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의 음성으로 반전·평화를 노래한
존 바에즈(Joan Baez; 1941〜)
“뭔가 의미 있는 노래들은 깊은 상처 속에서 나옵니다.”라고 말한 존 바에즈는 자유 그리고 비폭력의 진정한 뜻을 노래했다.
『도나, 도나(Donna, Donna)
시장으로 가는 마차 위에 슬픈 눈을 가진 송아지가 있어
그의 높은 하늘 위에선 하늘을 부드럽게 하는 비행하는 제비가 있고
바람은 얼마나 웃는지 그들은 마음을 다해 웃어
하루 종일 그리고 여름밤이 어느 정도 지날 때까지 웃고 또 웃어
농부는 말했어 “불평 좀 그만해 누가 너더러 송아지로 태어나래?
자랑스럽고 자유로운 제비처럼 왜 날개를 갖지 못한 거야?”
바람은 얼마나 웃는지 그들은 마음을 다해 웃어
송아지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쉽사리 도살당했어
하지만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자는
제비처럼 나는 법을 배웠지
바람은 얼마나 웃는지 그들은 마음을 다해 웃어
하루 종일 그리고 여름밤이 어느 정도 지날 때까지 웃고 또 웃어』
이 가사를 쓴 아론 제이틀린(Aaron Zeitlin; 1898〜1973)은 벨라루스 출생 유대인 작가였다고 한다. 연극 공연으로 미국에 갔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그의 가족 대부분은 독일의 조직적 학살(Holocaust)에 대부분 희생당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송아지는 억압받은 민중을 상징하고, 자유롭게 나는 제비는 자유를 상징하여 얽매인 자유를 찾자는 염원의 시이다. 노래는 포크의 여왕으로 불리는 존 바에즈가 불렀다.
1960년대의 미국은 아시아의 가련한 농업국가 베트남에 인류 역사상 최대의 폭력을 행사했다. 수많은 마을에서 노인과 어린이가 살해되고, 부녀자는 겁탈과 동시에 죽임을 당했다.
바로 그때, 워싱턴 광장에는 존 바에즈, 밥 딜런(Bob Dylan; 1941〜), 미국 포크 음악의 대부 피터 시거(Pete Seege; 1919〜2014) 같은 대중 가수들이 이끄는 반전의 메아리가 장엄하게 울렸다.
그리하여 베트남 반전 운동은 미국만이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가 전개했으며 국제연대로 발전했다. 이러한 움직임으로 미국 정부로 하여금 폭격 중지, 평화교섭 개시, 미군 철수, 전쟁 중단 결정을 내리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이들 반전·평화 음악가들은 미국이 신봉하는 힘의 논리를 무너뜨려, 미국 우익 제국주의자들의 오만함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
이들 가수 가운데 가장 위대한 반전 운동가를 꼽으라면 나는 존 바에즈를 첫손가락에 꼽는다. 이유는 조국인 미국이 저지른 제국주의 폭력에 대해 가장 의미 있게, 가장 끈질기게 저항한 양심 때문이었다. 바에즈는 반전‧평화를 위해 아직까지 거리에 나선다.
바에즈는 베트남전 참전 거부 운동으로 감옥에 갔다가 나온 뒤 이렇게 말했다.
“저는 감옥에서 배운 게 있죠. 반전으로 감옥에 가면 더 강한 반전주의자가 된다는 사실을”
그런 평화운동에 대해서 자서전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사람들이 다가와 제 목소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럴 때면 열에 아홉은 평화운동에 관한 걸 꼭 함께 언급하죠.
… 가장 마음에 와 닿은 이야기는 당시 군대에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였어요. 그들은 베트남 전선이나 다른 전쟁 지역에서 복무하던 시절, 금지곡이던 내 노래들이 담긴 앨범을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를 들려주었죠. 그 노래들을 밤에 몰래 들은 이야기며, 그것이 자신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에 관해서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내 노래가 군대를 떠날 수 있게 용기를 주었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내 노래가 군 복무를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위안을 되어 주었다고 하더군요. 이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내가 그분들과 함께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낍니다.”
존 바에즈가 인종 차별을 반대하고 반전평화 운동을 한데에는 멕시코계 반핵물리학자인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아버지는 방위산업체에서 오라고 했지만 원폭의 가공할 위력을 잘 알고 있기에 거절했다고 한다. ‘돈보다는 인류애’를 선택한 아버지의 핏줄을 딸이 이어받았다.
어릴 때부터 비폭력과 간디(Mahatma Gandhi; 1896〜1948)에 관심이 많았다. 16살 때 흑인 인권 운동가였던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목사의 연설에 감동했다. 킹목사의 <나에게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라는 제목의 연설로 유명한 1963년 3월 워싱턴 대행진에서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를 열창했다.
노래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노래를 비폭력 운동의 가장 강력한 무기로 만들기 위해 1959년에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1962년 ‘타임’지는 표지 인물로 존 바에즈를 다루면서 ‘신인 포크 가수 가운데 가장 재능이 있다’라고 언급했다.
연예 기획자가 거액을 제시하며 존 바에즈에게 계약을 맺자고 했지만 거절했다.
“포크 음악은 의식과 관계하고 있다. 누군가 포크 음악으로 돈을 벌려고 한다면, 그 음악은 포크 음악이라고 말할 수 없다.”
“뭔가 의미 있는 노래들은 깊은 상처 속에서 나옵니다. … 의미 있는 노래를 부르려는 가수라면 자신의 삶이 그것을 뒷받침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존 바에즈는 이렇게 말했고, 그렇게 살았다. 하나님께 받은 노래 재능을 평생 민중 해방과 국가 개혁을 위해 헌신했다.
이 가냘픈 가수의 노래는 비폭력 운동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지금까지 남미, 중동, 아프리카, 동유럽 등의 포탄이 머리 위를 스치는 수많은 분쟁 지역을 찾아 평화의 전도사 역할에 손 놓은 적이 없었다.
특히 1972년 12월 중순에 베트남 하노이를 직접 방문했다. 베트남전쟁의 영향을 직접 목격하고, 북베트남에 억류된 ‘미군 전쟁 포로’들에게 우편물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존 바에즈가 하노이에 머무는 13일 중 11일 동안 '크리스마스 폭격(The Christmas Bombing)을 경험했다. 미국은 공군의 전략 폭격기인 B-52가 주축을 이루어 11일 동안 2만 톤 이상의 폭탄을 투하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중폭격기 작전이었다. 존 바에즈는 방공호에 대피하여 절망에 가까운 공포를 경험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반전 평화 활동을 더욱 강화했고, 특히 이 시기의 경험은 그녀의 노래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 방문은 미국 내에서 논란을 일으켰지만 존 바에즈의 평화와 인권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였다.
존 바에즈의 음악 인생에서 가장 친근하게 활동했던 가수는 밥 딜런이었다. 밥 딜런은 존 바에즈와 동갑내기로 60년대 초반에 서로 음악적 영감으로 주고받으며 깊은 연인 관계를 맺었다. 두 사람은 “노래란 선율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가사 또한 살아 숨 쉬어야 한다.”고 일깨웠다.
밥 딜런은 60년대 초에는 반전 활동과 인종차별정책에 저항했지만 정치보다는 이리저리 바쁜 예술을 좋아했다. 60년대 중반부터는 사회적인 발언을 중단했다.
존 바에즈는 그런 밥 딜런에게 상처를 받고 멀어졌고, 끝까지 시대의 변화에 타협하지 않고 늘 힘없고 상처 받는 사람 편에 서서 노래를 불렀다.
약자를 달랜 것만이 아니라 잊힌 자유와 잃어버린 권리를 찾으라고 의식을 일깨웠다. 때문에 딜런과 달리 레코드 회사에서 따돌림을 받고 제도권의 방해에 시달렸다.
자신의 평생을 회고할 때 정치적인 활동을 할 때 가장 행복했고 음악은 그 다음이었다고 한다.
밥 딜런은 탁월한 작곡자이자 작사자다. 그의 노랫말은 음유시라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는 신비한 재능의 문학성을 품었다.
존 바에즈는 헤어진 지 10년 뒤에 밥 딜런을 이렇게 평했다.
“밥 딜런은 로큰 롤을 문학으로, 예술로 격상시키는 기반을 마련했어요.”
밥 딜런은 2016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는데 노벨문학상 역사에서 가장 뜻밖의 인물이었다. 이는 저항적인 대중 예술이 세계를 변화시키고 역사를 반성하게 하는 새로운 모델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였다.
밥 딜런이 노벨 문학상을 통해 음유시인으로 예술적 재능을 인정받았다면, 존 바에즈는 인간의 권리에 대한 강한 신념을 열정적으로 실천한 행동가로써 노벨평화상을 받아야만 마땅하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할 때 내가 받은 귀중한 선물은 여유 있는 시간이었다. 진료실이 텅 비었으니, 내 방에서 책을 읽을 때 컴퓨터에 유튜브를 켜놓으면 음악이 끊임없이 흐른다. 그러던 중 익숙한 곡이 흘러나왔다. 목소리가 약간 쉬었지만 귀에 익어 화면을 보니, 낯선 고운 할머니다.
아니 그런데, 자막에서 <Joan Baez-Fare Thee Well Abschiedstour 13. 6. 2018>이 나타났다. 아, 존 바에즈의 (고별공연?) 2018년 영상이니 존 바에즈는 77세!
나이 80을 바라보는 존 바에즈를 화면으로 보니 세기적 투사답지 않게 곱고 무엇보다 품위가 있다. 그 고운 품위 있는 비결은 존 바에즈의 아들 말에 있었다.
“자기의 신념과 철학, 인간의 권리에 대한 강한 열정이 어머니를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해요. 자기 일에 진지하면서도 웃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존 바에즈 자신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세상에 대해 윤리적인 입장을 갖고 있고 그 입장이 아주 분명해요.”
고운 할머니, 가장 강한 투사의 어록 몇몇을 적어 보겠다
*내 신념의 근간은 내가 10살 때와 같습니다. 바로 비폭력입니다.
*행동은 절망의 해독제입니다.
*어릴 때부터 비폭력과 간디에 대해 토론했고 16살 때 킹목사의 연설에 감동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재능을 민중 해방과 국가 개혁을 위해 헌신하기로 했습니다.
*노래! 우리 비폭력 운동의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진심으로 비폭력을 고수하려면 경찰에게 ‘파시스트의 돼지’라고 고함을 치거나 누군가를 때리면 안 됩니다.
*정치적인 활동을 할 때 가장 행복했고 가장 건강해요.
*노래한다는 것은 사랑하고 긍정하는 것이며, 날고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듣는 이들의 가슴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서 그들에게 삶은 살아가야 할 것이며, 사랑은 존재하고, 그 무엇도 약속된 것은 없지만, 아름다움은 존재하며, 그것을 찾고 발견해야 한다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존 바에즈는 『자서전』(이운경 옮김 2012. 삼천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음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음악에서 그렇듯 전쟁터에서도 생명의 편을 들지 않는다면, 그 모든 소리가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소용없죠. 이 시대가 던지는 가장 중요하고도 현실적인 물음, 즉 어떻게 하면 인류가 서로 죽이는 일을 막을 수 있으며, 그러한 살육을 막기 위해 내가 평생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문제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것이 될 거예요. 내가 세상에 나서서 무언가 하길 원한다면, 그건 바로 내 선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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