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01

[길을찾아서] 내가 무정부주의자? 어쨌든 ‘영광’이외다 / 정경모 52

[길을찾아서] 내가 무정부주의자? 어쨌든 ‘영광’이외다 / 정경모 : 사회일반 : 사회 : 뉴스 : 한겨레모바일: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52

1972년 10월 유신헌법 공포 직전 도쿄로 건너온 김대중씨는 필자에게 일본과 미국의 정치권을 상대로 ‘반독재 민
주화운동’을 벌이는 데 활용할 신문을 만들어줄 것을 요청했다. 그 무렵 김씨가 의원 신분으로 후지야마 이치로,
다가와 세이이치 등 일본 정객들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사진 김종충씨 회고록 <현해탄 파도는 아직도> 중에서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52
1972년 김대중 선생과 두 차례 만나고 나서, 사람은 우선 겉모양으로 상대방을 헤아
리게 마련이고 김 선생이 그 정도로 나를 봤다 해도 굳이 탓할 수는 없노라고 나는
느꼈소이다. 내게 무슨 대학교수쯤의 직함이 있었다든지, 혹은 국회의원이라도 한
차례 지냈다는 경력이 있다면 또 모르되, 논어의 말마따나 나이 사십이 넘도록 무문
이었으니 ‘부족외야’로 비쳤다 해도 무리는 아니었겠지요.
[길을찾아서] 내가 무정부주의자? 어쨌든 ‘영
광’이외다 / 정경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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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09-07-14 18:42
0 사회 0
닳고 닳은 관절, '주사,수술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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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번 어느날 사무소에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궁금도 하고 실례가 되지 않도
록 말을 낮추면서 김 선생에게 물었소이다.
“선생께서는 앞으로 무엇을 하시겠는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실 수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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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답은 ‘제2의 4·19’였소이다.
“내가 앞으로 일본과 미국을 왕래하면서 두 나라의 정계를 움직인다면 본국에서 제
2의 4·19가 발생할 것이며, 그때는 내가 들어가서 혁명위원회를 조직하게 될 것입니
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4·19에 대한 김 선생의 인식이 틀린 것이 아닐는지, 약간 의
아스러운 느낌이었소이다. 4·19로 인해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결과적으로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게 된 것은 사실이나 빗발치는 총탄을 무릅쓰고 이승만 정권을 타도
한 학생들의 투쟁은 결코 민주당을 차기 정권의 담당자로 상정하고 있었던 것은 아
니지 않소이까.
‘4·19’의 시인 신동엽이 무어라고 부르짖었소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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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 닳은 관절, '주사,수술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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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4·19 학생혁명의 정신은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는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인
데, 이 점에 대한 김 선생의 이해는 빗나간 것이 아닐까 느끼지 않을 수 없었소이다.
더구나 그가 ‘혁명위원회’를 운운하시니, 나는 쿠바혁명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는데,
쿠바와 우리나라는 비록 역사적 배경이나 놓여 있는 상황이 같은 것은 아니나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는 절규에서는 4·19와 쿠바, 두 혁명의 정신은 공통된 것이라
고 나는 믿고 있었소이다.
그러면서 김 선생은 역시 한민당의 전통을 이어받은 신민당 정객임을 새삼 깨닫지
않을 수 없었소이다. 한민당이란 김구 선생의 말투를 빌린다면, ‘적들이 항복하던 전
야까지 그들의 본거지를 제 집 드나들듯이 하면서 그들의 승리를 위해 모든 정성을
바치던’ 인사들의 집단이 아니오이까. 그 한민당이 민국당, 민주당, 신민당으로 여러
차례 간판을 바꾸기는 했으나 그들의 사대주의 사고는 뿌리깊게 살아남아 있음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소이까. 하기야 김 선생이 그런 흐름 속의 정치가 중에서는 한
국 문제를 민족 차원에서 거론한 최초의 인물이었다는 것쯤의 인식이 내게 없지는
않았소이다.
그러나 미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들을 설득해서 제2의 4·19를 일으켜 그것을 바탕으
로 혁명위원회를 조직한다니, ‘연목구어’도 유만분수요,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만
한 발상이 아니었소이다. 약간 화도 나고, 또 혁명을 운위한 김 선생 자신의 말도 있
던 터라, 문득 쿠바혁명 때 볼리비아에서 총에 맞아 죽은 체 게바라가 떠올라 좀 격
한 말투로 한마디 하고는 밖으로 나와버렸소이다.
“김 선생, 나더러 신문을 내라고 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총을 쏘라고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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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그런 며칠 뒤 이시카와 모라는 일본 사람이 김 선생의 심부름으로 집으로 찾아왔습
디다. ‘정경모’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좀 알아보고 오라는 뜻이었겠지요. 그 사람
을 적당히 다루어 보낸 다음 상당히 심기가 불편합디다. 김 선생께서 ‘정경모 당신이
뭘 생각하고 있는가’ 묻고 싶으시다면 나를 불러 직접 묻든지, 삼고지례는 아닐망정
당신께서 나를 찾아오시든가 할 일이지, 아니 그래 민족운동을 같이 할 동지를 찾는
분이 일본 사람을 시켜 내 맘을 떠보게 하다니 그게 무슨 노릇이오이까. 그러고 나
서 얼마 안 지나 ‘정경모는 무정부주의자니 절대로 접근하면 안 된다’고, 지방 순회
중의 김 선생께서 만나는 사람한테마다 그러시더라는 말이 내 귀에도 들려오더이
다.
옛날 진짜 무정부주의자였던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는 상해 임정의 초대 대통령으로
있던 이승만씨로부터 공산주의자로 혹심한 미움을 받고 있었는데, 나는 공산주의자
도 아니요 무정부주의자도 아니지만 김 선생으로부터 그렇게까지 미움을 사고 있다
면, 이제 나는 단재 선생과 같은 위상으로 사람값이 격상된 것이 아닐까 하고 쓴웃
음을 웃었을 뿐이었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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