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23

알라딘: 자살론 - 고통과 해석 사이에서 천정환

알라딘: [전자책] 자살론



[eBook] 자살론 - 고통과 해석 사이에서 
천정환
(지은이)문학동네2019-11-14 








































8.6 100자평(4)리뷰(7)


책소개
‘자살의 근대’를 통해 반추하는 죽음과 삶. 한국에서 일어나는 자살의 성격과 원인, 그리고 그것을 드러내는 문화적 표상 방식 등을 과거로부터 계보화해 추적하면서, ‘지금-여기’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자살들과 그것을 둘러싼 문제상황을 섬세하게 돌아보며 우리 사회를 다시 한번 진지하게 성찰하기를 청하고 있다.

이 책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자살의 원인으로 일컬어지는 화소들이 역사적으로 계속 바뀌어왔다는 점이다. 책에 따르면 현재 우리가 자살의 원인으로 당연하게 여기는 “우울증이라는 진단명과 그 사용이 역사적”일 뿐 아니라, 자살이라는 죽음의 형식 또한 “근대적”인 성질을 띤다. 조선 시대에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 시대 사람들은 유교적 봉건 이데올로기의 작동 속에서 “분하고 수치”스러울 때 목숨을 끊었다.

역적 집안으로 낙인찍혔을 때 이후의 삶이 죽음보다 더한 것이기에 가족 전체가 집단 동반자살했다. 또한 열녀 이데올로기가 조선 여인들을 수치 속에서 죽음을 선택하게 했다. 즉 이념적, 정치적 성격이 강한, 자기 처벌적 성격의 죽음이거나 정치적 항거로서의 죽음이었거나 또는 그렇게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살의 서사도 망탈리테의 변화와 함께 1910년대에 들면서 “염세” “정신착란” “신경쇠약” 같은 새로운 화소가 등장해 자살을 해석하는 코드를 대체한다.


목차


프롤로그_자살에 대한 미메시스

1장. 자살과 자기계발 사이에서: 자살 문제를 보는 관점
1. 한국에서의 자살
2. 사자死者의 고독+살아야 하는 이유
3. 병리로서의 자살과 ‘우울’이라는 테제
4. 자살과 사회, 그리고 경제
5. 국가와 자살
6. 자아.관계.표상으로서의 자살

2장. ‘마음의 봉건’으로부터의 이행
1. ‘역적’ 양반가 사람들의 집단자살
2. 분에서 고통으로, 부끄러움에서 우울로: 자살의 심리적 동기와 표상의 변화
3. 절節과 수치에서 고苦로: 자살과 젠더 관계에 일어난 변화

3장. 사랑과 자살, 실연과 정사
1. ‘실연으로 인한 자살’: 연애와 자살
2. 근대 초기의 정사
3. 근대화 개발 연대(1960~70년대)의 정사와 치정
4. 정사는 어떻게 사라졌을까?

4장. 식민지 조선인의 자살과 ‘해석 갈등’
1. 자살과 새로운 자아.사회.관계
2. 자살의 새로운 표상공간
3. 갈등하는 ‘해석’들: 자살에 대한 의미화 방식과 해석
4. 조선총독부 통계에 나타난 근대 초기의 자살 경향

5장. 자살과 ‘경제’ 그리고 자살의 ‘식민지 근대’
1. ‘경제’와 자살의 연관성을 보는 관점
2. 식민지 경제와 자살의 서사
3. 자살률을 낮추는 방법

6장. 정신질환과 자살: 식민지 조선의 정신착란과 신경쇠약
1. ‘정신착란에 의한 자살’
2. 신경쇠약과 근대성
3. ‘온갖 정신병 환자들’과 자살의 근대

7장. 자살 문제에 대한 근대국가와 사회의 대응
1. ‘자살예방의 날’
2. 근대국가와 자살의 사회화
3. 조선인 사회의 자살 인식과 담론
4. 근대화 개발 연대 자살 문제의 사회화와 자살예방 제도
5. 자살 문제가 진정 심각하다면

에필로그_자살의 모던과 포스트모던, 그리고

접기


책속에서



자살을 삶 자체 처럼 ‘복잡하게’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자살한 사람들은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즉 그들은 모든 우리처럼 삶의 구체적인 조건을 가진 존재들이며, 자살에 관련된 ‘객관적인’ 상황과 맥락들을 갖고 있다. 그 상황과 맥락을 곧 ‘자살 이유’라 등치시켜 말하기는 어렵다. 즉 자살의 ‘이유’가 아니라 자살의 ‘문제상황’이 있다.
(46면) 접기 - 라이언럽



저자 및 역자소개
천정환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부산 출생. 한국 현대 문화사와 문학사 연구자. 『문화론적 연구’의 현실 인식과 전망』(2007),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2013) 『근대의 책 읽기』(2003) 등을 발표하여 한국 현대문학사 연구의 폭을 넓히고, 『대중지성의 시대』(2008), 『조선의 사나이거든 풋뽈을 차라―스포츠민족주의와 식민지 근대』(2010), 『자살론―고통과 해석 사이에서』(2013), 『시대의 말 욕망의 문장―123편 잡지 창간사로 읽는 한국 현대 문화사』(2014) 등을 썼다. 『혁명과 웃음―김승옥의 시사만화《파고다영감... 더보기


최근작 : <숭배 애도 적대>,<문화과학 108호 - 2021.겨울>,<현대사회와 범죄학> … 총 34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우리는 모두 자살생존자들이다
‘자살의 근대’를 통해 반추하는 ‘지금-여기’의 죽음들, 그리고 삶

“이제 우리는, 누가, 어떻게, 죽으면 충격을 받고, 또 그것을
인간다움에 대해 함께 성찰하고 실천하는 재료로 삼을 수 있을까?”

대한민국 국민은 전 세계에서 자살할 확률이 가장 높은 ‘가장 우울한’ 국민이다. 한국사회에서 자살은 웬만한 유명인의 것이 아니고서야 딱히 놀랄 만한 사건도 아니게 돼버렸다. 2013년 11월 현재, 한국의 자살률은 8년째 OECD 국가 중 1위를 기록중이며, 한국 10~30대의 사망원인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또한 자살이다. 그러나 이런 팩트조차 이제 더이상 충격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과 죽음에 둔감해진 것일까. 그렇다면 왜 그렇게 되고 말았을까. 이 책은 한국에서 일어나는 자살의 성격과 원인, 그리고 그것을 드러내는 문화적 표상 방식 등을 과거로부터 계보화해 추적하면서, ‘지금-여기’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자살들과 그것을 둘러싼 문제상황을 섬세하게 돌아보며 우리 사회를 다시 한번 진지하게 성찰하기를 청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자살생존자들이다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은 대한민국 모두를 충격과 비탄 혹은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 파장은 엄청난 것이어서 아직도 ‘노무현의 유령’은 우리 사회를 배회중이며, 실제로 한국 정치판을 움직이는 하나의 힘으로 작용한다. 배우 최진실씨를 비롯한 수많은 유명 연예인의 자살, 스무 명 넘게 죽어나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과 그 가족의 자살, 남성연대 대표 성재기씨의 자살은 어떠한가. 각기 원인과 후과가 다를지언정 우리는 타인의 죽음에 강하게 영향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됐다. 2012년 한 해 자살자는 14,779명, 하루 40여 명 꼴이었다. “이제 자살은 우리 사회에서 말 그대로 ‘흔한’ 사건이” 된 것이다. 한마디로 자살은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병리 현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이러한 사태에 세심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으며, 자살이라는 죽음의 형식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무엇이 우리를 자살이라는 가장 외로운 죽음에 이르도록 만드는가.

자살의 폭주는 공적 공간에서 그야말로 ‘만연한’ 담론으로 우리 앞에 표명된다. 정부와 언론은 높은 자살률을 언제나 걱정하고 그 치유를 고민하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 위선이며 기만이다. (…) 자살 ‘사태’의 배후에 있는 계층적· 세대적 상황을 제대로 분석하고 진단하며 치유할 대안을 만들어내지 않을 뿐 아니라, 자살자의 가족이 받는 상처에 대해서도 아직은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로는 높은 자살률을 걱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양극화와 투기를, 그리고 무한경쟁을 고무· 조장한다. _본문 33쪽

자기계발하는 신자유주의적 주체들의 우울한 죽음
현재 미디어가 자살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가장 커다란 화소는 ‘우울증’이다. 자살자 대부분은 우울증에 걸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설명된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자살을 개인의 정신병리 현상으로만 표상되게 할 가능성 때문에 완전하지 못하며, 자살의 사회적 원인을 적절히 담아내지 못한다. 사회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에밀 뒤르켐이『자살론』을 통해 ‘자살’을 사회적 현상으로 읽어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자살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우울의 배후에도 원인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우울증이 내포하는 의미가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근래 우울증은 때로 그 의미를 지나치게 확장하고 있다. 심지어 ‘만유 우울증론’이라 부를 만한 논리도 있다. 지나치게 수줍거나 시끄러운 성격뿐 아니라, 문학· 예술, 그리고 비판적 지성과 결부된 파토스도 우울증의 일환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뿐 아니라 ‘상식’을 벗어났다고 판단되는 사상과 주의도 그렇게 간주될 수 있다. 미국에서 생산되어 그 나라 일각을 지배하는 이 같은 사고는 속류적 생물학주의의 소산이다. _본문 43쪽

그러나 한편,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현대 한국사회에서 자살과 결부된 우울증은 ‘자아의 테크놀로지’ 문제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점이다. 스스로를 기업화해 관리해야 하는 신자유주의적 주체들은 그 어느 시대의 인간들보다 외롭고 외롭다. ‘친밀성의 구조’는 깨지고 외로움은 병원에서 ‘치료’받아야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관계의 위기다.

오늘날 만연한 자살은 ‘자아’들이 덮어쓴 양면 가면의 어두운 뒷면이며, 그 앞면은 경쟁의 전쟁터를 그야말로 홀로 ‘각개약진’하는 ‘자기계발’ 전사의 ‘쿨하고’ 잔인한 얼굴이다. 이 야누스는 심약하고 허약하다. 각도를 조금만 틀면 가려진 그의 뒷면이 보인다. 쓰러지도록 지치고, 더 외로운. _본문 61쪽

자살의 표상과 서사도 역사에 따라 바뀌어왔다
한 가지 이 책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자살의 원인으로 일컬어지는 화소들이 역사적으로 계속 바뀌어왔다는 점이다. 책에 따르면 현재 우리가 자살의 원인으로 당연하게 여기는 “우울증이라는 진단명과 그 사용이 역사적”일 뿐 아니라, 자살이라는 죽음의 형식 또한 “근대적”인 성질을 띤다. 조선 시대에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 시대 사람들은 유교적 봉건 이데올로기의 작동 속에서 “분하고 수치”스러울 때 목숨을 끊었다. 역적 집안으로 낙인찍혔을 때 이후의 삶이 죽음보다 더한 것이기에 가족 전체가 집단 동반자살했다. 또한 열녀 이데올로기가 조선 여인들을 수치 속에서 죽음을 선택하게 했다. 즉 이념적, 정치적 성격이 강한, 자기 처벌적 성격의 죽음이거나 정치적 항거로서의 죽음이었거나 또는 그렇게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살의 서사도 망탈리테의 변화와 함께 1910년대에 들면서 “염세” “정신착란” “신경쇠약” 같은 새로운 화소가 등장해 자살을 해석하는 코드를 대체한다.

강하게 말하면 한국 근대문학 자체가 새로운 죽음충동과 함께 성립된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즉 ‘초기 근대소설=자살론’이라 해도 좋을 만큼 초기 근대소설의 ‘자아’는 우울과 허무한 자의식에 휩싸여 있고 자살생각에 대한 표백으로 점철돼 있다. _본문 88쪽

근대 이행기이자 식민지 시대였던 1910년대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자살의 서사는 급격하게 변화한다. 개인과 사회가 맺는 관계의 변화에 따른 것이다. 근대성의 한 가지 축인 ‘개인의 내면’이 완성되는 시점을 정확하게 잘라 말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마음의 봉건”은 근대에 들면서 자살의 원인 혹은 자살의 서사로부터 멀어진다.

젠더와 자살, 연애와 정사
조선 시대 여성은 봉건적 남성중심주의의 억압적 가치체계 그 자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조선 시대에 젠더적 주체로서의 여성은 존재하기 힘들었다. 조선 시대 여성들은 수절을 지키며 살거나 남편을 따라 죽기를 강요받았으며, 성폭력을 당했을 때 자결함으로써 봉건 이데올로기의 화신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의 삶 또는 죽음도 근대와 함께 서서히 변화한다. 시대적 한계가 있을지라도 식민지 시기 근대적 교육을 받은 신여성은 그때까지 여성이 겪어야 했던 고난을 타파해나가는 새로운 주체로서 부상했다. 1920년대에 부상한 새로운 문화적 코드라 할 만한 동등한 남녀 주체 간의 사랑, 즉 ‘자유연애’도 봉건적 이데올로기가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었다. 실연 때문에 자살소동을 벌이는 남성이 등장했으며 자유연애는 ‘수입된 죽음의 형식’이자 ‘열정적 사랑’의 표상인 정사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구조 또한 봉건에서 후기근대로의 시대적 변화와 친밀성의 구조가 변화함에 따라 달라지면서 정사 또한 거의 쓰이지 않는 말이 되다시피 했다.

오늘날 (…) 정사는커녕 점점 ‘사랑’ 자체가 불능에 빠져든다. 많은 원인이 여기에 관련될 것이다. ‘사랑’으로 말하면, ‘열정적 사랑’이 ‘스펙’ 같은 ‘조건’에 의해 대체되고 있는 상황이 일단 중요하겠다. ‘후기근대’의 정황과 신자유주의가 ‘나’와 타자 사이의 거리를 다르게 하고 있다. ‘나’가 이렇게 ‘사랑’보다 더 중요했던 시대가 또 있었을까? (…) 사랑은 어쩌면 표피적인 소비행동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_본문 161쪽

저당잡힌 삶, 타인에게 잔인하고 죽음에 둔감한 삶을 양산하는 사회
인간다움과 친밀성의 구조는 복원될 수 있을까
자살은 다기한 원인에 의해 선택되거나 또한 그렇게 해석될 수 있다. 삶의 불완전성을 채우는 실존적 선택이기에 숭고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고독한 단자로서의 벼랑 끝에서 이루어지는 선택이기에 외로운 죽음이기도 하다. 또한 자살은 존중받아야 할 선택일 수 있지만, 경제적 생존의 모든 수단이 박탈되어 어쩔 수 없이 남은 한 가지 선택이라면 그것은 자살자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그렇기에 “자살이야말로 우리 사회와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살아 있는’ 비판”일 수 있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자살률이 높아진다는 연구결과도 있지만, 어느 정도 경제성장을 이룩한 저성장사회일수록 자살률이 높다는 상반된 연구도 상존한다. 중요한 건 그런 통계적 연구결과라기보다도 경제적 파탄이 어떻게 개인의 삶을 좀먹는지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그에 따른 제도적 구제가 아닐까. 생계형 자살, 취약계층의 자살에 관한 기사가 사회 구성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까닭은 그런 데 있는 것 아닐까. 경제 규모 10위권이라는 국가의 경제 성장이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다시 한번 묻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빚에 몰려, 고리대와 신체포기각서에 시달리다 끝내 자살을 선택하는 이들이 지금 대한민국에 수도 없이 많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 ‘생명존중 사상’을 고무한다고 해서 자살률이 낮아지지는 않을 것 또한 분명하다. 신자유주의의 무자비한 경제 논리와 스노비즘적이며 불의한 통치, 그로 인한 친밀성의 실종을 경고하는 이들이야말로 지금 여기 대한민국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들 아닐까. 더이상 자녀의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할 수 없어 목숨을 끊은 기러기아빠, 회사의 부당한 처우에 대해 아무리 생계와 목숨을 걸고 싸워도 아무런 해결책도 얻어내지 못한 채 사회의 무관심 속에 자살하는 노동자들, 가난과 고독 속에 농약을 먹는 노인들, 입시지옥에서 허우적대다 창밖으로 몸을 날리는 청소년들이 상존하는 곳이 지금 이곳 대한민국 사회다. 접기


북플 bookple


평점
분포

8.6





개인적으로도 한 번 다뤄보고 싶었던 주제가 책으로 나왔다. 기대가 많다.
낮에뜬별 2013-11-26 공감 (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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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의 죽음이 낯설지 않다. 하지만 그 모든 게 개인의 우울증으로 치부되는 건 부당하다. 이 책에서 답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며...
minaret 2013-12-02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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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과 근대의 자살의 문화사적 의미를 보여주는 책. 저자는 상당한 분량의 통계들을 바탕으로 자살(이라 쓰고 사회적 죽음)을 해야했던 장삼이사들의 삶을 실증적으로 추적한다. 금권/속물 지배체제 하에서 성과와 경쟁에 지쳐 극단적 선택을 내리는, '죽음들'이 만연한 풍경을 진지하게 고찰한 수작!
수다맨 2016-11-17 공감 (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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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론.




전 세계 국가 중 자살 1위인 국가치고 아직도 우리에게 맞는 자살론에 관한 책이 변변하게 없었다. 이 책이 이제야 나온 것을 보면 그동안 실로 다양한 자살의 사례가 있었음에도 자살에 대한 공론화가 요원하였다는 반증이다. 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해 버리고 자살론을 꺼내는 것조차도 터부시했다. 아직도 여전히 자살을 이야기하면 더 열심히 살아야지, 죽긴 왜 죽냐라는 가혹한 소리나 해댄다. 아니, 아예 꺼내는 것 조차 싫어한다. 따라서 이 책은 자살의 개론에서부터 조선시대와 근현대의 자살의 사례를 분석하고 개인적이며 사회구조적인 자살의 형태를 분석하여 집대성하였다. 작가의 자살에 대한 연구의 수고가 대단하다. 자살에 대한 방대한 데이터를 근거로 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 아침에 출근하다가 라디오 뉴스에서 집배원이 자살로 벌써 몇 명이나 잃었다는 슬픈 소식도 들었다.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자살은 이렇게 너무나도 일상적인데 우리들은 여전히 자살에 대한 말도 꺼내지도 못하고 있구나 싶었다. 실로 죽고 싶을 만큼 고독하고 힘든 삶이란 것에 내몰린 사람들이 그만큼 한계치를 넘었고 임계점에 다다른 사회에서 과연 우리는 여전히 아이를 낳고 가르치고 밥 먹고 일상을 별 무반응처럼 살아도 되긴 하는 걸까?



책에서도 밝혔다시피, 현대의 자살은 우울증으로 모든 것을 덮어 쉬우려고 논리를 개발하지만 과연 이 우울의 근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진척을 보이지 못한다. 우울의 원인들은 좀 더 근본적이고도 본질적인 삶에 대한 해석을 요구하고 현실의 삶에 대한 구조적이고도 강고한 이 벽에 대한 논리를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자살자 한 사람을 통해서 주변으로 파급되는 심리적인 충격은 평생을 따라다니게 한다. 죽어도 혼자 죽을지는 모르지만 죽고 나서 주변의 지인들, 혹은 가족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어마어마하다. 자살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 자살자의 여러 가지 구출 요청에 대해 알지 못했다는 후회감 등등 이런 복합적인 감정들이 현재의 삶을 피폐화시키는 전파력은 끔찍하게 후유증으로 남는다. 그래서 건강한 사회일수록 우리가 삶을 어떻게 바라보며 자살에 대한 문제를 공론화시키며 공감대를 형성해나가며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지점에 있다는 거다.



나는 자살시도까지 포함해서 자살자를 벌써 3분이나 겪었다. 비록 죽고 난 이후에 알았지만 대부분은 경제적인 상황만 유추될 뿐, 딱히 경제적인 문제 이외에는 확실한 동기의 증거를 알지도 못했다. 마찬가지로 죽고 나서 직접적인 유서로 인해서 자신의 동기를 구체적으로 밝히면 그게 원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지만 자살자는 유서를 쓰지 않았을 경우에는 무수한 추측만 해댈 뿐이다. 이유야 뭐가 되었던 지간에, 파급되는 충격은 전염되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다. 그만큼 자살은 자학의 끝판왕인 셈이다.



이 책에서는 시대별로 자살에 대한 트렌드를 분석하고 시대의 구조적인 시스템의 문제를 짚어나간다. 조선시대의 자살과 자살의 세계관을 이야기하고 근세의 자살에 대한 분석을 논의했으며 현대의 자살을 따져 묻고 해석한다. 요즘에는 조선시대처럼 선비가 가지는 명분으로 자살이 없다. 신념을 지키기 위해 죽는 것보다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경제적인 어려움 등으로 죽어나간다고 봐야한다 낙오는 결국 자살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이처럼 자살도 사회의 골조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봐야 한다. 살아가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어려운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본능적으로도 죽음을 회피하려는 진화의 속성에 극적으로 역행한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 맞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역행적 상황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것일까? 현대의 자살은 경제적인 무게 때문에 이 무게에 짓눌린 자살이 허다하다. 근대 사회에서처럼 염세나 낭만 따위의 그런 자살이나 중세 시대의 신념이나 가치관, 또는 자신의 이념을 위해 의사를 표현하는 자살은 분명 현대 사회와 차이가 확연하다.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까지 했던 것도 살아가는 것이 죽는 것보다는 낫다는 가치를 담은 속담일 뿐 차라리 똥밭을 싫어하는 경우에는 뭐라 설명할 방법은 없다. 매일 시달리느니 차라리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는 것으로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가 거두어 짐을 벗으려는 욕망은, 똥밭이 더 처절할수록 더욱 강렬하다. 어쩌면 신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가난한 자의 삶은 차라리 살기보다 죽는 편이 나은 것인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어쩌면 오늘날의 자본주의 시대에 약간만 실수하게 되면 자신의 삶을 놓쳐버리게 만드는 우리 모두는 예비 자살자인 거나 다름없어 보이기도 한다. 무엇 때문에 억지로 사나라는 물음 앞에서 이 무엇의 요체를 정확하게 들여다보게 되면 그리 썩 긍정적이지만은 않게 보인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삶의 모순에 대한 절대적인 해결은 곧 죽음일 텐데, 스스로의 선택에 대한 질타는 딱히 하고 싶지도 않다. 무슨 선택이든 간에 "오죽했으면!~"이라는 공감과 이해를 먼저 선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질 뿐이다. 그렇다면 죽을 사람도 살리지 않을까 싶었다.



우리는 매일매일 죽어간다. 시간과 겹쳐 놓은 공간에서 한 자루의 초와 같은 운명을 본질적으로도 타고났다. 태어나는 순간과 같이 한 자루의 초가 필라핀을 끓어 심지에 불을 붙이듯, 우리 삶도 육체를 통해서 삶을 태우기 시작한다. 언젠가는 이 초가 에너지를 다할 때 꺼진다. 이는 무조건이다. 영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타는 와중에 스스로 타는 초의 심지를 꺾어버리는 것.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자살이나 마찬가지다. 하기야 먼저 가 나 뒤늦게 에너지가 엥꼬될 때까지 타다 가느냐라는 차이는 시간차일 뿐일텐데, 그래도 우리는 에너지가 모두 소모될 때까지 수명을 다하는 것을 인생이라고 부른다. 오늘도 우리는 열심히 제 삶을 자살하고 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곧 지금 이 순간 어떻게 무얼 하며 살까와도 같은 질문이다.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뭐가 차이 있다고 지금을 살고 있는지, 자살론을 통해서 내 삶의 자살에 대해 스스로가 묻는 질문지이길 이 책을 통해서생각해보게 된다.



그래서 항상 떠올린 문구 하나, 메멘토 모리 !~



PS : 1일 자살자수 : 40명. 1년이면 1만4천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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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7-07-19 공감(37) 댓글(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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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이 과연 자살인가.




에밀 뒤르켐의 유명한 책, '자살론'과 같은 제목의 책이다. 하지만 부제인 '고통과 해석 사이에서'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건조한 사회학적 분석만을 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대체 왜 자살하는가에 주목한다기 보다는 사회가 자살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더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살아있는 자, 이 책에서 사용되는 표현을 빌리자면 '자살 생존자'들은 자살을 "삶의 실패"로 받아들인다.



자살자에게는 빈소를 차려 장례를 치러주지도 무덤을 만들어주지도 않았던 것은 산 자들의 '보복'이라 할 수도 있다. 자살은 저항이거나 일탈, 죄이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통계청과 경찰청의 자살률 통계가 차이 나는 것으로 현상한다. 사람들은 사망 신고서에 자살한 자기 가족의 사망 원인을 허위로 기재한다. 자살은 죽은 자에게뿐 아니라, 그 가족에게도 삶의 '실패'로 간주되기 때문일 것이다. (34쪽)



그러나 과연 자살이 삶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일까? 그들이야말로 삶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 아닐까? 이상적인 삶을 꿈꾸던 사람들이 그 불가능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 그래서 자살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자살이 사회문제라는 것은 이젠 너무나도 뻔한(?) 이야기다. 자살률 세계 1위라는 표현 등에 우린 이미 익숙해졌다. 내 생각에 중요한 것은 자살률이 아니라(물론 자살률이 높다는 건 분명 사회문제다. 하지만) 그 자살을 어떻게 인식하느냐다. 과연 우리 사회, 혹은 이 사회의 구성원들이 자.살이 문제라는 걸 모르고 있을까? 왜 그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지 정말 모르는 걸까? 살아있는 우리는 문제가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다만 그것을 모른 척할 뿐이다. 그리고는 매번 새로운 것을 발견한 것처럼 놀라는 것이다. 이 기만을 까발리기 위해서는 죽은 자들이 "왜 죽었는가"를 물을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들이 자살의 이유로 무엇을 꼽고 있는가를 건조하게 분석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살 원인의 카테고리를 분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책에서는 주로 조선시대와 식민지기를 살펴보고 있는데, 특히 식민지기 일제의 자살 원인 분류는 상당히 흥미로운 주제다.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그 분류 자체가 상당히 작위적이고 기준이 애매하기 때문이다. 자살이 '문명화 정도'를 증명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부분에 이르면, 이 작위성은 극에 달한다.



식민지 경찰이 파악한 자살 '원인'의 '실상'은 과연 무엇일까? 이 '원인'을 자살자가 처한 '문제상황'과 죽음의 '맥락'에 대한 식민권력의 표현이라 이해해야 한다. 그러할 때 우리는 '자살의 식민지 근대'를 둘러싼 문화정치를 살펴볼 수 있다. (199쪽)



1927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의 인구현상>은 자살자 수의 증가를 문화 진전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로 간주했다. "조선의 자살 비율이 내지의 절반에도 미치지 않는 것은, 민족성 문제가 작용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주로 양자의 사회 상태의 도달한 정도의 차이"라는 것이다. (194~195쪽)



또 하나, 이 책에서 지적하는 것 중 중요한 것은 경제 지표를 자.살과 연결시킬 때 수없이 저지르는 부주의에 대한 것이다. 자살 문제가 굉장히 복잡하며 여러가지 요소와 관계가 있음을 생각하지 않고서 수치와 지표를 들이대다보면, 엄청난 오류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거다. 앞서 말한 것처럼 '자살률'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이런 오류를 야기할 수 있다.



이를테면 실업과 자살의 연관성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실업이 개인에게 경제력과 경제적 목표를 달성할 기회를 박탈하게 하는 것뿐 아니라, 자아존중감과 가족 등 타자들과의 관계를 크게 훼손할 수 있기에 자살에 영향을 미친다는 방식의 담화일 것이다. 즉 자살 유발요인과 문제상황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서 '실업'이 의미 있지, 실업'률'과 자살'률'의 관계에 대한 설명 따위는 사회의 누구에게도 무의미한 지식이라는 것이다. (214쪽)



아쉬운 점은 책의 결정적인 부분마다 애매하게 처리된 부분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이 주제를 다루면서 어찌 쉽게 단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겠냐만, 그래도 독자의 입장에서는 아쉬운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부분들.



'분'을 이길 합리적 방법을 찾는 것, 다시 말해 '분을 못 이겨' 제 목숨이나 남의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정동이, 합리적이고 절차가 차갑고 지루한 법과 제도의 과정으로 대체되게끔 하는 과정과 근대화 · 문명화가 긴히 관련된다고 해도 좋을까? (82쪽)



매우 흥미로운 부분인데 사실 이 부분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은 되고 있지 않다. 다만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부분은 과거에는 '분사'가 많았다는 것, 혹은 분사로 여겨지는 죽음이 많았다는 것 정도다. 위 추정은 충분히 설득력 있는 흥미로운 추정이지만 갑자기 몇 단계를 뛰어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럼에도 이 책은 매우 인상적이다. 특히 최근 읽은 책 중에 머리말이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이 아니었나 싶다. 이 책은 자살에 대한 저자의 진심어린 고민의 결과물이다. "자살로 인한 사회, 경제적 손실" 따위를 운운하는 천박함에 맞선, 성의있는 때로는 분노가 어린 고민의 결과다. 앞으로도 많은 논의들이 진행되어서 "생 자체를 포함한 제대로 된 삶"을 만들길 기원한다. 개인적으로 이 주제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연구자의 입장에서도 이 책은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다.



포스팅 제목에 "자살"을 치니 "생명은 소중합니다! 지금, 희망을 클릭하세요!"라는 메시지와 함께 자살예방센터 등등의 전화번호가 뜬다(네이버 블로그의 경우). 이 책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자살자가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아서 자살을 택하는 걸까? 우리 사회는 자살을 왜 예방하려는 걸까? 우리 사회가 과연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있을까? 자살 방지라는 차원에서의 캠페인이나 행정적 처분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그보다는 더욱 다양한 '자살론'이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애초부터 문제는 죽음이 아니라 삶이라는 사실을, "생명이 소중하다"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 소중한 삶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와 인식이야말로 자.살을 예방(?)하는 지름길이란 걸 당신은 정말 모르냐고 말하고 싶다. 얼마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또 한 명의 노동자를 생각하며, 그의 명복을 빈다.





사족. '자살'이라는 단어가 제목에 포함되어 있으니 아예 포스팅이 안 된단다(네이버 블로그). 웃기는 일이다. 이런 식이니 뭐가 나아질 게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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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뜬별 2014-01-05 공감(1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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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은 왜 이토록 흔한 죽음이 되었나




*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자살은 왜 이토록 흔한 죽음이 되었나



많은 사람들이 삶이 고통스러울 때 ‘자살’을 생각해봤을 것 같다. 나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이다. 하지만 자살을 실행할 세부적인 계획을 생각한 적은 별로 없었다. 관념 속에서 막연하게 죽어버리면 어떨까 생각했었다.



죽음이 구체적인 옷을 입고 나타난 건 몇 년 전 한 분의 죽음을 가까이서 목도했던 때부터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죽음은 복잡했고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죽은 사람과 관계있는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한 사람의 부재로 인한 고통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한 사람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와 연관된 사람들에게 오래 영향을 미치는 일이라는 사실 역시 깨달았다.



어쩔 수 없는 죽음 앞에서도 남는 자들의 고통이 이토록 큰데, ‘선택한 죽음’을 대할 때의 고통은 얼마나 더 크겠는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10년 넘게 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인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자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천정환의 <자살론>은 그런 고민들이 고스란히 담긴 책이다.



“자살은 ‘고통과 해석 사이’에 있는 무엇이다. 고통과 해석은 자살과 관계하는 주체성의 두 계기, 즉 경험과 인식을 뜻한다. 또는 자살의 ‘실재’와 ‘표상된 것’에 대응한다. 인간은 자살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서 고통을 경험하며, 고통을 회피하거나 극복하기 위해 자살한다. 그리고 인간은 타인의 죽음과 죽음에의 의지를 해석하며 삶의 의미를 성찰한다.”(26쪽)



“이 책에서 다루는 자살은 ‘한국인의’ 자살이 아니라 ‘한국에서의’ 자살이다. ‘한국인의’가 아닌, ‘한국에서의’라는 관형구는 자살하는 사람이 놓이는 삶의 구체적인 조건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중략> ‘한국인 고유의’ 심성과 그 집단적 발현태가 있다고 믿지 않는다. 특정한 시대의 사회문화․정치경제의 상황과 그것과 상호작용하는 집합적 심성의 구조가 있을 뿐이다.”(36쪽)



작가는 ‘한국에서의’ 자살을 “계보학적인 관찰을 통해 한국 사회/문화의 어떤 문제점과 자살이 연관되어 있는지 살피는 한편, 자살행동에 연루된 여러 가지 ‘문제상황’들이 어떻게 서로 다른 계층․젠더 주체들에 작용하는지도 서술”(34-35쪽)한다.



조선 시대부터 식민지 시기, 그리고 현대의 자살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사례를 정리하고 제시하며 해석하려는 시도를 한다. 그런 시도들은 ‘생명은 소중한 것’이라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말로 타인의 자살을 막을 수 없음을 시사한다. 또한 자살이 자살자의 개인적이거나 내면적인 문제나 정신질환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선택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인 변인들과 맞물려 일어나는 일임을 지적한다.



“(대부분의) 자살자들이야말로 어떤 면에서는 진정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야말로 최후의 궁지에 몰려,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엄을 지키고 최후로 타자들과 소통하기 위해 자살한다. 자살생각을 하는 순간 그가 누구든 일종의 사회적 약자이며, 거기에는 반드시 자살 원인을 제공한 상황과 구조가 있다는 점을 확실히 해야 한다. 그리고 자살은 대부분 일종의 “차악의 선택”이다. 또한 모든 자살에는 반드시 ‘원인’을 야기한 복잡하고 구체적인 관계의 상황이 있다. 따라서 사회적 우울과 고립을 줄여야 ‘삶의 질’을 높일 수 있고, ‘미래’를 살아갈 용기를 줄 수 있다.”(285쪽)



스스로 자살을 선택하지 않는 이상, 자살은 늘 ‘타인의 문제’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죽을 용기로 살지” 같은 말로 자살자를 ‘루저’로 인식하는 시선은 폭력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사유 없이 타인의 삶을 함부로 폄하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없다.



어쩌면 삶을 사랑했을 자살자들을 위해(혹은 앞으로 자살을 선택하고 싶어지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자살예방법이나 자살예방센터, 혹은 자살예방핫라인과 같은 전화 상담이 아니다. 자살을 야기하는 복잡하고 구체적인 원인에 대한 대책이다.



“자살이 만연한 사회는 제대로 된 사회가 아니다. 그것이 바로 현재의 대한민국이다. <중략> 즉 자살을 야기하는 사회구조를 고치고 ‘삶의 질’과 ‘행복’에 대한 인식의 패러다임을 고쳐나가는 것, 특히 학교나 직장에서 경쟁으로 야기되는 소위와 폭력의 상황을 줄이는 것, 자살위험군에 속하는 노인과 빈곤층 및 정신장애인들에 대한 실질적인 물질적․정신적 지원을 확충하는 것, 그리고 종합적인 긴급구제를 행할 수 있는 예방센터를 전문적인 인력의 힘으로 운영하는 것이다. 물론 자살에 대한 바람직한 앎을 증대시키는 것도 선행과제다.”(325쪽)



여기, 지금 한국에서의 자살은 ‘흔한 죽음’이다. 흔해질수록 자살이 우리에게 주는 충격도 점차 줄어드는 것 같다. 왜 자살은 이토록 흔한 죽음이 되었는가. 이런 현상을 마냥 지켜봐도 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이 책을 읽으며 같이 생각해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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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주 2017-06-13 공감(1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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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차원'에서 자살 문제를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책


자살을 둘러싼 문화 정치가 한국 근현대사에서 어떻게 구축되고 작동하였는지를 탐구한 책. 저자는 계보학적 방법론을 차용해 자살을 택한 사람들의 마음의 구조, 자살 및 자살자에 대한 사회적 의미화 방식에 관한 “문화사”를 써 내려간다. 이 책에서 자살한 사람의 자기 서사, 자살이라는 죽음의 형식을 둘러싼 사회적 해석은 근대 국가의 통치 권력과 지배 이념의 영향력 하에 놓여 있는 것으로 설명된다. + 더보기
stonewriter 2014-01-05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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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론> : 이성과 감성을 다하여 사회를 돌아본다




이 책을 읽는 중, 요즘은 무슨 책을 읽냐고 물어온 사람이 둘 있었다.

제목만 듣고는, 둘 다 왜 그런 무서운 책을 읽냐고.

덕분에 저자가 말하는 자살이 터부시되는 사회적 분위기도 새삼 확인했달까.

오해다. 전혀 무섭지 않다.

엄청 재미있게 읽었다.

지적이고 유희적이며, 이성적이고 감성적이다.

매우 만족스럽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정몽헌 회장의 자살을 계기로 자살을 화두로 삼게 되었다고 밝힌다.

"정몽헌 회장의 죽음이 자살로서는 훨씬 완벽해 보였다. 생활고에 떼밀려, 혼란스런 마음의 벼랑 끝에 섰기에, 복수하기 위하여, 또는 우울증의 끝에 택해지는 자살들에 비하여."




우연히 같은 자리에 있어 함께 그 사건을 접한 "병색에 찌든 얼굴과 가난한 외양"을 한 아낙은, "에유~ 쯧쯧!"하고 혀를 찬다.

"모든 산 자는 죽은 자를 위해 혀를 차며 동정할 권리를 가진 것인가."




저자는 도처에 널려있던 자살을 떠올린다.

"1986년의 봄에도 많은 어린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다"는 것.

"인간들은 더 강하고 깊게 서로 연결돼 있었던 듯하다. 타자들의 가난과 죽음이 나의 실존에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변수였던 듯하다."

"그러니까 그 중에서도 지나치게 선하고 예민한 사람들은 '5월'을 넘어 살아내기가 어려웠다. 자기 자신이라도 내던지고 공격해 세계의 비참과 불의에 작은 생채기라도 내고 싶어했던 듯하다."

누군가는 세상에 소리라도 내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데, 그 세상의 사람들이 이 죽음을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저자는 자살자들이,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자살을 주변 사람들에게 시사하거나, 토로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자살자는 최후까지 구원을 기대한다."

"누구에게나 삶이 딱 한 번이듯, '죽음'도 딱 한 번인 것이다. 그런데 이 어려운 타자의 '딱 한 번'에 우리가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저자는 "자살이란 우리네 삶과 사회의 한계 자체"라고 짚고, 관심을 촉구한다.

"직접성을 잃고 신자유주의의 효율에 '저당잡힌 삶'은, 죽음을 아무것도 아닌 사건으로 만들어버"리고 있지만,

"죽음에 대한 더 많은 앎이 삶을 더 존중하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믿기에 이런 글을 쓴다"고.




아래의 문장으로 저자의 논지를 보다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정몽헌씨의 자살이 좀더 '자살 그 자체'에 가까운 것은, '생계형 자살자'의 죽음이 타살로서의 성격이 훨씬 더 강하기 때문이다."

철저히 개인적인 자살이 얼마나 되겠는가.

가난해서, 도저히 살아낼 수가 없어서 죽는 생계형 자살이 진정 자살일까.

열녀를 칭송하는 사회, 정절을 잃거나 남편이 죽으면 따라죽어야 명예로운 것으로 간주되는 사회에서, 여성의 생명이나 인권은 '정절' 앞에서 한낱 이야깃거리도 되지 못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자살이 순수한 자살일까.




책에 의하면, 2012년 한 해 자살자는 14,779명, 하루 40여명 꼴이라고 한다.

뼈아픈 말, "사실상 우리 모두는 자살생존자다."




죽음, 특히 자살을 터부시하는 우리 문화에서 우리는 자살에 대해 무지하고, "무지와 기피는 자살을 방조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고로, 자살을 연구하는 것은 사회를 연구하는 것이다.




저자는 "자살이야말로 우리 사회와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살아 있는' 비판"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사는 곳이 아귀지옥임을 말해주고, 희생양이 되어 우리의 가해를 대속하는 존재라고.




국가는 자살의 '원인'을 정신질환 같은 개인의 문제로 돌리려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는 전체주의의 속성과 관계가 깊고, 박정희정권 역시 자살 통계를 포함한 각종 국가 통계를 비밀문서로 분류하고 통제, 은폐했다고.

지금의 한국은 자살률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실질적인 대책을 내놓지 않는다.

이는 대자본과 시장이 국가의 모든 것을 지배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진단한다.




책은 방대한 통계와 역사적 자료들은 물론 문학적 텍스트들을 활용하고 있어 매우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덕분에 문학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동시에 이성적인 독서를 할 수 있었다.

수입된(!) 정사(情死)가 식민지 조선에서 근대의 표징, 즉 '연애의 시대'를 드러내는 기능을 했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60년대까지 드물지 않게 등장했던 정사 및 실연자살은, 이제 드문 일이 되었다.

저자는 사회적으로 계몽되고 경제적 독립성이 커진 여성이 결혼(제도)이 가진 모순을 통찰하게 되었으며, 특히 신자유주의가 연애와 결혼의 의미를 변형시키고 있다고 분석한다.

남녀관계는 프로젝트가 되고 있으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자체를 시작하지 않게 하므로, 정사와 같은 극단적인 일은 애초부터 차단되는 셈이라고.

70년대까지도 언론에서 심심치 않게 써왔다는 '정사'라는 단어 자체가 지금은 사어가 되다시피 한 것도 이를 드러낸다.




우리가 현재 목도하는 자살의 모든 '이유'와 양상이 1910~20년대부터 본격화되고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조선에 이식된 자본주의는, 노동 능력이 없거나 최하층 소속의 사람들이 곧 '벌거벗은 생명'이 될 수 있는 성격의 자본주의였던 듯하다."

"요컨대 조선의 자살자와 아사자는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살자와 아사자는 또한 다 같은 "자연법칙의 희생자"다. 식민지 자본주의는 '문명'이 아니라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 지배하는 일종의 '자연'인 것이다."

또한 조선의 자살률 증가를 조선총독부가 '문명화', 즉 문화 진전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로 간주했다는 통탄할 만하다.

지금도 그런 식의 사고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꺼림칙한 마음이 든다.

저자는 "'성장'은 '자살'과 반대되는 자리에 있는 개념이라 할 수 있는 '행복'이나 '자아존중'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을 통계와 자료를 들어 설명한다. 성장만이 우리를 구원할 진리라고 믿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싶다.

"사회학자 정승화가 말한 것처럼 박정희의 근대화 개발이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던 1960~70년대의 "개발독재 시기는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자살률이 높았던 '절망의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곧 '아노미적 자살'의 개념인데, 박정희 통치 연간은 일종의 사회적 '위기' 국면이자 인간적 삶의 '비상 사태'였던 것이다. 오늘날 사회과학은 그것을 '압축성장'이라는 부드러운 말로 불러준다."

"성장은 물론 중요한 가치다. 그러나 '누구를 위한 어떤 성장인가'가 이슈일 때 성장은 진정으로 의미있다. 결국 문제는 정치적 주권과 계급관계일지 모른다."

"자살과 경제 문제의 '최종심급'에도 결국 '정치'가 있을 것이다."




자살이 만연한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다.

저자는 자살자들이 생명을 존중하지 않거나 건강한 가치관을 갖지 않은 것처럼 바라보는 시각은 위험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모든 현상을 다각적으로 바라보고, 실질적 대책을 찾아야 한다.

"그러다가 우리는, 바우만이 말한 것처럼 죽지 않고 죽음을 당한다."




저자의 논지만을 파악하자면 이렇게 긴 지면은 필요없겠다 싶기도 하지만,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매우 만족스러운 독서를 할 수 있었다.

국문학과 교수의 사회 현상 바라보기라.

문학이 사회를 어떻게 반영하는지, 다시 사회는 문학을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해 퍽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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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kenletter 2017-07-10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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