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19

문경준 - 4년 전 오늘 이 글을 올렸을 때 한 페친분으로부터 소개받은 책을 오늘 도서관에서 빌려 훑어봤다. 한국의... | Facebook

(6) 문경준 - 4년 전 오늘 이 글을 올렸을 때 한 페친분으로부터 소개받은 책을 오늘 도서관에서 빌려 훑어봤다. 한국의... | Facebook




가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표1>의 기 다 합천군에는 돌아가야 할 말도 없었기 때문에 귀국글고 하지마에 남은 사람이나 귀국해서도 힘을 찾아 다른 지역으
진출을 하로시마에서는 거리에서 조선인을 만나도 고향을 풀어볼 필요 이나다 방이 있을 정도였는데 "누구에게 불어보아도 '합창'이라고 답한 나는 것이었다. 또 패전 후의 히로시마에서도 '세일합천인화'라는 귀국을 난한 합천출신자 모임이 생겼다고 한다. 이번과 문화변용 한국합전지 국의 사례연구에 의하면, 1994년 현재 합천면 내곡리에는 이민경험자 29 중이 히로시바로 이주한 경험자로, 모임 간부에 따르면 협회등록자 출본적지가 합천군에 해당하는 자는 약 반수, 정확하게 하면 3분의 2가 될 지도 모른다고 한다.
이런 사실로부터, 약 5만 명으로 추정되는 히로시마에서 피폭된 조선인의 상당수가 합천군 출신사들이며, 합천군과 히로시마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큰 파이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큰 파이프는 어떻게 해서 만들어진 것일까? 다음으로 그 큰 파이프를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보는 것으로 합천과 히로시마의 연결 실제 를 탐색해보자.
사람들을 히로시마로 향하게 한 것
앞에서 보았듯이, '협회' 합천지부에서는 지부회원의 95%나 되는 회원이 히로시마로 가게 된 이유를 '생계를 위해'라고 답했다.
여기서 말하는 '생계를 위해'란 '합천군에서 먹고살 수 없어 살아가기 위 베'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그 실상을 지금까지 내가 만나고 이야기 배웠던 합천출신피폭자의 경우에 관하여 상세하게 살펴보면 몇 가지 유형
제5장 합천에서 히로시마로 가는 길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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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텍스트는 한국 합천 출신자들이 일본 히로시마로 이주하게 된 배경과 그 규모, 그리고 이주 동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합천 출신 이주민의 규모: 히로시마 피폭 조선인의 상당수(약 5만 명 중 3분의 2)가 합천군 출신으로 추정되며, 이는 합천과 히로시마 사이에 큰 연결 고리가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이주 동기: 합천지부 회원들의 95%가 '생계를 위해' 히로시마로 이주했다고 답했으며, 이는 합천에서의 삶이 어려워 살길을 찾아 떠났음을 의미합니다.
합천 출신자 모임: 패전 후 히로시마에 '재일합천인회'라는 합천 출신자 모임이 생겨났습니다.
히로시마 이주 경험자: 1994년 기준으로 합천면 내곡리에는 이민 경험자 29명 중 20명이 히로시마로 이주한 경험자로 확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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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합천읍내 거주 피폭자인 석판용(石)은 "우리 마음에서도 많은 사람 차 없어 다른 사람의 농사일을 돕는다거나 일용노동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살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그들 대부분은 소자지조 그래서 그 사람들은 해방 후 마을로 돌아와봤자 집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했다(1995년 4월).
또 1944년 당시 초계면사무소에서 일하던 조성섭)은 합천에서 만 주로 가기보다 일본으로 가는 사람이 많았다. 마음의 5분의 1 정도의 사람 이 일본으로 갔을 것이다. 대부분은 소작을 하고 있거나 생활이 어려운 사 람들이었다"고 말했다(1994년 8월).
이민과 문화변용』에서도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내곡리에서는 해방 전 조금이라도 전답을 소유·경영하거나, 어렵게나다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일본으로 돈벌이 나서는 것을 단념했다. 고 한다. 이를 거꾸로 말한다면, 전답을 소유·경영하지 않았던 대부분의 소작계층은 일본으로 돈벌이 간 것이 된다.
이런 이야기로부터도 합천군에서 히로시마로 건너갔던 사람들은 '돈벌이 에 나선 형'보다도 '유리형' 쪽이 많았다고 추측된다.
또 앞에서 보았듯이, 1924년이라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조선에서 히로시 마로 건너갔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독신 노동자로, 돈을 벌어 저축한 돈은 전부 고향으로 송금하는 '돈벌이에 나선 형'의 이주자였다. 그리고 그 무렵 온 조선에서 히로시마로의 이주자는 아직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에 대하여 다음 항 '히로시마로 향한 사람들의 물결'에서 볼 수 있듯이, 합천에서 히로 시마로의 이주는 합천에서의 농촌피폐가 심화되던 1930년대에 대거 이루어 졌다. 이러한 사실을 보아도 '돈벌이에 나선 형'보다도 '유리형'으로 히로시 마로 건너간 사람이 훨씬 많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 '유리형'이라고 해도, 조선에서 일본으로 가기 위해서는 합천에서 대 구 또는 부산까지의 차비, 대구에서 부산까지의 기차요금, 부산부터 시모노
제5장 합천에서 히로시마로 가는 길 277


AI 개요

제공된 텍스트는 일제강점기 합천에서 히로시마로 이주한 사람들의 특징을 설명하며, 다음과 같은 핵심 정보를 포함합니다.
합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 중 상당수는 해방 후에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이주자 대부분은 소작농이나 생활이 어려워 돈벌이를 위해 일본으로 갔으며, 특히 1930년대 농촌 피폐가 심화되면서 대거 이주가 이루어졌습니다.
초기 이주자 중에는 돈을 벌어 고향에 송금하는 '돈벌이에 나선 형'의 독신 노동자가 많았지만, 이후에는 '유리형'(돈벌이 외 다른 이유로 이주한 경우)의 이주자가 더 많아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가기 위해서는 합천에서 대구 또는 부산까지의 차비와 기차 요금 등이 필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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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놀자가 급증하여 할 수 없이 도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사람이 속출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합성을 내습한 큰 자연재해를 살펴보자. 역사 자연에에에 의한 합천 농촌의 참상에 관해서는 세상 '자연재해로 농촌리에는 더욱 기획에 이상하게 본 대로이다.
1929년 7월에 큰 수혜가 발생하여 합천 전체의 3분의 2의 건담이 유실 되고 마음의 방수학은 에너의 삼수인 석에 비하여 약 7만 식으로 크게 물 어진다. 시다가 1930년대 들어 세계공황의 여파로 합천 농민들의 생활은순 시간에 악화되었다.
1951년에는 수해 1932년에는 가뭄이 내습했다. 그 때문에 1932년 4월 사정에서 합천 농민들 중에는 보릿고개를 넘을 수 없게 되어 '유리결식하 는 우리, '이존재인'이 속출하여, 전체 합천군 인구의 7일 이상이 '초근목피 로 연명하는 상태가 되었다.
1934년부터 1939년에 걸쳐 매년 가뭄이 들었고, 특히 1939년의 가봉은 조선 전역을 내습하여, 조선전체가 대용작이었다. 그리고 같은 해 7월에는 합천에서 '빨기근'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총독부는 다음해 1940년부터 쌍의 공출을 시작했다.
<그림 3>에서 나타나 있는 도일자의 수가 급증한 해, 즉 1930년, 1932년 1935년, 1940년은 모두 위와 같은 합천을 내습한 큰 홍수나 극심한 가뭄이 있었던 다음해에 해당한다. 이 사실로부터 합천에서 히로시마로의 이주의 대다수는 '생활고' 때문이었다는 것이 한층 명백해진다.
파이프는 지연 혈연으로 만들어졌다
다음의 <지도 5>는, <표 12> '출신면별, 히로시마거주지별 피폭자 수 (재한과목자 20쪽 제재 '표 11·면별, 당시의 거주지별 피폭자 수'를 참조)의 히로시마시 및 히로시마 시외의 피폭자 수를, 식민지시대의 합천군을 표시 한 <지도 4>에 써넣어 '합천군내 각 면의 히로시마피폭자의 분포상황'을
284 제2부 한국의 히로시마'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표시한 것이다. 조사시의 거주민과 도시의 거주변이 다른 피폭자도 있지 만 거의 대부분의 피자는 히로시마로부터 다시 고향 면으로 귀국하여 개 기서 거주지를 찾았다. 따라서 <지도>의 피폭자 분포는 도일시에 도 자 분포에 해당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다음의 고장을 행했다
<지도 5>를 보면 피폭자가 몇 개의 면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합천군에서 히로시마시로의 이주자는 군내 17년 중등 곡면을 필두로 합천, 대양, 방책, 용주, 묘산 6면에 집중해 있다. 수치로 호 면이 6면에 합천군내 피폭자의 약 8할이 집중되어 있다. 합산향토사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이인갑주스, 1995년 당시)은 이렇게 말한다.
합천군에는 원자폭탄피해자뿐만 아니라, 해방 직후에 일본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많고, 또 오늘날까지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소위 재일동포 중에서 도 합천군이 고향인 사람들이 많다. 물론 일제시대에 이런저런 사정으로 일 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합천땅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4,000명이 붙 는 원자폭탄피해자 수가 상징하듯이, 합천군은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 너간 사람들이 눈에 띄게 많은 것이다.
- "한국의 발견 - 한반도와 한국인 경상남도, 149쪽
합천문화원의 변종철 원장(1995년 당시)도 "합천군의 모든 면에서 많은 사 람이 일자리를 찾아 일본이나 만주로 갔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합천군내의 모든 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히로시마를 목표로 일본에 건너갔던 것은 아니었다. 히로시마로 향한 사람들의 흐름에 는 군 내부의 지역적 특성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지도 5>를 보고 먼저 알 수 있는 것은, 100명 단위의 큰 ''가 적 있는 면은 합천면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펼쳐진 지역이다. 합천면내를 중심 으로 동서남북으로 뻗은 2등도로와 3등도로가 지나가는 면이다. 이것은 할 에서도 언급했지만, 식민지지배정책으로서 교통망의 정비가 조선인노동력 을 일본으로 '내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286 제2부 '한국의 히로시마'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AI 개요
이 텍스트는 한국의 합천군과 원자폭탄 피해자, 그리고 일제강점기 일본으로의 이주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합천군의 원자폭탄 피해자 집중: 합천군 출신 원자폭탄 피해자들이 히로시마로 이주했다가 해방 후 다시 합천군으로 돌아와 정착했으며, 특히 합천, 대양, 방책, 용주, 묘산 등 6개 면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합천군의 일본 이주 배경: 합천군에는 원자폭탄 피해자 외에도 해방 후 일본에서 돌아온 사람들과 재일동포 중 합천 출신이 많으며,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많았음을 설명합니다.
히로시마 이주의 지역적 특성: 합천군 내에서도 특히 합천면을 중심으로 2등도로와 3등도로가 지나는 지역에서 히로시마로의 이주가 활발했으며, 이는 식민지 지배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인 노동력을 일본으로 유도하는 교통망 정비와 관련이 있습니다.
"한국의 히로시마": 이 글은 합천군이 '한국의 히로시마'라고 불리게 된 배경과 그 역사적 맥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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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시한 것이다. 조사시의 거주민과 도입시의 거주민이 다른 피폭자도 있지 만 거의 대부분의 피폭자는 히로시마로부터 다시 고향으로 귀국하여 개 기서 거주지를 찾았다. 따라서 <지도 5>3의 피폭자 블로는 도시에도 자 분포에 해당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다음의 고통을 행했다
<지도 5>를 보면 피폭자가 몇 개의 면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합천군에서 히로시마시로의 이주자는 군내 17년 중등 곡면을 필두로 합천, 대양, 쌍책, 용주 묘산 6번에 집중해 있다. 수치로 호 면이 6면에 합천군내 피폭자의 약 8할이 집중되어 있다. 합천향토사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이인갑으며, 1995년 당시)은 이렇게 말한다.
합천군에는 원자폭탄피해자뿐만 아니라, 해당 직후에 일본에서 돌아온 도 합천군이 고향인 사람들이 많다. 물론 일제시대에 이런저런 사정으로 일 사람들이 많고, 또 오늘날까지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소위 재일동포 중에서 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합천땅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4,000명이 볼 는 원자폭탄피해자 수가 상징하듯이, 합천군은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 너간 사람들이 눈에 띄게 많은 것이다.
-"한국의 발견 - 한반도와 한국인·경상남도, 149쪽
합천문화원의 변종철 원장(1995년 당시)도 "합천군의 모든 면에서 많은 사
람이 일자리 를 찾아 일본이나 만주로 갔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합천군내의 모든 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히로시마를 목표로 일본에 건너갔던 것은 아니었다. 히로시마로 향한 사람들의 흐름에 는 군 내부의 지역적 특성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지도 5>를 보고 먼저 알 수 있는 것은, 100명 단위의 큰 'ㆍ'가 터치 있는 면은 합천면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펼쳐진 지역이다. 합천면내를 중심 으로 동서남북으로 뻗은 2등도로와 3등도로가 지나가는 면이다. 이것은 앞 에서도 언급했지만, 식민지지배정책으로서 교통망의 정비가 조선인노동력 을 일본으로 '내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286 제2부 '한국의 히로시마'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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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된 텍스트는 한국의 합천군과 원자폭탄 피해자, 그리고 일제강점기 일본으로의 이주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합천군은 원자폭탄 피해자뿐 아니라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많은 지역입니다.
특히 히로시마로 이주한 합천 출신자들이 많았으며, 이는 합천면을 중심으로 한 교통망 정비와 지역적 특성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지도 5>에 따르면, 합천면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뻗은 도로가 지나는 지역에 원자폭탄 피해자들이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식민지 지배 정책의 일환으로 교통망이 정비되어 조선인 노동력이 일본으로 이주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시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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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텍스트는 한국 합천 지역 주민들이 일제강점기 및 해방 이후 일본으로 이주하게 된 배경과 그 특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합천 원폭 피해자 및 재일 동포의 고향: 합천은 원자폭탄 피해자와 해방 후 일본에서 돌아온 사람들, 그리고 오늘날 재일 동포 중 많은 이들의 고향입니다.
일본 이주의 주요 원인: 합천 주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주된 이유는 일자리를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지역적 특성과 교통망의 역할: 합천군 내 특정 지역(합천면 중심)에 원폭 피해자가 집중되어 있으며, 식민지 지배 정책의 일환으로 정비된 교통망(2등도로, 3등도로)이 조선인 노동력을 일본으로 유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히로시마 이주의 특수성: 합천군 내 모든 면에서 히로시마로만 이주한 것은 아니며, 군 내부의 지역적 특성이 히로시마 이주 흐름에 크게 작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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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준's post


4년 전 오늘 이 글을 올렸을 때 한 페친분으로부터 소개받은 책을 오늘 도서관에서 빌려 훑어봤다.
한국의 히로시마...
역시 강제징용이 문제가 아니었다(전혀 없진 않았겠지만 가히 조족지혈 수준이었을 게 분명하다).
당연한(?) 일본의 수탈에 더해 이어진 자연재해를 포함해 극도의 가난에 빠진 합천군민들이 '굶어죽을 순 없어서' 하나둘 고향을 등지던 와중에 '그나마 먹고살 수 있는' 지역 중 하나로 히로시마가 떠올랐다.
'재팬 드림'까진 아니었어도, 태평양전쟁으로 군수산업이 활발히 진행된 히로시마는 분명 기회의 땅이었다.
초기에 가난을 피해 무작정 도일했다 우연히 히로시마에 정착한 이들이 '가족을 부르고, 친척을 부르고, 지인을 불러내' 이곳이 합천군민으로 득시글하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다 '이제 좀 먹고살 만해질' 때쯤 가공할 원자폭탄이 머리에 떨어졌고. ㅠㅠ
이제야 좀 감이 잡힌다.
식민지 시절 일본에 가 있던 조선인 얘기만 나오면 '강제징용' - 나중에 이 용어가 찜찜했는지 '강제동원'으로 물타기를 했더라만 - 으로 몰던 버릇을 지금이라도 고쳐야 하는 이유 중 하나가 '히로시마 속의 조선인들' 속에 들어있다.





강제징용에 대한 지극히 상식적인 의문 하나.
히로시마 원폭으로 사망한 조선인이 5만 명, 그중 70%가 합천 출신이란다. 무려 3만5천 명...
합천의 현재 인구가 4만5천인데 일제강점기에 무슨 연유로 그 많은 사람들이 일본 땅 그중 하필 히로시마로 옮겨간 걸까?
그 정도 숫자라면 노동력을 제공할 성인 남자만이 아니라 배우자를 비롯해 부모, 자식들이 모두 함께 있지 않았을까?
강제징용으로 어린 아이까지 강제와 취업사기로 끌고가 지옥보다 못한 작업환경에서 피죽을 끓여먹으며 탈출하다가 수도 없이 죽었다는 증언들이 넘쳐난다.
이런 지옥으로 왜 합천 사람들은 한 도시를 들어낸 것처럼 몰려간 걸까?
조선의 징용공이 끌려간 일본 내 타 지역과 히로시마는 완전 별개의 생활환경이었을까? 그래서 원폭 투하지점으로 선정된 건 아니겠지?
한국 사회가 인식하는 강제징용...
솔직히 의문투성이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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