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7-01 8:15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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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제 며칠 뒤면 6월 25일입니다. 여기 와서 6.25전쟁에 대해 북에선 몰랐던 많은 사실을 알게 됐는데 오늘은 그중 하나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김일성이 전쟁 말기에 박헌영의 남로당파를 숙청하면서 내걸었던 가장 큰 죄상의 하나가 “우리가 밀고만 내려가면 남조선 곳곳에서 인민봉기가 일어날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인민군이 남침해서 내려왔는데 남쪽에선 폭동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왜 폭동이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여러 분석이 있겠지만 저는 가장 큰 이유로 남쪽에서 진행했던 토지개혁을 꼽고 싶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남쪽도 토지개혁을 했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북한은 토지개혁을 자기네만 한 일처럼 선전하면서 이를 계기로 김일성이 인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고 교육합니다. 북한 전쟁영화를 보면 “장군님 덕분에 처음으로 내 땅을 가졌다”고 하면서 목숨 바치는 소작농 출신의 병사가 꼭 등장합니다.
하지만 남쪽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이 뚝심으로 밀어붙인 토지개혁 덕분에 난생처음 내 땅을 가진 사람들이 똑같은 이유로 목숨 바쳐 싸웠습니다.
남쪽의 토지개혁은 전쟁 3개월 전인 1950년 3월에 마무리됐습니다. 1946년 9월에 북한으로 올라간 박헌영은 토지개혁으로 달라진 남쪽 민심을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기 생각에는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 믿었겠지만 토지개혁으로 남쪽 농민들은 이승만 정권을 지지하게 됐습니다.
남쪽의 토지개혁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했던 북한과는 달리 유상수용 유상분배의 원칙에서 이뤄졌습니다. 당시 남쪽도 북한처럼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토지개혁을 하자는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식 농지개혁은 농민들이 대지주의 노예에서 정부의 노예로 바뀔 뿐”이라면서 끝까지 유상수용의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한국인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을 정도로 머리가 비상했고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도 뛰어났던 지도자였습니다.
토지개혁 때 그가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반대했던 이유 역시 그의 뛰어난 통찰력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훗날 역사가 바로 그걸 증명해주었습니다.
북한의 토지개혁은 무상몰수라기 보단 지주들을 타도해서 빼앗아낸 강탈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당합니다. 박해를 견디다 못해 많은 유산계층이 월남했고 북에 남은 지주들도 결국 얼마 안 돼 모두 숙청되고 자식도 3대 넘게 지주의 자손이란 성분의 굴레를 쓰고 잘해봐야 농촌에서 농민이나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땅을 무상 분배받은 농민은 또 어떻습니까. 결국 협동농장이란 구실로 나중에 국가에 땅을 다 빼앗기고 자기 땅이 없이 공동농사를 지어 공동분배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근로의욕이 사라진 북한 농업은 발전이 없었고 급기야 고난의 행군 사태를 맞아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습니다.
북한은 이제야 비로써 공동생산의 한계를 깨닫고 분조경작제니 하는 이름을 붙여선 개인들의 생산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정책으로 전환하려 합니다.
이런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비참한 말로를 이승만은 90여 년 전에 이미 예상했습니다. 그는 소련의 10월 혁명으로 공산주의 바람이 거세던 1920년대에 벌써 공산주의 부당성을 논증하는 글을 썼는데 오늘날에 봐도 그 혜안에 탄복하게 됩니다.
물론 이승만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고 그걸 두둔하고 싶지도 않지만 최소한 그가 머리가 비상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자유시장경제의 핵심은 사유재산 존중의 정신이고 한국은 그걸 지켰습니다.
남쪽은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농지 상한선을 북한의 다섯 정보보다 더 낮은 세 정보로 정했고 그보다 더 많이 소유한 지주의 땅은 국가에서 지가증권이란 것을 주어 샀습니다.
농민들은 자기가 받은 토지에서 나는 생산량의 150%를 바치면 땅을 가질 수 있었는데 이는 생산물의 절반을 3년만 바치면 자기 땅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래는 300%로 하려 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150%로 고집해 관철시켰습니다.
지주계층이 토지개혁을 반대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급진적 사회주의자인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으로 기용해 농지개혁법을 밀어붙였습니다. 결과 1950년 3월엔 농민들이 ‘분배농지예정통지서’를 받게 됐습니다. 이 땅이 이제 당신의 땅이 된다는 증명서인 것입니다.
해방 전 한국 전체 농가의 75%가 소작농이었지만 1950년대엔 전 경지의 92.4%가 자작농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떤 농민들은 소작농 신분을 숨기기 위해 자기가 받은 땅을 팔고 다른 곳에 이사 가서 거기서 땅을 새로 사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이 과정에 천 년 넘게 내려온 양반과 상놈, 지주와 소작농의 봉건적 신분제도가 무너지고 역사상 최초로 평등의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이러니까 어떻게 됐겠습니까.
인민군이 내려왔는데 토지개혁을 하려 하니 할 땅이 없습니다. 강제로 토지개혁을 하려보니 빼앗을 땅도 없거니와 방식도 농민들에게 소유권은 없이 경작권만 주는 북한식이었습니다.
내 땅 가지는가 싶었는데 인민군이 와서 농사만 지으라니 땅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인민군과 맞서 싸우는 길밖에 없는 겁니다.
만약 이승만 대통령이 토지개혁을 하지 않았다면 남쪽도 폭동이 수없이 일어났을지 모르지만 토지개혁이 그걸 막았습니다.
1950년대 말 북한은 소설과 드라마로 나온 ‘석개울의 새봄’에서 보듯이 무상 분배했던 땅을 빼앗아 협동농장을 만들었습니다.
농민은 수십 년 동안 아무리 열심히 농사지어도 국가에 다 빼앗기고 겨우 먹고 살만한 식량만 분배로 받았습니다. 이게 바로 국가의 노예가 아니고 뭡니까.
한국인 최초로 박사가 된 수재가 밑그림을 그린 나라와 총과 독재밖에 모르는 무식한 빨치산이 밑그림을 그린 국가. 그것이 바로 남과 북의 오늘날의 차이입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이 글은 자유아시아방송을 통해 북한 주민들에게 전해지는 내용으로 6월 20일 방송분입니다.
남한 독자들이 아닌 북한 청취자들을 대상으로 한 글임을 감안하시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이번 글은 계명산님이 올려주신 평전 이승만의 내용 중 토지개혁 부분에 대한 서술을 토대로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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