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05

"정수일 교수는 간첩이었지만 인간적으로 괜찮은 사람이었다" 2503

"정수일 교수는 간첩이었지만 인간적으로 괜찮은 사람이었다"

"정수일 교수는 간첩이었지만 인간적으로 괜찮은 사람이었다"
박수연 기자

2025-03-05

사형 구형했던 조규홍 당시 검사

"그렇지만 남편 존경한다"
매일 면회 한 부인 깊은 인상

"최후 진술서 학술 원고 복원 간청
오래 된 일 세세히 기억은 안 나"






1996년 11월 28일,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었던 위장 간첩 ‘무함마드 깐수’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전 단국대 교수)에게 검사는 “사형을 내려 달라”고 재판부에 요구했다. 2024년 2월 24일 정 교수의 별세를 계기로 당시 그에게 사형을 구형했던 서울지검 검사, 조규홍(70·사법연수원 14기·사진) 변호사에게서 그날의 뒷얘기를 들었다.



사형을 구형하던 날, 정 교수는 최후진술에서 자신의 목숨보다 압수된 고대동서교류사 원고를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생전 정 교수는 당시 조 검사가 선고를 이틀 앞둔 날 컴퓨터 기술자와 함께 자신을 소환해 원고를 복원할 수 있었다고 기억했다. 약 30년 전에 일화에 대해 묻자, 조 변호사는 “오래 전의 일이라 세세히 기억나지는 않는다”고 했다. 다만 그는 정 교수에 대해 “인간적으로는 괜찮은 사람으로 기억한다”고 회상했다.



조 변호사는 “전반적으로 보면 대한민국 체제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간첩이기 때문에 위장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고, 결국 사형을 구형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정 교수는 간첩으로 활동했지만 재판 과정에서 전향서를 제출했다. 대한민국이 북한보다 우수한 사회임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고, 대한민국 사회에 동화된 모습도 보였다. 이에 정 변호사는 “당시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다”고 했다.



조 변호사는 정 교수가 자신의 연구 활동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졌던 것으로 기억했다. 정 교수는 검찰 수사를 받으며 “북한에서 대학교수로 있을 당시 5만 자 정도의 아랍어 사전을 제작했는데, 이후 한국에 와서 보니 한국 학자들이 그 사전을 참고하고 있었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정 변호사는 “정 교수가 스스로를 ‘남북한을 통틀어 동서교류사와 아랍 연구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라고 평가한 것 같다”고 말했다.



조 변호사에게는 정 교수의 부인에 대한 인상도 강하게 남았다. 그는 “정 교수의 부인은 남편이 간첩 활동을 했음에도 원망하거나 반감을 가지지 않았다”며 “오히려 평소에 자신(부인)에게 잘해 줬고, (정 교수는)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고 기억했다.


정수일 교수의 마지막 단독 인터뷰를 실은 법률신문 2월 27일자.



격랑의 시대, 실크로드학을 열다 - 정수일 교수(1934~2025)

마지막 단독 인터뷰 기사 바로가기



정 교수는 북한에 아내와 세 딸이 있었고, 그의 부인은 이 같은 사실을 모른 채 속아서 결혼을 했다. 그럼에도 검사와의 면담에서 불만은커녕 남편이 얼마나 열심히 학문 연구에 정진했는지 설명했다고 한다. 조 변호사는 “정 교수의 아내가 ‘남편과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차 한잔을 끓여 서재로 올라가면, 러닝셔츠 차림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고서를 연구하고 있었던, 거의 모든 시간을 연구에 매진한 훌륭한 학자였다’고 설명하면서 그가 간첩으로 처벌받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고 말했다.




1998년 4월 10일, 정 교수는 징역 12년형을 확정받았지만, 2000년 광복절 특사로 출소했다. 2003년 사면·복권돼 한국 국적을 취득한 그는 이후 학자로서 연구 활동을 계속 이어갔다. 정 교수가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던 데에는 부인의 역할이 컸다. 학자로서의 자질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해 남편이 복역하는 동안 매일 면회를 했다고 한다.

조 변호사는 1985년 서울지검 의정부지청 검사로 임관해 서울지검 검사, 창원지검 진주지청 부장검사, 대전고검 검사, 인천지검 조사부장, 서울지검 의정부지청 형사부장, 부산지검 형사부장 등을 지내고 2003년 변호사로 개업했다. 2009년부터 충남대 로스쿨 교수로 후학을 양성한 그는 2014년부터 대전지방변호사회 소속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댓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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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랑의 시대, 실크로드학을 열다 - 정수일 교수(1934~2025) 마지막 단독 인터뷰
박수연 기자


2025-02-26 05:06

정수일 교수(1934~2025) 마지막 단독 인터뷰
"겨레에 헌신한 삶 … 대한민국 법과 법조인에게 신세졌다"
정수일 선생. <사진=백성현 기자>

문명교류학과 실크로드학의 권위자 정수일 선생이 24일 향년 90세로 영면했다. 선생은 2022년 12월 회고록을 출간했는데, 그와 관련하여 2023년 2월 8일 법률신문과 단독 인터뷰를 진행했다. 당시 추가 인터뷰 후 전문을 보도하려했으나 선생의 병환으로 2차 인터뷰를 진행하지 못했다. 당시 1차 인터뷰 내용을 선생의 장례식을 맞아 그대로 보도한다. 선생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다.

“돌이켜 보면 대한민국의 법에 신세를 졌고, 법조인들의 도움과 성원을 받아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회고록 《시대인, 소명에 따르다》를 발간한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은 2023년 2월 8일 서울 종로구 연구실에서 가진 법률신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실 저는 범죄자로서 감옥에 수감됐다가 자유의 몸이 됐다시피 대한민국의 법 아래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한국의 법과 법조인들의 배려, 관심, 정당한 판단, 도움, 성원 등을 받았습니다. 사법부의 판단을 받는 과정에서도 변호사님들께서 나서서 변론도 해주셨고요. (그러한) 훌륭한 분들 덕분에 지금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정 소장은 1996년 위장 간첩 ‘무함마드 깐수’로 체포돼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었던 인물이다. 북한에서 해외 아카데미를 거점으로 하는 특수공작원의 임무를 부여받고 세계 각국을 전전하다가, 무함마드 깐수라는 이름으로 필리핀 국적을 취득해 1984년 한국에 입국했다. 이후 단국대 교수로 재직하며 실크로드와 문명교류학 분야에서 혁혁한 연구 성과를 남기면서, 검거될 때까지 약 12년 간 간첩 활동을 병행했다. 학자로 연구에 매진하여 문명교류학의 권위자로 부상했던 만큼 그가 위장 간첩으로 체포되자 세상은 떠들썩했다. 정 소장은 일제시대 북간도로 이주한 유민의 후손으로, 옌볜의 쯔신에서 태어났다.


2023년 인터뷰 중인 정수일 선생. <사진=백성현 기자>

광복 후에는 중국 베이징대학교 동방학부에서 아랍어를 전공했는데, 조기 졸업과 함께 중국의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돼 이집트 카이로대학으로 떠났다. 졸업 후에는 모로코 대사관에 파견됐지만, 이후 조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을 중국 정부가 받아들여 합법적 국적 변경 절차를 통해 1963년 북한으로 갔다.

“저는 민족주의자입니다. 환경의 영향도 컸다고 볼 수 있는데, 어릴 적 만주라는 투쟁의 근거지에서 생활하면서 일찍이 민족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요. 그러다가 광복을 맞았고, 한반도의 조선인으로서 저의 몸과 정신은 조국으로 향했던 것 같습니다. 대학에 진학하고 유학을 떠난 뒤 연이어 외국 생활을 하며 알제리 전쟁을 목도했고, 제국의 시대를 겪으며 민족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조국의 통일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깊어졌습니다. 그때 마음에 새긴 좌우명이 ‘시대의 소명에 따라 지성인의 양식으로 겨레에 헌신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MZ세대에는 다소 고리타분하게 비칠 수도 있는 ‘민족주의’가 정 소장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그에게 통일의 당위성은 결국 민족국가론이 바탕이자 근거인지 물었다. “민족주의의 특성은 연대성과 수호 의지, 발전지향성입니다. 민족주의자라고 하면 다소 이상한 시각으로 보기도 하지만 진정한 민족주의자인 김구 선생 등을 떠올리면 됩니다. 민족을 바탕으로 우리의 문명을 세계로 확산시킴과 동시에 세계화의 형태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그것이 진정한 민족주의입니다. 혹자는 남과 북이 서로 다른 민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러려면 민족이 갈라져 지금은 하나의 민족이 아니라는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민족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가 달라져야 하는데, (남한과 북한은) 달라진 게 없어요. 경제적 토대, 경제생활, 경제에 영향을 주는 여건 등 세 가지 면에서 남북을 보면 그대로예요. 본질적으로 달라진 게 없어요.”



중국 외교부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던 정 소장은 총리 겸 외교부장 저우언라이에게 청원을 거듭했고, 끝내 중국 국적을 버린 채 환국해 북한으로 떠났다. 6~7년가량 북한 평양국제관계대학 및 평양외국어대학 동방학부 교수로 활동하다가 대남 공작원으로 발탁돼 아내와 세 딸을 둔 채 길을 나섰다. 이 과정에서도 통일에 대한 그의 열망이 작용했다.



“북한에서의 연구 환경은 상당히 만족스러웠습니다. 당시는 북한의 경제·사회적 분위기가 좋을 때였고, 지원도 전폭적이었죠. 그러던 중 대남 공작원 제의를 받았는데, 순간 통일 성업의 광야에 나서서 솔선하겠다는 포부를 떠올렸습니다. 통일에 도움이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 하고자 하는 마음이었지요. 이 시대에 태어난 제게 주어진 시대의 소명이랄까요. 매시기마다 (시대의) 소명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세대에 보람 있는 일은 민족에 보탬이 되는 일일 것이고, 그것이 통일로 가는 길 아니겠습니까. 생명이 다할 때까지 통일이 되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다 해보겠다는 심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 소장이 평생 가장 간절히 간구한 것은 바로 통일이다. 현실을 감안한 통일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사실 통일이라고 하면 제도 통일을 생각하는데, 독일을 보면 지금도 의식이나 생각은 통일되지 않았어요. 결국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통일이 되어야 하죠. 그 대안이 바로 ‘진화통일론’입니다. 진화된 방식의 통일이어야 완전한 통일이 될 수 있습니다. 통일을 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통일편익이라고 하는데, 남과 북이 진화 통일을 한다면 이익이 확실히 발생할 거라 생각합니다. 적어도 통일 첫 10년 차에 발생할 성장률은 대단할 것입니다. 아울러 군비 등도 절감될 것이고, 남북의 자원을 합쳐 편익을 도출할 수도 있겠죠.”

《시대인, 소명에 따르다》에서도 많은 부분을 통일에 관해 언급하고 있듯이, 인터뷰 내내 정 소장의 통일에 대한 갈망은 뜨겁게 전해졌다. 문득 회고록에는 거의 드러나지 않은 대남 공작원으로서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임무야 뭐 뻔한 이야기 아닐까요? 다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고요. 이미 확정 판결까지 나온 사안에서 대해 반복하지는 않아도 될 것 같아 회고록에는 담지 않았습니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돼 징역 12년이 확정됐다. 4년이 지난 2000년에 형집행이 정지됐고, 2003년 사면 복권에 이어 2007년에는 보안관찰처분도 취소됐다.

박원순 변호사와 김한수 변호사가 변론을 맡아주셨습니다. 이후 호적을 바꾸는 문제에도 직면했는데, 외국인이 한국에 수감되었다가 나오면 주소가 없지 않습니까. 그럴 경우에는 어느 곳에서 출소했는지에 따라 성씨나 본관을 받게 되는데 저는 서울 구치소에서 출소해 ‘한양 정씨’가 되게 되었어요. 저로서는 납득하기가 어려웠어요. 또 북에 있는 세 아이가 추후 혹시라도 저를 찾을 때 ‘한양 정씨가 되어버린 저를 찾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부터 조상에 대한 죄송한 생각까지 들면서 안 되겠다 싶었어요. 수감 생활 중 알게 된 포항의 옛 지명인 영일 정씨와 같은 성이란 점에 착안하여 종친회를 찾아갔지요. 우여곡절 끝에 영일 정씨를 인정받았습니다.”

559쪽에 달하는 회고록을 집필하는 데 걸린 시간이 단 8개월이라는 정 소장은 89세에도 학문에 대한 열망에 눈빛이 반짝였다. 그는 실크로드학을 중심으로 문명교류학을 이끌었고, 수감 생활 중 《이븐 바투타 여행기》를 완역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수많은 연구과 저술 활동이 이어졌다. 앞으로도 중세 문명 교류사, 연변 등 유민들의 역사 등에 대해 탐구하고 싶다는 그의 열정의 길은 앞으로도 더욱 길게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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