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 대한 고발은 파시즘의 전조였다. 그나마 11년전에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앞세워 전체주의적 욕망을 숨겼다.
그러나 이번엔 숨기는 일조차 하지 않았다. 시대가 퇴보했다는 증거다.
정의연이, 대한민국사법부가 내린 무죄판단을 무시하고 그 욕망을 내놓고 드러냈다는 사실은 ‘역사’에 남을 것이다. 물론 ‘여성학’이며 ‘법학’‘역사학‘학자들이 앞장서거나 뒤따랐다는 사실도.
법정에서 검찰이 나에게 추궁한 건 위안부에 대한 인식이 아니었다. 정의연이 30년 주장해 온 “법적해결” 아닌 “도덕적해결”의 가능성을 모색한 데 대한 괘씸죄였다.
물론 검찰은 정의연(정대협)과 일부 학자들의 추궁을 대변했을 뿐이다.
이번 사태—출판협회의 특별 공로상 취소—는 정의연이 앞서고 일부 ’학자’가 가세해 드러낸 분노 표출이 성공한 케이스가 되었다. 검찰이 그들을 대신해 구형했던 “징역 3년”의 처벌이 무산된 데 따른 분노다.
내 싸움은 사실 20여년전에 일본에서 시작된 진보 지식인간의 사상 싸움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한 일이겠지만, 일부 학자와 언론에 이어 ‘출판’인들이 단체의 이름으로 내 책에 낙인을 찍는 방식으로 파시즘에 굴복한 형태가 되어버린 데에 대해 심심한 유감을 표한다.
“출판의 자유”가 지켜진데 대한 상이었을테니 정종주대표에게만이라도 “한국출판공로상 특별공로상”을 시상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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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하 교수와 출판사 뿌리와이파리의 결국 출협 공로상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뿐더러 출협은 수상 대상자 선정을 사과하기까지 했다. 대상자 선정 취소는 곧바로 언론을 타서 수많은 기사를 남겼다. 수상 취소로 끝난 게 아니다. 상 탈 자격이 없다며 낙인을 다시 한번 찍어버렸다.
나는 이 과정이 매우 폭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억울한 일이 있을 때 마지막에 호소하는 곳이 법원인데, 법적 판단을 받아도 바뀌는 게 없지 않은가. 억울함을 증명 받은 게 아니다. 감히 무죄를 받았어? 괘씸죄 추가! 언론의 태도는 이렇다. 기사 하나하나를 보면 괘씸죄로 두들겨 패는 형국이다. 경향신문 기사 제목을 보라.
『“위안부는 매춘”···‘제국의 위안부’ 저자 박유하, 출판문화협회 특별공로상 취소"』 경향
기사 제목이 정말 책 내용과 일치할까. 박유하 교수가 정말 그렇게 생각할까? 명예훼손죄는 벗었는데 괘씸죄는 벗을 수도 없다.
박유하 교수가 조용하고 담담하게 말해서 별일 아닌 거 같지만, 벼랑끝으로 떠미는 폭력이다. 저번 글에서 한겨레, 프레시안에 오른 수상 비판글을 인용했다. "노이즈 마케팅으로 신화가 되었다"거나, "잔 다르크와 같은 명성 자본 획득"했다며 마치 송사로 이익을 본 것처럼 왜곡하기까지 한다.
박유하 교수는 억울한 송사에 시달린 피해자다. 가해자는 사과를 하고, 반성을 해야 한다. 누가 가해자인가? 정리된 고소·고발 일지를 보면 알 수 있다. 한 사람을 향한 공격으로는 너무 광범위하고 오랜 기록이라 정말 헷갈린다. 지켜보는 나는 눈만 돌아갈 뿐이지만 당사자는 피 말릴 일이다.
2014년 6월 16일. 나눔의집, 위안부 할머니 9인의 이름으로 저자 박유하와 뿌리와이파리 출판사 대표를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고소·고발. 허위사실을 적시했다는 109곳 대부분은 위안부 지원단체를 언급한 내용.
민사소송도 동시에 이루어졌고, 출판/판매금지 및 위안부 접근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접근하지 말라며 가처분 신청까지 했으니, 정말 황당한 일이다. 왜 접근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나.
"<제국의 위안부> 출간 이후 제가 나눔의 집에 거주하시던 할머니들을 만나 일본의 사죄와 보상에 관한 그분들의 생각을 직접 들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박유하
위안부 접근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던 나눔의집은 어떻게 되었나. 2020년이 되어서야 실체가 드러났다. 후원금 횡령은 물론, 할머니 학대와 유품 훼손까지 일어났다. 나눔의집 소장은 징역 2년 판결을 받았다.
- 2015년 2월 17일. 접근금지 가처분은 기각되었으나 '34곳을 삭제하지 아니하고는 출판해서는 아니된다'며 원고측 가처분신청 일부 인용.
- 2015년 5월 27일. 손해배상소송 민사소송 시작
- 2015년 11월 19일. 박유하 불구속기소.
- 2017년 1월 25일. 형사 1심 무죄.
- 2017년 10월 27일. 형사 2심 유죄, 벌금 1000만 원 선고.
그리고 이 사건은 기나긴 암흑의 터널에 들어선다. 대법원 판결이 하염없이 미루어 진다. 유죄를 받은 상태에서 최종 판결이 내려지지 않았으니 세상이 가해자로 낙인 찍는다. 판결은 언제 나오나. 1,2,3,4,5,6년이 지나 무려 2023년.
- 2023년 10월 26일. 대법원 ‘무죄 취지 파기환송’ 판결.
- 2024년 4월 12일. 형사 파기환송심 무죄 선고.
- 2024년에야 무죄 판결이 나왔다.
- 2025년 1월 22일. 민사에서도 승소했다.
- 2025년 7월 15일. ‘삭제 등’ 가처분 취소 결정이 내려져 마침내 온전한 책을 출간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주마간산으로 스쳐볼 뿐이지만, 당사자는 한 사건 한 사건이 중대했을 것이다. 삭제 가처분 취소까지 살펴보면 정말 황당하다. 온전한 책이 있어야 독자가 판단을 할 것 아닌가. 뭐라고 판단하나. 대부분은 '엥 이게 뭐라고?'라고 할 걸. 책 내용을 언급하면 명예훼손이라며 꽁꽁 묶어두고, 대법원은 개점 휴업 판단을 내려주지 않는다. 세상에 이렇게 억울한 일이 어디에 있나?
온전히 무죄 판결을 받고, 책 내용을 밝힐 수 있을 때까지 11년이 지났다. 11년간 가해자로 낙인 찍혀 있었다. 나는 박유하 교수가 11년째 귀양살이를 하고 있다고 본다. 추사 김정희가 두 차례 11년 귀양살이를 했다. 정약전이 15년 귀양을 살다 흑산도에서 죽었다. 정약용이 18년 귀양살이 했다. 세한도가 나오고, 자산어보가 나오고, 목민심서가 나오기에 충분한 기나긴 시간이다.
감히 무죄를 받아 낙인 찍힌 괘씸죄까지 벗어나려면 몇년이 더 걸릴까. 몇년이 더 걸려야 기자들이 책 내용을 확인하고 기사를 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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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게 적은 글이라 오류가 있어 두 군데를 수정한다:
1) 박유하 교수를 고발한 정확한 주체는 정의연이 아니라 할머니들이 사시는 시설인 '나눔의 집'이다. 할머니들의 명예훼손이라는 혐의를 씌우는 형식을 갖고 있으므로 고발자가 할머니들로 되어 있다.
2) 소녀상의 작품비를 받은 수령자는 해당 작품의 작가다. 엄밀하게 보면 이 작가가 정의연과 동일한 주체는 아니다.**
아래의 답변 이후 몇 말씀을 더 나누었고, 그 분께서 '일단 책을 읽어 보고 추가적인 의견을 말하겠다'고 하셨다. 얼마나 다행인지. 물론 독서 이후에도 생각이 바뀌지 않으실 수 있다. 그래도 책을 읽은 분이 한 명 늘어나는 것만으로도 기쁘다. 논쟁을 하더라도 상대의 맥락을 이해하는 분이랑 하는 게 맞거든. 그리고 끼리끼리 뭉쳐서 서로 맞아 맞아 하기만 하는 것보다는 절도 있는 논쟁이 나을 수 있거든. 더 큰 울타리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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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미국 영국 프랑스 벨기에 놈들보다는 그나마 나았을지언정) 우리 조상들을 2등국민으로 취급하고 우리의 자원을 교묘히 수탈하고 독립 의지를 짓밟은 것에 대해 당연히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절대 반복되어서도 안되고, 우리도 그런 짓을 누구에게도 해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을 일단 명확히 전제해야 오해가 없으실 것 같습니다.
2. 일본의 채권을 할머님께서 현금으로 결국 보상받지 못하셨을 겁니다. 박정희 정권은 놀랍게도(국가 근대화의 목돈 확보가 목적이었다고 합니다만) 민간 부재를 포함하여 모든 채권/보상 건을 일본 정부와 일괄 처리했습니다. 이것이 1965년 한일협정입니다. 일본은 개인 채무를 개별적으로 보상하겠다고 먼저 제안했고, 이를 거절한 것은 박정희 정권이었습니다. 이는 명백하게 증거가 나와 있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최근에도 이 채권의 보상 문제가 거론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도 억울하겠지요. 그래서 '아니 우리가 주겠다고 할 때는 거절하고 일괄로 받아가 놓고 이제 와서 무슨 소리냐' 하면서 반대했습니다. 따라서, 아래 말씀애서 '빼앗아간' 주체는 일본이 아니라 박정희 정권입니다. 만약 할머님께서 이것이 정말로 일본이 빼앗아간 거라고 누군가에게 들으셨다면, 어쩌면 그것은 당시 한국 정권에서 퍼뜨린 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3. 저희 장인어른께서 지금 90이 넘으셨고, 저희 외할아버지께서도 식민지 시절에 젊은이로서 평양과 황해도에서 사시던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일제시대의 이야기를 이것저것 들었지요. 무섭고 잔인하고 칼같았다는 말씀과 더불어 꼭 함께 하셨던 것이 '근데 조선놈들이 훨씬 더했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식민지 세상이 되었을수록 더 바르게 살고, 해방이 되어도 잘 하고들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대표적인 이야기가 일본이 지배하던 때는 무섭게 관리해서 거리가 늘 깨끗하고 산에 나무도 울창했는데 해방되자마자 아무도 치우지 않고 산의 나무도 너도나도 베어 가서 민둥산이 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일제시대의 우리 조상은 모두 독립투사라도 되는 줄 알고 살았던 저로서는 너무 실망스러웠는데, 사실 그게 덜 문명화된 세상에서 꽤 자주 보이는 모습이었다는 걸 인정하고 자괴감을 덜 수 있었습니다. 일본인들 안 그렇겠습니까.
4. 위안부 설치가 필요하다는 결정을 한 것은 일본군이 맞습니다. 박유하 교수도 이를 명확히 책에 적어 놓고 있습니다. 식민지도 아닌 적국 시민을 대상으로 일본군이 전시 성폭력을 자꾸 범하게 되자 일본군이 희한한(?) 결정을 한 겁니다. 자국의 '룸살롱' 같은 것을 전장으로 옮겨 놓자는 발상을 한 겁니다. 오늘날로 치면 군부대 위문 같은 것을 그런 식으로 기획한 것이지요. 박유하 교수는 이런 결정이 식민지 이전부터 계속되어 오던 동양의 가부장적 사회질서, 그리고 제국의 오만 또는 편견 속에서 만들어진 결정이라고 비판합니다.
5. 그리고 위 4번에서 말씀드린 '결정'을 실행할 수단이 필요하게 됩니다. 이것이 위안부 '모집'입니다. 이 모집을 군이 직접 하지 않고 민간에게 맡긴 것입니다. 오늘날 군부대 위문도 군이 요청하고 민간 회사가 실행하는 것과 어느 정도는 비슷하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여기에 오늘날의 룸살롱 같은 매춘행위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지요. 이 실행은 당연히 일본과 조선 모두에서 이뤄졌습니다. 몽고가 고려 공녀 끌고 가듯 한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 이후 신문 광고를 포함한 다양한 모집이 이뤄집니다. 이 과정에서 별별 협잡이나 사기, 약취, 심지어 납치가 없지 않았겠지요. 매춘 같은 것 없다고 하고 꼬신 놈들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는 엄밀히 따지면 그 실행을 하는 놈들의 문제지요. 일본 민간인, 조선 민간인 모두 말입니다. 분명히 찾아보면 없을 리가 없을 겁니다. 박유하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에서 이 부분도 비판합니다.
6. 이렇게 모집된 위안부들은 오늘날 군부대 위문 가는 연예인들이 '좋은 일 하러 간다'는 것처럼 '일본군을 잘 보살피러 가는 동행'의 대접 혹은 취급을 받습니다. 이게 이른바 '동지적 관계'인 것이지요. 위안부 할머니들이 스스로 동지가 되고 싶어했다는 게 아니라, 그런 동지적 관계의 틀 안에서 생활했다는 말입니다. 지난 재판의 키워드 '매춘'과 '동지적 관계'라는 표현의 맥락은 이런 겁니다. 나쁜 죄 지은 거 아니지요?
7. 그런데 오늘날에도 룸살롱에서 폭력 사건이나 인신구속의 일이 종종 일어나는 것처럼, 그 때라고 안 그랬겠습니까. 그러니 당연히 피해자가 발생하겠지요. 그러나 룸살롱의 문제를 국가가 배상하지 않는 것처럼, 일본 정부도 '위안부 제도에 의해 본의 아닌 피해자가 나온 것에 대해 죄송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국가 대 국가로 보상하는 게 맞느냐'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표면적으로는 양국의 민간단체가 재단을 만들고 보상을 추진하자고 했습니다.
8. 여기서 웃기는 일이 벌어집니다. 위안부 문제 자체를 발굴한 것도 일본이고 (한국은 정신대와 위안부 간의 구분도 하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보상을 추진한 것도 일본인데, 뒤늦게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답시도 나선 단체가 할머니들 입을 막고 '아니, 그런 보상 안 받아. 법적 배상을 해야 해. 공식 사과를 해야 해' 등으로 판을 깨고 나오는 겁니다. 그게 당시 정대협, 지금 정의연입니다. 이들은 할머니들에게도 끊임없이 가스라이팅을 한 것 같습니다. 일부 할머니들의 증언이 시간에 따라 계속 바뀌어 간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이렇게 입장이 바뀐 것을 지적하면 이 지원단체는 할머니들이 정신이 흐려지셔서 그렇다고 매도합니다. 이게 할 말입니까.) 좀 심하게 말하면, 이 대목에서 저는 옛날 부산에서 벌어진 '형제복지원' 사건이 생각납니다. 약자들을 한데 가두고 입을 막은 다음, 외부 접촉을 차단하고 자기들 배를 불린.
9. 이후 사과도 있었고, 화해를 위해 일본 측의 노력도 있었고 했지만, 무려 30년이 넘도록 정대협/정의연은 온갖 방법을 써서 여론을 조성해서 우리나라 대부분의 국민이 '일본은 파렴치하고 나쁜 놈들, 전시 성범죄, 강간범' 등의 이미지를 머리 속에 굳히도록 하는 데 성공합니다. 박유하 교수 같은 사람이 위안부 할머니를 직접 만나 취재하는 것을 방해하기까지 하면서요. 정의연 없이 단독으로 위안부 할머니들과 접촉한 다른 사람 있는지 한번 보셔요. 결국 박유하 교수는 위안우 할머니 관련 단체인 '나눔의 집'의 고발에 의해 10년이 넘는 세월을 소송 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류 상의 고발 주체는 할머니들로 되어 있습니다)
10. 이래서 제가 분노하는 겁니다. 1번에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일본이 무조건 잘했다는 것도 아니고, 매국노도 아니고, 수없는 반론 속에서도 김구 선생을 존경하고 안창호 선생을 위인으로 생각합니다. 안중근 의사의 말씀에 깊이 감동합니다. 하지만 그 문제랑 이 문제는 다른 거지요.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해야지, 아무 거나 뒤집어 씌우고 싸움을 붙여서야 되겠습니까.
11. 더욱 화가 나는 것은, 할머니들이 다 돌아가실 지경이 되도록 이 문제를 대화로 풀지 못하게 만든, 결국 '기억의 전쟁'이 되게 만든 이 상황입니다. 정의연이 해 놓은 게 뭡니까? 결국 대대손손 원수지간을 만들어 놓는 기초를 닦은 것밖에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후손에게 대체 뭘 물려주고 가는 건지요?
12. 선생님처럼 생각하시는 분들이 우리 국민의 대다수입니다. 모두 정의연이 배포하는 자료, 그 자료를 확인도 없이 읊고 있는 정치인과 언론 때문입니다. 보이고 들리는 게 그것밖에 없는데, 그래서 내 마음이 움직이고 난 다음인데, 다른 말이 쉽게 납득이 가겠습니까. 정의연은 그런 짓을 해 놓은 겁니다. 당시 위안부 평균 나이가 20세가 넘었는데도 대표 상징으로 소녀상을 세우고, 그것도 하나 세울 때마다 몇 천만 원을 받아먹으면서요. (정확히는, 이 돈은 소녀상을 만든 작가가 1차적으로 받았습니다.)
13. 그래서 선생님의 감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리고, '그래도 그게 다가 아닙니다'라는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겁니다. 저 역시 위안부에 대해 강제로 납치된 조선 소녀들이 마구 강간당한 성범죄라고만 알고 있었고, 그런 짓을 저지른 왜놈들 찢어죽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박유하 교수의 책 <제국의 위안부>를 우연히 접하고는 너무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너무도 생각이 짧았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14. 기왕에 선생님께서도 관심을 갖고 계시다면, 저 책을 한번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기록이 쉽고 자세하게 되어 있어서 절대 지루하고 알쏭달쏭한 책이 아닙니다. 가슴아프고 반성하게 되는 책입니다. 이상한 목적으로 선동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냥, 우리 후손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어른들은 안 되었으면 해서 드리는 부탁입니다.
어느 정도 답변말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궁금하신 점이 있다면 또 말씀 주십시오. 첫 말씀의 무례에 대한 사과는 십분 받아들이겠습니다. 저도 잠시 화가 났습니다만 다 풀었고, 선생님께서 잘 말씀해 주셔서 어떤 감정이셨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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