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01

알라딘: 중일전쟁 - 용, 사무라이를 꺾다 1928~1945



알라딘: 중일전쟁 - 용, 사무라이를 꺾다 1928~1945

중일전쟁 - 용, 사무라이를 꺾다 1928~1945
권성욱 (지은이)미지북스2015-02-10










































 정가
33,000원
판매가
29,700원 (10%, 3,300원 할인)


9.0100자평(9)리뷰(10)

916쪽
160*230mm
----------------------

책소개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을 온전히 받아낸 중국의 불굴의 항전사 '중일 전쟁'을 다룬 책이다. 중일 전쟁은 중국과 일본 두 나라가 모든 것을 걸고 맞붙은 진검 승부이자 20세기 아시아에서 벌어진 가장 큰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아시아의 판도를 바꾸었고 세계사의 흐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청조 멸망 이후 군벌들로 사분오열된 중국은 국내외 혼란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일본의 침략에 직면한다. 초기 전황은 만주를 시작으로 화북과 화중에서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로 점철된다. 그러나 개전 후 일 년이 지나면 전쟁은 완전히 양상이 변하여 두 나라 앞에는 끝없는 소모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중국은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 진용을 갖추기 시작한다.

이 책은 17년간의 장제스와 국민 정부, 중국군의 불굴의 항전사를 담았다. 거의 모든 전투가 소개되며, 전투마다 그 배후에 놓인 중일 양국의 전략과 전술, 병사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책속에서



P. 12 중일 전쟁 동안에 마오쩌둥은 일본과의 투쟁보다 장제스와의 내전에 대비하면서 국민 정부의 통치 역량을 흔드는 데 주력하였다. 그는 국민 정부와 일본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동안 중국 민중에 침투하여 빠르게 세력을 확대하며 기반을 다져 나갔다. 최대 40만 명이 참여한 ‘백단 대전’은 팔로군의 가장 대표적인 항일 투쟁으로 알려져 있다... 더보기
P. 253-254 일본군의 병력이 대거 증원되면서 상하이파견군이 약 10만 명으로 늘어나자 장제스 역시 모든 병력을 보내라고 명령하고 스스로 지휘봉을 들었다. 화중과 화남 각지의 병력이 상하이로 끝없이 수송되어 매일 한두 개의 사단이 열차를 타고 도착하였다. 10월 말에는 7개 집단군 85개 사단 80만 명이 집결하였고 그중에는 독일식 4개 사단(... 더보기
P. 388 전쟁의 장기화로 일본의 전쟁 비용 또한 눈덩이처럼 커졌다. 1936년에 10.9억 엔이었던 일본의 군사비 지출은 1937년에는 32.8억 엔, 1938년에는 59.6억 엔으로 급격하게 늘어났다. 도대체 일본 경제가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P. 644-645 중국은 청일 전쟁, 길게는 아편 전쟁 이래 근 백여 년 동안 혼란의 연속이었으며 안정을 누릴 잠깐의 여유조차 없었다. 장기간의 전쟁을 위한 준비 역시 없었다. 장제스는 독재를 지향했지만, 공포와 압제로 국민들의 희생을 강요할 수 있었던 스탈린의 철권통치에 비한다면 정권의 기반이 훨씬 취약했다. 또한 지방에 할거하는 군벌들, 그중에... 더보기
P. 824 미국의 전후 아시아 정책은 오판과 실책의 연속이었다. 국공 내전에서 미국은 우유부단하고 이중적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전 육군 참모총장 마셜 원수를 특사로 파견하여 국공의 협상을 강요하면서도 장제스에게 막대한 원조를 제공했다. 이런 행태는 장제스나 마오쩌둥은 물론 미국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추천글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중앙일보
- 중앙일보 2015년 2월 28일자 '주목! 이 책'
한겨레 신문
- 한겨레 신문 2015년 2월 27일자 '교양 새책'



저자 및 역자소개
권성욱 (지은이)
저자파일
최고의 작품 투표
신간알림 신청

울산에서 공무원으로 근무 중이다. 개인 블로그인 ‘팬더아빠의 전쟁사’에서 전쟁사 관련 글을 쓰고 있으며 중국 근현대사와 제2차 세계대전이 전문이다. 저서로는 국내 최초의 중일전쟁 통사인 『중일전쟁: 용, 사무라이를 꺾다』가 있다. 또한 『덩케르크: 세계사 최대 규모의 철수 작전』을 감수했다.


최근작 : <중일전쟁> … 총 4종 (모두보기)






중일전쟁을 본격적으로 다룬 거의 유일한 책. 시각이 중국 쪽으로 치우친 감은 있지만, 어디 전쟁사 책 중에 그렇지 않은 게 흔한가? 80~90년대에 나온 모택동 찬양하는 좌파들의 책, 혹은 우파 혐중론자들의 입장에서 단편적으로 서술한 책들에 비하면 감개무량할 수준.
주목 2016-07-16 공감 (3) 댓글 (1)
Thanks to
공감





장제스의 복권과 중국군이 오합지졸이 아니라 선전했다는 사실을 발굴한건 높이 평가. 주제는 좁고 네용은 깊게 파야하는데, 중일전쟁을 넘어 국공내전, 2차세계대전, 광복군까지, 시대로는 문화혁명으로 조사한 것들을 나열만 했다. 양국 전쟁사는 균형감을 유지해야하는데 중국에 치우쳤다.
히카루 2015-11-14 공감 (2) 댓글 (0)
Thanks to
공감
------------




우리가 접하기 어려운 중일전쟁에 대한 자료와 역사를 읽기 쉽게 잘 적어 놓은 책이다 약간 두꺼운 느낌은 있지만 읽다가보면은 전혀 많다고 느껴지지 않음
kyduck21 2015-06-09 공감 (2) 댓글 (0)
Thanks to
공감





굉장히 풍부한 자료와 고증을 거친 책으로써 여태까지의 부패하고 무능한 중국이 아닌 결코 패배하비 않았던 중국 국민당 정부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좋은 책입니다. 일본의 망상과 한계도 잘 보여주었고.....
동안의 암살자 2015-10-29 공감 (2) 댓글 (0)
Thanks to
공감





우리가 독립을 위해 싸우는동안 보여준 중국의 저력을 알수 있었다
수은중독 2016-04-22 공감 (1) 댓글 (0)
Thanks to
--------



중일전쟁에 대한 재인식

중일전쟁은 중국이 일본과 2차대전에 자신들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운 전쟁이다. 하지만 만주사변과 상하이 사변, 그리고 본격적인 전쟁이 38년에 시작했기에 오히려 조금더 다른 전쟁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이 전쟁은 보이지 않는 전쟁이기도 하다. 2차대전에 유럽에서의 전쟁이 주로 유명하고, 아시아에서는 미국과 일본과의 전쟁만이 알려져 있지만 중일전쟁 역시 그에 못지 않은 영향력과 한 축을 담당했다는 것이 이 책의 골자다.

책은 엄청 두껍다. 이 많은 일본군과 중국군의 주요 지휘관들과 전쟁의 개관과 뒷배경을 모두 파악하고 서술하느라 저자가 엄청난 고생을 했음을 짐작할수 있다. 쓸데없는 내용을 지리하게 써놨나 싶기도 했는데 읽어보니 마땅히 빠뜨릴 만한 것도 없다. 물론 상세히 쓰시기는 했다. 읽으며 3가지 정도를 얻은 것 같다. 좀처럼 익숙치 않은 중국의 주요 성의 위치와 도시 등의 지리적 감각, 무능하고 부패하여 항일전쟁은 물론 국공내전에서도 참패한 장개석 국민당 정권에 대한 재인식, 중일전쟁의 2차대전에서의 영향력이다.

중국 신해혁명으로 청왕조가 무너지고 기대했던 위안스카이와 그가 이끄는 북양군의 이탈로 국민정부는 곧 내전에 돌입한다. 난징정부는 세력을 규합해 북양정권과의 전쟁을 시작한다. 위안스카이는 반란으로 황제자리에 오르지만 시대착오적 행각을 일삼아서 지지기반을 빠르게 잃어갔고, 곧 죽는다. 중국은 역사상 늘 그렇듯 중앙정부가 무너지면 곧바로 지방군벌들이 날뛰는데 위안스카이가 죽은 당시가 그러했다. 이들은 중국 북경을 놓고 다투었는데 당시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낸 지휘관 장제스는 돋보였다. 장제스는 만주의 군벌은 장쭤린을 전쟁에서 이겼는데 당시 만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일본은 장쭤린이 친일적 성향을 보이지 않자 그가 탄 열차를 폭파하여 암살한다. 일본은 우두머리가 없는 무주공산을 노린 셈인데 그의 아들 장쉐량이 의외로 만주의 지배권을 빠르게 장악하며 이는 실패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 장쉐량은 두고두고 장제스의 발목을 잡는다.

만주는 당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한반도를 장악한 일본은 이를 호시탐탐노리고 있었다. 일본은 늘 그렇듯 트집을 잡아 기습 공격하였고 장쉐량의 동북군은 지리멸령하게 무너진다. 물론 동북군의 수가 일본군을 압도하여 충분한 반격과 재정비의 기회가 있었지만 일본이 만주 전체를 노리는게 아니라 무언가를 원한다고만 생각했던 장쉐량은 본격적인 반격을 주저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그의 주력은 화북의 북경일대를 장제스와 다른군벌에게서 방어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으므로 전력이 분산되 있었다. 결국 뒤늦게 장쉐량은 일본의 침략의도를 알았지만 때는 늦으리였다. 만주를 손쉽게 장악한 일본은 푸이를 압세워 만주국을 세운다.

일본의 야욕은 끝이 없어 만주국의 점령이후에도 화북지방을 계속도발하고 마침내는 상하이 사변까지 일으킨다. 당시 상하이에는 주요 열강의 조계가 있어 일본으로서는 상당히 무모한 도발이었지만 일본은 이를 강행한다. 책에서도 주로 지적하지만 당시 일본은 군부를 행정부가 통제하지 못하는 형태로 일본의 2차대전과 중일전쟁의 많은 도발에는 현장지휘관들의 무모한 야심과 독선에 의한 것이 많았다. 상하이 사변에서 국민당정부는 좀 소극적이었는데 공산당과의 전쟁, 그리고 일본과의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 수도 난징에 대한 방어 등 복잡한 상황이었다. 결국 장제스는 중앙군을 투입하지만 상황은 어려웠고, 일본과 타협한다. 장제스는 많은 비난을 받지만 당분간 일본과의 전쟁을 억제하면서 안을 정비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상하이 사변 이후 장제스는 늘 말썽이던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하고, 지방군벌들을 복속시키는등 자신의 정권을 강화해나간다. 만주사변과 상하이 사변에서 알수 있듯 당시 중국군의 전력은 형편없었으므로 독일과의 교류를 통해 군사협력을 없고 군대를 강화시켜나갔다. 독일은 당시 주요 자원들에 대한 해외의존이 필요했는데 영국 프랑스에 견제당하는 상황에서 중국은 주요 자원수입원이 되어주었다.

시간이 흘러 1937년 일본은 본격적인 중일전쟁을 시작한다. 만류하는 일본내 정치인도 있었으나 일본 군벌에 의해 암살되거나 실각하기 일쑤였다. 천황과 일본의 정치권은 무모한 일본 관동군의 행태에 패망까지 질질 끌려다니기만 했다. 관동군은 만주국에 주둔하는 군대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해관의 동쪽에 있다하여 관동군이라고 한다.

일본군은 장쉐량이 지키던 북경과 텐진지역을 손쉽게 점령해나갔으며 화북 지역 전역을 점령해나간다. 중국은 아직 준비가 덜 되었으며 아직도 각 성의 지방군벌들은 자신의 전력을 소모시키지 않기 위해 전쟁에 소극적이었다. 게다가 장제스의 중앙군과 지방군은 원래 세력이 달라 군복이 다른 경우도 많았고, 수장이 다르다보니 지휘계통의 문제 언어의 문제, 무장정도의 차이등 병력만 많았지 전투에 지장이 되는 문제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명령에 의해 자리를 지켜야 할 부대가 마음대로 퇴각하여 측면이나 후방을 돌파당하기 일쑤였고, 지방군벌들은 싸우려는 의지도 부족했다.

상당히 빠른 시간에 중국은 화북일대를 상실했으며 수도 난징이 점령당해 그 악명높은 난징대학살이 일어난다. 난징을 상실한 국민정부는 수도를 우한에서 충칭을 옮겼지만 일본군은 우한일대에도 대대적인 공세를 취해 점령한다. 거기에 중국의 동남해안 일대 도시를 점령하여 철광석은 풍부하지만 그외에 많은 물자를 헤외에 의존하던 국민당 정부의 숨통을 조여나간다. 하지만 매번 중국군은 영토를 상실해나가면서도 끈질기게 저항하여 일본군에도 적잖은 피해를 주고 있었으며 현장지휘관들의 독선과 무능, 중국군을 얕보는 경향, 병참등의 문제로 일본군의 피로도 만만치 않게 누적되어 간다.

2차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동남아시아로 눈을 돌린다. 자원을 외존하던 미국과의 교류가 끊어졌고 국 영토가 드넓었지만 정작 일본이 필요로 하는 석유와 고무등의 자원은 동남아에 풍부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우선 중국 최남단의 하이난 섬을 점령하는데 이로 인해 열강들을 일본에 긴장하고 견제하기 시작한다. 늘 그렇듯 기습으로 일본은 아시아 주요국과 섬들을 손쉽게 점령해나간다. 주요 아시아 식민지에 주둔한 유럽군대들은 당시 본국이 독일과의 전쟁으로 힘을 쓸수 없었고, 군대의 상당수도 식민지인으로 구성되어 이렇다할 전투력이 없는 상태였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령사이에 끼어 완충지로 독립을 유지하던 태국은 일본군이 다가오자 그들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수용하여 간신히 독립을 유지한다. 일본군의 통행과 철도 및 공항건설 시설이용등 적잖은 주권침해였다. 이로 인해 태국에서 버마를 연결하는 죽음의 철도가 일본에 의해 완공되었으며 우기에 시작한 공사로 공사기간중 현지인 7천명이 사망한다.

해안과 동남아를 통한 자원루트가 막히기 시작하자 중국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일본은 미국 진주만을 기습하면서 주요 열강의 지원을 기대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장제스는 오랜 고립에서 희망을 찾고자 했지만 연합군에게 중국은 상당히 부차적인 장소에 불과했으며 미국역시 침공은 일본에게서 받고 공세는 독일에 취하는 자세를 보인다. 더군다나 섬멸직전의 상황에서 일본과의 전쟁으로 국공합작을 한 공산군은 일본과의 전면전을 피하고 일본군의 세력이 닿지 않는 화북일대에서 자신들의 근거지를 널혀나가 장제스를 더욱 골치아프게 했다.

당시 미국이 파견한 미군 지휘관은 스틸월이었는데 버마에 파견된 그는 일본군에 버마를 잃고 이를 탈환하기 위해 노력중이었다. 스틸웰은 미국의 협력을 대가로 장제스에 정예군을 요청하고 전력이 모자란 장제스는 이에 응한다. 하지만 스틸웰의 무능으로 버마는 일본에 점령되고 장제스는 정예병의 상당수를 잃는다. 일본군은 화남에서도 대공세를 이어 3차례나 방어하였던 창사와 형양비행장, 동남아 주용 교역의 창구인 난닝을 차례로 잃어가며 영토가 반으로 쪼개진다.

이처럼 1944년까지만 해도 중국의 상황은 매우 어려웠지만 연합국의 전세는 극도로 전환되어 43년에는 이탈리아가 항복하여 독일에 선전포고 하고 독일 역시 항복한다. 독일의 항복에는 미국의 가세도 있지만 소련과의 동부전선이 무너진게 큰 역할을 하였는데 소련은 2차 대전중 일본 관동군의 시베리아 침입을 우려해 독일과의 서부전선에 계속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무려 70만의 극동군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과의 전쟁교착으로 일본 관동권의 전력이 투입되자 스탈린은 일본의 침공이 없을 것으로 확신하고 과감하게 극동권을 서부전전에 투입하여 전황을 뒤집을수 있었다.

결국 독일이 항복하고 일본은 손쉽게 점령한 섬과 아시아 여러나라들을 빠르게 잃어갔다. 특히 섬하나하나를 지키고자 병력을 분산하였는데 이로인해 병참의 문제와 함께 각 군대가 손쉽게 각개격파당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결국 핵 두발로 일본은 항복한다.

문제는 이로 인해 발생하는데 아직도 중국내에는 무려 300만에 달하는 일본군과 일본인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 일본군 세력을 무장해제하고 사용하는데 국민당과 공산군은 치열하게 경쟁한다. 공산군은 화북 세력을 기반으로 빠르게 만주와 화북지역을 장악하였는데 이는 소련군이 전쟁 말미에 빠르게 만주지역을 장악했기데 가능했다. 이로 인해 공산군은 장제스와 일국을 양자강을 경계로 이분하자는 주장까지 할수 있는 위치에 이르게 되었다.

결국 전쟁이 끝나자마자 국공내전이 발생하였으며 일본과의 오랜 침략으로 전력에 큰 손실을 입은 국민당 군은 각지에서 대패한다. 거기에 장제스는 일본과의 항전과정에서 전략적 외교를 통해 시간을 벌고자 일본과의 여러 협상에서 저자세를 보이곤 했는데 그것이 발목이 되어 민심을 많이 상실한 상태였으며 일본군의 무장해제 과정과 각 지역의 탈환과정에서 각 지휘관들의 부패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결국 중국은 공산화 되었고 장제스 정권은 타이완으로 탈출한다. 중일전쟁중 국민당 정권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지원을 인색했던 미국은 아시아에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국공내전은 여러 부작용을 갖고 왔다. 우선 독일처럼 연합군은 일본은 분할점령할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동과 북쪽 지역을 소련과 중국이 점령하고 나머지 지역을 영국과 일본이 점령하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맥아더의 강력한 반대와 국공내전으로 무산되고 분할점령은 엉뚱하게도 한반도가 당하게 된다. 거기에 일본과의 배상협상에서 일본측은 승전국인 중국에 막대한 피해 배상을 각오하였지만 타이완으로 쫓겨난 장제스는 국제사회에서 빠르게 인정받기 위해 손쉽게 포기하였으며 공산당 역시 고립을 우려해 이를 빠르게 포기하였다. 친일 부역자에 대한 처리도 국공내전으로 어려웠다. 당장의 전쟁으로 이들을 심판하기 어려웠고, 전쟁에 활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의 경우처럼 이들의 사회중심지위에 올라 호령하는 일은 없었다.

중국내의 일본인들의 운명도 기구했다. 소련에 점령당한 만주지역의 100만가량의 일본군과 일본인들은 약탈과 강간 살해의 대상이었으며 시베리아로 끌려가 상당기간 노역에 동원되었다. 중국내에 300만 정도의 일본인은 100만가량이 본국으로 송환되었지만 나머지는 국공전쟁에 동원되기 도 하고 어려 가지 이유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전쟁의 대가를 가혹하게 치른 셈이었다.

이처럼 중일전쟁은 2차세계대전에 미친 영향력, 그리고 공산당의 세력확산의 기회로 향후 중국이 공산화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으로 상당히 의미있는 전쟁이었다. 한반도에도 상당히 영향을 미쳤음에도 이런 중요한 전쟁이 잘 다루어지지 않고 잊혀져 있는 것이 무척 아쉽다.
- 접기
닷슈 2017-08-22 공감(33) 댓글(1)
Thanks to
공감




중일전쟁

오늘 북한에서 핵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참 이상하죠? 총선을 앞두고, 북한은 뭔가를 또 합니다. 언제나 잊을만하면, 북한의 존재를 알려주네요. 그것도 총선, 대선 등의 선거를 앞두고 말입니다.

그동안 중일전쟁에 대해 잘 몰랐는데, 이번에 미지북스(저자 권성욱)에서 나온 중일전쟁을 읽었습니다. 전 2차 세계대전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주로 유럽 전선에 관련된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태평양 전선에 대해서는 일본과 미국이 싸웠다는 것만 압니다. 영화에 나오는 정도가 다입니다.
중국이 일본에 대항하여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싸웠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허황된 꿈을 좇는 일본이 중국과 교착 상태에 빠지자 자원을 위해 동남아로 진출하고, 그로 인해 미국에 영향을 주니 아예 진주만을 공격해서 미국과 전쟁을 합니다. 하지만, 중국과 미국을 동시에 싸우니 승산이 없었죠.
만약, 중국이 일본에 완전히 패해서 우리나라처럼 식민지가 되었다면, 어떤 양상이 펼쳐졌을까는 쉽게 예측하기가 어렵습니다. 중국이 끝까지 저항할 수 있었던 대륙의 힘이 어찌 보면, 일본 패배의 한 요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아무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국가 간의 이해관계는 철저하게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움직입니다. 오늘의 우방이 내일이 우방이 절대 아니라는 거죠. 그리고, 인도주의 같은 것은 국가 간에 없습니다. 자국의 이익이 아니면, 남의 나라가 어떻게 되던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은 있을 수 있지만, 그게 다입니다.
중일전쟁(1928년 ~ 1945년) 때 중요한 국가 간의 조약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936년 4월 독일-중국 차관 조약(1억 마르크 차관, 각종 광물 제공)

1936년 11월 독일-일본 방공협정 체결, 중국에 대한 독일 원조 차단

1937년 8월 중국-소련 불가침 조약(1억 달러 차관, 1억 5천만 달러 무기 제공)

1939년 7월 크레이기-아리타 협정(영국은 중국에 대한 일본 침략 묵인)

1940년 9월 삼국 주축 동맹 결성(독일, 이탈리아, 일본, 10년 기한)

1940년 11월 미국이 중국에 1억 달러 차관 제공

1940년 12월 영국이 중국에 500만 파운드 차관 제공

1941년 4월 소련-일본 중립 조약(소련은 4천만 톤 석탄, 1억 4천만 톤 목재, 5천만 톤 철 제공, 5년 기한)

이게 뭔가요? 독일이 중국에 원조하다가 일본과 손잡고, 소련은 중국에 원조하다가 끊고, 일본과 중립 조약을 맺고, 이번에는 일본에 원조하고, 미국과 영국은 경제적 이익 앞세워 일본의 만주침략, 상하이 침략, 난징 대학살 등을 무시하다가 삼국 주축 동맹 결성되니 그제야 중국에 원조를 합니다.

10년도 안되는 시간 동안 정신없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합니다. 이게 국가 간의 관계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중국의 힘이 커지니 이번에는 미국과 일본이 가까워집니다. 러시아는 미국과 일본을 견제해야 하니 중국과 친해집니다. 이 두 세력간의 충돌이 우리 나라에 어떤 영향을 끼칠 지 모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의 힘입니다. 우리나라가 힘이 있어야 이 강대국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저는 우리나라 통일 가능성에 대해서 상당히 희박하다고 생각합니다. 4개 강대국이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서 한반도 전체가 어느 세력에도 속하면 안 됩니다.

우리나라를 무참히 지배했던 일본이 중국,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서 지지 않았다면, 만약, 만주만 점령하고 만족했다면, 중국이나 미국이 우리나라를 식민지에서 독립시켜 주었을까요? 만약, 장제스가 마오쩌둥에게 이겼다면, 국민당이 중국 대륙을 통일했다면, 우리나라는 어땠을까요?
1차, 2차 세계대전 당시 우리나라에 쥐꼬리만한 관심을 가져준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다들 자기들 이익 챙기는 데 바빴을 뿐입니다.

요즘 우리나라 보면 참 답답합니다. 옛날에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 모릅니다. 난징 대학살, 유태인 포로수용소 같은 것을 그렇게 회담 몇 번 하고, 청산했으니 새로운 시대를 열자고 할 수 있나요? 과거에 얽매이지 말자고요? 임진왜란, 정유재란, 한일합방.. 과거는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독일이 또다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킵니다. 대동아 공영권을 주장하던 일본이 이제는 자위대 해외 파견을 합니다. 중일전쟁 당시 일본은 전함 9척, 항공모함 4척, 순양함 33척, 구축함 102척, 잠수함 64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요청으로 지중해에도 전함을 파견할 정도였습니다.
이때, 조선에는 처음에는 2개 사단이 있다가 1개 사단만 주둔합니다. 사단 병력은 3만 명이 안됩니다. 3만 명도 안되는 병력으로 조선 한반도 전체를 통제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비참한 존재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반복되는 역사의 희생이 되지 않기 위해서 제대로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016.01.06 Ex Libris HJK

- 접기
아타락시아 2016-01-07 공감(9) 댓글(1)
Thanks to
공감




<중일전쟁 서평: 용 사무라이를 꺾다>


‘중일전쟁은 과연 어떤 전쟁이었을까?’ 10대 때부터 2차세계대전에 매우 관심이 많았던 나로선 중일전쟁에 대해 깊이 알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었다. 기껏 해봐야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이 중국국만당의 수도 남경(난징)을 순식간에 점령한 뒤, 난징에서 소름끼치는 대학살을 전개하며 30만이나 되는 중국인들을 학살했던 전쟁.”이 정도였다. 따라서 1937년 남경대학살 이후 1945년까지 약 8년간 전개되었던 중일전쟁의 전개양상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중일전쟁에서 죽었는지 알지 못했었다.


이후에도 난 중일전쟁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두지는 않았고 중일전쟁에 대한 나의 인식 또한 일반인 혹은 과거 2차대전 마니아들이 인식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중일전쟁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시각이 많이 변했다. 지금까지 알지 못하고 있던 사실을 굉장히 많이 알게 됐고 중일전쟁 또한 제2차세계대전 당시 유럽이나 태평양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들만큼이나 굉장히 치열하게 전개됐던 전투가 적잖게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난 지금 까지 중일전쟁 당시 장개석의 중국 국민당은 항일에 소극적이었고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은 항일에 적극적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이런 관점은 진보계열에 있는 유시민 작가나 리영희 선생이 쓴 책뿐만 아니라 보수색이 굉장히 강한 <먼나라 이웃나라>의 저자인 이원복 교수도 공유하고 있는 관점이기에 나 또한 비판 없이 받아들였던 것 같다.


진실은 그 반대였다. 오히려 항일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장개석의 국민당이었고 항일에 소극적이었던 것은 마오쩌둥의 공산당이었다.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이 일본군에 맞서 대규모의 전투를 치뤘던 건 1940년8월부터 1941년 1월 말까지 팔로군 40만 명이 동원되었던 백단대전 뿐이었다. 백단대전 외에 중국 공산당이 일본군에 맞서 전개했던 전투는 그리 많지도 않고 있어봤자 소규모 교전 정도였다. 물론 백단대전의 경우 팔로군 22000명이 죽고 일본군 12000명이 사망한 대규모의 전투였던 건 확실하지만 장개석의 국민당군이 치룬 항일전의 대가에 비하면 세발의 피에 불과했다.


1937년 노구교 사건 이후 중일전쟁이 일어난 시점부터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했을 때 까지 중국이 치른 대다수의 전투는 장개석의 국민당이 치뤘다. 중국의 베르됭 전투라고 알려진 오송전투, 남경 대학살이 일어나기 전 남경에서 전개되었던 난징 전투, 중일전쟁 이래 최초로 중국군이 승리했던 타이얼좡 전투, 창사 전투, 1939년에 전개 되었던 동계 대공세 그리고 1943년에 일어났던 전투이자 중국판 스탈린그라드 전투라고 불리는 창더전투까지 사실상 중일전쟁 시기 대부분의 전투는 장개석의 국민당군이 치렀다. 8년간 지속되었던 중일전쟁 시기 장개석의 국민당군이 항일전쟁을 치루면서 지불한 대가는 매우 컸다. 8년간의 중일전쟁에서 중국 국민당군은 고위 장성만 206명이 전사했다. 반면 중일전쟁시기 전사한 팔로군 연대장이 5명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중일전쟁 시기 중국 국민당군이 얼마나 항일전을 많이 치렀는지 입증된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중국과의 전쟁이 빨리 끝날줄 알았지만 중국은 거대한 대륙이었기에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은 몽골 국경지대 근처인 노몬한에서 소련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렀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중일전쟁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던 영국과 미국은 일본을 견제했고 1940년 일본이 무솔리니 히틀러와 동맹관계를 맺자 미국과 영국은 일본을 더더욱 압박했다. 이는 결국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 기습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1941년 진주만 기습공격 이후 2차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은 일본에 맞서 싸우고 있던 중국 국민당군을 지원했다. 중국 국민당 또한 영국군의 버마 탈환작전에 수많은 군대를 투입했고 교착된 중국 전선에서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태평양 전쟁 시기 미국과 일본간에 섬 쟁탈전이 시작되면서 일본은 중국전선에 투입했던 수많은 군대를 태평양으로 빼돌렸고 이는 결국 패망으로 이어졌다. 1945년 5월 나치독일이 항복하고 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이후에 소련군이 만주에서 진격해오자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국에게 항복했다.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사용했던 무기들을 살펴보면 성능이 그리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 국민당군의 경우 재정이 좀 부족하긴 했지만 서방세계의 무기(서방으로부터 지원받은 권총, 기관단총, 기관총, 야포, 박격포, 전차등)들을 많이 사용했지만 일본군의 경우 38식 아리사카 소총과 같은 구식 소총을 주로 이용했고 일본산 무기를 고집했다. 심지어 기관단총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군부는 “기관단총은 총알은 낭비한다.”라고 하면서 소총의 위력만을 과대평가하기 까지 했다. 무엇보다 일본군은 전차의 위력이 매우 취약했다. 일본군의 경전차는 대구경 기관총에 뚫리는 정도였고 포신또한 짧았으며 사거리도 전차라고 하기에는 아주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2차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주력전차M4셔먼과 소련군의 주력전차 T-34가 독일군 티거 탱크의 먹잇감이었다면 일본군 주력 중장갑 전차인 치하 전차는 미국의 M4셔먼전차에게 먹잇감이 되었던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미군 경전차였던 M3스튜어트 탱크에게도 처참하게 패배하기 일쑤였다.


중일전쟁과 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은 전차나 기본적인 보병들의 무기가 취약했던 모습과는 달리 공군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항공전력은 생각보다 약하지 않았고 해군력은 영국을 앞섰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마져도 세계최강의 해군을 보유하고 있던 미국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대륙에서 전투를 치루는 중일전쟁의 경우 해군은 의미가 없었다. 거기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중일전쟁 초반에 투입되었던 항공전력 대부분이 태평양 전선으로 갔다. 무튼 이 책을 통해서 일본군의 전력과 군사 기술력이 대충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고 항공 전력과 해군력은 나쁘지는 않았지만 전차를 비롯한 육군 장비들이 얼마나 취약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집중해서 읽은 파트는 일본과 소련군이 붙었던 교전이었다. 193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과 소련이 붙었던 전투는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한반도와 만주 소련의 연해주 사이에 있는 두만강 근처에서 벌어졌던 하산호 전투(장고봉 사건)고, 또 하나는 만주와 몽골 근처에서 벌어진 노몬한 전투고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1945년 소련이 만주에서 진격하여 전쟁을 끝낸 8월 폭풍 작전이다. 1938년 두만강 근처에서 벌어졌던 하산호 전투에서 일본군은 520명이 사망했고, 노몬한 전투에선 8400명이 전사했으며 1945년 8월 폭풍 작전에선 최소2만에서 최대8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전사했다. 3번 붙은 중대규모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소련군 보다 사상자가 더 많이 나왔고 3번 다 소련군에게 패배했다. 많은 사람들이 러일전쟁에 대해선 관심을 갖지만 정작 일본군이 처참하게 패배했던 이 3개의 전투에 대해선 별로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개인적으로 이 전투를 다룬 파트를 더 집중해서 읽었다.


이 책을 통해서 지금까지 내가 잘 알지 못했던 중일전쟁에 대해 많이 알 수 있었다. 900페이지라는 압도적인 분량이긴 했지만 주로 전투위주의 서술이었고, 전쟁사에 관심있는 나로선 책의 내용이 많았음에도 다른 책들에 비해 지루함을 덜 느끼면서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책 자체가 국민당의 항일 업적을 재조명하기 위해 쓰인 저자의 의도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중국 공산당의 투쟁업적을 너무 평가 절하했던 것 같다. 물론 저자가 얘기한 대로 항일투쟁에 있어서 국민당이 중국 공산당 보다 훨씬 더 많은 전투를 치렀다 할지라도 과연 국공내전시기 중국 국민당이 공산당에게 패배한 이유가 단순히 저자의 말대로 중일전쟁 시기 국민당이 전투를 많이 치렀기 때문일까? 글쎄 난 이 부분에 대해선 좀 회의적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 “중국 국민당의 부정부패 때문에 민심을 못 잡아 패배했다는 주장은 중국 공산당의 선전일 뿐이다.”라고 했지만 그다지 믿기지 않는다. 실제로 국공내전시기 부패한 국민당 관료들이 공산당에게 무기를 팔아넘기는 사례가 적잖았던 것을 생각해 봤을 때 그렇다는 얘기라는 것이다. 이 책은 중일전쟁을 총체적으로 아주 잘 정리한 책이다. 무엇보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중일전쟁을 총체적으로 정리한 서적이 출판되지 않았다는 점과 기존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중일전쟁시기 중국 국민당군의 항일투쟁을 잘 조명했다는 점에서 분명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하다. 추가적으로 더 얘기하자면 이 책은 한국 사람이 쓴 책이기에 이 책의 사실상 마지막 부분에선 1930,40년대 독립운동사를 중일전쟁사에서 1개의 파트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한국 독립운동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파트만 읽은 뒤 내용을 참고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2차세계대전사와 중일전쟁에 대해 관심이 많고 밀리터리 전쟁사 분야에 관심이 많은 매니아들에게 읽기를 매우 추천하는 책이다.
- 접기
NamGiKim 2018-06-12 공감(8) 댓글(0)
Thanks to
공감




중일 전쟁에 관한 거의 모든 것!

사실상 중일 전쟁은 일본의 패망을 촉발했다. 러시아를 침공한 나폴레옹이나 히틀러가 그러했듯이 중국을 침략한 일본 역시 불구덩이에 뛰어든 나방 신세와 마찬가지였다.

중국 대륙을 온전히 장악하기 위해서는 일단 병력과 무기의 군세가 중요할 것이다. 이때 군수품과 보급 등 병참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일본군은 중국내 주요 도시을 확보한 뒤 지역 방어선을 위한 거점으로 삼았다. 하지만 보급선이 너무 길었다.

이와 같은 악몽은 임진왜란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본군은 약 18만 병력을 동원하여 9진으로 나눈 다음 한양을 거쳐 파죽지세로 평양까지 밀고 올라 갔다. 2진은 함경도 북방까지 쳐 나갔다.

문제는 보급의 문제였다. 군량미와 무기를 제때 공급하려면 보급선이 중요하다. 당시 왜군들은 10리마다 기지를 세워 역참 구실을 하게 했다. 하지만 이 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경상도 충청도 등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들이 게릴라 전법으로 그들의 전략을 봉쇄시켜 버렸던 것이다. 바다를 통해 10만 명을 평양으로 실어 나르려던 전법도 이순신에게 막혀 버렸으니.

중일 전쟁도 마찬가지였다.일본은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정부군은 말할 것도 없고,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과 항일 투쟁에 나선 조선 독립군과도 싸워야 했다. 게다가 미국 본토까지 직접 공략하려 나섰으니 너무 무모하지 않은가?

지은이 권성욱 씨의 이력이 독특하다. 그는 조선공학과를 전공했다. 학창 시절부터 전쟁사를 전공보다 더 좋아했다. 서재에는 동서양의 전쟁과 무기에 관한 온갖 책과 논문이 쌓여 갔다. 이제 ‘좀 더 쉽고 재미있는 전쟁사’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쓰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현재 공무원으로 재직 중이라니 더 놀랍다. 가히 취미로 시작한 것이 특기가 된 셈이다.

이 책은 중일 전쟁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당시 중일 전쟁을 둘러싼 판도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지도 하며, 중일 양측 군사적 전략과 판세까지 풍부한 사료와 지도˙사진을 통해 독자에게 전해준다.



비록 나는 중일 전쟁을 좀 더 깊이 알고 싶어서 구매했으나, 어쩌면 저자의 뜨거운 열정 한 스푼을 산 것인지도 모르겠다. 뜨거운 박수를 보내 드린다!
- 접기
사랑지기 2015-03-09 공감(7) 댓글(0)
Thanks to
공감




용은 어떻게 사무라이를 꺾었는가 - 중일전쟁, 그 20년의 기록

중일전쟁(THE SINO-JAPANESE WAR) 용, 사무라이를 꺾다 1928~1945
저자 권성욱 / 미지북스 출판사 / 2015. 2. 10 / 페이지 916 / ISBN 9788994142388

1937년 7월 28일 아침 8시 베이핑-톈진-탕구 전역에 걸쳐 일본군은 쑹저위안군을 일제히 공격하였다. 조선군 제20사단과 지나주둔군 주력은 베이핑 남쪽의 요충지인 난위안(南苑)과 펑타이를, 관동군 독립보병 제1여단과 제11혼성여단은 시위안(西苑)을 각각 공격하여 펑즈안의 제37사단과 장쯔중의 제38사단에게 치명타를 가하였다. - p.215

8월 14일 오전 7시,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자싱(嘉與) 비행장에서 출격한 제35중대 소속의 전투기 편대가 구름 아래로 모습을 드러냈다. 중국 공군의 대규모 공습의 시작이었다. 또한 황푸 강을 항해하고 있는 제3함대 기함 이즈모의 머리 위로 커티스 호크 복엽 전투기와 노스롭-2E 경폭격기 수십대로 구성된 대편대가 나타났다. 그들은 불덩어리를 토해내는 대공포화의 화망을 뚫고 맹렬하게 공습을 퍼부었다. - p.242

난징 시장대리이자 헌병대 부사령관으로 광화먼의 방어를 맡아 마지막까지 싸웠던 샤오산링 소장은 난징이 함락되자 탕성즈의 후퇴 명령을 거부하고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쯔진 산을 수비하던 제159사단 부사단장 뤄처췬 소장은 남은 부하들과 함게 일본군을 향해 돌격하다 적탄을 맞고 장렬히 전사하는 등 진두지휘하던 수많은 여단장, 연대장들이 순국하였다. 일본군 역시 적어도 1만여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그에 대한 보복은 포로들과 힘없는 민간인들에게 고스란히 되돌아왔다. - p.284

한커우 비행장에는 일본 제5항공군 산하 제8비행사단 3개 전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오후 12시 7분 "B-29 다수 접근 중!" 한커우 상공에서 경계 비행 중이던 정찰기로부터 다급한 무전이 들어왔다. 경보가 울리고 허둥지둥 뛰어나온 조종사들이 활주로에 주기되어 있던 전투기에 탑승했다. 한 대, 한 대 차례로 출격했지만 40대도 채 되지 못했다. 그들의 눈앞에는 하늘을 뒤덮는 어마어마한 대편대의 무리가 항적을 그리며 날아오고 있었다. - p.533

우리에게는 "난징 대학살", "731부대"로 알려져 있는 중일전쟁. 1937년 7월 7일 이른바 루거우차오 사건을 시작으로 제국주의 일본은 중국을 전면적으로 침공합니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마찬가지로 손쉽게 승리하리라고 여겼지만 중국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무려 8년 1개월에 걸쳐 처절한 전쟁이 진행되었고 중국의 수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자 더욱 무모하게도 미국을 공격했다가 결국 두발의 원폭을 맞고 패망합니다.

​시중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나 태평양전쟁을 다룬 서적은 많이 있지만 중일전쟁은 태평양전쟁의 도입부로서 간단히 한 페이지 정도 할애할 뿐입니다. 일본 도쿄대 역사교수인 가토 요코의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와 같은 책도 있지만, 일본인의 관점에서 일본이 중국 침략을 어떻게 하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간략하게 서술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윤휘탁 교수의 《중일전쟁과 중국혁명》이나 신승하 교수의 《중화민국과 공산혁명》역시 중일전쟁 시기의 중국 정치, 사회를 다룰 뿐 중일 전쟁 그 자체를 본격적으로 다룬 책은 실상 전무하다해도 좋을 정도이죠.

그런 점에서 이번에 미지북스에서 나온 《중일전쟁 용, 사무라이를 꺾다》는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중일전쟁을 종합적으로 다룬 책입니다. 만주 사변 이전인 1928년 장제스의 중국 통일부터 시작하여 만주사변과 만주국의 건설, 상하이 사변, 2.26사건과 시안사건, 루거우차오 사건, 쌍방 100만명 이상이 투입되어 베르뎅 전투 이래 최대의 혈전이라 불리었던 쑹후 항전, 난징의 혈전, 중국의 동계 공세, 태평양전쟁과 카이로 회담, 일본의 패망과 전후 처리까지 약 20년에 걸친 동아시아 역사 전반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선을 중일 양국에만 국한하지 않고, 미국과 소련의 정치적 개입과 갈등, 소련과 일본의 대규모 분쟁이었던 장구펑과 노몬한 전투,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향하는 과정 등 주변의 정치적 상황을 중일전쟁과 연계하여 설명합니다.

/ 사진과 지도와 함께 보는 사실적인 묘사 /

책을 처음 받아보았을 때, 두툼한 하드커버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군요. 또한 큼직큼직한 활자 덕분에 인문학 서적치고는 9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임에도 눈이 전혀 피로하지 않다는 점. 인쇄 상태도 상당히 훌륭합니다.

중간중간에 당시의 사진과 주요 전투 지도, 도표 등을 삽입하여 독자의 이해를 높이고 있습니다.

​또한 난해하고 딱딱하기 쉬운 여타 전쟁사 서적들과 달리, 마치 내가 그 현장에 직접 있는 것처럼 매우 사실적이고 박진감 넘치게 서술하여 페이지를 넘기면서 그 뒤가 궁금해 만든다는 점이 이 책의 특징입니다.

/ 풍부한 자료와 흥미로운 읽을거리 /



만주사변부터 일본의 항복까지 ​중일전쟁에서 벌어진 주요 전투는 물론이고, 1930년대 장제스 정권이 야심차게 추진했던 중국군 현대화 계획, 중일 전쟁의 해전과 항공전, 노몬한 전투, 전후 중국의 친일파 청산과 주일 주둔군의 파견, 배상금 문제 등 9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책에는 여타 책에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풍부한 읽을 거리로 가득차 있습니다.



아편전쟁 이래 중국의 혼란과 일본은 왜 제국주의화 되었는가, 그리고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는 과정, 그리고 전후 일본의 부흥과 일본이 왜 과거사 문제에 대해 둔감한지에 대해서까지 이 책 하나로 20세기 전반의 역사를 알 수 있을 정도 입니다.

또한 책 말미에는 부록으로 중일전쟁 중 사용된 양국 군대의 주요 무기(소총, 기관총, 야포, 군함, 전차, 항공기 등)와 군사 편제, 계급장 등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전쟁 당시의 중공군에 대한 이미지 때문에 흔히 중국군을 "낡은 소총을 들고 인해전술을 펼치는 군대"라고 생각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그런 이미지가 얼마나 잘못된 편견인지 깨닫게 됩니다. 중국군은 기계화 부대와 항공기, 군함을 보유하였고 중일전쟁 내내 바다와 하늘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또 한가지 주목할 점은 중일전쟁과 우리 역사의 관련성입니다. 이봉창 의사의 천황 암살 미수 사건이 상하이 전투를 불러왔고, 상하이 전투 직후 일본군의 전승 행사에서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으로 다리를 잃은 일본군 장성과 외교관이 십수년 후 맥아더 장군 앞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였습니다. 이런 걸 보면 중일전쟁은 물론, 제2차 세계대전이 그동안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우리 역사와 얼마나 밀접한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또한 광복군 창설을 놓고 중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간의 갈등, 허무하게 끝난 국내진공작전, 장동건 주연의 블록버스터 영화 《마이웨이》로도 제작된 노르망디의 조선인과 일제의 조선인 강제 징용, 위안부 문제, 일본에 의해 제2의 오키나와가 될 뻔했던 제주도의 결전 계획 등 국사책을 통해 막연하게 알고 있던 사실에 대해서도 두루 다루고 있습니다.

/ 역사적 논란을 부를만한 예리한 지적 /

만주사변 당시 장쉐량은 장제스의 명령으로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지 못한 채 눈물을 머금고 물러났다, 중일전쟁에서 마오쩌둥은 유격전술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장제스 정권은 부정부패하고 무기력했으며 내전에만 광분하였다. 중국 근대사에 얼만큼 아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런 통념이 잘못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오히려 장제스는 장쉐량에게 물러나지 말 것을 지시했지만 부하들의 배반과 일본에 대한 두려움으로 장쉐량은 장제스의 명령을 무시한 채 물러났습니다. 1930년대 내내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여 단일화된 중앙 정부의 확립과 군의 현대화, 열강들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외교적 노력 등 장제스 정권의 항일을 위한 물적 기반의 구축,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고 말했던 마오쩌둥과 팔로군이 항일은 커녕 어떻게 세력 팽창에 광분하였으며 전후 내전에 대비하였는지에 대해서도 각종 자료를 근거로 설명합니다.

저자는 팔로군 개개인은 열심히 싸웠지만 마오쩌둥과 공산당 지도부가 얼마나 이중적이었으며 그동안의 통념은 대륙을 차지한 중공이 역사의 승자로서 만들어낸 허구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시각은 이전에 제가 읽은 조너선 펜비의 《장제스 평전》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실제로 ​근래에 와서 중국 역시 지나치게 미화되었던 마오쩌둥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 장제스 정권과 중일전쟁의 항전 역사를 재평가하고 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첫째로 장제스의 힘을 약하게 해주었다. 둘째로 우리의 공산당 지도부의 근거지와 군대 확충을 도왔다. 한때 30만명에 달했던 우리 군대는 불과 2만명 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과 8년 전쟁을 치루면서 우리 군대는 120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것이 큰 도움을 받은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 마오쩌둥의 "일본의 침략에 감사한다" (p.491)

약 9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난해하지 않고 쉬운 문체, 온갖 흥미로운 이야기 등 읽는 내내 도무지 책을 덮을 수 없어서 설 연휴 동안 단숨에 읽었습니다. 더욱이 동아시아 역사에 많은 관심이 있기에 중일전쟁사는 제게는 너무나 흥미로웠습니다. 제가 근래에 본 책 중에서 최고라고 감히 말씀 드릴 수 있을 정도로 잘 구성되어 있습니다.

G2인 중국과 G3인 일본, 중국은 고도 성장하는 반면 버블 경제로 "잃어버린 20년"인 일본의 성장이 지지부진하지만 여전히 두 나라는 서로 만만찮은 상대입니다. 중국은 인구와 영토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하고 핵무기를 보유한 반면, 일본은 고도의 기술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경제 규모 역시 거의 대등합니다. 그동안 경제 논리를 앞세워 민감한 정치적 문제는 피해왔지만 국력이 비슷해지면서 두 나라는 다시 자존심 대결을 벌이고 있죠. 과거사 문제는 물론이고, 센카쿠 열도(다오위다오)와 조업권을 놓고 갈수록 대립각을 세우고 있습니다. 조만간 무력 충돌로 확대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요.

두 나라의 첨예한 갈등은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우리 역시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야말로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격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중일전쟁사는 반드시 우리가 관심가져야 할 주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더욱이 전쟁사를 떠나, 동아시아 역사와 정치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필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깜빡군 2015-02-20 공감(4) 댓글(0)
Thanks to
공감

No comments:

Post a Comment

Note: Only a member of this blog may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