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15

백승종 진령군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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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h 
진령군을 아십니까?
근현대사를 잘 아는 분이라면 진령군(眞靈君)이라 불린 무당도 기억할 것이다.
그는 이씨 성을 가진 무녀로, 이야기는 임오군란(고종 19년, 1882)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명성황후가 충주로 피신해 불안을 떨치지 못하였는데, 그때 한 무녀가 찾아갔다.
황후는 무녀의 신통력을 확신하고 도성으로 데려왔다.
이후 황후는 몸이 불편할 때마다 이 무녀를 불렀고,
그러면 병세가 사라졌다고 한다(황현, ‘매천야록’, 1권).
고종 20년, 무녀는 자신의 신통한 정체성을 주장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황제를 움직여 조선을 구원한 관우 장군의 딸이라면서,
부디 관우를 섬기게 관왕묘(關王廟)를 지어달라고 했다.

그러자 황후는 북악산 아래 숭동(명륜동1가)에 관왕묘를 새로 짓고 무녀에게 맡겼다.
그때부터 무녀는 진령군으로 불렸다(정교, ‘대한계년사’, 권1).

무녀가 궁중을 마음대로 들락거린 것은 철종 때부터였다.
이를 망국의 조짐으로 보았던 흥선대원군은 집권하기가 무섭게 단호한 조치를 명령하였다.
도성 안의 무녀를 몽땅 쫓아낸 거였다.
그러나 대원군을 몰아낸 명성황후는,
무녀들을 다시 대궐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 바람에 도성 안 어디서나 굿하는 소리가 하루도 그치지 않았다(‘별건곤’, 제15호 1928년 8월호, ‘이십세기 대복마전…’).
국왕 내외가 진령군에게 의지하자 출세를 꾀하는 많은 사람이 진령군에게 붙었다.
충청도 영동의 이용직은 그에게 l00만냥을 바치고 경상도 관찰사가 됐다.
또 경상도 김해 출신으로 법부대신까지 지낸 이유인도 진령군을 배경으로 삼아 출세길을 달렸다.
이런 사실은 국가의 공식 기록에도 나와 있고(실록, 고종 44년 1월 21일),

동학 농민의 증언에서도 확인된다(증언자 전두형, 정리자 신영우, ‘다시 피는 녹두꽃’).
이유인은 진령군의 수양아들로서 내연관계였다고도 한다(‘매천야록’, 1권).
어리석게도 고종은 진령군을 신임해 국가의 길흉을 점쳤다.
무녀의 말 한마디에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는 형편이었다.
이에 조정 대신들까지 몰래 진령군에게 아부하였다.
그들은 아내를 보내 진령군과 자매의 연을 맺었다.
조병식, 윤영신 및 정태호 등은 아예 진령군의 수양아들이 되었다(‘매천야록’, 1권).
이처럼 고관대작이 모두 진령군을 찾아가 아부하였다(‘개벽’, 제48호, 1924년 6월호, ‘경성의 미신굴’).
구한말 신문들도 당시의 황당한 사정을 개탄하였다.
‘대한매일신보’를 읽어 보면 “진령군이 돈을 던져주면 (대신들이란 사람들이) 그 발아래 조아리며 부디 저희의 자리를 지켜 달라며 매달렸다”고 한다(1908년 4월 26일, 필자 번역).
이런 판국이라서 무지한 진령군이 무책임하게 내뱉은 한마디 말 때문에,
누구는 벼슬이 끊기고 귀양도 갔다.

이 무녀가 어느 날 국왕에게 경고하기를, 관운장(관우)은 여포에게 살해되었으므로 여씨 성을 가진 여규형 같은 이를 멀리하라고 하였다(매천야록, 1권).
여포가 관우를 살해한 것도 사실이 아닌 데다 19세기 조선의 여규형이 관우의 죽음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하지만 고종은 무녀의 말을 믿고 여규형을 번번이 못살게 굴었으니, 정말 어리석은 군주였다.

강직한 선비들은 진령군을 쫓아내려고 별렀으나 고종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무녀의 아들 김창렬은 벼슬길에 올랐고,
무녀의 손녀사위 이한영은 법부 협판 등 요직을 두루 지내며 많은 비리를 저질렀다(‘통감부문서’, 8권).
명성황후도 진령군도 세상을 뜬 지 오래였으나,
무녀의 권세는 여전히 살아 있었던 셈이다.

유력한 차기 대선 주자인 어느 후보가 정체불명의 술사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말이 끊이지 않는다.
마침 박근혜 정권이 사이비종교 세력에게 국정을 맡긴 끝에 탄핵당한 전사가 있는지라,
시민들의 걱정은 쉬 가시지 않을 것 같다.
===

사족:
오늘 아침에 발행된 어느 신문에 실은 저의 짤막한 칼럼입니다.
21세기에 살면서도 고대인의 사고방식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황당한 인사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꼬락서니를 알지 못한 채 세상사를 쥐락펴락 하기에 여념이 없는 모양을 보며, 시민들은 한숨을 내쉽니다.
그까짓 술사야 본질이 사기꾼이라 그렇다 하더라도,
이 나라에서 제일 좋다는 대학을 나와서 권세 높은 관청에서 평생을 호의호식 하던 사람이 또 무엇이 부족하여 술사에 의존한다는 말인지요.
한 마디로, 권력욕에 눈이 멀었으나 일말의 상식도 없는 무식한 자가 아닌가 하는 염려가 떠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현 정권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이런 자들을 '구국의 영웅'으로 여기는 눈먼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번 대선은 이성과 광기의 대결이 될 것 같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미국식입니다!
이은선 and 303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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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득종
    교수님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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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남
    그래서 사람이란 끊임없이 자신을 닦아야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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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갑룡
    우국의 역사학자 님, 건강 잘챙기셔요. 함께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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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경희
    어리석고 중심없는 자들의 탐욕스런 행태죠.
    국민들이 휘둘리지 말아야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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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길영
    잘 읽었습니다.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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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경성
    나라가 무너지는 모양은
    외우내환에 지배층의 어리석음이 산사태처럼 겹쳐있군요. 대통령이라는 직분이 국가와 국민의 일꾼을 뽑는 것인데 자기들의 왕을 세우는 것으로 혈안이 됩니다.
    그들 사이에는 때마다 허무맹랑한 무슨 록, ㅡ비결,이 유행하곤 했습니다. 권 금 언 기득권의 적폐가 총체적 난국입니다. 다 그걸 밝혀보지 못하는 사람의 문제이지요. 한 점 흐림이 없는 선생님 글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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