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17

치하포 사건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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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하포 사건

최근 수정 시각: 2017-11-23 09: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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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경과 사건 내용2. 논란
2.1. 쓰치다 조스케(또는 쓰치다 조료, 土田譲亮)의 신분과 살인의 동기
2.1.1. 백범일지2.1.2. 조서2.2. 사건과 그 후
2.2.1. 백범일지2.2.2. 조서2.3. 그 외의 의문, 오류 등3. 여러 가지를 한데 모아 합한 검토4. 사건 이후
4.1. 킬구 드립5. 사회·문화에서6. 학계에서7. 그외


1. 배경과 사건 내용[편집]


1896년 황해도 안악에 있는 해변 지역인 치하포에 있는 주막에서 당시 20세 청년이었던 백범 김구(당시 성명: 김창수)가 일본 민간인 쓰치다 조스케(또는 쓰치다 조료, 土田譲亮)를 죽인 사건.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이듬해인 1896년 고종아관파천을 하면서 조선 왕조가 격랑의 시기를 보내던 시절에 발생하였다.

2. 논란[편집]


치하포 사건의 특징은 《백범일지》와 후에 김구를 체포하여 신문하고 기록한 대한제국의 조서와 신문 보도 등이 상당한 내용의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다만 쓰치다 조스케(또는 쓰치다 조료, 土田譲亮)가 상인이라는 건 학계에서 오래전부터 나왔던 이야기다. 1997년부터 김구 전문가인 도진순이 쓰치다 조스케(또는 쓰치다 조료, 土田譲亮)가 상인이란 건 보고서로 작성했다. [1]

2.1. 쓰치다 조스케(또는 쓰치다 조료, 土田譲亮)의 신분과 살인의 동기[편집]

2.1.1. 백범일지[편집]


'단발을 하고 한복을 입은 한명이 같이 앉은 나그네와 인사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성은 정이고 사는 곳은 장연이라 했다. 말투가 장연 말씨가 아닌 경성 말씨였는데도 시골 노인들은 그를 조선 사람으로 알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분명 왜놈이었다.'

'만약에 저자가 보통 장사치라면 조선인 행세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미우라 고로(명성황후 시해범)가 아닐까? 공범일 수도 있다. 공범이 아니라도 칼을 차고 다니는 왜놈은 우리 민족의 독버섯이다.'[2]

'나는 왜놈의 소지품을 뒤지게 하였다. 소지품을 조사해 보니 왜놈의 이름은 쓰치다 조로이고 직위는 육군 중위이고 엽전이 800냥 있었다'

2.1.2. 조서[편집]


'이튿날 밝은 새벽에 조반을 마치고 길을 떠나려 하였는데, 점막(店幕)의 법도가 나그네에게 밥상을 줄 때 노소(老少)를 분별하여 그 차례를 마땅히 지켜야 하는데도 손님 중에 단발을 하고 칼을 찬 수상한 사람이 밥상을 먼저 요구하자 여점원이 그 사람에게 먼저 밥상을 주므로 마음으로 심히 분개하였다. 그래서 그 사람의 근본을 알아본즉 일본인이므로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讎)라고 생각이 되자 가슴의 피가 뛰었다. 그러한 때 그 일본인이 한눈을 팔고 있는 틈을 타서 발길로 차 거꾸러뜨리고 손으로 때려 죽여서 얼음이 언 강에 버렸다.'

백범일지 외에 쓰치다 조스케(또는 쓰치다 조료, 土田譲亮)가 육군 중위라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 사람은 일본 측 기록에 약장수로 등록이 되어 있었다. 또 사건 10년 후 쓰치다 조스케(또는 쓰치다 조료, 土田譲亮)의 유족은 대한제국에게서 배상받았다.

2.2. 사건과 그 후[편집]

2.2.1. 백범일지[편집]


'내 발에 밟혔던 왜놈이 새벽 달빛에 검광을 번쩍이면서 달려들었다. 나는 면상에 떨어지는 칼을 잽싸게 피하면서 발길로 왜놈의 옆구리를 걷어차서 거꾸러뜨리고는 칼을 잡은 손목을 힘껏 밟았다. 칼이 저만치 떨어져나갔다. 나는 그 칼을 집어들고, 왜놈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마구 난도질을 쳤다. 피가 샘처럼 용솟음쳐 마당에 흘렀다. 나는 손으로 피를 움켜 마시고, 얼굴에다 처발랐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들고 '아까 이 왜놈을 위해 달려들려던 놈이 누구냐'라고 엄포를 놓자 결국 여러 사람들이 나를 장군님이라고 부르며 용서를 빌었다. 800냥은 사람들에게 나눠 주라고 했다.'

2.2.2. 조서[편집]


3번의 공판에서 김구의 진술에 차이점이 있다. 1차 신문에서는 발로 차고 돌로 때렸다고 2차에서는 처음은 돌로 때리고 다시 나무로 때리자 그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 도망하기에 강변까지 쫓아 따라가서 몽둥이로 거듭 구타하여 죽였다. 3차에서는 자신이 돌을 던져 쓰러뜨린 후 모든 투숙객이 분격하여 함께 찔러죽였다고 하였다.

'금액량은 잘 모르게, 동행인의 노자로 얼만가를 주고 당나귀 한 마리를 엽전 일흔다섯 냥에 사서 타고 왔으므로 대략 전액은 엽전 백냥가량으로 안다.'(김구)
'그대가 이 사건을 일으킨 것은 재물을 탐하여 한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왜 재물을 탈취하였는가?'(신문)
'동행한 세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갈 노자를 달라고 애걸하므로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돈을 줘서 보내고 난 뒤 나머지 돈 팔백 냥은 점주에게 맡겼다.'(김구)
'그래서 몹시 놀라 달려가 본즉 김창수가 일본인을 붙들고 마구 때리고 있기에 만류하려 하였으나 벌써 일본인을 죽여서 끌어다 강변에 버리고 환도 한 자루를 탈취하여서는 자기가 차고 당나귀 한 마리를 사서 타고 떠났습니다'(주막 주인)

즉, 천 냥 가운데 이백 냥 정도를 쓰고 나머지를 점주에게 맡기고 떠났는데 일지에는 없는 부분이다.

2.3. 그 외의 의문, 오류 등[편집]



《백범일지》에서 이 일화는 젊은 날의 이야기 치고는 상당한 분량을 차지한다.


김구는 국모의 복수를 일관되게 주장한다.


체포 후 수감 시 동료 수감자에 대한 기억은 상당히 정확하다.


주막 주인이 증언한 바로는, 당시 한밤중이어서 캄캄했는데도 일지에는 장황한 묘사가 가득하다.


통역을 데리고 다녔다는 쓰치다 조스케(또는 쓰치다 조료, 土田譲亮)가 일지에서는 경성 어투를 쓰면서 조선말을 유창하게 한다.


주막 주인과 쓰치다 조스케(또는 쓰치다 조료, 土田譲亮)가 대화한 적도 없는 김구가 쓰치다 조스케(또는 쓰치다 조료, 土田譲亮)를 무참히 죽인 후 주막 주인에게 '너는 어떻게 저 자가 왜인인 걸 알았느냐?'라고 갑자기
묻는 뜬금없는 장면이 나온다.


《백범일지》를 보면, 주막집 주인은 김구가 풀어 주라고 해서 풀어 줬다고하지만, 1896년 10월 2일 법부에서 인천감리서로 보낸 전보에 이화보는 무죄로 방면하라고 내려와서 풀어 준 것이다.


《백범일지》에서는 사형 직전에 고종이 전화로 사면하여 살렸다고 나오나[3] 당시에는 시외전화가 개통되지 않았다. 전집을 발간했던 손충무는 전보라고 정정했다.


신문 때 배석한 조선인 경무관의 성명도 잘못되어 있다.


3. 여러 가지를 한데 모아 합한 검토[편집]


일제의 기록이 침략국의 기록이라는 점을 보아 전체에 걸쳐 무조건 신뢰하는 것은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사료 검토는 교차 검증이 기본인데 《백범일지》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뒷받침하는 다른 증거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또한 《백범일지》 내에서도 여러 오류가 발견된다.

쓰치다 조스케(또는 쓰치다 조료, 土田譲亮)가 명성황후 시해에 개입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명성황후 살해범들은 일본으로 옮겨져 수감되어 있다가 치하포 사건이 일어나기 불과 몇 주 전에 석방되었기 때문이다.

배치되는 기록의 어느 한쪽의 신뢰성을 증거 없이 곧바르고 명백하게 의심하는 단계에서 제삼자 처지에서 하는 판단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관련 기록만을 종합해 볼 때 쓰치다 조스케(또는 쓰치다 조료, 土田譲亮)가 육군 중위였다는 김구의 주장은 신뢰성이 아주 낮다.

김완섭은 2003년 '김구 선생은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한 뒤 중국으로 도피한 조선 왕조의 충견(忠犬)”이라는 내용의 문건과 '김구가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했다'는 내용의 인쇄물을 배부하였다가 사자 명예훼손으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이것을 근거로 쓰치다 조스케(또는 쓰치다 조료, 土田譲亮)가 일본제국군이었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김완섭의 주장 중 '허위'로 드러나 유죄를 인정받은 부분은 김구가 중국으로 가게 되는 과정 부분뿐이다.

재판부의 판결문에서 쓰치다 조스케(또는 쓰치다 조료, 土田譲亮)의 신분에 대하여는 '쓰치다 조스케(또는 쓰치다 조료, 土田譲亮)가 명성황후 시해에 연관 된 일본제국 군인인지, 무고한 상인인지 판단할 아무런 증거도 현출되지 않았기에 허위 사실 판단이 무리이다'라고 쓰고 있다.

"김구 선생이 1896년 2월 황해도 치하포항에서 살해한 ‘쓰치다 조스케(또는 쓰치다 조료, 土田譲亮)’는 당시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제국군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김구 선생이 쓰치다 조스케(또는 쓰치다 조료, 土田譲亮)를 죽이고서 체포돼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가 1919년 중국으로 망명했는데도 도주한 것처럼 허위를 적시했다” 라는 부분은 김완섭을 고소한 '검찰'의 주장이지, 역사에 관계된 사실이 아니다. 재판부에서는 이에 대하여 '위장한 일본제국군' 부분은 허위 사실 판단 무리[4], '망명을 도주로 표현한 부분'은 허위를 인정한 셈이다.

4. 사건 이후[편집]


상황이야 어쨌건 살인했으니 11월 법부에서는 김구에게 강도살인죄로 사형(교수형) 판결했으나 집행을 보류하였다. 이것은 우연히 승정원승지가 특이한 죄목명인 '국모보수'(國母報讐) 라는 단어를 우연히 발견했기 때문이라 한다.(승정원 기록에는 나오지않는다) 명성황후 시해로 인한 당시의 반일 감정 때문인지 조선 법부는 고종전화로 감옥장에게 내린 형집행 보류 지시를 근거로 사형 집행 예정일 하루 전날 형 집행을 보류하게 했다고 위키백과에서는 밝히고 있다.

중앙일보의 기사를 보면, 고종 이희는 전화가 아니라 전보로 감옥에 있는 김구의 사형 유보를 지시했다고 한다. 1894년 12월 1일부터 우편국에서 전보를 취급했고 전화는 1898년에 개통되었으며 이게 확장된 것은 1902년부터이기 때문이다. 판결에 대한 언질도 없이 옥중에서 생활하다가 11월 7일자 독립신문을 이용해 자신이 교수형 판결받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사형에 대한 중압감으로 경황이 없던 김구가 잘못 들었거나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하였다.

《백범일지》를 보면, 이때 심문을 맡은 감리서의 일본제국 관리(와타나베)는 후에 105인 사건에서 재회했다. 이때 일본제국 관리는 나는 X광선이 있어 네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허세를 부렸는데 정작 치하포 사건으로 감리서에서 대질한 사실은 기억을 못했다고 한다. 김구는 조선인 형사들이 이것을 감춰 준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했다. 물론 치하포 사건과 105인 사건 사이에는 15년이라는 긴 세월이 있는 만큼 그냥 잊어 버린 것일 수도 있다.

그 후로 김구는 감리서 책임자 경무관 김윤정과 현지 투전판 두목 김주경의 비호로 감옥 내에서 대접이 좋았다고 《백범일지》에서 회고하고 있다. 특히 범죄 조직 두목 김주경이 비호해 줬다는 점이 강도설을 뒷받침하는 정황 증거로 논의되고 있다.

4.1. 킬구 드립[편집]




이 문단은 킬구(으)로 검색해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후 역사 갤러리에서 이 사건을 재조명하고 만화로까지 패러디하면서 김구를 '킬구'라 부르기 시작했다. 다만 이 만화는 일부러 김구를 비판하는 시각에 초점을 맞춰 쓰치다 조스케(또는 쓰치다 조료, 土田譲亮)의 처지에서 기술한 약간 감성팔이가 섞여 있다. 이 만화는 역갤러에서 어그로를 잘 끌기로 유명했던 '황룡'[5] 이라는 갤러가 원작자이니 일부러 일뽕 시늉을 낸 것으로 보인다. 김구를 향한 관심이 없던 역갤에 돌연 황룡의 만화가 업로드되면서 킬구의 전설이 시작됐다. 지금도 여러 역갤러가 패러디하고 올리고 있으며 역갤 이외의 커뮤니티에도 조금씩 퍼지고 있다.

이거랑 대조로 많은 한국 측 미디어에서는 쓰치다 조스케(또는 쓰치다 조료, 土田譲亮)를 바람직하지 않게 본다. 고 오세영의 김구 위인만화(월간 보물섬 연재)에서는 조선인으로 위장하던 걸 이상하게 여겨 덮치는데 쓰치다 조스케(또는 쓰치다 조료, 土田譲亮)가 숨겨둔 칼을 꺼내 공격하는 걸 빼앗아 벤다.Han Shot First?? 이렇게 보통 쓰치다 조스케(또는 쓰치다 조료, 土田譲亮)를 간첩으로 많이 보고 있다. 솔직히 조선인 흉내를 내는 만큼, 간첩이라고 볼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왜 쓰치다 조스케(또는 쓰치다 조료, 土田譲亮)가 조선인으로 위장했는지는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을미사변직후인데 일본인이 일본인인 거 티내고 다니는 것도 미친 짓이다. 당시 일본인을 향한 조선인들의 일반 감정을 안다면 이런 짓한다는 건 죽여 달라는 것이나 다름 없는 행위. 그리고 《백범일지》에도 단발령에 대한 반발로 한양에서 조선인들이 일본인의 가옥을 부수고 일본인들을 때려죽였다는 기술이 되어 있고[6] 이런 사실들을 고려했을 때, 조선 복장을 했던 것은 조선에서 상업 활동하려고 굳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밝혀 불이익당하기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 추론해 볼 수 있다. 실제로 일본제국의 공문에서도 상인들에게 주의를 당부하였다.

밤섬해적단은 "백범살인일지"라는 노래로 이 사건을 까는 듯 안 까는 듯 다단히 묘하게 다룬다. 일단 가사 후렴구(?)가 "김구 짱 김구 짱 김구 짱 이승만 병신"이니까 최소한 이승만 빠는 노래는 아니다

김구가 전후에 저지른 백색테러[7]가 밝혀지면서 퍼진 경향이 있다. 치하포 사건만 놓고 봐도 아무 죄 없는 일본 민간인을 잔인하게 죽였으니 이것만 놓고 봐도 아햏햏한데 여기에 더하여 해방 후 김구가 같은 동포를 상대로 테러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같이 퍼지게 되었다. 특히 김구가 현재처럼 추앙받는 이유는 전후에 소위 "더러운 정치"질을 했던 이승만김일성과 다른 행보를 보였다고 여겨졌기 때문인데 같은 행동을 했다는 것이 차츰 밝혀지자 그 배신감 때문에 유독 최근 들어 까이기 시작했다.

5. 사회·문화에서[편집]


1932년 김구가 한인애국단의 활동을 알리려고 『도왜실기』란 책을 중국어로 냈고 이걸 엄항섭이 1946년 3월에 언역해서 한반도에 소개했고, 이 책에 이승만이 서문을 썼는데 치하포 사건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동지들과 함께 왜적에 복수할 것을 맹약하였고 삼남지방에 의병이 봉기했다는 소식에 급히 귀국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장료를 손수 죽여 국모의 원한을 갚은 것이 선생의 21세 때 일이다.


……이 소식을 들은 전국의 민중이 충의의 선생을 구하고자 들끊자 이 소식은 마침내 궁중으로 들어가 고종께서 친히 제물포에 전화를 걸어 각별히 사형 집행을 연기케 하여 선생은 사지에서 빠져나오게 되었다.
국모의 원수를 갚았기 때문에 위기에 빠진 선생을 국왕께서 몸소 살려 준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나 어찌 기이한 인연이 아닌가.」

이승만, 「발간사」, 『도왜실기』, 범우사, 2002


김구가 급히 귀국해 황후 시해범을 죽였다거나 원수를 갚아 줬기에 고종이 살려 줬다는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근데 절친한 친구사이였던 이승만과 김구의 사이를 보나, 21세기 들어서도 과연 쓰치다 조스케가 누군지도 똑바로 모르는데 이승만이 대충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로 썼다고
해도 신기하지 않은것이다.

사실 지금도 당시 일본 검찰은 쓰치다를 일반 일본 민간인이라고 했으나 여론이 이를 침략국의 기록이라며 부정하면서도 백범일지와 당시 조사중 진술을 보면 진술번복이 끝도없는걸 보아 정황상 쓰치다는 그냥 민간인은 맞는데 그걸 인정하면 안두희를 때려죽여도 전국민과 사법부가 용서할정도로 명망높은 민족의 큰 어르신인 김구의 평판이 그야말로 박살이 나버리므로...





이 사건을 배경으로 영화 〈대장 김창수〉가 제작됐다. 2017년 9월 8일 기준으로 줄거리에 "명성황후 시해범(...)을 죽이고 감옥에서 대장으로 거듭나기까지의 이야기를 그려낸 '감동 실화'"라는 설명이 붙어있었으나 현재는 여론을 의식했는지 "1896년 황해도 치하포, 청년 김창수가 일본인을 죽이고 체포된다. 그 사람은 재판장에서 국모의 원수를 갚았을 뿐이라고 소리치지만 결국 사형을 선고받고 수감된다."라며 한발 뺀 상황이다. 하지만 여전히 쓰치다 조스케(또는 쓰치다 조료, 土田譲亮)를 짐승 한 마리에 비유하는 등 여전히 불안한 요소는 남아 있어서 사건의 진상을 아는 사람들이 걱정했었다.
6. 학계에서[편집]



쓰치다 조스케(또는 쓰치다 조료, 土田譲亮)가 상인이라는 건 이미 2000년대가 되기 전부터 알려져 있던 사실이다. 김구를 다룬 대표 학자로 유명한 도진순이 그 예. 도진순은 1997년에 보고서를 작성하여 치하포 사건 분석을 내놓은 적이 있다. 도진순, 1895-96년 김구의 연중 의병 활동과 치하포사건, 한국학술진흥재단, 1997 여기서도 이미 쓰치다 조스케(또는 쓰치다 조료, 土田譲亮)가 상인이라고 적어 놓았다. 쓰치다 조스케(또는 쓰치다 조료, 土田譲亮)가 일본제국 중위가 아니라는 건 애초에 신선하거나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었다.




배경식이 풀어 쓴 《올바르게 풀어쓴 백범일지》(너머북스, 2008)에선 치하포 사건의 실체가 그대로 써져 있다. 김구가 아무 죄도 없는 멀쩡한 일본인을 잔혹하게 죽였는데 이걸 《백범일지》에서 사실과 다르게 썼다고 적는다. 다만 이 사람도 최초는 아니다.


7. 그외[편집]


《백범일지》 관련해서 손충무가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8] 이 손충무는 김구의 암살 사건을 다루던 기자였는데 특파원으로서 오래 생활하면서 김구에 관한 자료를 수집했다고 한다. 이 손충무는 쓰치다 조스케(또는 쓰치다 조료, 土田譲亮) 사건에 관한 자료를 신문사에 기증하기도 했다.#그러나 이 손충무가 제시한 자료에도 쓰치다 조스케(또는 쓰치다 조료, 土田譲亮)가 일본제국 중위라는 기록은 없었다. 게다가 이 손충무는 1970년 당시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여 미국으로 망명했다거나,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여 미국으로 망명했다지만, 당시 취재차 일본과 미국과 대만 등지로 출국한 것일 뿐 실제로 망명한 기록은 없다. 이후 발간한 책들이나 기사들을 볼 때에도, 상당히 신빙성에 의심이 가는 인물로 평가된다. #

고재열이라는 기자는 민간인 살해를 미러링이라고 미화했다.


복각본 <백범일지>를 읽고 놀랐던 적이 있다. 초판본을 그대로 재현한 것인데 내용이 너무나 적나라해서다. 젊은 시절의 백범은 혈기방장했다. 주막에서 한국인으로 위장한 일본인을 발견하고 그를 맨주먹으로 때려 넘어뜨린 후 난도질해 죽였다. 엽기적인 것은 그 다음이다. 그는 그 일본인의 피를 마셨다. 일본이 우리의 국모(명성황후)를 살해한 것에 대한 일종의 ‘미러링'이었던 셈이다.
백범일지에는 비슷한 사례가 많다. 이런 책을 어린이들에게 읽혀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백범의 행위를 맥락과 떼어 놓고 행위만 봐서는 문제가 될 것들이 있었다. 만약 누군가 백범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고 그의 행위만 나열한다면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간사하고 잔혹한 범죄자를 떠올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를 흉악한 범죄자가 아니라 백범으로 기억하는 것은 그의 행위를 시대적 배경을 통해서 이해해주고 그런 과정을 통해 그가 이뤄낸 성숙을 존중해서일 것이다.

출처: #

물론 그 사람의 주장은 훗날 그 사람의 독립운동을 근거로 그 사람의 문제가 되는 과거에 면죄부를 주는 궤변에 가깝다. 그리고 《백범일지》에는 시대 배경을 감안해도 문제인 게 있다. 그게 바로 김립 피살 사건옥관빈 피살사건안공근 암살 사건이다.



[1] # 무료니깐 확인가능. 다만 국한문혼용체라 한자압박이 있다.[2] 미우라는 당시 벌써 일본으로 가 재판받고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즉, 김구가 당시 중앙 정세를 잘 몰랐거나 체포된 후 거짓말한 것이다.[3] 이것은 EBS 〈역사채널〉에서도 방송된 적이 있다. 시외 전화가 첫 개통된 것은 1902년이다.[4] 특히 검찰이 주장만 해 놓고 재판에서는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을 판결문에서 알 수 있다.[5] 삼국지 갤러리에서는 악질 촉빠로 악명이 높은 인물이다.[6] 다만 《백범일지》에서는 그런 얘기를 들었다는 식으로 기술이 되어 있는 만큼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이런 소문이 돌았다면, 조선에서 활동하는 일본인들이 이런 소문을 못 들었을 리는 없을 테고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신변의 위협을 느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측이 가능하다.[7] 권력자나 지배계급이 반정부 세력이나 혁명운동을 상대로 삼아 벌이는 탄압.[8] 물론 이 사건을 연구한 사람이 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 손충무의 자료와 연구도 흔히 김구 연구에 쓰이고 1970년대 내내 가장 강력한 백범 연구가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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