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17
2001년, 왜 함석헌인가?
2001년, 왜 함석헌인가?
2001년, 왜 함석헌인가?
기독교계 이단아 아닌 새 지평 연 선각자로 이해해야
한종호 (amabi@hanmail.net)
승인 2001.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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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어떻게 읽을 것인가?
우리의 기독교 신앙 역사 속에는 소수의 굵직굵직한 이들이 선두에 서서 미답(未踏)의 경지를 개척해나갔습니다. 함석헌 선생 또한 그러합니다. 그 미답의 경지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동양인들의 삶과 기독교 신앙을 깊숙이 만나게 하려 했던 점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서양이 전해준 기독교 신앙과 그 신학체계를 그대로 받아들여 신주단지처럼 떠받들고 모시려했던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호흡과 우리의 역사, 우리의 삶을 기반으로 하여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재해석해 들어 갔던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자세가 언제나 옳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그의 이러한 시도는 기독교 신앙을 우리 자신의 현실에서 다가가는 능력을 길러나가는 데 있어 매우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이해와, 아프리카 흑인들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이해는 사뭇 다릅니다. 미국인들의 신앙이라고 해도, 1백년 전의 신학체계와 오늘의 신학체계는 또한 너무나 달라져 있습니다. 산업화가 그 초기의 단계에 있었던 사람들의 생활과, 오늘날의 삶이 제기하는 문제는 대단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 당시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들은 이른바 헬레니즘 문화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던 것은 따라서 그리스 철학이었습니다.
신앙도 그러한 각도에서 사고하고 받아들였으며, <주일(主日)>마저 전래의 안식일에서 이들 로마제국의 종교적 습속이었던 태양절과 관련이 있는 일요일(Sunday)로 대치되었습니다. 태양의 자리를 예수 그리스도가 차지하게 될 정도로 이들의 정신세계는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현실과 기독교 신앙을 만나게 한 결과였습니다. 성탄절마저도 로마제국의 천문학적 사고에 기반을 두고, 동지(冬至)가 끝나는 시점을 잡아 정해졌습니다. 하여, 비록 로마제국의 문화와 결합한 기독교 신앙이지만 그 신앙이 주려 했던 생명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고, 그들의 삶에서 가장 익숙한 형태를 취하여 이들의 마음에 다가갔던 것입니다.
복음서의 경우에도 우리는 그러한 면모를 볼 수 있습니다. 유대종교의 정신적 전통이 강한 지역에서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려 했던 마태복음 공동체는 구약의 족보를 기점으로 나사렛 예수를 설명하려했던 것과는 달리, 그리스 철학의 전통에 익숙한 요한복음은 이들이 잘 알고 있는 ‘로고스’의 개념을 중심으로 기독교 신앙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신앙을 전하려고 할 때에도, 아이들의 사고와 경험의 세계를 통해서 비유적으로 다가가지 않으면 아이들은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깨우치기가 어렵게 됩니다. 설교 또한 사람들의 구체적인 현실과 경험의 세계와 만나지 못하면 그 신앙적 메시지는 알아듣기 어려운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한마디로, 그 복음의 뿌리가 내리고자 하는 땅의 조건에 맞추어 그 복음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열매를 맺고자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로 시작된 성서일지라도, 우리말을 통해서 여과된 의미는 달라지기도 하며, 또 같은 말이라도 그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성서를 읽는 이에게 새롭게 다가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함석헌 선생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조선 땅에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는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은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이냐?” 하는 질문을 안고 평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 질문은 참으로 당연한 것이며 우리들로서도 마찬가지로 던져야 하는 질문입니다. 적지 않은 비신자들이 기독교 신앙에 다가가려 하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그건 유대인들의 역사 아니냐? 그들의 신앙 아니냐? 그게 왜 나와 관계가 있는가?” 하는 의문에서 비롯됩니다. 아브라함, 이삭, 모세 등등의 이름이 우리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괜히 남의 다리만 긁지 말고 아예 우리 자신의 역사에나 충실한 사상과 전통에 더 깊이 눈을 떠야 하지 않는가라는 힐난마저 합니다.
하여 우리는 자연스럽게, 수천 년 전의 히브리인들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이후 그와는 전혀 다른 풍토와 정신적 자산이 있는 동양인,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에게는 어떻게 역사하시는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궁해질 때, 우리는 수입된 종교사상에 매달리는 민족적인 혼마저 없는 이들로 여겨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동양정신+기독교사상=종교다원주의(?)
함석헌 선생은 바로 이 기독교 신앙을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힘있게 다가갈 수 있는 정신적 자양분을 동양정신의 맥에서 발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특히 그의 노자(老子) 연구는 바로 그러한 관점에서,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여겨 노자의 생각과 나사렛 예수의 언행을 깊이 연결시켜 사고하는 방식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노자적인 사고가 무의식적으로 삶이 된 동양인들의 심성에 가장 알맞게 다가갈 수 있는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정리해내고자 그토록 애를 썼던 것입니다.
인위(人爲)에 사로잡히지 않고 무위(無爲)의 도(道)에 따라 인간의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려 했던 마음은 오늘날에도 우리들의 심성 깊숙이 존재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억지로 꾸미지 않고 자연스럽게 살아가려는 정신적 욕구는 신앙인이나 비 신앙인 모두에게 무의식화 되어 있는 동양인들의 정신적 논밭입니다. 함석헌 선생은 바로 이 논밭을 개간하여 기독교 신앙이 이에 뿌리를 내려 열매를 맺기를 소망했던 것입니다. 이 점이 오해되면, 종교다원주의의 논란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하여, 그의 시도는 마치 요한복음이 당대의 그리스 철학적 사고에 젖어 있던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뜻을 전하고자 로고스의 개념에서 출발하여 이를 바탕으로 신앙의 세계를 풀어가려 했던 노력과 흡사한 것입니다. 따라서, 함석헌 선생은 기독교의 이단이 아니라, 기독교의 선교영역을 보다 넓혀 나간 선각자입니다.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 자산을 그대로 내어버리지 않고 이를 적절하게 밝혀 기독교 신앙과 만나게 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은 유대인들의 민족종교라고 배척하던 사람들의 마음에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정신, 그 신앙의 세계를 열어주려 했던 것은 우리에게 귀중한 정신적 자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그의 사상과 족적을 되새겨 본다면, 우리는 그에 대한 오해도 접고, 그가 못다 한 기독교 신앙의 주체적인 해석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인들의 무의식적 심성에까지 뿌리를 드리우는 신앙이 되고자 한다면, 실로 동양정신의 정수에 대한 이해가 밝지 않고서는 기독교 선교는 제한적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여 이 작업은 우리 모두가 당연히 시도해야 할 바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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