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07

유월 항쟁으로 민족학교, 울산시민회 결성 - 진영우

유월 항쟁으로 민족학교, 울산시민회 결성

유월 항쟁으로 민족학교, 울산시민회 결성특별취재팀 /
 기사승인 : 2017-02-22 13:13:51

진영우 선생. ⓒ박주석 객원기자

<지난 호에 이어>



이종호 편집국장(이하 ‘이’)=유월 항쟁 이후 7월에서 9월로 넘어가는 시기, 울사협 노동문제상담소가 노동자 대투쟁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진영우 선생(이하 ‘진’)=김연민 김승석 교수도 참여를 했었지요. 김승석 씨 역시 교수 시절부터 운동에 나서야 될 건가를 고민하고 그랬으니까요. 그러니까 우리는 언제 어떻게 튄다, 하는 걸 다 아는데 어리버리하다가 경찰에 잡혀버린 기라. 구류까지는 살지 않았어요.

어쨌든 김승석 김연민 교수 같은 분들이 열심히 했고, 서정훈 교수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분이 민교협 초대 회장입니다. 그 양반이 시위 같은 데는 열심히 안 나와도 교수회 집단 안에서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역할을 했습니다.

노동자 대투쟁만이 아니라 유월 항쟁 때도 온 거리를 덮었던 시위가 있었지요. 태화교는 물론이요 울산교에서도 공권력과 대치할 정도였으니까요. 심지어 그 밑에 철길 있는 데까지 진출을 한 굉장한 시가전이었죠. 그 즈음에 노동자들이 결집하고 현대엔진 노동조합이 만들어집니다. 그때 노옥희 씨가 참여했죠. 그때는 이미 노동자들이 자기들의 의제를 가지고 모이고 있을 때였죠. 그래서 노동자 대투쟁을 하게 되잖아요.

대투쟁하고 나서 노조가 만들어졌죠? 노조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울산노동문제상담소가 큰 역할을 했고 울사협하고 따로 가지는 않았지만 이 상담소가 거의 90퍼센트 이상 기여를 했다고 봅니다. 조직하고 사람들 만나고 소개 받고, 아예 노동자들이 막 찾아 왔어요. 심지어 저는 노동운동에 크게 참여를 안했지만 동양나일론 세종 이런 데는 저도 관여했죠. 왜냐면 적은 인력으로 많은 노조를 조직하려니 부족한 점이 크고 잘 되지 않으니까.

어느 회사에 누가 들어간다는 것보다는 개별적으로 조금씩 찾아오는 지원자가 많았었고 바깥에서 그걸 지원해주는 그런 역할을 많이 했습니다. 그때까지 막 노동자들이 자기완결적인 노동운동을 하진 않았고요.

이=민족학교는 그 이후에 만들어졌잖아요?

진=맞아요. 그 다음에 1988년에 민족학교 그걸 만들기 위해서 저와 다른 이들 셋이 모여서 서울에 갔어요. 서울 민족학교가 모델이라고 해서 이야길 듣고 배워 와서 만들었어요. 그때 제가 관심이 많았어요. 노동자를 조직하고 운동을 대중화해야 한다. 그래서 민족학교를 만들어야 한다. 단위 사업장에서 교육하고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또 시민들도 조직화해야 되니까요. 특히 1987년 단일화 안돼서 또 한 번 정권이 넘어갔잖아요.

운동이 본격화되는 시기니까 민족학교를 만들어 특히 노동자와 시민에게 큰 역할을 하고자 노력했죠. 민족학교 졸업생이면 노동단체 간부 하고 비약적으로 확장시키는 데 많은 도움이 됐죠. 그때 학출들 중에서도 김창현이라든지 이재권 씨도 그때 들어왔고요. 몇 명 더 기억나는데 대표적으로 김창현 이재권 두 친구들이 실무자 역할을 했고. 아무튼 민족학교 운동의 성과로 인해 나중에 울사협이 분화를 하는 계기가 됐죠.

이=민족학교에서는 어떤 역할을 하셨는지요?

진=민족학교 교장은 장태원 선생님이 했을 건데 실무 역할은 박종희 씨가 주로 했어요. 사실 민족학교에 대한 기억은 따로 없고요. 저는 울사협의 서기니까 ‘그때도 우린 안 한다’, 그러니까 그냥 그렇게 막후에서. 저와 이상희 씨 두 사람의 역할은 항상 그랬어요. 어떤 사람이 좋냐, 이런 사람이 좋다 언더 강사 상당수를 섭외하는 역할 같은 걸 많이 했어요.

이=울산시민회는 어떻게 발족한 겁니까?

진=아, 시민회는 언제부터 했냐면. 울사협이 인제 운동의 이런 역할을 다 하고 나서 분화가 돼 나갔잖아요. 청년회 전교조 노동자 또 이와이씨 등등이라든지. 그런데 시민들, 이 보통 사람들은 따로 소속이 없잖아요. 비록 혹자는 껍데기만 남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시민들이 시민들 그룹으로 나눠졌을 때 변화할 수 있는 일시적 단계, 울산시민회는 그때 시민이 남아있던 중심이라고 봐야합니다. 그래서 시민회가 나왔고 또 거기에서 경실련이 나왔으니까요.

참고로 저는 당시 경실련을 개량적 시민운동이라고 해서 반대했어요. 그렇지만 시민운동의 발전 과정 중 하나니까 어쩔 수 없다고 봤고. 그러니까 시민회 자체가 큰 역할을 했다기보다는 분화되지 않고 남아있는 운동을 잘 추슬렀고, 지역 시민운동의 상징성을 확보했고, 세부적으로는 역사기행을 진행한다든지 많은 역할을 했다고 봐야겠죠.


이=시민회는 공식적으로 해산했다고 봐야 하나요?

진=해산했다거나 그렇게 보기에는 어렵고요, 제가 마지막까지 시민회 간부를 맡았는데요. 이제 운동권은 정치에 진입을 했잖아요. 가령 당시 운동권에 울산연합이라는 게 있고 그때 울산연합이 성장해서 특히 청년회 같은 많은 조직들이 구성됐었죠. 그때는 전교조, 청년회 등등과 같은 일개 하나의 단체로 시민회가 있었고, 또 청년회는 아무래도 울산대를 비롯한 지역 학생운동의 중심으로 부상했죠.

울산연합이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울산연합과 청년회가 계열조직으로 비춰졌지만 울산연합 활동의 전성기 때만 해도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어요. 견해차가 있긴 하지만 청년회 입장에 반하는 대로 가지는 않았고. 연합이 나중에 진보정당운동으로 가기는 했는데, 그 이전에는 비판적 지지니 민중의 당이니 있었지만 아주 일부라고 하긴 그래도 진보정당운동은 후반이 더 본격적이잖아요.

이=그러면 그 이후에 정치권으로는 가지 않으셨나요?

진=아뇨. 가지 않은 건 아니에요. 저도 운동이 정치로 전환한다, 그럼 어떻게 참여할 건가에 대해 관심이 많았어요. 시민회 활동하면서도 노무현 이부영 다 데려왔으니까. 이부영 씨도 한번 띄웠고 김근태 씨 띄우기도 하고 했지만요. 유월 항쟁 이후에 양김의 분열로 운동이 비판적 지지파와 독자파로 분화됐잖아요. 울산에도 그 논쟁이 내부에서도 약간 있었고요. 저는 어느 입장은 아니었지만 후단파(후보단일화)나 중앙운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저는 비판적 지지 입장이지만 또 단일화를 해야 되는 거잖아요. 비판적 지지에 가까웠지만 단일화라도 해야지, 근데 와이에스로 단일화는 안 된다. 그럼 디제이로 가야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비판적 지지다. 이런 모호한 상황이 발생했잖아요. 아무튼 저는 독자파는 아니었어요. 정권교체를 해야 하는데 못하고 있으면 힘들지 않겠느냐는 입장이었죠. 그 이후에 민중의 당하고는 약간 견해를 달리해 아예 참여를 안했죠.

이후에 수평적 정권교체가 일어났었잖아요. 운동이 다 발전을 한 다음이니까 이제는 정치적으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죠. 울산시민회라는 조직의 이름으로 하기에는 부담스러웠죠. 운동이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으니까. 진보정당이 본격적으로 나오기도 전이니까 제가 나서서 정권교체운동을 시민회에서도 하고 뜻 있는 사람들 함께 해 운동권 사람들로부터 왜 정권교체운동을 하냐고 비판받기도 했어요. 그게 1997년 대선이었어요.

지난 1992년에는 대선 지지한 형태가 정책연합이었잖아요. 참여는 했는데 그때는 울산에서 정책연합에 참여했는데 사실 큰 의미는 없었어요. 전교조도 나름 활발히 움직였고. 민중당 계열은 모르겠어요. 어쨌든 제 활동을 하면서 정책연합을 도왔어요. 장명국 씨(전 내일신문 대표)도 그때 많이 봤어요. 이게 가능한 전략이라고 해서 많이 봤죠.

저는 야당이 적극적으로 필요하다고 보았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정당에 참여할 여지가 없잖아요. 사실 1997년에도 아무도 없었죠. 정권교체운동 시기에 이목희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낮에는 노조, 밤에는 뭐한다고 욕도 많이 먹었어요. 그 친구하고 제가 많이 교류를 했죠. 겉으로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실질적으로는 안에서 지역으로 많이 도움을 줬죠. 알던 친구기도 하고. 결국 1997년 정권교체기에 그런 성과가 만들어졌죠. 그렇지만 그때도 본격 정치참여는 아니었고.

<다음 호에 계속>


<특별취재팀>


총괄=이종호 국장


사진=박주석 객원기자


기록=김규란 기자


영상, 정리=이채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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