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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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5.8.29) 한겨레 신문 19면 '사람'난에 게재된 소생과 강성만 선임기자와의 인터뷰 기사를 올립니다. -자락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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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좌하면서 제가 우린 살 만큼 산 것 아니냐, 나이 든 사람들이 나서서 계엄군을 태운 차량 앞에서 막자고 농담처럼 말했어요. 그랬더니 몇 분이 호응하시더군요.”
2018년 정년을 맞은 김영 인하대 명예교수는 지난해 12월3일 비상계엄 소식을 아내에게 듣고 곧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국회로 향했다. 계엄 선포 30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각이라 국회 앞에 시민이 많지 않았다. 그때 부부의 눈에 시민들이 계엄군을 태운 수방사 차량의 국회 진입을 저지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바로 이 차량 앞에 연좌하며 다른 시민들의 동참을 독려했다.
그는 “도덕 교사 출신인 아내가 먼저 국회로 가야 한다”고 했다면서 그날 심경을 떠올렸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 때 광주 시민이 무차별 학살당하고 있다는 것을 제가 일찍부터 알았어요. 제가 다니던 향린교회가 광주와 연결되어 소식을 앞서 들었거든요. 그때 아무것도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제 마음 속에 깔려 있었어요. 이번에 한번 행동으로 갚을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 아무 것도 못해 부끄러웠으니.”
사실 그는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고 4개월이 지난 2022년 9월부터 거의 매주 거리에서 윤석열 퇴진을 외쳤다. 2023년 2월엔 박충구 감신대 명예교수, 해방신학자 김근수, 정종훈 연세대 교수 등과 함께 ‘민주사회를 위한 지식인 종교인 네트워크’(약칭 민사네)를 만들어 40여명 회원들과 함께 매주 광장에 섰다. 그와 박충구 교수가 공동대표인 민사네에는 조헌정 목사, 강정구 전 동국대 교수, 최자웅 신부, 이철 전 의원 등이 참여하고 있으며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이 고문이다.
지난 6월엔 민사네 3년 활동을 보여주는 자료집 ‘정의실천’을 펴내기도 했다. 여기에는 민사네 시국성명과 시국논평, 회원 중심으로 18차례 연 시국포럼 발제와 토론 내용 등이 담겼다.
김 교수를 지난 22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윤석열은 역사상 가장 저열한 걸(중국 하나라 왕)·주(중국 상나라 왕) 같은 폭군이라고 봐요.”
한문학자이자 여의샛강생태공원 ‘샛숲학교’ 교장도 지낸 그가 지난 3년 아내와 함께 매주 거리로 나와야 했던 이유이다. “제가 윤석열에 가장 분노한 것은 건설 노동자를 ‘건폭’(건설노조+조폭)이라고 한 겁니다. 우리 사회 발전에 기여한 노동자가 없으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자기는 ‘검찰 카르텔’을 만들면서, 적반하장으로 노동자들을 건폭이란 말로 모멸하고 또 가난한 사람은 유통 기한이 지난 음식을 먹어도 된다고 하더군요. 그걸 보고 대통령이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자격 미달이란 생각을 했죠. 신경림 시에 ‘가난하다고 사랑을 모르겠는가’라는 구절이 있는데, 윤석열은 가난한 사람을 인격체가 아니라 발톱 밑의 때처럼 여겼어요.”
조선 후기 학자 이광정이 쓴 망양록 연구로 모교인 연세대 국문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현역 교수 시절에도 ‘민주화와 사회 정의를 위해 행동하는 학자’였다. 2005년에 김명인·박혜영 교수 등과 함께 ‘우리 시대를 생각하는 인하대 교수 모임’(약칭 우생모)을 만들어 자본이 점령한 대학 현실에 대한 해법 모색에 노력했다. 인하대 교수회 의장 시절인 2015년에는 그가 주도해 대학 비룡탑 앞에서 세월호 참사 1주기 추모식을 했다. 이 행사에는 학생들보다 대학의 비정규직 청소노동자들이 많이 참석했단다.
그가 이끄는 교수회가 청소 노동자들 편에서 목소리를 내고, 타월과 같은 기념품을 만들 때도 꼭 챙겨준 것을 잊지 않고 교수회 행사에 동참한 것이다.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 시위에는 인하대 교수회 사상 처음으로 교수회 깃발을 앞세워 종로에서 광화문으로 행진했다.
그는 우생모 결성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대학이 자본의 힘에 초토화되고 있으니 비록 소수라도 진보적인 교수들이 뭉칠 필요가 있다고 봤죠. 회원이 15명에 불과했지만 뜻이 정당하고 또 조직되고 선전·선동 활동도 잘하니 대학에서 영향력이 있었죠.”
그는 우생모 결성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대학이 자본의 힘에 초토화되고 있으니 비록 소수라도 진보적인 교수들이 뭉칠 필요가 있다고 봤죠. 회원이 15명에 불과했지만 뜻이 정당하고 또 조직되고 선전·선동 활동도 잘하니 대학에서 영향력이 있었죠.”
지난 3년 ‘거리의 한문학자’로 살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묻자 그는 눈물이 쏟아졌던 순간을 떠올리며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농민들 트랙터 시위에 젊은 여성들이 합류한 남태령 집회에 가려고 아침 일찍 남태령 쪽 역 계단을 오르고 있었어요. 그때 뒤에서 오던 젊은 여성이 ‘할아버지 날이 굉장히 춥습니다. 제 목도리를 드리겠습니다’라며 목도리를 건네는 거예요. 머리가 하얀 노인네가 자기들을 응원하러 왔다고 생각해 그런 것 같습니다. 너무 감동이었어요.”
민사네는 지난 7월 기존 운영진에 역사학자인 백승종 전 서강대 교수를 교육위원장으로 새로 뽑아 2기를 시작했다. 2기 활동에 관해 묻자 그는 “회원들이 지식인과 종교인인 만큼 우리나라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담론 형성에 초점을 맞추겠다”고 했다. “사실 지금 우리 앞에 자본주의 위기나 생태 민주주의 도래 같은 인류사적 과제가 많아요. 윤석열 때문에 이런 걸 놓치고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죠. 기후위기나 종교의 파시즘 현상, 자본의 노예가 된 대학의 상업주의 문제 등에 대해 우리가 할 일이 뭔지 말과 글로 찾으려 합니다.”
그가 보는 오늘날 인류사적 가장 큰 과제는 생태 위기이다. 3년 전에 그는 ‘생태 위기 시대에 노자 읽기’란 책도 냈다. “지금껏 인류는 인간 중심주의적 세계관을 갖고 자연을 파괴하고 착취해 인간이 살지 못하게 되는 상황으로 몰리게 되었어요. 인간과 만물이 상호 공생하는 생태 민주주의로 가야 합니다.”
그는 우리 전통 사상에서도 생태 민주주의 개념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실학자 박지원은 이민택물(利民澤物·백성을 이롭게, 만물을 윤택하게)을, 실학자 정약용은 택만민, 육만물(澤萬民, 育萬物·만민이 윤택하게, 만물이 잘 자라도록)을 말했어요. 육만물은 꽃은 꽃답게, 나무는 나무답게 번성해 스스로 즐거워할 수 있게 한다는 거죠. 인간이 자기 이익을 위해 덜 익은 것을 마구 베거나 농약 같은 것을 확 뿌려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는 퇴임 뒤에도 ‘인문학을 위한 한문 강의’(2018), ‘고전에 길을 묻다’(2021) 등 고전 대중서를 꾸준히 펴냈다. 고전 문헌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대신 옛글의 뜻을 현 상황과 접목해 살피는 데 초점을 두고 책을 쓰고 있다. 지난 20년 동안 일기도 매일 쓰고 있다. “제 독서 철학이 ‘동서고금취사(東西古今取捨)’입니다. 제가 만든 말이죠. 동양이든 서양이든 옛날이든 지금이든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린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역사 현실과 저의 요구에 맞는 책은 취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버린다는 거죠.”
오늘날 가장 되새겼으면 하는 고전 글귀를 묻자 그는 중국 고전 ‘서경’에 나오는 만초손 겸수익(滿招損 謙受益)을 들었다. “교만은 손해를 불러오고 겸손은 이익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노자의 비우고 낮추고 부드럽고 겸손하라는 말과도 통해요. 지금은 오만한 사회입니다. 자기 욕망 충족이 최대의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이는 생태적으로 유지되기도 힘들고 개인적으로도 망하는 길입니다. 백성들도 그런 지도자는 마음으로 따르지 않아요. 오만한 권력자가 힘에 따라 통치를 하면 각자도생의 사회가 되어 공동체는 엉망진창이 됩니다.”
60살 이후 삶의 신조가 ‘이웃과 함께, 자연과 더불어’라는 김 교수는 “가지고 배우고 나이 든 자들이 해야 할 일은 억강부약(抑强扶弱, 강한 자에게는 세게 대응하고, 약한 자는 따뜻하게 돕는다)”이라고도 했다. 그가 정치인 이재명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단다.
그는 이어 “말보다 행동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독립운동을 말로만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가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는 것도 행동했기 때문이죠. 민사네 고문인 이만열 선생님도 ‘백 마디 말보다 한번의 행동이 중요하다’고 하시더군요. 윤석열 탄핵 때 보세요. 처음 국회에서 탄핵이 안 되니 여의도에 젊은 여성들 중심으로 10만, 20만, 30만이 모이니 탄핵이 되잖아요.”
나이 어린 제자들에게도 늘 깍듯했다는 그는 2016년에 인하대 총동창회가 주는 참스승상을 받았다. 그가 민사네에서 여러 지식인과 종교인을 아우를 수 있었던 데는 이런 겸손한 성품도 한몫했을 것이다. 지금도 후배 학자들이 책을 내면 정성껏 서평을 써 에스앤에스에 올리곤 한다.
겸손의 뿌리를 궁금해하자 그는 “제가 좀 착하게 생겼잖아요”라며 환하게 웃은 뒤 경북 의성에서 정미소집 막내아들로 자란 이야기를 들려줬다.
“정 같은 거는 좀 타고난 것 같아요. 어릴 때 우리 집에 걸인이 자주 왔어요. 그때 저는 그들을 정말로 환대했어요. 어머니가 쌀을 한 되 주면 저는 옆에서 ‘어머니 조금 더 넣어주세요’ 하고, 걸인에게는 ‘다음에 또 오세요’ 했죠. 어머니가 그걸 보면서 ‘사내새끼가 이렇게 마음이 곱고 착해서 어떻게 하겠냐’ 걱정을 하셨어요.
제가 해병대에 간 것도 해병대 장교 조종사였던 형님이 저를 보고 ‘아무래도 마음이 너무 착해 인생 살기에 조금 그러니까 해병대에 가는 게 좋겠다’고 권한 영향이 있었죠.”
그의 고향인 의성군 비안면 자락리에는 1970년대에 동네 주민들이 세운 그의 할아버지 공덕비도 있단다. 그의 조부가 땅을 내놓아 새로 저수지를 조성하게 되어 마을 농토가 천수답에서 수리답으로 바뀐 데 대한 보답이었다.
“우리 집 가훈이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입니다. 선을 쌓는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스러운 일이 있다는 말이죠. 할아버지가 만드셨어요.”
스스로 즐거워한다는 뜻인 그의 호 자락도 조부 공덕비가 있는 마을 이름에서 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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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 金泳
국내작가 인문/사회 저자
출생 1953년 03월 01일
출생지 경북 의성
직업 교수
작가 소개
인하대학교 국어교육과 명예교수로,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한국문학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강원대학교 국어국문학과(1981~1991)와 인하대학교 국어교육과(1992~2018)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베이징대학교, 런던대학교 SOAS 객원교수를 지냈으며, 인하대학교 사범대학 학장 및 교육대학원장, 인하대교수회 의장 및 대학평의원회 의장, 민족문학사연구소 대표, 한국한문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2016년에 인하참스승상, 2018년에 황조근정훈장을 수상했다. 현재 사회적협동조합 ‘한강’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조선후기 한문학의 사회적 의미』(1993), 『망양록 연구』(2003), 『네티즌과 함께 가는 우언산책』(2003), 『한국의 우언』(2004), 『한국한문학의 현재적 의미』(2008,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새 민족문학사 강좌』(공저, 2009), 『함께 가는 길』(2017), 『인문학적 상상력을 위한 한문강의』(2018), 『고전에 길을 묻다』(202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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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전체작품
최신순 베스트순
- 논어
- 생태 위기 시대에 노자 읽기
- 시민을 위한 한문 강의
- 인터넷 세대를 위한 한문 강의
- 조선후기 한문학의 사회적 의미
- 한국의 우언
- 함께 가는 길
- 시민을 위한 한문 강의
- 인문학을 위한 한문 강의
- 고전에 길을 묻다
- 천국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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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이 있는 사람은 말을 남긴다. 인천 문화계의 작은 거인 신현수 선생의 시는 의도적인 창작의 소산이 아니다. 평소의 따뜻한 시선과 향기로운 마음의 자연스런 결과물이다. 그가 시를 쓰는 것은 살아 있는 귀한 생명에 말을 건네는 몸짓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의 하나이다. 정의를 위해 광장에 나가고, 라오스방갈로초등학교 아이들을 추억하느라 시를 쓰지 못했지만, 오히려 그런 정의와 사랑이 저절로 『천국의 하루』의 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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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로 그리는 인천萬畵
참 배움과 실천을 고뇌하는 큰 스승, 인하대 김영 교수
이리생각
2017. 3. 27.
https://m.blog.naver.com/youliebe7/220967962534
봄날 캠퍼스는 변함없이 싱싱한 청춘들로 출렁였다. 사범대 서호관 2층에 자리한 연구실은 여전히 수북한 책들로 미로 속 같다. 책 더미 속에서 반가운 얼굴이 기자를 맞는다. 국어교육과 김영 교수(65세)다.
문득 16년 전 기자의 교육대학원 시절, ‘한문학’과 ‘우언강의’를 재미있게 들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늘 지척에 있으면서도, 가끔 페이스북에서 형식적으로 안부를 묻거나, 몇 번의 인사치레 통화가 고작이었다. 스승에 대해 너무 소원(疎遠)했다는 자책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어이구, 이게 얼마만이요? 인터넷이나 카톡이 유용한 시대인 건 틀림없지만, 역시 사람은 얼굴을 직접 봐야 되는 것인데. 그래도 가끔씩 우연히 소식 접할 때마다 반가웠어요.”
제자들에게 항상 깍듯이 존대하던 스승의 습관은 여전했다. 성성한 백발에서 세월의 무상함이 진하게 느껴진다. 온화한 미소, 부드러운 화법, 초롱한 눈빛만큼은 예전 그대로다.
“세월이 참 빠르죠? 벌써 이렇게 허연 늙은이가 되었으니. 학자로서 정년을 코앞에 두고 보니, 새삼스레 세상과의 소통과 나눔에 대해 고민하게 돼요. 평생을 스승으로 살아왔는데 과분하게 누려온 나머지 내 삶을 세상에 어떻게 되돌려줄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묻곤 하죠. 그래서 주위 우려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를 내고 촛불광장에도 나가는 거예요. 강의실에서의 고담준론이 시대정신과 맞물려 실행되지 못하면, 배움만큼 무력한 게 없다는 걸 후학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거죠.”
경북의성 사곡면에서 3남3녀의 막내로 태어났단다. 집에서 정미소를 운영했던 탓에 비교적 생활은 넉넉한 편이었다. 중학교가 집에서 20리나 떨어진 비암면에 있었는데 매일 자전거로 통학했단다.
“중학교도서관에서 이솝우화나 전래동화집을 처음 봤어요. 도시에서라면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이미 섭렵했어야 할 책들을, 중학생이 되어서야 겨우 접한 거죠. 심각한 문화영양실조에 걸려있었던 셈이지. 그때부터 사방이 컴컴해질 때까지 혼자 남아 도서관 책들을 모조리 읽어 치우기 시작했어요.”
고등학교는 대구로 유학을 갔다. 박목월, 김동리 선생을 배출한, 민족사립학교로 이름난 계성고등학교였다. 거기서도 도서관에 틀어박혀 문학책들만 파고 살았다. 당시 국어교사이자 도서관실장이 유명한 아동문학가 김성도 선생이었다.
“김성도 선생님과 입시얘기보다 문학과 책이야기를 참 많이 나눴어요. 헤르만헤세의 책들과 하이네시집을 읽으며 문학적 감수성으로 충만하던 시절을 보냈죠. 집에서는 형들처럼 공대에 가기를 원했어요. 하지만 어려서부터 밤낮없이 들리던 기계소리에 질렸던 저는 무조건 문과를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어요. 김성도 선생님처럼 국문학이나 도서관학을 전공할 계획이었죠. 당시 유일하게 도서관학과가 개설된 곳이 연세대였어요. 집에서는 무슨 듣도 보도 못한 도서관학과냐며, 차라리 법대나 상대를 가라고 다그쳤죠.
우여곡절 끝에 결국 연세대 국문과에 들어갔어요.”
하지만 잔뜩 기대를 갖고 들어간 대학은 실망스러웠단다. 도서관에서 책으로 접했던 쟁쟁한 시인, 문인 교수들의 강의만으로는 도무지 그의 지적욕구와 한창 용트림하던 감성이 채워지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강의실 대신 캠퍼스 잔디밭에서 빈둥대는 날이 늘어갔다. 강의를 몽땅 빼먹고 종일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만 읽는 날도 많았다. 그러다 그의 구미에 딱 들어맞는 ‘동아리’를 발견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이었다.
“‘자유교양회서클’이었어요. 책을 읽고 토론하는 독서클럽이었죠. 에리히 프롬의 ‘희망의 혁명’, ‘자유로 부터의 도피’,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사’,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등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데 선배들이 교수들보다 몇 갑절 나았어요.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습득하는 데에도 교수강의보다 직접적이고 유용했죠. 무엇보다 말이 통하고 감정을 즉각적으로 공유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숨통이 확 트이는 기분이었죠.”
그즈음 시대와 시국에 대해 눈을 뜨게 만든 역사적 사건이 터졌단다. 1971년 10월 3선개헌을 통해 영구 집권을 꿈꾸던 박정희정권이, 저항하는 학생들을 탄압하기 위해 10개 대학에 군대를 진주시키는 야만을 자행했다. 이른바 대학위수령이었다. 장갑차를 앞세우고 학교별로 200명에서 500명씩 떼를 지어 캠퍼스로 들이닥친 무장군인들은 인정사정없이 학생들을 짓밟았다.
“충격이었죠. 위수령이 해제된 후 다시 문을 연 대학은 처참했어요. 저항했던 선배들은 모조리 감옥에 가거나 군대로 끌려갔죠. 이런 상황에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편안히 학교에 다닌다는 건, 도저히 양심이 허락지 않았어요. 그래서 뜻있는 친구들과 함께 삭발을 단행하고 ‘삭발의 변’이라는 글을 학교신문인 ‘연세춘추’에 기고했죠. 선배들과 함께 싸우지 못했던, 비겁하고 소심한 제 자신에 대한 분노와 자책이었던 셈이죠. 그렇게 살아남은 자들끼리 다시 ‘독서클럽’을 꾸렸어요. 도서관을 점거한 빡빡머리들의 기괴한 모습은 학생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되기도 했죠. 이후에도 우리는 걸핏하면 머리를 빡빡 미는 것으로 우리만의 분노와 저항을 대신하곤 했어요.”
2학년을 마치고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문약했던 자신을 단련하고 강인해지기 위해 택한 방편이었다.
3년간의 해병대복무를 마치고 1975년 복학했다.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된 김창국, 김학민, 이해찬 등의 복학문제로 캠퍼스가 데모열기에 휩싸이자, 막 자라기 시작한 머리를 다시 삭발하고 언더우드 동상 앞에서 연좌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사회의식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부터 안병무선생의 민중신학에 심취했어요. 학내 모임이 어려워지자, 학생들은 교회로 모여 들었죠. 당시 교회는 훌륭한 보호막이었어요. 향린교회 대학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민중과 해방신학 공부에 열을 올리기도 했어요. 그때 마침 민중사학자 김용섭 교수님이 서울대에서 연세대로 옮겨오셨죠. ‘농업사학’이란 독특한 그분의 강의를 들으면서, 나도 인생을 학문에 걸기로 결심했어요. 뒤늦게 전공을 역사학으로 바꿔볼 생각까지 했을 정도죠. 그런데 교수님이 만류하셨어요. ‘국문학을 계속하면서도 역사의식을 잃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 깨우쳐 주셨죠.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연구실을 지키는 것으로 유명한 김용섭 교수님은 제 마음속 진정한 스승으로 지금껏 자리하고 있어요.”
4학년 졸업 무렵,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졸지에 홀로서기를 해야 할 상황이 된 것이다. 고향으로 부터 보내오던 학비와 생활비가 끊기면서 당장 생계조차 막막해졌다. 그래도 대학원진학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큰형이 입학금을 마련해줬다. 숭실고등학교 야간교사로 취직해 낮에는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학생들을 가르쳤다.
“처음부터 담임을 맡았는데, 대부분 형편이 어려운 집안아이들이 많았어요. 걸핏하면 사고치고 결석도 밥 먹듯 했죠. 그때마다 찾아가서 다독이고 함께 부대끼며, 햇병아리 교사생활을 정열적으로 감당했어
요. 하지만 대학원공부에 집중할 시간이 너무 부족한 거예요. 결국 1년 만에 사표를 내고 공부에만 매달리기로 했죠. 1년간 교사생활로 벌어놓은 돈은 금세 바닥이 났어요. 그때, SK가 설립한 ‘한국고등교육재단’에서 한학자양성 장학생 선발공고가 뜬 거예요.”
단 10명만 뽑는 바늘귀 경쟁을 뚫고 시험에 합격해, 매달 10만원이라는 돈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100만원도 훨씬 넘는 거액이었다. 30년 후 그 장학금으로 공부한 사람들이 모두 박사가 되고 교수가 되어, ‘Dream Lecture'라는 전국청소년대상 지식강연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들이 받은 혜택을 사회에 되돌려주는 사업을 지속해오고 있단다.
“그렇게 대학원을 졸업하고, 머리에 쥐가 나도록 한문공부를 해 한문학자가 되었죠. 1981년 9월 강원대 교수에 임용되어 10년간 근무하다, 1992년 3월 인하대 국어교육과로 옮겨왔으니 인천생활도 벌써 25년이 훌쩍 넘었네요.”
2005년 사범대학장을 거쳐 2010년 교육대학원장, 한국한문학회장, 2015년 교수협의회의장겸 대학평의훤회의장 등을 역임한 김영교수는 대학의 자율성문제와 민주화, 국정교과서 반대 등을 주도해왔고, 세월호 2주기 추모집회에서 성명서를 낭독하는 등 시대와 사회의 제반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앞장 서왔다. 현재도 김명인교수와 함께 ‘우리시대를 생각하는 인하대교수모임’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신영복 선생은 ‘독서란 머리뿐 아니라, 가슴으로 해야 하고 발로 완성해야한다’고 했어요. 이웃과 고통을 나누고, 현장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학인의 자세라는 걸 강조한 말씀이죠. 결국 제자리에 되돌려 주는 일, 그것이 최종적인 실천이 아닐까 생각해요. 학문도 시간도, 심지어 육신까지도 결국은 꼭 필요한 자리로 되돌려 주고 가야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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