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31

마침내 귀국, 전역, 귀향 그리고 월남전 참전.. : 네이버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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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206기 김영기 42개의 글 목록열기
2010. 7. 19. 21:52
===
귀국자 해병들과 육군병력을 실은 셔만호는 베트남 중부의 다낭항을 떠난지 일주일이 된 1971년 10월 4일
주위가 아직 캄캄한 새벽에 마침내 부산항 외곽 먼 바다에 도착하였다
배를 타고 한국으로 오면서 하루 하루를 손꼽아 계산하며 지내다 보니 이 배가 언제쯤에 한국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귀국사병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드디어 내일 새벽이면 부산항에 입항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를 비롯
해서 아마도 모두가 흥분되는 밤을 맞이하여 오지않는 잠을 청하며 모두가 취침에 들어갔으리라
누가 나를 깨웠는지 모른다
나는 한참 잠이 든 상태에서 나도 모르게 잠을 깨고 눈을 떴다 한번 잠이 들면 야간 경계근무를 위해 누가
나를 깨우지 않는 한 아침에 기상할 때 까지 한번도 안깨고 잠을 자던 내가 어떻게 나도 모르게 잠을 깨고
눈을 뜨게 되었는지 모른다
선실침대에 누워서 희미한 조명 아래 시계를 보니 지금 기억에 대충 새벽 4 시 정도 ... 그런데 잠이 올
같지 않다 저 가슴 밑에서 부터 무언가가 벅차오르기 시작한다 눈만 떠진 것이 아니라 의식이 또렷이 깨지
기 시작했고 무었 때문인지 모르나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나를 깨웠는지 모른다 야간 근무 외에는 자다가 일어나 본적이 없던 내가
                                                귀국일 새벽에 나도 모르게 잠을 깨 일어났다)
동료해병들이 곤히 잠든 그 시간에 나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자던 침대에서 일어나 군복을 입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나 선실 밖에 나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선실 밖으로 나가기로 했는데 때는 이미 10월의 한국날씨이고 더욱이 새벽이라 바다공기가 대단히 차므로 야전점퍼(이것을 우리는 휠드 쟈켓 - Field jacket - 이라 불렀다)를 입고 군화를 신은 뒤 선실문을 열고 상갑판으로 나갔다 선실 밖은 예상대로
추웠다
셔만호 상갑판에 나와 저 멀리 육지 쪽을 보니 반짝이는 무수한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부산항이다 ......... 부산항과는 아직도 십여 킬로메터 정도 떨어져 있는 것 같았고 배는 그렇게 부산항과 먼 거리에 정박해
었다 아마도  부산항에 입항할 시간에 맞추기 위해 원거리에 닻을 내리고 대기중인 것 같았다 노란 빛으로
좁쌀만한 크기로 영롱하게 빛나는 부산항의 불빛들을 바라보며 나는 가슴에 벅차 오르는 흥분을 누를 수가
없었다
아 !!!............. 드디어 나는 살아왔구나 .... 파월될 때는 살아온다고 생각지도 못했는데 나는 결국 살아서
돌아왔구나 이것이 정녕 꿈은 아니렸다 ...
    (1971년 10월 4일 새벽 4시 경, 곤히 자던 잠을 깨고 셔만호 상갑판 난간에 서서 멀리서 반짝이던 부산항 불빛을 바라보던 순간)
나는 참으로 감사했고 만감이 교차했다
파월근무 중에 청룡부대 여단본부 안에 위치한 월남어 교육대에서의 3개월 간의 교육기간도 있었고 월남어
교육대를 수료하여 여단본부 안에 위치한 민사참모실에서 14개월 간 아주 안전하고도 편안한 행정요원으로
써의 근무기간도 있었으나 오직 생각나는 것은 소총중대에서의 오늘의 생사를 알 수 없는, 험난했으나 하늘
의 은혜를 느끼게 해주었고 하늘을 향해 기도를 난생 처음으로 올렸던 그 피땀으로 얼룩진 5개월 간의 소총
중대 시절의 기간이었다
내 일생의 기간 중에 비록 단 오개월이라는 짧디 짧은 소총중대에서의 전투생활 기간이었으나 죽음이 바로
내 앞에 닥아온 순간들을 수차례 맞이하는 생활을 하며 비로소 생애 처음으로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기도
를 올렸으니 이 같은 소총중대에서의 생활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 같이 가슴 벅찬 귀국을 맞이하지 못했으리라
비록 험난하였으나 그러한 모든 감사한 경험, 은혜의 시간들이 어둠속 에서 저 멀리 보이는 부산항의 아련한
불빛들을 보며 내 머리에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상황 1) 1969년 12월 말경 월남전선에 도착하자 마자 며칠 후 부슬부슬 가랑비가 내리는, 바로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우기철 밤에 야간매복 작전에 투입되어 정글 속의 폐가에 매복을 하고 있었을 때 삼보 앞에 닥아온
무장한 적과 마주쳐 서로가 확인이 안되어 극도의 경계 속에 서로를 살피던 중 급기야 서로가 적임을 알아차렸을
상호 간에 순간적이고도 필사적인 대응으로 생사가 갈리는 경험이 없었더라면 이러한 귀국의 감격이 없었으리라  전투경험이 전혀 없었던 월남전 신병이 전투경험이 많이 있었을 삼십대 중반의 노련한 베트콩 병사와 격돌하여
그렇게 생사가 갈린 것은 하늘의 허락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으리라
          (이
는 <소
# 08 : 월
투>에
슴) 상황 2) M-60 탄약수 시절, 소대 주간작전 나가서 소대장과 소대원들이 정글 속의 폐가를 수색하러 간
사이 선임수병과 소대원들의 무장감시조로 남아 사주를 경계하고 있었을 때 우리 두 사람을 적으로 오인한
미해병대 건쉽 무장헬기가 우리를 향해 저 무서운 기관포와 로켓포 공격을 가하러 우리 머리 바로 위까지
곤두박질 쳐 왔을 때  건쉽 사격의 바로 그 순간, 그 죽음의 순간 그 찰라에, 선임 수병이 흰색의 천으로
조명탄 낙하산을 정글에서 주워서 귀국준비한다고 마침 손에 쥐고 있었으므로 그 건쉽헬기를 향해 두손으로
재빠르게 펼쳐보이므로써 우리가 아군임을 알려주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1 초도 안되는 사이에
탱크도 박살내는 건쉽 무장헬기의 엄청나고도 가공할 사격을 받아 완전 형체도 없이 살아질뻔한, 가장 위험
했던 생사기로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이러한 귀국의 감격이 없었으리라
           (이
는 <소
# 17 : 건
간>에
슴) 상황 3) 소총중대  M-60 화기분대의 사수시절 야간매복작전을 나가 2 교대로 잠복근무 중 먼저 잠을 자게
되어 누웠을 때 등판을 찌르는 돌로 인해 자리를 옮기자 마자 전방에서 월남군과 적들이 교전을 벌이던
날아온 유탄이 내가 누웠던 자리에 꽂히는 순간이 없었더라면 이러한 귀국의 감격이 없었으리라
                      (이
는 <소
# 07 : 네
기>에
슴) 상황 4) 또한 소총중대  M-60 화기분대의 사수시절 야간매복작전을 마치고 그 이튿날 아침 매복진지를 거
두고 철수작업을 하는 순간 우리소대를 적으로 오인한 월남군들이 80 밀리 박격포 4 문을 동원하여 십여분간
소나기 퍼붓듯 우리 소대에게 쏘아대므로써 가공할 파괴력의 박격포탄들이 수 없이 우리 머리 위에서 쏟아져



===

귀국자 해병들과 육군병력을 실은 셔만호는 베트남 중부의 다낭항을 떠난지 일주일이 된 1971년 10월 4일

주위가 아직 캄캄한 새벽에 마침내 부산항 외곽 먼 바다에 도착하였다
배를 타고 한국으로 오면서 하루 하루를 손꼽아 계산하며 지내다 보니 이 배가 언제쯤에 한국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귀국사병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드디어 내일 새벽이면 부산항에 입항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를 비롯해서 아마도 모두가 흥분되는 밤을 맞이하여 오지않는 잠을 청하며 모두가 취침에 들어갔으리라
누가 나를 깨웠는지 모른다
나는 한참 잠이 든 상태에서 나도 모르게 잠을 깨고 눈을 떴다 한번 잠이 들면 야간 경계근무를 위해 누가
나를 깨우지 않는 한 아침에 기상할 때 까지 한번도 안깨고 잠을 자던 내가 어떻게 나도 모르게 잠을 깨고
눈을 뜨게 되었는지 모른다
선실침대에 누워서 희미한 조명 아래 시계를 보니 지금 기억에 대충 새벽 4 시 정도 ... 그런데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저 가슴 밑에서 부터 무언가가 벅차오르기 시작한다 눈만 떠진 것이 아니라 의식이 또렷이 깨지기 시작했고 무었 때문인지 모르나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나를 깨웠는지 모른다 야간 근무 외에는 자다가 일어나 본적이 없던 내가 귀국일 새벽에 나도 모르게 잠을 깨 일어났다)

 동료해병들이 곤히 잠든 그 시간에 나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자던 침대에서 일어나 군복을 입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나 선실 밖에 나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선실 밖으로 나가기로 했는데 때는 이미
10월의 한국날씨이고 더욱이 새벽이라 바다공기가 대단히 차므로 야전점퍼(이것을 우리는 휠드 쟈켓 - Field jacket - 이라 불렀다)를 입고 군화를 신은 뒤 선실문을 열고 상갑판으로 나갔다 선실 밖은 예상대로
추웠다
셔만호 상갑판에 나와 저 멀리 육지 쪽을 보니 반짝이는 무수한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부산항이다 ......... 부산항과는 아직도 십여 킬로메터 정도 떨어져 있는 것 같았고 배는 그렇게 부산항과 먼 거리에 정박해 있었다 아마도  부산항에 입항할 시간에 맞추기 위해 원거리에 닻을 내리고 대기중인 것 같았다 노란 빛으로 좁쌀만한 크기로 영롱하게 빛나는 부산항의 불빛들을 바라보며 나는 가슴에 벅차 오르는 흥분을 누를 수가 없었다
아 !!!............. 드디어 나는 살아왔구나 .... 파월될 때는 살아온다고 생각지도 못했는데 나는 결국 살아서
돌아왔구나 이것이 정녕 꿈은 아니렸다 ...
    
 (1971년 10월 4일 새벽 4시 경, 곤히 자던 잠을 깨고 셔만호 상갑판 난간에 서서 멀리서 반짝이던 부산항 불빛을 바라보던 순간)
나는 참으로 감사했고 만감이 교차했다
파월근무 중에 청룡부대 여단본부 안에 위치한 월남어 교육대에서의 3개월 간의 교육기간도 있었고 월남어 교육대를 수료하여 여단본부 안에 위치한 민사참모실에서 14개월 간 아주 안전하고도 편안한 행정요원으로 써의 근무기간도 있었으나 오직 생각나는 것은 소총중대에서의 오늘의 생사를 알 수 없는, 험난했으나 하늘의 은혜를 느끼게 해주었고 하늘을 향해 기도를 난생 처음으로 올렸던 그 피땀으로 얼룩진 5개월 간의 소총중대 시절의 기간이었다
내 일생의 기간 중에 비록 단 오개월이라는 짧디 짧은 소총중대에서의 전투생활 기간이었으나 죽음이 바로 내 앞에 닥아온 순간들을 수차례 맞이하는 생활을 하며 비로소 생애 처음으로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렸으니 이 같은 소총중대에서의 생활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 같이 가슴 벅찬 귀국을 맞이하지 못했으리라 비록 험난하였으나 그러한 모든 감사한 경험, 은혜의 시간들이 어둠속 에서 저 멀리 보이는 부산항의 아련한 불빛들을 보며 내 머리에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상황 1) 1969년 12월 말경 월남전선에 도착하자 마자 며칠 후 부슬부슬 가랑비가 내리는, 바로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우기철 밤에 야간매복 작전에 투입되어 정글 속의 폐가에 매복을 하고 있었을 때 삼보 앞에 닥아온
무장한 적과 마주쳐 서로가 확인이 안되어 극도의 경계 속에 서로를 살피던 중 급기야 서로가 적임을 알아차렸을 때
상호 간에 순간적이고도 필사적인 대응으로 생사가 갈리는 경험이 없었더라면 이러한 귀국의 감격이 없었으리라  전투경험이 전혀 없었던 월남전 신병이 전투경험이 많이 있었을 삼십대 중반의 노련한 베트콩 병사와 격돌하여
그렇게 생사가 갈린 것은 하늘의 허락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으리라
           (이 그림과 글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소총중대 # 08 : 월남전선 도착 생사를 가른 첫 전투>에 실려 있슴)

상황 2) M-60 탄약수 시절, 소대 주간작전 나가서 소대장과 소대원들이 정글 속의 폐가를 수색하러 간
사이 선임수병과 소대원들의 무장감시조로 남아 사주를 경계하고 있었을 때 우리 두 사람을 적으로 오인한
미해병대 건쉽 무장헬기가 우리를 향해 저 무서운 기관포와 로켓포 공격을 가하러 우리 머리 바로 위까지
곤두박질 쳐 왔을 때  건쉽 사격의 바로 그 순간, 그 죽음의 순간 그 찰라에, 선임 수병이 흰색의 천으로 된
조명탄 낙하산을 정글에서 주워서 귀국준비한다고 마침 손에 쥐고 있었으므로 그 건쉽헬기를 향해 두손으로
재빠르게 펼쳐보이므로써 우리가 아군임을 알려주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1 초도 안되는 사이에
탱크도 박살내는 건쉽 무장헬기의 엄청나고도 가공할 사격을 받아 완전 형체도 없이 살아질뻔한, 가장 위험
했던 생사기로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이러한 귀국의 감격이 없었으리라
            (이 그림과 글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소총중대 # 17 : 건쉽의 타겟이 된 절대절명의 순간>에 실려 있슴)
상황 3) 소총중대  M-60 화기분대의 사수시절 야간매복작전을 나가 2 교대로 잠복근무 중 먼저 잠을 자게
되어 누웠을 때 등판을 찌르는 돌로 인해 자리를 옮기자 마자 전방에서 월남군과 적들이 교전을 벌이던 중
날아온 유탄이 내가 누웠던 자리에 꽂히는 순간이 없었더라면 이러한 귀국의 감격이 없었으리라
---



==
3) 소총중대  M
-
6
0 화기분대의 사수시절 야간매복작전을 나가
2 교대로 잠복근무 중 먼저 잠을 자게
되어 누웠을 때 등판을 찌르는 돌로 인해 자리를 옮기자 마자 전방에서 월남군과 적들이 교전을 벌이던
날아온 유탄이 내가 누웠던 자리에 꽂히는 순간이 없었더라면 이러한 귀국의 감격이 없었으리라
  
                       (이 그림과 글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소총중대 #07 : 네잎 크로버 이야기>에 실려있슴)
  상황
4) 또한 소총중대  M-60 화기분대의 사수시절 야간매복작전을 마치고 그 이튿날 아침 매복진지를
거두고 철수작업을 하는 순간 우리소대를 적으로 오인한 월남군들이 80 밀리 박격포 4 문을 동원하여 십여분간 소나기 퍼붓듯 우리 소대에게 쏘아대므로써 가공할 파괴력의 박격포탄들이 수 없이 우리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리며 우리 매복진지를 강타하여 이제는 정말 죽는다고 각오했던  순간이 없었더라면 이러한 귀국의 감격이 없었으리라 (이 그림과 글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소총중대#03 : 머리위로 우박같이 쏟아지던 포탄 
>
슴) 상황 5) 또한 1970년 3월에 월남전 최초로 실시된 3대대 횡대작전에서 우리 대대는 많은 수의 적을 사살
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적의 저항도 거세어져서 적들이 우리의 예상 진격로 앞에 수많은 부비츄렙을 설치
하여 우리 대대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던 그 작전 중 저항하던 적을 사살했던 같은
3소대의 첨병인 이수
병이 그들의 부비츄렙에 걸려 전사하고 나 역시도
M
-
6
0 화기분대의 첨병으로써 진격하면서, 전사한 전우
들을 공수하러 다낭에서 날아오는 저 많은 수의 매드백 헬기들을 보면서, 이제 나도 드디어 적의 부비츄렙
에 걸려 전사하리라 하던 각오가 없었던들 이러한 귀국의 감격이 없었으리라
      (이 그림과 글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
#
0
5 : 치
>
슴)
  상
6) 또한
3대대 11중대
3소대 화기분대의
M
-
6
0 경기관총 사수로써 주간 작전을 나가 기동 중에 우리를
 먼저 발견한 적이 우리에게 기습 사격을 가한다던지 아니면 적들의 저항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들이
아대는 빗발치듯 쏟아지는 총탄에 아랑곳 아니하고 부사수, 탄약수들을 데리고 질풍과 같이 달려가서 적들을
향해
M
-
6
0 경기관총 화기를 무제한적으로 쏘아대며 소대의 반격이 가능하도록 나의 임무에 최선을 다하던
시간이 없었더라면 이러한 귀국의 감격이 없었으리라
           (이
<
# 14 : M
-
6
0
>
슴) 상황 7) 무었보다도 이러한 소총중대에서 전투생활을 하면서 곧 깨닫게 된 것이 나의 생명이 나의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창조주의 손에 달렸다는 사실이었으니 해병대에 입대하기 전 19
67년
3월 대학에 입학
하여 1 학년 시절 배웠던 영어교재의
< 사랑과의 약속(
A
p
p
ointment with love) > 이라는 영어소설 가운데
서 처음으로 대했던 성경구절인
<내 비록 죽음의 어두운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아니함은 주께
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 Though I w
alk in the valley
of sha
d
o
w
of death, I shall fear no evil, for Thou art with me> 과 같이 기록된 다윗왕의 시를 생각하며 내일 아침에 살아서 돌아올지 모를 야간매복작전에
나갈 때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하늘의 도우심이 없었더라면 이러한 귀국의 감격이 없었으리라 ( 이 그림과 글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소총중대 # 23 : 소총중대를 떠나며(못다
>
슴) 상황 8) 소총중대 시절 야간매복작전을 나갈 때 어두운 밤에  일렬종대로 기동하므로 서로의 위치를 잃지
않도록 앞뒤 전우의 기동간격은 삼사보 수준이다 칠흙 같이 어두운 밤에 정글을 소리 없이 기동하다 보면
우리가 역으로 적의 야간 매복대에 노출될까 염려가 된다 만일에 우리의 기동이 적에게 먼저 노출되면 그야
말로 순식간에 전멸이다 드디어 매복위치에 당도하여
2인 1조의 참호를 조용히 구축한다 이때에도 아직 우리
의 전력이 갖추어 지지않았으므로 만일에 이러한 순간에 적에게 발견되면 이것도 그야말로 순식간에 전멸이다  이러한 순간들은 그야말로 피를 말리는 순간들이다
 드디어
2인 1조의 각 매복조의 참호들이 각각 완성되어 7 -
8 개의 매복조 참호들이 완성되고 진지 앞에
크레모어 지뢰를 설치하고 그 지뢰 앞에 조명탄들을 인계철선으로 연결하여 설치하고 나면 소대의 매복
진지가 완성된다  이 때부터 마음이 든든하다 이제 적의 숫자가 우리 보다 몇배 훨씬 많아도 우리에게 걸려들면 전멸을
한다 죽고 사는 것이 한순간이요 내가 당할지 적이 당할지 아무도 모르고 오늘밤 야간매복을 나가면 내일
살아 돌아올지 아무도 모른다 내일이 아니라 당장 오늘의 다음 순간 나의 생사여부를 알수 없는 전선의
을 지샌다
                       (월
도)
그리고 드디어 무사한 아침을 맞이한다
그 누가 이 아침을 전선의 아침이라 하겠는가 적이 기동하여 나올만한 정글을 바라보고 매복진지를 만든
초원의 아침은 그곳이 비록 전선이라도 싱그럽다
초원의 풀잎들은 새벽이슬에 젖어 영롱한 이슬방울들이 알알이 맺혀 새벽을 노래하며 저 정글에서는
이름모를 새가 뾰뾰뾰 !~ 뾰뾰뾰뾰뾰뾰!
~
~
~
~
~
9 음절의 노래를 반복하여 부르며 새벽을 깨운다
저 아름다운 새 소리에 병사는
2교대후 곤히 든 잠을 반쯤 그치고 비몽사몽간에 그 새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저 새소리는 내가 아직도 살아서 듣는 소리인지 아니면 내가 죽어서 저 세상에 와서 듣는 소리
==
   (월남전 당시 청룡부대가 소대 단위로 야간매복 작전을 실시할 때 구축한 야간매복 진지도)
그리고 드디어 무사한 아침을 맞이한다
그 누가 이 아침을 전선의 아침이라 하겠는가 적이 기동하여 나올만한 정글을 바라보고 매복진지를 만든
초원의 아침은 그곳이 비록 전선이라도 싱그럽다
초원의 풀잎들은 새벽이슬에 젖어 영롱한 이슬방울들이 알알이 맺혀 새벽을 노래하며 저 정글에서는
이름모를 새가 뾰뾰뾰 !~ 뾰뾰뾰뾰뾰뾰!~~~~~9 음절의 노래를 반복하여 부르며 새벽을 깨운다
저 아름다운 새 소리에 병사는 2교대후 곤히 든 잠을 반쯤 그치고 비몽사몽간에 그 새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저 새소리는 내가 아직도 살아서 듣는 소리인지 아니면 내가 죽어서 저 세상에 와서 듣는 소리냐> 병사는 비몽사몽간에 삶과 죽음을 혼동하면서 그래도 살아있어야한다고 희미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과연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수가 없다 비몽사몽 간에 삶을 향한 의심에 병사는 자기 허벅지를 살푸시 꼬집어본다
그런데 ... 아프다 ... 아프다면 살아있다는 증거다 ... 혹시나 싶어 더 세게 꼬집어 본다 그러니까 더 아프다 ... 그렇다면 살아있다는 것이다 내가 과연 살아있다니!.... 아!... 나는 살아있구나 !.... 비몽사몽간에 내 허벅지를 꼬집으며 내 육신의 생명이 아직도 살이있슴을 깨달으며 느꼈던 기쁨과 감사의
마음을 이 때로부터 삽십구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결코 잊지 않고 있으니 이러한  전선에서의 처절한
경험이 없었더라면 이러한 귀국의 감격이 없었으리라
(이 그림과 글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소총중대 # 02 : 아침에 저 새 소리를 들으며>에 실려 있슴)
  상황 9) 또한 이 소총중대 시절 중대진지에서 야간 경계근무를 설 때 수많은 별이 쏟아지듯 반짝이는 밤
하늘을 잠시 바라보며 잘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창조주의 위대하신 창조의 힘과 무한하신 능력을 조금이
라도 느끼고 깨달으면서 난생처음으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서 이 전선에서 저의 생명을 보존하여 주셔
서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게 된다면 반드시 하나님을 믿겠다고 조용히 기도를 올렸으니 저 깊은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그러한 기도와 서원의 시간이 없었더라면 이러한 귀국의 감격이 없었으리라
     (이 그림과 글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소총중대 # 21 : 소총중대를 떠나며(베트남의 밤 하늘을 바라보며>에 실려 있슴)
이제 그러한 모든 경험들을 뒤로하고 귀국선에 오른지 만 7일 만인  1971년 10월 4일 새벽에 귀국선 셔만호가
드디어 부산항 앞바다에 도착하였으니 잠을 못이룬채 선실을 나와 새벽 찬공기 가운데 홀로 서서 저 멀리 보
이는 부산항의 불빛들을 바라보며 가슴 벅찬 귀국을 맞이하던 그 날 그 때를 나는 언제라도 잊을 수가 없다
무었이 나로 하여금 곤히 자던 침대에서 일어나 그렇게 어두운 새벽을 맞이하게 하였는가
단순히 그 월남전선에서 내 육신의 생명만을 보존하여 살아돌아오는 것이라면 나 역시 저 50 여명의 동료해병
들과 같이, 또 저 쪽에 타고 있는 3000 여명의 육군전우들과 같이 아직도 침대에 누워 꿈나라를 헤매고 있으리라
내 육신의 생명을 보존하여 돌아오는 것도 물론 감격스럽고 감사한 일이지만 그것 보다도 이제 그 전선에서 생과
사를 가르는 모든 경험들을 통하여 창조주 되시는 분을 의지하게 하고 이제 믿겠다는 굳은 마음을 가지고 돌아오고
있으니 이 아니 감격스럽고 감사한 일이 아닌가 !... 그 날 그 때 그 순간 나는 무었을 마음 가운데 되뇌이며 각오를 다졌는가 !~~~
<이렇게 살아돌아 왔으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내가 이렇게 그 전선에서 살아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으니 그 전선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서원을 드리고
약속을 드렸던 바와 같이 나는 이제 반드시 하나님을 참되게 믿도록 나의 최선을 다하리라 .... > 나는 그 날 그 새벽에 부산항을 멀리서 바라보며 이러한 다짐을 다지고 또 다졌다
이러한 감격의 귀국을 맞이하며 새벽을 보낸 후 셔만호는 드디어 아침 일찌기 부산항 제 3 부두에 도착하여
우리 귀국자해병들은 곧 포항행 열차를 타고 포항에 위치한 해병 제 1 상륙사단 (요사이는 포항 1 사단)에
도착하였으니 귀국자해병들 50 여명 가운데 나 같이 전역기간을 넘긴 10 여명의 사병들만 따로 곧 전역식을
가지고 그 날 오후에 포항 1 사단을 나오며 집으로 향하게 되었으니 1971년 10월 4일의 나의 귀국일은 곧
나의 전역일이 되었다
포항 1 사단을 오후에 나와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상경할 전우들 너덧명 정도가 함께 모여 택시를 대절하여
집으로 향했으니 이 경부고속도로야 말로 월남전 참전자들의 피땀 어린 값이 지불되어 건설된 도로가 아닌가
경부 고속도로를 달려오며 하나둘씩 자기 고향, 목적지에 내리기 시작하여 내 고향이 인천이므로 내가 가장
늦게 내려 고향에 도착한 후 그리운 고향집, 내 본가에 무사히 도착하였으니 집을 떠난지 만 36개월의 해병대
군복무, 그 기간 안에 22개월의 파월근무를 마치고 귀향한 셈이다
다른 파월장병들 같이 여러종류의 선물이 가득한 커다란 귀국박스는 없고 그저 옷가지 몇벌과 책 몇권만 달랑
들고 왔으니 재산 불리는 재주는 없어도 그나마 몸성히 살아돌아왔으니 부모님에게 효도한 셈이고 당시 아직
초등학교를 다니는 쌍동이 여동생들에게는 그래도 월남 꽁까이 인형 두개를 사가지고 왔으니 오빠 노릇도 한
셈이니 감사한 마음이었다
무었보다도 파월의 22개월 기간 중 소총중대의 만 5개월 기간동안에 나로 하여금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을
찾도록 도와 주신 하늘의 크신 은혜를 오늘날 까지 언제나, 꿈에라도 정녕 잊지 못하며 감사드리는 바이니  이제  졸필로 써내려가던 나의 손을 거두며 그래도 다 쓰지 못했다고 생각이 되는 부족한 나의 월남전 참전
이야기를 마칠까한다
바쁘신 중에도 여기까지 저의 부족한 월남전 참전기를 읽어주신 여러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참전 정리와 소감> -----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 국군을 월남전선에 참전키로 결단하려고 했을 때 군 출신인 그로써는 그와 같은
자신의 결단이 우리나라의 많은 젊은이들의 피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많은 고민을 한 것으
로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시 고속도로 하나 제대로 건설할 수 있는 경제적인 능력이 없었던 가난한 나라의 실정
으로써는 월남전에 국군파병을 할 수 밖에 없슴을 느끼고 어려운 결단을 내렸으니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마음 아프게 느낀것은 우리 젊은이들의 전사와 그 가족의 눈물이었고 그는 고뇌하는 가운데 결단을 내리며 월
남전 전사자의 가족이 후에 내 무덤에 와서 침을 뱉는일이 있더라도 지금은 어쩔수 없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
라> 하며 결단을 내린 것으로 알고 있다
                                
                                            (가슴 저미는 저 어머니의 고통 ... 누가 저 어머니를 위로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같은 월남전 파병은 결과적으로 당시 경제적으로 몹시 가난했고 북한에 비해서도 모든 면에서
훨씬 뒤쳐져 있었던 우리나라의 경제력과 국력을 단숨에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활을 했으니 이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월남전 파병의 결과로 우리나라는 미국으로 부터 많은 경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특히 월남전 파병의 <전쟁 특수> 환경은 우리나라의 생산, 건설, 운송 등의 산업발전에 지대한 역활을 하였다
특히 건설업의 경우는 나중에 중동특수 효과를 얻어 2차의 경제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었으니 우리나라의
6.25 동란으로 말미암아 2차대전에서 패망하여 나락으로 떨어진 일본이 경제적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
==

==
부대가
소대 단
간매복
할 때 구
간매복
도) 그리고 드디어 무사한 아침을 맞이한다
그 누가 이 아침을 전선의 아침이라 하겠는가 적이 기동하여 나올만한 정글을 바라보고 매복진지를 만든
초원의 아침은 그곳이 비록 전선이라도 싱그럽다
초원의 풀잎들은 새벽이슬에 젖어 영롱한 이슬방울들이 알알이 맺혀 새벽을 노래하며 저 정글에서는
이름모를 새가 뾰뾰뾰 !~ 뾰뾰뾰뾰뾰뾰!~~~~~9 음절의 노래를 반복하여 부르며 새벽을 깨운다
저 아름다운 새 소리에 병사는 2교대후 곤히 든 잠을 반쯤 그치고 비몽사몽간에 그 새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저 새소리는 내가 아직도 살아서 듣는 소리인지 아니면 내가 죽어서 저 세상에 와서 듣는 소리냐> 병사는 비몽사몽간에 삶과 죽음을 혼동하면서 그래도 살아있어야한다고 희미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과연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수가 없다 비몽사몽 간에 삶을 향한 의심에 병사는 자기 허벅지를 살푸시 꼬집어본다
그런데 ... 아프다 ... 아프다면 살아있다는 증거다 ... 혹시나 싶어 더 세게 꼬집어 본다 그러니까 더 아프다 ... 그렇다면 살아있다는 것이다 내가 과연 살아있다니!.... 아!... 나는 살아있구나 !.... 비몽사몽간에 내 허벅지를 꼬집으며 내 육신의 생명이 아직도 살이있슴을 깨달으며 느꼈던 기쁨과 감사의
마음을 이 때로부터 삽십구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결코 잊지 않고 있으니 이러한  전선에서의 처절한
경험이 없었더라면 이러한 귀국의 감격이 없었으리라 (이 그림과 글에 해당되는 이야
는 <소
중대 # 02 : 아침에
소리를
으며>에
실려 있
슴)
  상
황 9) 또한 이 소총중대 시절 중대진지에서 야간 경계근무를 설 때 수많은 별이 쏟아지듯 반짝이는
하늘을 잠시 바라보며 잘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창조주의 위대하신 창조의 힘과 무한하신 능력을 조금이
라도 느끼고 깨달으면서 난생처음으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서 이 전선에서 저의 생명을 보존하여 주셔
서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게 된다면 반드시 하나님을 믿겠다고 조용히 기도를 올렸으니 저 깊은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그러한 기도와 서원의 시간이 없었더라면 이러한 귀국의 감격이 없었으리라
     (이 그림과
는 이야
는 <소
중대 # 21 : 소
중대를 떠나며(베트
보며>에
실려 있
슴)
이제 그러한 모든 경험들을 뒤로하고 귀국선에 오른지 만 7일 만인  1971년 10월 4일 새벽에 귀국선 셔만호가
드디어 부산항 앞바다에 도착하였으니 잠을 못이룬채 선실을 나와 새벽 찬공기 가운데 홀로 서서 저 멀리
이는 부산항의 불빛들을 바라보며 가슴 벅찬 귀국을 맞이하던 그 날 그 때를 나는 언제라도 잊을 수가 없다
무었이 나로 하여금 곤히 자던 침대에서 일어나 그렇게 어두운 새벽을 맞이하게 하였는가
단순히 그 월남전선에서 내 육신의 생명만을 보존하여 살아돌아오는 것이라면 나 역시 저 50 여명의 동료해병
들과 같이, 또 저 쪽에 타고 있는 3000 여명의 육군전우들과 같이 아직도 침대에 누워 꿈나라를 헤매고 있으리라
내 육신의 생명을 보존하여 돌아오는 것도 물론 감격스럽고 감사한 일이지만 그것 보다도 이제 그 전선에서 생과
사를 가르는 모든 경험들을 통하여 창조주 되시는 분을 의지하게 하고 이제 믿겠다는 굳은 마음을 가지고 돌아오고
있으니 이 아니 감격스럽고 감사한 일이 아닌가 !... 그 날 그 때 그 순간 나는 무었을 마음 가운데 되뇌이며 각오를 다졌는가 !~~~ <이렇게 살아돌아 왔으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내가 이렇게 그 전선에
나님께
으니 그
나님께
드리고
렸던 바
같이 나
는 이제
나님을
게 믿도
하리라 .... > 나는 그 날 그 새벽에 부산항을 멀리서 바라보며 이러한 다짐을 다지고 또 다졌다
이러한 감격의 귀국을 맞이하며 새벽을 보낸 후 셔만호는 드디어 아침 일찌기 부산항 제 3 부두에 도착하여
우리 귀국자해병들은 곧 포항행 열차를 타고 포항에 위치한 해병 제 1 상륙사단 (요사이는 포항 1 사단)
도착하였으니 귀국자해병들 50 여명 가운데 나 같이 전역기간을 넘긴 10 여명의 사병들만 따로 곧 전역식을
가지고 그 날 오후에 포항 1 사단을 나오며 집으로 향하게 되었으니 1971년 10월 4일의 나의 귀국일은
나의 전역일이 되었다
포항 1 사단을 오후에 나와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상경할 전우들 너덧명 정도가 함께 모여 택시를 대절하여
집으로 향했으니 이 경부고속도로야 말로 월남전 참전자들의 피땀 어린 값이 지불되어 건설된 도로가 아닌가
경부 고속도로를 달려오며 하나둘씩 자기 고향, 목적지에 내리기 시작하여 내 고향이 인천이므로 내가 가장
늦게 내려 고향에 도착한 후 그리운 고향집, 내 본가에 무사히 도착하였으니 집을 떠난지 만 36개월의 해병대
군복무, 그 기간 안에 22개월의 파월근무를 마치고 귀향한 셈이다
다른 파월장병들 같이 여러종류의 선물이 가득한 커다란 귀국박스는 없고 그저 옷가지 몇벌과 책 몇권만 달랑
들고 왔으니 재산 불리는 재주는 없어도 그나마 몸성히 살아돌아왔으니 부모님에게 효도한 셈이고 당시 아직
초등학교를 다니는 쌍동이 여동생들에게는 그래도 월남 꽁까이 인형 두개를 사가지고 왔으니 오빠 노릇도
셈이니 감사한 마음이었다
무었보다도 파월의 22개월 기간 중 소총중대의 만 5개월 기간동안에 나로 하여금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을
찾도록 도와 주신 하늘의 크신 은혜를 오늘날 까지 언제나, 꿈에라도 정녕 잊지 못하며 감사드리는 바이니  이제  졸필로 써내려가던 나의 손을 거두며 그래도 다 쓰지 못했다고 생각이 되는 부족한 나의 월남전 참전
이야기를 마칠까한다
바쁘신 중에도 여기까지 저의 부족한 월남전 참전기를 읽어주신 여러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참
정리와
감> -----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 국군을 월남전선에 참전키로 결단하려고 했을 때 군 출신인 그로써는 그와 같은
자신의 결단이 우리나라의 많은 젊은이들의 피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많은 고민을 한 것으
로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시 고속도로 하나 제대로 건설할 수 있는 경제적인 능력이 없었던 가난한 나라의 실정
으로써는 월남전에 국군파병을 할 수 밖에 없슴을 느끼고 어려운 결단을 내렸으니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마음 아프게 느낀것은 우리 젊은이들의 전사와 그 가족의 눈물이었고 그는 고뇌하는 가운데 결단을 내리며
남전 전사자의 가족이 후에 내 무덤에 와서 침을 뱉는일이 있더라도 지금은 어쩔수 없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
라> 하며 결단을 내린 것으로 알고 있다
                                
                                            (가슴 저미는 저 어머니의 고통 ... 누가 저 어머니를 위로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같은 월남전 파병은 결과적으로 당시 경제적으로 몹시 가난했고 북한에 비해서도 모든 면에서
훨씬 뒤쳐져 있었던 우리나라의 경제력과 국력을 단숨에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활을 했으니 이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월남전 파병의 결과로 우리나라는 미국으로 부터 많은 경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특히 월남전 파병의 <전쟁 특수> 환경은 우리나라의 생산, 건설, 운송 등의 산업발전에 지대한 역활을 하였다
특히 건설업의 경우는 나중에 중동특수 효과를 얻어 2차의 경제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었으니 우리나라의 6.25  동란으로 말미암아 2차대전에서 패망하여 나락으로 떨어진 일본이 경제적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
듯이 우리 또한 월남전 참전으로 말미암아 경제적인 도약을 이룩한 것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월남전에 참전하여 국익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었슴을 이 땅에 태어난 사람
으로써 감사히 여긴다
월남전 참전을 하려고 대학을 갓 입학했던 1967년 3월에 19세(만 17세)의 나이로 해병대를 지원했을 때 당시
나는 너무 어려서 월남전이 왜 일어났고 우리가 왜 참전해야 하는지도 잘 몰랐으나 당시 한참 젊은피가 끓는
청년으로써 나라를 위한 저 전쟁터에 당연히 가야한다고 느끼고 월남전 파병이 의무적으로 실시되는 해병대
에 두번 지원 끝에 1968년 10월 7일에 입대를 하고 1971년 10월 4일에 해병대 복무 만 3년, 월남전 파병근무 2년에서 두달 모자라는 만 22개월을 마치고 전역하였다
개인적으로는 고교시절 이순신 장군을 너무 존경하여 장래 진로를 해군사관에 입학하여 이순신 장군과 같은
훌륭한 해군제독이 되어보겠다고 열망하였으나 초등학교 시절 걸린 만성 축농증이 해사 입교 전까지 치료가
안되어 해사 진학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으니 그 때의 아쉬움은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 그러나 나라를 위해
우겠다는 젊은 열망은 비록 해사에 입학을 못했더라도 잠재울 수 없었으니 그 열망은 나로 하여금 해병대에
두번 지원입대하여 월남전에 참전토록 한 계기가 되었다
고교시절 해사에 입학하여 훌륭한 군인이 되어보겠다고 마음을 먹은 터라 독일의 유명한 전략가가 저술한 병서 (兵書 ), 중국의 삼략육도 (三略六道) 등의 여러가지 병서들을 두루 읽어보았는데 그 중 어느 병서의 첫마디가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 글귀는 <도대체 인류역사 상 왜 전쟁이 일어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논의였는데
결론적으로 <정확히 모른다> 라는결론이었다
전쟁의 원인이나 과정, 역사 등을 깊이있게 연구했던 연구자들이 전쟁의 원인을 <정확히 모른다>라고 했던
을 읽었던 당시 나는 그들의 그같은 결론을 아주 이상하게 생각했다 나이 어린 나 같은 어린 사람일지라도 쉽게
생각해서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벌이는 것이 전쟁 아닌가?> 라고 말할 수 있을텐데 왜 전쟁에 관하여 깊이 있게
연구한 전쟁연구자들이 전쟁의 원인에 대해 결론적으로 <정확히 모른다>라고 했을까 하며 이상하게 생각했던
일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러나 이제 조금 느끼고 있는 것은 그 전쟁연구자들이 그렇게 말한 것이 참으로 정직한 말이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성경의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과 싸우고자 달음질 하여 달려가며 골리앗에게 말했던 것
의 하나는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 이라고 말했으니 창조주에게 속한 것을 인간의 티끌과도 같은 지혜로 어찌
다 알수가 있겠는가
몇년 전 막내 딸이 학교의 방학숙제라 하며 어떤 역사든지 역사의 사실 하나를 공부하여 보고서를 써오라니까
같이 좀 하자고 해서 그럼 아빠가 월남전에 참전하였으니 월남전의 역사를 공부해서 보고서를 써 보자 하여
막내와 함께 인터넷도 뒤지고 시립도서관에서 책도 빌리고 하여 월남전에 관한 여러 자료들을 수집하여 26 페이
지에 달하는 보고서를 만들어 막내학교에 제출한 적이 있다
그 때 많은 자료들을 수집하면서 월남전의 발생원인에 대해 공부를 한 셈이었다 북베트남의 호치민, 미국의 월남
전 개입을 이끈 고 케네디 대통령, 이어 죤슨 대통령, 미 국무장관인 키신저 등의 인물들이 월남전에 어떠한 영향
을 미쳤는가, 1963년 통킹만에서 월맹군들에게 피습 당한 미국의 구축함 매독스호는 미국으로 하여금 월남전에
개입을 할 수 있는 원인이 되었으나 이 사건의 진실은 무었인가 등등 ... 물론 베트남 전쟁을 깊이 있게 연구한 사람들이 이 전쟁에 관한 많은 책을 낸 것으로 알고 있고 최근에 미국에
어느 전쟁연구자가 <베트남> 이란 제목의 책에서 베트남 전쟁의 원인과 과정 등을 소상하게 저술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나 보다 깊이 있게 베트남전을 연구한 그나 막내 방학숙제를 도와주기 위해 단기간 짧게 공부
한 나나 결론은 같은 것이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그나 나나 그 전쟁의 진정한 원인을 정확하게 안다
고 할 수는 없고 그 진정한 원인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알고 계신 것이다
나의 월남전 참전을 이같이 정리하면서 월남전에 관하여 한가지 확신하는 것을 쓰고자한다 그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 알고 확신하는 것은 그 전
하여 나
나님을
으니 내가 비록
쟁터에
고비를 넘겼
것이다
쟁이 아니었더라면 나
는 영원
채 영원
것이다
이것이 월남전을 참전했던 나의 소감이며 결론이다
         
 * 후기 : 그간 부족한 글재주로 써내려간 저의 월남전 <참전 이야기>를 읽어 주신 분들과 답글도 달아주신 여러분들께  거듭 감사드립니다 저의 개인적인 생활이 이 글을 쓰기에 자유롭지 못하여 여기까지 쓰는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만
인내하시며 너르신 마음으로 저의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심심 감사드립니다
참전 이야기는 끝났으나 저의 인생이 월남전 참전으로 인해 큰 변화를 겪으며 제가 월남전선에서 그렇게 바라고 약속드린
대로 하나님을 참되게 믿을 수 있는 방향으로 인생행로가 바뀌게 되었으므로 <참전 이야기> 게시판 밑에 <전
후 이야
기> 라는 게시판으로 그 경위를 계속 밝힐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병206기
고리 글
보기 월남전 자료 # 02 : 내가 참전한 승룡 19호 작전 영상물(1970년 1월) 2010. 7. 20. 월남전 자료 # 01 : 청룡부대와 맹호부대의 최초 파월 영상 (1) 2010. 7. 19. 마침내 귀국, 전역, 귀향 그리고 월남전 참전 정리와 소감 (1) 2010. 7. 19. 민사참모실 # 10 : 마침내 귀국선에 오르다 - 귀국후 남은 물건들과 서류들 2009. 10. 4. 2009년 7월 20일에 고광수 장군님께 드린 40년 만의 대답 (1) 2009. 8. 6.
72 5,958,158
1447.50 1472.83 1422.17
924.11 940.28 907.94
1698.65 1732.45 1664.85
글 ^ 
글 1 
==

해병206기 김영기 42개의 글
마침내 귀국, 전역, 귀향 그리고 월남전 참전 정리와 소감 |
해병206기 김영기/해병대명 글

2010.
https://blog.naver.com/ojh7071/30090


귀국자 해병들과 육군병력을 실은 서민호는 베트남 중부의 다낭항을 떠난지 일주일이 된 1971년 10월 4일 주위가 아직 캄캄한 새벽에 마침내 부산항 외곽 면 바다에 도착하였다.
배를 타고 한국으로 오면서 하루 하루를 손꼽이 계산하며 지내다 보니 이 배가 언제쯤에 한국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귀국사병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드디어 내일 새벽이면 부산향에 입항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를 비롯 해서 아마도 모두가 흥분되는 밤을 맞이하여 오지않는 잠을 청하며 모두가 취침에 들어갔으리라
누가 나를 깨웠는지 모른다
나는 한장 점이 든 상태에서 나도 모르게 잠을 깨고 눈을 떴다 한번 잠이 들면 야간 경계근무를 위해 누가 나를 깨우지 않는 한 아침에 거상할 때 까지 한번도 안깨고 잠을 자던 내가 어떻게 나도 모르게 잠을 깨고 눈을 뜨게 되었는지 모른다
선실침대에 누워서 희미한 조명 아래 시계를 보니 지금 기억에 대충 새벽 4시 정도... 그런데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저 가슴 밑에서 부터 무언가가 벅차오르기 시작한다 눈만 떠진 것이 아니라 의식이 또렷이 깨지 기 시작했고 무엇 때문인지 모르나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누가 나를 깨웠는지 모른다 야간 근무 외에는 자다가 일어나 본적이 없던 내가
귀국일 새벽에 나도 모르게 잠을 깨 일어났다)
동료해병들이 곤히 잠든 그 시간에 나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자던 침대에서 일어나 군복을 입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나 선실 밖에 나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선실 밖으로 나가기로 했는데 때는 이미 10월의 한국날씨이고 더욱이 새벽이라 바다공기가 대단히 자므로 야전점퍼(이것을 우리는 필드 자켓-Field jacket - 이라 불렀다)를 입고 군화를 신은 뒤 선심문을 열고 상갑판으로 나갔다 선심 밖은 예상대로
서만호 상갑판에 나와 저 멀리 육지 쪽을 보니 반짝이는 우수한 물빛이 눈에 들어왔다.
부산항이다
부산항과는 아직도 십여 킬로메터 정도 떨어져 있는 것 같았고 배는 그렇게 부산항과 연 거리에 정박해 있 있다 아마도 부산항에 입항할 시간에 맞추기 위해 원거리에 닿을 내리고 대기중인 것 같았다. 노란 빛으로 좁쌀만한 크기로 영롱하게 빛나는 부산항의 불빛들을 바라보며 나는 가슴에 박사 오르는 흥분을 누를 수가 없었다
아 드디어 나는 살아왔구나...... 파월될 때는 살아온다고 생각지도 못했는데 나는 결국 살아서 돌아왔구나 이것이 청년 꿈은 어니렸다....
(1971년 10월 4일 새벽 4시 경 곤히 자던 잠을 깨고 사만호 상갑판 난간에 서서 멀리서 반짝이던 부산항 불빛을 바라보던 순간)
나는 참으로 감사했고 만감이 교지했다.
파월근무 중에 성동부대 여단본부 안에 위치한 윙남어 교육대에서의 3개월 간의 교육기간도 있었고 월남어 교육대를 수료하여 여단본부 안에 위치한 민사합모실에서 14개월 간 아주 안전하고도 편안한 행정요원으로 써의 근무기간도 있었으나 오직 생각나는 것은 소총중대에서의 오늘의 생사를 알 수 없는 협난했으나 하는 의 은혜를 느끼게 해주었고 하늘을 향해 기도를 난생 처음으로 돌렸던 그 피땀으로 얼룩진 5개월 간의 소종 중대 시절의 기간이었다.
내 열생의 기간 중에 비록 단 오개월이라는 짧디 짧은 소총중대에서택 전투생활 기간이었으나 죽음이 바로 내 옆에 닥아온 순간들을 수차례 맞이하는 생활을 하며 비로소 생에 처음으로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기도 블 올렸으니 이 같은 소송중대에서의 생활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 같이 가슴 벅찬 귀국을 맞이하지 못했으리라
비록 첨단하였으나 그러한 모든 감사한 경험, 문혜의 시간들이 어둠속 에서 저 멀리 보이는 부산항의 아련한 불빛들을 보며 내 머리에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

상황 4) 도산소 M-60 기사수시절 두고 성수작업을 하는 순간 우리소재를 것으로 오연한 사진을 마치고 그 이날 마진지를 소니지 이웃도 우리 소니에게 내므로써 기공 괴력의 박격포판들이 수없이 우리 내리며 우리 퍼진지를 강타하이 이제는 정말 죽는다고 각오했던 순간이 있었더라면 애리 귀국의 감격이
(이 그림과 금액 해당되는 이야기는 소운대 #03 머리 위로 우비간이 쏟아지던 우린 그리고 생은>에 성과 気合)
Π
성경 5) 또관 1970년 3회에 하여 우리 새이도 작지 않은 피를 읽었던 그 직진찰하던 격을 했던 같은 3소대의 질병인 이수 늘을 공주하리 다낭에서 날아오는 서 많은 수의 메드백 기능을 보면서 어서 나도 드디어 적의 부비준
성황 (6) 또한 3대대 115대 3소대 회기분대의 M-60경기권 사수로 주간 자신을 나기 기능 등에 무리를 먼지 발견한 적이 우리에게 기습 시작을 가디언지 아니낸 적도서 지장이 있는 국이면 어디든지 그들이 쓰 이미는 빗방지는 손이자는 총탄에 아랑곳 마니하고 구수한 데리고 성웅과 같이 달리가서 적들 시간이 없었다면 이러한 귀국의 김격이 없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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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 7) 무었보다도 이러한 소음중대에서 진성장을 하면서 곧 깨닫게 된 것이 나의 생명이 나의 것이 이니라 하늘에 계신 김조주의 손에 달렸다는 사실이었으니 개별내에 입대하기 전 1967년 3월 대지에 임의 사진 배했던 넘어교체의 <사랑의 (Appointment with love)>이라는 넘어선 가운데난 저 지음으로 대했던 성경구실인 <비 어두운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 우리 애니입은 주의 서 니와 함께 하심이라 Though I walk in the valley of shadow of death, I shal feat no evil for thou arl with me> 개 길에 기록된 다윗왕의 시를 생각이며 내일 아침에 살아서 이지 모두 이건배복작전에 나갈 때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하늘의 도우심이 없었더라면 이러한 귀국의 감격이 없었으리라
[이 그림과 글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소중중대 23 소종순대를 미니며(못다한 이이기에 실려 있음)
상황 8) 소송중대 시절 이긴적진을 나갈 때 어두운 밤에 필름대로 기능하므로 서로의 위치를 지 않도록 앞뒤 경우의 기동간격은 신시설 수준이다 싶을 같이 어두운 밤에 한글로 소리 없이 기동하다 보면 우리가 역으로 적의 아진 피부대에 노출될까 언리가 된다 민인에 우리의 기동이 책에게 먼지 노출되면 그이 필로 순식간에 진열이 드디어 유치에 강도하이 2인 1조의 참호를 조용히 구축한다 이때에도 아직 우리 의 전력이 갖추어 지지않았으므로 만일에 이러한 순간에 적에게 발견되면 이것도 그야로 순식간에 전념이다
이러한 순간들은 그말로 피를 말리는 순간들이다
드디어 2인 1조의 제조 참호들이 각각 완성되어 7-8개의 최초들이 완성되는 전자 앞에 크리모어 지뢰를 설치하고 그 지리 인해 조명탄들을 인계정신으로 연결하여 인사하고 나면 소대의 배역진지가 완성된다
이 때부터 마음이 이다 이지적에 숫자가 우리보다 배 원 많이도 우리에게 걸려들면 선행을 당 한다 죽고 사는 것이 안순간이요 내가 뒤지 적이 당일치 여부도 모르고 오늘 이건배복을 나가면 내일 신이 돌아옵치 아무도 모른다 내일이 아니라 당장 오늘의 다음 순간 나의 생사여부를 알수 없는 전설의 방 을 지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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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드디어 우지한 아침을 맞이한다
그누기 의 이질을 경신 아침이라 하겠는가 적어 기능이 인한 성금을 미라보고 매복진지를 한단 초위의 이점은 그곳이 비록 전진이라도 그럽다
초생의 출생들은 새벽이슬에 것이 영원한 이슬방들이 생일이 이 새벽을 노래하며 저 장금에서는 이름모를 새기 정액 노래를 반복하여 무비 새벽을 깨운다
자 아름다운 채 소리에 시는 교대주 곤이는 삼을 씀 그리고 비음시간에 그 새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지 새소리는 내가 아직도 살아서 듣는 소리인지 아니면 내가 죽어서 저세상에 와서 하는 소리냐>
배사는 비움서울간에 실과 죽음음 운동하면서 그래도 신아있어야한다고 희미하게 분리한다. 그러나 내가 죽인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수가 없다 비봉사용 간에 삶을 달린 덕심에 병시는 자기 허벅지를 상주시 신어보다
그런데 아프다. 아프다면 살아있다는 증거다. 즉시니 삶이 더 세게 자신이 보다 그러니까 디 아크니
그림디면 살아있다는 것이다 내가 나연 살아있다니! 애니는 것이었구나!
비용시용건이 내 허벅지를 교점으며 내 육신의 생명이 아직도 상어있음을 깨달으며 느렸던 기쁨과 감사의 마음을 미 바로부터 삼십구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고 잊지 않고 있으니 이러한 선에서의 지질공 강험이 없었더라면 이러한 귀국의 감격이 없었으리라
(이 그렇게 길에 해당되는 이어가는 <소종중대 #02: 어산에 지 새 소리를 들으마>에 실려 있습
상황 9) 또한 이 소송승대 시절 중대진지에서 이건 경계근무를 성벽 수많은 별이 쏟아지는 반짝이는 밤 하늘을 잠시 바라보며 잘 어페이지는 뜻이지만 창조주의 위대하신 창조의 힘과 무한하신 능력을 조금이 라도 느끼고 평단으면서 난생처음으로 우름을 찾고 하나님께서 이 전신에서 저의 생명을 보존하며 주시 서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게 된다면 반드시 하나님을 깔렸다고 조용히 기도를 올렸으니 지 같은 파동수에서 우러나오는 그러핀 기도와 서원의 시간이 없었더라면 이러한 귀국의 감격이 없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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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부산화 보다에 도착하였으나 이는 어제 신상을 나치 새기기운데 서서 지리
단순히 그림전성시대 육신에 생명을 모른리어 십대리오는 것이면 등과 같이 로저 에고 있는 3000명의
내 자신의 생생한 보존하여 통해보는 것도 물은 결격스럽고 감사원 발표한 그것보다도 이제 그 신선시
사발 거르는 모든 경험들을 통하여 상호 되시는 분을 의지하게 하고 이제 믿겠다는 굳은 마음을 가지고 놀이오고
<이렇게 쓰이들이 앞으니 참으로 감사한 것이다 내가 이길게 있도록 이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으니 그 전에 부담을 듣고 아나님께 사건을 드리고 약속을 드렸던 미와 같이 나는 이제 반드시 하나님을 참되게 연도 최선을 다नलव...>에
나는 그날그 시에라시보 이러한 점을 다지고 또 다졌다.
머리의 거리의 귀국을 맞이하며 내보낸 민호는 드디어 대림 양가 부진한 도서대 가지고 그 날 오후에 포함 1사단을 시도해 집으로 향하게 되었으 1971년 10월 4일의 귀국일 큰 나의 전부였어 되었다
그 집으로 입었으니 보고도로마로 가장 값이 사용되어 조성된 도로가 아닌가
감성 고속도로를 달려오며 다음 자기고 지리고장이 인정으로 내가 가장 늦게 내리 그린에 도착한 후 그리고리 나가며 무사히 도착하였으나 지난 3개의 बापा 군제로 그 기간 안에 22개의 피
다른 특별질병통 같이 여러종류의 건물의 가치인 커다란 국비스는 없고 그게 거지 몇 쓰이니 감시한 타다음이었다.
무엇보다도 여리의지 기간 중 정토록 도와 주신 하늘의 크신 은혜를 오늘날까지 언제나 모이라도 정부지사 감사드리는 세미나
미쁘신 중에도 이기까지 한 인기를 아주 미리 시드니다
<삼산성리차 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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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박정의 대동 국의 심정지 당리고 그 출신인 그는 그가 같은 자신의 강단에 우리나라의 많은 쉬는 요구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보고 많은 고민을 한 것으 프로씨는 정남진에 국군을 수 밖에 없음을 느끼고 여러분 미음 미분에 느것은 두어 훼손이 진사의 그 가치의 눈물이었고 그는 고워하는 가운데 결단을 내리며 말 레> 저의 검단새것으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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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 정리와 소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 국군을 월남전선에 참전키로 결단하려고 했을 때 군 출신인 그로서는 그와 같은 자신의 결단이 우리나라의 많은 젊은이들의 피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많은 고민을 한 것으 로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시 고속도로 하나 제대로 건설할 수 있는 경제적인 능력이 없었던 가난한 나라의 실정 으로써는 활남전에 국군파병을 할 수 밖에 없슴을 느끼고 어려운 결단을 내렸으니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마음 아프게 느낀것은 우리 젊은이들의 전사와 그 가족의 눈물이었고 그는 고뇌하는 가운데 결단을 내리며 월 남전 전사자의 가족이 후에 내 무덤에 와서 침을 뱉는일이 있더라도 지금은 어쩔수 없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 라> 하며 결단을 내린 것으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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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九七녀 월치일
월남에서 천사
1970년
( 가슴 저미는 저 어머니의 고통... 누가 저 어머니를 위로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같은 월남전 파병은 결과적으로 당시 경제적으로 몹시 가난했고 북한에 비해서도 모든 면에서 훨씬 뒤쳐져 있었던 우리나라의 경제력과 국력을 단숨에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활을 했으니 이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월남전 파병의 결과로 우리나라는 미국으로 부터 많은 경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특히 월남전 파병의 <전쟁 특수> 환경은 우리나라의 생산, 건설, 운송 등의 산업발전에 지대한 역활을 하였다
특히 건설업의 경우는 나중에 중등특수 효과를 얻어 2차의 경제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었으니 우리나라의 6.25 동란으로 말미암아 2차대전에서 패망하여 나락으로 떨어진 일본이 경제적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 듯이 우리 또한 월남전 참전으로 말미암아 경제적인 도약을 이룩한 것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월남전에 참전하여 국익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었음을 이 땅에 태어난 사람 으로써 감사히 여긴다.
월남전 참전을 하려고 대학을 갓 입학했던 1967년 3월에 19세(만 17세)의 나이로 해병대를 지원했을 때 당시 나는 너무 어려서 활남전이 왜 일어났고 우리가 왜 참전해야 하는지도 잘 몰랐으나 당시 한참 젊은피가 끓는 청년으로써 나라를 위한 저 전쟁터에 당연히 가야한다고 느끼고 월남전 파병이 의무적으로 실시되는 해병대 에 두번 지원 끝에 1968년 10월 7일에 입대를 하고 1971년 10월 4일에 해병대 복무 만 3년, 월남전 파병근무 2년에서 두달 모자라는 만 22개월을 마치고 전역하였다.

개인적으로는 고교시절 이순신 장군을 너무 존경하여 장래 진로를 해군사관에 입학하여 이순신 장군과 같은 훌륭한 해군제독이 되어보겠다고 열망하였으나 초등학교 시절 걸린 만성 축농증이 해사 입교 전까지 치료가 안되어 해사 진학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으니 그 때의 아쉬움은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 그러나 나라를 위해 싸 우겠다는 젊은 열망은 비록 해사에 입학을 못했더라도 잠재울 수 없었으니 그 열망은 나로 하여금 해병대에 두번 지원입대하여 월남전에 참전토록 한 계기가 되었다.
고교시절 해사에 입학하여 훌륭한 군인이 되어보겠다고 마음을 먹은 터라 독일의 유명한 전략가가 저술한 병서 (兵書), 중국의 삼락욕도 (三略六道) 등의 여러가지 병서들을 두루 읽어보았는데 그 중 어느 별서의 첫마디가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 글키는 <도대체 인류역사 상 왜 전쟁이 일어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논의였는데 결론적으로 <정확히 모른다> 라는 결론이었다.

전쟁의 원인이나 과정, 역사 등을 깊이있게 연구했던 연구자들이 전쟁의 원인을 정확히 모른다>라고 했던 것 를 읽었던 당시 나는 그들의 그같은 결론을 아주 이상하게 생각했다 나이 어린 나 같은 어린 사람일지라도 쉽게 생각해서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벌이는 것이 전쟁 아닌가? 라고 말할 수 있을텐데 왜 전쟁에 관하여 깊이 있게 연구한 전쟁연구자들이 전쟁의 원인에 대해 결론적으로 <정확히 모른다>라고 했을까 하며 이상하게 생각했던 일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러나 이제 조금 느끼고 있는 것은 그 전쟁연구자들이 그렇게 말한 것이 참으로 정직한 말이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성경의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과 싸우고자 달음질 하여 달려가며 골리앗에게 말했던 것 중 의 하나는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 이라고 말했으니 창조주에게 속한 것을 인간의 티끌과도 같은 지혜로 어찌 다 알수가 있겠는가
몇년 전 막내 딸이 학교의 방학숙제라 하며 어떤 역사든지 역사의 사실 하나를 공부하여 보고서를 써오라니까 같이 좀 하자고 해서 그럴 아빠가 월남전에 참전하였으니 월남전의 역사를 공부해서 보고서를 써 보자 하여 막내와 함께 인터넷도 뒤지고 시립도서관에서 책도 빌리고 하여 월남전에 관한 여러 자료들을 수집하여 26 페이 지에 달하는 보고서를 만들어 막내학교에 제출한 적이 있다

그 때 많은 자료들을 수집하면서 월남전의 발생원인에 대해 공부를 한 셈이었다 북베트남의 호치민, 미국의 활남 전 개입을 이끈 고 케네디 대통령, 이어 혼슨 대통령, 미 국무장관인 키신저 등의 인물들이 월남전에 어떠한 영향 을 미쳤는가, 1963년 통킹만에서 월맹군들에게 피습 당한 미국의 구축함 매독스호는 미국으로 하여금 월남전에 개입을 할 수 있는 원인이 되었으나 이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 등등...
물론 베트남 전쟁을 깊이 있게 연구한 사람들이 이 전쟁에 관한 많은 책을 낸 것으로 알고 있고 최근에 미국에 어느 전쟁연구자가 <베트남> 이란 제목의 책에서 베트남 전쟁의 원인과 과정 등을 소상하게 저술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나 보다 깊이 있게 베트남전을 연구한 그나 막내 방학숙제를 도와주기 위해 단기간 짧게 공부 한 나나 결론은 같은 것이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그나 나나 그 전쟁의 진정한 원인을 정확하게 안다 고할 수는 없고 그 진정한 원인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알고 계신 것이다
나의 월남전 참전을 이같이 정리하면서 월남전에 관하여 한가지 확신하는 것을 쓰고자한다.
그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 말고 확신하는 것은 그 전쟁을 통하며 나는 하나님을 찾게 되고 아는 길에 있게 되었으니 내가 비록 그 전쟁터에서 수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겼으나 그 전쟁의 참전을 감사하는 것이다 그 전쟁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영원히 창조주를 모르는 채 영원히 소망 없는 사람으로 있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월남전을 참전했던 나의 소감이며 결론이다

*후기: 그간 부족한 글재주로 써내려간 저의 월남전 <침전 이야기>를 읽어 주신 분들과 답글도 달아주신 여러분들께 거듭 감사드립니다 저의 개인적인 생활이 이 글을 쓰기에 자유롭지 못하여 여기까지 쓰는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만 인내하시며 너르신 마음으로 저의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심심 감사드립니다.

참전 이야기는 끝났으나 저의 인생이 월남전 참전으로 인해 큰 변화를 겪으며 제가 월남전선에서 그렇게 바라고 약속드린 대로 하나님을 참되게 믿을 수 있는 방향으로 인생행로가 바뀌게 되었으므로 <창전 이야기> 게시판 밑에 <전후 이야기> 라는 게시판으로 그 경위를 계속 밝힐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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