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14

04 '귀농운동 20년을 돌아보며' (상임대표 대담회와 제2귀농운동론 정립을 위한 콜로키움) - 귀농정책연구소



'귀농운동 20년을 돌아보며' (상임대표 대담회와 제2귀농운동론 정립을 위한 콜로키움) - 귀농정책연구소



연구소 소개
‘귀농운동 20년을 돌아보며’ (상임대표 대담회와 제2귀농운동론 정립을 위한 콜로키움)
refarmi
2016년 7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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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년 ‘귀농’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회에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귀농본부가 설립되고 20년이 흘러 ‘귀농’이라는 말이 일반적인 명사가 되었고 귀농인구는 2010년을 기점으로 꾸준히 증가추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귀농관련 지원금이 생겨났고 귀농교육을 하는 단체가 전국적으로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무언가 중요한것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귀농운동 20년동안 ‘귀농’이라는 말을 처음 사회에 던졌을때 귀농본부는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운동들을 해왔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20년을 이끌어갈 귀농운동에 대하여 고민을 해보고자 합니다.
2016년 20주년을 맞이한 귀농운동본부는 귀농정책연구소와 함께 제2의 귀농운동론 정립을 위한 3차례의 콜로키움을 기획하였습니다. 첫시간으로 그간 귀농운동을 이끌어온 세분의 상임대표님을 모시고 대담회를 가졌습니다.

일 시 : 2016년 7월 14일 (목) 오전9시 ~ 12시
장 소 : 종로
참 석 : 이병철(귀농본부 설립 초대 상임대표), 정용수(전 상임대표, 소농학교장), 차흥도(현 상임대표), 사무처, 귀농정책연구소

뒤이어 본격적으로 제2의 귀농운동론 정립을 위한 1차 콜로키움을 하였습니다.

일 시 : 2016년 7월 18일 (월) 오후3시 ~ 6시
장 소 : 명동
참 석 : 전, 현직 상임대표 세분, 귀농본부 임원, 귀농정책연구소 연구위원, 사무처
발 제 : 이병철, 김용우

처음 귀농운동을 시작하게 된 이병철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다시한번 사업만 진행하는 실무자가 아닌 활동가이자 운동가라는 생각이 들어서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좀 긴글이기는 하지만 많은 회원님들과 함께 공유하고자 이병철 선생님의 2004년 글을 같이 올려봅니다. ‘귀농’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다시 한번 새기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박호진)









귀농, 생태적 삶과 그 문명으로의 길

이병철/ 전국귀농운동본부장/2004

농촌으로 돌아가기. 삶의 근거를 농촌 또는 땅에 가까이 둠으로써 새롭게 삶을 시작하고자 하는 귀농(歸農)과 이의 사회화를 위한 귀농운동이 도시 중심의 산업문명 위기와 한계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 글은 귀농 또는 귀농운동이 갖는 여러 의미 가운데 현존 산업문명의 위기와 한계를 진단하고 그 대안으로서 농적문명(農的文明)을 중심으로한 생태문명과 생태적 삶으로의 전환으로서 귀농과 그 운동이 갖는 의미를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1.위기, 그 재앙에서 살아남기

사태가 심상치 않다.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위기는 단순히 일자리의 축소, 실질 소득의 감소 등에 따른 경제적 고통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생존 자체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환경오염 등으로 인한 지구 생태계, 생명계에 대한 재난이 위험 수위를 넘어선 것이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특히 최근 들어 갈수록 더욱 심화되고 있는 세계 전역에 걸친 홍수, 태풍, 가뭄 등 대규모 기상이변으로 인한 재해와 겹쳐 이제 인류 생존이 치명적으로 위협받고 있다. 지금 우리는 백년 또는 수 백년만에 한번 올까말까하는 기상이변이 오히려 일상화된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이미 98년 가을, 미국의 코넬대학은「일상 생활이 우리를 죽이고 있다」라는 보고서에서 전 세계 사망인구의 40%가 환경오염 또는 환경과 관련된 질병으로 죽었다는 충격적인 발표를 했다. 이 보고서는 최근 엘리뇨 등 이상 기후가 이 같은 수치를 더욱 높일 것이며, 사람이 넘치는 도시 생태계에서는 잊혀졌던 질병들이 다시 발생하고 새로운 질병까지 만연하게 될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특히 온난화 등으로 야기되는 기상 이변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새로운 질병을 발생시키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매년 공기 오염 물질이 40~50억 명의 건강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수 백만 명이 환경 재해자가 될 것이고 도시 주거지역의 오염으로 인해 필사적으로 먹거리를 찾아 나서는 수많은 난민들이 발생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지난 봄 미 국방성 비밀보고서에선 앞으로 20년 안에 급격한 기후 변화로 인한 자연재해와 전쟁 등으로 수많은 사람이 사망하는 등 전지구적 재앙이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

영국의 옵저버 지가 폭로한 내용(2004년 2월)에 따르면 미 국방성 비밀보고서는 이러한 재앙이 2007년부터 구체화되면서 앞으로 20년 이내 전면화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녹으면서 해수면의 상승과 해류의 변화로 유럽 주요도시는 물 속에 잠기게 되고 영국과 북유럽은 시베리아와 같은 혹한의 기후대가 될 것이며 이로 인해 수많은 난민이 발생하고 대규모의 한발이 세계 주요 곡창지대를 강타하는 등 폭풍우와 가뭄, 폭염 등으로 농업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분열과 갈등이 지구의 일상적인 모습이 될 것이며 전쟁이 일상생활을 다시 한번 규정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20년 뒤는 지구가 지금 수준의 인구를 지탱할 수 있는 능력이 급격히 떨어질 것이며 지구가 지탱할 수 있는 수준으로 인구가 줄어들 때까지 전쟁과 기아가 수많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미 국방성 비밀보고서의 지구 대재앙에 대한 전망과 예측은 외면하고 싶은 하나의 가상 시나리오가 아니라 지금 우리 인류가 처해 있는 생존적 현실이라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재앙에 대한 이러한 예측은 그동안 제기되어 온 환경 생태론자들의 우려와 경고와는 그 차원을 달리 하는 것으로서 세계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초강대국 미국의 국가전략문건이라는 점에서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이제 우리가 처한 위기 상황은 단순한 징후로서가 아니라 절박한 생존의 현실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인류가 직면한 생존위기에 대한 이 같은 충격적인 진단은 돌발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그동안 충분히 예견되어 왔던 것이다. 지구를 살아있는 유기체라는 ‘가이아’ 학설을 주창한 제임스 러브록은 열대림의 파괴와 온실효과로 인한 지구온난화로 지금 지구는 임박한 주요 기후변화의 초입에 들어섰으며 이 변화는 빙하시대부터 지금까지 있어 온 것보다 두 배 혹은 여섯 배나 큰 변화가 될지 모르며 이는 인류의 생존에 있어서 어떤 핵전쟁으로 인한 재앙 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70년대 중반까지에는 일 년에 한 종 정도가 멸종된 것으로 추측되던 생명종들이 이제는 하루에도 100여 종이 넘게 이 지상에서 사라져가고 이런 추세가 앞으로 25년 정도만 계속된다면 이번 세기 안에 이 지구상의 동식물 2/3이상이 사라질 것이라는 세계식물학총회의 보고처럼 생명의 다양성과 공존성, 상호 연결고리는 급속히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이 지상에서 동식물들이 사라진 후에도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40년 전에 이미 레이첼 카슨은『침묵의 봄(1962년)』에서 인공 살충제 등 인간이 만든 화학 물질로 인한 시급한 위험들을 경고했다. 이제 그 경고대로 재앙이 우리 앞에 현실로 드려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형태가 계속된다면 지금 멸종되고 있는 생태계의 다른 종들처럼 머지 않아 인류라는 종의 정상적인 번식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인류의 생물학적 생존 그 자체가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광범위한 인공적 화학물질들이 호르몬 등 성적 발달과 생식문제들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테오 콜본과 그의 동료들에 의해 저술된『도둑 맞은 미래(1996년)』에서 잘 규명되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물질적 풍요와 삶의 편리를 문명의 진보와 행복의 기준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이를 위해 자연을 약탈, 파괴하고 생명을 상품화하고 존재가치를 수단으로 삼아온 결과 지금 우리는 인류의 생존 그 자체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결국 자신의 생존 근거를 파괴함으로써 인류 자신은 물론 이 행성에 사는 지구생명계 전체를 죽임 속으로 몰아넣어 온 절멸주의는 유한한 자원을 소모 고갈시키고 환경을 오염시키며 자연생태계의 파괴를 구조화하는 산업문명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반자연적인 산업문명을 자기 살해적 문명이라고 하는 이 때문이다. 생태신학자 토마스 베리의 지적처럼 스스로 자신의 보금자리를 파괴함으로써 다른 생명들까지 멸종에 이르게 한 일은 지구 46억년의 역사에서 일찍이 없었던 일로서 산업문명으로 인한 작금의 위기 상황을 인류 스스로에 의한 인류 자신의 생물학적 멸망 가능성에 직면하고 있는 미증유의 사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생명체가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벗어나 지나친 속도로 성장하게 되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을 죽음에 이르는 성장이라고 한다. 제초제(除草劑)도 이런 원리에 바탕하고 있다. 지금 지구 자연 생태계 1차 생산총액의 40%를 인간이라는 단일 종의 활동에 전용하고 있다. 그 결과로 1950년 이후 1990년까지 40년 사이에 세계 경제 총생산고가 5배 이상 증가하였고 세계천연자원 30%가 1970년부터 95년까지 불과 25년 사이에 고갈되었다. 이 짧은 기간동안 지난 인류의 생존사 전 기간보다 더 많은 지구자원의 부를 소모한 것이다. 이 같은 급속한 성장의 결과 ‘죽음에 이르는 성장’이란 말대로 인류문명사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인류에게 있어서 당면 과제는 어떻게지속 가능한 생존’을 이루어갈 것인가의 문제임이 분명해 졌다. 지구가 지탱할 수 있는 수준으로 인구가 감소될 때까지 재앙이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경고 앞에서 이른바지속 가능한 개발이란 더 이상 생존적 대안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닥쳐오는 이 재앙에서 살아 남는 길인가. 환경재난과 기아의 시대를 사는 길은 무엇인가.

살아남기, 이 혼돈과 재앙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금 이대로가 아닌 새로운 길, 새로운 가치관과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삶과 그 문명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필요하다. 일상적으로 길들어진 마취에서 깨어나 사태의 절박성을 바로 보아야 한다. 위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그 길은 한 길뿐이다. 지금의 우리 삶과 그 문명이 우리 생명의 근원이자 모태인 자연 생태계를 파괴 약탈하고 소모 고갈시키며 죽이는 것에 바탕해 왔다면 이제는 자연과 함께 조화함으로써 더불어 살아가는 새로운 문명, 새로운 가치관과 그 생활양식을 창조하는 길뿐이다. 생태문명, 생태주의가 인류의 지속 가능한 생존을 위한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21세기, 새로운 천년은 생태주의 시대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라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천년을 맞으면서 생태주의자 조너단 포릿이 발한 경고처럼 이제 인류는 그 자신의 생존을 위해 새로운 문명으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 뿌리로 돌아가기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우리의 불안, 존재 저 깊은 곳에서부터의 두려움은 우리가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뿌리뽑힌 존재라는 자각 때문이다. 지금의 위기가 자연을 거슬리는 문명과 그 삶의 방식이 초래한 것이라면 그 대안은 생명의 근원인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사는 삶의 지혜를 찾아 자연의 풍요에 동참하는 길뿐임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산업문명에 대한 새로운 인류문명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생태주의, 생태문명이란 한마디로 자연과 조화되는 상생 순환의 지속 가능한 삶과 그 문화를 일컫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연과 조화되면서 지속 가능한 생산과 그 삶이 이루어질 수 있는 구체적 형태는 어떤 것인가. 대안의 핵심은 자연과 조화되는 문명 곧 지속 가능한 생산양식과 그 삶의 양식을 어떻게 만들어 가는가에 있다.

오래된 미래라는 말에서 보듯 인류의 지난 생존사를 통해 자연과 조화되는 지속 가능한 삶과 그 문화를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은 결국 농업적 생산양식에 바탕한 문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어떻게 산업문명의 위기와 한계에서 벗어나 농업적 생산양식과 그 삶의 양식을 일구어낼 수 있는가. 자연과 조화되는 문명이 이루어지기 위해선 먼저 자연과 조화되는 삶과 문화가 이루어져야 하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달리 말해 새로운 대안문명인 생태문명을 열어가기 위해선 생태적 삶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며 이를 위한 생태적 인간이 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태적 인간과 생태적 삶 없이는 생태적 문명이 없다는 것은 이 말이다.

이해의 편의상 산업문명 이전의 농업문명을 이끌어 온 사람들을 농업적 인간이라고 한다면 공업화 중심의 현대산업문명은 공업적 인간에 의해 주도되어 왔고 이제 새로운 생태주의 시대, 생태문명을 열어갈 새로운 인간, 곧 생태적 인간의 출현이 요청된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산업문명이 불과 200여 년 만에 그 한계를 드려내고 이제 종말로 치닫을 수밖에 없다면 인류문명의 새로운 전개를 위한 새로운 인류의 출현은 필연적이라는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어떻게 땅에 기반하여 자연과 조화되면서 지속 가능한 삶을 이루어낼 것이며 그렇게 사는 사람들 곧, 생태적 인간들이 출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산업문명의 위기와 한계를 극복하고 살아남아 새로운 대안문명인 생태문명을 열어감에 있어 가장 기본 과제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이 귀농이고 그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귀농운동이다.

귀농운동이란 농촌으로 돌아가 자연과 조화되는 삶의 양식을 통해 생태적 가치와 자립적인 삶을 실현하자는 운동이다. 생태 순환적이고 자립적인 삶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현실적 토대가 농촌, 농업적 생산양식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생명의 근원인 땅에 기반하여 생명을 기르고 가꿈으로써 자신과 다른 생명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는 생산이 가능할 뿐 아니라 자연의 질서, 그 원리에 가까운 삶을 실현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 도시 문명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의 삶이 얼마나 반생명적이고 기형적인가를 생각한다면 왜 농촌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가는 자명하다. 최소한 자기 똥조차도 스스로 처리하지 못하는 도시적 삶의 의존성과 불구성이 가져오는 폐해는 자신뿐만 아니라 생태계 전체의 파멸로 결과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귀농이란 반자연적인 도시의 삶을 통해 멀어져 버린 땅으로, 자연과 조화되는 삶으로 돌아가자는 일이요, 현대 문명을 향유하기 위해 잃어버린 가치를 재발견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현대 산업문명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생태문명이란 그 본질이 자연의 원리에 따른 재생순환에 바탕을 둔 농적문명(農的文明)이라고 할 수 있다.

귀농운동을 통하여 젊은이들이 무너져 가는 농촌에 생태마을이라 이름하는 대안공동체들을 일구어 가는 일은 농촌의 회생을 위한 농민운동의 측면을 넘어 새로운 대안 문명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루돌프 바로가 산업사회의 파괴적 팽창주의 또는 절멸주의에 맞서는 필수적인 대안으로 제시하는 영성적이고 개명된 코뮨이나 해방구를 세우는 일과 맞닿아 있다. 바로는 팽창적이고 환경 파괴적인 생산양식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자기지탱적이며 환경 친화적인 생산양식을 채용하는 생태적 순환경제에 기초한 탈 중심적인 공동체들의 상호 연결망을 세우고 넓혀 가는 일이 오늘날 다면적인 세계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하게 확실한 길이라고 주장한다. 물질과 에너지의 소비를 최소화한다는 것은 지역 중심의 재생산 과정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땅을 기반으로 한 작은 공동체를 건설하여 사람들이 스스로의 먹을거리를 생산하며 땅에서 진짜 물을 구해야만 자연과 조화된 새로운 삶의 방식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머레이 북친의 주장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북친 또한 자연환경과의 지속적인 균형을 보장해 주는 인간 공동체의 창출 없이 인간과 자연의 조화는 불가능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환경 오염과 자원 부족이라는 지구의 한계는 기존 시장경제의 비도덕성과 기술의 반문화성에 있기 때문에 대안경제는 생산자와 소비자간의 익명성을 극복하고 인간적 필요와 소비 개념을 재정립하며 생태적합적 과학과 기술을 만드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동체를 건설하여 급진적 의식 혁명을 통해 자기 살해적 행위로부터 삶에 적합한 행위로의 이행을 완성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서 보듯 환경문제란 본질적으로 마음의 문제 곧 가치관의 문제이자 삶의 방식의 문제로서 우리 자신의 가치관과 삶의 양식에 대한 근본적인 전환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오늘의 위기를 지속성의 위기라고 할 때, 이는 우리 자신의 자립적인 삶의 위기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자립적이지 않고는 결코 지속 가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 속의 생명체들은 모두 자연에 의지함으로써 자기 생존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스스로 마련해서 살아가고 있다. 지속성의 위기, 자립적 삶의 위기는 삶이 뿌리뽑혀 있는 데에 그 근원이 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위기의 본질은 결국 지금 우리의 삶이 뿌리뽑혀 있는 데에 있음은 자명하다.

귀농운동은 한마디로 뿌리뽑혀 있는 우리의 삶을 흙에, 자연 속에 뿌리내리자는 운동이라 할 수 있다. 대지의 질서를 어기는 자는 결코 대지 위에서 살아갈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경구처럼 생명의 근원 자리로 돌아가기, 땅에 뿌리내리기란 자연과 조화되는 지속 가능한 삶과 그 문명을 실현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월터 리프만은 사람이 정신적으로 품위 있는 생활을 하는 전제조건으로 농업문화를 들고 있는데, 농업이 중심이 되어있는 삶에서만 인간은 사계절의 리듬에 순응하여 삶을 꾸려가면서 자신보다 더 큰 근원적인 존재를 느끼고 무한한 우주 앞에 경건한 태도를 갖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이 시대의 귀농이란 세상에서 달아나거나 사회에 관심을 덜 가지려는 것이 아닌 자신의 생계와 건강과 삶의 가치와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동시에 자연과 조화되는 삶을 통해 새로운 문명을 창출할 생태적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길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귀농, 생태적 삶으로의 전환

이 시대 우리운동의 근본적 지향은 생태적 사회의 실현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운동의 기본 과제는 생태적 사회의 전망을 제시하는 일과, 지금 여기 우리 자신의 삶과 문명 양식을 생태적으로 전환하는 데 두어야 할 것이다. 생태적 사회는 생태적 삶이 없이는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환경생태운동이 철저한 삶의 운동이고 문명적 대안운동이어야 하며, 근본주의적이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안운동의 핵심은 실천적 삶에 있다.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가 대안운동의 관건인 것이다. 따라서 대안운동이란 삶을 통한 운동이어야 하며 운동의 결과가 곧 삶으로 수렴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자연 생태계, 지구의 전 생명계가 절멸의 위기로 치닫는 대전환기에서의 대안운동은 필연적으로 생명가치에 바탕한 살림운동 곧 생명운동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임은 분명하다. 삶이란 곧 생명, 생명 활동의 다른 표현일 뿐만 아니라 죽임을 구조화하는 체제와 그 문명 속에서 살리는 일보다 더 절대적인 일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 시대의 대안운동이란 철저한 생명운동으로서 살아남기 위한 운동이며 살리는 운동이며 제대로 살고 더불어 사는 운동이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안적 운동이 감당해야 할 기본과제는 자연생태계의 파괴와 죽임을 구조화하는 문명양식과 쓰고 버리는 폐기에 바탕한 소모적 삶의 방식에 대한 실천적 삶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귀농운동은 이런 점에서 어떤 운동보다 근본주의적 관점과 실천적 삶의 대안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귀농이란 단순히 직업을 농업으로 갖거나 거주지를 농촌으로 바꾸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근본적인 전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농촌으로 돌아가는 것이, 단순히 농사를 짓는 것이 대안이 아니라 농촌으로 돌아가 어떤 마음, 어떤 가치관을 갖고 어떻게 농사짓고 어떻게 사느냐가 관건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농업을 통한 생태적 가치와 자립적 삶의 실현, 이를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생산과 생활 양식, 곧 생태순환적인 농적문명을 일구어가자는 것이 귀농운동의 과제이자 구체적 목표이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귀농이 생태적 삶으로의 전환이 되기 위해서 먼저 확인해야할 몇 가지 기본 관점, 그 조건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귀농이란 개념은 일반적으로 농업이란 직업 또는 거주지를 농촌에 둔다는 의미에서의 귀농과 구분하기 위하여 “생태적 귀농‘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하나, 귀농은 삶의 전환임을 분명히 한다.

먼저 귀농이란 직업이나 직장, 또는 생계수단을 농업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를 송두리째 바꾸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귀농은 경제적 가치의 실현 곧 또 다른 형태의 돈벌이를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달리 말하면 귀농이란 삶의 방편이 아니라 삶의 내용이며 삶 그 자체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농적 삶, 땅을 밟고 그 위에서 계절의 변화에 순응하면서 생명을 기르고 가꾸는 일 그 자체에서 삶의 의미와 내용을 실현해 내어야 한다. 농업을 경제적 가치로 바라보는 한 이미 귀농은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새로운 삶의 실현 자체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삶의 전환이란 중심 가치관의 전환과 구체적 삶의 양식이 동시에 이루어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 삶의 형식과 내용을 바꾸기, 존재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새롭게 바꿀 때 비로소 삶의 전환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 소비사회에 편입된 삶, 쓰고 버리는 것에 중독된 삶 등 이처럼 자기 살해적이고 파멸적인 문명과 생명을 상품화하고 존재를 황폐화시키는 체제와 그 삶에서 벗어나 삶의 양식, 존재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먼저 중심 가치관부터 바꾸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있어 무엇이 중심가치인가. 그것은 산업문명과 자본주의 체제가 강조하는 경제, 물질, 소유가치 중심에서 생명, 정신, 존재 중심의 가치로, 생태적 가치, 생명가치 중심으로 가치관을 바꾸는 것이다. 이른바 자신과 세상 곧 이 세계를 이해하고 인식하는 신념체계인 패러다임을 생명가치 중심으로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Paradigm shift)이 그것이다. 이 같은 가치관의 전환을 바탕으로 삶의 방식을 자립적으로 꾸려 갈 때 비로소 새로운 삶의 전환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둘, 돌아가기 위해선 떠나온 자임을 알아야 한다.

귀농이란 농(農)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선 우선 농이란 무엇이고 왜 돌아가야 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농이란 자연과 관계하여 생명을 가꾸어 사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 농업을 생명산업, 창조산업이라고 할 때의 의미가 그것이다. 생태적 귀농에선 이 점을 보다 분명히 한다. 귀농귀본(歸農歸本), 귀농귀일(歸農歸一)이라는 의미가 그것이다. 귀농이란 곧 그 근본, 그 하나인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귀농에서 ‘돌아간다’는 것은 근본의 자리, 생명의 근원자리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우리가 생명의 뿌리, 그 근원으로부터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귀농을 통해 농으로 돌아감이란 자연으로, 근본으로, 뿌리로, 제자리로, 생명자리로 돌아가는 것으로서, 그렇게 돌아가 이루는 삶을 자립적인 삶, 조화로운 삶, 영성적인 삶, 모심의 삶, 아낌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귀농의 돌아감이란 본래 있어야 할 제 자리인 ‘생명의 자리’로 돌아가 자신의 존재와 삶의 근원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귀농에서의 돌아감이란 뿌리뽑힌 삶에서 삶의 근원으로, 뿌리내리는 삶으로. 자연을 거스르는 삶에서 자연과 조화되는 상생순환의 삶으로.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삶에서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삶으로. 의존적인 삶에서 자립적인 삶으로. 경쟁 속의 불안한 삶에서 정직한 삶, 평정한 삶으로. 병든 삶, 기형적인 삶에서 건강하고 생기찬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돌아감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은 흔히 말하듯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삶, 창조하는 삶을 위해서이며,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위해서, 아름다운 삶을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귀농이 생명의 근본 자리로 돌아감이라는 이 같은 인식을 분명히 하고 이를 통해 삶의 전환이 이루어지기 위해선 우리가 떠나온 자임을 아는 일이 전제되어야 함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기 위해선 우리가 떠나온 자임을 먼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서 있는 이 자리가 우리가 있어야할 본래의 자리, 제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할 때, 지금 내 존재와 삶의 불안과 위기가 그 본래의 자리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임을 분명히 알 때만 비로소 망설임 없이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복귀기근(復歸其根,), 다시 그 뿌리로 돌아가야 함은 우리 또한 땅을 떠나서, 자연을 떠나서 살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사회적 존재이전에 생태적 존재라는 자각과 바로 이러한 ‘생태적 존재’가 우리 인간이라는 생명체, 그 존재 본래의 모습이라는 인식이 있을 때 비로소 돌아감이 가능한 것이다.

셋, 돌아가서 이루고자 하는 삶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귀농을 통해 이루고자하는 생태적 삶이란 과연 내가 원하는 삶 곧, 건강과 행복을 실현할 수 있는 삶인가. 아무리 생태적 삶이 시대적 대안이고 타당하다고 해도 귀농이라는 삶의 전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개별적 선택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귀농을 결정하기 위해선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귀농을 통해 내가 과연 행복할 수 있는가를 묻고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나에게 있어 정말로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어떨 때 나는 행복한가. 이런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선 우선 정신 없이 달리기를 멈추고 서서, 자신과 주위를 정직하게 돌아보는 일이 필요하다. 나와 우리 가족이 지금 어떻게 병들고 생명이 시들어 가고 있는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병들어 있으며 죽임이 구조화되고 있는가를 바로 보아야 한다.

위험한 것은 위기가 아니라 위기의식이 마비된 것이라는 경구대로 지금 우리 대부분은 마치 열탕 속의 개구리처럼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생태위기속의 자연재앙에서 살아남고 그리고 제대로 살기 위해선 지금 우리에게 정화와 치유가 절박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생명의 근원성, 삶의 자연성을 회복하는 것이 관건임을 아는 그것이 생태적 각성이다. 생태적 각성이란 다른 말로 우리가 생태맹(生態盲) 환자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생태맹이란 인간이 자신의 모태, 그 근원이 자연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이에 대한 신비함, 오묘함, 풍성함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일컫는 개념이다. 한마디로 생태적 감수성을 상실한 상태로 그 주된 증상은 도시화, 산업화로 파생된 인공적 환경을 당연시 여기며, 하루에 한 걸음도 흙을 밟지 않는 삶을 정상으로 인식하는 반면에 자연과 조화되면서 함께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 정서, 교감의 가치를 바르게 인식 못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생태적 삶의 전제는 생태적 각성에 있다. 생태적 각성 없이는 생태맹의 치유와 생태적 삶으로의 전환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도연맹이 귀거래사에서 읊은 것처럼 각비(覺非), 곧 삶의 전환을 이루는 근원적인 성찰이 필요한 것이다.

이제 깨어있는 상태에서 내가 원하는 삶, 곧 행복한 삶을 이룰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행복한 삶에 대해 일반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마음의 평정, 생명의 충실함, 지금 여기에 살아 있다는 자부심을 갖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해야 이런 삶이 가능할까.

마음의 평정 또는 삶과 존재의 평정(평온, 평화) 없이는 어떤 조건이 충족되더라도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를 행복한 삶을 위한 기본 전제로 삼는다면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선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이른바 행복한 삶을 위한 조건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자립적 삶, 자연과 교감하는 삶, 정직한 삶, 창조하는 삶 등이라 할 수 있다. ,

자립적 삶이란 자연 생태적 삶의 첫째 조건으로 자연의 존재원리라 할 수 있다. 스스로 자신의 생계 곧 생명유지의 필요를 마련해 간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명을 다른 것에 의지하는 한 결코 평온할 수 없는 까닭이다. 자립적이지 않으면 꿈에도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은 이 말이다. 일상에서의 자립적 삶이란 돈에 의지해서 생명유지에 필요를 해결해 가는 것이 아닌 자신의 손으로 직접 생계의 필요를 마련해 가는 것으로서, 이를테면 외국에서 식량이 수입되지 않더라도 굶어죽지 않고 기름 실은 배가 오지 않더라도 얼어죽지 않는 삶을 스스로 실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연과 교감할 때 우리는 애쓰지 않고도 몸과 마음의 휴식과 안정을 얻고 절로 정화되며 치유되는 것을 느낀다. 또한 자연 속에서 생명과 존재에 대한 신비함과 영적인 고양감을 체험하며, 이를 통한 깊은 통찰과 각성을 얻기도 한다. 이처럼 자연 속에서만 깊은 안식과 신성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자연이란 곧 모든 생명의 모태이며 신성의 드러남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자연과 교감하는 삶을 이루지 않고서는 온전한 정화와 치유, 심신의 평정함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삶이 정직하지 않고서는 마음의 평정, 존재의 자부심을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은 더 이상 말할 나위가 없다. 나의 삶이 다른 생명과 존재를 해치거나 불행하게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 이기심과 경쟁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과 남을 속이지 않으며 자신과 다른 존재 모두에게 이로운 삶을 살아가는 삶이 행복한 삶의 전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창조하는 삶이란 자신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사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돈벌이를 위한 상품으로 판매하거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주인으로서 스스로의 삶을 창조해 가는 것이다. 창조하는 삶만이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며 삶을 아름답고 건강하게 일구어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창조하는 삶이란 노래하는 삶, 삶을 음미 감상하며 감사하는 삶인 것이다.

넷, 그 삶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 청사진과 계획을 세우고 의도적인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

내가 원하는 삶이 행복한 삶이고 그 행복한 삶을 실현하기 위해선 앞서 말한 삶의 조건들을 갖추어야 하는 것에 동의한다면, 그리고 그러한 삶의 조건들을 지금 서 있는 자리인 도시 속의 아스팔트 시멘트 위에서, 쓰고 버리는 삶과 생명을 상품화하는 체제와 생명의 근원자리를 스스로 파멸시키는 문명 속에서는 실현할 수 없음을 자각한다면 이제 귀농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자신의 삶의 목표와 이를 이루기 위한 계획을 구체화하고 거기에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원하는 삶으로의 전환이 이루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선 내가 귀농해야 하는 열 가지 이유, 그 목적 찾기에서부터 시작한다.

내가 귀농하지 않으면 안 되는 10가지 이유와 목적이란 그랬으면 좋겠다는 차원의 것이 아니라 그 이유와 목적을 생각하면 절로 가슴이 뛰고 힘과 의욕이 생기며 행복감이 느껴지는 절실한 것이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렇지 않으면 삶으로의 전환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고 행복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10가지 이유와 목적을 찾았으면 그 다음에는 내가 이루고자 하는 이런 모습들, 생태적이고 자립적인 모습들을 보다 분명하게 그리는 것이 청사진 그리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림의 상(像)이 선명하면 할수록 그것에 분명하게 다가갈 수 있다.

청사진을 분명하게 그린 다음엔 그것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계획 세우기, 그 계획을 지금 여기에서 행동으로 옮기기는 목표를 올바르게 실현하기 위한 보편적 원칙이다. 목표를 분명히 수립하고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웠음에도 그것을 이루지 못했다면 이는 그 과정에 있어서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음을 오롯이 한 점에 모으는 노력, 바로 지금 여기에서 모든 관심과 에너지를 거기에 집중해야 한다. 귀농을 통한 삶의 전환이란 농촌으로 돌아가 정착한 다음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환을 결단하고 행동하는 지금 여기서부터 이루어져야 하는 것인 까닭이다. 달리 말하면 삶의 전환을 결심한 그 순간부터 예비농부로, 땅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자세와 귀농이 이루어질 때까지를 철저한 준비기간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생태적 삶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 계획 속에는 발을 땅에 딛고 스스로의 손으로 생계를 꾸려가야 할 식(食), 의(醫), 주(住), 교육(敎育), 문화(文化)의 자립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어떻게 내 손으로 생명의 먹거리를 마련할 것인가, 어떻게 내 몸을 스스로 돌 볼 것인가. 어떻게 편히 쉴 거처를 마련할 것인가. 어떻게 제대로 가르치고 배울 것인가, 내 자신이 주인 되는 삶의 문화를 어떻게 가꿀 것인가.

다섯, 자연과 함께 사는 법, 조화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귀농을 통한 생태적 삶이란 결국 생명의 근거인 땅으로 돌아가 자연의 원리 그 질서에 따라 사는 삶을 말한다. 그동안 우리는 도시화, 산업화, 문명화라는 것을 통해 자연으로부터 떠나 있었고 우리 자신이 자연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생태적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했으며 자연 속에서 조화되며 사는 법을 잃어버렸다. 그 결과 생태적 감수성과 자연 속에서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한 분별지를 상실한 채 이른바 생태맹 환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제 자연과 함께 사는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다시 자연을 읽고 자연에 따라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대지의 질서를 어기는 자는 결코 대지 위에서 살아갈 자격이 없다는 빅터 샤우버거의 지적처럼 다시 대지 위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대지의 질서에 따르는 생태적 법칙을 배우고, 자연의 문법을 새롭게 익히며 자연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생태적 삶의 방법을 학습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학습은 땅에서, 자연에서 직접 몸으로 배우고 익히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대지의 자식으로 살기 위한 법을 어머니 대지로부터 직접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날마다 땅을 밟고 자연과 만나며 그 속에서 깃들어 사는 생명체들이 어떻게 조화롭게 사는지를 보고 느끼고 배워야 한다. 이와 함께 땅위에서 삶을 일구어온 오래된 농부들, 특히 경험 많으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토착적 지혜를 배우는 일 또한 중요하다. 옛 선조들의 삶의 지혜나 원주민들 특히 인디언이나 토착민들이 살아가는 삶의 지혜들을 통해서도 자연으로 다가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생태적 삶의 전환을 먼저 시도한 귀농 선배들로부터 땅에 정착하는 법을 배우는 것도 매우 유용하다.

자연과 조화되어 사는 길인 생태적 삶으로의 전환을 위한 귀농의 핵심은 결국 삶의 단순성을 어떻게 회복하느냐에 달려 있다. 자연으로 다가가는 길, 자연의 풍요와 함께 하는 길이 삶의 자연성과 단순성을 회복하는 것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삶이 단순할수록 자연의 풍요를 즐기며 감사할 수 있고 삶의 만족도가 높은 것이다. 삶의 단순성을 회복하는 것이 자립적인 삶의 조건인 것은 이 때문이다. 먼저 비워야 채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삶의 단순성 회복이란 뿌리뽑힌 삶 속에서 길들어져 온 습관, 삶의 필요를 모두 돈에 의지하여 사서 쓰고 버리는 중독된 습관과 그런 삶의 양식을 얼마만큼 놓고 비우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에어컨을 버릴 때 솔바람의 시원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인위적인 수고를 놓고 자연에 의지하여 삶의 풍요를 누리고 즐기는 것이 자연과 함께 사는 삶의 지혜라 할 것이다.

모심(侍)과 아낌(嗇)은 이 같은 단순 소박한 삶을 통해 풍요와 감사의 삶을 일구는 열쇠이다. 한 생명, 한 물건.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거룩하고 신성하다는 모심과 섬김의 마음으로 대하며 한 물건도 함부로 다루거나 버릴 수 없다는 아낌의 자세로 살림을 꾸려 가는 것이 그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땅이 생명에너지의 원천임을 깨닫고 땅에 발을 딛고 서서 느림의 가치관, 작은 것의 소중함, 단순한 것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찬양하는 삶이 지금 여기에 생명력이 충만한 삶을 살게 하는 바탕이라 할 수 있다.
생태적 사회의 실현

귀농으로 이루어지는 삶의 전환이 귀농자의 개인적인 의미를 넘어 사회적 의미를 가지며 그것이 현존사회와 그 문명을 변화시키기 위한 운동으로서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미 앞서 문명의 전환기인 이 시대에 귀농이 갖는 생태적 삶의 실현이라는 의미를 살펴보았지만 여기서는 귀농운동의 사회적 의의와 그 필요성에 대해 특히 이 시대의 농(農)적 의미를 중심으로 다시 간략히 정리해 보자.

첫째, 삶과 문명의 새로운 구조조정을 위하여

지금 당면한 이 위기가 단지 경제적 위기에만 국한되지 않는 산업사회와 물질문명에 기반한 삶 전체의 위기인 까닭에 단순한 경제 중심의 구조 조정 차원을 넘어서 삶과 문명에 대한 전면적인 구조 조정을 단행해야 한다. 귀농이란 삶의 가치관에 대한 근본적인 전환이며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서 곧 우리의 지난 삶을 새롭게 구조 조정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농촌, 농업으로 돌아가는 것은 이 같은 현대 도시문명의 위기와 한계 그리고 이에 따른 심각한 환경생태계의 위기로 인한 재앙으로부터 살아남아 건강한 삶을 도모하며 나아가 상생순환의 생태적 대안 문명인 농적문명을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둘째, 식량위기 시대의 생존을 위하여

이제, 식량위기는 환경생태계의 위기와 더불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가장 치명적인 재앙이다. 이에 대한 대안은 결국 이 땅에서 식량의 자급도를 높이는 길뿐이다. 그러므로 이 같은 식량 위기 속에서 농촌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곧 기아의 시대에서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는 일임과 동시에 식량 생산을 통해 식량자급도를 높임으로써 절박한 민족 생존의 위기 해소에 기여하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셋째, 흙과 함께 하는 자립적인 삶과 건강성을 위하여

자연이 베풀어주는 풍요를 바탕으로 삼지 않고서는 자립적인 삶을 실현할 수 없다. 지속 가능한 생태순환적 경제란 땅을 토대로 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우리 생명의 근거가 흙과 자연, 곧 농업에 있는 것이며, 땅과 자연과 조화되는 자립적인 삶과 그 문명체계만이 생존 위기와 그 문명에 대한 대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생명의 터전인 농촌, 농업이 그 뿌리부터 무너지고 있다. 따라서 농촌으로 돌아가 그 속에 활력을 불어넣어 분해되고 파괴된 마을공동체를 새로 일으켜 세우며 생산력 수탈과 착취에 기반한 파괴적인 농업생산으로 죽어 가는 땅을 다시 살려내어 농업을 건강하게 회복하면서 그 속에서 자립적인 삶의 건강성을 실현하는 것은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넷째, 조화로 이루는 삶의 기쁨을 위하여

귀농이란 생태적 가치와 자립적인 삶의 실현을 위한 이 시대의 선택이다. 생명의 근원인 자연과 가까운 삶을 통하여 생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생명 가치와 신비를 배우고 자연의 운행에 동참하는 삶의 기쁨을 즐기고 노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곧 농촌, 농업과 함께 하는 삶인 것이다.

잿빛 불임의 도시에서 한갓 경쟁의 도구로 되어 시들어 가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고 생명의 소중함과 풍요로움을 맛보게 하며 더불어 함께 사는 건강한 삶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는 농촌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농업은 그 자체로 생명 교육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아이들이 생명을 키우는 농업을 통해서 온몸으로 생명을 만남으로써 살아있는 지혜와 심성을 키워갈 수 있다. 그러므로 생태적인 마을 두레공동체를 복원하면서 그 공동체의 중심에 흙에 기반한 작은 학교를 만들어 가는 것, 이것이 곧 대안교육의 핵심이기도 하다. 또한 귀농은 부부간의 사랑과 평등을 실현하는 길이며 사람과 삶이, 사람과 자연이 함께 어울려 조화를 이루는 길이기도 하다.

다섯째, 생명가치 중심의 풍요로운 삶을 위하여

귀농은 불안과 혼돈의 위기 시대에 건강한 삶과 문명을 위한 가장 확실한 대안이다. 그러나 농촌, 농업으로 돌아가는 것만으로 그것이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귀농이 건강한 삶을 실현하는 것이 되려면 먼저 땅에 굳건히 뿌리박는 튼튼한 귀농이 이루어져야 한다. 농촌에, 농업에 굳건히 뿌리박기, 이를 위한 전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직업으로서의 귀농, 생계를 위한 돈벌이 수단으로서의 귀농이 아니라 흙과 함께 하는 삶 자체가 목적인 귀농이어야 한다.

경제 가치 중심에서 생명 가치, 생태 가치 중심으로 우리의 가치관을 바꾸지 않는 한,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의 추구 속에서 쓰고 버리는 식의 파괴적인 삶의 양식을 단순하고 검소한 삶으로 바꾸지 않는 한 튼튼한 귀농도, 새로운 대안 문명도 불가능한 것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여섯째, 농촌으로 돌아가기–제2의 브나로드운동을 위하여

이 땅에서의 자립적인 삶의 실현 없이는, 자연 생태계와 상생순환하는 생태 문명의 구현 없이는 지속 가능한 삶도, 건강한 민족 생존도 한갓 공염불일 수밖에 없다. 모든 산업이 다 없어져도 생명의 먹거리인 농업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경구를 절실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농촌, 농업이 곧 우리의 밥상이요, 목숨줄이기 때문이고 우리의 처지가 지금 그만큼 급박하기 때문이다.

이제 건강한 삶과 생태적 세계와 그 문명을 염원하는 모든 젊은이들은 이 대열에 앞장서야 한다. 농촌, 농업은 경쟁사회에서 탈락한 사람들의 도피처나 다른 할 일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용기와 의지, 젊음의 힘과 열정을 필요로 하는, 삶을 새롭게 개척하는 일이다. 자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위한 멋진 도전이다.

농촌을 살리기 위해서는, 농촌․농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애정을 가진 도시 젊은이들이 먼저 농촌으로 돌아가야 한다. 젊음의 열정과 지성을 흙에 묻어 새로운 문명의 싹을 틔우기 위한 제2의 브나로드운동이 출범되어야 한다.

5, 생태적 인간, 토착민으로 살기 위하여

이 시대 귀농운동의 필요는 앞서 검토한 것처럼 새로운 삶과 문명의 실현이라는 사회 대안운동적 측면과 함께 내부적으로는 생태적 삶의 전환에 있어서 개별적 귀농이 갖는 현실적 인 한계와 어려움을 운동을 통해 함께 풀어가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귀농운동의 지향과 필요를 구체화하기 위한 실천 과제로는 언론 홍보매체 등을 통한 귀농운동의 사회화를 위한 캠페인, 귀농 희망자를 모집하여 효율적인 운동방안을 모색하고 귀농자 간의 연대와 상호협력을 조직화하여 지속적으로 지원 관리하는 귀농 희망자 및 귀농자 간 네트워크사업, 귀농학교 운영, 귀농 예비단계로서 구체적 농사법과 농촌의 삶을 배우고 익히기 위한 실습농장 및 연수원 운영, 생태마을 건설, 대학생과 직장인을 중심으로 한 생태농활 등 새로운 농촌 활동의 제시 및 이를 통한 제2의 브나로드운동 전개, 귀농 희망자 및 귀농자의 안정적인 현장 정착을 지원하기 위한 농산물 직거래 추진과 법적 제도적 지원 방안 강구, 현장 귀농자를 지원 협력하기 위한 후원회 조직 운영, 귀농의 주요 과제 및 이슈에 대한 연구와 세미나, 귀농소식지, 생태 길잡이 시리즈 및 귀농 지침서 간행 등 홍보 출판활동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과제들 가운데서 현 단계에서 우선되는 활동은 귀농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가치관 형성을 위한 교육 훈련 과정과 귀농자 간의 네트워크 구축, 새로운 농촌공동체 마을 형성을 위한 생태마을 만들기 등이라 할 수 있다.

튼튼한 귀농의 여부는 귀농의 이유와 목적을 얼마만큼 분명히 하는가, 농업적인 삶 그 자체에 얼마나 의미와 보람을 느끼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에 귀농학교를 통해서 이를 구체화하는 것은 가장 우선되는 일이다. 이와 함께 귀농한 사람들이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상호 연결망을 세우고 지원 협력하는 사업이 귀농학교와 더불어 현재 중심적 과제로 진행되고 있다. 귀농운동의 여러과제 가운데 전략적 과제로 중요시되고 있는 것이 생태마을 만들기이다.

귀농운동을 통한 생태마을 건설은 자연과의 조화와 이웃과의 협동을 통해서 생태적 균형과 공동체적 삶을 실현하기 위한 생태공동체 운동의 구체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제한된 물적 자원으로 공해와 자원의 낭비를 최소한으로 줄여가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단순 소박한 삶이 주는 또 다른 풍요로움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생태마을이란 바로 이러한 삶의 실현을 위한 공동체적 노력이다.

생태마을은 그 기본 내용으로 생태적 취락구조, 저 에너지 소비 환경시스템, 폐기물의 재사용과 자원화, 자연경관과 자연 자원의 보존, 흙을 살리는 유기 순환의 농사, 두레 공동체에 의한 노동, 자연과 함께 하는 대안학교와 생태학습장, 얼굴을 마주하는 도․농 공동체의 교류, 마을축제 등 마을공동체문화의 복원을 포괄한다. 이중에서도 특히 마을의 기본생산활동인 농업 생산 방법을 철저히 유기 순환적인 것에 두는 이유는 생명의 근거인 땅이 병들면 몸이, 생명이 병들고 죽기 때문이다. 땅을 살리지 않으면 우리 또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태마을을 통해 버려졌던 농촌 곳곳에 새로운 생태 공동체가 건설되면 이를 바탕으로 생태적 지역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속에서 상생과 순환의 원리에 따른 조화와 협동의 새로운 문명, 지속 가능한 새로운 생태 공동체 문화가 꽃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러한 귀농운동의 현실적 과제는 우리 사회에서 아직 괄목할만한 성과로 드러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운동이 갖는 의의는 앞으로 더욱 커질 수밖에 없으리라 싶다. 갈수록 심화되는 위기 상황은 삶과 문명의 근본적인 전환을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깨어 있지 않으면 안 되는 때다. 깨어 있으면서 살길을 찾아야 한다. 이미 닥쳐와 있는 위기를 알아채고 다가오는 재앙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그래서 건강하게 제대로 살아가기 그것이 귀농을 통한 땅에 뿌리내리기라 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 신드롬처럼 퍼지고 있는 이른바 웰빙(Well being) 붐도 우리의 삶과 우리 사회가 근원적으로 병들어 있다는 일빙(illbeing)의 시대적 반영이라 할 수 있다. 도시문명, 산업문명 속에서 자연과 유리된 채 쓰고 버리는 삶으로 중독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치유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을 온 몸으로 절박하게 느끼고 있다는 반증인 것이다. 그러나 몸으로는 위기감을 느끼면서도 대부분은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인지를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웰빙, 이른바 참삶살이란 상품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생명의 근원성과 삶의 자연성을 회복할 때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 달리 말하면 뿌리 뽑혀 있는 삶을 생명의 근원자리에 다시 뿌리내리는 삶의 전환 없이는 불가능한 까닭이다. 생명이 뿌리뽑힌 상태에서 웰빙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땅에 뿌리내리기, 흙에 뿌리박기란 토착민(土着民)으로 살기와 같은 말이다. 이 시대의 불행, 이 문명의 한계는 토착민을 없애 버린 것에 있다. 혹한의 겨울을 지나도 새로운 봄이 열릴 수 있는 것은 땅에 뿌리박은 나무와 흙 속에 갈무리된 씨앗들이 있기 때문이듯 어머니 대지의 질서를 따라 사는 사람인 토착민이 없이는 자연과 조화되는 지속 가능한 문명을 이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자신의 생명과 치유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닥쳐온 재앙에서 살아남으며 우리 아이들과 인류문명과 이 행성의 풍요로움을 위해 새로운 토착민으로 사는 일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새로운 토착민이란 곧 생태문명을 열어갈 생태적 인간의 다른 말이라 할 수 있다.

토착민으로 살기, 농촌으로 돌아가 땅에 뿌리내리는 그런 삶을 살 때 그 삶의 자리가 새로운 봄, 그 문명의 씨앗을 갈무리하는 텃밭이, 진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땅에 터 잡은 각자의 삶을 충실히 사는 일이 곧 겨울의 정화 의식 뒤에 찬란히 꽃 피울 새 봄의 충실한 씨앗을 갈무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문명의 겨울, 그 혹한의 추위가 이미 시작되고 있다. 이 혹한의 겨울을 견뎌내고 새 봄을 맞기 위해선 지금 서둘러 겨울 채비를 단단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상황이 절박하다. 남은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

(200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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