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01

[길을찾아서] DJ 향한 ‘기대와 실망’ 엇갈리고… / 정경모 51

[길을찾아서] DJ 향한 ‘기대와 실망’ 엇갈리고…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51

김대중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그가 망명을 선언했던 1972
년 섣달 어느날이었소이다. 그분께서 사람을 시켜 나를 만나자고 한 것은 앞으로 신
문을 낼 계획이니 힘이 되어 달라는 뜻이 아니었겠소이까. 둘 다 망명객으로 이국땅
에 와 있는 처지요, 나는 얼마나 뜨겁게 그 일을 위해서라면 견마지로를 아끼지 않
겠노라고 마음속에서 느꼈겠소이까. 나야 일본에 와서 겨우 책을 한 권 낸 것이 전
부인, 말하자면 문필가로서는 걸음마를 하기 시작한 애송이 글쟁이에 불과하니, 설
사 천하를 호령하는 대문장을 써서 세상에 발표했다 한들 그것이 무슨 뜻을 지닐 수
가 있겠소이까.
그러나 내가 만일 박정희와 겨룬 끝에 권토중래를 기해 한때 일본으로 망명해 온 김
대중 선생을 등에 업고 그의 입을 빌려, 비단 남쪽만이 아니라 남북을 아우르는 민
족 전체를 향해 우리가 처한 현황을 말하고, 외세의 강요로 부당하게 분단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민족으로 하여금 그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이 길
로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 방향을 제시한다면, 그 한마디 한마디의 말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겠소이까. 김 선생을 만나고 온 다음 나는 뛰는 가슴을 억제하
면서 약속의 땅을 향해 바야흐로 홍해를 건너려 하는 모세와 김 선생의 모습을 겹쳐
서 생각하면서 얼마 동안을 참으로 원대한 꿈속에서 나날을 보내고 있었소이다.
그러다 두번째로 김 선생을 만난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은 확실치가 않으나, 장소는
배동호 그룹이 그의 영입을 위해 마련한 상당히 호화찬란한, 도쿄 한복판 간다의 4
층짜리 빌딩이었소이다. 배동호 그룹과 김 선생의 협력관계는 어떠한 경로를 밟았
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내가 그 사무실을 드나들 무렵에는 이미 성립되어 있었던 것
이외다. 아무튼 그 빌딩 사무소에서 전날 영어를 씨부렁거렸다고 내게 맞대놓고 욕
지거리를 퍼붓던 곽동의도 다시 만났고, 또 얼마 안 있어 ‘김대중 수석비서관’이라는
큼직한 명함을 들고 으스대며 다니게 되는 조활준, 또 김 선생의 소학교 동창이라는
것으로 측근을 자처하며 특권이나 되는 듯 행세하고 있던 김종충 등 여러 인물을 만
나게 되었소이다.

그런 어느날 김 선생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데 ‘곽’이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저게 뭐 기독교인?” 하고 못마땅한 듯이 그를 턱으로 가리킵디다. ‘종교는 아편’이
라는 식의, 어디서 ‘주서’들은 사회주의적 지식을 내게 피로한 것인데, 그 말을 들으
면서 뭔가 불길한 생각이 듭디다. 이 사람들과 손을 잡는 것 말고 다른 선택은 없었
을까. 김 선생이 가엽기도 하고 말이외다.
아무튼 그 사무소의 구성원들은 그래도 내가 존경심을 품고 대하던 배씨를 별도로
한다면 하나같이 함량미달의 인물들뿐이었으며, 망명을 선언한 김 선생이 과연 동
지로 지내도 무방한 인물들인지 의심스러울뿐더러, 걱정스러웠소이다.

그런데 김 선생이 처음 만났을 때 얘기했던 신문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일체 말이 없고, 약간 답답하기도 해서 어느날 물었소이다. 그 시점에서 나는 적극적으로 <민족시보>에
관여하고 있지는 않았소이다. “그때 말씀하시던 신문은 내실 겁니까?” “아, 내야지
요.” “그럼 그 신문은 우리말 신문이겠지요?” “아니, 일본말이외다.” “누구에게 읽히
는 것인데요?” “앞으로 나는 미국을 오가면서 활동을 개시하겠는데, 내 동향을 일본
국회의원 아무개, 아무개 선생들에게 읽힐 신문이외다.” 그러고는 내가 묻지도 않았
는데 돈 얘기를 꺼내시더군요. “한달에 10만원은 지불하겠으니 내 소학교 동창생인
김아무개로부터 받아 생활비로도 쓰고 신문도 내 주시오.”

그 당시 김 선생이 분주히 일본 국회를 출입하면서, 우쓰노미야, 고노 등 자민당 안
에서는 그래도 양식파라고 할 수 있는 약 10명가량의 ‘에이에이’(AA) 그룹에 많은 기
대를 걸고 있다는 것은 나도 알고는 있었사외다. 그러나 그 몇 사람에게 읽히기 위
해서 ‘신문’을 내라고 하니 내가 느끼는 실망이 어느 정도였겠는지 알 만하지 않소이
까. 자기 측근이니 김아무개한테서 얼마씩 받아 생활도 하고 ‘신문’도 내라는 말은
내게 또 얼마나 모욕적으로 들렸겠소이까. 그때 내게는 김대중 선생과 손잡고 뛴다
면 그 돈의 10배, 100배의 자금을 모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소이다. 차
라리 김 선생이 “내게 무슨 돈이 있겠나. 그렇지만 생명보험료로 한달에 5만원은 보
장하겠으니 목숨 걸고 함께 뛰어주겠는가” 했다면, 내가 얼마나 감격의 눈물을 흘렸
겠소이까.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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