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통치가 조선의 고종과 순종 때보다 훨씬 낫구나...">
<1917년 11월 10일, 창덕궁에서 대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순종은 불길이 번지는 와중에도 가장 먼저 '우리 다이쇼 천황의 초상화를 챙겨라'고 지시했습니다.>
라는 문장이 아래 블로그 기사 내용 어디쯤 있나 찾아보기 ㅋㅋㅋ
무저항 한일합방의 이유 : 네이버 블로그
무저항 한일합방의 이유
차경환
2022. 12. 2.
"일제 36년의 오해와 이해 1: 일본이 총 한 방 안 쏘고 대한제국 합병한 비결(김용삼 기자)" 의 프리젠테이션 강의를 다시 각색 편집하여 소개합니다.
대한제국이 망할 때의 인구를 약 1천6백만 명으로 추산합니다. 그런데 과연 인구가 1천6백만 명이나 되는 나라가 어떻게 총 한 방 쏘지 못하고 저항 한번 제대로 못 해보고 너무나 허망하게 나라를 잃을 수가 있을까. 과연 이것이 가능한 것인가?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하는 점을 생각해봅니다.
지도를 보면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통치하게 된 것은 영국이 인도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면서부터 100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반도를 식민지경영을 하는 과정에서도 몇십 년이 걸렸습니다. 주민들의 저항이 일어나서 프랑스군대가 밀림에 들어가 전멸을 당하고 하는 그러한 악전고투 끝에 몇십 년 만에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반도를 식민지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일병합이라고도 하고 한일합방이라고도 하는 이것은 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구 1천6백만이나 되는 나라가 어떻게 저항 한 번 하지 않고 이렇게 너무나 손쉽게 넘어갔을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위 사진의 통감부 외사국장을 지냈던 고마츠 미도리(小松綠, 1865-1942)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군인 한 명 안 움직이고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대한제국을 병합하는 데 성공했다."
이 말에서 우리의 고민이 시작됩니다. 대한제국은 말 그대로 제국이었습니다. 제국이란 무엇일까요? 입법, 사법, 행정권은 물론이고 군 통수권에 이르기까지 모든 권한을 고종(高宗, 1852-1919) 과 순종(純宗, 1874-1926)황제가 보유하고 있던 나라였습니다. 따라서 누가 어떤 압력을 넣더라도 황제가 끝까지 버티기만 했다면 병합은 절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병합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 전제 군주가 병합에 찬성하고 동의했다는 뜻입니다. 만약 황제가 끝까지 저항했다면, 황제를 강제로 폐위시키거나 무력을 동원해 강제로 점령하지 않는 한 절대로 병합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일본은 통감부를 통해 고종의 성향을 면밀히 관찰한 결과, 고종 황제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바로 '돈'이었습니다. 고종은 금전 문제에 대해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체결 이전, 고종은 통감부에 밀사를 보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구사항을 전달했습니다:
황실 내탕금(內帑金, 황제 개인이 사용하는 비용)을 일정액으로 정하여 궁중에 지급할 것.
황실이 운영해 온 사업들(예: 광산 사업, 인삼 전매 사업)과 궁궐, 능원(陵園) 소속 토지 등의 재산권을 인정할 것.
황실의 재정과 재산에 대해 정부의 재정 고문이 간섭하지 말 것.
이 요구사항들은 모두 돈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일본의 관점에서 고종의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황실 개혁을 추진하면서, 황제가 정부 재산을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강제적으로 통제했습니다. 이전까지 고종은 대한제국의 모든 재산을 자신의 개인 재산처럼 제맘대로 사용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권한이 모두 사라지자 고종은 강하게 반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고종의 저항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일본이 우리의 내정을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했습니다. 이를 통해 고종은 일본의 내정 간섭을 세계에 폭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대한제국의 멸망 원인
1899년, 고종황제는 대한제국의 헌법인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선포한 이후 황제권 강화를 목표로 정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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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황제 고종이 돈 문제에 극도로 민감하다는 사실을 파악했고, 그들은 이 치명적 약점을 이용하면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1910년 8월 22일 합방조약(倂合條約) 체결을 앞두고, 일본은 병합을 위한 준비 과정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립니다. 합방 약 한 달 전인 1910년 7월 8일, 일본 정부는 각의(閣議)를 열어 '고종과 그의 가족들에게 파격적 금전적 보상을 하자'는 안건을 논의했습니다. 그 결과, 매년 150만 엔씩 지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는 사실상 돈으로 고종과 그의 가족을 매수하려는 의도였습니다.
150만 엔이라는 금액의 규모를 이해하기 위해 당시의 상황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당시 일본 총리의 연봉은 1만 2천 엔이었습니다. 즉, 고종에게 지급하기로 한 금액은 일본 총리 연봉의 100배가 넘는 금액이었습니다.
일본 황족들에게 지급되는 연간 세비는 3만 엔에서 10만 엔 사이였습니다. 고종에게 지급하기로 한 금액은 일본 황족 평균 세비의 약 15배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이는 일본 입장에서 볼 때도 상상하기 힘든 거액이었고 그야마로 "헉" 소리가 나는 금액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막대한 금액을 고종과 순종(純宗, 1874-1926)에게 지급하기로 결정했고, 이 결정을 담은 안을 가지고 1910년 7월 28일,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1852-1919)가 조선에 도착했습니다.
일본이 대한제국 황실에 막대한 금액을 제공하기로 결정한 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통치권의 중요성 인식: 일본은 통치권을 가진 고종과 순종이 합병을 거부하면 병합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무력 사용의 위험성: 만약 고종과 순종이 거부할 경우, 무력을 동원해야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러시아 등 외국의 개입이 있을 경우 상황이 매우 복잡해질 수 있었습니다.
평화적 병합 추구: 일본은 한일병합을 무력 사용 없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진행하고자 했습니다.
망국 군주에 대한 예우 시범: 일본은 망국의 군주를 어떻게 확실히 대우하는지 보여줌으로써, 조선의 대신들이 저항하지 않고 일본의 통치를 따르게 하려 했습니다.
파격적 예우 결정: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일본은 대한제국 황제의 눈알이 튀어 나오도록 파격적으로 예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러한 전략은 병합 과정을 원활하게 진행하고, 향후 통치에 대한 저항을 최소화하려는 일본의 치밀한 의도를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이인직(李人稙, 1862-1916)은 우리에게 신소설 '혈의 누'의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일본 유학 경험이 있어 일본어에 능통했습니다.
당시 내각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은 영어는 유창했지만 일본어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완용은 자신의 비서였던 이인직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깁니다. 그것은 일본이 어떤 조건으로 대한제국을 합병하려 하는지 그 내막을 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이인직은 일본 측의 고마츠 미도리와 협상을 시작합니다. 이인직이 '일본은 우리를 어떻게 예우할 계획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고마츠는 흥미로운 대답을 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서양 열강들이 다른 나라를 식민 지배할 때 얼마나 가혹하게 대했는지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가 1897년에 마다가스카르를 병합할 때, 왕을 외딴섬으로 유배시켰습니다. 미국도 1898년에 하와이를 합병한 뒤, 하와이 왕족들을 모두 평민으로 강등시켰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서양인들과 다릅니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최고의 예우를 다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냐면, 대한제국 황실을 일본 황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일본 황족보다도 더 큰 예우를 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황실뿐만 아니라, 당신과 같은 내각 대신들에게도 귀족 작위를 수여하고 연금도 지급할 것입니다. 그러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대한제국 지도부는 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협상 과정에서 이완용은 '대한제국' 대신 '한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황제가 폐위되더라도 '왕'이라는 칭호를 유지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최종 협상 결과, 일본에 새롭게 편입되는 지역의 명칭은 '한국'이 아닌 '조선'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또한, 고종과 순종의 황제 칭호도 변경되어 고종은 '덕수궁 이태왕(李太王)', 순종은 '창덕궁 이왕(李王)'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조건으로 병합을 진행하기로 결정됩니다.
주의할 점은 '조선'이라는 명칭은 일본의 식민지국 이름이 아니라, 일본제국의 새로운 영토에 대한 '지역' 명칭이라는 것입니다.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에 완전히 흡수합병되어 독립된 국가로서의 지위를 완전히 상실했으며, 이는 영국의 인도 식민지와 같은 유명무실한 국가의 존속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당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인도제국의 황제도 겸했습니다.
이때부터 병합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이완용이 이런 제안을 한 것은 당연히 순종의 지시입니다. 위의 모든 사항은 순종 황제에게 보고되었으며, 또한 신하였던 이완용은 황제 순종의 뜻을 전한 것이었습니다.
원래 합병 조약은 1910년 8월 22일에 체결하고 8월 25일에 병합을 공표하기로 합의되었습니다. 그러나 대한제국 측에서 갑자기 연락이 와서 공표 날짜를 8월 29일로 연기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왜 4일을 연기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중국 지식인 양계초(梁啓超, 1873-1929)가 쓴 조선 망국을 논함이라는 책에 나옵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합병 조약은 8월 16일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와 이완용의 논의로 결정되었고, 17일 데라우치가 그 결과를 일본 정부에 전보로 통지했다. 25일 공표하기로 이미 결정되었으나, 한국 정부가 갑자기 28일 순종 황제의 즉위 4주년 기념회를 연 뒤에 발표해달라고 요청하자 일본 측이 이를 허락했다. 그날 대연회에는 신하들이 몰려와 평상시처럼 즐겼고, 일본 통감 역시 외국 사신의 예에 따라 그 자리에 참석해 축하하며 기뻐했다. 세계 각국의 혈기 있는 이들은 한국 군신들이 보여준 태연한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순종 황제의 즉위 4주년 기념식을 성대하게 열고 나서 병합을 발표해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그래서 8월 28일에 황제 즉위 축하연을 성대하게 열어, 대신들에게 훈장을 나눠준 뒤, 바로 그 다음 날 '한일 병합!'을 선언한 것입니다. 어느 나라의 왕과 신하가 내일이면 나라가 망하는데, 즉위 기념 연회를 열고 '황제 폐하 만세!'를 외치며 훈장을 나눠줍니까? 이는 정상적인 논리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광경이며, 책에서 그 해괴한 장면을 묘사한 것입니다.
9월 1일, 상하이에서 발간되는 중국 일간지 *신보(申報)*에 '아아, 한국이 멸망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일본의 근대화 지식인으로 알려진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는 훨씬 이전부터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조선의 인민은 소, 말, 돼지, 개와 같으며, 이런 나라는 하루라도 빨리 망하는 것이 하늘의 뜻에 부합되는 일이다. 조선 백성을 위해서라도 조선의 멸망은 축하할 일이다.' 일본 지식인들은 이처럼 대한제국의 멸망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망한 나라의 왕족을 일본은 '왕공족'으로 편입시켰습니다. '왕공족(王公族)'이란 고종의 직계 가족을 '왕족(王族)', 방계 가족을 '공족(公族)'이라 부르며, 이를 합쳐 부르는 명칭입니다. 왕족에는 순종 황제와 그의 부인, 고종 황제와 그의 부인, 이렇게 총 4명이 포함되었습니다.
공족은 고종의 아들들과 손자들이 해당되었으며,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1877-1955)은 고종의 후처 소생 아들입니다. 의친왕과 그의 부인, 그리고 고종의 형인 흥친왕 이재면(興親王 李載冕)과 그의 부인, 이렇게 4명이 공족으로 편입되었습니다. 왕족과 공족을 합쳐 총 8명이 왕공족으로 포함되었고, 이들에게 매년 150만 엔이라는 거액이 지급되었습니다. 이후 1927년에 왕공족의 범위가 조금 확대되었으나, 아무튼 이 8명을 위해 150만 엔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지급한 것입니다.
이 150만 엔을 현재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약 300억 원에 해당합니다. 즉, 8명에게 매년 300억 원을 지급한 셈입니다. 한일병합조약 제3조에는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 및 그 후비와 후예들에게 각자의 지위에 맞는 존칭, 위엄, 명예를 유지하게 하고 충분한 세비를 제공할 것을 약속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일본은 이 약속을 1945년 조선이 해방될 때까지 지켰습니다.
1910년부터 1920년까지는 매년 150만 엔을 지급했고, 1921년부터 1945년까지는 물가 상승을 고려해 연간 180만 엔으로 증액했습니다. 이는 일본 총리 1년 연봉의 약 120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습니다. 이 돈으로 고종과 순종은 매우 안락하고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1911년부터 1913년까지 조선총독부가 조선을 통치하는 데 필요한 연간 예산은 약 5,047만 엔이었는데, 그중 3.3%가 8명의 왕공족 생활비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의 왕공족은 기존 대한제국 시절에 보유하던 땅과 재산에 더해, 일본이 제공하는 막대한 세비까지 받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부유해졌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왕공족을 관리하기 위해 '이왕직'이라는 부서를 따로 두었으며, 이왕직이 관리한 전답과 농토는 한반도 전체 논 면적의 5%에 해당하는 넓이였습니다. 이를 통해 조선 왕공족이 얼마나 부유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일본은 고종과 순종을 돈으로 완전히 구워 삶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왕족들만 회유해서 나라가 제대로 통치될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대신들도 구워 삶았습니다. 대신들만 회유했겠습니까? 조선 사회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유림, 즉 주자 성리학자들까지도 회유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까지도 모두 팍팍 구워 삶았습니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명백한 증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국민들은 "야 대한제국이 왜 망했데냐?" "아 그거야 뭐 간악한 일본이 총 들이대고 압력을 넣어서 어쩔 수 없이 빼앗긴 거 아니야?'라고 대충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게 아니라는 증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영친왕과 그의 배다른 형제 의친왕의 아들들인 이건(李鍵)과 이우(李鍝)는 조선 왕족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장교가 되었고, 일본 육군대학을 졸업해 고급 장교로 성장했습니다. 영친왕 이은은 일본 육군 중장까지 올랐으며, 유럽의 명문 골프클럽을 투어했고, 이건은 클래식 스포츠카를 수집했습니다. 조선의 왕공족이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황족들조차 '우리도 쟤들처럼 재산을 가져봤으면 좋겠다'고 부러워할 정도였습니다.
왜 우리는 이런 사실을 지금껏 전혀 몰랐을까요? 이 엄청난 재산은 나중에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건국한 후, 이들 왕족의 재산을 모두 국가 재산으로 압류하고 귀속시켰습니다.
* 이강(李堈, 1877.3.30~1955.8.16) 고종과 후궁장씨 소생의 다섯번째 아들로 의친왕으로도 불린다. 사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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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본은 왕족을 회유한 후, 고관대작들까지 회유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서양식 작위 제도를 도입하여 귀족 작위를 만들었습니다. 후작, 백작, 자작, 남작 등의 작위가 그것입니다. 합병 두 달 후인 1910년 10월 7일, 대한제국 황실의 친족과 각료 등을 예우하기 위해 '조선 귀족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이 제도에 따라 76명의 고관대작에게 작위를 수여하고, 이들에게는 귀족 작위에 상응하는 예우를 했습니다. 그 예우란 '은사금'이라 불리는 은퇴자금을 지급하는 것이었습니다.
병합 후 총 76명이 귀족으로 임명되었지만, 실제로 작위를 수여받은 사람은 68명에 이었습니다. 나머지 6명은 작위를 반납했으며, 2명은 자살했습니다. 작위를 반납한 6명은 윤영구, 홍순영, 한규설, 유길준, 민영달, 조경호로,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귀족 작위를 받을 수 없다고 거부했습니다. 이들은 결국 귀족 명단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자살한 2명 중 김석진은 작위를 받은 후 자살했기 때문에 그의 작위도 무효가 되었고, 조정구는 자살 후 살아나 은둔하여 면제되었습니다. 결국, 귀족 작위는 총 68명에게만 주어졌습니다.
귀족 작위를 수여받은 것만이 아니라, 해당 작위에 상응하는 돈도 지급되었습니다. 가장 많은 은사금을 받은 사람은 흥선대원군의 장남이자 고종의 친형인 이재면으로, 그는 한일 병합조약에 참여한 대가로 83만 엔을 받았습니다. 이를 현재 원화로 환산하면 약 166억 원에 해당합니다. 이재면은 166억 원을 수령한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이재면의 아들인 이준용은 16만 3천 엔을 받았고, 이는 현재 약 32억 6천만 원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이재면 부자는 총 200억 원 가까운 은사금을 일본 정부로부터 받고, 36년 동안 매우 안락하게 지냈습니다.
이것이 바로 총소리 한번 나지 않고 평화롭게 나라가 일본에 넘어간 진짜 이유 입니다.
그 다음으로 일본 정부는 사회 불만 세력을 매수하기 위해 3천만 엔 규모의 '은사공채'를 발행했습니다. 이는 미국 달러로 약 1,500만 달러,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약 6천억 원에 해당합니다. 이 6천억 원은 합방에 저항하는 사람들과 조선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이 금액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미국이 스페인-미국 전쟁에서 승리한 후 필리핀을 스페인으로부터 빼앗을 때, 필리핀을 미국이 차지하는 대신 스페인에게 2천만 달러를 지급했습니다. 이와 비교하면, 일본은 대한제국을 합병한 후 백성과 사회 불만 세력을 매수하기 위해 미국이 스페인 정부에 지급한 금액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무려 1,500만 달러를 사용한 것입니다.
미국이 필리핀 점령을 위해 스페인에 지급한 2천만 달러는 필리핀 국민에게 전달된 것이 아니라 스페인 정부의 주머니에 들어갔습니다. 반면, 일본이 발행한 3천만 엔은 모두 대한제국 백성들에게 직접 분배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당시 백성들이 저항하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 확실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3천만 엔은 구체적으로 어디에 사용되었을까요?
삼척수비대 앞에서 양반유생에 대한 은사금 수여식 1911년
첫째로, 병합에 협조한 조선 귀족들과 관리들, 공무원들에게 은사금을 지급했습니다. 둘째로, 주자 성리학자들, 즉 유생들 중에서 덕망 있고 나이 든 양반 유생 3,150명에게도 은사금을 나눠주었습니다. 또한, 모범적인 효자와 절부 3,290명에게도 은사금을 지급했습니다. 게다가 혼자 사는 가난한 홀아비, 과부, 고아, 독거노인 7만9백명에게도 은사금을 나눠주었습니다. 남은 돈은 흉년이 들었을 때 백성들에게 식량을 제공하는 데 사용되었고, 세금도 감면해주었습니다. 이러한 조치들 덕분에 백성들은 "일본 통치가 조선의 고종과 순종 때보다 훨씬 낫구나..." 하고 느꼈고, 그래서 일본의 통치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결과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의 병합은 총한방 쏘지않고 아주 평온하게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1910년 일본인이 본 한국 병합》이라는 책의 서문을 이데 마사이치(井手正一)라는 사람이 썼습니다. 이 서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무력 사용 없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합병한 것은 매우 놀라운 사건이다." 그는 또한 "다른 나라처럼 군대를 동원해 강제로 빼앗거나 의회에서 독단적인 결정을 통해 강행한 것이 아니라, 군주의 자발적 판단에 의한 평화적 합병이었던 점이 주목할 만하다"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 지구상에서 1천6백만 명이 넘는 인구를 가진 나라가 조약에 의해 총 한 발의 총성도 없이,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합병된 것은 정말 특별한 일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어떤 말썽이나 곤란한 상황도 없었고, 오히려 사람들의 맥이 빠지게 할 정도로 극히 평온한 상태에서 무사히 합병이 이루어졌다. 병합 발표 후에도 어떤 불만이나 소란도 없었으며, 예상보다 훨씬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고요하고 편안한 상태로 병합이 끝났다"고 덧붙였습니다.
더 충격적인 내용도 있습니다. '상민들은 그동안 양반과 관리들에 의해 생명과 재산 등 모든 자유를 박탈당해왔는데, 병합으로 법률상 사회적 지위가 양반과 동등한 인격자로 변화되었기에 그 기쁨이 매우 컸다'고 적고 있습니다. 거의 90%에 달하는 일반 상민들은 마치 흡혈귀 같은 양반과 관료들로부터 착취를 당해왔지만, 한일 합병을 통해 양반과 상놈의 구분이 없어져 법률상으로나 사회적으로 모든 면에서 평등해졌습니다. 그래서 상민들은 모두 합병을 반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위 '경술국치의 실제 모습'이었습니다.
이범진이라는 인물이 주러시아 공사관에 있을 때 병합 소식을 듣고 자결한 사례가 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습니다: '우리나라 대한제국은 망했습니다. 폐하는 모든 권력을 잃었습니다. 저는 적을 토벌할 수도 복수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깊은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자결 이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오늘 목숨을 끊으렵니다.' 그는 실제로 자결하였습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황제가 나라를 돈 받고 넘겼고, 백성들조차 합병을 기쁘게 받아들였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한일합방 전후에 고종과 순종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나라가 일본에 넘어간 후, 그들이 매일같이 비분강개하며 조선의 독립을 위해 몰래 독립군을 군자금을 대주고 피눈물 흘리며 망국군주의 한을 달랬을까요? 합방 전후 그들의 실제 삶을 사료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대한제국이 병합되기 전, 황실을 유지하기 위한 황실기구인 '궁내부'가 극도로 비대해져 있었습니다. 이후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대체 이놈의 나라는 어떻게 정부 공무원보다 황제를 위한 관리가 더 많냐?'라며 개혁에 나섰습니다. 그래서 궁내부 소속 관원 4,400명을 대량 해고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9년에는 칙임관 33명, 주임관 76명, 판임관 229명, 그리고 궁녀와 내시가 4,000명이나 바글대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한일합방 이후에도, 궁녀와 내시의 수가 지나치게 많다는 지적에 따라 추가적인 인원 감축이 이루어졌습니다. 1920년까지 궁녀와 내시의 정원을 2,000명으로 줄이기로 하고, 1,450명을 해고했습니다.
즉, 고종이 1919년 3.1운동 직전에 세상을 떠났을 때까지 궁녀와 내시가 총 2,500명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고종은 이 많은 궁녀와 내시들과 함께 해피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합방 이후, 고종은 덕수궁에서 '덕수궁 이태왕(도쿠주노미야 이태왕)'으로, 순종은 '창덕궁 이왕(쇼토쿠노미야 이왕)'으로 살게 되었고, 각각 나눠서 생활했습니다.
고종은 을미사변으로 민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당한 후, '엄상궁'이라는 여성과 함께 지내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때 엄상궁은 '영친왕'을 낳습니다. 이후 엄상궁이 1911년 7월 20일 덕수궁에서 사망합니다. 엄상궁이 죽은 그 이후부터 고종은 2천여 명의 궁녀들이 모두 자기 것이니까 이 궁녀 저 궁녀 데리고 거사를 치러서 이때부터 애를 낳기 시작 합니다.
‘귀인 양씨’라는 여성이 등장합니다. 양씨는 본래 신분이 미천해서, 오빠는 짐승을 도살하는 일을 하던 백정의 집안 출신으로 조선시대 최하층민 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궁녀가 되어 덕수궁의 ‘소주방’ 나인이 되었습니다. 이는 왕실 주방의 식모를 말합니다.
고종은 이 주방 식모와 동침해서 1912년에 덕혜옹주를 낳았습니다. 귀인 양씨는 엄비 사망 직후 장례 기간 고종의 승은으로 덕혜를 회임했다고 합니다.
당시 고종의 나이는 61세였는데, 덕혜옹주는 고종의 나이가 많았던 탓인지 정신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십 대 때부터 조현병이라는 정신질환을 앓으며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덕혜옹주는 그럼에도 대마도 도주의 아들과 결혼하게 되는데, 이는 그녀가 조선 왕족이라는 신분 덕분에 돈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신병은 더욱 심해졌고, 결국 1955년에 이혼하게 됩니다. 고종은 이렇게 일본에서 주는 세비를 받아 덕수궁에서 주방 식모 이런 여자들을 데려다 애 만드는데 아주 열심이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겠습니까. 무슨 망국의 시름을 섹스로 푸는것인가요?
이 여자 한 명뿐이 아니었습니다. 이번에는 '광화당 이씨'라는 여성과 또 동침했는데, 이 여성은 '무수리'입니다. 궁내의 허드렛일을 하는 무수리인 광화당 이씨와 1914년 7월 3일 '이육' 이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때가 고종 나이가 63세로 1914년은 한일합방이 되고 4년 후입니다. 광화당 이씨는 계속 생존하다 해방 후에 죽었다고 동아일보에 기사가 났습니다. 이육이라는 아들은 2살 때 죽습니다. 고종이 너무 많은 나이에 아이들을 낳아서 그런지 건강하게 제대로 자란 아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또 이번엔 또 '삼축당 김씨'라는 여성과 또 스캔들이 납니다. 삼축당 김씨라는 여성은 본명이 '김옥기'인데 이 여성은 8살 때 경복궁에 들어온 세수간 나인으로 이 여성도 무수리입니다. 그런데 고종이 여러 궁녀 중에서 삼축당 김씨를 가장 총애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순종이 즉위 후에 아버지가 가장 총애한 궁녀 삼축당 김씨에게 '삼축당'이라는 당호를 지어서 바치고 금반지를 하사했다는 기록도 나옵니다. 이 여성은 고종의 아이는 낳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도 해방 후 죽었는데 당시 신문에 부고 기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고종은 또 아이를 낳았는데, '이우'라는 아이입니다. 이 아이는 ‘보현당 정씨’라는 여성에게서 낳았는데 1915년 8월 20일 고종이 64세 때 낳았습니다. 하지만 1916년 7월 25일 날 내막염으로 죽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한일합방 이후 결국 아들 2명과 딸 1명 이렇게 3명을 낳았는데 딸인 덕혜옹주는 정신병 문제가 있었고 아들 2명은 어린 시절 모두 죽습니다.
그렇다면 창덕궁에 사는 순종 이왕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1913년 8월 29일 자 매일신보에 이런 기사가 났습니다. "순종 이왕께서 '옥돌장(당구장)에 나가서 공을 치시는데 극히 재미를 붙여 여관들을 함께 하신다. 여름에는 서늘할 때 석조전에서 청량한 바람을 몸에 받으시며 내인들을 데리고 이야기도 시키고 유성기 소리도 즐거워하신다더라." 즉, 궁녀랑 당구 치고 음악 감상하면서 아주 해피하게 잘 살았다는 그런 기록입니다.
순종은 우리가 흔히 명성황후라고 부르는 '민비'의 아들인데, 민비가 낳은 다른 자식들은 모두 기형으로 태어나 일찌감치 다 죽었습니다. 그 중 간신히 살아남은 게 순종인데, 이 순종도 어린 시절부터 병약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민비는 순종의 건강을 위해 지극정성으로 노력을 다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당의 말대로 금강산의 일만이천봉 봉우리마다 돈 일백냥과 쌀 한가마니씩을 바치고, 아들의 무병장수를 위해 한강의 용왕님께 오백석의 쌀로 밥을 지어 갖다 들이 붓는등 매일같이 무당 푸닥거리를 했습니다. 이렇게 나라의 재정을 완전히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는데, 그것은 모두 순종의 건강 때문이었습니다.
병합 당시만 해도 순종은 심신이 쇠약해서 시종들이 좌우에서 받쳐주지 않으면 계단도 자기 스스로 걸어 올라가지 못할 정도로 아주 병약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한일병합 후에 일본 황실에서 보낸 최고 의료진들의 도움을 받아서 건강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격도 쾌활해졌고 취미인 당구를 너무나 즐겼으며, 고급 축음기를 가져다가 음악 감상에 빠져 있었다고 합니다.
데라우치 총독의 기록에 따르면 순종이 어떻게 건강을 회복했는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국사의 근심으로부터 해방된 때문이다.' 즉, 복잡한 왕조 통치를 모두 일본에 떠넘기고, 일본으로부터 받는 막대한 세비 덕분에 순종은 마음 편히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구로다 가스히로(黑田勝弘) 산케이 서울 특파원이 최근 쓴 책에는 '우리 일본이 대한제국에 아무래도 속은 것 같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유는 고종과 순종이 조선의 모든 문제를 일본에 떠넘기고, 조선총독부가 근대화 작업을 시작했지만, 조선은 거의 폐허나 다름없어서 매년 일본 정부의 막대한 지원금 없이는 유지가 불가능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본 본토의 세금이 조선총독부로 계속 흘러들어갔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이 속은 것 아니냐'라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조선의 나라꼴은 엉망진창인 상태였다는 것이고,. 순종은 이런 어려운 국사의 근심으로부터 해방된 후, 궁녀들과 즐기며 열심히 당구쳤던 겁니다.
창덕궁에서 생활하던 순종 이왕은 일본 측의 왕공족 예우뿐만 아니라 일본 육군 대장으로서도 예우를 받았습니다. 위의 사진이 일본 육군 대장의 정복을 입은 그의 모습 입니다. 그는 어디를 갈 때나 항상 일본 육군 대장 군복을 착용하며 큰 긍지와 보람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록에 따르면 '늘 육군 대장 군복을 착용하고 다니셨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순종은 창덕궁에 자기를 이렇게 예우해 주는 다이쇼 천황의 초상화를 걸어두고 매일 그를 흠모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의 주요 궁중 제사인 '기원절, 천장절, 사방배 때는 반드시 대례복을 입고 총독관저를 방문하여 천황에게 축사를 바쳤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순종의 식사를 돕기 위해 일본 제국 호텔의 초대 요리장 이었던 요시카와 가네키치라는 유명한 요리사 부자가 조선에 와서 매일 프랑스 요리를 준비했습니다. 또한, '순종의 서양식 식사를 위해 필요한 치즈와 우유 같은 식자재를 공급하기 위해 일본 궁내성에서 특별히 공급된 최고급 소를 사육하여 사용했다' 라고하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1917년 11월 10일, 창덕궁에서 대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순종은 불길이 번지는 와중에도 가장 먼저 '우리 다이쇼 천황의 초상화를 챙겨라'고 지시했습니다. 일본 천황 덕분에 자신이 행복한 삶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길이 너무 빨리 번져 초상화를 꺼내지 못했고, 결국 초상화는 모두 불타버렸습니다. 순종은 이왕직 직원들을 모두 동원하고 총독부 경무부 직원을 입회 시킨다음 불탄 초상화의 재를 정성스럽게 모아 '비원의 가장 청정한 땅에 봉납했다'고 합니다. 화재 이후 복구를 위해 다른 곳에서 잠깐 동안 생활하시라는 말에 순종은 '다이쇼 천황께서 나에게 창덕궁을 주셨는데, 천황이 주신 이곳을 버리고 내가 어디로 간다는 말이냐' 하며 비좁은 낙선재에서 창덕궁 수리 작업이 끝날 때까지 거기서 생활했다고 전해집니다
결론적으로 대한제국과 일본이 서로 총 한 방 안 쏘고 평화롭게 병합이 이루어진 이유는 고종과 순종 같은 황족뿐만이 아니라 조선의 고관대작들이 전부 귀족작위를 받아 30억, 166억씩 돈을 받고 전부 매수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회 저항할 만한 사람들에게 전부 돈을 풀어서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조선의 일반 상민들에게는 "너희들은 오늘부터 양반과 똑같은 신분이다"라고 하니 노비 천민 상민들 다 만세를 부르며 일본의 통치를 환영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극히 평화롭게 병합이 이루어진 진짜 이유입니다.
그래서 현재 우리가 부르는 국권피탈(國權被奪) 또는 경술국치(庚戌國恥)라고 하는 1910년 8월 29일 날 순종황제가 내린 조칙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순종황제가 나라의 통치권을 일본에 넘긴 후에 이렇게 조칙을 내렸습니다.
"너희들 높고 낮은 관리들과 백성들은 나라의 형세와 현재 조건을 깊이 살펴서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자기 직업에 안착하여 일본 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받도록 하라. 오늘의 이 조치는 너희들 민중을 잊어서가 아니라 민중을 구원하려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들 신민들은 나의 이 뜻을 모쪼록 이해하기 바란다."
1910년에 이렇게 해서 대한제국은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한반도는 일본의 새로운 영토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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