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04

[특별기고] ‘이승만과 김구’에서 얻은 낙수 / 김병익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모바일

[특별기고] ‘이승만과 김구’에서 얻은 낙수 / 김병익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모바일

이승만과 김구는 서로 협력하고 도와주면서도 그 전략에서는 준비론과 투쟁론으로 달리했다.
시대의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데는 경쟁하며 상보하는 강/온, 완/급의 두 자세가 시너지 효과를
키운다는 예를 이승만과 김구의 두 대조적 역할의 역사에서 볼 수 있었다.
잡지나 신문이 큰 행사나 사건의 보도에서 제대로 다루기에는 작고 버리기에는 아
까운 사소한 이야깃거리를 ‘낙수’(落穗)란 이름으로 게재했었다. 나는 손세일의 전 7
권 5500쪽의 거작 <이승만과 김구>를 읽으며 쓴 꽤 긴 독후감에 끼워넣지 못한, 그
러나 버리기엔 참 아까운 이삭들을 많이 얻었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와 견줄
만한 한국 정치사의 일대 서사로 평가하고 싶은 그 방대한 독립운동사의 전개에 끼
어든 숱한 에피소드들에서 불운한 역사적 아픔과 민족 해방을 향한 열정의 큰 줄기
역사 못지않은 진솔한 감동적 정경들을 본 것이다.
먼저 집어든 낙수는 김가진이 임정 초대 수반 이승만에게 “매우 인상적인 방문”을
한 장면이다. 손자와 인력거를 타고 프랑스 조계의 임시정부 사무실로 찾아온 그는
대한제국의 군복을 입고 이승만에게 큰절을 한 후 “각하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옛
황제 앞에서 입었던 이 관복을 입고 왔습니다”라고 인사를 올렸다. 그러고 나서 “여
기 있는 사람들과 어떻게 상종해야 할지를 아셔야 합니다”라는 충언을 드린다. 세도
높은 안동김씨 가문으로 의친왕을 중국으로 망명시키려는 계획이 탄로되자 가족을
데리고 상해(상하이)로 탈출한 그는 이승만보다 29살 연상으로, 임정의 젊은 대통령
에게 왕조 시대의 무관 복장을 갖추고 전시대적 의례를 올리는 그 장면이 뜻밖의 감
동을 주었다. 망국의 왕조 유신(遺臣)이 젊은 신체제 대통령에게 바친 예우에서 사라
진 시대의 옛 그림자가 드리운, 그러나 지극히 진지한 조국애의 비감 어린 장면이
눈에 선하게 보인 것이었다.
제3권에 나오는 사진 한 장은 김구와 그의 어머니, 두 아들 인과 신이 비석을 둘러싸
고 찍은 모습이다. 비석 가운데에 ‘최준례 묻엄’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바로 김구 선
생 부인의 묘비였다. 그 비에 적힌 생몰 연대는 그런데, ‘ㄹㄴㄴㄴ해 ㄷ달 ㅊㅈ날 남’
‘대한민국 ㅂ해 ㄱ달 ㄱ날 죽음’이라고 적혀 있다. 사진을 먼저 본 나는 당혹했지만
[특별기고] ‘이승만과 김구’에서 얻은 낙수 / 김
병익
24 4
등록 2016-02-11 19:20
수정 2016-02-11 20:18
사설.칼럼
강남맘카페에서 난리….!!노…
2020. 10. 4. [특별기고] ‘이승만과 김구’에서 얻은 낙수 / 김병익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모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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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지은이의 이름이 나오자 손가락으로 헤아려, ‘단기 4222년 3월19일생’ ‘임시
정부 기원 6년 1월1일 작고’임을 짚을 수 있었다. 이 비문을 지은 김두봉은 주시경의
수제자로 <조선어문전> 편찬에 참여한 당대 최고의 한글학자로 임시의정원 의원과
상해교민단 학무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비문의 생몰 연대마저 아라비아
숫자 대신 한글 자모순으로 바꾼 것이다. 북한이 해방되자 바로 한글전용을 실시한
이유도 여기서 알 듯하다.
나는 야구장을 가지 않는 대신 중계되는 경기는 매우 즐겨 본다. 그런 눈에 이승만
이 하와이에서 교포 야구단을 꾸려 조국에 친선방문단으로 파견하여 식민지 시대의
우리 야구팀과 친선경기를 벌였다는 이야기를 놓칠 수 없었다. 이승만은 자신의 교
포학교 건축비 마련을 위해 모국의 도움을 기대하며 ‘창가대’ 여학생들과 함께 20명
의 야구단을 꾸려 1923년 6월 조선에 파견한다. 이들은 곳곳에서 환영받고 창가로
답례를 했지만 저자는 당시의 신문을 뒤져 “가장 많은 관객이 몰린” 이들 야구단의
모국 야구단과의 전적을 기록하고 있다. 월남 이상재가 시구를 한 서울의 동경(도쿄)
유학생 팀과의 첫 경기에서 방문 학생야구단은 22 대 16으로 이겼고, 이틀 후 배재
학교 야구단과의 경기도 7 대 6으로 이겼다. 이틀 후 휘문고보 팀과는 7 대 1로 졌지
만 동경유학생 야구단과 다시 한 시합에서는 또 26 대 19로 크게 이겼다. 배구와 함
께 모국 학생방문단의 야구경기는 그 후 전국을 순회하면서 강연회, 음악회와 함께
열렸는데, 두 달 동안의 모국 순회 경기와 행사로 이승만의 한인기독학원 교사 건립
이란 숙원 사업에 이들은 당시 돈 2만5770원13전을 기부할 수 있었다. 이 땅에 들어
온 지 10여년밖에 안 된 야구 실력은 지금의 동네 야구 수준이었겠지만, 그 생소한
경기를 통해 학교 건물 하나를 지을 수 있었던 그 젊은이들의 순진한 열정이 아름다
웠다. 우표 수집가에게 귀가 번쩍 뜨일 이야기도 있다. 1944년 미국 체신부는 ‘유린
된 나라’ 시리즈의 하나로 태극기를 그린 우표 150만장을 인쇄했는데 “이내 동이 나
8, 9달러를 주고도 살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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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포진"방치하면
평생고통!!해결방법은?!
소화불량, 식도역류
위장병 위험 신호들..
치질, 잘라내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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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한인들의 조국 광복을 위한 모금운동도 무척 잦았지만 무엇보다 아프게 다가
온 것은 상해임시정부와 그 중심인물 김구 선생의 가난이었다. 쉰살의 생일을 이역
의 땅에서 맞은 김구는 상해로 망명한 이후 처음으로 나석주가 차려준 밥상을 받았
다. “가장 영광스런” 생일상을 받은 그는 어머니의 회갑상을 차려드리지 못한 것이
너무나 송구스러워 “죽는 날까지 생일을 지내지 않기로 하고 <백범일지>를 쓸 때
일부러 자신의 생일 날짜를 적지 않았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가난에 지친 어
머니 곽씨는 두 손자를 데리고 고향에 돌아가기로 하면서 쓰레기더미를 뒤져 먹을
만한 배춧잎을 거두어 아들의 김치를 담그고 떠난다. 쪼들린 임정 생활에 김구의 초
췌한 몰골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헝겊신의 바닥이 남아날 날이 없었다. 바닥은
다 닳아 너덜거리니 명색만 신발바닥이고 신발 목부분만 성한 채로 매달려 있는 꼴
이었다.” 어머니 곽씨는 임정의 중심인물이 된 아들에게 “이제부터 너라는 말을 고
쳐 자네라고 하겠네. 잘못하는 일이라도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네”라고 대접해
주기로 한다. 김구가 자신의 팔순 생신 준비를 한다는 말을 듣고 “청년에게 무기를
얼마 사주어 그것으로 왜적을 다만 몇 놈이라도 더 죽이게 하라”고 사양했고, 아들
이 피격당하고도 살아났다는 말을 듣고 “한인의 총을 맞고 산 것은 일인의 총에 죽
은 것보다 못하네”라고 핀잔했다. 그 아들에 그 어머니였다.
미국의 이승만 형편이 중국의 김구보다는 나았지만 궁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태평양잡지>를 간행하면서 기사와 논설, 편집과 삽화, 제작과 배포 모두 혼자 직접
했지만 늘 적자에 허덕였다. 파리 국제연맹 회의 참석 차 유럽에 간 이승만이 커피
숍에서 우연히 만난 프란체스카와 1933년 결혼하는데 25살 연하의 빈 출신 아내는
1965년 하와이에서 사별할 때까지 이승만에게 속기와 타자, 4개 국어에 능숙한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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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맘카페에서 난리….!!노…
2020. 10. 4. [특별기고] ‘이승만과 김구’에서 얻은 낙수 / 김병익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모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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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한 비서이자 동지, 주부이자 관리자’였다. 그녀는 이승만으로부터 <일본 내막기>
원고를 타자해준 수고비로 용돈을 받자 검은색 예복을 한 벌 사 40년 동안 입었고
그 옷을 며느리에게 물려주었다.
김병익 문학평론가
이승만과 김구의 두 ‘국부’는 같은 황해도에서 한 해 차이로 태어났고 같은 형무소에
서 옥살이를 했지만 두 거인이 실제로 만난 것은 3·1운동이 계기가 된 상해임정의
대통령과 경무부장으로서였다. 그들은 미국과 중국으로 떨어져 독립운동을 하며 서
로 협력하고 도와주면서도 그 전략에서는 준비론과 투쟁론으로 달리했다. 그러나
‘왕손의 후예’라는 자부심과 ‘상놈의 자식’이란 자의식에도 불구하고 똑같이 교육과
계몽을 가장 중시했고 그 일에 열성이었다. 4대 연합국은 승리로 종전이 되면 일본
이 통치하던 식민지를 원상태로 돌려놓기로 합의하는데, 이렇게 한민족의 해방에
동의가 이루어진 것은 미국의 이승만이 벌인 외교적 활약과 중국의 김구가 전개한
투쟁 활동이 국제적 인정을 받은 덕분이었다. 시대의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데는 경
쟁하며 상보하는 강/온, 완/급의 두 자세가 시너지 효과를 키운다는 예를 이승만과
김구의 두 대조적 역할의 역사에서 볼 수 있었다.
김병익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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