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06

한반도 긴장 고조에 대한 한국 천주교회의 호소문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한반도 긴장 고조에 대한 한국 천주교회의 호소문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한반도 긴장 고조에 대한 한국 천주교회의 호소문
보도자료민족화해주교특별위원회 2024-11-05

배포일:2024-11-05
문 의:
행정실 노희성 부장 ☎ 02-460-7511

배 포:
미디어부 성수환 부서장 ☎ 02-460-7681 media@cbck.kr

한반도 긴장 고조에 대한 한국 천주교회의 호소문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이사 2,4)
 

지금 한반도의 하늘에는 증오와 미움의 먹구름이 어느 때보다도 무겁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그 먹구름이 무력 분쟁이라는 폭우로 변할까 많은 이들이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는 서로를 적대하는 전단과 오물 풍선이 난무하고 있으며, 휴전선 접경 지역 마을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는 확성기 소리에 불편과 불안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전쟁 중인 러시아에 북한군이 ‘파병’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우크라이나에 대한 우리 정부의 무기 지원에 세상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이렇게 높아지는 한반도의 긴장을 예의 주시하고 이 땅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 호소문을 발표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평화’의 의미와 그 가르침을 다시금 되새겨야 합니다. 남북이 함께 평화롭게 지내려면 물리적인 힘을 앞세워 상대를 굴복시키려 하기보다 상호 간에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내야 합니다. 증오와 대결의 악순환을 멈추고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현재의 대결 국면을 해소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북은 그동안 수많은 위기를 겪어 왔지만, 슬기롭게 극복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작은 변화로도 지금의 긴장을 낮추고 무력 충돌을 방지할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남북의 지도자와 정치인, 그리고 정책 결정자들에게 호소합니다. 바싹 마른 들판에서는 작은 불씨 하나도 큰 불길로 번질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지금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남북의 상황을 우려합니다. 국가의 첫 번째 임무는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지도자들은 전쟁의 참극이 일으키는 고통을 바로 자기 자신의 일로 여겨야 합니다. 남과 북 모두 위협을 당장 멈추고 군사적 긴장을 낮추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특히 새롭게 뽑히는 미국 지도자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남과 북 사이에 군사적 긴장이 완화되고 대화가 복원될 수 있도록 미국을 포함한 한반도 관련국들의 외교적 노력이 절실합니다.

아울러 평화의 사명을 지닌 신앙인과 공동선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호소합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목전에서 비오 12세 교황께서 “평화로는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으로는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로 가는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해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군사적 충돌은 피해야 합니다. 정치 지도자들이 평화적인 방법을 선택하도록 우리 모두 촉구합시다.

이 시간에도 지속되고 있는 전쟁은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 주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이스라엘과 중동의 전쟁 속에서 선량한 시민들이 크나큰 피해와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지금 평화를 희망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는 결코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넘어서는 용기를 주며, 갈등의 순간에도 사랑과 화해의 길을 선택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성심께서 전쟁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고, 평화를 세워 우리를 정의롭고 형제애 가득한 세상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니(「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Dilexit Nos), 220항 참조) 한반도와 전 세계에 진정한 화합과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평화의 여정으로 나아가는 길을 선택합시다. 진정한 평화를 위해 우리는 간절히 호소하며 기도합니다.

2024년 11월 5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민족화해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 김 주 영 주   교
위원 조 환 길 대주교
옥 현 진 대주교
정 순 택 대주교
손 희 송 주   교
박 현 동 아빠스

[내용출처 - https://www.cbck.or.kr/Notice/20242448?fbclid=IwY2xjawGXpW5leHRuA2FlbQIxMAABHSHp_VKLJS5bQ3MASG7lpzoRiPM6_kq7KplHYlEVUQkWTWKhfRFyIvvatA_aem_4IVqT6r-fDTn7pn0m7t7H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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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5

"사라져가던 언어에 생명 줬다"…NYT, 찌아찌아 한글도입 조명 | 연합뉴스

"사라져가던 언어에 생명 줬다"…NYT, 찌아찌아 한글도입 조명 | 연합뉴스

"사라져가던 언어에 생명 줬다"…NYT, 찌아찌아 한글도입 조명

송고시간2024-11-04 21:08

임지우기자

"구전되던 고유어 한글로 기록하고 공공기관 등 일상에도 정착"
현지 사회학자 "언어 사멸하면, 부족 정체성도 사라진다"

12년째 한글 교재로 부족 고유어 배우는 찌아찌아족

(자카르타=연합뉴스) 성혜미 특파원 = 인도네시아 부톤섬의 찌아찌아족 학생들이 한글 교재로 찌아찌아어를 배우고 있다.
[한국찌아찌아문화교류협회 제공. 

(서울=연합뉴스) 임지우 기자 = 2009년 한글을 도입해 고유 언어를 기록해 온 인도네시아 소수민족 찌아찌아족의 사례를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가 민족 정체성 보전의 성공사례로 조명해 주목된다.

4일(현지시간) NYT는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의 언어는 수 세기 동안 구두로 전해져왔다. 이제 부족의 아이들은 한국의 문자인 한글로 이를 쓰는 법을 배우고 있다"며 찌아찌아족의 한글 도입 현장을 소개했다.

인도네시아 중부 부톤섬에 살고 있는 찌아찌아족 주민 9만3천여명이 사용하는 고유어 '찌아찌아어'는 한글 도입 이전까지는 표기법이 없어 주로 구전되어 내려왔다.

그런 까닭에 인도네시아에 존재하는 700여개가 넘는 다른 소수민족 언어 대부분이 그렇듯 인도네시아 공식 언어인 바하사 인도네시아어에 차츰 잠식돼 원형을 상실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부톤섬 바우바우 지역의 사회학자 라 오데 알리르만은 "언어가 사멸하면, 부족의 정체성과 그 지역의 지혜도 함께 사라지게 된다"고 고유어를 잃었을 때의 위험성을 설명했다.

그러나 2009년 한국 학자들은 찌아찌아어가 음절 위주 언어인 한국어와 발음이 비슷하다는 사실에 착안, 한글 전파를 시도했고 이후 15년이 지난 현재 찌아찌아족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한글로 조상들의 언어를 익히고 있고 이를 위한 자체 교과서도 존재한다고 NYT는 소개했다.

찌아찌아족이 다수 거주하는 바우바우시 소라올리오 마을의 경우 거리와 학교, 공공기관 등의 명칭도 로마 알파벳과 한글로 함께 표기돼 있다.

한글을 받아들여 고유어와 문화를 보전하려는 찌아찌아족의 노력은 한글을 가르칠 교사가 부족해 한때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2020년 한글로 된 찌아찌아어 사전이 발간되면서 다시 추진력을 얻은 상황이라고 NYT는 전했다.

그러면서 한국 학계는 그간 여러 차례 문자 체계가 없는 민족에 한글을 전파하려 시도했으나, 성공한 사례는 찌아찌아족이 유일하다고 설명했다.

한글 도입 초기 직접 한국에서 한글을 배워 현지에 전파한 찌아찌아족 원주민 아비딘은 NYT에 "우리는 우리의 언어를 보존하기 위해 한글을 빌려왔다"면서 "옛 한글과 현대의 한글을 섞어서 독특한 찌아찌아의 것으로 만든다"고 설명했다.

지역 학자와 원로들은 이러한 노력을 통해 갈수록 사용인구가 줄어드는 찌아찌아어의 명맥을 잇고, 각종 전승을 문자화함으로써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려 노력 중이다.

알리르만은 "우리의 민담을 기록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지역의 지혜와 조상들의 역사, 우리 기억과 부족의 정체성을 다음 세대에 전수해 간직할 수 있다"고 말했다.

wisefoo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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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체계 출현과 전파는 어떻게…훈민정음학회 12일 학술대회
송고시간2024-10-07 
2022년 열린 훈민정음학회 국제학술대회 모습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훈민정음학회는 이달 12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신양관에서 창립 17주년 국제 학술대회를 연다고 7일 밝혔다.

올해 주제는 '문자 체계의 출현과 전파'다.

에리카 샌드맨 핀란드 헬싱키대 교수는 중국 칭하이(靑海)성에서 사용되는 우툰어와 우툰 화자의 글쓰기 관습을 주제로 연구한 내용을 설명한다.


마우리치오 리오토 안양대 교수는 상업적 교류와 사회적 관계를 촉진하기 위한 도구로 시작된 알파벳이 문학·역사·철학의 매개체로 발전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용 서울시립대 교수는 '문자학적 관점에서 본 조선 후기의 한자'를 주제로 발표한다.

훈민정음학회는 전 세계의 문자와 문자학을 연구하기 위해 2007년 설립됐다.

2009년에는 고유 언어는 있지만, 문자가 없었던 인도네시아의 소수 민족 찌아찌아족이 그들의 언어를 한글로 표기할 수 있도록 한글 보급 사업을 펼친 바 있다.

yes@yna.co.kr



거침 없이 한국말 하는 아이들... 한글 도입 14년, 찌아찌아족은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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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르포] 한글 받아들인 찌아찌아족 한글학당 탐방기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입력 2023.10.01.

바닥이 붉은색으로 물들어간다. 깨진 와인병에서 술이 점점 더 많이 흘러나왔다. 6월 26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공항, 입국 수속을 위해 줄을 서 있던 참이었다. 함께 인도네시아에 온 일행이 와인병이 든 쇼핑백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깨진 와인병과 바닥을 적시는 술을 번갈아보고 있는데 공항 남자 직원이 다가온다.

사진=정덕영

“이거 문제가 될 수 있다.”

벽에 붙은 감시카메라를 가리키며 자못 위협조다.

‘술병을 바닥에 떨어뜨린 게 문제가 된다고?’

술병 사고 전에도 그 직원은 기자에게 비자를 왜 사전에 신청하지 않았냐고 추궁하는 둥 뭔가를 원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던 참이었다. (많은 외국인 입국자들처럼 기자도 입국장에서 도착 비자를 발급받을 예정이었다.)

비행기를 놓치다

그때 히잡을 쓴 여성 직원이 빗자루와 양동이를 들고 나타났다.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사고 현장을 정리했다. 김이 샜다는 듯 그 직원도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사실 와인병이 깨지는 건 여러 문화권에서 부정적인 징조로 친다. 물론 과학적인 근거는 없다. 믿거나 말거나다.

수속을 마치고 공항 안에 있는 호텔로 이동했다. 호텔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일찍 바우바우(Bau-Bau)로 향하기 위함이다. 먼저 마카사르로 가는 국내선을 탑승한 후, 거기에서 부톤(Buton)섬 바우바우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탈 예정이다. 바우바우에는 찌아찌아(Cia-Cia)족이 산다. 그들에게 한글과 한국어를 가르치는 정덕영 교장과 바우바우 한글학당이 그 곳에 있다.

다음 날 아침, 기자는 체크인 카운터 앞에서 넋을 놓고 서있었다. 비행기를 놓친 것이다. 꿈이 아닐까.

동서 길이가 5150km

물론 비행기를 놓친 직접적인 이유는 기자가 체크인 카운터에 여유 있게 도착하지 않은 것이었다. 세부적인 이유를 굳이 꼽아 보자면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자카르타에서 출발하는 국내선은 국내선이 아니라 거의 국제선이다. 국제선을 타는 마음가짐으로 체크인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한국이라면 국내선은 탑승 1시간 전에 가도 충분하다. 인도네시아는 다르다. 일단 공항 진입 과정부터 복잡하다. 수카르노 하타 공항은 1터미널, 2터미널, 3터미널로 이뤄져 있다. 1터미널은 국내선 터미널이고, 2·3은 국내선, 국제선 공용(共用) 터미널이다. 국제선, 국내선 공용이다 보니 공항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보안 검색 절차에도 시간이 걸린다. 주목해야 할 건 국내선의 경우 탑승 터미널과 게이트가 수시로 바뀐다는 거다. 탑승 전까지 계속 확인해봐야 한다. 탑승 전날 확인할 때는 2터미널이었는데 당일 가보니 3터미널인 경우도 잦다. 터미널 사이 이동에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 30분은 잡아야 한다.

나중에 호텔 프런트에서 직원에게 물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국내선을 타기 위해 보통 몇 시간 전에 공항에 가나요?” 단호한 어조로 “2시간 전이다. 그래야 안전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사실 한국과 사정이 다른 게 당연한 것이, 인도네시아는 한국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국토의 규모가 엄청 크다. 동남아 적도상에 길고 넓게 자리해 있다. 서울-자카르타 직선거리가 5283km(비행시간 약 7시간)인데, 인도네시아의 동서 길이가 5150km다. 서쪽 끝에 있는 사방에서 메단, 자카르타, 자야뿌라를 경유해 동쪽 끝인 머라우께까지 가려면 국내선 비행시간만 20시간이 걸린다.

시간관념 부족한 인니 항공사들

둘째, 인도네시아 항공사들에 문제가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국내선을 운항 중인 항공사로는 라이언 에어, 바틱 에어, 가루다, 시티 링크 등이 있다. 인도네시아 항공사의 시간관념은 여행객들 사이에 유명하다. 국적기인 가루다와 가루다가 운영하는 시티 링크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라이언 에어는 악명 높다. 출발 시각을 한두 시간 뒤로 미루는 건 다반사다. 운항을 당일에 갑자기 취소하는 일도 흔하다. 얼마나 어이없나 하면, 심지어 일찍 출발하기도 한다. 고속버스도 그러지 않는데 말이다. 기자가 놓친 비행편도 라이언 에어였다.

나중에 부톤섬에서 다시 자카르타로 나올 때도 어김없이 라이언 에어가 추억을 만들어줬다. 예약해놓은 항공편을 갑자기 없애버렸다. 운항이 취소됐다는 것도 출발 당일까지 알려주지 않았다. 뒤이어 예약해놓은 항공편 모두 탑승할 수 없었다.

세계 최대 이슬람국가

셋째, 6월 마지막 주가 갑자기 인도네시아의 황금연휴가 되어버렸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6월 29일(목)은 원래 인도네시아 휴일이다. 이슬람 희생제 ‘이둘 아드하(Idul Adha)’ 종교일이다. 그런데 그 앞뒤 평일도 갑자기 휴일이 됐다.

인도네시아는 세계 최대의 이슬람국가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란 같은 이슬람국가와는 다르다. 세속(世俗)국가를 표방한다. 이슬람교와 함께 불교, 힌두교, 가톨릭, 개신교, 유교를 국가 종교로 지정했다. 각 종교의 축일마다 다 쉰다.

2016년 기준 전체 인구의 87%가 무슬림이다. 전체 인구가 많다 보니 기독교를 믿는 이들도 2000만 명이 넘는다. 2021년 기준 2억7200만 명이다. 주민등록증에 자신의 종교를 명시해야 한다. 무신론자(無神論者)는 공산주의자로 간주되어 사회에서 배척하는 분위기였다. 최근엔 조금 달라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무신론자라고 떳떳이 밝히기는 어려운 분위기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이슬람 희생제 앞뒤 날도 쉬라고 갑자기 발표했다. 6월 28일(수)과 30일(금)이 ‘권장 공동휴일(Cuti Bersama)’이 되면서 5일 내내 쉴 수 있는 연휴 기간이 되어버렸다. 인도네시아 주요 언론에 보도된 게 6월 20일이니, 휴일 일주일 전에 발표됐다.

어쩐지 공항에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비행기를 놓치고 망연자실해서 다음 비행편을 검색했다. 더 공포스러운 건 비행기 좌석이 실시간으로 다 팔리고 있다는 거였다. 아무리 황금연휴라도 왜 이렇게 사람들이 어딘가를 가려고 할까 의아했다. 부분적인 이유를 나중에 인도네시아 역사를 공부하며 알게 됐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인도네시아 정부에 오일 달러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하르토 정부는 인구 조밀 지역에서 저개발 지역으로 주민을 이주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러니 갑작스러운 연휴에 국내선이 난리통이 된 게 이해가 되기도 했다. 실제로 후에 비행기와 배에서 마주친 가족 단위의 여행객들은 대개 고향을 찾아가는 듯했다.

‘인도’는 인도네시아 의미

어쨌든 다음 날까지 바우바우에 도착해야 했다. 바우바우시에 먼저 도착해 있는 찌아찌아문화교류협회 측과 연락해 방법을 모색했다. 그 상황에서 최선의 방법은 켄다리까지 비행기를 타고 간 다음, 배를 타는 거였다. 켄다리는 동남술라웨시의 주도(州都)다. 켄다리로 가는 비행기표도 물론 다 팔렸지만, 대기를 걸어놨더니 기적처럼 구해졌다. 기자처럼 비행기를 놓쳐 자카르타 공항에 오지 못해 비행기를 놓친 이들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켄다리에 도착해 공항을 나서니 어느덧 해가 지고 있다. 거리 풍경은 기묘하다. 가게들이 분명 영업을 하고 있고 꽤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걸어 다닌다. 그런데도 거리가 어둡다. 가로등이 거의 없다. 도로 중앙분리대에만 겨우 있다. 차 사고만 나지 말라는 뜻인가. 거리 전체가 어둠 속의 축제를 벌이고 있는 것 같다.

유심히 보다 이유를 알았다. 가로등이 없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조명의 조도(照度)가 낮다. 영업 중인 상점 내부도 그리 밝지 않다. 전기의 전압(電壓)이 낮아서였다. 무슨 일인지 마트 체인인 ‘인도마트(Indo Mart)’는 무척 환했다. 알고 보니 돈을 따로 들이면 승압(昇壓)을 할 수 있단다.

‘흥남 철수’

다음 날 새벽 6시30분, 항구로 향했다. 부톤섬으로 가는 배를 타러 가는 길이다. 바우바우 한글학당 측에서 알음알음으로 현지인을 통해 표를 구해줬다.

정말 당황하면 웃음이 나올 수 있다는 걸 혹시 아는지. 항구에 도착해 나도 모르게 아하하하 웃음이 터졌다. 3배쯤 과장하면 흥남 철수 같은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배에 올라타려 수백 명이 아우성이다. 배 2층 갑판으로 막무가내로 기어올라가는 이들이 보였고, 배 안으로 들어가는 좁은 입구 안팎으로 수백 명이 거품처럼 몰려 있었다. 모두 표를 들고 있긴 한데, 과연 저 무리에 끼어 배를 탈 수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어안이 벙벙해서 서 있는데 배를 예매해준 현지인 남성이 재빨리 선원 한 명을 붙잡고 뭐라뭐라 말한다. 그러자 선원이 억지로 길을 만들어줬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표를 100장 들고 있어도 못 탔을 거라 확신한다.

간신히 자리에 앉고 보니 바닥이고 선반이고 엉덩이를 붙일 수 있는 모든 곳에 사람들이 앉거나 서 있다. 아기까지 둘러메고 서서 가는 이들을 보니 자리에 앉아 가는 게 미안할 지경이다. 8시가 되니 배가 출발한다. 집으로 가고 있기 때문일까. 선실 안엔 기대감 같은 게 떠다녔다. 배가 흔들리자 사람들이 ‘우우’ 하며 재밌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유명해진 찌아찌아족

앞자리에 앉은 여성들과 대화를 나눴다. 물론 번역 앱을 사용했다. 그들은 기자에게 “어디 가냐”고 물었다. “부톤! 찌아찌아”라고 했더니 “아” 하면서 단박에 고개를 끄덕인다. 여정 도중 만난 인도네시아인들에게 “한글을 채택한 찌아찌아족을 아는가” 물었더니 많은 사람이 안다고 대답했다.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채택해 상당한 홍보 효과를 거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바우바우에는 한때 ‘코리안 빌리지(한국 마을)’도 있었다. 한복을 입고 기념촬영도 할 수 있는 일종의 작은 한국 거리다. 한국에 관심이 있는 인도네시아인들이 꽤 많이 찾았다고 한다. 지금은 운영하지 않는다.

부톤섬에 도착했다. 5시간 걸린다더니 거의 7시간이 걸렸다. 배가 가라앉지 않은 것만으로 감지덕지였다. 승객들은 순식간에 배에서 빠져나갔다. 와중에 짐가방이 없어지지 않은 것은 기적 같았다. 공기 중에 두리안 향기가 떠다닌다. 한국어로 쓴 손피켓을 들고 마중 나온 찌아찌아 아이들이 보였다.

부톤섬의 면적은 4727km²로 제주도 면적(1846km²)의 약 2.5배다. 강원도 인제·평창·홍천을 합한 면적과 같다. 대부분 열대 우림 지대다. 바우바우시의 인구는 16만 명, 13개 민족으로 이뤄져 있는데 이 중 찌아찌아족이 가장 많다. 찌아찌아족은 약 9만1000명이다. 대부분이 이슬람교를 믿는다.


2010년부터 한글 가르친 정덕영씨

찌아찌아족 초등학생 아이들. 초등학생은 한글을 배우고, 중·고등학생은 한국어를 공부한다. /사진=정덕영

찌아찌아족은 고유 언어인 찌아찌아어가 있지만 사멸(死滅)될 위기에 처해 있다. 젊은이들은 인도네시아어로 소통한다. 언어가 없어진다는 건 그 언어가 담고 있는 이야기들도 없어지는 걸 의미한다. 찌아찌아어는 고유 문자가 없기 때문에 사라져 가는 전통과 기억을 기록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한글을 받아들인 이유다.

찌아찌아족과 한글의 첫 만남은 1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5년 전태현 한국외국어대 말레이·인도네시아어 통번역학과 교수는 국제학술대회 참석차 바우바우시를 방문했다. 이때 처음 고유 문자가 없는 찌아찌아족을 알게 됐다. 전 교수에게 이 얘기를 전해 들은 훈민정음학회는 찌아찌아족에 한글 사용을 제안했다. 찌아찌아족은 부족장 회의를 열었다. 한글을 부족의 문자로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14년 전, 2009년의 일이다.

현지에서 한글을 가르칠 교사로 정덕영씨가 선발됐다. 이듬해인 2010년 바우바우시로 떠났다.

한국찌아찌아문화교류협회

2011년 정부의 지원이 끊겼다. 세종학당과 정씨는 귀국해야 했다. 찌아찌아 아이들은 돈을 모아 현지 신문에 “선생님이 돌아오게 해달라”는 광고까지 냈다.

정덕영씨의 호소를 듣고, 몇몇 뜻있는 인사들이 모였다. 이들은 사비(私費)를 털어 후원금을 모았다. 사단법인 한국찌아찌아문화교류협회를 만들어 지금까지 후원을 계속하고 있다. 기자와 여정을 함께한 백순진 함께하는음악저작인협회 이사장(4월과5월 리더) 같은 이들이다. 덕분에 한글 교육이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지난해 8월엔 바우바우에 학교를 세웠다. 1311㎡ 부지 위에 연면적 465㎡ 2층 규모의 건물 안에 한글학당이 자리하고 있다. 교보생명이 건축비를 보탰다.

한글 고어 사용하는 찌아찌아족

올해는 한국·인도네시아 수교 50주년이다. 50주년을 기념해 한국 기업과 기관들이 바우바우시에서 힘을 합쳤다. ‘팀코리아’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는 현지에서 기업들과 함께 이번 행사를 기획했다. e러닝 콘텐츠를 만드는 기업인 아라소프트(대표 강정현)는 찌아찌아족이 사용할 수 있는 맞춤형 문서 저작 프로그램을 만들어 기증했다. 맞춤형 프로그램이 필요한 이유가 있다.

찌아찌아족 언어의 발음 특성상 한글 고어(古語)를 문자에 활용한다. 순경음(脣輕音) 비읍(ㅸ)이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엔 사용됐지만 이후 사용하지 않게 됐다. 영어의 브이(v) 발음과 비슷한 음가(音價)를 가졌던 걸로 추정된다. 찌아찌아어에서는 순경음 비읍을 활용하는데, 이걸 표기할 수 있는 디지털 문서 저작 프로그램이 없었다. 책을 만들 때 손으로 써서 제작했다. 아라소프트는 순경음 비읍을 쓸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라이선스를 기증했다.

KB국민은행은 노트북과 스마트 태블릿 60여 대를 바우바우 한글학당에 기증했다. KB국민은행은 인도네시아에서 활발히 사업을 펼치고 있다. 현지 은행인 부코핀은행을 인수해 KB부코핀(행장 이우열)으로 사업 중이다.

바우바우 현지 협력을 기념하는 행사가 6월 28일 한글학당 앞마당에서 열렸다. 말 그대로 산 넘고 물 건너 간 끝에, 이 행사를 겨우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다. 이상덕 주인도네시아 한국 대사가 직접 참석해 한글학당에 현판을 기증했다. 한국 대사가 바우바우시를 찾은 건 수교 이래 처음이라고 했다.

양칠성과 허영

이상덕 대사는 축사에서 인도네시아와 한국의 오랜 인연을 소개했다. 양칠성, 허영 등 낯선 이름들이 들려왔다. 이들의 이름에는 인도네시아와 조선, 일본의 역사가 얽혀 있다.

1942년 3월 일본군은 자바해전에서 승리해 인도네시아를 군정 통치하기 시작했다. 전북 완주 출신인 양칠성은 1942년 2월, 일본군 군무원으로 인도네시아에 왔다. 자바섬에서 포로감시원을 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했다. 네덜란드군이 인도네시아로 돌아왔다. 양칠성은 조선으로 돌아오지 않고 인도네시아에 남았다. 일본군에서 이탈한 조선인, 일본인 동료들과 함께 인도네시아 독립군으로 활약했다. 1948년 11월까지 네덜란드군과 맞서 싸웠다. 체포된 후 1949년 8월 10일 처형당했다.

허영은 일제 시대 히나쓰 에이타로(日夏英太郎)라는 이름으로 활약한 영화감독이다. <그대와 나(君と僕)>(1941)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허영은 1942년 육군보도반원으로 인도네시아로 갔다. 그 역시 일본 패망 후 아내와 딸이 사는 일본에도, 모국(母國)인 조선으로도 돌아가지 않았다. 인도네시아에 남아 영화인으로 활약했다. 인도네시아 초창기 영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인도네시아 영화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라고 한다.

초등학생쯤 될까 찌아찌아족 아이들이 한복을 입고 등장해 아리랑을 불렀다. 바닷바람 속에 울리는 아리랑 노래를 들으며, 아이들의 그늘 없는 미소를 보자 비행기를 놓친 거며, 7시간 배를 탄 기막힌 기억이 슬며시 기화(氣化)되는 것 같다.


현지인 교사도 탄생

흐뭇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정덕영 바우바우 한글학당 교장. /사진=정덕영

기념식을 지켜보는 정덕영 교장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기쁜 마음을 애써 숨기는 듯했다. 2010년부터 지금까지, 가족도 없이 이국 땅에서 혼자 살며 한글을 가르쳐온 그가 아니었다면 한글학당도, 오늘의 기념식도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 물었다.

- 다 그만두고 한국으로 가고 싶을 때는 없었나요?

“있었죠. 교실에서 아이들 가르치는데 이민국에서 와서 체포하겠다고 한 적도 있었어요. 비자 문제 때문이었어요. ‘더 이상은 못 있겠다’ 싶었지요. 아플 때도 그랬어요. 간단한 병인데도 여기서는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렸을 때요. 처음에 오자마자 티푸스에 걸렸어요. 쓰러져서 열흘 입원했어요. 치료라고 해봐야 요양하고 나오는 정도였지요.”

- 그런데 왜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나요? 가족과 10년 넘게 떨어져 살고 있는데 그립지는 않나요?

“저도 제가 이렇게 오래 머무를 줄 몰랐어요. 가족들도, 저도 2~3년 있다 귀국할 줄 알았어요. 1년만 더, 1년만 더 하다 여기까지 왔어요. 여기가 인맥(人脈)의 사회거든요. 많은 사람을 알게 됐잖아요. 어느 순간에 칼로 무 자르듯 모든 걸 뒤로하고 돌아올 수가 없게 되어버렸어요. 처음엔 두 개 학교에서 가르쳤는데 지금은 열 개까지 늘어났어요. 현지인 교사도 세 명 채용했고요.”

- 다 버리고 돌아오기 힘들게 됐군요.

“제가 가르친 아이들이 자라서 이제는 보조 교사를 하고 있어요. 월급은 조금밖에 못 주지만 한국어 가르치는 거 괜찮은 일이라고 제가 그 아이들에게 권했어요. 그러니 어떻게 귀국합니까. 저라는 사람을 통해 이 아이들이 한글과 한국어와 인연을 맺었잖아요.”

한글학당에서는 찌아찌아 아이들에게 한글뿐 아니라 한국어도 가르친다. 찌아찌아족이 아닌 다른 종족도 그에게 한국어를 배운다. 현지에서 만난 찌아찌아족 아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한국어를 잘했다. 발음도 좋고, 아이돌이니, 드라마니 한국 문화에도 훤해 대화에 별 막힘이 없었다. 눈 감고 들어보면 한국의 여느 고등학생과 얘기하는 기분이었다. 한두 명만 그런 게 아니라 여러 명이 그랬다.

규제 완화하려는 조코위 정부

그는 한국이 그리우면 여객선이 오가는 항구에 간다고 했다.

“‘저 사람들 이제 고향에 가는구나, 이제 가족들 만나겠구나’ 사람 구경하면 조금 괜찮아져요. 아이들 가르치러 교실에 들어가면 다시 힘이 나지요. 한글 교사들도, 아이들도 이제 저를 믿고 따라요. 관공서 직원들과도 알고 지낸 지 벌써 십수 년 됐잖아요.”

인도네시아는 오랜 기간 외부에 배타적이었다. 사람들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 외국의 투자나 진출에 신중했다. 외국 기업의 투자를 희망한다고 하면서도, 외국인 비자 발급엔 까다로웠다. 현 정권인 조코위 정부는 규제를 간소화하겠다고 하지만 아직도 규제의 벽이 만만치 않다. 자카르타 같은 도시라면 좀 나을 수 있지만, 지역에선 폐쇄적인 관행이 심각하다.

이날 기념식에도 이민국에서 나와서 기자가 누구인지 정덕영 교장에게 물었단다. 현지 호텔에 체크인하면 여권 사본이 자동으로 이민국으로 전달되는데, 기자는 비행기를 놓친 탓에 현지 호텔 체크인을 늦게 해서 아직 여권이 전달되지 않아서였다.

“보살이 되거나, 미친 사람이 되거나”

정 교장이 그동안 끈질기게 버텨 현지인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해놓은 건, 상당한 일이라는 걸 현지에 가보니 알 수 있었다. 그것도 정부의 지원 없이 민간 차원에서 말이다.

정 교장은 먼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에서 10년 이상 살면 보살이 되거나, 미친 사람이 됩니다.”

실감이 되는 게, 기자도 며칠 채 머무르지도 않았는데, 분노조절장애에 걸릴 것 같았다. 사람들은 친절하고 외국인에 배타적이지 않은데, 도로나 교통체계 같은 사회 인프라와 제도가 아직 많이 부족했다.

‘한글이라는 집’이 넓어지고 있다

부톤섬에 오기 전까진 의구심이랄까, 마음 한쪽에 이런 의문이 있었다.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도입하는 게 그들에게 또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한글 덕분에 한글학교 앞마당에서 만나게 된 찌아찌아 사람들과 한국인들을 보며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어는 생각의 집이다.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면 내 안의 어떤 부분은 잃고, 다른 부분은 채워진다. 그러면서 생각의 집이 확장된다. 한글학당 계단에 앉아 찌아찌아족 소녀들과 어떤 아이돌 가수가 제일인지 짧고 진지한 토론을 나눈 후 생각했다.

‘인도네시아 한쪽 부톤섬에서 찌아찌아족과 한국인의 지평이 조금씩 넓어지고 있구나. 한글이라는 집이 넓어지고 있구나.’

한글이라는 한 지붕을 공유하게 된 찌아찌아족과 인도네시아에 대해 이제부터는 우리가 더 많은 호기심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을 창제하고 반포한 목적이 바로 이런 게 아니었을까.⊙

“10월의 마지막 밤을” 추억하며 < 김윤태 문학평론가

“10월의 마지막 밤을” 추억하며 < 인문 < 칼럼/에세이 < 기사본문 - 더칼럼니스트



기자명김윤태 문학평론가
인문
입력 2024.10.30

“10월의 마지막 밤을” 추억하며
[김윤태의 항일민족문학 소개]
안중근 「장부가」와 우덕순 「거의가」
1909년 10월26일에 하얼빈역에서
민족 원흉 암살 거사 앞둔 두 청년의 결의
뉴라이트 세력 준동, 10·26 떠올리게 해


* 필자 주- 지난 6~9월 넉 달 동안 필자의 개인 사정으로 칼럼을 4회 건너뛰게 된 점에 대해 독자 여러분들께 송구한 마음을 전합니다. 아울러 칼럼을 재개하는 김에, 그동안 <한국시 산책>이 취해 왔던 시기별·사건별 접근의 방향을 좀 바꾸어서 당분간 “항일민족문학” 작품들을 찾아 소개하는 방식으로 몇 차례 진행해 볼 생각입니다. 이에 <더칼럼니스트> 편집진의 동의를 얻어 이 글이 우리 민족의 정기를 다시 회복하는 데 작으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1979년 10월26일 그 날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단 한 명의 가수를 꼽으라고 설문조사를 한다면,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는 조용필이 차지할 것이다. 그는 특히 1980년대에 폭발적인 인기를 거두었는데, 당시 거의 모든 가수·가요상을 휩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급기야 1987년부터는 TV 프로그램에서 주는 그같은 가요 관련 상들의 수상을 스스로 거부했다고 한다. 이젠 방송이나 언론에 거의 비치지 않는 그에게 아직도 대중들은 ‘가왕’이라는 호칭을 부여하며 그를 칭송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조용필을 제치고 1982년에 깜짝 ‘가수왕’(MBC 최고 인기 가수상)을 차지했던 이가 있었다. 1981년인가에 데뷔해서 1년 만에 최고 가수의 반열에 올랐으니, 그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함 직하지 않은가. 그는 ‘이용’이라는 가수였고, 그에게 가수왕의 타이틀을 안긴 노래는 「잊혀진 계절」이란 곡이었다. 그 노래 가사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으로 시작하는데, 노래가 발표된 지 42년이나 지난 요새에도 더러 불리고 있는 것을 보면, 인기가 많았긴 했던 것 같다.

이즈음, 즉 바로 10월 말이 오면 필자도 가끔 그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는데, 그러다가도 꼭 그 노래를 개사한 것을 이어 부르게 되곤 한다. “왜 개사한 노래를?”이라는 의문이 들지 않는가.

당시 대학생들은 1979년 10월 26일의 사건을 다 알고 있었고, “시월의 마지막 밤”이란 대목에 이르면 꼭 그 사건이 떠오르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날 저녁 경복궁 옆 궁정동의 안가에서는 젊은 여가수와 여대생을 양옆에 앉히고 정부 최고직의 부하 3명과 함께 회식을 즐기던 당시 군사독재의 권력자 박정희 대통령이 같은 고향에 같은 군인 출신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피격당해 사망하는, 희대의 대사건이 터진 것이다(당시의 이같은 정황을 자세히 재연하고 싶다면, 영화 「그때 그사람들」을 보라).

당시 대한민국의 전국민들에겐, 아니 전세계가 경천동지할 일이 벌어졌던 것, 그 순간 18년 간의 군사독재가 끝장나버린 것이다. 여기서 잠깐, 바로 그 노래 「잊혀진 계절」의 가사와 그 개사된 가사를 불러보자.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
시월의 마지막 밤을 /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양주잔 기울이고 있다가) /
우리는 헤어졌지요(머리에 총맞았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짜릿했던 술맛은) /
그대의 진실인가요(독재의 종말인가요) /
한마디 변명도(유언도) 못하고 /
잊혀져야(물러줘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그래도 뒤를 잇는 파쇼는) /
나에게 꿈을 주지만 /
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
나를 울려요. (이하 생략 / 괄호 안은 개사)

그렇다. 우리는, 아니 필자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 시월의 마지막 밤을”. 그 사건이 나기 딱 3주 전, 추석날 저녁에 유신 철폐 등의 내용이 적힌 유인물을 뿌리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투옥되어 구치소 감방에서 그의 죽음을 전해 들었기에, 45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필자는 ‘그 마지막 밤’을 더더욱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이렇듯 10.26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사건 중의 하나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안중근 의사.

1909년 10월 26일 그날

그런데 한국의 근대사에서 “또 다른 10.26”이 있었음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지금부터 115년 전인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중국 만주 하얼빈역에서 울린 세 발의 총성! 일본의 초대 수상에 초대 조선통감을 지냈던 노회한 거물급 정객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안중근 의사가 저격하여 사망케 한 바로 그 사건이다.

이 사건 역시 너무나도 유명하기에, 여기에서 사건의 세부를 낱낱이 거론할 필요는 굳이 없을 것이다. 다만 그 거사를 치르기 전에 안중근 의사가 동지들과 함께 결의를 다지는 시 한 수를 지었다는 사실을 밝혀 소개하고자 한다.

「거사가(擧事歌)」 혹은 「장부가(丈夫歌)」라 불리는 이 시는 거사 3일 전 하얼빈에 있는 동지 김성백의 집에서 우덕순, 유동하, 조도선 등과 모여 거사에 임하는 자신의 각오와 결기를 읊은 것이다. 한시와 한글 시가 함께 전해진다고 한 것으로 보아, 두 가지 언어로 동시에 지은 것이 아닌가 싶다.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뚯이 크도다 丈夫處世兮 其志大矣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時造英雄兮 英雄時造
천하를 응시함이여, 어느 날에 업을 이룰꼬 雄視天下兮 何日業成

동풍이 점점 참이여, 장사의 의기가 뜨겁도다 東風漸寒兮 壯士義烈
분개하여 한 번 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憤慨一去兮 必成目的
쥐 도적 쥐 도적이여, 어찌 즐겨 목숨을 비길꼬 鼠窺鼠窺兮 豈肯此命
어찌 이에 이를 줄을 헤아렸으리요, 시세가 고연하도다 豈度知此兮 時勢固然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同胞同胞兮 速成大業
만세 만세여, 대한독립이로다 萬歲萬歲兮 大韓獨立
만세 만만세여, 대한동포로다 萬歲萬歲兮 大韓同胞

(신동한 엮음, 『항일민족시집』, 서문문고, 1975, 132-134쪽 참조. 이 책에서 해당 작품을 인용했으나 약간의 오류가 발견되어 필자가 수정·보완하였음을 밝힌다.)
신동한 엮음 '항일민족시집'

위 시에서 ‘쥐 도적’이 이토 히로부미를 지칭한다는 것쯤은 누구나 짐작할 것이다. 원문에는 쥐 도적(鼠窺)이 중복되지 않고 ○○으로 비어 있다고 한다. 보안의 필요성 때문에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이며, 그 자리에 들어갈 단어는 이토(伊藤)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업’(이토 암살)을 이루고자 하는 안 의사의 장부(丈夫)로서의 결의에 찬 모습을 누구나 쉬이 읽어낼 수 있으리라.

이에 화답하여 우덕순(禹德淳)이 쓴 「거의가(擧義歌)」도 아울러 소개한다. 우덕순은 하얼빈 의거를 모의했던 동지였다. 그는 하얼빈역보다 앞 역인 차이자거우(蔡家具)역에서 거사를 분담 준비하던 중 기차역 객사에 갇혀버리는 바람에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오히려 러시아 헌병에게 붙잡힌 인물이다.

만났도다 만났도다 원수 너를 만났도다
너를 한번 만나고자 일평생에 원했지만
하상견지만야(何相見之晩也)련고

너를 한번 만나려고 수륙으로 기만리(幾萬里)를
혹은 윤선(輪船) 혹은 화차(火車) 천신만고 거듭하여
노청양지(露淸兩地) 지날 때에 앉을 때나 섰을 때나

앙천(仰天)하고 기도하길 살피소서 살피소서 주 예수여 살피소서
동반도(東半島)의 대제국을 내 원대로 구하소서
오호라 간악한 노적(老賊)아 우리 민족 이천만을
멸망까지 시켜놓고 금수강산 삼천리를 소리없이 뺏느라고
궁흉극악(窮凶極惡) 네 수단을
대한민족 이천만이 다 같이 애련하여
너 노적을 이 정거장에서 만나기를 천만번 기도하며
주야를 잊고 만나고자 하였더니 마침내 이토를 만났고나

금일 네 명(命)이 나의 손에 달렸으니
지금 네 명(命) 끊어지니 너도 원통하리로다.
갑오 독립 시켜놓고 을사늑체(을사체약 乙巳締約)한 연후에
오늘 네가 북향(北向)할 줄 나도 역시 몰랐도다.
덕(德) 닦으면 덕이 오고 죄(罪) 범하면 죄가 온다.
네뿐인 줄 알지 마라. 너의 동포 오천만을
오늘부터 시작하여 하나 둘씩 보는 대로
내 손으로 죽이리라.

오호라 우리 동포여
한마음으로 전결(專結)한 후 우리 국권 회복하고
부국강병 꾀하면은 세계에 어느 누가 압박할까
우리의 자유가 하등(下等)의 냉우(冷雨)를 받으니
속히 속히 합심하고 용감한 힘을 가져 국민 의무 다하세.

(신동한 엮음, 항일민족시집, 서문문고, 1975, 156-157쪽 참조.

이 책에서 해당 작품을 인용했으나 약간의 오류가 발견되어 필자가 수정·보완하였음을 밝힌다.)

위 시에서도 역시 노적(老賊)은 이토 히로부미를 말한다. 그를 처단하는 일뿐만 아니라 그후로도 일본인은 보이는 대로 죽이겠다는 의기를 다지며, 국권 회복과 나라의 부국강병을 제시하는 등 향후 독립투쟁의 방향까지 제시하고 있다.
영화 '하얼빈' 포스터.

2024년 10월의 마지막 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필자는 이 의거를 다룬 영화 《하얼빈》(감독 우민호) 이 제작되어 오는 12월에 개봉될 거라는 소식을 들었다. 주연 배우로 안중근 역엔 현빈, 우덕순 역에는 박정민이라고 전한다. 이미 예고편과 포스터는 공개된 모양이다.

이 영화에 대한 기대가 자못 크지 않을 수 없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대한제국의 강점을 마치 합법적인 일인 양 호도하고 일제의 식민지 체제에 의해 우리나라가 발전한 것처럼 주장하는 뉴라이트 세력들이 현 정부의 이념을 담당하는 정부기관의 요직을 장악하고 있는 요즈음의 정치적 실태를 고려할 때, 1909년의 10.26 사건이 다시 우리 앞에 호출되었으면 싶은 심정이 들기 때문이다.

1979년의 10.26과 더불어 우리 역사를 다시금 찬찬히 돌아보면서 현재 우리나라가 처한 국내외적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해 가야 하지 않겠는가.


※ 김윤태는 한때 문학평론가로 잠시 활동하면서 여러 대학에서 강의도 한 연구자이기도 했으나, 지금은 어쩌다 그냥 잡문이나 끄적이는 낭인(?)이라 스스로 평한다. 서울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박사 졸업. 저서도 오래 전에 출판한 <한국 현대시와 리얼리티>(200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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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才・小室直樹が見ていた「日本社会の構造」とは | 【新装版】危機の構造 日本社会崩壊のモデル | ダイヤモンド・オンライン

天才・小室直樹が見ていた「日本社会の構造」とは | 【新装版】危機の構造 日本社会崩壊のモデル | ダイヤモンド・オンライン


天才・小室直樹が見ていた「日本社会の構造」とは
小室直樹
予測・分析【新装版】危機の構造 日本社会崩壊のモデル
2022.9.17 2:50

1976年の初版版発刊以来、日本社会学の教科書として多くの読者に愛されていた小室直樹氏による『危機の構造 日本社会崩壊のモデル』が2022年に新装版として復刊された。社会学者・宮台真司氏「先進国唯一の経済停滞や、コロナ禍の無策や、統一教会と政治の癒着など、数多の惨状を目撃した我々は、今こそ本書を読むべきだ。半世紀前に「理由」が書かれているからだ。」と絶賛されている。40年以上前に世に送り出された書籍にもかかわらず、今でも色褪せることのない1冊は、現代にも通じる日本社会の問題を指摘しており、まさに予言の書となっている。『【新装版】危機の構造 日本社会崩壊のモデル』では、社会学者・橋爪大三郎氏による解説に加え、1982年に発刊された【増補版】に掲載された「私の新戦争論」も収録されている。本記事は『【新装版】危機の構造 日本社会崩壊のモデル』より本文の一部を抜粋、一部編集をして掲載しています。(前回の記事はこちら

Photo: Adobe Stock
小室直樹が論じた日本社会の「危機の本質」(「増補 はしがき」より)

 旧著『危機の構造 日本社会崩壊のモデル』を発表したのは昭和五一年の秋である。その核心として論じたものは現代日本の危機の本質である。つまり、機能集団が同時に運命共同体の性格を帯び、そこから魔力にも似たエネルギーが発生し蓄積される。それも社会組織の隅々に、拡大再生産され続けながら――という指摘である。

 人々は核の恐ろしさを言う。だが、この危機の「構造的アノミー」(無規範状態・疎外)は核の恐怖の比ではない。何故なら前者は人間の思考と技術の産物であるが、その人間を規定するものがこの魔力にほかならないからだ。さらに言うなら、前者は相対的恐怖であり、後者は絶望的な恐怖である。

 私は旧著作を歴史に対してきわめて楽天的かつ健忘症の人々に対して警告する意味で論じた積りである。「戦後デモクラシーの認識」から「社会科学の解体」まで全篇を通じて、日本人の行動様式(エトス)が戦前戦後を時間的に貫いて同型であり、あらゆる組織や枠組を多面的に認識してみるときこれまた類似であるという事実を語ったのである。

 つまり、ロッキード事件、過激派行動などの分析を行ったのは、これらが歴史上特異な狂い咲きにも似た社会現象でも何でもなく、構造的(ストラクチャリー)に系(コロラリー)として発生するものである。換言すれば根株(ルーツ)から自然発生する“ひこばえ”現象であるという事実を言わんがためである。

 今回、新たに「私の新戦争論」を加えて『危機の構造』(増補)を上梓することになったが、私の論述の力点が前に述べた点に在ることは言うまでもない。(※編集部注 『【新装版】危機の構造 日本社会崩壊のモデル』では旧版および増補版の内容を掲載しています。)

 旧著「はしがき」を併読していただければ『危機の構造』の骨格をなぞることが出来ると思うので読者諸氏には一読をお勧めしたい。

昭和五七年一月 国際情勢の暗雲ますます高まる時に 小室直樹

本記事は『【新装版】危機の構造 日本社会崩壊のモデル』より本文の一部を抜粋、再編集して掲載しています。


過激な天才による名著がついに復刊!!
現代日本の危機の構造は40年以上前から変わっていない―。
さまざまな危機に直面している今だからこそ読んでおきたい1冊!
情熱的かつ論理的に日本社会の問題や日本人の特性に向き合った社会学者・小室直樹氏が日本社会に警鐘を鳴らす
宮台真司氏推薦!!
「先進国唯一の経済停滞や、コロナ禍の無策や、統一教会と政治の癒着など、数多の惨状を目撃した我々は、今こそ本書を読むべきだ。半世紀前に「理由」が書かれているからだ。」
橋爪大三郎氏による新たな解説付き!!
付録として1982年発刊の『【増補版】危機の構造』に掲載された「私の新戦争論」も収録した完全版!!

【新装版】危機の構造 日本社会崩壊のモデル
小室直樹(著)・橋爪大三郎(解説)/定価2200円(本体2000円+税)











【新装版】危機の構造 日本社会崩壊のモデル
小室 直樹 著/橋爪大三郎 解説
<内容紹介>

日本社会が抱える問題の原因は40年以上前から変わっていないー。さまざまな危機に直面している今だからこそ読んでおきたい幻の名著がついに復刊! 情熱的かつ論理的に日本社会の問題や日本人の特性に向き合った社会学者・小室直樹氏が日本社会に警鐘を鳴ら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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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코무로 나오키가 보고 있던 「일본 사회의 구조」란
코무로 나오키
예측·분석
【신장판】위기의 구조 일본 사회 붕괴의 모델
2022.9.17 2:50
1976년의 초판판 발간 이래, 일본 사회학의 교과서로서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고 있던 고무로 나오키씨에 의한「위기의 구조 일본 사회 붕괴의 모델」이 2022년에 신장판으로서 복간되었다. 사회학자 미야다이 신지 씨 “선진국 유일의 경제 정체나 코로나 사무의 무책이나 통일 교회와 정치의 유착 등 수많은 참상을 목격한 우리는 지금이 책을 읽어야 한다. 반세기 전 에 '이유'가 적혀 있기 때문이다. 라고 칭찬받고 있다. 40년 이상 전에 세상에 내보낸 서적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퇴색할 수 없는 1권은, 현대에도 통하는 일본 사회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어, 바로 예언의 책이 되고 있다.「【신장판】위기의 구조 일본 사회 붕괴의 모델」에서는, 사회학자·바시네오오사부로씨 에 의한 해설에 더해, 1982년에 발간된【증보판】에 게재된 「나의 신전쟁론」도 수록 되었습니다. 본 기사는 「【신장판】위기의 구조 일본 사회 붕괴의 모델」보다 본문의 일부를 발췌, 일부 편집을 해 게재하고 있습니다. (전회의 기사는 이쪽 )


일본 사회
Photo: Adobe Stock
코무로 나오키가 논한 일본 사회의 「위기의 본질」(「증보 엽서」보다)
 구저 「위기의 구조 일본 사회 붕괴의 모델」을 발표한 것은 쇼와 51년의 가을이다. 그 핵심으로 논한 것은 현대 일본의 위기의 본질이다. 즉, 기능 집단이 동시에 운명 공동체의 성격을 띠고, 거기에서 마력과 비슷한 에너지가 발생하여 축적된다. 그것도 사회조직의 구석구석에 확대 재생산을 계속하면서――라는 지적이다.

 사람들은 핵의 무서움을 말한다. 하지만 이 위기의 '구조적 어노미'(무규범 상태·소외)는 핵의 공포의 비가 아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인간의 사고와 기술의 산물이지만, 그 인간을 규정하는 것이 이 마력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더 말하면, 전자는 상대적인 공포이고, 후자는 절망적인 공포이다.

 나는 구저작을 역사에 대해 매우 낙천적이고 건망증의 사람들에 대해 경고하는 의미에서 논한 쌓이다. 전후 데모 클래시의 인식에서 사회 과학의 해체까지 전편을 통해 일본인의 행동 양식(에토스)이 전전 전후를 시간적으로 관철하여 동형이며, 모든 조직이나 틀을 다면적으로 인식하고 볼 때 이것 또한 유사하다는 사실을 말한 것이다.

 즉, 록히드 사건, 과격파 행동 등의 분석을 실시한 것은, 이들이 역사상 특이한 미친 피와 비슷한 사회 현상도 아무것도 아니고, 구조적(스트럭쳐리)에 계(콜로라리)로서 발생하는 것으로 있다. 환언하면 근주(뿌리)에서 자연 발생하는 '히코바에' 현상이라는 사실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새롭게 '내 신전쟁론'을 더해 '위기의 구조'(증보)를 상척하게 됐지만, 내 논술의 역점이 앞서 말한 점에 있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편집부주 『【신장판】위기의 구조 일본 사회 붕괴의 모델』에서는 구판 및 증보판의 내용을 게재하고 있습니다.)

 구저 「엽서」를 병독해 주시면 「위기의 구조」의 골격을 추적할 수 있다고 생각하므로 독자 여러분에게는 일독을 추천하고 싶다.

쇼와 57년 1월 국제 정세의 암운 점점 높아질 때 고무로 나오키

본 기사는 「【신장판】위기의 구조 일본 사회 붕괴의 모델」보다 본문의 일부를 발췌, 재편집해 게재하고 있습니다.

과격한 천재에 의한 명저가 마침내 복간!!
현대 일본의 위기의 구조는 40년 이상 전부터 변하지 않았다-.
다양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지금이기 때문에 읽어 두고 싶은 1권!
열정적이고 논리적으로 일본 사회의 문제나 일본인의 특성에 마주한 사회학자·코무로 나오키씨 가 일본 사회에 경종 을 울리는 미야
다이 신지씨 추천!!
그리고 통일교회와 정치의 유착 등 수많은 참상을 목격한 우리는 지금이 책을 읽어야 한다. 」
다리 손톱 오사부로씨에 의한 새로운 해설 첨부!!
부록으로서 1982년 발간의 「【증보판】위기의 구조」에 게재된 「나의 신전쟁론」도 수록한 완전판!!

「【신장판】위기의 구조 일본 사회 붕괴의 모델」
코무로 나오키(저)·다리 손톱 오사부로(해설)/정가 2200엔(본체 2000엔+세)

위기의 구조
다리 손톱 오사부로
미야다이 신지
【신장판】위기의 구조 일본 사회 붕괴의 모델
【신장판】위기의 구조 일본 사회 붕괴의 모델
코무로 나오키 저 / 다리 손톱 오 사부로 해설
<내용 소개>
일본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원인은 40년 이상 전부터 변하지 않았다-. 다양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지금이기 때문에 읽어 두고 싶은 환상의 명저가 마침내 복간! 열정적이고 논리적으로 일본 사회의 문제나 일본인의 특성에 마주한 사회학자·코무로 나오키씨가 일본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1993002 『国民のための戦争と平和の法』

1993002 『国民のための戦争と平和の法』
度別目録
1953-1979
1980-1989
1990-1999
2000-
媒体別目録
図書
雑誌
新聞
その他


小室直樹文献目録 一般文献 1993002
[ 書名 ] 『国民のための戦争と平和の法』[ 副書名 ] 国連とPKOの問題点
[ 著  者 ] 小室直樹,色摩力夫
[ シ リーズ ] 無
[ 出版者 ] 総合法令
[ 総頁数 ] 343頁
[ 発  行 ] 1993年10月13日初版第1刷
      1993年11月27日第5刷発行 まで確認
[ ISBN等 ] ISBN 4-89346-276-8 C1300
[ 価  格 ] 定価1300円(本体1262円)
[ 箱 ・帯 ] 箱無・帯有
[ 体  裁 ] 四六判 19.4×13.5cm
[ 図  表 ] 無
[ 注  記 ] 無
[ 分  類 ] 図書・共著
目次 まえがきにかえて・小室直樹さんのことなど(色摩力夫)
 プロローグ 国際法を知らないとあなたも殺される 1 あなたも殺されるかもしれない(小室直樹)
 2 中田厚被仁氏は国連に殺された(小室直樹)
 3 国連信奉者よ目を覚ませ(小室直樹)
 序章 戦争と文明 1 平和主義者が戦争を起こす(小室直樹)
 2 いまだ日本は外交音痴のまま(小室直樹)
 3 戦争の文明史的本質(色摩力夫)
 第1章 PKOの問題点 1 伝統主義社会と欧米流の法と正義(小室直樹)
 2 軍隊と警察の本質的差異(色摩力夫)
 3 自衛隊の場合(色摩力夫)
 4 警察官の場合(色摩力夫)
 第2章 国連の本質 1 国連の幻想(小室直樹)
 2 国連の本質を見抜くいくつかのポイント(色摩力夫)
 3 国連憲章は戦争を否定していない(色摩力夫)
 第3章 国際法とは何か 1 国際法の理念(色摩力夫)
 ディスカッションのためのテーマ・社会的事実について(小室直樹)
 2 国際法の諸原則
 ディスカッションのためのテーマ・成文法と慣習法について(小室直樹)
 ディスカッションのためのテーマ・主権について(小室直樹)
 第4章 戦争の法 1 戦時国際法という法秩序(色摩力夫)
 2 真珠湾攻撃は国際法違反か(色摩力夫)
 3 捕虜という制度(色摩力夫)
 4 シベリア抑留問題(色摩力夫)
 ディスカッションのためのテーマ・シベリア抑留問題について(小室直樹)
 5 平和国家と戦時法規(色摩力夫)
 エピローグ 国際法とは「戦争と平和の法」である(小室直樹)
所蔵館国会図書館有(A159-E72)
都立中央有(3290/3028/93)
大学図書館 CiNii
情報元-
他文献-
備考刷情報:1993年10月23日2刷
帯字句 表:
全国民必読の書,ここに現わる!
内容以下,「まえがきにかえて」より一部引用:
本書は,小室さんの特別の誘いを受けて,共著ということで筆をとった。これも面白い体験であった。しかし,小室さんとの共著は,これが初めてではない。二回目のことである。一回目は,一九八一年刊行の『新戦争論』(光文社)である。当時,私は現職の外交官でもあり,多少の遠慮はしない訳にはいかなかった。ただし,名前が全くないのでは困ると編集者から言われて,「ホセ・マリア・アラネギ」というペンネームを使用した経緯がある。
更新日2005-03-12
2021-12-30 増刷情報 追加

国民のための戦争と平和 : 小室 直樹,  : Japanese Books

Amazon.co.jp: 国民のための戦争と平和 : 小室 直樹,  : Japanese Books




国民のための戦争と平和 Tankobon Hardcover – January 25, 2018
by 小室 直樹 (著),   (編集)
4.6 4.6 out of 5 stars 53 ratings


これが小室直樹による、念仏でもないお題目でもない平和論だ!
1981年刊行の名著、待望の復刊!


本書のテーマは副題の通り、第一次大戦後、ヨーロッパには厭戦気分が蔓延し、いわゆるパシフィズム「平和運動」が盛んでした。そのような風潮の中、ヒトラーはフランスとの国境付近 ラインラントへ進駐します。
当時の英総理大臣チェンバレンは時代の流れに抗しきれず軍事行動へ踏み切れず、その後のヒトラーの野望を挫く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
戦後チャーチルは第二次大戦を評して「戦う必要のなかった大戦」と述べていますが、初期行動ができなかったことの反省でしょう。
国際法を学んだ人なら理解できると思いますが、「戦争」は国際紛争を解決する一手段です。
これは高度に組織化された文明の所産。ここを理解できないと「戦争」というものの判断を誤ります。
「紛争」ありきで戦争は始まります。何もないところから戦争が始まったことは文明史上ありません。
この「紛争」への対処の仕方で、その国の国民の命運が決せられるのです。

【本書の恐るべき提言】
●戦争は個人の心の内の問題ではない
●全会一致制で衰退したポーランド
●戦争決意ができずに崩壊したフランス
●非武装中立は白日夢である
●建前と実態の離れた国は破滅する
●日本は清帝国の二の舞にならないか

==
국민을 위한 전쟁과 평화 Tankobon Hardcover – January 25, 2018
by 코무로 나오키 (작가), (편집)  
4.6 5점 만점에 4.6점    53개의 평가
모든 형식과 에디션 보기
첫 책 구입으로 10%포인트 선물
이것이 코무로 나오키에 의한, 염불도 아닌 주제도 아닌 평화론이다!
1981년 간행의 명저, 대망의 복간!

본서의 테마는 부제대로, 제1차 대전 후, 유럽에는 왕전 기분이 만연해, 이른바 퍼시피즘 「평화 운동」이 활발했습니다. 이러한 풍조 속에서 히틀러는 프랑스와의 국경 부근 라인란트에 진주합니다.
당시 영국 총리대신 체임벌렌은 시대의 흐름에 견딜 수 없었고 군사행동에 밟히지 못하고 그 후의 히틀러의 야망을 좌절할 수 없었습니다.
전후 처칠은 제2차 대전을 평가해 「싸울 필요가 없었던 대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초기 행동을 할 수 없었던 것의 반성이겠지요.
국제법을 배운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전쟁」은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한 수단입니다.
이것은 고도로 조직화된 문명의 소산. 여기를 이해할 수 없으면 「전쟁」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을 잘못합니다.
'분쟁'으로 전쟁이 시작됩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전쟁이 시작된 것은 문명사상 없습니다.
이 「분쟁」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그 나라의 국민의 명운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본서의 무서운 제언】
●전쟁은 개인의 마음 안의 문제가 아니다
●전회 일치제로 쇠퇴한 폴란드
●전쟁 결의를 못해 붕괴한 프랑스
●비무장 중립은 백일몽이다
●건전과 실태 떨어진 나라는 파멸한다
●일본은 청제국의 두 춤이 되지 않을까

==
Publisher ‏ : ‎ ビジネス社 (January 25, 2018)
Publication date ‏ : ‎ January 25, 2018
Language ‏ : ‎ Japanese
Tankobon Hardcover ‏ : ‎ 224 pages
ISBN-10 ‏ : ‎ 4828420045
ISBN-13 ‏ : ‎ 978-4828420042
Dimensions ‏ : ‎ 5.31 x 0.79 x 7.68 inches
Amazon Bestseller: #169,687 in Japanese Books (See Top 100 in Japanese Books)
#1,179 in Military Affairs
Customer Reviews: 4.6 4.6 out of 5 stars    53 ratings

From Japan

네코바바아
5.0 out of 5 stars 전쟁을 말하는 사람,이 책을 기조로 해주세요.
Reviewed in Japan on May 1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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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무로 나오키 선생님이, 1981년에 광분사 카파북스에서 나온 책의 증보 재간행판으로, 지금 읽어도, 전혀 낡지 않고, 현재의 세계에도 푹 들어맞는다. 전쟁은 고도로 문명적인 제도인 이를 훔친 논의는 모두 유치한 수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40년 전에 배웠을 뻔했는데 오랫동안 잊었다.
63 페이지의 항목 ⓵에서 ⑥, 여기에서 읽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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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t
5.0 out of 5 stars 일본인에게는 절대 읽어야 한다
Reviewed in Japan on February 8,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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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도 어렵지 않고, 알기 쉽고, 그러나 명수에 써 있다.
한국이나 북한, 러시아 중국과의 싸움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지지가 불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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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쵸
5.0 out of 5 stars "헌법상 그럴 수 없다"는 변명은 성립되지 않는다
Reviewed in Japan on October 2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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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은 쉽게 "사회가 주어진다"고 생각한다. 그 사회를 장으로서 인간이 만들어야 할 제도도 주어진과 착각을 일으킨다. 전쟁은 문명의 소산이다. 제도인 것이다. 자연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태풍과 지진과 동일합니다. 국제정세도 단순한 여건이다. …

​​ ​의 재간행. 이것이, 40년 가까이 전, 1981년의 서적이라고 하기 때문에, 저자의 눈부신 장소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다. 아니, 이 나라가 국방이나 안보에 관하여 얼마나 유치하고 진보가 없는 나라인지 알자. 그 일부를 소개하자. ◆p.45 전쟁은, 개인의 양심의 문제로서 정리될 만큼, 단순한 소박한 일은 아니다. …… 국제분쟁의 해결을 목적으로 한, 거대한 노력의 체계이다.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특정 노력을 하지 않고 끝내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경우, 해결책은, 단 하나, 「그것과 동등 혹은 그 이상의 노력의 체계」로 옮겨놓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문명의 철칙이다. (제1장 “평화주의자”가 전쟁을 일으킨다) ◆p.88 전면 항복의 각오가 있다는 것은, 선방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만족시킨다는 것과 같다. 선방의 말이 될만한 각오가 있다면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전면적으로 양보하고 있을 것이다. 즉, 전쟁 이전 단계에서 해당 분쟁은 해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이 일어날 리가 없다. 만약 절대적 평화주의자가 있다고 하면… 할 각오가 없으면 맡지 않는다. … … 일본인에게, 이러한 절대 평화주의 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소질이 있을까. (제2장 전쟁을 부정하면 근대문명이 붕괴된다) 제3장(종장)은 마치 마루 일본인 유엔 신앙에 대해 비판적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지금 현재도 전혀 진부화하지 않았다. 지금 보수파에 의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유엔 신앙은 계속 옛날부터 지적되고 있었던 것이다. 21세기가 되어 세계는 '대테러전쟁' 시대에 돌입했다. 전쟁의 상대가 국가가 아니게 된 현재, 본서를 어떻게 응용할 수 있을까는, 국제 정치학의 좋은 연구 재료·연습 문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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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oo Tanaka / 다나카 이노부
4.0 out of 5 stars 평화를 만드는 것은 간단하다. 그러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은 훨씬 어렵다!
Reviewed in Japan on March 1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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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서 잡아당겨 오고, 코무로 나오키씨의 책을 읽어 보았다. 전쟁 그 자체는 인간의 '마음의 내부' 문제가 아니다. 전쟁은 국가 정책의 문제이다. 즉, 푸틴의 마음 안이라는 생각은 버리는 편이 좋다.

 전쟁은 국제 분쟁의 수단이다. 게다가 최종 수단이다. 소련군이 공격해온다는 자체 앞에는 전형하는 국제분쟁이 있을 것이다. 어떠한 국익을 건 분쟁이 있다. 이 단계에서 양보하면 원래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전쟁이 시작된 후 전면 항복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 전면 항복의 각오가 있다면, 선방의 말이 되는 각오로부터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전면적으로 양보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이란, 붙이는 약이 없는 것에 붙이는 약이다. 민스크 합의를 수행할 수 없었다는 것은 최종 수단에 이르는 것으로 보였다.

 1) 전쟁이란 국제분쟁의 최종수단이다
 .

 평화라는 제도를 전쟁 이상으로 고도의 조직적 노력의 체계로 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기억한 것은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의 다음 말이다.

 "평화를 만드는 것은 간단하다. 그러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은 훨씬 어렵다" 칸트의 구상한 "

 평화 연합"은 형식적이며, 전제로서 법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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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고양이
5.0 out of 5 stars 일본인의 평화 노망주의의 공기를 논파하고 있습니다.
Reviewed in Japan on February 2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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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무로 나오키 「국민을 위한 전쟁과 평화」를 읽었습니다.

'뾰족하게 징수하고 질을 불다'
이것이 대동아전쟁에서 패전해 310만명의 희생자와 공습·원폭으로 국토를 파괴된 일본인의 '전쟁기피' 체질이 되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처럼 느낌.

엄청난 인명, 재산을 잃는 전쟁은 누구나 귀에 정해져 있습니다.
그래도 전쟁은 끊이지 않습니다.

대동아전쟁이 끝난 1945년 이후에도 많은 전쟁이 일어나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전쟁, 그리스 전쟁, 인도 파키스탄 전쟁, 중동 전쟁, 티베트 전쟁, 한국 전쟁, 알제리 전쟁, 헝가리 전쟁, 라오스 전쟁, 콩고 전쟁, 베오남 전쟁, 쿠바 전쟁, 말레이시아 전쟁, 체코 전쟁, 비아후라 전쟁, 중소 전쟁 , 북아일랜드 전쟁, 요르단 전쟁, 필리핀 전쟁, 캄보디아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란 이라크 전쟁, 포클랜드 전쟁, 수단 전쟁, 스리랑카 전쟁, 베트남 중국 전쟁, 파나마 전쟁.

21세에서는 파키스탄 전쟁, 라이베리아 전쟁, 이라크 전투, 태국 전쟁, 다르푸르 전쟁, 동티모르 전쟁, 스리랑카 전쟁, 리비아 전쟁, 우크라이나 전쟁, 시리아 전쟁 등입니다.

반드시 '전쟁'이라는 명칭이 아니라 '내전', '내란', '분쟁', '침공' 등이라 불리지만, 내용은 무기를 가지고 적아군으로 나누어진 대규모 군사적 교전입니다.

전쟁은 언제 어디서나 일어나는 것이라고 우선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라는 것입니다.

코무로씨는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 이가제의 전쟁관을 바탕으로 이 책을 전개합니다.
"전쟁이란 국제 분쟁 해결의 최종 수단이다"가 오르테가의 주장입니다.

지역, 역사, 민족, 종교, 문화, 경제 등이 다른 국가가 각각 자국의 발전과 번영, 존속을 바라며 생존권으로서의 국가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해, 역사, 경제 등에서 마찰, 갈등, 분쟁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거래, 협상, 계약 등에서 우선 트러블을 제거하려고 노력합니다.
제대로 가지 않으면 최종 해결책으로 전쟁이 됩니다.

지금도, 전쟁의 씨앗은 다하지 않고, 일촉 즉발의 다툼도 많습니다.
필요한 것은 평소부터 군사적 위협에 대한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은 다양한 군사적 위협에 대비하여 시뮬레이션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중에는, 독일이나 일본은 물론입니다만, 영국과 전쟁이 되면, 어떻게 싸울 것인가라고 하는 시뮬레이션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1500만명의 희생자를 낸 유럽은 파리 강화조약으로 지금의 일본헌법 9조와 같은 부전조항을 넣은 평화조약을 체결했습니다.
그 후 12년 후에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습니다.

원인은 히틀러의 제3제국 구상에 근거한 주변 타국에의 군사적 침략에 의해 전화가 확대된 것입니다.
히틀러의 침략을 허용한 것은 프랑스, ​​영국 등이 군사력으로 독일의 침략을 저지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 영국, 프랑스 등이 군사 행동에 나설 수 없었을까.
평화주의의 공기가 여론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독일에 대항하여 군대를 동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그 의원은 선거에서 낙선하는 '공기'가 만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손가락을 둘러싸고 히틀러의 침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초기 대응을 잘못했기 때문에 파괴, 살육의 희생이 확대되었습니다.
평화주의 분위기가 히틀러의 야망을 도왔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쟁은 이미 고멘이라면 '뾰족하게 징수하고 질을 불어' 태도로 전쟁 준비를 게을리한 츠케가 돌아왔습니다.

지금의 일본도, 같은 평화 노망의 공기가 감돌고 있으므로, 싫은 느낌입니다.
이미 센카쿠 열도, 다케시마, 북방 영토는 외국에 의해 군사적으로 침략되고 있습니다.
북한의 군사 미사일은 일본 열도 상공을 두 번 횡단 통과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입끝인 항의밖에 할 수 없습니다.
나메 되고 있습니다.
중국은 오키나와가 옛날 중국의 영토라고 공식적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동기부여의 패권주의입니다.

코무로 씨는 유엔에 대해 일본인의 환상을 면도하고 있습니다.
유엔은 제 2 차 세계 대전 중에 나중에 전승국 인 연합국이 만든 "승리 조합"이 아닙니다.

유엔에는 전쟁 억제력이 없습니다.
유엔은 먼저 전쟁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자위를 위한 전쟁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많은 전쟁이 각각에 「자위전쟁」 「정의의 전쟁」이라고 주장해 지금도 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은, 각각에 금의 깃발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없어질 리가 없습니다.

이 책은 29년 전 복각 책입니다.

이것이 쓰여진 당시에는 소련의 군사적 위협이 자세하게 쓰여졌습니다.
현재 소련이 중국·조선으로 바뀐 것만으로 내용·주장은 어쩐지 낡지 않고, 어긋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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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을 말리다
5.0 out of 5 stars 우리나라에서의 평화주의와 유엔신앙에 느끼는 위화감의 이유를 설명해준다
Reviewed in Japan on February 3, 2018
Verified Purchase
본서는, 1981년에 출판된 「신전쟁론~”평화주의자”가 전쟁을 일으킨다”를 개제, 재간행한 책이다.
따라서 표현이나 정세가 지금과는 다른 점도 엿볼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지난 30여년에 걸쳐 일본인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재인식시켜주는 저작이다.

저자는 말한다.
'평화주의'의 기본적 결함 중 하나는 박멸해야 할 적인 '전쟁'을 과소평가한 곳에 있다고.
전쟁은 개인의 양심의 문제로 정리될 정도로 단순한 소박한 일이 아니다.

전쟁은 국제 분쟁 해결을 목적으로 한 거대한 노력의 체계이다.

전쟁에 호소할지 여부의 중대한 의사결정을 하고,
인적물적자원을 전쟁 수행을 위해 조직적으로 동원하고,
시시각각 추이하는 객관적 정세를 정확하게 판단하여 최적의 전략을 찾아내면서 ,
국가 계획을 가동하기 위한 것이다.

무목적 무원칙에 그런 노력이 이루어질수록 인류사회는 부조리가 아니다.
전쟁은 무료 행위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요구해서 고생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 말아야 할 고생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전쟁을 그만두는' 해결법은
'그것과 같거나 그 이상의 노력의 체계'로 대체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문명의 철칙이다.

불행히도
전쟁보다 합리적이고 전쟁보다 실효적인 국제 분쟁 해결 수단은
아직 그 모아도 없기 때문에
구체적인 이미지를 그릴 수 없다.
그러나, 단 하나 말할 수 있는 것은, 전쟁이라고 하는 노력의
체계보다, 보다 복잡하고 미묘하고
, 보다 조직도가 높은 것으로, 좀더 능률과 규율이 높은 것에 틀림없다, 라고 하는 것. 그것은 결국 전쟁을 웃도는 거대한 노력의 체계라는 것이 된다. 센카쿠 열도의 영유권 문제는 일중간에 선반으로 올렸다. 다케시마 영유 문제도 한일 양국간 사실상 동결해 버렸다. 만사 이 식으로 처리하면 세계평화는 어딘가에 올까. 이것은 국제 분쟁 해결을 위해 현대의 ​​국제 사회에서 모범 사례가 될 것인가? 물론, 그런 일은 없다. 왜? 이 두 분쟁 모두 관계 당사국들 사이에서 사활의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이다. 구체적인 이해관계가 현재 희박한 것이다. 경제적 자원의 관점에서 보면 각별한 의미가 없다. 교통의 요로에 위치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없다. 결국 영유권이라는 법적인 분쟁 이상이 아니다. 소련이 북방 영토를 반환할 기회는 이론적으로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일본이 실력행사하여 소련의 의지를 강제하는 것, 즉 전쟁이다. 또 하나는 객관적 정세의 변화에 ​​의해 소련의 사정이 어느 날에 바뀌어 조건의 여유에 따라서는 반환해도 된다는 기분이 되는 것이다. 그 이외의 기회는 절대로 없다고 말해도 좋다. … 등. 위세 그 외의 사항, 또 유엔의 실정 등에 대해서는, 직접 본서에 있어서 납득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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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shii
5.0 out of 5 stars 다시 읽어도 그 통찰력의 대단함
Reviewed in Japan on July 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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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어도 의식을 새롭게 해준다.
이 시점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이 지금도 통용한다.
이대로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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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out of 5 stars 놀라운
Reviewed in Japan on November 1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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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코무로 선생님은 정론을 즈바즈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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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타 키츠네
5.0 out of 5 stars 전쟁을 연구해야 한다
Reviewed in Japan on March 1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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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코무로 박사. 사물의 근본을 알려주세요.
저뿐만 아니라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근본적인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까 생각합니다.
전쟁은 국제 분쟁을 해결하기위한 제도이며 개인의 심정과는 별도의 국가 정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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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out of 5 stars 전쟁은 문명의 산물 평화는 염불이 아니라 분석이 필요
Reviewed in Japan on December 21, 2018
코무로 나오키의 '국민을 위한 전쟁과 평화'를 읽었다. 쇼와 56년 발행(1981년) 발행의 책으로, 지금부터 37년전의 책이지만, 일본을 둘러싼 제정세나 국제 정세의 분석에 낡음은 전혀 느끼지 않는다. 이하, 나 자신의 비망록적으로 기입해 본다.
・평화를 사랑한 결과가 제2차 세계대전이 되었다… 수단을 망설였다.
・평화주의자는 염불주의자인가… 평화주의자는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면 평화로운 상태가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태풍은 자연의 산물이며, 평화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 그래서 인간은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염불을 주창하고 있어도 평화는 붕괴된다.
・전쟁과 싸움은 다르다… 싸움은 동물에서도 실시한다. 전쟁을 하는 것은 인간만. 전쟁의 목적은 상대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망설임, 분쟁을 자신의 유리하게 해결하는 수단이다. 그래서 이 분쟁의 원인이 해결하기 위해 전쟁 이외의 것을 찾아야 한다. 다만, 아직 전쟁을 넘는 해결 방법이 발견되지 않았다. 전쟁의 불씨를 선반 올려, 가만히 참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c0070439_22585829.jpg
· 유엔은 150개의 주권국가의 모임에 불과하다… 지금의 세계에서 법체계나 사회규범을 정리하고 있는 것은 주권국가이며, 유엔은 주권국가를 벌하는 등의 권한은 없고, 상부 조직이 되어 있지 않다.
・유엔의 상임이사국(안전보장이사회)의 거부권을 없애면 유엔은 좋은 조직이 될 것인가? 아니 다르다… 거부권을 다루어 다수결로 유엔 결의를 할 수 있는지, 실태를 수반하는 것인가? 다수결로 결정될 정도로 국가간의 싸움은 단순하지 않다. 거부권이 없어도 주권국가(150개국) 전원의 찬성이 없으면 결과적으로 집행되지 않는다. 즉, 5개국의 거부권을 거론하면 가맹국 150개국에 거부권을 주는 것. 국가의 이해를 대표하고 있는 지금의 유엔에서는 무리.
・일본인은 유엔을 자연계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조건에 따라 경향이 있다…
・이 세상에는 정의가 150 있다. 주권국가마다 이권, 국토, 문화가 벌어지기 때문에 정의의 이름으로 싸움이 생긴다. 정의를 위의 규범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그것을 찾아내는 노력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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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ald Trump’s Biggest Business Failures And Scandals | Matthew Distefano

Donald Trump’s Biggest Business Failures And Scandals | Matthew Distefano

Donald Trump’s Biggest Business Failures and Scandals
Last updated on: November 1, 2024 at 8:44 am
November 4, 2024 by Matthew Distefano


When it comes to Donald J. Trump, there’s no shortage of opinions on what kind of businessman he is. Some see him as a larger-than-life dealmaker who can do no wrong, while others know the actual, less shiny truth. So, let’s take a clear-eyed look at some of Trump’s most glaring business failures—without the glitz, just the facts. And I promise, I’ll try to keep the sarcasm at bay.
1. Bankruptcies Galore

When people talk about Trump’s “business acumen,” it’s hard not to think about the time (or five) he declared bankruptcy. Let’s break it down:Trump Taj Mahal (1991): His “Eighth Wonder of the World” went under just a year after its grand opening, crushed by debt and poor financial decisions.
Trump Castle and Trump Plaza (1992): In the same year, these Atlantic City casinos couldn’t handle their debt either and crumbled into bankruptcy.
Trump Hotels and Casino Resorts (2004): You’d think the lesson would stick after three times, but nope—Trump’s casino empire filed for Chapter 11 again.
Trump Entertainment Resorts (2009): The cherry on top of a consistent losing streak. Bankruptcy one last time, proving that when it comes to financial distress, Trump’s got that on lock.
2. Not Paying the People Who Did the Work

A staple in the Trump business playbook seems to be: contract work, use it, then find every loophole not to pay for it. Hundreds of contractors—everyone from painters to small-business owners—claimed Trump stiffed them on payments. He’s even been sued for it. Talk about supporting the working class, right?
3. Racial Discrimination in Real Estate

Trump’s not-so-golden years began with a lawsuit in 1973 when the Department of Justice sued his company for racial discrimination in renting practices. The evidence? Applications from Black prospective tenants were marked with a “C” for “colored.” The company settled without admitting guilt but agreed to change practices. Not exactly the hero of equal opportunity housing.

4. The Graveyard of Trump Business VenturesTrump University: A masterclass in scams, not real estate. Multiple lawsuits, a $25 million settlement, and a lot of people who felt duped by promises that were as empty as an abandoned ballroom.
Trump Steaks: Because who doesn’t want overpriced meat from a real estate mogul? Spoiler: Almost everyone. The product tanked.
Trump Vodka: Marketed as “Success Distilled.” The irony? The company stopped distilling it after just a few years due to poor sales. So, cheers to that failure.
Trump Airlines: A vanity project that bled money until creditors took over. The “luxury” was short-lived.
GoTrump.com: An attempt to corner the travel website market that promptly fell flat. Competing with Expedia and Orbitz is hard when you’re only offering a name and not much else.
5. Subpar Products

Whether it was Trump Ice (a bottled water that failed to make waves) or Trump: The Game (which, ironically, didn’t sell well), the track record for successful products bearing the Trump brand is bleak. Let’s just say the “quality” often wasn’t worth the premium price.
6. Charitable Shenanigans

The Trump Foundation was found to be a personal piggy bank disguised as charity. The New York Attorney General cited Trump for using the foundation’s funds for self-serving purposes, including settling lawsuits and making campaign donations. The foundation was dissolved, and Trump was ordered to pay $2 million. Philanthropy, indeed.
7. Debt, Debt, and More Debt

Trump’s entire business empire has often been propped up by immense debt. The kind that gets you high credit leverage but brings a business to its knees when the bills come due. Repeated bankruptcies and defaults didn’t do much to strengthen his credit score, either.

8. Fleeting International Ventures

Trump’s brand licensing agreements abroad also had their share of problems. From failed projects in places like India to politically controversial towers in Turkey, Trump’s global business dealings have been marred with issues that range from questionable partnerships to corruption scandals.
9. Tax Records That Say It All

Years of investigative reporting have shown that Trump paid very little in federal income taxes. His tax records revealed huge business losses that undercut his carefully curated image as a financial genius. He once famously said, “That makes me smart.” Sure, it also makes it clear how messy his finances really are.
10. Aggressive (and Questionable) Business Practices

Trump wasn’t above employing aggressive tactics, including lawsuits, to get his way. He’d sue critics, contractors, and even governments if it helped him save face or avoid accountability. Not to mention, marketing hyperbole and misleading statements were staples of his business model, leaving many consumers disappointed.

So, tell me again how Donald J. Trump is good for business when he can’t even successfully or ethically run his own?

As UN warns entire Population of Gaza is at Risk of Death, Bill Clinton says he's not keeping Score

As UN warns entire Population of Gaza is at Risk of Death, Bill Clinton says he's not keeping Score

DEMOCRATIC PARTY

As UN warns entire Population of Gaza is at Risk of Death, Bill Clinton says he’s not keeping Score

JUAN COLE11/02/2024

Ann Arbor (Informed Comment) – Bill Clinton is a Rhodes scholar and a voracious reader. He is not a stupid man. He is, however, morally stupid. I’m not referring to his personal life but to his remarks on Israel’s behavior in its total war on little Gaza.

Clinton came to Michigan and said,“I understand why young Palestinian and Arab Americans in Michigan think too many people have died, I get that.”

“But if you lived in one of those kibbutzim in Israel, right next to Gaza, where the people there were the most pro-friendship with Palestine, most pro-two state solution of any of the Israeli communities … and Hamas butchered them.”

He said, he’d been asked, “Yeah but look how many people you’ve killed in retaliation, so how many people is enough to kill to punish them for the terrible things they did?”

“Well, you’ll have to forgive me, I’m not keeping score that way. It isn’t how many we’ve had to kill. Because Hamas makes sure that they’re shielded by civilians, they’ll force you to kill civilians if you want to defend yourself.”

Clinton’s callous and morally stupid words explain how a majority of Americans can close their eyes to a year of Israeli genocide. He, and they, should read my new book, Gaza yet Stands. Clinton makes it sound as though the Palestinians have no legitimate grievances, even though 70 percent of families in Gaza had been driven out of their homes by the Israelis and made penniless refugees, while Israelis stole all their land and property.

The argument Clinton made is that the killing of hundreds of civilians by al-Qassam Brigades cadres on October 7, 2023, justifies the high rate of civilian deaths in Israel’s war on the people of Gaza. Indeed, October 7 is fetishized so that it authorizes anything and everything.

That assertion is not true. For a non-state actor like the paramilitary of Hamas to kill civilians for political purposes is terrorism. It is an ugly crime that certainly merits punishment. Moreover, Clinton’s assumption that Israeli actions in Gaza are mainly directed at Hamas militants is not in evi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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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ted Nations officials have their hair on fire, shouting at the top of their lungs that the entire population of Gaza is at risk of death. That is over 2 million people on the verge of extinction, as though everyone in Houston, Texas, were to be killed. Mass death on that scale is not and cannot be a war aim. Public health specialists are saying that when it is all over as many as 300,000 people in Gaza will have been killed by the Israelis. Now the UN officials are saying it could be seven times that.

There is nothing in International Humanitarian Law that authorizes a disproportionate military response just because the enemy killed civilians. Ironically, it was Judaism that most famously enshrined the principle of proportionality, in Exodus 21:23–25. Although “an eye for an eye” sounds brutal today, the prescription was intended to forestall victims from taking two eyes for one eye. The God of Exodus would frown on taking 150,000 eyes for 550.

The denial of the applicability of the principle of proportionality on the emotional grounds that civilians were killed who were nice people is, to put it bluntly, the first step toward justifying genocide.

The Rome Statute makes it clear, drawing on the Geneva Conventions enacted after World War II, that you can’t kill large number of civilians with no legitimate military purpose, and you can’t destroy civilian infrastructure (“objects”) not connected to a military objective. The response has to be proportional to the initial attack.

Clinton’s glib repetition of the canard that Israel is only trying to kill Hamas militants and can’t get at them except by killing tens of thousands of civilians fails on many grounds. Clinton assumes that all Israeli military actions in Gaza have been legitimate and directed at fighting Hamas. But UN investigations have brought into question whether some of the large numbers of 2,000 pound bombs Israel dropped on Gaza, obliterating entire apartment buildings and neighborhoods, had any discernible military targets.


“Eyeless in Gaza,” Digital, Dream / Dreamland v3 / Clip2Comic, 2024

The physicians who served in Gaza as volunteers maintain that Israeli soldiers deliberately shot children. American surgeon Mark Perlmutter saw children shot twice. “No child,” he observes, “gets shot twice by mistake.”

Even the announced Israeli goal of killing all 37,000 militants in Gaza is not a normal military objective. Typically you try to defeat the enemy and take the rest captive or drive them to demobilize, not kill them all. The October 7 operation involved 4,000 cadres, not 37,000. It was a tightly held secret except among those who actually launched it. The other 33,000 people Israel is trying to kill may not even have known about it in advance, much less participated in it.

Lt. Gen. Herzi Halevy announced in October that Hamas has been defeated.

Ordinarily, such a pronouncement by the army chief of staff would indicate that the war is over, not that hundreds of civilians should continue to be killed every week.

Some 18 million men served in the German army of the Nazi government. Between 4 and 5 million were killed by the Allies. The victors didn’t make it a goal to kill all 18 million. Prominent West Germans such as Nobel-prize-winning author Günter Grass had been enlisted men in the Nazi army. In 1957, 77 percent of the senior officials in the West German Ministry of Justice were former members of the National Socialist Party. The Nazi military personnel were much, much worse than Hamas, and even they were not dealt with as Israel says it wants to deal with the Hamas paramilitary.

The “human shield” argument also holds no water. The high civilian death toll doesn’t come from killing shields. Israeli rules of engagement allow 15 to 20 civilian deaths per militant killed. Israel uses a computer program to track suspected militants, droning them to death only when they go home at night, making sure to kill their family members, friends and neighbors. The militants could have been killed out in the open. Their families were not shielding them. The families were deliberately targeted along with the militants.

Those are not the rules of engagement of a civilized country. NATO has cut off military cooperation with Israel during this past year because NATO rules of engagement, like those of the US military, require the minimization of civilian casualties, an endeavor in which the current Israeli authorities have no interest.

The point is not that anyone is, in Clinton’s horrid phrase, “keeping score.” It is that a disproportionate military response that kills 38 of the enemy for every one of your deaths is unethical and illegal. Generals were tried at Nuremberg and executed for that sort of thing.

We don’t have to guess whether Israeli officials and officers are ordering a disproportionate response in places like Lebanon. They have a whole military doctrine mandating it.

Ultimately, Clinton’s remarks are a form of unfaced racism on his part. Israeli kibbutzim are white people, whose deaths are to be mourned. The 42,000 dead Palestinians are brown people, mere statistics, whose deaths, while unfortunate, are necessary so that white people can feel safe — which is what really matters. It is the same logic Clinton used, as president in 1996, when he spoke of African-American “superpredators.

And no, no one “has to forgive” him, and they won’t. I’m not a political scientist or an Americanist, and I have no idea whatsoever what will happen in Michigan –with its large Arab and Muslim American population — next Tuesday on election day. But Clinton seems to me to be trying to lose it for the Democrats. Worse than their electoral impact, those words from a former president point to a deep malaise in the American soul, an inability to feel viscerally the deaths of 17,000 brown children, a classification of them not as people with mothers, fathers, siblings and futures, but as an inconvenience to be swept under the rug.

Filed Under: Democratic Party, Featured, Israel/ Palestine

About the Author



Juan Cole is the founder and chief editor of Informed Comment. He is Richard P. Mitchell Professor of History at the University of Michigan He is author of, among many other books, Muhammad: Prophet of Peace amid the Clash of Empires and The Rubaiyat of Omar Khayyam. Follow him on Twitter at @jricole or the Informed Comment Facebook Page

“The Nation” Endorses Kamala Harris | The Nation

“The Nation” Endorses Kamala Harris | The Nation


Editorial / September 23, 2024
The Nation Endorses Kamala Harris


In her own right, and because we oppose Donald Trump’s reactionary agenda.
The Nation


Democratic presidential candidate Vice President Kamala Harris.(Saul Loeb / Getty)This article appears in the October 2024 issue, with the headline “For Kamala Harris.”

The great strength of Kamala Harris’s unlikely but existentially important campaign for the presidency is her powerful grasp of what is at stake in this election. “In many ways, Donald Trump is an unserious man,” Harris declared in her acceptance speech at the Democratic National Convention. But as she reminded the delegates, “the consequences of putting Donald Trump back in the White House are extremely seri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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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rning of the danger to democracy posed by a reelected “Donald Trump with no guardrails”—especially after the Supreme Court’s recent 6–3 decision granting him “presumptive immunity” from criminal prosecution for his official acts—Harris urged Americans to “consider what he intends to do if we give him power again. Consider his explicit intent to set free violent extremists who assaulted those law enforcement officers at the Capitol. His explicit intent to jail journalists, political opponents, and anyone he sees as the enemy. His explicit intent to deploy our active-duty military against our own citizens.”

We believe those threats are real. Of course we endorse Harris over Trump. But we also endorse Harris in her own right, as an experienced and capable leader with a vision for America’s future that—while not as progressive as we might prefer, particularly when it comes to foreign policy—represents a clear advance on the Democratic presidential nominees of the past half-century. In her selection of a progressive governor, Minnesota’s Tim Walz, Harris also demonstrates an awareness of the need not merely to build on the many successes of the Biden-Harris administration but to go farther in the pursuit of economic, social, and racial justice—and the preservation of our planet.

Harris has long been an eloquent and tireless fighter for reproductive freedom. She spent the months following the Supreme Court’s decision in Dobbs v. Jackson Women’s Health Organization highlighting the connections between that assault and the other Republican efforts to roll back our rights. Now, in Walz, she has a spirited partner to assist her in combating Trump’s increasingly deranged anti-abortion rhetoric and the more quietly reactionary—but equally devastating—proposals outlined in Project 2025.


Harris proposes to make the child tax credit permanent, pass the PRO Act (making it easier for labor unions to organize), build 3 million units of affordable housing, expand Social Security, and tackle price-gouging and healthcare costs—all significant extensions of the Biden administration’s notably progressive economic achievements. And although some of her wealthy backers haven’t been shy in pressing her to fire Federal Trade Commission chair Lina Khan, Harris has, so far at least, stood firm behind Khan and the anti-monopoly agenda she has pursued at the FTC. Harris may have backed away from her 2019 embrace of Medicare for All and a ban on fracking, but Bernie Sanders, describing such shifts as “pragmatic,” still has no difficulty in recognizing Harris as worthy of our votes and our support. Neither do we.

On foreign policy, however, the positive case is harder to make. Harris’s campaign refused to allow even one Palestinian elected official to address the Democratic convention. And she has failed so far to offer anything more substantive to the millions of Americans—including the 650,000-plus Democrats who, in order to take a stand on this issue, voted “Uncommitted” during the primaries—desperate for an end to America’s unconditional support for Israel’s brutal war on Gaza. Her change in tone, and her statements taking note of the horrendous death toll among Palestinian civilians, while welcome, might also be little more than the standard “pro-Israeli, pro-Palestinian, but subtly more pro-Israeli…say-nothing bullshit” lampooned so effectively on Veep. (Though at least Secretary of State Antony Blinken will be gone.)

Current Issue
November 2024 Issue

On the war in Ukraine, Harris’s position is hawkish. On relations with Russia and China, she has done nothing to indicate any departure from the Biden administration’s belligerent rhetoric—or any recognition of the toll the Pentagon’s bloated budgets would take on her domestic agenda. Indeed, in her acceptance speech, she promised to “ensure America always has the strongest, most lethal fighting force in the world”—a recipe for blank checks from now till doomsday. Still, anyone promoting Trump as a peace candidate needs to check their eyesight. Or their privilege.

Donald Trump has been a cancer on our public life since his days posing as a successful casino operator. His pervasive influence not just on our politics but on our manners, conversations, imaginations, and media developed a momentum that, until Biden withdrew, seemed likely to carry this habitual liar and adjudicated rapist back to the pinnacle of power. Preventing such a calamity ought to be reason enough to turn out to vote—particularly since, unlike in 2016, there is little doubt about how Trump would use such power.


Leftists contemplating voting for a third party in protest of Harris’s shortcomings—or out of discontent with our two-party system—need to ask themselves why their particular cause, or their personal discomfort, is more important than making sure that Trump, JD Vance, and their claque of congressional collaborators are defeated decisively, not only in the Electoral College but in the popular vote as well. Especially since we can already see Trump preparing another attack on the legitimacy of our elections.

Harris deserves credit for moving nearly $25 million from her campaign to downballot races. The vice president knows she can’t afford to win narrowly in the battleground states; for her and Walz to govern effectively, to break the fever of Trumpism, they also need to lift Democrats in the races that will decide control of the House and Senate. Because a Democratic administration that lacks the means, or the will, to break the current congressional gridlock—or the death grip of a reactionary Supreme Court—risks provoking even greater cynicism and desp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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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magazine was founded by abolitionists who believed that the victories won on the battlefields of the Civil War, and paid for in blood at Antietam and Gettysburg and Appomattox, needed to be secured in Washington and in the states. Both visionary radicals and deeply practical politicians, they knew what each generation of Americans is apparently fated to learn for itself: that the ruling class of the Confederacy, and the racist ideology whose comforts—North and South—it rationalized, would not simply acknowledge defeat and allow the country to move toward justice and equality. It also had to be disarmed and beaten politically.

The insurrectionists who attacked the Capitol on January 6, 2021, may have been unsuccessful. Their aims, however, were part of a long campaign to drag this country back not to some mythical golden age but to the actual past when Black Americans had “no rights which the white man was bound to respect” (in the words of the Dred Scott decision), women had no control over their own bodies, corporations were free to pollute our air and water, and employers were allowed to terrorize and discard their workers.


Job one for Harris, then, is to defeat Trump—and Trumpism—decisively this November. Yet the current moment, and Harris’s campaign, offers more than merely a chance to wake from our long national nightmare.

Ralph Featherstone, an activist with the Student Nonviolent Coordinating Committee (until he was assassinated by a car bomb in 1970) used to say that a revolutionary is “someone who knows what time it is in history, and acts accordingly.” Kamala Harris, who was not yet born when Featherstone went down to Neshoba County, Mississippi, in the summer of 1964 and was still a little girl in pigtails when he was murdered, is no revolutionary. Rather, as the Irish writer Fintan O’Toole has noted, she is the child of revolutionaries who has chosen a different path.


But unlike the self-proclaimed radicals who argue that there is no real difference between the two parties, or the two candidates, Harris has long shown an enviable—if not always admirable—awareness of what time it is in history. Her rise from the tougher-on-crime district attorney of San Francisco, to the state attorney general who took on corporate criminals and Medicare fraudsters and created the California Homeowner Bill of Rights, to the US senator who quickly established a reputation as a feared and trenchant interrogator, to the vice president of the nation is ample evidence of that.

Americans are indeed desperate, as Harris puts it, to turn the page on the dead-end politics of the past. Not only on Trump and his corrosive campaign, and on the bankrupt neoliberalism that sent jobs and manufacturing abroad, but on the winner-take-all economy in which billionaires make the rules and the rest of us fight over the crumbs.

2024-11-04

고영양 고효율, 1초마저 아끼는 20대 자취생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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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혼자 사는 MZ의 아침밥 이야기 | 1화

고영양 고효율, 1초마저 아끼는 20대 자취생들[MZ세대 자취생 아침밥 일기] 극단 간편형 (上)
24.11.04 1

요즘 20대 자취생들이 먹는 아침은 기성세대의 ‘아침밥’과는 다르다. 바쁜 사회초년생들에게 아침 식사는 건강 챙기기의 일환일 수도 있고, 소소한 즐거움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해장과 재정비의 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요리는 간단해야 하고, 준비 시간은 짧아야 한다. 이 연재는 현대 자취생들이 어떤 방식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그들만의 아침 시간 속에서 삶의 작은 즐거움을 어떻게 찾는지 보여준다. ‘극단 간편형’, ‘요리 매니아형’, ‘개성 취향형’이라는 세 가지 카테고리를 통해 자취생 MZ세대의 현실적인 아침 풍경을 담아내며, 그들만의 독립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엿본다.[기자말]
자취하는 MZ세대의 아침밥 풍경은 기성세대와 사뭇 다르다. 예전처럼 아침상에 꼭 국과 밥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해장을 위해 콩나물국을 끓이는 정성도 필요하지 않다.

누군가는 간편한 토마토 주스, 혹은 군고구마 몇 개, 전자레인지만 사용하기도 한다. 이어질 연재에서는 노련한 간편식부터 SNS에 자랑해도 좋을 정성 어린 식사, 과일이나 국밥 등 취향이 확실한 상차림까지 MZ세대의 다양한 아침밥 식탁을 살펴보려고 한다.

비슷해 보이지만 실상은 다른 식탁 속에서, 각자 그리고자 하는 미래가 엿보인다.

조리도 설거지도 필요 없는 간단 한식



▲조미김, 계란후라이, 임연수구이, 제로콜라 ⓒ 정누리관련사진보기
첫번째 식탁은 '간단 조리 한식'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불에 조리한 것이 없다. 전자렌지에 1분 돌리면 되는 순살 임연수 구이, 봉지만 뜯으면 되는 조미김이다. 계란조차 프라이팬에 부치지 않았다. 기름과 불을 쓰는 것은 귀찮기 때문이다.

대신 노른자를 터트려 밥에 섞어 전자렌지에 돌린다. 별도의 설거지가 필요 없다. 옆에 있는 제로콜라가 눈에 띤다. 설탕이 안 좋다는 인식이 있어 요즘은 너도나도 제로음료를 애용한다. 간단하다고 영양 구성까지 포기하지는 않는다. 불을 켜서 조리하지 않고도, 이렇게 얼마든지 탄단지(탄수화물, 단백질, 지방)를 고루 지킬 수 있다.

이 식탁의 주인공은 나다. 최근 러닝과 헬스에 관심이 커지면서 한 끼라도 허투루 먹을 수 없게 됐다. 살을 빼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근육을 키우는 것이었다. 근력을 키우려면 너무 적게 먹어서도, '탄단지' 중 어느 하나만 많이 먹어서도 안된다.

시간이 없는 우리는 자기 관리를 하기 위해서 수많은 아이디어를 냈다. 내열 용기에 알배추와 냉동고기를 얇게 저며서 전자레인지에 돌리거나, 오트밀과 우유를 전날 섞어 버무려 불려둔 오나오('오버나이트오트밀'의 준말), 봉지째로 돌려 먹는 닭가슴살 볶음밥 등등이 그것이다.

이들의 아침 식사를 보면 전날 밤 자기 전에 무슨 조리를 했는지 알 수 있다. 난 당신이 어젯밤에 무슨 일을 했는지 알고 있다.

언제든 바로 이동할 수 있게... 고구마와 요거트



▲고구마, 달지 않은 요거트 ⓒ 정누리관련사진보기
두번째 식탁은 고구마와 요거트다. 사진 속 주인공은 대학 병원에서 일한다. 그는 앉아서 아침밥을 먹다가도 호출이 오면 바로 일어나야 한다. 그릇을 씻을 시간도, 수저를 정리할 여유도 없다. 그는 고구마와 요거트라는 최고의 전략을 택했다.

고구마는 껍질 째 먹어도 되고, 요거트는 한입에 털어먹을 수 있어 쓰레기가 덜하다. 이 친구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자취를 오래 한 친구다. 그는 이미 살림 지혜가 주부 백단 못지 않다. 매주 일요일이 되면 밥솥에 밥을 한가득 지은 다음 소분해서 냉동실에 넣어두고, 고구마는 5kg를 한 번에 찐 다음 월요일부터 1~2개씩 집어 들고 출근한단다.

밥 한 끼도 정성스레 준비하는 친구가 있는 반면, 최고의 효율을 택하는 친구도 있다. 그에게서 고수의 향이 난다. 사진 속 모니터와 키보드가 이 식사의 의미를 말해준다. 이들에게는 아침도 '전략'이다.



▲토마토주스 ⓒ 정누리관련사진보기
세번째 식탁은 토마토 주스다. 전날 술을 많이 먹은 자취생의 해장 식단이다. 요즘 또래 직장인들 사이에서 회식 때문에 괴로워하는 분위기는 많이 사그라들은 듯하다. 오히려 자발적으로 술을 먹을 때가 많다. 커리어 고민, 경제적 불안, 매너리즘 등의 이유로 마음 맞는 동료들과 자발적으로 술을 먹곤 한다.

이 시대의 아버지들이 콩나물국으로 해장을 했다면, 우리들은 간편하게 배달앱으로 토마토 주스를 시켜먹는다. 믹서기에 직접 토마토를 갈 필요도, 찬장에 꿀을 구비할 필요도 없다. 배달앱으로 몇 천 원을 내면 알아서 토마토 주스가 집 앞에 온다.

콩나물국은 수저가 필요하지만 토마토주스는 식탁에 앉을 필요도 없다. 골골거리는 몸을 침대에 기대고 그저 빨대만 사용하면 그만이다. 전날 술자리에서 떠들었던 고민은 토마토 주스 몇 모금 마시면 날아가는 알코올처럼 금방 사라진다.

부모님을 비롯한 어르신들이 보면, 왜 이렇게 부실하게 먹냐며 끌끌 찰지도 모르는 식단들. 하지만 그 안에는 자취생 나름의 지혜가 담겨있다. 쉴 틈 없이 바쁜 20대 에게 식사는 '효율'이다.

다만 패스트푸드가 과거에는 불량식품 이미지가 강했다면, 이제는 속도와 건강 모두를 챙길 뿐.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란 MZ세대에게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언제 일어나서 아침을 차렸나 싶을 정도로 식사에 진심인 MZ세대들도 있다.다음 편에서는 '요리 매니아형' 자취생들의 식탁을 살펴보려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위성락 북한의 러시아 파병에 대해

위성락

북한의 러시아 파병에 대해
우리측의 일정한 대응이 필요한 것은 맞지만 수위와 강도에 대해선 원모심려하며 정해야 합니다. 우리 안보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 정부는 무슨 호재라도 만난 듯 관련 정보를 과시성으로 공개하고, 설익은 대증적 조치를 마구잡이식으로 내놓고 있습니다. 긴장 조성을 불사하려는 듯한데, 그 저의가 의심스럽습니다.

살상무기 지원검토, 듣도보도 못한 참관단이라는 이름의 정보·군사 인력 파견, 심문조와 심리전 요원 파견 등 온갖 아이디어가 언론을 도배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윤 대통령이 젤렌스키 대통령과 통화도 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전쟁터입니다. 우크라이나를 지원해야 하지만 전쟁에 직접 연루될 가능성에는 조심해야 합니다. 정부의 사려깊은 대응을 주문하면서, 몇 가지 유의사항을 제기하고자 합니다.
첫째, 정보 관련 사항은 기본적으로 은밀히 다루고, 이를 대외적으로 활용하는 데 있어 지금보다 신중해야 합니다.

둘째, 정부가 우크라이나에 보낸다고 하는 소위 참관단을 갖고 언론플레이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쟁 중인 나라에 보내면서 참관단이라는 용어로 쓰는 것은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유사한 정보활동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비밀리에 할 일입니다. 언론에 떠벌리는 것이 매우 부적절합니다.
셋째, 우크라이나 전쟁 현장에 우리 군인이 들어가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소위 참관단이 가더라도 군인은 포함되지 않아야 합니다.
넷째, 정상 차원에서 우크라이나와 직접 소통하는 것도, 살상무기 지원을 언급하는 것도 신중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escalation 이 되어 우리의 선택지가 좁아지고, 과도하게 휘말릴 수 있습니다.

*최근 진행한 오마이뉴스 인터뷰 링크를 댓글에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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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락

북한의 러시아 파병은 한반도의 역학구도는 물론 지역 및 글로벌 정세에 심대한 악영향을 주는 사태입니다. 규탄의 대상입니다.
한편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은 러북이 단순한 동맹을 넘어 혈맹이 된 것을 의미하고, 북한 유사시에 러시아가 개입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김정은으로선 강력한 체제 버팀목이 생겨난 셈입니다.
이러한 상황 진전에 대한 적절한 대응은 필요하지만, 그 수위와 강도는 심사숙고 해야 합니다. 특히 우크라이나 살상 무기지원 문제는 함부로 다룰 문제가 아닙니다. 한반도 주변의 역학구도가 우리에게 완전히 불리하게 고착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파장과 전후 맥락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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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라





Ron Sider - Wikipedia 로널드 사이더

Taechang Kim
로날드 제이 사리더 저, 고토 토시오해설, 미타치 에이지 역
《예수는 전쟁에 대해서 무엇을 가르쳤는가:폭력의 시대에 적을 사랑한다는 것》

(아오조라쇼보, 2021년5월25일제1쇄발행). 기독교는 전쟁을 긍정하고 있는가? 구약의 잔혹한 신과 예수의 사랑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비폭력으로 전쟁이나 범죄가 방지될 수 있는가? 기독교최대의 난문에 도전한다. 본서는 최신의 성서학에 기초를 두고 전쟁과 폭력에 관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수많은 글귀들을 자상하게 해독하고 있다. 전쟁과 폭력의 테마에 관한 사유와 연구에 필수불가결의 역서다. 

원저는
Ronald J. Sider  《If Jesus is Lord》 (Michigan,2029)


Ron Sider - Wikipedia

Ron Sider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Ron Sider
BornSeptember 17, 1939
DiedJuly 27, 2022 (aged 82)
Education
Occupation(s)Theologian, activist

Ronald James Sider (September 17, 1939 – July 27, 2022),[1][2] was a Canadian-born American theologian and social activist. He was the founder of Evangelicals for Social Action, a think-tank which seeks to develop biblical solutions to social and economic problems through incubating programs that operate at the intersection of faith and social justice.

Sider was also a founding board member of the National Religious Partnership for the Environment. He was the Distinguished Professor of Theology, Holistic Ministry and Public Policy at Palmer Theological Seminary in St. Davids, Pennsylvania.

Education and career

[edit]

In 1953, Sider graduated from secondary school at Niagara Christian College (Now Niagara Christian Collegiate) which is located in Fort Erie, Ontario. Sider attended the Waterloo Lutheran University, in WaterlooOntario, and received a BA in European history in 1962.[3] While at Waterloo, he came in contact with the apologetic work of InterVarsity Christian Fellowship, and set his sights on a career in academia. Upon graduating from Yale University with an M.A. (history, 1963), B.D. (divinity, 1967), and PhD (history, 1969),[3] he expected to teach early modern European history on secular university campuses, and continue his apologetic work for IVCF. In 1968, he accepted an invitation from Messiah College to teach at its newly opened Philadelphia Campus in the inner city of PhiladelphiaPennsylvania. The racismpoverty, and evangelical indifference he observed at close hand made a deep impression that led him to write the book, Rich Christians in an Age of Hunger.

What he saw as the injustice of the inner city motivated Sider to work toward developing a biblical response to social injustice. He brought together a network of similarly concerned evangelicals, which in 1973 became the Thanksgiving Workshop on Evangelical Social Concern. It was this conference that issued The Chicago Declaration of Evangelical Social Concern. Twenty years later, a similar gathering of evangelical leaders resulted in the Chicago Declaration II: A Call for Evangelical Renewal. In 2004 he was a signatory of the "Confessing Christ in a World of Violence" document.

He signed his name to a full-page ad in the 5 December 2008 New York Times that objected to violence and intimidation against religious institutions and believers in the wake of the passage of Proposition 8. The ad stated that "violence and intimidation are always wrong, whether the victims are believers, gay people, or anyone else." A dozen other religious and human rights activists from several different faiths also signed the ad, noting that they "differ on important moral and legal questions," including Proposition 8.[4]

Publications

[edit]

Sider published over 30 books and wrote over 100 articles in both religious and secular magazines on a variety of topics including the importance of caring for creation as part of biblical discipleship.

In 1977, Sider's Rich Christians in an Age of Hunger, was published. Hailed by Christianity Today as one of the one hundred most influential books in religion in the 20th century, it went on to sell over 400,000 copies in many languages. He later authored Good News Good Works (published by Baker Book House), a call to the church to embrace what Sider sees as the whole gospel, through a combination of evangelism, social engagement and spiritual formation. Its companion book tells stories about effective ministries that bring both evangelism and social transformation together.

Completely Pro-Life, published in the mid-1980s, calls on Christians to take a consistent stand opposing abortioncapital punishmentnuclear weaponshunger, and other conditions that Sider sees as anti-life. 

Cup of Water, Bread of Life was published in 1994.

Living Like Jesus (1999) has been called Sider's Mere Christianity

Just Generosity: A New Vision for Overcoming Poverty in America (1999, 2007) offers a holistic, comprehensive vision for dramatically reducing America's poverty.

 Churches That Make a Difference (2002) with Phil Olson and Heidi Rolland Unruh provides concrete help to local congregations seeking to combine evangelism and social ministry. 

Recent publications include: 

Fixing the Moral Deficit: A Balanced Way to Balance the Budget (2012); 

Just Politics: A Guide for Christian Engagement (2012); 

The Early Church on Killing: A Comprehensive Sourcebook on War, Abortion, and Capital Punishment (2012); 

The Spiritual Danger of Donald Trump: 30 Evangelical Christians on Justice, Truth, and Moral Integrity (2020).

Ecumenical relations

[edit]

In August 2009, he signed a public statement encouraging all Christians to read, wrestle with, and respond to Caritas in Veritate, the social encyclical by Pope Benedict XVI. Later that year, he also gave his approval to the Manhattan Declaration, calling on evangelicals, Catholics and Orthodox not to comply with rules and laws permitting abortion, same-sex marriage and other matters that go against their religious consciences.[5][6]

Criticism

[edit]

Sider's opponents typically criticize his ideas as consisting of bad theology and bad economics. The most thorough critiques come from the American Christian right, specifically from Christian ReconstructionistsDavid Chilton's book, Productive Christians in an Age of Guilt Manipulators (1986), with a foreword by Gary North, argues that Sider's book takes a position contrary to the biblical teachings on economics, poverty, and giving, and that the economic model it provides is untenable.[7] Sider significantly revised the book for the twentieth anniversary edition, and, in an interview with Christianity Today magazine said, "I admit, though, that I didn't know a great deal of economics when I wrote the first edition of Rich Christians. In the meantime, I've learned considerably more, and I've changed some things as a result of that. For example, in the new, twentieth-anniversary edition, I say more explicitly that when the choice is democratic capitalism or communism, I favor the democratic political order and market economies."[8]

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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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er was the child of a Canadian Brethren in Christ pastor. He attended Oxford Circle Mennonite Church, was the father of three and lived in Lansdale, Pennsylvania, with his wife Arbutus, a retired family counselor. They celebrated their 50th wedding anniversary in 2011, and they had six granddaughters. Sider's son Theodore (Ted) is a tenured professor of philosophy at Rutgers who has published over 50 scholarly articles and three books with Oxford University Press.

See al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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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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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널드 사이더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로널드 사이더(Ronald James Sider, 1939년 9월 17일~2022년 7월 27일)는 캐나다 태생의 미국의 복음주의 사회운동가이며 신학자가이다.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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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널드 사이더는 1939년 캐나다에서 개신교(그리스도의 형제단)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예일 대학교와 같은 대학교 신학부에서 역사(Ph. D.)와 신학을 공부했다. 1968년 인종차별과 빈곤으로 고통받는 흑인 기독교인들의 어려움을 알게 되면서 1973년부터 칼 헨리짐 윌리스사무엘 에스코바와 함께 주말집회에서 사회문제들을 주로 다루었다.팔머 신학교에서 신학자로 활동했으며, “사회 참여를 위한 복음주의 운동”(Evangelicals for Social Action, ESA)회장,미국 동부 침례교회 신학교(Ea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기독교 윤리학 교수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선언》(영어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Conscience),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영어Rich Christians in an Age of Hunger),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다!》(영어Genuine Christianity)(모두 한국기독학생회 출판부IVP에서 역간)가 있다.

어록

[편집]

로널드 사이더는 2005년 한국을 방문하여 머무는 동안 《복음과 상황》과의 인터뷰를 했다. 당시 《복음과 상황》 편집장이었던 양희송씨와 로널드 사이더간의 인터뷰 내용의 일부를 발췌하였다.

  • 양희송: 최근 번역된 당신의 책 <그리스도인의 양심선언>은 미국 복음주의의 현실을 개탄하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실제로 비관적으로 보는가?
  • 로널드 사이더: 나는 사실 낙관주의자이다. 그 책은 아마 나의 가장 비관주의적 전망을 담았을 것이다. 미국 복음주의에는 다양한 흐름이 있다. 물론 크게 봐서 이 전통은 16세기 종교개혁의 가르침과 18세기 부흥운동의 흐름,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신학적 자유주의와의 대립 등을 공유하고 있다. 나는 전 생애에 걸쳐 대중적인 복음주의의 여러 측면을 비판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복음주의 내부에서 제출한 비판이었다. 나는 매우 헌신된 복음주의자이다. 어떤 행위가 성서의 가르침에 충실한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측면에서 나오는 비판이다. 성서는 개인만의 구원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복음, 공동체를 함께 말하는 복음을 가르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 책에서는 복음주의자들의 이혼율이나 혼전관계 비율이 일반인들과 다르지 않다든지, 별반 차이가 없는 삶을 살고 있음을 지적했다. (종교 통계 전문가인)조지 바나(George Barna) 같은 이들의 통계자료 분석을 보면 실망스런 내용도 많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주 교회에 출석하는 이들의 경우는 상당히 차별성 있는 삶을 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1]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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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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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nytimes.com/2022/08/05/books/ronald-j-sider-dead.html


Ronald J. Sider, 82, Who Urged Evangelicals to Social Action, Dies

He often bucked the rightward trend among some Christians, and in a popular 1977 book he argued that faith meant more than just personal salvation.


Ronald J. Sider in 2019. He argued that Christ called the faithful to attend to social justice issues.Credit...Eastern University



By Neil Genzlinger
Published Aug. 5, 2022Updated Aug. 8, 2022


Ronald J. Sider, an evangelical Christian author and speaker who, in an era when evangelicals increasingly aligned themselves with the political right, argued that Christ called the faithful to attend to social justice issues like racism and poverty, died on July 27 at his home in Lansdale, Pa., near Philadelphia. He was 82.

His son Theodore said the cause was cardiac arrest.

In 1973 Dr. Sider was among a group of religious leaders who, at a conference in Chicago, issued what became known as the Chicago Declaration of Evangelical Social Concern, “confessing our failure to confront injustice, racism and discrimination against women, and pledging to do better,” as he would summarize the document later.

The declaration, of which Dr. Sider was a principal architect, was bold for the time: It stated emphatically that the evangelical emphasis on personal salvation was not enough.

“We acknowledge that God requires justice,” it said. “But we have not proclaimed or demonstrated his justice to an unjust American society. Although the Lord calls us to defend the social and economic rights of the poor and oppressed, we have mostly remained silent.”


Opinion | Tish Harrison Warren
A Model for an Evangelical Christianity Committed to Justice
Aug. 7, 2022



Dr. Sider pressed that case further in his book “Rich Christians in an Age of Hunger,” published in 1977. In it, he laid out what he saw as the biblical command to aid the poor, and he lit into evangelicals and other Christians who let themselves be seduced by advertising that hawked the benefits of affluence.

“People persist in the fruitless effort to quench their thirst for meaning and fulfillment with an ever-rising river of possessions,” he wrote. “The personal result is agonizing distress and undefined dissatisfaction. The social result is environmental pollution and neglected poor people.”


Originally published in 1977, Dr. Sider’s “Rich Christians in an Age of Hunger” has been reissued frequently and has sold hundreds of thousands of copies.Credit...

The book, which has been reissued frequently — with Dr. Sider updating it to account for AIDS, the fall of the Soviet Union and other world developments — has sold hundreds of thousands of copies. In 1978 its success encouraged Dr. Sider to start Evangelicals for Social Action (now Christians for Social Action), a group that has been a voice not only on poverty but also on nuclear disarmament, apartheid, the environment and other issues.

While many evangelicals were aligning with the politics of the right (the Rev. Jerry Falwell founded the Moral Majority the next year) and focusing on abortion and issues of sexual identity, Dr. Sider spoke and wrote from the left, remaining vocal and politically involved for half a century.

That included trying to counter the support among white evangelicals for Donald J. Trump. In 2020 he edited “The Spiritual Danger of Donald Trump: 30 Evangelical Christians on Justice, Truth, and Moral Integrity,” a book that, he told Sight magazine, “grew out of an obvious concern that white evangelicals were not thinking in an adequately biblical way in their reflections on Donald Trump, his character and his policies.”

Dr. Sider wasn’t without his conservative side, especially concerning same-sex marriage and abortion. And he cautioned against being overly focused on causes — one of his books was called “I Am Not a Social Activist: Making Jesus the Agenda” (2008). But he had hope that a faith of personal salvation and one of advocacy on social issues could coexist.

“I long for the day when every village, town and city has congregations of Christians so in love with Jesus Christ that they lead scores of people to accept him as personal Savior and Lord every year,” he wrote in “Good News and Good Works: A Theology for the Whole Gospel” (1999), “and so sensitive to the cry of the poor and oppressed that they work vigorously for justice, peace and freedom.”

Ronald James Sider was born on Sept. 17, 1939, in Stevensville, Ontario. His father, James, was a farmer and later a pastor, and his mother, Ida (Cline) Sider, was a homemaker.



He grew up attending the Brethren Church of Christ. His interest in social activism started there.

“It was thoroughly evangelical but had not experienced the wrenching early-20th-century divisions of the social gospel-fundamentalist battles that helped produce the huge gulf between evangelism and social action,” Dr. Sider wrote in “Good News and Good Works.” “In my early years in the faith I just assumed that devout Christians shared the gospel, as my missionary uncle had in Africa, and also cared for the poor, as my church’s relief agency was doing.”

He earned a bachelor’s degree at Waterloo Lutheran University in Ontario in 1962 and later in the decade earned a master’s degree and a Ph.D. in history at Yale University and a bachelor of divinity degree at Yale Divinity School. He was an ordained minister in both the Mennonite and Brethren of Christ denominations, but teaching was his main career.

In 1968 he took a position at the Philadelphia campus of Messiah College, where he made a point of attending a Black church in a distressed part of the city and organizing “weekend seminars for rural and suburban church leaders so they could listen to African American leaders share the anguish of racism and poverty,” as he wrote in “Good News and Good Works.”

In 1977 Dr. Sider joined the faculty of Ea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now Palmer Theological Seminary, in St. Davids, Pa., where he was an emeritus professor at his death. The seminary, in a memorial posting, said he had “held the longest faculty tenure in Palmer’s history.”

“His effective ministry bore fruit in the seminary classroom, the local and global church, and further afield in the public sphere, both in the United States and abroad,” the posting said.



In addition to his son Theodore, Dr. Sider is survived by his wife, Arbutus (Lichti) Sider, whom he married in 1961; another son, Michael Jay Sider-Rose; a daughter, Sonya Marie Smith; and seven grandchildren.

Dr. Sider’s book “I Am Not a Social Activist” includes a chapter titled “What Keeps You Going, Ron?”

“I hope that I have, by God’s grace, allowed Jesus’ resurrection to shape the way I live — it certainly has shaped the way I hope,” he wrote in that chapter. “I expect to see Jesus. I believe that he will make good on his promise to complete his victory over the devastation Satan has caused in God’s wonderful world.

“Broken marriages, corrupted cultures, unjust systems, drug-scarred bodies and polluted rivers are not the last word. Jesus is coming back.”


Neil Genzlinger is a writer for the Obituaries desk. Previously he was a television, film and theater critic. More about Neil Genzlinger
A version of this article appears in print on Aug. 9, 2022, Section A, Page 20 of the New York edition with the headline: Ronald J. Sider, 82; Urged Evangelicals to Social Action. Order Reprints | Today’s Paper | Subscri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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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christianitytoday.com/2022/07/ron-sider-died-evangelicals-for-social-action/

DIED: RON SIDER, EVANGELICAL WHO PUSHED FOR SOCIAL ACTION

DANIEL SILLIMAN


Author of “Rich Christians in an Age of Hunger” argued poverty was a moral issue.


Ron Sider
CHRISTIANITY TODAY  JULY 28, 2022

Edits by Mallory Rentsch
ENGLISH


Ronald J. Sider, organizer of the evangelical left and author of Rich Christians in an Age of Hunger, died on Wednesday at 82. His son told followers that Sider suffered from a sudden cardiac arrest.

For nearly 50 years, Sider called evangelicals to care about the poor and see poverty as a moral issue. He argued for an expanded understanding of sin to include social structures that perpetuate inequality and injustice, and urged Christians to see how their salvation should compel them to care for their neighbors.

“Salvation is a lot more than just a new right relationship with God through forgiveness of sins. It’s a new, transformed lifestyle that you can see visible in the body of believers,” he said. “Sin is a biblical category. Given a careful reading of the world and the Bible and our giving patterns, how can we come to any other conclusion than to say that we are flatly disobeying what the God of the Bible says about the way he wants his people to care for the poor?”

Sider was a key facilitator of the born-again left that emerged in the 1970s. But he lived to see American evangelicals largely turn away from concerns about war, racism, and inequality. He continued to speak out, however, and became, as a Christianity Today writer once described it, the “burr in the ethical saddle” of the white evangelical horse.

His landmark book, Rich Christians in an Age of Hunger, inspired generations of young Christians, selling 400,000 copies in nine languages. CT ranked it as one of the most influential evangelical titles of the 20th century, right after J. I. Packer’s Knowing God and Kenneth Taylor’s The Living Bible.

Rich Stearns, president emeritus of World Vision, called Sider “a great Christian soul and a passionate justice warrior.” Adam Russell Taylor, the president of Sojourners, said he was “was a longtime friend and ally” and “a tireless proponent of peace and justice.” Both referenced the impact of Sider’s book on their lives.


Sider was born in Fort Erie, Ontario, in September 1939. Raised on a 275-acre farm, his father was a farmer and a pastor in the Brethren in Christ Church, an Anabaptist and Wesleyan tradition that combined concern for holiness, a commitment to peace, and a literalist reading of the Sermon on the Mount.


Sider was the first in his family to pursue higher education, but he carried with him the conviction that Christian faith was not merely intellectual assent: True faith should shape your whole life.

He studied history under Christian apologist John Warwick Montgomery at Waterloo Lutheran University in Ontario and then went to Yale University to study the Reformation with historian Jaroslav Pelikan. Sider wrote his dissertation on Andreas Karlstadt, a contemporary of Martin Luther who renounced academic titles, wore peasants’ clothes, and preached simplicity in the church.

Sider was learning to embrace a similar radicalism in his own life. Instead of living with the other graduate students at Yale, he found a home for his young family on the edge of a Black neighborhood in New Haven, Connecticut. Then he moved to the center of the African American community, where he mourned with his neighbors when Martin Luther King Jr. was assassinated in 1968 and became involved with the local struggle for civil rights. When he wasn’t reading Latin and German for his dissertation, Sider helped Black activists register voters and recruited Yale’s InterVarsity students to join him.

After graduating, Sider took a position teaching at Messiah College’s Philadelphia campus and then at Eastern University’s Palmer Theological Seminary. He moved to the African American neighborhood in Germantown and focused his classes on racism, war, and poverty.

Sider also became more politically active. He campaigned for George McGovern, founding Evangelicals for McGovern to rally support for the anti-war senator from South Dakota who was maligned by his many opponents as the candidate for acid, amnesty, and abortion.

According to historian David Swartz, Evangelicals for McGovern was the first evangelical group after 1945 to support a presidential candidate. Religious Right groups such as the Moral Majority and Christian Coalition had not yet organized, and though many prominent leaders such as Billy Graham supported President Richard Nixon, evangelical politics at that moment seemed “up for grabs.” Sider, along with people like Tom Skinner, Jim Wallis, and Richard Mouw, wanted to grab it. They believed Christians who loved Jesus and hated sin should exert their political will to oppose the war in Vietnam, law-and-order politics, and economic policies that aggravated poverty.


After McGovern’s landslide loss, Sider organized a group of about 50 to meet in a YMCA basement in Chicago before Thanksgiving 1973. They wrote a declaration of “evangelical social concern.”

“We acknowledge our Christian responsibilities of citizenship,” it said. “Therefore, we must challenge the misplaced trust of the nation in economic and military might—a proud trust that promotes a national pathology of war and violence with victimizes our neighbors at home and abroad. We must resist the temptation to make the nation and its institutions objects of near-religious loyalty.”



Ron Sider’s Unsettling Crusade

TIM STAFFORD

In 1977, Sider published Rich Christians, arguing that poverty is a moral and not just economic issue. Christians who take the Bible seriously should oppose wealth inequality, he said, and see the injustice of the social structures that benefit powerful people at the expense of the poor.

“Hunger and starvation stalk the land,” he wrote. “The problem, we know, is that the world’s resources are not evenly distributed. North Americans live on an affluent island amid a sea of starving humanity.”

Evangelical Christians had long preached against some of the sins that lead to poverty, such as alcohol abuse. But they had ignored others, when condemnation would mean corporate responsibility.

“If God’s word is true, then all of us who dwell in affluent nations are trapped in sin. We have profited from systemic injustice,” Sider wrote. “We are guilty of an outrageous offense against God and neighbor.”

The book was sharply criticized by Christian Reconstructionist Gary North, who accused Sider of being a “guilt manipulator,” and Christian worldview philosopher Francis Schaeffer, who said Sider had succumbed to secular humanism and focused too much on society’s material problems.


The book nevertheless found an eager audience of evangelicals. It was especially popular among InterVarsity students and at campus ministries across the US and abroad. Rich Christians was translated into German, Dutch, Portuguese, Japanese, and Korean, and continued to circulate among left-leaning Christians for decades.

“Sider became a spark plug,” according to a 1992 CT profile, “among a small group of evangelicals who were interested in social and political issues, most of whom were young, well educated, highly idealistic, and shared a concern for social and racial justice and simple living.”



The Rich Christian


KEVIN D. MILLER

Sider founded Evangelicals for Social Action (now Christians for Social Action) in 1978. Hopes, however, for a strong progressive evangelical movement were soon swamped by the popularity of Ronald Reagan and the successes of the Religious Right. Republican leaders actively courted white evangelicals, finding common causes on issues from the Supreme Court to the local school board. Meanwhile, leading Democrats—many of whom found Jimmy Carter’s moralism judgmental and offensive—avoided or dismissed religious concerns and religious voters.

Nonetheless, Sider continued speaking and writing about evangelical moral concerns, including popular books on simple living and historic studies of the early church’s holistic pro-life teaching. Evangelicals for Social Action lobbied for sanctions on apartheid South Africa, launched the Evangelical Environmental Network, and campaigned for higher fuel-efficiency standards on automobiles.

Sider also protested American support for Latin American dictators in the 1980s and opposed the Gulf War in 1991 and the US invasion of Iraq in 2003.

“Sider refused to isolate abortion from issues of violence & injustice, urging conservative evangelicals to be ‘completely pro-life,’” wrote historian Brantley Gasaway. “Sider’s career seems bittersweet. … a bitter reminder of what modern evangelical politics might have but did not become.”

Sider continued to cry out to evangelicals from the wilderness into the 2020 election, when he edited a collection of Christian political essays called The Spiritual Danger of Donald Trump.


He said he published the book “with deep sadness and persistent hope,” calling American Christians across the political spectrum to demonstrate their “commitment to truth, respect for opponents, and willingness to negotiate reasonable bipartisan compromise.” Writers in the collection included former CT editor in chief Mark Galli, evangelical philosopher Michael Austin, theologian Samuel Escobar, and former Republican Congressman Reid Ribble.

“We believe that Christians can make a huge contribution to preserving a good future for our children and grandchildren,” Sider wrote, “by praying for God’s guidance, submitting unconditionally to biblical principles about truth, justice, and moral integrity, and faithfully applying these biblical principles in all our political decisions.”


In March 2021, he announced he had an aggressive form of bladder cancer and that he would be starting radiology and chemotherapy treatments. Sider said he was praying for 10 more years to live, but also kept singing a hymn from his childhood:


Peace, peace, wonderful peace,
Coming down from the Father above!
Sweep over my spirit forever, I pray,
In fathomless billows of love!



“We at Christians for Social Action feel the loss of this humble, kind, and prophetic man,” said Nikki Toyama-Szeto, the organization’s executive director. “As the initial surprise passes, we hold deep gratitude for the big and small ways that Ron bore witness to God’s heart, and how he always showed us a fuller picture of what it means to follow Jesus.”

Toyama-Szeto said in a statement that as Sider worked on his autobiography, “he was unafraid of death, confident that an even better story awaited him.”

On July 28, Sider’s son Ted shared on Facebook and Substack that his father had died suddenly of a cardiac arrest and asked followers to “please join our family in grieving for him.”

He is survived by his wife of 59 years, Arbutus Lichti Sider, and three children.



History Shows Us Why Being Evangelical Matters

RON SIDER
More from Ron Si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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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christianitytoday.com/2016/11/history-shows-us-why-being-evangelical-matters/

HISTORY SHOWS US WHY BEING EVANGELICAL MATTERS

RON SIDER

Evangelicalism yesterday helps us embrace the label today.

CHRISTIANITY TODAYNOVEMBER 21, 2016

Shutterstock


Is it time to abandon the label evangelical?

It’s a question we have been asking for years. But especially after this election, many Christians who have long identified as evangelicals—as well as millennials who grew up in our congregations—consider the label evangelical irreparably toxic. Both inside and outside the church, it has come to caricature a Religious Right sensibility, and worse, a group who are homophobic, anti-science, anti-immigrant, racist, and unconcerned about the poor.

In spite of my many decades as an evangelical, I have recently thought that it may be time to use a different word. But then I remember the long history of the term, the fact that the word essentially means a commitment to Jesus’ gospel, and that we need some label to distinguish ourselves from theologically liberal Protestants.

For a proper definition, we need to look at the significant times in history when large numbers of Christians gladly embraced the evangelical label: the Protestant Reformation in the 16th century, the Wesleyan/evangelical movements in the 18th and 19th centuries, and the evangelical movement in the 20th century.

The Evangelicals Who Came Before Us

Sola gratia and sola scriptura were the two key watchwords of the Protestant Reformation. Luther insisted that faith in Jesus Christ, not our good works, is the means of salvation (sola gratia). Luther also taught that Scripture alone (sola scriptura) is the final authority for faith and life. While we respect church history, church tradition is not an independent or equal source of authority alongside Scripture. To this day, the Lutheran Church in Germany is called “die evangelische kirche,” or the evangelical church. To say one is an evangelical is to embrace the Reformation teaching on sola gratia and sola scriptura.

The revival movements of the 18th and 19th centuries, including John Wesley’s Methodist movement, also identified as evangelical. Wesley asserted a passion for evangelism and a living, personal faith against a dead orthodoxy. He also emphasized “social holiness,” opposed slavery, and promoted justice in society. Wesley’s movement led to the conversion of William Wilberforce who launched the decades-long movement in Great Britain that finally ended the slave trade and slavery itself in the British Empire. The same movement led to a wide range of social justice campaigns in Britain.


The evangelical movement in the United States in the 19th century continued Wesley’s evangelical movement with sweeping revival, passion for evangelism, and strong commitment to social justice. In the mid-19th century, thoroughly evangelical Oberlin College—where the famous evangelist Charles Finney taught as a professor—served as a center for Christian opposition to slavery, the emergence of an evangelical women’s movement, and ongoing evangelistic efforts. Oberlin’s students led missions among Native Americans and stood with them to try to force the US government to keep the treaties it constantly broke. (See Donald Dayton’s Discovering An Evangelical Heritage.) The modern missionary movement of the 18th and 19th centuries flowed in a direct powerful way out of this evangelical movement. In this period when vast numbers of Christians called themselves evangelicals, the word connoted both a passion for evangelism and a commitment to work vigorously for justice in society. Those notions remain central to my conception of evangelical as I use the label today.

In the third period (the 20th century), large numbers of Christians called themselves evangelicals as theological liberalism found powerful expression in many “mainline” Protestant churches in the early 20th century and subsequent decades. Prominent liberal theologians rejected the possibility of miracles, denied the virgin birth, and even challenged the deity and bodily resurrection of Jesus. They neglected evangelism and focused on a “social gospel” concerned primarily or exclusively with justice in society. Christians committed to the historic doctrines of Christian orthodoxy rejected this theological position. At first, these folk called themselves “fundamentalists,” a term that referred to their commitment to central historic Christian doctrines. By the 1940s and 1950s, they shifted to the label “evangelical.”


Tragically, in the earlier years of the social gospel–fundamentalism debate, the theological conservatives overreacted to the social gospel’s one-sided focus on justice by embracing a one-sided emphasis on evangelism and foreign missions. But slowly in the 1950s, and then more vigorously in the next several decades, younger evangelicals insisted that biblical faith demands a strong commitment to both evangelism and social action, thus returning to the balanced position of much of 19th century evangelicalism.

Evangelicals in the later decades of the 20th century rejected the widespread embrace of universalism, a one-sided focus on social justice, and neglect of evangelism in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and many mainline denominations. Instead they reaffirmed the centrality of evangelism but at the same time insisted that social justice is also a central part of our biblical responsibility. Holistic programs embracing both evangelism and social action—dual missions reflected in the Lausanne Covenant and the Chicago Declaration of Evangelical Concern—increased exponentially around the world. When I call myself an evangelical, I also remember this recent period when being an evangelical came to mean embracing justice while holding to central doctrines of the faith.

How We Redeem the Label

What it meant to be an evangelical throughout church history is still relevant today. These distinctives remain important to our faith: salvation by grace, not works; the authority of the Bible; personal faith; passion for both evangelism and social justice; and commitment to historic central doctrines. We need a label to refer to this cluster of beliefs and practices. Perhaps biblical Christian would work, or small-o orthodox.

But the word evangelical is solidly biblical. It is simply the adjective derived from the Greek word evangelion, meaning gospel. Evangelicals are committed to the full biblical gospel.

Why allow people to distort the meaning and connotation of a great name? The harsh, narrow voices of the Religious Right used the label as they neglected justice for the poor and for people of color. Racists and homophobes and anti-immigrant demagogues called themselves evangelical despite their failure to respect and love their neighbors. The term also came up among those rejecting the science of global warming and the importance of creation care. Popular media learned from these examples that evangelical has often meant unjust and unbiblical.


This is a problem, but it’s one we can overcome. Throughout my life, I have repeatedly discovered that the media are intrigued by evangelicals who are passionate about economic and racial justice and protection of the environment. Leading with these concerns helps non-Christians listen to our conversation about Christ. Over time, we can help the larger society come to a better understanding of what an evangelical is.

Our central focus, of course, must be on faithfulness to Jesus and the Scriptures, not some label. Actually practicing holistic ministry that combines evangelism and social action; implementing a completely pro-life agenda that embraces both the sanctity of human life and family on the one hand and racial and economic justice, peacemaking and creation care on the other; and modeling astonishing love even for those we disagree with most strongly; –all that is far more important than “fighting” however winsomely for the label evangelical. In fact, it is the best way to redeem that label.

I see younger Christians already doing many of the things necessary to correct a distorted view of evangelicalism. They embrace racial and economic justice and creation care; they affirm the full dignity and equality of women; they take for granted that faithful Christians must embrace evangelism and social action; and they hold to a biblical sexual ethic while vigorously opposing mistreatment of LGBT people and defending their appropriate civil rights.

Millennials and all Christians who want to be faithful followers of Jesus must do that as well as affirm the beliefs and practices embraced by those who have historically called themselves evangelicals. To do that we need some label that distinguishes us from Protestants who abandon biblical authority, neglect evangelism and fail to affirm historic Christian doctrines.

I continue to believe that the word evangelical is the best label to do that.


Ron Sider is founder and president emeritus of Evangelicals for Social Action and a distinguished professor at Palmer Seminary at Eastern University.

Global Analysis
The Legacy of Ronald J. Sider
Five elements shaping transformational mission today

Al Tizon Aug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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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istory of the worldwide journey of evangelicals toward a holistic understanding and practice of mission cannot be told without taking into account the legacy of a North American theologian-activist by the name of Ronald J. Sider. His death on 27 July 2022 at age 82 gives us occasion to celebrate a life meaningfully lived and to reflect upon the lasting impact of his work on the mission of the church.

Though he was a distinguished professor of theology, holistic ministry, and public policy at Palmer Theological Seminary near Philadelphia for almost 45 years and founder of Christians (formerly Evangelicals) for Social Action, Sider never served as a cross-cultural missionary. His research and ministry focused predominantly on his own context of North America, as he called for a full-orbed Christianity that addressed both soul and society. However, North America could not contain his message—Sider’s influence crossed continental borders and made an impact on the church’s global mission.

This was not purely incidental. He was present, for example, at all three international Lausanne congresses. I personally went with him to the Third Lausanne Congress in Cape Town in 2010. In between the first and second congresses, Sider organized two consultations in 1980 on simple lifestyle and community development as part of his work with the Unit on Ethics and Society of the World Evangelical Fellowship (now the World Evangelical Alliance). So, although he appropriately focused on his own cultural context, the global scene was certainly within his purview.

By far, his most indelible mark on global mission was the part he played in catalyzing the transformational movement, which has manifested in such enduring entities as the International Fellowship for Mission as Transformation (INFEMIT), the Oxford Centre for Mission Studies, the journal Transformation (of which he served as first editor), and Regnum Books International.

The transformational movement, or ‘mission as transformation’, can be defined as a loose global network of reflective-practitioners of integral, contextual, and relational mission, wrapped in theological scholarship. Driven by a vision of God’s kingdom of peace, justice, and salvation, transformationalists ‘refuse to understand evangelization without liberation, a change of heart without a change of structures, vertical reconciliation (between God and people) without horizontal reconciliation (between people and people), and church planting without community building.’[1]

When one digs around the roots and fruits of this movement, one will unavoidably and regularly run into the person of Ronald J. Sider. Of course, he was not alone; other friends and ‘co-conspirators’ of ‘mission as transformation’ would include Rene Padilla, Samuel Escobar, Vinay Samuel, Melba Maggay, Kwame Bediako, and Peter Kuzmic.   

With a transformational understanding of the whole gospel as both foundation and backdrop, let us consider five key ways in which Sider uniquely shaped the movement.


Transformation and Discipleship: I Am Not a Social Activist
The first element is that a holistic understanding of the gospel is a discipleship issue. When people associate Sider with social justice, they are not wrong. But Sider’s response was clear: ‘I am not a social activist.’[2] This response was as puzzling as it was declarative. For if Sider did not consider himself a social activist, then what was he? In his own words, ‘I’m a disciple of Jesus Christ, the Savior and Lord of the universe.’[3] His motivation for social transformation came not from humanist altruism, but ultimately from authentic, Christian discipleship—a deep desire to follow Jesus faithfully and radically in the world.


Wealth and Poverty: Rich Christians in an Age of Hunger
Now in its sixth edition, Rich Christians in an Age of Hunger is on Christianity Today’s Top 50 Books that have shaped the evangelical world. In light of its impact alone, few would argue that Sider did more than any other to make economic life central to evangelical mission. Wealth and its pursuit are a sacred cow in capitalist societies—to challenge it would be to do so at one’s own peril! Nonetheless, Sider called it for what it is, a powerful idol that hinders the work of the gospel. ‘The increasingly affluent standard of living is the god of twenty-first century North America, and the adman is its prophet.’[4]

Sider’s critique honed in on God’s people who unquestioningly pursue wealth according to the rules of capitalism and not the rules of biblical faith. He writes, ‘In an age of affluence and poverty, most Christians [. . .] are tempted to succumb to the heresy of following society’s materialistic values rather than biblical truth.’[5] In the spirit of the biblical prophets, Sider called the church to repent and to begin living out the economics of the kingdom—in short, to return to Jesus.

Sider’s calling of rich Christians to account has had enormous impact on the church’s worldwide mission. First of all, it translated into a call for many Christians (myself included) to sell everything they had and to give the proceeds to the poor in order to follow Jesus who resides among the poor, oppressed, marginalized, and traumatized (cf. Mark 10:17–27; Matt 25:31–40). Implied here is that our wealth is more a hindrance than it is an asset for mission. While Jonathan Bonk’s classic Missions and Money[6] made the definitive case for the consequences of affluence to missionary work, Sider’s Rich Christians has served as the inspiration for economically conscious mission, not just for those called to work directly among the poor, but for the missionary community as a whole to think more critically about its attitude and management of material resources. Are the abundant resources entrusted to us gospel-serving or self-serving?[7]


Simple Lifestyle: Living Like We Care
Sider’s warning regarding the unquestioned pursuit of wealth and his practical commitment to the poor converged in his call to a simple lifestyle as essential to missional faithfulness. How we live our lives testifies to how we truly love (or don’t love) our poor neighbors around the world. Sider did his significant part to reinforce this conviction in the worldwide evangelical community.

He took to heart The Lausanne Covenant, which says, ‘All of us are shocked by the poverty of millions and disturbed by the injustices which cause it. Those of us who live in affluent circumstances accept our duty to develop a simple lifestyle in order to contribute more generously to both relief and evangelism’ (Covenant pt-9). Convicted and inspired by this, Sider organized two consultations on simple lifestyle—one in 1979 in New Jersey (US) and the other in 1980 in London. The guiding question for these gatherings was, ‘Will we dare to measure our lifestyles by the needs of the poor and unevangelized rather than by the living standards of our affluent neighbors?’[8]

Simplicity refers to living more with less, and being happier for it. For Sider, simplicity lends credibility to the church’s mission, as it demonstrates solidarity with the needy in the world. Indeed, it bends our hearts toward the poor and needy. It also better poises us to more fully engage in mission with freed-up time and resources. And it cultivates an orientation of people over product.


Peace and Nonviolence: If Jesus Is Lord
Sider’s commitment to nonviolence provides yet another contour of mission for which he is significantly responsible. Famous for his unwavering pacifism, Sider defined nonviolent action as ‘an activist confrontation with evil that respects the personhood even of the “enemy” and therefore seeks both to end the oppression and to reconcile the oppressor through nonviolent methods’.[9] His book Nonviolent Action features examples in history of the effectiveness of nonviolence to bring about social change, such as the People Power Revolution that toppled a cruel authoritarian government in the Philippines in the mid-1980s.[10] But ultimately Sider based his belief on the lordship of Christ.

His absolute commitment to nonviolence notwithstanding, however, he went beyond the tired pacifism-versus-just-war debate and called the whole church to peacemaking. A true just-war perspective places the use of violence at the very end of its tactical list; meaning that all nonviolent possibilities should be tried before reluctantly resorting to violence. The call to nonviolent action, therefore, beckons pacifists, just-war theorists, and everyone in between to link arms and ‘wage peace’ upon the earth.


The Politics of Jesus: Sociopolitical Involvement[11]
Finally, Sider urged fellow Christians to enter the public square with the politics of Jesus. Though he primarily spoke to believers in the North American contexts regarding sociopolitical involvement, the message is clear for the global church: participate in the political process of their respective contexts to advocate for the needy, speak truth to power, and help build the kind of society that reflects God’s peace, justice, and righteousness.[12]

This challenged the common misconception among evangelicals that they should not get involved in politics. It also challenged some of his fellow Anabaptists whose ‘social ethic’ was reduced to providing an alternate society by simply being the church. Sider, who served on a team of policymakers under the Carter administration, was adamant that being the church also meant proactively engaging mainstream politics in the name of Jesus.

That said, Sider discouraged partisan politics.[13] The sociopolitical involvement of Christians must transcend political membership, for our kingdom citizenship already carries with it a politic that does not respect party lines. He often said to me, ‘Al, if you get people on both sides of the political line angry, then you know you’re on the right track!’ Refusing to become ideologically captive or to tow the party line, he strove to be faithful to ‘the politics of Jesus’. In his words, this kind of politics is ‘pro-life, pro-poor, pro-family, pro-racial justice, pro-peace, and pro-creation care since God cares about all those things’.[14]


Building on a Strong Foundation
In summary, I have highlighted five elements in the work of Ronald J. Sider that have helped shape evangelical global mission today. As one of the pioneers of the transformational movement that championed a truly holistic, contextual, relational, and theological approach to mission, Sider contributed significantly, (1) as he located integral mission in the realm of discipleship; (2) as he centralized the issues of wealth and poverty on the missionary agenda; (3) as he did more than any other in developing the Lausanne Covenant’s statement on simple lifestyle; (4) as he advocated for nonviolent peacemaking as part of the justice work of the church in the world; and (5) as he urged Christians to get involved in the political process of their respective contexts for the sake of the vulnerable, as well as for the sake of social change.

I had the privilege to speak at Ron Sider’s memorial service. I spoke and cried for all who have been impacted by him when I thanked him for leaving us with plenty of resources to live radically and uncompromisingly for Jesus in the service of the whole gospel.

Endnotes
Al Tizon, Transformation after Lausanne: Radical Evangelical Mission in Global-Local Perspective (Oxford et al: Regnum, 2008), 6. 
See Ronald J. Sider, I Am Not a Social Activist: Making Jesus the Agenda (Scottdale, PA: Herald, 2008). 
Sider, I Am Not a Social Activist, 21. 
Ronald J. Sider, Rich Christians in an Age of Hunger: Moving from Affluence to Generosity. Sixth edition (W Publishing, 2015), 28. 
Sider, Rich Christians, 25. 
Jonathan Bonk, Missions and Money. Revised and Expanded (Maryknoll: Orbis, 2006). 
Editor’s Note: See article entitled ‘A Holistic Approach to Poverty Alleviation in Asia’ by Kumar Aryal inLausanne Global Analysis, July 2022, https://lausanne.org/content/lga/2022-07/a-holistic-approach-to-poverty-alleviation-in-asia. 
Ronald J. Sider, ‘Introduction,’ in Living More Simply: Biblical Principles and Practical Models, ed. Ronald J. Sider (Downers Grove, IL: IVP, 1980), 16. 
Ronald J. Sider, Nonviolent Action: What Christian Ethics Demands but Most Christians Have Never Really Tried (Grand Rapids, MI: Brazos, 2015), xv. 
Sider, Nonviolent Action, 63-77. 
This section is adapted from ‘Leading Evangelicals for Social Action,’ in Religious Leadership: A Reference Handbook, ed. Sharon Henderson Callahan (Los Angeles et al.: Sage reference, 2013), 459-460. Used by permission. 
Editor’s Note: See article entitled ‘Working for Freedom in a World of Exploitation and Trafficking’ by Marion L. S. Carson in Lausanne Global Analysis, July 2022, https://lausanne.org/content/lga/2022-07/working-for-freedom-in-a-world-of-exploitation-and-trafficking. 
However, he was quite clear about his opposition to the elections and presidency of Donald J. Trump in the United States. But even in that rare occasion, he did not oppose the then-current president on the grounds of party affiliation. See The Spiritual Danger of Donald Trump: 30 Evangelical Christians on Justice, Truth, and Moral Integrity, ed. Ronald J. Sider (Eugene, OR: Cascade, 2020). 
Sider, I Am Not a Social Activist, 203. 
Author's Bio

Al Tizon
Al Tizon is affiliate professor of missional and global leadership at North Park Theological Seminary in Chicago, Illinois (US), and lead pastor of Grace Fellowship Community Church in San Francisco, California, where he and his wife reside. Al worked with Ron Sider for nine years at Palmer Theological Seminary and Christians for Social 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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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널드 J. 사이더의 유산:
오늘날의 변혁적 선교를 형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

Al Tizon 8월 2023


선교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와 실천에 대한 전 세계 복음주의자들의 여정의 역사는 북미 신학자이자 활동가인  로널드 J. 사이더(Ronald J. Sider)를 빼놓고 논할 수 없다. 그는 2022년 7월 27일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죽음은 의미 있는 삶을 살았던 그를 기념하고 그의 업적이 교회 선교에 끼친 지속적인 영향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해준다.

그는 거의 45년 동안 필라델피아 인근의 파머(Palmer) 신학교에서 신학, 통전적 사역, 공공 정책 분야의 저명한 교수이자 사회 행동을 위한 기독교인(Christians (formerly Evangelicals) for Social Action)의 창립자이기도 했지만, 다문화 선교사로 섬긴 적이 없었다. 영혼과 사회를 모두 다루는 온전한 기독교에 주목하던 그의 연구와 사역은 주로 북미라는 자신의 상황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북미 대륙은 그의 메시지를 담아낼 수 없었고, 사이더의 영향력은 대륙의 경계를 넘어 교회의 세계 선교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는 순전한 우연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그는 국제 로잔대회에 세 차례 모두 참석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2010년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제3차 로잔대회에 그와 함께했다. 제1차 대회와 제2차 대회 사이 1980년도에 사이더는 세계복음주의연맹(World Evangelical Fellowship, 현재는 World Evangelical Alliance)의 윤리 및 사회부서(Unit on Ethics and Society)에서 일하며 단순한 생활방식과 공동체 개발에 관한 두 차례의 협의를 조직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문화적 맥락에 적절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지만, 그의 시야 안에는 전 세계가 담겨 있었다.

그는 변혁의 운동을 촉진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세계 선교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는데, 이는 인페미트(INFEMIT, the International Fellowship for Mission as Transformation), 옥스퍼드 선교 연구 센터(the Oxford Centre for Mission Studies), 그가 초대 편집장을 역임한 저널 트렌스포메이션(Transformation), 국제 레그넘 북스(Regnum Books)와 같은 지속적인 단체에서 잘 드러난다.

변혁 운동 혹은 ‘변혁으로서의 선교’는 신학적인 학문에 뿌리를 둔 통합적, 상황적, 관계적 선교를 실천하는 성찰하는 실천가들의 느슨한 글로벌 네트워크라고 정의될 수 있다. 변혁주의자들은 평화, 정의, 구원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바탕으로 ‘해방 없는 복음화, 구조의 변화가 없는 마음의 변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수직적 화해가 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수평적 화해, 공동체의 구축이 없는 교회 개척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1]고 주장한다.

이 운동의 뿌리와 열매를 파헤치다 보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리고 정기적으로 로널드 J. 사이더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물론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르네 파딜라(Rene Padilla), 사무엘 에스코바(Samuel Escobar), 비나이 사무엘(Vinay Samuel), 멜바 마가이(Melba Maggay), 콰메 베디아코(Kwame Bediako), 피터 쿠즈믹(Peter Kuzmic) 등의 인물들도 친구 혹은 ‘협력자’들로써 함께 ‘변혁으로서의 선교’에 동참했다.

온전한 복음에 대한 변혁적 이해를 기초이자 배경으로 삼아, 사이더가 이 운동을 형성할 때 기반으로 한 다섯 가지 주요 방법을 살펴보자.


변혁과 제자도: 나는 사회운동가가 아니다
첫 번째 요소는 복음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가 제자도의 문제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사이더를 사회 정의와 연관시킬 때, 그들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이더의 대답은 분명했다: ‘나는 사회 운동가가 아닙니다.’[2] 이 답변은 선언적이면서 당혹스럽기도 했다. 사이더가 스스로를 사회 운동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우주의 구세주이자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3] 사회 변혁에 대한 그의 동기는 인본주의적 이타주의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진정한 기독교적 제자도, 즉 세상에서 예수님을 신실하고 근본적으로 따르고자 하는 깊은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부와 빈곤: 기아 시대의 부유한 기독교인
이제 여섯 번째 판을 출간한 ‘기근 시대의 부유한 그리스도인’은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의 복음주의 세계를 만든 50대 도서에 선정되었다. 그 영향력만 놓고 볼 때, 사이더가 복음주의 선교의 중심이 되는 경제적인 삶을 위해 그 누구보다 많은 일을 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와 부의 추구는 신성한 소와도 같기 때문에 이에 도전하는 것은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더는 부를 복음의 사역을 방해하는 강력한 우상이라고 불렀다. ‘점점 더 풍요로워지는 생활 수준은 21세기 북미의 신이며, 광고인들은 그들의 메신저이다.[4]

사이더의 비판은 성경적 신앙의 규칙이 아닌 자본주의의 규칙에 따라 의심 없이 부를 추구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그는 ‘풍요와 빈곤의 시대에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 . .] 성경적 진리보다는 사회의 물질주의적 가치를 따르는 이단에 굴복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다’[5]고 적었다. 성경 속 선지자들의 정신에 따라 사이더는 교회가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의 경제를 실천하는 삶을 살기 시작해야 한다고, 즉 예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고 촉구했다.

부유한 기독교인에게 책임을 묻는 사이더의 추궁은 교회의 전 세계 선교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선적으로, 이는 나를 포함한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가난하고 억압받고 소외되고 상처받은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그 수익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는 요청으로 해석되었다(참조. 막 10:17-27; 마 25:31-40). 여기에 함축된 의미는 우리의 부가 선교의 자산이라기보다는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조나단 봉크(Jonathan Bonk)의 저서 ‘선교와 돈’[6]은 부유함이 선교 사역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결정적인 사례를 제시한 반면, 사이더의 ‘부유한 기독교인’은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직접 사역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선교 공동체 전체가 물질적 자원에 대한 태도와 관리에 대해 더 비판적으로 생각하도록, 경제적으로 의식적인 선교에 영감을 주었다. 우리에게 맡겨진 풍부한 자원은 복음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인가?[7]


단순한 생활방식: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대로 살기
의심할 여지 없는 부의 추구에 대한 경고와 가난한 이들에 대한 그의 실천적인 헌신은 선교적 신실함에 필수적인 단순한 생활방식에 대한 그의 부르심과 맞닿아 있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우리가 세계 속 가난한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보여준다. 사이더는 전 세계 복음주의 공동체에서 이러한 신념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수많은 사람이 겪는 빈곤에 우리 모두가 충격을 받으며, 이 빈곤의 원인인 불의에 대하여 분개한다. 우리 중에 풍요한 환경 속에 살고 있는 이들은 검소한 생활양식을 개발해서 구제와 전도에 보다 많이 공헌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임을 확신한다’(언약 9항)는 로잔 언약(Lausanne Covenant)의 내용을 마음에 새겼다. 이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영감을 받은 사이더는 1979년 미국 뉴저지와 1980년 런던에서 두 차례에 걸쳐 단순한 생활방식에 관한 협의(consultations)를 조직했다. 이 모임을 이끌었던 주된 질문은, ‘부유한 이웃의 생활 수준이 아닌 가난하고 복음을 접하지 못한 사람들의 필요를 기준으로 우리의 생활방식을 측정할 수 있는가?’였다.[8]

단순함(Simplicity)은 더 적은 것으로 더 많은 것을 누리며 더 행복하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사이더에게 있어 단순함은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를 보여주고, 이는 교회의 사명에 신뢰성을 준다. 실제로 단순함은 우리의 마음을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에게 향하게 한다. 또한 여유로운 시간과 자원으로 선교에 더욱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한다. 그리고 제품보다 사람을 중시하는 마음을 키운다.


평화와 비폭력: 예수님께서 주님이시라면
비폭력에 대한 사이더의 신념은 그에게 책임이 있는 또 다른 선교의 윤곽을 제시한다. 확고한 평화주의로 유명했던 사이더는 비폭력 행동을 ‘“적”의 인격까지 존중하며 악에 맞서는 활동가로서, 비폭력적인 방법을 통해 억압을 종식시키고 억압하는 자와 화해를 도모하는 것’[9]이라고 정의했다. 그의 저서 ‘비폭력 행동(Nonviolent Action)’에는 1980년대 중반 필리핀의 잔혹한 권위주의 정부를 무너뜨린 피플 파워 혁명(People Power Revolution) 등 비폭력이 사회 변화를 가져온 역사 속 사례들이 소개되어 있다.[10] 하지만 궁극적으로 사이더는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사이더가 비폭력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을 따분한 평화주의 대 정의 전쟁의 논쟁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교회 전체가 평화를 만드는 데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진정한 정의 전쟁의 관점에서는 폭력의 사용을 전술 목록의 제일 마지막에 두며, 이는 어쩔 수 없이 폭력에 의존하기 전에 모든 비폭력적 가능성을 시도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비폭력 행동에 대한 요청은 평화주의자, 정의 전쟁 이론가,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이 땅에서 ‘평화를 쟁취’하라고 손짓한다.


예수님의 정치: 사회정치적 참여[11]
마지막으로 사이더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의 정치에 부합하는 자세로 공공의 문제에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주로 북미 지역의 신자들에게 사회정치적 참여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각자의 상황에서 정치 과정에 참여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옹호하고 권력에 진실한 목소리를 내며 하나님의 평화, 정의, 공의를 반영하는 사회를 건설하는 데 도움을 주라는 그의 메시지는 세계 교회에도 뚜렷하게 전달된다.[12]

이는 복음주의자들이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일반적인 오해에 도전한 것이다. 또한 단순히 교회됨을 통해 대안 사회를 건설하는 것으로 사회 윤리적 책임을 줄이는 일부 아나뱁티스트(Anabaptist)와도 대립하였다. 카터(Carter) 행정부의 정책입안팀에서 일했던 사이더는, 교회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정치의 주된 흐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렇긴 하지만, 사이더는 당파적 정치를 반대했다.[13] 기독교인의 사회정치적 참여는 정당을 초월해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의 시민권은 당파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이따금 나에게 ‘알, 정치 노선의 양쪽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화나게 하면 자네는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거야!’라고 말했다. 이념적으로 어딘가에 사로잡히거나 당의 노선을 따르기를 거부한 그는 ‘예수님의 정치’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런 정치는 ‘친생명, 친빈곤, 친가족, 친인종정의, 친평화, 친창조세계돌봄적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이다.’[14]


강력한 기반 위에 구축
요약하자면, 나는 오늘날 복음주의 세계 선교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된 로널드 J. 사이더의 업적에서 다섯 가지 요소를 강조했다. 선교에 대해 진정한 총체적, 상황적, 관계적, 신학적 접근을 지지한 변혁 운동의 선구자 중 한 명인 사이더가 크게 기여한 바는 다음과 같다. (1) 통합적 선교를 제자도의 영역에 위치시킨 것; (2) 부와 빈곤의 문제를 선교 의제로 집중시킨 것; (3) 단순한 생활방식에 관한 로잔 언약의 선언을 개발하는 데 다른 누구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 (4) 세상에서 교회의 정의 사역의 일환으로 비폭력 평화 만들기를 외쳤다는 것; (5) 기독교인들이 사회 변화와 취약 계층을 위해 각자의 상황 속 정치의 과정에 참여하도록 촉구했다는 것이다.

나에게 로널드 사이더의 추도식에서 연설할 수 있는 영광이 주어졌다. 나는 그에게 영향을 받은 모든 사람을 마음에 두고 눈물을 흘리며, 우리가 타협하지 않고 예수님과 복음에 온전히 헌신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풍성한 자원을 제공해 준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미주
Al Tizon, Transformation after Lausanne: Radical Evangelical Mission in Global-Local Perspective (Oxford et al: Regnum, 2008), 6. 
See Ronald J. Sider, I Am Not a Social Activist: Making Jesus the Agenda (Scottdale, PA: Herald, 2008). 
Sider, I Am Not a Social Activist, 21. 
Ronald J. Sider, Rich Christians in an Age of Hunger: Moving from Affluence to Generosity. Sixth edition (W Publishing, 2015), 28. 
Sider, Rich Christians, 25. 
Jonathan Bonk, Missions and Money. Revised and Expanded (Maryknoll: Orbis, 2006). 
Editor’s Note: See article entitled ‘A Holistic Approach to Poverty Alleviation in Asia’ by Kumar Aryal inLausanne Global Analysis, July 2022, https://lausanne.org/content/lga/2022-07/a-holistic-approach-to-poverty-alleviation-in-asia. 
Ronald J. Sider, ‘Introduction,’ in Living More Simply: Biblical Principles and Practical Models, ed. Ronald J. Sider (Downers Grove, IL: IVP, 1980), 16. 
Ronald J. Sider, Nonviolent Action: What Christian Ethics Demands but Most Christians Have Never Really Tried (Grand Rapids, MI: Brazos, 2015), xv. 
Sider, Nonviolent Action, 63-77. 
This section is adapted from ‘Leading Evangelicals for Social Action,’ in Religious Leadership: A Reference Handbook, ed. Sharon Henderson Callahan (Los Angeles et al.: Sage reference, 2013), 459-460. Used by permission. 
Editor’s Note: See article entitled ‘Working for Freedom in a World of Exploitation and Trafficking’ by Marion L. S. Carson in Lausanne Global Analysis, July 2022, https://lausanne.org/content/lga/2022-07/working-for-freedom-in-a-world-of-exploitation-and-trafficking. 
However, he was quite clear about his opposition to the elections and presidency of Donald J. Trump in the United States. But even in that rare occasion, he did not oppose the then-current president on the grounds of party affiliation. See The Spiritual Danger of Donald Trump: 30 Evangelical Christians on Justice, Truth, and Moral Integrity, ed. Ronald J. Sider (Eugene, OR: Cascade, 2020). 
Sider, I Am Not a Social Activist, 203. 

저자 약력

Al Tizon
알 티존은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 있는 노스파크(North Park) 신학교의 선교 및 글로벌 리더십 학과의 부교수이자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그레이스 팰로우십 커뮤니티(Grace Fellowship Community) 교회의 담임목사로, 아내와 함께 거주하고 있다. 알은 9년 동안 로널드 사이더와 함께 파머 신학교와 ‘사회행동을 위한 기독교인’에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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