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록·게이쵸의 역할
| 문록의 역할 | |
|---|---|
문록의 역 '부산 진순절도' [ 주 1 ] 부산 진성 공략의 모습으로 왼쪽으로 밀집하고 있는 것은 상륙한 일본의 군선. | |
| 전쟁 : 문록의 역할 | |
| 연월일 : 텐쇼 20년 4월 13일 ( 1592년 5월 24일 ) - 분록 2년 7월 9일 ( 1593년 8월 5일 ) | |
| 장소 : 한반도 전역 , 만주 · 두만강 일대 | |
| 결과 : 코니시 행장 과 침착경의 협의에 의해 일본과 명 사이에서는 휴전 성립 [ 주 2 ] [ 1 ] 일본군은 남쪽으로 후퇴했지만, 한반도에 세운 성채 에 주둔했다. | |
| 교전 세력 | |
| 명 조국 | |
| 지도자·지휘관 | |
| 장군 도요토미 히데요시 총대장 우 키타 히데야
종 의 토모 , 코니시 행장 , 마츠우라 진신 , 아리마 하루노부 , 오무라 키젠 , 고토 준겐
모리 카츠노부(모리 요시나리), 시마즈 요시히로, 다카하시 전종, 아키즈키 종장 , 이토 유우 병 , 야마다 무사 마사 , 시마즈 타다요시
후쿠시마 마사노리 , 도다 카츠 타카 , 나가무네 카베 모토 모 , 벌 스카 가사마키 , 이코마 친정, 내시마 도리 유키
고바야카와 타카야게 , 고바야카와 히데포 , 타치바나 진호(종모), 다카하시 통증, 치 쿠시 광문 , 모리 테루모토 [ 주 3 ]
우키타 히데야 외
아사노 유키나가 , 나카가와 히데마사 , 미야베 나가사키 외
도요토미 히데카츠 , 호소카와 타다오키 , 하세가와 히데이치 , 기무라 시게바 외
쿠키 카가 타카시, 후지도 타카토라, 와키자카 야스지, 카토 카아키, 카메이 이바라시, 스가 타츠 나가 , 쿠 와 야마 이치 하루, 쿠 와 야마 사다 하루, 호리 우치 씨 선 , 스기와카 씨 무네 | 명군 병부 상서 석성 병부 왼쪽 사무 로邢玠兵部 오른쪽 사무 로 송 응창 → 고양 켄방 해양 왜총 총병관 ( 제독 ) 이여마츠 부총병(료동군) 조승훈참장 리우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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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력 | |
| 일본군 158,700명 [ 1 ] (모리가문서에 의한 통설. 총세는 일본군 진립을 참조) | 명군 : 48,000명 [ 2 ] [ 3 ] 조선군 84,500명 [ 4 ] -192,000명 [ 5 ] [ 5 ] 의병군: 22,400명 |
| 손해 | |
| 적어도 약 21,900 명 이상 [ 6 ] | ~36,000명 [ 7 ] [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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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장의 역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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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농성도 병풍( 후쿠오카시 박물관 소장 ) | |
| 전쟁 : 경장의 역할 | |
| 연월일 : 경장 2년 1월 14일 ( 1597년 3월 1일 ) - 경장 3년 11월 25일 ( 1598년 12월 22일 ) | |
| 위치 : 한반도 삼남지방 | |
| 결과 : 조선과 명의 승리.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으로 일본 측의 전군 이 귀국 [ 9 ] . | |
| 교전 세력 | |
| 지도자·지휘관 | |
총대장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카토 기요마사 코니시
쿠로다 나가마사, 모리 카츠노부, 모리 카츠나가, 시마즈 타다요시, 타카하시 전종, 아키즈키 종장, 이토 유우병, 소라장
나베시마 나오모, 나베지마 카츠 모
시마즈 요시히로
나가무네 아베 모토부모, 후지도 타카토라, 이케다 히데씨 , 가토 가아키, 내도 통총, 나카가와 히데나리, 스가 타츠 나가
하스카가정, 이코마 이치마사, 와키자카 안지
모리 히데모토, 우키타 히데야
그 외 | 명군 병부 상서邢玠( 총독 ) 도찰 원 우승 도 미사 양호 → 만세 덕 제독 마귀 왕왜 총 병관 부총병鄧子龍左협군 대장 이여매 조선 군도 원수권 경삼 도 수군 통제사 이순신 → 전균 → 이순신 전라 우수사 이억규 의병 대장 곽 재유 |
| 전력 | |
| 141,500명(노예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백성도 포함) [ 10 ] | (제설 있음) 명군 : 92,100 (삼로 전투시) [ 11 ] 조선군 84,500명 [ 4 ] -192,000명 [ 5 ] [ 5 ] 의병군: 22,400명 |
| 손해 | |
50,000명(문록·경장 양역의 총계) [ 주 6 ] (전사자는 약간이며 대부분이 병사·아사·동사.)
| 수십만명(조선군+명군. 문록·경장 양역 의 총계 ) [ 주 7 ] 100 만명 이상 [ 주 8 ] [ 주 9 ] [ 12 ] [ 13 ] [ 주 10 ] [ 14 ] ] 일본에 연행된 포로·노예 2만명~10만명 이상 [ 17 ] [ 18 ] [ 19 ] [ 20 ] |
분로쿠·게이 쵸의 역 (분로쿠 · 케이 쇼노 에키 ) 은 , 텐쇼 20 년 / 만력 20 년 / 선조 25 년 1597년 )의 강화 협상 결렬에 의해 재개되어 경장 3년/만력 26년/선조 31년 [ 주 11 ] 1598년 )의 타이코 도요토미 히데요시 의 죽음으로 일본군의 철수로 종결한 경장 의 역과 를 합친 전역 의 총칭 이다 ( 다른 명칭 에 대해서는 후절 을 참조 ) .
덧붙여 문록 원년에의 개원은 12월 8일 ( 그레고리오 달력 1593년 1월 10일 )에 행해졌기 때문에, 4 월 12일 의 부산 상륙으로 시작된 전역 초년의 대부분의 사건은, 엄밀히 말하면 천정 20년의 사건 이다 . )로 표기. ( )의 해는 기원 이다 .
일본 의 천하통일을 완수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명 제국 의 정복을 목표 로, 부하 의 서국의 여러 다이묘를 규합해 원정군을 시작 했다 . 한 수도·한성을 포기한 조선국왕 선조는 아키라의 원군을 바라보고 연합군에서 이에 저항 하려 했다 . 16세기 세계 최대 규모의 전쟁이었다고도 한다 [ 22 ] [ 주13 ] .
미결착 그대로 종식했기 때문에, 쓰시마 번은 위사를 이용해 독단으로 국교의 수리를 시도해 , 에도시대에 야나가와 일건 으로서 폭로되었다, 전역의 영향은, 명과 조선에는 쇠퇴의 원인이 되는 심각한 재정난을 남겨 도요토미가 에게도 무단파와 문치 파로 나뉘어 진 가신단의 내분을 가져왔기 때문에, 삼자삼님에게 피해를 입었지만, 서국 다이묘 중에는 다수의 노비를 데리고 돌아가는 등으로 대가를 얻은 다이묘도 있었다 .
이름
[ 편집 ]도요토미 정권 때부터 에도 시대 후기 당까지는 히데요시가 아키라의 정복을 목표로 하는 도상의 한반도 에서 행해진 전역 이기 때문에 '당진' 이나 '당어진'이라고 불리거나 '고려진 [ 주 14 ] ' 이나 '조선진' 등의 호칭이 사용되고 있었다. 히데요시 자신은 「당나라」라고 칭하고, 다른 동시대의 것으로서는 「대명에 미도자」[ 23 ] 라는 표현도 있었다.
「조선 정벌」이라는 표현도 역사적으로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어 에도 전기의 1659년 (초고 성립은 1644년경 [ 24 ] )에 간행된 호리 안보(호리 정의) 『 조선 정벌기 』에서 이미 볼 수 있다 . 반대의 입장이지만, 호조씨 나오토를 공격한 오다와라 정벌 이나 시마즈 요시히사를 공격한 규슈 정벌 등에서도 이용되고 있어, 조선이라며 코사라 비하 하지만 표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13세기에 일어난 원구 에서 몽고가 일본에 침공할 때, 속국의 고려가 주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부터, 한반도는 정벌 되어야 할 악인의 땅과의 사상도 퍼지고 있어 히데요시도 그 사상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 현재의 한국에 있어서도, 원편을 「 여몽의 일본 정벌 」이라고 부르고 있다 [ 25 ] . ] 가 정벌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고, 에도기의 그림책 타이코기나 메이지기의 그 밖의 역사 서적의 대부분에 있어서, 조선 정벌은 단순히 히데요시의 수많은 업적의 하나로 파악 되고 있었다 [ 23 ] . [ 주 15 ] 나, 에도 후기의 일본사 연구를 주도한 미토 학자 들이 히데요시가 사망하지 않으면 명나라 일본령이 되었다고 하는 생각이 영향을 주고 있어 [ 23 ] , 그의 행위는 칭찬에 비치해야 비판 의 대상 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치년 (1658년-1660년)에 편찬을 명령한 『정한록』이 먼저였고, 막부 말의 미토 학자 가와구치 쇼보 등도 『정한 위략』(1831년)을 저술했다.
「조선출병」의 호칭도 일찍부터, 전후에도 쇼와기에는 교과서 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었지만, 출병의 표현도 점차 피할 수 있게 되어 있다 [ 주16 ] 1960년대의 세상을 반영해 조선출병이 해외침략이었다는 것이 강하게 의식된 결과, 조선사회가 받은 피해에도 더 관심이 많아 '조선침략' [ 주 17 ] 이 활발하게 사용된 시기도 있다 [ 23 ] , '대륙 침공' 등의 표현도 등장했다 1980년대가 되면 사학에서는 다각적 분석이 주류가 되지만, 1990년대가 되면 한일의 문화교류가 해금되어 한국의 서적이 번역되는 등, 후술의 조선에서의 호칭도 일본의 서적에서 볼 수 있게 되어 용어는 다양화 최근의 한일 관계를 반영해, 교과서 등의 기술에는 상당히 변동이 있었던 것인데, 현재는, 제1차 출병을 「문록의 역」으로서 제2차 출병을 「경장의 역」으로 하고, 아울러 「문록·경장의 역」이라고 하는 호칭으로 정착하고 있다.
중국 에서는 '조선지역(조선역)'이라 불리지만, 후자는 조선전쟁(또는 조선에서의 전역)이라는 의미이며, 1950년 동명의 전쟁 이나 그 밖의 조선에서의 전쟁과 구별하는 의미로 근대 이후 당시의 원호인 만력 을 붙여 ' 만조 ' 일본에서 쓰는 말에 한문이 사용되고 있던 영향으로 「조선역」이라고 하는 호칭도 예전에는 사용되었지만, 이것은 이 중국어의 호칭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었다. '만조동정'이라는 호칭도 있다. 또 '만력일본역'이라는 호칭도 있었다고 하지만 전지를 전역명으로 하는 것이 관습이며 현재는 별로 사용되지 않는다.
한반도( 한국 · 북한 )에서는 이왕조 시대부터 이 전역도 소중화 사상 을 바탕으로 기존대로 왜란이라고 정의하고, 전란이 일어났을 때의 간지 를 잡고 문록의 역을 ' 임진왜란 ' [ 주 18 ] 이라고 부르며 경장의 역 을 ] 또는 '정유 재란' [ 주 20 ] 이라고 불렀다. 현재도 한국 에서는 이 왜란이 사용되고 있으며, 2개의 전역을 하나로 보고 임진왜란을 전쟁 전체의 총칭으로 사용하는 경우 도 있다 .
최근, 삼국의 자국사를 초극하는 것을 목적으로 행해진 한일중 공동 연구에서는 「임진 전쟁 」 이라고 하는 호칭 이 제창되었다 [ 22 ] . 다만 한국 에서는 ' 임진왜란 / 임진 왜亂' 가 아직도 일반적인 호칭으로 서적이나 신문, TV 등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
영어권에서는 " The War of Bunroku-Keicho [ 27 ] " " The Imjin War [ 27 ] [ 28 ] " " Japanese invasion of Korea [ 29 ] "나 " Japan's Korean War [ 30 ] "등의 명칭이 있지만, 이들은 각각이 기출.
배경
[ 편집 ]일조관계 전사
[ 편집 ]이웃나라인 일본과 한반도 사이에는 역사적으로 관계가 깊고, 전쟁이나 침략의 경험도 서로 갖고 있었다.
663년 에 당· 신라 연합군 과 야마토조정·백제 연합군 이 충돌한 시라무라 에 의 싸움이 있어, 야마토·백제측이 패배했다. 예, (몇 번이나 계획은 들렸지만) 일본 측에서는 수만에 이르는 대규모 출병은 문록의 역까지 약 천년간도 끊어지게 되었다 . 25 ] 한편 , 812년 부터 906년 까지 소규모 해적에 의한 신라 의 입 숙이 반복되어 997년 부터 1001 년 에 걸쳐 고려 해적에 의한 입 숙이 있었다 .
1224년 부터 5회에 걸쳐 고려의 김주 ( 현경상남도 김해시)와 거제도 등에 처음으로 왜인의 해적이 습격. 나중에 왜구 라고 불리는 해적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고려는 대재 부에 해적 단속을 요청했고, 소이직에 있던 무토자뢰는 대사 앞에서 해적 90명을 처형시켰다 [ 31 ] . 그 후, 몽골군의 침공을 받은 고려는 원래 항복 . 진도 나 제주도로 도망친 삼별초가 1271년 일본에 구원을 요구하지만 무시됐다.
1274년 과 1281년 에 전 이끄는 군세(몽골인, 남송인, 고려인)가 일본의 규슈 북부에 침공 하는 이른바 원대 가 있었다 . 여자·동자를 드러내고 노예로 하는 등 의 만행이 있었다 . 22 ] 라는 주장은 아즈치 모모야마 와 에도시대에 이미 말해진 것 같지만, 현대의 역사학에서는 왜구와 해적중의 실태로부터 생각하면 그 지적은 올바르지 않다는 것이 정설 이다 . 니시 쿠니 무사단이 바다에 활로를 요구한 것을 시작으로 무로마치 막부의 내분( 관응의 혼란 )에 의해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 규슈 탐제 이마가와 료슌이 남조 세력 을 내렸을 때에도, 한층 더 선단에서 해외로 탈출 하는 자가 늘어난 것으로 생각되고 있어 31 ] , 에도 말기의 『일본 방고략』에서도 왜구를 하고 「일본 넘치기」라고 정의하고 있었다 [ 35 ] .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관계
[ 편집 ]왜구의 습격에 겁을 주는 고려에서는 군비가 황폐해 만족에 싸우지 못하고 [ 35 ] , 왜인( 투화 왜인 )을 거제도나 난카이 현 등에 살게 해, 때로는 식량을 공급하는 것으로 진무하려고 했지만, 왜구는 거기를 새로운 출격지로 한 것만으로 해적 활동은 그만두지 않고, 이 정책은 완전 하게 실패한 것에 35 ] , 도망한 척척 · 재인 등 고려배민 등도 왜구의 측에 합류했다 [ 31 ] [ 주23 ] . 1375년 에는 가신단을 데리고 투하한 왜인의 후지 케이 미쓰루를 유살 하려 실패했고, 반대로 격렬한 보복을 받았다 . 1380년 에는 조선에서 진포대장과 격퇴가 칭찬 되는 왜구 500 척 [ 주 24 ] 의 대 습격 이 있었다 [ 31 ] . 25 ] .
고려가 멸망 조선을 대체하자 태조 이성계 는 일본에 금구를 요구했다. 1392년 남북조 합일을 완수하고 동란을 다스린 지 얼마 안된 아시카가 요시만은 일본측으로서 처음으로 이에 따라 이마가와 료슌 에 왜구 단속이 명령되었다 료슌은 한층 더 수호 다이묘 오우 치 요시히로에게 명령해 왜구 진압의 공적을 올렸다 조선측이 말하는 이키·쓰시마 정벌은 일본측에 기록이 없지만, 어쨌든 , 일조의 단속 강화에 의해 전기 왜구 는 감퇴 의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정)시에 이키·쓰시마를 경상도 관할하라고 주장, 보유선의 3분의 1 이상을 넘는 227척 1만 7천여의 대군세로, 이키·쓰시마를 침략 했다 21 ] 어쩌면 아키라의 영락제와의 관계가 뒤틀리고 있던 시기에, 장군 아시카가 요시유키 는 아키라가 조선과 연합 해 공격해 왔는지와 놀라, 교토에서는 세번째의 몽고습래라는 소문이 퍼져 큰 충격이 퍼졌다 [ 23 ] [ 35 ] 다행히, 이 외관은 종정성의 약간의 수세 에 의해 격퇴 되어 태풍 을 두려워 철퇴했다. 전기 왜구는, 명의 해금 , 감합 무역이 시작되는 등으로 1444년경에 거의 종식 했다 .
후기 왜구는 1511 년 포르투갈 이 말라카를 멸하고 동아시아에서의 교역을 시작해 1523년 닝보 의 난이 일어나는 등 감합무역이 끊어져 명왕조의 해금정책을 벗어난 중국인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다시 활발화 연구 했다 . ] 등을 기초로 하면 16세기 초 1501년부터 1525년경에는 명, 이조, 일본, 류큐, 동남아시아 국가의 환중국해 지역에서는 그때까지의 연합무역 등 조공형식의 명왕조 주도 무역이 아니라 해금정책에 반하는 비합법한 중국인 왜구 상인의 활동이나 사카이 와 하카타의 호상 등을 중심으로 한 네트워크가 구축되어 시프트해 갔다고 한다 .
그러나 조선에서도 1544년 에 후기 왜구에 의한 사량왜 변이 일어나 통교통제가 더욱 엄격해져 천황과 오우치 씨 · 소이 씨 의 사절 이외의 일조 통교가 금지됐다 . 1547 년 의 정 미약 조 이다 . , 일조간의 입장 은 아키라 와 쓰시마의 종씨를 통해서 복잡하게 얽혀 있어, 후의 문록의 역할의 원인의 하나가 된다.
가야제 의 시대의 무력에 의한 해금 정책의 엄격한 시행으로, 오히려 해외에 거점을 가지는 후기 왜구의 활동은 과격화해 최성기 가 되었다 . 1554년 6월에는 제주도 에서 당인과 왜인이 동승하는 배가 조선수군과 충돌하는 사건이 일어나, 1555 년 에는 을卯의 왜변이 있어 왜구가 명의 난징과 조선의 전라도를 침범 했다 . 1557 년 에 정준 약조 가 체결 되었다 .
일명관계 전사
[ 편집 ]1402년 아시카가 요시만은 교토 기타야마에 명사의 반례를 받아들여 건문제 의 책봉 을 수락 했다 . 책봉해 금인을 하사했다. 이후 1547년까지 150년간 19회에 이르는 송명선(勘合船)이 나와 감합무역이 교제 됐다 . 29 ] 라는 특이한 것이었다 [ 38 ] 요시 만은 책봉 의례도 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다음 4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지는 외교 방침을 재차 1411년에 책봉 관계는 단절 됐다 .
중조 관계 전사
[ 편집 ]몽골의 고려 침공 이래, 전 아침의 속령이었던 고려는 왕통이 몽골 귀족화하고 있었지만, 협영왕 의 대가 되어 홍건의 난으로 중국이 혼란한 것으로 원래의 통치가 약해져, 자립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 왕은 원래의 황후를 낸 기씨( 기황후 )의 세력을 숙청해 독립을 도모했지만, 왜구와 홍건군에 시달리고 국내외는 혼란. 성립 얼마 지나지 않은 명의 책봉을 받으려고 한 것이 이유로 쿄오오왕은 친원파에게 암살당했다. 고려는 일시적으로 북원 과의 관계를 부활시키지만, 이 내란을 억제한 무인 이성계가 , 1392년에 선양을 받고 주군 협 양왕 으로부터 왕위를 이어, 명의 홍무제 로부터 「조선」의 국호와 권지 고려 국사 의 호를 받고, 조선을 창시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2년 후에 구주를 포함한 고려의 왕통은 모두 살해당했다.
조선에서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1401년 에 명의 건문제로부터 제3대의 태종이 함명과 금인을 하사되어 중국에서 야생난의 이상이 있어, 1403년 에 영락제가 다시 한번 태종을 「조선국왕」으로서 봉해, 정식으로 책봉 체제에 들어갔다 . ] 의 아침공사절을 보내겠다는 1 년 3 공 [ 주 29 ] 을 실시 했다 .
이처럼 명의 소왕인 조선 국왕의 신하로서의 입장은 명확했고, 뒤에 히데요시가 명원정을 선도하라고 등을 시사한 것은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1591년 5월, 히데요시의 국서를 받은 조선( 후술 )에서는 종주국인 명에게 주문해야 할지 논의가 되었다. 시키는 것만으로, 파풍을 세우면 부정적이고, 주문 대신 성절사로 임명한 김응남에게 사정 을 설명하게 하기로 했다. 신이 통보하고 그것이 복건과 절강의 순무 라는 지방관료를 통해 정식 보고로 올려지고 있었다. 그래서 명은 조선이 일본과 공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안고 있었다.
아키라는 8월에 방문한 김응남의 설명에 만족해 조선절사를 위로해 은 2만량을 보냈다. 막문하는 문서가 같은 무렵 에 조선조정에 도착 해 그들은 경악했다. 39 ] 를 한응인 에게 갖게 급파했다. 그동안 9월에는 사쓰마의 재일명국인 의사 허의준 의 '이미 조선은 일본에 복속해 정명잠에 협력하려고 하고 있다' [ 40 ] ] 라는 쫓기는 보고가 밝고, 또 류큐 왕국에서도 사자가 와서 연주됐다.
1592년 정월경에 명의 조정에 진주문이 제출되어 재차 일조 교섭 의 경위를 자세하게 설명했지만, 조선통신사를 일본에 보낸 사실은 오로지 숨겨져 중국인에 의해 하는 통보 등은 조선에 대한 함고라고 비난할 뿐, 일본의 출병 계획을 큰 그것으로 허위라고 정리하고 있었다. 을 불식하기에는 이르지 않고, 전역이 일어난 뒤에도, 명의 아내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염은 깊어진 것이었다 요동의 명장들은 조선조정을 어려워 지휘권의 통일에도 반대하여 조선민중의 일본군 협력을 의심하고 조선에 대해서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40 ] .
조선의 내정
[ 편집 ]권위의 뒤 방패 를 명확히 요구한 이성계는 군사였던 정도전 의 진언으로 국내 를 불교를 숭배한 고려시대와는 일전하여 주자학을 국교 ] 로 하는 것으로 도덕질서가 있는 유교국가로서 번영시키려고 했다. 떨어지고 왕위를 빼앗은 이방원 뒤를 이은 세종 이후의 군주는 평화에 부심하고 유학사상을 극단적으로 신봉하게 됐지만 오히려 인신들 사이에 가장적 명분주의와 배타주의 가 만연 41 ] 한편 다툼은 멈추지 않았다. 관인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나 유학을 배워야 했지만, 서원마다 유생은 도당을 이루고, 관인이 되고 나서도 선배에 따라 정권 장악을 목표로 되어, 사무와 당쟁 이 시작 되었기 때문이다. 양반층)과의 싸움 다음에는 사림파에서 분열한 동 인파 (개혁)와 서인파 (보수)의 싸움이 있었고, 동서양파의 싸움 때 문록의 역이 시작되었지만 동인파는 더욱 남인파와 북인파로 분열하는 등 전시하에도 불구하고 일단 당파 는 42 ] 결과적으로는 조정의 질서는 흔히 흐트러지며, 왕과 후, 왕자, 외척, 중앙과 지방의 양반이 끊임없는 세력 싸움에 쏟아져 음모와 숙청을 수세기에 걸쳐서 혼란을 일으켰다.
이런 내분을 반복한 이씨 왕조에서 민심이 떨어져 있던 일본 측에 협력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정도였다는 내용의 설명은 루이스 프로이스의 저작 에서도 볼 수 있다 . 강학에는 매우 열심이었지만, 극단적으로 권위주의적이고, 종종 역린에 접해 가신에게 엄벌을 내리는 변덕스러운 왕으로, 정치에 질리며, 덕이 없고, 인민에게 선호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후의 양전역의 장에서 말하지만 몇 가지 치 명적인 판단의 잘못을 저질렀다. 이 때문에 조선의 사료에서조차 선조실록(25년 5월 조)에는 “인심 원한하고 왜와 동심”이라고 인정하고 선조가 “적병의 수, 중반이 우리 국인이지만, 그럴까”라고 신하에게 물었다고 기술되어 있어 왕도를 버리고 도망하는 왕에게는 민사를 잊고 후궁을 두껍게 하는 것을 제일 로 김공포 (寵姫仁嬪金씨의 형)를 중용했다고 비난이 모여 투석하는 백성이 끊임없이 위병도 이를 멈출 수 없었다고 한다 . 43 ] 또한 김성이 치의 『학봉집』에도 「왜녀 몇 번도 없고, 중반 은 반민, 극히 한심 미끄러지다」[ 44 ] 라는 설명이 있었다.
'임진전 난사'의 저자인 이병석에 따르면 조선이 '분당정치와 기강의 혼란, 사회제도의 폐해와 도의 관의 타락, 조신의 무능과 실천력의 미약성, 경 무사상과 안도한 혼식성, 사대사상 과 타력 의존성, 국방정책의 빈곤 등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 침략을 받는 간접적 요인이 되었다고 총괄한다 . 45 ] . 또 후술 하지만, 당시 한반도의 인구는 일본의14에 지나지 않았던 것도 유의하고 싶다.
동기에 관한 여러 설
[ 편집 ]히데요시가 아키라의 정복과 그에 앞서 조선 정벌, 즉 '당진'을 실시한 동기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여러 설이 있지만, 아무도 확증에는 이르지 못하고 [ 45 ] , 역사상 의 수수께끼 중 하나라고 말해지고 있다.





- 쓰루마츠 사망설(울분설)
1591년 (텐쇼 19년) 정월, 정명 의 원정 준비를 시작시킨 히데요시였지만, 그 직후(날짜 위에서는 2일 후)에 동생인 도요토미 히데 나가가 병사, 또한 8월에는 도요토미 츠루마츠 의 죽음이라는 불행이 잇따랐다. 히데요시는 잇따르는 신내의 죽음에 비탄에 살았지만, 그 극한에 이르고, 각자 자신의 출진과 명국을 은거의 땅으로 하는 결의를 새롭게 했다고, 히데요시와 동시대인의 귀족인 근위 신윤이『미이코인기』에서 기록하고 있다 [ 46 ] 정명의 결의를 공개적 으로 표명 한 것은 애식의 죽음 직후 였다 .『조선 정벌기』 등 다양한 서적에서도 다루어지고 있다. 요시가 그들의 사고에 어떻게 접했는지 는 별로) 이것을 동기와 직접 연결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점이 많다 . 45 ] .
- 공명심설(호전설/정복욕설)
원정동기를 히데요시의 공명심으로 하는 설의 근거는 히데요시가 조선에 보낸 국서에 '단지 가나를 삼국 에 현씨 만'이라고 단적으로 그 이유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 ] 가 욕심을 위해 출병하는 것은 ‘빈병’이며, 탓에 맡긴 ‘기병’이나 분노에 맡긴 ‘기병’이기도 했고, 천도에 등을 섰으나 고의 실패였다고 비판한 것을 시작으로 도의에 적합하지 않은 것이 자주 문제가 되었다고 도학자 의 도덕 하는 가치관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전과 전후에서도 극적 변화가 있어 동기와 평가를 맞추어 생각하는 경우는 영웅주의에 의한 찬미가 대의없는 전쟁이라는 비판으로 바뀐 것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 48 ] .
- 동란외전설
에도 후기 유학자인 요시야마 요도 도 국내 의 동란을 밖으로 돌리기 위한 전역이었다는 설을 주장해 유명했다 . 『일본 서교사』의 저자 장 클라세의 경우는 「타이코는 일본의 불평창이 반역해야 할 분편을 깨끗이 제거하지 않으려고 하고, 그 십오만인을 도해시켜라」배를 불러 ‘군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아, 기아 욕심에 빠지다 [ 49 ] 라고까지 세세하게 쓰고 있다. 그러나, 이 설의 모순은, 히데요시가 원정의 실패를 예기한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점이다. 가장 경계해야 할 대로는 출정 하지 않았다 . 45 ] , (패배주의적인 요리야마 요의 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소봉도 국내의 여러 다이묘에 “히데요시에 먹어 걸었는데 기개는 없었다”며 “가설의 설설, 즉 학자의 서재적 관견”이라고 완전 부정하고 있다 [ 50 ] .
- 영토확장설
급성장을 이룩해 온 도요토미가는, 제장의 봉록으로 하기 위해서 차례차례 새로운 영지의 획득을 필요로 했다고 하는 설은, 전국 다이묘로서는 당연한 것으로 당초보다 검증없이 받아들여져 왔다고 공명을 세우는 것과 영토 획득은 종종 같 라고 이 때문에 양설은 중복해 주장되는 일이 있지만, 역사학자 나카무라 에이타카 는 히데요시는 명성 불후에 잔씨 때문에 "당시 우리 나라에 알려진 동양의 국가를 치고, 한 나라로 하는 것을 종국의 희망으로 해외 경략의 계획은 진행되고 있었다" [ 51 ] 과 대제국 건설이 목적이라며 “정권 확립을 위해 지배체제 강화를 소령과 유통의 대외적 확대에 요구하고 동아시아 정복에 의한 해결을 목표로 했다” [ 45 ] 라고도 말했다 . ] 라고 서장 등으로부터 분석해, 제국왕이 제대 명과 같이 다루어진 것을 강조 . 이러한 견해는, 천하 통일의 달성이 일본 열도에 한정된다고 하는 현대의 국경 개념의 틀 안에서 생각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 감합무역설(통상무역설/해외무역진흥설)
히데요시의 전략은 가능한 한 평화적 수단으로 강복하도록 노력하고 그것을 따르지 않을 때만 정벌하는 것이었지만, 해외에서 명과의 교합 무역 의 부흥이나 통상무역 확대를 목표로 했을 때, 조선이 아키라와의 중개 요청을 거부한 것이, 조선 출병의 이유였다고 하는 설은, 일본사학자 다나카 요시나 리나 츠지 요시유키 조 , 카시와하라 마사조 등 많은 학자가 주창해 온 것이다. 라고 자주 비판을 받은 설이었던 것도 지적해야 하지만, 이 설의 문제점은 오히려 무역이 당초부터의 목적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근거가 얇다는 것이다.
역사학자의 다호교결 이「어떤 문서에도 감합이나 그 외의 무역에 대한 언급은 없다」[ 45 ] 라고 비판한 것처럼, 중요한 부분은 사료 가 아니라 상상을 기초로 하고 있다. 일명교섭에서 갑자기 등장한 감합무역 부활의 조건이 주된 논거가 되지만, 나카무라 에이타카가 “명국정복의 불가능함을 깨운 뒤 소기의 결과와는 별도로 고려된 것에 다름없다” [ 54 ] ] 라고 말했듯이 당초부터의 목적이었는지 의심스러운 데다, 히데요시가 만력제의 신하가 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감합」과 「책봉」의 의미를 히데요시 본인이 이해하고 있지 않았다고 하는 설 [ 38 ] 도 있고, 경장의 역의 재개 이유가 단순히 조공(감합 무역)이 인정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 남부 영유(사도 할양)의 거부에도 있었다면 이 설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지적 되었다 . 하나가 아니라고 주장해 이에 이의를 제기하고 대외영토의 확장도 대명무역독점 체제의 기획의 일부 라고 했다 . 45 ] .
- 국내 집권화설(한계없는 군역설)
국내의 통일이나 권력 집중 혹은 구조적 모순의 해결을 위한 외정이었다고 하는 설도 다수 존재하지만, 도요토미 정권의 통치 체제가 미완으로 끝났기 때문에 검증할 수 없는 것이 많은 것이 난점이다.
일본 사학자인 사사키 준노스케 의 말에 따르면 “전국 통일과 동시에 집권적 봉건 국가 체제 건설=무사의 계급적 정비·확립과 통일적인 지배 체제 완성에 노력해야 하며 통일적 지배 체제 완성 사업은 이 대륙 침략 과정에서 추진했다” [ ] 라고 지적했다. 마찬가지로 아사오 나오히로 도 가신단 내부의 대립분쟁을 회피하고, 그들을 통제하에 두기 위한 논리로서 '당국평정'이 나왔다고 하며 무사령 등 일본 국내 통제 정책 때에도 「일본의 의는 말할 수 없고, 당국까지도 상의를 얻어 후」라는 논법을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륙을 포함한 통합을 시야에 넣었다고 한다 [ 55 ] , 조선출병에 의한 군부역을 이용해 신분통제령을 부과하여 새로운 지배=예속의 관계를 설정했다고 논했다 [ 45 ] 시나이 마사유키 교수는 “대규모 해외 영토의 획득에 의해, 여러 다이묘 간의 분쟁을 정지시키고, 전 다이묘 및 팽창한 가신단을 통째로 통제하에 통합하려고 했다”고 논해,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는 필요 불가결한 것이었다고 주장 했다 [ 45 ] .
일본 사학자의 야마구치 케이지 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여러 다이묘에의 「한계없는 군역」의 부역이 불가피하고, 전쟁 상태를 전제로 하는 끝없는 군역이 통일 전쟁 종결 후 해외로 향하는 것도 필연적 동향이다"고 주장하고, "히데요시의 직신단은 소수의 일족, 자녀의 무장, 관료를 제외하면, 병농 분리 에 의해 재지성을 상실한 모임 아츠메의 일기조가 모여 군대를 구성하고 있어, 전공에 의한 은상의 기회를 요구하고 있었으므로, 도요토미씨 자체가 안쪽에서 끊임없이 대외침략을 지향해 국하의 외양대명을 통제하기 위해 그들을 항상 외정에 동원해 도요토미씨의 밑아래로 관리해 두어야 했다”고 설명했다 . 45 ] .
- 국내 통일책의 연장설
이는 통일이 군사적 정복과정이라는 기존 견해를 부정하는 점이 특징인 설로 역사학자의 후지키 쿠시 도 천하통일=평화를 목표로 하는 히데요시에게 소무사령 이야말로 전국통합의 기조였다고 해적금지령은 단순히 해민의 장악을 목표로 하는 국내정책 배권=바다의 평화령에 근거하고 있어, 모든 동아시아 외교의 기초로서 자리매김했다고 하며, 「국내 통일책 즉 소무사령의 확대를 꾀하는 일본측에 아마 외국의식은 없고, 또 패전 철퇴 후에도, 패배의 의식보다는 오히려 바다를 넘은 정벌의 [ 45 ] 라고 말했다. 대명정책은 감합의 부활, 즉 복속요구를 수반하지 않는 교역정책이지만, 조선·대만·필리핀·류큐에는 국내 소무사령의 반출이라 할 수 있는 복속안도책을 채택하는 등 외교정책은 중층 성이 존재해 히데요시는 “조선에 지위보전을 전제로 한 복속의례를 강제”하고 따르지 않기 때문에 출병했다 . 45 ] .
- 동아시아 신질서설
시로상에서 태어난 도요토미 정권은 기존의 동아시아의 질서를 파괴하는 존재였다고 하는 설. 라고 싸운 닛신 전쟁 의 전사처럼 파악하는 것으로, 메이지 시대 전후에 지지 를 얻었다 . 38 ] 이며, 기본적인 사실에 반하는 점이 있었다. 사료로부터 히데요시 자신이 아시카가 요시만과 같이 망유례를 행했다고 충분히 판단할 수 있고, 사학적으로는 히데요시가 의도하여 책봉 체제와 무너뜨리려 했다는 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좋다.
그러나 한편으로 16세기와 17세기 동아시아에서 명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교역질서의 해체에 의해 가열된 상업붐이 일어나 이 시기에 주변지역에서 교역의 이익을 기반으로 대두한 신흥군사세력의 등장을 필연 그러면서 군사 충돌은 이 「왜구적 상황」이 낳았다는 기시모토 미오 교수나, 「전국 동란을 이기지 못하고 천하인이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보다 큰 자신감과 자존 의식을 가지고, 국제 사회에 임한 것은, 당연하게 되어 버린다」[ 45 ] 라는 무라이 쇼스케 명예 교수 등 히데요시가 책봉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관계없이 통일국가 일본이 탄생한 것 자체가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에 변동을 촉구한 요인이었다는 동아시아사의 지적도 있다는 비판 [ 45 ] ] 도 있지만, 동기와는 다르지만 세계사 속에서의 자리매김이라는 관점에서 이 설은 일정한 의미를 가진다.
또, 케네스·스오프 미 볼 주립 대학 준교수(현·남 미시시피 대학 교수)가 「일본과 조선간의 전쟁이라고 하는 견해는 그만두어야 한다」로서 「명(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지배 체제・질서에 히데요시의 도전. 이것은 일본과 중국의 전쟁 이다 . 13 ] 지정 학적 견지에서 일중 충돌의 필연성으로 설명하는 학자도 있었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동양사학자의 신궁학은 히데요시가 말했다고 하는 『도요 섬 삼국 처치 태하계계』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히데요시의 발상은 완전한 명의 책봉 체제의 재구성(종래의 동아시아의 질서의 계승)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자세한 것은 후술) [ 56 ] .
- 기독교 제후 배척설
루이스 플로이스 와 장 클라세, '동방 전도사'의 루이스 드 구스만 등 동시대 선교사들이 주장한 설에서 “기독(그리스도 ) 신자의 용을 두려워해를 멸할 수 없는 것을 모시고, 전투의 용도에 충당하고 전사하지 말라고 하고, 젊은 지나를 장악하면 기독 신자를 속여 지나에 이주시키면 [ 57 ] 과 히데요시가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전역이 배틀렌 추방령이나 그리스도탄 탄압과 겹쳐, 같은 시기에 필리핀이나 인도에 뻗어 있던 히데요시의 외교가 그들의 눈에는 기독교 세계 전체에 대한 공격과 비춰졌을 가능성은 있지만, 코니시 행장을 필두로 그리스도인 다이묘는 배척되지 않았고, 그러한 사실은 없었다 [ 58 동란 외 전설과 비슷하지만 배척 대상이 기독교인에게 한정되어 있는 곳에 특색이 있다.
- 元寇 복수설
히데요시가 원대 의 복수전으로서 문록 게이쵸의 역을 일으켰다는 설은, 츠지요시노스케가 「공막하는 설」[ 45 ] 라고 일축하고 있어, 사실과는 멀어진 것이다. 그러나, 특히 근거가 없는 속설의 종류라고 해도, 조선의 서적에 있어서도 교섭 당사자였던 경관 현수가 언급하고 있던 것이 기록되고 있어, 믿는 사람은 당시부터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이외에도 다이묘나 무사 사이에서도 소문에 있어, 이 당시는 아니지만 거슬러 올라가 노부나가가 토벌하고 아케치를 토벌하면 권력을 장악했을 때, 예상할 수 없었던 노부나가의 죽음이라는 슬픔과 혼란 속에서, 우선 앞으로 나라를 어떻게 할까 먼저 취해야 할 문제로서 외국으로부터의 침략 대책의 문제에 먼저 닿아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어 「일본은 이전 외국으로부터 나라의 존멸에 관련된 큰 공격을 받은 것(즉 원재의 뜻)으로부터, 그것을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오는 날도 오는 날도 고민하고 있었다는 측근의 기록이 남아 있다. 평생 그 밖에는 거의 가지 않고 만년이 되어 해당하는 그대로 실행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 출병은 처음부터 그 미래의 구상을 세우고 있어 인생의 마지막에 그것을 실행했을 가능성이나 영향을 받은 하나의 이유라고도 생각된다.
- 조선속 국설(히데요시 변호설)
이단의 유학자 야마가 소행이 주장한 것으로, 신공황후의 무렵보다 「범조선은 오늘 아침의 속국 번병」이기 때문에 순종하지 않는 조선을 정벌하고 「오늘의 무위를 이역으로 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하는 것 [ 공명심설(호전설)이 도의적 비판을 받은 반발에서 태어난 유자적 논법이지만, 동기와 원인이라기보다 단순한 칭찬이며, 게다가 조선정 벌은 본래의 목적이 아니라 히데요시에 고대의 지식이 있었을지도 의심스럽다고, 국가주의자의 소소조차 「자랑하는 이굴을 맞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60 ] 이라고 평가했다.
원인
[ 편집 ]히데요시의 당국 평정 구상
[ 편집 ]
히데요시는 일본 의 통일을 완성시키는 것보다 상당히 전부터 해외 침공 계획을 안고 있었다. 이것은 히데요시가 섬긴 오다 노부나가 의 시나 정복 구상 ] 를 이어받는 것이었다고 널리 믿어지고 있지만, 실은 이 설은 근거가 부족하다. 『조선통교대기』에 나타나는 아키라와의 무역을 열려고 통교의 알선을 조선에 중개를 의뢰한 자(우무위전)를 노부나가라고 하는 것은 인물 오인 이며 61 ] , 이것을 바탕으로 노부나가의 유책을 히데요시가 계승했다는 설 [ 62 ]이 한때 있었지만, 그것은 후지가 맞지 않는 [ 61 ] 이므로, 노부나가의 영향에 대해서는 상상의 역을 나오지 않는다.
텐쇼 5년(1577년) 10월, 노부나가로부터 하리마 정벌을 명령받은 히데요시가 “중국 정벌 뒤에는 규슈를 퇴치하고, 나아가서 조선을 따르고, 명을 정벌하는 허가를 청했다”는 유명한 일화 [ 63 ] [ 64] ] 는 호리정의가 '조선 정벌기'에 실려 에도시대부터 널리 믿어지고 있어 원전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사실이라고는 명언할 수 없지만 어떠한 유래가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히데요시 본인이 해외 진출의 구상을 안고 있던 것을 나타내는 사료는, 텐쇼 13년( 1585년 ) 이후 의 것에 존재 해 , 사학적으로는 1585년이 외정 계획을 품은 처음일 것으로 여겨진다 [ 45 ] 관백 취임 직후 의 같은 해 9 월 3 일 , 육아의 직신 이치야나기시 스케(나가모리의 형)의 서장으로 「일본국 은 말하는 것에 가리지 않고, 당국까지 말씀해져 후심에 후인가」라고 하는 기술이 그것이다 [ 55 ] .
텐쇼 14년(1586년) 3월 [ 55 ] 에는 '일본 서교사'에 따르면 예수회 준관 구장 가스펄 코에료에 대해 국내 평정 후에 는 일본을 동생 수장에게 양보하고 당국의 정복으로 옮길 예정이기 때문에 그 때문에 새롭게 2,000척의 배 건조시키는 것으로 한 뒤, 견고한 포르투갈의 대형 군함을 2척 갖고 싶으니까, 매각을 알선해 주겠다고 의뢰해, 정복이 잘 가면 중국에서도 기독교의 포교를 허가한다고 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 66 ] [ 67 ] .
같은 해 4월 모리키 모토에 대한 주인장 14개조 중 '고려미도해사'라는 곳에서 외정 계획을 선보이며 6월 쓰시마 종의조로의 귀순 을 촉구 하는 서장에서도 규슈 가 끝나자마자 고려정벌을 결행한다고 예고했다 [ 65 ] 또 8월 5일의 안쿠쿠지 에쿠 와 쿠로다 타카타카 에 대한 주인장에서도 규슈 정벌 뒤의 '당국' 붙어도 사태가 있었다고 기술이 있었다 [ 69 ] .
텐쇼 15년(1587년)이 되면 등장 빈도는 늘어나 , 이야기 도 서서히 구체화 했다 . ] 라고 말하고 와카를 소망. 하늘의 메구미는 고려백제까지”라고 읊어져, 매우 마음에 들었다는 사건이 있었다. “카라라이 나라에 어린 시유츠카(가시)의 쿠니모세 히하이 신청 후 그대로”라고 적고, 규슈 평정의 연장으로서 고려(조선) 평정의 의향도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 70 ] 6월 1일자로 혼간지 현여로 향한 주인장 속에도 「아아사노각후간 고려국왕 가 참내후지 피앙견후」라고 적고 있다 [ 71 ] .
묘 만지 문서(5월 29일자)에 따르면, 히데요시는 북정소 에 보낸 편지로, 이키 쓰시마에 인질을 찾아 출사를 명령한 것 뿐만 아니라, 조선에 입공을 요구해 서장을 낸 것, 당국까지 손에 넣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 72 ] 고바야카와 문서에 의하면, 10월 14일자의 히고 국인 일규 후의 사사 세이마사 의 처벌에 대해, 「당남만국까지도 순종하고 싶은 것에 의해, 규슈와 같이는 고키우치 동전에 평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히데요시가 말했다 [ 73 ] 라고 한다.
히데요시의 당국평정계획은 장기적으로 순차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게다가 일본통일의 과정과 수단과 방법이 동일했고, 제국왕을 제대명과 동렬로 취급한 것에 특색과 일관성이 있었다 . 규슈 정벌 뒤에 일조 교섭은 시작되었고, 츠루마츠의 탄생이나 오다와라 정벌, 대불 건립 등에서 중단은 있었지만, 이후에는 더 이상 원정은 단순한 구상이 아니었다 .
텐쇼 20년(1592년) 6월, 이미 조선을 병권선이 기세였을 때, 모리가문서 및 나베시마가문서에는 “처녀 때 대명국을 주벌해야 하는 것은 , 산의 달걀을 압하듯이 있어야 할 것 같다 . 55 ] [ 74 ] 하지만 그것은 과대 망상 등이 아니라 계획 이 있었던 것이다.
일조 협상의 결렬
[ 편집 ]정명 능도
[ 편집 ]텐쇼 15년(1587년) 5월 초순, 사쓰마강내 에 재진중에(이미 히데요시에 귀순하고 있던) 종 의 조의 사자로서 사스 케이만 [ 주 36 ] 와 가신의 야나가와 조신 , 유야 야스히로 의 3명이 와서, 히데요시에게 배모를 소원했다. 할 수 없는가 라고 청원에 온 것이다. 그러나, 규슈 정벌을 이룬 히데요시는, 다음은 류큐, 조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들어들이지 않았을 뿐, 조선 국왕 스스로가 입조할 것을 요구해 68 ] , 그것이 없는 경우는 정벌한다고 했다 [ 주 37 ] 그리고 그들 종씨를 조선과의 협상역에 명령해, 입조를 알선시키는 임무 를 줬다 . 이렇게 엄명했다. 이렇게 씨에게 강한 태도에 나선 배경으로는 류큐가 시마즈에 종속된 것처럼 조선도 쓰시마에 종속되어 있다고 히데요시가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75 ] 루이스 플로이스도 “조선은 연간 공물로서 미국 1만만을 쓰시마 국주에게 납입하고 있었다”고 쓰고 있으며, 이러한 인식은 히데요시에 머물지 않고 당시의 일반적인 것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 40 ] . 그런데 실제로는 이 쌀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측으로부터 왜구 방지를 위해 하방되는 세적미로, 양도 불과 100석에 불과해, 쓰시마 ·종씨는 조선 무역에 경제를 의존하고 있고, 반대로 종속적인 입장이며, 대외적으로는 거짓말을 뱉고 있었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전술한 바와 같이 위사 를 이용해 고생해 조선과의 관계를 수복한 곳이었다.
9월, 종씨는 유야야스히로를 일본국왕의 위사(타치바나 야스히로)로서 도해시켜,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을 말한 뒤, 신국왕이 된 히데요시를 축하하는 통신사 의 파견을 조선측에 요청했다. 아침 대신으로 사태를 거두자는 배려였지만 조선측은 서한의 문언이 오만하다고 주장하며 주자학에 굳어진 선조도 “지금까지의 국왕을 폐지하고 신왕을 세운 일본은 철탈의 나라” [ 76 ] [ 주 38 ] 대의 를 사서 돌려 달라고 명령 했다. 그것을 받은 장관 들은 " 화 외의 나라 에는 예의 에 따라 " ] 에 의하면, 보고를 받은 히데요시는 격노하고, 협상 실패는 배신의 결과인 것으로 유자야 야스히로를 일족 모두 처형했다고 한다 [ 76 ] .
기한을 넘어도 1년간 진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텐쇼 17년(1589년) 3월, 히데요시는 조선 국왕 지참을 비난해, 입조의 알선을 다시 종의 토모 [ 주 41 ] 에 명령했다. 6월 요시치는 하카타 세이후쿠지 의 외교 승경 현현소를 정사로 스스로 부사가 되어 가신 야나가와 조신과 하카타 호상 시마이 무네무로 등 25명을 데리고 조선으로 건너갔다. 한성부 에서 조선국왕에게 배모한 일행은 거듭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했고, 종의치는 스스로 물 앞안내인을 맡을 때까지 제의했다. 그런데 조선 측은 먼저 성의를 보이라고 몇 년 전에 왜구가 일으킨 사건을 꺼내 쓰시마로 도망했다고 의심되는 조선인의 반민 사사 배동인 인물의 인도를 요구했다. 요시토모도 이에 응하고 곧바로 야나가와 조신을 쓰시마에 돌려, 사을 배동과 수명의 왜구를 포박해 연행 ( 주 42 ) 시켰기 때문에, 거절할 이유가 없어진 조선측은 마침내 통신사의 파견에 응했다. 반례에 종의 치는 공작 과 화승총 [ 주 43 ] 을 헌상했다.

의 히데요시의 정청이었던 사쿠라제
텐쇼 18년(1590년) 3월에 한성부를 발한 통신사는 정사에 서인파 황정길 , 부사에게 동인파 김성일 , 서장관 허봉( 허가 의 형) 외 관악중 50여명이라는 구성으로 4월 29일 부산에서 쓰시마에 걸쳐 체류 1개월했다. 이 때 김성이치가 연석에轎(駕籠)을 타고 나중에 온 종의지를 무례하게 화나게 했기 때문에 사죄에 갓오를 참수로 한다는 사건이 있었다 [ 78 ] . 교토에 도착한 것은 7월 하순으로, 대덕사를 숙소로 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정벌과 오슈 마무리 때문에 9월 1일까지 부재했고 개선 후 잠시 방치됐다.
11월 7일이 되어 드디어 히데요시는 순락제로 인견 했지만, 요시토모와 그 칸코니시 행장이 공모해 통신사는 복속 사절이라고 거짓말해 설명해, 히데요시는 조선은 일본에 귀복한 것이라고 생각 하고 있었던 것 같다 [ 77 ] [ 79 ] 그래서 히데요시는 정해진 의례도 거의 행하지 않고, 국서와 선물( 입공 )을 받은 것만으로 만족해, 중자해 아카코의 츠루마츠 를 안고 다시 나타나, 사자 앞에서 소변을 새는 우리 아이를 웃으며, 시종상 기분이었다. 라고 받아 분개했지만, 정사와 부사에게는 각각 은 400량, 그 외의 수원에게도 포상의 물건들이 나뉘어 주어, 공이 노려졌다 물론 대답의 준비도 없고, 의례에 반하면 통신사가 항의한 뒤, 승록서 웃음 승리 가 일어났다 .
그 내용은 히데요시 스스로는 ‘일륜의 아이’라는 감생제설을 선보여 제왕에게 적합한 인물이라고 주장한 데다 대명국을 정복하고 일본의 풍속이나 문화를 미래 영구에 중국에 심는다는 큰 포부를 말하며 앞서 아침”한 조선을 평가해 안도를 약 하는 한편, “정명 준도” 즉 명원 정군을 선도를 하는 것을 명령해, 응한다면 맹약은 보다 강고하게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모두는 “다만 가명을 삼국 에 현씨만”이라고 히데요시 개인의 공 명심을 과시하고 있었다. 문장을 일독한 통신사는 속국 취급에 경악하고 종의지와 현소에 항의했다. 아침」의 문자의 재기록을 요구해 먹었지만, 이미 한시라도 빨리 귀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황안길은 그대로 출립했다.
가도 입명
[ 편집 ]텐쇼 19 년 ( 1591년) 3 월 통신사 는 조선 국왕 에게 보고 했다 . 황윤길이 “반드시 병사 아란”이라고 전쟁이 절박하고 있는 사실을 경고했지만, 대항심을 드러내는 김성일이 엄청나다고 옆을 넣어 [ 주 45 ] , 전부정해 논란이 되었다. 야나나리 류가 같은 동 인파의 김성일 을 옹호 해 그의 의견이 올바르게 되어, 황정길의 보고는 무시되었다. 인사의 변화와 약간의 경계의 처치는 취해졌지만, 대일 전쟁의 준비 는 거의 행해지지 않았다 .
현소와 야나가와 조신 [ 주 46 ] 이 도 헤이칸 에 체류 중, 선위사(접대역) 우억령 등은 일본의 정세를 들으려고 연회를 마련했다. 그러자 (히데요시가 아니라 무네씨의 의향을 터짐) 조선이 먼저 (이것을) 주문해 조공의 길을 열어준다면 분명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 83 ] [ 84 ] 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주자학의 정의에 맞지 않기 때문에 김성일은 대의를 뒤엎는다고 비판해 논란이 되었다. 현소는 "옛날 고려가 원래 병사를 선도하고 일본을 공격했다. 일본이 이 원한을 조선에 보답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83 ] [ 84 ] 라고 뜨거워져 반발했기 때문에 조선 측은 이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 83 ] . 5월 조선조정은 “일본은 토모우의 나라로, 대명은 군부이다”며 가도 입명 요구를 거부하고, 종씨가 따로 요구한 사이포와 감포 개항도 거부했다. 현소와 조신은 국서를 손에 쓰시마로 돌아왔다 [ 85 ] [ 86 ] [ 87 ] [ 88 ] .
같은 해 6월, 현소의 복명을 받자마자 종의치는 다시 도해해, 부산 의 변장에 대해 “일본은 대명과 국교를 통하고 싶다.만약 조선이 이 일을 (명하게) 연주해 주면 매우 다행이지만,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양국은 평화는 깨질 것이다”라고 경고를 발하고, 재교섭을 요망했다. 언동을 포기하고, 히데요시의 국서의 오만 무례함을 분노하고 있었던 곳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았다. 요시토모는 10일간 기다렸다. 이후 일본과의 통신 은 끊겼다 . 85 ] [ 89 ] .
한반도 경유 이유
[ 편집 ]히데요시가 당국평정계획을 목표로 하면서 직접 밝히지 않고, 그 첫걸음으로서 당초보다 조선에 압력을 가해 귀복이나 군의 통과를 용서할지의 선택을 강요하려고 한 이유의 하나로서 일본의 항법이 에도시대가 되고 나서도 「지승항법(연안항법) '이었던 것이 설명으로 꼽힌다. '산 맞대기'라 불리는 주위 경치의 겹침 상태에서 자신의 위치를 아는 방법이 주류였기 때문에, 선단이 연안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는 것은 위험했고, 망설이면서 대양을 횡단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일본 수군은, 규슈 북부의 히젠 나고야(현 가라쓰시 와 겐카이초 ) 등에서 출항해, 이키( 카츠모토 )→쓰시마 남부( 엄원 )→쓰시마 북부(오우라)→ 부산 과 차례차례 나아가 해협을 횡단 해 , 한반도 남부 연안을 서쪽으로 북상하는 90 ] 최단 경로에서 벗어난 제주도 는 무시되었다.
준비
[ 편집 ]
텐쇼 19년 1월 20일, 히데요시는 (명의) 원정 준비를 시동했다. 오후나 2종을 준비하도록 명령하고, 미나토마치는 집 백채당 10명의 수주(카코)를 내는 것, 자신의 창고 입지 (치쿠마에·섭진·가와치·이즈미에 집중)에는 10 만석에 대해 대선 3개, 중선 5개를 건설하는 것, 건설비는 반액을 봉행보다 지출, 잔액은 준공 위에서 교부한다고 했다. 되는 처자에게도 급금을 주는 것을 약속했고, 선두는 급미를 주고 후우한다고 했다 . 91 ] 또한 대선의 크기는 길이 18간(33미터)으로 폭 6간(11미터)으로 정해져 있었다.
같은 해 말에 군용군 자금으로 통화를 대량으로 생산시켰다. 금화는 꽃무늬가 있기 때문에太閤花降金이라고 칭하고, 은화는 꽃강 은 이라고도 이시미은이라고도 불렸다. 양식미는 48만 명이 집적돼 질도 상응 하게 준비됐다. 각지의 가도와 다리의 정비 수복도 명령되었다 [ 92 ] .
또 조선의 지도가 제작되어 팔도 를 오색으로 칠하고, 경상도를 백국, 전라도 를 적국, 충청도 · 경기도 를 청국 , 강원도 · 평안도를 황국, 함경도 를 흑국 , 황해도 를 녹국으로 명명하고, 제장에게 나누었다 [ 93 ] .
나고야 성 축조
[ 편집 ]텐쇼 19년 8월 23일 , 히데요시가 '당나라'라고 칭하는 정명 원정의 불퇴전의 결의가 다시 한번 제다 이름 에 발표 되었다 . 94 ] [ 주 47 ] 이 때문에 히데야는 나중에 히데요시의 명대로서 총대장을 맡기게 된다. 원정을 위해 나라를 꼽아 출사의 준비를 더욱 서두르도록 촉구 됐다 .
히데요시 는 원정군의 숙영지로 나고야성 축조 를 지시 했다 .
나고야성의 건설 예정지는 하타 씨의 영토에서 플로이스가 「모든 사람 손이 부족한 황무지」라고 평가한 [ 95 ] 장소였지만, 완성된 나고야성에는 전국보다 다이묘중이 집결해, 「들도 산도 비어 있는 곳이 없다」라고 미토의 히라츠카 타키토시가 9장 에 기록했다 ] 정도 활황을 나타내고, 당나라의 기간은 일본의 정치 경제의 중심이 되었다 [ 96 ] .
마지막 통제
[ 편집 ]새해 텐쇼 20년(1592년) 정월, 총 21군(대) [ 97 ] [ 98 ] 로 나뉘어진 약 30만이 되는 정명군의 편성이 시작됐다. 라고 계획은 급히, 정지를 강요당했다. 이것은 그들이 조선 통신사가 온 것만으로 조선이 입조했다(귀복했다)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을 추진하고 있었던 것을, 히데요시가 도외시해 명정복을 실행에 옮기려고 했기 때문에, 불안해졌기 때문이었다.
행장은 거짓말을 잡기 위해 귀복한 조선이 변심했다고 새로운 거짓말로 설명하고, 정명군에게 길과 성을 빌려주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고 말한 것 같다 [ 79 ] 조선교섭의 부수미에 면목을 잃은 행장이지만, 책임은 조선측에 전가하고 평복하고 마지막 교섭과 상대가 따르지 않는 경우에는 스스로 선봉을 맡기를 바란다. 까지 모습을 확인해 복명하도록 지시.만약 조선이 따르지 않으면 4월 1일이 되면(우선 조선에서) '퇴치 있을 수 있는'이라고 출정 개시의 호령이 나왔다.
히데요시가 부하의 장에게 전달한 문서에 「고려국의 미사」로서 양명이 파견된 것은 확인할 수 있지만, 1월부터 3월 말까지의 사이, 다시 현소를 파견한 이외는 특히 행동한 모습은 없고, 행장 라고 의지는 조선에는 부탁하지 않았다 . 79 ] .
2월 27일, 교토에서 히데요시는 동국세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어 이에야스의 수세가 적은 것을 분노 불편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이것이 속설로서도 출진의 연기가 계속되어 사람들은 불안 히데요시가 길일인 3월 1일에 출진의 의를 할 생각이었지만, 눈병을 앓고 연기했다. 령이 발표되어 일본군의 선구중이 9대에 재편성되는 진립이 새롭게 나타났다 . 를 출립했다.이동안도 제1군(대)은 3월 12일에 이키에서 쓰시마로 이동해, 후속도 도해를 개시.
반면, 마지막 통제의 역할을 담당한 현소는 다시 한번 조선국왕이 입조하여 복속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조선이 정명군의 통과를 허가하도록 협력을 협상하고 있었지만, 조선측의 대답은 요령을 얻지 못했다 [ 99 ] . 이미 기일이 지난 4월 7일, 현소는 쓰시마에 귀환해 조선측의 거절의 의지를 전했다 [ 100 ] .
도중, 완만하게 이쓰 쿠시마 신사 에 참배해, 모리씨의 접대를 받고 있던 히데요시의 대행렬이 나고야성에 착진한 것은, 이미 전단이 끊어진 후의 4월 25일이었다.
일본군 진립
[ 편집 ]
텐쇼 20년 3월 15일, 군역의 동원이 명령되어 제국 다이묘로 시코쿠·규슈는 1만석에 600명, 중국·기이는 500명, 고키우치는 400명, 오미·오와리·미노·이세의 시카쿠니는 3 50명, 토에·미카와·스루가·이즈까지는 300명으로 그것보다 동쪽은 200명, 와카사 이북·노토는 300명, 에치고·데와는 200명으로 정해, 12월까지 오사카에 집결하라고 호령 되었다 91 ] 그러나 이러한 군역의 할당은 일률적이지 않고 개별 대명의 사정에 의해 감면 되었다 .
주로 서일본 방면( 서해도 , 난카이도 , 산인도 , 산양도 )에서는 전면적 으로 병사가 동원되었지만, 동일본 방면(기내이동 ) 에서는 동원수가 줄어들 었다 .
병사는 제후의 이시다카의 대소 에 비례하여 동원되었기 때문에 수만명을 내는 대신자부터 수백명을 내는 소신자까지 다양하며, 이들을 조합하여 일대가 편성되어 주로 그 중 대 신자를 지휘자로 삼았다. 또 도요토미 보시대의 제후가 외양의 제후를 지휘하기로 했다 . 103 ] .
전체적으로는 개산으로 나고야 체류가 10만, 조선 출정이 16만~20만이 되었다. 다만, 이 숫자에는 인부(수졸)나 미즈오(수주) 등의 비전투원(보조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비전투원의 비율은 각대에서 마을이었고, 문록의 역에 있어서 시마즈세에서는 약 4할이었고 [ 주 48 ] 이, 타치바나세에서는 약 5할로, 고토세에서는 약 7할에 이르렀다 [ 104 ] . 덧붙여 비전투원으로부터 병원에게 전용되었다고 하는 기술이 나중에 나오기 때문에, 이것들이 완전하게 전투에 관여하지 않은 것은 아닌 것 같다.
당시 일본 전국의 총석 높이는 약 2000만석이며, 1만석당 250명의 병사가 동원 가능하게 했을 경우, 일본의 총병력은 약 50만명이었다 [ 105 ] 문록의 역으로 동원된 25만~30만의 병수는 일본의 총병력 의 약 반분 정도 였다 .
군의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각주가 없는 숫자는 주로 모리가문서 [ 106 ] [ 107 ] [ 108 ] 와 마츠우라 고사기 [ 109] ] 에 의한다 실제로 출진한 것을 알고 있는 무장 중에 표기가 없는 것이 모리가문서는 분명히 생략되어 있어 7번대 이후나 나고야 재진중(기본 포함)은 보다 상세한 마츠우라 고사 기를 참고로 했다. ] 까지는 순차적으로 출립했지만, 우키타 히데야보다 후의 부대는 전황에 맞추어 출진하고 있어 차례도 달라, 대로서 행동하고 있던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번대, 혹은 다테나 사타케 등 재진중으로부터의 증원도 있었다. 도해 시기의 잘 모르는 부대도 있다.
일본 수군의 규모는 9천명에서 1만명 정도였다 [ 110 ] [ 111 ] [ 112 ] 육상 부대의 숫자 속에도 약간의 수군중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그들을 포함해도 수군의 총수는 많아도 약 1만 수천명 정도로, 그 주력은 아와지 수군과 기이수군이었다(내도계 이외의 무라카미 수군은 코바야카와·모리대 안에 포함된다).
- 일본군
- 통감군·총계 101,315명 [ 주 49 ] (나고야 성체진)
- 기모토 · 총 27,695명
- 전비중·합계 5,740명 [ 113 ]
- 아카마츠 노리보 …200명
- 타키가와 유우리(하 시바시타 총수) … 300명
- 궁철포중·총 1,755명 [ 113 ]
- 이토 나가히로 …250명
- 미야베 후지 사에몬위…130명
- 이쿠마나가 승 … 250명
- 하 시바 노부히데(오다 노부히데) … 300명
- 장속정가 … 500명
- 후루다 오리베 마사 … 130명
- 야마자키 정승 …250명
- 카마타 히로세키 …200명
- 나카에 나오스미 …170명
- 이코마 수리 료 [ 주 50 ] … 130 명
- 예비군
- 재진중·총 73,620명 [ 116 ]
- 제1군 “조선국 선구세”(나고야에서 출격)
- 이치반대・총 18,700명
- 오무라 기젠 …1,000명
- 고토 준겐 (우쿠 준겐) ... 700 명 (수주 포함)
- 2번대 ·합계 22,800명(총 20,800명 [ 118 ] )
- 相良長마다(요리보) … 800명
- 3번대 총 11,000명(합계 12,000명 [ 118 ] )
- 오토모 요시히로(요시츠네) … 6,000명
- 4번대 총 14,000명
- 모리 카츠노부(모리 요시나리) … 2,000명
- 시마즈 요시히로…10,000명(류큐 여력)
- 5번대 총 25,100명
- 이코마 친정 …5,500명
- 쿠리시마 도리유키(토시이 도리유키) 와 쿠리시마 도리 유키…700명(수군)
- 6번대 총 15,700명
- 고바야카와 타카케이 …10,000명( 안코쿠지 에쿠 타 외)
- 코바야카와 히데포 …1,500명
- 타치바나 진호 (종모) … 2,500명
- 다카하시 통증 …800명
- 제2군 “조선 국도표 출세중”
- 카토 미 츠요시 … 1,000명
- 아사노 유키나가 …3,000명
- 미야베 나가사키 …1,000명(2,000명 [ 98 ] )
- 난조 모토키요 …1,500명
- 키노시타 중견(아라키 중견) … 850명
- 가키야 항소 …400명
- 사이 무라 마사히로 …800명
- 아카시 노리미 … 800명
- 벳쇼 요시지 …500명
- 나카가와 히데마사 …3,000명
- 이나바 사다도리 …1,400명
- 핫토리 춘안 …800명
- 이치 야나기 가유 (이치 야나기 우근) ... 400 명
- 9 번대 총 25,470명
- 도요토미 히데카츠 / 오다 히데노부 [ 주 57 ] …8,000명 나가오카 타다오키(호소카와 타다오키) …3,500명 (이키에서 대기)
- 하세가와 히데 이치 (하 시바토 고로) ... 5,000 명
- 기무라 시게나기 …3,500명(3,000명 [ 98 ] )
- 오타 이치요시 (군목 첨부)…120명(160명 [ 98 ] )
- 마키무라 리사다(마사요시) … 700명 (750명 [ 98 ] )
- 타카다 분고수 …300명
- 후지카케 미카와 모리 ...200명
- 오노기 시게카츠 …1,000명
- 후루타 효부 소스케 …200명
- 신조 직정 …300명
- 하야카와 나가마사 …250명
- 모리 시게 마사 (모리 병 타치바나) ... 300 명
- 카메이 이바라키 …1,000명(수군)
- 군목 첨부
- 다케나카 시게카리, 오타 이치요시, 구마가야 나오 모리
- 일본 수군
- 선수중 총 8,750명
- 舟奉行 (병원 물자 수송 감독)
문록의 역할
[ 편집 ]
초반전
[ 편집 ]부산과 동모성의 공략
[ 편집 ]텐쇼 20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일대의 종의지와 코니시 행장은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 시간 이 지나면 부산 에 상륙 했다 . 를 요구한다는 내용의 책을 던지고, 만약을 위해 복종의 의사를 다시 확인했지만, 무시됐다 . 119 ] (甫庵太閤기 에서는 참수 8,000) 같은 시절, 행장도 다대진의 요새를 공격했지만, 이것은 밤낮 걸려, 밤 습격하고 다음날에 함락시켰다 [ 120 ] 다대진 수비대 지휘관(多大浦僉使) 윤흥신 은 전사했다.
조선군은 서전에서 충격적인 대패를 하고 부산 주변의 연안 부분을 잃었다.
조선 수군의 분들도 경상 좌수사 박규가 경상좌수영(부산사자천) 을 버리고 산중으로 도망. 빼앗기는 것을 두려워, 거의 모든 수군 선박(주력함의 이타야 선을 포함한다)을 싸우지 않고 침몰하면, 타마우라 만도 이운룡 , 소비포 권관 이영남 , 영등 만도 우치 치적들을 데리고, 4척으로 분승해 곤양에 철수했다 [ 121 ] 덧붙여 조선의 사서 『징서록』에서는 원균은 자중해 교전을 앞두었다고 하지만, 『연예실 기술』에서는 원균은 거제도에서 출격했지만 현지의 어선을 적선으로 오인해 스스로 붕주해, 그가 유수에 한 경상우수영에서는 공황이 일어나 도망치고 압사하는 자가 있거나, 창고에 불을 붙여 도망치는 자가 있고, 영이 소실되어 돌아갈 곳이 없어져 가덕도에 철수했다고 쓰여 있다 [ 122 ] 게다가 『징록』에서는 원균은 이영남의 제언을 넣어 인접하는 관구인 전라좌 수사 이순신 에게 구원을 요구했지만, 이순신은 관할 밖이어 조선조정의 명령이 없기 때문에 초권행위이기도 하다고 5-6도 열심히 거부했다고 한다. 기술'에서는 이순신 뿐만 아니라 전라우수사 이억사도 전라좌수영(여수 ) 에 모여 있었지만, 모두 원균의 구원요청을 무시, 광양 현 감 어영담 은 제장이 국난을 앞서 협력하지 않는 태도에 분개하고 이를 대답했다 . 123 ] .
어쨌든 경상도 수군은 소멸하고 전라도 수군이 구원을 거부한 것으로 일본군의 후속대는 조선수군에 번거로움 없이 상륙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수군은 이후 반월간 정도 침묵하고 눈에 띄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경상좌병사 이현 은 병영성( 울산 북쪽)에서 와서 일단 동문성 에 들어갔지만 부산진 함락의 비보를 받고 겁먹고 성을 도망치려고 히가시모후부 사 송상현 은 밀어붙여 함께 싸우려고 설득했지만 이폐는 소수의 수세와 성을 빠져나와 소산 역에 진을 깔았다 124 ] . 4월 14일-15일, 일본군이 히가시모키성에 차례차례 도착했다 . 125 ] [ 126 ] 일본군은 15일 새벽에 습격했고, 2시간 만에 동모성은 낙성, 조선군은 3000명이 전사하고 500명이 포로가 되었다 [ 127 ] 송상현(東萊府使)은 살해되어 홍允寛(조방장), 조영규 (梁山郡守), 송봉수(대장), 노개방(東萊教授) 등 제장도 전사해 이히코 마코토(울산군수)가 포로.
4 월 15일 일본군은 이날 더욱 무인 경상 좌수영 과 기장 을 점령 했다 . 그러자 조선 성병은 경악하고 성을 버리고 무너졌다 무산이 된 양산성을 다음날 아침 일찍 코니시 주전 조율 하는 코니시·종 양대 선발대가 점령했다. 128 ] .
4월 16일 이른 아침 부산에서 도망친 박규가 마침내 한성부(수도)에 이르러 조선조정에 일본군 습습(외관)을 보도 했다 . 체제를 협의해, 후일 상주하는 형태로서, 순찰사에 명장 이진 을 임명해 중로를, 좌방선사에 성응길 , 우방선사에 조준 을 각각 임명해 서로와 동로를 방비시키는 것으로 하고, 조방장에게 리우 가쓰라 와 나가미를 임명해 하기로 했다. 또 경주부 윤의 윤인이 겁쟁이라서 파면해, 邊応星을 새로 임명했다. 로 등록되어 있던 자조차 유생이나 관우 등만으로 출정을 거절하는 것이 속출했다 . 129 ] .
경상도 제압
[ 편집 ]4월 17일 일본군의 2번대, 3번대, 4번대(시마즈대는 지참)가 잇달아 부산 에 상륙 했다 .
17 일 오후, 코니시 행장과 마츠우라 진신 대는 가쿠인 에 육박했다. 세키의 효로에서 매복해, 처음으로 야전으로 맞이해,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척후가 이 적병을 발견. 행장의 팔대중이 정면에서 공격하는 동안 진신의 히라도의 철포중이 우측면으로 돌아와 야마노테에서 노격을 당했다. 조선군은 복병에 놀라 쏘아져서 뛰었다. 일본군은 추격해 300여 명 을 싸웠다 . 131 ] .

반면 이현은 소산역 진을 빼앗아 병영성으로 돌아와 우선 자신의 날과 면포(세금 대신 징수하는 것) 재산을 후방으로 보냈다. 라고 진격하려 했지만 헛됨이었다 성내도 싸움 공포로 하고 있어 적습의 오보가 날에 몇번이나 있었다 . 132 ] .
4월 18일, 코니시 행장은 밀양을 점령했다. 같은 무렵 한성부 제일 타는 공을 다투고 있던 가토 기요마사(二番隊)는 양산에 이르렀다. 행장이 밀양에서 청도 , 대구 , 상주 로 나아가는 중로를 취한다고 전해 들은 청정은 스스로는 동로를 잡기로 하여 길을 돌려 다음날 히코양을 점령했다.
4월 19일, 3번대의 쿠로다 나가 마사와 오토모 요시유키 는 해로에서 안골포를 공격했다. 육지로 성에 다가섰다 김해 부사 서례원 은 김해성 의 성문을 닫아 항전했지만, 일본군은 성외의 짚을 깎고 해자에 던져, 매립해 성벽을 튕겨 올랐다 . 59 ] 가 서문을 열고 도망하고 그것을 본 조선성병도 들판을 버리고 도망쳤기 때문에 멈추지 않고 서례원도 성을 탈출해 진주 로 넘어 졌다 [ 133 ] .
또 같은 날, 6번대의 고바야카와 타카카게 가 부산에 상륙. 5월 초순에 후속이 상륙을 완료할 때까지 동지에 있었다 [ 135 ] . 또, 2번대의 카토 기요마사와 나베시마 나오모리 는 연명으로 장속정가들 히데요시 측근의 봉행중에 대해, 현지는 풍부하게 병궁이 축적되고 있는 것, 코니시 행장과 협의하면서 다른 경로로 한성을 목표로 하고 싶다고 보고하고 있다 [ 136 ] .
한편 한성부에서는 좌의정·만조판서를 겸임하는 류세이류가 자신을 도체찰사로 병조판서에 복심인 김응남 (도체찰 부사겸임)을 임명하여 모병체제를 강화했다. 또 신선을 불러 책을 청했다. 신렬은 “어신은 무인이 아니다. 이쯤 때는 빨리 이진의 후원으로서 다른 맹장을 속발하라” [ 137 ] 라고 말하고, 어둠에 자신을 추거했기 때문에, 류세이류는 국왕에 상주해 신렝을 삼도도 순찰사( 경상도 · 충청도 · 전라도 의 삼도의 육군을 통괄하는 관직)에 임명했다. 신렝은 명장으로 굉장히 높았지만, 인살의 평판에서도 두려워되어 함께 종군하는 것을 기피할 정도로 인망이 없었다. 거기서 야나나리 류가 모은 부하를 데리고 가게 되어 선조도 이진 이하 누구라도 명령에 따르지 않는 것은 이것으로 베라와 검을 줘서 내보냈다 [ 138 ] .
4월 20일 2번대 가토 기요마사와 나베지마 나오모는 경주성을 공격했다. 조선 성병은 활로 항전했지만, 신임 경주부 윤나 응성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차관인 경주 판관 박규 장은 적의 맹공에 공포에 몰려 도망. 이것으로 성병은 대혼란에 빠져 성내에 난입한 일본군은 1500여 목을 잡았다 [ 139 ] . (경주성 전투)
코니시 행장은 4월 20일 대구성을 점령하고, 22일 인동성을 점령. 김광(경상도 순찰사)은 '제승방략 [ 주60 ] '이라는 사전계획에 따라 문경 이하 주변의 수령에 함을 날려민을 피난시키고 대구에 군병을 집결시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군의 급속한 진격을 앞에 소집된지 얼마 안된 조선장병은 동요하고, 밤 사이에 탈주해 싸우기 전에 군은 붕괴해 버렸다 [ 140 ] . 이로 인해 경상도의 중로를 지키는 부대가 사라졌다. 행장은 23일 얕은 물에서 낙동강을 건너 선산에 이르렀다. 같은 날 이진은 상주성에 들어갔지만 상주목사 김수 는 마중을 구실로 성을 나와 그대로 도망. 성에는 상주 판관권길이 혼자 남아 있었지만 일병도 없었다. 이진은 결국 900-6000명 [ 141 ] 정도의 농민을 모아 즉석 군대를 만들어야 하지 않고, 24일 성 밖에서 연병 중에 적습을 받고 포위 공격받아 괴멸했다 [ 142 ] . 이진(순찰사)은 옷을 벗고 버리고 알몸으로 도주, 김수(상주목사)도 도주, 왜학통사(통역) 경응현이 포로 가 되어 이경 류 (防禦使兼兵曹佐郎), 권길(상주 판관),朴篪( 교리), 143 ] .
한성부를 출립한 신렙은 충청도 에서 8,000-100,000명을 소집해 4월 26일 단산역으로 군을 추진했다. 월 27일 무인 조령을 돌파한 1번대는 안보역에서 단산역에 이르렀다 . 144 ] [ 145 ] [ 146 ] [ 147 ] [ 148 ] , 패한 신렙은 말로 강에 들어가 자결했고, 이종장 (충주목사·조방장)과 그 아들의 이희 립 , 김여재 (전의주목사·부사),邊璣(조방장) 등 제 장도 난전 속에서 전사했다. 야나기 류의 징록 에 의하면, 궁정에서는 오는 날도 오는 날도 신렙의 승보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 150 ] .
한편, 3번대의 구로다 나가마사는 창원성을 공략해 수급 500을 들고 북상해, 창녕 , 현풍을 거쳐, 4 월 24일에 성주 에 이르고, 김산을 거쳐, 가을풍령을 넘으려고 하고 있는 곳에서, 4월 28일, 조준 사관) 외 별장 정기룡 , 황윤 , 의병 장지현 의 연합군이 가로막고 교전했지만, 격파 했다 . 151 ] .
코니시 행장과 카토 키요마사
[ 편집 ]카토 기요마사와 2번대는 경주성을 점령한 후 히라도 출신의 표착민인 도쿠고로라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그를 능도자로 진격을 앞당겨 4월 21일에 나가 가와를 점령하고 신 닝, 비안으로 진행했다. 이대로 동로를 진행한다면 다케미네를 목표로 하는 것이지만, 류구가와, 도요츠와 온 후에는 류구현에는 진행하지 않고, 청경에 진행해, 코니시 행장의 소식을 듣는다 와 충주성으로 향했다고 하기 때문에, 서둘러 조령을 넘어 뒤를 쫓았다. 때, 제일대는 아직 탄금대에서 수실검을 실시 하고 있어, 1일 뒤를 취한 것을 청정은 매우 유감스러웠다 . 152 ] .
군의의 내용에는 이설이 많고, 고전에는 등장 인물이나 날짜에 쓰레기가 맞지 않는 점이 산견되지만, 코니시 행장이 이끄는 제일대가 고군으로 직입한 것에 대해 제대는 원래 쾌적하게 생각하지 않고, 불만이 있었다.
『정한위략』의 기술은 꽤 과장되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그 내용에서는 한성부에 진격로를 할당할 때, 카토 기요마사는, 우선 행장의 출자를 놀리고, 무공을 자랑하는 행장에 대해, 은밀하게 출발해 단독으로 공을 이루었지만, 그 성공도 종씨가 지리에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게다가 타이코는 청정과 행장에게 격일로 선봉을 맡도록 명령받은 [ 주 61 ] 이므로 오늘보다 격일로 선봉을 바꾸어 우열을 명확하게 하려고 도전하지만, 행장이 거부하면 군령 무시이며 사리 사욕의 상인근성이라고 모욕. 행장은 격노해 칼을 손에 넣었으므로, 나베시마 나오모에 멈출 수 있다. 거기서 마츠우라 타카노부가 양장이 선봉에게 명령받았는데 협력해 적에게 임하지 않고 서로 상쟁해 적에게 익히는 것만으로는 만사에 합당하다고 권유되어, 양인이 반성해, 결국은 진로를 분배하게 된다. 남대문을 목표로 하는 백리의 행정과 동대문을 목표로 하는 백여리의 행정이 있었지만, 하구 근처에서 한강을 건너야 하지만 직선거리가 짧은 전자를 가토 기요마사가 선택하고, 거리는 길지만 도하의 고생이 작은 후자를 코니시 행장이 진행하게 되었다 [ 153 ] .
조선국왕의 도락
[ 편집 ]싸움 공포로 하는 조선조정에서는 한성의 방위에 대해 논의하고, 우의정 이양원 을 경성도 검찰사로 임명하고, 이희, 나히히코를 좌우 중위대장으로 하고, 상산군朴忠侃[ 주 62 ] 를 도성검찰사로 하여 칠계군 윤 탁연 을 부사, 이성중을 수요사,丁胤福를 동서로호 소사로 하기로 했다. 난을 막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양원은 곧 성의 사민에 대한 모병을 시작했지만, 거기에 상주 전투의 패보가 도착해 인심이 흐트러져 도시에서 피난하려고 하는 것이 속출했다 . 154 ] .
4월 27일, 황혹이 난토 를 저지르고 [ 주 63 ] [ 155 ] , 장관과 타이쇼 [ 주 64 ] 가 한자리에 모여 처음으로 천도가 발의되었지만, 군신이 모두 울고 말을 다하고 말했다 . 다른 한편으로 吏曹判事의 이 전익을 헤이안도도 순찰사 와 의 겸임 으로 최흥원을 황해도 도 순찰사 로 파견 하기 로 결정했다 .
또한建儲(세계) 문제 도 논의되고 있었다. ] 원인이 된 이 문제는 금기시 되고 있어, 아무도 입에 내고 싶지 않았지만, 일본군 다가 가는 상황에서 만일도 우려됐다. 을 듣자 국왕이 결정해야 할 일이라고 어둠에 결단을 다가섰기 때문에 선조는 결국은 이전에 거절한 차남 광해군 을 왕세자로 선택해 국본을 정하고 인심의 안정을 도모하게 되었다 158 ] 4월 28일, 광해군은 왕세자가 되었다 [ 주 65 ] .
수도의 한성부를 포기하는 것은 관민이 거절하고 있었지만, 이 도시는 방어에 적합하지 않았고, 처음에는 지키기 위해서도 군인이 부족했다. 모아 지키기 위해 잡으려고 했지만, 모인 것은 7천명뿐으로, 많은 것은 유생이나 승우, 공사 노비였고 까마귀 의 중에서 부탁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고 있었다 [ 159 ] 이전보다 왕자를 지방에 파견해 근왕의 사를 모으자는 건언이 자주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겨우 윤탁연하게 임해군 (선조 장남 )을 봉해 함경도 로 향하도록 명령해, 도조 판사 한준에게 순화군 ( 선조 6 남 ) .
4월 28일 상주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해방된 왜학통사(통역) 경응현이 코니시 행장의 편지와 국서를 가지고 경성에 이르렀다. 코니시 행장은 종씨와 면식이 있는 예조참판 ( 외무차관) 이덕해 와 충주성에서의 강화회견을 요구하고 있어, 일본 달력과의 차이에 의해 편지의 기한은 전날 27일로 이미 지났지만, 선조는 일본군의 진격을 늦추는 것을 기대해 회견에 응하는 것을 허가했다. 이 명령을 듣고 예조 판사(외무대신) 권 카츠치는 경악하고 졸중사했기 때문에 이덕해가 이 대임을 담당하게 되었다 . 그런데 중간 지점의 다케야마까지 갔을 때 충주성이 이미 함락한 것을 알았다. 이덕馨은 일본어의 가능한 경응현을 먼저 가게 하고 다시 일본 측과 협상을 하려고 했지만 그는 도중에 잡혀 죽었는지 [ 주 66 ]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덕정도 빈틈없이 되돌릴 수밖에 없고, 강화의 첫 시도는 실패했다 [ 160 ] .
같은 28일 저녁, 3명의 놈이 신선의 사망과 충주 전투의 패보를 경성에게 전해, 시중에 패닉을 일으켰다 [ 161 ] 부탁하고 있던 신렙까지도 출정 후 불과 며칠 만에 목숨을 잃은 것은 큰 낙담을 초대 했다 .
김명원이 전군의 지휘를 맡은 도원수 로 임명되어 신원은 부원수가 되어 한강 의 수비에 붙었다 . 이항복이 그의 재능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멈추게 했고, 대신 우의정의 이양원이 유도대장으로 한성부의 방위에 남게 됐다 . 162 ] .
심야, 충주 전투에서 생환한 이진이 상황을 보고하고, 일본군은 오늘 내일에도 한성부에 온다고 해서, 미야나카의 위사는 다 탈출 했다 [ 163 ] . ] 를 주어 위사 를 모아 치안 을 회복 시키려고 했지만 , 한 사람 도 이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 164 ] .
선조 도피 행의 참상
[ 편집 ]
4월 29일 선조는 아카츠키와 함께 출발 하기 로 결단 했다 . 이산해와 야나기 류 등의 아침관, 사무라이, 노비 등 100여명은 도보로 둔의문을 지나 서쪽 으로 향했다. 165 ] .
조선난민은 우선 죄수와 노예의 신분기록을 보존하고 있던 장예원 과 형조 로 방화하고, 다음에 내주고(왕실재산보관고)의 금품재보를 빼앗았다 [ 166 ] 게다가 국왕의 거주지인 경복궁 이 거칠어 져 탈탈 과 방화 로 창경궁 과 창덕궁 의 2 개의 별궁 도 소실 되었다 . [ 167 ] 왕실의 축사에 있던 가축을 훔쳐 도망한 가신도 있었다 [ 170 ] .
"왜 녀석들도 없고, 중반 반민, 극히 한심 미끄러짐" - 학봉집
한성부에서 도망칠 때 스스로의 왕에도 불구하고 돌을 던지는 자도 있어 선조의 일행은 나아가는 마을에서 주민을 만났지만, 주민들은 왕이 백성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을 슬픔하고 왕을 맞이하는 예법을 지키지 않았다 [ 170 ] .
도피행은 사현을 지나 이시바시에 이르는 곳에서 비가 쏟아져 몹시 젖어졌다. 경기도 순찰사 권징이 쫓아와 국왕에게만 비구를 건네주었다. 폭우가 되었기 때문에, 타이거로 이동하고 있던 사람은 내려 말로 갈아타고 있었다. 벽제역의 역사에서 왕족들은 휴식을 취했지만, 비에 쳐 의기 소침한 중관의 대부분이 경성에 되돌아갔다. 사무라이나 타이즈도 낙오해 어딘가에 없어졌다. 김응남은 진호를 기어다니며 이들을 제지하려고 했지만 낭비였다. 혜음령을 지날 무렵에 비는 점점 강해져 궁녀들은 말을 타고 얼굴을 덮고 울면서 진행되었다. 임진강 에 도착하지만 배가 적고 아래 사람은 앞으로 싸웠다. 일본군의 추수를 두려워할 정도로, 건너간 후에 배는 되돌리지 않고 구워졌기 때문에, 반이 건너지 못하고 그대로 동쪽 해안에 남겨졌다. 황혼에 동파위에 도착했다. 파주 목사 허신 과 나가오후부사구 타카부치가 일행을 위해 식사를 만들었지만, 굶주린 위사들이 주방에 난입. 음식을 서로 빼앗아서 괴로워했기 때문에 국왕에게 제공하는 식사도 낼 수 없게 되었다.孝川淵은 죄를 훼손받는 것을 두려워 도망쳤다 [ 171 ] .
4월 30일 아침 선조는 근신과 선후책을 협의 했다 . 야나기 류를 묻자 그는 "오타마 동토를 한 걸음 떠나면 조선은 우리의 것이 아니게 된다"고 국외 탈출을 부정 했다 . 68 ] 의 양명이 나라를 버리는 행위 라고 밝혀 윤두수는 함경도로 향해야 한다고 말했다 .
경기의 사졸이 도망쳐 버려 개성을 향해 출발할 수 없으면 황해도 순찰 사조인 득이 수백명을 데리고 합류했기 때문에 드디어 출립했다. 도요 군군 모리이 수량 이 도중에 막사를 마련해 일행에 처음으로 괜찮은 식사를 제공했다. 저녁에 개성에 도착했다.
그날 밤 개성에서는 수많은 백성이 모여 와서 통척하거나 눈물을 흘려 조선 국왕을 비난해 떠들썩하게 됐다. 적게 제지할 수 없었다. 선조는 윤두수를 어영 대장으로 했지만, 윤두수는 국내에서 국왕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여 인사의 쇄신과 자신을 처벌하는 책을 팔도 로 내리도록 헌언했다 . 173 ] .
5월 1일, 영의정의 이산해가 나라를 잘못 외우를 초래했다고 우선 탄핵됐다 선조는 그렇다면 좌의정의 야나나리 류도 동죄라고 망했지만, 병조정로구연은 이산해가 토벌되지 않는 것은 타이쇼에게 지 인당 이 많기 때문 의 추방 도 포함해 한층 더 규탄했다 . , 윤두수를 우의정에 임명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날 오후에 선조가 남대문에서 나와 인민을 진무하고 있으면 정택의 복권을 요구하는 것이 있어, 이것이 용서되었다. 라고 하는 의견이 있어, 논의가 되었다. 이항복이 이에 차이 를 주었다 . 174 ] .
한성부 점령
[ 편집 ]4월 29일 한편 일본군도 충주에서 행군을 재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침에 나왔을 때는 맑았던 날씨가 악화되어 오후에 조선국왕이 조우한 것과 같은 폭우가 되어 가는 손을 막았다. 제일대는 비에 의해 길을 잃고 결국 1일을 낭비했다. 여주 에 도착한 것은 5월 1일이었다. 거기에서 호강을 건너려고 하지만 강은 증수해서 말로는 건너갈 수 없고, 북쪽 해안에 강원도 조방장 전 호 율하는 수백명의 소부대가 나타났기 때문에, 코니시 행장과 종의 토모는 선발대만을 배로 건네주고, 양안에 체진해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전호의 부대는 싸우지 않고 철수했지만, 증수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행장들은 선발대만을 데리고, 양근을 경유해 용진에서 한강을 건너 오후 8시에 한성부에 도달했다. 본대 의 대부분은 여전히 여주였고 도하작업을 계속 하고 도착 은 3일 밤이 되었다 [ 175 ] .

2번대( 와키자카 안지대 도 육상 부대로서 동행)는 음성, 다케야마, 양지, 용인 과 별로를 진행해 5월 2일 정오에 한강까지 도착했지만, 대하를 앞에 두고 배가 없었다. 카토 기요마사는 대안까지 수영하여 배를 빼앗아 오는 사람을 모집,曾根孫六되는 사람이 적선을 빼앗아 귀환 . 176 ] .
미야코모토 김명원은 불과 1000명을 이끌고 한강 북쪽 해안의 제월정(京城府普光町)에서 대기하고 있었지만, 일본군의 수를 일망해 전의 상실 . 종사관 침우정이 김명원 을 따라잡고 호울해 말을 멈추자 서행한 국왕을 지키기 위해 임진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177 ] .
5월 2일 , 조선의 수도· 한성부 는 함락했다. 이것은 개전으로부터 불과 21일로의 사건 이었다 . 가토 기요마사는 남대문에서 입성했다 . 179 ] 가 빨라도 같은 날 동각의 도착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오타 규이치의 「고려진 일기」에서는, 날짜 시간의 기술 은 없지만, 척후보다 돌아온 기무라 마타쿠라 가 먼 쪽의 산에 행장 대를 찾아 아직 도시에는 도착하지 않았다고 보고, 이를 들은 카토 기요마사는 4, 5명을 데리고 서둘러 말을 달려, 도시 제일 타기를 했으므로, 타이코에 주진했다고 되어 있다 [ 180 ] .
한성부는, 제일대가 접근한 단계에서( 상기의 조선난민 의 방화 에 의해 ) 연기를 올리고 있었다 [ 181 ] . ] 가 되어 일본군에 협력하는 자가 속출 했다고 한다 . 183 ] 루이스 프로이스도 조선의 백성은 “공포도 불안도 느끼지 않고 스스로 진행하고 친절하게 성의를 가지고 병사 들에게 음식을 배포하고 손 흉내 에서 뭔가 필요한 것은 없을까 묻는 유양하고 일본인 쪽이 면식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일본군은 조선 국왕의 추격을 하지 않고, '요시노 일기'에 의하면 제일대는 금중에 할거하여 남아 있던 진품 보물·비단을 분포해, 휴식 장소로 했다 [ 181 ] 5월 5일, 코니시 행장의 숙영에 가토 기요마사가 와서 협의해, 성외에 숙영을 옮겨, 성문에 목찰을 세워, 도망한 조선도민의 환주를 촉구 하게 되었다 [ 184 ] . , 원래 사전의 훈시가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어좌소를 마련하도록 야계하야에 지시를 하게 된다.
조선도민은 잠시 후 경성으로 돌아와 평범한 생활을 시작 했다 . ] 도민의 변절을 비판하는 한편, 혐고된 사람들의 쫑쫑이 남대문 아래에 쌓여 있었다는 설명이 있지만, '서정일기'에도 (흔히 난민이 된) 백성을 진정하는 고찰의 이야기가 있어 치안을 유지하겠다는 최대한의 노력.
별로를 가고 있던 3번대의 쿠로다 나가마사는 5월 7일에 경성에 도착 했다 . ] 의 우키타 히데야와 봉행중은 히데요시에게 한성부의 수비와 통치를 명령받았으므로 5월 2일 부산에 상륙하면 이 길을 서두르고 강행군하고 6, 7 날에는 게 이죠 에 도착했다. 이어 경성에 도착했다. 4번대 속에서 지참하고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는, 대의 일부가 드디어 5월 2일에 부산에 도착했지만, 영국의 가까이에서 매북국 겸 과 국인중이 일으킨 일소의 후처리로 국허를 떠나지 못하고, 후속이 구마가 와에 도착할 수는 없다.
5번대는 4번대에 이어졌다고 여겨지며, 일정과 기일 등은 잘 모르지만, 5월 중순에는 충청도와 경상도의 경계에 전개되어 후쿠시마 마사노리 는 다케야마에, 벌스가 가정 은 충주에, 장종가부 전 부모 는 개경에 진을 던졌다.
육번대는 부산과 동모 근처에서 집결 중이었지만 잠시 후 5월 10일이 되어 현풍으로 나아가 경상우도로 전개됐다. 원래는 성주에, 코바야카와 타카케이 는 선산에, 타치바나 통호·타카하시 통증·치쿠시 광문은 가나야마에 배치되었다 . 187 ] 이렇게 6번대와 5번대는 연계하여 앞서 언급한 일본군 연락선의 수비 에 착수 했다 .
조선수군과의 조우
[ 편집 ]일본 수군은 부산 상륙 때 적극론의 가토 가 아키 와 신중론의 와키자카 안지와의 사이에서 차이를 보인다 [ 188 ] , 거제도의 전균의 함대를 놓쳤지만, 결과적으로는 전술한 바와 같이 경상도 수군은 마음대로 자멸했기 때문에 일 을 얻었다 . 군대가 부산을 떠나 한성부를 목표로 하고 있던 사이에도 진해만, 거제도, 가덕도, 울산만에서 적선을 수색하고, 특히 저항을 받지 않고 70척여를 나포해 경상도 연안의 소토를 완료시켰다 . 189 ] .
그러나, 분한을 묵수하고 있던 이순신과 이억지도, 일본군의 파죽의 진격이라고 하는 상황도 있었는지, 5월 4일, 드디어 경상도 수역에의 진입을 결단해 요격을 개시해 6일, 원균도 단선으로 이에 합류했다. 를 발견해 남쪽으로 돌아가 이를 공격했다. 당일 귀도에 합포로 향하고 있던 일본군선을 만나 공격.
다만 이 전승의 소식은 도피행 중 조선조정에는 곧바로 닿지 않았다. 개성 선조는 한성부가 점령된 것도 아직 몰랐지만 우승 취지 신아를 군민의 진무에 파견했는데, 이미 함락하고 있던 것을 알고 파주 로부터 되돌려 보고. 190 ] . 한응인을 순찰사로 하여 도위 군 (왕궁 경호)을 이끌어 밤에 김교역에 노숙하고, 5일, 히라야마부, 6일에 안성, 봉산 , 7일에 황주 , 그리고 8 일에 평양에 도착해, 헤이안 도 순찰 사송 신언 에 맞았다 출립 전에 김명원이 한강 방위를 포기한 죄는 과병을 위한 것이었다고 허락 되었고 , 계속 임진 의 고수 가 명령 됐다 .
또 이 전익은 도순찰사로 임명됐다. 兪泓도 도체찰사로서 원병으로 향하게 하려는 방안도 있었지만, 병력이 지나치게 분산된다는 이론이 있어 향하지 않았다 [ 193 ] .
한반도를 석권
[ 편집 ]히데요시의 지배 계획
[ 편집 ]5월 16일 한성부 공략과 조선 국왕 도망의 소식을 받은 히데요시는 같은 날에 통사(통역)를 도해시켜 사자를 파견하여 (조선 국왕이) 반역하여 도망 한 이유 를 듣고 낙인 분 을 주시며 그리고 스스로의 도해의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불행한 일이었지만, 원정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명정복이며, 준비 단계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 도요타 삼국 처치 태하계
- 가가번 제4대 번주의 마에다 츠나키가 남긴 문서 속에 『 풍태섬 삼국 처리 태하계 』와 그가 표제 한 것이 있다. 대부분의 조항은, 내년(1593년)의 정월이나 2월경에는 출진하게 된다고 했던 히데지에의, 매우 세세한 오더가 쓰여져 있었다 하지만, 안에는 놀라운 계획이 피로되어 있어, 명국을 정복하면 히데지를 대당관백의 직으로 맡는다든가, 대당도( 베이징 )에 천도해 명후년(2 연후 )에는 고양성천황이 그 땅에 행운할 수 있도록 하거나, 천황에 베이징 주변의 10개국을 진정해(동행하는) 여러 공가중에게도 지행을 주는 것, 천황이 베이징으로 옮긴 후의 일본의 천황으로서는 와카미야( 료인 친왕 ) 또는 하치조궁(동생의 지인친왕 )의 어느 쪽이라도 좋다 등이 쓰여져 있었다. 인사 구상에 관해서는, 8월까지 하니시 히데토시 ( 탄바 나카노언)도 출정시키는 것으로, 그는 조선에 배치할지 나고야의 유 모리이 역 으로 하고 조선의 보좌역은 미야 베 계윤 . 혹시 조선을 하시바 히데카츠(기후재상)나 비젠재상에게 맡긴다면 단바 나카노언은 규슈 에 놓기로 하는 등이라고 썼다 . 73 ] .
- 이 문서는 구체적이고 섬세한 지시와 공상에 가까운 막연한 지시가 혼재되어 있는 것이 특징 이다 .
- 금 이래의 도성·수도로서의 베이징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는 동양사학자의 신궁학 은, 명의 영락제 에 의한 베이징 천도의 이유로서, 정치적·경제적인 「남북 통일」과 전대의 원 ( 몽골 제국 )의 등장에 의한 중화 세계의 확대에 의해 원래를 대신하는 왕조로서 그 실현을 강요받은 「화이 일통」이라는 2개의 목적을 완수하기 위한 요점이 베이징에서 있었다고 해, 실제로 책봉 체제의 재흥이라고 하는 형태로 후자가 실현되었다(일본도 송명사절을 베이징에 파견하고 있다) 것을 지적한 다음, 히데요시의 이 구상은 천황을 책봉 체제 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베이징에 두려고 하고 있는 시점에서 명에 의한 책봉 체제의 틀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않고, 당시의 동아시아 질서의 단순한 재작성 밖에 없다고 평가하고 있다 [ 56 ] .
- 직물 문서
- 쵸야 문서란, 와카사 쿠니 오바마쵸의 쵸야씨 집에 소장되어 있던 문서로, 원래는 병풍의 하장이었던 것을, 에도시대의 국학자 반신 중외경위전」에 실었던 것으로부터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 195 ] . 가명 문자로 쓰여진 이 문서는, 나고야 진중에 있던 히데요시의 우 필산 나카나가 슌이 , 오사카성에 있던 여중(동전국과 객인국 [ 주 74 ] )에 향한 5월 18일자의 편지로, 앞의 도요타 삼국 처치의 뒷받침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보완하는 것과 같은 내용.
- 이 문서에도 놀라운 내용이 몇 개 있어, 히데요시는 당월(5월)중에 도해해 조선을 향하는 의향으로, 적어도 연내(1592년)에는 베이징에 입성할 생각이었다고 명기 되고 있는 것 외에 베이징에 거점을 쌓은 후에는 누군가에게 맡기고 스스로는 닝보에 거주 하고 있다. 그렇게 하고, 스스로는 교통의 요충이다(라고 당시의 일본인은 생각하고 있던) 닝보를 근거지로서 오사카와 같이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선구중은 천축 (인도의 의미)에 가까운 소령 을 주고, 천축의 영토에 잘라 자유의 허가를 줄 생각이라고도 쓰여져 있었다. 197 ] .
2문서에서 밝혀지는 외정계획에 대해, 안쿠쿠지 에쿠와 같은 낙관적인 찬동자가 있던 반면, (성주에서 에쿠와에서 11곳의 히데요시용 숙박시설의 보청명령을 전달받은) 모리 휘원 등은 일관된 비관론자 앞서 언급한 쵸야 문서에도 모리 테루모토, 나가무네 아베 모토모리, 시마즈 요시히로, 오토모 요시도리 등은, 나라 바꾸고 조선에서 10배 20배의 지행증가를 약속했지만 폐가 되었다고 쓰여져 있고, 키루모토는 10배의 가증이 있었다. 그렇다면 현재 영지의 통치도 각속 없게 된다고 사퇴했다는 내용이 있었지만, 이국의 소령에 매력을 느낀 다이묘는 오히려 소수였던 것 같다 . 그러면 더욱 구체적으로 쓰고 있어 조선은 약하지만 토지가 널리 말도 통하지 않고 통치하기는 어렵다고 지적하며 의사 소통에 일일이 통역이 있는 번거로움은 각별하다고 했다. 병사로 무너질 정도로 약하고 중국병은 조선병보다 더 약하다고 듣고 있지만 중국의 땅은 조선보다 더 광대하기 때문에 명의 통치는 더 어려울 것이며 적은 일본군이 오자마자 산으로 도망치지만 , 소인수로 통행하고 있으면 활로 저격해 습격해 오는 등 어려운 상대로, 성도 국내에 무수하게 있으면 장기화할 우려도 시사하고 있었다. 사이에 굶주림이 퍼지고 있는 것도 지적한 부분도 있었지만, 이것은 나중에 일어나는 농민 반란의 원인이 되었다.또한 조선의 도시는 가리비가 비정상적으로 많고, 물 뿌리기도 나쁜 데다, 야드와 소가 많아, 위생 환경이 열등 악인 모습도 쓰고 있으며, 자신도 건강을 해치고 있다고 철자하고 있었다 . 198 ] .
진격 재개
[ 편집 ]조선측 은 한성의 조금 북쪽을 흐르는 임진강을 다음 방어선으로 삼기 위해 임진강 남안의 일대를 태워 일본군이 도하의 자재를 얻지 못하게 했다 .
5월 18일, 도원수 김명원이 이끄는 13,000의 조선군은 개성을 방어 하기 위해 임진강에 방어선을 치지만, 2번대 가토 기요마사 등이 임진강 싸움 에서 조선군을 격파했다 [ 199 ] 조선군에서는 신류 (劉禦使), 리우 카츠라(조방장), 홍봉상 (독군관) 등 여러 장이 전사했다. 를 보내고 협상을 시작하려고했지만 거부되었습니다 (이후 6 월 1 일과 6 월 11 일에도 서장을 보내고 있지만 모두 거부되었습니다). 조선 국왕은 승리를 믿고 낙관하고 있었지만, 김명원의 패보를 접해 일전 해 색 을 잃었다 .
개성의 점령
[ 편집 ]5월 19일, 제일대·코니시 행장들이 임진강을 향해 출발 했다 . 강 전투에서 패배한 후 잔병을 모으고 있던 도원수 김명원과 이양원들도 평양으로 도주 했다 . 200 ] .
용인 전투
[ 편집 ]일본군이 한성으로 진격하고 있는 동안, 전라도 장관 이수 (순찰사) 는 군을 수도에 파견해 일본군 을 막으려고 했지만 [ 201 ] , 수도 함락의 보에 접해 , 퇴각했다 [ 201 ] . 그러나, 지원병 을 모은 것으로 군대는 50,0 ~100,000명 [ 203 ] [ 204 ] 에 오르기 때문에 이주와 민병의 지도자들은 목표를 한성 탈환으로 정하고 한성에서 42km 남쪽 수원 으로 군을 진행시켰다 [ 201 ] . 6월 4일, 용장으로 선정된 백광 히코 (조방장)·이유 시(조방장) 등이 이끄는 정병으로 선정된 수천900명 [ 203 ] 의 조선병이 용인 의 성을 탈취하려고 공격했지만, 와키자카 안지 가신 부하의 수비대 600명은, 와키자카 안지 본군의 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조선군과의 교전을 피했다 [ 201 ] . 204 ] 의 조선군은 붕괴하고 무기를 버리고 퇴각했다( 용인의 전투 ) [ 201 ] [ 203 ] 조선군에서는 백광언, 이유시, 그 동생 용장이 전사하고 이수(전라도 순찰사), 윤국馨(충청도 순찰사 ) , 김무(경상도 순찰사), 권경 (光州牧師) 등 조선군 지휘 이 후, 전라도·충청도의 조선군은 다시 한번 움직이지 않았다 [ 203 ] .
덧붙여 6월 1일자로 조선의 진으로부터 일본 본국에 충당된 발급자·주소 불분명하면서, 내용으로부터 카토 기요마사에 의한 것으로 추정 가능한 서장이 남겨져 있어, 발급자(키요마사)는 아키라에의 진군을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후술의 팔도국할을 정한) 제장의 담합을 「폐」라고 규탄해, 韃靼와의 경계(=함경도)에 파견되는 것으로 도카이한 히데요시가 아키라의 국경까지 진군했을 때 합류가 시간에 맞지 않는 것을 우려하는 내용이 되고 있다 . 136 ] .
팔도국할
[ 편집 ]개성 함락 후, 일본의 제장은 한성에서 군의를 열고 각 방면군에 의한 팔도 국할이라고 불리는 제압 목표를 결정했다.
- 헤이안도 에 제일대 코니시 행장 외 ,
- 함경도로 2번대 가토 기요마사 외 ,
- 황해도로 3번대 구로다 나가마사 외 ,
- 강원도 로 4번대 모리 요시 나리 외,
- 충청도로 5번대 후쿠시마 마사노리 외 ,
- 전라도로 6번대 고바야카와 타카케이 외,
- 경상도로 칠번대 모리 키모토 ,
- 경기도 로 팔번대 우키타 히데야 .
헤이안도와 제일대
[ 편집 ]평양 점령
[ 편집 ]코니시 행장이 이끄는 제일대가 북진하고, 황해도 의 히라야마 , 서흥 , 봉산 , 황주 를 점령 하고 , 게다가 헤이안 도 에 들어가 중화 를 점령 했다 [ 205 ] . 30,000명의 일본군에 대해 윤두수 ( 좌의정 ), 이원익 (도순찰) , 송신 언(평안도 순찰사), 김명원 (도원수 ) , 이진 (순찰사), 한응 인( 제도 도 순찰사 ) 등 이 이끄는 10,000명 조선군의 방전준비에 의해 일본군이 사용할 수 있는 배 는 전혀 없었다 [ 207 ] .
6월 14일 밤, 조선군은 비밀리에 강을 건너 일본군 숙영지를 기습했지만, 다른 일본군 부대가 달려 조선군의 배후로부터 공격해, 한층 더 강을 건너고 있던 조선측의 원군을 격파했다 [ 208 ] ( 대동강의 싸움 ) 여기서 남아 있던 조선군 부대는 평양으로 퇴각했지만, 일본군은 조선군의 추격을 정지하고 조선군이 어떻게 강을 건너 돌아가는지를 관찰했다 [ 208 ] 다음날 어젯밤에 조선군이 퇴각하는 모습을 관찰한 결과에 근거해 일본군은 강의 얕은 물을 사용해 정연히 부대 를 대안 으로 나아 가기 시작 했다 . 6 월 15 일 , 제일대 ·코니시 행장들이 평양을 제압 한다 .
- 7월 24일(기원), 제일대와 세번대는 이미 포기되고 있던 평양에 들어갔다 [ 209 ] .
조선에 파견된 제장은 팔도국할을 목표로 요충을 제압해 갔지만, 코니시 행장은 당초는 조선, 후에는 아키라와의 평화 교섭을 모색해 평양에서 북진을 정지했다.
- 12월 1일, 중화의 싸움 .평양의 소서세가, 평양 근교의 중화의 요새에 세워진 숲 중창 등 의 조선군을 섬멸한다.
함경도와 2번대
[ 편집 ]2번대 가토 기요마사 등은 6월 1일에 개성을 출발하면 6월 17-18일에 안변 에 도착해 [ 136 ] , 거기서 동해안 을 따라 북쪽으로 진격을 개시 했다 [ 213 ] .
청정은 한층 더 북상할 의사를 굳혀 안변에 머물고 있던 나베시마 나오 모를 함흥 에 불러들인다. 나오모는 이를 받아 7월 1일에 안변 을 출발했다 .
- 7월 17일-18일, 2번대의 일부 10,000명 [ 207 ] 은 한층 더 북진을 계속해, 7월 17일에는 한극사 (함경북도 병사)가 이끄는 함흥도의 북군 및 남군과, 성진(현재의 금책 )에서 싸웠다 [ 214 ] . 조선의 기병부대가 기사전법에 의해 성진의 평지에서 우위에 서서 일본군은 곡물창고를 방패로 만들어 이를 막았다 [ 214 ] . 일본군은 창고에 있던 미바를 이용해 장벽을 만들고 기병의 돌격을 화조총으로 격퇴했다. 조선군이 다음날 아침에 다시 공격을 걸려고 계획하고 있는 동안, 카토 기요마사는 복병을 숨기고 조선군을 기다리고, 2번대는 늪지에 접하는 부분을 제외하고 완전히 조선군을 포위하고 격파했다 [ 214 ] ( 해정창전 ) [ 215 ] . 패배한 조선군에서는 원희 (富寧府使)들이 전사했고, 한극장은 사상자를 버리고 경성으로 도망 했다 [ 210 ] .
7 월 17일에는 나베시마 나오모가 청정의 유수 를 지키기 위해 함흥 에 들어갔다 . [ 136 ] 7월 23일, 2번대는 회령에 들어가, 거기서 가토 기요마사는, 일본 측에 잠들어간 조선의 부사 마리히토인 이나 현지 주민에 의해 이미 잡히고 있던 2명의 왕자( 임해군 , 순화군 ), 한층 더 그 종신인 김귀영 , 황정히코 , 황정 (黃廷) 히코노코), 이에이 (회령부사), 이장( 온성부사), 이홍업(경성판관), 문 몽채 ( 회령 부사 ) , 야나 가나가타테(함경도 관찰사) 등 20여명을 포로로 받았다 . 216 ] [ 217 ] [ 218 ] 해정창 전투 의 조선군 지휘관 으로 패배 뒤 도망 하고 있던 한 극장 ( 함경 북도 병사 ) 도 일본군 에 잡혀 , 여기 함경도 는 다 정해졌다 .
- 7월 23일, 조선의 두왕자를 포박하기 위해, 9000의 병사로 북진하고 있던 카토 기요마사는, 회녕으로 왕자들을 포박 [ 219 ] .
함경도에서는 이전부터 중앙에서 파견된 관료와 현지민(조선인+여진족) 사이가 잘 되지 않았고, 종종 싸움이 일어나고 있었다. 함경도는 또한 좌 천지 · 유형지 이기도 했고, 좌천인·유형인들은 중앙에 불만을 품고 있는 현지민과 연결되었다. 게다가 함경도 출신자는 과거 에 접어도 관직 에 취할 수 없다는 차별이 있었고, 함경도는 조선에 불만을 안는 자들의 온상이 되고 있었다. 카토 기요마사는 함경도를 “일본에서는 하치조가 시마, 유황이 시마 등과 같은 유죄인의 배소”라고 보고하고 있다 [ 220 ] .
청정 은 함경도 북부의 지질의 나쁨과 물산의 적음을 보고, 장기간 머무르는 토지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아카 가 와 와 그 이북 으로부터의 철퇴 를 결정 했다 [ 221 ] . 길주· 해정창( 김책 ) · 단천 · 이하라 · 북청 · 홍원 에 각각 500명에서 1500명의 병사를 두고, 안변에는 청정의 병사 3000 여개 를 두었다 .
전전 후 일본군은 내정에 노력했다. 청정은 철수 후의 땅을 되돌아온 조선인에게 관리시키는 등 일부 지역에 조선인의 자치를 인정했다 [ 223 ] .
- 11 월 일본군의 길주수비대의 일부 가 조미를 징수하기 위해 성 밖으로 나왔다 .
- 11월 10일, 함흥의 싸움 . 함경도 순찰사 윤 탁연 은 함경남도 에서 병사를 모집해, 나베시마 나오모토진을 공격하려고 노력해, 독산의 기슭에 집결진을 세웠지만, 나베시마세가 선수를 치고 1천명. 조선군의 패잔병은 원평의 산지로 도망쳐 다시 병사를 모집해 1만5000명으로 부풀어 오른다고 호언했다 . 225 ] .
- 12월, 해정창(현재의 김책 )의 일본군 수비대 400이 임정역으로 향했지만, 쌍포 에서 정문학들의 의병이 맞이해, 길주 수비대는 해정창으로 물러났다 [ 226 ] .
- 분 로쿠 2년(1593년) 1월 23일, 단천 의 싸움 .
- 분록 2년(1593년) 1월 28일, 백탑교의 싸움 . 분록 2년 정월, 길 주성의 일본군이 남쪽으로 철퇴 를 시작 했다 . .
강원도와 4번대
[ 편집 ]모리 요시나리가 이끄는 4번대는 7월에 한성 을 출발 하여 동쪽 으로 향해 한반도 동안 의 성 을 안변 에서 3 척 까지 점령 했다 . [ 209 ] 여기에서 모리 요시나리는 민정을 실시해, 일본에 준한 신분 제도를 도입 해 , 한층 더 국토 조사 를 실시 했다 [ 209 ] .
- 6월, 원주의 전투 ( 코우 하라야마성의 전투 ). 강원도의 조방장 원호 가 일본군의 소대에 공격을 가하자, 모리 요시나리 등이 병사를 향해, 전호는 도주 했다 . 0명과 함께 鴒原山城에 박혀 가려고 했다 . 227 ] .
- 6 월 , 철령 의 싸움 .
- 6 월, 평창 의 싸움 . 나루는 격노해, 아키즈키 종장에게 그들을 공격하게 했다 . 227 ] .
- 7 월 아사다 의 싸움 과 이가와 성의 싸움 .
- 8월, 연안성의 싸움 . 이 무렵, 3번대의 쿠로다 나가마사는 황해도를 거의 평정하고 있었다 .
- 8월 오가와의 싸움, 야나기 무네스케 등 이 이끄는 조선군 이 모리 요시나리 등의 일본군을 맞아 쏘기 위해 복병을 깔았다.
- 10월 19일 후녕의 싸움 . 경기도 순찰사의 침악은 한성 탈회 를 노리고 호녕성에서 병사 를 모으고 있었다 .
- 10월, 춘천의 싸움 . 강원도의 조방장 원호 가 다시 병사를 모집해 수천명을 모아 원주 박혼과 함께 춘천 성 을 공격 했다 . .
- 12월, 김화 의 싸움 .시마즈 요시히로가 김화로 진을 옮겼을 때, 또 원호가 수백의 병사 를 이끌어 왔다 요시히로의 아이의 쿠보가 이것을 공격해 전호들을 처치해, 목 을 드러냈다 .
- 9월 15일, 거울성의 싸움 [ 215 ] .
- 10월 16일, 함흥 전투 [ 215 ] .
- 11월 15일, 길주 장평의 싸움 [ 215 ] .
오번대
[ 편집 ]- 1월, 다케야마의 싸움 . 변이후 이끄는 조선군이 후쿠시마세가 지키는 다케야마성을 공격하지만, 후쿠시마세가 역습해 조선군은 대패했다.
전라도와 육번대
[ 편집 ]고바야카와 타카시가 이끄는 6번대가 전라도 제압 의 임을 당하게 되고, 6번대는 이미 3번대가 통과하고 있던 일본군의 이동루트를 통해 상주로 행군 하고 충청도 의 금산 에 이르렀다 .
- 7월 5일, 9일~10 일 [ 232 ] . 제 1 차 금산 의 싸움 .
- 7 월 7 일, 구마고토 의 싸움 . 또 이와 병행하여 6번대의 일부 부대 2,000명이 리치로 향했지만, 권경들에게 격퇴되었다( 리치의 싸움 ) [ 235 ] .
- 7월 7일~8일 조선 의병 장금 사는 소척 전투 에서 고바야카와 타카카게의 부대를 복병으로 격퇴했다 [ 236 ] .
- 7월 30일 청주 전투 . 이 무렵, 일본군의 일부 부대가 청주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지만, 방 요사 이옥 의 조선군 은 도주해, 일본군이 청주성을 점령 했다 . 30일 청주성을 공격했지만 일본군으로 격퇴되어 조헌 등 조선군은 후퇴하여 성 서쪽 고지에 진을 던졌다 . 237 ] .
- 8월 9 일 , 양 탄산 의 싸움 .
- 8 월 15일~18일 [ 239 ] , 제 2 차 금산의 싸움 .
육번대는 용인 전투에서 퇴각한 5만 병을 더한 각지에서 패잔병 15만을 옹호하여 전라도의 방어를 굳힌 권율 에 의해 공략을 막아 금산에서 이조군을 깨지만 남하하는 명군의 공격에 대응한다 때문에 7월 중순에는 주장의 융경이 한성으로 향했다 .
경상도와 칠번대
[ 편집 ]- 6월 5일 모계 의 싸움 . 전승사 에서 무용의 사람이라고 불리는 손인갑이 이끄는 조선군이 모리세의 무라카미 경친이 지키는 시게요 의 요새를 공격했지만, 일본군이 분전해 격퇴해, 한층 더 추격해 수백명을 쓰러뜨렸다 [ 241 ] .
- 6 월 5 일醴泉의 싸움 . 요즈음, 안쿠쿠지 에쿠라 등의 1,500의 일본군이 함안 방면에서 의녕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곽재유는 鼎津에 병사를 두고 도하 를 막았다 .
- 5월, 카메이 이바사키의 군은 사천 부근에 상륙해, 사천성을 공략하고, 한층 더 곤양성과 하동성을 공략했다. 그 후, 카메이 이에사쿠 의 군은 일본군 상층부의 명령으로 기장성으로 옮겼다 . 242 ] .
11월 기장성의 싸움 . 수천의 조선군의병이 기장성에 공격했지만, 일본군은 이를 격퇴하여 800개의 목을 얻었다 [ 242 ] .
- 8월 7일 선산·인동의 싸움 . 호소카와 충흥·하세가와 히데 이치 · 기무라 시게이 등이 이끄는 1 만 2000일본군이, 선산 에 서서 있던 조선군의병을 소토 했다 .
- 8월 20일 제1차 성주성의 싸움 . 조선군 수천명이 모리세가 의지한 성주 성 을 둘러싸고 있다 .
- 9월 10일 제2차 성주성의 싸움 . 병을 모은 15,000의 조선군이 다시 모리세가 의지한 성주성에 다가가 모리휘원의 무장들이 구원에 달려갔다. 모리 의 무장 은 김천역 에서 조선군 244 ] .
- 9월 23-26일 창원의 싸움 . 호소카와 타다오키, 하세가와 히데이치, 키무라 시게이케 등 2만의 일본군이 김해에서 진주성으로 향하는 도중 창원성에서 출격하여 노현으로 요격에 해당한 경상우병사, 야나기 히로시 등 천의 조선군을 격파해, 3일 후에는 창원성을 공격해 1천4백명을 처치했다 . 245 ] 패주한 야나기 타카히토는 후방 진주성에 들어가려고 하지만, 부하이며 수장의 진주목사· 김시민 은 일본군의 돌입을 두려워 성문을 여는 것을 거부했다.
- 10월 6-10일, 제1차 진주성 공방전 . 일본군은, 부산 서방의 제압을 획책해, 진주성 의 공략을 도모한다( 호소카와 충흥 지휘의 일본군 대금시 지휘의 조선군)가, 조선군이 방위에 성공했다 [ 주75 ] 조선군 지휘관 금시민 은 일본군의 철포에 의해 중상을 입고 공방전 후에 상처의 악화에 의해 사망했다.
- 12월 7-14일, 제3 차 성주성의 싸움 .
조선수군 동향
[ 편집 ]- 5월 7일 해안이동을 하고 있던 일본 수송선단에 대해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 91척 함대가 공격, 해전을 상정하지 않았던 50척의 일본 수송선단은 주야전에서 15정이 격파된다(다 마우라 전투 ).
- 5월 8일 조선수군은 적진포에 있는 일본 수송선 13척을 공격, 일본선 11척은 격파된다.
- 5월 29일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이 일본 수송선 단 을 공격 했다 .
- 6월 2일, 가라우라의 해전 [ 246 ] .
- 6월 5일, 제1차 당항포해전 [ 246 ] .
- 6월 7일, 쿠리우라 해전 [ 246 ] .
- 7월 7일 해전용 수군이나 조선 연안을 서진하는 작전을 갖지 못한 일본군은 육전부대나 후방에서 수송임무에 맞고 있던 부대 에서 급거 수군 을 편성 해 대항 했다 . ] 의 일본 수군이 패배한다(한산도 해전 [ 247 ] ).
오랜 왜구 대책으로 선체 파괴를 위한 원전 지향의 조선 수군에 대해 선원 제압을 위한 근전 지향의 일본 수군에서는 장비나 전술의 차이도 있고, 정면 충돌의 해전을 하면 일본 수군이 불리했다. 7월 7일 한산도 해전 에서 일본 수군이 패배하자 일본군은 해전 불리를 깨닫고 출격 전술 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 로 방침을 변경했다. 당초 독점적으로 수송용이었던 일본 수군의 배에도 대철포가 갖추어져 일본군은 세력 범위의 요소에 요새(왜성이나 철 낫즈라고 불리는 포대)를 쌓아 대통과 대철포 를 갖추어 수륙 병진해 활동하게 되었다. 이 방침전환은 효과적으로 기능했으며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박지역 공격은 부산포 공격, 쿠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은 피해를 많이 낼 뿐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 출격 횟수는 급감했다. 일본군은 거제도에도 성곽을 건설하고 거기에 도요토미 히데카츠 의 군세를 두고 일본 수군과의 제휴를 깊게 했다. 당시의 배는 항해력도 미숙하고, 육상에의 의존이 강하기 때문에 수륙 공동 방어 전술은 유효하게 기능했다.
- 그 중에서도 부산포는 문록의 역 개전 직후 일본군에 의한 점령 이래 일본의 히젠 나고야에서 이키·쓰시마를 거쳐 부산에 이르는 루트가 일본군의 해상교통로로 되어 있으며, 보급물자는 일단 부산으로 하양된 후 육로 내륙으로 수송되고 있었다. 말하자면 부산은 일본군에게 취급 연락상의 근본이 되는 거점이었다. [ 248 ] ”로서 9월 1일 조선수군은 총력을 꼽고 부산탈회를 목표로 했지만 일본군으로 격퇴되어 패퇴하고 [ 249 ] 조선 수군 은 가시마 만도· 정운 이 전사 하는 등 손해를 많이 내고 철수했다( 부산포해전 ) [ 251 ] 지금까지 연속적으로 출격을 반복해 온 조선수군은 이 싸움을 경계로 두드러진 활동을 정지한다. 전양에 나타난 것은 이때가 처음으로 마지막이 되었다. 이로써 부산은 일본군에게 있어서 안타까운 장소가 되어, 전쟁의 종결까지 보급 연락상의 근본 거점으로서 계속 기능하게 된다.
명군 참전
[ 편집 ]명군의 참전을 받고, 일본군은, 제장의 합의의 결과, 연내의 진격은 평양까지에서 정지해, 한성의 방비를 굳히게 되었다.
한편, 명조정은 조승훈의 7월 16일 평양전의 패배라는 사태에 침착경을 대표 로 세워 일본군에 강화를 제안.
- 7월 29일 조선의 장금 명원 (도원수)이 이끄는 조선군 1만여 명이 평양을 공격했지만, 이를 제일대의 코니시 행장들이 크게 깨고 조선군은 많은 손해를 내고 철수했다( 2 차 평양성 전투 [ 252 ] ] .
오랑카이 침공
[ 편집 ]7월 하순부터 8월 중순까지의 기간, 카토 기요마사는, 「오랑카이(여진족)」[ 주 76 ] 의 전력을 시험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 만주 에 들어가, 근처의 여진족 의 성 을 공격 했다 [ 216 ] . 그때까지 여진은 종종 국경을 넘어 조선을 습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함경도의 조선인 3,000명도 이에 (가토 기요마사의 군세 8,000명에 ) 합류 했다 . [ 216 ] 여전히 우위 에 서 있었지만 , 철수 했다 [ 216 ] . 이 후, 키요마사는 히데요시에게 「오랑카이로부터 명에 들어가는 것은 무리이다」라고 히데요시에 보고하고 있어, 단지 싸웠을 뿐만이 아니라, 명에의 진공 루트를 찾는 목적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 주 77 ] .
이 여진 침공을 받고 여진족의 장 널 하치는 명과 조선에 지원을 제기했다. 그러나 양국 모두 이 제의를 거절했다.
일본군의 군평정
[ 편집 ]명군의 참전을 받아 조선봉행인 이시다 미츠나리 , 마스다 나가 모리 , 오오타니 요시카즈 , 히데요시의 상사 , 구로다 타카타카 등은 한성에 여러 장을 불러 군평정을 열었다 [ 220 ] .
이 평정에서 '올해 중 당나라 연기', '히데요시의 조선 진입 중지', 이 두 가지를 히데요시에게 진언하는 것이 정해졌다.
쿠로다 타카타카는 한성에서 북쪽으로 1일 이내의 거리에 요새 를 쌓아 한성의 수비에 힘을 쏟는 것을 제안 .
덧붙여 가토 기요마사는 오랑 카이에 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 평정에 참가할 수 없었다. 한편, 청정으로부터 하면 함경도 파견 때 가장 우려하고 팔도국할에 반대의 이유로서 온 사태(긴급의 합류에 늦지 않은 사태)가 일어난 것에 반발해, 삼성과의 관계가 악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 136 ] .
일본군·명군 휴전
[ 편집 ]8월 29일 침착경과 코니시 행장 사이에서 50일간의 휴전이 약속 되었다 [ 255 ] .
평양, 벽제관, 고슈 전투
[ 편집 ]명장군으로서 명예 높은 이여마츠의 군은 총병력 4만명 3,000명으로, 이가의 자각의 사병 에 의해 구성되어 있어 정예 무비의 군으로 알려져 있었다 [ 256 ] .
다음 문록 2년(1593년) 정월, 이여마츠는, 사용을 평양 교외의 순안에 파견해, 명조정이 강화를 허락해, 사자가 곧 도착하는 것을 코니시군에게 전했다. 강화 그 자체가 함정이었다. 타케우치 등은 도상에서 복병에 의해 살아남을 수 있다. 일부가 돌파에 성공해 코니시에 전한다 . 257 ] .
1월 6 일부터 전투가 개시되었다( 제 3차 평양성의 싸움 ) . , 명·조선군은 합계 51,000여명이 되었다(명군 43,000, 조선군 8,000 ) . , 일본군은 내성에 처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철포화기가 예상외의 장비였기 때문에, 이 장군은 무리 공격에 의한 자군의 희생을 고려해, 포위의 일부를 풀어, 소서군의 퇴각을 촉구해, 추격전으로 하기로 했다 256 ] [ 258 ] .
1월 7일 밤, 코니시군은 탈출했다. 다음날, 명군은 정기 3000명으로 추격을 개시, 일본군 은 360 여가 토벌 되었다 [ 259 ] ( 이설 있음 [ 260 ] ) . 그러나 일본군의 절반이 소사되었다는 설명이 조선왕조실록에 있다 [ 263 ] . 또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제3차 평양성 싸움에서 명군이 얻은 1285의 수급 중 절반이 조선인의 백성이었고 전투 중에 소사하거나 익사한 1만명도 모두 조선의 백성이었다는 명군의 석유봉, 양정란 4 ] 이 일이 중국에서도 화제가 되자 [ 265 ] , 그 후, 이여 마츠 는 반론했지만 [ 266 ] , 명군의 송연 창 에서 탄핵 당했다 [ 267 ] . 269 ] .
코니시군의 철퇴시, 황주에 있던 오토모 요시츠네는 명군 습격에 즈음해, 코니시군의 수용도 하지 않고 퇴각한다고 하는 실태를 연기했다(후개역), 코니시군은 낙담했지만, 한층 더 퇴각을 계속해, 용천산성에 재진하는 구로다 나가마사에 맞이되었다 [ 256 ] 회의에서는 일단 개성까지 철퇴하고 한성에 집결하기로 했다.
1월 18일, 명군, 개성 입성.
1월 25일, 명군과 일본의 척후군이 접촉. 다음 26일 미명, 타치바나 무게 대 2000 병이 진군 개시 했다 . 271 ] [ 272 ] [ 273 ] [ 274 ] ( 벽제관의 싸움 ) . 이 싸움 에서 명군은 큰 손실 을 내고 [ 271 ] ) 총사령관 이여마츠 는 위태롭게 죽음 에 직전까지 몰렸지만 평양까지 퇴각 했다 . 이 전투의 패배에 의해 이여마츠는 전의를 상실하고 명군의 기세는 휩쓸려 무력에 의한 일본군격퇴방침을 포기하고 강화교섭으로 전환한다. 적( 일본군 ) 분장도, 좌우 돌귀, 발예 무적 . , 이여마츠군을 위해 병량 등의 준비도 하고 있던 조선의 재상인 야나나리 류 가 저술 한 징 록록 에는, 「이여마츠 제독이 이끌고 있던 것은 모두 북방의 기병으로 화기를 가지지 않고 박탈 맛이 나쁜 단검을 가져 주셨다. 한편 적(일본군)은 보병으로 그 도검은 모두 3·4척의 예리함 무비의 것이었기 때문에, 충돌 격투해도 그 장도를 휘두르다 하고 베어지기 때문에 사람도 말도 모두 쓰러져 감행하는 것은 없었다. 햇볕에 제독은 파주로 돌아갔다.
2월 12일, 고슈 의 전투 . 조선군은 1일째의 공격을 격퇴했지만(조선군 참일군 130급), 권慄은 일본군의 공격을 위협해 성을 포기하고 [ 256 ] , 파주 까지 퇴각했다 [ 278 ] 징징록 에 따르면, 권율은 이 전투 후 일본병의 시체 를 모아 “지체를 찢어 숲의 나무 곳곳에 걸게 하고 그 분노를 받았다”고 한다 [ 278 ] .
카토 키요마사의 한성 귀환
[ 편집 ]한편, 9월 중순, 2번대의 카토 기요마사는 안변 까지 , 나베시마 나오모는 함흥 까지 돌아온다 [ 221 ] , 길주 에서 안변 까지의 성들에 병사를 두고, 청정·나베지마 나오모리·아이라 요시보 등은 향후의 함경도의 통치 방침을 협의하고 있었다. 한 헤이안도를 맡은 코니시 행장에 대한 불만은 강하고, 9월 20일에 오다 노부오와 키노시타 요시히데에 대해 받은 서장에서도 분노를 표명하고 있다 그동안 이웃나라이기도 하고, 대립을 피해 온 카토 기요마사와 코니시 행장의 확집의 모아가 보인다 136 ] .
10월이 되면, 길주 등에서 일본군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지만, 다른 방면에서의 전황의 악화나 눈이 내리기 때문에 토벌에 가는 것이 곤란한 정세였다. 대의 패주 보도를 들은 한성의 봉행중이었던 이시다 미츠나리·오타니 요시츠네·마스다 나가모리는 2번대에 함경도로부터의 철퇴를 엄명, 부득이하게 가토 기요마사 등은 한성에의 철퇴를 받아들여, 2월 29일에 조선 왕자 2명( 임해군 , 순화 군 ) 을 데리고 279 ] , 나베시마 나오모는 함흥에서 한성으로 귀환했다 [ 280 ] 청정은 왕자를 일본에 연행해 히데요시에게 속견시키는 의도를 갖고 있었지만, 일본의 히데요시 및 그 주변에서는 강화교섭의 진전과 함께 일본에는 연행하지 않고 조선측에 돌려줄 방침이 굳어져, 4월 하순에는 청정에 대해 상주 방위에 전념시키기 위해 왕자를 다테 마사무네에게 인도 하는 것 .
일본·명강화 교섭
[ 편집 ]벽제관의 싸움 후, 후퇴한 명군이 개성에 들어가 잠시 후, 군량이 다 갔다 . 명군의 이여마츠 제독의 부하의 제장이 군량이 다한 것을 이유로 군을 철퇴시킬 것을 제독에게 요청했다 [ 281 ] 제독은 군량을 준비할 수 없는 조선조정에 분노하고, 야나나리 류 등 조선조정의 요인을 불러 정원에 무릎을 꿇고, 큰소리로 꾸짖고 처벌하려고 하고, 야나이 용은 눈물을 흘려 사죄했다 [ 281 ] 전란에 의해 조선의 국토는 거친 민중은 굶주리고 있었지만, 조선조정은 모은 식료의 대부분을 명군의 군량 으로서 제공 했다 [ 282 ] . 북한 일본군은 강화협상 을 개시 한다 [ 256 ] .
- 일본군은 조선왕자와 그 종자를 반환
- 일본군은 부산까지 후퇴
- 명군은 개성까지 후퇴
- 명명에서 일본으로 사절을 파견
명측에서는 송응창·침오경이 공모해, 부하의 사용 아즈사와 서일관을 황제로부터의 칙사에 위장해 일본에 파견하기로 했다. 한편, 일본의 히데요시에게는, 이 칙사는 「거짓말」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보고되고 있었다.
이 강화협상은 일본과 명과의 사이에서 행해져 조선은 교섭의 장으로부터 제외되었다 조선측은 국왕 이하 일관해서 강화에 반대하고 있었다. 를 사이에 두는 권리가 없고, 단지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 285 ] [ 286 ] .
4월 18일, 합의 조건에 근거해, 일본군은 한성을 나와, 명의 칙사·침유경·조선의 2왕자( 임해군 , 순화군 )와 함께 부산 까지 후퇴했다 .
조선 측은 이여마츠에게 일본군을 추격하도록 탄원했지만 이여마츠는 이를 무시하고 일본군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 287 ] .
5월 1일, 히데요시는 오오토모 요시츠네, 시마즈 타다츠시 , 하타 부모 를 개역 처분 으로 삼는다 .
5월 8일, 코니시 행장과 이시다 미츠나리·마스다 나가모리·오타니 요시츠네의 삼봉행은 아키라사와 함께 일본에 출발.
5월 15일, 명칙사는 나고야에서 히데요시와 회견.
- 명의 황녀를 천황 의 왕비로 보내는 것
- 감합 무역 을 부활시키는 것
- 일본과 아키라, 쌍방의 장관이 맹세를 교환하는 것
- 조선 팔도 중 남쪽의 4도를 일본에 할양하고 다른 4도와 한성을 조선으로 반환하는 것
- 조선왕자와 가로를 1, 2명, 일본에 인질로 내보내는 것
- 포로로 한 조선왕자 2명은 침착경을 통해 조선으로 반환
- 조선의 중신들에게 향후 일본에 등장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게 하는 것
이시다·코니시 등은 본국에는 재작성하여 보고하면 된다고 진언 .
한편, 아키라로 향한 나이토 여안은 히데요시의 「납관표」를 가지고 있었지만, 아키라의 송응창은 히데요시의 「항복」을 나타내는 문서가 필요하다고 주장.
제2차 진주성 전투와 전선 교착
[ 편집 ]한편, 이 무렵, 히데요시도 조선남부의 지배 확보는 필수로서 진주성 공략을 명 한다 [ 256 ] .
일본군은 6월 21일부터 29일에 걸려 불과 8일(전투 개시부터 3일)로 공략한다(제2차 진주성 합전 ) . 최경회 , 충청병사, 황진 , 진주부사, 서례원 , 의병장, 고종후 , 김해 부사 , 이종인, 거제현령, 김준민 등 의 무장 이 전사하여 군민 2만명이 전멸했다. [ 288 ] 6월에는 명군도 남하하고 있어 조선군은 구원을 요청했지만 '성을 비우고 싸움을 피하는 것이 양책 ' 이라는 대답을 얻었다 . 일본군은 진주성을 공략하면 더욱 전라도를 엿보며 각지의 성을 공략, 명군이 진출하자 전선은 교착하여 휴전기에 들어갔다.
일본군은 전라남도에서 7월 5일에는 구례, 7 일 에는 계곡까지 진출 했다 . 본군은 영구적인 지배와 재진을 위해 한반도 남부 각지에 거점이 되는 성의 축성을 시작했고, 축성이 시작되면 방위력이 약한 진주성은 무용으로 파괴되었다.
협상결열과 재출병
[ 편집 ]히데요시는 명항복이라는 보고를 받고, 명조정은 일본 항복이라는 보고를 받고 있었다.
결국 일본의 협상 담당자는 '관백강표'라는 거짓 항복문서를 작성했고, 명측에는 히데요시의 평화조건은 ' 감합무역 재개'라는 조건뿐이라고 전해졌다. 결과 「봉은 용서하지만 공은 용서하지 않는다」(명의 책봉 체제 하에 들어가는 것은 인정하지만 감합 무역은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결정, 히데요시에 대해 일본 국왕 (순화왕)의 칭호와 금인을 수여하기 위해 일본에 사절을 파견했다. 1596년 9월, 히데요시는 내일 아침 한 명사절과 겸견. 자신의 요구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알고 격노 .
지진과 개원
[ 편집 ]또한, 1596년 9월 1일( 구력 7 월 9일 ) , 게이 쵸 이요 지진 이 발생 . 7.0-7.8, 죽은 자 710명, 지진과 쓰나미에 의해 류세지마 와 구광도 의 2개의 섬이 가라앉았다고 한다.
다음날 9 월 5일 오전 0시경, 게이쵸 후시미 지진( 게이 쵸 후 시미 대지진 ) 이 발생 [ 291 ] . 292 ] .이 큰 지진이 잇따라 경장 으로 개원되었다 (이 때문에, 지진은 「경장」을 씌운다).
덧붙여 이 지진보다 이전, 카토 기요마사가 이시다 미츠나리·코니시 행장 등에 호소되어 일본에서 근신하고 있었지만, 키요마사는 지진이 일어났을 때에 히데요시의 아래로 달려가 밸브 아키라를 실시해, 근신을 풀어 경장의 역에도 출진하게 되었다( 지진 가토 ).단, 기요마사가 지진의 2일 후에 낸 서장에서는 기요마사는 후시미 저택의 미완성에 보다 자신이 무사했다고 기록하고 후시미에는 없었던 것이 판명되고 있어 지진 가토의 일화는 사실이 아니었다고 보여진다 . 136 ] .
일본군 진립(경장)
[ 편집 ]평화협상이 결렬되면 서국제 장 에게 동원령 이 발행 되었다 . [ 295 ] .
재출정군 ·총계 141,500명 [ 296 ]
- 1 번대 및 2번대 ( 선수는, 카토 기요마사와 코니시 행장이 아오이에 의해 2일 교체로 담당한다고 정해져 있었다. 선수 때에는 제일대가 된다.)
- 카토대 (삼대비)
- 카토 기요마사 …10,000명
- 코니시대 ·총 14,700명(4대비)
- 3번대 ·합계 10,000명(3대비)
- 4번대 ·총 12,000명(4대비)
- 5번대・합계 10,000명(3대비)
- 시마즈 요시히로 …10,000명
- 6번대 총 13,300명(4대비)
- 칠번대 ·총 11,100명(3대비)
- 팔번대 및 9번대 (양인은 선진을 대체했다고 한다.)
- 제성의 재번중・총 20,390명
- 부산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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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목 첨부 (경장)
- 가키미 일직 , 후쿠하라 나가토, 쿠마가야 나오모리, 다케나카 시게몬
경장의 역할
[ 편집 ]
게이쵸 2년(1597년)의 후역의 작전 목표는 제장에게 발행된 2월 21일자 주인장에 의하면, 「전라도를 남기지 않고 깨닫게 성패하고, 한층 더 충청도나 그 밖에도 진공하라.」라고 하는 것으로 [ 297 ] , 작전 목표 달성 후에는 경상도 연안부에 철수하여 놓은 성( 왜성 )을 축성하고 재번 성주(주로 규슈의 다이묘)를 정하고 다른 제장은 귀국한다는 계획이 정해졌다 [ 298 ] [ 299 ] (게다가 그 후 게이쵸 4년(1599년)에 재출병에 의한 대규모 공세도 계획되었다. [ 300 ] ).
전라도·충청도 소토전
[ 편집 ]
조선왕조에서는 부산에 집결 중인 일본군을 조선수군에서 공격하라고 명령했지만, 거듭되는 명령 거부 때문에 삼도수군 통제사 이순신은 파면 되어 후임으로 원균이 임명됐다.
조선 수군 을 이어받은 전균도 공격을 범했지만, 마침내 경장 2년(1597년) 7월에 출격을 실시했다. 는 후지도 타카토라·와키자카 안지·가토 가메이 등의 수군이 공격해, 육상으로부터도 시마즈 요시히로·코니시 행장 등 이 공격 했다 . 해상에서 조선수군의 세력을 일소한 일본군은, 다음 8월, 우군과 좌군(및 수군)의 2대로 나뉘어 경상도로부터 전라도 를 향해 진격을 개시했다. 산성 과 남원성 에서 수비를 굳혔지만, 일본의 우군은 8월 16일 황석산성을 낙성시켰다( 황석산성의 전투 ). 그럼 주장의 명장 양원 이 도망, 이신요시, 장표 , 모 승처 등 의 부장이 전사, 조선군에서는 이복남 ( 전라병사), 임현(남원부사), 김경 로 ( 조방장 ), 정기원 ( 접 반사 ) 모토 하루 (구례현감)· 마응방 (진안현감)· 고응아 (방요사) · 이덕수 (판관)·황대중( 의병 지휘관 ) 등 여러 장이 전사, 미나미하라성은 낙성해, 명·조선군은 5000명이 전사 해 전멸했다 301 ]( 남원성 의 싸움) 도망한 양원은 나중에 죄를 묻고 명군의 손에 의해 처형되었다 .
일본의 제장은 전주에서 군의를 실시해, 우군, 중군, 좌군, 수군으로 나뉘어 제장의 진격로와 제압하는 지방의 분담을 실시해, 수비 담당을 결정 전라도·충청도를 순식간에 점령했다. 결국 남하해서의 항전을 결의해, 9월 7일에 선견대의 명장· 해생 과 쿠로다 나가마사의 부대가 충청도와 경기도의 도경 부근의 불산 에서 조우전이 되었지만 결착은 못하고, 모리 히데모토의 구원 도착을 들은 명군은 수원 에 철수했다 . 302 ] [ 303 ] ( 직산 전투 ).
한편 해상에서는 조선수군의 잔존함대를 삼도수군 통제사로 되돌아가는 이순신이 이끌고 전라우수영에 근거 했다 . 이 명량 해전 다음날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이 떠난 전라우수영을 점령 한다 . , 일본 수군은 전라도 서안까지 진출해, 육군에 호응하는 형태로 제압해 갔다.이 때 일본 수군은 강릉 이나 정희득 등 의 많은 포로 를 얻었다 .
규산에 일본군이 진출하자 명·조선군은 한강을 주방 위선으로 설정해 이곳을 어떻게든 사수하려고 했지만 [ 305 ] 한성에서는 일본군의 접근으로 패닉에 빠져 있어 사람들은 도주를 걸어 거의 무인 이 될 정도 였다 .
작산에서의 전투에 관해서는 조선왕조실록에는 일본군의 전사 500~600, 명군도 전사자가 많다는 기사가 있다. [ 308 ]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명군은 자군의 승리라고 보고하고 있다 [ 309 ] .
한편, 일본의 우군은 불산에서의 전투 후, 9월 10일에는 경기도의 안성·다케 야마 까지 전진 했다 [ 310 ] .
이렇게 일본군은 히데요시의 작전 목표대로 전라도·충청도를 성패하고, 한층 더 경기도까지 진출하면, 계획대로 연안부에 철수해, 문록의 역시에 세워진 성곽 군역의 외연부(동은 울산에서 서쪽 은 순천에 이르는 범위 ) 에, 계획대로 새로운 성곽군을 구축 성곽군의 완성 후에는 각 성의 재번군 이외의 군세는 귀국 할 예정이며, 다음 경장 3년( 1598 년 ) 중에는 공세를 하지 않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다 .
울산전역
[ 편집 ]축성을 서두르는 일본군에 대해, 명군과 조선군은 공세를 건다 경장 2년 12월 22일, 완성 직전의 울산 왜성 (일본식 성곽)을 명·조선 연합군 5만 6,900명 [ 313 ] [ 314 ] 가 습격해, 공성전이 개시된다. 울산성이 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니시우라에서 들은 카토 기요마사는 즉시 병선에 좌승하여 울산으로 귀환, 성내 에 들어갔다 . )의 단단한 방어 전에 명·조선군은 큰 손해를 입고 공격은 좌절했다 [ 316 ] [ 317 ] 그러나, 이때 울산성은 미완성이며, 식량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채의 농성전에서 일본군은 곤경에 빠진다 다음 해 경장 3년 1월이 되면 울산성은 굶주림으로 인해 낙성은 시간의 문제 가 된다 . 318 ] 이 도착해 다음 4일 수륙에서 명·조선연합군을 공격 패주시켜 2만명의 손실 [ 319 ] 을 주고 승리했다( 울산 성의 싸움 ) 명군 의 지휘관 클래스에서는 유격 양만 금 전사 [ 320 ] , 천 총 마래 전사 [ 32 ] , 천총 이동빈 전사 [ 323 ] , 파총곽안민전사 [ 324 ] , 천총 왕자화 전사 [ 325 ] , 초 총탕 분선 전사 [ 326 ] , 천총전 응태 전사 [ 327 ] , 장 응원전 8 사 , , 유격 진 부상 [ 329 ] , 유격 진 바위 부상 [ 330 ] 이라는 손해 를 내고 있다 . 싸움 후, 우키타 히데야 등 13명은 입지상 돌출하고 있는 울산 ·순천· 양산 의 삼성을 원군의 어려움을 이유로 포기하는 방안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상신 하고 있지만, 이것에 코니시 행장, 종의 토모, 카토 가아키, 타치바나 무네 등은 반대하고, 히데요시는 이 안을 각하해 상신자를 꾸짖었다. 증강 공사, 화기의 증강, 병량의 비축이 진행되어 견고한 방위 체제가 갖추어져 갔다. 4천여 명의 군세를 한반도의 재번으로 거둔 7만의 시코쿠중·중국중과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예정대로 순차적으로 귀국해 이듬해 이후 재파견에 대비했다.
시로 전투 (사로 병진)
[ 편집 ]히데요시는 다음 경장 4년( 1599년 )에 대군 을 재파견해 공세를 실시하는 계획 을 발표 하고 있었다. 행을 중심으로 철수가 결정되어 비밀리에 조선으로부터의 철수준비가 개시되었다.
전회의 패전 후, 명군에서는 본국으로부터의 증원을 얻어 병력은 약 10 만이 되었다 . 즉, 10만의 병력을 동원해 육군이 일본군의 거점들을 동시에 타격하는 한편, 수군에 퇴로를 차단시키는 것이었다. 울산, 사천, 순천에 총력을 올린 공세에 나섰다 수륙 방면에서의 협격을 통해 한반도에 잔류하고 있던 일본군을 괴멸시킨다는 이 구상은 이른바 ‘사로병진책’으로 통칭 됐다 .
제2차 울산성 전투
[ 편집 ]제1차 울산성 전투 후 울산성은 계속 가토 기요마사군이 수비를 하고 있었다. 게이쵸 3년(1598년) 9월, 명장 마귀 총병이 지휘하는 동로군 29,500명 [ 333 ] (명군 24,000명, 조선군 5,514명)가 카토 기요마사가 수비하는 울산 왜성(농성병 10,000명)을 공격했지만, 이번에는 게이성 준비 가 되어 있어 명·조선연합군의 공격은 격퇴되어 실패, 명·조선연합군은 큰 피해를 입어 경주로 철퇴했다( 제2차 울산성 전투 ).
'명사'에 따르면 일본군은 거짓 퇴각을 하고 마귀의 명군을 유인하고 명군이 공루에 들어갔을 때 복병이 일어나 명군은 패배했다 [ 334 ] . 경상도 좌방기사의 권응장이 도원수의 권경에 보낸 보고에 의하면 9월 19일 에 마귀는 부산의 일본군을 견제하기 위해 조선군의 김응서가 동모의 온정에 가서 다음 20일부터 울산 왜성을 공격 시작했다. 일본군은 수비를 굳히고 나오지 않기 때문에 명군의 피해는 헤아릴 수 없다.
사천의 전투
[ 편집 ]게이쵸 3년(1598년) 9월 말, 명장동일원 이 이끄는 명·조선연합군(조선선조실록의 병수는 명군은 26,800명 2,215명으로 기록되어 있다.)가 사천 왜성에 몰려 들었다 . 성에서 출격하자 명장유격 이녕·노득공 이하 수백명 을 쟁취 했다 . 포위를 돌파하고 사천 고성을 포기하고 사천 신성 ( 를 목표로 했다. 강신성에 철수하는 데 성공했다. 또 카와카미 타다시는 세토구치 시게지 에게 명령하여 적의 식량고를 태워 이에 성공했다. 신성에 대한 총공격을 하기로 결심했다 . 335 ] 이 전투 중 명·조선연합군의 화약고에 인화해 폭발했다 [ 335 ] 이 기계를 타고, 시마즈군은 성문을 열고 나왔다. 항도 창을 받고 부상도 7명 참는 등으로 분전했다 . 336 ] , 혼란해 괴주하는 연합군은 남강 에서 무수한 익사 자를 냈다 . 조선왕조실록에 기술된 명군전사자는 7000~8000명 [ 337 ] [ 338 ] , 혹은 명군의 과반수가 전사로 되어 있다 [ 339 ] .
순천성 전투
[ 편집 ]순천신성에서는 고니시 행장 , 마츠우라 진신 , 아리마 하루노부 , 고토 겐야 , 오무라 요시마 에 5명 13,700명 [ 336 ] 가 재번하고 있었다.명·조선연군 중, 서로군, 수군이 순천성에 공격 목표를 정했다 . 8명 으로 권慄이 이끌었다 . 333 ] 에 이른 게이쵸 3년(1598년) 9월 19일, 지상에서 명·조선군이 순천신성으로 진공해, 해상에서도 명·조선수군이 포격을 가했지만 일본군에 격퇴된다 [ 340 ] 이어서 20일·21일과 명·조선 수군이 성에 다가섰지만, 일본군은 방전해 이를 물리치고, 명의 유격 이금이 부상해 , 전사한 명병도 수 모르고 있다. 10월 2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총공격 을 걸었다 . 이날 지상에서는 명·조선군은 8백여명의 전사자를 내고 격퇴 되었다 . 도주 요시스케, 사량 금성옥 , 해남현 감야호 , 진도군 수선의경 , 강진현 감 송상진 이 부상했다 . 341 ] 여기에서 진창은 오후 8시경 수군을 이끌어 올라 조수에 승진해, 밤반성하에 다가가 일본군과 공방전이 된다. 군의 당선 23척(『선조실록』, 이순신의 『난중일기』에서는 사선19척, 號船20隻)이 얕은 물에 좌초한다 . 342 ] 명병에 사상 및 포로가 되는 것이 많이 나오고, 생환한 자는 14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처럼 3일, 4일과 수군은 해상으로부터의 공격을 실시했다. 대패를 피하고 있어 그 패보가 전해지고 있던 사정이 있다. 명·조선군은 큰 피해를 내면서 공성에 실패해, 10월 7일이 되면, 마침내 포위중의 지상군은 철퇴해, 명군은 고순천에 1만여를 남겨, 리우 자신은 부유까지 철수 했다 342 ] 이에 따라 수군도 10월 9일 해상봉쇄를 풀어 고이마지마( 간지마군 고이마면)로 철수했다 [ 342 ] 명군의 퇴로상에는 투기된 병량이 흩어져 있어 이 일부는 일본군이 전리품으로 입수했다.
이 삼성동시공격(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는 명·조선연합군이 동원한 총병력은 11만을 넘어 전역·후역을 통해 최대 규모에 이르렀다. 에 모두 실패로 끝났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 로 패퇴하고, 이것에 의해, 3로로 나뉘어진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파괴하고, 인심은 부끄러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 343 ] .
전쟁 종결
[ 편집 ]게이쵸 3년(1598년) 8월에 히데요시가 사망한 이후 유아의 도요토미 히데요리 가 뒤를 이은 도요토미 정권에서는 다이묘간의 권력을 둘러싼 대립이 현재화되어 정치 정세 는 불온한 것으로 되어 있다 . , 더 이상 대외전쟁을 계속하는 상황에는 없었다 거기서 드디어 10월 15일, 히데요시의 죽음은 은닉된 채 오대로에 의한 귀국 명령이 발령되었다. 장 4년(1599년)의 재출병 계획은 백지가 되었다.또 쓰시마 해협은 겨울이 되면 바다가 거칠어져 중량물 수송이 곤란해지기 때문에, 겨울을 맞이하기 전의 철수가 서둘렀다.
게이쵸 3년(1598년) 10월 하순, 귀국 명령을 수령한 코니시 행장은, 명군의 육장 리우綎과의 협상에 의해 무혈 철퇴의 약속을 달고, 인질을 수령 하지만 철퇴 준비에 착수하고 있었다. 전양 에 나타나 해상봉쇄를 실시해 해로 철퇴의 방해를 실시했다 . 수령하지만, 요즘 일본 측 철퇴의 내정(히데요시의 죽음)은 명·조선측도 아는 곳이 되어, 실제로는 명·조선 수군은 후퇴하지 않고 해상 봉쇄를 계속했다.
코니시 군의 탈출이 막혀 있음이 확인되면 사천에서 철수해 온 시마즈 요시히로, 타치바나 무네, 타카하시 쇼지 , 테라 자 와 히로타카 , 종 의 토모 , 코바야카와 히데포 , 치 쿠시 히로 몬 ] 등의 제장은 구원으로 위해 편성 해 .
이 노량해전 에서 시마즈 수군은 고전했다고 하며, 명·조선측의 자료에서는 자군의 승리를 강조하고 있다 . 게다가 이영남 (가리포 승사), 방덕룡 (가안군 수), 고득 장 ( 흥양현 감), 이히 요라 등 여러 장관이 전사 했다 . 346 ] 명·조선 수군이 퇴각하는 일본군을 추격하거나 혹은 다시 순천을 봉쇄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았다. 전해역 을 피해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해로 탈출에 성공했고, 거제도에 도착했다 . 347 ] [ 346 ] .
한편, 울산·니시우라·양산·다케시마 등 동부 방면에 전개하고 있던 일본군은, 이것보다 앞서 11월 15일경부터 각 자성을 철회하고 순조롭게 부산으로 향하고 있다 [ 348 ] [ 349 ] .
11 월 중순 일본군은 부산에 집결 했다 [ 350 ] [ 351 ] . 이렇게 일본의 출정 다이묘 들은 조선을 퇴거하고 일본으로 귀국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획책한 명원정, 조선정복계획은 성공에 이르지 못한 채 히데요시의 죽음에 의해 종결되었다 [ 주7 ] .
이 전쟁에 대해 청이 편찬한 ' 명사 '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조선 출병이 개시된 이래 7년, (명에서는) 10만의 장병을 상실해, 백만의 병량을 노비하는 것도, 중조(명)와 속국(조선)에 승산은 없고, 단지 관백(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 한다 . 7 ] .
경장 4년(1599년) 재출병 계획
[ 편집 ]히데요시는 게이쵸의 역 개시 시절부터 몇 번의 출병을 계획하고 있으며, 울산전역 뒤에는 6만4천여 명의 장병을 한반도의 재번으로 거점이 되는 성곽군에 남겨 방비를 굳히게 하는 한편, 7만여명의 장병을 본토로 귀환시키고 있었다 [ 353 ] 그것은 히데요시가 게이쵸 4년(1599년)에도 대규모 군사 행동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300 ] 일본군의 총사령관에는 이시다 미츠나리와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임명되어 있었다.
전역 후 평화 협상
[ 편집 ]평화협상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위임받은 쓰시마 종씨와 조선당국 사이에서 진행됐다. 그렇다고는 해도 일본 국내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재출병을 계획하고 대립하고 있는 제대명들을 조선에 보내려고 한다"는 불온한 소문이 흐르고 있었다 [ 354 ] .
일본은 단절하고 있던 조선과의 국교를 회복하기 위해 조선측에 통신사 의 파견을 타진하고, 그것을 받아 조선조정은 우선 일본의 내정 탐색을 위해 1604년에 탐적사 로서 유정을 쓰시마에 파견했지만, 정이 대명 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종 의 지호 1605년 (게이쵸 10년) 상경하여 후시미성 에서 회견했다. 야스마사는 일본측의 실권이 도쿠가와로 옮겨진 것과 이에야스의 평화의 의향을 확인하고, 그 후 조선보다 정식인 사절인 응답겸쇄환사가 파견되어 평화가 이뤄진 것은 1607년 (게이쵸 12년) 2대 장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에 대해였다.
아키라 는 일본과 국교를 맺지 않은 채 멸망하고, 아키라를 대신해 중국을 지배하게 된 청 은 이미 일본이 쇄국 을 취했기 때문에 무역은 하지만 정식적인 국교를 갖으려고 하지 않았다( 해금 도 참조).
일본군 보급
[ 편집 ]문록·경장의 역에서 일본은 초동에 있어서 16만명에 대한 막대한 수송량에 대한 보급을 훌륭하게 무시했지만, 황해도를 거쳐 해로에서 베이징을 공략할 계획은 제해권을 얻지 못하고 보급선 확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단념했다고 하는 설이 있다 [ 355 ] 또한 한반도는 육로, 해로 모두 수송경로가 정비되어 있지 않고, 보급활동에서 손모가 수반되는 상태였다 [ 356 ] .
한국에서는 일본군에는 수륙병진작전(일본의 육상군이 수도·한성으로, 한층 더 도망치는 조선국왕 일행을 쫓아 평양으로 진격하는 것에 맞추어 일본 수군은 해상을 진행해 조선 서해안을 북상해, 육군에의 보급을 한다는 작전)이 존재했다고 여겨져 왔다. 일본군의 수륙병진책이 있었다고 하는 설을 가장 빨리 쓴 것은 당시, 조선왕조에서 좌의정(부총리) 한층 더 영의정(수상)을 맡은 야나나리 류의 『징록록』일 것이다. 「일본의 수사십여만이, 또 서해에서 도래한다. 대왕의 용어는, 여기에서 어디에 갈 수 있을까」라고 서한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코니시의 말은 외교상(전략상)의 블러프(하타리)일 것으로 보인다 [ 357 ] .
실제의 일본군의 수군세는 전체에서도 1만에 못 미쳤다. 사절을 파견할 것”이라고 전했지만, 실제로 명으로부터 조선에 파견된 군세는 4만8천이었다(이계황). 침착경도 블러프를 사용한 것이다. 그것은 징록의 영향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순신의 해전을 일본군의 수륙병진책의 타파로 해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국왕과 함께 의주에 머물고 있는 야나나리 류에게는 코니시의 말은 현실미를 띤 협박이라고 느낀 것이 아닐까. 한 것은 아닐까. 만약 수륙병진 작전을 진행하려고 한다면, 선수중의 겨드랑이, 후도도, 구귀, 카토 카아키 등을 상륙시켜 내륙부에서 일하게 하지 않고, 이순신의 제1차 경상도에 출격을 하지 않고 일본 수군에서 행해지고 있던 것이 아닐까. 경장 2년의 제2차 침공 때도, 이들 선수중이 칠천 해전에서 대승한 뒤, 내륙부의 남원성 공략에 참전하지 않고, 단번에 전라도 서안으로 진출하는 것은 아닐까. 야나나리 류의 서술에 준거해 이 전역을 기술해 온 것이 아닐까 . 357 ] .
한반도의 보급선에 대해서는 끊김 없이 계속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 358 ] 최근 한국의 역사학회에서는 '이순신이 일본군의 보급선을 찢었다'는 주장이 진행되고 있다(예·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1기)·정구복 발표논문 '임진왜란의 역사적 의미' '이순신에 의한 해전의 승리에 의해 해로를 통했다.
일본군의 보급로는, 히젠 나고야에서 해로 이키를 거쳐 쓰시마 이쓰하라에 도착해, 쓰시마 북단에 위치하는 오우라 등으로부터 부산에 착안해 짐을 내리고, 그 후에는 육상을 한성으로 향한다고 하는 것 이 보급로를 조선수군이 직단하기 위해서는 부산 항구를 지속적으로 해상봉쇄하거나 부산 자체를 점령탈환할 수밖에 없었다. 산의 해상봉쇄를 한 적은 없고, 부산 전양에 나타나는 것 자체가 거의 없었다. 없었다. 한 번만 부산에 나타난 것이 텐쇼 20년 8월 29일(명력 9월 1일)의 부산포 해전 이었다 . 359 ] [ 360 ] 조선수군 의 총력 을 올려 부산항에 강경 돌입 했다 . 단 하루의 몇 시간의 사건이며 계속성이 없고, 이 후 이순신이 부산의 전양에 나타나는 것도 두 번 없고, 일본군의 보급로는 견지되어 안태였다 [ 359 ] .
일본군의 보급 상황을 나타내는 자료도 다수 존재한다.
한성 재진제장이 문록 2년 3월 3일에 발한 연서장에는 해로, 부산에는 병량이 운반되고 있으며, 4월 11일까지는 한성에 병량이 있는 것이 쓰여 있다 [ 362 ] .
문록 2년 4월 일본군은 한성 을 끌어 들여 조선남부에 재 포진한다 .
남부로의 재포진 후, 보급을 충당시킨 일본군은, 문록 2년 6월, 재공세를 개시해, 29일, 조선측 최대의 반항 거점으로 눈에 띄는 진주성을 공략했다.
진주성의 공략 후, 즉시 일본군은 경상도 남부의 연해부에 현재 왜성이라고 불리는 다수의 성곽군을 구축해 장기의 주류 체제를 정돈했다. 일본사」에 의하면, 이러한 성곽에는, 병량·탄약이 해로 수송되어 풍부하게 비축되고 있어 게다가 그것은 2년 이상 가지고 견딜 정도로 막대한 양에 이르고 있었다 [ 364 ] 또한 이 시기, 우에스기 경승, 다테 마사무네, 사타케 요시노부 등 증원군이 잇달아 해로, 일본에서 부산으로 도해하고 있다.
분록 3년 5월 24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발한 주인장에는 부산·가덕도·동문·다케시마(김해) 등의 왜성에 막대한 양의 병량이 비축되어 있어 이들이 고미화하지 않도록 새로운 병량미와의 교체를 지시하는 내용 이 있다 .
연안의 주요 항만에는 일본식 성곽(왜성)이 세워져 요새화되고 있어 일본군의 보급로는 견고하게 유지되는 체제가 갖추어져 있다 [ 359 ] . 일본과 명의 강화협상 중(1593년 2월 이후)에도 이순신은 왜성군의 공략을 위해 여러 차례 출격하고 있지만 최초의 관문인 구마 가와 왜성을 드디어 공략·돌파하지 못한 것이다 [ 359 ] .
경장의 역에 있어서도 일본군의 보급로는 견지되어 안태이며 제해권을 철퇴까지 계속 유지했다 [ 366 ] . 경장의 역에서는 칠천 양해전에서 전균면하의 조선수군이 괴멸적 타격을 입은 뒤 이순신이 삼도수군 통제사로 복귀해 조선수군의 지휘를 받지만 이후 한 번도 부산근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있었던 장소는 전라도 서방의 고이마섬이었지만, 거기서 동쪽 순천에서 부산의 약 140km에 이르는 연안은 일본군의 제압하에 있었고, 해안에는 많은 왜성이 쌓여 있었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일본군이 점령하고 왜성을 쌓은 지역보다 동쪽으로는 진출할 수 없었고, 한번도 부산의 전양에 나타나지 않았다 .
그러나 조선수군이 한 번만 부산 전양에서 일본군의 보급선을 방해한 적이 있었다. 거제도를 정박지로 삼아 부산 전양으로 진출하는 것이 가능했다 . 359 ] [ 367 ] .
게이쵸 3년 3월 13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재번의 제장에게 발한 서장에는, 「병량을 일본의 수도에 전달하는 것보다, 그 분(조선)에 전달하는 편이 용이하다」라고 쓰여 있다 [ 368 ] .
히데요시의 사후, 오대로의 명령에 따라 일본군은 철수 를 개시 한다 .
7년에 걸친 전쟁 동안 대군의 해상 수송과 양륙, 해안의 거점·해상 보급로의 구축과 장기간의 유지라는 도해 작전은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 366 ] .
군사력과 군사 상황
[ 편집 ]이하, 관계국의 군사력을 기록한다. 또한 당시 각국의 인구는 1600년 시점에서 일본은 2200만명, 조선은 500만명, 명조는 1억 5000만명이었다고 추측되고 있다( 역사상의 추정 지역 인구 참조) [ 369 ] 또한 이베리아 제국(스페인 포르투갈)은 1050만명, 네덜란드는 150만명, 브리튼 제도 전체에서 625만명이었다 [ 370 ] .
일본군
[ 편집 ]- 동원 수
- 히데요시는 침공군과 예비군의 숙영지로서 새로 건설한 나고야성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 다만 이들은 제대명에 부과된 군역의 동원정수로서 동원실수는 그 80% 정도라고도 불리며 [ 371 ] 일본군의 동원수에는 인부나 미즈오 등 비전투원이 포함되어 있어(문록의 역에 있어서 시마즈세에서는 비전투원이 전수의 4할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 37 ] .
- 그 밖에 20만5570여명의 병사가 고려로 건너가 나고야 재진은 10만2415병으로 총 30만7985병으로 진립됐다는 ' 마츠우라 고 사기'에 의한 기록도 있다 [ 373 ] .
- 무기・장비
- 15세기 중반부터 일본은 긴 내전 상태( 전국 시대 )에 있었기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 의 지휘 하에는 실전에서 단련된 50만명의 군대가 있는 상태가 되어 있어, 이것은 서양 의 서쪽을 통해 명과 늘어선 당시 최대 규모의 군대였다. 반입된 화조총은 그 후 곧바로 국산화되고 독자적으로 순발식 화조총 으로 개량되어 일본 국내 에서 보급되고 있었다. 374 ] 또한 당시 일본의 무사 인구는 200만명인 반면 영국의 기사 인구는 3 만명 이었다 .
- 일본군은 보병(足軽)이 중심으로 화승총과 활을 조합하여 사용하고, 접근전용으로는 장창 , 난전용으로는 일본 도를 사용했다. 부족한 탄환 중량 2종반(약 9.4그램)의 저렴하고 대량 생산이 가능한 비교적 소구경의 것이 주로 사용되고, 대통과 대철포를 포함한 장비 총포수의 약 7할을 이 2단 반통이 차지 했다 81 ] 화약의 원료인 질석 을 수입에 의지하고 있던 당시의 일본에서는 대구경의 포는 화약을 대량으로 소비하기 때문에 공성전에서 사용되는 정도로 야전에서는 그다지 사용되지 않았다.
- 전쟁 초기, 일본군은 500미터 이상의 최대 사거리를 가지고 [ 주 82 ] 활화살보다 관통력이 있는 화승총의 집단 사용 으로 우위 에 서 었다 . 본래의 일본의 화승총의 용법은, 서양에 있어서의 전열 보병 에 의한 탄막 사격과는 달리 저격형의 것이고, 사격 개시 거리도 1정(약 109미터) 정도였다고 하지만, 조선에 있어서는 보다 원거리로부터의 사격전이 행해지는 경향에 있어 원거리 사격에 의한 정밀도의 저하를 보충하기 위해 일제히 집중 사격도 행해졌다.
- 일본의 기병은 창이나, 마상용의 소형 총을 장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전국 시대에 총의 집단 사격에 대한 기병의 취약성을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병의 사용은 감소하고 있었다.
- 일본 수군은 안 택선은 일부의 상급 지휘관의 승선 등에 한정되어, 중형의 관선 이나 소형의 초고속 에 의한 기동성이 높은 전투를 주전법으로 해, 접현 노치에 의한 백병전 지향 그래서 가능하다면 적선을 잡는 경향 이 있었다 . 83 ] 일본 수군의 주요 임무는 식량과 병원의 수송이며, 선박에는 대구경의 화승총 형식인 대철포가 많이 사용되었다.
명군
[ 편집 ]조선에서 '천병'이라 불리는 명군은 문록의 역에서 조승훈이 있는 5,000명, 이여마츠가 이끄는 가을수경을 포함한 43,000명이 참전하고, 또한 바지관 전투 나중에 리우 루가 이끄는 5,000명이 증원 으로 새롭게 도착했다 . 377 ] .
게이쵸의 역에 대해서는, 최대 동원이 된 게이쵸 3년(1598년) 9월의 울산·사천·순천의 3방면 동시 반공 때의 병력을, 『선조 실록』은 수군을 합쳐 92,100명으로 해, 참모 본부 편찬 『일본전사 조선 역. 또 조선의 사료 '연예실 기술'에서는 양역을 통한 명의 동원수를 221,500여명으로 한다.
아키라의 보병은 광대한 제국에서 다양한 전투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무기를 사용했다. 또, 철봉, 사수의 호신용으로 한손도, 그 밖에 대포, 연막탄, 손 던지기탄 등이다 . 378 ] 루이스 플로이스의 기록에 따르면, 명군의 방어구는 철제 때문에 수비력이 있어 창도 일본도도 통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 379 ] [ 주84 ] .
그러나 벽제관 전투에 관해 조선왕조실록에는 '천병(중국병) 단원, 기마, 무화기, 길릉 진심, 불능진騁, 적(일본군) 분장도, 좌우 돌파, 발예 무적.'이라는 설명 이 있다 . , 이여마츠군을 위해 병량 등의 준비도 하고 있던 조선의 재상인 야 나나리 류 가 저술 한 징서록 에는, 「이여마츠 제독이 이끌고 있던 것은 모두 북방의 기병으로 화기를 가지지 않고 단단함이 나쁜 단검을 가져 주실 수 있었다. (일본군)은 보병으로 그 도검은 모두 3-4척의 예리함 무비의 것이었기 때문에, 충돌 격투해도 그 장도를 휘두르고 베어지기 때문에 사람도 말도 모두 쓰러져 대담하게 맞서는 것은 없었다(이하 약어)”라고 있다 [ 380 ] 이와 같이 명군은 일본군의 일본도에 시달린 것 같고, 일본군이 미나미하라성을 함락시켰을 때의 일본·명간의 교전에 관하여 징서록에서는 “일본병은, 성외에 있어 이중, 삼중에 둘러싸고, 각각 요로를 지키고, 장도를 분노 라고, 어쩌면 잘라냈다. 명국군은, 목을 늘어뜨려 칼을 받는 것만이었다. 군대나 민간에서 왜도 및 왜술이 널리 이용되게 된 것은 명대(1368-1644)에서였다. 의 칼이나 일본식의 검술이 무장의戚継光과 학자의茅元儀등에 의해 연구되어 군에 채용되고 있었다. 그는 왜가 중국에 공격해 왔을 때 알았던 것이다. 그들은 춤추는 보법을 이용해, 전방에의 돌진력은 빛이 섬뜩한 것 같고 우리 명의 병사는 마음을 빼앗길 뿐이었다. 척이므로 1장 5척의 사이에서도 공격받는다. 일본인에게는 먼 곳에서의 조총이 유효하다. 일본인의 검은 가볍고 오랫동안 접근을 허락한 후 우리 군의 총수의 움직임은 너무 무겁다. [ 381 ] 라고 있다 1790년에 조선에서 편찬된 무예도보통지에는, 중국의 사료를 인용하는 형태로 「(명의 戚継光困) 일본도는 왜구가 중국을 침범했을 때 처음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이 검을 손에 들고 춤을 추자 광섬 앞에, 우리 병사들은 신경을 빼앗기고, 왜인은 일장 너무 일약하고, 만난 사람은 양단당했다. 오늘이라도, (도만) 단독으로 사용해서는 방어할 수 없다. 칼은 지극히 강하고 날카롭고 중국도에서는 미치지 못하고(중략) 왜적은 용감하지만 어리석고 생사를 중시하지 않는다.
조선군
[ 편집 ]문 록역 의 전체 기간의 합계로 조선 은 172,400명의 정규군을 전개하고, 22,400명의 비정규군이 이를 지원했다.
조선에도 화승총 을 닮은 화기가 있었지만 구식의 것이었다. 철포 나미의 위력이었다. 종 의지가 1589년 사절로 조선을 방문했을 때 진물로 화조총을 줬지만 조선 국왕은 그것을 군기사(무기 제조관서)로 내렸다 . 383 ] 이조는 개전 전에 이 신병기의 잠재력을 간파할 수 없었다.
조선의 보병은 칼 [ 384 ] , 창, 활화살 등의 무기를 장비하고 있었다. 주력무기는 활이었지만, 당시 조선의 재상인 야나나리 류가 저술 한 징서록에 의하면, 조선의 활의 최대 사거리는 120미터 정도이며, 일본의 활의 140 미터 여보다 짧았다 [ 주85 ] .
더욱이 일본의 화승총은 조선의 활보다 위력과 명중률면에서 몇 배 뛰어났다. 징록에는 "(화조총의) 멀리까지 발사하는 힘과 명중시키는 수제와는, 활화에 몇 배한다.(중략) 궁화의 기술은 백보에 지나지 않지만, 조총은 자주 수백보로 및, (중략) 매우 대항할 수 없다"(동양 문고판 283페이지)와 있다(당시의 아침) 또 이 책에 상주에서 양군의 전투에선 조선의 활은 실사정도가 100m에 못 미쳤다. 또한 활을 병사가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화강총보다 길고 어려운 훈련이 필요했다. 이 밖에 플로이스 일본사에는 '화약 냄비(파네라 데 폴보라, 수류탄 같은 무기)', '철제의 투구', '튼튼한 가죽 방어구', '구리제 소형포', '화살을 쏘고 발사하는 사석포(봄발다 ) ' 등의 설명이 보인다. 조선의 기병은 대녀 진용 에 북방 배치되어 있어 난전용으로 껍질 장 과 창을 장비하고, 원거리전용으로 활화살을 장비하고 있었다. 조선 기병의 전투로는 충주 전투 · 해정창 전투가 있지만 모두 일본군이 승리하고 있다.
조선군의 방어구에 관하여 야나이 용이 저술한 징서록에 기록이 남아 있다 [ 385 ] 그에 따르면, 방위에 관한 제신의 한사람이 “적(일본군)은 창이나 칼을 능숙하게 이용하지만, 우리 조선군에게는 이것을 방어할 수 있는 말이다 ” 385 ] . 게다가 "전신을 두꺼운 철로 보이지 않게 하는 갑옷을 만들고 그것을 쫓아 적과 싸우면 적은 틈이 없이 찌를 수 없어 우리가 이길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 무게를 견딜 수 없고 움직임도 취하기 어렵고 사용이 어려운 것을 알고, 계획은 중지되었다고 한다 [ 385 ] 조선군은 일본병의 일본도·검술에 시달렸다. 아직 강에 몸을 던지지 않았던 자에게는 賊(일본군)가 뒤에서 장도를 분명히 썼지만 모두 다 붙어 칼을 받고 굳이 저항하는 사람도 없었다. 한 일본군과 조선군과의 접촉에 대해 말한 기사에는 “해가 뜨고, 적은, 미츠히코들의 긴장이 약간 느슨한 것을 보고, 흰 칼날을 반짝반짝 큰 소리를 내고 돌진해 왔다. 하고 두려웠다. 사람이 보행할 수 없을 정도였다”라고 그 밖에 “우리군(조선군)은, 적이 아직 산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일발의 포성이 울려, 사방면에서 큰 소리로 불리면서 튀어 나오는 것이 모두 적병(일본병)이었기 때문에, 승천해 총붕 선생님은 적이 없는 처를 향해 분주했는데, 뭉쳐 진흙 속에 우울해 버렸다. 기대되는 일본인의 태도의 위력에 대항할 수 없어""일본군은 극히 계획적으로 진출해, 철포에 가세해, 태도의 위력을 가지고 흩어져 습격했기 때문에, 조선군은 전장을 포기해, 다리를 날개(같은)로 해 앞을 다투고 뻗었다"라고 하는 기술이 있다. 무기도보통지 에는 , “우리나라(조선)는, (중국에서 보고 변함없는) 바다 밖으로 치우쳐 있어, 옛부터 전해지는 것은, 단지 궁화의 기예 하나가 있을 뿐입니다. 말상 일창 등이라고 해도, 시장에서 이용된 적이 없고, 그 사용법도 상세하게 갖추어져 있지 않습니다.그 때문에, 검창은, 그 무기 자체가 포기되어 오래입니다. 부터 낼 여유가 없고 창도 자르지 못하고, 모두 흉인에 의해 일과 피를 흘린다. 모두 검이나 창 훈련법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수군 은 고려시대부터 대왜구를 목적으로 정비되어 훈련도 이루어지고 있어, 구식이면서 화포를 많이 장비하고 있었지만, 개전 직후부터 일본에는 대패 하고 있다 . 유명하지만 실체 불명의 거북선도 이 이타야 선 을 개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386 ] 한층 더 불안정한 해상의 배 위에서 쏘게 되면 거의 눈앞까지 접근하지 않으면 포탄을 명중되지 않고, 조선의 함대가 일본선으로부터의 화조총·궁화살 등에 의한 반격의 사거리 밖에서 일본선을 격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387 ] 또한 조선의 화포는 철탄, 석탄을 복수 담아 산탄의 형태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화연(火矢)을 쏘고 적선을 태우는 것을 주안으로 하는 화차가 사용되고 있었다.
조선의 국방태세
[ 편집 ]당시 조선과 명 에 대한 주된 군사적 위협은 여진과 북방 기마 민족 , 왜구 였다 . 의 하나였던 쓰시마 를 공격했다 ( 응영 의 외각 ) . 화약이 도입되어 조선에서는 화포가 개발되고 있어 이것이 해전에서는 큰 위력을 발휘해, 일본군과의 해전에 있어서의 조선 우위로 연결 되었다 . 그렇다면 일본을 큰 군사적 위협으로 는 보지 못했다 .
1583년 학자로 유명했던 당시 병조판서(현재 일본의 방위대신에 해당) 이준 은 전국의 병력을 100,000명으로 증원하도록 조정에 진언했지만 [ 주86 ] , 이주는 서인파 였기 때문에 당시 정권을 쥐고 있던 동 인파 (야나이 류가 소매 ) 는 이 제안을 각하 . , 그 밖에 모험을 좋아하는 귀족과 자유를 요구하는 녀석계층이 있을 뿐이었다 . 현실미를 띠고 와서 이 문제에 대해 문관 류성룡이 입장을 바꾼 뒤에도 정치적 권력 다툼을 위한 논쟁이 이루어질 뿐이어서 실제 군비확장은 불충분했다.
또 야나나리 류 가 “(장군이) 백인이라도 아무도 병사 훈련 방법을 모른다”고 한탄할수록 조선 군인은 군사적 지식보다 사회적인 인맥에 의해 승진이 결정되고 있다. 그렇다고 군대는 조직이 느슨해지고, 병사는 거의 훈련 되지 않고 , 장비 도 빈약 하고, 평소에는 성벽 등의 건설 공사에 종사하고 있었다. 88 ] .
일반적으로 조선의 요새는 산성으로, 산 주위에 뱀처럼 성벽을 둘러싸는 것이었다. 벽의 높이도 낮았다.
양반 사군
[ 편집 ]전쟁 초기에 곽재유가 사병 을 징모했다. 무장집단은 일부 지방에서 노역과 전투 에 참가 했다 .
문록의 역동안 한반도 안에서는 전라도만이 침공 을 면한 지역 으로 남아있었다 .
곽재유의 거병은 반란 으로 여겨져 조선관군과의 전투가 일어나고 있다. ] 를 꺾었다. 이조조정은 곽재유에 관직을 주는 조치를 취하고 관군의 보조를 인정했지만, 한편 조조정은 곽재유군을 순찰사 등의 지휘하에 통제했다. 허수아비 문록 역후 휴전 기간에 곽재유군의 한성 습격으로 이조조정은 그 위험성을 인식하고 통제를 강화하고 말기에는 관군에 통합되어 독립된 부대가 아니게 되었다.
전쟁 후, 소위 의병은 불우했다 [ 주 89 ] .
영향
[ 편집 ]주변 국가에 미치는 영향
[ 편집 ]결과적으로는 조선 일국을 침범한 것에 머물렀지만, 원래 이 전역은 명국 정복을 목적으로 시작되었고, 당(중국)·천축(인도)·남만에 이르기로 구상된 세계 진출에 대해서도, 히데요시는 초기 단계에서 언급되고 있다 . 이들은 과대 망상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의 변화를 느끼고 있으며 [ 392 ] ‘입공인가 정벌인가’라는 두 자택일을 다가온 상대는 실제로 하루카 남방의 여러 나라에도 미치고 히데요시의 목적은 명이나 조선에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류큐 왕국
[ 편집 ]텐쇼 10년(1582년) 6월 7일, 중국 대답 에 앞서 모리와 화목했기 때문에, 부하의 무장 가메이 이에사쿠 에 약속하고 있던 이즈모의 나라에서의 가증이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에 다른 장소를 소망하도록(듯이)라고 히데요시가 말했는데, 이바시로는 하고 싶은 곳은 없기 때문에 "원한다면 류큐를 받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이를 줬다. 이후 그는 시바타 카츠야 멸망의 무렵(텐쇼 11년)이나 코마키 나가테의 무렵(텐쇼 12년)의 서장에서는 카메이 류큐 모리로서 서명하고 있었다 . 393 ] 문록 원년, 이바사키는 류큐국을 받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류큐 벌사」주인을 갖고 싶다고 소원해, 히데요시는 부득이하게 이를 허가했다 . 393 ] 출정 후는 동료가 된 시마즈씨를 고려했는지, 이바사키는 류큐 수호가 아니라 중국의 지명인 '타이슈 모리'를 자칭하게 되었다.
류큐 왕국은 명의 책봉국이었지만, 당시는 아직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정명군에 가세하라는 명령을 공개적으로는 거부했지만, 실제로는 일본군에의 보급에 협력 해 , 시마즈 요시히사는 류큐왕에게 나고야성 축성이나 원정의 가세는 하지 않아도 되므로, 대신에 금은미곡을 보내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시에 명의 신하이기도 한 류큐는, 일본측에는 비밀리에, 사전에 나카기 왕자를 명 에게 파견 해 히데요시의 정복 계획을 통보하고 있어, 명으로부터도 출병에 대해서 선도역을 명령받고 있었다.

인도(인도)
[ 편집 ]텐쇼 10년에 로마를 향해 출발한 텐쇼 송 유럽 소년 사절이 텐쇼 15년의 귀로에 포르투갈령 인도 의 고아 식민지 에 들렀을 때, 부왕 으로부터 히데요시에의 서한이 탁탁되었다. 그들은 예수회 순찰사 발리냐노 를 동반하여 텐쇼 18년(1590년)으로 귀국. 다음 텐쇼 19년 정월에 발리냐노는 히데요시에게 속견해 이 서한을 건네주었다. 부왕의 서한은 배틀렌 추방령이 나왔다는 것을 알기 전의 내용으로, 히데요시에게 경의를 기울여 기독교의 포교와 선교사의 보호에 감사하고 앞으로도 계속되는 양호한 관계를 기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7월 25일, 히데요시가 발한 반서는 이 기대를 배반하는 것이었다. 승황이 기초했기 때문에 내용은 조선 국왕에게 건네준 것과 비슷했지만, 히데요시는 스스로가 국내의 천하 통일을 이룬 위대한 인물임을 과시하고, 지금은 명국을 정벌하지 않고 있는 곳이지만, 인도에도 가려고 생각하면 제작도 없기 때문에 "원근이동 말하는 한편, 인도의 불교와 중국의 유교와 일본의 신도는 일체의 것으로, 신도를 알면 모두에게 통한다는 독자적인 종교관을 피로해, 국민을 마도에 끌어들이려는 사법(기독교)의 포교는 앞으로는 용서하지 않기 때문에, 이후는 선교사가 입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 통상목적 입항의 안전을 보장하고 남만 무역을 보호할 의향을 나타내고 있었지만, 바리냐노는 통렬한 내용에 경악하고, 마에다 겐 이후 중개를 부탁하여 어떻게든 표현을 온화하게 하도록 고심했다 [ 395 ] .
이 서한에는 은사품의 무구 세트가 곁들여져 있었지만, 이것은 군사적 위협의 의미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해석되고 있다 .
스페인령 필리핀
[ 편집 ]
필리핀 은 당시 스페인 식민지 [ 주 90 ] 로 히데요시가 협상한 남방 국가 중에서는 유일하게 교전의 가능성이 있었다. 오리 토요 시대의 일본과는 사람의 왕래가 활발하고, 그러한 루손 섬을 왕복하고 있던 일개의 무역 상하라다 손 시치로 ( 가스파르·하라다)가, 필리핀의 방비가 수박인 것을 알고 히데요시에게 이 나라를 정복 는 쉽다고 상주한 것으로부터, 히데요시는 손칠로의 책을 받아들여, 텐쇼 19년(1591년) 9월 15일, 그에게 국서를 갖게 해 강복을 권하는 사자로서 마닐라 에 파견하기로 했다. 국서는 서령 필리핀에 조공과 복속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미 조선과 류큐는 일본에 입공하고 있어 대명국의 정벌하는 곳이라고 말했다.
손칠로는 도해 앞에 바리냐노에게 총독과의 면회의 입소문을 의뢰하고 있으며, 일본의 침략 의도를 살펴본 바리냐노는 마닐라에 있는 같은 예수회 선교사 안토니오 세데뇨에게 이 일을 전하려 했다. 1592년 봄 일본 필리핀 총독 고메즈 페레스 다스마리냐스 영어판 는 놀라 해안의 방비를 굳히고 경계하고 있던 곳에, 5월 31일, 손칠로가 도착해 국서를 건네주었다 스페인 편에서는 일본어 당한 후 스페인어로 번역됐다 총독은 히데요시의 말에 분개한 것 같지만, 요즘 스페인은 네덜란드나 영국과 전세계에서 전쟁 중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세데뇨와 상담하여 반서를 했기 때문에 내용은 무명의 상사를 들고 질문을 제시해 확인을 요청하는 것으로 히데요시의 요구에의 회답을 선전해, 시간을 벌려고 하는 것이었다.또 스페인 제국 의 대국으로서의 위엄을 과시하는 한편으로 일본도 대국인 것을 인정해, 대국 끼리의 수호 통상 을 희망하는 취지 도 전하고 있었다 . 91 ] 가 손자부로에 동행해, 공물을 갖게 해 파견되었다.분록 원년(1592년 말), 손칠로는 코보와 함께 사츠마로부터 히라도를 거쳐 나고야에서 히데요시에게 속견했다 사실과 필리핀의 대응에 히데요시는 두 국서를 보내도록 진언했지만, 이번 사자는 손칠로의 주인에 해당하는 하라다 키에몬이 맡게 되었다.
분로쿠 2년(1593년) 4월 22일, 키우에몬은 마닐라에 도착해 제2의 국서를 총독에게 건네줬지만, 스페인 측은 사전에 배에 동승하고 있던 명인을 막문하고, 일본 국왕이 구귀 요시타카에게 필리 핀 제도의 점령을 맡겼지만, 대만의 점령도 다른 인물에게 맡겼기 때문에, 당지의 원정은 그 다음인 등의 출처의 잘 모르는 괴정보를 얻어, 그것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회가 아니고) ) 프란시스코회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해, 히데요시의 요구는 내공이라고 설명하는 키우에몬에 대해서, 총독은 찌르고, 공물로서 보내는 것은 「대포의 탄환 있는 것만」이라고 고압적으로 교전의 결의 그런데 말라카 원정중에 지금 일본 과 개전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고 설득되어 불과 2주 후에 기우위문의 바람대로, 프란시스코회 선교사 페드로·바프티스타 92 ] , 곤잘로 가르시아 [주 92 ] 등 3명을 사자로 하고, 멕시코산의 스루마, 璻璃의 거울, 도금한 항아리 등을 선물로 통상동맹 조약을 제기하게 되었다. 타코 필리핀 사절은 다른 선교사와는 다른 검소한 옷차림이 눈에 띄었지만, 곤잘로가 일본어에 능숙했던 것이 다행히, 「일륜의 아이」를 칭 하고 위압적으로 행동하는 히데요시에게도 당당하게 건너 감탄시켰다. 없다고 반론.또 이 사절은 통상동맹 조약을 제기하기 위해 왔기 때문에, 새로운 요구는 본국에 묻지 않으면 대답할 수 없다고 말해, 그때까지는 스스로는 인질로서 일본에 머물러 있다고 해서 승낙되었다. 렌 추방령 후 신부 를 잃고 있던 교토에서 대환영됐다 . 년에는 마닐라에서 새롭게 3명의 선교사가 와서, 쿄자카 지방에서 의 포교 활동을 활발화시켜, 신도를 1만명 늘렸다 마에다 히데이 ( 현이의 아이)나 오다 히데노부 93 ] , 테라 자와 히로타카 등 다이묘 클래스도 요즘 세례를 받았다. 분로쿠 3년(1594년) 7월 20일에 귀조한 루송스케 사에몬이 사카이 의 다이칸 이시다 마사스미 를 통해 히데요시에게 우산, 촛불인 기분이 많다.
필리핀에서는 총독이 잇따라 죽고 테리요 데 구즈만 [ 주 94 ] 를 대신했지만, 누에바 에스파냐 (현 멕시코)에 파도 한 배가 일본 근해에서 난파해, 산 펠리페호 사건이 일어났다 . 위협에 느껴 경장원년(1597년)에 키리시탄 탄압을 강화해 통상동맹조약을 위해 체류중인 사자 전원을 처형했다. [ 396 ] [ 397 ]
1597년 2월에 처형된 26성인 중 한 명인 멀티노 데 라 어센시온 ( 은 필리핀 총독 앞의 서한으로 스스로가 처형되는 것과 히데요시 의 필리핀 침략 계획에 대해 일본에서 들은 것을 쓰고 있다 . 398 ] [ 399 ] 멀티노는 또한 침공 루트에 대해서도 "그는 류큐 와 대만 을 점령하고, 거기에서 카가얀에 군을 투입하고 만약 하나님이 진출을 멈추지 않으면 거기에서 마닐라 에 공격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 398 ] [ 398 ] .
대만(고산국)
[ 편집 ]대만(聺灣)은 당시 일본에서는 다카야마 국/타카사군(高山国/高砂)이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히데요시는 필리핀과의 협상중인 문록 2년(1593년) 그러나 대만은 중국 대륙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서부와 북부 연안에 거주했고, 고지에는 소수민족이 할거하고 있는 것만으로 통일된 정부가 존재하지 않았다. 불가능했고, 외교는 실패로 끝났다 . 때문에澎湖 제도 에 병사를 배치해 소통해금을 명령하여 쇄국하는 등 했고, 일정한 효과는 있었던 것 같다 . 397 ] [ 400 ] .
일본 국내 정세에 미치는 영향
[ 편집 ]휴전을 사이에 두고 6년에 걸친 전쟁은 일본·명·조선의 삼국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출병 전후에 발생한 영향
[ 편집 ]유수 중인 다이묘 영지 에 타이코 검지가 행해져 도요토미 정권 의 통치력과 관료적인 집단이 강화됐다.
또한 출병에 필요한 무기·탄약·병궁·전부의 대부분은 다이묘의 부담이며, 그 부담은 직접 출진하지 않은 영내의 가신이나 백성에 전가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의 전부로서 백성의 동원이 행해졌다. 그러면 동원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발생했고, 한 번 동원되어 한반도로 보내진 전부 속에도 도망쳐 비밀리에 일본으로 도망가는 것도 있었다.・히고의 백성으로부터 청정에 수행하고 있는 인부에게 충당해 기록된 것으로, 「지금이라면 집단으로 히고로 도망쳐 돌아가도 대관의 개조도 없는 모양이므로 도망치는 것이라면 지금이다」라고 하는 내용으로, 백성의 저항이 유수의 대관까지 말려들어 무언가가 되어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 401 ] 이 출진한 다이묘가 많거나 적거나 직면한 문제였다.
한편, 다이묘 중 최대의 돌고기를 가지면서, 규슈에의 출진 정지로 조선에 출병하지 않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은연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5대로의 필두가 된 이에야스는 히데요시 사후의 평화 교섭에서도 주도권을 잡고, 실질적인 정권 운영자로 올라간다. 이 관료 집단과 이에야스의 급성장 는, 도요토미 정권 존속을 도모하는 관료 집단(주로 이시다 미츠나리)과 차기 정권을 노리는 이에야스와의 대립으로 발전해, 게이쵸 5년(1600년)의 세키가하라의 싸움 에 이르렀다 싸움에 압승한 이에야스는 일본 국내에서 부동의 지위를 얻어 경장 8년(1603년)에 조정 보다 정이 대장군 에 맡겨 도쿠가와 막부 를 창설했다. 야스는 게이쵸 19-20년(1614-1615년)에 오사카의 진 으로 도요토미씨를 멸망시킴으로써 도쿠가와씨 에 의한 국내 패권을 확립, 에도시대가 시작되었다.
또 출병에 참가한 다이묘들에 의해 데려오거나 다이묘와 고용관계를 맺거나 스스로 일본에 온 조선인으로부터 다양한 기술 이 전해졌다 . 도자기 의 제법, 기와의 장식 등을 전한 것으로 일본 문화에 새로운 일면 을 더했다 . 402 ] .
익숙하지 않은 이국의 전쟁은 후의 대만 출병 · 일청 전쟁 과 마찬가지로 전사자 이상의 전병사를 발생시켰다 . 403 ] 동년 4월 12일자 도해 제장 앞 히데요시 주인장에도 병이 만연하고 있으므로 의사 20명을 파견한다 [ 404 ] 육지에서도 같은 해 7월 21일자 다테 마사무네 서장에는 종기라는 병을 얻은 사람은 10명 중 9명이 죽었다고 하고, 또 같은 달 24일자 서장에는 물의 차이로 많은 사람이 병사했다고 한다 [ 405 ] 루이스 플로이스의 조사에 의하면, 문록의 역으로 도해한 15만명 중, 사망자는 5만명, 그 대부분은 과로사·아사·동사·병사였다 [ 406 ] 다이묘에 한해서도 도요토미 히데 카츠 , 카토 미츠야 , 도다 카츠 타카 , 하세가와 히데이치, 고토 준겐 , 시마즈 쿠보 가 도카이 앞에서 또는 도카이 앞에서 병을 얻고 귀국 후에 병사하고 있다.
에도 시대의 영향
[ 편집 ]도요토미 정권을 쓰러뜨린 도쿠가와 씨의 에도 막부 치하에 있어서의 조선 출병에 대한 견해는 임라산 의 「토요토미 히데요시보」가 쓰루마츠의 죽음에 의한 광기에 본 것처럼 부정적인 견해가 강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조선 통신사 를 에도 막부에 대한 ' 조공사'로 자리매김해 조선 출병을 그 전제로 해석하는 흐름도 존재했다. 가사기」는 이 흐름을 추구하고 있다. 또, 국학에 있어서 의 본거 선장 의 『馭戒慨言』도 같은 노선에 서지만, 이러한 주장은 「일본의 무위」를 강조함과 동시에, 에도 막부에 의한 조선출병의 후처리를 단순한 평화회복이 아니라 막부에 의해 조선의 재복속화와 삼한정벌의 약속인 조공이 회복되었다는 인식에 의한 것이다 [ 407 ] 덧붙여 본거는 출병의 실패의 원인으로서 히데요시의 경신의 부족과 조선에서의 무익한 민중살해가 원인이었다고 한다 [ 408 ] .
18세기 말기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러시아의 남하가 경계되기 시작하면 조선이 조선 출병 보복을 위해 러시아와 함께 일본을 공격하는 것이라는 소문이 흘러 문화 노편을 다룬 남풍정 영조 의 ' 홋카이 이담 '에 는 조선 출병을 대러시아전의 참고로 해야 할 선례로서 다루는 것 뿐만이 아니라 러시아와 조선에 의한 협격을 경계하는 기술이 기록되거나, 「그림책 타이코기」・「그림책 조선 군기 」 등 조선 출병에 관한 책 이 나오기도 했다 409 ] .
텐포 연간에는 가와구치 장孺에 의해『정한 위략』 이 저술 된다 .
삼한 정벌과 조선통신사를 연결한 조선을 조공국으로 하는 인식과 조선출병이 일본의 무위를 보였다고 하는 인식은 19세기 구미의 군사적 압력 가운데 히데요시에 의한 조선출병에 대한 평가를 긍정화시켜 막말에 이르러 정한론 으로 전환 하는 요인 이 된다 .
또 조선출병이 비교적 새로운 역사적 사건으로 혹은 『징서록』・『정한위략』 등을 읽은 독후의 감상으로 문인들 사이에서 조선출병을 소재로 한 많은 한시가 쏟아져 대표적인 것에 오기 후유 의 「기제풍왕구택」 야스 가 다 야마 의 「기타케야마 선생님」( 나카이 다케야마 의 학식을 히데요시의 무력보다도 위라고 평가했을 때 조선 출병의 실패를 끌어내는), 이토 동애 의 「복처사 종종예차 징록록. 무렵 기요음, 졸화 사유」410 ] .
개국 후 대륙 진출에 미치는 영향
[ 편집 ]에도시대 말기·메이지 시대의 개국 에 의해 대륙 정세에의 관계가 불가피한 것이 되면, 당시의 무장들이 삼한 정벌을 상기한 것처럼,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도 주목받게 되어, 대륙 진출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의 유지를 이어받는 행실 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많아 졌다 . 코바야카와·카토·코니시의 제장이 지금 살고 있으면, 조선을 일본의 것으로 한 이 밤의 달을 어떤 기분으로 볼 수 있을까)」라고 노래를 시전해, 외무부장이었던 코마츠 미도리 는 이것에 반가해, “다이코 을 지하보다 일으켜 보면 야한 고려(코마)야마 높이 올라가는 히노마루(타이코 전하를 소생시켜 보여드리고 싶은 것이다, 조선의 산들에게 높이 휘둘리는 히노마루를)」라고 노래해, 한국 병합이 이루어진 것을 기뻐했다.
명에 미치는 영향
[ 편집 ]조선에 대한 원병 을 동시기에 행해진 닝샤 의 숭배 의 난 , 파슈 의 양응룡의 난 의 2개의 반란의 진압과 함께 '만력 의 3대정 '이라고 불렀다 . 완전에 의하면 「닝샤용병(애배의 난), 비용 80여만, 조선지역 7백80여만, 파슈지역(양응룡의 난) 2백여만」, 「명사」진증전에는 「닝샤용병 의 난) , 비평금 200여만. 하지만, 만력의 3대 정복 중에서도 이 전역이 숭배의 난 과 양응룡의 난 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재정상에 큰 부담이었다고 인식되고 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방대한 군사비의 지출 및 전사자 [ 주 7 ] 를 내놓은 것과 황제 만력제 의 분쟁은 명의 국력을 잡아 17세기 전반의 여진 의 강대화를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명의 급속한 약화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
[ 편집 ]한반도에서는 불평양반과 피차별계급, 곤궁한 농민, 도적에 의한 반란 , 봉기 가 일어났다 .
조선은 극단적으로 중앙집권화 가 진행되어 계급 차별 과 가혹한 착취로 인해 농민 이 매년 봄에는 반드시 굶주릴 정도로 국토의 개발도 게을리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립하지 않고 조선민중과는 물건교환 등으로 식량조달을 해야 했다.
명군의 병량 공급은 조선측이 제공했기 때문에 [ 주 95 ] 조선정부는 가혹한 식량조달을 벌였다. 이 때문에 명군의 약탈과 함께 일본군이 침공하지 않은 평안도도 황폐해 인구가 격감하고 있다. 에 대한 무질서한 약탈 등도 횡행하고, 조선의 민중은 일본을 제일의 침략자로 하면서도, 억압해 온 조선왕조에 반란을 일으켜, 명군도 제2의 침략자로서 미워했다. 조선의 백성들이 궁전 속에 침입 조선왕의 재산을 넣고 있던 창고를 약탈했다. 의 정부건축물 등 대소관청에 방화했다. 서류의 소장창고를 불태웠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민중의 방화로 연기와 불길이 하늘에 올라 1개월이 지나도 화재가 이어 졌을 정도 였다 . 412 ] [ 413 ]李曁은隋의煬帝와唐의太宗의 고사를 인용하면서 중국 의 대군도 고구려 로 침공했지만 이길 수 없었던 반면에 조선이 일본군의 공세에 무잔하게 당한 것은 마음이 흐트러져 이반해 오랜 시간이 걸렸고, 제장이 소문만 들려도 도주한 탓에 진격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해 지배층과 민중간의 괴리와 줄다리의 느슨함을 한탄하고 있다.
전공의 증명으로서는 나소기도 행해졌지만, 당초는 일본의 국내전과 같이 비전투원인 민중은 보호의 대상이며 살육은 금지되고 있었다. 노인과 남녀를 불문하고 비전투원도 대상으로 여겨졌다 고 한다 . 414 ] 조선군에 투하되어 잡힌 일본 장병(강왜)은 당초 처형되고 있었지만, 강왜를 이용하는 것을 목적으로 1591년 10월에 강 왜를 멋대로 죽이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들의 기술 습득이 도모되었다. 군의 배의 젓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강왜 중에는 조선왕조에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과 싸우는 등 조선성을 받고 우대받고 조선에 정착하는 사람도 있었다.
전역 이후 조선에서는 일본에 대한 적의가 태어나 평화로운 무역관계를 바라는 쓰시마의 종씨도 조선왕조에 강하게 경계되어 일본사절 상경은 금지되어 무역에 온 일본인도 부산에 마련된 왜관에 행동을 제한 됐다 . 사이에서는 명의 원군 덕분에 조선은 멸망을 면했다는 의식('재조유은')이 강조되어 명에 대한 은의를 중시하는 사상이 퍼져 속국으로서의 입장 이 강해졌다.
또 문화면에서도 한반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추가 문록·경장 역의 일본군에 의해 한반도에 가져와 김치 등의 한국· 조선 요리 의 초석을 세웠다. 역시 일본도를 원형으로 한 왜도 등의 파생 무구 가 만들어 졌다 . [ 요 출전 ] .
조선과 후금·청에의 복속
[ 편집 ]조선과 명이 문록·경장의 역에 의해 국력을 피폐시키자, 여진족 의 널 하치가 대두해, 1616년 까지 명 으로부터의 독립해, 아이신 국(aisin gurun, 금국. 후금 )을 건국했다. 1619년 의 명과 아이신국의 전쟁인 살프의 전투 에서 김은 명에게 승리한다. 조선은 원군을 명에게 보내고 있었다. 따라서 원군을 보냈다”고 변명했다. 널하치는 이를 용서했고, 후금은 조선 침공을 하지 않았다. 1624 년 인조 에 대한 이축의 반란이 일어나자마자 진압됐지만 후금으로 도망친 반역자가 조선 침공을 진언, 홍타이지가 1627년 조선에 침공한다( 정규 후란 ). 에 도달하자 인조는 항복하고 후금을 형, 조선을 동생으로 삼는 형제국으로서의 맹약, 조선은 왕족을 인질로 내보내는 것 등이 합의됐다.
1636년 후금이 청과 국호를 변경하고 조선에 대해 청에의 복종과 조공, 그리고 명에 파견하는 병사 3만을 요구해 왔을 때 조선은 이를 거절하고 청은 12만 군으로 조선에 침입했다( 조자의 난 ). 뒤 청의 속국 이 됐다. 인조는 홍타이지에 대해 미하쿠 9두의 예 를 하고 청황제 를 공인하는 맹세를 했다( 대청 황제 공덕비 ) .
관련 인물
[ 편집 ]- 일본측
- 싸움 에 참가한 무장
- 이시다 미츠나리 , 오타니 요시카즈 , 마스다 나가모리, 하세가와 히데이치, 기무라 시게카미 , 가토 미츠 야스 , 마에노 나가야스 , 아사노 유키나가 , 요시카와 히로야 , 카타기리 카토 모토 , 사야야 무노리 , 타카다 손베 에(모타니무라 록스케), 오이시 토모히사 , 구마 가야 나오모리 .
- 기타
-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 경념
- 밝은 쪽
- 문록의 역참전 주요 무장
- 게이쵸의 역참전 주요 무장
- 정희득 , 줄리아 오타아 , 오소리・소첨 , 사야 가(김충선), 정발, 김명원 , 유정 , 휴식 , 김응서, 이환복 , 이양원 , 이영남 , 가쓰라 츠 키카 (전설적인 여자 스파이),許浚(왕 주치의 의), 논개 , 이삼평 , 정기룡 , 고경명 , 조헌 , 최경회 , 윤두수 , 윤근수 , 이항복 , 이덕馨,陳武晟, 한호 , 황신 , 백파 선 )
연표
[ 편집 ]- 텐쇼 19년(1591년) 날짜 는 모두 화력(음력)
- 1월 20일 도요토미 히데요시, 원정 준비의 개시를 명령
- 8월 23일 히데요시가 “당나라”의 결의 공표
- 10월 10일 나고야성의 축성 보청을 개시
- 12월 27일 히데요시는 관백직을 내대신 도요토미 히데지에게 양도해 스스로는 타이코를 칭한다
- 텐쇼 20년/분록 원년(1592년)
- 3월 26일 히데요시, 조선 출진을(고양성 천황에) 상주
- 4월 12일 코니시 행장, 일본군 상륙 개시 - 문록의 역
- 4월 13일 부산진 전투 , 다대진 전투 (14일까지)
- 4월 14일 전투 (15일까지)
- 4월 16일 양산성 전투
- 4월 17일鵲院関 전투
- 4월 18일 안골포· 김해성 전투
- 4월 20일 경주성 전투
- 4월 24일 상주 전투
- 4월 25일 히데요시, 나고야성에 착진
- 4월 27일 충주 전투
- 4월 28일 추풍령 전투
- 4월 29일 조선 국왕 선조의 도락
- 5월 2일 한성부 점령(일본군, 개전 20일간 공략)
- 5월 7일 타마우라 해전, 합포 해전·아카진포 해전 (8일까지)
- 5월 18일 임진강 전투
- 5월 28일 개성부 점령
- 5월 29일 사천 해전
- 6월 2일 당포 해전
- 6월 5일 용인 전투 1차 당항 포해전
( 6일까지) - 6월 7일 쿠리우라 해전
- 6월 15일 대동강 전투 (16일까지)
- 6월 16일 평양성 점령
- 7월 7일 한산도 해전
- 7월 8일 리치(구마치)의 싸움
- 7월 9일 안골포 해전
1차 금산 전투 - 7월 13일 중화 전투
- 7월 16일 제1차 평양성 전투 , 명장 조승훈의 기습 실패
- 7월 17일 우이 쿠라 전투
- 7월 29일 제2차 평양성 싸움 ,
김명원 공격 실패 히데요시, 어머니 대정 소 장례를 위해 오사카성으로 돌아온다 - 8월 15일 제2차 금산 전투
- 8월 19일 제1차 성주성 전투 (20일까지)
- 8월 29일 부산포 해전
- 9월 26일 창원 전투
- 10월 4일 제1차 진주성 전투 (10일까지)
- 10월 중순 제2차 성주성 전투
- 10월 19일 철원 전투
- 10월 24일 나카가와 히데 마사 , 불의의 전사 [ 주 96 ]
- 11월 1일 히데요시, 나고야성으로 돌아온다
- 11월 10일 함흥 전투
- 11월 12일 히라야마 전투
- 11월 중순 가토 기요마사, 함경도 의 전투
- 11월 하순부터 1월까지 침착경 , 일명간에서 강화협상
- 12월 7일 제3차 성주성 전투 (14일까지)
- 분로쿠 2년(1593년)
- 1월 2일 다케우치 요시베에 등 사절, 순안으로 생 잡는다
- 1월 5일 제3차 평양성 전투 (7일까지) 이여 마츠의 명군 내원
- 1월 7일 코니시 행장, 평양을 탈출
- 1월 8일 명군, 평양성을 탈환
- 1월 중순 일본군 재편성, 함경도에서 철퇴
- 1월 18일 명군, 개성부 탈환
- 1월 26일 벽제관 전투 , 명군 대패·전진 정지
- 2월 10일 제1차 구마우라(구마가와) 해전
- 2월 12일 고슈산성 전투 2차
쿠마우라 해전 - 2월 18일 제3차 구마우라 해전
- 2월 22일 제4차 구마우라 해전 , 조선 수군 패배
- 2월 중순부터 4월에 걸쳐 전선 교착
- 3월 6일 제5차 구마우라 해전
- 3월 10일 히데요시, 한성부의 포기를 지시(4월 7일 전선에 명령 도달)
- 4월 8일 코니시 행장과 침착경, 다시 강화협상을 시작한다
- 4월 18일 일본군, 한성부에서 철수
- 4월 19일 명군, 한성부를 탈환
- 4월 하순 일본군, 부산 주변으로 이동
- 5월 15일 명사, 나고야성에 이른다
- 5월 20일 히데요시, 진주 공격과 연안에 왜성 건설을 지시
- 5월 23일 히데요시, 명사에 속견
- 6월 14일 일본군, 군사행동 재개
- 6월 21일 제2차 진주성 전투 (29일까지)
- 6월 28일 히데요시, 나이토 여안을 베이징에 파견
- 7월 중순부터 일본의 여러 다이묘, 일본 본토로의 귀환 시작
- 7월부터 9월에 걸쳐 이여마츠 등 명군 주력, 반도에서 철병
- 8월 3일 도요토미 히데요리 , 탄생
- 8월 25일 히데요시, 오사카성으로 돌아간다
- 9월 2일 주류 수비대 이외의 일본군 철병
- 9월 3일 선조, 한성부로 돌아간다
- 12월부터 다음해 1월에 걸쳐 구마가와에서 일명간의 강화협상
- 분로쿠 3년(1594년)
- 분로쿠 4년(1595년)
- 7월 15일 히데 지 절복 사건
- 11월 23일 이종성, 부산 일본군 진영에 도착
- 분로쿠 5년/경장 원년(1596년)
- 게이쵸 2년(1597년)
- 경장 3년(1598년)
- 1월 2일 울산성에 일본의 원군 도착
- 2월경 전선 교착
- 3월 중순 히데요시, 울산성·순천성·다케시마성의 고수를 엄명
- 8월 18일 히데요시, 후시미성에서 사망
- 9월 4일 4 대로 [ 주97 ] 연서에서 명군과의 화의를 지시
- 9월 19일 순천성 전투 (10월 9일까지)
- 9월 20일 제2차 울산성 전투 (10월 7일까지)
- 9월 27일 사천 고성 전투
- 10월 1일 사천신성 전투
- 10월 3일 순천 해전
- 10월 15일 오대로, 연서에서 철병을 지시
- 10월 하순 일명간에서 강화협상
- 10월 25일 일명간에서 휴전 성립 (인질을 교환)
- 10월 31일 코니시 행장·시마즈 요시히로, 전군 철수를 확인
- 11월 명군, 히데요시의 죽음을 알고, 휴전을 반고로 한다
- 11월 15일 일본군, 철병을 개시
명장 진창 , 인질을 내지만 병사를 물리치지 않고 - 11월 18일 노량 해전
- 11월 19일 코니시 행장, 거제도에 무사 탈출
- 11월 20일 시마즈 요시히로, 난카이섬에서 코니시대와 합류
명군, 사천성·순천성·울산성을 점령 - 11월 23일 가토 기요마사 등, 울산에서 귀환
- 11월 24일 모리 요시 나리 , 부산에서 귀환
- 11월 25일 코니시 행장들이 부산에서 귀국해 원정 종료
- 경장 4년(1599년)
- 7월 쓰시마의 알선에 의해 조선에 사절의 교환을 요구
- 경장 5년(1600년)
- 4월 종 의지 , 조선에 수호의 사과
- 6월 19일 부산에 정박중인 명·조선 수군이 태풍을 당해 함몰
- 8월 6일 명의 만력제, 조선보다 완전철병을 명령
- 9월 27일 조선주둔 명군철병
사료
[ 편집 ]- 일본측 자료(1차 및 2차)
- 고세 甫庵『太閤記』( 요시다 토요 역『太閤記』1-4, 교육사 신서)
- 코니시 행장군의 종군 승천장의 『서정일기』[3] (『속속 군서류종』 소수)
- 루이스 프로이스 『 완역 프로 이스 일본사 5 도요토미 히데요시편 2』
- 진 클라세 『일본 서교사 상・하』
- 「보문집」( 나베시마 나오 모의 종군 승시 시호 에 의한 기록 [4] )
- 『마쓰우라법인 정한일기초』[5]
- 『마츠우라 고사기』[6] (아래의 『마쓰우라 총서』에도 수록)
- 『종씨 가보』
- 『우츠노미야 고려귀진 이야기』
- 『조선기』(오타 이치요시 의 가신 오카 와치 히데 모토 저)
- 『고려진 일기』(오타규 1 저 )
- 『조선 일상기』( 우 스키 성주 오타 이치요시를 섬기는 안양 사의 의교 경념 의 경장의 역종군 일기. 오이타현립 도서관 Q&A )
- 『청정 고려진 각서』 구로카와 신도 편
- 『조선 남대문 합전기』 구로카와 마도 편
- 『조선 정벌기』(호리정의)(만지호리모토)
- 『조선 정벌기』(오오세키 정유)(오오세키모토)
- 『정한 위훈록』[7]
- 「원친기」・「토사 이야기」장종가부 전친 에 관한 기록
- 명측 자료
- 아키라 「신무네 실록」
- 조선측 자료
- 『난중일기 임진왜란의 기록』(1-3, 평범사 동양문고, 2000년-2001년. 기타지마 만지 역)
각주
[ 편집 ]주석
[ 편집 ]- ↑ 1709년의 초필을 1760년에 모사한 것.
- ^단 진주성 공략은 실시했다.
- ^ a b c 모리가문서에서는 칠번대로 한다. 그러나 마츠우라 고사기 등에는 6번대와 같은 그룹에 쓰여져 있어 모리키모토는 실제로 6번대와 행동을 함께 하고 있었다. 도쿠토미소봉 등도 선구중을 육군으로 한다.
- ^ a b c 모리가문서에서는 팔번대로 여겨진다.
- ^ a b c 모리가문서에는 쓰여지지 않은 여러 부대.
- ^ 「완역 프로이스 일본사 5 도요토미 히데요시편 II」에서, 루이스 프로이스 등이 「 백방 손을 다해」정보 수집한 결과, 「가장 신뢰할 수 있고 또한 정확하다」라고 판단한 숫자. 사인에 대해서는 “적에 의해 죽인 자는 작고, 대부분의 사람은 전혀 노고, 기아, 한기 및 질병에 의해 사망한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 ^ a b c d 위키소스(중국어)
- ↑ 조선의 인구 추이: 1392년 (554만명), 1522년 (1061만명), 1591년 (1409만명), 1637년 (1063만명), 1822년 (1621만명), 1910년(1742만명) "Choson." Composite recorded data are from the Hogu ch'ongsu (1789); Choson Wangjo Sillok entries and T'akchiji entries are from the Seoul National University edition of the Hogu ch'ongsu; records from 1864 to 1924 are from Zensho, Chosen. The Journal of Economic History, Vol. 68, No. 1 (Mar., 2008), pp. 244-282
- ↑ 루이스 플로이스는 조선인의 피해에 대해 일본의 것에 비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방대했다. 제44장부터.
- ^ 19세기 말의 역사가 인 조지 H. 존스 에 의해 추정된 군인과 민간인의 희생자는 100만명이다.
- ^ a b 일본·중국(명)의 원호 나 조선의 제왕기년 .
- ^ 출전에 있는 명과 조선의 달력의 날짜는 +1일 많기 때문에 주의.
- ↑ a b 아사히 신문 2006년 6월 28일 석간 문화면 「『왜란』과 동아시아 한국의 국제 심포에서 위」보다.스오프 준 교수(중국 군사사)는 「일본과 조선간의 전쟁이라고 하는 견해는 그만두어야 한다」로서 「명(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지배 체제·질서에의 히데요시의 도전. 이것은 일본과 중국의 전쟁이다. 조선의 요청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참전했다"고 말했다. 또 ""명군은 약하다"는 이미지는 명을 쓰러뜨린 청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당시는 무기도 우수하고 정강이었다. 한편의 히데요시군은 전란으로 단련된 세계 최강의 군단. 양자의 격돌은 16세기 세계 최대.
- ↑ 여기에서의 고려는 코리아 와 같은 의미.
- ↑ 후술하는 소행의 조선속 국설도 참조( 동기에 관한 제설 )
- ^ 출병으로 하면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전쟁'(세계사용어집, 야마가와 출판사) 등과의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에 정벌이 피할 수 있는 것과는 반대로 회피된다.
- ^ 교과서의 용어로는 이 명칭은 사용되고 있지 않지만, 일본사 리브렛등의 부독본에는 등장.
- ^ 일본어 읽기 : 진신와란, 조선어 읽기 : 임진웰란( 임진왜란 ).
- ^ 일본어 읽기 : 테이유 우와란, 조선어 읽기 : 정유웰란 ( 정유왜란 ).
- ^ 일본어 읽기:테이유 우사이란, 조선어 읽기:정유지란( 정유재란 ).
- ^ 일본어 읽기 : 진신 거기 얌전, 조선어 읽기 : 임진조국 정전 ( 임진조국전쟁 )
- ^ 후술하지만 , 『懲毖録』에 의하면景轍玄蘇도 조선 과 의 협상 에서 언급 했다 .
- ^ 이들은 『고려사』나 『성종실록』의 기술에 근거하는 것이다.
- ^왜구 라고 하지만, 고려배민 혹은 제주도 해민을 주체로 하는 집단이었다고 하는 설이 유력.
- ^ 단, 이에 대해 일본 측에는 외숙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
- ↑ 이승만 에 의한 다케시마 의 점령을 제외한 경우.
- ↑ 무라이 1993 , p.218
이미 1540년(천문 9년) 시점에서 일조 무역에 종사하는 오우치 요시타카가 아키노베이쿄에 파견한 호심 부리 등 제 18차 견 명사 가 “일본은 조선을 복사(복속)시키고 있기 때문에 석차는 조선보다 위로 미끄러지다”고 요청했다 [ 37 ] .
- ^ 다만 조선에 있어서는, 당시보다 이 문록·경장의 역을 왜구의 최대 마지막 것으로 생각한 것은 주의가 필요하다. 그들은 왜군이라고 칭하는 것과 왜구를 구별하지 않았다.
- ^ a 류큐 왕국은 2년 1공이나 1년 1공으로 횟수가 많을수록 중용되어 책봉 체제 내에서의 대우 가 좋은 것을 말한다.
- ↑ 매년 설날의 정조사, 명황제의 생일 성절사, 명황 태자의 생일인 천추절사, 정조 폐지 후 동지절.
- ^ 정학 혹은 관학이라고도 한다.
- ^ 편자 주: 「○○설」과 스스로의 학설·주장을 자칭하지 않는 학자가 많아, 후세의 학자 각각에 의해 명명·분류되었기 때문에, 각설의 불리는 방법에는 미묘하게 차이가 있다.
- ↑ 후쿠오카번의 조선통신의 응접역으로, 야나나리 류의 『징서록』의 일본판의 서문을 쓰고 있는 인물.
- ^ 루이스 프로이스는 '일본사' 제55장에서 “노부나가는 일본 66개국의 절대 군주가 된 아카키에게는 일대 함대를 편성해 지나를 무력으로 정복하고, 나라를 스스로의 자식들에게 나눠줄 생각이었다”고 적고 있다.
- ^ 이 날짜는 이와자와 쿄히코의 고증 에 의한 추정.
- ^ 종씨의 일족으로, 쓰시마국 수호대를 맡았다.
- ^ 이것은 시마즈씨, 고호죠씨, 다테씨 등 여러 다이묘의 평정과 같은 방식으로, 귀순하면 허락하지만, 거꾸로 하거나 무시했을 경우는 대군을 파파한다고 하는 것이, 히데요시의 상변수단이었다.
- ^ 여기에서 말하는 「지금까지의 국왕」이란 아시카가 장군가를 가리킨다.
- ^ 해로 익숙하지 않고 길을 모르는 의미.
- ^ 야나나리 류의 『 징 서록』에 의한다. 일본측 기록에 야스히로의 처형의 이야기는 없고, 일족(야스히로의 아들이라고 생각된다) 유야 토모히로는 전역 후의 국교 회복 교섭에 종사해 조선에서 옥사했다.
- ^ 종의조는 은거하고 벌써 사망.
- ^ 종씨의 평소의 의지로 무관한 죄수를 인도했다.
- ↑ 야나나리 류의 『징서록』에 따르면 이것이 조선이 손에 넣은 최초의 일본제의 화조총이라고 하는 것이지만, 무기창에 사장되어 고민되지 않았다.
- ^ a b 선조는 측실의 인양을 몹시 사랑하고, 그 아들의 신성군을 익사하고 있었지만, 군신은 광해군을 따르고 있었다. 정택(西人派)은 인주의 동생 김공성이 전횡의 경향이 있기 때문에 배제하려고 했지만, 이산해(동인파/북인파)의 아이를 통해서 그 이야기가 금공포에 새어, 인수가 국왕에게 울었기 때문에, 선조는 격노하고 정복했다.
- ^ 김성이치는 이때 '반드시 내구가 있다고는 할 수 없다'는 애매한 부정론을 말했다. 이듬해 4월 23일 일본군이 석권하는 가운데 그는 경상우병사의 직무에 있었지만 해임 체포됐다. 그러나 다시 동인파의 원호로 직후 경상우 초사로 임명되어 의병의 징모에 해당했다. 도쿠토미 1935 , p.398
- ^ 쓰시마의 사는 대외상은 조선 배신이기도 하고, 야나가와 조신은 앞의 인견으로 조선국왕보다 가선대부 의 작위를 수여되고 있었다.
- ^ 또 이 때, 카토 기요마사가 상심의 히데요시에게 외정을 권하고 스스로가 선봉을 맡을 것을 청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것은 키요마사의 입장이나 전후의 사정에서 생각해 분명히 츠지가 맞지 않고, 쓰루마츠 사망설(울분설) 에 따라 만들어진 우화인가, 카토 가오루가 키요마사의 역할을 크게 과장해 썼지만 또, 같은 해 8월 13일에 키요마사가 영국에 대해 36조에 이르는 준비를 지시하는 서장(「시부자와 에이이치 문서」소수, 도쿄 대학 사료 편찬소 소장 그림책)에는, 대규모 군사 작전에 대한 위기감을 드러내고 있다(나카노 등 「카라마츠의」
- ^ 분록의 역에 있어서의 시마즈세 15,437명 중 6,565명(43%)이 인부·미즈오였던 학연편 “분록·경장의 역 : 동아시아를 흔들어 준 히데요시의 야망”학연<역사 군상 시리즈 35 > , 1993년 79쪽 7 .
- ^ 동원되었지만 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군의 합계에는 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원래는 이들도 모두 도해할 계획이었다.
- ^ 이코마 친정 의 동생.
- ^ 오오시마 마사요의 아들.
- ↑ 나가사키 봉행 에 출세.
- ↑ 경장의 역에서는 군목 첨부.
- ↑ 사타케씨는 출격을 명령받고 대신 사타케 요시히사가 출진했다.
- ↑ 다테 마사무네는 출격을 명령받아 자주적으로 3,000명으로 출진했다.
- ^ 나베시마세는 1만으로, 하타당은 나베시마 부하로 여겨졌지만, 명령을 거쳐 독자적인 다이묘로서 움직여, 다시 히데요시의 감기에 접했다.
- ^ 도요토미 히데카츠는 거제도에서 병사했기 때문에 오다 히데노부로 바뀐다.
- ^ 자주 육상 부대로서도 활동. 병원의 절반 정도는 수주.
- ↑ 이 패전의 책임을 묻고, 4월 25일에 조선측이 참수형에 처했다. 조선사 편수회 1937 , p.442
- ↑ 이 계획의 창안자는 이진 자신이었다.
- ^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 여부는 불명. '가토 가타미' 등 가토 기요마사가 선봉이었다고 하는 서적도 있어, 일조 교섭에 달라붙어 코니시 행장이 빠져나가서 단독 돌입을 했다고 하는 설도 있지만, 대체로 키요마사를 훌륭한 무인, 행장을 소인으로 , 토쿠토미 소봉은 코니시 행장이 제일대로, 카토 기요마사는 2번대였던 것은 순연한 사실로서, 부정한다. 없었던 것, 코니시 행장이 세키가하라의 싸움으로 멸망한 것 등으로, 문록·게이쵸의 역에 있어서의 카토 기요마사가 실상을 넘어 비대화하고 있는 것을 지적한다.
- ↑ 개전 전에 군현에 준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징병에 반대한 인물.
- ^ 조정에 불행이 찾는 불길의 전조.梁의 무제(蕭衍)의 고사에 의해 '황혹 난토에 들어가면 천자전을 내려 달린다'고 한다.
- ^ 미사다이 의 관료 속에서 군주를 포기하는 직책.
- ^ 다만 명에게는 상주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비공식이다.
- ^ 조선 측의 기록은 가토 기요마사를 강화 반대파와 마음대로 결정해, 이 때도 경응현은 카토 기요마사에게 잡혀 죽었다는 기술이 있지만, 사정을 생각하면 전란 속에서 그 후 어떻게 된지 모르는 것으로서 살해자를 특정할 수 있다는 것은 이상하다.
- ^ 조선국왕이 내는 칙령의 것.
- ↑ 이산해의 탄핵에 의해 사직된 서인파의 전령의정.
- ^ 『서정일기』에서는 촌민이 숨기고 있던 배를 몇척 찾았다고 하며, 『懲毖録』에서는 가옥을 부수고 뭉친다고 한다.
- ^ '난민'이나 '반민'이란 조선조정을 거꾸로 한 조선인민중을 뜻한다.
- ↑ 『완역 프로이스 일본사 5 도요토미 히데요시편 II』 제38장
- ^ 군역의 의무가 없는 지행 의 것. 투하해도 조선국왕의 생활비는 보증한다고 약속한 것을 의미한다.
- ^ 덧붙여 여기에서 말하는 「삼국」이란 일본·조선·지나의 일이며, 좀 더 일반적인 당나라·천축·오늘 아침이 아니다.
- ^ 동전국은 오타니 요시츠구의 생모. 동전국과 객인국의 양명 모두 북정소 첨부의 시녀로, 사무라이를 통해서 북정소에 정세를 설명하기 위한 편지였다고 생각되고 있다.
- ↑ 이 전투는 한산도 해전 (1592년 7월, 와키자카 안지 지휘의 일본군 대 이순신 지휘의 조선군)·고슈 산성 공방전 (1593년 2월, 우 키타 히데야 지휘의 일본군 대권 慄 지휘의 조선군)과 아울러 한국에서는 '임진'.
- ^ 조선인은 여진족을 「야만인」이라고 하는 의미를 담아 「오랑케 (兀良哈)」라고 불렀다.
- ^ 청정의 보고 내용은 “오랑카이는 조선의 배 정도의 넓이로, 이것을 통해서 명에 들어가려면 몽골 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무리이다” “오랑카이는 밭지만으로 잡곡밖에 취해라 하지, 병량미가 입수할 전망은 없다” “오랑카이에는 일본의 수호 와 같은 통치자가 없고, 이가자 · 코 가자와 같이 요새를 짓고, 마치 일규 국인 것 같다”라고 하는 것이다 [ 254 ] .
- ^ 구참모본부·일본전사에서도 일본측 전사자를 1600명으로 하고 있다 [ 257 ] .
-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후 곧,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적대 세력으로 상정해 모리 테루모토는 마스다 나가모리, 이시다 미츠나리, 마에다 겐이후, 장속 정가의 4봉행과 연계해, 불측의 사태에 대비해 상방 방면에 대군을 종결시키는 등, 군사 충돌마저 일어날 수 있는 상황 하에 4 .
- ↑ 모두 한성 점령 후에 도조했다.
- ↑ 류세이류는 일본군의 화조총(조선에서는 조총)을 큰 위협으로 하고 있다.
- ^ 유효 사거리는 구경이나 장약량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200m 정도로 된다.
- ^ 덧붙여 다른 언어판에서 볼 수 있는 일본 수군을 강화하기 위해 히데요시가 포르투갈 의 갈레온선을 두척 고용해 전쟁에 참가시키려고 한 일화는 1586년 예수 수회 준관구장 가스파르 코에리요를 오사카성에서 속견했을 때의 타진이며, 규슈 정벌 의 무렵의 일이며, 문록의 역개전 후의 조선 수군의 활동을 받은 것이 아니다.
- ^ 덧붙여 프로이스에는 과장버릇이 있어(『프로이스 의 일본 각서』( 마츠다 코이치 , E·요리센 저)보다, 바리냐노의 프로이스 평), 그는 조선에는 건너지 않기 때문에 전문 에 근거하고 있는 것, 또 일본의 대륙 침공에 대해서 「무모한 기사」라고 부정 .
- ^ 단, 조선의 '편정'이라는 활은 원거리용 짧은 화살을 이용하면 최대 사거리는 450m에 달한다고도 한다.
- ↑ 이것은 노비나 특권계급의 제2부인 이하로 태어난 자식의 징병도 포함한 내용이었다.
- ↑ 장년남자는 농경과 기타 경제활동에 우선적으로 종사하는 정책을 채택했기 때문에
- ^ 조선군의 조직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었다. 게다가 임명된 장군은 멀리서 착임하기 때문에 임지에서의 자군의 전력이나 지리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고, 병도 소수의 상비군밖에 없었기 때문에 전쟁이 시작된 후 징병된 신병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훈련 부족이었다.
- ^ 의병을 묶는 제장이 양반층 (귀족계급)인데 비해, 병사의 대부분이 노비 , 이조에서는 빈민 신분에 휩쓸리고 있던 스님 등이었지만, 목숨을 걸고 공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망은 이뤄지지 않고, 전쟁 되돌아와 스님도 또 빈민인 채로 여겨졌다. 문록·경장의 역으로 관직을 받은 장군도 전역 후에는 당파간의 정쟁에 편입되어, 그 대부분은 권력자들의 의심과 질투로부터 그 지위를 쫓겨나 결국 유형이나 사형 390 ] .
- ↑ 일본명으로는 「코류큐」 또는 「로송국」.
- ↑ ( Juan Cobo )
- ↑ a b 일본 26성인 의 1명.
- ↑ 이 전후에 출정을 명령받아 진주성 공방전 에 참가했다.
- ↑ Francisco de Tello de Guzmán )
- ↑ 쌀, 소, 돼지 등 외, 조선의 여인도 요구하고 있다
- ^ 만석 이상의 지행이 있는 다이묘로서는 유일한 전사.
- ^ 부재의 우에스기 경승을 제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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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격과의 사이에 상기와 같은 협정이 이루어지자, 곧 일본군은 조선의 수도, 그리고 몇몇 다른 요새를 시나인에게 건네주고, 관백에서 해로 수송되어 온 풍부한 식량과 탄약이 있는 해변지대에 물러났다.
- ^ 그들의 성채를 가능한 한 견고한 것으로 하려고 생각해, 일본에서 실시하는 것과 같이, 절단하지 않는 돌을 이용해, 벽도 요새도 하얗게 석고를 바르고, 천수라고 부르는 높은 탑을 마련해, 한 성씩에 단성을 처치해, 서로 그 완성을 경쟁했다. 관백에서 임명된 3명의 무장에 의해 식량과 탄약――그들은 실로 풍부하고, 1595년의 9월까지 충분히 가지고 참을 수 있을 정도의 양이 있어, 그들은 그 분배를 위해 관백으로부터 임명되고 있었다――가 분배되고 끝나면, 그 성채에는・・・
- ↑ 급도 피앙 출후, 피월치 후고성 쌀노의, 야코미 니 부성지 님, 앞 병량 니 교체 소견, 구수 무차이, 원정 가적 치후, 부산 우라카타카이(카토쿠시마) 히가시모토・다케시마 등 니유노분, 막대지의의 후조, 가이오 봉행, 후쿠시마 사에몬 오오오 ・모리민부 다이스케, 피앙부후, 앞 어성미 인가, 소인수 다소 니 부령 할부 가적 환후・・・『(분록 3년) 5월 24일자 도요토미 히데요시 주인장』 일본 전사. 조선역 (문서·보전) 문서 제175호
- ↑ a b c d 「역사 군상」2010년 4월호 167쪽 「조선 출병 도해 작전」학연 퍼블리싱
- ^ 번선 가라시마(거제도)를 거처로 짓고, 날마다 파출, 일본 통선, 도카이 일절 불파성 니 첨부, 오인 노자 신합, 가라시마에 밀려, 어제 15일 밤 반부터 , 명말지각까지 상전, 번선 166 습지 절취 其外津々浦, 156리 사이, 후나코 불불소 소기신, 당인 수천명 바다에 쫓아, 절삭 신후,... 7월 16일자, 4봉행(마에다 겐이, 마스다 나가모리, 이시다 미츠나리, 나가타카 마사) 앞, 코니시 유키나가, 후지도 타카토라, 와키자카 야스지, 가토 가아키, 시마즈 요시히로・다다요시, 연서장 『정한록』
- ^ 병량유의하, 일본노토에 상신후보다, 가타카타에게는 혼후・・・ 3월 13일자, 타치바나 무네 앞, 도요토미 히데요시 주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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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엘 페린 「철포를 버린 일본인-일본사에 배우는 군축」, 카와카츠 히라 타역, 중공 문고, 1991년, 63-64페이지. 조사(프랑스의 스파이를 통해 후세에 전해졌다)에서는, 기밀군 24000중 총 보유수는 6000이었다. 또, 1589년에 프랑스에 파견 되었다 영국군은, 4연대, 3600명의 병사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추밀원의 이상에서는 일련대 중 총포병이 차지하는 비율이 60%였던 것이 30%에 머물렀다. 이를 보충했지만, 전체적으로 1100정 정도 의 장비 였다 . 군은 25000군데, 그 중 철포대는 9000명이었다. 이 상황은 압도적이었다(페린 동서, 160-162쪽). 일본군이 조선에 출병하고 있었지만, 일본에는 아직 많은 병사가 잔류하고 있어, 그 대부분이 1정 또는 2정의 총을 장비하고 있었다(페린 동서, 71쪽).
- ↑ 노엘 페린 전 게시 , 80쪽
- ^ "(화조총의) 멀리까지 발사하는 힘과 명중시키는 수제란, 활화살에 수배한다.(중략) 궁화기의 기술은 백보에 지나지 않지만, 조총은 자주 수백보로 및, (중략) 매우 대항할 수 없다" 282-283 페이지
- ^ 「중국군의 병력에 대해서, 많은 사람은 너무 과장하고 있지만, 신용할 수 있는 몇몇 그리스도인으로부터의 통신에 의하면, 적어도 20만 정도는 있었다. 게다가 그것은 마찬가지로 무수라고도 할 수 있는 조선의 군세를 제외하고의 수라는 것이다」
- ^ 「그런데 그들의 철포(에스핀가르다)는 어떻게 발사되는지 불가해하다.
- ^ 루이스 플로이스 가 1593년의 평양전에서 명군의 장비를 언급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최우수를 자랑했던 일본군의 검이나 창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런 손상을 가할 수 없었다. 『완역 프로이스 일본사 5 도요토미 히데요시편 2』 제41장
- ↑ "징계록"1979 , p. 187.
- ↑이자자 왜범중국시유유키. 그 이후 淤跳舞, 光閃而前, 我兵已奪氣矣. 왜선약, 일봉족칙 길이, 검장 5척, 칙길 5척. 가병 단기난접, 장기불사, 조지자 신다토시, 엔기리이이야수사, 용력중고야. 지금 여사용칙 무위, 유조총수 적원총, 적지근신 재무타기 가이공자, 여겸살기칙 총 중아코 마타다, 세소 불능, 고도도 輕而 또한 장, 이비 임신기 총용. 황유 살수 계봉, 고용 장도비지 귀.
- ↑ 『조선과 일본의 관계사』 박종명 감수/아카시 서점 (2000) 192페이지
- ↑ 징계록 1979 , p. 14.
- ^ 루이스·프로이스에 의하면, 일본은 “그것(=화포·화살) 이외의 무기, 특히 도검은 짧고, 대단히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하는 사전 정보를 얻고 있었다 『완역 프로이스 일본사 5 도요토미 히데요시편2』 제36장
- ^ a b c "징계록"1979 , p. 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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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작품
[ 편집 ]Category:분록·게이쵸의 역을 소재로 한 작품 도 참조
소설
[ 편집 ]- 카이네지 시오고로 “가토 기요 마사” 분예 춘추 1983년
- 도요타 아리 항「지모의 호랑이-맹장 카토 키요마사」쇼덴샤, 1989년
- 쓰모토 요 “꿈의 또 꿈” 1993-1994년, 문예 춘추, 환동사 문고
- 동문 후유이「소설 구로다 여수」 후지미 서방 1995 (쇼가쿠칸 문고, 「군사 구로다 여수」가와데 분고)
- 에미야 타카유키「시마즈 요시히로」학연 M문고, 2004년
- 이토 준「쿠로난 바람의 바다
- 이지마 카즈이치 “ 호시야 항행” 신시오샤, 2018/6/29
- 가와 고에 무네이치 “천지에 칭찬” 문예춘추, 2018/7/6
이순신 에 관한 관련 작품은 이순신 #이순신을 소재로 한 작품을 참조.
관련 항목
[ 편집 ]・조선 왕조실록
외부 링크
[ 편집 ]- 나이토 나베스케 「포로지에 의한 히데요시 조선의 역」 「중국 단기 대학 기요」 제8권, 중국 단기 대학, 1977년 3월 20일, 1-7페이지.
- Gyeongsangnam-do. “ 충무공 이순신 ” . 한국, 경상남도. 2022년 8월 8일 열람 .
- JINJU National Museum. “ 한국·국립진주박물관( 국립진주박물관 ) ”. 국립 진주 박물관 ( 국립 진주 박물관 ). 2022년 8월 8일 열람. 임진왜란 전시가 있는 한국의 역사박물관 사이트의 일본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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