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11

13 평화칼럼]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며/김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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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칼럼]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며/김명혁
2013.05.14 14:43 뻬뻬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신 것이 “화해와 평화와 통일” 이라고 신약 성경은 지적했습니다.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고후5:18).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골1:20).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 구약 성경은 야곱과 에서의 “화해”의 장면과 요셉과 그의 형들과의 “화해”의 장면을 생생하게 기록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창33:3,4,10, 창49:1,2,14,15). 메시야가 “평화의 왕”으로 오실 것을 예언했습니다(사9:6). 선지자 에스겔에게 “통일”의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겔37:16,17). 결국 기독교는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종교입니다. 소위 ‘악의 축”이라고 할 수 있는 니느웨와 로마에 대해서도 ‘분노'와 ‘증오'와 ‘저주'를 쏟아 붓는 대신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펴셨고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화려하고 대단한 예배를 드리기 이전에 “먼저 가서 형제와 화해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23,24).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왕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눅2:14).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서로 원수가 되었던 우리들을 “하나로” 만드셨다고 사도 바울이 지적했습니다(엡2:16, 갈3:28).

지금 우리 한국 교회와 사회 안에 시급하게 요청되는 것은 화려한 예배나 정통 진리의 선포 이전에 ‘증오’와 ‘분노’와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고 서로 붙잡고 울면서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들간에 그리고 신자들간에 “화해와 일치와 협력과 평화와 통일”을 이루는 것이 급 선무라고 생각합니다(고전12:12,27, 엡4:3,4). 의인 의식을 가질 때는 불가능하고 죄인 의식을 가질 때 비로서 가능해진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먼저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룰 때 양극으로 치닫고 있는 우리 사회도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고저 하는 자극과 감동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적대적으로 치닫고 있는 남북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도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입니다.
“화해와 평화와 통일”은 우리 죄인들과 피조물을 향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화해와 평화와 통일”은 성경의 목표이며 역사의 완성 점입니다.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배타적이고 위선적인 우리 죄인들이 십자가 상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함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흔적을 몸과 마음에 지니고 나타내면서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같은 신앙의 선배들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 우리들도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흔적과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흔적을 몸과 마음에 조금씩 아주 조금씩 지니고 나타내면서 살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스데반 집사님과 토마스 선교사님처럼,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처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수 있는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제물들이 될 때 ‘분노’와 ‘증오’와 ‘갈등’과 ‘분열’과 ‘혼돈’이 가득한 이 땅에 “긍휼과 용서와 사랑” 그리고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역사를 조금씩, 아주 조금씩 이룰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여 우리들을 화해의 도구들로 써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들을 평화의 도구들로 써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들을 통일의 도구들로 써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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