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nhee Kim
nh15d FemtSbprouantaryn sredmhmrmnorSat e0dl2:ce0h9 ·
집행되지 않는 판결
지난 달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생존하는 일본군 위안부피해자 12명이 일본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일본정부는 피해자들에게 1억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하였다. 이에 대해 정부는 "사법부 판단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동시에 문대통령은 지난 달 기자회견에서 강제집행 방식의 현금화는 한일관계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언급하였다.
문재인 정부의 이러한 입장은 아연실색할 정도로 허술한 법의식을 보여준다. 사법부 판결은 강제집행을 통해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국가의지라고도 할 수 있는데 대통령이 판결을 존중한다면서 강제집행은 안된다니 모순 아닌가? 강제집행을 하지 않는다면 어떤 의미에서 사법부의 판결을 존중한다는 것인가? 강제집행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왜 위안부피해자들로 하여금 일본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도록 '선동'했는가?
정치가 종교와 도덕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근대사회에서 국가는 법 그 자체이다. 즉,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민족이나 종족집단들이 같은 법제도에 의해 지배받을 때 통일된 국가가 탄생한다. 근대국가의 목적은 기본적으로 법을 통해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지 도덕적인 혹은 종교적 가치를 실현하는 데 있지 않다. 현대사회에서 시민은 '법을 지키고 세금을 내는'('law-abiding and tax-paying') 사람들로 규정된다. 법의 지배를 이행하지 못하는 국가는 국가로서의 기본적 기능을 상실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수십 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살인자가 버젓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닌다면 그런 사회는 국가의지가 집행되지 않는 무정부사회이다. 법이 집행되지 않는 무정부 사회에서 사람들은 각자 알아서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방어해야 한다.
이번 재판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해진 '주권면제'라는 국제관습법도 법의 강제성을 전제하고 있다. 다른 나라 정부의 행위가 우리나라 사법부의 판결의 대상이 되었을 때 판결을 이행하기 위해선 우리나라에 있는 그 나라 정부의 재산을 압류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는 다른 나라 영토를 침입하는 것에 준하는 행동이라 보복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보복의 악순환을 피하기 위해 타국을 상대로 한 법적 다툼은 국내재판을 피하고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거나 정치적, 외교적 합의를 통해 해결하고자 하게 된다. 국내재판을 피하는 국제법의 불문율을 '주권면제'라고 하는 것이다.
과거 정부에서 위안부피해자 손해배상소송을 기각했던 것도 국내 사법부 판결의 강제집행이 대일관계에 초래할 후폭풍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국제법의 주권면제의 원칙을 무시하고 국내재판을 했을 경우 판결을 이행하려면 일본정부의 재산을 압류할 수 있어야 하는데 국내재판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에게 일본정부재산의 압류는 일본의 보복과 국교단절과 같은 최악의 상황을 감수할 각오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반면에 현 정부는 2015년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합의를 사실상 폐기하다시피 했고 일본정부를 상대로 한국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것을 부추겼다. 한일 양국 정부 외교부의 합의에 근거하여 일본정부가 10억엔을 출연하여 만든 화해치유재단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며 해산되었으며 당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위안부합의가 '진정한' 해결이 될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그런데 정작 한국법원이 주권면제의 원칙을 배제하고 일본정부가 생존 위안부피해자들에게 1억원씩 배상할 것을 판결하자 현 정부는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을 이유로 판결을 강제집행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야 박근혜 정부의 2015년 합의를 공식적 합의로 인정하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늦었다. 문재인 정부는 이미 딜레마에 빠져있다. 한편으로는 법치국가에서 법원판결을 이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사법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국가기강은 무너지게 된다. 국제사회에서도 한국 사법부의 판결을 누가 신뢰할 것인가? 반면에 판결을 이행하게 되면 일본과의 외교관계는 아마도 파탄날 것이다. 외국공관지역에 들어가 외국정부재산을 압류하는 것은 비엔나협약 22조를 위반하는 것으로 외국영토를 침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미 일본정부에 대해 주권면제를 인정하지 않아 한일관계는 급속히 냉각되고 있다.
'문정부의 이 딜레마는 지난 2년간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조국, 윤미향 사태, 그리고 비교적 최근의 윤석렬 검찰총장과 정부 사이의 갈등, 유시민의 거짓말 등과 일맥상통하고 하고 있다. 현 정부와 그 지지자들은 한결같이 법, 계약, 합의 등을 지키는 것을 중시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이번 판결의 강제집행을 하지 않아도 별 문제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한겨레신문 등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언론보도 역시 강제집행은 안된다고 못박고 있다. 1월10일자(인터넷판) 한겨레신문의 길윤형 기자는 이번 판결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법적 책임"을 인정한 데 그 의의가 있으며 실제로는 이행되지 않는 "상징적 판결"로 남게 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참으로 편리한 생각이다.
그래, 강제집행 안 한다 치자. 그렇다면 사법부의 '상징적' 판결은 위안부피해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당신은 집행되지도 않을 상징적 판결을 받기 위해서 소송을 제기하는가? 아무 효력도 없는 '상징적' 판결을 받기 위해 30년을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시위하였는가? 그동안 일본정부가 수차례 사죄하고 상당한 금액의 '위로금'을 지급하는 것을 걷어찼는가? 그리고 '돈받으면 화냥년'이라고 큰소리쳤나?
정대협, 정의연이 일본정부에게 요구해온 '법적 책임과 법적 배상'은 우리가 힘으로 일본을 굴복시킬 수 없는 한 현실적으로 실현될 수 없는 문제해결 방법이다. 애초부터 일본은 개인청구권을 완전히 소멸시킨 1965년 한일협정을 내세우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체의 법적 책임을 완강히 거부하였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내가 보기에도 우리가 일본정부에게 법적인 책임과 배상을 강조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한일협정이라는 조약을 지키길 요구하는 국제사회의 법질서를 부인하는 것이다. 일본 정부가 당시 위안부피해자들에게 '반인도적 범죄'를 저질렀다 해도 일본정부에 법적 책임을 요구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한일협정은 개인청구권에 대해 "어떤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고 명시했기 때문이다.
대신 일본정부는 '도의적' 책임을 받아들여 그동안 여러번 사죄했고 상당한 금액의 '위로금'을 피해자들에게 지급하였다. 1990년대 중반 무렵 일본정부의 재정지원과 민간인 모금으로 아시아기금을 조성하여 무라야마 총리가 사죄하는 편지와 함께 피해자 한 사람당 500만엔(약 7250만원)을 61명에게 지급하였다. 2015년 한일 양국의 외교부 합의에 따라 일본정부가 10억엔(108억원)을 출연하여 화해치유재단을 만들었고 이 재단을 통해 생존위안부 46명 중 36명이 위로금 1억원씩 수령하였다. 이는 많은 생존위안부피해자들이 일본의 사죄와 위로금을 받아들이길 원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이제 얼마나 더 살겠는가?'하는 현실적 문제를 고려하여 일본의 사죄와 반성을 받아들였다. 또한 생활이 곤궁했던 피해자들에게 '위로금'이든 '배상금'이든 그 명칭은 중요하지 않았다.
일본정부의 사죄와 위로금 지급에 대해 정대협과 정의연은 '진정성'이 없다고, 정부의 '배상금'이 아니라 '위로금'이라고, 기타 여러가지 애매한 이유를 내세우며 반대해왔다. 아시아기금 때에는 일부 위안부피해자들로부터 돈을 받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받았다. 정의연은 2015년 합의에 대해 위안부들에게 의견을 묻지 않고 진행시켰다고 반대했지만 정의연 등 시민단체들도 마찬가지로 위안부피해자들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았다. 결국 정의연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해결책과 거리가 먼 법적 책임과 배상을 요구하며 거의 30년에 이르는 세월을 보냈다. 아마 앞으로 정의연은 일본 대사관 앞에서 '자발적으로' 배상금을 지불하라는 수요집회에 할머니들 동원하며 더욱 가열차게 반일여론을 부추길 것이다. 촛불시위도 하겠지.
우리는 이제 일본의 도의적 책임 이행을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실현 가능성 없는 법적 책임과 배상을 요구하는 것이 위안부피해자 할머니들에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물어야 한다. 한국사회가 그들에게 일본보다도 더욱 심한 형벌을 내리는 것은 아닐까? 일본을 증오하는 집회참석 30년 형. 비가 와도 눈이 와도 30년 동안 참석하라. 정작 위안부피해자들의 삶과 전혀 관계없는 '대의'를 위해 그들이 보상받을 수 있는 기회를 차버리는 것이 80년 전 위안부로 차출했던 일본제국 못지 않게 그들을 국가를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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