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08

모니카 마시아스: 김일성이 아버지였던 모니카의 평양...그리고 서울 - BBC News 코리아



모니카 마시아스: 김일성이 아버지였던 모니카의 평양...그리고 서울 - BBC News 코리아



모니카 마시아스: 김일성이 아버지였던 모니카의 평양...그리고 서울
김효정, 서명진BBC 코리아

2019년 3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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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16년, 내게 김일성은 제2의 아버지였다'

"꿈은 하늘에서 잠자고 추억은 구름 따라 흐르고… 친구여, 모습은 어딜 갔나. 그리운 친구여."

우리 말을 모국어로 사용하며, 한국 가수 조용필의 '친구여'를 즐겨 부르는 아프리카 적도기니 출신 여성이 있다. 그의 메신저 프로필에도 한반도 사진이 자리하고 있다.

지난해 남북정상회담 장면을 시청하며 감격에 젖기까지 했다는데...

바로 평양에서 어린 시절부터 20대까지 지낸 후 한국에서 30대 한 자락을 보낸 모니카 마시아스(47) 이야기다.

이런 배경 때문에 모니카는 평양과 서울 억양이 섞인 우리말을 한다.

그에게 남과 북, 그리고 한반도는 이름만 들어도 그리움에 눈물이 나는 곳이다.
영국 사진작가의 렌즈에 담긴 북한 주민들의 일상
북한에 편지를 보낼 수 있을까?
적도기니 대통령 딸이 평양으로 간 이유

7살이었던 1978년, 모니카는 언니, 오빠와 함께 평양행 비행기에 오른다. 아버지 프란시스코 마시아스는 스페인에서 독립한 적도기니의 초대 대통령이었다.

불안정한 상황 속 쿠데타의 위험을 피해 아버지는 세 아이를 '형님'으로 부르던 평양 김일성 주석에게 보낸다.Image copyright모니카 마시아스이미지 캡션아프리카 적도 기니 초대 대통령 딸이었던 모니카 마시아스(가장 우측)

그 당시 미국과 소련의 냉전 구도 속에서 북한 역시 서구 열강에서 독립한 제3세계 국가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던 시기였다. 평양에는 공산국가 출신 유학생들이 많았다.

모니카가 낯선 평양 생활을 시작하지 얼마 되지 않아 비보가 날아든다. 아버지가 암살된 것이다.

남매는 위협이 도사리는 적도기니로 돌아갈 수 없었다.

심리적 충격은 기억의 상실로 다가왔다.

모니카는 "이상하게도 이전 적도기니 기억이 사라져 버렸고 원래 쓰던 스페인어도 완전히 할 수가 없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빈자리에는 한반도의 언어가 채워졌다.
평양시민으로 자란 16년의 세월

이후 모니카는 만경대혁명학원 인민학교에 다니며 평양 생활에 적응하게 된다. 다른 재학생들처럼 사격, 야전 훈련 등 군사훈련을 받으며 당 간부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

졸업 후에는 김일성 주석이 추천한 피복학과 전공을 택해 평양 경공대에 진학했다.

외롭고 흔들렸던 때도 있었지만 평양의 친구들이 위로가 돼 줬다.Image copyright모니카 마시아스이미지 캡션만경대혁명학원 인민학교 시절 모니카 마시아스

북한의 폐쇄된 공간 속에서도 모니카는 외국인 신분 덕분에 조금이나마 자유를 맛볼 기회가 있었다.

다른 외국 친구가 건네준 미국 영화 '람보'나 '록키' 등을 즐겨봤다. 스스로 '인생의 주제곡'으로 칭하는 조용필의 '친구여'를 듣게 된 것도 그때였다.

1990년대 초, 대학 졸업 후 '자본주의에 적응하겠느냐'는 우려를 뒤로하고 모니카는 스페인으로 떠난다.

바깥세상을 향한 호기심이 그를 흔들었다.

이후 '원수의 나라'로 여겼던 미국 뉴욕에서도 살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예전 대학 시절 베이징에서 미국인을 처음 만나고 겁에 질려 도망쳤던 적도 있을 정도로 모니카는 '북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모니카는 달라졌다. 이내 뉴욕의 자유와 개방성, 다양성에 눈 뜨게 됐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 평양과 그곳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을 지울 수 없었다.
보지 못했던 한쪽 눈, 서울

"인천공항에 내렸는데 백두산 사진이 걸려있었어요. 멈춰서서 펑펑 울었어요."

외국 생활 이후 2007년 모니카는 서울행을 선택했다.

'미국의 앞잡이'로 배운 남쪽 땅이었다. 한국행 비행기 내내 가슴이 요동쳤지만, 땅을 디디자마자 느꼈다고 한다. '아, 이곳도 같은 땅이구나'하고.

서울행을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보지 못했던 다른 한쪽을 제대로 알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는 서울 한 의류회사에서 일하며 3년간 한국 사회를 경험했다.

그간 경험을 바탕으로 2013년에는 '나는 평양의 모니카입니다'라는 책도 펴냈다. 현재는 런던에서 국제관계학을 공부하고 있다.Image copyright모니카 마시아스이미지 캡션2007년 서울에서 살던 당시 모니카

두 나라를 다 살아본 모니카에게 남한과 북한은 어떤 의미일까. 모니카가 반복했던 답변은 바로 '체제는 달라도 같은 나라'였다.

그러나 공통점을 이야기하는 모니카와는 달리 사람들은 항상 '차이점'만을 집요하게 확인하려고 했다.

그는 "중국 사람과 북한 사람은 같아 보여도 사고방식이 다르지만 북한과 한국은 사고방식, 성격 모두 똑같다"는 말을 하면서 "욕하는 것도 똑같이 한다"며 환히 웃었다.

모니카에게 북한 정치 체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자, 그는 "정치에 대한 깊은 지식이 있어야 책임질 수 있는 발언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더불어 "김일성 주석에 대한 평가 역시 정치인이냐 인간이냐에 따라 답이 다르지만, 인간 김일성 쪽으로 이야기를 하면 아버님과의 약속을 지킨 의리가 있는 분"이라는 생각을 전했다.
편견의 눈

모니카는 서로를 너무 모르는 상황에서 남북이 서로 재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선 그가 남북에서 겪은 사람들은 다 똑같다고 했다.

정치는 따로 두더라도 일단 사람은 편견 없이 알고 지내야 한다는 것.

통제가 있었던 북한과 마찬가지로, 자유를 중시하는 미국 역시 자기만의 세계 안에서 다른 세상을 바라보듯 다른 나라를 바라본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Image copyright모니카 마시아스이미지 캡션미국 뉴욕에서 모니카는 다양성과 개방성을 맛봤다

그는 "사람도 지내봐야 알 듯 나라도 상대 나라를 먼저 아는 단계가 필요하다"며 "그렇게 알고 지내면 관계가 좀 더 좋아지지 않을까 한다"고 평했다.

한반도 뉴스를 늘 관심 있게 지켜본다는 모니카는 젊은 세대가 통일에 무관심한 듯하다며 안타까움을 내비치기도 했다.

"'통일을 해야 한다, 하면 안 된다'하는 선택에 앞서 중요한 것은 관심이에요. 통일은 정치 문제인데, 정치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해요. 국민은 주권 소유자인데 통일처럼 중요한 일에 무관심하다면 무책임한 것이에요."
'평양-서울' 거친 모니카의 꿈

나중에 아이를 낳게 되면 아이들에게 엄마의 삶이 '한반도' 그 자체였다고 말하고 싶다는 모니카 마시아스.

통일이 된다면 어린 시절 자신의 외로움을 채워주었던 북한의 친구들을 꼭 만나 남쪽 친구들을 소개해주고 싶은 것이 남은 소망이다. 조용필의 '친구여' 가사가 그에게 사무치는 이유다.

'옛일 생각이 날 때마다- 우리 잃어버린 정 찾아- 친구여 꿈속에서 만날까...'

영상 촬영 및 편집: 이웅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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