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04

위안부 문제는 한국의 이성잃은 민족주의를 부추겨 - 대만인이 본 이웃나라의 큰 ‘잘못’

[기고] 주리시(朱立熙) 지한문화협회 집행장
일 동양경제 온라인 2.8 [2017]

http://news.naver.com/main/read.nhn?m_view=1&includeAllCount=false&mode=LSD&mid=sec&sid1=104&oid=025&aid=0002684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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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문제는 한국의 이성잃은 민족주의를 부추겨
- 대만인이 본 이웃나라의 큰 ‘잘못’


수 년 전에 대만 주재 한국 외교관이 내게 연락을 해 왔다. ‘대만인 위안부와 만나고 싶은데 알아봐 줄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를 위해 관련 단체에 연락해 대만인 위안부의 실정을 알아본 뒤 그에게 이렇게 회신했다. “대만과 한국의 위안부 상황은 다르다. 그러니 대만인 위안부에게 다시 상처를 주지 말고, 또 불필요한 반한ㆍ반일감정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되도록이면 이런 민감한 주제는 건드리지 않는 게 좋겠다”고. 그는 내 제안을 받아들여 위안부 방문을 단념했다.

그가 왜 위안부 방문을 추진했는지 짐작이 간다. 한국 정부의 정책에 따라 외교관인 그는 실적을 올리려 한 것이다. 다만 대만의 위안부 문제는 한국의 경우와 크게 다르다. 한국은 이 문제를 정치적 도구화 해서 반일 민심을 조장해 국가정책의 뒷심으로 쓰려고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대만에서는 위안부 문제는 고사하고, 반일 여론 조작도 전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한국의 위안부 문제와는 거리를 둬 왔다. 이 문제는 매우 복잡하고 한국 친구들과 이성적인 토론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대만이 일본과 한국 사이의 제3자의 입장에서 논지를 전개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 역사교과서로 불을 지핀 일본 비판

사실 개인적인 경험으로 말하면 나는 일본과 한국의 오랜 원한의 직접적인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나는 1982년 연세대 사학과 대학원에서 한국근대사를 전공하고 있었다. 애초에 제3자로서, 그리고 같은 일본의 식민지였던 대만 국민으로서의 입장과 공감을 가지고 일ㆍ한의 원한을 분석해보려고 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해,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 언론은 연일, 맹렬한 일본 비판으로 날을 샜다. 한국의 신문은 모두 많은 지면을 할애해 이 문제에 관한 여러가지 주제를 설정해서 빠짐없이 보도했다.

당시 맹렬한 반일민족주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나는 객관적인 제3자로서 양국의 원한을 분석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연구를 중단하고 대학원을 중퇴한 뒤 대만으로 돌아왔다. 그후 2003년 대만의 출판사에서 『한국사』를 집필해 출간했다. 이것으로 겨우 역사학에서 도망갔다는 한은 풀게 됐지만...

이 책은 대만의 한류 붐 덕분에 잘 팔려 지금까지 4쇄가 나왔다. 이 책의 2쇄를 냈을 때, 대만에서도 교편을 잡은 적이 있는 하마시마 아츠토시(濱島敦俊) 오사카대 명예교수가 책에서 취급한 일본의 조선에서의 토지조사사업 부분에 틀린 서술이 있다는 지적을 했다. 그래서 경제사 전문인 서울대 이영훈 교수가 쓴 『대한민국 이야기 -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이라는 책을 꺼내 들었다.

거기서 1955년에 한국인 학자로 도쿄대에 있던 이재무 씨가 논문에서 “일본이 조선에서 조선총독부의 조사사업을 이용해 전국 농지의 40%를 강제 점거했다”고 조작한 것을 알아냈다. 서울대 이영훈 교수는 이에 대해 “역사학자가 지어낸 얘기인데 그후 반복 인용돼 상식처럼 고착됐다”고 비판했다.

이른바 구 일본군 종군위안부의 실정을 연구한 세종대 박유하 교수의 저서 『제국의 위안부』를 읽어봐도 한국 역사에서 이같은 맥락을 발견할 수 있다. ‘정신대 = 위안부 = 소녀’. 과거 편향된 저술이 거듭 인용돼 오히려 상식으로 고착화된다. 한국인은 전후(戰後),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역사를 조작해 왔는데 오히려 일본이 역사를 조작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대만 속담에 ‘거북이가 자라를 꼬리가 없다고 비웃고, 자라는 거북이를 목이 짧다고 비웃는다’는 게 있다. 일본어로 하면 ‘오십보 백보’다.

- 한국인이 배상을 청구해야할 대상은 누굴까

위안부 문제는 종전(終戰)으로부터 50년이 지난 1990년 중반이 돼서야 한국에서 크게 취급되기 시작해 양국 외교에 족쇄가 돼 왔다. 그 중 하나의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은 1965년 박정희 정권이 일본과 ‘일ㆍ한 기본조약’을 조인(調印)해 국교를 정상화했을 때 이미 민간 개인의 청구권을 포괄적으로 해결한 것을 한국 측이 외면한 것이다.

한국이 이런 불합리한 요구, 특히 외교협정의 법률적 효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대만인이라는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인의 생각과 행동이 변덕스럽다고 느끼고, 국제적으로도 ‘한국인은 신뢰할 수 없다’고 보기 십상인 원인이 된다.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위안부의 배상청구에 있어 한국 사람들은 분명히 청구대상을 잘못 찾고 있다. 한국인들은 박근혜 정권(대통령 본인은 직무정지 중)이 그녀의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범한 잘못을 청산하고 한국 정부가 스스로 피해자인 위안부들에게 배상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 하지만 한국의 일부 단체는 그 대신 일본에 망신을 주려고 국내외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것은 지나치다.

요 근래 나는 대만 각지에서 ‘한국을 알자’는 주제의 순회강연을 다니고 있는데 종종 청중으로부터 ‘한국인은 신뢰할 수 없다’는 점에 관한 질문을 받는다. 나는 이에 대해 언제나 하나의 예를 들어 설명하곤 한다. 세계 각국의 은행은 다들 대만에 지점을 개설하고 있는데, 한국의 은행들만 거의 개설하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신용’은 은행의 가장 중요한 목숨같은 것이어서 신용이 없는 은행에 돈을 맡길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대만의 3대 상업은행, 창화(彰化)ㆍ화난(華南)ㆍ디이(第一) 은행은 모두 100년의 역사를 가진 노포(老鋪)다. 노포의 브랜드는 신용을 보증한다. 그런데 한국의 은행들은 합병과 개명을 반복해, 내가 한국에 유학하던 1980년대의 많은 은행들은 지금은 이름도 없어졌다. 그 대신 내 귀에 들리는 것은 이전엔 들어보지 못한 ‘국민’‘우리’‘하나’ 등의 이름들이다.

바꾸는 것도 쉽고, 바꾸는 속도도 엄청 빠르다. 이게 외국인이 한국인을 신뢰하기 힘든 주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나는 2009년 한국의 한 은행이 대만에 파견한 선발대 직원 2명을 앞에 두고 ‘강의’를 했다. ‘대만인의 한국관’을 분석해 보여줬다. 그들은 먼저 대만에 지점을 개설한 뒤 중국 대륙의 거대시장을 개척하기를 바랬다. 하지만 내 분석을 들은 뒤 그들은 곧 대만을 떠났다.

이상은 내가 직접 경험한 사례들이다. 다시 일본과 한국의 원한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위안부 문제의 진짜 발단은 일본제국에 의한 조선의 식민지 통치에 있다. 만약 다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면 ‘일ㆍ한 병합(1910년)’은 양국이 정식으로 조인한 조약에 따른 것이지만 강제적으로 조인된 불평등조약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로부터 반세기 후 일ㆍ한 기본조약에 대해서는 스스로 청구권을 포기한 걸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 일ㆍ한 기본조약으로 청구권 포기

이 문제 전체에 대한 해답은 박정희 정권에 있다. 그는 1961년 일개 육군 소장 자격으로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지만 돈이 없으면 정치를 할 수 없는 법. 급히 돈이 필요한 상황에서 시급히 일본과 국교를 수립하고 일본 측에서 배상금을 받기를 원했다.

또 북한이라는 존재를 고려, 개인의 청구권을 포기한 것이다. 이것은 이해가능한 이유이고 더구나 한국 사람들 자신의 문제다. 그것을 50년이 지나서 ‘적국(敵國)’을 만들려고, 그리고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위안부 문제를 계속 거론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또 하나, 개인적인 경험을 말하고자 한다. 내가 1980년대 초 한국에 유학했을 때는 전두환 씨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얼마 안된 시점이었다. 그도 박정희 씨처럼 급히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또다시 일본을 ‘현금인출기(ATM)’로 이용했다. 전 대통령은 노신영 국무총리를 일본에 파견해 차관(借款) 교섭을 벌였다. 처음에 제시한 금액은 100억 달러. 당시 환율로 1조 엔이었는데 이것은 일본을 놀라게 했다. 당시 차관 요청의 이유는 ‘한국은 일본에 대한 공산세력의 위협에 대항하는 최전선에 서 있다. 그러니 일본이 방위비용을 분담하는 건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그 후 40억 달러로 이 차관이 정해졌지만 그 중 얼마가 전 씨의 개인 호주머니로 들어갔는지는 내가 계속 호기심을 갖고 있는 미스터리다. 이처럼 국교수립 당시 자기들이 스스로 포기한 청구권을 50년 후가 돼서 다시 격렬하게 요구하는 것은 한국인을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증명하는 게 아닐까.

신용이라는 문제 뿐 아니라 나는 45년에 걸쳐 한국 문제와 그 민족성을 연구해 오면서 개인적인 결론을 내린 게 있다. 한국 사람은 ‘한(恨)’이 뿌리 깊어, ‘적(敵)이 없으면 못 산다’는 것이다. 전자(前者)는 불리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주변 열강에 시달리며 비극의 역사가 끊임없이 계속되는 바람에 형성됐다는 것. 후자는 적을 만들어 한을 해소할 필요가 있어서 국가와 국민 모두를 끌어올리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때때로 비이성적이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한국인이 진상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니라 미디어와 일부 사회운동단체에 의한 선동 하에 반일 맹종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한국 사람들의 이런 격렬한 애국주의에 대해 나는 유치함을 느낀다.

과거 ‘일ㆍ한ㆍ중 역사 공동연구위원회’의 일본측 학자팀이 타이베이를 방문해 대만의 역사학자들과 좌담회를 연 적이 있다. 나는 제3자의 입장에서, 한국에서 정부와 민간단체가 조장하는 반일감정은 근본적으로 국내정치적인 의도가 있어, 반일의 이름을 빌려 민족주의로 민심 단결을 고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발언에 대해 일본 학자들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 시각의 독특함과 기쁨을 동시에 느끼는 것 같았다.

- ‘위안부’라면 한ㆍ중이 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전후 50년, 60년, 70년이 지나도 한국인은 왜 ‘반일’을 계속하며 위안부 문제를 항의하는 건지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종전 70주년, 또 일ㆍ한 국교회복 50주년을 맞은 2015년 이후, 양국 관계는 위안부 문제로 오히려 최악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나는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서 시진핑 주석과 함께 열병하는 모습을 보고 마침내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원래 위안부 문제는 중국과 공유하는 게 가능한 주제이고 나아가 ‘중국과 손잡고 반일’을 하기 위한 절호의 소재였다.

한국은 스스로가 미ㆍ일 안보를 주축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진영에 서 있는 것을 망각하고 ‘사대주의(대중국 종속정책)’로 시장을 획득하기 위해 무조건 중국과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 후 한국 정부가 10억 엔에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약속을 받아들이고 미국의 사드(THAAD) 배치를 용인하자 중국은 열화와 같이 한국에 분노했고, 사대주의로 획득한 중국과의 우호관계는 완전히 없던 일이 됐다. 동시에 한국 국내에서 위안부 문제로 격화된 애국주의는 이런 용두사미의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럼에도 위안부 문제는 한국 사람들을 더 뜨겁게 만들고 있다. 이것은 서울의 일본 대사관 앞에 2011년 12월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과 절대적인 관계가 있다. 2016년 말에는 부산의 일본 총영사관 앞에도 설치돼 일본은 대사와 총영사를 일시 귀국시켜 항의 중이다.

한국의 이런 방식은 대만인이 쓰는 ‘태관항의(관을 메고 항의)’와 같다. 예를 들어 의료사고로 사망한 환자의 유족이 관을 메고 병원에 가서 항의한다. 도를 넘은 항의에 병원 측은 합리적인 이유가 있더라도 배상을 하고 만다. 사고가 왜 일어났는지, 재발 방지는 어떻게 하면 좋은지 등의 앞으로 이어질 대책은 묻힌 채, 피해자 측이 배상을 받고 끝나버린다는 의미다.

다만, 대만인이 관을 메는 건 보통 한 번 뿐이다. 만약 장기간 관을 다른 사람 집앞에 놔두면 그런 과격한 항의방식은 이웃의 불만을 불러온다. 위안부상(像)이 한국 전체의 민족주의를 불러 일으킨 것은 어떤 외국인이든 제3자의 입장에서 ‘너무하다’고 느낄 것이다.

- 인터넷 시대, 젊은 세대의 등장

2016년 10월 ‘촛불시위’라고 불리는 반(反)박근혜 정권 시위를 계기로 한국의 젊은 세대가 일어섰다. 이것은 1987년 6월 한국 민주화로 이어진 민주항쟁의 상황과 닮았다. 그때와 다른 것은 당시의 시위 방식이 지금은 보다 문명적이고 평화적이 됐다는 것이다.

1990년대 말부터 시작된, 이전의 민주화 시대와 다른, 21세기 인터넷 시대의 민주화 시대에는 엄청난 양의 정보가 급속도로 전파된다. 어떤 거짓말도 숨길 수 없다. 국가가 만들어 낸 거짓 정보도 곧 간파될 것이다.

인터넷 민주화 시대의 신(新)한국인에게 보다 필요한 것은 진실 탐구를 통해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평화적으로 이성적인 ‘민족주의’를 재건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주변 국가와의 충돌과 대립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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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리시(朱立熙)
1954년생. 대만 국립정치대학 한국어학과 졸업. 미국 스탠퍼드대 동아시아연구원 석사. 1985~88년 ‘연합보’ 서울 특파원, 타이베이 타임스 편집장, CTS-TV 부사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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