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함석헌 어떻게 읽을 것인가
2001년, 함석헌 어떻게 읽을 것인가
<표지이야기>역사를 깨운
한종호 (amabi@hanmail.net)
승인 2001.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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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빈들에 외치는 소리, 아니 건드리는 것이 없고, 못 들어가는 틈사리가 없고 간 데마다 닥쳐 싸워 이겨 울고 져서 우는 하늘 땅 사이를 달리는 바람 소리. ...살로메냐! 살로메냐! 썩어질 살로 내 가슴 매려느냐? 독사의 살로 내 목을 베려느냐? 시집 밑천 삼진 못할 내 목 잘라 쟁반에 들고 춤추는 오그라진 속아, 네 눈에 원수 갚음의 독살 소용이 없느니라. 나의 죽음이 쏜 빛살이 이미 네 살을 뚫어 꿰지 않았느냐? 나는 영원의 빈들에 메아리를 울리는 죽지 않는 외치는 소리." (함석헌: 나는 빈들에 외치는 소리)
스스로를 "빈들에 외치는 소리", "영원의 빈들에 메아리를 울리는 죽지 않는 외치는 소리"로 못박은 함석헌은 일제의 황량한 시대를 거쳐, 독재와 분단의 시기를 통해서 우리 역사에 거칠 것 없는 <하늘의 야성(野聲)>을 울린 이였다. 그는 20세기가 시작하는 첫 해인 1901년에 태어나 1989년, 88세의 장수를 누리면서 혹독한 세월을 때로는 폭풍처럼, 때로는 우박처럼 우리의 영혼을 몰아치고 울리며 살다 간 사상의 거인이었으며, 역사의 맥을 짚어내는 장엄한 시(詩)로 혜안(慧眼)의 빛을 우리의 어두웠던 정신에 비춘 민족 시인이기도 하였다.
그는 허연 수염과 하얀 두루마기 자락을 펄펄 날리면서, 고대 동양의 '선인(仙人)'과 같은 풍모로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살아 움직이는 예언자로서 우리의 역사에 우뚝 선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가 나타나면, 그 자리는 온통 존경의 마음이 우러났고, 그가 발걸음을 딛는 자리는 역사의 진전이 이루어지는 뜨거운 현장이 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성서는 하늘의 뜻을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읽어나가는 책이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존재는 그 내면에 완성의 힘을 가진 <씨알>이 되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노자와 같은 고대 동양의 지혜는 새로운 육성을 가진 깨우침이 되었고 편협했던 기독교 신앙에 우주와 인간을 온통 하나로 아우르는 힘을 갖도록 하였다. 이 밖에도 그가 일구어놓은 정신사의 흔적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1935년경, 그가 서른 다섯의 역사선생으로 정주 오산학교의 교편을 잡았던 시절, 함석헌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초고로 내놓는다. 이 글을 그의 신앙동지들과 함께 조국의 역사에 스며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찾기 위한 노력의 성과로 작성했던 것이다. 그는 이 글을 발간하지 못한 채 해방된 조국의 현실을 맞이하게 되는데, 1950년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라는 책으로 서울에서 출간하게 된다. 그리고 이 책은 더욱 연조를 더해가면서 1965년 다시 본래의 제목인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되어서 오늘의 모습이 되었다.
책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조국의 희망 일깨워
함석헌을 대중들에게 가장 많이 알리게 된 저서인 이 책은 믿음의 눈으로 본 조국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 민족에게 어떤 계시와 메시지를 주시려는가를 깨우치려 했던 것이다. 사실 이 책은 무슨 전문적인 역사저술도 아니고, 엄격한 역사학 방법론에 기초한 학술서적도 아니었다. 조선의 역사를 제대로 배울 수 없었던 시절, 젊은이들에게 오로지 자신의 민족사를 알게 하려는 일념 하나와, 그저 사실을 엮어나가는 역사책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두신 뜻까지 알게 하려는 마음이 이 책을 탄생하게 했던 것이다.
이 책은 그리하여, 함석헌의 사색의 열매였다. 평안도 시골구석의 한 초라한 민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이 자신의 혼과 열을 다하여 쏟아낸 이 글은 그러나 이후 무수한 젊은이들에게 조국의 역사에 열등감을 느끼지 않고 심오한 뜻과 새로운 희망을 품게 하는 책이 되었던 것이다. 1930년대는 어떤 시대였는가? 그야말로 세계적인 공황이 휩쓸고 이에 따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일제가 우리 나라를 병참기지화 하여 중국을 향해 총칼을 들이대었던 때가 아니었는가? 그래서 온 민족이 절망하고 갈 길을 잃은 채, 새로운 시대에 대한 비전을 갖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바로 이 때, 젊은 함석헌은 우리 민족의 고난의 경험이 도리어 우리를 새롭게 살려 내게 된다는 것을 깊이 깨우치고, 그 영감을 사람들에게 나누었던 것이다. 고난이란 짐이며, 그래서 조국의 역사를 외면하고 있던 젊은이들은 이러한 그의 역사해석에서 뜨거운 정신과 만났고, 그 정신의 감화로 잠자던 영혼이 일어나 역사의 현실을 감당하는 존재가 되어 갔던 것이다.
▲서재에 있는 함석헌 선생
(사진 함석헌기념사업회 제공) 여기서 그는 모든 역사의 주체를 '씨알'로 규정하고 이 존재가 역사의 밭에 뿌려져 하나님 나라를 일구게 된다고 보았다. 이것은 나사렛 예수의 비유를 관통하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변화의 현실을 의미했고, 당당한 자아를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민족사를 개간하는 주체를 뜻하는 것이었다. 이 씨알들이 자라나고, 힘을 모아 새로운 민족의 미래를 만들어내는 것을 꿈꾼 그는 그래서 이 씨알들의 성장을 가로막는 세력들에 대해서는 가만있지 않았다. 장준하와 손을 잡고 벌였던 <사상계>를 통한 싸움은 바로 이 씨알의 힘을 억누르려 했던 권세와 감연히 맞선 일이었다. 1950년대와 60년대를 걸쳐, <사상계>는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호흡과도 같은 출판물이었고,
암울했던 시대를 일으켜 세우는 새벽의 뜨거운 함성이었다.
그가 사상계에 발표하여 정치적 논란과 탄압을 불러일으킨,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함석헌이 역사의 현실에서 어떤 메시지를 온 몸으로 전하려고 했는지 일깨우는 글이라고 하겠다. 오랜 일제의 속박 속에서 당장의 생존이 급급했던 우리 민족, 그리고 다시 그 일제의 악령을 되불러온 독재의 사슬 속에서 우리 민족은 생각하며 사는 여유와 힘을 잃고 만 것이었다. 그리고 권력의 명령과 지시, 그리고 족쇄에 갇혀 마치 무뇌(無腦)적 존재처럼 살게 된 것을 그는 탄식했다. 사람이 아니라, 인형과 기계가 되어가고 있던 민족의 현실 앞에서 그는 용기 있게 "아니다!"를 외쳤고, 그 힘을 민족사의 전진을 위한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일에 진력을 다하였다.
성서독법 훈련으로 동양고전 새롭게 해석
그가 시대의 이단자가 되어 하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려는 의지를 그는 <대선언>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들어라, 오 들으라. 하늘이여 땅이여. 그 사이에 소용돌이쳐 오르는 인간의 회리 바람이여. 내 즐겨 이단자가 되리라. 비웃는다. 겁낼 줄 아느냐. 못될까 걱정이로다. 앞으로 밖에 모르는 몰아치는 영이 이를 명한다. 내 감히 자신 있어 지어먹는 맘에서랴, 내 속에 분명 딴 뜻을 나는 듣노라. 나의 나직하장에는 거슬리는 뜻을."
그런데 그는 정치적 이단자로서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평생에 그가 믿고 고백해온 기독교에서도 이단자적 위치를 마다하지 않았다. 대선언의 시 그 다음 구절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내 기독교에 이단자가 되리라. 참에야 어디 딴 끝 있으리라. 그것은 교회주의의 안경에 비치는 허깨비뿐이니라.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보다 위대하다."
함석헌의 정신은 워낙 광대하여 기존의 기독교 신학의 틀 안에 가둘 수 없었고, 기존의 교회주의적 고백으로는 성이 찰 수 없었다. 기독교가 둘러 처 놓은 울타리를 깨고, 그는 하나님의 육성에 담겨 있는 참이 무엇인가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도처에서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영이 하나님의 마음에 닿아 있으면, 참은 보인다는 그 신념이 그를 기독교의 이단자가 되게 하였으나, 종교간의 대화의 문을 열어 놓았고 서구에서 수입해온 기독교적 관점으로 멸시하며 지내온 동양정신의 깊이를 여는 역할을 감당하게 하였다. 이것은 실로, 그 동안 잠자고 있던 정신의 보고(寶庫)를 새롭게 발견하는 일이었고, 기독교 신앙으로 훈련되고 자란 정신의 힘으로 영감(靈感)의 차원이 달라진 그의 눈이 우리들에게 보여준 새로운 세계였다.
그의 노자 강좌의 첫 대목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노자를 하게 되었다고 그러는데, 왜 노자 공부를 하나?...종교란 종교는 다 동쪽에서 나서 서쪽으로 갔어요....서양문명이 발달하면 모든 것이 다 자동적으로 잘 풀려 나갈 줄 알았단 말이예요. 그러나 그것은 이미 착각이라는 것이 다 밝혀졌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어떡하지?" 동양, 거기 한번 찾아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단 말이예요....종교란 밑뿌리가 다 하나일건데, 발표형식이 다를 뿐인데....공자는 어려운 때니까, 실질적인 지식을 주자, 실천도덕이 중요하다 그랬는데 노자의 생각은,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해서 어찌 되느냐? 근본에서 잘못되어서 그러는데, 이제 그 근본을 다시 찾아돌아 가기 전에는 어찌 그럴 수 가 없지 않느냐? 보다 더 생각이 깊은 거예요. ..영적으로 해석한다할까, 정신적 해석이라 할까? 그런 견지에서 나는 하는 거니까."
결국 그가 추구하려 했던 것은 모든 인간사의 밑바닥에 관통하고 있는 정신적 문제의 근본을 바로 보자는 것이었고, 동양의 정신 속에 이미 있는 보고를 그대로 지나치지 말고 자세히 들여다보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자신을 혁파하여 새롭게 하자는 것이었다. 주목되는 것은 그의 이러한 동양고전의 해석이 과거 자구를 붙들고 구태의연하게 해석했던 한문학(漢文學)과는 달리, 그 뜻을 총괄적으로 살펴나가는 성서독법의 훈련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결국 그는 서양에서 들여온 기독교의 깊은 뿌리를 어루만지다가, 동양정신의 뿌리까지 가게 되었고 이 양자간의 대화를 통해서 하늘의 뜻을 캐묻고 대답해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자세는 어둠에 갇혀 있던 인간의 정신세계에 맑은 생수를 부어나가는 일이었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의 크기를 우주적 규모로 만드는 일이었으며, 하나님의 뜻을 도처에서 찾아 이를 이루는 일과 통했던 것이다.
이제 함석헌 선생 탄신 1백주년을 맞이해서 기독교는 그가 걸어갔던 사상적 자취를 되돌아보면서 우리 자신의 편협함과 배타성을 극복하고, 광활한 정신세계의 확대를 이루어 기독교가 이 시대에 보다 큰 힘으로 호소력을 갖고 인간의 삶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나는 빈들에 외치는 소리, 아니 건드리는 것이 없고, 못 들어가는 틈사리가 없고 간 데마다 닥쳐 싸워 이겨 울고 져서 우는 하늘 땅 사이를 달리는 바람 소리. ...살로메냐! 살로메냐! 썩어질 살로 내 가슴 매려느냐? 독사의 살로 내 목을 베려느냐? 시집 밑천 삼진 못할 내 목 잘라 쟁반에 들고 춤추는 오그라진 속아, 네 눈에 원수 갚음의 독살 소용이 없느니라. 나의 죽음이 쏜 빛살이 이미 네 살을 뚫어 꿰지 않았느냐? 나는 영원의 빈들에 메아리를 울리는 죽지 않는 외치는 소리." (함석헌: 나는 빈들에 외치는 소리)
스스로를 "빈들에 외치는 소리", "영원의 빈들에 메아리를 울리는 죽지 않는 외치는 소리"로 못박은 함석헌은 일제의 황량한 시대를 거쳐, 독재와 분단의 시기를 통해서 우리 역사에 거칠 것 없는 <하늘의 야성(野聲)>을 울린 이였다. 그는 20세기가 시작하는 첫 해인 1901년에 태어나 1989년, 88세의 장수를 누리면서 혹독한 세월을 때로는 폭풍처럼, 때로는 우박처럼 우리의 영혼을 몰아치고 울리며 살다 간 사상의 거인이었으며, 역사의 맥을 짚어내는 장엄한 시(詩)로 혜안(慧眼)의 빛을 우리의 어두웠던 정신에 비춘 민족 시인이기도 하였다.
그는 허연 수염과 하얀 두루마기 자락을 펄펄 날리면서, 고대 동양의 '선인(仙人)'과 같은 풍모로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살아 움직이는 예언자로서 우리의 역사에 우뚝 선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가 나타나면, 그 자리는 온통 존경의 마음이 우러났고, 그가 발걸음을 딛는 자리는 역사의 진전이 이루어지는 뜨거운 현장이 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성서는 하늘의 뜻을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읽어나가는 책이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존재는 그 내면에 완성의 힘을 가진 <씨알>이 되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노자와 같은 고대 동양의 지혜는 새로운 육성을 가진 깨우침이 되었고 편협했던 기독교 신앙에 우주와 인간을 온통 하나로 아우르는 힘을 갖도록 하였다. 이 밖에도 그가 일구어놓은 정신사의 흔적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1935년경, 그가 서른 다섯의 역사선생으로 정주 오산학교의 교편을 잡았던 시절, 함석헌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초고로 내놓는다. 이 글을 그의 신앙동지들과 함께 조국의 역사에 스며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찾기 위한 노력의 성과로 작성했던 것이다. 그는 이 글을 발간하지 못한 채 해방된 조국의 현실을 맞이하게 되는데, 1950년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라는 책으로 서울에서 출간하게 된다. 그리고 이 책은 더욱 연조를 더해가면서 1965년 다시 본래의 제목인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되어서 오늘의 모습이 되었다.
책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조국의 희망 일깨워
함석헌을 대중들에게 가장 많이 알리게 된 저서인 이 책은 믿음의 눈으로 본 조국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 민족에게 어떤 계시와 메시지를 주시려는가를 깨우치려 했던 것이다. 사실 이 책은 무슨 전문적인 역사저술도 아니고, 엄격한 역사학 방법론에 기초한 학술서적도 아니었다. 조선의 역사를 제대로 배울 수 없었던 시절, 젊은이들에게 오로지 자신의 민족사를 알게 하려는 일념 하나와, 그저 사실을 엮어나가는 역사책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두신 뜻까지 알게 하려는 마음이 이 책을 탄생하게 했던 것이다.
이 책은 그리하여, 함석헌의 사색의 열매였다. 평안도 시골구석의 한 초라한 민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이 자신의 혼과 열을 다하여 쏟아낸 이 글은 그러나 이후 무수한 젊은이들에게 조국의 역사에 열등감을 느끼지 않고 심오한 뜻과 새로운 희망을 품게 하는 책이 되었던 것이다. 1930년대는 어떤 시대였는가? 그야말로 세계적인 공황이 휩쓸고 이에 따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일제가 우리 나라를 병참기지화 하여 중국을 향해 총칼을 들이대었던 때가 아니었는가? 그래서 온 민족이 절망하고 갈 길을 잃은 채, 새로운 시대에 대한 비전을 갖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바로 이 때, 젊은 함석헌은 우리 민족의 고난의 경험이 도리어 우리를 새롭게 살려 내게 된다는 것을 깊이 깨우치고, 그 영감을 사람들에게 나누었던 것이다. 고난이란 짐이며, 그래서 조국의 역사를 외면하고 있던 젊은이들은 이러한 그의 역사해석에서 뜨거운 정신과 만났고, 그 정신의 감화로 잠자던 영혼이 일어나 역사의 현실을 감당하는 존재가 되어 갔던 것이다.
▲서재에 있는 함석헌 선생
(사진 함석헌기념사업회 제공) 여기서 그는 모든 역사의 주체를 '씨알'로 규정하고 이 존재가 역사의 밭에 뿌려져 하나님 나라를 일구게 된다고 보았다. 이것은 나사렛 예수의 비유를 관통하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변화의 현실을 의미했고, 당당한 자아를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민족사를 개간하는 주체를 뜻하는 것이었다. 이 씨알들이 자라나고, 힘을 모아 새로운 민족의 미래를 만들어내는 것을 꿈꾼 그는 그래서 이 씨알들의 성장을 가로막는 세력들에 대해서는 가만있지 않았다. 장준하와 손을 잡고 벌였던 <사상계>를 통한 싸움은 바로 이 씨알의 힘을 억누르려 했던 권세와 감연히 맞선 일이었다. 1950년대와 60년대를 걸쳐, <사상계>는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호흡과도 같은 출판물이었고,
암울했던 시대를 일으켜 세우는 새벽의 뜨거운 함성이었다.
그가 사상계에 발표하여 정치적 논란과 탄압을 불러일으킨,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함석헌이 역사의 현실에서 어떤 메시지를 온 몸으로 전하려고 했는지 일깨우는 글이라고 하겠다. 오랜 일제의 속박 속에서 당장의 생존이 급급했던 우리 민족, 그리고 다시 그 일제의 악령을 되불러온 독재의 사슬 속에서 우리 민족은 생각하며 사는 여유와 힘을 잃고 만 것이었다. 그리고 권력의 명령과 지시, 그리고 족쇄에 갇혀 마치 무뇌(無腦)적 존재처럼 살게 된 것을 그는 탄식했다. 사람이 아니라, 인형과 기계가 되어가고 있던 민족의 현실 앞에서 그는 용기 있게 "아니다!"를 외쳤고, 그 힘을 민족사의 전진을 위한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일에 진력을 다하였다.
성서독법 훈련으로 동양고전 새롭게 해석
그가 시대의 이단자가 되어 하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려는 의지를 그는 <대선언>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들어라, 오 들으라. 하늘이여 땅이여. 그 사이에 소용돌이쳐 오르는 인간의 회리 바람이여. 내 즐겨 이단자가 되리라. 비웃는다. 겁낼 줄 아느냐. 못될까 걱정이로다. 앞으로 밖에 모르는 몰아치는 영이 이를 명한다. 내 감히 자신 있어 지어먹는 맘에서랴, 내 속에 분명 딴 뜻을 나는 듣노라. 나의 나직하장에는 거슬리는 뜻을."
그런데 그는 정치적 이단자로서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평생에 그가 믿고 고백해온 기독교에서도 이단자적 위치를 마다하지 않았다. 대선언의 시 그 다음 구절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내 기독교에 이단자가 되리라. 참에야 어디 딴 끝 있으리라. 그것은 교회주의의 안경에 비치는 허깨비뿐이니라.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보다 위대하다."
함석헌의 정신은 워낙 광대하여 기존의 기독교 신학의 틀 안에 가둘 수 없었고, 기존의 교회주의적 고백으로는 성이 찰 수 없었다. 기독교가 둘러 처 놓은 울타리를 깨고, 그는 하나님의 육성에 담겨 있는 참이 무엇인가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도처에서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영이 하나님의 마음에 닿아 있으면, 참은 보인다는 그 신념이 그를 기독교의 이단자가 되게 하였으나, 종교간의 대화의 문을 열어 놓았고 서구에서 수입해온 기독교적 관점으로 멸시하며 지내온 동양정신의 깊이를 여는 역할을 감당하게 하였다. 이것은 실로, 그 동안 잠자고 있던 정신의 보고(寶庫)를 새롭게 발견하는 일이었고, 기독교 신앙으로 훈련되고 자란 정신의 힘으로 영감(靈感)의 차원이 달라진 그의 눈이 우리들에게 보여준 새로운 세계였다.
그의 노자 강좌의 첫 대목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노자를 하게 되었다고 그러는데, 왜 노자 공부를 하나?...종교란 종교는 다 동쪽에서 나서 서쪽으로 갔어요....서양문명이 발달하면 모든 것이 다 자동적으로 잘 풀려 나갈 줄 알았단 말이예요. 그러나 그것은 이미 착각이라는 것이 다 밝혀졌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어떡하지?" 동양, 거기 한번 찾아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단 말이예요....종교란 밑뿌리가 다 하나일건데, 발표형식이 다를 뿐인데....공자는 어려운 때니까, 실질적인 지식을 주자, 실천도덕이 중요하다 그랬는데 노자의 생각은,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해서 어찌 되느냐? 근본에서 잘못되어서 그러는데, 이제 그 근본을 다시 찾아돌아 가기 전에는 어찌 그럴 수 가 없지 않느냐? 보다 더 생각이 깊은 거예요. ..영적으로 해석한다할까, 정신적 해석이라 할까? 그런 견지에서 나는 하는 거니까."
결국 그가 추구하려 했던 것은 모든 인간사의 밑바닥에 관통하고 있는 정신적 문제의 근본을 바로 보자는 것이었고, 동양의 정신 속에 이미 있는 보고를 그대로 지나치지 말고 자세히 들여다보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자신을 혁파하여 새롭게 하자는 것이었다. 주목되는 것은 그의 이러한 동양고전의 해석이 과거 자구를 붙들고 구태의연하게 해석했던 한문학(漢文學)과는 달리, 그 뜻을 총괄적으로 살펴나가는 성서독법의 훈련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결국 그는 서양에서 들여온 기독교의 깊은 뿌리를 어루만지다가, 동양정신의 뿌리까지 가게 되었고 이 양자간의 대화를 통해서 하늘의 뜻을 캐묻고 대답해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자세는 어둠에 갇혀 있던 인간의 정신세계에 맑은 생수를 부어나가는 일이었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의 크기를 우주적 규모로 만드는 일이었으며, 하나님의 뜻을 도처에서 찾아 이를 이루는 일과 통했던 것이다.
이제 함석헌 선생 탄신 1백주년을 맞이해서 기독교는 그가 걸어갔던 사상적 자취를 되돌아보면서 우리 자신의 편협함과 배타성을 극복하고, 광활한 정신세계의 확대를 이루어 기독교가 이 시대에 보다 큰 힘으로 호소력을 갖고 인간의 삶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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