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16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개정판) - 인터넷교보문고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개정판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9년 06월 12일 출간 (1쇄 2006년 1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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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 8,400원

역사/문화 > 한국사 > 근현대사 > 한국현대사
한국 현대사의 각 시대를 입체적으로 조명하는『한국 현대사 산책』시리즈. 10여 년에 걸친 자료 수집, 1만여 개의 주제별 파일을 통해 정치, 외교, 경제, 사회, 스포츠, 대중문화, 언론, 학생운동에 이르는 방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1945년부터 1999년까지 55년의 대한민국 역사에 대한 다양한 입장을 소개하면서도 저자 나름의 시각을 함께 제시한다.

<1940년대편>에서는 '8ㆍ15 해방'에서 '6ㆍ25 전야'에 이르기까지 40년대 한국 사회의 풍경을 살펴보고 있다. 우리나라 현대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1940년대 후반을 다양한 문헌들을 바탕으로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기술하였다. 2004년 4월에 냈던 책을 개정한 것으로, 설명을 보다 쉽게 하는 동시에 그 시대의 문화와 사람 사는 모습을 함께 보여준다.

이 책의 시리즈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2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한국 현대사 산책:1940년대편 1(8.15해방에서 6.25전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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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저자 : 강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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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 한(恨)과 욕망의 폭발 8

제1장 36년 묵은 한(恨)의 분출 / 1945년 

  • 도둑같이 찾아온 8·15해방 25 |
  •  “해방은 16일 하루뿐이었다” 32 | 
  • 30분 만에 그어진 38선 41 | 
  • 소련군의 평양 진주 50 | 
  • 조선인민공화국 선포 57 | 
  • 한국인을 적(敵)으로 간주한 미군 64 | 
  • “인공을 타도하라”: 한국민주당 창당 80 |
  • ‘통역 정치’와 정치에 대한 굶주림 87 | 
  • ‘능률적인 폭정의 도구’: 일본화된 경찰 96 | 
  • 가짜 김일성의 등장? 101 | 
  •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이승만의 귀국 106 | 
  • 전평의 결성과 조선인민당 창당 115 | 
  • 김구의 귀국, 임시정부의 분열 121 | 
  • 김일성의 권력 장악, 인공 불법화 140 | 
  • ‘죽음이냐 독립이냐’: 신탁통치 갈등과 투쟁 145 | 
  • ‘언론의 둑은 터졌다’: 좌우(左右) 전쟁 156 |
  • ‘새 나라의 어린이’와 38선의 밀수품 168 | 
  • ‘문화의 둑’도 터졌다: ‘양키 문화’ 논란 175 | 
  • “일제 시대보다 더 고통스럽다”: 정치과잉 182 

자세히 읽기 : 
  • ‘준비 부족론’ 논쟁 78 | 
  • 함석헌과 윤치호 137 | 
  • 방송과 미군정 홍보 165 

제2장 좌우(左右) 갈등의 폭발 / 1946년 
  • ‘신탁통치’ 갈등은 전쟁이었다 193 | 
  • 국방경비대 창설: 국군 창설을 위하여 207 | 
  • “쌀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213 | 
  • 따로 치른 3·1절 행사: 민주의원과 민족전선 221 | 
  • 김일성 암살 미수와 북한의 토지개혁 228 | 
  • “싸움꾼이 됩시다”: 38선 고착화 233 | 
  • 정판사 위폐사건과 좌익의 ‘지하화(地下化)’ 241 | 
  • 김규식과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 247 | 
  • 이승만의 단정론과 김구의 의리 253 | 
  • 우익 청년단체의 전성시대 259 | 
  • ‘국립서울종합대학안’ 파동과 ‘교육출세론’ 확산 272 |
  •  ‘피는 피로써, 테러는 테러로’: 좌우합작과 ‘신전술’ 282 | 
  • “쌀이 없으면 고기를 먹어라”: 전평의 총파업 289 | 
  • ‘해방의 선물은 기근’: 대구 10월항쟁 296 | 
  • ‘좌우합작’에서 ‘우파 과도입법의원’으로 302 | 
  •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절: 중간파의 몰락 310 | 
  • 이승만의 방미(訪美): 이승만·하지의 충돌 316 | 
  • ‘종이’와 ‘극장’을 달라 321 

자세히 읽기
  • ‘4당 합의’와 ‘5당 회의’ 204 | 
  • 마지막 경평전 축구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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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미군정과 백범 김구에 대한 재인식 <한국현대사 산책, 1940년대> js**e55 | 2013-12-23 | 추천: 1 |

한국현대사를 공부하기 위해 나름대로 선정한 책 중에서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박세길)> 시리즈, <대한민국사(한홍구)> 시리즈, <우리역사 이야기(조성오)> 시리즈,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에 이어 강준만 교수의 <한국현대사 산책> 시리즈를 읽었다.여러 국내 저서 중에서 강준만 교수의 저서를 선택한 이유는 그의 다른 저서를 통해 내가 인정했던, 자료와 정보수집 능력 등을 고려한 것이고, 그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중도'적 관점에서 현대사를 서술하겠다는 서문을 존중한 것이었다.강 교수는 현명(?)하게도 책의 서문에서 한국사회에서 한국현대사를 서술하는 데 있어 아직 저술가들이 안전하지 않다(분단체제와 국가보안법 등)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직도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현실에서 40년대 후반을 '오늘'의 관점을 벗어나서 새롭게 보려고 애쓰는 건 결코 안전한 일은 아니다."(p.17)그럼에도 강 교수는 '많은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모든 분야에 걸쳐 종합하여 이해하기 쉽게 정리해' 보여주겠다는 각오로 책을 썼다고 밝힌다. 특유의 방식인 '보수와 진보의 이분법을 떠나 다양한 시각'을 소개하겠다고 하니 기대가 컸다.

강 교수는 자신의 관점과 집필 방향에 따라 적지 않은 다른 저자의 저술과 정보를 참고하여 한국현대사를 저술해 나갔고 가급적 최신판 발간자료를 활용하려 한 흔적이 엿보인다. 대부분은 다음과 같은 국내 학자였고 일부 외국 학자의 출판물도 참고했다.
예를 들어 김동춘, 오기영, 최상용, 서중석, 조순경, 이숙진, 박명림, 김상웅, 이기백, 지명관, 여연구, 도진순, 송광성, 부르스 커밍스, 구종서, 송광성, 김송달, 양동주, 히라야마 타츠키, 김학준, 신복룡, 이우진, 돈 오버도퍼, 하리마오, 김창훈 등이다.
강 교수가 인용한 저서와 정보를 내가 일일이 검증하지 못했고 저자들의 학문성향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저자의 저술에 비해 강 교수의 정보 및 자료 인용에서 아쉬운 점은 본인이 책의 서문에서 밝힌 '많은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모든 분야에서 걸쳐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여 현대사를 '새롭게 보여주'겠다는 애초의 의도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많은 경우에 한국현대사학계의 주류 입장에 필요한 정보와 주장을 주로 인용했다는 것이다.

실제 강 교수의 그러한 정보와 출처의 수집에 있어서의 편향은 저자가 현대사를 집필하고 정리하는 방향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머리말'에서 자신이 해방 후 5년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기득권 투쟁과 면죄부 투쟁에 따른 이해득실의 문제를 둘러싼 혈투"라고 규정한다.
그는 해방 후 한반도의 사회정치 상황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도 '한과 욕망의 이분법'이라는 잣대를 적용한다. 그러면서 해방 후의 사회상황과 사람들의 욕망을 21세기로 투영하여 독선, 오만, 도덕적 우월감, 과도한 인정욕구, 선악 이분법이라는 잣대를 동일하게 적용한다. 해방 후 정치상황을 좌우익의 극한대결로 묘사하면서 동시에 21세기의 정치상황 역시 진보-보수의 극한대결로 묘사하는 것이다.

물론 강 교수의 그런 지적이 일부 타당한 면이 없지는 않지만, 해방 후의 사회정치적 상황과 21세기의 사회정치적 상황을 그런 식으로 '선악 이분법'으로 극단화시키는 것이 사실에 기초한 객관적인 분석이라고 동의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한국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2권을 읽으면서 저자의 역사 서술과 해석 방향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문제점을 느꼈기 때문이다.
문제점 중의 첫째는 해방 후 한민족의 시대적 과제에 대한 몰이해 내지 간과라 할 수 있고, 둘째는 '이분법' 해석에 갇히는 바람에 '거악'이자 역사적 상황에서 주요 대립구도를 간과해버렸다는 점이다.
1945년 해방 당시 한민족의 시대적 과제는 당연히 친일파의 청산과 자유, 평등, 독립, 인권이 보장되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제의 조선 강제 합병은 봉건적이고 농업관료체제였던 조선을 조선인 스스로 주체적으로 개혁 또는 혁명을 통해 인권이 보장되고 자유롭고 평등하고 자주자립적인 국가를 건설을 가록막았던 것이고, 해방은 한민족 스스로 그런 시대적 과제를 뒤늦게나마 완성해야 하는 시기였다. 그러나 미군정이 일제 패망을 이유로 한반도를 임의로 무력 점령하면서 일제의 식민지를 인수한다는 식으로 대처하면서 조선(한국)인 스스로 친일파를 척결하고 조선(한국)을 개혁하는 것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두번째는 위에서 분석한 것처럼 해방 후 한민족의 시대적 과제를 가로막은 가장 주된 세력은 미군정이었다. 일제의 패망 이후 친일파들은 자신들의 같은 민족과 국가에 대한 반역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알기에 숨 죽이며 지하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강제 점령하면서 친일파를 불러내고 일제의 총독부를 유지하면서 친일파를 청산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한민족의 노력을 무력으로 부정하고 파괴했던 것이다. 좌우익 대결이나 이분법 역시 미군정 하에서 미군정이 한민족간의 내분을 조장하고 부추겼던 셈이다.

강 교수에게 더욱 안타까운 것은 강 교수 스스로가 여러 자료와 저술을 인용하면서 미군정이 어떤 과정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해방 후 남한 인민의 자유와 자주독립을 유린하고 탄압했는지 보여주었(아래 부분 '1. 미군정에 대한 재인식' 참조)으면서도 미군정의 역사적 책임과 범죄행위에 대해 제대로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강준만 교수가 '머리말'에서 주장한 국내 좌우익간의 '선악 이분법'이라는 해방 후 5년사 해석을 동의할 수가 없다.

그나마 이 책에서 새롭게 발견한 부분은 백범 김구에 대한 여러가지 정보였다. 백범 선생은 기존에 '통일조국의 지사'라고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을 통해 '통일조국의 지사'라는 상징이 대부분 깨졌다.(아래 부분 '2. 백범 김구에 대한 재인식' 참조)
강 교수가 정리한 내용으로 볼 때, 백범 김구는 해방 전부터 부패한 장개석 중군 관벌과 손을 잡았고 미군에게 손을 내밀었으며, 해방 후 남한에 들어올 때부터 암살 당하기 직전까지 미군정의 손아귀에 놀아났던 셈이다.
백범은 국제정세와 세력관계에 대해서도 무지했고, 미군정이나 이승만 만큼이나 극단적인 반공주의만을 신념화하였고, 대중정치인이라기 보다 일제시대의 테러리스트의 연장이었고, 해방 후 정치적 야욕을 위해 친일파와도 손을 잡았으며,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아니라 폭력과 테러와 선동의 정치를 남한에 뿌리 내리게 했다.
결국 백범 김구는 미군정의 충실한 여러 명의 꼭두각시 중 하나의 역할을 했고, 이억만리 타향에서 이름없이 허송세월하던 이승만이 상당한 정치세력을 규합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고, 죽어가던 친일파가 부활하는 데 엄청난 디딤돌이 된 후 미군정과 이승만에게 토사구팽 당한 것이라 할 수 있다.역시 지난 역사는 교과서나 언론, 인터넷의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공부할 게 아니라 구체적이고 다양한 정보와 사실을 파악하면서 종합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1. 해방 후 미군정의 만행 ] ○ "건국동맹은 1944년 8월 10일 여운형이 주동이 되어 조동우, 현우현, 김진우, 환운, 이석구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체로 전국에 걸쳐 약 7만 명의 맹원을 확보하였다. 건국동맹은 태평양 전쟁 말기에 국내에서 조직된 유일한 건국준비 조직으로서 국외의 독립운동 단체와도 연결되어 있었다."(p.34, 한국현대사의 비극 - 중간파의 이상과 좌절, 김재영)○ "1945년 8월 15일부터 9월 8일 사이에 식민 경찰의 50%를 차지하고 있던 조선인 경찰관의 80%가 건국준비위원회의 치안대에게 쫒겨나거나 도망쳤다. 같은 시기에 일본인 경찰관의 약 90%가 그대로 직장에 머물고 있었던 사실을 감안하면 조선인 경찰에 대한 민중의 분노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p.37, 미군점령 4년사, 송광성)○ "식민통치안은 이미 제2차 세계대전 전부터 미국 루스벨트가 미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구상해 둔 것이었다. 식민지 상태에서 독립시켰을 경우, 좌익이 정권을 잡을 위험이 높은 지역에선 신탁통치를 실시함으로써 그 기간 동안 친미 정권을 수립케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놓겠다는 것이었다."(p.41, 해방전후사의 인식, 박현채 외)○ "이미 1920년대에 상해 임시정부에는 27개 정당, 사회단체가 난립하여 최악의 분파주의을 노정했고, 이러한 현상은 그 후에도 지속되어 해방 직전 미국 전략국(OSS)의 정보보고서는 임정의 분열상과 해방 이후 임정 요인들의 수권능력의 불신에 관한 설명으로 가득 차 있다."(p.44, 한국정치사, 신복룡)=> 임정에 대한 재학습. 김구, 김규식, 김원봉의 입장은 누락. "과연 상해 임정은 분파주의가 대세였나? 그렇다면 분파주의의 원인은?"○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주석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 국무총리 허헌, 내무부장 김구, 외무부장 김규식, 재정부장 조만식, 군사부장 김원봉, 사법부장 김병로, 문교부장 김성수, 경제부장 하필원, 체신부장 신익희 등 국내외, 좌우를 망라한 인사들이 선임되었다. 그러나 인공의 선포는 미 점령군의 진주라는 급박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졸속으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각 부를 담당할 중앙인민위원의 임명도 국외에 있고나 국내에 있더라도 사전 동의 없이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이승만이 인민공화국의 주석이 되었다는 것은 그에게 커다란 정치적 후광이 될 수 있었다."(p.60, 통일지향 우리 민족해방운동사, 허은,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서중석)=> 여운형과 박헌영, 허은의 주장은 누락. 인공 간부들 중에서 사전 동의 없는 당사자는 누구? 친일파는 누구?○ "인공의 급조는 여운형의 조급한 판단과 재건파 공산당의 좌경 헤게모니의 의식이 결합되어 나타난 것으로서 해방정국을 급격한 좌우 대결 구로도 몰고 가게 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p.62,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서중석) "그 내막이야 어찌되었건, 밖으론 인공이 여운형의 주도하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던 만큼 여운형은 우익진영의 타도대상이 되었다. 인공의 급조로 좌우 진영의 사이는 더욱 벌어졌다."(p.63)○ "미군의 친일본, 반조선 자세는 이미 9월 6일 준장 찰스 해리스가 이끄는 37명의 미군 선발대가 비행기로 김포공항에 도착해 조선호텔에 투숙했을 때부터 예고된 것이었다. 미군 선발대는 일본 관리와 장교들을 만나 곤드레만드레가 된 채 흥청거린 연회를 가졌다. 그러면서도 한국인들의 접견 요청은 모두 거부하였다."(p.65)○ "조선을 적으로 간주하는 미군의 기본 자세는 9월 7일 발표된 맥아더의 포고령 제1호와 2호, 그리고 3호를 통해 구체화되었다. 건준 및 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조선인민보'의 창간호 1면에는 영어로 '연합군 환영'이라는 톱기사가 커다란 사진과 함께 실렸고, 왼편에는 역시 '연합군을 환영함'이라는 기사가 실렸지만, 미군은 그런 환영을 외면하였다."(p.67)○ "1945년 8월 30일 중국 중경의 임시정부 대표들은 중경의 미 대사관을 방문해, 미국식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기독교 신자가 많은(?) 자신들이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공산주의자들의 대거 입국 때문에 희망을 잃고 있으며, 미국의 도움으로 입국한다면 미 점령군이나 혹은 국무성의 의사에 반하는 일을 결코 하지 않을 것이라는 비망록을 남겼다. 하지만 미 정치고문 배닝호프는 미 국무성에게 공산주의자들 마저 중경의 임정을 전적으로 부인하지 못하기 때문에 김구 세력을 횔용하는 것이 미군정에 매우 유리하다고 보고했다.(서중석)"(p.122)=> 사실이라면 임시정부의 커다란 정치적, 도덕적 과오○ "미군정은 임시정부 요인들을 홀대했다. 더이상 귀국을 미루기 어려워진 임정은 결국 개인 자격으로 귀국을 받아들였다. 11월 23일 임정요인 환국 1진이 미군 수송기에 올랐다. 김구, 김규식 등 15명이었다."(p.123)○ "미군정은 인공에게는 미군정이 유일한 정부라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공화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던 것과는 달리 '임정을 인공의 경쟁자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임정이 정부 또는 내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도록 허락했다."(정용욱)(p.124)○ "인민공화국과 조선공산당은 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자 임시정부와의 연대를 모색했다. 그러나 김규식 등 임정 요인들은 인공이나 조공과의 연대를 거부했고, 여운형의 방문마저 거부했다."(p.127)○ "임시정부측은 인공과 조공에 대해선 단호한 태도를 취한 반면, 친일 협력자들에 대패선 유보적인 자세를 취했다. ... 이처럼 친일파 처단 문제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김구와 임정은 친일 자본가와 한민당의 접근은 받아들였다. 김구 역시 정치자금 문제 때문에 일정하게 친일파들과 손을 잡은 것이다."(p.128)○ "미군정은 임정 내의 우익이 먼저 귀국하여 유리한 위치를 점해야 한다는 계산을 하고서 일부러 작은 비행기를 보내 준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에 따라 임정 내부에서는 누가 먼저 귀국할 것이냐를 놓고 내분이 벌어졌다."(p.134)○ "1945년 12월 12일 하지는 '남조선에서 실제적인 정부는 미군정 뿐'이라며 공식적으로 인공을 불법화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후, 19일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를 동원하여 서울에 있는 인민이원회를 습격했다."(p.142)○ "1945년 11월 15일 남원에서 인민위원회 해체에 항의하는 민중들에게 미군이 발포하여 사망 3명, 부상 50명이 발생하였다. 이 폭력사태는 당시 진행 중이던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4대국 신탁통치안의 논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분위기 조성 효과를 갖는 것이었다.(?)"(p.142)○ "미-소의 신탁통치 결정에 대한 악의적 오보는 미국 내 통신사로부터 전달되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오보가 언론을 통제하던 미군정의 단순실수인지, 아니면 반소 반탁 감정을 형성하기 위한 모종의 국제적(?)인 음모가 개입된 것인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p.147)○ "1945년 12월 (교묘하게 조작된) 신탁통치 보도에 격분한 임시정부가 신탁통치 반대와 더불어 미군정청을 반대하며 파업을 주장하자 1946년 1월 1일 하지는 김구를 자기 사무실로 불러 '나를 속이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면서 파업을 해제할 것을 위협하자, 임시정부는 다음날 파업 중지를 호소했다."(p.155)○ "미군정은 1945년 9월 '절대적인 언론자유의 보장'이라고 한 약속을 뒤집고 1945년 11월 10일 '매일신보'에 정간 명령을 내렸다. 이 신문이 해방 후 사원들로 구성된 자치위원뢰를 결성하였고 인민공화국을 부인한 아놀드 성명의 게재를 거부하는 등 미군정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었다."(p.159)○ "1945년 9월 15일 미군정은 서울중앙방송국 등 남한의 10개 방송국을 모두 접수하여 군정정책에 대한 홍보매체로 이용하였다. ... '정당 방송' 시간에는 좌익 정당에 매달 30분, 우익 정당에 매달 4시간 30분을 힐애했다.(좌익정당 방송을 언제 금지했는지는 아직 모름)"(p.166)○ "미군정은 1945년 10월 미국의 독립기념이일,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등을 공휴일로 지정했는데, 어쩌면 바로 이것이야말로 훗날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 미군정의 가장 성공적인 홍보전략이었는지도 모르겠다."(p.167)○ "1945년 9월 16일 미 군정청 학무국장 락카드 대위는 조선교육위원회를 구성하고 7명의 조선인 교육위원을 선정하였다. 김성수, 한상윤, 백낙준, 김활란, 김성달, 최규동, 유억겸 등이 그들이다. 한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 친일 경력이 있는 인사들이었다."(p.172)○ "해방 직후 교육정상화의 가장 큰 장애 중의 하나는 미군의 교육시설 점유였다. 점령 직후 내려진 명령 중 하나가 모든 학교의 휴교였는데, 학교 건물들은 미군에 의해 사용되었다. 곱게 사용했으면 모르겠는데, 약탈적 점령으로 시설, 특히 도서관 파괴가 심각했다."(p.173)○ "물론 이는(해방 직후 일제의 화폐남발과 인플레이션) 미군정의 정책부재가 겹쳐 악화된 것이었다. 일제가 퇴각하는 순간에도 수탈을 자행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군정이 수립된 이후에도 여전히 일본인이 각 금융기관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은행은 10월 13일에야 미군이 총재로 임명되었다."(p.185)○ "반면 미군정은 남한의 이데올로기 투쟁에만 관림을 기울인 나머지 일본인 기술자들을 붙잡아 둘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거의 다 귀국시키고 말았다."(p.186)○ 46년 전반기까지 미군정의 점령정책은 소위 '질병과 소요' 공식이었기 때문이다. 점령군의 안전을 위협하는 '질병과 소요'를 막을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의 비용을 투입할 뿐 피점령국의 경제는 점령 측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었다.(p.187, 한국의 국가형성과 민주주의, 박찬표)=> 정치,경제,행정,사법,사업체까지 장악하고서 경제정책 방치하는 것을 그냥 미군정의 입장이라고만 설명?? : 총독부 유지, 총독부 정책/인물 유지, 친일파 군경 보호/조직, 일제 사업체 접수(생산액의 35%), 방송국 장악, 금융기관 전부 접수(늦장부렸지만), 일본 기술자 귀국, 물가폭등, 토지개혁 저지, ○ 정치의 과잉, 그건 그 어떤 명분에도 불구하고 분명 해방정국의 비극이었다. 그건 오래송안 막혔던 둑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나타난 현상인지라 통제가 어려웠고, 통제를 시도할 주체도 없었다. 남은 건 욕망의 적나라한 대립과 투쟁뿐이었다. 그 욕망은 '애국심'으로 포장되었기에, 갈 데까지 가는 것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p.189)○ 미군정은 1945년 10월 15일 뉴욕타임즈 리차드 존스턴과 조선공산당 박헌영의 기자회견을 조작해 미국의소리 방송 -> 동아일보를 통해 언론공작을 펼쳤다. 회견에 참석했던 국내 12개 신문,통신사 기자들이 성명서를 발표했으나 미군정은 사실을 알면서도 방송과 한민당, 친일우익단체를 동원하여 반탁운동을 부추겼다.((p.195~197)○ 1946년 1월 7일 반탁전국학생연맹(대표 이철승)이 결성되면서 서울운동장에서 1만명이 반탁시위를 벌였다. 서울시내 학생들은 방학 중임에도 학교와 교사의 지시로 동원된 것이었다.(p.198)=> 교육부처를 장악하고 있던 미군정과 친일파들이 배후였던 셈이죠.○ 1946년 1월 8일 반탁학생연맹은 반탁시위를 벌인 뒤 조선인민보사로 몰려가 인쇄기를 부수고 건물을 피괴했고, 조선인민당으로 몰려가 건물과 시설을 파괴하였으며, 서울시 인민위원회 및 부녀총동먕 사무소를 부수었고 신문로에서 학병동맹원들과 충돌하였다. 다음 날 새벽 장택상의 지휘로 (친일파 출신) 경찰은 반탁학생연맹의 파괴행위의 책임은 묻지 않고 충돌의 책임을 학병동맹에게 묻겠다며 사무실을 포위하여 공격했다. 총격전이 발생하여 학병동맹원 3인이 죽었다.(p.199)○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에 대한 진실(미국이 먼저 제안, 미국측이 주장한 10년을 소련측이 5년으로 축소, 임시정부 먼저 구성 등)이 미군정과 관제언론에 의해 왜곡 조작된 것에 대해 소련측이 항의함에도 미군정 하지 중장은 소련의 주장을 보도하지 못하도록 언론을 통제하였다.(p.201)○ 신탁통치에 대한 사실이 알려지자 1946년 1월 7일 한민당(김병로,원세훈), 국민당(안재홍,이승복,백홍균), 인민당(이영성,김세용,김오성), 공산당(박헌영,이주하)과 중경 임시정부측 김원봉, 장건상, 김성숙, 인공측 홍남표, 이강국 등이 참석하여 모스크바 회의 결정을 지지하고 자주독립의 정신에 기초하여 신탁이 이루어지도록 할 것을 결이했다. 다음 날 신한민족당까지 가담하여 5당 회의를 진행하였으나 이승만과 한민당이 결사 반대하고 김구의 한독당마저 반탁을 무조건 고집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4당 코뮈니케, p.204)○ 미군정은 1945년 10월 경찰을 보완할 목적으로 국군을 창설키로 결정하고 11월 13일 군정 법령을 발표한 후 국방부를 설치하고 1946년 1월 15일 국방경비대를 창설했다. 미군정은 경비대의 장교는 투옥 경력이 없어야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독립운동가들을 배제시켰다.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원용덕(만주군 중좌), 제1연대장 채병덕(일본육사 49기), 2연대장 이형근(일본육사 56기), 4연대장이자 경비대 총참모장 정일권(만주군관학교), 5연대장 백선엽(만주군관학교)는 모두 친일파였고 미군정 국방부 고문 이응준도 일본육사 26기생 대좌출신이었다.○ 1946년 1월 미군정의 지시를 받은 경찰과 미 헌병부대는 서울에 있는 인민공화국 산하 국군준비대 본부와 양주군 훈련학교를 습격하여 해산시켰다. 이 습격에는 김두한이 이끄는 대한민청의 대원들도 가담했다.(p.208)○ 1946년 6월 15일,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이 국방경비대의 명칭과 목적에 대해 문제제기하자 미군정은 국방경비대를 조선경비대로, 국방부를 경무부로, 군사국을 경비국으로 바꾸었다.(p.210)○ "미군정은 어리석게도 1945년 10월부터 조선의 실정에 전혀 맞지 읺는 자유시장 정책을 실시하여 쌀 투기만 불러 일으켰다. 쌀의 도매시세가 3개월 만에 한 석당 650원에서 5천600원으로 폭등했다."(p.213)○ "미군정은 1945년 10월 소작제를 철폐하지 않은채 소작료의 상한선을 1/3 정했다. 하지만 위반시 처벌하지 않아 무용지물이었다. 대부분의 지주는 이 법령을 지키지 않았고 관개시설 사용료 등 모든 비용을 소작인에게 전가시켰다."(p.215)=> 일제와 미제가 무엇이 다른가?○ "미군정은 1946년 2월 일제의 동양척식회사를 신한공사로 이름만 바꾸었다. 신한공사는 남한 전 경지면적의 13.4%, 전체 농가수의 27%, 쌀 생산량의 25%에 달했다. 직원들에게 소작료 징수량의 일부를 떼어주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에 신한공사 직원들은 소작료를 받아내는 데 경찰보다 더 혈안이었다.(아마 직원들은 일제의 수탈에 부역하던 사람들 그대로였겠죠)"(p.216)=> 일제와 미제가 무엇이 다른가?○ "미군정이 실시한 미곡수집령에 의한 미곡 공출은 소작인이 직접 납부하고 지주는 직접 받을 수 없도록 되었는데, 지주들은 소작인들을 속여 직접 현물로 받아 소작인의 불공출을 권장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소작농에 대해서만 가록하게 대응했다. 미곡 수집과정에사 처벌한 소작인만도 1946년 8천600백 명에 이르렀다."(p.217)=> 일제와 미제가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미곡 공출 역시 시세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강제로 공출하였기 때문에 자영농과 소작인들은 큰 피해를 당해야 했다.○ "미군정은 미곡 공출로 도시민에게 식량을 배급하는 제도를 취했는데, 지주의 저항과 속임수로 공출 목표가 미달하고 쌀값 폭등과 더불어 턱없이 모자라는 배급량으로 인래 도시에서의 쌀 위기는 계속되었다. 그 혼란한 와중에서도 미군정은 쌀 수집과 배급 절차를 통해 좌익을 통제라고 탄압했다."(p.218)○ "민주의원을 거부한 세력들은 다음 날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였다. 여기에는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독립동맹, 전평, 전농, 조선문학작가동맹 등 29개 정당, 사회단체가 망라되었다. 민전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총체적 지지를 주장하며 친일파, 민족반역자, 파시스트, 민족분열자 등을 제외한 민주주의 민족통일체임을 선언했다."(p.225)○ "(북한의) 토지개혁 발표 후, 남한의 신문들은 이를 톱기사로 보도했으며, 사설들은 남부에서도 유사한 개혁을 할 것을 주장했고 비판은 거의 없었다. 그후 북한과 같은 토지개혁을 요구하는 시위가 남부 각 도에서 산발적아로 일어났다. 당시 남한 신문들을 숙독하면 한국의 추진력은 북으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남부인들의 생각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알 수 있다."(p.232)○ "미군정은 1945년 9월 정당신고재를 택한 지 5개월 만인 1946년 2월 정당등록법읓 발표하였다. 이는 미군정이 3월 20일로 예정된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전체 공산주의 활동에 관한 보다 나은 정보를 얻고 궁극적으로 좌익들을 단속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인민보는 이에 대해 '일제의 치안유지법보다 더 고약한 것'이라고 비판했다."(p.233)○ "1946년 미군정은 방첩대를 동원하여 좌익인사들에 대해 집요하게 전향공작을 펼쳤다. 급기야 불법적이고 치졸한 방법을 동원하여 인천 민전 의장으로 활동하고 있던 조봉암 전향사건으로 이어졌다. 전향공작의 불법성과 폭력성을 점점 심해졌는데, 1947년 10월 민전 경기도 부위원장 작일원의 전향공작시에는 고문을 가하기도 했다."(p.242)○ "미군정은 1946년 5월 뚝섬에서 체포된 위조지폐단 용의자 26명 중에 포함된 조선공산당원 한 명을 빌미로 조선공산당 본부를 수색하고 기관지 해방일보를 무기 정간시켰다. 미군정 법정은 공산당원 16명에게 무기징역에서 최저 10년형을 선고했다."(p.243~244)=> 이 사건은 수많은 의혹만을 남긴 상태로 남아있다.○ 대한민청은 한민당을 비롯한 호남 (친일)지주들의 지원을 받았고, 김두한은 때로 협박,공갈을 구사하여 자금을 충당했다. 친일경찰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이 활동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권력과 깡패가 본격적으로 야합하기 시직한 것은 이때부터였지만, 단초는 이미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졌다.(p.262)○ 미군정도 청년단체를 활용할 필요성을 느껴 1946년 중반 비밀리에 약 500만 달러와 미군 장비를 지원하고 훈련 고문으로 미군 대령 한 사람을 특파하여 1946년 10월 조선민족청년단읓 결성케 하였다. 단장은 이범석. 이범석은 중국의 조선광복군 2지대 사령관을 지내면서 미국 정보원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인물이었다. 족청은 김활란, 백낙준, 최규동, 현상윤 등으로 이사회를 구성했다.(p.267)○ 1946년 8월 전평 조합원에 대한 대한노총의 텔러에 가담한 청년 테러단원은 하루 300~500원을 받고 동원되었다. 이때 전 산업 남성 노동자의 하루 평균 임금은 61원이었다.(p.269)○ 미군정의 좌익 탄압은 교육 영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미군정은 1946년 3월 '무허가 학교 폐쇄령'을 공포하여 민족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의 학교, 학원, 강습회를 폐쇄하였다. 또 미군정은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문맹퇴치운동을 금지시켰는데, 이는 좌익이 문맹퇴치를 정치 이데올로기를 삼투시키기 위한 기초공작으로 이용하는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p.272)=> '민족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의 학교, 학원, 강습회가 왜 무조건 '좌익'인가? 이것은 미군정이 일제처럼 제국주의적 사고를 지닌 것이고 강준만이 다음에 거론하듯이 전민중의 공부 열기에 따른 자발적인 모습일 뿐이며, 미군정은 좌익을 명분으로 이용한 것 뿐이라는 걸 왜 인정하지 않는가? 문맹퇴치운동이 '좌익이 이용한 것'이라는 근거가 무엇인가?○ 1946년 7월부터 1947년 2월까지 진행된 국립서울종합대학안(국대안) 파동은 교육 영역이 그렇게 이념적, 정치적 논란의 주요 이수로 등장(?)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국대안 반대투쟁은 미군정 지시 하에 서북청년회와 김두한의 깡패를 동원하여 폭력으로 탄압함으로써 진압되었다.(p.273~279)=> 강준만 본인도 뒤에서 과정을 밝혔듯이, 교육이 정치적으로 변질된 이유는 미군정과 친일극우가 유도하고 저지른 때문이었다. 어떤 면으로 보아도 미군정이 국대안을 실시할 이유도 근거도 없었다. 미군정이 기존 학교시설을 점거하고 파괴했는데, 문맹퇴치와 사설교육기관을 폐쇄했는데 갑자기 조선의 교육을 위해 힘쓴다? ○ 1946년 6월부터 여운형과 김규식이 주도하여 시작된 좌우합작 운동은 미군정이 지지하면서 민주의원괴 민전 사이의 논의로 급진전되었다. 박헌영은 좌우합작의 조건으로 5개항을 제시하고한민당측은 8개항을 제시했다. 미군정은 1946년 9월 좌우합작을 반대하는 박헌영과 이강국 등에 대해 체포령을 내리고 좌우합작을 다시 밀어붙였다. 좌우합작위원회는 7원칙에 합의했는데 무상몰수 무상분배라는 토지개혁을 한민당이 반대했다. 이에 반발하여 한민당에서 원세훈, 송남헌, 김병로, 김약수 등이 탈당하였다. 미군정은 과도입법의원을 설치하면서 좌우합작위원회를 외면했다. 미군정은 과도입법의원을 조직하려고 좌파와 중도파를 이용한 것이다.(p.284~305)○ 1946년 10월 미군정은 좌우합작운동을 근거로 민선 45명, 관선 45명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간접선거) 설치를 강행하면서 제2의 중추원으로 비판하면서 여운형을 비롯한 좌파세력은 이를 거부했고, 중도좌파 대부분 사퇴했다. 결국 과도입법의원은 다수의 우파와 친일파 세력, 일부의 중도우파세력으로 구성되었다.(p.306~309)○ 1946년 9월 조선노동자전국평의회(전평)는 전국적 규모의 총파업을 실시했다. 이는 미군정의 탄압에 직면한 좌익계열이 기존의 미군정에 대한 태도를 전면적으로 수정하여 이른바 '신전술'의 일환으로 벌인 대대적인 파업이었다. 한달 전인 8월 경찰이 전평 서울본부를 습격하여 문서를 압수하였고, 인민보와 현대일보, 중앙신문 등 좌익계열 신문을 포고령법 위반으로 폐간시켰다. 미군정은 경찰과 김두한 등 우익단체를 동원해 전평의 총파업투쟁위원회를 습격하여 간부와 노조원을 죽이고 폭행하고 체포했다.(p.289~293)=> 그렇다면 강준만은 미군정의 정당, 노조, 언론탄압에 무릅 꿇고 죽으라는 것인가? 미군정의 부당하고 불법적인 탄압에 아무런 입장이 없는 것인가?○ 1946년 10월 대구에서 "쌀을 배급하라!"며 시작되어 12월까지 전국으로 확대된 10월항쟁에는 약 300만 명이 참여했는데, 경찰 200명 이상과 민간인 1천 명 이상이 피살되었으며, 체포된 사람은 3만 명에 이르렀다. 10월 항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해방 이루 새로운 민주사회 건설에서 제반 개력의 요구가 좌절된 데 대한 민중의 항거라 할 수 있다. 대구, 경북의 항쟁에 대한 미군정과 경찰, 김두한 등 정치깡패 등의 폭력과 학살은 끊이지 않았다.(p.296~300)○ 10월 항쟁은 결과적으로 공산당에게 큰 타격을 입혔으며, 당시까지 지방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돈 인민위원회의 파국을 낳았다. 그러나 궁극적인 피해자는 농민이었다. 남로당은 급진화되었으며 대중적 지지를 상실했다. 여기서부터 농민의 보수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나중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이승만이 농촌을 자신의 주요 지지기반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역사적 상처에 근거한 것이었다.(p.301)=> 미군정과 친일파와 극우들이 친일경찰과 정치깡패를 동원하여 농민을 학살하고 폭력을 휘두른 것을 직접 보고 겪은 농민들이 이승만을 지지했다? 웃기는 소리. 1948년 단독선거 거부투쟁과 그뒤 빨치산 유격대 투쟁 등을 고려하면 강준만 교수의 염원일 수는 있으나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일 뿐이죠. 이승만은 모든 선거에서 부정과 폭력을 일삼았고, 그런 행위가 농촌에서 더 쉽게 먹혀들어간 것 뿐...○ 미군정의 최대 관심은 '예술'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였다. 미군정은 일본이 남기고 간 극장에 대해 조선 영화인의 의견에 따라 불하한다고 공언했지만 친일 지주와 친미 자산가, 친일 예술인들에게 불하함으로써 그 약속을 어겼다. 여기에 1946년 10월 미군정은 영화 포고령을 발포하여 사전허가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영화,예술 등에 대한 창작의 자유를 억눌렀다.(p.325~327)--- 아래부터는 1940년대 2부 ---○ "미군정과 우익단체들은 전국적으로 열린 민전 주최의 1947년 3.1절 기념 시민대회를 탄압하였다. 부산과 제주도 등 지방에서는 경찰 발포로 16명이 죽고 22명이 중경상을 입었다."(p.19) ○ "제주도에서 발생한 3.1절 경찰 발포로 인한 사상이 바로 그 다음해에 일어난 비극적인 4.3항쟁의 비극을 불러일으킨 씨앗이 되었다. 경찰이 사과하고 수습했으면 간단히 해결될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경찰과 그 배후에 있는 미군정은 사건을 크게 키우려고 작정이나 한 것처럼 계속 적반하장을 일삼았던 것이다."(p.21)=> 강준만 교수의 순진함 또는 무지함 또는 비겁함이 드러난 대목. 미군정은 1945년 9월 8일 한반도 남단을 점령하면서 일제의 점령지를 이어받은 '점령군'으로 스스로를 자임했고, 그 이후 지속적으로 점령군으로 행사하면서 남한 민중의 자주적 자발적 독립국가 건설과 친일파 처단을 막았는데 이제와서 3.1절 발포사건과 수습과정을 문제삼는 것은 왜??○ "미군정과 우익의 3.1 기념대회 탄압에 항의하여 전평은 3월 22일 전국 총파업을 진행하였다. 이에 미군정과 우익세력은 민전과 그 산하단체들을 습격하였다. 3월 29일까지 3천여 명이 검거되었는데, 독립투사이자 민족혁명당 김원봉도 검거되어 노덕술 등 친일경찰에게 고문을 당했다."(p.21)○ "오늘 해방된 지 38년이 지나도록 분단이 계속될 줄 알았다면 나는 차라리 신탁통치를 수락함으로써 민족분단의 비극을 예방하는 데 찬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식탁통치를 식민지 연장과 같이 생각했던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랬듯이 즉시 독립에의 정열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신탁통치반대'의 현수막이 나부끼는 화물자동차에 올라타고 확성기로 외치고 다녔다."(p.39)"결과적으로 훗날의 이승만 씨 집권과 그의 타라그 부패한 친일파들의 반민족적 정권 유지의 원초적 협조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는 회한이 지금도 가시지 않고 있다. '신탁통치 찬성 = 공산당'의 당시의 정치투쟁의 단순논리의 의미를 내가 꿰뚫어볼 능력이 없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승만과 추종세력이 '반탁'의 여세를 몰아 민족분단, 단독정부 수립으로 민족의 순수한 열망을 악용할 줄은 더욱 몰랐다."(p.39) - 리영희 <역정>(창비 1988) 중에서 재인용○ "미군정은 2차 공위 시작 전인 1947년 5월 17일 법령 제161호를 공포하고 6월 3일 남조선과도정부를 공식 출범시켰다. 과도정부의 한인 고위관리 115명 중 70명이 일제 총독부에서 관직에 있었으며, 23명은 일제 하에서 공공 및 개인기업의 소유자, 지배인이었다. 전체 줓 조금이나마 항일활동 경력을 가진 사람은 11명에 불과했다."(p.44)○ "1948년 2월까지의 미군정 각 부처장급 한인 고위관료 30명의 출신지역을 분석한 바에 따르면, 이북 출신자들이 39%였는데 이는 기독교 선교사들의 추천이 큰 영향을 미쳤으며 미군정의 반공 이데올로기와 관련해 설명할 수 있는 것이었다."(p.45)

[ 2. 백범 김구에 대한 재인식 ]

○ "미군정은 1946년 2월 반탁운동을 주도적으로 펼치던 우익(?) 지도자들을 포섭하기 위해 미군정의 자문기관으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을 출범시켰다. 여기에 1월 김구와 이승만이 결성한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28명 전원이 민주의원으로 임영되었다. 여운형 등은 불참을 선언했다. 불참한 세력은 이를 일제의 '중추원'으로 비난하였다."(p.221)=> 이로써 김구와 김구식은 그동안 완강하게 고집하던 임시정부의 법통론을 스스로 부정해버렸다. 김구와 김규식은 왜 이런 들러리 단체에 참여했는가? 미군정의 협박과 정치자금 때문에?? 김구 선생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 첫 번째....○ "민주의원 설립 후 김성수가 사적으로 100만 원을, 대지주 중심의 단체인 대한경제보국회가 200만원을 기부했다. 경제보국회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해방정국의 '3거두'를 비록한 우익 정치인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했다. 물론 이승만은 따로 1천만 원을 제공받았다."(p.223)=> 친일파들에게 정치자금을 받고서 친일파를 청산할 수 있겠나? 김구 선생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 두 번째....

○ "1946년 3월 1일, 평양역에서 진행된 3.1 운동 기념식에서 김일성에 대한 폭탄테러 미수사건이 일어났다. 이 테러 미수사건은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염동진이 이끄는 백의사라고 하는 전문 테러단체가 김구와 신익희의 지시에 따라 저지른 짓이었다. 암살단은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 명의로 2월 15일에 발급된 '승차편의 공여에 관한 의뢰장'을 갖고 있었다."(p.230)=> 김구 선생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 세 번째.... 임시정부와 김구, 김규식, 신익희 씨에 대해 결정적으로 실망한 대목. 해방 후 그많은 친일파와 일제부역자들에게 테러 한 번 못하고 정치자금을 받으면서 자주독립통일국가를 꿈꾸었다니..

○ "1946년 3월 22일 미소공동위원회는 공동성명 5호를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지금까지 반탁투쟁을 했어도 삼상회의 지지를 표명하면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협의대상으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좌익과 우익의 합작파는 즉시 찬성을 표했지만, 김구는 완강히 거부했다. 이승만은 한 달 후 공동성명 5호에 동의했다. 그래도 여전히 민주의원 일부가 지지를 거부하자, 하지는 미소공동위원회와 사전 상의없이 신탁통치 여부를 불문에 붙인다고 발표했다."(p.236)=> 김구 선생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 네 번째....

○ "이승만은 1946년 6월 정읍, 전주, 이리, 군산에서부터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거부하고 단독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했다. 6월 11일 독촉국민회 전국대표자회의 진행시 김구는 '우리는 죽음으로 이승만 박사에게 복종라기를 맹세합시다'라고 외쳤다. 이승만이 민족통일본부라는 단체를 만들었을 때 김구는 부총재에 취임했다. 김구는 한 살 위인 이승만을 깍듯이 형님이라고 부르고 이승만이 나가던 교회까지 따라 나갈 정도로 형님에게 극진하게 대접했다. 김구의 그런 지원으로 이승만은 우익진영의 선두주자로 나서게 되었다."(p.258)=> 김구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다섯 번째 이야기...○ 1946년 봄 300명이 모여 대한민주청년동맹을 결성했다. 조직원은 종로,명동 일대의 폭력조직 대부분이 망라되었다. 명예회장은 이승만, 김구, 김규식, 회장은 유진상, 감찰부장은 김두한이었다. 일제 밀정노릇을 하던 염동진이 만든 테러단체 백의사 비밀조직원인 김두한은 극단적으로 반공을 내새운 깡패였다.(p.260)=> 김구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여섯 번째 이야기...

○ 이승만과 김구가 가장 믿음직한 단체의 하나로 아끼고 사랑했던, 반탁학생연맹의 후신인 전국학생총연맹이 1946년 7월 결성되었다. 김구와 조소앙은 청년,학생단체의 소속원들이 체포되면 장택상 수도경찰청장 등에게 전화를 걸어 석방시켰다. 이들 단체의 자금은 김성수로부터 나왔다.이 단체는 김두한의 대한민청과 밀접한 협력관계를 구축했다. 김두한은 자신이 1947년 근로인민당의 당사까지 빼앗아 이 단체에 넘겨주었다고 주장했다.(263)=> 김구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일곱 번째 이야기...

○ 대한노총은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이 1946년 3웣 10일에 결성한 것으로 정식 명칭은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이었다. 결성대회에는 김구, 안재홍, 조소앙, 엄항섭 등 우익계 정치인들이 참석했다. 대한노총은 출발부터 단순한 노동자 조직이 아니라 우익 깡패와 정치집단으로서 일종의 테러리스트 조직이었다. 대한노총의 조직은 미군정 차원에서 구상되고 실련되었고, 서북청년단과 대동청년단에서 파견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대한노총의 제1차 대의원대회에서 총재에 이승만, 부총재에 김구, 전진한을 다시 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p.294~295)=> 김구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여덟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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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ho**chun2 | 2010-01-28 | 추천: 0 |

작년에 읽었던 책. 작년 부쩍 우리나라 현대사가 궁금했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로 인해 그것이 촉발되었고,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 이 후에, 우리나라 현대사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어떤 책이 좋을까 싶어서 고민하던 차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그냥 거창하게 현재 우리나라 정치 구조에 누적된 문제점이 갑자기 궁금해져서, 혹시 멀지 않은 가까운 과거를 알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고, 솔직히 말하면, 아는 척을 하고 싶어서 였던 것 같다.

이번에 읽은 책은 1940년대 1편으로 일제 치하로부터 해방된 1945년, 1946년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저자인 강준만 교수님이 머리말에 쓴 이야기인데, 한 대학생이 40년대 후반의 이야기를 읽다가, 우울해서 이 책을 덮었다고 한다. 나는 이 책을 덮지는 않았고 - 사서 읽은 책이었기 때문에 다 읽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다 - 속으로 욕을 하며 읽었다.

해방 이 후, 격동의 1940년대. 이 책을 읽고 가장 오래 가슴을 저미게 만들었던 이야기는 해방 소식을 듣고도 사람들이 기뻐 곧바로 거리로 뛰쳐나온 것이 아니라 그 전대로 무표정하기만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줄곳 겁을 먹고 지내왔고, 해방된 그 순간에도 일본 경찰이 버티고 있었으므로, 바로 기뻐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는 4~5시간 후 대폭발로 이어졌다. 어쨌든 나는 이 부분이 가장 기억에 남고 가슴이 아팠다. 기뻐도 곧바로 기뻐하지 못했던 그 4~5시간.

어쨌든 해방 이 후, 하지만 기쁨의 순간만이 그 시간을 채웠던 것은 아니었다. 해방이 갑작스럽게 와서, 아무런 준비도 못했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던가. 하지만 그 시기, 우리나라이 진짜로 영웅이 나왔더라면, 지금 우리나라는 분단되어 있지도 않았을테고, 친일파들이 득실거려, 후대에도 떵떵거리며 살지는 았았을 게다. 영웅이 나오기는 커녕 영웅인 척 하려했던 사나이-슈퍼맨이었던 사나이 패러디 - 들만 득세했다. 어쨌든, 그 시기 영우이 되고 싶은 사람이 너무 많았나보다. 이는 인정욕구와 영웅주의라고 저자는 분석했던 것 같다.

이 때 친일청산을 했어야 했지만, 슬픈 이야기이지만 일제 치하에서 미군정으로 변화되었을 때, 전범국인 일본을 철저하게 처벌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즉 미국이 전략적 요충지로 이용했기 때문에, 일본은 전쟁을 일으키고도, 그에 합당한 벌을 받지 않았다. 아마 일본의 힘이 약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친일파의 힘 또한 약해질 수가 없었던 것 같다. 또 그들은 미군정의 부름을 받아, 더 큰 권력을 누렸다고 한다. 이 참을 수 없는 기회주의.


10쪽 이 시기에 진정한 이데올로기가 있었다면, 그건 대세 또는 힘이 센 쪽으로 기우는 기회주의였을 것이다. 해방 이틀 후 소련군이 서울역에 들어온다는 헛소문은 그런 기회주의를 유감없이 드러나게 해준 사건이었다. 후일 강력한 반공(反共) · 반소(反蘇)주의자로 활동하게 되는 사람들도 그때엔 소련군에 대한 대대적인 환영을 준비하였기 때문이다.
피가 끓는 원한관계, 전통적인 유대관계, 대세 추종의 처세술 등과 같은 동기들로 인해 빚어졌거나 증폭된 갈등마저 이데올로기 투쟁이라 불러야 한다면, 그건 아마도 '의사(擬似 : 실제와 비슷함) 이데올로기 투쟁' 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음. 친일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는 것 같다. 친일을 했으나, 인정하지 않은 뻔뻔한 친일, 그리고 반성하는 친일. 물론 모두 잘못했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는 반성하지 않는 뻔뻔한, 정당화하는 친일이 많지 않나 싶다. 한편 내가 당시에 살았더라면 친일을 하지 않았으려나? 모르겠다. 하기야. 친일을 하는 것도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가 있어야 하는건데, 친일 하는 것도 아마 어려웠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그 당시 우리나라 국민의 단결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의 과잉으로 인해 너도나도 우익, 좌익을 선택받기를 강요받았고, 흑백논리는 덤이었다. 중도를 지키기란 어려웠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행동하기도 어려웠을 거다. 저자는 그 동안 오랫동안 막혔던 둑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표현했고, 통제가 어려웠고, 통제를 시도할 주체도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욕망은 애국심으로 표현되었다고 한다. 그 시기는 시정잡배도 정치를 부르짖었고, 영웅이 되던 시기였다.

또 한 가지 의아했던 점은, 백범 김구에 대한 점이다. 그냥 지금 우리나라에서 김구 선생이 과대평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부분은 조심스러운 부분이기에. 뭐라고 할 말은 없고, 이 책을 읽고 나서 든 그냥 단편적인 생각일 뿐. 당시 친일파 처단 문제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이는 정치자금 문제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종종 정치인으로서의 그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현실 상황을 오판 했었고, 자신의 욕심인지, 민족을 위한 것인지 불분명한 상황도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지난 해, 조정래 작가님의 강연회를 듣고서, 뭔가 생각한 게 있었다. 청산리 전투를 떠올릴 때 생각나는 사람은 김좌진 장군인데, 사실 그 때 김좌진 장군 말고도 기억해야할 분이 있다고 했는데, 이름을 까먹었다. 어쨌든, 남한과 북한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을 영웅화 시켰다는 말씀이었다. 즉, 균형잡힌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취지의 이야기였다. 김구에 대한 평가도 균형잡힌 시각이 필요한 것 같다. 뭐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지껄인 이야기이고, 진짜 아무것도 모르면서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원래 빈수레가 요란하다고들 하니까.


그리고 당시 임시정부는 분열하고 있었고, 과도한 보상욕구와 인정욕구에 굶주렸다고 한다. 결국 민족을 위해 했던 일이라고들 하지만, 결국 그것은 순수하게 민족만을 위한 일이 아니었던가보다. 아마 영웅이 되고 싶었던 마음도 컸을 것이다.

136쪽 이타적 삶을 산 사람들의 과도한 보상욕구가 문제였을까? 보상욕구 자체를 탓할 수는 없을 것이나, 그런 전통은 훗날까지도 계속되어 민중으로 하여금 엘리트의 이타적인 행동을 정략적인 '장기 투자' 로 보게끔 만드는 가공할 효과를 낳게 된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실 책 읽은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예전에 조금 메모한 것을 바탕으로 쓴 글인데, 뭔가 당시에는 재밌게, 애써 읽었었는데, 기억력이 좋지 않아 지금 머리에 남은 게 많지 않다는 것이 슬프다.

18~19쪽 진정한 '낙관과 긍정'을 위해선 우리 자신에 대한 자신감의 회복이 필요하다. 그래야 과거를 있는 그대로 직시할 수 있다. 그래야 오늘이 규명되고 더 나은 내일이 열린다. 어떤 역사적 조건의 산물 또는 역사의 상흔은 우리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의식구조로까지 자리잡아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역사 탐구의 장점은 현재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의 기원을 캠으로써 그것이 어떠한 역사적 조건의 산물이라는 걸 이해할 수 있게끔 해준다는 점일 것이다.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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