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8

김파란 | 뉴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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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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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호의 변명이 너무 치졸해서 이 바쁜 농사철에 또 헛지랄을 한다. 내 성질에 내가 못 이겨 고추밭에 약 치다가 들어와서 쓴다(이것도 병이다)
비평가 유종호는 일제 말  문인들의 친일문학은  선택의 자유가 없었던 강압해서 나왔다고 말했다. 그 말은 '저항 문학'에 대

● 일제 말 문학인의 세 가지 저항 방식
중일전쟁 이후 가속화된 총동원체제로 인하여 조선 작가들은 이전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가혹한 억압에 시달려야 했다. 이전에는 이런 주제를 취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면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것들을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으로 바뀌었다. 상황이 이렇게 바뀌어 가자 식민주의에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작가들의 경우에는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그렇지 않고 저항의 태도를 가지고 있는 작가들에게는 이러한 억압을 어떻게 뚫고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매우 심각한 것이었다.
일제 말기 저항을 한 작가들을 탐구할 때 넘어서야 할 것은 식민지하의 저항이 모두 내셔널리즘에 입각해 있었던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이다. 조선의 경우 문학적 저항에 국한시켜 볼 때 내셔널리즘의 저항은 매우 작은 부분을 차지한다. 내셔널리즘 중에서 국민주의에 섰던 작가들의 경우, 예를 들면 이광수나 주요한 같은 작가의 경우 예외 없이 식민주의에 협력하였고 민족주의에 선 현진건 같은 작가들은 저항을 하였지만 문학적 저항 전체를 고려할 때 극히 소수였다. 오히려 끝까지 저항을 하였던 문학인들은 사회주의적 국제주의자이거나 혹은 세계주의자였던 것이다. 왜 해방 후 많은 문인들이 북으로 갈 수밖에 없었는지 알 수 있다. 
저항 작가들을 그 저항 방식에 따라 나누면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침묵이며 둘째는 우회적 글쓰기이며 셋째는 망명이다. 유종호 교수는 이런 저항의 방식을 알고 있으면서 친일작가들을 변명하기 위해 일본의 억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쓴 것이 친일문학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뻔뻔한 변명에 발터 벤야민의 입을 빌려 싶다
- 저항을 선택할 수 없는 문학가는 침묵해야 한다.
저항을 할 경우 작가 자신들이 처한 조건에 따라 각각 다른 방향을 취하였다. 우회적 글쓰기를 택한 작가 중에서 가장 긴장이 강하였던 경우가 한설야이고, 우회적 글쓰기를 하다가 이것이 여의치 않자, 망명을 선택하였고 이에 성공했던 경우가 김사량이었다. 침묵으로서의 저항을 선택했던 작가 중에서 가장 극적 전환을 보여주는 경우로 김기림을 들 수 있다. 김기림은 신체제론이 선포되면서 많은 근대 비판론자들이 대동아공영권의 근대초극론으로 기울어질 때 이에 대해서 분명한 자의식을 갖고 비판하면서 침묵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 이육사 역시 우회적 글쓰기로서 시를 쓰다가 이것으로는 더 이상 자신을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였을 때 망명을 시도한다. 김재용의 글에 의하면 당시 이육사와 같이 망명하려고 했던 이의 증언과 주변 정황을 미루어 볼 때 이육사가 망명을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검거되어 옥사하였음은 거의 분명한 것 같다.
유종호 비평가는 이 친일문학에 대한 민중의 거부감을 그 시대상의 억압적 지배를 인지 못하는 대중의 폭력성으로 돌리려 한다. 물론 그런 폭력성에 대한 성찰은 중요하다. 그러나 여기에 묘한 차원의 단순 환원론이 있다. 수많은 식민 지배와 그에 따른 저항의 논리를 제국주의 담론에 다 묻어버리려는 것이다. 이런 단순 환원론이 문학계에서 '그 시절 친일 안 한 사람 나와봐라...친일과 그 작품은 분리해야 한다..' 라는 식의 무식한 담론을 만들어 낸 것이다. 
친일문학...식민담론에 포획된 주체들에게는 불가피한 선택일 수는 있다. 그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들은 그 식민구조의 아들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주체가 실은 항상 타자에게 구속된 채 고정되어 있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만약 그렇다면 저런 저항문학은 나올 수 없지 않는가? 비평가들이 역사를 보고 인식할 때 그 주체의 내재성으로 제국주의에 저항하고 인류를 억압하는 제국주의적 질서를 돌파할 가능성을  타진한 저런 주체들을 호명하면서 친일문학에 대한 반성적 인식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럴 수 없다면 유종호는 침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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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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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작 좀 하자
빨갱이로 밀리니까 홍범도 장군 흉상은 육사가 아니라 독립기념관으로 옮기자는 것인데, 좌빨들이 이념 전쟁으로 몬다고 말한다. 그래 좌빨이 니네들 논리의 전부겠지만, 그럼 해군사관학교의 거북선은 민속박물관으로 옮겨야 하나?
한국 사회는 이념이 아니라  '때려잡자 공산당'이라는 독재자의 유훈통치가 사람들의 영혼을 지배하는 듯 하다. 지구상에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아직도 이런 취급을 받는 나리가 어디에 있으며, 과거의 시간을 현재의 틀에 맞춰 재단하고 취사선택하는 야만성을 이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 자리에 있느냐 말이다. 
역사적 인물을 빨갱이다 아니다,로 나눌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또 바로 그런 이분법적인 '사고'에 수많은 사람들 목숨이 좌우됐다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대통령이라는 작자가 골목대장처럼 나서서 편 가르기를 하고 있다. 정말이지 많이 양보해 윤석열이  마음속으로 어떤 역사적 인물과 사건에 대해 그런 생각이 있더라도, 이분법적 사고로 국민들 분열을 조장하는 발언은 정치가나 관료 하물며 대통령이라는 자리에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인물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작업에는 다양한 정치적 이해가 개입될 수는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 사회 지도자나 지식인이 달라야 하는 것은 목소리를 내는 다양한 사람들이 가진 믿음의 형성과정을 명백히 틀렸다고 단정 짓거나 잘잘못을 가리는 즉 흑백을 나눠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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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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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나의 이해 5>

며칠 간 이 문제에 매달리느라 정작 내가 하고 싶었던 내 일은 손을 못 대고 있군요. 그래도 멈추지 못한 것은 하필이면(?) 내가 이 책을 읽었다는 것이고, 내가 독해한 내용에 비추어 보았을 때, 지금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는 지점에 오해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나름대로 성실한 학자이자 위안부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문제 해결을 위해 애쓰고 있는(저에게는 그렇게 보입니다) 사람이 곤경에 처한 상황을 내 일이 아니라고 해서 모르는 척 입 다물고 있으면 그건 비겁한 태도이며, 나 자신에게 떳떳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책을 읽는 이유는 지식이나 교양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읽은 내용에 대해 책임을 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면식도 없는 한 학자의 책에 대해 어쭙잖은 내용이지만 몇 번의 글을 쓰게 됐습니다.
그럼에도 페북에서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이 너무 오래 이어지는 것도 서로에게 피로감을 안겨주는 일이고 해서, 긴 글은 이번을 끝으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상황에 따라 짧게 끼어드는 일은 있을 수 있겠지요. 그리고 본격적인 논의는 학계에서 해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먼저 박유하 교수가 조선인 위안부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기본 시각을 다시 한 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이들은 ‘위안’을 매춘으로만 생각했고 우리는 ‘강간’으로만 이해했지만, ‘위안’이란 기본적으로는 그 두 요소를 다 포함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위안’은 가혹한 먹이사슬 구조 속에서 실제로 돈을 버는 이들은 적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수입이 예상되는 노동이었고, 그런 의미에서는 ‘강간적 매춘’이었다. 혹은 ‘매춘적 강간’이었다.
이 20년 동안, 우리는 초기에 만들어진 ‘상식’에만 고집하고 그에 반하는 이야기는 무조건 ‘우익의 망동’이거나 ‘친일적 발언’으로 간주하고 배척해 왔다. 그 결과,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것은 모든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수배양’된 ‘위안부 이야기’뿐이다. (120~121쪽)>
박유하교수가 말하는 ‘순수배양된 위안부이야기’는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 왔을까요? 이 또한 단일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않았겠지만, 책에는 이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사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보았던 이 증언은 근년에 가장 활발히 활동해온 이의 증언이다. 그런데, 20년 전인 1993년에 나온 증언집에서 그는, 이 일은 “만 열여섯 살” 때의 일이었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새벽” 친구 “분순이”가 불러 “따라나갔”는데 “강가에서 보았던 일본 남자”를 만나게 되고 그가 보여주는 “빨간 원피스와 가죽구두가 어린 마음에 얼마나 좋았는지”, “그래서 그만 다른 생각도 못 하고 선뜻 따라나서게 되었다”(같은 책, 124쪽)고 말한다.
그런데 2004년에 교토 대학교에서 열린 모임에서는, 자신이 끌려간 정황을 “열다섯 살”이었고 “일본군의 칼에 위협을 받은 여성이 자신을 불러 감싸안아 끌어갔”다고 말한다. 또 최근 한국의 신문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에서는 “대구에 있는 집 마당에까지 일본군이 들어와서 끌고 갔다”(영남일보, 2012.9.14.)고 말하기도 한다. 끌려갔을 당시의 나이가 점점 더 어려지고 일본군에 의한 강압적인 정황이 점점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132쪽)>
박유하 교수가 소개한 위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증언 내용을 바꿔가며 들려준 위안부 할머니에게 문제가 있다고 보입니다. 하지만 제가 박유하 교수의 책과 인품에 대해 신뢰를 보이는 것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바로 다음과 같은 서술로 이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증언의 신뢰성 문제만 잡고 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걸 한 개인의 문제로 보지 않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조건과 상황을 살펴가며, 개인의 한계까지 끌어안고 가려는 자세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이들이 ‘위안부의 증언은 거짓말’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이런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안부의 그런 ‘변화’는 의식적인 거짓말이라기보다는 듣는 이들의 기대가 그렇게 만든 측면이 크다. 증언을 듣기 위해 모인 이들은, 미리 인지된 지식을 바탕으로 그 지식이 보완되기를 무의식적으로 바랐을 테니까. 한국인이라면, 그 피해가 더 가혹할수록, 더 끔찍할수록, 일본에 대한 분노를 키우고 당당해질 수 있게 되니까, 증언의 장이 어떤 이야기를 요구하는지는 위안부들 역시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위안부의 증언에 차이가 난다고 해서 위안부들만을 비난할 일은 아니다. 그들의 그런 증언을 듣고 싶어했던 것은 오히려 우리 자신이라고 해야 한다. 피해자로서의 자신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 그것은 자신의 주장의 정당성을 확보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한국이 과거에 일본에 의해 식민지화되었다는 체험이 기본적으로 피해체험인 것은 분명하다. 그 정치가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하더라도 그 체험이 정신적 노예일 수밖에 없었던 한 그건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이다. 더구나 고문과 성적 노동을 포함한 신체적 강제에 더해 생명까지도 ‘일본’이라는 국가에 맡겨진 상태였으니 식민지 체험이 피해체험인 것은 분명하다.(133쪽)>
박유하 교수를 뉴라이트 계열로 파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지적은 억측일 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위 글에 나오는 대목 중 ‘그 정치가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하더라도’라는 부분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식민지근대화론’이며 뉴라이트 역사관의 핵심 중의 하나입니다. 박유하 교수는 식민지 체험에 대해 어떤 말을 하더라도 피해체험인 것이 분명하다고 밝힘으로써 뉴라이트 역사관을 반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박유하 교수는 이러한 이야기를 논하는 챕터의 마지막 문장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저는 ‘애국’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애국을 해야 한다면 박유하 교수가 말하는 애국심 쪽에 한 표를 던지고자 합니다.
<이제,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고 싶지 않은가. 애국심이 그렇게 발휘될 수 있다면, 그 또한 아름다울 수 있다.(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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