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프리즘 - 우리 시대의 교양
김현진,이찬수,고병권,김동춘,이대근,천정환,오길영,안수찬,한윤형,은수미 (지은이)
사계절2010-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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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서재 18호(인문/사회/역사/과학/예술/청소년 분야 도서 2만원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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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프랑스의 『르 몽드』가 “사상의 은사”라 불렀던 리영희. 민주주의를 꿈꾸고 고민하고 싸웠던 이 땅의 젊은 지성들에게 리영희는 뿌리이자 토대이고 출발점이었다. 이 책은 리영희를 프리즘으로 삼아 우리 시대를 이해하고, 다른 세상, 다른 삶을 위한 새로운 고민을 시작하고자 한다. 리영희의 의미와 영향력을 되새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리영희를 통해서, 리영희가 지녔던 교양의 힘을 매개로 새로운 교양 목록을 제시한다.
리영희의 팔순(2009년 12월 2일)을 축하하고 기념하기 위해서 기획된 책으로, 리영희를 사상의 스승으로 모시는 70,80년대 학번부터 리영희의 제자가 아니었다고 밝히는 90년대 학번, 20대 논객으로 주목받는 2000년대 학번까지 세대를 넘어선 다양한 필자군으로 구성되어, 리영희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읽을 수 있다.
목차
서문: 리영희를 다시 불러내는 이유 - 홍세화
리영희와 생각하기: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고병권
사상의 은사 / 조건반사의 토끼 / 계몽이란 무엇인가 / 의식화의 은사, 의식화의 원흉 / 민주주의, 그 영원한 의식화를 위하여
리영희와 책 읽기: 책 읽기와 청년, 그리고 자유 - 천정환
리영희라는 필독서 / 리영희의 책 읽기 / 리영희 읽기, 도는 읽지 않기 / 오늘날의 책 읽기. 청년. 자유
리영희와 전쟁: 전쟁의 세기 - 김동춘
전쟁이라는 최고의 현실 / 정치로서의 전쟁 /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 한반도의 냉전 체제 / 시장과 전쟁 / 반공,전쟁, 국가주의의 우상 / 제국의 전쟁, 그리고 평화
리영희와 종교: 무신론적인, 그러나 유신론적인 - 이찬수
기독교에 대한 거부 / 예수와 제도 종교의 갈등 / 한국 기독교인은 고대 유대교인 / 우상숭배 금지의 본뜻 / 우상숭배 금지에 대한 오해 / 유일신이라는 말 / 한국 기독교의 정치사회적 배경 / 무신론적인,그러나 유신론적인 / 종교의 안과 밖 /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 최고의 가르침
리영희와 영어 공부: 영어라는 우상 - 오길영
500단어의 유창한 영어 실력 / 영어 몰입 교육의 백일몽 / 영어 울렁증과 실용 영어 / 영어 공부의 본령 / 알맹이 없는 영어 강의 / 리영희의 영어 공부 / 영어를 왜 공부하는가
리영희와 지식인: 다시, 지식인의 책무를 묻다 - 이대근
야만의 시대와 지식인 / 근대적 지식인과 탈근대적 지식인 / 한국 지식인의 자화상 / 한국 사회의 특별 계급 / 다른 세상을 위한 지식인의 책무
리영희와 기자: 진짜 기자의 멸종 - 안수찬
프롤로그 / 소 잃고 외양간 고치다 / 사라진 낭만의 시대 / 기자들의 보험, 출입처 시스템 기자라는 이름의 부속품 / 낯익으면서도 낯선 언론 탄압 / 진실 보도 경쟁이 사라지다 / 기자 리영희의 교훈 / 다른 시대, 다른 기자의 꿈
리영희와 사회과학: 사회과학의 고민 - 은수미
리영희와 사회과학 / 사회과학은 비정규직을 어떻게 보는가 / 비정규직을 말하는 사회과학 / 사회과학의 딜레마 / 공공성에 대한 고민 / 사회과학에 대한 질문
리영희와 청년 세대: 냉소주의 시대의 우상과 이성 - 한윤형
'아버지 세대의 선생님'을 만나다 / 리영희와 청년 문화의 긴장 관계 / 대학생, 자유를 말하다 / 무엇이 우상이고 무엇이 이성인가 / 리영희와 청년 문화의 상실 / 전환이 불가능한 시대의 우상과 이성 / 분열증 시대에 돌아보는 리영희
리영희 인터뷰: 가혹하게 정직하고, 칼날처럼 순결하게 - 김현진
고옥의 일인자 / 레이디, 인텔리겐치아 / 그런 것이 역사다 / 혁명은 온다, 네가 형무소에 갈 때 거절하라! / 물을 건넌 개, 물에 빠진 개 / 피로 쓴다 / 생활은 간소히, 생각은 높게 / 리영희 수난곡, 리영희 스타일, 그리고 사상의 오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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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16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 ‘생각의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훌륭한 ‘정보’나 ‘견해’를 들려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생각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스승이란 우리에게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존재, 우리를 각성케 하는 모든 존재에게 부여될 수 있는 이름이다.
- 고병권의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중에서 접기
P. 34 어떤 책들은 그냥 종이 뭉치이거나 문장의 집합체가 아니게 된다.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어떤 인간과 같다. 우리는 그 시절에 어떤 이들과 조우함으로써 우리 생을 만들고 또 바꿔 왔다. ‘그/책’은 젊은 날이 성마른 열정과 숭고한 영성을 상징한다. ‘그/책’은 한 시대를 표상하는 이름이며 존재다.
- 천정환의 「책 읽기와 청년, 그리고 자유」 중에서 접기
P. 66 전쟁은 처음부터 끝까지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 특정한 정치경제 상황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인간적.인문학적 현실임과 동시에 적나라한 정치적.사회적 현상이다. 따라서 전쟁은 언제나 동일한 방식으로 나타나지도 않고 또 그것을 겪은 군인들이나 민간인들에게 동일하게 체험되지도 않는다.
- 김동춘의 「전쟁의 세기」 중에서
P. 88 율법의 ‘문자’가 아닌 ‘정신’을 실현하고자 한 예수가 율법을 거스른다는 이유로 율법가들에 의해 희생되었는데, 예수를 따른다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다시 예수를 죽인 율법가의 편에 선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예수의 정신을 여전히 반대로 알아듣는다. 사람들을 문자와 제도 안에 가두어 두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며 강권한다.
- 이찬수의 「무신론적인, 그러나 유신론적인」중에서 접기
P. 109 당시 강연장을 가득 메운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원어민’들도 그의 발음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이 관심을 기울인 것은 지젝의 어색한 발음이 아니라 강연에서 그가 주장했던 독창적인 사유의 내용이었다. 원어민 발음과 거리가 먼 영어를 구사하는 지젝은 원어민을 능가하는 유려한 글쓰기 능력으로 자신의 저서를 대부분 영어로 쓴다. 그런 능력은 500단어의 유창한 영어 발음으로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오길영의 「영어라는 우상」 중에서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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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글
이 책은 고민하는 청춘들의 영원한 스승, 리영희를 다시 불러낸다. 리영희를 프리즘으로 삼아 우리 시대를 이해하고, 다른 세상, 다른 삶을 위한 새로운 고민을 시작하고자 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지부터(고병권), 책 읽기(천정환), 전쟁(김동춘), 종교(이찬수), 영어 공부(오길영), 지식인(이대근), 기자(안수찬), 청년 세대(한윤형)에 이르기까지 리영희를 매개로 우리 시대 교양의 기초를 다지고자 한다.
- 인문사회과학출판인협의회(인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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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 중앙일보(조인스닷컴) 2010년 2월 20일 북 브리핑
한겨레 신문
- 한겨레 신문 2010년 2월 19일 잠깐 독서
저자 및 역자소개
김현진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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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예술사와 연극원 서사창작과 전문사를 공부했다. 17세에 에세이집 《네 멋대로 해라》로 데뷔해 지금까지 칼럼, 에세이, 소설을 쓰고 있다. 《한겨레》와 《경향신문》에 에세이를 써왔으며, 《내가 죽고 싶다고 하자 삶이 농담을 시작했다》 《지지 마, 당신》 《네 멋대로 해라》 《그래도 언니는 간다》 《누구의 연인도 되지 마라》 《뜨겁게 안녕》 《육체탐구생활》 《동물애정생활》을 비롯한 에세이집과, 장편소설 《녹즙 배달원 강정민》 《말해봐 나한테 왜 그랬어》 《XX 같지만, 이건 사랑 이야기》, 소설집 《정아에 대해 말하자면》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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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우리는 예쁨 받으려고 태어난 게 아니다>,<네 멋대로 해라>,<녹즙 배달원 강정민> … 총 52종 (모두보기)
이찬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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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니시타니 케이지(西谷啓治)의 불교철학과 칼 라너(Karl Rahner)의 철학적 신학을 비교하며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남대학교 교수, (일본)WCRP평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코세이가쿠린 객원교수, 난잔대학 객원연구원, 성공회대학교 대우교수,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냈고, 한국문화신학회 회장으로 일했으며, 한국평화종교학회 부회장, 인권연대 운영위원 등으로 봉사하고 있다.
그동안 종교학, 죽음학, 평화학 등과 관련해 77권의 단행본(공저/역서 포함)과 88편의 논문을 출판했는데, 평화학과 관련한 책으로는 『평화와 평화들』, 『한국인의 평화사상1.2』(공편), 『평화의 여러가지 얼굴』(공편), 『아시아 평화공동체』(편저)를 비롯해, 『세계평화개념사』, 『아시아공동체와 평화』, 『평화의 신학』, 『세계의 분쟁』, 『평화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녹색평화란 무엇인가』, 『폭력이란 무엇인가』, 『재난과 평화』, 『탈사회주의 체제전환과 발트3국의 길』, 『사회주의 베트남의 역사와 정치』, 『양안에서 통일과 평화를 생각하다』, 『동아시아의 대동사상과 평화공동체』, 『근대 한국과 일본의 공공성 구상 1.2』, 『우리 시대 혐오를 읽다』 외 여러 권의 공저서와 번역서들이 있다.
국가보훈처 산하에 있으면서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에 소속된 보훈교육연구원장으로 취임한 이래 평화 및 복지국가의 형성에 기여하는 보훈 연구와 교육이 될 수 있도록 뒷받침하고 있다. 접기
최근작 : <보훈, 평화로의 길>,<독립.호국.민주의 미래와 보훈의 가치>,<보훈학 개론> … 총 58종 (모두보기)
고병권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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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에서 화학을 공부했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했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사회사상과 사회운동에 늘 관심을 기울이며 살아왔다. 오랫동안 연구공동체 ‘수유너머’에서 생활했고 지금은 노들장애학궁리소 회원이다. 그동안 『화폐, 마법의 사중주』, 『언더그라운드 니체』, 『다이너마이트 니체』, 『생각한다는 것』,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그는 마르크스의 『자본』을 1991년에 처음 우리말 번역본으로 읽었다. 그 시절 한국은 민주주의 열망이 불붙던 시기다. 어느덧 30여 년이 지나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러나 아직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으며, ‘그 달라지지 않은 것’을 사유하고자 다시 『자본』을 읽어야 하는 시대라 믿는다. 접기
최근작 : <북클럽 자본 세트 - 전12권>,<임금에 관한 온갖 헛소리>,<[큰글자책]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 … 총 70종 (모두보기)
김동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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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자. 서울대학교 사범대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서 「한국 노동자의 사회적 고립」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역사비평』 편집위원, 『경제와 사회』 편집위원장,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참여사회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으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했다. 1997년부터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현재 같은 대학 NGO 대학원장 및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주의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 『1960년대의 사회운동』 『한국 사회 노동자 연구』 『한국 사회과학의 새로운 모색』 『분단과 한국 사회』 『전쟁과 사회』 『독립된 지성은 존재하는가』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 『1997년 이후 한국 사회의 성찰』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전쟁정치』 『대한민국 잔혹사』 『대한민국은 왜?』 『사회학자 시대에 응답하다』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반공자유주의>,<대한민국은 왜?>,<역동적 한국인의 탄생> … 총 67종 (모두보기)
이대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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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대학교 국방정책대학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고려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경향신문 편집국장 및 논설고문,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 자문위원, 북한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북한군사 문제를 넘어 한반도 평화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 저서로는 『북한 군부는 왜 쿠데타를 하지 않나』, 『김정은 시대 조선로동당』(공저), 『북한군사문제의 재조명』(공저), 『북한의 당·국가기구·군대』(공저) 등이 있다.
최근작 : <12개 렌즈로 보는 남북관계>,<당신은 정의로운 사람입니다>,<나는 천천히 울기 시작했다> … 총 9종 (모두보기)
천정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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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부산 출생. 한국 현대 문화사와 문학사 연구자. 『문화론적 연구’의 현실 인식과 전망』(2007),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2013) 『근대의 책 읽기』(2003) 등을 발표하여 한국 현대문학사 연구의 폭을 넓히고, 『대중지성의 시대』(2008), 『조선의 사나이거든 풋뽈을 차라―스포츠민족주의와 식민지 근대』(2010), 『자살론―고통과 해석 사이에서』(2013), 『시대의 말 욕망의 문장―123편 잡지 창간사로 읽는 한국 현대 문화사』(2014) 등을 썼다. 『혁명과 웃음―김승옥의 시사만화《파고다영감》을 통해 본 4·19 혁명의 가을』(공저, 2005), 『1960년을 묻다―박정희 시대의 문화정치와 지성』(공저, 2012) 등을 통해서도 역사적 문화연구, 또는 문화정치사 연구의 지평을 개척해왔다. 『역사비평』, 『문화/과학』 편집위원. 『경향신문』, 『한겨레』 등에 칼럼이나 기획 연재물을 실어왔고, 인문학협동조합, 민교협, 지식공유연대 등을 통해 학술 운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접기
최근작 : <숭배 애도 적대>,<문화과학 108호 - 2021.겨울>,<현대사회와 범죄학> … 총 34종 (모두보기)
오길영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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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와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영문학과 비교문학을 공부했다.
1991년 계간 『한길문학』에 임철우·양귀자론을 발표하며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충남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산문집 『아름다운 단단함』(2019), 평론집 『힘의 포획』(2015), 연구서 『포스트미메시스 문학이론』(2018), 『세계문학공간의 조이스와 한국문학』(2013), 『이론과 이론기계』(2008) 등이 있다.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ogyjoyce
최근작 : <아름다움의 지성>,<아름다운 단단함>,<소설을 생각한다> … 총 15종 (모두보기)
SNS : //facebook.com/ogyjoyce
안수찬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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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석사 공부까지 마쳤으나 언론학으로 전공을 바꿔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1997년 11월부터 시작한 기자 노릇에 의심이 많아져 언론학을 제대로 파 보자고 결심했다. <한겨레> 탐사보도팀장, 사건팀장 등을 거쳐 <한겨레21> 편집장을 맡고 있다. <뉴스가 지겨운 기자>(삼인), <기자, 그 매력적인 이름을 갖다>(인물과사상사), <4천원 인생>(한겨레출판) 등을 썼다.
최근작 : <대통령의 7시간 추적자들>,<저널리즘의 지형>,<인문학이 인권에 답하다> … 총 15종 (모두보기)
한윤형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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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 비평 전문지 《미디어스》에서 2012년부터 3년간 정치부 기자로 일했다. 혼자 쓴 책으로《 뉴라이트 사용후기》와《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미디어 시민의 탄생》 등이 있고, 함께 쓴 책으로《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와《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가 있다. 그 외 몇 권의 책에도 한 꼭지씩 보탰다. 현재는 새로운소통연구소의 조사분석실장이며, 유튜브 채널 헬마우스에서는 ‘한가놈’이란 예명을 쓰며, 주로 자료조사에 힘을 보태고 있다.
최근작 : <촉 2022-2023>,<추월의 시대>,<지방선거 가이드북> … 총 21종 (모두보기)
은수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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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한 뒤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정책국장으로 일하다 체포되어 6년 가까이 수감생활을 했다. 1997년 출소 뒤, 대학에 복학해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노동연구원,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노동정책 자문위원, 청년유니온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했고, 민주통합당 비례대표로 19대 국회위원을 지냈다. 2016년 테러방지법을 반대하는 필리버스터를 10시간 18분 동안 했고, 같은 해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했다. 여러 학교, 시민단체, 노동조합 등에서 ‘노동, 청년, 정치’를 주제로 한 강의와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 『IMF 위기』 『날아라 노동』 『은수미의 희망 마중』 『어떤 복지국가인가』(공저) 『여성의 일, 새로고침』(공저)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만국의 알바여, 정치하라>,<정치의 시대 세트 - 전4권>,<은수미의 희망 마중> … 총 23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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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다음 달에는>,<나는, 휴먼>,<프레드가 옷을 입어요>등 총 1,181종
대표분야 : 전쟁/평화 이야기 1위 (브랜드 지수 13,925점), 문화/예술/인물 1위 (브랜드 지수 351,841점), 청소년 인문/사회 2위 (브랜드 지수 222,185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이 책은 리영희에게 바치는 책이 아니다. 리영희에게 바치는 책은 그 누구보다도 리영희가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그것을 모른다면 그를 ‘사상의 스승’으로 부를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글을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인데, 어떻게 헌사 따위가 바쳐지는 자리에 스스로 서겠는가. - 홍세화의 「서문 : 리영희를 다시 불러내는 이유」 중에서
1. 사상의 은사, 리영희를 다시 불러낸다
프랑스의 『르 몽드』가 “사상의 은사”라 불렀던 리영희의 책 『전환시대의 논리』는 “사회과학 서적으로는 처음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저작”이다. 시대를 고민하는 청춘들에게 리영희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고 “머릿속에서 지진을 일으키”고 “몽롱한 의식에 끼얹은 찬물 한 바가지”였다. 리영희로 말미암아 눈을 뜨고 세계를 인식하고, 이전과 다른 존재로서 생을 만들고 바꾸어간 청년들은 시대의 한 가운데로 투신했다. 민주주의를 꿈꾸고 고민하고 싸웠던 이 땅의 젊은 지성들에게 리영희는 뿌리이자 토대이고 출발점이었다. 그렇게 한국 현대사의 비판적 지성의 상징, 리영희는 우리 시대 민주주의를 향한 여정의 출발점이다. 이 책은 고민하는 청춘들의 영원한 스승, 리영희를 다시 불러낸다.
2. 리영희라는 이름의 교양, 우리 시대 교양의 기초를 다진다
리영희는 깨어 있고자 한 청춘들이 읽어야 할 필독서였고, 알아야 할 교양의 첫 번째 목록이었다. 여기서 교양이란 속류화된 호사 취미나 잡다한 지식을 지시하지 않는다. 일찍이 플라톤은 교양이란 “영혼의 건강과 같은 것, 혹은 아름다움이나 반듯하게 배우고 알아야 할 최대의 덕”을 의미하고, 교양을 구현해낸 이상적인 인간상인 철학자는 “폴리스에 대한 사랑, 즉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봉사할 줄 아는 덕을 지향해야 한다”고 했다.(이광주, 『교양의 탄생』(한길사) 중에서) 또 재일 디아스포라 학자 서경식은 신자유주의 전체주의가 지배하고 전쟁이 일어나는 시대에 교양의 자리를 묻는다.(서경식 외, 『교양, 모든 것의 시작』(노마드) 중에서)
무지몽매한 우상이 지배하던 시대에 이성의 힘으로 맞서 싸운 리영희는 교양의 의미를 올곧게 보여주었다. 리영희라는 이름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일깨우는 고민의 바탕이었고, 수많은 청춘들이 스스로 서게 하는 교양의 힘이었다. 7,80년대 민주주의를 향한 거대한 물결은 바로 ‘세미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자발적인 ‘교양’ 공부의 토대 위에 있었다. 이 책은 리영희를 프리즘으로 삼아 우리 시대를 이해하고, 다른 세상, 다른 삶을 위한 새로운 고민을 시작하고자 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지부터(고병권), 책 읽기(천정환), 전쟁(김동춘), 종교(이찬수), 영어 공부(오길영), 지식인(이대근), 기자(안수찬), 청년 세대(한윤형)에 이르기까지 리영희를 매개로 우리 시대 교양의 기초를 다지고자 한다.
3. 리영희를 불러내는 또 하나의 방법
이 책은 리영희의 팔순(2009년 12월 2일)을 축하하고 기념하기 위해서 기획되었다. 그러나 어떤 금기도 허용치 않고 우상에 맞섰던 리영희에게 헌사는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이 책은 일방적인 존경과 흠모를 보내는 보통의 헌정 도서와 다르게 구성되었다. 리영희의 의미와 영향력을 되새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리영희를 통해서, 리영희가 지녔던 교양의 힘을 매개로 새로운 교양 목록을 제시한다. 리영희는 새로운 교양을 촉발하는 원재료이고, 다양한 교양의 목록을 묶어주는 고리의 역할을 한다. 또 서문을 쓴 홍세화를 필두로, 리영희를 사상의 스승으로 모시는 70,80년대 학번부터 리영희의 제자가 아니었다고 밝히는 90년대 학번, 20대 논객으로 주목받는 2000년대 학번까지 세대를 넘어선 다양한 필자군으로 구성되어, 리영희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읽을 수 있다.
[주요 내용]
리영희와 생각하기 :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_ 고병권
리영희가 ‘사상의 은사’라 불리는 점에 착안하여, 생각을 낳아준 스승이란 무엇인가,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탐색한다.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 ‘생각의 스승’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그가 정보나 견해, 지식을 전달한 사람이 아니라, 생각하기 즉 각성을 전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스승이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에게 부여되는 이름이다. 리영희는 생각 없음의 상태/체제에 도전하여 생각할 것을 일깨웠고, 생각한다는 것은 기존의 굳은 관념, 견해에 의한 조건반사의 반응을 넘어서는 것이다. 바로 생각의 전제, 토대조차 무너뜨리고 생각하는 것이고, 그것이 계몽이고 각성이고 다른 사람이 되는 주체 변형의 의식화다.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 ‘생각의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훌륭한 ‘정보’나 ‘견해’를 들려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생각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스승이란 우리에게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존재, 우리를 각성케 하는 모든 존재에게 부여될 수 있는 이름이다. _ 16쪽, 고병권의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중에서
리영희와 책 읽기 : 책 읽기와 청년, 그리고 자유 _ 천정환
독서의 문화사라는 관점에서 책 읽기를 통해 형성되고 발현되는 정신사의 풍경을 서술한다. 리영희의 독서 이력과 리영희를 읽고 또 읽지 않던 70,80년대 책 읽기의 문화사를 살펴보며, 책 읽기와 자유의 관계에 질문을 던진다. 식민지 시대 일본어로 된 문학 책으로 시작하여, 국제관계 저널리스트이자 진보적 지식인으로서 사회과학 서적의 탐독으로 이어진 리영희의 책 읽기는 당대의 문화-정치의 맥락과 맞물려 한국 지성사의 서술로 이어진다. 수많은 청년들이 책 읽기를 통해 존재를 건 모험에 나섰던 70,80년대 리영희가 ‘필독서’에서 ‘선택 교양’으로 전환되는 맥락 속에서 책 읽기와 자유, 책 읽기와 정치의 관계를 짚어본다.
어떤 책들은 그냥 종이 뭉치이거나 문장의 집합체가 아니게 된다.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어떤 인간과 같다. 우리는 그 시절에 어떤 이들과 조우함으로써 우리 생을 만들고 또 바꿔 왔다. ‘그/책’은 젊은 날이 성마른 열정과 숭고한 영성을 상징한다. ‘그/책’은 한 시대를 표상하는 이름이며 존재다. _ 34쪽, 천정환의 「책 읽기와 청년, 그리고 자유」 중에서
리영희와 전쟁 : 전쟁의 세기_ 김동춘
리영희라는 지식인이 전쟁이라는 최고의 현실을 어떻게 마주했는지를 살펴보며, 20세기 한반도와 주변에서 벌어진 전쟁의 역사와 경험을 되짚는다. 전쟁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관계들도 파괴하고 새로운 관계들을 만들어낸다. 전쟁은 모든 것을 뒤집어버리는 일종의 혁명이다. ‘제국’의 프로젝트인 전쟁은 국제 질서를 뒤흔들 뿐 아니라 국내의 정치 질서도 지배하는 정치사회적 사건이자 현상이다. 『전쟁과 사회』의 저자이자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문제를 천착한 김동춘 교수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냉전 체제의 속살을 파헤친다.
전쟁은 처음부터 끝까지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 특정한 정치경제 상황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인간적 ? 인문학적 현실임과 동시에 적나라한 정치적 ? 사회적 현상이다. 따라서 전쟁은 언제나 동일한 방식으로 나타나지도 않고 또 그것을 겪은 군인들이나 민간인들에게 동일하게 체험되지도 않는다. _ 66쪽, 김동춘의 「전쟁의 세기」 중에서
리영희와 종교 : 무신론적인, 그러나 유신론적인 _ 이찬수
일관된 종교 비판자였지만 종교의 가치를 좇았던 리영희를 통해, 제도와 교리에 갇힌 기성 종교를 비판하고 진정한 종교 정신을 되새긴다. 종교 간 갈등은 교리의 차이가 아니라 교리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예수는 유대교 율법의 ‘정신’을 살리려 했지만, 율법의 ‘문자’ 자체에 매달린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기독교의 우상숭배 금지, 유일신 사상도 이와 같이 교리를 문자 자체로 해석하여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 제도와 교리 속에 담겨진 정신은 뒷전으로 밀리고, 정신이 형상화된 제도와 교리에 치우친 기성 종교를 비판하며, 보편적인 종교 정신을 강조한다.
율법의 ‘문자’가 아닌 ‘정신’을 실현하고자 한 예수가 율법을 거스른다는 이유로 율법가들에 의해 희생되었는데, 예수를 따른다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다시 예수를 죽인 율법가의 편에 선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예수의 정신을 여전히 반대로 알아듣는다. 사람들을 문자와 제도 안에 가두어 두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며 강권한다. _ 88쪽, 이찬수의 「무신론적인, 그러나 유신론적인」
리영희와 영어 공부 : 영어라는 우상 _ 오길영
영어 실력이 사회적 성공의 보증수표로 여겨지는 시대, 영어를 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따져보고, 일찍이 외국어 공부에 매진한 리영희의 사례를 통해 올바른 영어 공부와 방법에 대해 논한다. 실용주의와 시장주의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영어 실력은 실용성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 실용의 수준이 텍스트 독해력과 사고의 조직력 등을 배제한 ‘관광 영어’ 수준으로 이해되고, 영어 공부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필요한지에 대한 고민 없이 모든 사람에게 강요된다. 서투른 발음에도 영어 원어민들을 압도하는 지젝과 영어 공부하는 목적과 방법을 명확히 하고 영어를 익힌 리영희를 통해 영어 공부의 본령을 제시한다.
당시 강연장을 가득 메운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원어민’들도 그의 발음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이 관심을 기울인 것은 지젝의 어색한 발음이 아니라 강연에서 그가 주장했던 독창적인 사유의 내용이었다. 원어민 발음과 거리가 먼 영어를 구사하는 지젝은 원어민을 능가하는 유려한 글쓰기 능력으로 자신의 저서를 대부분 영어로 쓴다. 그런 능력은 500단어의 유창한 영어 발음으로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_ 109쪽, 오길영의 「영어라는 우상」 중에서
리영희와 지식인 : 다시, 지식인의 책무를 묻다 _ 이대근
저항적 지식인의 전형인 리영희의 퇴장을 곱씹으며, 민주화 이후 변화된 지식인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 따져본다. 민주화가 진행되고 분노와 저항의 시대를 헤쳐온 지식인 리영희가 물러났지만, 한국사회는 인간다운 사회와 가까워지지 못했다. 신자유주의가 지배하고 시장에 휘둘리는 정글 사회로 변모하고, 불평등과 억압은 세련되게 변형되고 교묘해졌다. 탈근대적 현상들로 탈근대 지식인론이 논의되지만, 근대적 과제와 탈근대적 과제가 중첩되어 있는 한국사회에서 탈근대적 지식인론이 근대적 지식인론을 대체할 수는 없다. 삶의 질이 악화되고 더욱 뿌리 깊은 억압과 불평등이 만연한 이 시대에 지식인의 책무에 대해 다시 묻는다.
리영희는 사르트르를 인용해 자유의 의미를 절절하게 전했다. 사르트르는 독일 점령하에 있을 때처럼 자유로웠던 때가 없었다고 한다. 일체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매일 정면으로 모욕을 당할 때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자유라고 했다. 막다른 골목에 쫓겨 있었던 까닭에 거동 하나하나가 앙가주망의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고 했다. _ 144쪽, 이대근의 「다시, 지식인의 책무를 묻다」 중에서
리영희와 기자 : 진짜 기자의 멸종 _ 안수찬
IMF 이후 시장에 노출되어 생존 경쟁에 돌입한 언론사의 현실 아래서, 기자들은 조직의 부속품이 되어갔다. 단독자 기자는 사라지고 매체마다 정형화된 기사가 넘쳐났다. 『시사저널』 사태는 시장 압력에 굴복한 대표적 사례다. 또 기업 이윤이라는 논리로 진행되는 언론 탄압은 민주 정부 시절의 언-권 유착에서 영감을 얻었고, 역시 시장주의와 관련된다. 기자 사회의 낭만에 빠지지 않고 기자라는 명함에도 연연하지 않으며 권력과 긴장했던 진짜 기자 리영희를 되새기며, 기자의 존재 조건과 기자 정신을 되새기고자 한다.
기가 막힌 노릇이지만, 이는 국소 마취의 수법이다. 시장주의의 모르핀으로 언론의 발을 마비시켰다. 방송 시장이 개방된다는데, 방송이 신문 광고를 다 빼앗아 간다는데, 이 언론사가 망하면 너는 어디 가서 잘난 기자 노릇을 할 것이냐고 겁박하는 방식이다. 기자들이 겁먹었다는 증거는 허다하다. _ 157~158쪽, 안수찬의 「진짜 기자의 멸종」 중에서
리영희와 사회과학 : 사회과학의 고민 _ 은수미
비정규직 문제를 천착하는 사회과학 연구자로서 사회과학의 입장과 역할, 딜레마 등에 대한 고민을 풀어낸다. 사회과학이 비정규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를 사회과학의 고전적 주제인 개인과 사회의 관계의 맥락에서 뒤르켐과 리프킨, 스티글리츠를 참조한다. 사회과학이 비정규직을 말하고 대변하는 것의 의미를 아렌트의 공론장에서 자리 확보의 논의와 만하임의 지식사회학 논의를 연관 지어 고민한다. 또 사회과학이 연구대상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 공공성이란 무엇인지, 사회과학이란 무엇인지 등에 대한 고민을 깊이 있고 진솔하게 풀어낸다.
학문의 역사는 가설의 역사일지도 모른다. 연구자는 아직 입증되지 않은 자신의 논리, 예를 들어 “파업권 보장 없이 민주주의는 없다”는 가설을 제시하고 그것을 입증하려 한다. 학문은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가설을 통해 재구성된다. 하지만 가설을 주장하고 입증하는 것이 학문 외부의 강제에 의해 불가능하여 가설이 가설로만 남는다면 그것은 학문 세계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로 바뀐다. _ 184~185쪽, 은수미의 「사회과학의 고민」 중에서
리영희와 청년 세대 : 냉소주의 시대의 우상과 이성 _ 한윤형
1980년대생의 젊은 필자가 ‘아버지 세대의 선생님’ 리영희를 매개로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청년 문화의 양태, 속내를 정리한다. 70년대 통기타 문화와 리영희의 긴장 관계부터 민중문화가 주도하던 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이론이 유행하던 90년대를 개괄하면서, 우상과 이성의 분별이 가능한지를 질문한다. 또 청년 문화가 상실되고 상품화된 대중문화로 대체되어 버린 지금 청년들의 삶의 조건과 정서, 욕망을 설명한다. 노동자마저 자본가의 사유를 내면화해, 우리 삶 자체가 우상화되어버린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스스로의 삶 자체에 대한 치열한 성찰을 요구한다.
예비 노동자인 대학생들은 자신을 착취해주기를 간절하게 바랄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대학생들이 바라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편입’이다. 자본주의로부터의 자유, 노동할 의무로부터의 자유를 꿈꾸지 못하고 자본주의 사회로 편입하기를, 정규직으로 편입하기를, 그러기 위해 좋은 대학으로 편입하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 하지만 하루하루 편입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의 삶 속에선, 우상은 바로 우리의 삶 그 자체다. _ 204쪽, 한윤형의 「냉소주의 시대의 우상과 이성」 중에서
리영희 인터뷰 : 가혹하게 정직하고, 칼날처럼 순결하게 _ 김현진
일찍이 고등학교를 박차고 나온 ‘불량소녀’로 알려졌고, 20대 필자로 다양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는 김현진이 거인 리영희를 만났다. 패거리를 만들지 않고 올곧게 독립적으로 진실만을 추구했던 리영희의 삶을 ‘리영희 스타일’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하고 지식인과 변혁, 혁명, 역사, 자본주의, 자유 등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리영희는 엄격하고 단단하고 날카로운 솜씨로 질문에 답하는 한편, 어린 손녀의 물음에 응해주는 따뜻하고 지혜로운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인다.
그래도 날렵한 몸으로 채찍을 휘두르며 ‘포티 파이브’ 권총으로 백발백중의 사격 솜씨를 자랑하는 탐험복 차림의 고고학자 리영희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캐릭터로 본다면, 절대 인디아나 존스는 아니다. 아무리 적이라 해도 타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함정에 빠뜨리거나 자동차에서 떨어뜨리거나 하는 건 도저히 ‘리영희 스타일’이 아니다. _ 232~233쪽, 김현진의 「가혹하게 정직하고, 칼날처럼 순결하게」 중에서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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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얼 먹어도 물을 싸는, 뭐 다소 흔한 질병에 걸렸다. 흔한 질병이긴 하나 그 원리가 참으로 신묘하다 아니 할 수 없다. 대처 방법 또한 그렇다. 물을 많이 배출하므로 물을 많이 먹어라. 당연한 말이긴 해도, 내 몸이 들어온 물을 그대로 내보내는 한 줄기 파이프가 된 것 같아 놀랍고 비참하다. 항쟁의지가 남다른 괄약근의 철벽수비가 아니었다면 훨씬 더 비참했을 것이다. 쓰다듬어 주고 싶다. 미쳤군.
인체의 신비는 경이롭다. 사람의 몸은 샌드위치를 잘못 먹으면 파이프가 된다. 우유를 잘못 먹어도 파이프가 된다. 치즈 잔뜩 뿌린 치킨을 잘못 먹으면 성능 좋은 파이프가 된다. syo는 낙지 볶음을 잘못 먹고 밸브가 고장난 노브레이크 하이패스 PVC 파이프가 된 기억이 있다. 치매가 와도 결코 잊지 않을 아주 흥건한 추억이다. 인체의 신비는 경이롭다. 그러나 그 경이로운 체험은 늘 이런저런 고통을 수반한다. 넓은 호수 표면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는 소슬바람 같은 고통에서부터, '말 못할 고통'이라고 아주 간편하게 말할 수 있는 아이러니한 고통까지. syo는 지금 또 한번 소소한 경이를 체험하는 중이다.
온몸으로 웃으려고 노력 중이다. 그러니까, 다음의 인용문들은 다 원 맥락을 무시한 채, 지금 상황에서 스스로 웃으며 버텨보려는 목적으로 인용하는 것임을 밝힌다. 안 그럼 울 것 같잖아. 지금 syo의 입장에선, 저게 웃긴다. 쓴웃음도 웃음입니다..... 아, 괄약근 너는 빼고. 지금 벌어질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비극적 상황은, syo는 못 웃는데 괄약근만 지 혼자 박장대소 하는 사태라 할 수 있겠다. 괄 장군에게 구국의 결단을 촉구한다......




어떤 기미를 둘이 거의 동시에 느꼈다. 남매는 나뭇가지를 던져버리고 장난감 같은 차들이 오가는 강변도로를 향해 뛰었다. 기미는 방귀냄새로, 생똥 냄새로 또 독가스 같은 구린내로 순식간에 바뀌어갔다. 그것이 오고 있었다. 남매는 모래밭에서 허우적거렸다. 숨은 적게 들이마시면서 뛰기는 빨리 뛰려는 불가능한 노력을 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무리 늦장을 부려도 결국 흘러가고야 말 것이다. 하류로 내려가서 서해 바다로 빠져나가 버릴 것이다. 한강다리의 교각에 몇 층으로 뚜렷이 그어져 있는 그것의 자취도 언젠가는 말끔히 지워질 것이다. 늘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그것을 구경조차 할 수 없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 그들은 그런 것을 본 적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_ 오수연,「강변에서」,『이해 없이 당분간』
비참 속에 담긴 비참, 비참에도 질서가 있었고, 그 길은 따라야만 했다.
_ 콜슨 화이트헤드,『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살해당할 거라면? 멍청하긴, 언제라는 거야, 그게? 지금 살해당하고 있는 거 아냐? 아주 조금씩 말이야. 그놈들은 말야, 능숙하다구."
_ 고바야시 다키지,『게 가공선』
오물로 가득한 폐허를 만나지 못힌 자들, 자신이 있는 곳를 폐허로 경험하지 못한 자들은 어떤 것도 창조할 수 없다. 그러하니 창조하려거든 몰락하라. 태어나려거든 흔쾌히 죽어라!
_ 고미숙 외,『루쉰, 길 없는 대지』
2
스타일이 간절히 목마른 때일수록 콘텐츠에 눈을 돌리자. 양식이나 미학이 부족하다는 느낌은 기반이나 근본이 빈곤한 정신에 종종 일어나는 증상이다. 일종의 저혈당쇼크라고 본다면 적절한 해결책은 결국 정신에 양분을 제공하는 일이다. 손은 저절로 움직일 때 가장 아름다운 결과를 빚는다. 손을 어떻게 움직일지를 계산하고 제어하는데 역량을 분산시키면 그만큼 멀리 가지 못하고 높이 닿지 못한다. 그러므로 손은 평소에 쉼없이 놀려야 한다. 손이 저 혼자 놀 수 있도록 하고, 저 혼자 놀아도 마음과 다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자주 놀고 많이 익힐 것. 자주 쓰고 많이 읽을 것.
알면 뭐 해, 안 되는데. 근래 독서량은 가장 좋은 시절에 비해 1/5 수준이고, 이제 거의 읽는다는 데 의의를 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어제는 닷새만에 뭐라도 써 봤는데, 글이라는게 참 늘 때는 정말 더럽게 더디더니 빠질 때는 KTX급이다. 싸야 할 곳으로는 물을 싸고, 손으로 똥글을 싸고 있다. 그런데도 읽을 시간도 쓸 시간도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문워크 하면서 사는 것이 바로 인생이로구나..... 하고 징징거리려는데, 이럴 때마다 다잡아 읽는 우리 선생님들 꽃같은 말씀.



밤에도 잠자는 것보다 일이 우선이었다. 때로 피곤할 때면 옷도 벗지 심지어는 이불도 덮지 않은 채 그대로 침대에 누워 두어 시간 눈을 붙였다. 이렇게 루쉰은 참호 속의 전사처럼 깜빡 잠이 들었다가, 몸을 뒤척이고는 바로 깨어나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진하게 끓인 차를 마신 다음, 과자가 있으면 조금 먹고는 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급한 글이 있을 때면 펜을 놓을 줄 몰랐으며, 대부분 동이 틀 때까지 작업했다. 루쉰은 많은 잡문들을 대부분 이런 상황에서 써냈으며, 많은 소설도 이런 상황에서 써냈다.
_ 왕스징, 『루쉰전』
우리가 학생에서 '직업인'이 되고 '교양'에서 '전문'으로 넘어갈 때, 혹은 청년에서 장년으로 넘어갈 때, 우리의 앎과 독서는 길을 잃고 위기에 처하기 십상이다. 어떤 이는 아예 책을 완전히 손에서 내려 놓기도 한다. 주로는 생계 활동의 고달픔 때문인데, 만흔 한국인들이 한 달에 책한 권도 못 본다. 어찌보면 이는 인생 자체의 행로가 위험해지는 것과 다르지 않은 과정일지 모른다. 우리는 이때 젊은이로서의 열정과 '꿈'을 잃고, 밥벌이과 기성 질서의 노예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리영희의 말은 그러할 때 책 읽기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그것은 자기 생과 앎을 소명을 지닌 프로젝트로 만드는 것, 또한 그것을 늘 또럿이 스스로 의식하고, 스스로 설정한 지적 과제를 충일하게 채워 나가는 책 읽기다.
_ 고병권 외, 『리영희 프리즘』
박태순이 내 글을 괴팍하다고 했다고 한다. 괴팍하다니.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썼을 뿐이며, 남들도 다 쓸 수 있는 글들을 쓰는 것을 삼갔을 따름이다.
_ 김현,『행복한 책읽기』
syo 2017-11-20 공감 (41) 댓글 (13)

시이소오님의『모두를 위한 페미니즘』리뷰를 읽고 쓰는 글이 맞지만, 시이소오님의 견해를 지적하거나 반박할 의사가 없습니다. 첫째, 시이소오님은 syo가 깔 수 있을만큼 어쭙잖은 말을 하는 분이 절대 아니고, 둘째, syo는 시이소오님의 글을 깔 수 없을만큼 어쭙잖은 말을 하는 놈이고, 셋째, 설령 미라클적으로 앞의 두 조건이 모두 만족된다 하더라도, 시이소오님의 말씀처럼 아직 페미니즘에 대해 발언하는 것은 위험하고 멍청한 짓이 되는 곳이 이 나라 이 땅이기 때문이겠다. 시이소오님이 그렇듯 syo도 남성이며, 페미니즘에 대해 발언하는 것이 위험한 마당에 페미니즘에 대한 발언에 대해 발언하는 것이 듀얼코어로 멍청한 일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소심한 syo가 언제나 그랬듯, 지금 놀이터 한 구석에 숨어서 바닥에다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난 항상 혼자 놀지. 친구가 없거든. 지금 난 그림을 그리고 있어. 혼자 그리고 있지. 뭐, 와서 보라고 그리는 건 아냐. 그렇지만 본다고 해도 말리진 않을게. 혹시 내가 그린 그림이 마음에 안 든다고 나를 때리지는 않을 거지?
위의 글을 어디 적어놓고 앞으로 쓸 일 있을 때마다 ctrl+c, ctrl+v 해야 되겠다.
syo는 <집적회로소자> 과목이 쉬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은 처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미적분을 처음 배울 때, 물리2를 처음 접했을 때부터 그랬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미분적분학>,<일반물리학>,<디지털논리설계>,<현대물리학>,<전자기학>,<회로이론>,<데이터구조>가 쉬웠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 후로도 <전자회로>,<반도체소자공학>,<수치해석>,<알고리즘>,<디스플레이구동설계>..... 그 많고 복잡한 수식들과, 무뚝뚝한 공학적 서술들과, 이 책을 보는 사람이라면 요정도는 당연히 배우고 올라왔으리라는 잔인한 가정과..... 이 모든 악랄한 것들이 전부 실리콘밸리든 어디든 syo는 가지도 못하며 평생 부러워만 해야하는 곳으로 떠나버렸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렇게 꾹꾹 눌러 4년을 마치자 syo는 "지금부터 아주 잘만하면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메모리를 만들 수도 있을 수도 있을 수도 있는 먼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디스플레이, 프로세서, 배터리, 그리고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각각 syo같은 먼지들이 생성되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수학 할아버지와 과학 할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기괴하고 야릇한 이름의 과목들을 헤쳐나오는 데 고등학교 이과 2년, 대학 4+n년, 최소 6년을 오롯이 바쳐 겨우 '먼지'가 된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졸업즈음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어, 먼지들아 반갑다, 나는 '찌꺼기'라고 해, 너희들도 나처럼 대학원에 들어와 석사 2년을 마치고 나면, 당당한 '찌꺼기'가 될 수 있단다!
그 먼지들이 찌꺼기가 되고, 찌꺼기가 덩어리가 되는데 거의 10년이다. 그러나 여러 곳의 덩어리들이 한데 뭉쳐 가까스로 만들어 낸 스마트폰을 사용하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몇가지 손가락 기술, 항시 와이파이를 켤 것, 기기묘묘한 패턴을 만들 것, 안되면 껐다 켜볼 것, 과 같은 아주 단순한 기능 뿐이다. 그러나 전자공학을 배우고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는 누구도 스마트폰을 더 잘 쓰기 위해 전자공학이 더 쉬워지길 바라지 않는다. syo도 그렇다. 전자공학 연구가 어려워지고, 복잡해지고, 고도화될수록, 우리가 스마트폰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더욱 많아진다.
물론 syo도 페미니즘이 쉬웠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것은 더 잘 이해하고 싶은 욕심일 뿐이지, 페미니즘이라는 학문 자체가 syo의 이해선상으로 내려오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건 불가능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 일이다. 물론 버틀러는 뒤지게 어렵게 쓴다. 이리가레는 읽기 위해 필요한 것이 많다고 들었다. 스피박은 본 적도 없는데 이미 죽은 견해라는 이야기도 어디서 주워 들은 것 같다. 페미니즘 이론 계보상 저어어어어 꼭대기에 있으니 그나마 괜찮겠지 싶어서 읽기 시작한 보부아르의『제2의 성』조차 지금 몇 주째 제대로 진도가 나가지 않고 있다. 쉬웠으면 좋겠다. 그러나 좀 더 쉬울 수는 있어도, 겨우 얇은 책 10권 정도 읽어 본 syo가 확 이해할 수 있을만큼 쉬울 수 있는 것이 페미니즘이라는 학문이라면, 한 줌의 이론에 무너질 얄팍한 기반에 근거해 이리저리 여성들을 착취해 온 남성의 보잘 것 없는 역사가 한껏 더 보잘 것 없어지겠다.
페미니즘이 스마트폰처럼 우리의 생활을 바꾸기 위한 학문이라 해도, 그 저변에는 난해한 이론들이 깔려있을 수 있다. 그것은 전혀 과도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의 서점에는 이미, 밀어서 잠금 해제 수준으로 학문을 배제하고 생활에 밀착시킨 페미니즘 책들이 많다. syo의 눈에는 오히려 그런 책들이 너무 많아서 문제로 보인다. 페미니즘의 이름을 달고 나오지만 그저 여성이 쓴 에세이일 뿐인 그런 책.
표면과 심층 사이의 그 깊은 간극, syo는 그 간극이 더 벌어졌으면 좋겠다. 다만 밑바닥까지 밟아 내려갈 수 있는 계단 같은 책들이 좀 더 단계적으로 나왔으면 한다. 이건 뭐, 밑바닥 볼려면 무조건 다이빙 말고는 방법이 없으니 페미니즘에 생업을 건 것도 아닌 입장에서 그냥 물장구만 퐁당퐁당 치고 말아야 하는 형국이긴 하다.
벨 훅스의 책을 읽으면서 syo는 그런 생각을 했다. 페미니즘을 점점 어렵게 하는 학자들의 담론 자체에는 문제가 없지만, 만약 그들이 담론을 어렵게 만드는 이유가 다른 페미니즘 연구자나 활동가의 입을 닥치게 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들을 고성능하이클라스특급쓰레기라고 불러야 되겠다고. 우리가 더 좋은 스마트폰을 사용해 더 다양한 생활의 편의를 구현하려면 전자공학의 담론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복잡해져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전자공학 박사학위자가 일반인들에게 당신들이 쓰는 방식은 틀렸소, 스마트폰은 이렇게 써야 하오, 나는 박사요, 내 말을 들으시오, 거기 당신은 스마트폰을 쓸 자격이 없으니 내일부터 폴더폰을 쓰시오, 나보다 스마트폰을 잘 아는 사람이 없으므로 나는 이런 결정을 할 자격이 있소, 당신들이 쓰는 것은 스마트폰이 아니오, 그러므로 당신은 스마트하지 않소. 뭐 이따위의 발언들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연구자가 아닌 일상의 페미니스트들이나, 페미니즘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도 해당사항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때로 주의를 주거나 경고를 할 수 있다. 아무리 방수가 된다지만 스마트폰을 물에 빠뜨리는 것은 좋지 않아, 배터리는 소모품이니까 1년의 무상 A/S 기간 안에 갈아주는 것이 좋아, 데이터를 함부로 쓰면 요금 폭탄을 맞아,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진동으로 바꾸는 게 어때. 그러나, 그런 행동들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개인이 법의 손을 빌리지 않고 임의로 타인의 스마트폰을 빼앗거나 사용할 자격을 박탈할 수는 없다. 타인의 페미니즘을 함부로 짓밟지 맙시다.
뜬금없지만 171101-171111 32권




1. 파씨의 입문
: 아프고, 슬프고, 부질없는 것들의 반복을 앞에서, 곁에서, 안에서 바라보는 눈. 언제 돌아올지 모를 다음 파도를 기다리며, 바닥이 없는 긴 구멍 속을 한없이 함께 낙하하는 눈.
2. 괴물과 함께 살기
: 사회철학에 대한 재빠른 일별. 두꺼운 책들이 눈을 부릅뜨고 기다린다.
3. 웃는 남자
: 만족 만족. 읽는 사람이 세상을 마주해 열린 관심을 가질수록, 소설의 기능과 가치는 더 선명하게 빛나는 법이다.
4. 다이어트는 운동 1할, 식사 9할
: 될까? 뭐든 열심히 안 하는 syo에게 살 빼는 일이야 열심히 안 먹으면 되니까 쉽지만, 건강하게 살 빼는 일은 뭘 열심히 해야 하므로 어렵다.




5. 시사인 528
6. 민주주의의 정원
: 호모 이코노미쿠스와 호모 폴리티쿠스를 죽이고, 애덤 스미스와 찰스 다윈을 제 입맛에 맞게 교접한 우리의 오래된 기계적 세계관을 깨고 나오자!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모든 학문 분야들이 전부 정원으로 향하는 우리의 길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라고 써놓고 보니 이 책의 장점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다..... 작지만 훌륭한 경제사회 팸플릿 같다.
7. 루쉰
: 일본에서 나온 책이라, 루쉰이 유학하던 시절의 일본상을 명확히 그리기도 하고, 일본의 루쉰 수용사를 비중있게 다루기도 한다. 같은 분량의 다른 평전들에 비해 루쉰의 개인사를 조금 더 집요하게 파고드는 경향도 있다. 전체적으로 매력이 넘치는 평전은 아니겠다.
8. 니체씨, 긍정은 어떤 힘이 있나요?
: 삼촌, 니체가 뭐하는 사람이야? 라고 조카가 물어오면 이 책을 권하고 싶은데 조카가 없다.




9. 헌법의 주어는 무엇인가
: 헌법의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기 위해 1조를 다시 읽는다. 어느 순간 철학과 관념의 평면으로 점프했다가 다시 정치와 권력의 평면으로 내려오는데, 두 개의 평면 위에서 놀 때는 능수능란한 반면, 평면 간의 이동이 갑작스럽거나 다소 거칠게 밀고 들어온다는 느낌이 있다. 헌법 1조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는 충분히 놀라운 책이다.
10. 고전으로 철학하기
: 읽을만 한 인문독서기록이다. 의견의 대립이 있는 부분에서는 양비론, 중용, 도덕책 속의 예쁜 말로 결론을 맺는 경향이 없진 않은데, 깔 때는 까 주고 말할 게 있을 때는 촥촥 내지르다보니 그렇게 눈에 밟히지는 않는다. 빨강이의 냄새가 난다. 아이 좋아라.
11. 약탈정치
: 한 권으로 끝내는 이명박근혜.
12. 마키아벨리의 네 얼굴
: <군주론>의 임팩트가 막강한 것은 전쟁터가 우리네 사는 마당 안으로 스며들었기 때문이고, 이것은 마키아벨리의 입장에서는 득인 동시에 실이다. 명성을 얻었으나 그 명성이 악명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군주론>을 다 읽고는 이제 마키아벨리를 다 씹어먹었다고 생각하지만 저자의 말에 따르면 그런 경우 고작 1/4의 마키아벨리를 알았을 뿐이다. 저자는 마키아벨리의 저작을 <서한집>과 <외교문서집>을 한 덩어리로 시작해, <군주론>, <로마사논고>, <피렌체사> 의 큰 네 덩어리로 끊는다. 군주론 하나 읽고 깝치지 말라는 이야기 같다.




13. 세상물정의 사회학
: 세상물정 아는데 알아야 하는 것이 이리도 많으니 게으르게 살아가지고는 답이 없겠다. 어휴.
14. 헌법의 발견
: 헌법의 대표적 조항들을 둘러싼 정치/철학/사회학적 지식들의 향연이다. 박홍순 선생님의 인문학 책 스타일을 실하게 보여주는 좋은 책. 다만 좀 재미가 없고, syo의 경우 이런 나열식 발췌 지식 사전 같은 형식의 책에서 얻은 것들은 빨리 휘발되고, 결국 책에서 언급된 문헌들을 하나씩 읽어가야 남는 게 있더라.
15. 종의 기원을 읽다
: 양자오는 무섭다. 어마어마하게 많이 아는 사람. 책도 좋다. 그러나 양자오의 책은 양자오처럼 무섭거나 어마어마하게 괜찮지는 않다. 쉽고 재미있다는 사실은 반박불가다.
16. 문제적 과학책
: 36권의 과학책을 결점으로 해서 꿰어나가는 과학사. 어렵진 않지만 딱히 재미가 있지도 않은, 무난한 과학사 책이겠다. 철학사도 그렇지만 과학사 역시 구슬 서 말을 꿰어 보배를 만드는 데 쓰는 끈이므로, 초심자가 과학 공부를 과학사 책으로 시작하는 것은 시간낭비가 될 공산이 크다. 근데, 이런 이야기를 왜 하고 있는 걸까.




17. 풍경 소리
: 구효서 선생님 회춘 소식을 전합니다. 만세. 이것은 구력이 없으면 도저히 쓸 수 없는 글인데, 상큼한 문체와 만나 이제껏 없는 작품이 나왔습니다.
18. 맹자를 읽다
: 양자오는 맹자를 투사로 본다. 논변의 투사. 그런 관점에서 맹자를 읽는 것은 과연 효력이 있다. syo가 보는 맹자는 분노와 혁명의 사상가다. 사람들은 자꾸 택도 없는 질문으로 맹자를 괴롭히고 그 덕에 맹자는 항상 화가 나 있다. 공자보다 맹자가 더 잘 듣는 약이 되는 시대다.
19. 한겨레21 1185
20. 베를린 일기
: 빵 터지면 별 다섯 개 원칙대로 별 다섯 개. 오십다섯 개.




21. 지금 당신에겐 시 한 편이 필요합니다
: 그 동안 시를 읽는다고 읽었지만, syo는 읽은 게 아니라 읽은 개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22.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 반짝반짝 빛나지는 않지만 무엇인가 선명하게 가리키고 있는 윤고은.
23. 리영희 프리즘
: 리영희를 빌려와 오늘날(2010)을 조명하는 책. 리영희를 지식이 아닌 방법론으로 보는 셈인데,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방법론으로 기능할만 한 지식인이 과연 얼마나 더 있을까.
24. 작은 겁쟁이 겁쟁이 새로운 파티
: 제목부터가 딱 정지돈이다. 정지돈의 <정지돈> 이런 느낌이다. 단편도 장편 같고 장편도 단편 같다. 읽어보면 여지없이 정지돈이다. 여전히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싫어할 것이다. syo는 그저, 정지돈은 정지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일 뿐이다.




25. 다른 사람
: 많은 말을 하려고, 많은 글을 썼는데 모두 지워버렸다. 작가가 글을 너무도 선명하게 써서, 나도 이 모든 아픔과 슬픔을 이해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니 그 이해라는 것이 여전히 세상에 크고 작은 아픔과 슬픔들을 만들어내는 이들의 입에서 종종 나오는 '이해'라는 단어와 얼마나 다른지 확신이 없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뱉을 수 있는 말이 줄어드는 책들이 있다. 나는 부채감과 분노가 만드는 교집합의 어느 지점 위에서 그저 침묵만 거듭한다.
26. 즐거운 시 읽기
: 이 책을 보고 있자니 중고등학생이 시를 싫어하게 되는 이유를 잘 알겠는데도, '즐거운' 시 읽기 라고 제목을 붙인 것은 그야말로 반어법에 어떤 것인가를 몸소 보여주려는 살신성인의 태도겠거니.
27. 문단 아이돌론
: 우리에게도 이런 사람이 필요하거나 아니면 이미 있는데 못 보고 있거나. 어느 쪽이든, 얼른 눈 앞에 나타나라구요. 현기증 난단 말이예요.
28. 21세기 다윈 혁명
: 다양한 학문 분야에 다윈을 끌어들여 아전인수식으로 다윈의 위대함을 설파하는 책. 진짜 위대해 보이긴 한다. 19명의 저자가 짧은 글 한두 꼭지씩을 기고한 것인데, 글만 놓고 보면 수준이 고르지 못하다.




29. 이해 없이 당분간
: 아 재미지다. 흥미로운 작가들도 몇몇 발견. 아, 읽을 책이 또 늘었다. 깔려죽겠네.
30. 시사인 529
31. 그림으로 배우는 알고리즘
: 애기들 보는 애긔애긔 귀여운 책.
32. 알고리즘 행성 여행자를 위한 안내서
: 어려운 책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책은 기술서가 아니라 인문학 / 철학서이기 때문이다. 공학도와 공학도가 아닌 이들에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공히 어려운 책이겠다.
그간의 길었던 백수생활을 청산할 필요성을 느끼고 가족 및 준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본 결과인데, 그들은 모두 syo가 이제라도 뭔가 생활력을 갖겠다는 데는 하나같이 찬성하였지만, 취업 전선에 나가겠다는 말에는 또 하나같이 반대를 하였다. 평생을 책상 앞에만 앉아 있다가 아직도 책상 앞에만 앉아 있는 니가 뭘 할 수 있겠냐며, 그냥 책상 앞에 계속 앉아 있되 책만 바꾸어 보기를 강권한다. 한 자리에 모아놓고 공청회를 가진 것도 아닌데, 마치 배후에 무슨 세력이라도 존재하는 것처럼 이렇게 다들 똑같은 말들을 한단 말인가. 두어 명 정도는 동의를 해 줘야 마이 웨이 가겠다고 우겨라도 볼텐데. 이건 마치 덤벼라 세상아 하는 기분이라 찍소리 못하고 납득. 내일부터는 사랑스러운 책들 대신 끔찍하게 생긴 몇 가지 법서와, 요약서, 문제집 같은 것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아, 책은 갔습니다. 이렇게 하루에 세 권 기세로 읽는 짓도 이제 끝이 난 것입니다. 앞으로 딱 250일만, 하루 10시간만 공부하기로 약정하였고, 위약하면 위약금으로 인생을 내놓을 판이라, 이제 한 달에 몇 권이나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syo무룩).
syo 2017-11-12 공감 (42) 댓글 (28)

오늘 읽은 책에서 1

일반적으로 여자는 남자에 비해 뇌세포 수가 적기 때문인지(일본인 뇌 무게의 평균치는 남자 1372.9그렘, 여자 1242.8 그램) 천박함과 어리석음을 그 바탕으로 하며, 또 그것이 매력이 되기도 하지만 천박함과 어리석음이 이렇게까지 심해지면 그냥 넘어갈 수 없게 된다.
_ 다치바나 다카시,「시대와 상황의 병리학」,『문명의 역설』에 수록
우먼 리브는 일부일처제가 여자의 성적 욕구를 봉쇄한다고 비난하지만 이는 그녀들이 정신적 불구임을 공표하는 것과 같다. 정상적인 여성의 성 심리에서는 여성 스스로가 일부일처를 원한다는 사실이 모든 심리학적 데이터를 통해 증명되고 있다. / 음란한 여자, 여러 남자를 원하는 여자는 예외 없이 냉감증, 불감증이다. 오르가슴 부전이 님포마니아와 우먼 리브를 낳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이 진정으로 해방되길 원한다면 오르가슴을 느끼게 해주는 남자를 하루빨리 찾아야 할 것이다.
_ 다치바나 다카시, 위의 책
와, 아무리 옛날 글이라지만, 다치바나 다카시 진짜 개실망...... 후에 문고판으로 재발매 될 때도 전혀 개정이나 삭제를 하지 않았다는군요.
오늘 읽은 책에서 2

남성 우월주의는 어떠한가?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다윈주의를 남성 우월주의의 일종이라고 비난해 왔다. 다윈 이래 생물학자들은 암컷과 수컷의 차이를 강조하고 이를 토대로 남녀의 사회적 역할이나 기능을 설명하려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합당한 논의와 '오버'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다윈주의는 규범적 입장이 이념과 무관하다. 더구나 준거점을 언급하지 않고 무조건 수컷이 암컷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구체적인 기능을 제시하지 않으면 평가적인 언명도 자기 선호 표현에 지나지 않게 된다. "남자는 여자보다 잘났다."고 말하는 것이나, "난 남자가 좋아."라고 말하는 것이나 무엇이 다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윈주의가 스테레오타입을 강화하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엉렵다. 다만 그것이 전적으로 다윈 탓인지는 의문이다. ....(중략)..... 하지만 성선택 이론을 수컷 우월주의로 착각하는 일부 때문에 다윈주의를 남녀 차별을 용인하거나 조장하는 입장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핵전쟁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때문이라고 질책하는 것이나 진배없다. 다윈주의자와, 다윈주의를 빌미로 남성 우월주의를 조장하는 이데올로그는 구문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_정연교,「윤리의 세방화를 촉진시킨 다윈과 다윈주의」
이런 글을 보면 눈쌀이 찌푸려지는 것이 syo 뿐입니까. 다윈주의자와 다윈주의를 빙자하는 이데올로그를 왜 구분하지 못하냐고, 그 책임을 페미니스트에게 따져 묻는 것이 전적으로 온당한 일인가?
이 판에는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글쓴이가 주장하는 순수한 정통 다윈주의자 A, 다윈주의를 빌미로 남성 우월주의를 조장한다는 '착각하는 일부' B, 그리고 다윈주의도 잘 모르면서 남성 우월주의의 일종이라고 비난하는 페미니스트 C.
그러니까 글쓴이의 말은, B가 다윈주의라는 객관적이과 과학적인 학문을 비틀어 C를 공격했고, C는 A와 B를 구분하지 않고 욕하고 있다는 건데, 이 말만 들어도 저자가 얼마나 젠더 문제를 방관하고 있으며 학문적 고고함만 지키려 하는지 눈에 선명히 보인다. 세상 어느 B가 자신이 B라고 하며 C를 공격하겠는가. 자기가 A라고 하며 공격해 오는 B를 보며, 얻어맞는 C가 너는 A가 아니라 B야, 하고 다정하게 정정을 해주면서 얻어맞아야 한다는 말인가. 글쓴이가 A로써, 정말 진정한 다윈주의를 오염시키는 세태를 바로잡고 싶다면, C에게 눈을 뜨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B를 축출하는데 앞장서야 할 게 아닌가. 다윈주의에 똥물을 타고 있는 것은 C가 아니라 B인데. B가 모조리 없어지면 C가 다윈주의를 오해할 일이 없겠으나, C가 모조리 없어진다 한들 B가 남아 있다면 진정한 다윈주의를 향한 A의 꿈은 이룰 수 없는 게 아닌가?
첫번째 문단에서 글쓴이는 B를 공격한 척 하는데, 눈가리고 아웅도 정도껏이다. 글쓴이의 눈에 B가 하는 짓은 잘못이 아니라 '오버'일 뿐이다. 글쓴이는 '준거점을 언급하지 않고' 깝치는 B를 욕하는 척 하지만, 실제 그런 B는 없고, 있어도 C가 알아서 거른다. 문제가 되는 B들은 진화심리학이든 뭐든 가져와 자신의 주장에 맞게 데이터를 해석하는 방법으로 근거를 만들곤 한다. 그러나 글쓴이는 그런 B를 경계하는 태도는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허수아비를 만들어 놓고 후드러 패면서 객관성을 확보한 척 할만큼 약삭빠른 것인지, 아니면 저래 놓고 정말 스스로 객관적이라고 생각할만큼 순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글쓴이는 '가치 다윈주의'라는 것을 주장하면서, 그 가치 다윈주의가 자리잡기 위해 필요한 네 가지 예쁘지만 허망한 조건을 제시하는데, 정말 옳다. 핵공감.
"우선 가치와 진리가 분리되어야 한다. 가치의 원천을 하늘이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정말 그렇다. 부디, 다윈주의라는 진리의 고결함을 수호하겠다고 사람에게서 눈을 돌리고 귀를 막는 일은 하지 말아주시기를.
"둘째, 이성에 대한 편집증으로부터 탈피할 수 있어야 한다. 도덕이나 윤리가 고매한 이성을 갈고닦아 발견할 수 있는 진리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정말 그렇다. 부디, '준거점'이나 '구체적인 기능' 같은 진리의 보조장치들을 휘둘러대며 무언가를 합리화 하려는 시도는 말아주시기를.
"셋째, 문화와 가치의 기능을 효용에서 찾아야 한다. 문화와 가치가 생존 기제의 일부임을 인식하고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상이한 습속과 전통이 있을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정말 그렇다. 부디, 젠더 형성 과정에서 환경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말아달라는 목소리에 지금처럼 힘을 실어주시기를.
"넷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직한 문화나 가치가 갖추고 있는 공통적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형평과 효율, 배려와 사익, 규율과 자율이 적절하게 배분되지 않을 경우 어떤 가치나 문화도 오래 지속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정말 그렇다. 부디, 형평보다 효율에, 배려보다 사익에 더 큰 무게추를 실으면서도 그것이 적절한 배분이라고 우기는 학자는 되지 말아 주시기를.
마지막으로, 아인슈타인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 사람은 핵폭탄이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떨어진 그 날 이후 남은 평생 내내 핵폭탄 제조를 독려하는 편지를 보낸 일을 후회하며 살다 갔다는 사실을 덧붙이고 싶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에게 던져진 전제와 근거에 따라 추론하는 것에 머물 때, 우리는 '기계 부품'에 머무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그때 생각이 없는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용기의 문제, '감히 알려 하고', '감히 문제 삼으로 하는'태도라고 할 수 있다.
_ 고병권 외,『리영희 프리즘』
진보를 믿는 것, 그것은 진보가 이미 이루어졌다고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은 믿음이 아닐지도 모른다.
_ 프란츠 카프카,「죄와 고통, 희망 그리고 진정한 길에 대한 성찰」
만약 당신의 그 권위 있는 비평이 우리가 모르는 것를 알려준다면, 왜 세상은 계속 침묵할까요? 왜 우리에게 진실과 돌이킬 수 없는 법을 말해주지 않을까요? 비평이 그것을 안다면 우리에게 길을 제시해주었을 테고,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지 알았을 겁니다.
_ 안톤 체호프
실상 탈맥락적 보편이란 말은 허구다. 우리는 이 세계에서, 우리의 위치에서, 말하고 사고하고 행위한다. 철학적 사유는 자신이 거주하는 시간과 공간을 표시하고 말해야 한다. 예전에 만들어진 개념은 당연하게도 새로운 개념과 이론에 의해 비판되며 수정되고 새로 쓰인다. 개념은 그 흔적으로 자신의 자리를 만든다.
_ 김은주,『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모든 진리는 자기 확장적이다. 어떤 관념이 자기를 진리라고 믿을 때, 그것은 맹렬하게 팽창한다. 주먹만하게 줄어들었다가 크게 폭발한 우주처럼. 그러나 그 우주에도 끝은 있다.
_ 김현,『행복한 책읽기』
눈치 없이 혼자 느긋한 이유는 달리 없습니다. 느긋해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느긋한 채로 살 수 있는.쪽과 그렇지 못한 쪽이 정해져 있어서 문재가 되는 상황에서는, 본인이 팔자가 좋다는 걸 드러내지 않는게 예의입니다.
_ 이민경,『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syo 2017-11-09 공감 (34)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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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정체를 알수 없는 책, 차라리 이영희 선생님의 "대화"를 읽는게...

ksigene 2010-10-29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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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를 통해 본 대한민국
'리영희'라는 이름은 이제는 보통명사가 된 느낌이다. 물론 나는 그를 책에서 표현하듯 '사상의 은사'로 모신 그런 70년대 세대는 아니다. 그렇다고 그를 수정주의자라 여기며 극복해야할 대상으로 여긴 80년대 세대도 아니다. 오히려 '리영희'라는 이름을 듣고도 "이게 뭥미?"하고 뜨악하게 쳐다보는 지금의 보통 세대들과 거의 다르지 않은 90년대 세대다.
'리영희'라는 이름은 많이 들어왔지만, 정작 그의 저서를 접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놀고 술마시느라 바빴으니 당연하지). 96년 어느날 동아리방에 너덜너덜해진 책 한 권이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 책의 제목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제목의 책이었다. 그 책 제목의 계시와도 같은 강렬함에 이끌려 난생 처음으로 책 도둑질을 했다(도둑질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이 책을 빌리고 반납하지 않은지 14년이 다 되어가니 훔친거나 다름없다. 깊이 반성한다...). 국제 정세와 한국 정세를 판단한 그 책은 생각보다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으나, 대결의 구도가 아닌 조화의 구도를 그려냈다는 점에서, 그 어떤 문학보다도 감동적으로 다가온 경험이 있다.
그리고 한동안 잊고 살았다. 선생이 중풍에 쓰려졌다는 소식을 접했을때도, "아, 어쩌나"라는 생각뿐이었고, 구술 자서전 『대화』가 나왔을때도 "아!"라는 감탄뿐이었지, 그의 저작을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세상은 어차피 잘만 돌아가니까.
『리영희 프리즘』. 이 책을 읽고나서야 깨달았다. 그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이었는가를. 이 책에 있는 글들은 '리영희'라는 존재를 통해 지금의 대한민국과 지금의 우리들을 바라본다. 어떤 것은 놀랄만한 경탄을 이끄는 글들도 있고, 또 어떤 것은 참신한 시선이라며 무릎을 치게 하는 글들도 있지만, 어떤 것은 "이건 뭥미?"하는 핀트를 벗어난 글도 있다.
열 명의 저자들이 얘기하는 담론들- 생각하기, 책 읽기, 전쟁, 기독교, 영어, 지식인, 기자, 사회과학, 청년문화, 자유 -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진단할 수 있는 열쇳말이기도 하다. 이 담론들이 '리영희'라는 스펙트럼을 통해 이야기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의 시대'를 살아온 세대들에겐 당연한 중언부언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으나, '리영희'라는 인물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놀라움과 경의감을 느낄 것이다.
홍세화 씨가 서문에 밝혔듯이, 이 책은 '리영희'라는 우상 만들기에 관한 책이 아니다. 우상 파괴를 역설한 사람이 스스로 우상이 되는 것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이 책은 이제는 우리가 잊어버린, 그래서 '폐기처분해도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감히" 지닌 '리영희'라는 인물이, 사상이, 삶이 아직까지 우리 시대에 유효하다는 것을 역설한다. 일제시대와 해방과 분단과 전쟁과 독재와 민주화를 말 그대로 "온몸으로" 견디어낸 인물의 생각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다. 그는 늙었지만 낡지 않았다. 지금이나마 "선생님"을 알게되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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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ek 2010-03-08 공감(27)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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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프리즘
나는 리영희를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 이 책의 누구 말 마따나 리영희는 알지도 못하고 진중권과 홍세화를 통해 의식화된 21세기의 대학생이 바로 나이다. 그의 글은 쪽글 하나 읽어본 적 없으면서 그의 팔순을 기념하는 책부터 읽는다는 것이 웃기긴 하지만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숨겨진 의도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리영희를 모르는 이 시대의 누군가에게 그의 정신을 일러주는 것. 이렇게 그를 모르는 것이 당연한 현실이 영구해지기 전에 정신차리라고 볼때기를 때려주는 역할 말이다. 이 책을 읽고나서 보니 요즘 세대 지식인과 다른 리영희만의 특징은 그는 외로운 시대를 외롭게 살았다는 점이다. 할 말 하는 댓가로 키보드워리어들과 전투를 치뤄내고 무식한 대중들과 맞짱을 떠야 하는 요즘 지식인들과 달리 그는 무엇이 진실이고 정의인지 겨룰 상대도 없던 적막의 시대를 살았다. 요즘 지식인들이 '디-워는 돈내고 봐주는게 한국인의 도리'라고 우기는 개념없는 애들 상대해주기 피곤하긴 하지만 그래도 혼자였던 리영희보단 덜 외롭지 않을까. 먹고 살기는 커녕 목숨 부지하기도 힘들고 반공 이데올로기는 두꺼운 장막처럼 이 사회를 뒤덮고 있었다. 그 숨막히던 시대에 리영희는 배운자의 사명으로 끝없이 공부하고 탐구하는데 그 외로움은 외로움의 경지를 넘어 숭고하다는 감상마저 자아낸다.
책은 전쟁, 사회과학, 영어공부, 책 읽기, 청년세대 등 다양한 소주제를 리영희와 연결지어 다루고 있다. 한 저자가 한 주제를 맡아 글을 쓰고 있으니 그 다양함이 장점이요 글의 분위기와 농도가 제 각각인 것은 나름의 단점이라 말 할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무척 감탄하며 읽었던 글은 역시 김동춘 교수의 글이었고 한윤형씨의 글 또한 무척 좋았다. 김현진씨의 글은 이 책에서 유일하게 리영희선생님의 인터뷰가 담긴 글이니 좋을 수 밖에 없었다. 다 고르고 골라 선정된 필진일 테니 리영희를 알지도 못했던 일개 무식한 대학생인 내가 글을 품평한다는 것이 웃기긴 하다만 오길영 교수가 쓴 '영어라는 우상'이라는 글에 대해서는 뭥미?심정이 되었음을 리뷰에서 짚고 넘어가야겠다. 오길영 교수는 온 국민이 영어에 목을 매는 현 한국세태에 대해 '언어를 정보 전달과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격하시켜 혹은 생계를 버는 수단으로 격하시켜 창조적 사유와 분리하는 문제를 가져온다.'(113p)고 비판하며 '500단어 영어'를 이야기한다. 요즘 젊은애들이 외국나가고 영어학원에서 목매는 영어회화란게 결국 500단어 가지고 하는 대화란 말이다. 그 500단어 가지고 무슨 깊이 있는 대화가 되겠냐, 그런 발음 굴리기나 하니 미국대학가서 따라가지 못하고 중도탈락하는 것이다-라는 것이 그의 요지이다. 영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일 뿐인데 내가 그걸 무슨 학문처럼 파고들었단 자괴감에 슬펐던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이었다. 영어가 단순히 최강대국의 언어라는 위치를 넘어 전세계공용어로 자리잡은 현실에서 우리가 커뮤니케이션 하는 대상은 네이티브 스피커인 경우보다 영어를 제 2외국어로 삼고 있는 사람인 경우가 더 많다. 독일인을 만나도 케냐인을 만나도 중국인을 만나도 영어로 대화하는 세상이다. 미국으로 석박사 따러가는게 아닌 이상 제일 중요한건 제2외국어로 소통하는 상황에서 기본 500단어로 어떻게 자신의 의사를 효율적이고 분명하게 드러내느냐가 영어회화의 핵심인데(고급단어써서 유식하게 보이고 싶은 욕망은 이해한다만 토플에 나오는 고급단어도 일상회화에선 거의 쓰이지 않는다)이걸 가지고서 문제라고 하니 나로선 전혀 공감하지 못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500단어 회화로는 비판적 사고력의 부족을 커버할 수 없고 그래서 발음만 현란한 한국애들이 안되는 거라 이야기 하는데 그렇게 애초에 알맹이가 없는 애는 500단어 회화가 아니가 22000단어 회화로도 커버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는 또 지젝의 강연을 들었던 예를 들며, '그의 발음은 알아듣기 힘들었고 표현도 어색했지만 그의 당당했던 태도는 좌중을 압도했다' 말하는데 그건 지젝이니까 그런거고 남들에게 내 이야기를 쏙쏙 이해되게 갖다 바쳐야 하는 일반 한국인들로서는 발음도 무척 중요한 부분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나 비지니스 영역에서 유려한 말솜씨의 중요성을 무엇에 빗댈수 있으랴? 리영희는 마지막에 가서야 이 영어교육론과 연결된다.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는 왜 배우는가? 어떻게 영어를 배우고 누구를 위하여 영어를 쓰는가? 리영희에게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는 진실을 추구하려는 지식인으로서 글을 쓰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다. 다양한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세계를 조망하는 창을 더 많이 확보한다는 뜻이다. 리영희가 누구보다 날카롭게 당대의 문제를 파악하고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를 향해 열린 외국어의 창을 많이 확보했고 그 창을 통해 무엇을 봐야 할지를 명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124p) 말은 참 근사하다만 초반부에 영어를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격하시킨다 분개하더니 뒤에 와선 리영희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잘 사용했다 칭송하니 좀 뭥미?싶었다. 결국 어떤 목적은 숭고하고 어떤 목적은 천박하다는 것인가. 물론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는 알겠다. 고전을 원서로 읽어라, 더 많은 단어를 배우고(개념을 배우고) 사고의 지평을 넓혀라 그런 이야기겠지.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에 나쁜 뜻이 있었으리라곤 생각치 않는다. 그런데 요즘 현실에선 에덴의 동쪽을 원서로 읽는 것은 사치인 사람들이 많다. 비지니스 영어회화 100개 외워서 면세점 취업해야 하는 아가씨들이 가장 좋은 예일 것이다. 그런 삶의 문제.현실의 문제가 결코 격하될 수 없는 부분이란 것이 나의 생각이기에 영어가 수단으로 사용될 때에도 급이 있다는 식의 오길영 교수의 글은 불편했다. 영어로 인한 사대주의, 식민주의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영어가 필요한 사람만 배우면 된다'고 말한다. 현재 한국의 영어 열풍이 정상의 범주를 넘어서 과도한 사회적 수준의 낭비를 가져오고 있는 것에 나 역시 분명히 동감하는 바이다. 하지만 '배울 사람만 배우면 된다'는 논리는 무척 위험하다고 본다. 에덴의 동쪽을 원서로 읽을 시간적 여유가 되며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교수. 기자 등등)만 영어를 배우겠다는 소리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시대에 영어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위키피디아 사전 한번 들춰보려고 해도 영어는 필요하다. 그래. 내가 불편했던건 이런 이야기들이다. 리영희 선생이 영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전혀 아는바가 없다. 이 책은 리영희 선생이 쓴 책이 아니니까.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오교수의 인용에 리영희 선생은 전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리영희 선생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생각을 강하게 펼친것 아닌지 하는 찝찝함이 남았다.
이 기나긴 불평글을 다 읽고 내려오신 분이라면 분명히 아시겠지만 이 책은 마지막 챕터의 인터뷰 약간을 제외하고는 리영희의 목소리나 글이 직접적으로 담겨있지 않다. 그에게 사상적으로 은혜를 입었다는 이들이 그를 떠올리며 쓴 글이 묶여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 같이 그와의 시대적 갭이 무척 큰 대학생이나 젊은 사람은 그를 본격적으로 읽기 이전에 우리 이전 세대에 그가 가졌던 의미가 무엇인가 잠시 배우고 건너갈 수 있는 징검다리가 되어줄 수 있는 책이다. 간접적으로나마 리영희의 생애나 경력이 토막토막 언급되기에 그에 대한 기본지식도 제공해준다. 나는 이제 리영희의 진짜 글을 읽어보려고 한다. 마지막 챕터의 인터뷰가 주는 감동이 너무 커서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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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10-03-16 공감(12)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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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망 없는 시절의 목발,리영희
리영희,라는 이름을 앞에 두고, 이 책을 읽으며 떠올렸던 상념들을 무슨 말로 옮겨야 할지 막막하다. 어차피 이 책에 글을 올린 필자들처럼 리영희,라는 프리즘으로 현실 사회를 진단할 능력이 없음을 제 깜냥에도 알고 있지만, 그래도 고개 숙여 큰 절이라도 한 번 하고 싶었고, 선생님이 살았던 시절보다 어쩌면 더 가망 없어진 시절을 어찌 살아내야 하는지 무슨 나침반 하나라도 거져 얻고 싶었다. 끈 떨어진 마음이 갈 곳 몰라 떠돌고 있다고 자백하는 꼴이니, 알고는 있었지만, 사람 덜 된 꼴을 이렇게도 확인하는 요즘이다.
90년대 초반, 내가 대학이라는 곳에 발을 들여 놓고, 사회과학연구소라는 모호한(?) 성격의 동아리를 기웃거리며, 그곳에 있던 쌘(지금 보면 무섭지도, 선동적이지도 않지만 그땐 그렇게 보였다) 책들을 읽기 시작할 무렵 선배로부터 건네받은 책이 [우상과 이성]이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선배는 나를 잘 못 골랐다. 리영희 선생의 [우상과 이성]을 읽은 후, 되려 쌘 책들과 멀어졌고, 선배들의 주입식 교육을 의심했고, 자연스럽게 주변인으로 겉돌기 시작했다.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생각의 스승'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훌륭한 '정보'나 '견해'를 들려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생각하게' 했기 때문이다."라고 고병권은 이 책에 적고 있다.
정녕 그러했다! 절대의 이름으로 맹목적으로 외우고, 익히던 시절에 마침표를 찍게 한 사람, 내가 안다고 믿었던 신, 인간, 사회구조, 주의, 냉전, 자본 그리고 나 자신마저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게 한 사람, 그가 리영희,였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 IMF라는 재갈이 물려, 무한 경쟁이라는 시절을 벼락처럼 맞아야 했고, 그에 따라 수적으로는 다수일지라도 구조적으로는 소수로 전락하는 사람들의 곁을 멤돌면서, 국가도 조직이라고 본다면, 조직의 명운이 흔들리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어떻게 개인들을 위축시키는지, 조직원으로서 더 잘 조련되는지를 맥없이 지켜봐야만 했다. 그리고, 이 특별한 조련에 동원된 언론, 지식인 사회, 정치인들의 모습 또한 꾸준히 봐야만 했다. 리영희 선생님이 전 삶을 걸고 완강하게 싸운 [우상]을 떼거지로 목도한 시절이었다. 또한, 사회가 지능적으로 잔인하다는 것도, 그에 대한 각 개인의 대비가 이렇게 허술했구나,라는 사실도 이처럼 일목요연하게 경험할 수 있다니 그저 놀라운 시절이었다. 물론, 그 이후 시장이라는, 신자유주의라는 우상이 자리를 잡고 가망 없는 시절이 노골적으로 시작되면서, 그 시절 내 놀라움은 시작에 불과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지만 말이다.
얼마 전, 보험설계사 한 분을 만났다. 요즘처럼 영업이 힘든 건, 일을 시작하고 10년이 넘었지만 처음이라고 했다. 해약은 많고, 가입은 적다고. 진심은 아니었지만, 경제 대통령 시절이고, 경제가 좋아진다고 하고, 토건 사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데, 어째서 현실 경제가 그리 얼어붙었을까요,라고 나는 물었다. 내 음험한 물음에 중산층이 점점 무너지니까요,가 그분의 대답이었다. 중산층이 무너지다뇨,라고 계속 말꼬리를 물고 싶었지만, 그분이 무슨 죄라고 내 비아냥을 참아내야 하는가 싶어 그만두었다.
여튼 우리 사회에서 무너지고 있는 것이 중산층뿐일까? 아니 중산층이라 정의되는 계급이 무너진다는 것이 경제적 의미에서만 해석될 수 있는 것일까? 구조적 소수자로 내몰리는 우리가 이 위기를 극복할 수는 있는 것일까? 현실에 대한 사유가 깊어질수록, 나는 엄혹한 시절을 살아낸 스승에게, 예의없는 태도로, 스승이 살았던 그 시절보다 더 가망 없는 시절을 살고 있다고 토로하고 싶었다. 최장집의 말을 빌려, 권위주의 시대처럼 명백한 부정의 때문에 정의가 쉽게 파악되는 시절도 아니고, 소수의 기득권 세력을 위한 질서도 그 외피를 바꿨을지언정 변하지 않은, 그러기에 무엇이 무엇인지, 그저 우르르 몰려 다니며 속고 속이는 시절이라고. 시장을 획득하기 위한 전쟁이 평화의 옷을 입고, 글로벌이라는 이름이 무한 경쟁을 재촉하고, 루저가 되지 않으려면 사교육에 올인해야 하고, 조직의 무탈을 위해서 부속품으로 전락하는 개인쯤은 어쩔 수 없는 희생이며, 투자와 저축보다 투기만이 이 땅에서 살아남는 길이라는 것이 상식이 되어버린 시절이라고. 이보다 가망 없는 시절이 또 있을까 싶다고.
생각없는 노예로 죽어가는 삶보다 고통스럽지만 깨어있는 삶을 그리고 잠든 사람들을 깨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던 선생을 통해 각성의 기쁨을 맛보았지만, 정작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거대한 체제, 자본, 시장이라는 [우상]앞에서 정녕 어찌해야 하는지, 쪽팔림이라도 면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여전히 두려움과 기갈로 우왕자왕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또 한편, 따져 묻지도 말라는[우상]의 엄포앞에서 작은 용기, 내 삶이 피해입지 않을 정도의 용기로 맞섰으니까, 내가 할 몫은 다한거 아니냐고, 그런데 현실은 갈수록 왜 이모양이냐고, 계속 불평만을 늘어놓는 나에게, 삶과 앎이 불일치한 너는 리영희,를 왜 읽었느냐고, 리영희,가 그저 지적 유희로 소비되었던 것이었냐고, 리영희,가 아니더라도 네가 읽은 책 속의 어떤 글 한 줄도 너의 삶을 바꾸지 못했다면 그 책들은 무엇하려 읽은 것이냐고, 이제는 선생이 다시 꾸짖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선생의 글이, 선생의 삶이 여전히 내 주위를 떠돌며 나를 부끄럽게 하고, 깨우치게 하는 한, 적어도 가망 없는 시절을 핑계삼아 어딘가에 숨는 일도 이제는 어려울 듯 싶다. 화끈거리는 마음은 쥐구멍 앞을 서성이지만 그도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선생님, 사랑을 목발 짚어 살아온 어느 시인처럼, 선생님을 목발 짚어 살아보려는 후학, 아니 후학이라고 혼자 우기는 이가 있습니다. 어떤 이유를 들어서도 반가우실리는 없겠지만, 그렇지만 말입니다, 선생님, 다독이고 독려해야 할 청춘이, 제가 아니더라도 아직 많습니다. 그러니 아직은, 그리고 앞으로도, 강건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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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0-03-15 공감(9)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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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은 반드시 온다! 사유하라!
70,80년대 한국의 청년들, 그리고 대중의 사상적 은사였던 이영희 선생을 왜 지금 다시 논의하여야만 하는가? 다시 말해 ‘의식화’로 대변되는 정신의 혁명, 대중의 깨어남이 요구되는 까닭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 당위의 질문에 대하여 이 저술은『전환시대의 논리』,『우상과 이성』으로 상징되는 잠자던 대중을 깨웠던, 즉‘깨어난 자들의 끊임없는 증식’을 통해,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던 독재의 암흑이란 철벽을 부수고 일궈냈던 민주화의 성취가 오늘에 다시금 어떠한 의미로 다가서는지를 세대와 분야를 아우르는 인물들의 담론으로 펼쳐내고 있다.
여기에는 인권이 유린되고, 자유는 억압되었으며, 밀실로 붙들려가 폭력에 시달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나가는 민주주의의 실현은 요원하기만 하였던 악독한 독재정권이 지배하던 시절, 역사의식도 없으며, 세계사적 흐름을 읽지 못하던 무지몽매한 지배계급의 폐쇄적 폭압의 시대에나 필요했지 오늘에 새삼스레 대중의 집단적 각성, ‘의식화’의 논리를 꺼내드는 것은‘꼰대’들의 구시대적 발상이라는 냉소도 있다. 더구나 온통 물화(物化)되어버린 사회, 당장 밥벌이라는 생존의 문제에 허덕이고 있는데 무슨‘자유’타령이냐, ‘자본주의에 편입’되기 위해 발버둥치기에도 모자란 형국이란 말이다. 라는 88만원 세대의 항변도 있다.
그러나 잠시라도 소위 자기 계발이란 것을 소홀히 하면 경쟁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높으니‘자본의 도구’가 되는 종속을 택하는 것이 옳다는 이러한 단순화된 양자택일의 논리는 왠지 설득력을 갖추기엔 미흡하지 않은가? 당장은 안전한 자신의 보위가 되는 듯 보이지만, 이는 결국 부정의와 불평등, 비인간화, 인간소외를 고착화시키고 자본의 노예로 길들이려는 지배계층에 굴종하는 삶을 완성하는 것 이상이 아닐 것이다. 오늘의 우리사회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라는 무한경쟁 시장의 논리, 즉 시장만능의 이데올로기는 경쟁의 원리, 약육강식의 원리, 탐욕의 원리만 작동되고, 이를 위해서는 인권, 자유, 민주주의는 기꺼이 희생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국가경쟁력 제고라는 미명하에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자유를 부인하던 군부독재 시절로 역진된 형국과 한 치의 차이도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무감각, 무의식을 자처하고, 지배자들에게만 가치판단을 맡길 때, 어느덧 회복할 수 없이 잘 길들여진 비인간화된 노예의 삶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불평등, 억압, 배제와 차별이 고착화된 사회, 작은 물질에 자신의 자유를 내어준 사람들이 기대할 수 있는 사회의 모습일 것이다.
‘완전한 사고 정지증’에 걸린 듯한 오늘의 사람들에게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집단적 각성, 의식화가 지닌 의미의 오늘에서의 재해석을 필두로, 신자유주의적 세속(反)윤리의 틀을 벗어나 경쟁의 바깥으로 탈주하는 것으로서의 책 읽기,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의 이해를 통한 전쟁의 파렴치한 속성들 - 권력과 민중 격차의 극대화, 제국주의의, 계급원칙의 적나라한 불평등... -에서부터 “사대주의에 기초한 허구적 주류의식과 무지몽매함”으로 한국전쟁의 참화와 분단국가의 서러움을 겪고서도 전쟁에서 완전히 벗어날 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오늘날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의 또다른 냉전체제의 병리현상을 지적하기도 하며, 정말 기형적인 한국 기독교의 본말이 전도된 제도 종교로서의 비판과, “예수를, 진리를 이기적 욕망충족의 수단으로 착각”하여 “욕망에 마음을 굽히고 돈에 허리를 굽히는 행위가 사실상 우상숭배라는 사실에는 아랑곳하지 않는”종교인에 대해 생각한다.
한편, 영어를 강조하는 상상력빈곤의 이 사회의 진정한 속셈인 “지배세력의 입장에서 볼 때 영어가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 할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이라는 통찰과, 창조적 사유의 자리가 없는 실용영어가 지니는 허위, 그리고 무엇보다 원어민 교육을 받아 혀 꼬부라진 그럴듯한 발음에도 정작 “비판적이고 포괄적인 사고력이 없는” 맹탕의 영어로 일그러진 한국인의 초상을 말한다. 그럴듯한 발음의 영어를 구사하지만 사유와 지식이 없는 무식한 영어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점이다.
특히, 지식인에 대한 사회적 책무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은 이 저술과 이영희 선생의‘배우게 하는 사람’이라는 스승의 개념과 연결되어, 학벌세상의 승자인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을 향해 매운 회초리를 든다. 삶과 앎이 불일치하는 한국 지식 사회의 고질병은 물론, 탈근대적 과제와, 여전히 매우 질 낮은 민주주의와 같은 근대적 과제까지 중첩된 한국사회에서의 합당한 지식인의 역할을 논의한다. “현학의 하늘에서 대중의 땅으로 내려와 그곳에서 지식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체득해야 한다는 권유”는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자각한 파리아(pariah,주변인)의 관점’그것으로서, 지식인의 계몽자로서의 기능을 강조한다.
극단적인 신자유주의와 시장지상주의를 밀어붙이는 이 정권은 점점 대중의 사회안전망을 축소하고 개인의 행복이나 복지가 모조리 개인의 책임이 되는 사회로 퇴행시키고 있다. 또한 교육은 “‘약자를 보호하자’가 아니라, 심지어‘강자가 어떻게 약자를 더 잘 먹을 수 있을까’를 가르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옛날 옛적부터 잘 먹고 잘산 놈들이 제 권리를 잠시 빼앗겼는데 도로 찾으려 일어나는, 반동이 일어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인 것은 역사의 경험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평등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보편적 복지가 높아지고 생산성도 높아질 수 있도록 가치관, 인간관, 세계관을 개량하는데 노력을 경주하여야 할 것이다. 눈앞의 풍요 속에 매몰되어 진정한 가치들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악덕한 제도, 정치, 사상에 굴종하지 않는다는 저항적 인간을 목표로 하는 자기의식의 전환을 이야기하는 이 저술은 그래서 지금에 다시 이영희를 말하고, 집단적 깨어남을 말하여야 하는 필연적 요구를 담고 있다. 오래전 대학신문사에서 독재정권의 말로를 지켜보고, 그리고 더욱 악질의 군사정권이 들어서는 폭력의 시대에 이영희의 저작들을 읽고, 민주화운동을 취재하며 학우들과 울분을 토해내던 그 시절을 떠올린다. 더 이상 이러한 집단 의식화를 얘기하는 세상이 아니기를 바랐건만 소비지상의 물화된 신자유주의라는 우상으로 바뀐 대상이 30년 전으로 사회를 역진시키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역사와 철학, 문학과 예술 등 다방면의‘특수 지식인’들이 바로 이러한 각성을 위해 대중을 향한 노력을 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변혁은 반드시 올 것이란 말을 되새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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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 2010-03-12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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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를 통해 교양을 읽다
시대가 어려울 때일수록 사람들은 진정한 이 시대의 양심을 원한다. 우리나라는 해방이후 군부독재 시대라는 암울한 시기를 거치면서 많은 양심들이 힘들고 모진 시기를 거쳐왔다. 그 중에서도 ‘리영희;라는 이름이 남긴 의미는 남다르다. 지금까지도 그의 이름 세 글자는 ’민주화‘ 라는 화두와 함께 우리에게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이 책은 2009년 12월 2일 리영희의 팔순을 기록하고 기념하기 위해서 기획된 것이다. 리영희가 이 시대에 던져준 의미와 영향력을 되새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리영희를 프리즘으로 삼아 우리 시대를 이해하고, 다른 삶과 다른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교양 목록을 제시한다.
리영희와 생각하기에서부터 책 읽기, 전쟁, 종교, 영어 공부, 지식인, 기자, 사회과학, 청년 세대 등에 이르기까지 리영희를 매개로 다양한 교양을 이야기한다. 각 주제는 지금 현실과도 직결되는 주제들이다. 간단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내용들이 아니다. 오랜 공부와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논의될 수 있는 묵직한 주제들이다. 리영희의 삶과 인생이 함께 녹아든 주제들은 리영희라는 인물 앞의 우리들이 더욱 작게만 느껴지게 만든다.
예전 세대에 비해 요즘 세대는 비주얼과 감각적인 면에 많이 노출되어 있다. 즉물적이고 즉흥적이라는 이야기도 있다(물론 절대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대중교통이나 거리에서 휴대전화, MP3, DMB에 익숙한 젊은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점점 생각하는 시간이 적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지은이들이 이야기하는 생각하기와 책 읽기, 영어공부, 청년세대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쯤 숙독해 볼 필요가 있는 이야기다.
이제는 하나의 거대한 집단으로 변해가고 있는 종교에 칼날을 들이대고, 지식인으로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지 지식인의 책무를 묻기도 한다. 이쯤되면 이 책이 단순히 리영희의 의미와 그 영향력을 읽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지금 현재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생각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로 모시는 70, 80년대 학번부터 2000년대 학번까지 세대를 뛰어넘는 다양한 이야기꾼들이 참여하고 있다. 세대를 넘나드는 이야기는 리영희에 대해 다양한 시선으로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세대를 넘어서서 리영희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리영희라는 인물이 가진 진실한 교양인으로서의 모습때문이 아닐까.
교양을 뜻하는 영어 'culture'의 원뜻은 '경작(耕作)'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풍부한 지식과 인격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경주되어야 한다. 천박한 지식과 대중들의 인기에 영합하는 아집이 판을 치는 세태가 되어서는 안된다. 급변하는 현실 사회와 정치 속에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교양인이 필요하다. 교양을 다시금 이야기해 보아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리영희를 더 읽어야 하고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서재 18호(인문/사회/역사/과학/예술/청소년 분야 도서 2만원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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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프랑스의 『르 몽드』가 “사상의 은사”라 불렀던 리영희. 민주주의를 꿈꾸고 고민하고 싸웠던 이 땅의 젊은 지성들에게 리영희는 뿌리이자 토대이고 출발점이었다. 이 책은 리영희를 프리즘으로 삼아 우리 시대를 이해하고, 다른 세상, 다른 삶을 위한 새로운 고민을 시작하고자 한다. 리영희의 의미와 영향력을 되새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리영희를 통해서, 리영희가 지녔던 교양의 힘을 매개로 새로운 교양 목록을 제시한다.
리영희의 팔순(2009년 12월 2일)을 축하하고 기념하기 위해서 기획된 책으로, 리영희를 사상의 스승으로 모시는 70,80년대 학번부터 리영희의 제자가 아니었다고 밝히는 90년대 학번, 20대 논객으로 주목받는 2000년대 학번까지 세대를 넘어선 다양한 필자군으로 구성되어, 리영희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읽을 수 있다.
목차
서문: 리영희를 다시 불러내는 이유 - 홍세화
리영희와 생각하기: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고병권
사상의 은사 / 조건반사의 토끼 / 계몽이란 무엇인가 / 의식화의 은사, 의식화의 원흉 / 민주주의, 그 영원한 의식화를 위하여
리영희와 책 읽기: 책 읽기와 청년, 그리고 자유 - 천정환
리영희라는 필독서 / 리영희의 책 읽기 / 리영희 읽기, 도는 읽지 않기 / 오늘날의 책 읽기. 청년. 자유
리영희와 전쟁: 전쟁의 세기 - 김동춘
전쟁이라는 최고의 현실 / 정치로서의 전쟁 /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 한반도의 냉전 체제 / 시장과 전쟁 / 반공,전쟁, 국가주의의 우상 / 제국의 전쟁, 그리고 평화
리영희와 종교: 무신론적인, 그러나 유신론적인 - 이찬수
기독교에 대한 거부 / 예수와 제도 종교의 갈등 / 한국 기독교인은 고대 유대교인 / 우상숭배 금지의 본뜻 / 우상숭배 금지에 대한 오해 / 유일신이라는 말 / 한국 기독교의 정치사회적 배경 / 무신론적인,그러나 유신론적인 / 종교의 안과 밖 /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 최고의 가르침
리영희와 영어 공부: 영어라는 우상 - 오길영
500단어의 유창한 영어 실력 / 영어 몰입 교육의 백일몽 / 영어 울렁증과 실용 영어 / 영어 공부의 본령 / 알맹이 없는 영어 강의 / 리영희의 영어 공부 / 영어를 왜 공부하는가
리영희와 지식인: 다시, 지식인의 책무를 묻다 - 이대근
야만의 시대와 지식인 / 근대적 지식인과 탈근대적 지식인 / 한국 지식인의 자화상 / 한국 사회의 특별 계급 / 다른 세상을 위한 지식인의 책무
리영희와 기자: 진짜 기자의 멸종 - 안수찬
프롤로그 / 소 잃고 외양간 고치다 / 사라진 낭만의 시대 / 기자들의 보험, 출입처 시스템 기자라는 이름의 부속품 / 낯익으면서도 낯선 언론 탄압 / 진실 보도 경쟁이 사라지다 / 기자 리영희의 교훈 / 다른 시대, 다른 기자의 꿈
리영희와 사회과학: 사회과학의 고민 - 은수미
리영희와 사회과학 / 사회과학은 비정규직을 어떻게 보는가 / 비정규직을 말하는 사회과학 / 사회과학의 딜레마 / 공공성에 대한 고민 / 사회과학에 대한 질문
리영희와 청년 세대: 냉소주의 시대의 우상과 이성 - 한윤형
'아버지 세대의 선생님'을 만나다 / 리영희와 청년 문화의 긴장 관계 / 대학생, 자유를 말하다 / 무엇이 우상이고 무엇이 이성인가 / 리영희와 청년 문화의 상실 / 전환이 불가능한 시대의 우상과 이성 / 분열증 시대에 돌아보는 리영희
리영희 인터뷰: 가혹하게 정직하고, 칼날처럼 순결하게 - 김현진
고옥의 일인자 / 레이디, 인텔리겐치아 / 그런 것이 역사다 / 혁명은 온다, 네가 형무소에 갈 때 거절하라! / 물을 건넌 개, 물에 빠진 개 / 피로 쓴다 / 생활은 간소히, 생각은 높게 / 리영희 수난곡, 리영희 스타일, 그리고 사상의 오빠
참고문헌
접기
책속에서
P. 16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 ‘생각의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훌륭한 ‘정보’나 ‘견해’를 들려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생각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스승이란 우리에게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존재, 우리를 각성케 하는 모든 존재에게 부여될 수 있는 이름이다.
- 고병권의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중에서 접기
P. 34 어떤 책들은 그냥 종이 뭉치이거나 문장의 집합체가 아니게 된다.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어떤 인간과 같다. 우리는 그 시절에 어떤 이들과 조우함으로써 우리 생을 만들고 또 바꿔 왔다. ‘그/책’은 젊은 날이 성마른 열정과 숭고한 영성을 상징한다. ‘그/책’은 한 시대를 표상하는 이름이며 존재다.
- 천정환의 「책 읽기와 청년, 그리고 자유」 중에서 접기
P. 66 전쟁은 처음부터 끝까지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 특정한 정치경제 상황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인간적.인문학적 현실임과 동시에 적나라한 정치적.사회적 현상이다. 따라서 전쟁은 언제나 동일한 방식으로 나타나지도 않고 또 그것을 겪은 군인들이나 민간인들에게 동일하게 체험되지도 않는다.
- 김동춘의 「전쟁의 세기」 중에서
P. 88 율법의 ‘문자’가 아닌 ‘정신’을 실현하고자 한 예수가 율법을 거스른다는 이유로 율법가들에 의해 희생되었는데, 예수를 따른다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다시 예수를 죽인 율법가의 편에 선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예수의 정신을 여전히 반대로 알아듣는다. 사람들을 문자와 제도 안에 가두어 두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며 강권한다.
- 이찬수의 「무신론적인, 그러나 유신론적인」중에서 접기
P. 109 당시 강연장을 가득 메운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원어민’들도 그의 발음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이 관심을 기울인 것은 지젝의 어색한 발음이 아니라 강연에서 그가 주장했던 독창적인 사유의 내용이었다. 원어민 발음과 거리가 먼 영어를 구사하는 지젝은 원어민을 능가하는 유려한 글쓰기 능력으로 자신의 저서를 대부분 영어로 쓴다. 그런 능력은 500단어의 유창한 영어 발음으로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오길영의 「영어라는 우상」 중에서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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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글
이 책은 고민하는 청춘들의 영원한 스승, 리영희를 다시 불러낸다. 리영희를 프리즘으로 삼아 우리 시대를 이해하고, 다른 세상, 다른 삶을 위한 새로운 고민을 시작하고자 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지부터(고병권), 책 읽기(천정환), 전쟁(김동춘), 종교(이찬수), 영어 공부(오길영), 지식인(이대근), 기자(안수찬), 청년 세대(한윤형)에 이르기까지 리영희를 매개로 우리 시대 교양의 기초를 다지고자 한다.
- 인문사회과학출판인협의회(인사회)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중앙일보
- 중앙일보(조인스닷컴) 2010년 2월 20일 북 브리핑
한겨레 신문
- 한겨레 신문 2010년 2월 19일 잠깐 독서
저자 및 역자소개
김현진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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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예술사와 연극원 서사창작과 전문사를 공부했다. 17세에 에세이집 《네 멋대로 해라》로 데뷔해 지금까지 칼럼, 에세이, 소설을 쓰고 있다. 《한겨레》와 《경향신문》에 에세이를 써왔으며, 《내가 죽고 싶다고 하자 삶이 농담을 시작했다》 《지지 마, 당신》 《네 멋대로 해라》 《그래도 언니는 간다》 《누구의 연인도 되지 마라》 《뜨겁게 안녕》 《육체탐구생활》 《동물애정생활》을 비롯한 에세이집과, 장편소설 《녹즙 배달원 강정민》 《말해봐 나한테 왜 그랬어》 《XX 같지만, 이건 사랑 이야기》, 소설집 《정아에 대해 말하자면》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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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우리는 예쁨 받으려고 태어난 게 아니다>,<네 멋대로 해라>,<녹즙 배달원 강정민> … 총 52종 (모두보기)
이찬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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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니시타니 케이지(西谷啓治)의 불교철학과 칼 라너(Karl Rahner)의 철학적 신학을 비교하며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남대학교 교수, (일본)WCRP평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코세이가쿠린 객원교수, 난잔대학 객원연구원, 성공회대학교 대우교수,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냈고, 한국문화신학회 회장으로 일했으며, 한국평화종교학회 부회장, 인권연대 운영위원 등으로 봉사하고 있다.
그동안 종교학, 죽음학, 평화학 등과 관련해 77권의 단행본(공저/역서 포함)과 88편의 논문을 출판했는데, 평화학과 관련한 책으로는 『평화와 평화들』, 『한국인의 평화사상1.2』(공편), 『평화의 여러가지 얼굴』(공편), 『아시아 평화공동체』(편저)를 비롯해, 『세계평화개념사』, 『아시아공동체와 평화』, 『평화의 신학』, 『세계의 분쟁』, 『평화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녹색평화란 무엇인가』, 『폭력이란 무엇인가』, 『재난과 평화』, 『탈사회주의 체제전환과 발트3국의 길』, 『사회주의 베트남의 역사와 정치』, 『양안에서 통일과 평화를 생각하다』, 『동아시아의 대동사상과 평화공동체』, 『근대 한국과 일본의 공공성 구상 1.2』, 『우리 시대 혐오를 읽다』 외 여러 권의 공저서와 번역서들이 있다.
국가보훈처 산하에 있으면서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에 소속된 보훈교육연구원장으로 취임한 이래 평화 및 복지국가의 형성에 기여하는 보훈 연구와 교육이 될 수 있도록 뒷받침하고 있다. 접기
최근작 : <보훈, 평화로의 길>,<독립.호국.민주의 미래와 보훈의 가치>,<보훈학 개론> … 총 58종 (모두보기)
고병권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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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에서 화학을 공부했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했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사회사상과 사회운동에 늘 관심을 기울이며 살아왔다. 오랫동안 연구공동체 ‘수유너머’에서 생활했고 지금은 노들장애학궁리소 회원이다. 그동안 『화폐, 마법의 사중주』, 『언더그라운드 니체』, 『다이너마이트 니체』, 『생각한다는 것』,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그는 마르크스의 『자본』을 1991년에 처음 우리말 번역본으로 읽었다. 그 시절 한국은 민주주의 열망이 불붙던 시기다. 어느덧 30여 년이 지나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러나 아직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으며, ‘그 달라지지 않은 것’을 사유하고자 다시 『자본』을 읽어야 하는 시대라 믿는다. 접기
최근작 : <북클럽 자본 세트 - 전12권>,<임금에 관한 온갖 헛소리>,<[큰글자책]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 … 총 70종 (모두보기)
김동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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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자. 서울대학교 사범대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서 「한국 노동자의 사회적 고립」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역사비평』 편집위원, 『경제와 사회』 편집위원장,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참여사회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으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했다. 1997년부터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현재 같은 대학 NGO 대학원장 및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주의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 『1960년대의 사회운동』 『한국 사회 노동자 연구』 『한국 사회과학의 새로운 모색』 『분단과 한국 사회』 『전쟁과 사회』 『독립된 지성은 존재하는가』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 『1997년 이후 한국 사회의 성찰』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전쟁정치』 『대한민국 잔혹사』 『대한민국은 왜?』 『사회학자 시대에 응답하다』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반공자유주의>,<대한민국은 왜?>,<역동적 한국인의 탄생> … 총 67종 (모두보기)
이대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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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대학교 국방정책대학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고려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경향신문 편집국장 및 논설고문,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 자문위원, 북한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북한군사 문제를 넘어 한반도 평화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 저서로는 『북한 군부는 왜 쿠데타를 하지 않나』, 『김정은 시대 조선로동당』(공저), 『북한군사문제의 재조명』(공저), 『북한의 당·국가기구·군대』(공저) 등이 있다.
최근작 : <12개 렌즈로 보는 남북관계>,<당신은 정의로운 사람입니다>,<나는 천천히 울기 시작했다> … 총 9종 (모두보기)
천정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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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부산 출생. 한국 현대 문화사와 문학사 연구자. 『문화론적 연구’의 현실 인식과 전망』(2007),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2013) 『근대의 책 읽기』(2003) 등을 발표하여 한국 현대문학사 연구의 폭을 넓히고, 『대중지성의 시대』(2008), 『조선의 사나이거든 풋뽈을 차라―스포츠민족주의와 식민지 근대』(2010), 『자살론―고통과 해석 사이에서』(2013), 『시대의 말 욕망의 문장―123편 잡지 창간사로 읽는 한국 현대 문화사』(2014) 등을 썼다. 『혁명과 웃음―김승옥의 시사만화《파고다영감》을 통해 본 4·19 혁명의 가을』(공저, 2005), 『1960년을 묻다―박정희 시대의 문화정치와 지성』(공저, 2012) 등을 통해서도 역사적 문화연구, 또는 문화정치사 연구의 지평을 개척해왔다. 『역사비평』, 『문화/과학』 편집위원. 『경향신문』, 『한겨레』 등에 칼럼이나 기획 연재물을 실어왔고, 인문학협동조합, 민교협, 지식공유연대 등을 통해 학술 운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접기
최근작 : <숭배 애도 적대>,<문화과학 108호 - 2021.겨울>,<현대사회와 범죄학> … 총 34종 (모두보기)
오길영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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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와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영문학과 비교문학을 공부했다.
1991년 계간 『한길문학』에 임철우·양귀자론을 발표하며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충남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산문집 『아름다운 단단함』(2019), 평론집 『힘의 포획』(2015), 연구서 『포스트미메시스 문학이론』(2018), 『세계문학공간의 조이스와 한국문학』(2013), 『이론과 이론기계』(2008) 등이 있다.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ogyjoyce
최근작 : <아름다움의 지성>,<아름다운 단단함>,<소설을 생각한다> … 총 15종 (모두보기)
SNS : //facebook.com/ogyjoyce
안수찬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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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석사 공부까지 마쳤으나 언론학으로 전공을 바꿔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1997년 11월부터 시작한 기자 노릇에 의심이 많아져 언론학을 제대로 파 보자고 결심했다. <한겨레> 탐사보도팀장, 사건팀장 등을 거쳐 <한겨레21> 편집장을 맡고 있다. <뉴스가 지겨운 기자>(삼인), <기자, 그 매력적인 이름을 갖다>(인물과사상사), <4천원 인생>(한겨레출판) 등을 썼다.
최근작 : <대통령의 7시간 추적자들>,<저널리즘의 지형>,<인문학이 인권에 답하다> … 총 15종 (모두보기)
한윤형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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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 비평 전문지 《미디어스》에서 2012년부터 3년간 정치부 기자로 일했다. 혼자 쓴 책으로《 뉴라이트 사용후기》와《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미디어 시민의 탄생》 등이 있고, 함께 쓴 책으로《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와《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가 있다. 그 외 몇 권의 책에도 한 꼭지씩 보탰다. 현재는 새로운소통연구소의 조사분석실장이며, 유튜브 채널 헬마우스에서는 ‘한가놈’이란 예명을 쓰며, 주로 자료조사에 힘을 보태고 있다.
최근작 : <촉 2022-2023>,<추월의 시대>,<지방선거 가이드북> … 총 21종 (모두보기)
은수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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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한 뒤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정책국장으로 일하다 체포되어 6년 가까이 수감생활을 했다. 1997년 출소 뒤, 대학에 복학해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노동연구원,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노동정책 자문위원, 청년유니온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했고, 민주통합당 비례대표로 19대 국회위원을 지냈다. 2016년 테러방지법을 반대하는 필리버스터를 10시간 18분 동안 했고, 같은 해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했다. 여러 학교, 시민단체, 노동조합 등에서 ‘노동, 청년, 정치’를 주제로 한 강의와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 『IMF 위기』 『날아라 노동』 『은수미의 희망 마중』 『어떤 복지국가인가』(공저) 『여성의 일, 새로고침』(공저)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만국의 알바여, 정치하라>,<정치의 시대 세트 - 전4권>,<은수미의 희망 마중> … 총 23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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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다음 달에는>,<나는, 휴먼>,<프레드가 옷을 입어요>등 총 1,181종
대표분야 : 전쟁/평화 이야기 1위 (브랜드 지수 13,925점), 문화/예술/인물 1위 (브랜드 지수 351,841점), 청소년 인문/사회 2위 (브랜드 지수 222,185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이 책은 리영희에게 바치는 책이 아니다. 리영희에게 바치는 책은 그 누구보다도 리영희가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그것을 모른다면 그를 ‘사상의 스승’으로 부를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글을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인데, 어떻게 헌사 따위가 바쳐지는 자리에 스스로 서겠는가. - 홍세화의 「서문 : 리영희를 다시 불러내는 이유」 중에서
1. 사상의 은사, 리영희를 다시 불러낸다
프랑스의 『르 몽드』가 “사상의 은사”라 불렀던 리영희의 책 『전환시대의 논리』는 “사회과학 서적으로는 처음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저작”이다. 시대를 고민하는 청춘들에게 리영희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고 “머릿속에서 지진을 일으키”고 “몽롱한 의식에 끼얹은 찬물 한 바가지”였다. 리영희로 말미암아 눈을 뜨고 세계를 인식하고, 이전과 다른 존재로서 생을 만들고 바꾸어간 청년들은 시대의 한 가운데로 투신했다. 민주주의를 꿈꾸고 고민하고 싸웠던 이 땅의 젊은 지성들에게 리영희는 뿌리이자 토대이고 출발점이었다. 그렇게 한국 현대사의 비판적 지성의 상징, 리영희는 우리 시대 민주주의를 향한 여정의 출발점이다. 이 책은 고민하는 청춘들의 영원한 스승, 리영희를 다시 불러낸다.
2. 리영희라는 이름의 교양, 우리 시대 교양의 기초를 다진다
리영희는 깨어 있고자 한 청춘들이 읽어야 할 필독서였고, 알아야 할 교양의 첫 번째 목록이었다. 여기서 교양이란 속류화된 호사 취미나 잡다한 지식을 지시하지 않는다. 일찍이 플라톤은 교양이란 “영혼의 건강과 같은 것, 혹은 아름다움이나 반듯하게 배우고 알아야 할 최대의 덕”을 의미하고, 교양을 구현해낸 이상적인 인간상인 철학자는 “폴리스에 대한 사랑, 즉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봉사할 줄 아는 덕을 지향해야 한다”고 했다.(이광주, 『교양의 탄생』(한길사) 중에서) 또 재일 디아스포라 학자 서경식은 신자유주의 전체주의가 지배하고 전쟁이 일어나는 시대에 교양의 자리를 묻는다.(서경식 외, 『교양, 모든 것의 시작』(노마드) 중에서)
무지몽매한 우상이 지배하던 시대에 이성의 힘으로 맞서 싸운 리영희는 교양의 의미를 올곧게 보여주었다. 리영희라는 이름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일깨우는 고민의 바탕이었고, 수많은 청춘들이 스스로 서게 하는 교양의 힘이었다. 7,80년대 민주주의를 향한 거대한 물결은 바로 ‘세미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자발적인 ‘교양’ 공부의 토대 위에 있었다. 이 책은 리영희를 프리즘으로 삼아 우리 시대를 이해하고, 다른 세상, 다른 삶을 위한 새로운 고민을 시작하고자 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지부터(고병권), 책 읽기(천정환), 전쟁(김동춘), 종교(이찬수), 영어 공부(오길영), 지식인(이대근), 기자(안수찬), 청년 세대(한윤형)에 이르기까지 리영희를 매개로 우리 시대 교양의 기초를 다지고자 한다.
3. 리영희를 불러내는 또 하나의 방법
이 책은 리영희의 팔순(2009년 12월 2일)을 축하하고 기념하기 위해서 기획되었다. 그러나 어떤 금기도 허용치 않고 우상에 맞섰던 리영희에게 헌사는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이 책은 일방적인 존경과 흠모를 보내는 보통의 헌정 도서와 다르게 구성되었다. 리영희의 의미와 영향력을 되새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리영희를 통해서, 리영희가 지녔던 교양의 힘을 매개로 새로운 교양 목록을 제시한다. 리영희는 새로운 교양을 촉발하는 원재료이고, 다양한 교양의 목록을 묶어주는 고리의 역할을 한다. 또 서문을 쓴 홍세화를 필두로, 리영희를 사상의 스승으로 모시는 70,80년대 학번부터 리영희의 제자가 아니었다고 밝히는 90년대 학번, 20대 논객으로 주목받는 2000년대 학번까지 세대를 넘어선 다양한 필자군으로 구성되어, 리영희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읽을 수 있다.
[주요 내용]
리영희와 생각하기 :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_ 고병권
리영희가 ‘사상의 은사’라 불리는 점에 착안하여, 생각을 낳아준 스승이란 무엇인가,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탐색한다.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 ‘생각의 스승’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그가 정보나 견해, 지식을 전달한 사람이 아니라, 생각하기 즉 각성을 전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스승이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에게 부여되는 이름이다. 리영희는 생각 없음의 상태/체제에 도전하여 생각할 것을 일깨웠고, 생각한다는 것은 기존의 굳은 관념, 견해에 의한 조건반사의 반응을 넘어서는 것이다. 바로 생각의 전제, 토대조차 무너뜨리고 생각하는 것이고, 그것이 계몽이고 각성이고 다른 사람이 되는 주체 변형의 의식화다.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 ‘생각의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훌륭한 ‘정보’나 ‘견해’를 들려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생각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스승이란 우리에게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존재, 우리를 각성케 하는 모든 존재에게 부여될 수 있는 이름이다. _ 16쪽, 고병권의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중에서
리영희와 책 읽기 : 책 읽기와 청년, 그리고 자유 _ 천정환
독서의 문화사라는 관점에서 책 읽기를 통해 형성되고 발현되는 정신사의 풍경을 서술한다. 리영희의 독서 이력과 리영희를 읽고 또 읽지 않던 70,80년대 책 읽기의 문화사를 살펴보며, 책 읽기와 자유의 관계에 질문을 던진다. 식민지 시대 일본어로 된 문학 책으로 시작하여, 국제관계 저널리스트이자 진보적 지식인으로서 사회과학 서적의 탐독으로 이어진 리영희의 책 읽기는 당대의 문화-정치의 맥락과 맞물려 한국 지성사의 서술로 이어진다. 수많은 청년들이 책 읽기를 통해 존재를 건 모험에 나섰던 70,80년대 리영희가 ‘필독서’에서 ‘선택 교양’으로 전환되는 맥락 속에서 책 읽기와 자유, 책 읽기와 정치의 관계를 짚어본다.
어떤 책들은 그냥 종이 뭉치이거나 문장의 집합체가 아니게 된다.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어떤 인간과 같다. 우리는 그 시절에 어떤 이들과 조우함으로써 우리 생을 만들고 또 바꿔 왔다. ‘그/책’은 젊은 날이 성마른 열정과 숭고한 영성을 상징한다. ‘그/책’은 한 시대를 표상하는 이름이며 존재다. _ 34쪽, 천정환의 「책 읽기와 청년, 그리고 자유」 중에서
리영희와 전쟁 : 전쟁의 세기_ 김동춘
리영희라는 지식인이 전쟁이라는 최고의 현실을 어떻게 마주했는지를 살펴보며, 20세기 한반도와 주변에서 벌어진 전쟁의 역사와 경험을 되짚는다. 전쟁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관계들도 파괴하고 새로운 관계들을 만들어낸다. 전쟁은 모든 것을 뒤집어버리는 일종의 혁명이다. ‘제국’의 프로젝트인 전쟁은 국제 질서를 뒤흔들 뿐 아니라 국내의 정치 질서도 지배하는 정치사회적 사건이자 현상이다. 『전쟁과 사회』의 저자이자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문제를 천착한 김동춘 교수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냉전 체제의 속살을 파헤친다.
전쟁은 처음부터 끝까지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 특정한 정치경제 상황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인간적 ? 인문학적 현실임과 동시에 적나라한 정치적 ? 사회적 현상이다. 따라서 전쟁은 언제나 동일한 방식으로 나타나지도 않고 또 그것을 겪은 군인들이나 민간인들에게 동일하게 체험되지도 않는다. _ 66쪽, 김동춘의 「전쟁의 세기」 중에서
리영희와 종교 : 무신론적인, 그러나 유신론적인 _ 이찬수
일관된 종교 비판자였지만 종교의 가치를 좇았던 리영희를 통해, 제도와 교리에 갇힌 기성 종교를 비판하고 진정한 종교 정신을 되새긴다. 종교 간 갈등은 교리의 차이가 아니라 교리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예수는 유대교 율법의 ‘정신’을 살리려 했지만, 율법의 ‘문자’ 자체에 매달린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기독교의 우상숭배 금지, 유일신 사상도 이와 같이 교리를 문자 자체로 해석하여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 제도와 교리 속에 담겨진 정신은 뒷전으로 밀리고, 정신이 형상화된 제도와 교리에 치우친 기성 종교를 비판하며, 보편적인 종교 정신을 강조한다.
율법의 ‘문자’가 아닌 ‘정신’을 실현하고자 한 예수가 율법을 거스른다는 이유로 율법가들에 의해 희생되었는데, 예수를 따른다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다시 예수를 죽인 율법가의 편에 선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예수의 정신을 여전히 반대로 알아듣는다. 사람들을 문자와 제도 안에 가두어 두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며 강권한다. _ 88쪽, 이찬수의 「무신론적인, 그러나 유신론적인」
리영희와 영어 공부 : 영어라는 우상 _ 오길영
영어 실력이 사회적 성공의 보증수표로 여겨지는 시대, 영어를 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따져보고, 일찍이 외국어 공부에 매진한 리영희의 사례를 통해 올바른 영어 공부와 방법에 대해 논한다. 실용주의와 시장주의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영어 실력은 실용성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 실용의 수준이 텍스트 독해력과 사고의 조직력 등을 배제한 ‘관광 영어’ 수준으로 이해되고, 영어 공부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필요한지에 대한 고민 없이 모든 사람에게 강요된다. 서투른 발음에도 영어 원어민들을 압도하는 지젝과 영어 공부하는 목적과 방법을 명확히 하고 영어를 익힌 리영희를 통해 영어 공부의 본령을 제시한다.
당시 강연장을 가득 메운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원어민’들도 그의 발음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이 관심을 기울인 것은 지젝의 어색한 발음이 아니라 강연에서 그가 주장했던 독창적인 사유의 내용이었다. 원어민 발음과 거리가 먼 영어를 구사하는 지젝은 원어민을 능가하는 유려한 글쓰기 능력으로 자신의 저서를 대부분 영어로 쓴다. 그런 능력은 500단어의 유창한 영어 발음으로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_ 109쪽, 오길영의 「영어라는 우상」 중에서
리영희와 지식인 : 다시, 지식인의 책무를 묻다 _ 이대근
저항적 지식인의 전형인 리영희의 퇴장을 곱씹으며, 민주화 이후 변화된 지식인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 따져본다. 민주화가 진행되고 분노와 저항의 시대를 헤쳐온 지식인 리영희가 물러났지만, 한국사회는 인간다운 사회와 가까워지지 못했다. 신자유주의가 지배하고 시장에 휘둘리는 정글 사회로 변모하고, 불평등과 억압은 세련되게 변형되고 교묘해졌다. 탈근대적 현상들로 탈근대 지식인론이 논의되지만, 근대적 과제와 탈근대적 과제가 중첩되어 있는 한국사회에서 탈근대적 지식인론이 근대적 지식인론을 대체할 수는 없다. 삶의 질이 악화되고 더욱 뿌리 깊은 억압과 불평등이 만연한 이 시대에 지식인의 책무에 대해 다시 묻는다.
리영희는 사르트르를 인용해 자유의 의미를 절절하게 전했다. 사르트르는 독일 점령하에 있을 때처럼 자유로웠던 때가 없었다고 한다. 일체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매일 정면으로 모욕을 당할 때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자유라고 했다. 막다른 골목에 쫓겨 있었던 까닭에 거동 하나하나가 앙가주망의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고 했다. _ 144쪽, 이대근의 「다시, 지식인의 책무를 묻다」 중에서
리영희와 기자 : 진짜 기자의 멸종 _ 안수찬
IMF 이후 시장에 노출되어 생존 경쟁에 돌입한 언론사의 현실 아래서, 기자들은 조직의 부속품이 되어갔다. 단독자 기자는 사라지고 매체마다 정형화된 기사가 넘쳐났다. 『시사저널』 사태는 시장 압력에 굴복한 대표적 사례다. 또 기업 이윤이라는 논리로 진행되는 언론 탄압은 민주 정부 시절의 언-권 유착에서 영감을 얻었고, 역시 시장주의와 관련된다. 기자 사회의 낭만에 빠지지 않고 기자라는 명함에도 연연하지 않으며 권력과 긴장했던 진짜 기자 리영희를 되새기며, 기자의 존재 조건과 기자 정신을 되새기고자 한다.
기가 막힌 노릇이지만, 이는 국소 마취의 수법이다. 시장주의의 모르핀으로 언론의 발을 마비시켰다. 방송 시장이 개방된다는데, 방송이 신문 광고를 다 빼앗아 간다는데, 이 언론사가 망하면 너는 어디 가서 잘난 기자 노릇을 할 것이냐고 겁박하는 방식이다. 기자들이 겁먹었다는 증거는 허다하다. _ 157~158쪽, 안수찬의 「진짜 기자의 멸종」 중에서
리영희와 사회과학 : 사회과학의 고민 _ 은수미
비정규직 문제를 천착하는 사회과학 연구자로서 사회과학의 입장과 역할, 딜레마 등에 대한 고민을 풀어낸다. 사회과학이 비정규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를 사회과학의 고전적 주제인 개인과 사회의 관계의 맥락에서 뒤르켐과 리프킨, 스티글리츠를 참조한다. 사회과학이 비정규직을 말하고 대변하는 것의 의미를 아렌트의 공론장에서 자리 확보의 논의와 만하임의 지식사회학 논의를 연관 지어 고민한다. 또 사회과학이 연구대상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 공공성이란 무엇인지, 사회과학이란 무엇인지 등에 대한 고민을 깊이 있고 진솔하게 풀어낸다.
학문의 역사는 가설의 역사일지도 모른다. 연구자는 아직 입증되지 않은 자신의 논리, 예를 들어 “파업권 보장 없이 민주주의는 없다”는 가설을 제시하고 그것을 입증하려 한다. 학문은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가설을 통해 재구성된다. 하지만 가설을 주장하고 입증하는 것이 학문 외부의 강제에 의해 불가능하여 가설이 가설로만 남는다면 그것은 학문 세계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로 바뀐다. _ 184~185쪽, 은수미의 「사회과학의 고민」 중에서
리영희와 청년 세대 : 냉소주의 시대의 우상과 이성 _ 한윤형
1980년대생의 젊은 필자가 ‘아버지 세대의 선생님’ 리영희를 매개로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청년 문화의 양태, 속내를 정리한다. 70년대 통기타 문화와 리영희의 긴장 관계부터 민중문화가 주도하던 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이론이 유행하던 90년대를 개괄하면서, 우상과 이성의 분별이 가능한지를 질문한다. 또 청년 문화가 상실되고 상품화된 대중문화로 대체되어 버린 지금 청년들의 삶의 조건과 정서, 욕망을 설명한다. 노동자마저 자본가의 사유를 내면화해, 우리 삶 자체가 우상화되어버린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스스로의 삶 자체에 대한 치열한 성찰을 요구한다.
예비 노동자인 대학생들은 자신을 착취해주기를 간절하게 바랄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대학생들이 바라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편입’이다. 자본주의로부터의 자유, 노동할 의무로부터의 자유를 꿈꾸지 못하고 자본주의 사회로 편입하기를, 정규직으로 편입하기를, 그러기 위해 좋은 대학으로 편입하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 하지만 하루하루 편입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의 삶 속에선, 우상은 바로 우리의 삶 그 자체다. _ 204쪽, 한윤형의 「냉소주의 시대의 우상과 이성」 중에서
리영희 인터뷰 : 가혹하게 정직하고, 칼날처럼 순결하게 _ 김현진
일찍이 고등학교를 박차고 나온 ‘불량소녀’로 알려졌고, 20대 필자로 다양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는 김현진이 거인 리영희를 만났다. 패거리를 만들지 않고 올곧게 독립적으로 진실만을 추구했던 리영희의 삶을 ‘리영희 스타일’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하고 지식인과 변혁, 혁명, 역사, 자본주의, 자유 등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리영희는 엄격하고 단단하고 날카로운 솜씨로 질문에 답하는 한편, 어린 손녀의 물음에 응해주는 따뜻하고 지혜로운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인다.
그래도 날렵한 몸으로 채찍을 휘두르며 ‘포티 파이브’ 권총으로 백발백중의 사격 솜씨를 자랑하는 탐험복 차림의 고고학자 리영희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캐릭터로 본다면, 절대 인디아나 존스는 아니다. 아무리 적이라 해도 타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함정에 빠뜨리거나 자동차에서 떨어뜨리거나 하는 건 도저히 ‘리영희 스타일’이 아니다. _ 232~233쪽, 김현진의 「가혹하게 정직하고, 칼날처럼 순결하게」 중에서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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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얼 먹어도 물을 싸는, 뭐 다소 흔한 질병에 걸렸다. 흔한 질병이긴 하나 그 원리가 참으로 신묘하다 아니 할 수 없다. 대처 방법 또한 그렇다. 물을 많이 배출하므로 물을 많이 먹어라. 당연한 말이긴 해도, 내 몸이 들어온 물을 그대로 내보내는 한 줄기 파이프가 된 것 같아 놀랍고 비참하다. 항쟁의지가 남다른 괄약근의 철벽수비가 아니었다면 훨씬 더 비참했을 것이다. 쓰다듬어 주고 싶다. 미쳤군.
인체의 신비는 경이롭다. 사람의 몸은 샌드위치를 잘못 먹으면 파이프가 된다. 우유를 잘못 먹어도 파이프가 된다. 치즈 잔뜩 뿌린 치킨을 잘못 먹으면 성능 좋은 파이프가 된다. syo는 낙지 볶음을 잘못 먹고 밸브가 고장난 노브레이크 하이패스 PVC 파이프가 된 기억이 있다. 치매가 와도 결코 잊지 않을 아주 흥건한 추억이다. 인체의 신비는 경이롭다. 그러나 그 경이로운 체험은 늘 이런저런 고통을 수반한다. 넓은 호수 표면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는 소슬바람 같은 고통에서부터, '말 못할 고통'이라고 아주 간편하게 말할 수 있는 아이러니한 고통까지. syo는 지금 또 한번 소소한 경이를 체험하는 중이다.
온몸으로 웃으려고 노력 중이다. 그러니까, 다음의 인용문들은 다 원 맥락을 무시한 채, 지금 상황에서 스스로 웃으며 버텨보려는 목적으로 인용하는 것임을 밝힌다. 안 그럼 울 것 같잖아. 지금 syo의 입장에선, 저게 웃긴다. 쓴웃음도 웃음입니다..... 아, 괄약근 너는 빼고. 지금 벌어질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비극적 상황은, syo는 못 웃는데 괄약근만 지 혼자 박장대소 하는 사태라 할 수 있겠다. 괄 장군에게 구국의 결단을 촉구한다......
어떤 기미를 둘이 거의 동시에 느꼈다. 남매는 나뭇가지를 던져버리고 장난감 같은 차들이 오가는 강변도로를 향해 뛰었다. 기미는 방귀냄새로, 생똥 냄새로 또 독가스 같은 구린내로 순식간에 바뀌어갔다. 그것이 오고 있었다. 남매는 모래밭에서 허우적거렸다. 숨은 적게 들이마시면서 뛰기는 빨리 뛰려는 불가능한 노력을 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무리 늦장을 부려도 결국 흘러가고야 말 것이다. 하류로 내려가서 서해 바다로 빠져나가 버릴 것이다. 한강다리의 교각에 몇 층으로 뚜렷이 그어져 있는 그것의 자취도 언젠가는 말끔히 지워질 것이다. 늘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그것을 구경조차 할 수 없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 그들은 그런 것을 본 적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_ 오수연,「강변에서」,『이해 없이 당분간』
비참 속에 담긴 비참, 비참에도 질서가 있었고, 그 길은 따라야만 했다.
_ 콜슨 화이트헤드,『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살해당할 거라면? 멍청하긴, 언제라는 거야, 그게? 지금 살해당하고 있는 거 아냐? 아주 조금씩 말이야. 그놈들은 말야, 능숙하다구."
_ 고바야시 다키지,『게 가공선』
오물로 가득한 폐허를 만나지 못힌 자들, 자신이 있는 곳를 폐허로 경험하지 못한 자들은 어떤 것도 창조할 수 없다. 그러하니 창조하려거든 몰락하라. 태어나려거든 흔쾌히 죽어라!
_ 고미숙 외,『루쉰, 길 없는 대지』
2
스타일이 간절히 목마른 때일수록 콘텐츠에 눈을 돌리자. 양식이나 미학이 부족하다는 느낌은 기반이나 근본이 빈곤한 정신에 종종 일어나는 증상이다. 일종의 저혈당쇼크라고 본다면 적절한 해결책은 결국 정신에 양분을 제공하는 일이다. 손은 저절로 움직일 때 가장 아름다운 결과를 빚는다. 손을 어떻게 움직일지를 계산하고 제어하는데 역량을 분산시키면 그만큼 멀리 가지 못하고 높이 닿지 못한다. 그러므로 손은 평소에 쉼없이 놀려야 한다. 손이 저 혼자 놀 수 있도록 하고, 저 혼자 놀아도 마음과 다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자주 놀고 많이 익힐 것. 자주 쓰고 많이 읽을 것.
알면 뭐 해, 안 되는데. 근래 독서량은 가장 좋은 시절에 비해 1/5 수준이고, 이제 거의 읽는다는 데 의의를 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어제는 닷새만에 뭐라도 써 봤는데, 글이라는게 참 늘 때는 정말 더럽게 더디더니 빠질 때는 KTX급이다. 싸야 할 곳으로는 물을 싸고, 손으로 똥글을 싸고 있다. 그런데도 읽을 시간도 쓸 시간도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문워크 하면서 사는 것이 바로 인생이로구나..... 하고 징징거리려는데, 이럴 때마다 다잡아 읽는 우리 선생님들 꽃같은 말씀.
밤에도 잠자는 것보다 일이 우선이었다. 때로 피곤할 때면 옷도 벗지 심지어는 이불도 덮지 않은 채 그대로 침대에 누워 두어 시간 눈을 붙였다. 이렇게 루쉰은 참호 속의 전사처럼 깜빡 잠이 들었다가, 몸을 뒤척이고는 바로 깨어나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진하게 끓인 차를 마신 다음, 과자가 있으면 조금 먹고는 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급한 글이 있을 때면 펜을 놓을 줄 몰랐으며, 대부분 동이 틀 때까지 작업했다. 루쉰은 많은 잡문들을 대부분 이런 상황에서 써냈으며, 많은 소설도 이런 상황에서 써냈다.
_ 왕스징, 『루쉰전』
우리가 학생에서 '직업인'이 되고 '교양'에서 '전문'으로 넘어갈 때, 혹은 청년에서 장년으로 넘어갈 때, 우리의 앎과 독서는 길을 잃고 위기에 처하기 십상이다. 어떤 이는 아예 책을 완전히 손에서 내려 놓기도 한다. 주로는 생계 활동의 고달픔 때문인데, 만흔 한국인들이 한 달에 책한 권도 못 본다. 어찌보면 이는 인생 자체의 행로가 위험해지는 것과 다르지 않은 과정일지 모른다. 우리는 이때 젊은이로서의 열정과 '꿈'을 잃고, 밥벌이과 기성 질서의 노예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리영희의 말은 그러할 때 책 읽기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그것은 자기 생과 앎을 소명을 지닌 프로젝트로 만드는 것, 또한 그것을 늘 또럿이 스스로 의식하고, 스스로 설정한 지적 과제를 충일하게 채워 나가는 책 읽기다.
_ 고병권 외, 『리영희 프리즘』
박태순이 내 글을 괴팍하다고 했다고 한다. 괴팍하다니.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썼을 뿐이며, 남들도 다 쓸 수 있는 글들을 쓰는 것을 삼갔을 따름이다.
_ 김현,『행복한 책읽기』
syo 2017-11-20 공감 (41) 댓글 (13)

시이소오님의『모두를 위한 페미니즘』리뷰를 읽고 쓰는 글이 맞지만, 시이소오님의 견해를 지적하거나 반박할 의사가 없습니다. 첫째, 시이소오님은 syo가 깔 수 있을만큼 어쭙잖은 말을 하는 분이 절대 아니고, 둘째, syo는 시이소오님의 글을 깔 수 없을만큼 어쭙잖은 말을 하는 놈이고, 셋째, 설령 미라클적으로 앞의 두 조건이 모두 만족된다 하더라도, 시이소오님의 말씀처럼 아직 페미니즘에 대해 발언하는 것은 위험하고 멍청한 짓이 되는 곳이 이 나라 이 땅이기 때문이겠다. 시이소오님이 그렇듯 syo도 남성이며, 페미니즘에 대해 발언하는 것이 위험한 마당에 페미니즘에 대한 발언에 대해 발언하는 것이 듀얼코어로 멍청한 일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소심한 syo가 언제나 그랬듯, 지금 놀이터 한 구석에 숨어서 바닥에다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난 항상 혼자 놀지. 친구가 없거든. 지금 난 그림을 그리고 있어. 혼자 그리고 있지. 뭐, 와서 보라고 그리는 건 아냐. 그렇지만 본다고 해도 말리진 않을게. 혹시 내가 그린 그림이 마음에 안 든다고 나를 때리지는 않을 거지?
위의 글을 어디 적어놓고 앞으로 쓸 일 있을 때마다 ctrl+c, ctrl+v 해야 되겠다.
syo는 <집적회로소자> 과목이 쉬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은 처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미적분을 처음 배울 때, 물리2를 처음 접했을 때부터 그랬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미분적분학>,<일반물리학>,<디지털논리설계>,<현대물리학>,<전자기학>,<회로이론>,<데이터구조>가 쉬웠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 후로도 <전자회로>,<반도체소자공학>,<수치해석>,<알고리즘>,<디스플레이구동설계>..... 그 많고 복잡한 수식들과, 무뚝뚝한 공학적 서술들과, 이 책을 보는 사람이라면 요정도는 당연히 배우고 올라왔으리라는 잔인한 가정과..... 이 모든 악랄한 것들이 전부 실리콘밸리든 어디든 syo는 가지도 못하며 평생 부러워만 해야하는 곳으로 떠나버렸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렇게 꾹꾹 눌러 4년을 마치자 syo는 "지금부터 아주 잘만하면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메모리를 만들 수도 있을 수도 있을 수도 있는 먼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디스플레이, 프로세서, 배터리, 그리고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각각 syo같은 먼지들이 생성되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수학 할아버지와 과학 할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기괴하고 야릇한 이름의 과목들을 헤쳐나오는 데 고등학교 이과 2년, 대학 4+n년, 최소 6년을 오롯이 바쳐 겨우 '먼지'가 된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졸업즈음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어, 먼지들아 반갑다, 나는 '찌꺼기'라고 해, 너희들도 나처럼 대학원에 들어와 석사 2년을 마치고 나면, 당당한 '찌꺼기'가 될 수 있단다!
그 먼지들이 찌꺼기가 되고, 찌꺼기가 덩어리가 되는데 거의 10년이다. 그러나 여러 곳의 덩어리들이 한데 뭉쳐 가까스로 만들어 낸 스마트폰을 사용하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몇가지 손가락 기술, 항시 와이파이를 켤 것, 기기묘묘한 패턴을 만들 것, 안되면 껐다 켜볼 것, 과 같은 아주 단순한 기능 뿐이다. 그러나 전자공학을 배우고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는 누구도 스마트폰을 더 잘 쓰기 위해 전자공학이 더 쉬워지길 바라지 않는다. syo도 그렇다. 전자공학 연구가 어려워지고, 복잡해지고, 고도화될수록, 우리가 스마트폰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더욱 많아진다.
물론 syo도 페미니즘이 쉬웠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것은 더 잘 이해하고 싶은 욕심일 뿐이지, 페미니즘이라는 학문 자체가 syo의 이해선상으로 내려오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건 불가능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 일이다. 물론 버틀러는 뒤지게 어렵게 쓴다. 이리가레는 읽기 위해 필요한 것이 많다고 들었다. 스피박은 본 적도 없는데 이미 죽은 견해라는 이야기도 어디서 주워 들은 것 같다. 페미니즘 이론 계보상 저어어어어 꼭대기에 있으니 그나마 괜찮겠지 싶어서 읽기 시작한 보부아르의『제2의 성』조차 지금 몇 주째 제대로 진도가 나가지 않고 있다. 쉬웠으면 좋겠다. 그러나 좀 더 쉬울 수는 있어도, 겨우 얇은 책 10권 정도 읽어 본 syo가 확 이해할 수 있을만큼 쉬울 수 있는 것이 페미니즘이라는 학문이라면, 한 줌의 이론에 무너질 얄팍한 기반에 근거해 이리저리 여성들을 착취해 온 남성의 보잘 것 없는 역사가 한껏 더 보잘 것 없어지겠다.
페미니즘이 스마트폰처럼 우리의 생활을 바꾸기 위한 학문이라 해도, 그 저변에는 난해한 이론들이 깔려있을 수 있다. 그것은 전혀 과도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의 서점에는 이미, 밀어서 잠금 해제 수준으로 학문을 배제하고 생활에 밀착시킨 페미니즘 책들이 많다. syo의 눈에는 오히려 그런 책들이 너무 많아서 문제로 보인다. 페미니즘의 이름을 달고 나오지만 그저 여성이 쓴 에세이일 뿐인 그런 책.
표면과 심층 사이의 그 깊은 간극, syo는 그 간극이 더 벌어졌으면 좋겠다. 다만 밑바닥까지 밟아 내려갈 수 있는 계단 같은 책들이 좀 더 단계적으로 나왔으면 한다. 이건 뭐, 밑바닥 볼려면 무조건 다이빙 말고는 방법이 없으니 페미니즘에 생업을 건 것도 아닌 입장에서 그냥 물장구만 퐁당퐁당 치고 말아야 하는 형국이긴 하다.
벨 훅스의 책을 읽으면서 syo는 그런 생각을 했다. 페미니즘을 점점 어렵게 하는 학자들의 담론 자체에는 문제가 없지만, 만약 그들이 담론을 어렵게 만드는 이유가 다른 페미니즘 연구자나 활동가의 입을 닥치게 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들을 고성능하이클라스특급쓰레기라고 불러야 되겠다고. 우리가 더 좋은 스마트폰을 사용해 더 다양한 생활의 편의를 구현하려면 전자공학의 담론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복잡해져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전자공학 박사학위자가 일반인들에게 당신들이 쓰는 방식은 틀렸소, 스마트폰은 이렇게 써야 하오, 나는 박사요, 내 말을 들으시오, 거기 당신은 스마트폰을 쓸 자격이 없으니 내일부터 폴더폰을 쓰시오, 나보다 스마트폰을 잘 아는 사람이 없으므로 나는 이런 결정을 할 자격이 있소, 당신들이 쓰는 것은 스마트폰이 아니오, 그러므로 당신은 스마트하지 않소. 뭐 이따위의 발언들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연구자가 아닌 일상의 페미니스트들이나, 페미니즘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도 해당사항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때로 주의를 주거나 경고를 할 수 있다. 아무리 방수가 된다지만 스마트폰을 물에 빠뜨리는 것은 좋지 않아, 배터리는 소모품이니까 1년의 무상 A/S 기간 안에 갈아주는 것이 좋아, 데이터를 함부로 쓰면 요금 폭탄을 맞아,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진동으로 바꾸는 게 어때. 그러나, 그런 행동들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개인이 법의 손을 빌리지 않고 임의로 타인의 스마트폰을 빼앗거나 사용할 자격을 박탈할 수는 없다. 타인의 페미니즘을 함부로 짓밟지 맙시다.
뜬금없지만 171101-171111 32권
1. 파씨의 입문
: 아프고, 슬프고, 부질없는 것들의 반복을 앞에서, 곁에서, 안에서 바라보는 눈. 언제 돌아올지 모를 다음 파도를 기다리며, 바닥이 없는 긴 구멍 속을 한없이 함께 낙하하는 눈.
2. 괴물과 함께 살기
: 사회철학에 대한 재빠른 일별. 두꺼운 책들이 눈을 부릅뜨고 기다린다.
3. 웃는 남자
: 만족 만족. 읽는 사람이 세상을 마주해 열린 관심을 가질수록, 소설의 기능과 가치는 더 선명하게 빛나는 법이다.
4. 다이어트는 운동 1할, 식사 9할
: 될까? 뭐든 열심히 안 하는 syo에게 살 빼는 일이야 열심히 안 먹으면 되니까 쉽지만, 건강하게 살 빼는 일은 뭘 열심히 해야 하므로 어렵다.
5. 시사인 528
6. 민주주의의 정원
: 호모 이코노미쿠스와 호모 폴리티쿠스를 죽이고, 애덤 스미스와 찰스 다윈을 제 입맛에 맞게 교접한 우리의 오래된 기계적 세계관을 깨고 나오자!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모든 학문 분야들이 전부 정원으로 향하는 우리의 길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라고 써놓고 보니 이 책의 장점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다..... 작지만 훌륭한 경제사회 팸플릿 같다.
7. 루쉰
: 일본에서 나온 책이라, 루쉰이 유학하던 시절의 일본상을 명확히 그리기도 하고, 일본의 루쉰 수용사를 비중있게 다루기도 한다. 같은 분량의 다른 평전들에 비해 루쉰의 개인사를 조금 더 집요하게 파고드는 경향도 있다. 전체적으로 매력이 넘치는 평전은 아니겠다.
8. 니체씨, 긍정은 어떤 힘이 있나요?
: 삼촌, 니체가 뭐하는 사람이야? 라고 조카가 물어오면 이 책을 권하고 싶은데 조카가 없다.
9. 헌법의 주어는 무엇인가
: 헌법의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기 위해 1조를 다시 읽는다. 어느 순간 철학과 관념의 평면으로 점프했다가 다시 정치와 권력의 평면으로 내려오는데, 두 개의 평면 위에서 놀 때는 능수능란한 반면, 평면 간의 이동이 갑작스럽거나 다소 거칠게 밀고 들어온다는 느낌이 있다. 헌법 1조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는 충분히 놀라운 책이다.
10. 고전으로 철학하기
: 읽을만 한 인문독서기록이다. 의견의 대립이 있는 부분에서는 양비론, 중용, 도덕책 속의 예쁜 말로 결론을 맺는 경향이 없진 않은데, 깔 때는 까 주고 말할 게 있을 때는 촥촥 내지르다보니 그렇게 눈에 밟히지는 않는다. 빨강이의 냄새가 난다. 아이 좋아라.
11. 약탈정치
: 한 권으로 끝내는 이명박근혜.
12. 마키아벨리의 네 얼굴
: <군주론>의 임팩트가 막강한 것은 전쟁터가 우리네 사는 마당 안으로 스며들었기 때문이고, 이것은 마키아벨리의 입장에서는 득인 동시에 실이다. 명성을 얻었으나 그 명성이 악명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군주론>을 다 읽고는 이제 마키아벨리를 다 씹어먹었다고 생각하지만 저자의 말에 따르면 그런 경우 고작 1/4의 마키아벨리를 알았을 뿐이다. 저자는 마키아벨리의 저작을 <서한집>과 <외교문서집>을 한 덩어리로 시작해, <군주론>, <로마사논고>, <피렌체사> 의 큰 네 덩어리로 끊는다. 군주론 하나 읽고 깝치지 말라는 이야기 같다.
13. 세상물정의 사회학
: 세상물정 아는데 알아야 하는 것이 이리도 많으니 게으르게 살아가지고는 답이 없겠다. 어휴.
14. 헌법의 발견
: 헌법의 대표적 조항들을 둘러싼 정치/철학/사회학적 지식들의 향연이다. 박홍순 선생님의 인문학 책 스타일을 실하게 보여주는 좋은 책. 다만 좀 재미가 없고, syo의 경우 이런 나열식 발췌 지식 사전 같은 형식의 책에서 얻은 것들은 빨리 휘발되고, 결국 책에서 언급된 문헌들을 하나씩 읽어가야 남는 게 있더라.
15. 종의 기원을 읽다
: 양자오는 무섭다. 어마어마하게 많이 아는 사람. 책도 좋다. 그러나 양자오의 책은 양자오처럼 무섭거나 어마어마하게 괜찮지는 않다. 쉽고 재미있다는 사실은 반박불가다.
16. 문제적 과학책
: 36권의 과학책을 결점으로 해서 꿰어나가는 과학사. 어렵진 않지만 딱히 재미가 있지도 않은, 무난한 과학사 책이겠다. 철학사도 그렇지만 과학사 역시 구슬 서 말을 꿰어 보배를 만드는 데 쓰는 끈이므로, 초심자가 과학 공부를 과학사 책으로 시작하는 것은 시간낭비가 될 공산이 크다. 근데, 이런 이야기를 왜 하고 있는 걸까.
17. 풍경 소리
: 구효서 선생님 회춘 소식을 전합니다. 만세. 이것은 구력이 없으면 도저히 쓸 수 없는 글인데, 상큼한 문체와 만나 이제껏 없는 작품이 나왔습니다.
18. 맹자를 읽다
: 양자오는 맹자를 투사로 본다. 논변의 투사. 그런 관점에서 맹자를 읽는 것은 과연 효력이 있다. syo가 보는 맹자는 분노와 혁명의 사상가다. 사람들은 자꾸 택도 없는 질문으로 맹자를 괴롭히고 그 덕에 맹자는 항상 화가 나 있다. 공자보다 맹자가 더 잘 듣는 약이 되는 시대다.
19. 한겨레21 1185
20. 베를린 일기
: 빵 터지면 별 다섯 개 원칙대로 별 다섯 개. 오십다섯 개.
21. 지금 당신에겐 시 한 편이 필요합니다
: 그 동안 시를 읽는다고 읽었지만, syo는 읽은 게 아니라 읽은 개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22.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 반짝반짝 빛나지는 않지만 무엇인가 선명하게 가리키고 있는 윤고은.
23. 리영희 프리즘
: 리영희를 빌려와 오늘날(2010)을 조명하는 책. 리영희를 지식이 아닌 방법론으로 보는 셈인데,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방법론으로 기능할만 한 지식인이 과연 얼마나 더 있을까.
24. 작은 겁쟁이 겁쟁이 새로운 파티
: 제목부터가 딱 정지돈이다. 정지돈의 <정지돈> 이런 느낌이다. 단편도 장편 같고 장편도 단편 같다. 읽어보면 여지없이 정지돈이다. 여전히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싫어할 것이다. syo는 그저, 정지돈은 정지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일 뿐이다.
25. 다른 사람
: 많은 말을 하려고, 많은 글을 썼는데 모두 지워버렸다. 작가가 글을 너무도 선명하게 써서, 나도 이 모든 아픔과 슬픔을 이해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니 그 이해라는 것이 여전히 세상에 크고 작은 아픔과 슬픔들을 만들어내는 이들의 입에서 종종 나오는 '이해'라는 단어와 얼마나 다른지 확신이 없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뱉을 수 있는 말이 줄어드는 책들이 있다. 나는 부채감과 분노가 만드는 교집합의 어느 지점 위에서 그저 침묵만 거듭한다.
26. 즐거운 시 읽기
: 이 책을 보고 있자니 중고등학생이 시를 싫어하게 되는 이유를 잘 알겠는데도, '즐거운' 시 읽기 라고 제목을 붙인 것은 그야말로 반어법에 어떤 것인가를 몸소 보여주려는 살신성인의 태도겠거니.
27. 문단 아이돌론
: 우리에게도 이런 사람이 필요하거나 아니면 이미 있는데 못 보고 있거나. 어느 쪽이든, 얼른 눈 앞에 나타나라구요. 현기증 난단 말이예요.
28. 21세기 다윈 혁명
: 다양한 학문 분야에 다윈을 끌어들여 아전인수식으로 다윈의 위대함을 설파하는 책. 진짜 위대해 보이긴 한다. 19명의 저자가 짧은 글 한두 꼭지씩을 기고한 것인데, 글만 놓고 보면 수준이 고르지 못하다.
29. 이해 없이 당분간
: 아 재미지다. 흥미로운 작가들도 몇몇 발견. 아, 읽을 책이 또 늘었다. 깔려죽겠네.
30. 시사인 529
31. 그림으로 배우는 알고리즘
: 애기들 보는 애긔애긔 귀여운 책.
32. 알고리즘 행성 여행자를 위한 안내서
: 어려운 책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책은 기술서가 아니라 인문학 / 철학서이기 때문이다. 공학도와 공학도가 아닌 이들에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공히 어려운 책이겠다.
그간의 길었던 백수생활을 청산할 필요성을 느끼고 가족 및 준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본 결과인데, 그들은 모두 syo가 이제라도 뭔가 생활력을 갖겠다는 데는 하나같이 찬성하였지만, 취업 전선에 나가겠다는 말에는 또 하나같이 반대를 하였다. 평생을 책상 앞에만 앉아 있다가 아직도 책상 앞에만 앉아 있는 니가 뭘 할 수 있겠냐며, 그냥 책상 앞에 계속 앉아 있되 책만 바꾸어 보기를 강권한다. 한 자리에 모아놓고 공청회를 가진 것도 아닌데, 마치 배후에 무슨 세력이라도 존재하는 것처럼 이렇게 다들 똑같은 말들을 한단 말인가. 두어 명 정도는 동의를 해 줘야 마이 웨이 가겠다고 우겨라도 볼텐데. 이건 마치 덤벼라 세상아 하는 기분이라 찍소리 못하고 납득. 내일부터는 사랑스러운 책들 대신 끔찍하게 생긴 몇 가지 법서와, 요약서, 문제집 같은 것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아, 책은 갔습니다. 이렇게 하루에 세 권 기세로 읽는 짓도 이제 끝이 난 것입니다. 앞으로 딱 250일만, 하루 10시간만 공부하기로 약정하였고, 위약하면 위약금으로 인생을 내놓을 판이라, 이제 한 달에 몇 권이나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syo무룩).
syo 2017-11-12 공감 (42) 댓글 (28)

오늘 읽은 책에서 1
일반적으로 여자는 남자에 비해 뇌세포 수가 적기 때문인지(일본인 뇌 무게의 평균치는 남자 1372.9그렘, 여자 1242.8 그램) 천박함과 어리석음을 그 바탕으로 하며, 또 그것이 매력이 되기도 하지만 천박함과 어리석음이 이렇게까지 심해지면 그냥 넘어갈 수 없게 된다.
_ 다치바나 다카시,「시대와 상황의 병리학」,『문명의 역설』에 수록
우먼 리브는 일부일처제가 여자의 성적 욕구를 봉쇄한다고 비난하지만 이는 그녀들이 정신적 불구임을 공표하는 것과 같다. 정상적인 여성의 성 심리에서는 여성 스스로가 일부일처를 원한다는 사실이 모든 심리학적 데이터를 통해 증명되고 있다. / 음란한 여자, 여러 남자를 원하는 여자는 예외 없이 냉감증, 불감증이다. 오르가슴 부전이 님포마니아와 우먼 리브를 낳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이 진정으로 해방되길 원한다면 오르가슴을 느끼게 해주는 남자를 하루빨리 찾아야 할 것이다.
_ 다치바나 다카시, 위의 책
와, 아무리 옛날 글이라지만, 다치바나 다카시 진짜 개실망...... 후에 문고판으로 재발매 될 때도 전혀 개정이나 삭제를 하지 않았다는군요.
오늘 읽은 책에서 2
남성 우월주의는 어떠한가?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다윈주의를 남성 우월주의의 일종이라고 비난해 왔다. 다윈 이래 생물학자들은 암컷과 수컷의 차이를 강조하고 이를 토대로 남녀의 사회적 역할이나 기능을 설명하려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합당한 논의와 '오버'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다윈주의는 규범적 입장이 이념과 무관하다. 더구나 준거점을 언급하지 않고 무조건 수컷이 암컷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구체적인 기능을 제시하지 않으면 평가적인 언명도 자기 선호 표현에 지나지 않게 된다. "남자는 여자보다 잘났다."고 말하는 것이나, "난 남자가 좋아."라고 말하는 것이나 무엇이 다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윈주의가 스테레오타입을 강화하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엉렵다. 다만 그것이 전적으로 다윈 탓인지는 의문이다. ....(중략)..... 하지만 성선택 이론을 수컷 우월주의로 착각하는 일부 때문에 다윈주의를 남녀 차별을 용인하거나 조장하는 입장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핵전쟁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때문이라고 질책하는 것이나 진배없다. 다윈주의자와, 다윈주의를 빌미로 남성 우월주의를 조장하는 이데올로그는 구문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_정연교,「윤리의 세방화를 촉진시킨 다윈과 다윈주의」
이런 글을 보면 눈쌀이 찌푸려지는 것이 syo 뿐입니까. 다윈주의자와 다윈주의를 빙자하는 이데올로그를 왜 구분하지 못하냐고, 그 책임을 페미니스트에게 따져 묻는 것이 전적으로 온당한 일인가?
이 판에는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글쓴이가 주장하는 순수한 정통 다윈주의자 A, 다윈주의를 빌미로 남성 우월주의를 조장한다는 '착각하는 일부' B, 그리고 다윈주의도 잘 모르면서 남성 우월주의의 일종이라고 비난하는 페미니스트 C.
그러니까 글쓴이의 말은, B가 다윈주의라는 객관적이과 과학적인 학문을 비틀어 C를 공격했고, C는 A와 B를 구분하지 않고 욕하고 있다는 건데, 이 말만 들어도 저자가 얼마나 젠더 문제를 방관하고 있으며 학문적 고고함만 지키려 하는지 눈에 선명히 보인다. 세상 어느 B가 자신이 B라고 하며 C를 공격하겠는가. 자기가 A라고 하며 공격해 오는 B를 보며, 얻어맞는 C가 너는 A가 아니라 B야, 하고 다정하게 정정을 해주면서 얻어맞아야 한다는 말인가. 글쓴이가 A로써, 정말 진정한 다윈주의를 오염시키는 세태를 바로잡고 싶다면, C에게 눈을 뜨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B를 축출하는데 앞장서야 할 게 아닌가. 다윈주의에 똥물을 타고 있는 것은 C가 아니라 B인데. B가 모조리 없어지면 C가 다윈주의를 오해할 일이 없겠으나, C가 모조리 없어진다 한들 B가 남아 있다면 진정한 다윈주의를 향한 A의 꿈은 이룰 수 없는 게 아닌가?
첫번째 문단에서 글쓴이는 B를 공격한 척 하는데, 눈가리고 아웅도 정도껏이다. 글쓴이의 눈에 B가 하는 짓은 잘못이 아니라 '오버'일 뿐이다. 글쓴이는 '준거점을 언급하지 않고' 깝치는 B를 욕하는 척 하지만, 실제 그런 B는 없고, 있어도 C가 알아서 거른다. 문제가 되는 B들은 진화심리학이든 뭐든 가져와 자신의 주장에 맞게 데이터를 해석하는 방법으로 근거를 만들곤 한다. 그러나 글쓴이는 그런 B를 경계하는 태도는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허수아비를 만들어 놓고 후드러 패면서 객관성을 확보한 척 할만큼 약삭빠른 것인지, 아니면 저래 놓고 정말 스스로 객관적이라고 생각할만큼 순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글쓴이는 '가치 다윈주의'라는 것을 주장하면서, 그 가치 다윈주의가 자리잡기 위해 필요한 네 가지 예쁘지만 허망한 조건을 제시하는데, 정말 옳다. 핵공감.
"우선 가치와 진리가 분리되어야 한다. 가치의 원천을 하늘이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정말 그렇다. 부디, 다윈주의라는 진리의 고결함을 수호하겠다고 사람에게서 눈을 돌리고 귀를 막는 일은 하지 말아주시기를.
"둘째, 이성에 대한 편집증으로부터 탈피할 수 있어야 한다. 도덕이나 윤리가 고매한 이성을 갈고닦아 발견할 수 있는 진리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정말 그렇다. 부디, '준거점'이나 '구체적인 기능' 같은 진리의 보조장치들을 휘둘러대며 무언가를 합리화 하려는 시도는 말아주시기를.
"셋째, 문화와 가치의 기능을 효용에서 찾아야 한다. 문화와 가치가 생존 기제의 일부임을 인식하고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상이한 습속과 전통이 있을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정말 그렇다. 부디, 젠더 형성 과정에서 환경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말아달라는 목소리에 지금처럼 힘을 실어주시기를.
"넷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직한 문화나 가치가 갖추고 있는 공통적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형평과 효율, 배려와 사익, 규율과 자율이 적절하게 배분되지 않을 경우 어떤 가치나 문화도 오래 지속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정말 그렇다. 부디, 형평보다 효율에, 배려보다 사익에 더 큰 무게추를 실으면서도 그것이 적절한 배분이라고 우기는 학자는 되지 말아 주시기를.
마지막으로, 아인슈타인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 사람은 핵폭탄이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떨어진 그 날 이후 남은 평생 내내 핵폭탄 제조를 독려하는 편지를 보낸 일을 후회하며 살다 갔다는 사실을 덧붙이고 싶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에게 던져진 전제와 근거에 따라 추론하는 것에 머물 때, 우리는 '기계 부품'에 머무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그때 생각이 없는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용기의 문제, '감히 알려 하고', '감히 문제 삼으로 하는'태도라고 할 수 있다.
_ 고병권 외,『리영희 프리즘』
진보를 믿는 것, 그것은 진보가 이미 이루어졌다고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은 믿음이 아닐지도 모른다.
_ 프란츠 카프카,「죄와 고통, 희망 그리고 진정한 길에 대한 성찰」
만약 당신의 그 권위 있는 비평이 우리가 모르는 것를 알려준다면, 왜 세상은 계속 침묵할까요? 왜 우리에게 진실과 돌이킬 수 없는 법을 말해주지 않을까요? 비평이 그것을 안다면 우리에게 길을 제시해주었을 테고,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지 알았을 겁니다.
_ 안톤 체호프
실상 탈맥락적 보편이란 말은 허구다. 우리는 이 세계에서, 우리의 위치에서, 말하고 사고하고 행위한다. 철학적 사유는 자신이 거주하는 시간과 공간을 표시하고 말해야 한다. 예전에 만들어진 개념은 당연하게도 새로운 개념과 이론에 의해 비판되며 수정되고 새로 쓰인다. 개념은 그 흔적으로 자신의 자리를 만든다.
_ 김은주,『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모든 진리는 자기 확장적이다. 어떤 관념이 자기를 진리라고 믿을 때, 그것은 맹렬하게 팽창한다. 주먹만하게 줄어들었다가 크게 폭발한 우주처럼. 그러나 그 우주에도 끝은 있다.
_ 김현,『행복한 책읽기』
눈치 없이 혼자 느긋한 이유는 달리 없습니다. 느긋해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느긋한 채로 살 수 있는.쪽과 그렇지 못한 쪽이 정해져 있어서 문재가 되는 상황에서는, 본인이 팔자가 좋다는 걸 드러내지 않는게 예의입니다.
_ 이민경,『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syo 2017-11-09 공감 (34)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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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정체를 알수 없는 책, 차라리 이영희 선생님의 "대화"를 읽는게...
ksigene 2010-10-29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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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를 통해 본 대한민국
'리영희'라는 이름은 이제는 보통명사가 된 느낌이다. 물론 나는 그를 책에서 표현하듯 '사상의 은사'로 모신 그런 70년대 세대는 아니다. 그렇다고 그를 수정주의자라 여기며 극복해야할 대상으로 여긴 80년대 세대도 아니다. 오히려 '리영희'라는 이름을 듣고도 "이게 뭥미?"하고 뜨악하게 쳐다보는 지금의 보통 세대들과 거의 다르지 않은 90년대 세대다.
'리영희'라는 이름은 많이 들어왔지만, 정작 그의 저서를 접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놀고 술마시느라 바빴으니 당연하지). 96년 어느날 동아리방에 너덜너덜해진 책 한 권이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 책의 제목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제목의 책이었다. 그 책 제목의 계시와도 같은 강렬함에 이끌려 난생 처음으로 책 도둑질을 했다(도둑질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이 책을 빌리고 반납하지 않은지 14년이 다 되어가니 훔친거나 다름없다. 깊이 반성한다...). 국제 정세와 한국 정세를 판단한 그 책은 생각보다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으나, 대결의 구도가 아닌 조화의 구도를 그려냈다는 점에서, 그 어떤 문학보다도 감동적으로 다가온 경험이 있다.
그리고 한동안 잊고 살았다. 선생이 중풍에 쓰려졌다는 소식을 접했을때도, "아, 어쩌나"라는 생각뿐이었고, 구술 자서전 『대화』가 나왔을때도 "아!"라는 감탄뿐이었지, 그의 저작을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세상은 어차피 잘만 돌아가니까.
『리영희 프리즘』. 이 책을 읽고나서야 깨달았다. 그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이었는가를. 이 책에 있는 글들은 '리영희'라는 존재를 통해 지금의 대한민국과 지금의 우리들을 바라본다. 어떤 것은 놀랄만한 경탄을 이끄는 글들도 있고, 또 어떤 것은 참신한 시선이라며 무릎을 치게 하는 글들도 있지만, 어떤 것은 "이건 뭥미?"하는 핀트를 벗어난 글도 있다.
열 명의 저자들이 얘기하는 담론들- 생각하기, 책 읽기, 전쟁, 기독교, 영어, 지식인, 기자, 사회과학, 청년문화, 자유 -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진단할 수 있는 열쇳말이기도 하다. 이 담론들이 '리영희'라는 스펙트럼을 통해 이야기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의 시대'를 살아온 세대들에겐 당연한 중언부언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으나, '리영희'라는 인물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놀라움과 경의감을 느낄 것이다.
홍세화 씨가 서문에 밝혔듯이, 이 책은 '리영희'라는 우상 만들기에 관한 책이 아니다. 우상 파괴를 역설한 사람이 스스로 우상이 되는 것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이 책은 이제는 우리가 잊어버린, 그래서 '폐기처분해도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감히" 지닌 '리영희'라는 인물이, 사상이, 삶이 아직까지 우리 시대에 유효하다는 것을 역설한다. 일제시대와 해방과 분단과 전쟁과 독재와 민주화를 말 그대로 "온몸으로" 견디어낸 인물의 생각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다. 그는 늙었지만 낡지 않았다. 지금이나마 "선생님"을 알게되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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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ek 2010-03-08 공감(27)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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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프리즘
나는 리영희를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 이 책의 누구 말 마따나 리영희는 알지도 못하고 진중권과 홍세화를 통해 의식화된 21세기의 대학생이 바로 나이다. 그의 글은 쪽글 하나 읽어본 적 없으면서 그의 팔순을 기념하는 책부터 읽는다는 것이 웃기긴 하지만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숨겨진 의도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리영희를 모르는 이 시대의 누군가에게 그의 정신을 일러주는 것. 이렇게 그를 모르는 것이 당연한 현실이 영구해지기 전에 정신차리라고 볼때기를 때려주는 역할 말이다. 이 책을 읽고나서 보니 요즘 세대 지식인과 다른 리영희만의 특징은 그는 외로운 시대를 외롭게 살았다는 점이다. 할 말 하는 댓가로 키보드워리어들과 전투를 치뤄내고 무식한 대중들과 맞짱을 떠야 하는 요즘 지식인들과 달리 그는 무엇이 진실이고 정의인지 겨룰 상대도 없던 적막의 시대를 살았다. 요즘 지식인들이 '디-워는 돈내고 봐주는게 한국인의 도리'라고 우기는 개념없는 애들 상대해주기 피곤하긴 하지만 그래도 혼자였던 리영희보단 덜 외롭지 않을까. 먹고 살기는 커녕 목숨 부지하기도 힘들고 반공 이데올로기는 두꺼운 장막처럼 이 사회를 뒤덮고 있었다. 그 숨막히던 시대에 리영희는 배운자의 사명으로 끝없이 공부하고 탐구하는데 그 외로움은 외로움의 경지를 넘어 숭고하다는 감상마저 자아낸다.
책은 전쟁, 사회과학, 영어공부, 책 읽기, 청년세대 등 다양한 소주제를 리영희와 연결지어 다루고 있다. 한 저자가 한 주제를 맡아 글을 쓰고 있으니 그 다양함이 장점이요 글의 분위기와 농도가 제 각각인 것은 나름의 단점이라 말 할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무척 감탄하며 읽었던 글은 역시 김동춘 교수의 글이었고 한윤형씨의 글 또한 무척 좋았다. 김현진씨의 글은 이 책에서 유일하게 리영희선생님의 인터뷰가 담긴 글이니 좋을 수 밖에 없었다. 다 고르고 골라 선정된 필진일 테니 리영희를 알지도 못했던 일개 무식한 대학생인 내가 글을 품평한다는 것이 웃기긴 하다만 오길영 교수가 쓴 '영어라는 우상'이라는 글에 대해서는 뭥미?심정이 되었음을 리뷰에서 짚고 넘어가야겠다. 오길영 교수는 온 국민이 영어에 목을 매는 현 한국세태에 대해 '언어를 정보 전달과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격하시켜 혹은 생계를 버는 수단으로 격하시켜 창조적 사유와 분리하는 문제를 가져온다.'(113p)고 비판하며 '500단어 영어'를 이야기한다. 요즘 젊은애들이 외국나가고 영어학원에서 목매는 영어회화란게 결국 500단어 가지고 하는 대화란 말이다. 그 500단어 가지고 무슨 깊이 있는 대화가 되겠냐, 그런 발음 굴리기나 하니 미국대학가서 따라가지 못하고 중도탈락하는 것이다-라는 것이 그의 요지이다. 영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일 뿐인데 내가 그걸 무슨 학문처럼 파고들었단 자괴감에 슬펐던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이었다. 영어가 단순히 최강대국의 언어라는 위치를 넘어 전세계공용어로 자리잡은 현실에서 우리가 커뮤니케이션 하는 대상은 네이티브 스피커인 경우보다 영어를 제 2외국어로 삼고 있는 사람인 경우가 더 많다. 독일인을 만나도 케냐인을 만나도 중국인을 만나도 영어로 대화하는 세상이다. 미국으로 석박사 따러가는게 아닌 이상 제일 중요한건 제2외국어로 소통하는 상황에서 기본 500단어로 어떻게 자신의 의사를 효율적이고 분명하게 드러내느냐가 영어회화의 핵심인데(고급단어써서 유식하게 보이고 싶은 욕망은 이해한다만 토플에 나오는 고급단어도 일상회화에선 거의 쓰이지 않는다)이걸 가지고서 문제라고 하니 나로선 전혀 공감하지 못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500단어 회화로는 비판적 사고력의 부족을 커버할 수 없고 그래서 발음만 현란한 한국애들이 안되는 거라 이야기 하는데 그렇게 애초에 알맹이가 없는 애는 500단어 회화가 아니가 22000단어 회화로도 커버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는 또 지젝의 강연을 들었던 예를 들며, '그의 발음은 알아듣기 힘들었고 표현도 어색했지만 그의 당당했던 태도는 좌중을 압도했다' 말하는데 그건 지젝이니까 그런거고 남들에게 내 이야기를 쏙쏙 이해되게 갖다 바쳐야 하는 일반 한국인들로서는 발음도 무척 중요한 부분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나 비지니스 영역에서 유려한 말솜씨의 중요성을 무엇에 빗댈수 있으랴? 리영희는 마지막에 가서야 이 영어교육론과 연결된다.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는 왜 배우는가? 어떻게 영어를 배우고 누구를 위하여 영어를 쓰는가? 리영희에게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는 진실을 추구하려는 지식인으로서 글을 쓰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다. 다양한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세계를 조망하는 창을 더 많이 확보한다는 뜻이다. 리영희가 누구보다 날카롭게 당대의 문제를 파악하고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를 향해 열린 외국어의 창을 많이 확보했고 그 창을 통해 무엇을 봐야 할지를 명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124p) 말은 참 근사하다만 초반부에 영어를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격하시킨다 분개하더니 뒤에 와선 리영희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잘 사용했다 칭송하니 좀 뭥미?싶었다. 결국 어떤 목적은 숭고하고 어떤 목적은 천박하다는 것인가. 물론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는 알겠다. 고전을 원서로 읽어라, 더 많은 단어를 배우고(개념을 배우고) 사고의 지평을 넓혀라 그런 이야기겠지.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에 나쁜 뜻이 있었으리라곤 생각치 않는다. 그런데 요즘 현실에선 에덴의 동쪽을 원서로 읽는 것은 사치인 사람들이 많다. 비지니스 영어회화 100개 외워서 면세점 취업해야 하는 아가씨들이 가장 좋은 예일 것이다. 그런 삶의 문제.현실의 문제가 결코 격하될 수 없는 부분이란 것이 나의 생각이기에 영어가 수단으로 사용될 때에도 급이 있다는 식의 오길영 교수의 글은 불편했다. 영어로 인한 사대주의, 식민주의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영어가 필요한 사람만 배우면 된다'고 말한다. 현재 한국의 영어 열풍이 정상의 범주를 넘어서 과도한 사회적 수준의 낭비를 가져오고 있는 것에 나 역시 분명히 동감하는 바이다. 하지만 '배울 사람만 배우면 된다'는 논리는 무척 위험하다고 본다. 에덴의 동쪽을 원서로 읽을 시간적 여유가 되며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교수. 기자 등등)만 영어를 배우겠다는 소리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시대에 영어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위키피디아 사전 한번 들춰보려고 해도 영어는 필요하다. 그래. 내가 불편했던건 이런 이야기들이다. 리영희 선생이 영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전혀 아는바가 없다. 이 책은 리영희 선생이 쓴 책이 아니니까.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오교수의 인용에 리영희 선생은 전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리영희 선생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생각을 강하게 펼친것 아닌지 하는 찝찝함이 남았다.
이 기나긴 불평글을 다 읽고 내려오신 분이라면 분명히 아시겠지만 이 책은 마지막 챕터의 인터뷰 약간을 제외하고는 리영희의 목소리나 글이 직접적으로 담겨있지 않다. 그에게 사상적으로 은혜를 입었다는 이들이 그를 떠올리며 쓴 글이 묶여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 같이 그와의 시대적 갭이 무척 큰 대학생이나 젊은 사람은 그를 본격적으로 읽기 이전에 우리 이전 세대에 그가 가졌던 의미가 무엇인가 잠시 배우고 건너갈 수 있는 징검다리가 되어줄 수 있는 책이다. 간접적으로나마 리영희의 생애나 경력이 토막토막 언급되기에 그에 대한 기본지식도 제공해준다. 나는 이제 리영희의 진짜 글을 읽어보려고 한다. 마지막 챕터의 인터뷰가 주는 감동이 너무 커서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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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10-03-16 공감(12)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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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망 없는 시절의 목발,리영희
리영희,라는 이름을 앞에 두고, 이 책을 읽으며 떠올렸던 상념들을 무슨 말로 옮겨야 할지 막막하다. 어차피 이 책에 글을 올린 필자들처럼 리영희,라는 프리즘으로 현실 사회를 진단할 능력이 없음을 제 깜냥에도 알고 있지만, 그래도 고개 숙여 큰 절이라도 한 번 하고 싶었고, 선생님이 살았던 시절보다 어쩌면 더 가망 없어진 시절을 어찌 살아내야 하는지 무슨 나침반 하나라도 거져 얻고 싶었다. 끈 떨어진 마음이 갈 곳 몰라 떠돌고 있다고 자백하는 꼴이니, 알고는 있었지만, 사람 덜 된 꼴을 이렇게도 확인하는 요즘이다.
90년대 초반, 내가 대학이라는 곳에 발을 들여 놓고, 사회과학연구소라는 모호한(?) 성격의 동아리를 기웃거리며, 그곳에 있던 쌘(지금 보면 무섭지도, 선동적이지도 않지만 그땐 그렇게 보였다) 책들을 읽기 시작할 무렵 선배로부터 건네받은 책이 [우상과 이성]이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선배는 나를 잘 못 골랐다. 리영희 선생의 [우상과 이성]을 읽은 후, 되려 쌘 책들과 멀어졌고, 선배들의 주입식 교육을 의심했고, 자연스럽게 주변인으로 겉돌기 시작했다.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생각의 스승'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훌륭한 '정보'나 '견해'를 들려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생각하게' 했기 때문이다."라고 고병권은 이 책에 적고 있다.
정녕 그러했다! 절대의 이름으로 맹목적으로 외우고, 익히던 시절에 마침표를 찍게 한 사람, 내가 안다고 믿었던 신, 인간, 사회구조, 주의, 냉전, 자본 그리고 나 자신마저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게 한 사람, 그가 리영희,였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 IMF라는 재갈이 물려, 무한 경쟁이라는 시절을 벼락처럼 맞아야 했고, 그에 따라 수적으로는 다수일지라도 구조적으로는 소수로 전락하는 사람들의 곁을 멤돌면서, 국가도 조직이라고 본다면, 조직의 명운이 흔들리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어떻게 개인들을 위축시키는지, 조직원으로서 더 잘 조련되는지를 맥없이 지켜봐야만 했다. 그리고, 이 특별한 조련에 동원된 언론, 지식인 사회, 정치인들의 모습 또한 꾸준히 봐야만 했다. 리영희 선생님이 전 삶을 걸고 완강하게 싸운 [우상]을 떼거지로 목도한 시절이었다. 또한, 사회가 지능적으로 잔인하다는 것도, 그에 대한 각 개인의 대비가 이렇게 허술했구나,라는 사실도 이처럼 일목요연하게 경험할 수 있다니 그저 놀라운 시절이었다. 물론, 그 이후 시장이라는, 신자유주의라는 우상이 자리를 잡고 가망 없는 시절이 노골적으로 시작되면서, 그 시절 내 놀라움은 시작에 불과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지만 말이다.
얼마 전, 보험설계사 한 분을 만났다. 요즘처럼 영업이 힘든 건, 일을 시작하고 10년이 넘었지만 처음이라고 했다. 해약은 많고, 가입은 적다고. 진심은 아니었지만, 경제 대통령 시절이고, 경제가 좋아진다고 하고, 토건 사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데, 어째서 현실 경제가 그리 얼어붙었을까요,라고 나는 물었다. 내 음험한 물음에 중산층이 점점 무너지니까요,가 그분의 대답이었다. 중산층이 무너지다뇨,라고 계속 말꼬리를 물고 싶었지만, 그분이 무슨 죄라고 내 비아냥을 참아내야 하는가 싶어 그만두었다.
여튼 우리 사회에서 무너지고 있는 것이 중산층뿐일까? 아니 중산층이라 정의되는 계급이 무너진다는 것이 경제적 의미에서만 해석될 수 있는 것일까? 구조적 소수자로 내몰리는 우리가 이 위기를 극복할 수는 있는 것일까? 현실에 대한 사유가 깊어질수록, 나는 엄혹한 시절을 살아낸 스승에게, 예의없는 태도로, 스승이 살았던 그 시절보다 더 가망 없는 시절을 살고 있다고 토로하고 싶었다. 최장집의 말을 빌려, 권위주의 시대처럼 명백한 부정의 때문에 정의가 쉽게 파악되는 시절도 아니고, 소수의 기득권 세력을 위한 질서도 그 외피를 바꿨을지언정 변하지 않은, 그러기에 무엇이 무엇인지, 그저 우르르 몰려 다니며 속고 속이는 시절이라고. 시장을 획득하기 위한 전쟁이 평화의 옷을 입고, 글로벌이라는 이름이 무한 경쟁을 재촉하고, 루저가 되지 않으려면 사교육에 올인해야 하고, 조직의 무탈을 위해서 부속품으로 전락하는 개인쯤은 어쩔 수 없는 희생이며, 투자와 저축보다 투기만이 이 땅에서 살아남는 길이라는 것이 상식이 되어버린 시절이라고. 이보다 가망 없는 시절이 또 있을까 싶다고.
생각없는 노예로 죽어가는 삶보다 고통스럽지만 깨어있는 삶을 그리고 잠든 사람들을 깨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던 선생을 통해 각성의 기쁨을 맛보았지만, 정작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거대한 체제, 자본, 시장이라는 [우상]앞에서 정녕 어찌해야 하는지, 쪽팔림이라도 면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여전히 두려움과 기갈로 우왕자왕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또 한편, 따져 묻지도 말라는[우상]의 엄포앞에서 작은 용기, 내 삶이 피해입지 않을 정도의 용기로 맞섰으니까, 내가 할 몫은 다한거 아니냐고, 그런데 현실은 갈수록 왜 이모양이냐고, 계속 불평만을 늘어놓는 나에게, 삶과 앎이 불일치한 너는 리영희,를 왜 읽었느냐고, 리영희,가 그저 지적 유희로 소비되었던 것이었냐고, 리영희,가 아니더라도 네가 읽은 책 속의 어떤 글 한 줄도 너의 삶을 바꾸지 못했다면 그 책들은 무엇하려 읽은 것이냐고, 이제는 선생이 다시 꾸짖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선생의 글이, 선생의 삶이 여전히 내 주위를 떠돌며 나를 부끄럽게 하고, 깨우치게 하는 한, 적어도 가망 없는 시절을 핑계삼아 어딘가에 숨는 일도 이제는 어려울 듯 싶다. 화끈거리는 마음은 쥐구멍 앞을 서성이지만 그도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선생님, 사랑을 목발 짚어 살아온 어느 시인처럼, 선생님을 목발 짚어 살아보려는 후학, 아니 후학이라고 혼자 우기는 이가 있습니다. 어떤 이유를 들어서도 반가우실리는 없겠지만, 그렇지만 말입니다, 선생님, 다독이고 독려해야 할 청춘이, 제가 아니더라도 아직 많습니다. 그러니 아직은, 그리고 앞으로도, 강건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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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0-03-15 공감(9)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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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은 반드시 온다! 사유하라!
70,80년대 한국의 청년들, 그리고 대중의 사상적 은사였던 이영희 선생을 왜 지금 다시 논의하여야만 하는가? 다시 말해 ‘의식화’로 대변되는 정신의 혁명, 대중의 깨어남이 요구되는 까닭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 당위의 질문에 대하여 이 저술은『전환시대의 논리』,『우상과 이성』으로 상징되는 잠자던 대중을 깨웠던, 즉‘깨어난 자들의 끊임없는 증식’을 통해,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던 독재의 암흑이란 철벽을 부수고 일궈냈던 민주화의 성취가 오늘에 다시금 어떠한 의미로 다가서는지를 세대와 분야를 아우르는 인물들의 담론으로 펼쳐내고 있다.
여기에는 인권이 유린되고, 자유는 억압되었으며, 밀실로 붙들려가 폭력에 시달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나가는 민주주의의 실현은 요원하기만 하였던 악독한 독재정권이 지배하던 시절, 역사의식도 없으며, 세계사적 흐름을 읽지 못하던 무지몽매한 지배계급의 폐쇄적 폭압의 시대에나 필요했지 오늘에 새삼스레 대중의 집단적 각성, ‘의식화’의 논리를 꺼내드는 것은‘꼰대’들의 구시대적 발상이라는 냉소도 있다. 더구나 온통 물화(物化)되어버린 사회, 당장 밥벌이라는 생존의 문제에 허덕이고 있는데 무슨‘자유’타령이냐, ‘자본주의에 편입’되기 위해 발버둥치기에도 모자란 형국이란 말이다. 라는 88만원 세대의 항변도 있다.
그러나 잠시라도 소위 자기 계발이란 것을 소홀히 하면 경쟁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높으니‘자본의 도구’가 되는 종속을 택하는 것이 옳다는 이러한 단순화된 양자택일의 논리는 왠지 설득력을 갖추기엔 미흡하지 않은가? 당장은 안전한 자신의 보위가 되는 듯 보이지만, 이는 결국 부정의와 불평등, 비인간화, 인간소외를 고착화시키고 자본의 노예로 길들이려는 지배계층에 굴종하는 삶을 완성하는 것 이상이 아닐 것이다. 오늘의 우리사회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라는 무한경쟁 시장의 논리, 즉 시장만능의 이데올로기는 경쟁의 원리, 약육강식의 원리, 탐욕의 원리만 작동되고, 이를 위해서는 인권, 자유, 민주주의는 기꺼이 희생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국가경쟁력 제고라는 미명하에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자유를 부인하던 군부독재 시절로 역진된 형국과 한 치의 차이도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무감각, 무의식을 자처하고, 지배자들에게만 가치판단을 맡길 때, 어느덧 회복할 수 없이 잘 길들여진 비인간화된 노예의 삶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불평등, 억압, 배제와 차별이 고착화된 사회, 작은 물질에 자신의 자유를 내어준 사람들이 기대할 수 있는 사회의 모습일 것이다.
‘완전한 사고 정지증’에 걸린 듯한 오늘의 사람들에게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집단적 각성, 의식화가 지닌 의미의 오늘에서의 재해석을 필두로, 신자유주의적 세속(反)윤리의 틀을 벗어나 경쟁의 바깥으로 탈주하는 것으로서의 책 읽기,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의 이해를 통한 전쟁의 파렴치한 속성들 - 권력과 민중 격차의 극대화, 제국주의의, 계급원칙의 적나라한 불평등... -에서부터 “사대주의에 기초한 허구적 주류의식과 무지몽매함”으로 한국전쟁의 참화와 분단국가의 서러움을 겪고서도 전쟁에서 완전히 벗어날 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오늘날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의 또다른 냉전체제의 병리현상을 지적하기도 하며, 정말 기형적인 한국 기독교의 본말이 전도된 제도 종교로서의 비판과, “예수를, 진리를 이기적 욕망충족의 수단으로 착각”하여 “욕망에 마음을 굽히고 돈에 허리를 굽히는 행위가 사실상 우상숭배라는 사실에는 아랑곳하지 않는”종교인에 대해 생각한다.
한편, 영어를 강조하는 상상력빈곤의 이 사회의 진정한 속셈인 “지배세력의 입장에서 볼 때 영어가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 할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이라는 통찰과, 창조적 사유의 자리가 없는 실용영어가 지니는 허위, 그리고 무엇보다 원어민 교육을 받아 혀 꼬부라진 그럴듯한 발음에도 정작 “비판적이고 포괄적인 사고력이 없는” 맹탕의 영어로 일그러진 한국인의 초상을 말한다. 그럴듯한 발음의 영어를 구사하지만 사유와 지식이 없는 무식한 영어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점이다.
특히, 지식인에 대한 사회적 책무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은 이 저술과 이영희 선생의‘배우게 하는 사람’이라는 스승의 개념과 연결되어, 학벌세상의 승자인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을 향해 매운 회초리를 든다. 삶과 앎이 불일치하는 한국 지식 사회의 고질병은 물론, 탈근대적 과제와, 여전히 매우 질 낮은 민주주의와 같은 근대적 과제까지 중첩된 한국사회에서의 합당한 지식인의 역할을 논의한다. “현학의 하늘에서 대중의 땅으로 내려와 그곳에서 지식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체득해야 한다는 권유”는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자각한 파리아(pariah,주변인)의 관점’그것으로서, 지식인의 계몽자로서의 기능을 강조한다.
극단적인 신자유주의와 시장지상주의를 밀어붙이는 이 정권은 점점 대중의 사회안전망을 축소하고 개인의 행복이나 복지가 모조리 개인의 책임이 되는 사회로 퇴행시키고 있다. 또한 교육은 “‘약자를 보호하자’가 아니라, 심지어‘강자가 어떻게 약자를 더 잘 먹을 수 있을까’를 가르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옛날 옛적부터 잘 먹고 잘산 놈들이 제 권리를 잠시 빼앗겼는데 도로 찾으려 일어나는, 반동이 일어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인 것은 역사의 경험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평등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보편적 복지가 높아지고 생산성도 높아질 수 있도록 가치관, 인간관, 세계관을 개량하는데 노력을 경주하여야 할 것이다. 눈앞의 풍요 속에 매몰되어 진정한 가치들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악덕한 제도, 정치, 사상에 굴종하지 않는다는 저항적 인간을 목표로 하는 자기의식의 전환을 이야기하는 이 저술은 그래서 지금에 다시 이영희를 말하고, 집단적 깨어남을 말하여야 하는 필연적 요구를 담고 있다. 오래전 대학신문사에서 독재정권의 말로를 지켜보고, 그리고 더욱 악질의 군사정권이 들어서는 폭력의 시대에 이영희의 저작들을 읽고, 민주화운동을 취재하며 학우들과 울분을 토해내던 그 시절을 떠올린다. 더 이상 이러한 집단 의식화를 얘기하는 세상이 아니기를 바랐건만 소비지상의 물화된 신자유주의라는 우상으로 바뀐 대상이 30년 전으로 사회를 역진시키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역사와 철학, 문학과 예술 등 다방면의‘특수 지식인’들이 바로 이러한 각성을 위해 대중을 향한 노력을 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변혁은 반드시 올 것이란 말을 되새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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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 2010-03-12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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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를 통해 교양을 읽다
시대가 어려울 때일수록 사람들은 진정한 이 시대의 양심을 원한다. 우리나라는 해방이후 군부독재 시대라는 암울한 시기를 거치면서 많은 양심들이 힘들고 모진 시기를 거쳐왔다. 그 중에서도 ‘리영희;라는 이름이 남긴 의미는 남다르다. 지금까지도 그의 이름 세 글자는 ’민주화‘ 라는 화두와 함께 우리에게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이 책은 2009년 12월 2일 리영희의 팔순을 기록하고 기념하기 위해서 기획된 것이다. 리영희가 이 시대에 던져준 의미와 영향력을 되새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리영희를 프리즘으로 삼아 우리 시대를 이해하고, 다른 삶과 다른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교양 목록을 제시한다.
리영희와 생각하기에서부터 책 읽기, 전쟁, 종교, 영어 공부, 지식인, 기자, 사회과학, 청년 세대 등에 이르기까지 리영희를 매개로 다양한 교양을 이야기한다. 각 주제는 지금 현실과도 직결되는 주제들이다. 간단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내용들이 아니다. 오랜 공부와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논의될 수 있는 묵직한 주제들이다. 리영희의 삶과 인생이 함께 녹아든 주제들은 리영희라는 인물 앞의 우리들이 더욱 작게만 느껴지게 만든다.
예전 세대에 비해 요즘 세대는 비주얼과 감각적인 면에 많이 노출되어 있다. 즉물적이고 즉흥적이라는 이야기도 있다(물론 절대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대중교통이나 거리에서 휴대전화, MP3, DMB에 익숙한 젊은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점점 생각하는 시간이 적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지은이들이 이야기하는 생각하기와 책 읽기, 영어공부, 청년세대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쯤 숙독해 볼 필요가 있는 이야기다.
이제는 하나의 거대한 집단으로 변해가고 있는 종교에 칼날을 들이대고, 지식인으로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지 지식인의 책무를 묻기도 한다. 이쯤되면 이 책이 단순히 리영희의 의미와 그 영향력을 읽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지금 현재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생각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로 모시는 70, 80년대 학번부터 2000년대 학번까지 세대를 뛰어넘는 다양한 이야기꾼들이 참여하고 있다. 세대를 넘나드는 이야기는 리영희에 대해 다양한 시선으로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세대를 넘어서서 리영희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리영희라는 인물이 가진 진실한 교양인으로서의 모습때문이 아닐까.
교양을 뜻하는 영어 'culture'의 원뜻은 '경작(耕作)'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풍부한 지식과 인격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경주되어야 한다. 천박한 지식과 대중들의 인기에 영합하는 아집이 판을 치는 세태가 되어서는 안된다. 급변하는 현실 사회와 정치 속에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교양인이 필요하다. 교양을 다시금 이야기해 보아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리영희를 더 읽어야 하고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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