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6

하야시 라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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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 라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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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 라잔

하야시 라잔(일본어林 羅山덴쇼 11년(1583년) ~ 메이레키 3년 음력 1월 23일(1657년 3월 7일))은 에도 시대 초기의 주자학파 유학자이다. 는 노부카쓰(信勝). 호는 라잔(羅山). 통칭은 마타사부로(又三郎). 불도(佛道)에 들어간 후의 호는 도슌(道春)이다. 관학으로서의 성리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일생[편집]

1583년 교토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수재로 알려졌었고, 1595년 교토의 겐닌지(지금의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소재)에서 불교를 배우지만, 승적에 오르는 것은 거부하고 집에 돌아와 독학을 하면서 주자학에 열중한다. 1604년 후지와라 세이카를 만나 큰 영향을 받는다. (후지와라 세이카는 당시 정유재란으로 일본에 끌려온 성리학자 강항의 영향을 받았다.) 후지와라는 라잔의 영민함에 감명을 받아, 1605년 제 1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그를 천거한다. 이에야스는 23세인 약관의 라잔을 자기 곁에 두었고 도쿠가와가의 선생으로 발탁한다. 이때 라잔이 이에야스를 알현했던 곳이 교토의 니조 성 이라고 한다.

1607년에는 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경전을 가르쳤다. 제 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스승이 되었고 이후 막부의 정치에도 관계하였다. 1635년에 무가제법도의 기초를 담당하였고 다음 해에는 이세 신궁참배 예전에도 참여하였다.

1632년 우에노의 시노부가오카(지금의 도쿄도 다이토구 우에노 공원 일대)에 학문소 및 선성전(先聖殿) 등을 건립하였고 이것이 나중에 쇼헤코(昌平黌)의 기원이 되었다. 라잔의 쇼헤코는 에도시대 유학의 총본산이 되었고 유학을 장려하는 에도막부에 의해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자리잡았다. 훗날 쇼헤코는 도쿄대의 원류가 된다. 하지만 도쿄대의 설치해인 1877년 보다 앞서 1871년에 폐지되었으므로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이후, 다이가쿠노카미(大學頭)라고 하여, 3대손인 하야시 호코 때부터 이후 라잔의 후손은 대대로 도쿠가와 막부의 학문의 책임을 지게 된다.

1656년 처를 잃고는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26수를 남겼다. 다음 해 메이레키 대화재에 의해 집과 서고를 소실하고, 4일 후에 사망한다.

외부 링크[편집]


제1대 하야시 다이가쿠노카미 가 당주
? ~ 1657년
후임
하야시 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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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羅山  『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林羅山像」[注釈 1]

林 羅山(はやし らざん、天正11年(1583年) - 明暦3年1月23日1657年3月7日))は、江戸時代初期の朱子学儒学者林家の祖。羅山はで、は信勝(のぶかつ)。は子信。通称は又三郎。出家した後の号、道春(どうしゅん)の名でも知られる[注釈 2]


출처: 무료 백과사전 '위키피디아(Wikipedia)'
「림라산상」[주석 1]

하야시 라산 (하야시 라잔, 텐쇼 11년( 1583년 ) - 명력 3년 1월 23일 ( 1657년 3월 7일 ))은 에도 시대 초기 주자 학파 유학자 . 임가 의 조. 나산은 호로 ,는 노부카츠 . 글자 는 자신. 통칭 은 또 사부로. 출가한 후의 호, 도춘의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주석 2] .

평생 편집 ]

텐쇼 11년( 1583년 ), 교토 시조 신마치에서 태어났지만, 얼마 없이 백부에게 입양되었다. 아버지는 가가국의 향사  후예에서 랑인 이었다고 전해진다 [2] . 어린 시절부터 수재로서 구해져, 분로쿠 4년( 1595년 ), 교토· 건인사 에서 불교를 배웠지만, 승적에 들어가는 것(출가)은 거부 하고 게이 쵸 2년( 1597년 ), 집에 돌아왔다. 그동안 건인사 대통암의 고라지 자치와 겐닌지 10여원의 영주 영웅(雄長老)에 사사했고, 수장 장로에서는 문학에 뛰어난 마츠나가 사다토쿠로부터 자극을 받았다 . [2] . 집에 돌아가고 나서는 유유서에 친숙해져, 남송의 주석 (朱子)의 장구, 집주 ( 4  의 주석)를 연구했다 [3] .

독학을 진행하면서 한층 더 주자학 (송학)에 열중해 가서 게이쵸 9년( 1604년 )에 후지와라 히나 와 만난다. 그러므로 정신적, 학문적으로 크게 기와의 영향을 받게 되어, 스스로 유학하는 것에 주자학을 배웠다 . 히와와는 걸출한 영재가 문하에 합류한 것을 기뻐하며 나산에게 유복을 주었다. 나산이 그때까지 읽은 책을 정리해 목록을 만들자 440여부에 올랐다. 나산은 책을 읽는데 '5행으로 내린다'며 한눈에 5줄씩 읽어가고 모두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나산의 영명함에 놀란 히와와는, 자신은 도쿠가와에의 사관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 경장 10년(1605년)에는 나산을 추거해 도쿠가와 이에야스  만나게 했다 . 나산이 이에야스에게 속견한 것은 교토 니 조성 에 있어서였다 [4] . 이에야스는 기와의 권고도 있어, 이 나라라산을 수중에 두어 가기로 했다 [3] . 나산은 살을 인정받아 23세의 젊음으로 이에야스의 브레인의 한 명이 되었다.

호히로지의 종명
도쿄도 신주쿠구에 있는 하야시씨 묘지. 임라산을 비롯해 일족이 자고 있다. 나라의 사적 으로 지정되어 있다. 내부는 11월 초순에만 공개되고 있다.

게이쵸 11년( 1606년 )에는 예수회 의 일본인 수도사 , 일만 하비안과「지구 논쟁」을 실시하고 있다. 이때 임라산은 지구동설 과 지구구체설을 단호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지구방형설과 천동설을 주장했다.

게이쵸 12년( 1607년 ), 이에야스의 생명에 의해 승형이 되어, 도춘이라고 칭해 섬겼다. 또, 이 해, 에도  가서 2대 장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에게 강서를 하고 있다. 나가사키에서 혼초 츠나메를 입수해, 스루후에 체재하고 있는 이에야스에 헌상하고 있다 [5] . 또, 게이쵸 19년( 1614년 )의 오사카의 진 에 즈음해서는 히로 지 절의 범종에 새겨진 교토 난젠지의 선승 문 영청  에 의한 명문중의 「국가 안강」 「군신풍락」의 문언의 건( 방광사 종명 사건 )에서, 이에야스에 추종하여, 이것을 도쿠가와가를 저주하는 것으로서 문제시하는 의견을 헌신했다 [6] . 게다가 나야마는 "오른쪽 사원 조신 이에야스"(오른쪽 사사는 우대신의 당나라)를 "이에야스를 쏘는"것이라고 무리하게 박힌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6 ] .

관영 원년( 1624년 ), 3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미츠(히데타다의 장남)의 사무라이가 되어, 한층 더 막부 정치에 깊이 관여해 가게 된다. 그 활약은, 「히로나가 제가계도전」 「혼조 통감  등의 전기·역사의 편찬· 교정 , 고서·고기록의 채집, “무가 제법도” “ 제사 법도 ” “ 어정서 백 개조 ” 등의 설정, 외교문서의 기초, 조선통신사 의 응접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 [4] [주석3] . 관영 12년( 1635년 )에는 무가 제법도를 기초하고, 다음 공영 13년( 1636년 )에는 이세진구 참배전례에 해당한다.

히로나가 7년( 1630년 ), 장군·이에미츠로부터 에도 우에노 시노 오카에 토지를 주어지고, 히로나가 9년( 1632년 ), 나야마는 에도 우에노 오시오카에 사 학원 ( 학문소 )· 문고 와 공자묘를 세워 "선성전"이라고 칭했다. 나중에 오시오카 성당 이라고 불리는 시설이다(이들은 나중에 간다의 창평 자카로 옮겨지게 된다). 이 사학원에서는 많은 문인이 배출하고 후세의 창평자카 학문소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오와리번 초대번주의 도쿠가와 요시오리 는 나산이 나산의 사저의 일각에서 공자를 모시는 약식 석사를 집행 하는 것에 도움을 주고 있으며 [4] , 만년에는 막부보다 910석을 받았다 . 7] .

도쿠가와 가문의 이에야스, 히데타다, 이에미츠, 이에즈미의 장군 4대를 섬긴 나야 마는 초기 에도막부의 토대 만들기에 크게 관여 하여 다양한 제도, 의례 등의 룰을 정해 갔다 학문상에서는 유학· 신도 이외의 모든 것을 배제하고 주자학 의 발전과 유학의 관학화에 공헌했다. 박식으로, 학문서뿐만 아니라 기행서를 저술하는 등 문인으로서의 활약만도 다채롭다 [4] . 나산은 막부에 대해서는 승려의 자격으로 섬기면서 불교비판을 하고 있다 [4] .

덧붙여 임야 당대의 주가 대학 머리 (다이가쿠노카미)라고 칭한 것은 나야마의 손자의 3대·림봉오카의 대로부터이며, 이후 임가는 요요 막부의 교학의 책임자로서의 역할을 담당 한다 , 스루가 문고 의 관리도 행했다.

명력 2년( 1656년 )에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있다. 다음 명력 3년( 1657년 ), 명력의 대불 에 의해 저택과 서고를 소실하고, 그 4일 후에 사망했다. 서고가 소실된 충격과 낙담으로 생명을 줄였다고도 한다. 향년 75. 무덤은 도쿄도 신주쿠구 이치야마 후시초 에 있다. 막부에 의한 나산의 등용은 유학자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나산의 학문과 사상 편집 ]

유학자 나산 편집 ]

유시마 성당

임라산의 학문은, 한당의 구주 로부터 육상산 · 왕양명 의 학에 및, 제자 백가로부터 일본의 고전에도 통했지만, 남송  주희 ( 주자)의 학문( 주자학 )이 그 중심으로 예, 특히 사의 후지와라 히나와의 몰후는 명확하게 주희의 이기론(태극이기의 이론)의 입장에 서 있었다 [3] [7] . 나산은 주자학자로서 만물은 ‘이’와 ‘기’로 이루어진 이기 이원론을 설교하고 이법이 여러 현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이성이 정욕을 지배하는 것을 이상으로 했다(『산덕초』). 그리고 하늘(이기 미분의 태극 )을 자연·인문의 일체의 사물에 내재화하고, 또한 하늘은 마음에 의해 만상을 창조해, 이에 의해 만상을 주재하는 것으로서, 이 하늘의 작용, 즉 「천도」를 세우는 것이야말로 인도주의이며 , 이 인도의 실천·이행이 「격물」 보다 시작된다고 말했다 [3] .

나산의 인간론은, 인간은, 천리를 받고, 그 본성은 선이지만, 정욕을 위해 가려져 있기 때문에 충분히 발휘할 수 없다고 하는 것으로, 학문에 의해 우주를 괴롭히는 이리를 극복하고, 수양에 의해 정욕을 꺼내야 할 것을 주장했다 [8] .

또한 만상을 관철하는 도덕적 속성을 생각하는 입장에 서서 막 번체 제하 의 신분질서와 거기에서의 실천도덕을 형이상학 적으로 기초하였다 [7] . 춘감초』에 있어서는, 우주의 원리인 이론은, 인간 관계에서는 신분으로서 나타나는 것으로 상하 정분의 이리를 설해 사농공상의 신분 제도를 정당화했지만, 이것은 , 막번 체제 의 근간 을 이루는 신분 질서 절대화의 이론이었다 [9] . 나산은 이 책에서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서'(질서·서열)를 유지하기 위해 '경'(쭉쭉쭉한 마음)과 그 구체적인 나타나는 '례'(예의· 법도 )가 중요시되어야 하는 것을 설설하고, 지경(마음 속에 '경'을 계속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존심지경). 나산은 우주의 원리인 이리를 들여다보면 안에 경, 밖에는 예로서 나타난다고 설, 경과 예가 인륜의 기본이며, 이와 마음의 일체화를 설한 것이다(거 경찰) [8] [주석 4] .

나산의 주자학은 중국에서 직수입한 것이 아니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  계기로 유입한 조선주자학을 자각적, 선택적으로 섭취한 것으로 여겨진다[11 ] . 덧붙여 「라산」의 호도, 조선책의 「연평문답」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12] .

「백과전서파」라산 편집 ]

『아즈마 거울』 고활자본 관영판・림도춘(라산)의 跋文

나산은 많은 작문·부시를 쓰고 있고 [7] , 오히려 나산은 어용학자 라기보다는 '도쿠가와 시대의 최초의 엔사이클로페디스트'였다는 평가가 있다[4 ] . 신도전수 '와 ' 혼아사 신사고 '에서는 주코가 주창한 귀신론을 바탕으로 고대 이후 일본의 신불습합을 비판 했다 . 중국의 본초학 의 소개서 『다식편』, 병학 의 주석서인 『손자 속해』 『삼략 속해』 『육상 속해』, 한층 더 중국의 괴기 소설 의 안내서 『괴담 전서』를 저 등의 관심과 학식은 다방면에 걸쳐 있다 [주석 5] . 일본사에도 조예가 깊고, 일본의 국조 로서의 태백설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7] .

나산의 사상 편집 ]

나산의 사상은 일반적으로 유교적인 현세주의·도덕주의, 및 일종의 합리주의 를 특징으로 한다 [7] .

특히 당시였던 주장의 하나에 불교의 배척이 있어, 불교가 그 해안주의에 서서 현세의 인간 사회에 있어서의 문제를 피해, 내세를 설설해 허망을 말한다고 비판해,  도덕 무시나 불승으로 보이는 부도덕・죄악 등을 추궁하고 있다 [7] .

지금 하나는, 신교합 일론이다. 나산은, 신도 , 왕도 , 유도 , 인도 의 근본은 동일하고, 신은 마음·리라고 하여 이당 기분 신도를 설설해, 일본 ​​신화  의 “ 3종의 신기 ”를 유교적인 지·인·용 [ 삼덕 의 상징]으로 간주했다 [7] [주석 6] . 또, 이당심 신도는, 근세 의 유가 신도 의 선두가 되었다 [3] .

근대주의의 입장으로부터의 평가는 낮다. 와쓰지 테츠로 는 지구체설을 힘차게 부정하는 등 나산은 하비안과의 논쟁에서도 과학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시야가 좁은 유럽에서는 근대적인 사상가가 나와 있던 시대에 고대 중국의 이상으로 돌아가는 시대착오 등 나산은 쇄국  함께 보수적 반동적인 편협한 정신을 뛰어넘어 오랫동안 일본인의 자유로운 사색활동을 방해한 '불행'이었다고 논하고 있다[14 ] .

편저서 편집 ]

편저서는 150여 개 및 [7] 위에서 설명했다

  • 『삼덕초』
  • 『춘감초』
  • 혼조 통감』(『혼조편 연록』)
  • 관영제가계도전」(막부의 생명에 의해 편찬 주임으로서 종사한다)
  • 「혼조 신사 고」
  • 『신도전수』

등 외에도

  • 『라산문집』
  • 『라산시집』
  • 丙辰紀行
  • 『성리자 의속해』
  • 『신도비전절 중속해』

있다.

가족 편집 ]

동생에게 하야시 나가키 . 나산에는 4명의 남자가 있어, 장남과 2남은 뭉치했다. 모토와 4년( 1618년 )에 3남・춘승, 관영 원년( 1624년 )에 4남・모리카츠가 모두 교토에서 태어났으며, 춘승은 쿠로미네, 모리카츠는 요코사이 ( 토쿠 코우 ) 사이)라고 호했다. 鵞峰은 아버지의 후계자로서 막부를 섬기고 대학 머리라고 칭할 수 있게 되었고, 독경재도 막부에 부름받았다 [3] .

에피소드 편집 ]

  • 8세 때 한 나니가 ' 태평기 '를 읽는 것을 곁에서 듣고 이를 암창했다. 한 번 들은 것은 잊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아이의 귀는 낭이(ふくろみみ) 이다 .
  • 에도 성에 출사한 다이묘 가 각각 자신이 지참한 도시락을 먹고 있었을 때, 나가후 번주 · 모리 히데모토 의 도시락 속에 연어 필레가 들어가 있었다. 이때 나산은 무사시 이와 츠키번주 아베 중차 등과 함께 '희귀하다'며 연어의 필레를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16] .
  • 라산은 경안 4년( 1651년 )에 후미오 상황이 갑자기 출가하여 법명을 청정이라고 칭했을 때, 이를 “아아 치코의 아버지로 삼아야 한다. 무문 이것을 애원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도 이즈군이 얻는 켄이나라고 평가하고 있다 [17] .
  • 명력 2년(1656년), 아내를 죽었을 때에는, 그 죽음을 悼る시를 26목 읊는 등, 애처가였다.
  • 명력 3년 1월 18일 (1657년 3월 2일 )부터 삼일 삼밤에 이르는 명력의 대불(통칭 '소매 화재')에서는, 나산은 주위의 소란을 살짝 독서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간다의 집에 불이 났기 때문에, 1월 19일 ( 3월 3일 ), 읽기의 책 1권만으로 우에노 방면 으로 도망쳤지만, 집이 소실되어, 서고에 납입되고 있던 장서도 모두 소망했다고 듣고 발병했다고 한다 [18] .

임라산상 편집 ]

나산은 무로마치 시대의 만리 집구 와 같이 아리마 온천 , 구사쓰 온천 , 게로 온천 의 3온천을 「천하의 3명천」이라고 적었다( 일본 3명천 ) [19] .

게로 온천가의 시라사와바시에는 임라산의 동상이 있다 [20] . 또한, 게로 온천에서 개최되는 게로 온천 축제의 참진 행렬은 「온천 추수 감사절(만리 집구제·림라산 축제)」으로서 개최되고 있다[21 ] .

각주 편집 ]

주석 편집 ]

  1. ↑ 교토대학 종합박물관 창고. 원본의 화가는 불명. 본 그림은 에도 시대 후기의 모사.
  2. ^ 라산, 도춘 외, 라부자·석양면·호나비동·매화촌 그 외의 호가 있다 [1] .
  3. ^ 그러나 이에야스 자신은, 나산보다 숭전 이나 천대종 의 승려천해  정치적 조언자로서는 오히려 중용하고 있어 유학자를 굳이 특별시한 것은 아니었다 .
  4. ^ 언제나 언동을 쏟아내고 예의를 드러내는 이 사상에는 무사계급에 지도자로서 자기를 율법과의 자각을 끄덕인 측면이 있는 것도 지적되고 있다[10 ] .
  5. ^ 라산은 널리 스스로의 학술종교를 싸웠기 때문에, 후세, 나카에토키나 야마자키 암사이로부터의 비판 을 받고 있다.
  6. ^ 이와키 타카리는 이것을 중세 말기의 이세 신도 의 흐름을 펌핑하는 발상이 될 것으로 하고 있다 [13] .

찾아보기 편집 ]

  1.  미야자키(1994)
  2. ↑ b 미야자키(1994)
  3. ↑ g 이시다 (2004)
  4. f 마츠오카 마사타카의 센야 천권 「도쿠가와 이데올로기」헬만 오무스
  5. ↑ 미야모토 요시미「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혼초학」
  6. ↑ b 츠지 (1974) pp.210-211
  7. ↑ i 이와성 (1979) p.108
  8. ↑ b 厨 (1995) pp.188-189
  9.  백취(2005) p.88-89
  10.  다카하시 외(2003) p.42
  11.  후카야(1993) pp.259-262
  12.  후카야(1993) p.262
  13.  이와성(1979) p.108
  14. 와즈지 테츠로묻힌 일본 ――키리시탄 도래 문화 전후에 있어서의 일본의 사상적 정황――』( 아오카 문고 )
  15.  이야기 일본사(아래) P.59
  16.  츠지(1974) p.132
  17.  츠지(1974) pp.386-387
  18.  후카야(1993) p.170
  19. ↑ “ 게로시 에코 투어리즘 추진 전체 구상(게로시 에코 투어리즘 추진 협의회) ”. 환경성 . 2021년 12월 1일 열람.
  20. ↑ “ 게로 온천 거리 맵 ”. 게로 온천 관광 협회 . 2021년 12월 1일 열람.
  21. ↑ “ 게로 온천 축제 개최! ”. 일본 온천 협회 . 2021년 12월 1일 열람.

임라산을 연기한 인물 편집 ]

참고 문헌 편집 ]

관련 항목 편집 ]

외부 링크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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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yashi Razan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Hayashi Razan
Hayashi Razan, 18th century portrait
Born1583
DiedMarch 7, 1657
Edo
Occupation(s)Historian, philosopher, political consultant, writer
Notable workNihon Ōdai Ichiran
ChildrenHayashi Gahō (son)
FamilyHayashi
EraEdo period
RegionEastern philosophy
SchoolJapanese Confucianism
Main interests
Japanese historyliterature
Notable ideas
Three Views of Japan

Hayashi Razan (林 羅山, 1583 – March 7, 1657), also known as Hayashi Dōshun,[1] was a Japanese historian, philosopher, political consultant, and writer, serving as a tutor and an advisor to the first four shōguns of the Tokugawa bakufu. He is also attributed with first listing the Three Views of Japan. Razan was the founder of the Hayashi clan of Confucian scholars.

Razan was an influential scholar, teacher and administrator. Together with his sons and grandsons, he is credited with establishing the official neo-Confucian doctrine of the Tokugawa shogunate. Razan's emphasis on the values inherent in a static conservative perspective provided the intellectual underpinnings for the Edo bakufu. Razan also reinterpreted Shinto, and thus created a foundation for the eventual development of Confucianised Shinto in the 20th century.

The intellectual foundation of Razan's life's work was based on early studies with Fujiwara Seika (1561–1619), the first Japanese scholar who is known for a close study of Confucius and the Confucian commentators. This kuge noble had become a Buddhist priest; but Fujiwara's dissatisfaction with the philosophy and doctrines of Buddhism led him to a study of Confucianism. In due course, Fujiwara drew other similarly motivated scholars to join him in studies which were greatly influenced by the work of Chinese Neo-Confucianist Zhu Xi, a philosopher of the Song Dynasty.[2] Zhu Xi and Fujiwara emphasized the role of the individual as a functionary of a society which naturally settles into a certain hierarchical form. He separated people into four distinct classes: samurai (ruling class), farmers, artisans and merchants.

Academician[edit]

Razan developed a practical blending of Shinto and Confucian beliefs and practices. In particular, he argued that Shinto was a provisional and local form of Confucian ideas, enabling a Confucian interpretation of Shinto shrine rituals.[3] This coherent construct of inter-related ideas lent themselves to a well-accepted program of samurai and bureaucrat educational, training and testing protocols. In 1607, Hayashi was accepted as a political advisor to the second shōgunTokugawa Hidetada.

Razan became the rector of Edo's Confucian Academy, the Shōhei-kō (afterwards known at the Yushima Seidō) which was built on land provided by the shōgun. This institution stood at the apex of the country-wide educational and training system which was created and maintained by the Tokugawa shogunate. Razan had the honorific title Daigaku-no-kami, which became hereditary in his family. It also happened that the position as head of the Seidō became hereditary in the Hayashi family. Daigaku-no-kami, in the context of the Tokugawa shogunate hierarchy, effectively translates as "Head of the State University.[4]

In the elevated context his father engendered, Hayashi Gahō (formerly Harukatsu), worked on editing a chronicle of Japanese emperors compiled in conformance with his father's principles. Nihon Ōdai Ichiran grew into a seven-volume text which was completed in 1650. Gahō himself was accepted as a noteworthy scholar in that period; but the Hayashi and the Shōhei-kō links to the work's circulation are part of the explanation for this work's 18th and 19th century popularity. Contemporary readers must have found some degree of usefulness in this summary drawn from historical records.

The narrative of Nihon Ōdai Ichiran stops around 1600, most likely in deference to the sensibilities of the Tokugawa regime. Gahō's text did not continue up through his present day; but rather, he terminated the chronicles just before the last pre-Tokugawa ruler. This book was published in the mid-17th century and it was reissued in 1803, "perhaps because it was a necessary reference work for officials".[5]

Razan's successor as the Tokugawa's chief scholar was his third son, Gahō. After Razan's death, Gahō finished work his father had begun, including a number of other works designed to help readers learn from Japan's history. In 1670, the Hayashi family's scholarly reputation was burnished when Gahō published the 310 volumes of The Comprehensive History of Japan (本朝通鑑, Honchō-tsugan).[6]

Razan argued that Emperor Jimmu and the Imperial line were ultimately descended from an offshoot Chinese royal family by Wu Taibo. This opinion was considered dangerous to publish widely, and thus he argued it in a private work entitled Jimmu Tennō Ron (Essay on Emperor Jimmu). These unorthodox claims were supposedly opposed by Tokugawa Mitsukuni, and as a result there were obstacles in being able to publish such ideas.[7]

Razan's writings were compiled, edited and posthumously published by Hayashi Gahō and his younger brother, Hayashi Dokkōsai (formerly Morikatsu):

  • Hayashi Razan bunshū (The Collected Works of Hayashi Razan), reissued in 1918
  • Razan sensei isshū (Master Razan's Poems), reissued in 1921

Razan's grandson, Hayashi Hōkō (formerly Nobuatsu) would head the Yushima Seidō and he would bear the inherited title Daigaku-no kami. Hōkō's progeny would continue the work begun in the 18th century by the scholarly Hayashi patriarch.

Political influence[edit]

As a political theorist, Hayashi lived to witness his philosophical and pragmatic reasoning become a foundation for the dominant ideology of the bakufu. The political dominance of Hayashi's ideas lasted until the end of the 18th century. This evolution developed in part from Razan's equating samurai with the cultured governing class. Razan helped to legitimize the role of the militaristic bakufu at the beginning of its existence. His philosophy moreover encouraged the samurai class to cultivate themselves, a trend which became increasingly widespread over the course of his lifetime and after his death. Razan's aphorism encapsulates this view:

"No true learning without arms and no true arms without learning."[8]

Hayashi Razan and his family played a significant role is helping to crystallize the theoretical underpinnings of the Tokugawa regime.

In January 1858, Hayashi Akira, the hereditary Daigaku-no-kami descendant of Hayashi Razan, headed the bakufu delegation that sought advice from the emperor in deciding how to deal with newly assertive foreign powers.[9] This was the first time the Emperor's counsel was actively sought since the establishment of the Tokugawa shogunate. The most obvious consequence of this transitional overture was the increased numbers of messengers which were constantly streaming back and forth between Tokyo and Kyoto during the next decade. In the 19th century, this scholar-bureaucrat found himself at a crucial nexus of managing political change, moving arguably "by the book" through uncharted waters with Razan's well-settled theories as the only guide.[10]

Legacy[edit]

Razan's legacy has been memorialized and praised by some Japanese scholars for his relatively dispassionate attempt at understanding history for the time, leading some scholars to call him the "founder of modern historical research" in Japan. His work was influential on Arai Hakuseki, who is considered to have been even more dispassionate scholar.[11]

Notes[edit]

  1. ^ Ponsonby-Fane, Richard A. B. (1956). Kyoto: the Old Capital of Japan, 794–1869, p. 418.
  2. ^ Ponsonby-Fane, R. (1956). Kyoto: the Old Capital of Japan, 794–1869, p. 418.
  3. ^ Josephson, Jason (2012). The Invention of Religion in Japan.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p. 28. ISBN 9780226412351.
  4. ^ Ponsonby-Fane, p. 418.
  5. ^ Screech, Secret Memoirs of the Shoguns: Isaac Titsingh and Japan, 1779–1822. p. 65.
  6. ^ Brownlee, John. (1999). Political Thought in Japanese Historical Writing, p. 120
  7. ^ Maitre, Cl. E. (1903). "LA LITTÉRATURE HISTORIQUE DU JAPON: DES ORIGINES AUX ASHIKAGA"Bulletin de l'École française d'Extrême-Orient3 (4): 564–596. doi:10.3406/befeo.1903.1256ISSN 0336-1519JSTOR 43729146.
  8. ^ Blomberg, Catherina. (1999). The Heart of the Warrior, p. 158.
  9. ^ Cullen, L. M. (2003). A History of Japan, 1582–1941: Internal and External Worlds, p. 178 n11.
  10. ^ Ponsonby-Fane, p. 324.
  11. ^ Brownlee, John S. (1988). "The Jeweled Comb-Box. Motoori Norinaga's Tamakushige"Monumenta Nipponica43 (1): 35–44. doi:10.2307/2384516ISSN 0027-0741JSTOR 2384516.

See also[edit]

References[edit]

Banners mark the entrance to the reconstructed Yushima Seidō (Tokyo).

External links[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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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d of the state educational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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