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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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반란 사건후 군대내 좌익세력 척결 : 6.25. 전쟁때 군의 배신행위가 없었던 이유>
1. 해방후 군대에 좌익세력 대거 침투
미군철수와 한국정부 수립이 구체화되자, 주한미군은 1948년 초부터 한국군의 병력을 급격하게 증강시켰다.
그리하여 병력자원에 대한 면밀한 검열은 불가능했고,
그냥 입대희망 장병이 미군정 당국 및 곧 수립될 정부에 충성할 것을 선서하면 특별한 신원조회없이 무조건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경찰에 쫓기던 좌익 성향의 세력들이 상당수 군에 입대해 도피처로 삼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2. 숙군 사업 강화로 군대내 좌익세력 숙청
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국군 전신) 제14연대 소속의 일부 군인들이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라는 정부의 명령에 항명해 반란을 일으키고
여기에 호응한 좌익계열 시민들이 봉기하였으나 정부군에 유혈 진압되면서 8일만인 10월 27일 종결되었다.
선서 한 번으로 군에 들어와 터를 잡은 좌익 세력이 정부수립 2개월 만에 폭동을 일으켜 그 실체를 드러낸 사건이었다.
국회에서도 위기감을 느껴 「국가보안법」을 1948년 12월 1일에 제정하였고,
군내의 좌파 세력을 색출하고자 하는 숙군(肅軍) 사업이 강화되었다.
1949년 3월까지 육군 정보부(방첩과)는 불과 4개월 동안 1,500명에 달하는 이를 숙청했다.
당시 군 병력의 3%에 해당하는 엄청난 인원이었다.
3. 숙군사업이 없었다면 6.25때 공산화 우려
6.25 전쟁 당시 군이 집단으로 배신하거나 하는 행위가 없었는데
그건 여순반란 사건으로 촉발된 숙군 덕분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숙군 사업때 방첩과 김창룡 대위가 크게 활약하였고, 그는 이를 계기로 승승장구한다.
4. 숙군사업에 앞장선 김창룡은 누구인가?
김창룡(金昌龍, 1916~1956)은 일제강점기 당시 만주로 건너가 일본 육군 관동군의 헌병대에 입대(1940)하여
중국공산당을 감시하고 항일조직을 적발했던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
광복 이후에는 뼛속 깊은 반공주의자로
공산당 색출과 군대 내의 좌익세력 제거에 공헌하여
대통령 이승만으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얻으면서, 1951년 육군 특무대(特務隊,
방첩부대) 대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정치적 목적과 성과주의로 상당수의 공안사건을 조작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또한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1949)을 지시한 배후로 지목받고 있다.
그러다가 그가 개인적 영달을 위해 권력을 남용하고 군의 지휘계통을 무시하는 행위에 불만을 품은 특무대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묘는 1998년 특무부대의 후신인 국군기무사령부의 노력으로 대전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이선우
글 잘 읽었습니다
사족으로 특무대의 대 는 隊 일 겁니다
Hion Joon Kim
그렇습니다
박정희가 군내 침투한
남로당간첩들을 모두
잡게한 큰 공을 세워서
6.25발발전
반란군들을 사전에 모두 색출해서
적화가 안된 것입니다
Samuel Chung
김창룡 특무대장 저격한 허태영 대령.
그의 재판 기록을 한번 그가 사형선고 받고 사형집행전 최후 진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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