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의식
학문적인 엄정함을 제하고 말하자면, 한국 문학에 나오는 남성들의 자의식은 ‘식민지인’의 바로 그것과 비슷하다.
달리 표현하자면 주체성을 상실한 식민지인의 비애성이라 할 수 있다.
남성성 없는 남성으로서의 남성 식민지인의 정신세계는 그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생겨났다기보다는 제국에 의해 부여된 제국/식민=남성/여성이라는 도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역대 지도자 중에 가장 이 식민지적 의식을 잘 체현한 사람이 바로 박정희라 할 수 있는데, 그의 정신세계에서 제국에 의해 부여된 앞의 도식은 이제 가부장 없는 가부장제로 달리 현상된다.
‘무능한’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에게 착취당하고 매질 당하면서도 나만 바라보며 모든 걸 희생하시는 어머니, 그리고 그런 어머니와 같이 나를 이해해주는 내 아내라는 도식 속에서 “진정한” 아버지가 되겠다는 그의 욕망은 근대화라는 역사적인 사건 속에서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식의 독재자의 의식으로 전치되어 나타난다. 나는 이런 박정희의 의식이 박정희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식민지를 거친 한국인의 의식 속에 잘 체현되어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이건 우에노 치즈코의 일본]
여기서 핵심은 “잃어버린 주체성”이다. 이러한 자의식의 형성을 가족에서부터 출발해 드러내보자. 가족 내에서 어린 남성은 아버지의 권위에 의해 굴복당한다. 아버지에 대한 굴복은 곧 아버지와 동등한 주체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기에 주체성의 상실로 나타난다. 가족 내부에서의 주체성의 상실과 외부에서 또래 남성들과의 동등함이라는 이중적인 구조는 민족적 차원에서는 민족 및 국가간의 주체성 문제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잃어버린 주체성에 대한 욕망은 어떻게 발산되는가? 개인이 처해있는 환경적, 혹은 역사적 맥락과 특질에 따라 다르지만 그 부분을 사상하고 말하자면 어렸을 때는 어머니에게 인정받으려 하지만 장성해서는 아내와 자식에게 인정받으려 한다. 아버지의 인정은 언제나 최후의 승인으로 나타나며 그것이 진행되면 가족간의 계승은 끝이 난다. 이러한 과정을 요약하자면 그것은 외부의 업적에 대한 집착과 내부의 아내를 비롯한 가족에 대한 인정투쟁으로 나타난다. 가족 내에서 자신이 정당한 아버지 혹은 그 계승자라는 것을 끊임없이 가족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과 함께 그 인정을 위한 업적으로서의 외부 활동이 서로 교차적으로 나타난다. 역설적이게도 내부에서 인정받기 위해 외부 일에 집착하면 할수록 내부에서 가족에게 소외당하기 때문에 이 욕망의 끝은 언제나 외롭디 외로운 한 남자의 쓸쓸한 최후가 될 수밖에 없다. 남성은 끝끝내 외로워질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그렇기에 그런 가족에 대한 무심함 속에 담긴 뜨거운 사랑과 애정을 말없이 알아주는 아내가 반드시 필요하다. 아내는 단순히 섹스를 제공해주는 존재가 아니다. 나의 모든 허물과 부족함을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이해해주고 알아주는 어머니의 재현이자 사회 전체에서 외면당하더라도 어딘가 돌아갈 곳이 있다는 막연함을 정당화해주는 근거지로서의 가족 공동체와 자신을 매개해주는 역할이다.
그렇기에 이런 남성들의 의식 속에서 여성의 역할은 분업의 형태로 나타난다. 섹스를 담당하는 여성, 가정을 책임지는 아내, 자신을 낳아주고 모든 걸 희생해준 어머니 등등의 분업된 형태로 여성이 나타난다. 이중 가장 어려운 존재는 역시나 첫번째이며 두번째는 죽는 날까지 편한 존재이고 마지막은 나이를 먹을수록 어려워지는 존재가 된다.
박정희의 수많은 글 속에서 아버지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버지와 같은 남성의 존재는 외부 속에서 만나고 형성되는 관계이지 집안 내에서 형성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집안의 남성이란 자신의 계승자이거나 계승할 대상이거나 둘 중 하나이지 관계가 형성되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기에 남성들끼리의 대화는 언제나 직접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어머니를 매개로 이뤄지거나 아니면 경원시하는 형태로 이뤄진다. 다른 남성은 동등한 주체로서 가족 공동체 외부에서 만나든지 아니면 가족 내에서 다른 남성의 권위에 굴복해 비가시적인 존재가 되든지 둘 중 하나밖에 없다. 후자의 경우에는 나중에 성장해서 어엿한 가족 공동체의 수장, 즉 가부장이 되면 자신과 동등한 주체로 자신을 인정해주는 이가 된다.
가정 내에서 형성된 이러한 자의식에 기반해 있는 남성에게 식민지적 상황이란 도무지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가족 내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앞서 말했듯이 외부적인 업적이 있어야 한다. 식민지적 상황은 그러한 외부적인 업적의 공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되려 식민지적 상황은 그러한 주체성의 발현을 억압하고 가족 내로 주체를 몰아넣으려고 한다. 무기력하고 억압된 존재로서의 식민지인 일반은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고자 하는데 그것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난다. 외부를 향하는 것과 내부를 향하는 것. 내부로 향하는 것은 이러한 주체성의 억압을 가족에 대한 억압 속에서 보상받고자 하는 것이고 외부로 향하는 것은 보다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억압자에게 항의를 하든, 굴복을 하든 혹은 정치적인 영역 즉 주체성이 발현될 공간이 아닌 공간에서 무언가를 추구하든. 이러한 수많은 형태가 있지만 이 중에서도 가장 포괄적으로 식민지인의 자의식을 대표하는 계층이 바로 지식인 계층이다.
이 지식인 계층의 정신세계는 어디서든 부패한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그러한 정신적 부패는 어떻게 발현되는가? 지식인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전통의 공동체, 그것은 언제나 해체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에 귀속될 수도 그렇다고 지배자의 공동체에 귀속될 수도 없다. 전통의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은 결국 그것과 함께 해체되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이미 전통을 벗어난 그의 정신세계에서 그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새로운 공동체이자 이상적인 공동체라 할 수 있는 지배자의 공동체에 속할 수도 없다. 그것은 곧 주체성의 상실을 뜻하기 때문이다. 피지배자가 아무리 스스로를 지배자의 구성원으로 표상한다 할지라도 지배자의 구성원들 자체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왜냐하면 지배자라는 지위는 특권적인 형태로 나타나기에, 자의식은 분열되어 버리고 주체성은 해체된다. 몰락하는 공동체와 신생하는 공동체 사이에서 식민지의 지식인의 정신세계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채 분열해버리고 주체성은 해체되어 버린다. 그는 결국 정신적 공허함과 황폐함 속에서 실천과 유리되어 정신적으로 부패해버린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이광수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지식인의 자의식은 문학 등의 매체에서 언제나 유약하고 부러지기 쉬우며 약물 등에 절어 황폐해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지식인이기에 그러한 묘사는 언제나 자기모멸적이고 자학적인 형태로 이뤄진다. 자신에 대한 지독한 멸시는 성적인 무능력함으로 곧잘 드러나는데 그것은 인간의 가장 내밀한 부분이면서 동시에 가장 근본적인 욕망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근본에서부터 부패해 기능하지 못하는 지식인의 자의식이 바로 성적인 무능으로 나타나는 것인데, 이 성적인 무능은 낯선 여성보다는 아내 혹은 애인에게 많이 드러난다. 여기서 한국 문학 등에서 남성들이 여성과 항상 관계를 맺고 싶어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가에 대한 해답이 나온다. 여성은 자신의 성적인 무능을 해소시켜줄 수 있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확인시켜주는 모순적인 존재이다.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묘사가 천편일률적이면서도 동시에 각자에게 엄청나게 색다른 기억으로 나타나는 이유이다. 그녀들의 현상은 나에게 하나의 계시적인 사건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녀는 나의 주체성을 구원해주는 존재이니까.
식민지적 상황이 타파되었다고 해서 이러한 상황이 개선되지 않았다는 점에 한국의 역사적 특질이 있다. 국가의 아버지로 불리는 독재자들이 연이어 나타나며 남성의 정신세계를 지배해왔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여기서 역설적이게도 본인이 아버지를 증오하고 아버지를 대신하고자 했으면서도 최후에는 국가의 아버지가 되어 아버지가 되기를 욕망하는 이들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점에서 가장 한국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 박정희의 정신세계를 효과적으로 분석할 때 우리는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보다 정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단순히 사변적인 것이 아니라 한국의 역사적 과정 전체를 이해하기 위한 전제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도대체 박정희는 왜 그렇게 근대화에 집착했으며 독재를 하게 되었는가 등등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정치학적, 경제학적, 역사학적 분석 등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의 정신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전제될 때 우리는 그가 만든 세계를 보다 정치하게 분석할 수 있다.
문학을 전공하든 영화를 전공하든 미술을 전공하든 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이라면 이런 한국인의 자의식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중심에 놓고 사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게 예술 분야의 다양한 매체는 한국인의 의식 세계에 접근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의미가 있다. 물론 위의 내용을 논증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이론적 고리가 필요하고 실증적인 고리들도 필요하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을 단순화해 서술한 것이니 실증적인 근거는 차치하자. 아무튼 단순히 그러한 지식인적 모습을 하나의 기믹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패러디가 아닌 이상에야, 정말로 체현되어 있는 남성 지식인이라면 이런 부분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학이든 무엇이든 예술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이자 전제는 자신의 정신세계에 대한 분석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정신세계의 내밀함을 드러내고 분석함으로써 보편의 인식에까지 이르는 과정이야말로 예술가들이 해야 할 가장 ‘과학적’인 활동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런 문제의식이 있는 문학가나 예술가를 좋아한다. 이런 생각이 없는 이들을 바보라고 생각하고 싫어한다. 기믹만 있는 인간의 공허함이여. 문학 좀 읽고 술 마시며 우울증약을 먹는다고 예술가가 아니다. 이러한 이해를 전제로 자신의 특질을 만들어내고 드러내는 것이 예술이라 생각한다.
여기서 핵심은 “잃어버린 주체성”이다. 이러한 자의식의 형성을 가족에서부터 출발해 드러내보자. 가족 내에서 어린 남성은 아버지의 권위에 의해 굴복당한다. 아버지에 대한 굴복은 곧 아버지와 동등한 주체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기에 주체성의 상실로 나타난다. 가족 내부에서의 주체성의 상실과 외부에서 또래 남성들과의 동등함이라는 이중적인 구조는 민족적 차원에서는 민족 및 국가간의 주체성 문제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잃어버린 주체성에 대한 욕망은 어떻게 발산되는가? 개인이 처해있는 환경적, 혹은 역사적 맥락과 특질에 따라 다르지만 그 부분을 사상하고 말하자면 어렸을 때는 어머니에게 인정받으려 하지만 장성해서는 아내와 자식에게 인정받으려 한다. 아버지의 인정은 언제나 최후의 승인으로 나타나며 그것이 진행되면 가족간의 계승은 끝이 난다. 이러한 과정을 요약하자면 그것은 외부의 업적에 대한 집착과 내부의 아내를 비롯한 가족에 대한 인정투쟁으로 나타난다. 가족 내에서 자신이 정당한 아버지 혹은 그 계승자라는 것을 끊임없이 가족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과 함께 그 인정을 위한 업적으로서의 외부 활동이 서로 교차적으로 나타난다. 역설적이게도 내부에서 인정받기 위해 외부 일에 집착하면 할수록 내부에서 가족에게 소외당하기 때문에 이 욕망의 끝은 언제나 외롭디 외로운 한 남자의 쓸쓸한 최후가 될 수밖에 없다. 남성은 끝끝내 외로워질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그렇기에 그런 가족에 대한 무심함 속에 담긴 뜨거운 사랑과 애정을 말없이 알아주는 아내가 반드시 필요하다. 아내는 단순히 섹스를 제공해주는 존재가 아니다. 나의 모든 허물과 부족함을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이해해주고 알아주는 어머니의 재현이자 사회 전체에서 외면당하더라도 어딘가 돌아갈 곳이 있다는 막연함을 정당화해주는 근거지로서의 가족 공동체와 자신을 매개해주는 역할이다.
그렇기에 이런 남성들의 의식 속에서 여성의 역할은 분업의 형태로 나타난다. 섹스를 담당하는 여성, 가정을 책임지는 아내, 자신을 낳아주고 모든 걸 희생해준 어머니 등등의 분업된 형태로 여성이 나타난다. 이중 가장 어려운 존재는 역시나 첫번째이며 두번째는 죽는 날까지 편한 존재이고 마지막은 나이를 먹을수록 어려워지는 존재가 된다.
박정희의 수많은 글 속에서 아버지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버지와 같은 남성의 존재는 외부 속에서 만나고 형성되는 관계이지 집안 내에서 형성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집안의 남성이란 자신의 계승자이거나 계승할 대상이거나 둘 중 하나이지 관계가 형성되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기에 남성들끼리의 대화는 언제나 직접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어머니를 매개로 이뤄지거나 아니면 경원시하는 형태로 이뤄진다. 다른 남성은 동등한 주체로서 가족 공동체 외부에서 만나든지 아니면 가족 내에서 다른 남성의 권위에 굴복해 비가시적인 존재가 되든지 둘 중 하나밖에 없다. 후자의 경우에는 나중에 성장해서 어엿한 가족 공동체의 수장, 즉 가부장이 되면 자신과 동등한 주체로 자신을 인정해주는 이가 된다.
가정 내에서 형성된 이러한 자의식에 기반해 있는 남성에게 식민지적 상황이란 도무지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가족 내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앞서 말했듯이 외부적인 업적이 있어야 한다. 식민지적 상황은 그러한 외부적인 업적의 공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되려 식민지적 상황은 그러한 주체성의 발현을 억압하고 가족 내로 주체를 몰아넣으려고 한다. 무기력하고 억압된 존재로서의 식민지인 일반은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고자 하는데 그것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난다. 외부를 향하는 것과 내부를 향하는 것. 내부로 향하는 것은 이러한 주체성의 억압을 가족에 대한 억압 속에서 보상받고자 하는 것이고 외부로 향하는 것은 보다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억압자에게 항의를 하든, 굴복을 하든 혹은 정치적인 영역 즉 주체성이 발현될 공간이 아닌 공간에서 무언가를 추구하든. 이러한 수많은 형태가 있지만 이 중에서도 가장 포괄적으로 식민지인의 자의식을 대표하는 계층이 바로 지식인 계층이다.
이 지식인 계층의 정신세계는 어디서든 부패한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그러한 정신적 부패는 어떻게 발현되는가? 지식인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전통의 공동체, 그것은 언제나 해체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에 귀속될 수도 그렇다고 지배자의 공동체에 귀속될 수도 없다. 전통의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은 결국 그것과 함께 해체되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이미 전통을 벗어난 그의 정신세계에서 그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새로운 공동체이자 이상적인 공동체라 할 수 있는 지배자의 공동체에 속할 수도 없다. 그것은 곧 주체성의 상실을 뜻하기 때문이다. 피지배자가 아무리 스스로를 지배자의 구성원으로 표상한다 할지라도 지배자의 구성원들 자체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왜냐하면 지배자라는 지위는 특권적인 형태로 나타나기에, 자의식은 분열되어 버리고 주체성은 해체된다. 몰락하는 공동체와 신생하는 공동체 사이에서 식민지의 지식인의 정신세계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채 분열해버리고 주체성은 해체되어 버린다. 그는 결국 정신적 공허함과 황폐함 속에서 실천과 유리되어 정신적으로 부패해버린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이광수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지식인의 자의식은 문학 등의 매체에서 언제나 유약하고 부러지기 쉬우며 약물 등에 절어 황폐해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지식인이기에 그러한 묘사는 언제나 자기모멸적이고 자학적인 형태로 이뤄진다. 자신에 대한 지독한 멸시는 성적인 무능력함으로 곧잘 드러나는데 그것은 인간의 가장 내밀한 부분이면서 동시에 가장 근본적인 욕망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근본에서부터 부패해 기능하지 못하는 지식인의 자의식이 바로 성적인 무능으로 나타나는 것인데, 이 성적인 무능은 낯선 여성보다는 아내 혹은 애인에게 많이 드러난다. 여기서 한국 문학 등에서 남성들이 여성과 항상 관계를 맺고 싶어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가에 대한 해답이 나온다. 여성은 자신의 성적인 무능을 해소시켜줄 수 있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확인시켜주는 모순적인 존재이다.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묘사가 천편일률적이면서도 동시에 각자에게 엄청나게 색다른 기억으로 나타나는 이유이다. 그녀들의 현상은 나에게 하나의 계시적인 사건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녀는 나의 주체성을 구원해주는 존재이니까.
식민지적 상황이 타파되었다고 해서 이러한 상황이 개선되지 않았다는 점에 한국의 역사적 특질이 있다. 국가의 아버지로 불리는 독재자들이 연이어 나타나며 남성의 정신세계를 지배해왔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여기서 역설적이게도 본인이 아버지를 증오하고 아버지를 대신하고자 했으면서도 최후에는 국가의 아버지가 되어 아버지가 되기를 욕망하는 이들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점에서 가장 한국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 박정희의 정신세계를 효과적으로 분석할 때 우리는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보다 정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단순히 사변적인 것이 아니라 한국의 역사적 과정 전체를 이해하기 위한 전제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도대체 박정희는 왜 그렇게 근대화에 집착했으며 독재를 하게 되었는가 등등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정치학적, 경제학적, 역사학적 분석 등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의 정신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전제될 때 우리는 그가 만든 세계를 보다 정치하게 분석할 수 있다.
문학을 전공하든 영화를 전공하든 미술을 전공하든 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이라면 이런 한국인의 자의식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중심에 놓고 사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게 예술 분야의 다양한 매체는 한국인의 의식 세계에 접근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의미가 있다. 물론 위의 내용을 논증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이론적 고리가 필요하고 실증적인 고리들도 필요하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을 단순화해 서술한 것이니 실증적인 근거는 차치하자. 아무튼 단순히 그러한 지식인적 모습을 하나의 기믹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패러디가 아닌 이상에야, 정말로 체현되어 있는 남성 지식인이라면 이런 부분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학이든 무엇이든 예술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이자 전제는 자신의 정신세계에 대한 분석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정신세계의 내밀함을 드러내고 분석함으로써 보편의 인식에까지 이르는 과정이야말로 예술가들이 해야 할 가장 ‘과학적’인 활동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런 문제의식이 있는 문학가나 예술가를 좋아한다. 이런 생각이 없는 이들을 바보라고 생각하고 싫어한다. 기믹만 있는 인간의 공허함이여. 문학 좀 읽고 술 마시며 우울증약을 먹는다고 예술가가 아니다. 이러한 이해를 전제로 자신의 특질을 만들어내고 드러내는 것이 예술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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