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04

곽곽대원 | Facebook 일본

곽곽대원 | Facebook:

11 S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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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서울올림픽때 우린 한달간 일본 초청 강연 여행을 했다 걸쭉한 입담으로 재일교포와 일본인을 즐겁게 했던가 ㅎ 좀 썰렁했..다 오사카 동경 숙소에선 자극적인 일본 포르노도 함께 보았..., "창비에 대해선 유독 자신에게 엄격한 잣대를 댄단다 창비에 책을 내고 싶지만.." 창비는 돌아가실때까지 출판을 허허지 않았다 함께 미술평론했던 김윤수선생이 도와주지 않았던 이유가 궁금하다 이제 고인이 된 두 분이 하늘에서 만나 풀었을 것이리라 12일간 남도인들과 어울리며 이들이 매우 감성 풍부하고 유연하며 누구보다 예인적 기질을 갖고 있음을 알았다 특히 언어는 뉘앙스 자체가 세계적 유산이다 마지막 날 몽탄 후배들은 연일 술로 내 기운이 떨어진 것을 아는지 맛집이라며 흑염소탕과 근처 영암 월출산에 있는 무위사를 안내했다 저녁에는 김호원작가 정원에서 목포에서 온 박일정작가 등 후배들과 바베큐 파티를 하며 석별의 정을 나눴다 오늘 아침, 밤늦게 마셨던 호원, 문태 등 몽탄 후배들이 눈비비며 역까지 나왔으니 아이고 참으로 모진 정이다 사실 이번 여행은 진도도 제주도도 아닌 '나를 찾아서' 다 미망하려 헤매이는 사람은 부처나 예수에게 살 바를 찾고, 깨달은 사람은 스스로 마음을 정화시킨다는데 나는 양쪽도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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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n Hee Woo and 90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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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Oct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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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역 독서토론만 없으면 좋았건만.. 일본 오사까에서 온 김석철작가 등은 1988년 이맘때 오사카 선술집에서 만난 작가들이다 김석철작가 작업실도 갔다 그때 함께 작업실 쓰던 김영숙작가도 왔다 이제 얼굴에 연륜이 보이는 67년생이지만 여전히 예쁘다 작품 모델은 여전히 본인을 그리는 것 같다 홍성익작가는 얼굴 살이 많이 빠졌다 가업 때문에 작업을 중단한 탓인지 전시장엔 30년전 작품들이 걸려있다 그 당시 일본 권위있는 공모전 태평양미술전 최고상을 받아 동포사회 차세대 리더로 주목받았고 일본 화단에서도 장래가 기대된 작가였다 밤새 술먹다 그의 2층집서 잤던 기억이... ㅋㅋ 먼 오래된 기억들이 죄다 술먹는 것만 생각나는지 암튼 세상 좋아졌다 아시아 동포작가 25명이 중국, 일본, 사할린,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에서 왔다 전시와 포럼도 열고 하룻밤 교류도 나누니 참 좋다 ※ 따져보면 디아스포라는 상당히 인류문명에 기여한 바가 크다 다수자와 소수자가 공존하니 다양한 문화가 생산되었다 과거 디아스포라는 강제, 이주, 핍박, 고립, 단절이지만 이젠 네트워크, 창의성, 협력, 다문화 등이다 통일 한국에게 700만 해외동포는 글로벌 인적자원이다 야당도 과거 교민청을 제안했다 이중국적도 확대하고 교민청이던 동포청이던 이민청이던 고마 싸우고 하루빨리 청장년들 자발적 디아스포라로 해외 나갈 수 있는 일거리 창출을 논의하라라라 이상, 오늘 미술관 다녀온 감상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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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pyo Kang, Konosuke Huzii and 117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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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Sep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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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엣남인이고 나머진 홍콩 일본 중국 한국인이다 중간 중간 섬 관광을 하다 스킨스쿠버를 신청하지 않는 승객은 떠 있는 배서 자유 수영이다 각국 장기자랑도 하고 투어 진행자 진행에 모두 박장대소 좁은 배 좌석이 식탁이 되고 무대가 된다 중국, 홍콩인은 등려군 대표곡 '첨밀밀', 한국은 싸이 '강남스타일', 한국 노래 나오자마자 배안이 들썩인다 모두 알고 있는 듯 춤 따라하고 한국서 휴가온 젊은이 4명 이에 맞춰 춤추니 압권이다 금세 이국 여성들에게 선망이 되버렸다 일본 동경서 공부한다는 하노이 출신 대학생은 아침 9시 배타러 가는 합승버스에서부터 친해져 함께 다녔다 함께 온 어머니 보면서 꺼이꺼이 한다 비싼 돈주고 유학시켰더니 제법... 잊어버린 일본어가 되살아나니 역시 언어는 스킨십이다 아침 9시부터 오후 4시 일정을 마치니 호텔앞까지 합승버스로 내려준다 만원의 행복치고는 나름 좋았다 아일랜드라는 섬에서 힐링도 했다 호치민 신카페에서 끊은 9불행 메콩강 미토와 비슷한 상품이다 모두 비용에 점심 제공인데 먹을만 했다 돌아오니 호텔에서 다음날 다낭가는 기차를 예약해줬다 밤 버스는 무리라해서 침대칸 기차로 해안선 타고 월북한다 나짱 해변은 세계 6대 해수욕장에 낄 정도로 길다 20킬로 이어진 모래사장 주변에 대형 호텔이 수북한데도 5개 고층 호텔이 신축중이다 시내 곳곳도 건설중인 건물이 많다 볼거리 즐길 것도 별로 없는 이 곳에 차고 넘치는게 호텔인데 과연 관광객들이 차고 넘칠까 ※ 나짱 첫날 보기좋게 사기당했다 터미널 내리자마자 달려드는 오토바이와 흥정중, 이를 본 터미널 직원이 시내 호텔까지 무료인 합승버스를 타란다 붕타우서도 같은 경험을 했다 비엣남 관광지는 터미널 외곽에서 시내까지 합승버스가 무료다 합승버스서 내려 호텔을 찾는데 두번째 오토바이가 등장, 1만동(5백원)만 내란다 골목안 호텔이라 찾기 힘들겠단 생각에 올라탐 헐^^~ 시내 반바퀴 돌다 처음 탄 건너 골목길 호텔에 내려준다 걸어서 30초 거린데 이동비용 3만동 요구다 평생 살면서 가장 비싼 이동비용을 줬다 하긴 누군 최근 권투 경기중 링위서 1대씩 맞을때마다 1억씩 벌었다지 바가지도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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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Mar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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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때 난 숨겨논 일본 여인도 있었다 "브레이크가 고장 불도져"란 별명을 가진 서울미술관 심광현기획실장은 날 계속 밀어부쳤다 일본 공부는 무슨.. 현장 공부가 진정한 공부 아닌가? 자기 아내도 전문대 출신이고 스팩이 머가 중요하냐고!! (후에 그는 아내와 사별했다는 이야길 들었다) 이때 일본 갔으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림마당 민의 마땅한 대안이 없는 상태라 그만두고 떠나면 문닫을 상황일 수도 있었다 이후 마당 민 대표를 김정헌관장 체제로 재편하여 당시 마당 민에 대해 강한 집착을 가졌던 민예총 사무차장 김용태형을 견제했다 물론 천하의 김용태형이 견제 될리 없었다 신경림시인 사무총장 뒤를 이은 그의 카리스마는 문화판에서 갑자기 커지기 시작했다 93년 초 난 결국 김용태형과의 대립으로 7년간 출근했던 민미협을 떠나고 1년뒤 인사동 그림마당 민은 폐쇄되었다 이후 심광현 서울미술관 기획실장도 7년간 근무한 미술관을 그만두고 나와 함께 성완경교수의 상산환경연구소에서 <서울 정도(定都) 600주년> 전시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했다 그 당시 심광현감독은 경원대 자릴놓고 기다렸으나 윤범모에게 밀렸다 (서울대 이종상 교수가 윤범모를 밀었단 풍문이 돌았다) 새옹지마 (塞翁之馬)랄까, 심광현은 막 출범한 한예종에 미술평론가 최민원장 추천으로 교수자릴 얻고 지금은 재혼해서 잘산다 들었다 ... 세월은 이리 와장창 다시 만나고 떠날 사람은 슬며시 사라지니 서경덕(徐敬德, 1489~1546) 본집(本集)중 요놈 생각이 난다 有物來來不盡來 來纔盡處又從來 來來本自來無始 爲問君從何所歸 오고 또 와도 다 온 게 아니네 다 왔나 했더니 다시 또 오네 오고 오는 것이 본시 처음이 없는 데서 오는 것이니 그대 대체 어디로부터 오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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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Jul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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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야 했던 그는 일본 정부와 일본 우익이 싫어하는 짓만 골라서 하는 블랙 리스트다 그러나 예수도 그랬듯이 살고 있는 오사카에서 문화운동 하는 동포들과 사이가 그리 좋지는 않단다 '안봐도 비디오'! (아는 사람들이다 쿄토 오사카 지역 활동가들은 자존심 강하고 명분 중요시 하는 전형적인 지식인 활동가들이다 차별 받고 살아온 까닭에 속에는 이해하는 폭이 크지 않다 조금만 틀어져도 적과 다름없다) 이런 저런 이야기 중 나온 사진가 마키다 키요시 고독사 말을 듣는 순간, 말로만 듣던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와 알게 된 1980년대 후반, 마키다는 서울에 아사히 저널 사진기자로 5년간 체류하며 민주화운동을 필름에 담았던 한국통이다 인사동 그림마당 민에서 <양심수의 어머니들>이란 제목의 사진전을 열고 같은 제목 사진집을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출판했다 서문을 썼다 마키다는 오사카를 중심으로 재일조선인과 장애인, 빈민 등 마이너리티들의 삶을 다뤘다 그는 이들 마이너리티 사람들이 그동안의 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어온 계층이라고 보았다 고베지진때 제일 먼저 들어가 사진으로 진상을 알렸다 말년 한국인 처와 헤어져 혼술 덕에 일찍 갔단다 마지막 본 게 1995년 아라시야마 서승선배 집에서 자고 나와 쿄토역에서 도쿄행 티켓을 끊어준게 마지막 선물이 되었다 오사카에 작지만 집에 방도 있고 도서관 잘때도 있으니 오란다 자주 보기로 했다 그러나 언제 또 만날지 모른다 언젠가 강물들이 바닷물 되어 만나듯 만날 사람은 자연이 다시 만난다 모두 자연의 한 부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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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Jul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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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며 장기 출장중, 웁스!! 일본 티비에 황석영 월북! (짐작은 갔지만 아래 기사에서 비화가 밝혀진다) 그 당시 민속학자 양민기선생도 오사카에서 동경으로 나와 동행해주셨고 (민속학자겸 1인극 배우 심우성선생과 절친, 몇년전 돌아가신 양선생의 유가족은 양선생이 평생 모은 꽤나 량이 많은 한국 관련 일본 서적을 한국에 기증하겠다했지만 받을 곳이 없던 심선생님은 정중히 거절했다 한국에 있는 일본관련 대학들이 기증 받았으면) 오사카 시내에선 일본인들도 존경하는 김시종시인을 만났고 (한국인 최초 다카미준상 수상, 39권 시집 발간) 김시인 부부가 하는 찻집을 여러번 가게 되었다 동경서는 황석영이 만든 우리문화연구소에서 사무국장 이순애(여성학자, 일본인 남편이 유명대학 북한연구 교수) 온니와의 우정을 키웠다 그 당시 사무실에 자주 온 서동만교수는 동경대 박사과정중이었다 그런데.. 맙소사? 북한 전문가인 그가 노무현 정부때 국정원 기조실장이 되고 53살 나이에 병사할 줄이야? 황석영과 친했던 여운 김용태선배는 차례로 떠났는데 더 나이든 황선배는 저리도 건강하다 못해 4살 기억을 책으로 옮긴다 황석영은 광주사태 당시 부재를 부채로 느끼면서 국내외서 돈키호테로 성장하였다 분단 70년, 세계 유일 분단 국가다 박제가 된 분단 철조망을 보고 돌진하는 또다른 정의의 사도 돈키호테는 어디에 있는가?
hani.co.kr
영웅도 호구도 아닌 민초들의 이야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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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Jun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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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업이었다 콘서트에는 일본 한류 팬 6만8000명이 몰렸다 한류 초기는 90년대 아이돌의 일본·대만·홍콩 진출이 있었지만 성과는 없었다 이때까지 한국 음악은 ‘내수 상품’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초 2세대 아이돌 등장으로 흐름은 달라졌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해외 진출을 노리고 언어와 문화를 배우거나 아예 외국어 능통자를 뽑아 맞춤 트레이닝을 했다 보아가 대표적이다 2000년대 후반 한국 대표 수출 문화 콘텐트는 드라마에서 아이돌 그룹의 음악으로 완전히 전환됐다 2009년 음악산업 수출액은 3100만 달러로 전년 대비 90% 증가했다 (같은 기간 드라마 등 방송 콘텐트 수출액이 1.9% 증가에 그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일본과 동남아시아에서 한국 아이돌을 향한 팬덤이 형성되면서 관련 소비가 급증한 것이다 (이 기간 동남아에서는 한국 음악 관련 콘텐트 수출액은 2008년 256만 달러에서 2009년 641만 달러로 149% 증가했다) 동남아에서 한류 콘텐트 가능성이 보이자 JYP엔터테인먼트는 2PM을 기획하면서 태국 출신 멤버(닉쿤)를 영입하는 전략을 보여주기도 했다 2010년대 이후 한국 아이돌은 소셜미디어를 무기로 팬층을 유럽과 중남미, 북미로 확대, 2014년 처음으로 음악산업 수출액이 3억 달러를 넘어선 이후 성장세가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성공적인 미국 진출을 한 방탄소년단이 현재 빌보드 차트에 진입하면서 K팝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중국 정부의 한한령이 풀리면서 한국 아이돌 그룹 공연과 중국 내 활동이 재개돼 올해 전망은 밝음이다 한동안 주춤했던 걸그룹도 최근 맹활약 중이다 2NE1, 카라 등 해외 활동이 활발했던 걸그룹이 차례로 해체되면서 걸그룹 가뭄이 왔다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 트와이스, 레드벨벳, 블랙핑크 등 데뷔 3년 차 미만의 그룹들이 대거 등장해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블랙핑크는 28일 빌보드 메인차트에 이름을 올렸다 전문가는 아이돌 그룹 세대교체가 안정적으로 진행되고 있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수출은 10% 이상 성장할 전망이란다 한류 아시아 특징이라면 중국은 빅뱅이나 EXO처럼 강한 스타일의 그룹을 좋아한다 반면 일본은 에이핑크나 트와이스·소녀시대처럼 아기자기한 걸그룹이 상대적으로 인기다 팬 성향도 다르다 중국은 아무래도 굵직한 공연 무대가 많다 오타구 문화가 있는 일본은 중국보다 시장은 작지만 팬의 충성도가 높다 한번 좋아하면 쉽게 떠나지 않는 일본, 앨범 소장 등에 대한 열망이 큰 나라다 일본 팬 중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의 앨범을 100~200장씩 구매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포장 등을 다양화해 이들이 질리지 않도록 배려한다” (일본 오타구 경제적 파급 규모는 2조엔이다) 또 하나 한류 노래 특징은 해외에서 선호하는 후렴구 반복되는 가사와 멜로디가 후크송(Hook song) 영향 때문이다 중독성 강한 후렴구와 리듬이 한번 들으면 계속 귀에 맴돈다 한국서도 샤이니의 ‘링딩동’은 수능시험 전날 피해야 할 ‘수능 금지곡’으로 유명하다 유튜브에서 찾아봐라, 후렴구 ‘링딩동 링딩동 링 디기디기딩딩’이 반복돼 한번 들으면 계속 떠올라 시험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충성도와 중독성을 바탕으로 K-아이돌은 관광·출판·유학·유통 등 다양한 분야를 엮는 낚싯바늘(후크)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런 한류를 통해 한국 미래를 논하는게 성급할까? 아니다 인문학적 논의도 해야 한다 ※ 위 글은 최근 한류 기사를 짜집기 했다 나름 한류를 흩어보기 위함 일뿐이다
mnews.joins.com
연습생 뽑을 때 인성 따진다…일진 출신은 절대 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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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Aug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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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전 만났던 명필름 이은대표는 한국영화계의 고질적인 문제로 '독과점'과 '수직계열화'를 말한다 이를 위해 <문화다양성및 반독과점 영화인대책위원회> 를 만들어 활동중인데 가을 정기국회 개원에 맞춰 본격적으로 움직이려 한단다 '김상조의 공정위'는 영화 재벌의 독과점 문제와 갑질에 도대체 뭘하는지 모르겠다 "제대로 미쳤다! 2168개 극장 상영, 독과점을 넘어 이건 광기다" 지난 해 민병훈감독이 CJ 제작 영화 <군함도> 상영에 뱉은 말이다 - 아래 기사 내용에서다 CJ와 롯데는 거대 영화 체인을 가지고 있다. 메가박스 역시 존재하지만 주인이 바뀌면서 두 재벌가에 비해 시장 지배력이 상대적으로 약해진 것은 사실이다. 두 재벌가가 운영하는 극장은 대한민국 스크린을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저 극장만 있는 것이 아닌 배급과 제작을 함께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권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영화를 만드는 이들에게 이들 재벌 영화관들은 절대 갑이다. 그들이 투자를 하고 배급까지 하면 최소한 수익은 보장된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영화관을 확보하는 것조차 힘겨운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최근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옥자>를 보면 명확해진다. 만약 재벌가들이 영화관을 내줬다면 <옥자> 열풍은 보다 강력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넷플릭스가 제작하고 온라인 공개를 한다는 이유로 극장 상영을 거부했다. 이들로 인해 그동안 소외되어 왔었던 개별 극장들이 잠시 호황을 이루기는 했다. 과거 대한민국의 극장은 지역 단위로 구축되어 있었다. 지역마다 지역 사람들이 극장을 가지고 운영을 하는 형태였다. 물론 돈이 많은 자본가들이 주변 지역들까지 섭렵하며 시장을 확장하는 모습 역시 존재했지만, 현재와 같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과거의 형식이 모두 옳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시대는 변했고, 이에 따라 극장 문화 자체도 크게 변화고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이 답이라고 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니 말이다. 외국의 멀티플렉스 모델이 국내로 들어오며 대한민국의 극장 지도는 급격하게 바뀌었다. 자본이 지배하는 시장 재편이 급격하게 진행되었다는 의미다. 개봉관, 재개봉관 등 다양한 형태의 극장들은 말 그대로 자본에 밀려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거대 자본은 동네 극장들까지 몰아내며 거대한 공룡이 되었다. 재벌가가 만든 새로운 시장은 문화 자체를 바꿔버렸다. 7월 26일 개봉한 <군함도>는 CJ에서 제작을 한 작품이다. 류승완 감독의 신작이자 황정민, 소지섭, 송중기가 출연한 <군함도>는 역사적 사실을 극화했다는 점에서도 관심이 큰 작품이었다. <군함도>는 제작비만 220억이 들어간 대작이다. 엄청난 금액이 아닐 수 없다. 스타들이 대거 등장하고, 고증과 함께 실제와 유사한 세트를 지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 정도 제작비는 나올 법 하다. 이 영화의 손익분기점은 700만이다. 순제작비 220억에 홍보 마케팅 비용이 7, 80억이 추가되니 손익분기점은 천만이 넘어야 한다. 현재와 같은 추세로서는 충분히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CJ가 배급을 하는 만큼 충분히 가능한 장사이니 말이다. "제대로 미쳤다. 2168. 독과점을 넘어 이건 광기다" "신기록을 넘어 기네스에 올라야 한다. 상생은 기대도 안한다. 다만 일말의 양심은 있어야 한다. 부끄러운줄 알아라" 민병훈 감독은 26일 자신의 SNS를 통해 <군함도>에 대한 분노를 쏟아냈다. <군함도>는 2,000여 개에 달하는 스크린에서 상영되었다. 구체적으로 2168개의 스크린을 확보했다. 이는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같은 날 개봉한 <슈퍼배드3>가 700여개 스크린에서 개봉되고, <덩케르크>의 경우는 650여 스크린에서 개봉 중이다. <군함도>는 2168개의 스크린에서 9700여 회가 넘게 상영된다. 좌석수만도 하루에 176만여 석이 넘는다. 좌석수의 70%만 채워도 100만이 넘는 관객이 관람이 가능한 수치다. 엄청난 독점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이렇게 집중적으로 스크린을 독점한 일은 없다. 스크린 독점은 항상 논란이 되어 왔었다. 한국 영화 시장이 몇몇 천만 영화에 기대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말 그대로 장사가 되는 영화에 시장이 집중되는 형식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현상이 민병훈 감독의 말처럼 광기다. <군함도> 한편을 위해 거의 모든 스크린이 시장을 열었다. 이로 인해 다른 수많은 영화들은 관객을 만날 기회를 놓쳤다. 돈 되는 영화를 위해 자신들이 가진 스크린을 모두 돌리는 현실은 독과점이 만든 폐단이다. 독점적 지위를 가진 재벌사의 횡포는 결국 영화 시장 전체를 망칠 수밖에 없는 구도로 가고 있다는 의미다. 상업영화를 모두 비난할 이유는 없다. 영화 역시 예술로 볼 수도 있지만, 태생이 상업적인 예술이라는 점에서 이를 부정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문제는 과도한 독점은 결국 수많은 문제만 양산할 수밖에 없다. 민병훈 감독은 상업영화 감독이 아니다. 해외 유학 중이던 시절부터 큰 주목을 받았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상업적인 지향점을 가지지 못했다. 영화적 완성도는 뛰어나지만 상업적 성공을 거두기 어려운 작품들이라는 것이 문제다. 비상업적 영화의 경우 대한민국에서 제대로 관객을 만나기 힘들다. 반복적으로 피해를 받아왔던 민 감독으로서는 이런 독과점 상황에 분노할 수밖에 없다. 민 감독만이 아니라 상업적 가치는 적지만 영화적 상상력과 완성도가 뛰어난 작품이 관객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져가는 이런 독과점 형태는 비난을 받아야 한다. <군함도>가 가지는 역사적 가치는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철저한 상업영화다. 다큐멘터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영화가 유행이었다. 소위 장사가 되는 소재였기 때문이다. 그 소재주의의 정점이 바로 <군함도>일 가능성도 높다. 정점에 오른 이 영화가 얼마나 큰 성공을 거둘지 모르지만 아무리 좋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심각하게 고민해야만 한다. <군함도>로 인해 다른 많은 영화들이 기회를 놓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현상은 수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재벌가가 독점하는 영화계는 그래서 암울하다. 장사가 되지 않으면 그들은 떠난다. 시장은 언제든 변할 수 있고, 그런 변화에 누구보다 빠른 태세 전환을 하는 그들의 독점은 결국 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민병훈 감독의 분노는 그래서 공감할 수밖에 없다. <군함도>가 크게 성공하면 할수록 이런 독과점 논란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씁쓸하다. 공정위에서 독과점과 프랜차이즈 갑질에 대해 강도 높은 조사를 하는 것처럼 이 문제를 풀어낼 수 있는 해법 역시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영화라는 문화가 보다 튼튼하게 자라기 위한 최소한의 틀은 만들어야 하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재벌가의 독과점 문제는 심각하게 바라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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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훈 감독 군함도에 대한 분노 공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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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May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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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한 시기는 1941년 프랑스와 일본 식민지 상태의 벳남에 잠입한 후 랍니다 호치민은 '깨우치는' 이라는 뜻입니다 1945년 베트남 민주공화국이 탄생하면서 1969년 9월 2일 심장병으로 사망할때까지 초대 원수(주석) 자리에 있었고 "내 죽은 후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내 시신은 화장시키고 무덤에는 비석과 동상도 세우지 말라 다만 단순히고 넓으며 통풍이 잘 되는 집을 세워 방문객을 쉬어가게 하는 것이 좋겠다 방문객마다 추모의 뜻으로 한두 그루씩 나무를 심게 하라 세월이 지나면 나무들은 숲을 이룰 것이다" 호치민의 유언과 달리 베트남 정부는 하노이 광장 앞에 대규모 영모를 짓고 시신을 방부 처리한 뒤 참배객들이 볼 수 있게 했습니다 호아저씨가 죽어서도 피곤하답니다 호화로운 궁을 멀리하고 작은 집을 선호했던 호아저씨 유언과 달리 체제 선전물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북한의 김일성부자처럼 말입니다 맑은 강원도 온 느낌의 달랏에서 이제 아침을 먹고 호치민으로 들어갑니다 SNS에 밝힌 생일을 없앨 생각입니다 변변찮은 제게 내년에 또 장미를 선사할까봐요 ㅎ 호들갑스럽지 않고 생일이 없는 듯 살다가는게 옳은 것 같아서요^^ 주일날 편히 쉬세요~
youtube.com
EBS 클립뱅크(Clipbank) - 베트남 국민을 사랑했던 혁명가, 호치민(Ho Chi Minh, a Revolutionary who Loved the Vietnam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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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Aug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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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당 GDP차이를 보자.(OECD Data 2018년) 일본 42,823 US$ vs. 한국 40,096 US$ .
Dongseok Tschoe's post
[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계, 그리고 제국주의에 대하여] . 처음으로 아일랜드에서 여름휴가를 보낸 것은 2001년이었다. 20년 근무했던 한국은행을 떠나 인사조직분야에서 컨설팅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휴가지를 아일랜드로 정했다. 유학시절 유럽대륙 국가들 대부분 다녀보았지만, 차를 가지고 가기에는 부담돼서 영국과 아일랜드는 남겨놓았다. 그전에 박지향 교수가 쓴 《슬픈 아일랜드》라는 책을 보았는데, 영국에게 수백 년간 괴롭힘을 당했던 나라였고, 왠지 아일랜드가 마음에 끌리기도 했다. 더구나 친구인 김중구 (Jung Goo Kim) 교수(현 우송대학교, 당시 외환은행 리스크관리부장)가 적극 추천해주기도 했다. . 아일랜드를 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우리나라와 전혀 다른 이국적 풍광의 아름다움에 감탄할 것이다. 당시에는 아시아의 네 마리 용에 이어 유럽의 ‘켈틱 타이거’(Celtic Tiger)라는 슬로건으로 경제잡지 표지를 장식할 정도로 경제성장이 눈부실 때였다. 운전대가 오른쪽에 있는 차가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곧 익숙해졌다. 우리는 여러 도시를 돌았다. 전형적인 가톨릭국가인데다 순박하기 짝이 없는 시골사람들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친절함, 소박함, 특별한 산업이 없이도 여유로움과 자신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 2001년 여름, 아일랜드의 어느 시골 B&B 주인과 함께 기네스를 마시고 있을 때, 기억은 분명하지 않은데, 누군가 800년간이나 영국인이 자신들을 괴롭혔으니 이제는 더욱 경제를 성장시켜서 영국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Angela’s Ashes》라는 책을 꼭 읽어보라고 했다. 아일랜드 출신 미국인 영어교사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는 자서전이었다. 이 책은 당시 아일랜드인들에게 선풍적인 인기였다. 이 책을 사들고 귀국했지만, 읽지는 못하고 있다가 한국번역판이 《안젤라의 재》라는 이름으로 나왔다길래 단숨에 읽었다. 어린 시절 생활상의 자세한 묘사는 정말 탁월했다. 퓰리처상을 받기에 충분했다.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혼자 킬킬대다가 때로는 그들의 참혹한 삶에 눈물을 흘렸다. 여기서도 8백년간 영국이 지배했다는 얘기가 끊임없이 나온다. 빈민구호소에 가서 몇 푼을 얻어 기네스 몇 잔 들이킨 서민들은 늘 독립전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얘기를 찬송가 후렴처럼 반복한다. “슬픈 아일랜드” 얘기다. . 아일랜드의 역사를 간단히 요약해야겠다. 19세기 중엽이었다. 아일랜드는 감자마름병이라는 기근과 역병에 시달려야 했다. 몇 년 사이에 8백만의 인구 중 2백만 명이 사라졌다고 한다. 기아로 죽고 이민을 떠났다. 당시 인류 최악의 재앙이었다. 케네디 가문도 이때 아일랜드를 떠나 미국으로 이주했다. 영국은 자신들이 지배하고 있던 아일랜드에서 벌어지고 있는 저 참상에 눈감고 있었다. 오히려 식량을 긁어모아 본국으로 운송했다. . 그러자,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대규모 원조를 약속했다. 영국 정부는 오스만에게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요청했다. 대영제국의 도덕성은 여기서 끝났다고 말한 사람들이 있지만, 제국엔 본시 도덕성이란 없다. 그뿐이 아니었다. 심지어 식량을 실은 술탄의 배가 아일랜드 땅에 대지 못하도록 방해하자 배들은 영국관리들의 눈을 피해 몰래 정박해야 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아일랜드인들의 민족주의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 12세기 영국인들이 쳐들어와 자신들이 왕을 겸하기도 했는데, 이 시기부터 아일랜드인들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그러다 17세기부터 아일랜드는 명실상부한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이 대거 아일랜드의 얼스터지방(지금의 영국령 북아일랜드 지역)으로 넘어와 가난한 가톨릭교도들을 몰아내고 중요한 지위와 재산을 차지해버린 것이다. 지주계급에 있던 가톨릭교인들 중에는 장로교로 개종해서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도 했다. 그렇게 되자 아일랜드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하여 가톨릭교도가 되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인들에게 차별과 억압을 받아왔다. 신·구교간의 갈등은 불가피한 상황이 되었다. . 20세기 들어 드디어 일이 터지고 말았다. 1916년 부활절, 차별과 억압을 참다못한 젊은이들이 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일주일만에 중무장한 영국군에 의해 무참히 진압되었다. 77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15명이 처형되었다. 가혹한 처벌에 아일랜드인들은 분노했다. 이어서 1919년~1921년 3년간의 영국과 아일랜드는 전쟁을 치러야 했다. 게릴라전이었다. 월등한 화력을 가진 영국군의 잔혹성과 만행이 알려졌지만,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 사상도 전달되어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양측은 협상테이블에 앉았다. 결국 남부의 26개주는 독립을 허용하고, 북부 개신교 지역인 얼스터 6개주는 영국령으로 남을 수 있도록 협정을 맺었다. . 과연 아일랜드인들은 이 협정을 받아들였을까?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또 싸움이 벌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1949년에 가서야 아일랜드공화국으로 완전히 독립하고 영연방에서 탈퇴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영국에 편입하기로 한 북아일랜드 역시 두 파로 갈렸다. 영국에 연합해야 한다는 개신교파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자는 가톨릭교도 중심의 공화국파로 나뉘어 싸움이 시작됐다. 이 정치적 갈등이 종교분쟁으로 표면화되면서 많은 사상자를 냈다. . 영국 보수당 출신의 대처 총리 시절이었다.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공화국군(Irish Republican Army, IRA)의 요원들 40여명은 벨파스트 감옥에서 일반 잡범들과 같은 취급을 당했다. 그들은 정치범 대우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벌였다. 그 투쟁의 중심에는 바비 샌즈(Bobby Sands, 1954~1981)가 있었다. 그녀는 옥중에서 출마하여 영국 하원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처 총리는 대화를 거부했다. 샌즈는 66일간의 단식투쟁 끝에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다. 1981년 여름에만 단식투쟁으로 10명이 사망했다. 영국 보수당 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샌즈의 죽음은 IRA 신병모집에 아일랜드 젊은이들이 대거 참여하도록 했고, 무장폭동도 크게 증가했다. 아일랜드 지식인들은 대처 총리를 향하여 “우리가 아는 최악의 쌍년(bastard)!”이라고 비난했다. . 그 후, 노동당 출신 토니 블레어가 1997년 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로 총리가 되자, 북아일랜드 양측 지도자들간의 “벨파스트 선언”을 이끌어냄으로써 폭력투쟁을 종식시켰다. 이때부터 아일랜드인들은 본격적으로 경제부흥의 길에 들어섰다. . 물론 아일랜드 인구는 영국의 10분의 1도 안 된데다가 가난했고, 1949년 아일랜드공화국을 세운 후에도 영국으로부터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슬픈 아일랜드”였다. 영국은 자신들이 아일랜드에서 저지른 만행에 대해 사과한 적이 있는가? 없다. 제국주의란 그런 것이다. . 그러나 21세기 들어서면서 “켈틱 타이거(Celtic Tiger)”라는 별칭으로 불릴 만큼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영국의 생산성을 따라잡기 시작했다. 내가 아일랜드를 처음 갔던 2001년이 바로 그런 때였다. 아일랜드는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다. 유럽에서 아일랜드를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 2011년이 돼서야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공식적으로 아일랜드를 방문해서 과거에 잘못한 것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를 했다. 아일랜드인들은 그런 사과를 쿨하게 받아들였다. 영국은 왜 그제서야 사과를 했을까? 갑자기 영국인들이 개과천선했을까? 국가 간에 그런 경우란 일어나지 않는다. 더 이상 아일랜드를 어떤 식으로도 지배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과 이웃과의 좋은 파트너관계를 맺지 않으면 오히려 자신들이 손해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 쿨하게 영국의 사과를 받아들인 아일랜드의 경제는 일취월장했다. 지금 영국과 아일랜드 간의 생산성 지표인 인당 GDP를 비교해보자.(OECD Data 2018년) . 영국 45,504 US$ vs. 아일랜드 83,081 US$ . 단순 수치만 비교해도 현재 아일랜드는 영국보다 1.8배 더 잘 살고 있다. 나는 작년(2018년 여름) 북아일랜드 여행을 통해 남•북아일랜드인들의 삶의 질적 수준을 비교할 수 있었다. 아일랜드는 이제 영국의 ‘넘사벽’이 되었다. 다시 묻는다. 영국은 과거의 만행에 대해 아일랜드에 사과했는가? 했다. 제국주의란 그런 것이다. . 그러나 영국인들은 아직도 과거 대영제국의 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브렉시트(Brexit)가 그것이다. 주변국들과 세계인들은 비웃고 있는데, 영국인들만 그걸 모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착각은 자유다. 이것이 어리석은 자들의 역사다. . 프랑스인들은 과거 그들이 경영했던 식민지에 대해 사과했는가? 배·보상은 했는가? 그런 적은 없다. 제국주의란 그런 것이다. . 그런데 독일인들은 왜 주변국들에게 주구장창 사과하고 있는가? 그들이 전쟁 후에 갑자기 선량한 사람이 됐기 때문에? 천만의 말씀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더 큰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소위 전략적 로키(low-key)를 선택한 것이다. (독일인들이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여기서 생략한다.)독일제국도 뒤늦게 식민지 개척에 뛰어들어 짧은 기간이지만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경영했다. 그들 나라에는 사과하지도 배상하지도 않고 있다. 제국주의란 그런 것이다. . 일본은 어떤가? 사과한 적이 있는가? 없다. 주변국들이 너무나 약체였기 때문이다. 조약이나 협정문서 몇 장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제국주의란 그런 것이다. 누누이 강조했거니와, 일본으로부터 사과를 받아내는 유일한 길은, 일본이 더 이상 깔보지 못하도록 인당 GDP를 올리는 것뿐이다. 우리기업이 높은 생산성과 창의성을 발휘하는 국가로 발전하는 것이다. . 기업의 구성원들을 쥐어짜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생산성을 높일 수 없다.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아베와 그 일당이 제국주의 망상에 사로잡혀 일본국민을 대상으로 허튼 수작을 꾸미고 있을 때, 우리는 경영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하여 높은 생산성과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이것만이 우리가 일본의 도전을 극복하는 길이다. . 아베와 그 일당이 100년 전 아시아를 휩쓸었던 일본제국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모양이다. 착각은 자유다. 이것이 어리석은 자들의 역사다. . 일단 생산성 지표로 가장 많이 쓰이는 현재의 인당 GDP차이를 보자.(OECD Data 2018년) . 일본 42,823 US$ vs. 한국 40,096 US$ . 지금 OECD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라. 한일관계가 어디까지 왔는지 보이는가? 간발의 차이다. 겁낼 필요 없다. 100년 전 또는 50년 전 한일관계가 아니다. 지금 일본의 도전에 응전하지 않으면 한국은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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