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K투데이 » [북한은 왜?] 북한은 광복을 '쟁취한 것'으로 본다? ①
[북한은 왜?] 북한은 광복을 '쟁취한 것'으로 본다?
–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
한국에서는 광복을 '외세에 의해 어느 정도 주어졌다'고 배우고 있다.
그렇다면 북한은 어떨까?
토지몰수 등을 통해 친일청산을 철저하게 진행한 입장에서 북한은 일제의 패망, 그리고 독립운동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
1983년 북한에서 출간된 '현대조선역사'는 일제의 항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군부대들의 드센 공격과 인민들의 혁명적 진출 앞에서 더는 견딜 수 없게 된 일제의 '대본영'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최후공격작전이 개시된지 불과 1주일도 못되는 1945년 8월 15일 황급히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김한길, "현대조선역사", 일송정, 1988, 160쪽.)
즉, 북한 역사책은 민중들의 투쟁과 조선인민혁명군의 공격으로 일본이 항복하고 한반도에서 물러났다고 작성해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
현재까지 한국에서 출간된 역사서적들에 기초하여 그 근거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목차]
1. 일제에 용감하게 저항해온 우리민족
2. 일제로부터 어떻게 해방할 것인가.
3. 전민항쟁 준비단계
1) 항일유격구와 군대
2) 동북항일연군
3) 조국광복회
4) 국제연합군 제88여단(동북항일연군 교도려)
4. 전민항쟁
1) 2차 세계대전의 종말
2) 전민항쟁의 진행
3) 국내진공작전
5. 동북항일연군 교도려와 소련군의 진주가 없었다면?
※ 현재 한국 역사책에서 19세기 말, 20세기 초 우리 민족을 '조선'보다는 '한국'이라는 표현으로 더 많이 부르고 있다. 1897년 고종이 선포한 대한제국의 약칭으로 '한국'이라고 쓰는 것이다. 그러나 1910년 8월 22일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이라는 국가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그러면서 대한제국은 '조선'이라는 지역 명칭으로 불려졌고 민중들 역시 '조선국권회복단', '조선국민회', '조선공산당', '조선여성동우회', '조선일보' 등 조선이라는 명칭을 더 많이 썼다. 대한제국이 왕조 교체 없이 1392년에 설립된 조선이라는 나라의 연장선에 불과했다는 점, 오늘날 순종 역시 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불려왔다는 점 등에 기초하여 이 연재글에서 당시 한반도 지역을 '조선'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이 글에서의 '조선'이 현재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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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제에 용감하게 저항해온 우리민족
1) 반일의병운동
일본이 조선침략을 시작했던 것은 19세기 중반부터였다.
명치유신(메이지유신)으로 개화의 길에 들어선 일본에서는 서구 열강으로부터 '천황(天皇)의 국가'를 지키기 위해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일본은 조선이라는 땅덩어리를 차지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의 지원 하에 청나라, 러시아와 전쟁을 치렀다.
1895년 청일전쟁에 이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맺어 미국의 지원(가쓰라-태프트 조약) 하에 우리나라 땅에 대한 배타적 독점권을 얻게 된다. (배타적 독점권 : 다른 나라가 넘볼 수 없는 독점권)
포츠머스 회담 2달 후인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했고 1910년 한일합방조약으로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삼았다. (정식명칭은 한일협상조약. 일제의 강압에 의해 법적 형식이 결여된 채 불법적으로 맺어졌다. )
이로서 가혹한 일제 치하의 36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우리 민족은 일제가 조선에 대해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 시점부터 단 한시도 독립운동을 그치지 않았다.
양반관리들의 비리와 부패에 저항하여 시작된 1894년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혁명)도 일제에 맞서 싸운 반외세투쟁으로 확대되어 최후까지 일본군들과 맞서 싸웠다.
갑오농민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은 농민군은 곳곳에서 반일의병운동에 적극 떨쳐나섰다.
갑오농민전쟁 직후인 1895년 7월 유생 김원교가 이끄는 상원의병은 평안도 상원 읍내로 진격해 친일 관리들을 처단하고 황해감영군과 치열한 격전을 벌인 후 장수산에서 격문을 발표해 의병운동을 추동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 이후 의병의 수가 급증해 총 1만 여 명에 달했던 제천의병(대장 유인석)은 1896년 2월 충주성을 함락시키고 일본군의 공격을 여러 차례 물리치기도 했다.
이승룡이 주도했던 양근의병은 이천의병 등과 합세하여 남한산성에 입성하고 관군과 대규모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국가기록원,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반일의병운동은 더욱 양양되었다.
당시 민종식 대장이 이끈 홍주 병오의병, 신돌석의 을사의병, 최익현의 홍주의병 등은 일제에 맞서 적극적으로 싸웠다.
1906년 5월 의병군 1,000여명이 일본군이 지키고 있는 홍주성을 점령하고 10여 일 동안 지켜내기도 했다.
일제는 토벌대를 배치해 1907년 8월부터 1911년 6월까지 무려 1만 7,000여명의 의병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럼에도 1908년에만 7만 여 명의 의병들이 1천 500여 회에 달하는 전투를 벌여 일제가 조선을 점령하는 데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도처에서 일어난 의병에 맞서 일제는 1910년부터 1,624개소에 달하는 경찰·헌병기관, 1만 7915명의 헌병, 경찰들을 배치해 조선을 '완전한 감옥'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거대한 감옥'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일제가 축소해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1910년 9월부터 1913년 8월까지 3년 동안 의병의 전투회수가 70여차에 달하기도 했다.
의병전투 외에 영등포피혁회사 파업 등 노동자투쟁, 강원도 춘천군 서하면 농민들의 면사무소 습격 등 농민투쟁, 청년학생들의 동맹휴학 등이 도처에서 발발했다.
이러한 민중들의 분노가 거족적인 반일항쟁으로 폭발된 것이 바로 3·1운동이었다.
2) 3·1운동의 성과와 한계
3·1운동은 일제강점기 최대 전민족적 독립항쟁이었다.
조선총독부 공식기록에만도 총 집회인수가 106 여 만 명이라고 적혀있을 정도로 많은 수가 참가했다.
총 참가인원은 전체 조선 인구 1,678만 8천400명의 10% 정도로 추산된다. (3.1운동, 한국사콘텐츠)
전국적으로 총 232개 중 211개 부, 군, 섬에서 발생한 거족적인 봉기였고 우리 민족이 살아있다는 것을 세계적으로 시위했던 항쟁이었다.
3월 하순에서 4월 하순에 걸쳐 전국적으로 544회 봉기가 일어났고 4월 1일 하루 동안에만도 60회 이상 투쟁이 전개되었다.
3·1운동은 우리 민족해방운동사에 특기할만한 항쟁으로 기록되어 남북 모두 3월 1일을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3.1운동으로 우리 민족은 일제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지 못했다.
북한은 그 원인을 운동지도부의 나약성과 비폭력·무저항주의로 보고 있다.
당시 3.1운동 지도부는 비폭력·무저항주의에 입각한 평화적 시위와 열강에의 독립청원을 통해 독립을 달성하고자 했다. (이윤상, "3.1운동의 배경과 독립선언",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8쪽.)
이들은 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윌슨 미국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면서 파리 강화회의가 개최되는 정세에 희망을 갖고 곽종석, 김창숙 계열은 파리 평화회의에 독립탄원서를 보낼 시도까지 했다.
민족대표들은 10여 년 전 총을 들고 일제와 맞서 싸웠던 의병들과 달리 외국청원에 희망을 품고 비폭력주의로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노선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은 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자부로에게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 사실을 알리고 연행되었다.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6 : 사진신부에서 민족개조론까지", 인물과 사상사.)
보성법률상업학교 학생 강기덕을 중심으로 하는 학생들이 태화관으로 들이닥쳐 민족대표들이 탑골공원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비난했지만 당대의 논객이었던 박희도는 "무저항 비폭력으로 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방침에 따라 불가피하게 불참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대표들이 잡혀가자 3·1운동은 명확한 지도부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확산되었다.
시위는 주로 학생들이 주도하여 독립선언서를 읽고 시민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부르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민족대표의 입장에 영향을 받은 각지 만세시위 주도자들은 국제적 여론에 호소하고 미국의 도움을 받기 위해 국내에서 비폭력운동을 크게 전개해야 한다고 바라봤다.
태극기를 든 민중들은 일제의 무력진압으로 제대로 된 저항을 못한 채 쓰러졌고 수만명이 연행되면서 항쟁역량이 온전히 보전되기 힘들었다.
일부는 파출소에 진입하거나 돌을 던지며 일본 경찰들의 총칼에 맞서 저항했지만 결국 2-3달만에 7,509 명이 사망하고 4만 7천여 명이나 구속되었다. (조선총독부 공식 발표)
수원 제암리에서는 3.1만세시위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가 시위 지도부를 죽이고 잔혹한 학살을 감행하기도 했다.
제암리 학살 현장.
결국 3.1운동역량이 급격히 소진되면서 운동은 독립할 때까지 이어가지 못했다.
3·1운동 이후 절망에 빠진 우리의 민족해방운동은 우리 현실에 맞는 독립노선을 찾아 헤매게 되었다.
(계속)
김혜민 기자 NKtoday21@gmail.com ⓒNK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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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왜?] 북한은 광복을 '쟁취한 것'으로 본다? ②
NK투데이에서는 <북한은 왜?> 시리즈를 통해 북한의 현대사, 그리고 오늘의 모습을 살펴보는 장기 기획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전편보기 : <북한은 왜?> http://nktoday.kr/?p=15265
[북한은 왜?] 북한은 광복을 '쟁취한 것'으로 본다?
–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
–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
한국에서는 광복을 '외세에 의해 어느 정도 주어졌다'고 배우고 있다.
그렇다면 북한은 어떨까?
토지몰수 등을 통해 친일청산을 철저하게 진행한 입장에서 북한은 일제의 패망, 그리고 독립운동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
1983년 북한에서 출간된 '현대조선역사'는 일제의 항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군부대들의 드센 공격과 인민들의 혁명적 진출 앞에서 더는 견딜 수 없게 된 일제의 '대본영'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최후공격작전이 개시된지 불과 1주일도 못되는 1945년 8월 15일 황급히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김한길, "현대조선역사", 일송정, 1988, 160쪽.)
즉, 북한 역사책은 민중들의 투쟁과 조선인민혁명군의 공격으로 일본이 항복하고 한반도에서 물러났다고 작성해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
현재까지 한국에서 출간된 역사서적들에 기초하여 그 근거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목차]
1. 일제에 용감하게 저항해온 우리민족
2. 일제로부터 어떻게 해방할 것인가.
3. 전민항쟁 준비단계
1) 항일유격구와 군대
2) 동북항일연군
3) 조국광복회
4) 국제연합군 제88여단(동북항일연군 교도려)
4. 전민항쟁
1) 2차 세계대전의 종말
2) 전민항쟁의 진행
3) 국내진공작전
5. 동북항일연군 교도려와 소련군의 진주가 없었다면?
2. 일제로부터 어떻게 해방할 것인가.
3. 전민항쟁 준비단계
1) 항일유격구와 군대
2) 동북항일연군
3) 조국광복회
4) 국제연합군 제88여단(동북항일연군 교도려)
4. 전민항쟁
1) 2차 세계대전의 종말
2) 전민항쟁의 진행
3) 국내진공작전
5. 동북항일연군 교도려와 소련군의 진주가 없었다면?
※ 현재 한국 역사책에서 19세기 말, 20세기 초 우리 민족을 '조선'보다는 '한국'이라는 표현으로 더 많이 부르고 있다. 1897년 고종이 선포한 대한제국의 약칭으로 '한국'이라고 쓰는 것이다. 그러나 1910년 8월 22일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이라는 국가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그러면서 대한제국은 '조선'이라는 지역 명칭으로 불려졌고 민중들 역시 '조선국권회복단', '조선국민회', '조선공산당', '조선여성동우회', '조선일보' 등 조선이라는 명칭을 더 많이 썼다. 대한제국이 왕조 교체 없이 1392년에 설립된 조선이라는 나라의 연장선에 불과했다는 점, 오늘날 순종 역시 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불려왔다는 점 등에 기초하여 이 연재글에서 당시 한반도 지역을 '조선'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이 글에서의 '조선'이 현재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밝혀둔다.
(계속)
2. 일제로부터 어떻게 해방할 것인가.
3·1운동으로 나라의 독립을 이루지 못하자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서서히 일제에 협력해나갔다.
이광수, 최남선 등 문학가들은 과감하게 친일의 길을 걷기도 했다.
그들이 일제와 협력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패배주의와 무력감 때문이었다.
강대한 일제에 맞서서 싸우기에는 우리 민족의 의식과 힘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은 '내선일체가 되어' 일본인으로 살아가야 했던 것일까.
일본은 우리 민족에게 일본어, 일본이름, 일본식 문화를 강요하고 조선역사 대신 천황 중심의 일본역사를 가르쳤다.
나이어린 조선 소녀들을 위안부로 동원하고 구속된 독립운동가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까지 저지르는 만행을 벌였다.
일본은 내선일체를 주장하고 있었지만 사실 우리 민족을 '일본의 2등 국민'으로 치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3.1운동, 일제와의 투쟁에서 무력감을 느낀 일부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내선일체' 주장에 동조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다수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엔 독립에 대한 염원과 그 의지가 남아있었다.
3.1운동 이후 1920년대에만도 수만이 참가하는 노동자, 농민, 학생운동이 끊임없이 전개되면서 우리 민족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1929년 원산총파업은 3개월이나 원산 노동자 전체가 파업에 참가해 세계적으로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
1) 독립운동노선
당시 독립운동은 외세에 의존하여 독립을 쟁취하자는 노선(이승만 등), 실력을 양성해서 독립을 이뤄내자는 노선(안창호 등), 일제 치하에서도 민족자치가 가능하다는 노선(이광수 등), 노동자, 농민의 과격한 계급투쟁을 앞세우는 노선(박헌영, 김찬 등), 암살, 파괴 등의 테러를 통한 독립노선(김구, 김원봉 등)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반면 1920년대 중후반부터 활동을 시작했던 타도제국주의동맹(약칭 ㅌ.ㄷ, 훗날 반제청년동맹으로 발전),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 성원 등 만주지역 사회주의계열 항일무장투쟁세력은 조직적인 무장투쟁의 기치 아래 전체 조선인들을 떨쳐나서야 조국광복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훗날 북한 정부의 지도부로 성장한 인물들이다.
그들은 외세의존, 실력양성, 민족자치 노선들이 민족의 힘을 믿지 못하고 일제에 대한 환상에 빠져 만들어진 이론들이라고 비판했다.
그들은 이 이론들이 민중들의 절대적 지지를 얻어낼 수 없을 뿐 아니라 실질적인 독립을 이뤄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미국 윌슨 대통령이 독립운동가들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할 조짐을 보이자 '일본의 조선 병합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발생한 문제가 아니므로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인들의 요구를 들어줄 가능성은 없다'라며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던 사례 등을 꼽았다. (이윤상, "3.1운동의 배경과 독립선언",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1쪽.)
그들은 일제 및 열강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오직 우리 민족의 힘으로 독립을 이뤄야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제시한 노선이 바로 무장에 기반한 전민항쟁노선이었다.
2) 전민항쟁노선
전민항쟁노선은 조직적인 무장투쟁의 기치 아래 전체 우리민족을 단결시키고 발동하여 항쟁을 벌여나가자는 노선이었다.
즉, 많은 조선인들이 일제에 반대하는 의식을 가질 수 있게 하고 하나의 독립운동조직에 묶어서 즉각적이며 조직적인 전국 반일항전을 전개하여 조국광복을 실현하자는 노선이었다.
만주지역 사회주의계열 항일무장투쟁세력은 일제의 가혹한 압박에 신음하는 전체 조선인들의 힘을 길러 무장으로 일제를 몰아내는 것밖에 독립의 길은 없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만주지역에서 상비적인 혁명무력을 키워내고 반일투쟁에 이해관계를 가진 모든 애국역량을 총발동하여 국내에서 거족적인 항쟁을 이뤄나가야 한다고 바라봤다.
그들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의병들의 활동, 청산리·봉오동전투에서 보여줬던 우리 민족의 투지를 믿고 있었던 것이다.
3) 역사 속 전민항쟁 경험
만주지역 사회주의계열 항일무장투쟁계열이 이런 노선을 제기한 이유는 우선 과거 항쟁들의 경험이 전민항쟁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1919년 3·1운동은 전국적으로 폭발된 전민항쟁의 형태를 띠었고 실제 일제의 통치방식을 바꿀 정도로 위력적인 투쟁이었다.
비록 당장의 독립을 이뤄내지 못했지만 전민항쟁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순종의 장례식을 기해 일어났던 6.10만세운동 역시 전민항쟁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죽자 전국적으로 망곡, 봉도, 철시, 동맹휴학 등이 거세게 일어났다. (망곡 : 먼 곳에서 임금이나 어버이의 상사를 당했을 때에, 곡을 할 장소에 몸소 가지 못하고 그쪽을 향하여 슬피 욺. 봉도 : 임금이 거둥할 때 수레를 편안히 모시라고 별감이 소리를 지르면서 경계하던 일. 철시 : 국상이 났거나 대신이 죽었을 때 저자의 문을 닫고 쉬던 일.)
이리, 김천, 청주, 강릉, 강경, 광주 등 주요 읍내가 전부 철시를 하고 전국적으로 봉도식이 진행되었으며, 언론에 보도된 것만 토대해도 김제 금구보통학교, 홍성보통학교, 여산보통학교, 원주보통학교 등 수십 개의 학교에서 학생들의 동맹휴학이 진행되었다. (장석흥, "6.10만세운동",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38~263쪽.)
그리고 1926년 6월 10일 서울에서 학생들 중심으로 "일본 제국주의 타도," "토지는 농민에게," "8시간 노동제 채택," "우리의 교육은 우리들 손에" 등의 구호로 시위가 벌어졌으며 시위는 인천, 고창 등지로 확대되었다.
당시 조선공산당, 천도교, 임시상해부 등은 6.10만세운동을 전국에 확대하여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210여명의 학생들을 포함하여 전국적으로 1,000여 명을 사전 검거하면서 시위는 확산되지 못했다.
비록 6.10만세운동이 지도부의 사전 체포로 큰 항쟁으로 되지 못했지만, 우리 민족이 사상의 차이를 넘어 단합이 가능하다는 것, 전국적 항쟁이 가능하다는 것, 우리민족의 반일 의지가 높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도 전국적으로 확산된 학생들의 동맹휴학 투쟁으로 전민항쟁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1920~1925년(6년) 총 234회, 1926~1928년(3년) 총 210회의 동맹휴학이 발생하는 등 반일학생운동의 기세가 높아지던 시점에 일어난 항쟁이었다.
1929년 11월부터 1930년 4월까지 6개월 동안 전국적으로 194개교에서 6만 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 동맹휴학 등에 참가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조선 청년학생들의 반일의식과 단결력이 대단히 높아 항쟁의 기운이 전체 민족으로 확산만 되면 전민항쟁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전민항쟁의 가능성을 믿은 만주지역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은 전민항쟁이 항일무장세력과 결부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대중투쟁만으로는 해방을 이뤄낼 수 없다는 교훈이 바로 3·1운동, 6.10만세시위 등에 있다는 것이었다.
총칼로 무장한 일제가 조선을 가혹하게 옥죄고 있는 상황에서 비폭력·평화운동은 역량의 손실만 가져올 뿐이었다.
그들은 1900년대 의병운동처럼 만주지역에서 성장한 항일군대가 국내에서 직접 전투를 벌여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무장력이 전민항쟁과 결합하여 단숨에 한반도 땅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군대가 서서히 한반도 땅을 점령하면서 해방을 이루는 형태는 조선땅, 일본본토에서 일본군의 증강을 불러올 위험이 컸다.
따라서 전국 독립운동조직에 묶인 조선인들이 각자 자기 지역에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동시에 이루어내는 형태로 추진되어야 했다.
이렇게 항일군대과 전체 조선인들의 신뢰와 연대 속에서 해방을 이루자고 했던 것이 바로 전민항쟁 노선이었다.
실제 항일군대와 민중이 결합하여 일본군과 맞서 싸운 경험은 우리 민족이 많이 거주하는 동만주 지역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의병운동과 1920년 봉오동·청산리 전투로 대표되는 독립군의 활동으로 우리나라 북부국경지대, 동만주지역에는 역사적으로 반일의식이 높은 조선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1930년대 초 동만주에는 일본의 통치나 만주국(일본이 세운 괴뢰정부)의 통치가 미치지 못하는 유격구(일종의 해방구)가 꾸려지기 시작했다.
유격구에서는 토지개혁, 8시간 노동제, 남녀평등, 무상교육, 무상의료 등을 실현하는 인민혁명정부가 건설되었다.
아이들은 아동단, 여성들은 반일부녀회, 농민들은 농민협회 등의 대중단체에 묶여 반일의식을 높여 나갔다.
인민혁명정부를 중심으로 결합된 주민들은 자체의 힘과 의지로 일본군과 위만군(만주국의 군대)로부터 유격구를 수 년 동안 지켜냈다.
유격구를 지켜낼 수 있었던 힘은 유격구가 꾸린 군대에서도 나왔다.
조선독립을 위해 싸우는 군대를 유격구의 군대라 하여 유격대라 불렀다.
유격대는 일본군과 소규모 전투를 벌여 총 등의 무기와 식량, 의복 등을 얻었다.
이에 일제는 유격구의 확대에 위기감을 느끼고 1932년 겨울부터 많은 병력을 규합해 해방구에 대한 지속적인 토벌작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에서 해방구를 지켜낸 경험들은 전민항쟁의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들이었던 것이다.
1933년 봄 일제는 중국공산당 동만특별위원회의 주재지인 소왕청에 수천여명의 전투병력을 투입하여 대규모 공세를 전개했다.
유격대는 주민들과 함께 1933년 3월 30일 하루 종일 치열한 격전을 치른 끝에 3백여명의 적군을 살상하고 보총·권총 259정과 박격포 4문 등을 노획하는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이종석, "북한 지도층과 1930·40년대 초반 동북인민혁명군의 항일무장투쟁".)
그러나 그해 가을 일제는 또다시 보병, 포병, 항공대의 협동 하에 대병력을 밀어붙였다.
비행기까지 동원한 최신무기로 초토화전술을 써가며 왕청, 연길, 화룡, 훈춘현에 각각 수천 명의 병력으로 대규모 공세를 감행했다.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150쪽.)
당시 소왕청은 120여명에 달하는 2개 중대 유격대 역량만 있었다고 한다. (당시 소대규모는 20여명, 중대규모는 60여명, 대대규모는 120여명, 연대규모는 360여명로 추정된다.)
백여명의 사람들이 총을 들고 수천명의 적들과 싸운다는 것은 사실상 무모한 행동이었다.
이 때 소왕청 방어를 위해 나섰던 이들은 유격구 주민들이었다.
주민들이 아동단, 부녀회, 농민협회 등에 소속되어 조직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아이들은 돌과 통나무를 굴려 적들을 살상하고 기마대와 군용트럭에 타격을 입혔다.
여성들과 아이들은 밤에 일본 토벌대 숙영지에 들어가 꽹과리나 북을 쳐 일본군들이 밤에 잠을 못 자게 했다.
당조직과 혁명정부의 두리에 뭉친 군민들은 근거지방어전에 한결같이 떨쳐나섰다. 후방을 지켜선 여성들은 불비 속을 헤치면서 물과 밥을 유격대에 날라갔고 의복도 빨아 주었으며 아동단원들은 근거지를 지켜선 유격대원들에게 항일가요를 불러 그들의 투지를 고무하여 주었다. 인민들로 조직된 반일자위대는 유격대를 도와 후방을 지켜선 한편 적극적으로 출격하였다. 이리하여 1933년 춘기대토벌과 1933년 동기대토벌에서 각각 400여 명, 1,000여명의 살상자를 낸 일제는 부득이 물러가고 말았다. 반일자위대는 근거지방어전에서 무비의 위력을 발휘하였다. ("백년사화" 제2집, 료녕인민출판사, 1982. 300쪽. /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151쪽에서 재인용.)
이렇게 전체 주민들이 함께 힘을 모아 전투를 벌였다.
당시 주민들의 힘으로 사흘간에 400여명의 토벌대를 소멸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오마이뉴스, "일제토벌대가 녹아난 소왕청골 뾰족산" )
유격대는 일제의 초토화 작전을 물리치기 위해 일본군의 병영을 몰래 지나 적의 배후를 쳤다.
배후공격에 당황한 일본 토벌대는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만주지역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은 주민들과 독립군대가 합세하여 일제의 침략을 몰아낸 소왕청 전투를 통해 전민항쟁의 가능성을 봤다.
항일의식이 높은 주민들과 무장한 군대가 있다면 전민항쟁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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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민 기자 NKtoday21@gmail.com ⓒNK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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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왜?] 북한은 광복을 '쟁취한 것'으로 본다? ③
NK투데이에서는 <북한은 왜?> 시리즈를 통해 북한의 현대사, 그리고 오늘의 모습을 살펴보는 장기 기획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전편보기 : <북한은 왜?> http://nktoday.kr/?p=15265
[북한은 왜?] 북한은 광복을 '쟁취한 것'으로 본다?
–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
–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
한국에서는 광복을 '외세에 의해 어느 정도 주어졌다'고 배우고 있다.
그렇다면 북한은 어떨까?
토지몰수 등을 통해 친일청산을 철저하게 진행한 입장에서 북한은 일제의 패망, 그리고 독립운동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
1983년 북한에서 출간된 '현대조선역사'는 일제의 항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군부대들의 드센 공격과 인민들의 혁명적 진출 앞에서 더는 견딜 수 없게 된 일제의 '대본영'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최후공격작전이 개시된지 불과 1주일도 못되는 1945년 8월 15일 황급히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김한길, "현대조선역사", 일송정, 1988, 160쪽.)
즉, 북한 역사책은 민중들의 투쟁과 조선인민혁명군의 공격으로 일본이 항복하고 한반도에서 물러났다고 작성해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
현재까지 한국에서 출간된 역사서적들에 기초하여 그 근거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목차]
1. 일제에 용감하게 저항해온 우리민족
2. 일제로부터 어떻게 해방할 것인가.
3. 전민항쟁 준비단계
1) 항일유격구와 군대
2) 동북항일연군
3) 조국광복회
4) 국제연합군 제88여단(동북항일연군 교도려)
4. 전민항쟁
1) 2차 세계대전의 종말
2) 전민항쟁의 진행
3) 국내진공작전
5. 동북항일연군 교도려와 소련군의 진주가 없었다면?
2. 일제로부터 어떻게 해방할 것인가.
3. 전민항쟁 준비단계
1) 항일유격구와 군대
2) 동북항일연군
3) 조국광복회
4) 국제연합군 제88여단(동북항일연군 교도려)
4. 전민항쟁
1) 2차 세계대전의 종말
2) 전민항쟁의 진행
3) 국내진공작전
5. 동북항일연군 교도려와 소련군의 진주가 없었다면?
※ 현재 한국 역사책에서 19세기 말, 20세기 초 우리 민족을 '조선'보다는 '한국'이라는 표현으로 더 많이 부르고 있다. 1897년 고종이 선포한 대한제국의 약칭으로 '한국'이라고 쓰는 것이다. 그러나 1910년 8월 22일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이라는 국가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그러면서 대한제국은 '조선'이라는 지역 명칭으로 불려졌고 민중들 역시 '조선국권회복단', '조선국민회', '조선공산당', '조선여성동우회', '조선일보' 등 조선이라는 명칭을 더 많이 썼다. 대한제국이 왕조 교체 없이 1392년에 설립된 조선이라는 나라의 연장선에 불과했다는 점, 오늘날 순종 역시 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불려왔다는 점 등에 기초하여 이 연재글에서 당시 한반도 지역을 '조선'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이 글에서의 '조선'이 현재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밝혀둔다.
(계속)
3. 전민항쟁 준비단계
1) 항일유격구와 항일유격대
그렇다면 만주지역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이 본격적으로 전민항쟁을 준비했던 과정은 어떠했을까?
"20세기 우리역사",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 등 현재까지 한국에서 발간된 역사책들에 토대하여 그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전민항쟁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상비무력 즉, 군대부터 꾸려야 했다.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은 1931년 12월 연길현 명월구 (현 명월진, 明月镇)에서 조선독립과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군대를 꾸릴 것을 결정했다.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94쪽.)
회의에서는 원산총파업, 광주학생운동 등 반일투쟁이 세차게 일어나고 있는 정세에 맞춰 만주지역에서는 유격군(독립군) 및 유격구(해방구)를 꾸리기로 결정했다.
1932년~1933년 당시에는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고 만주국을 세우면서 만주지역의 통치권력이 일종의 공백기를 겪던 시기였다.
1931년 10월 중국공산당도 '만주 병사공작에 관한 지시'를 내려 만주지역 반일대중을 중심으로 유격대를 창건하고 유격구를 개척할 것을 지시한 바 있었다. (강만길, "20세기 우리역사", 창작과비평사, 1999,136~146쪽.)
따라서 만주지역 조선인들은 중국인들과 함께 연합하여 유격구와 유격대를 꾸렸다.
1932년 4월 안도현에서 김일성 대장(훗날의 김일성 주석)이 주도하는 반일인민유격대가 창건되었다. (이정식, 스칼라피노, "한국공산주의운동사 Ⅰ", 돌베개, 1986, 278쪽.)
북한에서는 이 날을 건군절로 기념해왔다. (올해 북한은 건군절을 조선인민군 창건일인 2월 8일로 변경하였다.)
반일인민유격대는 자체로 칼, 창, 곤봉, 고춧가루폭탄, 화약 등을 제조했고 이것을 이용하여 일제의 현대적인 무기들을 빼앗아 스스로를 무장했다.
안도에서 인민유격대가 창건된 후 연길, 화룡, 왕청, 훈춘 등 각 현에서 현 단위의 항일유격대가 꾸려졌다.
이 지역들은 대부분 조선 북부 국경과 인접한 동만주지대였다.
1933년 말 동만주 지역 항일유격대의 민족별 구성은 조선인 565명, 중국인 16명으로 총 600명 규모를 유지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정식, 스칼라피노, "한국공산주의운동사 Ⅰ", 돌베개, 1986, 226쪽.)
유격대는 중국공산당과 협력 하에 동만주지역 조선인들이 많이 살던 왕우구·소왕청·석인구·대황구·연통라자 등을 유격구로 형성했다.
유격구는 급격히 확대되어 1933년 말 13개의 고정된 해방구로 발전했으며, 총 3만 여 명의 인구를 포용할 만큼 크게 성장·발전했다고 한다.
유격구에서는 인민혁명정부가 주민들을 대중단체로 묶고 끊임없이 반일교양사업을 진행했고 유격대의 확장에 큰 기여를 했다고 한다.
유격구는 해방된 사회의 원형을 실현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독립투쟁에 대한 확신을 주는 역할을 했다.
참고) 인민혁명정부 정강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134쪽.)
Ⅰ. 인민혁명정부 통제구역 내에 있는 모든 노동자, 농민, 유격데병사·지휘관 및 학생, 상인 기타의 반일, 반만, 반제 대중 및 그들의 가족을 남녀, 종족, 종교·신앙의 차별 없이 모두 평등하게 혁명정부의 공민으로서 평등권을 가지며 16세 이상은 모두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갖는다. 단 매국적 민족반역자, 일본제국주의 및 괴뢰만주국의 앞잡이, 반혁명분자에게는 선거권·피선거권이 없고 정치적 자유도 없다.
Ⅰ. 일본 및 모든 제국주의와 매국노의 은행, 철도, 광산, 기업소, 토지 및 기타의 재산을 몰수하여 반일군비로 충당하며 일부분은 빈곤한 인민에게 분배한다. Ⅰ. 일본에 반대하는 모든 피압박민족과 공동전선을 결성한다. Ⅰ. 인민의 무장으로 반만항일을 행한다. Ⅰ. 가렴잡세를 폐지하고 통일누진세제를 실시한다. Ⅰ.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독서 및 스트라이크(파업)의 자유를 보장한다. Ⅰ. 8시간 노동제와 최저임금제를 실시하고 실업자 및 이재민을 구제한다. Ⅰ. 소작농민에게 2·8 소작제를 실시한다. (20% 지주, 80% 농민) Ⅰ. 소수민족의 자결권을 확립한다. |
또한 유격대 인원이 보충되고 군사훈련, 학습, 휴식 등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줌으로써 반일인민유격대가 급격히 성장할 수 있도록 보장했다.
2)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
1934년 3월 각 지방의 유격대들은 조선인민혁명군을 결성했다. (장세윤,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41~145쪽. 한국 역사학계에서 낸 이 책에 따르면 조선인민혁명군의 존재에 대해 1930년대 전반기 일부 중국인들 사이에서 확인된다고 한다.)
한국 학계에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이 만주지역에 살던 우리 민족이 대거 참여해 성립한 부대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독립사단)이라고 보고 있다. (강만길, "20세기 우리역사", 창작과비평사, 1999,136~146쪽.)
동북인민혁명군은 중국공산당이 1933년 "1월서한"을 채택하면서 동만주·남만주·북만주 등지에서 활동하던 유격대들을 개편한 연합군이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2~3개의 독립연대로 편성된 수개의 독립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반일인민유격대가 최초로 세워진 지 2여 년 만에 일종의 정규 군대 정형을 갖추게 된 것이다.
장세윤의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가 인용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조선인민혁명군 규모가 3천명이었다고 한다.
3개 소대가 1개 중대로, 3개 중대가 1개 대대로, 3개 대대가 1대 연대로 편성되었고 중대마다 정치지도원, 대대, 연대에는 정치위원이 있었고 사단 및 군에는 정치부가 있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이후 여러 전적을 쌓았는데 1934년 6월 만주지역 중국인부대인 구국군과 함께 연대하여 라자구 시내를 해방시키기도 했다.
또한 1934년 9월 탄광노동자들의 집결지인 연길현 노항구로의 진공작전으로 도시를 일시에 해방시키는 전적을 쌓기도 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1934년 10월~1935년 초까지 북만주로의 원정을 진행한 후 1935년 요영구회의에서 유격구를 해산하고 더 넓은 지대로 진출하여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벌일 것을 결정한다.
이후 조선인민혁명군은 백두산지구 유격구를 새롭게 건설하고 국경지대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1937년 6월에는 압록강을 건너 조선 갑산군 보천보를 공격하여 국내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강만길, "20세기 우리역사", 창작과비평사, 1999,136~146쪽.)
한편 1936년 2월 중국공산당이 "동북항일연군 군대 편제를 통일할 것에 관한 선언"을 발표하면서 동북지역 무장조직들이 통합되어 동북항일연군 제1군부터 제11군으로 편성되었다.
동북항일연군 주요간부 저우바오중(주보중)이 쓴 "저우바오중문선"(1987, 51쪽)에 따르면 "항일연군 제2군은 동시에 '조선인민혁명군'이었다"고 되어 있다. (장세윤,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41~145쪽. "재만한인들이 대거 참여해 성립된 이 부대를 중국인들도 경우에 따라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고 적혀 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훗날 동북항일연군 제1군과 제2군을 합쳐 편성된 제1로군(양징우 총사령)에 배치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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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왜?] 북한은 광복을 '쟁취한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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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왜?] 북한은 광복을 '쟁취한 것'으로 본다? ⑤
NK투데이에서는 <북한은 왜?> 시리즈를 통해 북한의 현대사, 그리고 오늘의 모습을 살펴보는 장기 기획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전편보기 : <북한은 왜?> http://nktoday.kr/?p=15265
[북한은 왜?] 북한은 광복을 '쟁취한 것'으로 본다?
–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
–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
한국에서는 광복을 '외세에 의해 어느 정도 주어졌다'고 배우고 있다.
그렇다면 북한은 어떨까?
토지몰수 등을 통해 친일청산을 철저하게 진행한 입장에서 북한은 일제의 패망, 그리고 독립운동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
1983년 북한에서 출간된 '현대조선역사'는 일제의 항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군부대들의 드센 공격과 인민들의 혁명적 진출 앞에서 더는 견딜 수 없게 된 일제의 '대본영'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최후공격작전이 개시된지 불과 1주일도 못되는 1945년 8월 15일 황급히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김한길, "현대조선역사", 일송정, 1988, 160쪽.)
즉, 북한 역사책은 민중들의 투쟁과 조선인민혁명군의 공격으로 일본이 항복하고 한반도에서 물러났다고 작성해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
현재까지 한국에서 출간된 역사서적들에 기초하여 그 근거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목차]
1. 일제에 용감하게 저항해온 우리민족
2. 일제로부터 어떻게 해방할 것인가.
3. 전민항쟁 준비단계
1) 항일유격구와 군대
2) 동북항일연군
3) 조국광복회
4) 국제연합군 제88여단(동북항일연군 교도려)
4. 전민항쟁
1) 2차 세계대전의 종말
2) 전민항쟁의 진행
3) 국내진공작전
5. 동북항일연군 교도려와 소련군의 진주가 없었다면?
2. 일제로부터 어떻게 해방할 것인가.
3. 전민항쟁 준비단계
1) 항일유격구와 군대
2) 동북항일연군
3) 조국광복회
4) 국제연합군 제88여단(동북항일연군 교도려)
4. 전민항쟁
1) 2차 세계대전의 종말
2) 전민항쟁의 진행
3) 국내진공작전
5. 동북항일연군 교도려와 소련군의 진주가 없었다면?
※ 현재 한국 역사책에서 19세기 말, 20세기 초 우리 민족을 '조선'보다는 '한국'이라는 표현으로 더 많이 부르고 있다. 1897년 고종이 선포한 대한제국의 약칭으로 '한국'이라고 쓰는 것이다. 그러나 1910년 8월 22일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이라는 국가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그러면서 대한제국은 '조선'이라는 지역 명칭으로 불려졌고 민중들 역시 '조선국권회복단', '조선국민회', '조선공산당', '조선여성동우회', '조선일보' 등 조선이라는 명칭을 더 많이 썼다. 대한제국이 왕조 교체 없이 1392년에 설립된 조선이라는 나라의 연장선에 불과했다는 점, 오늘날 순종 역시 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불려왔다는 점 등에 기초하여 이 연재글에서 당시 한반도 지역을 '조선'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이 글에서의 '조선'이 현재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밝혀둔다.
(계속)
4. 전민항쟁
※이 부분은 고태우, "북한사 다이제스트100", 가람기획, 2015, 12쪽~15쪽. / 김병균, "쉽게 보는 북한역사, 그리고 통일-항일무장투쟁사편", 해드림, 2013, 266~274쪽.의 상당 부분을 인용하였음.
1) 2차 세계대전의 종말
1940년대 말까지 서부 유럽과 북부 유럽을 점령한 독일은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하여 그해 10월 모스크바까지 진격하지만 바로 소련의 반격으로 후퇴를 시작했다.
독일과 동맹을 맺었던 이탈리아의 경우에는 1943년 7월 남부 이탈리아에 상륙한 미·영연합군(허스키 작전)에 밀려 그해 9월 항복을 선언하였고, 결국 1945년 5월 소련이 베를린을 점령함에 따라 독일은 항복을 선언했다.
전쟁이 종말에 가까워짐에 따라 국제정세는 조선독립에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1943년 11월 미국, 영국, 중화민국 3국은 2차 세계대전 후 일본에 대한 전략과 조선을 독립시킬 것을 합의한 카이로선언을 발표했다. (원문 : "The aforesaid three great powers, 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re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이어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는 소련과 미국, 영국이 독일의 분할통치, 폴란드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 행사 인정, 소련의 극동에서의 이권 회복 등을 논의했다.
이 회담에서 소련은 독일 항복 3개월 이내에 일본과의 전쟁을 시작할 것을 약속한다.
국내에서는 전쟁이 종말에 가까워짐에 따라 일제의 패망과 조국의 해방에 대한 기대가 고조되고 있었다.
각지의 노동자, 농민, 학생, 청년들 속에서 징병과 징용을 거부하고 산속으로 들어가 초보적인 무장항쟁을 전개하는 사태가 발생할 만큼 반일·반전의 각종 투쟁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광주서중학교에서는 무등회가 결성되어 태평양 전쟁이 장기화되면 조선독립의 절호의 기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일제의 군사교육을 무력 항쟁의 수단으로 이용해 무장봉기를 기도했다.
또한 평양사단 학생의거 등 학도지원병으로 끌려간 학생들 중 일부가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키려는 움직임도 있었는데, 1941년 소화 공과학원 학생들이 조직환 BKC단 등 학생층이 무장대를 조직해 무장항쟁을 기도하기도 했다.
전주사범학교의 우리회, 경복중학교의 흑백당 그룹 등은 임시정부 등 만주지역 운동세력과 합류하기 위해 만주로 탈출할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김정인, 이준식, 이송순, "한국근대사②", 푸른역사, 2016,327~328쪽.)
이 당시 조선 국내에서 조선인민혁명군과 연계를 가지려는 사건들은 일본 경찰 측에 확인된 것만 하더라도 1942년에서 1944년까지 무려 30여건을 상회하고 있었다.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429쪽.)
이러한 상황에 대해 가장 불안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미국이었다.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은 당시 사회주의가 확대되어 세계 곳곳에 사회주의 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대단히 우려하고 있었다.
얄타회담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945년 2월 한 미국 국무성 문서는 "명백한 위험사태는 조선공산군이 적절한 시기에 조선반도를 휩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태는 미국에 대해 치명적인 상황을 초래할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455쪽.)
미국은 조선이 조선인민혁명군 및 동북항일연군의 주도 하에 전민항쟁의 형태로 해방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한편 조선인민혁명군은 1945년 8월에 들어 조국해방을 위한 "최후진공작전계획" 실행을 위해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했다.
이 계획은 1943년 9월 조선인민혁명군 정치간부회의에서 결정된 것으로, 조선인민혁명군을 함경북도, 함경남도, 평안북도, 평안남도의 4개 방면으로 나누어 진공하고 그 과정에서 징병, 징용을 피해 입산한 청년들을 합류시키며 국내의 노동자, 농민, 학생을 비롯한 전민항쟁을 전개하자는 것이었다.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456쪽.)
소련은 독일을 패망시킨 후 일본과의 전쟁을 위해 1945년 여름 원동소련군총사령부를 조직하고 3개의 큰 전선군을 배치했다.
제1원동전선군의 기본작전지역은 할빈 이남의 중국동북 일부 지역과 조선이었고 제2원동전선군의 작전지역은 하바로프스크 서쪽에 있는 동북지역이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이 소속된 국제홍군특별독립 88여단은 제1원동전선군에 배속되어 전민항쟁 전술을 기초로 하여 함께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2) 전민항쟁의 진행
소련의 일본 선전포고가 다가오고 일제의 패망이 가시화되면서 우리 민족의 저항은 더욱 본격화되었다.
1944~1945년경에는 징용·징병의 기피형태로 전국 각지의 산속으로 들어가서 함께 해방을 위한 준비를 모색하는 경우가 많았다.
징병·학병 기피자들과 산속에 은신해 있던 운동가, 징용을 기피한 농민들은 초보적 수준이지만 무장대를 꾸렸다.
'평양학병사건'을 지도한 삼천당, 징용기피자가 중심이 된 경북의 결심대, 덕유산·지리산 등에서 항일유격대를 조직한 보광당, '부민관 폭파사건'으로 유명한 대한 애국청년당' 등 많은 조직이 무장봉기를 직접 실천에 옮기려 했다.
당시 총독부 고위 관리는 "사실 나는 1944년 말경부터 위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조선은 언제 어느 때 어디서 폭동이 일어날지 몰랐습니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김정인, 이준식, 이송순, "한국근대사②", 푸른역사, 2016, 329~332쪽.)
1945년에 들어서면서 일제의 임금착취, 가혹한 노동에 시달려왔던 노동자들은 일제의 군수생산에 반대하여 적극 투쟁했다.
1945년 6월 서두수(두만강의 지류 중 하나)공사장에 끌려 온 인부들과 허천(함경남도 북동부에 위치한 군) 일대 노동조합들은 일제가 북선 개척의 미명 하에 벌려 놓은 수력전기공사장과 철도부설확장공사장에서 댐을 파괴하고 집단탈주투쟁을 감행했다.
이 투쟁은 일제의 전시전기생산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다.
청진제강소를 중심으로 한 이 일대 공장 노동자들은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구호를 들고 일제의 군수생산을 지연시키거나 공장 설비들을 파괴했다.
함흥비료공장, 흥남항부두, 원산조선소, 문평제련소, 천내리시멘트공장 노동자들도 일제의 태평양전쟁에 충당할 군수물자생산을 지연시키고 그 수송을 저지했으며 항구를 봉쇄하는 등 각종 대중투쟁으로 일제의 침략정책 수행에 막대한 타격을 주게 된다.
평양, 신의주, 남포, 서울, 부산, 목포 등 산업중심지의 중화학, 방직, 기계, 운수, 체신 등 업종별 노조산하단체들도 대중적인 반일반전투쟁으로 일제의 군수생산을 파탄시켰다.
도처에서 발생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일제의 군사전략물자생산에 실질적인 타격을 주었다.
흥남화학공장에서 다이너마이트 생산이 1942년 8,398톤(t)에서 1944년 5,767톤(t)으로 떨어지고 1945년에 들어와서는 그 양이 전해에 비해 절반으로 더 줄어들게 된다.
또한 문평제련소 구리생산도 1941년 1,302톤(t)에서 1943년 1,017톤(t)으로 떨어졌고 1945년에는 더욱 감소되었다.
일본 각지로 끌려간 강제징용노동자들 속에서도 저항이 확대되었다.
북해도 삿포로군사기지공사장에 강제로 끌려간 노동자들은 공사장에서 태업을 조직하고 도주자를 확대하여 공사기간을 연장시키기도 했다.
농민들의 반일투쟁도 고조되었다.
함경남도, 평안남북도, 강원도, 경기도를 비롯한 전국 각지의 농민들은 일제의 농산물강제공출, 국방헌납금책동, 전시군사시설동원 등에 반대하여 격렬한 항의투쟁을 벌였다.
1945년 7월 황해남도 은율군 농민들은 일제의 공출에 반대하여 식량창고를 습격하기도 했다.
풍산, 북청, 흥원, 단천, 이원 등 비교적 농민조합이 강한 지역 농민들은 주변의 노동자들과 함께 일제의 농산물 약탈행위와 각종 부역에 반대하여 투쟁했다.
곡창지대로 알려진 전라도와 충청도, 경상도 농민들은 공출미헌납을 반대하여 면사무소습격, 쌀창고 방화 등 투쟁을 진행했다.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과 그 주변 수백명의 농민들은 일제의 쌀 공출에 반대하여 면사무소를 포위하고 식량창고를 습격하기도 했다.
조직적으로 꾸려진 무장대의 활동도 활성화되었다.
1945년 6월부터 전국 도처에서는 일제의 통치기구들에 대한 정찰활동과 이를 파괴하는 전투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함경북도 선봉군 백학산의 무장대는 나진 제19사단 76연대가 주둔해있는 지역의 무력상태를 알아내고 일본군 병영과 그 일대 경찰서 등을 습격했다.
1945년 7월 백사봉에 활동거점을 둔 부거, 부령무장대는 '나진-선봉요새'에서 일제의 포진지에 불을 지르고 경찰관 주재소에 대한 습격을 진행했다고 한다.
청진 이북의 경흥 요새 구역에서도 무장한 조선인들이 일제 병영과 토장, 경차관 주재소를 습격했다.
1945년 8월 초 무산군 강선리 노동단은 진화, 용산, 풍산 경찰서 습격을 단행했다.
1945년 7월 양덕의 대봉무장대, 신양군의 반일행동대, 쌍룡광산의 노동자돌격대, 용암리의 용암무장대 등 항쟁무장조직들도 일제 주둔지, 경찰무력 배치상태를 알아내고 일제의 관동군 방면군을 태운 열차 전복, 일제 기관과 면사무소, 헌병대에 대한 기습을 단행했다.
260여명 규모의 평양 조국해방단도 기동적인 기습전, 각종 형태의 군사활동을 벌였다.
조국광복회 승호리시멘트공장지회의 소부대들과 만달산노동무장대는 일본군사격장을 야간에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평양 선교리까지 진출해 전시식량수송을 파탄시키기도 했다.
평안북도 염주, 삭주, 창성지구의 항쟁 조직들도 광산, 도로부설장, 채벌장의 헌병대 등에 대한 기습전을 벌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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