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21

한청훤 - <백년의 마라톤>

한청훤 - 구정 九鼎의 무게를 물었을때 - 백년의 마라톤 춘추오패 중 하나인 초 장왕이 당시 형식상 종주국인 주나라의...






한청훤
27 May at 14:19 ·



구정 九鼎의 무게를 물었을때 - 백년의 마라톤

춘추오패 중 하나인 초 장왕이 당시 형식상 종주국인 주나라의 사신을 접대하면서 문득 주나라 왕실의 상징인 구정의 무게를 물었다. 이에 주나라 사신은 덕이 중요하지 구정은 상징일 뿐이라면서 초장왕의 질문을 일축했는데, 이 고사에서 유래하여 구정의 무게를 묻는 것은 일종의 천하패권을 차지하려는 야심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것을 암시하는 뜻으로 동아시아에서 줄곧 사용되었다. 백년의 마라톤에도 이 구정의 무게를 묻는 것이 곧잘 나오는데 저자가 지적한 중국의 전략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때가 오기 전에 절대 구정의 무게를 묻지 않는다."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들에게는 매우 친숙하지만 서양인들에게는 생소할 두 가지 고대 중국 고사를 예를 들며 저자는 중국의 대미 핵심 외교 전략을 서술한다. 첫 번째는 와신상담이고 두 번째는 조조와 대화 중에 번개가 치자 두려움에 벌벌 떨며 겁쟁이 연기를 한 유비의 이야기다.

월의 부차나 촉의 유비 처럼 중국의 전략은 당대 천하패권국인 미국 앞에 자신의 진짜 야심을 숨기고 철저히 약자 행세를 하며 조용히 경제성장에 매진해 꾸준히 힘을 기르는 것이었다. 미국과 자웅을 겨룰 수 있는 힘이 생기기 전에 경솔하게 구정의 무게를 묻는다면 중국의 굴기는 싹부터 도려내 질 것 이기 때문에 장구한 전략적 기만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나온 말이 오랜 기간 중국 외교전략을 대표했던 도광양회이며 화평굴기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이미 대소련 관계에서 구정의 무게를 물었다가, 즉 사회주의 패권국의 지위에 대한 야심을 너무 일찍 드러냈다가 소련으로 부터 모든 원조가 끊기고 극심한 견제와 압박을 받은 큰 실패 경험이 있다. 대미관계에서도 두 번 다시 이런 구정의 무게를 묻는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된 다는 게 현대 중국을 만든 덩샤오핑의 첫 번째 외교 지침이었다.

그렇게 중국의 전략적 기만술은 성공에 성공을 거듭했다. 미국은 중국을 포용하고 적극적으로 도와주면 중국이 언젠가 서구식 가치와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기대하고 일종의 대중국 햇볕정책을 민주 공화 정권 가리지 않고 일관되게 펴면서 중국에 엄청난 물질적 경제적 기술적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냉전시기에는 대 소련 견제 목적이 컸지만 소련 붕괴와 천안문 사태가 발생했음에도 미국은 중국이 언젠가 동아시아의 미국이 될 것이라는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고 계속 퍼주었다. WTO 가입도 도와주었고 세계은행, IMF를 통한 경제 발전 전략도 수립해 주고 광대한 시장을 개방하여 매년 엄청난 제품을 사주면서 중국의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산업 혁명을 도와주면 미국은 중국에 말그대로 아낌없이 퍼주기를 해줬다. 저자를 포함한 소위 친중파들은(저자는 2006년 까지 약 25년 까지 친중파였다.) 중국의 시장개혁과 경제성장을 도와주면 중국이 언젠가 제2의 한국 대만이 될 것이라는 낙관적 희망을 놓지 않았다. 중국은 이 기회를 통해 30여년 만에 전 세계 최빈국에서 G2에 육박하는 제2 경제대국으로 말 그대로 굴기해 버렸다.

중국의 구정을 묻지 않는 전략과 미국판 햇볃정책이 콜라보 되며 장기간 평화와 번영을 구가한 미중관계는 2008년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중대한 고비를 맞이하게 된다. 이라크 전쟁이라는 천하패권국의 외교적 추락에 이어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세계적 위기를 초래하며 위신추락을 하자 북경의 당 최고 엘리트 분석가들은 자신들이 오매불망 바라던 '세'(勢)가 예정된 시간표 보다 훨씬 빨리 바뀐 것 아닌가 의문을 표하게 된다. 거기다 중국은 엄청난 규모의 재정정책을 통해 전 세계에서 가장 빨리 모범적으로 금융위기를 극복하며 중국이 세계 경제를 구했다는 찬사를 듣게 되자 이러한 의심을 굳히게 된다. 바로 미국의 추락이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시작되었으며 중국의 국력으로 천하패권을 가져올 수 있는 시기가 임박한 만큼 천하패권 교체를 준비해야 할 시기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정세판단이다. 이러한 정세판단아래 이제는 구정의 무게를 묻고 구정을 가져올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는, 덩샤오핑 이후 30년 간 지속된 전략적 기만과 인내전략을 대대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었으며 2013년 출범한 시진핑 정권 국정이념인 중국몽은 바로 그런 베이징 전략가들의 컨센서스를 토대로 나온 것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후진타오 정권 말기 부터 시진핑 정권 내내 중국의 외교정책이 왜 그렇게 국수주의적이고 공격적이고 일방적이며 때이른 패권국가 행세를 하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지금 중국은 주변 거의 모든 나라들과 영토와 주권침해 문제로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다. 오랜 기간 중국의 경제발전을 도와준 일본과는 영토 분쟁, 한국과는 사드 배치 문제, 동남아시아 각국 및 인도와 영토 문제 등등.

중국이 구정의 무게를 물어야 할 때가 왔다는 북경의 경세가들의 판단은 옳았던 것일까? 지금 시점에서 시기의 적절함에 대해 판단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도전자의 구정의 무게에 대한 질문이 천하패권국의 역린을 건드린 것만은 확실하다. 시진핑 정권의 공격적 민족주의와 대외 초강경 정책, 일방주의를 미국이 정식으로 자신들의 유일패권에 대한 위협적 도전으로 받아들였고 이에 대해 전면적인 응전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무역전쟁을 발발시킨 트럼프 정권의 개인 지도자나 특정 정권만의 특징적인 움직임도 아니다. 이미 오바마 정권 말기에 아시아로의 회귀 정책 및 TPP 추진 등을 통해 외교, 안보, 경제, 무역 전분야에서 대대적인 대중국 고립정책이 진행되고 있었고 트럼프와 대선에서 겨루어 패배했던 힐러리 클린턴이 바로 이 대중국 포위정책을 주도한 당시 국무장관 이었다. 감히 구정의 무게를 물은 죄를 묻겠다는 게 미국 특정 당파나 정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닉슨의 중국 방문 전후로 부터 25년 넘게 친중파 였다가 2000년대 중반 쯤 중국의 구정의 무게를 묻지 않는 전략을 간파하고 현재 가장 대표적인 반중파가 된 외교안보 인사이다. 거기다 지금 트럼프 정권의 인수위원으로 활동하며 트럼프 정권의 대중정책의 판을 짠 사람이다. 작년 펜스 대통령이 한 연구소에서 행한 트럼프 정권의 대 중국정책 기조에 대한 연설도 저자의 이 책의 요약판 수준으로 볼 수 있다.

지금 역린이 건드려진 천하패권자는 구정의 무게를 물은 죄에 대해 확실히 묻자고 나서고 있으며 패권도전자는 구정의 무게를 물은 댓가를 톡톡히 치루고 있는 셈이다. 08년 금융위기 후 후진타오 정권 말기 미국의 몰락이 임박했다는 정세판단을 했던 베이징의 최고 전략가들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시진핑은 자기 정권의 이념과 지침을 짰던 그 전략가들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을까? 원망하고 싶을까? 아니면 우선 눈앞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결사항전만 생각할 까? 작년 모두의 예상과 달리 트럼프가 대중 무역전쟁을 일으키며 중국의 경제성장율이 떨어지고 외국투자가 감소하며 코너로 몰리자 시진핑 정권의 핵심 책사인 왕후닝 상무위원에 대해 당내외 에서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는 뉴스가 기억난다. 중국은 어떤 선택을 할까? 이왕 구정의 무게를 물은 것, 이판사판 한판 붙어보자고 나올까, 아님 다시 넙죽 엎드리고 구정의 무게를 물은 것을 억지로라도 주어담고 다시 와신상담의 길로 갈까? 당분간 이판사판과 주어담는 것 두 개다 병행해서 쓰면서 일단 이 위기를 넘기고자 할 텐데 어느 선에서 미중이 타협한다 치더라도 미중관계와 더 나아가 전 세계가 예전과 같은 미중관계 황금기로 두 번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건 분명해 보인다. 미중관계 황금기의 해택을 가장 톡톡히 봤던 나라 중 하나인 한국에게도 큰 발등의 불이 떨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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