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 [장정일 칼럼] 나는 백살 때 어떤 책을 읽고 있을까?
[장정일 칼럼] 나는 백살 때 어떤 책을 읽고 있을까?
장정일 소설가
등록: 2018.01.24 13:21
어느 출판사에서 신인작가의 소설을 보내주고 싶으니 주소를 가르쳐 달라는 메일이 왔다. 옛날 같았으면 재깍 주소를 알려주고 증정본을 덥석 받았을 테지만, 지금은 사정이 그렇질 못하다. 고민 끝에 사양하는 답신을 보냈다. “제가 신간 소설을 웬만하면 읽지 않으려고 합니다. 쉰일곱 살이나 되었으니, 갈 날도 멀지 않은 데다가, 눈도 침침해집니다. 그나마 남은 시간 동안 읽어야 할 소설은 아직 읽지 못한 무시무시한 고전들뿐입니다. ○○○ 작가는, 저보다 더 열렬한 독자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써놓고 보니, 너무 비장하군요. 하여튼 이게 현재 저의 상황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노년에 맞추어 독서를 관리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있다. 온갖 독서에 관한 책이 넘치지만, 노년에게 필요한 독서 관리술은 좀체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던 중에 작년 연말에 나온 쓰노 가이타로의 ‘100세까지의 독서술’(북바이북,2017)을 마침맞게 읽게 되었다. 연극 연출을 하다가 출판 편집자가 된 지은이는 1960~70년대 일본 청년 문화에 영향을 끼친 여러 책을 기획했고, 이후에는 대학 교수로 있다가 정년퇴직을 했다. 지금은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일흔 살 넘어 이 책을 썼다.
평생 책을 탐닉해온 사람은 어떡해서라도 이 즐거움을 생의 마지막까지 유지하려고 한다. 노인이 독서를 계속해 나가기 위해 넘어야 할 장애는 많다. 더 이상 좋아질 수 없는 시력은 포기한다고 치더라도, 믿어왔던 내 기억력과 집중력마저 가차 없이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미처 상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끝에 “어릴 적부터 시작된 기나긴 독서 생활의 종말”이 기다리고 있다. 반면 작가나 저술가의 노년은 일반적인 독서가와 딴판의 역설을 만나게 된다. 노년이 된 작가는 쓸거리가 생겨도 쓰려고 하지 않고, 이전처럼 밀도 높은 문장을 구사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생각한다. 쓰는 인간이 되기 전, 애초에 나는 읽는 인간이었다고.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즐겁게 생을 마치리라.” 그러나 작가라고 해서 뭇 노년이 마주한 장애를 피할 재주는 없다.
젊을 때의 독서는 무한한 미래가 있다. 그래서 세상의 활자를 다 읽어 치울 태세로 책에 욕심을 낸다. 그런 착각은 60대 중반 정도까지 지속되지만, 일흔을 넘기면서 깨진다고 한다. 이 나이가 되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으레 이런 자문을 거친다. “나에게도 죽음이 곧 닥칠 것이다. 내게 남은 그 한정된 시간 내에 과연 몇 권의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이런 자문은 거의 형식적인 절차와 같아서, 결국은 지금까지의 독서습관을 그대로 고수하게 된다.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남독파(濫讀派)는 여든이 되어서도 부지런히 새로운 주제를 찾아 다니고, 한 우물을 파는 독서가는 원래 읽던 것만 되풀이 읽는다. 당신은 어떤가?
인생이 ‘태어나고(生)’ ‘늙고(老)’ ‘죽는(死)’ 것이기만 하다면 그럭저럭 괜찮다. 잔혹하고 심술궂은 자연은 인간을 늙어서 죽게 내버려 두지 않고, 꼭 ‘아프다(病)’가 죽게 만들었다. 그런데 지은이는 ‘병원에도 책의 길’이 있다면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면 평시와는 색다른 독서 경험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커튼으로 둘러싸인 침대는 서재, 환우들이 남긴 각 병동의 재활용 책장은 도서관, 병원의 구내서점은 신간 서점, 가족이나 친구가 날라주는 책은 인터넷 서점. 일흔다섯 살 때 난생 처음으로 수술을 하고 입원실 신세를 졌던 지은이는 열이틀 동안 한동안 기피해왔던 소설을 실컷 읽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의 기벽은 다 읽지도 못할 책을 멈추지 않고 사들이는 것이다. 개인 장서가 2,000권만 넘어도 책은 집안의 애물단지가 된다. 뜻밖에도 이 악습의 해결사는 정년퇴직을 하면서 찾아오는 급격한 수입 감소다. 이제 남은 고민은 이제껏 소장해온 책을 어떻게 처분하고 죽는가이다. 요즘의 도서관은 책을 기증 받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전자책과 디지털이 기록 문화의 총화가 되면서, 물성을 가진 책은 그것을 폐기해야 하는 가족과 지인에게 고인을 참수하는 것이나 같은 죄책감을 안긴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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