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23

강주영 지금개벽과_과학적사회주의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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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영
Yesterday at 05:19 ·



#지금개벽과_과학적사회주의이성

영성, 개벽, 하늘 등이 계급투쟁과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다. 촛불은 합리적 시민 이성이 아니라 이타적인 상부상조의 영성이었다. 촛불은 파시즘화한 이기적 합리성에 대항한 영성의 계급투쟁이었다.

투쟁의 실물적 주체는 노동계급이나 농민계급이 아니었다. 실물로서 노동계급이나 농민계급이 참여했다 하더라도 촛불광장의 공감대는 전통적 계급성이 아니다. 이타적인 상부상조의 영성이야말로 노동계급이 가질 최우선의 덕목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오독하고 잘못 배운 과학적 사회주의 이성의 계급성이 그릇된 노동계급 선민주의를 낳았다. 망루에서 고공 투쟁하는 노동자는 말하여도 날마도 목숨을 걸고 일하지만 파산하는 자영업자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한국의 자영업자는 하강 분해된 노동계급이지 고전적인 의미의 쁘띠부르주아지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90%는 노동계급이다. 농민과 노동계급은 구분되지 않는다. 1억 가까운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와 땅을 좀 가졌다하여 연봉 5천만 원은커녕 빚만 지는 농민을 쁘띠부르주아지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러시아혁명이나 중국혁명의 주체는 지식인과 농민 짜르와 군벌을 이탈한 병사들이었지 노동계급이 아니었다. 볼세비키들의 저작이 노동계급으로 도배되었다하더라도 그들은 과학적 사회주의 이성으로 정권을 잡은 게 아니라 소비에트(우리말로 인민평의회) 혁명을 볼세비키쿠데타로 바꿔치기하였을 뿐이다.

볼세비키는 노동자를 서구 자본주의와 같이 생산력 경쟁인 대약진 운동으로 내몰았다. 그들 역시 지구를 약탈하였다.

자유로운 상호부조와 협동, 자유로운 자치자급, 자주관리라는 오래된 사회주의적 영성을 프롤레타리아독재와 국가관리 그리고 노동계급주의로 대체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망했다.

80년대 이후 한국의 노동계급은 단 한 번도 이웃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 자신만을 위해서 싸웠다. 그 투쟁을 지지하지만 그 투쟁에만 갇혀있는 것은 적폐이다. 노동계급은 그릇된 과학적 사회주의 이성을 개벽해야 한다.

전선은 자본 대 민중이다. 자본대 노동계급이 아니다. 전선은 근대의 합리적 이성(과학적 사화주의 이성 포함)과 이타적 영성이다. 전선은 헛세계화와 진세계화이다. 전선은 국가와 마을이다. 전선은 지구 약탈과 지구 생태이다. 전선은 산업단지와 마을이다.

마을은 동네가 아니다. 마을에는 영역과 국경이 없다. 유니세프나 단체를 통하지 않고 네팔에 학교를 직접 새우려는 동아리의 구성원을 만났다. 네팔의 주민과 동아리는 국가를 매개하지 않는 한마을이다.

혁명에는 과학이 없다. 이타적 영성이 필요할 뿐이다. 민노총이 네팔 주민에게 후원금을 내는 노동자국제주의를 실현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 과학적 사회주의 이성은 국가 권력을 잡아서 국가 권력으로 세상을 바꾸겠다고 혁명을 뒤로 마룬다.

그러나 '지금개벽'하는 이들은 마을에 오래된 새로움을 지금 만들고 있으며 그만큼 국가를 소멸시키고 있다.

소래 박홍규 작 <모악산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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