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k Yuha
어제 공유한 <일본인 위안부>와 함께 꼭 읽어야 할 책에 대한 서평.권용득 작가께서 보태고 뺄 게 없이 써 주셨다. 특히 이 책이 한국 사회에서 슬쩍 보고 한쪽으로 치워지는 대접을 받은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30년 운동과 연구로 권위를 구축한 이들이야 그렇다 쳐도 젊은이들은 읽어 보자. 이 책은, 전시 성폭력문제에 관한 인식에서 세계 최첨단의 책이다.
권용득
3tShponsnagorced ·
12명의 사회학·역사학 분야 연구자가 공동 저자로 참여한 <전쟁과 성폭력의 비교사>를 관통하는 주제를 한마디로 하면 ‘새로운 듣기의 가능성’이 아닐까 싶다.
91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의 실명 증언은 이 책의 공동 저자인 우에노 치즈코가 ‘쇼크’라고 표현할 만큼 큰 화제였다.
그전에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 관련 연구와 피해자 지원활동은 여러 각도에서 진행되고 있었지만, ‘김학순 쇼크’ 이후에야 비로소 제대로 공론화되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마침 90년대 들어서면서 그전까지 전시 성폭력을 전쟁의 부수적 피해 정도로 여겼던 국제사회도 구 유고슬라비아와 르완다 분쟁에서 벌어진 점령군에 의한 집단 강간 사건에 주목하면서 전시 성폭력을 제노사이드에 버금가는 주요 전쟁범죄로 다루기 시작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가시화된 시점과 전시 성폭력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식이 변화하기 시작한 시점은 그런 식으로 연속선상에 있다(나치 수용소 내 매춘시설에서 성노동을 강요당했던 한 피해자는 김학순의 실명 증언 이후 오랜 침묵을 깨고 독일 TV 언론의 취재에 응하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김학순의 실명 증언은 큰 의미가 있고, 김학순의 실명 증언이 가능했던 까닭은 김학순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려는 청자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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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청자가 듣기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는 아니다. 화자의 이야기를 통제하거나 지배하기도 한다. 그 어떤 화자든 화자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로부터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고, 화자 또한 그 사실을 예민하게 알아차린다. 자신의 이야기가 공동체 내에서 어떻게 소비되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안다는 얘기고, 화자의 이야기는 어느 순간 청자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로 변질되기도 한다. 요컨대 지난해 5월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의 ‘이용만 당했다’는 폭로 이후 이용수를 향한 비난 대부분은 이용수가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치 세력(또는 정치인)을 흠집 낸다는 원망이었다. 그들에게 이용수의 고통은 안중에 없었고, 그들에게 이용수의 폭로는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던 셈이다.
그렇다고 청자가 듣기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는 아니다. 화자의 이야기를 통제하거나 지배하기도 한다. 그 어떤 화자든 화자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로부터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고, 화자 또한 그 사실을 예민하게 알아차린다. 자신의 이야기가 공동체 내에서 어떻게 소비되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안다는 얘기고, 화자의 이야기는 어느 순간 청자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로 변질되기도 한다. 요컨대 지난해 5월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의 ‘이용만 당했다’는 폭로 이후 이용수를 향한 비난 대부분은 이용수가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치 세력(또는 정치인)을 흠집 낸다는 원망이었다. 그들에게 이용수의 고통은 안중에 없었고, 그들에게 이용수의 폭로는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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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도 같은 지적이 계속 반복된다. 어떤 화자의 어떤 피해 서사는 손쉽게 가시화되고 동시에 공적 기억으로 존중받는 반면, 그럴수록 풍선 효과처럼 찌그러지고 결국에는 풍화되는 피해 서사도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모두 후자의 피해 서사에 주목하면서 공동체가 어떤 피해 서사를 공적 기억(중심 서사)로 선별하고, 또 동시에 공동체에 이롭지 못한 사적 기억(주변 서사)를 지워나가는지 그 배경을 파고든다. 또한 공동체 내에서 오랜 시간 침묵을 강요받은 화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해방되는 과정도 잘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도 같은 지적이 계속 반복된다. 어떤 화자의 어떤 피해 서사는 손쉽게 가시화되고 동시에 공적 기억으로 존중받는 반면, 그럴수록 풍선 효과처럼 찌그러지고 결국에는 풍화되는 피해 서사도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모두 후자의 피해 서사에 주목하면서 공동체가 어떤 피해 서사를 공적 기억(중심 서사)로 선별하고, 또 동시에 공동체에 이롭지 못한 사적 기억(주변 서사)를 지워나가는지 그 배경을 파고든다. 또한 공동체 내에서 오랜 시간 침묵을 강요받은 화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해방되는 과정도 잘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2차 세계대전 당시 베를린에서 소련군에 의한 집단 강간 사건에 관한 수기는 종전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터져 나왔다. 그 고난의 수기는 비교적 솔직한 편이었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로부터 통제되거나 지배되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자신들이 당한 일을 독일군이 점령지에서 했던 악랄한 행위에 대한 보복쯤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소련군의 만행을 ‘자연재해’로 여기기도 했다. 게다가 종전 후 미소 냉전 상황에서 자유주의 진영은 이들의 피해 서사를 소련을 비난하는 선전 도구로 삼기도 했다(그 대표 피해 서사 격인 <함락된 도시의 여자>도 초판은 미국에서 먼저 출간됐다). 다시 말해 피해자들은 일체의 저항이 불가능한 상황을 널리 이해받고 있었고, 따라서 자신의 피해 사실을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다.
반면 일본군 고참 병사에게 장기간 구속되어 그 고참 병사의 아이까지 낳았던 중국의 난런푸는 해방 후 삼반오반 운동 당시 ‘역사적 반혁명’ 죄를 뒤집어쓰고 투옥됐다. 난런푸의 가족은 항일세력에게 몰살당하고, 난런푸도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처럼 공동체 내에서 여성의 성폭력 피해가 수치스러운 일로 낙인찍히면(거기에 더해서 ‘적에게 더렵혀진 여자’ 또는 ‘적에게 협력한 여자’라는 낙인까지 찍히면) 아무리 억울하고 고통스러워도 당사자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베를린에서의 피해자들처럼 자신이 왜 그런 일을 겪어야 했는지 역사적 맥락 속에서 살필 기회조차 없고, 이들의 피해는 다중적 억압 속에 방치되다 사라지기 마련이다. 난런푸 같은 극단적 사례는 없었지만, 해방 후 조선인 위안부의 피해 서사도 같은 이유로 오랜 시간 억압돼왔다. 해방 후에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피해자가 부지기수였고, 이들은 당시만 해도 자신들의 피해 서사를 김학순처럼 입 밖으로 꺼내놓을 수 없었다. 그건 조선인 위안부뿐만이 아니었다. 일본인 위안부도 마찬가지였고, 미군 기지촌 성노동자(소위 ‘빵빵’: 일본 정부는 패전 직후 ‘성방파제’ 삼아 미군을 상대할 여성을 모집했지만, 강제로 동원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와 종전 후 만주에 남겨진 일본인 여성과 나치 수용소 내 성노동자도 같은 이유로 자신들의 피해를 오랜 시간 숨겨야 했다.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안 사실은 일본의 우생보호법(지금은 ‘모체보건법’으로 바뀌었다)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다. 그전까지만 해도 일본의 우생보호법을 타민족의 아이나 장애아를 선별하려는 나치의 인종말살정책쯤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법이었다. 종전 후 중국과 조선 각지에 남겨진 일본인은 현지 주민들에게 분풀이 대상이 됐다. 특히 만주에 한 일본인 거주지(구타미 개척단)는 현지 주민들의 표적이 되는 바람에 주민이 집단자결하기도 했다(1명 생존했다). 그 소식이 알려지면서 인근의 다른 일본인 거주지(구로카와 개척단)에서는 만주까지 진주한 소련군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소련군은 보호를 빌미로 여성의 몸을 요구했고, 이때 소련군에게 희생된 여성은 부녀자보다 주로 젊은 미혼 여성이었다. 특히 출정 병사의 아내는 예외였는데, 관련 사건을 파고든 이 책의 공동 저자 이노마타 유스케는 눈앞에 여성보다 부재하는 남성 동료의 여성을 우선시한 ‘호모소셜한 연대’의 결과라고 지적했다. 즉, 당시만 해도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로 간주됐고 호모소셜한 연대는 누구의 소유물도 아닌 여성부터 희생양 삼았다.
이 여성들이 일본으로 돌아올 무렵에는 이 여성들의 강제 임신이 사회 문제로 불거졌다. ‘적에게 더렵혀진 여자’라는 낙인이 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도 종종 있었지만, 이 여성들에게 임신을 중단할 자기결정권은 없었다. 당시 일본에서 낙태는 중범죄였고, 일본 정부는 결국 우회적으로 낙태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또 당시에는 물자 부족 따위의 이유로 마취약이 없어서 관련 수술은 모두 마취 없이 이루어졌다. 그 일련의 사건 이후 일본 정부는 우생보호법을 만들어 강간에 의한 강제 임신뿐만 아니라 경제적 이유로 인한 임신 중단까지 법적으로 허용했다. 이 책의 공동 저자인 히구치 게이코는 우생사상을 바탕으로 한 악법이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이 다른 나라에 비해 임신 중단의 자유가 보장된 배경이라고 지적했다.
흥미로운 것은 앞서 말한 사건이 가시화된 이후다. 앞서 말한 사건은 일본에서도 가시화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이 책의 공동 저자 사토 후미카에 따르면 ‘배외주의적이고 내셔널리스틱한 인터넷 공간에서 (해당 사건은) 이웃 나라에 대한 적의를 부추기는 재료로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이 책은 비가시화된 피해 서사를 국경을 초월해 비교하고 있지만, 단지 비교에만 그치지 않는다. 어느 쪽 피해자의 피해 서사가 더 고통스러웠는지 불행올림픽을 하자는 것도 아니다. 화자의 이야기를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전시 성폭력처럼 비일상 속 성폭력뿐만 아니라 일상 속 성폭력까지 연결해서 살펴볼 계기가 되고 그와 같은 시도를 통해 새로운 국면이 열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리즈 켈리의 ‘성폭력 연속체’ 개념을 사용해 강간·매매춘·연애·결혼에 이르기까지, 이 사이에 분명하게 구별되는 성폭력과 그렇지 않은 성폭력을 연속선상에서 놓고 보려는 우에노 치즈코와 다른 공동 저자의 시도는 아마도 그런 차원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이를테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서 결혼이주여성 문제까지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단서가 있을 테고, 이들의 시도는 여러 비기사회된 전시 성폭력 사건을 망라하면서 그 단서가 선명해지도록 만드는 시도였다고 본다. 한마디로 하면 남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 그리고 우리의 문제로 보게 만드는 책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읽었다.
이처럼 이 책은 비가시화된 피해 서사를 국경을 초월해 비교하고 있지만, 단지 비교에만 그치지 않는다. 어느 쪽 피해자의 피해 서사가 더 고통스러웠는지 불행올림픽을 하자는 것도 아니다. 화자의 이야기를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전시 성폭력처럼 비일상 속 성폭력뿐만 아니라 일상 속 성폭력까지 연결해서 살펴볼 계기가 되고 그와 같은 시도를 통해 새로운 국면이 열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리즈 켈리의 ‘성폭력 연속체’ 개념을 사용해 강간·매매춘·연애·결혼에 이르기까지, 이 사이에 분명하게 구별되는 성폭력과 그렇지 않은 성폭력을 연속선상에서 놓고 보려는 우에노 치즈코와 다른 공동 저자의 시도는 아마도 그런 차원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이를테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서 결혼이주여성 문제까지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단서가 있을 테고, 이들의 시도는 여러 비기사회된 전시 성폭력 사건을 망라하면서 그 단서가 선명해지도록 만드는 시도였다고 본다. 한마디로 하면 남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 그리고 우리의 문제로 보게 만드는 책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읽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해서 서평을 검색해봤다. 짧은 독자 서평 몇 개와 언론 서평 두 개밖에 찾지 못했다. 그마저 언론 서평은 모두 이 책의 의도를 다소 악의적으로 해석한 비판조였다. 한 줄로 요약하자면(외람되지만 해당 서평 작성자들도 이 책을 그런 식으로 요약하였으므로) 어떻게 감히 일본인 위안부와 조선인 위안부를 동일선상에 놓느냐, 왜 조선인 위안부 때문에 일본인 위안부가 비가시화됐다며 징징거리느냐는 식이다. 또 한 언론 서평은 초장에 우에노 치즈코가 박유하를 인용하면서 사용한 ‘동반자’라는 표현을 꼬투리잡고 있었다. 그 ‘동반자’는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 병사가 종전 직후 현지 주민에게는 같은 편으로 뭉뚱그려질 수밖에 없다는 문맥에서 사용했는데, 실제로 싱가포르나 오키나와 등에서 해방을 맞았던 조선인 위안부는 피해자가 아닌 포로 신분이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앞서 말한 ‘동반자’ 같은 표현을 ‘가해자의 언어’ 또는 ‘(위안부 문제) 부정론자의 언어’로만 보고 일본의 책임을 흐린다면서 무조건 금지할 때, 오히려 위안소의 실태는 가려진다.
이 책의 공동 저자 히라이 가즈코는 위안소를 이용했던 일본군 병사의 수기를 면밀히 분석해서 정리했는데, 그동안 ‘피해자의 언어’로만 봐왔던 피해 서사가 보다 입체적으로 재구성되는 것 같았다. 히라이 가즈코에 따르면 일본군 병사는 위안부에게 가해 의식조차 없었고, 그게 위법하다고 여기지도 않았다(아주 극소수만이 위안부의 처지를 이해하고 위안소를 이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용무가 끝나면 곧바로 퇴실할 것’이라는 위안소 규정에 자신이 물건 취급받는 모멸감을 느끼면서 때때로 위안부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히라이 카즈코는 그 일체감을 ‘남성 측의 독선적인 일체감’이라고 딱 잘라 비판했고, 이 문제는 젠더 관점 없이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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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근래에 한국인은 책 속에 등장하는 나치 수용소에서의 정치범과 사뭇 닮은 것 같다. 이 책의 공동 저자 히메오카 도시코에 따르면 나치 수용소 내에도 등급이 있었다. 카포(군기반장), 정치범(카포 역할을 하기도 했다), 반사회적 분자·집시·유대인(인간 이하 취급받는 수감자), 이렇게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카포와 정치범은 수용소 내 매춘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고(나치는 수용소 밖 매춘시설을 이용했다), 그들을 상대했던 성노동자 대부분은 6개월 뒤 풀려날 수 있다는 말에 속아서 동원됐다(아무도 풀려나지 못했다).
그런 식으로 매춘시설에 동원된 성노동자는 인간 이하 취급받는 수감자보다 어쩌면 더 인간 이하의 존재였다(아우슈비츠 생존자 프리모 레비조차 자신의 수기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그들의 존재를 짧게 언급할 뿐이다). 그리고 그 성노동자의 피해는 사죄 끝판왕으로 알려진 독일에서도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다. 그 성노동자의 피해를 억압했던 것은 그 성도동자와 마찬가지로 나치의 피해자였던 정치범이다. 정치범은 자신들이 매춘시설을 이용했던 사실이 알려지면 ‘순결한 피해자’ 지위를 잃을지도 몰라서 매춘시설에 동원된 성노동자를 애초에 순결하지 않은 피해자로 가공했고, 때로는 나치에 협력한 부역자로 낙인찍었다. ‘내 피해가 가장 소중해’라면서 성노동자의 피해를 억압해왔던 것이다. 성소수자의 인권은 ‘나중에’라며 자신들 뒤로 가뿐히 미루고, 난민의 인권은 ‘국민이 먼저’라며 자신들을 앞세우던 근래에 한국인처럼.
이 책의 공동 저자들은 김학순을 비롯한 여러 위안부 피해자의 적극적인 피해 호소와 그들을 곁에서 지원한 한국의 지원자와 연구자 모두가 결국에는 전시 성폭력에 대한 ‘패러다임 시프트’까지 견인했다고 평가하면서 이들의 노고를 거듭 강조하고 있다. 자신들의 연구는 이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면서 조심스레 연대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이들의 손길을 자기 입맛에 맞을 때만 이용하고 그동안 부지런히 뿌리쳐온 것은 아닌가 싶다. 무엇을 위해, 대체 왜, 그런 생각만 든다.
*재한일본인 처(조선인 남성과 결혼해서 조선으로 이주한 일본인 여성) 문제를 취재하고 기록했던 김종욱이 한번은 그들의 사진으로 전시를 기획했는데, 당시 관계부처로부터 돌아온 말은 ’왜 우리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있는데 그런 전시를 하려고 하냐‘는 식이었다고 한다. 김종욱이 관련 문제에 매달렸던 까닭은 일제시대 강제징용 노동자였던 아버지 영향이었다. 차별을 겪어본 사람만이 차별받는 사람 심정을 안다는 아버지 뜻에 따라 재한일본인 처 문제에 매달렸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그들의 이야기는 좀처럼 들을 수 없다. 그들의 고난의 수기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존칭은 모두 생략했다. 작은따옴표는 ‘새로운 듣기의 가능성’과 ‘내 피해가 가장 소중해’ 말고는 모두 인용의 의도로 사용했다.
***이 책이 비판받을 지점은 따로 있다고 본다. 후술하겠지만, 뒤에 말하겠지만, 나중에 말하겠지만... 등등이 너무 많이 나온다. 그래도 어떻게 끝까지 읽긴 읽었는데, 해당 관용구 나올 때마다 솔까말 죽을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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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일본어 책을 소개한 적이 있는 <일본인 위안부>가 번역되었다.
이 책에는 지원자들이 ‘자발적매춘부’라고 강조했던 일본인 여성들도 속아서 가게 된 사람이 많다는 사실도 쓰여 있다.
더 중요한 건 이들이 “애국”의 틀에서 동원되었다는 것.
힘들게 힘들게 책이 나왔다.
혹시나 오역이 있지나 않을까, 이 단어로 이 번역을 하는 것이 진짜 맞는 것일까, 넷이서 (줌으로) 머리를 맞대고 일년이 넘는 시간을 의심하고 확인하고 치열하게 싸운 결과이다. 현물로 나온 책을 보니 그래서 여러 기억이 오고간다. 그 사이 팬데믹을 겪었고 위안부문제와 관련한 여러 이슈가 터졌다. 이제 우리 손을 떠나 부디 논란이 되길.
사석에서 여러번 얘기했지만 위안부 문제는 민족문제가 아니라 여성문제이고 계급문제라고 생각한다.
국가가, 제국이 여성의 신체를 전유했고 이용했고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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