있는 인문서로 평가받고 있는 이 에세이가 혁명의 시작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표현한 새로운 옷을 입고 재출간되었다. 첫 출간으로부터 10년이 지났지만, 사사키 아타루의 목소리는 여전히 이 사회에 유효한 파문을 일으킨다.


목차


첫째 밤 문학의 승리
둘째 밤 루터, 문학자이기에 혁명가
셋째 밤 읽어라, 어머니인 문맹의 고아여 — 무함마드와 하디자의 혁명
넷째 밤 우리에게는 보인다 — 중세 해석자 혁명을 넘어
다섯째 밤 그리고 380만 년의 영원

발(跋)
옮긴이의 말


책속에서


P. 33~34 사고하고 쓰는 행위에 도전하려고 할 때 저에게는 니체의 말이 잊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책을 읽었다기보다 읽고 말았습니다. 읽고 만 이상,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는 이상, 그 한 행이 아무래도 옳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은 이상, 그 문구가 하얀 표면에 반짝반짝 검게 빛나 보이고 만 이상, 그 말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한... 더보기
P. 78~79 루터는 이상할 정도로 ― ‘이상해질 정도’로 ― 철저하게 성서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 이 세계의 질서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습니다. 게다가 그 질서는 완전히 썩어빠졌습니다. 다른 사람은 모두 이 질서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고, 따라서 이 세계의 질서는 옳고 거기에는 근거가 있다고 생각... 더보기
P. 104 우리가 이 대혁명에서 집중해야 하는 것은 혁명의 과정에서 폭력에 의해 권력을 탈취하는 것이 선행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텍스트를 읽고, 다시 읽고, 쓰고, 다시 쓰고, 번역하고, 천명하는 것. 그 과정에서 폭력적인 것이 나타나는 일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혁명에서는 텍스트가 선행합니다. 혁... 더보기
P. 114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나고, 문학을 잃어버린 순간 혁명은 죽습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문학을 폄하하고 문학부를 대학에서 추방하려고 할까요? 왜 문학자 스스로가 문학을 이렇게까지 업신여길까요? 그것은 바로 문학이 혁명의 잠재력을 아직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P. 128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는 책을 읽거나 써도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죽임을 당하면 곤란하고 죽임을 당하지 않는 사회가 더 좋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명한 전제가 아닙니다. 읽고 쓰는 것 때문에 목숨을 걸지 않을 수 있었던 날들-그것은 역사상 실로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우리의 나날, 우리의 장소가 다소...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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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 한겨레 2024년 5월 3일자 학술지성 새책



저자 및 역자소개
사사키 아타루 (佐-木 中)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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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이자 철학자로 1973년 일본 아오모리에서 태어났다. 도쿄대학 문학부 사상문화학과를 졸업했고, 도쿄대학 대학원 인문사회 연구계 기초문화연구과 종교학一종교사학 전문 분야 박사학위를 받았다(문학박사).
호세이대학 비상근 강사를 거쳐 현재는 교토세이카대학 인문학부 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비평서로는 『야전과 영원一푸코, 라캉, 르장드르』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제자리걸음을 멈추고』『바스러진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 『이 치열한 무력을』 『춤춰라 우리의 밤을 그리고 이 세계에 오는 아침을 맞이하라』 『같음: 강의 모음집... 더보기

최근작 :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 나날의 돌림노래>,<바스러진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 … 총 12종 (모두보기)

송태욱 (옮긴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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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외국어대학교 연구원을 지냈고, 현재 연세대학교에서 강의하며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구름은 대답하지 않았다》,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 오에 겐자부로의 《말의 정의》, 히가시노 게이고의 《사명과 영혼의 경계》,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세설》, 미야자키 하야오의 《책으로 가는 문》 등을 옮겼다.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번역으로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최근작 : <그림 그리는 남자>,<르네상스인 김승옥>,<번역과 번역가들> … 총 234종 (모두보기)
사사키 아타루(지은이)의 말
정말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저는 무지합니다.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것, 당연히 읽었어야 하는 것을 아무것도 모릅니다. 멋대로 프랑스어로 책을 읽고, 멋대로 쓰고, 멋대로 여기저기로 가져가고, 멋대로 여기저기에서 거절당하고, 어딘가에서 멋대로 받아주어 책을 냈을 뿐입니다. 완전한 무지, 완전한 어리석음 안에 있는 것이지요. 지금도.
우습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도. 조금은. 너 바보야? 하고 술자리에서 친구가 대놓고 놀린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텍스트라는 건 그렇게 마주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읽는다는 것은 그런 일입니다.



출판사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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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디오판토스가 들려주는 일차방정식 이야기>,<해리엇이 들려주는 일차부등식 이야기>,<테트리스 부부>등 총 1,333종
대표분야 : 청소년 소설 6위 (브랜드 지수 349,787점), 초등 한국사 13위 (브랜드 지수 32,776점), 학습법 17위 (브랜드 지수 11,128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중앙일보』『동아일보』 『한겨레신문』 등 국내 다수 일간지 강력 추천★
★서평가, 평론가 ‘로쟈’ 이현우 추천★

일본 최고의 지성이라 불리는 스타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의 여전히 유효한 목소리
“읽고 쓰는 것, 그것이 곧 혁명이다!”

조용하지만 강렬한 한 문장, 파울 첼란의 시 ‘빛의 강박’에서 따온 이 책의 제목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니체의 유명한 선언 “신은 죽었다”를 떠오르게 한다. 저자는 책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을 ‘대혁명’이라 부른다. 루터는 성서를 반복해 읽고 성서에 기록된 메시지와 현실 종교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을 깨달았다. 물론 루터에게 책을 읽는 것은 기도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기도하는 것에서 나아가 책을 읽고 깨달은 바를 실행해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마음이 강했다. 루터가 살았던 그때 “세계의 질서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었”고, “그 질서는 완전히 썩어빠졌”기 때문이다.... 더보기

평점분포

8.6




전자책 나왔길래 바로 구매! 독서의 위험성과 중요성에 대해서, 그리고 반복해서 읽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절실하게 느꼈다.
Laika 2025-03-31 공감 (1) 댓글 (0)
마이리뷰


읽는 것이 곧 혁명

우리나라에서 첫 출간됐을 당시 나는 사사키 아타루에 대해 몰랐다. 서점을 서성거리다 다소 자극적인 제목이 눈에 들어와 처음 몇 장을 읽어보고 산 책이었다. 한 번 읽고 얼마 안 있어 빌려간 친구가 책을 잊어버려 재독의 다짐도 덩달아 어영부영 잊혀졌는데 개정판 출간 덕분에 다시 읽는다.


이 책의 핵심은 '책을 읽는 것'이다. '읽는 것'이야말로 혁명이라고 말한다. 이 혁명은 정치, 법, 종교, 문학, 예술, 교육, 과학에 이르기까지 인류사 대부분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폭력인 아닌 문학으로 이뤄낸 혁명은 아이, 여성 등 약자들을 수호한다.

'요즘의 독서는 과연 읽는 것인가?'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하는 저자는 정보를 모은다는 것은 명령을 모으는 일이며 미디어의 익명성 아래에 감추어진 누군가의 부하로서 영락해가는 것이고, 정보에 매물되면 스스로를 가두게 된다고 일갈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연장선으로 비평가와 전문가를 예로 드는데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하려는 비평가, '하나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하려는 전문가는 그들 모두 자신을 '완벽한 전체성'을 가진 만능인으로 내세우려고 한다면서 이것은 전체주의적 환상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책을 읽는다는 것,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일인가.
텍스트란 마주 보는 것, 마주 볼 수밖에 없는 것이며 무의식으로 접속한다는 것이라고 고, 또한 책은 되풀이해서 읽어야하고 어떠한 목적 없이 그 자체가 즐거워서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독서라고 썼다.


이 책의 초반에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읽고 쓰는 모든 것'을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한 지점이다. 언어예술, 즉 미적인 것에만 관련지으면 문학은 역사적, 지리적으로 굉장히 좁게 한정된 용법이라는 점이다. 또한 읽고 쓰고 번역하고 편찬하는 것까지 포함했던 오래 전 과거를 떠올려볼 때 오늘날 우리가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예전에는 광대한 영역을 차지했던 것에 비하면 오늘날에는 상당히 좁아졌음을 지적한 부분이다. 저자는 반反 정보로서의 문학, 회태로서의 문학, 세계를 변혁하는 것으로서 문학의 의미 범위를 더 넓혀야 한다고 강조라는데 책 전반에 걸쳐 이에 대해 서술한다.





저자는 시종일관 문학은 혁명의 근원이라고 반복하며 강조한다. 혁명의 본질은 폭력이 아니라 텍스트를 다시 쓰는 것이고, 반복적으로 책을 읽는 것이야말로 혁명이라고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문학은 혁명의 힘이고,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난다. 이후의 내용은 니체, 라캉, 푸코, 들뢰즈 등을 통한 철학적 사유와 제임스 조이스, 사무엘 베케트를 인용한 삶의 연속성과 공생이 문학이 갖는 저항의 증명이라고 이해했다.


인문학이 위기를 맞고 과학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의견을 거부하는 저자는 특히 문학자이면서 문학과 철학에 종말을 고하는 자들을 강하게 비판한다. 읽을 수 있으면서 읽을 수 없게 된, 혹은 읽으려 하지 않는 자들과 문맹이지만 처절하게 읽기 위해 고투하는 자들을 대비시킨다. 전자는 아무리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면 후자야말로 혁명가다.
문맹률이 90퍼센트인 시대에도 수많은 학자와 사상가와 작가들은 글을 쓰고 출판했음을 상기하면서 현재에 문학이 위기라거나 끝났다는 말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문학과 예술과 혁명이 살아남아야만 인류가 살아남는다.


또한 앞서 언급했던 루터, 무함마드, 도스토옙스키, 베케트, 버지니아 울프 같은 사람들은 계속 등장할테니, 들뢰즈의 말을 빌어 부흥기와 침체기가 있을 뿐 문학(아마도 여기서 말하는 문학은 '미적 문학(저자의 표현)'의 범위를 넘어선)은 사라지지 않음을 말한다. 무엇보다 모든 사람들이 읽고 쓰는 것을 멈추지 않는 한 그들 각각의 인생은 무의미하지 않으며 그러한 삶 자체가 의미인 것임을 전한다. 결국 매일 읽고 쓰는 것을 놓지 않을 때에 우리 일상의 소소한 삶이 곧 혁명이라는 것일테다.




책의 제목은 저자 본인이 밝혔듯 파울 첼란의 시에서 가져온 것인데, 아마도 기도만 하지 말고 그 손으로 읽고 쓰라는 게 아닐까싶다.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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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율 2024-05-11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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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잘라라기도하는그손을 #사사키아타루 #자음과모음 #도서협찬
📖읽어도 전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 '어쩐지 싫은 느낌'이 드는 것이야말로 '독서의 묘미'며
읽고 감명을 받아도 금방 잊어버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자기 방어'
_후루이 요시키치_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지,
읽는 일이 왜 혁명인지,
문학으로부터만 혁명이 일어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성경이 없던 시절에 성경을 쓰고, 읽고, 번역하면서 혁명이 일어났듯 우리도 반복해서 읽고 써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 철학, 종교를 가져와서 이야기를 펼치는데 난해하고 진짜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쉽게 읽히는 책은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전하기 위해서였을까? 이 책을 완벽히 이해하려면 저자의 주장대로 여러 번 읽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 접기
suya 2024-05-15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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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책이 곧 혁명이다


이책은 2012년에 출판되고 다시 십여년이 지난후 개정판으로 다시 나온책이다.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이며 폭력은 이차적인것에 지나치지 않는다.
읽는것, 다시 읽는것
쓰는것, 다시 쓰는것,
이것이야말로 세계를 번혁하는 힘의 근원이다.
문학과 예술과 혁명은 끝을 모르며,
끝날수도 없다.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있다.

‘혁명으로서의 책 읽기’를 이야기하는 이 책은 이 시대에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를 역설하고 있다.
책을 읽는 행위가 위대한 이유는 그 자체가 혁명이고 또한 혁명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작가는 마르틴 루터, 무함마드, 니체, 도스토옙스키, 프로이트, 라캉, 버지니아 울프 등의 소설가, 철학자 들의 독서 방식과 그에 따른 결과들을 예시로 들며 ‘책이 곧 혁명’임을 단호하게 주장한다.

저자는 불합리하고 부당한 세상을 변화시켜달라고 두 손을 모아 신에게 기도하는 것보다, 그 손으로 책을 들어 읽고 또 읽고, 고쳐 읽고 다시 고쳐 쓰는 행위 자체가 더 가치 있고 아름다운 일이라고 주장한다.
급 변화하는 세계속에서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정의란 무엇이고 어떻게 실현해야 하는지 고민할 여력이 없다. 그러나 정말 할 말이 없을까? 깊은 생각에 빠질 짧은 시간조차 없을까?
책을 읽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는 건강해진다.


책 속으로

누구의 부하도 되지 않았고
누구도 부하로 두지 않았다.


우리는 혁명으로 부터 왔다.
혁명으로 부터 태어났다.
혁명이라는 말을 듣고 우리가 떠올리는 그
혁명보다 저 멀리 있는 혁명으로부터
더 오래되고 더 광대한
그리고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혁명으로 부터,,


멜라출신 아들이 책을 읽는다.
성서 박사가 된다. 그리고 책을 쓴다.
그래서 교황의 방해자가 되고 그리하여 예술,
문학, 정치,법,신앙,종교, 그 모든것이 변했다
대혁명은 성취되었다.
반복한다. 그는 무엇을 했을까?
책을 읽었다.
"나 여기에 선다.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이며 폭력은 이차적인것에 지나치지 않는다.
읽는것, 다시읽는것
쓰는것, 다시 쓰는것
이것이야말로 세계를 번혁하는 힘의 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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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9436 2024-05-15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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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나아갈수 없을까

사사키 아타루의 목소리를 빌려, 저도 말하듯이 생각을 읊어보겠습니다.
며칠동안 글을 쓰길 주저했습니다.
제가 한달간 본 영화는 6편, 완독한 책만 12권, 이걸 쓰는 마음에 뿌듯함이 조금도 없다면 거짓말이겠지요.
그 마음이 왜 생겼는지 살펴보자 이말입니다.
책과 혁명에 관한 1시간짜리 혼잣말을 한 다섯번 기록한 책입니다.
미친듯이 정보를 취하는 것은 사실 정보에 취해진 거나 다름없다고 이야기합디다. 왜냐면 정보는 명령이니까요. 알면 알수록 우리의 불안은 사라지고, 이 행동의 당위성이 생기게 되니까요. 그게 정말일까요? 화자는 뭐 긍부정보다 생각해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게 말이 되냐고요.
그 많은 정보 속에서 무엇을 느끼나요. 제가 한달간 느꼈던 것을 여기서 알게 되었네요. 네 맞아요. 저의 필터대로, 해석하게 되니까 단 한권의 책을 읽은거나 진배없다는 소리입니다.

그럼 무엇을 하란말인가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황해보라고 합니다. 명령을 따르지 않게 되니까, 우린 막막합니다. 허둥댑니다. ‘창피하고 어쩐지 불안하며 한심합니다. 고통스럽기까지 합니다. 외부의 기준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요컨대 다른 사람이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다는 것은 용서받지 못하는 일을 하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죄책감 비슷한 것에 시달리게 합니다’

그래서 어르고 달랩니다. 니체와 들뢰즈 라캉 로크 흄 뉴턴 프로이트 버지니아울프도 그러했다고 합니다.
또 저의 안테나가 여기 꽂혔네요. 철학이란, 그리고 쓰는 것이란 ‘여성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생물학적 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요. 회임을 하란 소리죠. 그게 그거 아니냐고요?

반복해서 읽고, 내안의 것을 낳는 것이라고 저는 이해했답니다.
그렇다면 아까 정보 과잉이 명령 과잉이라고 했는데 왜 다시 읽으라고 하는걸까요.
그가 읽는다고 하는 것은 “읽어도 전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 ‘어쩐지 싫은 느낌’이 드는 것이야말로 ‘독서의 묘미’이며 읽고 감명을 받아도 금방 잊어버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자기방어‘라고. 그러므로 다 읽으면 잊어버리고, 그래서 반복해서 읽는거라고 말이지요.”

맞아요 지금 이책이 저한테 그래요. 이건 무시무시한 철학서가 되겠구나. 읽으면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럼에도 꾸역 꾸역 읽어요. “싫은 느낌이 들어서, 방어 반응이 있어서, 잊어버리니까, 자신의 무의식에 문득 닿는 그 청명한 징조만을 인연으로 삼아 선택한 책을 반복해서 읽을 수밖에”요.

아 그럼 뭘 읽어야 하나요. 책을 추천이라도 해주나요?
여기서 읽는것, 리터러시는 완전히 경계를 뛰어넘습니다. 뉴턴도 애덤스미스도 문학자들이라고 말해요. 자연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죠. 그들은 ‘읽을 줄 아는’ 사람인거에요. 그래서 문학이라 불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파우스트박사가 성서를 번역할 때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를 결국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라고 쓰는 첫 장면 기억나시나요. 괴테의 의도가 느껴지시나요? 단순히 명령을 그러모으는 짓은 그만둬야겠어요.
그런데 좀 시니컬함에 저도 시니컬하게 대꾸해보고싶네요.
그리스 문학이 훌륭한 이유는 어딘가 좀 모자란 신들이 나와요.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인간들. 다신교를 이야기하는 건 아니고요. 교육적인 측면으로 보자면, 그 어딘가 숨어있을 지 모르는 그 신들, 어쩌면 인간들을 우리는 존중해요. 그리고 고마움을 배워요.
대단한 문학에 앞서, 한번 움직여보라고 이야기하고 싶네요. 날씨가 정말 좋네요. 그 기도하는 손을 멈추고, 오늘은 산책을 해야겠어요.

#잘라라,기도하는그손을 #사사키아타루 #자음과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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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치열한 무력을 - 본디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사사키 아타루 (지은이),안천 (옮긴이)자음과모음2013-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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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408쪽


책소개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사사키 아타루의 신간.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상가 사사키는 아사부키 마리코, 안도 레이지, 가가미 아키라, 하나에, 이치카와 마코토, 다카하시 겐이치로, 후루이 요시키치, 이토 세이코, 진노 도시후미, 우카와 나오히로 등 많은 작가, 평론가와 함께 나눈 이야기를 <이 치열한 무력을>에 담았다.

<이 치열한 무력을>에는 대담과 좌담 말고도 다양한 형식의 텍스트가 들어 있다. 좋아하는 두 작가의 작품을 추천하는 글이 있다. 먼저 카프카와 들뢰즈가 사랑했던 작가이자 극작가 클라이스트의 <칠레의 지진>을 짧지만 강한 문구로 추천한다. 그리고 ‘20세기 최대의 시인’이라고 생각하며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라는 책제목에 시구를 빌려올 정도로 각별한 독일 시인 파울 첼란의 <파울 첼란 전집> 간행 추천사에 지금이야말로 파울 첼란의 시를 읽어보자고 권유한다.

후쿠오카 강연을 바탕으로 정리한 「변혁을 향해, 이 치열한 무력을」과 교토세이카대학 강연을 요약한 「우리의 제정신을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가르쳐달라」 기본 주기 21개 글도 있다. 또 여러 매체에 실린 기고도 있다. 잡다하지만 비교적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본디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모르겠다”는 말을 이처럼 정면에서 듣기는 처음입니다」와 사사키 본인의 소설을 출간한 기념으로 대담한 「아무것도 끝나지 않아, 왜냐면 열받았거든」, 「희망 없는 희망으로서의 소설을 위해」라는 텍스트도 있다.




목차


[2011년]
말이 태어나는 곳
클라이스트 『칠레의 지진』을 추천한다
몰라도 괜찮아
연애의 시작
본디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소설을 쓰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누군가가 되는 모험이다
변혁을 향해, 이 치열한 무력을
파울 첼란을 읽어보자
「우리의 제정신을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가르쳐달라」를 요약한 기본 주기 21개
아무것도 끝나지 않아, 왜냐면 열받았거든

[2012년]
후루이 요시키치, 재난 이후의 영원
40년의 시행과 사고
“모르겠다”는 말을 이처럼 정면에서 듣기는 처음입니다
희망 없는 희망으로서의 소설을 위해

지은이의 말
대담자와 좌담자 소개
옮긴이의 말
추천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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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13 우선 5천 년 전에 언어가 하나의 시각적 존재로 주어졌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이 때문에 일종의 ‘회화로서의 언어 예술 작품’이 가능해지죠. 서예, 즉 캘리그래피 말입니다. 근대 이전까지 이 분야가 가장 꽃핀 곳은 중화와 아랍입니다. 두 제국 모두 장대한 시詩의 문화를 갖고 있죠.
P. 21~22 어쨌든 여기서는 ‘읽어라’라는 절대적인 명령이 내려지면서 하나의 세계가 현실에 출현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읽어라’라고 쓰여 있기는 하지만 조심스레 확인해가면서 읽어보면 이 신의 말은 이미지나 문자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말하지 말라’고 쓰여 있으니 음성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즉 언어의 구성 요소로 꼽히는 이미지, 의미, 음성이 전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절대적인 이물질로서의 언어가 주어졌다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안정된 언어관 안에 존재하는 쉽게 읽고 쓰고 말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라 지금 바로 아사부키 씨가 말씀하신, 이미지와 의미와 음성이 항상 결합되었다가 분리되는 거대한 운동성과 같은 언어가 말입니다. 접기
P. 35 여러분, 철학을 공부하십시오. 하지만 창작 활동에서는 자신이 쌓아온 지식을 한순간 불꽃 속에 태워버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아까워하면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고생은 뭐였지?’라는 생각조차 나지 않게, 완전히 잊을 정도로 그것을 제로로 해버려야 합니다. 지식은 은행의 예금 계좌가 아닙니다. 몇 백 포인트 쌓았으니까 더 뛰어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얼마나 성대하게 불태우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접기
P. 53 읽을 수 없다면 쓸 수도 없습니다. 이때의 읽기는 필연적으로 ‘다르게 읽기’를 의미하죠.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건 똑같은 행위가 아니거든요. 쉬운 예로 제2장까지 읽고 졸려서 일주일 정도 내버려뒀다가 다시 다음 장부터 읽는 것과, 하룻밤 사이에 책을 다 읽는 것은 인상이 전혀 다릅니다. 시기에 따라 ‘읽기’는 전혀 다른 것이 되고 마는 거죠. 당연히 개개인에 따라서도 다르고요. 물론 최저한의 수준은 존재합니다만. 접기
P. 69~70 ‘Love’ 혹은 ‘Amour’란 무엇인가? 많은 논의가 있습니다만, 한마디로 잘라 말하면 “신이 왜 이 세계를 만들었는지 모르겠다”는 것과 관련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의 전통에서 신이란 물질세계를 초월한 순수 ‘정신’입니다. 13세기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은 무얼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신은 자신을 만끽하고 있다”고 답하고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신은 전지전능의 무한 존재이기 때문에 굳이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만들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런데 굳이 세계를 만들고 우리 인류를 창조하셨죠. 도대체 왜? ‘사랑’이라고밖에 답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 존재가, 이 풍요로운 세계가 압도적으로 주어지고 말았다, 이를 증여받았다는 사실의 경이로움. 이 수수께끼에 대한 답이 바로‘사랑’입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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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글
가라타니 고진의 『탐구』 이후에 나를 가장 놀라게 한 일본인 저자의 책이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었다. 일본 최대 비평가라는 평판의 가라타니 고진과는 달리 사사키 아타루는 무명의 저자였다. 하지만 ‘책을 읽는다는 혁명’에 대한 그의 신념과 열정은 가슴까지 뜨겁게 만들었다. 평판과 무관하게 그는 일급이었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이후의 강연과 대담을 묶은 『이 치열한 무력을』은 사사키 아타루를 기억하는 독자들에게 또 하나의 즐거움을 제공한다. 철학이 난해하다면 리오넬 메시의 드리블과 스즈키 이치로의 타격도 난해하다는 그의 견해에 동의한다면, 우리에게 남은 건 기꺼이 그 난해함의 친구로서 철학과 문학 그리고 비평이 어우러진 인문학의 만찬을 즐기는 일이다.

- 이현우 (서평가,『로쟈의 인문학 서재』 저자)

인류가 지구에 출현한 이래 혁명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혁명에서 늘 피를 연상하는 것은 정치·군사 혁명만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혁명의 범주는 크고 넓다. 때로는 감성적 혁명, 웃음과 재미를 찾는 혁명, 먹고 마시는 축제와 같은 유쾌한 혁명도 있다. 자기를 넘어서서 무엇인가가 되려는 시도, 세계의 크고 작은 질서를 바꾸려는 시도, 모든 주체적 삶의 기획과 실천이 크고 작은 혁명의 발화점들이다. 혁명은 일상의 밋밋함을 뚫고 나가는 의식의 생성이고, 경계를 넘는 도주이자 횡단이다. 무딘 사람만이 못 느낄 뿐이다. 그들은 일상에서 치욕과 굴욕을 견디며 무력함으로 팔다리를 허우적일 뿐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책을 읽고 쓰는 것이야말로 열락과 광기를 동반하는 혁명의 단초라고 되풀이한다. 그가 자연재해를 겪고 반쯤 부서진 사람들 속에서 ‘재해 이후’의 의미에 대해, 삶을 침식하는 치욕과 무력을 넘어서는 혁신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자고 말을 건다. “웃어야 마땅한 것처럼 웃는 것을 배워라. 더 높은 인간들이여, 실로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하다.”(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사사키의 책에서 니체의 메아리를 듣는 것은 나만의 환청인가?

- 장석주 (시인, 소설가, 문학평론가)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동아일보
- 동아일보 2013년 9월 14일자 새로나온 책



저자 및 역자소개
사사키 아타루 (佐-木 中)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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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이자 철학자로 1973년 일본 아오모리에서 태어났다. 도쿄대학 문학부 사상문화학과를 졸업했고, 도쿄대학 대학원 인문사회 연구계 기초문화연구과 종교학一종교사학 전문 분야 박사학위를 받았다(문학박사).
호세이대학 비상근 강사를 거쳐 현재는 교토세이카대학 인문학부 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비평서로는 『야전과 영원一푸코, 라캉, 르장드르』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제자리걸음을 멈추고』『바스러진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 『이 치열한 무력을』 『춤춰라 우리의 밤을 그리고 이 세계에 오는 아침을 맞이하라』 『같음: 강의 모음집 2009~2014同: selected lectures 2009~2014』 『전쟁과 한 명의 작가一사카구치 안고론戰爭と一人の作家―坂口安吾論』 등이 있고, 소설로는 『여름 석 달 전야九夏前夜』 『행복했을 적에 그랬던 것처럼しあわせだったころしたように』 『아키코 너의 문제들』 『밤을 빨아들여서 밤보다 어두운夜を吸って夜より昏い』 『남루를 끌다らんる曳く』 『짧은 밤샘短夜明かし』 『신성한 곳神柰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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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 나날의 돌림노래>,<바스러진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 … 총 12종 (모두보기)

안천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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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현대 일본 문학을 전공했으며 도쿄대학교 총합문화연구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현대 일본의 새로운 ‘계급’을 둘러싼 지적 지형도」, 「‘소설의 종언’ 이후의 일본 소설론」, 「대전환의 예감, 보이지 않는 윤곽」 등의 글에서 아즈마 히로키를 다뤘다. 아즈마 히로키의 『일반 의지 2.0』, 『약한 연결』, 『느슨하게 철학하기』, 『정정하는 힘』을 우리말로 옮겼으며, 2020년에는 아즈마 히로키를 인터뷰한 책을 한국에서는 『철학의 태도』로, 일본에서는 『철학의 오배』로 펴냈다. 그 외에도 『이 치열한 무력을』(사사키 아타루), 『야전과 영원』(사사키 아타루), 『어려운 책을 읽는 기술』(다카다 아키노리), 『물의 도시 도쿄』(진나이 히데노부) 등을 옮겼다.
X(트위터) @anio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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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속물과 잉여> … 총 17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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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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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디오판토스가 들려주는 일차방정식 이야기>,<해리엇이 들려주는 일차부등식 이야기>,<테트리스 부부>등 총 1,333종
대표분야 : 청소년 소설 6위 (브랜드 지수 349,787점), 초등 한국사 13위 (브랜드 지수 32,776점), 학습법 17위 (브랜드 지수 11,128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사사키 아타루의 신간, 『이 치열한 무력을』
“이 압도적인 현실 앞에서 OO은 무력하다!(?)”

사사키 아타루는 박사 학위 논문을 단행본으로 출간한 『야전과 영원-푸코·라캉·르장드르』로 데뷔한 후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으로 명성을 날린, 일본 사상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젊은 지식인이다.
사사키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로 널리 알려지게 된 이후 기고, 강연, 대담 등 대중적으로 더 많이 활동하였다. 그 결과물들을 ‘아날렉타 시리즈’로 엮어 꾸준히 출간하고 있다. 이번 신작 『이 치열한 무력을』은 그중 네 번째 시리즈며, 일본에서는 곧 다섯 번째 책이 출간될 예정이다.
사사키는 아사부키 마리코, 안도 레이지, 가가미 아키라, 하나에, 이치카와 마코토, 다카하시 겐이치로, 후루이 요시키치, 이토 세이코, 진노 도시후미, 우카와 나오히로 등 많은 작가, 평론가와 함께 나눈 이야기를 『이 치열한 무력을』에 담았다.
『이 치열한 무력을』에는 대담과 좌담 말고도 다양한 형식의 텍스트가 들어 있다. 좋아하는 두 작가의 작품을 추천하는 글이 있다. 먼저 카프카와 들뢰즈가 사랑했던 작가이자 극작가 클라이스트의 『칠레의 지진』을 짧지만 강한 문구로 추천한다. 그리고 ‘20세기 최대의 시인’이라고 생각하며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라는 책제목에 시구를 빌려올 정도로 각별한 독일 시인 파울 첼란의 『파울 첼란 전집』 간행 추천사에 지금이야말로 파울 첼란의 시를 읽어보자고 권유한다.
후쿠오카 강연을 바탕으로 정리한 「변혁을 향해, 이 치열한 무력을」과 교토세이카대학 강연을 요약한 「우리의 제정신을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가르쳐달라」 기본 주기 21개 글도 있다.
또 여러 매체에 실린 기고도 있다. 「연애의 시작」에서는 “우리를 농락하는 ‘연애’는 사실 12세기 유럽의 발명품입니다.”라고 시작하며 ‘사랑’과 ‘연애’를 역사적 큰 사건들을 통해 사사키 식으로 정의한다. 「후루이 요시키치, 재난 이후의 영원」에서는 “고로 현존하는 최고의 작가고 지금이야말로 읽혀야 할 작가며 나아가 여전히 앞으로 도래해야 할 작가다.”라며 후루이 요시키치를 칭송하고 그의 3부작 『히지리』, 『집』, 『부모』를 논한다. 여기서 사사키는 3부작의 줄거리를 상세히 전하고 있다.
그리고 잡다하지만 비교적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본디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모르겠다”는 말을 이처럼 정면에서 듣기는 처음입니다」와 사사키 본인의 소설을 출간한 기념으로 대담한 「아무것도 끝나지 않아, 왜냐면 열받았거든」, 「희망 없는 희망으로서의 소설을 위해」라는 텍스트도 있다.

“어떤 종류의 잡다함이 즐거움의 원천일 수 있다.”

사사키 아타루는 『이 치열한 무력을』 ‘지은의 말’에 위의 한 문장을 말하면서 함께 대담하고 좌담한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며, 이 책의 성격을 한 마디로 밝힌다.
사사키 아타루의 사상과 문체에 관심이 많아 『철학자의 사물들』에서 욕조와 사사키의 생각을 절묘하게 연결한 장석주 문학평론가는 『이 치열한 무력을』을 읽고 기꺼이 추천의 글을 집필했다. 사사키가 앞서 말한 것과 연결해 장석주 문학평론가의 말을 잠시 빌린다.
“계통과 체계는 미약하지만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육성’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사사키는 다양한 청자와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해 말을 주고받는다. 독자들은 『이 치열한 무력을』 차례를 보고 본인이 좋아하는 주제부터 찾아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사다 아키라, 아즈마 히로키 이래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상가 ‘사사키 아타루’

사사키 아타루는 혜성처럼 나타났다. 박사 학위 논문을 그대로 내놓은 첫 번째 저작 『야전과 영원-푸코·라캉·르장드르』는 사사키 특유의 문체와 어우러진 개성 있는 고찰로 인문학 관계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두 번째 저작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은 정통 인문서로는 극히 이례적으로 몇 개월 만에 3만 부가 읽혀 인문학의 쇠락을 통감하던 많은 이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결코 어려운 내용은 아니지만 주제는 상당히 무거운 저작이었기에 본문에서 사사키 본인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도대체 누가 찾아 읽는 거지?’라는 궁금증을 자아냈다.
이처럼 사사키 아타루가 세상에 알려진 경위는 ‘화려하다’는 수식을 덧붙이는 게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으나 사실 그가 걸어온 궤적은 그리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고난에 가깝다.
사사키는 1973년 아오모리靑森에서 태어났다. 그는 1989년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다음 해 검정고시에 합격한다. 그로부터 4년 후 도쿄대학에 입학해 졸업한 후 대학원에 진학해 석, 박사 과정에서 종교학을 전공했다. 그때 쓴 논문이 『야전과 영원-푸코·라캉·르장드르』이다. 이 원고를 들고 열 군데가 넘는 출판사를 직접 돌아다녀 겨우 출판했다. 당시 무명이던 사사키를 인정해주는 출판사가 없었던 것이다.
한편 사사키는 힙합 작사가이기도 하다. 그의 독특한 문체나 말투는 물론이고 그가 글쓰기뿐 아니라 노래하고 춤추는 것까지 포함해 ‘문학’을 논하는 것도 이를 염두에 두고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사키는 소설도 몇 편 내놓았다. 『이 치열한 무력을』본문에 실린 글들에서 종종 그의 소설이 언급된다.(안천 역자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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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으로서의 3.11 - 대지진과 원전 사태 이후의 일본과 세계를 사유한다
 아이아 총서 9
쓰루미 슌스케,요시모토 다카아키,사사키 아타루 (지은이),윤여일 (옮긴이)그린비2012-03-11
원제 : 思想としての3.11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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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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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책소개
3.11은 보고나 기록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고도성장의 신화, 안전신화, 원자력신화……. 현대 일본의 모든 신화들이 무너져 내린 그라운드 제로, 후쿠시마. 그곳으로부터 바람과 조류를 타고 퍼져 나가는 피폭의 공포는 그것이 닿는 모든 지역의 삶과 노동, 통치와 저항의 성격을 바꾸어 놓고 있다.

이제 일본과 세계의 인류는 3.11로 시작된 이 강력하고 지속적인 재난 속에서 삶을 영위할 방법을 사유해야 하는 것이다. 재난의 한복판에서 쓰여진 <사상으로서의 3.11>은 바로 이 사유의 단초들을 엮은 책이다. 쓰루미 슌스케나 요시모토 다카아키와 같은 원로 사상가로부터 고소 이와사부로나 사사키 아타루와 같은 젊은 지식인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일본 지식인들의 사유가 담긴 <사상으로서의 3.11>은 3.11 이후 인류에게 어떤 삶의 가능성과 과제가 놓여져 있는지를 다양한 시각에서 조명해 주고 있다.


지은이 소개
사사키 아타루(佐?木中)
1973년 생. 철학자·작가. 현대사상과 이론종교학에 기반해 문필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저서로는 『야전과 영원』, 『잘라내라, 저 빌고 있는 손을』 등이 있다.

쓰루미 슌스케(鶴見俊輔)
1922년 생. 사상비평가. 『사상의 과학』 창간을 주도했으며 아카데미즘 틀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적인 시각으로 대중문화를 관찰하며 일본적 사고방식을 해부하고 있다. 저서로 『추억 봉투』, 『불령(不逞) 노인』 등이 있다.

요시모토 다카아키(吉本隆明)
1924년 생. 사상비평가. 문학, 서브컬처, 정치, 사회, 종교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평론활동에 나서고 있다. 저서로 『심리적 현상론 본론』, 『빈곤과 사상』 등이 있다.

나카이 히사오(中井久夫)
1934년 생. 정신병리학자. 한신대지진 이후 설립된 효고현립 ‘고코로케어센터’의 초대소장으로 일했다. 현재는 효고피해자지원센터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재해가 정말로 덮쳤을 때』, 『부흥의 길 한복판에서』 등이 있다.

기다 겐(木田元)
1929년 생. 철학자.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연구하고 있다. 메를로퐁티 등 현대서양철학의 주요 저작을 일본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저서로 『우연성과 운명』, 『반철학 입문』 등이 있다.

야마오리 데쓰오(山折哲雄)
1931년 생. 종교학자. 종교사와 일본사상사를 전공하고 있다. 다신교적 종교가 일신교적 종교에 비해 우월하다는 주장을 내놓은 바 있다. 저서로 『내가 죽음에 대해 말한다면』, 『신란을 읽는다』 등이 있다.

가토 노리히로(加藤典洋)
1948년 생. 평론가. 현대철학과 현대문학에 기반해 일본사상계의 쟁점들에 관해 폭넓게 발언하고 있다. 1997년 출간한 『패전후론』은 일본사상계에서 역사주체논쟁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저서로 『패전후론』, 『잘 가세요, 고질라들』 등이 있다.

다지마 마사키(田島正樹)
1950년 생. 철학자. 언어철학에 기반해 형이상학의 문제를 고찰하고 있다. 근대의 정치철학과 예술을 연구하며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통찰을 끌어와 연구활동에 나서고 있다. 저서로는 『정의의 철학』, 『신학 - 정치론』 등이 있다.

모리 이치로(森一郞)
1962년 생. 철학자. 철학자. 후설,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연구하고 있으며 니체와 아렌트를 참조해 근대성의 문제를 탐구하고 있다. 저서로 『죽음과 탄생』 등이 있다.

다테이와 신야(立岩?也)
1960년생. 사회학자. 복지사회학회, 일본생명윤리학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다만 삶』, 『좋은 죽음』 등이 있다.

고이즈미 요시유키(小泉義之)
1954년 생. 철학자. 주로 데카르트, 들뢰즈, 레비나스를 연구하고 있다. 만화와 서브컬처에 대한 평론도 작성하고 있다. 저서로 『윤리』, 『병의 철학』, 『생식의 철학』 등이 있다.

히가키 다쓰야(槍垣立哉)
1964년 생. 철학자. 프랑스와 독일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아울러 자아론, 생명론, 언어론 등 현대사회의 철학적 과제를 탐색하고 있다. 저서로 『순간과 영원』, 『푸코 강의』 등이 있다.

이케다 유이치(池田雄一)
1969년 생. 평론가. 소설비평 이외에도 칸트에 관한 독자적인 독해에 근거해 도덕의 근거를 되묻는 작업에 나선 바 있다. 저서로 『칸트의 철학』이 있다.

도모쓰네 쓰토무(友常勉)
1964년 생. 역사학자. 일본근대사상사를 연구하고 있다. 전후의 피차별 부락민 운동사에 대한 연구도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 『탈구성적 반란』, 『시원과 반복』이 있다.

에가와 다카오(江川隆男)
1958년 생. 철학자. 서양근현대철학과 윤리학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스피노자, 니체, 들뢰즈를 경유해 반도덕주의 철학을 재구성하고 있다. 저서로 『죽음의 철학』, 『존재와 차이』 등이 있다.

고소 이와사부로(高祖岩三郞)
1955년 생. 아나키스트. 미국에 거주하면서 도시 공간의 문제를 탐구하고 있다. 뉴욕의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운동에 참여하는 등 정치적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저서로 『새로운 아나티즘의 계보학』, 『죽어가는 도시 회귀하는 거리』 등이 있다.

히로세 준(??純)
1971년 생. 영화평론가. 현재 프랑스에 체류하며 영화를 연구하고 있다. 프랑스의 영화비평지 VERTIGO 편집위원이며 스트로브-위예, 사카모토 준지 등에 대한 평론을 발표했다. 저서로 『씨네 캐피탈』, 『전투의 최소회로』 등이 있다.

『도래해야 할 봉기』 번역 위원회
『도래해야 할 봉기』(L’insurrection qui vient)를 일본어로 번역했다. 「사막과 오아시스」, 「소문의 범람은 이미 혁명의 도래를 알리고 있다」 등의 논고를 발표했다.


목차


옮긴이 서문 / ‘멀다’와 ‘가깝다’ 사이
부서진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 _ 사사키 아타루
일본인은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_ 쓰루미 슌스케
지금부터 인류는 위험한 다리를 터벅터벅 건넌다 _ 요시모토 다카아키
전쟁으로부터, 고베로부터 _ 나카이 히사오
인간은 이미 기술을 어찌할 수 없는가? _ 기다 겐
두 가지 신화와 무상전략 _ 야마오리 데쓰오
미래로부터의 기습 _ 가토 노리히로
시작도 끝도 없다 _ 다지마 마사키
세계를 사랑한다는 것 _ 모리 이치로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 있고 때론 생각하는 편이 좋은 것도 있다 _ 다테이와 신야
사건의 때 _ 고이즈미 요시유키
자연은 당연히 난폭하다 _ 히가키 다쓰야
우리들 ‘후쿠시마’ 국민 _ 이케다 유이치
노동-생의 경계와 마주하여 _ 도모쓰네 쓰토무
중간 휴지와 취약함의 규모 _ 에가와 다카오
3.11 이후의 지구적 아나키즘 _ 고소 이와사부로
원전에서 봉기로 _ 히로세 준
반원전의 증표 _ 『도래해야 할 봉기』 번역 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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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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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실로 어려운 대목입니다. “말해”라는 압력에 굴하지 않고 사망자와 이재민을 ‘이용’하지도 않고, 그런데도 이 사태에 관해 진지하게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면 말이죠. 거의 줄타기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어느 작가가 제게 다소 침통한 내용의 글을 보내 왔습니다. 즉, 이 사건조차 옴진리교 사건처럼 2, 3년 동안 문학, 사상, 비평에서 ‘소재’로 소비되고 그대로 잊혀지지는 않을까라고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들뢰즈가 비난했듯이 “이용”하고 “시체를 먹는” 사람들은 또 등장하겠죠. 예를 들어 지진 재해를 화젯거리로 삼은 소설이 차례차례 출판되거나 ‘9.11에서 3.11로’ 등을 제목으로 뽑은 사상, 비평의 게임이 전개되겠죠. “자, 축제다. 일대 이벤트, 게임의 시작이다. 소재는 대지진과 원자력 발전 사고다. 누구 머리가 제일 좋은가?”라고요.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진심으로.― 사사키 아타루, 「부서진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본문 46쪽) 중에서 접기
전력 업계는 지역 독점 기업인데도 텔레비전 업계에 거액의 광고료를 뿌려 여론을 조직적· 전략적으로 유도해 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원전 사업에 반하는 이견을 봉하는 데는 광고를 끊겠다는 위협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면 원전을 반대하는 의견은 조직적으로 밀려난다. 일단 그런 흐름이 만들어지면 구태여 개개인을 매수하러 나설 필요는 없다. 원전 정책이 일을 만들어 내고, 따라서 조직과 직장을 만들어 내고, 많은 낙하산 인사, 연구기관, 심의회를 만들어 낸다. 그렇게 부풀어 오른 조직과 인원은 서로를 보증하고 뒷받침하고 인가하고 익찬한다. 개중에는 돈에 눈이 멀어 먼저 나서는 자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저차원의 관심’에서 움직이는 경우는 예외적일 것이다. 대개는 시대의 물결에 올라타서 옮겨 가는 것일 뿐이고, 오랜 세월의 친분과 신사적 교제가 있어서 임원이 되는 걸 뿌리치지 못한 것일 뿐이고, 자리에 이름을 올린 것일 뿐이리라. 부러 이기적인 짓을 할 작정도 없고, 그런 습관이 있는 자들도 아니다. 다만 다양한 의견과 반대 입장의 목소리를 도통 알아듣지 못하니 식견이 좁고 편향되어 있다는 지적은 면키 어렵다. 그리고 그게 이단을 꺼리고 대립을 배제하고 원만히 화합해 나가자는 익찬체제의 본질이다. ― 다지마 마사키, 「시작도 끝도 없다」(본문 144쪽) 중에서 접기
지키고 전해야 할 사물을 돌보는 것이 곧 세계를 사랑하는 수업인 것이다. 반면 후대에게 남겨야 할 이유가 없는데 언제까지고 끈질기게 남아 있는 사물도 있으니 그런 것은 늘리지 않는 편이 현명하다. 한번 불붙으면 다음 세대에도 피어올라 언제 어느 때에 다시 타오를지 모를 복수심에, 인류는 아주 오랫동안 골치를 썩어 오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용서의 기적을 바라는 심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여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수만 년이 지나야 겨우 반감기로 들어가는 방사성 물질은 일단 제조되면 돌이킬 수 없으며 반영구적으로 저주를 뿌린다.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당사자가 범한 잘못뿐이다. 세계를 파괴하리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도 눈앞의 편리나 이익에 이끌려 핵연료 쓰레기를 세계에 부지런히 쌓아 가는 21세기의 원자력 주민-별칭 지구 시민-의 비도非道를 미래의 인류는 결코 용서해 주지 않을 것이다. ― 모리 이치로, 「세계를 사랑한다는 것」(본문 160쪽) 중에서 접기
원전사고는 일어납니다. 지진도 일어납니다.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은 가당치 않습니다. 우리는 전대미문의 재해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The only one의 사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로 one of them이라는 사실을 곱씹지 않으면 안 됩니다. 스스로가 한신대지진의 이재민인 나카이 히사오 씨는 only one이라는 자각과... 더보기 - Tatyana
넓게 보자면 우리는 이재민입니다. 그러나 집을 잃은 도호쿠의 이재민이 보기에 우리는 이재민이 아니겠죠. 말하자면 '후방지원'을 해야 할 입장입니다. 도호쿠의 이재민들에 대해서는 그녀들 그들의 경험을 the only one으로서 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괴로움이 one of them으로서 많은 참화 가운데 하나이며 여러 사람이 안고 있는 쓰라림이라 여기며 자기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냉정한 시선을 확보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직접적 이재민의 the-only-one-ness도 지킬 수 없습니다. 자기연민에 빠지거나 조증과 울증을 오가며 우왕좌왕하는 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57쪽 접기 - Taty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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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쓰루미 슌스케 (鶴見 俊輔)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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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대표하는 사상가 겸 철학자. 1922년 도쿄 아자부구 산겐야정(현 미나토구 모토아자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외할아버지 모두 정치 이력을 가진 유력한 가정에서 자랐으나 반항적인 청소년기를 보내다 1937년 다니던 중학교를 중퇴 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후 일본으로 돌아와 자카르타 해군 무관부 군속으로 전쟁을 경험했다. 패전 직후 마루야마 마사오 등 전쟁에 반대하는 지식인들과 함께 1946년 『사상의 과학思想の科學』을 창간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평화운동에 지속적으로 힘을 쏟았으며 반전시민운동인 ‘소리 없는 소리의 모임’, 평화헌법 9조를 지키기 위한 ‘9조 모임’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자 반전운동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을 이끌며 미국과 대립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2015년 타계할 때까지 70여 년간 다양한 분야를 횡단하며 수많은 연구와 매체, 사회운동을 이끌었다. 학술적으로는 ‘전향’을 20세기 전반기 일본의 사상 체계를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엘리트들의 집단적 체험으로 새로이 규정한 것으로 유명하다. 주요 저서로 『전향』 『전후 일본의 대중문화』 『전후 일본의 사상前後日本の思想』(공저)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전쟁의 소문 속에 살았다>,<다케우치 요시미 : 어느 방법의 전기>,<사상으로서의 3.11> … 총 84종 (모두보기)

요시모토 다카아키 (吉本 隆明)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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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시인이다. 일본에서는 유명한 작가가 되면 이름을 음독하는 관습이 있어 ‘요시모토 류메이’라고도 불린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요시모토는 전쟁에 침묵하거나 전쟁을 옹호한 문학가들의 책임론을 주장하며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고, 1960년대 일본에서 학생운동이 한참 전개될 때 학생들과 행동을 같이하며 사회개혁을 이끌기도 했다. 그가 걸어온 길은 ‘행동하는 지식인’의 전형이었다. 특히 그가 집필한 《공동환상론》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새로운 각성을 불러일으킨 명저로 통한다.
그는 세계적인 작가이자 국내에도 많은 독자를 거느린 소설가 ‘요시모토 바나나’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바나나는 아버지에 대해 “나의 아버지는 말과 행동에 차이가 없었던 존경스러운 분이셨죠. 제가 글쓰기에 집중하게 된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습니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바나나를 세계적 작가로 길러 낸 데는 앎과 실천을 같은 선상에 놓은 요시모토의 남다른 철학도 한몫했다.
그는 2012년 87세를 일기로 타계했는데, 일본의 수많은 지식인들에게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온 만큼 당시 추모 열기가 대단했다. 접기

최근작 : <진짜와 가짜>,<십대를 위한 다섯 단어>,<사상으로서의 3.11> … 총 176종 (모두보기)

사사키 아타루 (佐-木 中)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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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이자 철학자로 1973년 일본 아오모리에서 태어났다. 도쿄대학 문학부 사상문화학과를 졸업했고, 도쿄대학 대학원 인문사회 연구계 기초문화연구과 종교학一종교사학 전문 분야 박사학위를 받았다(문학박사).
호세이대학 비상근 강사를 거쳐 현재는 교토세이카대학 인문학부 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비평서로는 『야전과 영원一푸코, 라캉, 르장드르』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제자리걸음을 멈추고』『바스러진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 『이 치열한 무력을』 『춤춰라 우리의 밤을 그리고 이 세계에 오는 아침을 맞이하라』 『같음: 강의 모음집 2009~2014同: selected lectures 2009~2014』 『전쟁과 한 명의 작가一사카구치 안고론戰爭と一人の作家―坂口安吾論』 등이 있고, 소설로는 『여름 석 달 전야九夏前夜』 『행복했을 적에 그랬던 것처럼しあわせだったころしたように』 『아키코 너의 문제들』 『밤을 빨아들여서 밤보다 어두운夜を吸って夜より昏い』 『남루를 끌다らんる曳く』 『짧은 밤샘短夜明かし』 『신성한 곳神柰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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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 나날의 돌림노래>,<바스러진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 … 총 12종 (모두보기)

윤여일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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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사회과학원 방문학자로 베이징에서, 도시샤대학 객원연구원으로 교토에서 체류했다. 제주대학교 공동자원과 지속가능사회 연구센터 학술연구교수로 제주에서 지내고 있다. 『물음을 위한 물음』, 『광장이 되는 시간』, 『사상의 원점』, 『사상의 번역』, 『동아시아 담론』, 『지식의 윤리성에 관한 다섯 편의 에세이』, 『상황적 사고』, 『여행의 사고』(전3권)를 쓰고, 대담집 『사상을 잇다』를 펴냈으며, 『다케우치 요시미 선집』(전2권),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 『다케우치 요시미―어느 방법의 전기』, 『루쉰 잡기』, 『사상이 살아가는 법』, 『일본 이데올로기』, 『조선과 일본에 살다』, 『재일의 틈새에서』, 『사상으로서의 3·11』, 『사회를 넘어선 사회학』을 옮겼다. 지키는 연구를 하고 싶다. 접기

최근작 : <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경계’에서 본 재난의 경험>,<공동자원의 영역들> … 총 45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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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철학의 기쁨>,<하이데거의 사건 존재론>,<구도자의 일기>등 총 680종
대표분야 : 철학 일반 2위 (브랜드 지수 220,185점), 여성학/젠더 11위 (브랜드 지수 37,096점), 고전 22위 (브랜드 지수 170,457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3.11은 보고나 기록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고도성장의 신화, 안전신화, 원자력신화……. 현대 일본의 모든 신화들이 무너져 내린 그라운드 제로, 후쿠시마. 그곳으로부터 바람과 조류를 타고 퍼져 나가는 피폭의 공포는 그것이 닿는 모든 지역의 삶과 노동, 통치와 저항의 성격을 바꾸어 놓고 있다. 이제 일본과 세계의 인류는 3.11로 시작된 이 강력하고 지속적인 재난 속에서 삶을 영위할 방법을 사유해야 하는 것이다. 재난의 한복판에서 쓰여진 『사상으로서의 3.11』은 바로 이 사유의 단초들을 엮은 책이다. 쓰루미 슌스케나 요시모토 다카아키와 같은 원로 사상가로부터 고소 이와사부로나 사사키 아타루와 같은 젊은 지식인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일본 지식인들의 사유가 담긴 『사상으로서의 3.11』은 3.11 이후 인류에게 어떤 삶의 가능성과 과제가 놓여져 있는지를 다양한 시각에서 조명해 주고 있다.

일본의 대표적 지식인들이 말하는 3.11 대지진과 원전!!
근거가 무너진 재난의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인류에 대한 제언!

3.11은 보고나 기록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고도성장의 신화, 안전신화, 원자력신화……. 현대 일본의 모든 신화들이 무너져 내린 그라운드 제로, 후쿠시마. 그곳으로부터 바람과 조류를 타고 퍼져 나가는 피폭의 공포는 그것이 닿는 모든 지역의 삶과 노동, 통치와 저항의 성격을 바꾸어 놓고 있다. 이제 일본과 세계의 인류는 3.11로 시작된 이 강력하고 지속적인 재난 속에서 삶을 영위할 방법을 사유해야 하는 것이다. 재난의 한복판에서 쓰여진 『사상으로서의 3.11』은 바로 이 사유의 단초들을 엮은 책이다. 쓰루미 슌스케나 요시모토 다카아키와 같은 원로 사상가로부터 고소 이와사부로나 사사키 아타루와 같은 젊은 지식인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일본 지식인들의 사유가 담긴 『사상으로서의 3.11』은 3.11 이후 인류에게 어떤 삶의 가능성과 과제가 놓여져 있는지를 다양한 시각에서 조명해 주고 있다.
3.11 대지진의 어마어마한 피해는 그 자체로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지만, 지진과 쓰나미로 인한 후쿠시마 원전의 붕괴는 지진 재해와는 또 다른 차원의 공포와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 방사능이라는 보이지 않는 위협, 그리고 인간의 짧은 수명으로는 상정할 수 없는 ‘수만 년’이라는 방사능 피해의 시간 단위는 후쿠시마에서 새로운 재난의 시대를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수록된 18편의 글들은 이 재난의 시대 속에서 새로운 시대를 전망하기 위한 다양한 사상 과제들을 도출해 내고 있다. 내셔널리즘, 근대, 기술과 과학, 세계와 자연, 항상적 봉기 등 각각의 글들은 각기 다른 주제와 입장에서 새로운 시대를 위한 전망을 제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입장과 주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글 대부분이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탈원전/반원전’의 필요성이다. 방사능의 공포가 현재의 삶을 위태롭게 한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제어할 수 없는 치명적인 위험성을 가진 ‘쓰레기’를 미래 세대에게 남기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도 탈원전은 절실한 과제라는 것이다.
실제로 후쿠시마 사태 이후, 일본뿐만 아니라 유럽과 브라질 등 많은 나라들이 원전 정책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나라인 한국은 여전히 이웃나라의 비극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듯하다. 오히려 일본이 비워 둔 원전 선진국의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듯이, 원전 수주에 환호하고 원전을 더욱 육성하겠다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에서 사태가 여전히 진행 중이라면, 한국에서는 사태가 악화되고 있는 것이다. 재앙은 후쿠시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자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것이 『사상으로서의 3.11』에 실린 일본 지식인들의 사유를 귀담아 들어야 하는 이유이며, 또한 이것이 ‘3.11 대지진’ 1년을 맞아 『사상으로서의 3.11』 한국어판을 번역·출간하는 이유이다.

내셔널리즘을 넘어 ‘후쿠시마 국민’으로

미디어 문제를 미뤄 두더라도 어째서 일본사회 전체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이 정도로 고립감에 휩싸이게 되었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그건 해일과 지진이 안긴 피해가 너무나도 심각하고 원전 사고로 인한 절망감도 있겠지만, 저는 역시 일본에는 세계의 일원이려는 자세가 원래 부족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반성합니다. 앞으로의 일본을 생각한다면 세계의 일원이라는 의식이 몹시 소중합니다. 현재 일본은 “국난에 빠져 있다, 하나가 되어 힘내자”라는 식이어선 안 됩니다. 앞으로 이 나라를 어떻게 바로 세워 갈 것인가를 고민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앞으로는 다음 걸음을 내디딜 때 세계의 일원이라는 일체감을 갖지 않는다면, 그 용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요컨대 이번 일을 계기로 삼아 인구 문제, 자원 문제, 쓰레기 문제 등 세계 전체의 문제를 30년 정도 선취해 사고한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 가토 노리히로, 「미래로부터의 기습」(132∼133쪽)

대규모의 재해가 일어나면 사회는 곧장 ‘내셔널리즘’으로 달려간다. 3.11 이후 일본의 미디어들 역시 “일어서라 일본”과 같은 구호를 반복하면서, 재해지의 ‘미담’을 전하고, 부흥해야 할 ‘건전한 일본’의 상을 그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내셔널리즘의 선동이 흘러나올 때, 거기에서 가장 먼저 배제되는 이들은 재해의 희생자들과 여전히 사태가 진행되고 있는 후쿠시마의 당사자들이다. 후쿠시마는 더 이상 피해지가 아니라, ‘일본의 부흥’을 위해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어 버린다. 애도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도카통통」(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제목으로 망치 소리의 의성어, 본문 196쪽 참조)의 망치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평론가인 이케다 유이치는 내셔널리즘의 구호 속에서 그어지고 있는 이러한 분할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반경 10km, 20km, 30km……. 그리고 현의 경계와 국경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그어지는 분할선에 따라 모두가 자신의 입장을 가지고 안전을 확보하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방사능 피해는 그렇게 인간들이 긋는 분할선을 따라서 구분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모두가 피폭의 위험에 처해 있는 당사자, 곧 ‘후쿠시마 국민’으로서 발언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이케다의 주장이다. 그럼으로써 국민과 행정, 국민과 내셔널리즘 사이에 그어져 있는 더 큰 분할선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패전후론』의 작가로 일본 학계에서 ‘역사주체논쟁’을 벌이기도 했던 가토 노리히로가 원전 피해지역을 방문하면서 느낀 것 역시 이런 내셔널리즘의 문제였다. “전쟁에서 공습이 오는데 “도망쳐라”가 아니라 가족이 “으악”하며 얼싸안아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본문 132쪽)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지적하고 있는 것이 ‘고립’을 지향하는 일본 내셔널리즘의 성격이었다. 근대화 이후 일본은 특유의 ‘전학생 의식’으로 스스로는 고립된 채 세계를 따라잡고 앞서 나가려고만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태평양 전쟁 당시의 일본의 모습이었고, 세계에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일어나라 일본”의 이미지에만 집착하고 있는 일본의 현재 모습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재난의 시대

만약 최선의 경우에 관한 허황된 기대가 모두 실현되어 방사능 유출이 멈추고, 노심이 제대로 냉각되어 장기 안정상태에 이르고, 그걸 수관으로든 콘크리트로 된 석관으로든 완전히 밀봉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사건이 끝났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대기로 대지로 바다로 흩뿌려진 아이오딘 131의 방사능이 급속히 감쇠하고, 30년의 반감기를 갖는 세슘 137조차 흩어지거나 제염되거나 생활하기에 무시할 수 있을 만큼 낮아졌다고 해도, 견고하게 밀봉된 석관 속에는 대량의 우라늄과 플루토늄이 기분 나쁘게 잠들어 있는 것이다. 플루토늄 239의 방사능이 절반으로 줄어들려면 2만 4천 년 걸린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일순 그 황당한 시간의 단위에 눈이 멀고 생각도 정지된 채로 굳어 버린다. - 다지마 마사키, 「시작도 끝도 없다」(141쪽)

다지마 마사키의 글 제목이 잘 표현하고 있듯이, 현대는 ‘시작도 끝도 없는’ 재난의 시대이다. 원전 사고가 발생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재난 시대인 것이 아니라, 원전 자체가 이미 ‘사고’이기 때문이다.(히로세 준, 「원전에서 봉기로」, 249쪽) 원전 ‘사고’를 발전 자체나, 발전 이후의 폐기물 처리와 구분해 줄 수 있는 기준은 어디에도 없다. 모두 수만 년 동안 지속될 과정의 일부일 뿐이기 때문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재난의 시대, 이를 히로세 준은 ‘문제제어 사회’(「원전에서 봉기로」)라고 부른다. ‘문제제어 사회’라는 표현은 비단 원전문제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9.11로 시작된 ‘테러와의 전쟁’ 또한 ‘원전’과 동시대적인 ‘문제제어’의 현상이다.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했다고 해서 ‘테러와의 전쟁’은 해소되지 않는다. ‘테러리즘’이라는 문제를 해결불가능의 상태로 유지함으로써 자신의 사회를 ‘제어’하고 삶과 노동을 끊임없는 재난의 상태에 놓이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테러와의 전쟁’의 요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테러에 대한 공포가 일상을 지배하듯이, 후쿠시마 사태 이후 일상화된 피폭은 일상생활, 노동, 사회관계, 통치, 투쟁 등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치고 이를 재규정한다. 원자력 사고를 계기로 가장 선진적인 자본주의 국가 중 하나였던 일본이 그 내적 문제와 한계를 묵시론적인 형태로 드러냈고, ‘인류 진보의 정점’이었던 원전 또한 스스로 붕괴하여 자본주의가 만들어 왔던 인간 존재의 한계를 드러냈다. 하지만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원전이나 핵무기가 일거에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는 난망한 것이다. 사사키 아타루가 자신의 글(「부서진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이미 지구상에서는 수도 없는 원자력 사고들이 발생했고 그 정점에 후쿠시마의 원전사태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재난 시대의 통치는 이러한 붕괴의 사실을 알면서도 지연시키는 장치를 인류에게 강제할 것이다.(고소 이와사부로, 232∼233쪽)
이런 강제에 맞서 다양한 형태의 저항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문제제기 사회’에서 벌어지는 이 저항들은 마찬가지로 ‘문제제어’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히로세 준은 이를 ‘아랍의 봄’을 들어 설명한다.(「원전에서 봉기로」, 253쪽) 과거의 ‘혁명’이 ‘문제해결’, 즉 정권을 장악하고 새로운 건국 프로그램을 시작하는 것으로 종결된다면, 오늘날의 ‘아랍의 봄’과 같은 봉기에는 ‘정권 장악’이나 ‘건국 프로젝트’와 같은 구체적인 목적이 있는 아니라, 봉기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에 실린 「반원전의 증표」에서 등장하는 일본의 마이너 운동들(다메렌, 목욕탕 이용자 협의회 등) 역시 끊임없이 봉기로서 봉기하는, 다시 말해 특정한 목적이 아니라 “노상 점거 자체를 지향하는” 저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데모가 기쁨의 선線인 동시에 피로의 선이기도 하다는 것은 단순히 자유롭게 길을 메우고 활보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비좁은 인도로 밀려나야 하기 때문은 아니다. 답으로 향하는 데모, 불안정에서 안정으로 향하는 데모가 아니라 문제를 그것으로서 살아가는 데모, 준안정에서 준안정으로 진행되는 데모이기 때문이며, 즉 그 종착점이 종지부가 아니라 휴지부이며 거기에는 시작도 끝도 없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이것을 ‘뱀’이라고 부르며 시작과 끝으로 획정된 선분 위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가 또 다른 획정된 선분 위로 얼굴을 내미는 과거의 ‘두더지’와 구별했다. 뱀은 선분을 알지 못하며 데모와 일상을 전혀 구분하지 않는다. 뱀은 또한 땅 속에서의 휴식도 알지 못한다. 쉬지 않고 땅 위를 기어간다. 그동안 피로가 쌓인다. 땅 위로는 끊임없이 방사선이 쏟아지고 있다. 피로와 피폭의 선. 그렇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또한 뱀들의, 즉 우리 해방의 선, 기쁨의 선이다. 뱀이 된다(봉기한다)는 것은 이 문제를,
어디까지나 과잉된 힘으로서의 이 ‘균열’을 살아가는 것이다. - 히로세 준, 「원전에서 봉기로」(254∼255쪽)

세계를 사랑한다는 것

모리 이치로는 자신의 글(「세계를 사랑한다는 것」)에서 세계와 자연을 구분한다. 태곳적부터 유구한 템포로 같은 것을 영원히 반복하고 있는 존재자 전체를 ‘자연’이라고 한다면, ‘세계’는 인간이 그 자연과 맞서 싸워 구축해 낸, ‘인간이 만들어 내서 영속하는 사물의 총체’를 말한다. 따라서 ‘자연을 지키자’라는 말은 오만한 것이다. 자연에게 있어 인간의 존재 여부는 어찌 되어도 상관없는 것이며, 자연은 때때로 그 막대한 힘으로 세계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인간에 의해 위기에 처한 것은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 구축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할 ‘세계’인 것이다. 파괴와 제조의 과정 자체를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는 ‘방치해도 사라지지 않는’ 쓰레기들을 만들어 내고, 그 쓰레기들에 의해 ‘세계’가 파괴되고 있다. 그리고 그 정점에 있는 것이 원자력 발전의 ‘쓰레기’이다. 언뜻 ‘제어’하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원자력 발전의 과정은 세계 속으로 선악을 모르는 자연을 끌어들인 것이며, 자연이 자신의 본령을 발휘하여 세계를 파괴하도록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본문 158쪽)
방사능 물질은 일단 제조되면 인간으로서는 상정할 수도 없는 수만 년이라는 시간 동안 위력을 발휘한다. 모리 이치로의 말처럼 “미래의 인류”는 “세계를 파괴하리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도 눈앞의 편리나 이익에 이끌려 핵연료 쓰레기를 세계에 부지런히 쌓아가는” 오늘날의 인류를 결코 용서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파괴와 제조의 과정을 반복하고 확대하면서 세계를 파괴하고 있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그리고 그 원동력의 상징인 원자력 발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미래의 피해자’를 위해서도, 그리고 후쿠시마 이후 지속적으로 피폭의 위험에 노출되어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를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급선무일 것이다. 접기




우리가 벌써 잊어버리고 멀쩡한 것처럼 살고 있는 것을 다시 생각해보게 하나, 일본도 인문학 계열에서는 말만 나부낀다.
madwife 2014-06-06 공감 (0) 댓글 (0)


사상으로서의 3.11 (부서진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 : 사사키 아타루)


Tatyana 2012-08-05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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