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14

["현실 사회주의"의 슬픈 진실: 몽골의 사례 (1-3)] Vladimir Tikhonov


Vladimir Tikhonov 2025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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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사회주의"의 슬픈 진실: 몽골의 사례 (1)]

한국에서 종종 소련이나 북한에 대해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이용할 때에 저로서 좀 불편한 마음이 절로 생깁니다. 물론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사회주의'를 지향했습니다. 마찬가지로, 1945년 이후 북한 혁명의 지도자들 역시 적어도 관념적으로 '사회주의'를 새 나라 건국의 모델로 지향한 것입니다. 한데 마르크스나 엥겔스가 "사회주의"라고 했을 때에는 이미 자본의 축적 및 국민 국가의 수준을 훨씬 넘는 (세계적인) 탈자본주의 사회를 함의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소련이나 북한 역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야말로 바로 새로운 '국가'의 건설과 공고화, 그리고 (국가적) 자본 축적의 한 형태라고 할 국가 주도 공업화이었습니다. 즉, 초기 건국 집단의 사회주의 지향, 그리고 아주 많은 소련사 내지 북한사의 진보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를 총체적으로 마르크스주의적 눈으로 볼 때에는 아무래도 "탈자본주의"라기보다는 고전적인 자본주의를 "대체"한 또 다른 방식의 혁명 이후의 근대화라는 결론을, 솔직히 회피하기가 힘듭니다. 소련의 최초의 아시아에서의 피후견 국가, 즉 몽골의 근현대사를 보면, 이 결론은 더더욱 더 불가피한 것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몽골 인민들의 상당수가 "사회주의"를 꿈꾼 것은 맞겠지만, 1921년 친소련 정권 성립 이후의 몽골에서 소련이 취해온 정책을 "사회주의적"이라고 부르기에는 정말 양심에 걸립니다.
​몽골의 역사를 보면 많은 측면에서 조선의 역사가 떠오릅니다. 17세기 명청교체 이후 몽골의 귀족들은 조선의 국왕과 마찬가지로 청에 조공하고 청으로부터 형식적인 책봉, 즉 인장 등을 받았습니다. 조선 총사들이 나선정벌에 동원된 것처럼, 몽골의 치릭 (tsirik, 군인)들이 대러시아 국경 경비에 계속 동원됐습니다. 조선보다 청의 조공체제에서 몽골의 위치가 더 중요하여, 몽골어는 청 황실의 공식 언어 중의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한데 1880년대의 양무 운동 과정에서 청은 가면 갈수록 "보편 제국"에서 메이지 일본과 같은 중상주의적인 근대 국가의 면모를 갖추게 됐습니다. 조선에서도 1882년 이후 원세개 등 중국 관료들의 보호에 힘입어 중국의 상공인들이 대거 이주하게 되어 머지 않아 동순태(同順泰, 1885~1937년) 의 담걸생 (譚傑生)처럼 한성의 재계에서 거상으로 군림하게 됐습니다. 나름의 토착적인 상공인 계층이 이미 어느 정도 형성된 조선에서도 그랬다면, 토착적인 "원자본가 계급" (proto-bourgeoisie)이 거의 없었던 외몽골은 어느 정도이었을까요? 1900년대에 외몽골 인구의 6분의 1 정도 이미 한족 이주민들이 차지했으며 약 7만5천 명 정도 되는 한인 상인, 고리대업자 등이 몽골 유목민의 "땅"을 사들이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위협을 느낀 몽골인들은 곳곳에서 의병을 조직하여 중국인 정착민들을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일부의 경우에는 그 의병 부대 뒤에 몽골을 언젠가 보호국으로 만들려고 했던 러시아 제국이 있었던 것이죠.
​1911년에 신해 혁명으로 청 황조는 멸망에 이르렀습니다. 몽골에서 주요 귀족들이 이 기회에 독립을 선포하여 게룩파 라는 몽골과 티베트의 지배적인 금강승 불교 종파의 지도자인 제쮠담바 후툭투를 옹립하여 제정일치의 군주인 복드 칸으로 왕위에 올렸습니다. 그들이 러시아에 도움을 청원했으며, 결국 러-중 교섭의 끝에 외몽골이 "자치권"을 얻어 사실상 말기 로마노프 제국의 일종의 보호국이 된 것입니다. 그 수도인 우르가 (오늘날 울란바토르)에 러시아 정착민들의 상당수가 들어오고, 그 군대를 러시아 군관들이 양성했습니다. 그 영향 하에 있었던 일부의 몽골인들은 나중에 바로 "사회주의 혁명"의 주역 부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참, 사회주의를 이야기하자면 1910년대의 몽골에서 이런저런 일을 했던, 상당히 러시아화된 진보파의 부랴트인들을 언급해야 합니다. 예컨대 사회주의를 모호하게 지향하면서 몽골계 모든 민족들의 대동단결 등을 꿈꾸었던 부랴트족의 좌파 민족주의자인 체베엔 잠차라노 (Tsyben Zhamtsarano, 1881-1942)는 1910년대 몽골의 최초의 근대식 학교를 열고 최고의 근대식 언론인 <시네 돌리> (새로운 거울)를 발행했습니다. 참, 그는 그 전에 저의 모교인 상트-페테르스부르그 황립대학에서 몽골어를 교수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이미 서구화된 부랴트의 고급 지식인들은, 강제로라도 "아직도 중세적 삶을 사는 우리 동족"인 외몽골 몽골인들을 "초고속 근대화"시키고 싶어했던 것이죠. 그러나 "초고속 근대화"에 외부적 힘부터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외부적 힘"이 생긴 과정은, 어쩌면 소설과도 같았습니다. 1919년, 로마노프 황조가 망하고 혼란에 빠진 러시아가 무대에서 잠깐 발을 뺀 틈을 타서, 중화민국의 북양정부는 몽골의 자치권을 취소하여 그 수도 우르가에 군을 파견했습니다. 한데에 1920년에 상황은 돌변했습니다. 시베라이에서 붉은 군대와 (조선인 유격대를 포함한) 민중 반란 세력의 협공에 반동의 백위군 콜차크 정권이 붕괴되고, 그 백위군의 일부인 웅게른-세른베르그 남작 (1886-1921)의 "아시아 기마사단"은 몽골에 쳐들어 중국군을 패배시켜 몰아냈습니다. 복도 칸으로부터 "친왕"의 호칭까지 받은, 거의 동물적 수준의 반유대주의 (우르가의 모든 유대계 주민들은 그에게 학살을 당했습니다)와 반동성을 그 특색으로 한 "미친 남작" 웅게른은 유목민들을 단결시켜 칭기스칸 제국을 다소 건설한다는, 그야말로 망상적인 "꿈"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의 "칭기스칸 꿈"은 러시아인과 부랴트인으로부터 모종의 좌파 민족주의적 이념을 전수 받은 극소수의 몽골 중산층들에게는 아무 매력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잠재적 후원 세력으로 "붉은 러시아"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925년4월17일에 중국 식당 아서원에서 조선 공산당을 창당한 19명 (박헌영, 김찬, 조봉암, 김약수, 윤덕병, 독고전, 홍덕유, 김기수, 김상주, 강달영 등) 중에서는 한 명의 공장 노동자도 없었습니다. "노동자 혁명"은, 결국 지식인들이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혁명에 나선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한데 1920년에, "미친 남작" 웅게른 군이 들어아고 있었던 우르가에서는 노조를 조직, 급진화시켜 투쟁에 나서게끔 할 수 있는 노동자마저도 없었습니다. 차후 몽골인민당 (몽골 공산당)의 중핵이 된 약 15-20명의 창당 주역들의 면모를 보면 하급 라마 출신의 언론인 (닥소믄 보도, 1885-1922), 하급 관료, 사무원 (전보국 종사자), 그리고 중급 직업 군인 (담디느 수해바토르, 1893-1923) 등이 있어도 노동자들을 눈을 씻고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단, 이 그룹 멤버들의 하나의 공통의 분모는 잠차라노 같은 부랴트 근대주의자나 러시아의 외교관 내지 사무원 등과의 "인연"을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이 "계급 투쟁"을 목적으로 했는가요? 글쎄, 웅게른이 중국군을 몰아내기 전인 1920년8월에 그들이 소비에트 러시아에 사절단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지만, 도움을 요청하는 서한을 서명한 이는...다름이 아닌 "봉건 귀족" 복도 칸이었습니다. 계급보다는 (북양 정부로부터의) "민족 해방"은 문제였고, 이 "민족 해방"의 문제 차원에서 "봉건 군주"인 복도 칸은 붉은 러시아라는 가장 유력한 "외부적 조력자"에 연줄을 댈 수 있었던, 그 일부가 아예 라마이기도 했던 중산층 혁명가들에게는 충분히 기댈 수 있었습니다. 몽골의 "사회주의 혁명"은 이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이후 계속)










Hyunyoung Ro

북미에 살면서 민족해방과 제국주의의 문제를 더 첨예하게 느끼는데요, 2021년 조사 기준 캐나다 전체 인구의 26.5, 토론토 인구의 57%가 유색인종인 사회에 살다 보니 민족문제와 제국주의 문제가 피부에 와닿더라구요. 다양한 국가 출신의 제3세계 출신 활동가들을 만나다 보니 더 그렇고요. "현실사회주의"의 한계라는 것이 결국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저개발 국가에서 생산력과 노동계급이 미약한 와중에 제국주의의 핍박 속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고자 발버둥친 결과물이기도 하죠... 제3세계에서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이 결국 "구좌파", "현실사회주의"에 가까운 형태로 나타나는 것도 이런 이유라고 생각하고요.
동아시아, 서유럽, 북미의 "선진국" 좌파들이 반제국주의, PT국제주의에 더 충실하고, 제2세계, 제3세계의 운동에서 학습해야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결국 변증법적 유물론자로서 물질적 조건이 열악한데 우리가 바라는 이상만을 요구할 수 있나? 싶기도 하구요.
이런 맥락에서 신민주주의론의 아래 부분이 가지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식민지, 반식민지 혁명의 제 1 단계, 즉 첫 걸음은 그 사회적 성격으로 볼 때에는 기본 상 여전히 부르죠아 민주주의적인 것이며 그 객관적 요구는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한 길을 닦는 것이지만 이러한 혁명은 이미 낡은, 부르죠아지에 의하여 령도되는, 자본주의 사회 및 부르죠아 독재의 국가를 건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혁명이 아니라 새로운, 프로레타리아트에 의하여 령도되는, 제 1 단계에 있어서는 신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고 각개 혁명적 계급들 간의 련합 독재의 국가를 창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혁명이다. 그러 므로 이러한 혁명은 또한 사회주의의 발전을 위하여 더욱 광활한 길을 닦아 주는 것이다. 이러한 혁명은 그 진행 과정에 있어서 적정 및 동맹군의 변화로 인하여 또 약간의 단계 로 구분되기는 하지만 그 기본적 성격은 변화되지 않는다.
이러한 혁명은 제국주의를 철저히 타격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국주의는 이것을 용허하지 않고 반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그것을 용허하며 사회주의 국가와 사회주의적 국제 프로레타리아트는 그것을 원조한다."


JunHo Lee

몽골 ‘공산주의 유머’를 마침 봤는데 근대사도 격동의 역사네요




김종보

너무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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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ladimir Tikhonov
["현실 사회주의"의 슬픈 진실: 몽골의 사례 (2)]



1921년9월14일. "미친 남작" 웅게른의 백위군을 몽골에서 내몬 (사실상 붉은 러시아 장교들이 지휘하는) "몽골인민혁명군"과 붉은 군대의 연합 부대들이 몽골 수도 우르가를 이미 점령했습니다. 복도 칸이라는 신정일치의 군주를 옹립한 새 정부는 일단 "입헌군주제"를 선언하고 중국에 대한 "완전한 독립"은 표방했습니다. 아마도 1921년 몽골 혁명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바로 이 "민족 독립"이었던 것일 겁니다. "민족 독립"을 넘어서 "계급 혁명"으로 가는 것을, 이 시점에서 아무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유명무실의 군주인 복도 칸은 물론이고, 막후에서 몽골의 새로운 내각을 사실상 직접 지명하고 지휘한 붉은 러시아의 대표자인 외무인민위원회의 시베리아 대표 보리스 슈먀츠키 (조선의 이르쿠츠크 공산당의 후견인이기도 한 인물이죠) 역시 레닌에게 보낸 메모에서 "몽골 같은 후진국에는 입헌군주제와 점차적 개혁만이 필요하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라마로서 제정 러시아의 영사관 부속 학교에서 러어를 익힌 하급 친러파 지식인 출신의 새로운 "혁명 내각"의 첫 지도자인 독소믄 보도 (Dogsomyn Bodoo, 1885-1922) 역시 그가 정중히 모시려 했던 복도 칸 밑에서의 "자주적 민족 근대화" 정도를 생각했습니다. 조선 혁명가들에게는 "1차 민족민주 혁명"과 "2차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두 단계 혁명론"을 가르쳤던 코민테른으로서는, 이런 "점진주의", 즉 사실상의 1당 체제 국가에서의 점차적 근대화 개혁 방향을 지지하는 건 아무 문제 없었습니다. ​
문제는, 새 내각이 표방한 "민족 독립"이란 사실상 러시아 보호국 체제에서는 어디까지나 "허구"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1894-5년 청일 전쟁 결과로 청 제국 중심의 조공체제로부터 벗어난 조선이 바로 일제 침략의 대상이 된 것처럼,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한 몽골은 제정 러시아를 대체한 붉은 러시아의 "보호막" 밑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 혁명의 열정이 식지 않았던, 그리고 아시아에서의 "친구"를 필요로 했던 초기 소련이 몽골에 제시한 조건은 썩 나쁘지 않았습니다. 1921년 몽-러 협정으로 몽골이 제정 러시아에 진 5백만 루불의 외채는 전부 탕감되고, 새로운 차관이 제공되고, 러시아 제국의 몽골에서의 모든 이권들이 회수되고 몽골 정부에 귀속됐습니다. 일단 레닌 정부만큼 나름대로 "아시아 약소국에 대한 혁명적 연대주의"를 실천해보려 했습니다. 한데, 이와 동시에 붉은 러시아는 사실상 몽골의 국정 운영을 장악하고 말았습니다. 약 5천 명의 러시아 "고문관"들이 군을 비롯한 국가 각 기관에 포진됐으며, 특히 군의 경우에는 참모본부 부장 등 핵심 보직을 계속해서 러시아인들이 맡았습니다. 1926년 소련군 부대들이 몽골에서 일시 철수했지만, 몽골군 자체가 소련에 장악돼 있는 상황에서는 이건 큰 차이를 가져다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1921년의 "민족 혁명"은 지정학적인 완충지대에서는 한 열강에서 다른 열강에의 "종속 관계의 변경" 정도 의미하게 된 것입니다.
​한데 몽-러 관계에서는 또 하나의 변수로 뜬 것은 바로 러시아 "고문관"들의 상당수를 차지한 부랴트 공산주의자들의 "민족 공산주의" 지향이었습니다. 조선과 비교하자면, 북조선 건국 초기에도 약 400명의 고려인들이 파북되어 새나라 건설 과정에서 요직을 맡은 바 있었습니다. 한데 박진순이나 남만춘, 한명세, 최고려 등 1세대 재러 혁명 지도자들이 이미 다 숙청된 판에 파북된 고려인들은 대개 스탈린 체제하에 키워진, 독립적인 정치 구상이 없었던 20-30대의 기술 관료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그 리더 격인 허가이가 1953년에 "자살을 당한" 일이 있고 나서 그 중에서는 극소수는 1956년 종파 사건과 같은 형태로 저항했다가 패배 당하고, 다수는 숙청되거나 소련으로 돌아가고, 일부 (방학세, 남일, 박정애 등)는 김일성파에 붙고 말았습니다. "야성"이라고 별로 없는 이들 파북 고려인들과 달리, 파몽 부랴트인들이 제1세대 혁명가로서 그 포부가 아주 컸습니다. "몽골의 허가이"라고 할 엘베크도르지 린치노 (Elbekdordzhi Rinchino, 1888-1938)는, 무색무취의 스탈린 시대 관료인 허가이와 달리 1903년부터 보리스 슈먀츠키의 지도 밑에서 지하 마르크스주의 셔클 생활을 해본 혁명가이자 학자였습니다 (남만춘의 여동생인 남마리야의 남편이기도 했죠. 남마리야는 아주 훌륭한 생물학자였고요). 1921년에 (남마리야와 함께) 몽골에 온 린치노는 - 붉은 러시아 여권을 가지면서도 - 몽골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수해바토르와 함께 몽골의 "수령"이 됩니다. 수해바토르가 1923년에 의문사되자 부랴트인 린치노가 1923-1925년 사이에 사실상의 몽골의 독재자가 됩니다. 참, 복도 칸도 55세도 안된 나이에 1924년에 - 천수를 다하지 못한 채 - 요절하자 린치노의 권력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없었습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부랴트 지역에서 "부랴트 민족 위원회"를 꾸려 일종의 준 민족국가를 만들어본 린치노의 구상은 참 대담했습니다. 상트-페테브루브르 제국대학 법학부에 다닌 바 있는 러시아와된 부랴트 지식인인 린치노는 불교를 대단히 싫어하고 몽골을 탈불교화시키려 했습니다. 종교를 대체할 것은 "피억압 민족"으로서의 전세계 몽골인들의 대동단결이었습니다. 린치노는 외몽골과 부랴트 자치 공화국, 투바 (우량하이 지역), 내몽골 등 몽골어 사용자들이 살거나 역사적으로 몽골과 인연이 있는 모든 지역들이 하나로 합치는 것을 원했습니다. 이런 "범몽골 대동단결" 계획을 실현하자면, 일단 린치노파는 몽골에서의 권력 장악을 튼튼히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 이해 "탈불교화" 절대 찬성할 수 없었던 라마 출신의 독소믄 보도 총리는 1922년에 그 추종자들과 함께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곧 충살됐습니다. 린치노의 탈불교화 등 급진적 방향에 반대했던 세관 관료 출신의 또 한 명의 혁명 지도자인 몽골인민당 총서기 솔리인 단잔 (Solyin Danzan, 1885-1924) 역시 "친일 간첩"으로 몰려 역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한데 몽골 시민도 아닌 린치노가 단잔의 숙청 이후에 몽골의 독재자가 된 것을, 몽골인민당의 주된 기반인 우르가의 중산층에게 불만이었습니다. 린치노는 "범몽골주의적" 꿈을 꾸었지만, 몽골의 교양인, 관료 등에게는 린치노는 몽골을 "식민 통치"하는 "소련 사람"이었습니다. 한데 우르가로 코민테른의 대표 자격으로 온 투라르 르스쿨로브 (Turar Ryskulov, 1894-1938)라는 카자흐 혁명가의 입장에서는 린치노의 대담한 구상들이 위험하기도 하고 소련의 외교 정책에 위배되기도 했습니다. 중국으로부터 내몽골을 떼내는 것은 중국 혁명가들과의 관계를 망칠 수 있는 등 "파몽 부랴트파"와 소련의 정책적 구상은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소련은 린치노를 다시 소련으로 소환했으며, 권력은 청나라 시대때부터 관직에 있어온 노련한 관료인 발린긴 체렌도르즈 (Balingiin Tserendorj, 1968-1928)에게 돌아갔습니다.
체렌도르즈의 구상이란 사실 오늘날 몽골 정부의 노선을 방불케 합니다. 대외적으로 그는 다축 외교, 특히 일본과 유럽, 미국과의 관계 강화를 원했으며, 대내적으로 불교 전통의 존중과 혼합 경제, 매우 점차적인 공업화를 지향했습니다. 1930년대에 대숙청의 회오리에 빨려들어간 몽골에서 많은 이들이 체렌도르즈의 시대를 "황금기"처럼 회상했지만, 이런 독립적이고 중도적인 노선을 걷는다는 것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외부에서는 소련이 특히 비밀경찰과 군 인사를 쥐락펴락하려고 하는 등 계속해서 인사 정책과 외교 정책에 간섭하고, 대내적으로 공청 (혁명청년단) 출신의 청년 급진파, 즉 소련과 같은 국가 주도의 경제와 강력한 당-국가 체제 건설을 원하는 젊은 간부 후보생들이 그를 "보수파"로 지목해 계속 비판했습니다. 그가 죽고 나서, 1930년대 초반부터 급진파의 소장 간부들이 결국 당과 국가의 요직을 장악하고 말았습니다. 그 때부터는 몽골의 진정한 수난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차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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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ladimir Tikhonov


["현실 사회주의"의 슬픈 진실: 몽골의 사례 (3)]

"현실 사회주의" 건설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소위 농업 집단화입니다. 집단화의 논리는 뻔했으며, 그 논리는 그 어떤 종류의 사회주의와도 아무 관계도 없었습니다. 공업화에 막대한 투자 자본 (외국에서 사들이는 기계의 대금, 건설비, 기술 이전 비용 등등)이 필요한데, 혁명 이후 정권이라면 핵심부 자본주의 국가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손쉽게 투자하거나 차관을 공여할 일은 없습니다. 미국과 일본 등으로부터 투자를 받고, 저리 차관을 받을 수 있었던 한국은 공업화 시기의 농업 정책에 있어서는 그냥 도시민들의 물가 안정화를 본위로 하고 농민을 다소 희생시키는 저곡가 정책 정도로 족할 수 있었지만, 소련이나 중국, 북한 등은 아예 농업 부문의 잉여를 모조리 빼내 공업 부문에 투자를 해서 외부의 투자/차관 없는 내포적인 초고속 공업 성장을 이루어야 했습니다. 북한의 경우 토지개혁 이후에는 이미 25% 현물세의 형태로 농촌 잉여의 대부분을 국가가 수취했지만, 1950년대 중후반의 집단화로 농업 집단화로 아예 농촌 잉여의 전부를 국가가 가져갈 수 있게 됐습니다. 그렇게 해서 국가가 획득한 내부 자원은 바로 1970년대말까지 상당히 높았던 북한 공업 성장률의 뒷받침이 된 것이죠. 그런데 북한의 경우에는 이미 일제말기의 농산물 공출 등이 있어서 "현실 사회주의" 이전에도 농촌에 대한 국가의 관리망이 촘촘했습니다. 거기에다 퇴역 군인 등 정권에 충성할 수 있는 새로운 지도 집단이 농촌을 이끌게 되어서, 농촌집단화에 대한 소극적 저항 (도시로의 대대적인 이주)은 있어도 적극적 저항은 없었던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와 달리 몽골 유목민들을 그 어느 국가도 역사상 촘촘히 관리한 적이 없으며, 그 내부에서 정권에의 충성을 할 수 있는 "기간 집단"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몽골에서는 농촌 집단화의 시도는 바로 폭발의 도화선이었습니다.
​공청 출신의 초급진적인 젊은 간부 젠겔티인 직지자브 (Tsengeltiin Jigjidjav, 1893-1933)가 1930년에 내각 총리에 취임합니다. 소련의 전례대로 사찰 재산은 국가에 강제 귀속되고, 사기업들이 전면 금지되고 유목민들에게 집단 (hamtral) 가입이 강요됩니다. 그 강요에 저항하여 유목민들이 가축을 도살해, 2년 사이에 몽골 가축 두수는 약 3분의 1이 줄어듭니다. 그러다가 1932년에 바로 소련의 국경에 위치한 훕수굴 (Khuvsgul)이라는 지역에서 대대적인 농민 반란이 일어납니다. 농민군을 지도하게 된 이는 바로 한 사찰의 주지스님이었던 지매디인 삼부우 (Chimediin Sambuu)스님이었는데, 그 부하들 중에서는 스님 이외에는 집단화 정책이 초래한 파국에 놀란 몽골인민혁명당 당원 출신들도 수두룩했습니다. 반란군이 채채를래그 (Tsetserleg)이라는 지역 거점 도시를 함락시키자 그 주둔병의 10분의 9는 반란군에 합류할 정도로, 정권의 집단화 정책에 대한 불만은 이미 극에 달했던 것입니다. 반첸라마와 연락하여 제정일치의 체제를 복구하려 했던 반란군은 순식간에 몽골 국토 4분의 1을 통제하게 되어 친소련 정권은 패닉 상태에 빠졌습니다. 수도 울란바토르가 곧 합락될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힌 현지의 소련 대표자들이 스탈린에게 소련군의 즉각 파병을 요청했습니다. 한데 스탈린이 "파병하면 우리가 점령군이 되고 중국이나 일본군이 해방군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여 현명하게도 파병을 거절하고, 파병 대신에 몽골 정부군에 기관총과 야전포, 그리고 폭격기를 지원했습니다. 결국 기관총과 공중 폭격으로 정부군이 이기고 농민 반란군이 졌습니다. 몽골 총인구 60만 명 중 약 1만명이 희생된 것이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대개 계급 투쟁을 역사 진보의 원천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실, 이 훕수굴 반란의 경우에는 농민이라는 직접 생산자 계급의 적극 투쟁이 그들에게 위로부터 강요되었던 착취적 정책을 적어도 지연시킬 수 있었던 "계급 투쟁 승리"의 경우입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착취적 정책을 강요하려 했던 이들이 마르크스주의를 그 기치로 내걸었던 것이었죠. 한데 이 반란으로 스탈린이 몽골에 집단화를 강요하다가는 지정학적으로 민감한 지역에서 "화"를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몽골에서의 집단화를 취소했습니다 (1958년이 돼야 몽골 정부는 급기야 집단화를 실시했습니다). 쓸 모가 없게 된 직지자브는 총리직에서 해임돼 좌천됐다가 다음해에 "괴한의 흉탄"에 의문사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속된 말로 "팽"을 당한 것이죠. 다음 총리는 벨지딘 겐덴 (Peljidiin Genden, 1892-1937)이라는, 좀 더 온건한 노선의 공청 출신이었습니다. 소련은 이미 완전한 국유 경제로 진입했지만, 농민들의 저항으로 몽골에서는 겐덴 정권하에서 여전히 민영 경제가 남아 있는 '신경제정책', 즉 혼합 경제가 잔존했습니다. 겐덴은 공청과 당을 통해 초고속 출세를 할 수 있게 된 농민 출신의 간부이었지만, 그에게는 혁명이란 일차적으로 '민족 혁명'이었으며, '민족 문화'의 요체는....맞습니다. 바로 불교이었습니다. 겐덴은 레닌과 석가모니불을 똑같이 존경한다고 맨날 공언했습니다. 거기에다가 그는 민족 독립의 차원에서 적극적 대일, 대중국 외교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몽골에서의 소련군 진입을 반대하고, 몽골에서의 소련 고문관들의 "식민주의적 태도"를 질타했습니다. 거게다가 그는 스탈린과의 한 술자리에서 스탈린에게 "니가 러시아의 황제처럼 군림하는 놈!"이라고 욕을 퍼붓고 뺨을 때렸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살아 남았을 리는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1936년에 해임되고, 소련에 진료차 갔다가 거기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몽골이라는 전략적 요충지에서는 스탈린이 일단 "무조건 충성파"를 꽂아야 했습니다. 한데 겐덴의 뒤를 이은 이들도, 아무리 빈민 출신의 공청 내지 당 간부를 거쳐 올라온 "혁명의 신옐리트"이었다 해도, 기본적으로 '민족'의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1936-39년 사이에는 몽골의 총리는 가난한 하급 귀족 출신의 독실한 불교 신자 아난든 아마르 (Anandyn Amar, 1886-1941)이었으며, 실권은 그의 부총리인 호를로긴 초이발산 (Khorlogiin Choibalsan, 1895-1952)에게 있었습니다. 아마르는 소련 군대의 몽골 진입 (1937년8월27일)을 반대했으며 피의 숙청에도 반대했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습니다. 소련 군대는 총리인 아마르의 허가 없이 몽골로 들어왔는가 하면, 숙청을 1917년 이전에 이르쿠츠크에서 러시아식 교육을 이수한, 그리고 스탈린의 신임을 한 몸에 받은 초이발산은 진행했습니다. 초이발산과 함께 숙청을 진행한 이들은 소련에서 파견된 러시아인 비밀 경찰이었습니다. 결국 1937-8년 숙청의 결과로 약 1만7천명의 불교 성직자 (라마)와 함께, 몽골의 상당수 당 간부 등도 죽었습니다. 전통 사회의 엘리트 (성직자와 귀공족)와 함께 신사회 엘리트 (당 간부)의 상당부분은 거의 물리적으로 멸절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 빈 자리를 채운 이들은, 1939년에 아마르를 대신하여 총리가 된 초이발산 '수령'에게 무조건적 충성을 바치는 아주 젊은 새로운 청년 간부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초이발산은 석가모니불 이상의 위인이었던 것이죠. 그들이 초고속 출세를 하게 됐지만, 그 대가는 약 3-4만 명 (그 당시 몽골 총인구의 약 4-5%) 숙청 희생자들의 고통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나는 몽골인데 왜 나를 소련 재판소가 재판하느냐?"라고 소련의 식민주의적 정책을 질타한 아마르 총리는, 해임되고 나서 모스크바에서 재판을 받아 거기에서 총살됐습니다. 동시에 초이발산 총리는 몽골에서의 "무신론과 사회주의의 승리"를 자축했습니다. "무신론"은 모든 사찰의 강제 철거와 모든 승려들의 총살 내지 강제 환속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면 "사회주의"는? 몽골의 혁명은 애당초에 중국인의 고리대 자본과 토지 잠식 등에 대한 불만에서 출발했지만, 농민 집단화에 실패한 1930년대 몽골에서 그나마 건설된 공업, 즉 금광이나 석탄광산 등은 철저하게 소련 경제의 수요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한데 종주국 소련에 비해서는 몽골의 "사회주의적 발전"은 더뎌도 아주 더뎠습니다. 아마르가 소련에서 총살 당한 1941년 그 당시 몽골인의 80%는 여전히 문맹이었습니다. 이건 문맹이 거의 청산된 소련보다 차라리 식민지 조선을 더 방불케 했습니다. 참, 식민지 조선은 그나마 마지 못해 1925년에 국립대 하나 (경성제대)를 세워야 했지만, 몽골에서는 1941년에 12개의 고교가 있고 몇 개 전문학교가 있어도 대학 한 군데 없었습니다. 고등 교육을 받으려면 무조건 러어를 익혀 소련 유학 가야 했습니다. 몽골의 경제나 인프라, 교육 시설에 죽어도 투자를 하지 않았던 종주국 소련은, 몽골에서 진력을 다하여 키운 건 단 하나, 바로 몽골군이었습니다. 대일 전선에서 몽골군이라는 보조 병력이 필요했던 것이죠. 결국 몽골의 혁명은 '민족 혁명'으로 시작돼어 중국에 대한 독립 쟁취에 성공했지만, 대소련 종속 속에서 몽골의 자주적 발전은 거의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멸절을 당한 귀공족과 라마를 대신하여 새로운 관료 계급이라는 지배층이 형성되었지만, 몽골 사회가 생산할 수 있는 잉여가 적고 소련은 몽골을 경제적으로 착취해도 투자를 거의 안했던 상황에서 이들이 쟁취할 수 있는 근대화의 수준 역시 그다지 높지 못했습니다. 1941년 그 당시의 몽골은 여전히 종속과 빈곤의 늪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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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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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형
베트남 보면, 사회주의 국가가 어떤지 알 수 있는데, 체제의 결점을 개인이 다 짊어지고 가는 구조죠. 체제의 구조적 결함이나 비효율이 사회 전체의 책임으로 분산되지 않고, 오히려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경우가 많음. 특히 외국인. 사회가 집단적으로 체제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각 개인이 자기 방식으로 “버티는” 것이 일종의 생존 전략이 되어 버림. 이런 국가가 발전이 되겠습니까? 베트남 보면 웃김. 베트남 공산당 생각을 보니까 일부러 계급을 만들어서 공권력으로 눌러서 계급투쟁을 시키는 듯 ...
10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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