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민석
9 August ·
재작년 오늘 나는 내가 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지 설명하는 글을 썼다.
“맑스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것치고는, 소장하고 있는 책의 3분의 1정도가 맑스(와 그 연장선에서의 헤겔)와 관련이 있는, 스스로를 맑스주의자라 칭하기를 언제나 주저하는 편이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맑스에 관심이 많은, 실상은 자본주의자'이기 때문은 아니다(웃음). 또 어떤 이의 말처럼 개량주의에 가까운 정치적 입장 때문만은 아니다(다른 이들은 내게 구좌파라고 하기도 한다!).
그것은 우선 “맑스”주의자라는 용어 때문이다. ‘..주의자’(-ist 혹은 더 나쁘게 ‘..신봉자’-ite라는 뜻이 붙는)라는 접미사는 특정 이론을 개인적이거나 배타적으로 보이게 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갖고 있다. 맑스 본인도 이에 대해 인식하고 맑스주의자라는 표현보다 ‘과학적 사회주의’ 등과 같은 객관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비단 맑스뿐만 아니라 ‘공상적 사회주의자’ 로버트 오웬도 자신의 사상을 “오웬주의”라 부르는 것에 반대하였으며, 존 윌크스 또한 자신을 칭찬하는 이에게 “선생, 하지만 내가 윌크스주의자라고 생각하진 말아주시오”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 표현을 거부하였다. 트로츠키는 또 어떤가? 그는 아예 ‘트로츠키주의’라는 표현을 스탈린 지지자들이 만들어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논문을 몇 편이나 썼다고 한다. 단순한 파벌이나 개인적 분파를 초월한 특정 이론에 ‘..주의’라는 “오명”을 붙일 필요가 있을까. 거기에 대해 지극히 회의적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입장은 맑스주의(정말이지 이 표현을 사용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외의 다른 사상들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여성’주의가 그 표현이 자신의 사상을 적확하게 드러낸다고 간주한다면 여성주의자들은 흑인운동이 흑인주의가 아니고, 장애인 운동이 장애인주의가 아닌데 왜 여성운동만이 여성주의로 표현되어야 하는지 설득력 있게 논증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과문해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여성주의에서 표현의 정당성에 대한 논의를 보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나는 이 문제의 미해결이 페미니즘 정당과 같은 정치운동으로서의 여성주의의 실패를 어느 정도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종종 하고는 한다.
다음으로 “맑스주의자”를 스스로 칭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이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맑스의 방법론을 갖고 이론화 작업과 분석 작업을 해보지 않은 이들이 맑스주의자를 자청하기란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면 실제로 연구를 수행하는 학자들만이 맑스주의자를 칭할 수 있게 되지 않냐는 반론이 들어올 수 있을텐데, 그렇다고 생각하기도 하거니와 이러한 주장에 거부감이 든다면 조금 더 포괄적인 의미에서 맑스의 이론에 대한 “확신” 문제라고 받아들여줬으면 좋겠다. 자신만의 이론이 있는 이들은 전향하기 쉽지 않다. 왜냐하면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분석과정 속에서 이론에 대한 확신이 더 강해지고, 종국에는 ‘신념’ 수준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신념이 없는 이를 ‘..주의자’라 칭하기란 어렵지 않겠는가. 자신이 지속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이론의 유효성을 입증해본 이가 이론을 버리기란 쉽지 않지 않겠는가.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맑스의 이론은 기껏해야 특정한 시기 혹은 상황에서만 쓰이는 도구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상황에 따라 이론을 버릴 수 있는 이가 맑스주의자를 자청하기란 쉽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맑스의 이론을 전유한 자신만의 이론이 있어야 맑스주의자를 자칭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는 바로 위의 신념 문제와 연결시켜서 맑스주의자를 자처하기 위해서는 그 이념에 맞게 자신의 삶을 고쳐야 한다. 물론 자신의 계급성 문제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맑스가 얘기했듯이 특정 세력과 그 대변자 사이의 관계는 그 대변자의 세계관 속에서 특정 세력으로 대변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면 족하다. 다시 말해 부르주아의 대변자는 부르주아들이 현실의 제관계 속에서 마주하는 한계들을 머릿속에서 재현하고, 극복하지 못하기만 하면 족하다. 그들 사이의 어떤 "필연성"이란 있을 수도 없거니와 그걸 가정할 필요도 없다. 그 문제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앞서 말한 것들이 충족되지 않는 이상 신념에 의한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기란 쉽지 않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줬으면 좋겠다. 특정 이념에 맞춰 삶을 바꾸는 일은 앞의 조건들이 갖춰지기 전에도 쉽지 않지만 갖춰진다 해도 쉽지 않은 문제이다. 맑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이 외에는 그러한 삶을 살 필요가 그리 없다고 생각한다. 정확하게는 그리 엄격하게 행동할 필요가 없다. 이 과정은 사회적인 규모의 교육과 훈육에 의해 이뤄져야 할 것이지 맑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일부를 제외한 개인에게 그 비용을 부담하라 할 수는 없는 문제이다.
대략 이 정도의 이유에 의해 맑스주의자를 자처하지 않고 있다. 엄밀히 말해 나는 어떻게든 더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냐에 관심이 있기에 맑스주의에 대해서도 아직 도구적 관점 이상의 무언가를 성취하지는 못하였다. 이건 내가 아직 이론화 작업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 없다는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꼭 '..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세력화•가시화를 위해서도 가끔은 그러한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많이 든다. 어쨌거나 언젠가는 어디에서라도 '..주의자'를 칭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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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이 지난 지금의 나는 스스로를 돌아보았을 때 마르크스주의자라 자신 있게 칭할 수 있을까? 첫번째와 세번째 조건에서는 여전히 부족한 것 같다. 결국 나만의 독창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있는가 이 부분이 핵심인데, 이 부분은 어느 정도 충족을 시킬 수 있게 된 것 같다. 독창적인이라는 말은 조금 과한 것 같고, 나만의 독자적인 해석이라고 하자. 아무튼 그런데.. 문제가 있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맑스의 이론을 아직도 그리 신봉하지 않는다. [자본론]을 몇 번이나 다시 읽으면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조만간 결판이 날 것 같다. [자본론] 자체가 이론적으로 현대 사회에서 유의미한 이론적 체계인지 내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면, 그때 비로소 나는 스스로를 온전한 마르크스주의자라 칭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직은 3권에 대한 검토가 다 끝나지 않았다. 아무리 열심히 봐도 하루에 100페이지 이상 읽기가 어렵고 몇 번에 걸쳐 다시 읽고 또 읽다보니 시간이 많이 걸린다. 3천 페이지가 넘는 책을 거의 외우다시피 하면서 읽고 있으니 시간이 많이 걸릴 수밖에.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나 스스로도 부디 내가 맑스에 대한 검토가 끝난 뒤에 온전히 마르크스주의자라 칭할 수 있기를 정말 간절히 기도한다. 내가 갖고 있는 수많은 테제들이 맑스와 엥겔스의 이론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여전히 그들의 이론이 실효성이 있는 이론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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