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의 노래 - 북한 정치범수용소 체험수기
강철환 (지은이) | 시대정신 | 2005-06-13
2005년 현재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고 있는 강철환 씨가 유년시절 북한의 함남 요덕 정치범수용소에서 보낸 10년을 기록한 책. 미국에서 <평양의 어항>(The Aquariums of Pyo ngyang)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어 타임지가 선정한 '2002년 올해의 책 베스트 100'에 선정된 바 있는 책이다.
옥수수 한 그릇과 소금 한 숟갈로 14시간의 중노동과 채찍을 견뎌내야 하는 곳.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서 지옥 같은 생활을 하다 탈옥한 지은이의 체험 수기다. 지은이는 정치범 수용소에서는 살아있는 것 자체가 가장 큰 고통이고, 치욕이었다고 회고한다.
2003년 상, 하 두 권으로 출간되었던 책을 하나로 묶은 개정판이며, 2005년 6월에는 미 부시 대통령이 읽었다는 책으로 알려지면서 화제가 된 바 있다.
개정판 머리말
초판 머리말
마른 하늘에 날벼락
죽음의 고개
요덕수용소
죄인의 자식들
개걸병
평토해치운다
토까사 증축사고
수용소에서 살아남기
특별공급
스파이의 말로
뭐든 먹는다
김기운 선생
완전통제구역
수용소에서의 명절
나는 개다
전염병
토끼사 당번
남새밭 습격
용평에 온 담임교워
네놈이 뛰면 우린 난다
부모님의 이혼
야생동물
친구의 출소
졸업
외화벌이
공개처형
총알이 아깝다
에필로그
수용소에서 탈주를 시도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용평에서는 이따금씩 수용소 생활을 견디다 못하 나머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도주해보는 경향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모두가 거미줄에 걸린 파리목숨처럼 함정에 빠져 발버둥치다가 죽게 되거나 보위원에게 붙잡혀 처형당하게 된다. 용평 근처의 함정에선 만신창이가 되어 도저히 건져 올릴 수도 없게 된 사람의 시체가 가끔 보인다고 한다. - 본문 184쪽에서
저자 : 강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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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아! 요덕>,<수용소의 노래>,<수용소의 노래 - 하> … 총 8종 (모두보기)
소개 : 1968년 9월 18일 평양시 중구역 경림동에서 태어났으며, 한양대학을 졸업한 후 한국전력공사에 근무했고, 2006년 현재 조선일보 기자와 북한민주화운동분부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대황의 재전>이 있으며, 영어.불어.네덜란드어.이태리어.불가리아어판으로 발간되었다. 특히 영어판 <평양의 어항>은 타임지가 선정한 2002년 '올해의 책 베스트 100'에 선정된 바 있다.
강철환의 한 마디
북한의 현실을 제대로 모르는 한 그 어떤 훌륭한 대북정책도 나올 수 없으며, 북한 인민의 불행이 계속되는 한 결국 남한 국민들도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독재의 잔악성을 따진다면 남한의 역대 독재정권은 김정일의 발바닥에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정권과는 피 흘리며 싸운 사람들이 김정일에 대해서는 무비판으로 일관하고 마치 까마귀가 백로로 변하 듯 김정일에게 잘해주면 스스로 변화할 것으로 착각하는 어리석음은 이제 그만둬야 할 때가 됐다고 봅니다.
더 많은 국민들이 탈북자들의 수기를 읽고 우리 형제들의 아픔을 함께 하는 날이 빨리 오기를 학수고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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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수용소의 실체에 대한 책. 이 책을 읽고 요덕스토리라는 극까지 보기를.
연정 ㅣ 2015-08-05 l 공감(0) ㅣ 댓글(0)
북한의 실상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책. 맘같아선 무료책자로 많은 분들이 봤으면 한다. 한편으로는 인간은 참 생명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팜북 ㅣ 2012-05-01 l 공감(1) ㅣ 댓글(0)
어머니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또한번 느낄수 있었음
우리집 식구는? ㅣ 2008-06-12 l 공감(6) ㅣ 댓글(0)
총 : 5편
소년 시절을 북한 수용소에서 보낸 자의 체험기 외로운 발바닥 ㅣ 2013-10-13 ㅣ 공감(0) ㅣ 댓글 (0)
북한의 인권 수준이 인권이라는 말을 입에 담기가 민망할 정도의 수준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북한의 인권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북한에서는 정권에 잘못 보이면 반동분자로 몰려서 수용소에 수감되고 심하면 공개처형도 당한다는 정도로 추상적인 의미에서 북한의 인권을 인식하고 만다. 나도 그랬다. 그리고 그 점은 이 책을 읽고 나서도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북한에서 아무리 끔찍한 일이 일어나도 잠시 동안 마음이 언짢고 북한사람들을 동정하고 김정은을 욕하겠지만, 그리고서는 곧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더라도, 북한에서 실제 일어나는 일을 조금이라도 더 생동감 있게 느껴보고 싶어서, 조금은 덜 무감각해지고 싶어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책 자체는 그렇게 잘 썼다는 느낌은 못 받았다. 한국에 온 이후의 기록도 있을 줄 알았는데,그런 것도 없다. 그러나 저자가 겪은 일을 생각하면 그런 것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토록 혹독한 시련을 겪은 사람한테 감히 어떤 말을 꺼내지 못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북한 수용소에서의 삶이나 북한 사회 전반의 인권 문제가 아무리 심각하더라도 우리 나라에서의 인권 침해나 온갖 사회 부조리가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북한에 무조건 강경책을 쓰는 것이 북한 주민들의 삶을 개선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결론으로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것도 아니다. 김정일 등의 북한 지도자에 느끼는 저자의 분노와 증오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햇빛 정책을 강하게 비난하는 저자의 서문이 좀 생뚱맞게 느껴지는 것도 비슷한 연장선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책을 읽다 보면 비록 지금은 후퇴하고 있는 면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북한에 비해서는 우리나라의 제도로서의 민주주의의 상황이나 개인적 삶에 있어서 비교할 수 없을만큼 좋다는 당연한 사실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고, 대북 강경책이 일반적으로 국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는 것에도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석기를 비롯한 주사파들이 북한을 추종하는 그런 미친 생각을 처벌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우리사회 민주주의의 순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나면 이석기나 주사파는 도대체 뭐하는 X들인가…하는 생각이 든다.
다음에는 북한에 대하여 조금 더 객관적으로 썼다고 하는 리얼 노스코리아를 읽어봐야겠다.
북한 정치범수용소, 침묵으로 야누스를 키우다 초록빛Refresh ㅣ 2008-12-04 ㅣ 공감(0) ㅣ 댓글 (0)
세상은 독충들로 가득하다. 북한에 뿌려진 침묵의 씨앗들은 독충의 배설물을 먹고 두 얼굴의 야누스로 성장해가고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主體思想)을 토대로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가 실시되고 있는 사회주의 정권의 하늘 아래,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는 국가보위원들의 냉랭한 인권침해와 수용자들의 두려움에 질려 다물어진 입을 한데 뭉뚱그려 침묵 속에 감추고 있다. 수용소는 인권침해 하는 자의 얼굴과 인권침해 당하는 자의 얼굴을 묵묵히 지켜내느라, 40여 년간 입을 열지 못했다. 북한이 장기간 고집해온 수용소의 침묵은 내부와 외부의 소통을 두절시킨 것이다. 그렇기에 수용자들의 피 비린내, 아픔의 호통, 덕지덕지 말라붙은 기생충들을 감싸고 흘러내리는 땀, 등을 분출시키지 못하고 제자리에 맴돌아 침묵 속에서 썩어감으로써 그 퀴퀴한 내음은 탈북자들의 체험 수기를 타고 세상을 떠돌게 한 것이다. 그 내음의 독성으로 세상 사람들을 인상 찡그리게 하고 심지어 눈물까지 자아낸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독충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인권침해를 자아내기에 퀴퀴한 내음을 꼬리 달고 다니는 독충들은 세상 사람들을 진저리 치게 만든다는 걸 『수용소의 노래|평양의 어항|』을 통하여 새삼 느끼게 될 것이다.
1990년대 후반 북한은 수백만의 아사자를 냈고, 아무리 적게 잡아도 백만 명 이상이 굶어죽었다고 한다. 전쟁도 아닌 평화 시기에 이러한 일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며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인민들이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그들은 말하지 못하였는가? 굶어 죽으면서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게 원망조차 하지 않은 그 관용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5천년 역사에서 오늘과 같이 우리나라가 만방에 빛을 뿌린 적이 일찍이 없었다. 수령님이 탄생하시어 일제를 때려눕히시고 미제를 타도하였으며 오늘과 같은 사회주의 강국으로 발전시키신 것이다. 또 어버이 수령님께서는 주체사상을 창시하여 인류가 나아갈 앞길을 환히 밝혀주고 계신다.”
그들의 몸을 혹사시키더라도 인류의 길에 호롱불을 켜 앞장서시는 ‘어버이 수령님’이기에 자신들의 죽음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는 것인가? 인류의 길에는 그늘진 곳이 있을지언정 이미 태양이 내려쬐고 있는데 호롱불을 켜서 앞장서시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 대한 은혜를 깊이 느꼈다는 것인가? 이는 그의 힘이 드리워진 영역을 알게 한다. 북한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건설이라는 체제적 목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수령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이 사활적 의의를 갖는 중요한 문제로 간주되면서 수령의 유일적 영도가 제도화되어 있는 특성을 보인다. 그렇기에 생존 시의 김일성 북한 전 국방위원장이나 그의 지위를 계승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수령으로서 어느 국가기관에 대해서도 책임질 필요가 없는 절대 권력자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선사시대의 대표적인 거석문화인 지석묘는 고인돌사회 그 자체이며, 단군조선, 청동기시대의 시작, 노예순장제사회, 한국 최초의 국가성립 등의 여러 이면을 엿보게 한다. 이러한 선사시대 힘의 증표가 지석묘라면 북한의 힘의 증표는 ‘정치범수용소’가 가장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에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자들은 북한정권에 관용을 베풀 수밖에 없었기에 그들의 침묵만이 남겨진 것이다.
사상과 기술의 주인은 우리라
사대주의 수정주의 짓 부셔 버리자
사상 기술 문화 혁명 더욱 다그쳐
혁명의 주인답게 혁명의 주인답게
살아나가자……
수용자들에게 침묵하는 법을 가르친 북한의 혁명은 얼마나 위대한 것일까? 위는 매일 아침 집합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린 뒤에, 학교로 향하는 학생들의 행군 속에서 기계처럼 울리던 ‘수용소의 노래’의 일부이다. 그들의 혁명은 사대주의와 수정주의를 벗고 사상 기술 문화 혁명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참히 국민들이 죽은 뒤에 남을 사상 기술 문화 혁명의 성과는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 사람들의 생명보다 고귀한 대우를 받는 혁명사상의 추진에 있어 그 정당성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에 북한의 학생감독들이 ‘혁명화의 노래’라 일컫던 ‘수용소의 노래’를 되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혁명의 주인답게 살아나가자”라는 노래 뒤에는 무언의 명령이 숨겨져 있다. 혁명의 주인답게 살아나가기 위해, 혁명을 위해서라면 인간의 생명을 거리낌 없이 퍼부어야 한다는 절대명령 말이다.
가는 길 험난해도 해도
시련의 고비 넘으리
눈구름 휘몰아쳐도
생사를 같이 하리라
천금주고 살 수 없는
동지의 한없는 사랑
다진 맹세 변치 말자
한 별을 우러러 보네
- 동지애의 노래
북한에서는 ‘동지애의 노래’를 가사에서 보이듯 적지에 들어가 포로라든가 부상병이 되느니 동지를 따라 자폭하라는 교양적인 노래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혁명을 위해서 국민들의 인권쯤은 고려의 여지없이 내어줄 수 있다는 절대 힘의 형상화이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 적합한 국민들이란 수용자들과 같이 지배권력 밖의 사람들만이 해당된다. 이러한 인식은 절대적이면서도 본래 태생이 그러하다는 불변의 이념이 되어 박혀있기에 국가보위원과 같은 권력자들은 수용자들에게 가하는 구타와 살인에 대하여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사건 하나하나들은 본보기로 삼아 수용자들에게 선전한다. 그러한 인식이 전제된 상태이기에, 수용소에서 공개처형을 시행할 때에는 생사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나무토막처럼 고꾸라져 나뒹구는 처형자의 머리를 권총을 꺼내 힘껏 내리치기까지 한다. 필자의 ‘토끼사 당번’이나 ‘갈매기 자전거’ 등의 경험은 수용자들이 짐승이나 기구 혹은 사물보다 못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인식화가 바탕이 되어진 수용소에서 수용자들은 국가보위원들의 인권침해를 견디다 못하여 자살하는 경우가 많은데, 자살한 사람의 시신은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그 현장에서 차에 싣고 어디론가 가지고 간 후에, 인부들을 시켜 사람들이 다니는 길을 파게하고 시신을 묻는다. 봉분은 물론 없으며 그곳은 예전처럼 평평한 길로 만든다. 이는 아무도 묘를 찾을 수 없게 하려는 것이며 수용소에서는 이러한 행위를 ‘평토해치운다’고 말한다. 권력자들의 인식 상태를 잘 말해주는 또 다른 하나는 ‘용평’이다. 북한의 ‘독재대상구역’이라 불리는 이곳은, 보위원들의 말을 빌리면 조선인민공화국에서 살아서는 안 될 악질분자인 ‘완전타도대상’들이 가는 곳이라고 한다. 곧, 보위원들이 반동분자, 간첩, 반혁명분자, 위험분자 등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가는 수용소로써, 한 번 들어가게 되면 살아서 나오리란 희망을 걷어 치워야만 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는 ‘종자씨 말리기 작전’일 뿐이다.
북한의 보위원들은 몰래 작업이나 수업에 빠지고 자기 일을 하거나 노는 것을 자유주의라 몰아가고, 제 잇속만 챙기는 행위를 자본주의라 몰아간다. 그들은 자유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이것에 대한 국가 권력의 간섭을 배격하려고 하는 사상적 입장이며, 자본주의가 생산수단을 가진 자본가 및 기업가 계급이 그 이익 추구를 위해 생산 활동을 하도록 보장하는 사회경제체제임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공산주의가 일반적으로 생산수단의 사회적 공유를 토대로 하고 자본주의 사회를 유물 변증법으로 비판하며 계급투쟁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장하는 것임을 보편적인 시각으로 인식하고 있는가? 그들이 말하는 공산주의는 어떤 것일까? 그들의 주관성으로 일구어진 사상이 북한 내에서 정당화시키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간다.
“너희들은 죄인의 자식들임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어버이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하늘처럼 높고 바다처럼 넓고 깊은 은덕으로 학교 교육을 받고, 이제부터는 노력자(勞力者)로 일을 하게 되었다. 앞으로도 학교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일이 없도록 일을 잘하여야 한다.”
이는 학교 교장의 상투적인 연설을 옮긴 것이다. 여기서 그들의 공산주의가 이루어낸 혁명사상 아래의 수용자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북한사회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있어서 가치관과 의식구조에 혁명관 ? 윤리관 ? 인생관 등은 그대로 투영되는데 그 일면을 보이는 연설인 것이다. 북한은 김일성 북한 전 국방위원장 사후 ‘김일성을 영원한 수령으로 높이 받들어 모셔야 한다.’면서 평양에 김일성 영생탑을 세우고 김일성이 태어난 1912년을 원년으로 하는 주체 연호를 제정한 바 있고, 김일성민족 ? 김일성조선 ? 태양민족 ? 태양국이라는 신조어를 쓰면서 김일성 생일을 태양절로 정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그에 대한 믿음을 내면화시키기 위하여 육체적 생명보다 정치적 생명을 중시하도록 요구하고 있는데, 여기서 정치적 생명은 혁명에 대한 정신적 풍모에 따라 결정되며 이 정신적 풍모의 높이는 김일성에 대한 충실성의 정도에 따르는 것으로 규정되고 있다. 결국 북한 주민에게 있어 삶의 행복은 김일성이 바라고 당이 의도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된다. 그렇기에 ‘위대한 어버이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하늘처럼 높고 바다처럼 넓고 깊은 은덕’을 운운하며 이에 보답을 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는 북한 주민들에게 정치적 생명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여, 물질적 만족이나 이기심의 충족보다는 집단에의 충성과 혁명에 가치를 부여하는 주체의 인생관 확립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통치하에서도 여전히 요구하게된 것이다. 이러한 삶 속에의 인식 투여는 수용소의 ‘연대처벌’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연대처벌은 수용자끼리 서로 투쟁하게 함으로써 서로를 감시하게 하거나 작업의 능률을 올리는데 그 목적이 있는 체벌이다. 이것은 하루 종일 혹사를 당하며 있는 힘을 노동에다 쓰는 수용자들의 피로를 더 부추기는 기능을 하며, 집에 돌아가는 수용자들을 기진맥진하게 만들어 걸음조차 제대로 옮길 수 없게 만든다. 곧 개인의 휴식과 건강은 집단에의 충성과 혁명의 가치성에 짓눌려 버리고 만 것이다. 이러한 가치판단에 따른 인권침해는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북한정권을 위하여 주민들이 혹사되어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 뒤에, 북한정권은 누구를 통치하겠다는 것일까?
늘 보던 이가 갑자기 보이지 않게 되어도 침묵을 지키는 수용자들, 그들은 과연 인간인가? 그들은 매일 누더기만 입는다. 그들의 옷이란, 사람의 체격에 맞추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들에게 맞추어져야만 한다고 위세를 부리는 것들이다. 그들의 음식이란, 사람의 기호와 영양에 맞추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들의 여건에 맞추라고 위세를 부리는 것들이다. 그들은 식량으로 하루 350g의 옥수수쌀을 배급받는데 이를 ‘옥쌀’이라 한다. 이것은 잘 익지도 않을뿐더러 소화도 힘들어서 수용소에 들어 온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은 설사병을 통례적으로 겪는다. 이러한 불충분한 음식으로 인하여 영양부족에서 오는 일종의 피부병인 ‘펠라그라’는 제일 잘 걸리는 병으로 활약하기도 한다. 또한 그들의 영양부족은 ‘게걸병’을 부르기도 한다. 이는 통상적인 게걸스러움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과 먹을 수 있는 것은 뭐든지 닥치는 대로 입에다 처넣는 병적인 증상으로 개구리 ? 뱀 ? 나무열매 ? 쥐 등 먹는 것에의 종류를 가리지 않게 만든다. 이는 소름끼치는 식문화가 아닌, 살아남기 위한 죽음과의 처절한 싸움일 뿐이다. 그렇기에, 필자는 친구들과 함께 쥐굴을 습격하여 살찐 쥐 몇 마리와 쥐들이 모아 놓은 강냉이까지 덤으로 얻어먹어 포식했다는 기쁨을 고백하게된 것이다. 그의 기억 속의 유철호라는 인물은 쥐를 먹기 위해 집안에 쥐를 키우며 혹시나 쥐들이 달아날까 상전 모시듯 끔찍한 배려를 베풀기도 한다. 그의 별명은 쥐토벌대장, 쥐참모 등이다. 필자의 기억에서 유철호의 집안에서 친구들과 함께 쥐를 사냥한 경험은, 인간이 인류의 기원에서 최근의 선상에 있음에, 원시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야생동물처럼 사는 생활의 일면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수용소의 노래’에서 사상 기술 문화 혁명을 부르짖던 북한정권의 그 혁명에 따르는 혜택은 어디로 간 것일까? 혁명은 앞에 가 섰는데, 북한 주민의 인권은 무거워 떨쳐내고 혁명과 북한정권만이 앞으로 나아간 것인가? 하물며 그들이 부르짖는 사상 기술 문화 혁명에의 성과마저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다. 북조선이 자랑하는 김일성이 개발하였다는 ‘주체농법’은 수용소에서 하는 그 어느 노역보다도 몇 배 힘이 든 일로 여겨지고 있다. 봄에 하는 ‘농촌 지원 전투’에는 강냉이 영양단지 만들기, 강냉이 이식전투, 모내기 등이 있으며 이러한 ‘농촌 지원 전투’는 온종일 허리도 펴지 못하고 한 자리에서 앉았다 일어섰다 하는 것을 수백 번 반복하고 나면 수용자들의 눈앞은 캄캄해지고 하늘이 노래질 정도로 만든다. 인권이 침해되는 공간에서 그들의 혁명에의 행진이 거북이걸음으로 나갈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필자 강철환의 가족은 1963년 북한의 허위선전에 속아 북송된 재일 북송교포 가족으로서 조총련 교토지부 상공회 회장을 지냈던 할아버지가 민족반역죄로 국가안정보위부에 끌려간 후 온 가족이 1977년 8월에 함경남도 요덕군에 위치한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10년간의 수감생활 끝에 출소하게 된다. 이에 북한 주민들은 “15호 관리소에서 살아나온 영웅들이군.”, “그 지긋지긋한 관리소 생활을 잘도 견뎠군.”, 등의 별의별 말을 하는데, 그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그의 가족은 추운 것도 모르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긴장하며 잔뜩 겁을 먹고 서있었다고 한다. 왠지 자꾸만 주눅이 들고 눈이 부셔서 고개를 들고 서있을 수가 없었다고 필자는 말한다. 그들의 출소하는 모습만 떠올려도 그들의 인권존중의 정도를 가늠해볼 수가 있는 것이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간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은 것일까? 이들을 끌고 가는 보위원들은 구체적인 이유를 말할 수 있었을까? 국가보위원들이 필자의 집에 들어서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필자의 할머니의 ‘내 탓’은 왜 나온 것이며, 언제까지 할머니의 입에 오르내릴 것인가? 이 속에 핵문제보다 더 중요한 북한의 인권문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인간학살 사태를 토로하고 북한의 현실도 인식하지 못한 채 추진되었던 햇볕정책이며 대북정책의 위상을 다시 한 번 밟고 가게 하는 외침이 있다. 히틀러 시대에서나 볼 수 있는 수용소가 북한 곳곳에 만들어져 있어 인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저항 정신을 말살시켜 ‘침묵’을 고집하는 현실을 보라는 외침 말이다.
아무리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한계가 있게 마련이었다. 더구나 한 번 발생한 발진티푸스는 그 전염성이 강했다. 매일같이 한 두 아이가 고열과 함께 쓰러졌다. 우리는 이미 슬픈 감정도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지 않았다. 매일같이 눈만 뜨면 얼굴을 대하고 같이 일하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죽어 보이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소리 없는 충격을 던져주었다.
근본적인 문제를 외면한 북한을 단적으로 보여준 말이다. 이는 그들의 인권문제로 확대해서 보는 것에 문제되지 않는다. 또한 한국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난 17일 EU와 미국, 일본 등이 공동 제출한 대북인권결의안이 우리나라가 찬성한 가운데 유엔총회 제3위원회에서 통과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있기 이전, 한국은 지난 2003년부터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3차례 연속 채택된 북한 인권규탄결의안 표결에 기권 혹은 불참했고, 지난해 총회 차원에서 처음으로 채택된 대북인권결의안 표결에서도 기권한 바 있다. 필자는 『수용소의 노래』에서 자신의 체험을 고백함에 앞서, “더 많은 국민들이 탈북자들의 수기를 읽고 우리 형제들의 아픔을 함께 하는 날이 빨리 오기를 학수고대합니다.”라고 말하였다. 필자는 이 한 마디에 그동안 북한 인권문제에 무심하던 ‘반쪽 민족’을 향한 질책을 가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의 질책에 동요된 것일까. 며칠 전의 대북인권결의는 반기문 전 외교통상장관이 유엔 차기사무총장으로 확정된 후 한국이 처음으로 찬성표를 던진 가운데 채택되어 더 주목되었으며, 북한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진 고문과 공개처형, 강제노력, 탈북자 강제송환과 처벌, 여성의 인신매매, 심각한 영양실조 등 광범위한 인권침해 사례에 대하여 강한 우려를 표하면서 이에 대한 실태조사와 북한의 인권개선 노력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북한이 그간 유엔 결의에 강하게 반발해온 데다 지난 달 북한의 핵실험 강행 이후 채택된 유엔 안보리 결의 1718호와는 달리 구속력을 갖지 못하기에 실질적 효과를 거두기는 힘들 것이다. 다만 유엔 총회가 북한 인권에 대하여 지속적인 조취를 취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고 전 회원국의 의사가 반영됐다는 측면에서 북한 인권상황에 경종을 울리고 압박을 가하는 정치적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표면상으로 노력을 보였다는 위안으로 북한 인권문제에 관심을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평양선 요즘도 귀국자 집들이 자꾸 어디론가 없어진다고 하더군요.”
그 즈음 수용소에서는 거의 매일 새로운 사람들이 왔는데, 대부분 귀국자와 외국 유학생들이었다.
“이러다간 북송 귀국자는 다 몰살을 당하겠구나.”
“2차 대전 때 히틀러가 유태인 대학살을 시킨 것과 같은 거지요.”
기존의 우리의 무관심한 태도로 돌아간다면 계속되어 늘어나는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수용자들을 더 학대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곧,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는 표리부동한 두 얼굴의 야누스가 40여 년간 묵혀온 인권침해의 곰팡이로 더욱 퀴퀴하고 낡아져가 인간이 살 수 없는 공간이 될 것이다. ‘관리소’라는 명분 아래서 ‘인권침해’를 냉랭하게 가하는 paradox를 범하게 될 것이다.
E. H. Carr는 역사를 “현재와 과거 사이의 대화”라고 하였다. 곧 역사는 현재와 과거를 잇고, 나아가 미래와 현재를 이어주는 징검다리와 같은 것이다. 이는 과거의 역사교훈을 통해 현재 삶의 안목을 길러 계획하고, 현재의 삶을 토대로 미래의 윤택한 삶을 설계함을 말한다. 이에 우리는 동독과 서독의 통일을 통하여 끊임없는 교류와 양측의 균등한 경제 성장을 위하여 지원의 필요성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의 햇볕정책은 통일의 길에 바람직하게 다가섰는가의 의문을 제기한다. 이는 마치 9?11 전대미문의 사건과 같아서 이라크 파병을 꾀함에 세계에 보이지 않는 벽을 세워 세계를 분열시키려는 파멸의 발상의 측면에 서있다고 하겠다. 북한에 지원되는 자원은 북한과 남한의 균등한 경제성장을 꾀하는 길이 아니라,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수용자들과 국가보위원들의 양측의 삶의 질적인 면에의 극대화를 부추긴 정책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북한 수용자들의 인권침해를 부추겼을 여지가 없지 않다고 본다. 그렇기에 우리는 북한과의 관계 면에서 북한의 현실을 바로 보아, 좀 더 신중한 대응을 해야만 한다.
멕시코의 북미자유무역협정 협상주역 중 한 사람인 루이스 데 라 카예(Luis de la calle)는 모든 나라가 “자기성찰을 하는 능력”이 필요하며, 이는 “어떠한 나라도 자신이 어디에 있고 한계가 무엇인지에 관해 엑스레이 검사를 받지 않고는 발전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발전이라는 이룸의 차량에서 떨어진 국가는 술 취한 사람과 같아서, 다시 그 차를 얻어 타기 위해서는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볼 줄 알아야 하며, 발전은 자발성에 바탕을 둔 과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걸음을 내딛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결정이 필요하며, 이는 자기성찰을 통해서만 시작할 수 있다. 그렇다. 남한 측의 우호적인 관계만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독재적인 정치에서 인권을 생각하는 여지를 마련하는 길은 아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자신은 물론, 북한이 걸어온 길에의 자기성찰에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러한 시간을 갖은 후에, 그들은 수십 년의 때가 더덕더덕 붙어가 마침내 썩어가기에 이르는 정치범수용소에 대한 현실자각이 필요하며 인권 존중의 필요성을 인식할 시기를 맞았다. 이제 북한정권은 수용소가 침묵으로써 키워왔던 야누스의 얼굴을 벗을 때가 되었다. 수용소가 묵묵히 지키어 오던 국가보위원들의 인권침해와, 그로 인한 두려움에 수백만의 아사자가 나옴에도 침묵할 수밖에 없던 수용자들과 북한 주민들의 삼켜버리던 외침을 분출해낼 때가 되었다. 그렇게 수용소가 북한정권을 바탕으로 침묵으로써 키워온 야누스의 얼굴을 벗어, 인권침해에의 눅눅한 때를 벗을 때가 된 것이다. 이는 타국의 압박보다는 자국의 정권세력 자체에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하겠다.
잠이 들지도 않았는데 나는 자꾸만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소리도 막 질러보고 싶었다. 출소했다는 확실한 사실에 가슴은 마구 뛰었다. 참으로 희한하게도 그 순간에 나는 어머니 품에서 자던 어린시절의 환상을 보았다.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나는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필자 강철환의 자신의 북한 정치범수용소 경험에 대한 마지막 고백 부분이다. 인권을 존중받는 삶에의 기쁨이 여실히 느껴진다. 이 기쁨을 북한정권이 인식하고, 이를 토대로 북한 자국에의 번영을 꾀하는 원동력이 됨을 하루빨리 깨닫고 수용소에 피 비린내가 가시는 상큼한 바람이 불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퀴퀴한 야누스의 얼굴은 쓰라린 고통을 담은 소중한 역사적 교훈으로 삼고 새롭게 일어나, 북한과 남한에의 우호적인 관계 또한 기대해 본다.
수용소의 노래 yousarah ㅣ 2007-03-27 ㅣ 공감(1) ㅣ 댓글 (0)
북한의 현실을 제대로 모르는 한 그 어떤 훌륭한 대북정책도 나올 수 없으며, 북한 인민의 불행이 계속되는 한 결국 남한 국민들도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독재의 잔악성을 따진다면 남한의 역대 독재정권은 김정일의 발바닥에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정권과는 피 흘리며 싸운 사람들이 김정일에 대해서는 무비판으로 일관하고 마치 까마귀가 백로로 변하 듯 김정일에게 잘해주면 스스로 변화할 것으로 착각하는 어리석음은 이제 그만둬야 할 때가 됐다고 봅니다.
더 많은 국민들이 탈북자들의 수기를 읽고 우리 형제들의 아픔을 함께 하는 날이 빨리 오기를 학수고대합니다.
-작가의 말 중에서 -
책을 읽는 내내 든 생각은 정말로 이런일들이 가능 할까였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와 독재에 시달리고 있는 것일까 내가 알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시름하고 있는 것일까..
참 마음이 아팠다.. 아직은 어린 고사리 손들때문에 가슴이 아팠고
이제는 하얗게 변해 버린 머리를 가지고도 끈임없이 고통가운데 있어야 하는
어르신들 때문에 또 한번 아팠고 부모와 자식을 사막으로 내놓고 자기자신 또한 그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젊은 아버지들 때문에 또 다시 아팠다..
통일이 멀게 느껴지지만 통일이 다가오기전에 저 멀고도 가까운 ..
가깝지만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우리의 이웃에게 평안이 전해졌으면 한다..
북한 정치범수용소 체험수기 dreams ㅣ 2006-02-08 ㅣ 공감(1) ㅣ 댓글 (0)
<2006년 제 16권째 책>
어릴적 우리에게는 '아우지 탄광'이니 모니..하면서 북한에는 김일성, 김정일에게 미움당한, 숙청당한
사람들을 격리수용하는 곳이 있다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은 실제 그곳에서 원인도 모른채 (단지 할아버지가 국가에 반역의 죄를 지었다는 얘기만 듣고)
저자가 가족과 함께 '요덕 수용소'라는 지옥과 같은 곳에 끌려와서 10년여의 기간동안 겪은 것을
적어놓은 것이다.
일단은 그런 지옥같은 곳에서 견디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인내와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리고, 어서 빨리 그러한 곳이 지구상에서 없어졌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 뿐이다.
남과 북,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그 받아들인 체제의 다름이 이런 극단의 삶을 초래하는 가?
문득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있는 것이 무척 다행스럽다.
하지만, 저자 강철한이 (지금은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한다고 함) 미국의 부시와 만나서 찍은 사진을
자랑인냥, 그리고 부시가 북한의 인권에 가슴아파 한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 저자의 글을
서두에 보면서... 내내 가슴 한 켠이 불편하다.
미국, 부시의 경제제제, 봉쇄로 죽어간 (그리고 지금도 죽어가는) 세계의 인구가 얼마나 많은 가?
......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경험을 한 저자가 남겨진 이들을 위해, 좀 더 용기를 내어 부지런히
많은 활동을 해주기를 바랄뿐이다. 물론 우리들도 기꺼이 후원자가 되어야 할 것이고 !
북한 아우슈비츠 이방인의눈 ㅣ 2005-09-05 ㅣ 공감(0) ㅣ 댓글 (0)
북한에 있는 아우슈비츠를 그린 책이다.
그의 기록은 생지옥 그 자체이다. 그 책을 본다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다.
인간의 야만이 그대로 기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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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이런 분야 - 북한, 통일, 인간성 등의 문제에 관심이 있지 않은 독자에게 추천을 하지 않다.
이 책을 읽고 너무나 아득하고 몽롱해지는 삶의 비극을 느끼게 될것이다.
인간의 마지막 모습을 본듯한 그런 참혹한 느낌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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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 우연히 저자를 만났을때는 공포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하나의 탈북자의 느낌이었다.
그에게 그런 많은 고통의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상상조차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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