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05

박정희 정치리더십의 공과(功過): 박정희. 『우리민족의 나아갈 길』(1962년 2월). 『국가와 혁명과 나』(1963년 9월). : 네이버 블로그

박정희 정치리더십의 공과(功過): 박정희. 『우리민족의 나아갈 길』(1962년 2월). 『국가와 혁명과 나』(1963년 9월). : 네이버 블로그

박정희 정치리더십의 공과(功過): 박정희. 『우리민족의 나아갈
길』(1962년 2월). 『국가와 혁명과 나』(1963년 9월).
킨키나투스
2024 8 18

박정희 정치리더십의 공과(功過): 박정희. 『우리민족의 나아갈 길』(1962년
2월). 『국가와 혁명과 나』(1963년 9월).

박정희는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했다. 하지만 박정희 등 군사반란 세력은
‘혁명공약’에서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고 다
짐했다. 박정희는 8월 12일 성명을 통해 민정이양에 관한 일정까지 발표했
다. 2년 후인 1963년 초에는 정당 활동을 허용한 후, 같은 해 여름은 민정이
양을 하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군사정권은 민정이양 일정을 실행에 옮겼다. 이러한 민정이양 공약이
행에 미국의 압력이 주효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1962년 10월 8
일 ‘국가재건비상조치법’ 개정, 10월 12일 ‘국민투표법’을 제정했다. 윤보선
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자 대통령 권한대행에 오른 박정희는 11월 15일 국
가재건최고회의가 헌법 개정안을 발의하자 헌법개정안을 공고했다. 또 12월
6일 계엄령 해제, 12월17일 제3 공화국 헌법개정안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박정희는 1963년 4월 대통령 선거, 5월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한다고 발표했
다. 특히 1월 1일부터 민간인 정치 활동 허용을 약속했다. 이제 민정이양은

당연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 민간인 중에는 현역군인만
아니면 전역군인은 정치참여가 가능하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외 정세를 종합 고찰하여 검토한 결과 최고위원들이 군복을 벗고 민간인
자격으로 민간정부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 국가를 위해 더욱 충실하게 봉사하
는 길이라고 결정했다. 본인도 최고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민정에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박정희는 민정참여 선언은 말만 민정이양이지 군사반란을 일으킨 자신들이
전역을 하고 나서 민간인 신분으로 정권을 잡겠다는 의도였다. 특히 박정희
는 “당에서 결정을 내린다면 당원은 당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한
다”고 말해 대통령 선거 출마에 나설 뜻을 분명히 했다.
박정희의 정치참여에 대한 반대 역시 만만치 않았다. 쿠데타 실세 중 하나로
5.16 당시 방첩부대장(현 국군방첩사령부, 구 보안사, 기무사)을 역임한 김
재춘 소장을 포함한 군 수뇌부 다수는 “군인은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혁명 공약을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또한 남로당 경력 등을 이유로
박정희의 민정 참여에 반대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박정희는 민정이양
과 군정연장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1963년 2월 16일에 열린 3군 수뇌회의는 박정희의 민정 참여에 반대한다
고 결의했다. 미국의 케네디 행정부도 같은 의견을 보이자 박정희는 2월 18
일 9개 항으로 이루어진 ‘시국수습안’이 받아들여지면 민정에 참여하지 않겠
다고 밝혔다(2.18 성명). 9개 항의 핵심은 ‘군의 정치적 중립과 민간정부 지
지’, ‘5·16의 정당성 인정’, ‘한일 문제에 대한 군정의 방침에 협력할 것’이었
다.
그 무렵에 박정희의 잦은 변심을 가리키는 ‘번의(翻意)’라는 말이 언론에 회자
됐다. 박정희의 번의는 열흘이 멀다 하고 되풀이된 적도 있었다. 그는 1963

년 2월 27일 각 정당과 정치 지도자들이 참여하는 ‘정국수습선서식’을 열고
민정에 불참하겠다고 약속했다(2.27 선서).
박정희는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민정이양 약속을 파기했다. 3월 16일 박정희
는 민정 불참과 민정 이양 약속을 파기하고 ‘군정을 5년 연장하기 위한 국민투
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한 뒤 ‘비상사태 수습을 위한 임시조치법’을 공포함으
로써 모ㅣ정당 활동을 정지시키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제한하려 했
다(3.16성명). 그러나 박정희는 미국의 압력으로, 전역 후 민간인 신분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소위 4.8성명으로 민정이양 계획에 대미를 장식했다. 민정
이양과 쿠데타 세력의 정치참여가 곡절 끝에 타협에 이른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계획
박정희는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516쿠데타 이듬해인 1962년부터 발 빠르
게 가동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1962년 1월13일 발표됐다. 그런
데 여기서 흥미 있는 것은 그 기간이다. 1차 계획은 1960년을 기준년도로 잡
고 1961년을 공백년도로 그리고 1962-1966년을 계획년도로 설정했다. 혹
자는 이 계획이 제2공화국 장면 정부 하에서 확정된 안을 단지 실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는 잘못된 접근이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장면 정
권의 5개년 계획 역시 자유당 정권에서 부흥부가 1959년 작성한 7개년 계획
을 그대로 본따 작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경제개발 계획을 누
가 작성했느냐 여부가 아니라 누가 그것을 실행에 옮겼느냐 여부와 그것을 실
천할 과단성 있는 정치적 리더십의 존재유무이다.


박정희. 『우리민족의 나아갈 길』(1962년 2월).

제1장 인간개조의 민족적 과제
23쪽) 무엇보다 앞서야 할 것은 ‘참된 자기를 이룩한다’는 것이다....그러면
참된 자기를 이룩한다는 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자기를 안다는 뜻이다. 자
기를 안 다음에야 남을 알게 되고 나아가서는 겨레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렇
게 될 때 비로소 자기를 믿고 의지하게 되고 나아가서는 겨레를 믿고 의지하
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남을 믿고 의지한다는 것은 남에게 무조건 기댄다는
것과는 그 뜻과 성질이 아주 다른 것이다. 바꿔 말하면 지난날의 봉건주의와
오늘날의 민주주의와의 차이, 바로 그것이라 하겠다. 남을 알고 남을 믿는 데
서 참다운 타협과 (24쪽)서로 돕는 협력은 가능해지는 것이다.
36) 우리는 국가에서 내가 살고 내 가족이 살 수 있도록 적절히 보살펴 주어
야 하고 살 권리를 어떤 제도나 시설에 의해서 보장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또 그러한 주장과 요구가 법의 보장 아래서 요구하는 국민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실질적인 이득으로 돌아가야 한다.
제5장 후진민주주의와 한국 혁명의 성격과 과제
172쪽)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새로 이룩된 민주국가들
은 세계 여러 큰 나라의 싸움에 몰려 있든가 아니면 미국과 소련의 이른바 냉
전의 숨가쁜 억눌림 아래서 시달리지 않을 수 없는 운명에 놓여 있다. 이와 같
이 안팎으로 어려운 고비에 맞서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바라는 바 자유
민주주의를 하루속히 이룩할 수 있겠는가가 급한 숙제로 남게 된다.
173) 지난 날 아시아에 있어서 민중의 동의에 의해 정부가 이룩된 바는 거의
없고, 또한 정부의 정책이나 방침도 역시 관대한 아량으로 했다는 아무런 증
거도 없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시아에 사회학적으로 물려준 것은 다만 몇
사람의 손에 의해 움직여지는 이른바 과두정치뿐이었다. 물론 유럽 여러 나라

들도 거의 같은 상태에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선거에 의한 대의제도가 이
룩될 수 있는 좋은 사회적 풍토가 마련되고 있었으니, 그 뒷받침이 되었던 풍
성한 살림살이의 조건이 아직은 우리 아시아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존재
하더라도 거의 불충분한 것이었다.
176) 결국 뒤떨어진 민주국가에서 민주주의를 다시 이룩하는 길은 오랜 경제
개발 계획과 국민소득의 향상이라는 서로 모순된 두 개의 문제를 잘 조화시
켜 결과적으로는 국민이 잘살게 되고 특히 국민들 개개인의 생활 향상에 도움
을 주어야 된다고 나는 분명하게 잘라 말하고 싶다. 따라서 유럽에서 물려받
은 자유민주주의의 이념과 테두리 밑에서 어떻게 하면 결과적으로 국민들 개
개인의 소득을 높일 수 있는 경제개발 계획을 성공적으로 이룩할 수 있는가
가 우리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에 있어서 참된 민주주의가 성공할 것이냐 못
할 것이냐를 결정짓게 될 오직 하나의 열쇠가 된다.
3절. 혁명기에 있어서의 민주주의: 행정적 민주주의
178) 나는 혁명시기에 있어 우리가 바라는 민주주의란 서양 식 민주주의가
아니라 우리 사회와 정치형편에 알맞은 민주주의를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
다. 즉 그러한 민주주의란 다름 아닌 바로 ‘행정적 민주주의’라고 말 할 수 있
다.
그러면 왜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행정적 민주주의가 되어야 하는 가를
설명하자면 우리들이 과거의 부패를 깨끗이 씻어 버리고 국민들로 하여금 스
스로 다스려 나가는 힘을 길러 올바른 사회를 이룩하자는 것이 당면한 목표이
고 그러기에는 임시적인 정책으로 행정적 방법을 취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
며 그 방법으로서 민주주의를 ‘위에서’ 내려닥치는 식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오는 식의 민주주의, 다시 말해서 아래서 깨달은 민주

주의, 국민 스스로가 자기들의 지난날의 그릇된 버릇을 바로잡고 새로이 출발
하여 발전하는 민주주의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정당들이 그릇되게 보여준 나쁜 버릇들이 모든 단체 속에까지 전염되어
있는 마당에 정치적 민주주의의 높은 뜻을 살핀다고 당장에 선거를 한 대서
그와 같은 그릇된 병폐가 하루아침에 가셔질 리는 없다. 하루바삐 국민들 스
스로가 지난날의 그릇됨에서 벗어나고 무지에서 풀려나와 스스로 자기의 운
명을 바르게 판가름 할 수 있는 정치적 힘을 기르게 해야 할 것이며, 그러기 위
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국민들 스스로가 ‘아래서부터’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
는 힘을 기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우리들은 참된 민주주의를 새로 이룩해야 하
기 때문에 비록 우리들이 혁명시기에 있어서 완전한 정치적인 자유민주주의
를 마음껏 누릴 수는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행정적 수준(179)에 있어서는 민
주주의의 원칙이 지켜지고, 또한 민주주의적인 원칙에 의해 국민의 의견과 권
리가 존중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과도기적인 혁명단계에 있어서 우리들이 내세운 행정적인 민
주주의는 정부가 하는 일에 대해서 국민의 떳떳한 비판과 의견을 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것을 환영하며 국민의 전체적인 의견 앞에 정부가 해놓은
일을 심판하도록 해서, 잘못이 있다면 고쳐나가는 방향으로 나가야 할 줄 안
다.
현재 나라 살림을 맡고 있는 행정부에 잘못이 있을 때, 이것을 고치고 고발하
는 것은 혁명의 중심이 되는 지도세력에만 그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온 국
민에게 한결 같이 있는 것이며 또한 이러한 힘을 길러야 하는 것이다.
오늘 날의 행정관청의 모든 권한 행사는, 비록 혁명 시기라 할지라도 민주주
의의 근본정신 밑에서 이뤄져야 한다. 아무리 혁명 시기라 할지라도 나라 살
림하는 일이 비민주주의적이라면 이는 결국에 가서는 혁명의 참뜻을 욕되게

하는 것이며, 혁명의 정신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결과가 되기 쉽다는 것을 나
는 확실히 믿는다.
181) 이번 혁명은 참되고 올바른 민주주의를 이 땅에 이룩하자는 데 그 목적
이 있기 때문에, 어떠한 방법으로든 일반 국민들로 하여금 그들의 실제 살림
살이를 통해서 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국민된 책임과 사회적으로 맡은 바 임무
에 대한 깨달음을 더욱 높일 수 있는 이른바 사회교육을 철저히 해야 한다.
즉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영화라든가 좌담회와 강연회 등을 이용하거나 범
국민운동을 전국적으로 실시해서 수천 년 동안 이어 내려온 무사주의, 안일주
의, 적당주의, 사대주의, 의타심 등 갖가지 이 겨레의 그릇된 풍습과 정신을
고치고 깨우쳐 나가, 참되고 올바른 민주주의의 모든 권리와 의무를 국민들
스스로가 바르게 행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국민 스스로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다시 이룩하기 위한 정치교육을
통해서 보다 나은 자주 능력과 자치 능력을 높여야 할 것은 물론, 윗자리에 앉
은 사람은 국민과 사회에 대한 책임이 더욱더 무겁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182) 그러므로 혁명기간을 정신적인 면에서 볼 때는 참된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는 정신적 기틀을 만들기 위한 국민정신 재교육 기간이요, 국민들 스스
로의 자주능력과 자치 능력을 높이는 깨우침의 기간이요 자기의 권리뿐만 아
니라 남의 권리까지도 존중하고 남과 사회를 위해서 몸과 마음을 바치는 봉사
의 정신을 기르는 기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제6장 사회재건(국가)의 이념과 철학 (184)
4절 최대의 자유와 최소의 계획
192) 다음으로 우리는 이상과 같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질서 이외에 예속
과 착취가 없는 자유로운 생활과 아울러 늘어가는 소득에 대해 온 국민이 공
평하게 참여할 수 있는 경제 질서를 이룩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우리들이 이

상으로 생각하는 온 국민의 착취와 구속이 없는 자유롭고 복된 살림살이(아래
에서 보는 대로 가령 서독과 같은 사회),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
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사회경제 질서는 당장 하루아침에 이룩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우리가 온갖 노력을 기울여 나가야 할 목표임에 틀림없다.
이제 이러한 온 백성의 균등한 이익을 앞장세워 생각해야 하는 사회경제 질서
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자원배분을 합리적
으로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경제의 계획화 또는 장기 개발계획이 긴급하게 요
청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혁명 후 정부는 최초로 제1차 5개년 경제개
발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온갖 힘을 다하고 있다. 장기적인 개발계획 없이는
우리나라의 생산력을 늘리거나 실업자를 구제하는 고용량의 증대를 가져올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러나 경제의 계획화나 또는 장기적인 개발계획이 개인의 경제적 창의성과
사회적 자발성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도록, (193쪽)특별한 처리
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계획만을 위한 계획을 해서는 안된
다.
또한 우리 사회가 이겨내야 할 가장 어려운 일은 말할 것도 없이 많은 실업자
구제다. 직업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문제는 단순히 경제적 자원의 낭비뿐만
아니라, 실업자의 도덕적 퇴폐를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방법
을 통하든지 완전고용을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
다.
엄청난 실업자 문제를 그냥 내버려둔 채 국민의 정신을 일깨우는 국민재건운
동은 그 실속있는 성과를 거둘 수 없다. 따라서 직장 없는 사람에게 일터를 주
는 것은 단순히 국민에게 경제적 혜택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는 올바
른 도덕적 기풍을 불어넣은 부수적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고용
능력을 늘려 실업자를 구제하는 일은 국가재건을 꾀하는 오늘에 있어 크고도
시급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같이 땅이 좁고 자원이 풍부하지 못한 나라에서, 고용능력
을 늘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다른 나라와의 무역을 넓히고 근대공업을 일으
키는 일이 그 긴급한 해결책인 것이다. 즉, 곳에 따라 적당한 산업을 계획하
고 농촌지대에 근대공업을 쉬지 않게 하고, 차차로 노동시간을 줄여서 완전고
용을 이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다음으로 공사를 불문하고 기업체에 고용되는 근로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
해, 즉 근로자가 단순히 기계의 부속품에 그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일반 근
로자가 경제에 대한 창의적 발언권을 가질 수 있도록 보살펴 주어야 할 것이
다.
다음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를 불문하고, 산업을 경영
하는 데는 그 규모가 크기만 하면 무조건 좋다고 하는 (194쪽) 맹목적인 생각
이 많다는 점이다. 물론 큰 규모의 경영방법이 유리한 조건과 부분을 많이 지
니고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특히 중소기업도 그 독자적인 특
징을 나타낼 수 있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렇기 때
문에 우리들은 위축상태에 있는 중소기업을 그냥 내버려 둘 것이 아니라, 국
가에서 자금을 융자해 주거나 기술개량의 지도 같은 방법을 통해 적극적으로
이끌어 주고 키워 줌으로써, 이들 중소기업의 종업원들에게도 대기업의 종업
원 못지않은 소득을 올릴 수 있도록 적극 보살펴 주어야 한다.
194) 국가란 자기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해서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이룩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렇다고 국가가 경제 자체에 대해 만능의 힘을 나타낼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 근본은 경제에 간접적 영향을 주는 수단에만 그쳐야 한
다......우리가 바라는 사회는 경쟁이 항상 적절하게 허용되고 있는 자유시장
이고 그러한 시장이 개인이나 어떤 집단의 지배 밑에 놓여지게 될 때에는 경
제상의 자유를 갖기 위한 여러 가지 적절한 조치가 필요하게 됨은 두말 할 필
요도 없다. 여기에 ‘가능한 한 광범한 경쟁과 필요한 최소의 계획’ 이것이 사회
경제질서를 지탱하는 원칙이다(박정희는 이러한 경제의 구체사례로 서독의

경제발전을 염두에 두었다. 그의 「국가와 혁명과 나」를 보면 ‘제5장 제목이
라인강의 기적과 불사조 독일민족이다(355~366쪽). 여기서는 그는 독일형
사회적 조합주의 및 질서자본주의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을 뿐만 아니
라 그것이 한국사회에 장기적으로 적용 가능한 것임을 시사한다:자주)
5절. 소득의 균등과 경제의 공익화
195) 오늘 날의 경제형태의 그 본질적인 커다란 특징의 하나는-물론 현 단계
의 우리나라로서는 필요불가결한 요소이긴 하지만--기업의 형태가 집중적으
로 커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커다란 기업형태는 경제발전과 살림살이를 향상시키는 데 결정적 역
할을 할 뿐만 아니라, 경제와 사회의 구조 그 자체까지도 변화시킨다. 이를 테
면 이렇게 커다란 기업형태를 가진 기업가는 단순히 경제적 행위에만 그 힘
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면을 넘어 정신적 면에까지 그 힘을 뻗어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뜻에서 본다면, 겉으로는 나라의 경제력
을 발전시킨다는 명분 아래 개인적 이익에만 눈이 어두워 날뛰는 자유로운 경
쟁이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똑같은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사람은 똑같이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막혀버리기 때문에, 많은 적든 간에 자유를 빼앗기고 있는 셈이 된다. 더욱이
소비자의 입장에 선 사람은 경제적으로 가장 약하기 마련이다.
무릇 어느 나라, 어느 사회든지 간에 커다란 기업체의 지도자는 ‘카르텔’이나
‘트러스트’를 통해서 보다 억센 힘을 일반 사회의 경제나 정치에 미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한 나라를 운영하고 다스려 나가는데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
그 실례로 지난날 우리 사회에서 경제계 인사들이 국가 행정이나 국가 정책
에 압력을 가해서 자기네들에게 유리한 법을 만들었고, 필요하다면 법을 어
겨 가면서까지 횡재를 할 수 있는 힘을 가졌던 것이 그 좋은 본보기다.

196) 사실 이와 같은 일은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가로막을 뿐만 아니라 동시
에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만약 그들이 경제적 힘을
가지고 나라의 정책을 좌우한다면, 이는 민주주의 원칙이나 국민대중의 의사
와는 정반대로 나라의 권력을 가로채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경우를 가리켜 경제적 힘이 정치적 힘으로 바뀌었다고 단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가 벌어진다는 것은 사람의 가치나 자유, 정의, 사회적 안
전에 도전하는 것이 되며, 인간 사회의 본바탕이라고 할 수 있는 만인의 평등
이라는 원칙에 위협을 가져올 것이다. 따라서 대기업체와 그 경제력에 대한
국가의 적절한 조절과 지도감독이 자유로운 경제정책의 중심되는 과제가 아
닐 수 없다. 그 이유는 한 나라나 사회가 어떤 강력한 개인적인 경제적 이익집
단의 사사로운 이익과 욕망의 희생물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이
야기를 한다 해서 생산수단의 사사로운 소유를 부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국가나 사회의 전체 이익에 어긋나지 않는 한 무조건 인정되어야 한
다. 다시 말하면, 생산수단의 사사로운 소유가 공정한 사회질서의 건설을 가
로막지 않는 한 사회적으로 보호를 받아야 할뿐더러 이러한 권리를 더욱 가
질 수 있는 방안이 강구되어야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들은 중소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뿐만 아니라 국가는 중소기업의 경쟁을 통해서 그 참다운 가치를 드러낼 수
있도록 최대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중소기업의 육성 없이는 경제
의 자유로운 경쟁이 있을 수 없으며, 이러한 자유로운 경쟁이 없는 곳에서 국
민 개개인의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될 수 없기 때문이다.
197) 그러나 공공기업에 의한 경쟁은 사사로운 기업의 시장지배를 막을 수
있는 결정적 수단이므로, 이와 같은 기업을 통해서 국민 전체의 이익과 복지
향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경제의 이

익을 공익화한다는 문제는 오늘날 어떠한 국가에서도 단념할 수 없는 공적 관
리의 전통적인 하나의 형식이란 점이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
이 움집과 같은 오막살이에서 헐벗고 굶주려 있지만, 일부 특권층은 무제한
안락한 생활을 즐기고 있다는 서글픈 사실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우리 국민
의 수치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발전을 가로막는 암적인 장애가 되고 있다
는 것을 우리는 뼈저리게 느껴야 한다. 따라서 우리들은 서로 믿고 도와서 자
유로운 사회를 하루 속히 이 땅에 이룩하게 위해, 이와 같이 잘못된 현실을 바
로 잡기 위한 공동의 과업으로써 지금까지 이어져 온 가난이나 질병, 무지몽
매를 하루속히 몰아내고, 자유롭고 번영된 복지국가 건설에 우리의 모든 힘
을 집결시켜야 한다.
우리는 지금 군사경쟁은 물론, 경제적 경쟁시대에 들어서 있다. 우리는 어서
빨리 그릇된 사회경제를 바로잡아야 하겠다. 노동자의 낙원을 입으로만 떠들
어대는 소련이나 중공, 북한과 같은 무자비한 공산주의에 이기는 길은 우리
가 ‘더 살기 좋은 사회’, 다시 말하면 ‘굶주리지 않고 배고프지 않은 사회’를 하
루 속히 이룩하는 것이다.
박정희. 『국가와 혁명과 나』(1963년 9월).
박정희는 자신의 군사반란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516쿠데타가 419혁명
을 계승, 연장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 “독재의 부패와 아성을 넘어뜨린 419
혁명을 가로챈 무리들로부터 국권을 되찾고, 사라지는 자주정신과 숨지는 경
제에 생기를 돋우어 국민여러분에게로 돌렸다”419쪽. 우리는 박정희의 주저
인 [국가와 혁명과 나]를 통해 쿠데타 당시 그의 정치적 사고의 일단을 읽을
수 있다.

박정희의 각 국 혁명에 대한 평가.
박정희는 이집트의 나세르 혁명을 높이 평가하고 516군사쿠데타가 그것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임을 시사한다(337-348). 특히, 나세르 쿠데타의 반
제민족주의적 혁명의 특성에 심취했음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특기할 점은 계
급투쟁이니 민족해방투쟁과 같은 좌익 용어를 가감없이 사용하고 있다는 사
실이다.
“제2차 대전이 발발하고 영-이 동맹조약을 구실로, 전 이집트 영토를 점령하
고 왕궁을 포위하여 친영정권인 와프트 내각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이 사건
은 즉각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위로는 국왕으로부터 아래로는 국민 한 사람
한사람에 이르기까지 분노가 폭발했다. 외세의 침략으로 신음의 역사만 되풀
이되어 오던 이집트 국민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 영국군의 침퇴
를 요구하는 시위가 잇달았으나, 날이 갈수록 가열의 도를 더해 가는 세계대
전은 이민족 항거를 억눌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가말 압델 나세르의 혁
명정권이 수립되기까지, 이 나라 역사는 한마디로 말해서 ‘민족해방 투쟁
기’라 할 것이다 (338).....
제2차 세계 대전 전후 수년간에 있어 이집트에는, 자본주의 경제발전은 상당
한 발전을 가져왔지만, 그 결과는 국가경제의 구조면에서 큰 변화를 초래했
다. 화학, 기계, 금속, 방적, 시멘트, 사탕, 연초, 은행업 등에서 영국이 이집
트 경제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대규모의 실력을 구축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발달은, 그것이 국민적인 이익임에도
불구하고 반영(反英) 의식과 특권층에 대한 반항 의식을 각성하게 했고, 영국
군의 본토철수에서 거둔 승리의 전 세력은 계급투쟁이란 새로운 양상을 빚어
내게 되었다. 마침 이럴 때에 유명한 팔레스타인 분할 사건이 발생했다. 그렇
지 않아도 솟구쳐 일어나는 계급투쟁의 방지에 혈안이던 왕정은 이 좋은 기회

를 놓칠세라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민주노동운동을 탄압하고, 1948년 5
월 이스라엘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이 전쟁의 결과는 참담했다.339-340
“우리들은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니다. 단지, 우리는 우리의 사회를 형성
하는 중에 있을 뿐이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 나세르는 이렇게 선언했다. 그
는 지금 세계 최대의 댐이자, 이집트 공업화의 중심 동력원이 되고 전 경작지
의 3할을 증가시킨다는 장대무비한 에스원 하이 댐 공사에 여념이 없다. 또
한 1960년부터 시작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약 3억 7500만 이집
트 파운드를 투입하여 연간 1억 3700만 이집트 파운드의 국민소득 증가를
기하려고 총력을 다하고 있다.
그는 또한 민족경제의 재건을 돕는 인사라면 그 누구든지 이집트의 친구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하여 동서 쌍방을 마음대로 다루면서 아랍과 아프리카의 정
점에 앉아 ‘제3의 세계건설’이란 내일을(347) 향해 손짓하고 있다. 수천 년
동안의 봉건 아성을 무너뜨리고 생기 충일하는 현대 이집트를 건설하려는 나
세르의 자세와 투지! 동서의 강대 세력, 그 한복판에 서서 실리외교를 추진하
고 ‘제3의 세계’를 외치며 세계 균형을 조정하고 나서려는 그의 철학은 확실
히 약자가 창조하여 가는 현실의 기적이 될 것으로, 이는 우리의 관심을 모아
마땅하리라 믿는 바이다”(347-348).
박정희는 나세르의 1938년 자유장교단 혁명에 대해 “반식민지주의, 반왕제,
반봉건제를 기치로 내건 쿠데타”(342)로 규정한다. 이로보아 박정희는 제3
세계에선 민중봉기보다는 각성된 청년장교들에 의한 쿠데타 형식의 정변이
불가피하며, 쿠데타의 관건은 그것을 통해 실현하려는 목표가 무엇인지에 따
라 혁명이냐 반동이냐로 규정했음을 알 수 있다.
박정희는 자신의 혁명과업에 있어 4개의 근대혁명이 큰 영향을 주었음을 고
백한다.

“손일선[손문-자주]이 주도한 신해혁명에 있어서는 혁명이란 ‘무엇보다도 먼
저 확고하고도 일관된 이념의 기저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일본의 메
이지유신은 ‘혁명이란 어디까지나 그 개혁의 결과가 자기류(自己流)로 완전
소화되는 결과여야 한다’는 것이고, 터키의 경우, ‘혁명은 양보없는 투쟁과 불
굴의 전진에서만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집트의 혁명은 , ‘현대의 혁명
은 곧 경제혁명인 동시에 그것은 고도화한 국제 연관성과 항시 직관되어 있
다’는 것이다”(352).
국민에의 호소
“혁명은 마치 한 해의 농사와 같다.
가을의 수확을 위해 농부는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리며 고생을 하는가. 현재의
고통은 내일의 결실을 위해 부득불 지불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희생,
이 지불 없이 가을의 수확은 참으로 허망한 기대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우리의 혁명을 달리 우리의 인생에 비할 수도 있다.
아버지의 노고는 아버지의 향락을 위하려는 당대 위주가 아니고, 솔직히 사랑
하는 자녀를 위하는 데 있듯이, 혁명은 당시 사회의 안정이기보다는 내일의
사회를 위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혁명을 맞은 당대는 그만큼 고생을 지
불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자녀를 위하기보다 우선 자신이 잘살아야겠다는 부모가 있겠는가. 진실로 오
늘날의 부모는 어느 모로도 많은 자산을 자녀에게 물려주기는 틀렸다. 우리
부모들이 물려줘야 할 것은 돈도 아니고, 금도 아니고, 그 자녀가 자시 실력대
로 살아갈 수 있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인 것이다. 그런 까
닭으로 우리들의 사명이 또한 고되지 않을 수 없다.
혁명을 괴롭다 하고 당장의 쾌락을 추구한 나머지 자녀들로 하여금 우리가 겪
은 그대로의 고난을 물려준다면 참으로 오늘 날의 우리 부모들은 크나큰 죄
를 지었다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억만 금을 물려준다 한들 후세 사회가 온

전하지 못하다고 한다면, 결국 그 자산이 무슨 힘이 되겠는가? 혁명은 이같
이 오늘보다 내일을 위해 제기되는 윤리에 있다.
못산다.
괴롭다
갑갑하다.
이것을 극복할 수 없는 민족은 언제나 남의 무릎 위에서 재롱이나 부리지 않
으면 안 되는 것이다.
‘피와 땀과 눈물.’
이것으로 ‘민족’이란 싹은 비로소 자라나는 것이다. 이러니 혁명은 강력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적이 무엇인가 알아야 하며, 확고한 이념으로 무장해야 하고, 불굴의 투지와
폭발하는 정열과 감격이 행동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투철한
민족적 예지와 천금같은 인내와 깊고 넓은 애정이 빠질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혁명은 그 같은 사명과 목표 밑에 이뤄졌고 또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본인은, 이 같은 우리의 혁명과정과 이상 각 민족의 혁명과정을 비교
하여 민족적 노력, 투쟁, 인내 등에 있어 과연 위대한 결과를 기약할 수 있는
당연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가 없는 가를 언제나 자성하고 있다(353-354).
제6장 우리와 미‧일 관계
1. 한‧미간의 관계
우리의 경우는 미국을 떠나서 논의될 수 없는 처지에 있다. 1945년 8월 15
일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시라도 이 관계를 잊어본 일이 없는 한국국민이
다. 민주주의라는 사상적 세계에서나, 공동의 운명으로 맺어진 6.25 전쟁, 그
리고 군사 경제면 등에서 더욱 그렇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분단이 미국을 비
롯한 전승 제국의 전후 조치에서 기인된 것이므로, 이 엄청난 비극을 걷어 줄

책임이 또한 미국에 있다는 것을 알 때, 미국과 한국의 거리는 새삼스럽게 늘
어놓을 필요가 없다. 앞에서 본인은 미국의 원조정책에 얼마간의 비판과 분석
을 가진바 있었다....
본인은 이 기회를 빌려 미국에 대해 몇 가지 의견을 말하려 한다. 이것은 한,
미 양국의 우호 증진을 위해 불가결한 요건이라는 점에서 어느 시기, 어느 누
구에게든 한 번은 논의하여야 할 성질의 것이다. 혼자서 가슴에만 품고 있을
것도 없고, 설혹 이 의견이 미국에 다소 불만이 가더라도 어차피 조만간 알려
져야 할 문제라면, 그 시기는 빠를수록 좋은 것이다.
우리는 미국을 좋아한다. 자유민주주의 제도가 그렇고, 우리를 해방시켜 준
것이 그렇고, 공산침략으로부터 우리를 방위한 것이 그렇고, 경제원조를 주어
서 그렇다. 그보다도 우리가 미국을 더욱 좋아하는 까닭은, 그와 같은 은혜를
주었으면서도 우리를 부려먹거나, 무리를 강요하려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만약 그러한 부당한 간섭이나 기미가 엿보였다면 우리들의 태도는 이미 다른
방향으로 표시되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민의 신경은 참으로 예민하
다. 5천년 한국 민족의 애국적인 유산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그
같이 우리에게 은혜로운 대상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대로 할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미국이 한국을 위해 싸워주고 도와주는 것은 백 번 고맙지만,
이러한 결과(미국이 원조하지 않을 수 없는)를 한국이 면치 못하게 됨으로써
입는 우리의 고난은 세계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만큼 심대하다는 것이다
(369-370). 그 요인이 무엇인가? ‘국토분단’이다(371)...허술한 반공의 기
치나 구호는 이미 한물갔다. 공산주의를 이기는 첩경은 ‘피와 땀과 눈물’로만
자라는 ‘경제의 재건’, 이 하나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래 전에 이미 아
데나워가 제시한 산 증거가 아닌가? 미국의 가일층한 이해와 관심을 촉구해
마지않는다(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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